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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 [천 하룻밤 이야기]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

류종렬(한철연 회원)

산다, 뭘 하며 살지: 삶과 함 –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

2025 09 23 추분(秋分): 지구 온난화일까, 거의 추분 나흘 전까지 밤에도 20도를 넘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삶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 중의 하나가 학문이다. 그 학문의 체계화에는 철학이 있다. 철학은 한편으로 문제 해결에서 개인들 각각 편하게 살기 위한 방식도 있고, 다른 한편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위해 개인들 사이의 몫을 내놓는다.

이 문제라는 것을 화두라고 부를 수 있다. 화두 또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푸는 데는 일상적으로 눈으로 보고 또는 귀로 들어서 따라 하기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살아온 과정에 느낀 심정성이란 것도 있다. 지자들은 후자의 심정성이 인간 종으로서 당연히 있다고 느끼고 더 이상 말로 표현하지 않거나, 중경과 선후에 따라 뒷전으로 밀쳐둔다. 그런데 첫째의 지식에 관하여 눈과 귀는 개인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영향과 결과를 미친다고 여긴다. 게다가 이것을 잘 아는 자는 자기 이익을 챙기기 쉽다고 여긴다. 지자의 길은 현자의 길보다 중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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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할배들이 모인 사랑방 이야기에서 천문 지리를 통달해야 세상에 나가는 것이고(출세간, 出世間), 그렇지 않은 경우에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고들 했다. 한 해의 길이와 한 달의 길이 사이에서 기준이 다른 것들, 원의 길이와 원의 지름 사이의 비례, 하도와 낙서니,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임) 등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무엇인가 신기한 이야기를 잘 알아야 출세간 하는 줄 알았다. 그럼에도 농사를 짓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절후(해의 길이, 양력)라고 하면서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음력(달의 크기, 음력)으로 하는 것에까지 다른 점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한다. 어떤 현상 또는 사실들이 풀이 방법이나 추리 방식에 따라 달라서 서로 사맞디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랑방에서 한쪽과 다른 쪽 사이 견해가 서로 다를 때,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은 쪽으로 결정 나는 것 같은데, 실재로는 답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우선 정한 선후와 중경을 따르는 것 같다.

중등 시절인가, 중국 백만 대군이 백두산에서 오줌을 누면 우리나라가 떠내려간다든지, 중국인구가 몇 억이 모여 한꺼번에 뛰어서 구르면 지구가 흔들거린다고 들었을 때, 어린 마음에 중국이 무섭구나 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에 물리학을 배우면서, 이 걱정은 사라졌다. 백두산 꼭대기에 백 만 대군이 같은 자리에 올라설 수 없다는 것이고, 억대의 인구가 한자리에 모일 수도 없고 그들이 한자리에서 뛰어 구르지 않고 흩어져서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 정답은 아르키메데스가, ‘지렛대와 지지점을 주면, 지구를 들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철학사들을 읽으면서 서양 중세에도 이런 걱정을 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바늘 꼭대기 천사가 얼마나 앉을 수 있느냐는 것인데, 선승들이 들었으면, 점에서 위치와 크기가 없는 데 점에 무한한 상징들이 앉을 수 있지. 원이 무한히 줄어들면 점이 되고, 줄어서 무한히 작아지면 그 점이 없어질까? 점이 무한히 크다고 생각하면 점은 둥근 우주가 되는 것인가? 상상작용은 지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허구와 미신을 낳는다는 소(小)소크라테스 학자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중세 유명론에서 상상작용의 상징이 실재한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우주의 무한성은 아직도 허구일 것 같다. 우주의 크기가 눈의 관찰을 넘어서 빛으로, 그리고 빛이 오는 거리를 350억 광년거리라고 측정(추정?)한다고 하지만, 그 과학적 측정이 상상작용만큼이나 허구(fiction)으로 보이는데, 실재라면서 천문학의 기술을 믿는 이들은 비허구(non-fiction)라고 한다. 인간 종은 지구라는 삶의 터전위에서 문제거리가 중하고 먼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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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이래로 실재하는 사물들에 대해 수를 세는 노력은 있어왔다고 한다. 기록 상으로는 구석기 말기에 뼈나 나무 위에 빗금친 기호(le signe)들을 숫자를 세는 표기법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숫자로서 기호가 표시된 것은 신석기 시대에 공동체가 형성되고 난 뒤에 나타난다고 한다. 이 숫자의 기호가 수를 셈하는 산술로서 상징이 되는 데는 인류에게 시간이 더 필요했다. 어쨌든 고대 수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개수를 세는 방식이 먼저였고, 그리고 셈법을 간소화하고 정확하게 하는 방식에서 산술학에서 말하는 수의 용어가 성립했다고 한다. 산술학에서 수는, 사과 한 개, 두 개; 대추 한 개 두 개의 한, 두와 다르다는 점이다. 한, 두는 수의 1, 2와 다르다는 것을 학술적으로 논의한 것은 그리스 철학사에서 퓌타고라스학파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수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이전에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이집트 문명에서 숫자와 수의 구별이 있었다고, 고대 문헌적 자료를 통해 해명하였다. 그런데 수학자들이 수의 셈에서 10진법과 하늘의 운행에서 나왔다고 여기는 60진법 사이에서 전자가 후자로 발전하는 또는 달리 생각하는 방법이 연속적인지 불연속적인지를 아직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두 개에서 2라는 추상의 상징을 생각해낸 과정을 분명하게 밝힐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사과 한 개와 배 한 개를, 두 개라고 하는 실재적인 것과 2라는 추상의 수는 별개인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서 실재적인 것은 현실적으로 바구니에 담는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개수의 둘은 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숫자에서 나온 것이다. 상징의 2는 사과와 배가 없이도, 그리고 바구니가 없어도, 생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수학 역사가들이 말하듯이 수와 숫자는 다르고, 셈법과 산술학은 다르다고 할 것이다. 이런 사유방식의 차이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졌을 것이고, 문헌적 체계로서 플라톤 먼저고 그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이다. 라파엘(1483-1520)이 그린 “아테네 학당”의 그림은, 플라톤의 하늘, 아리스토텔레스 땅, 즉 하늘과 땅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천문지리의 이야기는 서양에서도 이어져 왔다.

셈법의 하나, 둘, 셋, 다섯, 열, 스물 등은 대상과 연관이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셋 또는 다섯을 두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라고 하면, 딱 떨어지는 셈법이 없다. 문제거리를 해결하는 것이 현자 또는 지자일진데, 긴 세월에 걸쳐서 풀 수 있는 방법들을 만들어갔을 것이다. 셈법과 달리 산술학이 편리하고 유용하다는 것은 점점 알아채고 있었다. 현실적인 것, 기호적인 것, 상징적인 것 사이에서 현자들이 차히를 알았음에도 하나로 설명하는 체계를 만들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지자들은 분할의 방법을 사용하여, 이 범위 속에서 이렇게 저 범위 속에서는 저렇게, 다른 범위 속에서 달리 체계를 만들어야 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후세 철학자들이 차히의 발생과 원인을 생각하기보다, 차이들 사이의 범주(항목들)와 체계를 만드는 작업의 노력을 학문의 길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스 아테네 철학이후 2천 5백여년 동안에 차이의 범주들을 기준으로 삼아 구성론(le constitution)과 구축론(construction)이 있었고, 그럼에도 잘 설명이 안 되지만 차히의 발생에서 조성론(composition)이 있다는 것도 끼여 있었다. 아마도 현대수학들의 논의에서 수학 역사가들이 단위 형성에 관한한 논리주의, 형식주의, 직관주의라는 방법론의 방향을 설명하는 것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생성론이란 방법이 있다면 이는 자연주의 일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과 한 개와 대추 한 개를 현실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수의 실재적인 것과 개수의 현실적인 것은 다르다. 그런데 1+1= 2라고 할 때 두 개의 2는 1의 동등성이 실재하는 것을 여긴다. 게다가 2를 분할하면 동등한 1이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럼에도 고대에서는 그 1이라는 단위가 실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플라톤주의에서 이데아론의 실재론이고, 유일 신앙에서 하늘나라에서 부활의 대상이 실재론이고, 나아가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의 규범과 헤겔의 절대지 등도 실재론이고 현상학에서 선험적 현상도 실재론이라 한다. 이에 비해 프랑스 철학사가들이 19세기말에 칸트와 헤겔의 영향으로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인식 대상의 관념이 실재한다고 하는 것이 허구(une fiction)이라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시기에 산술학과 논리학의 대등을 논하는 것도, 관념론의 사유 논리와 같은 계열의 체계화로서, 사유에는 하나의 통일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중세 보편논쟁에서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전칭긍정명제가 실재하지 않은 추리에 의한 귀결이라고 여기고 착각이라고 불렀으며, 모든 S가 P이다에서 모든 S가 보편이니 절대니 하는 것은 하나의 신이 전체이면서 보편이라는 독단(le dogme, 억측)일 뿐이라고 한다. 그 1(하나)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vox, la voix)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유명론의 학문이 퍼져나가자, 신학은 다시 범주보다 체계를 세웠다고 하지만, 즉 아퀴나스가 보편논쟁을 정리했다고 하지만, 이에 대립하는 학자들은 그 신학자들의 독사(le doxa) 정도로 여겼다. 독단은 인간의 삶의 편안과 안녕을 위해 기호의 편의를 현실적으로 적용함에서 합리적인 부분만을 경계삼아 유용성과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고, 개인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부추기고, 집단적 오성(지성, 이성)인 것처럼 위장(포장)한 것이리라.

수학사는 흥미 있게도 하나라는 숫자는 범주와 체계 속의 단위(1)와도 다르고, 추상하여 1이라는 것과도 전혀 다르다고 한다. 게다가 1(추상)은 원주의 길이를 무한히 작게 잘라서 나온다고 여기는 점과도 다르다. 어쩌면 실재성이란 단위를 설정하기 이전에 아페이론과 같은 것이고, 그것은 방황하는 흐름이고, 경계가 없는 덩어리이고, 게다가 무어라고 정의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실재적인 것이며, 세상의 여러 다양한 것들 생성하게 하는 자연 또는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단위는 우주를 단위로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흐르고 변한다. 프랑스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브랑슈비끄(1869년–1944)가 원시 문화에서 숫자의 성립과 개념작업을 생각하면서, 원인(아이티아)과 범주(카테고리)는 서로 다른 길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사유였을 것이다. – 아마도 발생과 현상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재성은 발생에 있으며, 현상은 현질적이지만 실재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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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론이 하나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주장에 대한 허구라는 이야기에 대해, 근세철학에서 데카르트 이후로는 유명론의 언급조차도 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정수에서 무한이 절대적 무한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고 데카르트가 말한다. 마치 신이 모든 무한을 포함하는 무한성인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데카르트의 좌표 상으로 무한히 길이를 연장(l’étendue)하면 무한이 있고, 그 무한은 실재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이 무한성을 이해하는 인간의 사유가 타당(정당)하다고 하였고, 무한의 사유가 당연히 인정된다고 여겼다. 신은 무한하다. 무한성은 실재한다. 여기에 논리학이 끼어들면 무한한 전체(전칭긍정 명제의 주어)를 알면 그에 속하는 부분들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이후 200여년 만에 그 무한이 인간의 사고가 만든 무한이라는 것을 비유클리트 기하학이 제시할 것이고, 다른 무한을 증명할 것이다. 이런 여러 무한들도 모두 실재성이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칸토어 이후에는 무한의 종류들도 많아졌다. 그러면 우리가 사유하는 무한들 말고도, 모두를 체계 속에 넣어서 하나의 통일성을 갖는 무한, 그런 무한이 있을까? 아직 무한성이 비결정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실재성은 흐름 또는 생성(자연)이라는 이법이 성립한다. 흐름을 마름질하는 방식에 따라 상상작용은 흐르는 덩어리를 달리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등이 주장하는 하나의 원리(정의)가 다른 것(원인 생성)들의 잣대가 되는 것처럼 생각해왔다. 천문학이 우주전체에, 진화론이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등 종의 다양성에도, 통일장이 극미립자의 역학에서도 공리와 정의처럼 먼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각 학문은 한계 안에서 정합적이고 그에 맞는 대상(이미지작용)에 규약적일 뿐이다. 그럼에도 전체에 통일성(l’unité)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모든 것은 하나의 통일성 속에 있다고 여긴다. 이 통일성이 단위가 아닌가? 그 단위가 고정되고 불변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단위가 흐르고 변화하고 움직이고 생성하는 중인 덩어리를 임의적으로 잘라 범주를 정한 것이 아닌가?.

수학의 범주와 체계화는 아직도 진행 중에 있고, 각 진행의 방식에 따라 세계 또는 자연을 구성, 구축, 조성, 생성 등에서 이유와 방식들은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 중이다. 수학의 문제를 푸는 방식은 50가지가 넘는다는 오일러의 발언은 경계(페라스)를 설정하는 방식에 따라 수학들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그 보다 더 많은 방식이 심리(프쉬케) 또는 영혼을 다루는 방식에도 있을 것이다. 요즘 급부상하는 AI가 이미지를 습득하고 다른 방식은 영혼(두뇌)을 다루는 새로운 한 방식일 것이다.

셈법에서 산술학, 측지술에서 기하학, 복리 이자계산에서 지수와 로그함수, 실재성의 무작위 재단하는 방식에 따라 부정방정식과 대수학, 우연이라기보다 우발적 사건들의 발생에 대한 주사위놀이와 같은 계산에서 확률론과 통계학, 기후 변화와 지진 활동의 발생에서 복잡계이론, 집합론과 파라독사 이후 무한계 등에 이르기까지 수학들(Les mathématiques)의 발전과 확장이 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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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마찬가지로 사유 방식의 천차만별의 차히들의 등장(생성)만큼이나 영혼학(프쉬케학, 심리학)의 영역(분과)들이 생겨났다. 여기서 상층의 정신과 생명체의 영혼 사이에서 새로이 응용할 용어로서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영국의 마음(the mind)과 어원을 같이 하는 심정성(la mentalité)의 용어를 수용한다. 정신과 영혼 사이에서 데카르트이후 “빛들세기”에서 정신은 추상과 보편을 실재성으로 삼는데 비해, 영혼은 자연과 발생을 실재성으로 삼는 차히를 드러낸다. 이로서 화학이 구화학(al-chimie)에서 벗어나고, 생물학이 보편과 추상과 별개로 실재성의 학문임을 드러낸다. 대부분의 정신주의자들은 자연의 생성과 생명의 진화에는 법칙을 발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학문이 아니라 우발성의 개연성에 머문다고 보았다. 생명은 원래 아자르(hasard)이고, 신의 활동도 아자르라고 하게 되면서 정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원리와 법칙을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이 또는 무슨 통일성이 절대와 완전으로부터 자연과 생명에 적용가능한가? 이런 물음은 신이 생명에 대해 무엇을 적용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추상의 산물로 여기는 신은 생명과 자연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해놓은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에서는 신의 권능과 역할이 있는가? 사회와 공동체는 인간 활동의 영역이다. 이제야 인민 주권이란 말을 실감하는 시대이다.

정신의 실재성, 관념의 실재성을 믿는 이들은 신의 권능과 역할이 자연과 생명에게는 유보하더라도 인간 사회와 국가의 체계는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신앙이 국가와 국민이라는 일반화의 정립이 실재성이라고 하고, 국가의 기능과 국민의 역할을 실재성이라 한다. 이런 우화적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 전통과 풍습 속에서 이어져 왔다. 그렇다고 추상성과 보편성을 반박하듯이, 일반화에서 대상화를 이룬 개념들이 실재성이라는 것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일반화의 대상들을 현실적으로 대응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물의 셈에서 개수(nombre)와 거리에서 길이(étendue)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 이런 사물들과 거리들이 실재하는 것인가에 대해 논의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다. 즉 추상관념들은 실재성이 아니지만, 추상관념이 적용하는 일반 대상들로서 개념들이 실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반화의 두 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추상관념이 개념화에서 개수는 세는 것과 같은 일반화가 있고, 다른 하나는 더미 또는 여럿에서 일반화를 합의하는 방식이 있다고 한다. 전자에서 대상은 개수를 세는 수학과 물리학의 편리에서 오는 것인데 비해, 후자에서는 공동체에서 훌륭한 일, 장한 일의 일반화이다. 플라톤주의와 논리주의는 전자의 일반화가 먼저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19세기말 20세기초 심리학의 발달과 언어학의 발달은 전혀 다른 길을, 후자의 길을 보여주었다. – 맑스의 가치, 니체의 가치, 심정성의 가치는 후자의 길에 가깝다 – 앞에서 언급한 셈칙과 산술학 그리고 기하학의 발달과정의 언급에서 일반화는 현실적 대상에서부터였다고 했다. 수학에서 일반화는 언어의 용어 성립에서도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언어학자가 아니라 일부 입말학자는 공동체의 삶에서 명사가 동사보다 먼저 생겼을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명사에서 동사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명사는 고정이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들 일체이다. 소크라테스는 대상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로서 살아간 과정과 행위의 일체를 말한다. 그 명사로서 용어는 과정의 일체로서, 그의 삶의 일반화에 대한 용어로서 일반화라는 것이다. 사자가 먼저이고 용맹하다는 다음이며, 날래다는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용어 성립에서 명사, 성질(특성) 형용사, 동사로서 규정하고 다른 것과 경계를 그었다는 것이다. – 이 가설은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에서 나온다.

일반화에서 전자의 일반화에는 관념 또는 추상의 상징이 실재성이라는 이론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후자의 일반화는 삶의 과정에 대한 표현과 합의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신석기 시대의 종족들의 공동체에서 언어가 문법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이야기에 암시를 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화용론에 있을 것이다. 작업장에서 벽돌 장인이 “벽돌”이라고 외치면, 벽돌을 쌓는 것인지 던지는 것인지는 같이 작업하는 동료와 약속 또는 합의에서 이루어진 활동에서 용어이라는 것이다. 삶의 터전에서 일반화의 용어로서 먼저 등장한 것은 삶의 터전의 합의와 조성에서 있을 것이다.

단어와 대상, 문자와 그림의 연관으로 보았던 비트겐슈타인이 1차 대전이 끝나고, 왜 고향 땅으로 돌아가 유치원 애들을 가르치면서 언어 형성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이 시기에 인류학과 입말학(언어학)은 논리학의 구조와 틀(체계)과 달리 생성하는 용어와 개념을 다루는 방식을 고민했다. 앵글로색슨이 인식의 우선으로 용어와 개념이 먼저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그것들이 먼저 있는 것이라고 실재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지만, 프랑스 쪽에서 언어학은 논리학과 달리 입말이라는 점을 보았다. 중세 말기의 개념이 기호와 목소리로 되어 있다고 하면서 추상은 실재성이 아니라고 하였듯이, 20세기의 언어학에서 그 입말은 소리와 이미지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벩송은 사유의 재료들이 이미지들로 되어있다고 보았던 심리학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언어는 몸짓, 행동, 말씨 등을 포함한다. 그 언어의 실행에서 논리가 먼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비해 논리학과 수학과 별개로 입말이 있고, 입말의 일반화가 있다. 소쉬르가 설명하는 입말의 경우에, 실재하는 대상으로서 소나무가 있고, 이 소나무와 별개로 현실적으로 청각 이미지(ㄴ, ㅏ, ㅁ, ㅜ)가 있으며, 이것을 듣는 이는 머리 속에 그리는 소나무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청각이미지와 상상이미지는 각각의 개인이 갖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카나다의 꼬마가 나무를 단풍나무로, 프랑스 파리의 꼬마가 떡갈나무로, 강원도 인제에 사는 꼬마가 미시령의 소나무를 생각(이미지를 그리며 상상)하는 것은, 그 꼬마들의 삶의 터전의 사유이다. 청각이미지를 시니피앙(기표), 사유(상상) 이미지를 시니피에(기의)라고 한다. 이 두 가지는 대상의 실재성과 전혀 관계없는 이미지들이라고 소쉬르는 못 박았다. 그런데 이 두 이미지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는 그 각각들이 살아온 과정의 이미지들을 일반화 한 것이다. ‘부산’은 우리나라 사람의 청각이미지이고 ‘푸산’은 미국인들의 청각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아는(상상하는 사유하는) 한반도 남쪽 항구의 부산에 대한 서술은 다르다. 그러면 진실은 부산을 죽 살아온 사람의 이미지 작업들의 일체일 것이다. 살고 있는 이 부산의 일반화가 먼저이고, 살지 않았던 사람들 각각의 대상 이미지는 나중의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한 가지를 더 보태어 보자, 이런 과정의 일반화에는 삶의 추억들의 일반화를 포함하며(추억이미지), 길게는 한반도 역사를 포함하는 일반화의 기억도 있을 것이다(기억이미지).

심리학과 입말의 결합에서 부산이라는 덩어리를 잘 표현하는 것은 추억들을 포함하는 기억을 잘 살리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이런 부산의 대상화가 실재성이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의 실재성의 과정의 일체를 말하는 것과 같다. 이에 비해 부산의 이야기를 듣거나 또는 한두 번 체류하여 아는 부산의 이야기는 일반화도 아니고 개념을 사용한 설명의 편리일 뿐이다. 게다가 ‘푸산’이라고 하는 개념화는 이 발화자의 자신의 삶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으면서 개념의 일반화를 빌려온 것이다. 종교의 신학에서 하늘나라, 천국, 극락 등의 개념은 어떤 실재성의 일반화 용어에서 빌려왔을까를 생각해 보라. 실재성은 시간의 과정에 있으며, 그 과정을 합의 또는 평결에 의해 일반화에서 오는 것이 먼저이다.

이런 관점을 철학사에 비추어보자. 이오니아학파의 자연과 엘레아학파의 존재 사이에 어느 것이 실재를 드러낸 것인가? 사람들은 존재가 실재이고 자연은 변화하기 때문에 가상 또는 현상일 뿐이라고 한다. 현대철학 사가는 이런 사람들을 플라톤주의, 논리주의, 유일신앙주의에 포획된 사람이라 한다. 실재성은 지구 형성과정을 포함하는 자연의 변화가 실재성이고, 그 시대에 맞는 일반화라는 것을 만든 것은 인간이 인간의 편리(유용)와 탐욕(이기심)에 맞추어 규정하고 정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가 19세기말 20세기초에 심리학과 인류학의 발달과 더불어 이미지 실현(상상작업, l’imagination)으로 나타난다.

추상관념은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은 중세 유명론이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편리를 위한 언어와 논리의 과학적 규정이 실재성과 연관이 없다는 것은 소쉬르의 입말에서 설명한다. 그럼에도 현실성이 실재성이라고 또는 신실재론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은 현실에 드러난 현상의 실재성이 역사와 과정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추상과 논리에 인습을 인정하며 유용성과 실용성의 이익에 우선하는 현실에서, 제국의 논리와 명령체계에 포획된 현실에서, 안주하는 것이다. 극우들이 국민주권과 최종심금을 무시하고 그들만의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으면서 인민주권에 저항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역사적 과정에 자기들의 관념과 개념의 정당성을 위하여, 이익과 착취를 위하여, 전쟁과 공포를 조장했을 뿐이다. 역사에서 그 자유와 인권을 인민이 극우(왕권, 교권, 제국권)에게 저항, 항쟁, 혁명하면서 겨우 찾아가는 중이다. 실재성은 삶의 터전에 과정에 있다. 보편과 절대의 체계로부터 인권이든 자유는 없었다. 말뿐이다. 낙수효과는 없었다. 이런 관념과 개념으로부터 현실성에 맞는 실재성을 도출하는 것은, 논리적 착각이며, 일반화의 허구이다. 이 허구의 극한에 유일신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오니아학파의 세계(코스모스) 이래로 “하나”는 실재하는 덩어리, 즉 아페이론이다. 이것은 변화중인 자연이며, 지속하는 우주이다.

(7:04, 58T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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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5]

 

3. 실증주의 비판에서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으로

 

□ 자이제 실증주의 논쟁(Positivismusstreit)’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이 논쟁도 교수님의 하이델베르크 시절에 해당하죠교수님께서 당시 쓰셨던 글들특히 『사회 과학의 논리』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면변증법적 방법론을 주로 옹호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석학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계셨다는 인상을 받습니다그리고 이와 동시에 이해 사회학의 방법론을 전면에 내세우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 솔직히 그때는 그런 관점에서 인식하지는 못했지만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말씀이 맞습니다어쨌든 저는 혼란스러웠던 소위 실증주의 논쟁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참고로 포퍼는 이 명칭에 대해 정당하게 반대했죠좋은 결과란 바로 그 논쟁 이후로 사회 연구 분야에서 오직 분석적 정통성만을 배타적으로 고집하던 분위기에 맞서다양한 질적 연구 방법론들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는 점입니다이와 관련해서 언급하자면울리히 외버만(Ulrich Oevermann)의 객관적 해석학(objektive Hermeneutik)’은 제가 그때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지만참 흥미로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어쨌든 그 논쟁 이후로 사회적 데이터를 어떻게 다루고 처리하는지와는 별개로해석학적인 접근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 그렇지만 그때 선생님께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변증법적 비판이라는 사회과학 연구 방법론과 더불어 가다머의 해석학을 옹호하셨죠그것이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또 다른 유의미한 방법이라는 이유에서 말이죠.

 

■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네요하지만 이제 와서 비로소 제가 당시 제대로 설명했어야 할 두 가지 문제를 더 잘 이해하게 됐습니다그때 저는 사회학자의 위치를 성찰적 관점에서 관찰자로 간주해야 한다는 점은 언급했지만선행적인 해석학적 참여가 관찰 행위에 미치는 사후적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했습니다이런 식의 해석학적 참여를 통해 성찰적 설명의 단계가 따로 형성되며이는 경험적분석적 서술과 방법론적으로 구별되거든요당시에 그 점은 배경에 머물러 있었습니다다른 하나는 변증법의 적용 영역에 대한 언급을 빠뜨린 것입니다변증법은 근대 사회에서 진행되는 위기를 재구성하는 방법인데 이점을 명확히 하지 못했어요이 두 가지는 제가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통해 나중에야 비로소 명확히 알게 됐습니다왜냐하면 일상적으로 실천되는 상호작용이 예/아니오의 입장 표명과 그에 대한 비판즉 입장을 표명하고 그것의 근거를 묻고 답하는 과정을 거쳐 유지된다는 점을 비로소 깨달을 때사회학적 관찰자가 [생활세계에서 물러나 있는 게 아니라사회 자체 내에서 관찰 대상 영역과 공유하게 되는 합리적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거든요이 합리적 잠재력은 사회학적 관찰자인 나 자신과 관찰 대상인 사회가 공유하는 것입니다이 점을 설명하려면 제가 좀 더 길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좋습니다!

 

■ 먼저 사회 이론의 성찰적 구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행위 이론에 입각한 사회학은 관찰된 주체들의 의견가치 지향의도소망과 관심간단히 말해 그들의 견해와 그런 생각을 표명하는 행위 맥락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동일한 개념 수준에 있는 가설들[개별 주체의 주관성을 바탕으로 사회 현상을 기술하려는 가설]을 활용하여 설명하는 것에 만족합니다사회 이론은 이와 다릅니다사회학적 관찰자가 그 대상을 해석학적으로 파악하고 사회적 사실로 서술하려면대상 영역에서 발견되는 명제적 내용비판적 타당성 주장 그리고 수행적 태도의 교환에 가상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한 상태에서 접근합니다이런 관찰자는 이런 관점을 활용하여 자기 입장에 따라 비판적 입장을 표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게 됩니다왜냐하면 모든 사회적 사실은 [사람들이 상호의사소통을 통해 만들어낸 다양한 언어의미규범문화적 코드 등과 같은상징적으로 구성된 삶의 형식의 한 부분으로서양측[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공유하는 이유의 공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기술적(deskriptiv)으로 접근하는 사회학 역시 이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대상 영역에서 마주치게 되는 근거입장견해들에 대해서는 즉각 대상화하는 태도를 취합니다즉 그것들을 단순히 주관적 표현으로 간주하면서 기술하고 있던 주체들에게 귀속시킵니다그렇게 되면 그 근거들은 그들의 근거가 될 뿐, ‘우리의 근거가 되지는 못 하게 됩니다그러나 근거라는 것이 단순한 주관적 의견이나 동기로서 의도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그것은 상호 주관적 타당성을 요구합니다.

대상화의 관점을 가지고 기술하는 태도를 취하는 사회학자의 관점에서는 관찰된 근거들은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오직 해당 개인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 있는가라는 점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이에 반해 사회 이론(Gesellschaftstheorie)은 연구 대상 영역 내에서 통용되는 타당성 주장(Geltungsansprüche)과 이성적 잠재력(Vernunftpotentiale)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고수합니다개인과 사회의 행위 지침이 되는 자기 이해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rational zu rekonstruieren과제를 수행하기 위함입니다참여자들의 근거는 그것을 [참여자의 관점을 가지고판단하지 않고서는 그 자체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사회 이론가는 행위자들의 자기 이해라는 지평에서 기술된 견해동기행위들이 어느 정도 합리적인지를 이해할 수 있지만동시에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단지 가상적으로만 참여하는‘ 이론가 자신의 시각에서 그것들을 평가즉 비판적으로 가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관찰자를 관찰적 실천에 가상적으로 참여하는 자로서 반성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은 사회적 사실에 접근하기 위한 해석학적 기본 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사회 이론가(Gesellschaftstheoretiker)는 기술 사회학자(beschreibender Soziologe)와는 다르게 이러한 가상적 참여를 중단하지 않습니다오히려 관찰적 실천들 속에서 작동하는 이성적 잠재력즉 관련 당사자들에게 근거로 간주되어 사회적 사실을 형성하게 하는 그 근거들에 대해 스스로 입장을 표명하게 하죠왜냐하면 사회 이론가 역시 자신이 관찰하는 행위들과 동일한 근거들의 공간 안에 존재한다고 전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회학자는 오직 이러한 전제하에서만 대상 영역에서 발견된 어떤 견해나 학설(Lehre)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기술할 정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이러한 조건[사회학자가 관찰자의 객관적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근거들의 공간에 참여자로서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전제 조건]에 대해서는 지금 더 깊이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음 6회에서 계속~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은 실제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 ① –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1]

Max Stirner’s Philosophy Is Actually Worth Reading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은 실제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 ① –

 

 

이 글은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 1874~1960)의 글을 2024년에 훔볼트 대학교 사회비판센터 연구원 야콥 블루멘펠트(Jacob Blumenfeld)가 영역하고 이것을 다시 우리 말로 옮기면서 옮긴이가 주석을 단 것입니다.

 

옮긴이 박종성(한철연 회원)

 

주로 막스 슈티르너는 칼 마르크스가 조롱한 “허무주의자”(nihilist)로 기억된다. 그러나 독일 사회주의자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가 새롭게 해석한 기사(記事)에서는 슈티르너의 자기해방 철학이 노동계급 운동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고 주장합니다.

 

  • 옮긴이 서문

 

노동계급에게는 철학이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어떤 철학이 필요합니까? 아마도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가 1897년에 제시한 답변보다 더 충격적인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노동계급에게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철학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이어야 합니다.

유명한 아나키스트이자 허무주의자인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Proletarian) 철학입니까? 이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 만약 슈티르너의 철학이 단순히 아나키스트이자 허무주의자라고 가정한다면 말입니다. 슈티르너의 사상에 대한 그와 같은 어리석은 묘사는 1844년 그의 책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The Unique and its Property, 종종 The Ego and its Own으로 잘못 번역됨)이 출판된 이래로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에는 조금의 진실도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슈티르너를 칼 마르크스를 돋보이게 하는 부정적인 사람(negative foil)이나 프리드리히 니체와의 긍정적인 유사함positive analogy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슈티르너를 슈티르너 그 자체로 읽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를 전유하는(appropriating) 아나키스트와 그를 비난하는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에 끼인 슈티르너는 숨을 쉴 틈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슈티르너를 나쁜 헤겔주의자나 좋은 니체주의자로 읽기보다는, 현대 사회에 대한 원대한 비판자, 우상과 정체성의 무자비한 파괴자, 애국심의 진부한 이야기, 윤리의 본질, 종교의 의식(儀式), 성별의 우상, 그리고 국적의 규범을 경멸한 사상가로서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막스 슈티르너는 현대 사회에 대한 원대한 비판가이자

우상과 정체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사람이었습니다.”

 

슈티르너는 개인이 자발적 연합(voluntary associations)에서 다른 사람들과 결합하여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 즉 자유로움을 성취함으로써 고정된 교리와 신성한 관습으로부터 개인의 자기해방(self-liberation)[2]을 옹호했습니다. 슈티르너에게 있어, 타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자기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투쟁은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필요와 욕구로부터 시작해야,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대의(cause), 국가의 대의, 인민(people)의 대의를 위해 싸우지 말고 ―자신, 자기 자신의 대의를 위해 싸우십시오.[3] 이런 대의는 유용성의 극대화, 부의 획득 또는 기쁨의 추구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대의는 각 개인이 자신의 변화하는 삶 전반에 걸쳐 추구하며,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도달하며, 항상 새롭게 노력하는 가지각색의(a multiplicity of) 비교할 수 없는 목적을 지칭합니다.[4]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엥겔스가 언급했듯이 자기중심성(egoism)은 즉시 공산주의로 변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in common), 우리 자신을 위해, 기쁨과 연대로 싸우는 힘 없이는 자기 자신의 삶을 전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통찰은 여러 시대에 걸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으로, 1897년 7월에 『사회주의 월간지』(Sozialistische Monatshefte)에 실린 헤르만 둔커의 이 짧고 낙관적인 글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어 처음으로 영문으로 번역했습니다.

헤르만 둔커의 책 『menschheits-gedichte』[5]

둔커는 독일 사회주의 역사에서 매우 인상에 남는 인물입니다. 파산한 함부르크(Hamburg) 상인의 아들로 1874년에 태어난 둔커 가족은 괴팅겐(Göttingen)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헤르만이 고등학교를 다녔고, 어머니의 손에 자랐습니다. 헤르만은 어머니가 키우는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1897년 이 글을 쓸 당시 그는 23세에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SPD) 당원이었으며 라이프치히에서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 카를 뷔허(Karl Bücher), 카를 람프레히트(Karl Lamprecht) 밑에서 정치경제학과 철학을 공부하며 음악 학위를 막 마친 상태였습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in her own right 뛰어난 사회주의자인 케테 둔커(Käte Duncker(née Döll))와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사회주의자를 주제로 강연을 다니며 여행했고,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사회민주당을 탈당하여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6],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7],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8]과 함께 스파르타쿠스 동맹(Spartacist League)[9] 설립에 힘을 보탰고 결국 독일공산당(Communist Party of Germany/KPD)[10] 창당에 힘을 보탰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독일공산당의 초대 중앙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헤르만은 1925년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학교를 설립하고 사회민주당과의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독일공산당의 첫 번째 중앙위원이었습니다. 헤르만은 1925년에 마르크스주의자 노동자 학교를 설립하고 사회민주당과의 공동전선에 계속 헌신했습니다. 나치Nazi[11] 통치 기간 동안, 케테는 미국으로 탈출했고, 헤르만은 덴마크, 영국, 프랑스, 모로코를 거쳐, 결국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은 동독으로 돌아와 독일사회주의통일당(the Socialist Unity Party/SED)[12]에 가입했고, 헤르만은 로스토크(Rostock 대학교)[13]에서 [학생을] 가르치다가, 결국 자유독일 노동조합연맹(the German Trade Federation/FDGB)[14]의 수장가 됐습니다. 그는 1960년에 세상을 떠났고,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기념하는 사회주의자 기념관 옆에 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펠데(Friedrichsfelde)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정의”와 “권리”와 같은 단어가 좌파의 담론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아래 기사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슈티르너의 글을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생각, 그의 사상이 노동계급(working class)에게 영감을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마침내 우리 자신의 대의(大義)보다 더 높은 대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독단에서 사회주의자들을 깨어나게 할 것입니다. 둔커는 슈티르너를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그들 자신과 그들 자신의 필요를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노동자가 스스로(for themselves)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은 사회적 해방을 위한 기본적 전제조건입니다. 둔커가 이 글의 주석에서 지적했듯이, 슈티르너의 “주요 철학적 작품은 레클람(Reklam) 판(版)에서 80페니히(pfennig)[15]에 구입할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작품 자체를 토대로 그의 혹은 그녀의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노동이 자신을 얼마나 타락시키는지를 노동자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프롤레타리아트의 철학”(philosophy of the proletariat)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해방을 가로막는 이념적 장벽을 일부 제거하는 것이지만, 결코 프롤레타리아트의 철학은 그 일 자체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은 그러한 해방을 원하고, 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무거운 짐(burden)입니다.


[1]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독일 노동자 교육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원이었으며 나중에는 독일공산주의자의 일원이었습니다. 옮긴이 야콥 블루멘펠트(Jacob Blumenfeld)는 『나에게 모든 대의(大義)는 무(無)이다 : 슈티르너의 유일자 철학』(All Things Are Nothing to Me: The Unique Philosophy of Max Stirner)의 저자입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s://jacobin.com/2024/02/max-stirner-proletariat-philosophy-duncker  – 나(옮긴이)는 이 글과 연결되는 내용을 내가 번역한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로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 모든 주석은 옮긴이의 주석이다. –

[2] “여기에 자기해방과 해방279(Emanzipation)(자유롭게 방면함, 자유롭게 놓아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 주석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 2쇄)[이하 『유일자와 그의 소유』로 표기] 262쪽. 그리고 261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3] “신과 인류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의 근거를 자기 이외에 아무것에도 두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의 근거를 바로 신처럼 다른 모든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나, 나의 전부인 나, 유일자(Einzige)인 나, 나 자신 이외에 아무것에도 두지 않는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11-12쪽.

[4] “실제로 나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며, 유일한 사람이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218쪽.

[5] 헤르만 둔커의 책 『menschheits-gedichte』에는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의 잊을 수 없는 웅변가였던 헤르만둔커가 자신의 펜으로 쓴 시를 통해 자신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각과 감정을 시로 표현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주요 주제는 무엇보다도 형제애와 연대 속에서 전쟁 없는 인간적인 삶에 대한 관심, 즉 인류를 위한 시였습니다! 선별된 시들은 노동 운동 대열에서 지칠 줄 모르는 교육 활동과 파란만장한 삶의 흔적을 따라갑니다. 그는 파시스트 독일에서 배척당했습니다. 1933년 스판다우(Spandau)와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에 투옥된 후 수년간 지구 반대편으로 추방되었습니다.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는 베르나우 노동조합 대학의 총장으로서 동독의 사회주의적 변화의 시작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편집자 Dr. Dr. 젊은 대학을 졸업한 독일 하인츠는 1950년대 말 직원으로서 아주 늙은이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In diesem Buch kommt Hermann Duncker (1874 bis 1960), der unvergessene, wortgewandte Lehrer in der sozialistischen Arbeiterbewegung, mit Gedichten aus seiner Feder zu Wort. Er hatte ein ausgepragtes Bedurfnis, Gedanken und Gefuhle inVersen auszudrucken. Seine großen Themen waren vor allem die Sorge um ein menschenwurdiges Leben ohne Krieg in Bruderlichkeit und Solidaritat – Menschheitsgedichte! Die ausgewahlten Gedichte folgen den Spuren seiner unermudlichen Bildungsarbeit in den Reihen der Arbeiterbewegung und seines bewegten Lebens. Im faschistischen Deutschland war er verfemt. Der Haft in Spandau und Brandenburg 1933 folgten Jahre des Exils uber den halben Erdball. Hermann Duncker schatzte sich glucklich, als Rektor der Gewerkschaftshochschule in Bernau denBeginn der sozialistischen Umgestaltungen in der DDR noch miterleben zu konnen. Der Herausgeber, Prof. Dr. Heinz Deutschland, durfte als junger Hochschulabsolvent dem Hochbetagten Ende der funfziger Jahre als Mitarbeiter hilfreich zur Seite stehen).

[6] 로자 룩셈부르크(독일어: Rosa Luxemburg, 문화어: 로자 룩셈부르그, 1871년 3월 5일 ~ 1919년 1월 15일)는 폴란드 출신의 독일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이며 사회주의자, 철학자 또는 혁명가이며, 레닌주의 비판자이다.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이후의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사회 민주주의 이론가였다. 그녀는 신문 〈적기(赤旗)〉를 창간했고 나중에 독일 공산당(KPD)이 된 마르크스주의자 그룹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공동으로 조직하여 1919년 1월에 베를린에서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녀의 지도 아래 수행된 사건은 자유군단에 의해 진압되었고, 룩셈부르크와 수백 명의 스파르타쿠스 조직은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7]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년 8월 13일 ~ 1919년 1월 15일)는 독일의 공산주의자, 혁명가, 사상가이다. 1900년부터 독일 사회민주당 당원이었으며 1912년부터 1916년까지 국가의회 원내의 대의원으로 당내 혁명적 좌익세력을 대표했다. 리프크네히트는 반전주의자로 1916년 독일 정당들 간의 전시 협의에 반대함으로써 의원단에서 제명되었다. 그는 1907년 반전 팜플렛 제작과 1916년 반전 시위의 주도자로 두 번 투옥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독일에서 11월 혁명이 발생하면서, 리프크네히트는 1918년 11월 9일 베를린성에서 “자유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어 11월 11일에는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등과 함께 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독일에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려는 그의 시도는 국가노병평의회(Reichsrätekongress) 다수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918년 말 리프크네히트는 독일 공산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리프크네히트는 1919년 1월 그가 주도한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면서 자유군단에 억류되어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피살되었다. 그의 죽음과 직접 연관된 두 명의 인물이 기소되었으나 재판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8] 클라라 체트킨(독일어: Clara Zetkin, 1857년 7월 5일 ~ 1933년 6월 20일)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여권운동가이다. 1911년 최초의 국제 여성의 날을 조직했다. 1917년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원이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옹호하는 당론에 반발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탈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독립사민당내 극좌파이자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에 가담했다.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뒤 공산당을 조직했고, 1920년 ~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권력을 잡고 1933년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독일 공산당은 활동이 금지되었고, 체트킨은 소련으로 망명해 거기서 죽었다.

[9] 스파르타쿠스 동맹(독일어: Spartakusbund 슈파르타쿠스분트[*])은 독일의 단체로, 고대 로마에서 노예들의 계급투쟁을 이끌었던 전설적인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따왔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활동은 1914년부터 암암리에 시작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6년 1월부터 잡지 『슈파르타쿠스브리페』(Spartakusbriefe)를 발행하면서 특히 스파르타쿠스 동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후에 독일 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내의 극좌, 극단 성향의 당원들이 탈퇴하여 결성되었다. 1919년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맹원인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체포되어 1월 15일 처형당했다. 이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한 인물로는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등이 있다. 이 사건으로 좌파공산주의는 쇠퇴하게 된다.

[10] 독일 공산당(독일어: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KPD 코무니스티셰 파르타이 도이칠란드스, 케이피디[*])은 1919년 1월 1일 창당한 독일의 공산당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8년 11월 혁명에 참가했던 많은 공산주의 혁명 조직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독일 공산당은 초기부터 개량적인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한 혁명적 대안으로 이해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초기엔 의회주의에 대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잏었으나 1919년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공산주의와 인민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것으로 통일하였다. 에른스트 탈만이 서기장으로 취임한 이후 독일 공산당은 스탈린주의 노선을 지지했으며, 코민테른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나치 정권 시절 독일에서는 공산주의 서적이 폴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 서적들과 함께 소각되는 등 공산주의가 탄압받았기 때문에 나치당에 의해 독일 공산당의 활동이 금지되었고, 종전 후 연합국의 점령군에 의해 활동이 허가되었다. 1946년 4월 독일 공산당 동부 지부는 독일 사회민주당 통합한 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소련의 지지를 받아 독일 민주공화국을 건국했다.

서독 지역에서 독일 공산당은 제1회 독일 연방의회에 의원을 배출하였으나 서독 정부는 독일 공산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에 책임이 있고 소련에 종속적이며 위헌적인 정당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독일 공산당은 1956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11] Nɑtionalsozialist; 전(前)독일의 국가 사회당

[12]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 독일어 : 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13] 로스토크 대학교(독일어: Universität Rostock)는 독일 로스토크에 있는 대학교이다.

[14] 자유 독일 노동조합연맹 (독일어 : Frei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 또는 FDGB)은 1946년부터 1990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민주 공화국(GDR 또는 동독) 의 유일한 전국 노동 조합 중심지 였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동독의 대중 조직으로, 모든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FDGB는 국민전선 의 구성원이었습니다. FDGB의 지도자들은 집권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의 고위 의원이기도 했습니다.

[15] 《독일의 동전; 1마르크의 1∕100》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천 하룻밤 이야기]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2025 08 23. 처서(處暑), 고추잠자리가 높이 나는데 더위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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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종렬(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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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에서 아이러니(l’ironie)가 세 종류 있다고 들뢰즈가 제시했다. <고대의 상식을 통하여 소크라테스 아이러니, 근대의 합리주의의 양식에 의한 아이러니, 그리고 나를 개입시켜 시대의 활동을 서술(표현)하는 낭만주의의 아이러니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는 자의식의 확장으로서 지혜의 추구가 하나의 길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의 『향연(Συμπόσιον, 심포지온)』의 자의식의 발현에서 욕망의 끝이 답이 없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라 한다. 이는 의식의 상승에서 아이러니이다. 근대에서 자의식은 자연의 총체성을 사유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를 보증해주는 신도 있다고 하였으나, 이 신은 신학의 신이 아니라 이론적 신이라고 하였다. 이런 의식의 발현이 무한을 사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칸트에서 이상은 형이상학(자연학의 배후)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이러니이다. 그런데 낭만주의에 이르러서 이런 사유를 할 수 있는 자아가 있을 것이라고, 당연히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아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고, 이런 자아가 자유롭다고 하며 자연 속에서 방랑성 또는 노마드가 있다고 여겼다. 그러면 그 방랑성은 왜 있는가? 자연에서가 아니라 인간에서 방랑성의 근원과 이유는 무엇인가? 상승도 아니고 이상도 아니고 총체성의 통일성도 아닌, 자아의 자유(방랑성)의 기원을 찾으려 했으나, 의식의 내재성은 규정할 수 없는 무차별성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이다.

무차별성 속에서 자아의 성립은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신 없는 자아, 범아 없는 자아, 자연 없는 자아는 성립할 것인가? 고대와 중세를 거쳐서 근대성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개체성 또는 이것임이 없는 인간은 고독자일까? 도덕감과 종교심이 있다고 하는 이들은 삶의 터전에서 일반화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이 있다고 한다. 그 양식이 무엇인지 대상화하기 어렵지만, 인간의 자연에는 일반화가 있다. 이 기원 또는 원인의 탐구는 인간의 발생적 기원에 관한 논의로 넘어갈 것이고, 생명의 기원을 탐색하면서 생물학과 심리학이 길을 열 것이다. 그럼에도 개체로서 인간은 단독자임에 분명하다. 19세기에 단독자, 유일자의 대상화로서 인간을 대하는 태도와 공동체 속에서 인간을 다루는 태도 사이의 차이가 등장할 것이다. 생물학의 발전과 진화론의 등장으로 기나긴 생명현상의 과정 속에서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을 안다. 그 인간은, 스스로를 동물류에서도 인간 종에서도 아니고, 개체(불가분)로서 자연 속에서 한 인간(이것임)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듯이 자기 대신에 죽을 수 있는 자가 없듯이, 생명체로서 인간은 단일성이고 특이자이며, 별건의 노마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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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생산력의 변화는 의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 자연이 생산과 창조를 한다. 자연의 생산성은 이오니아학파의 사유였을 것이다. 페르샤의 침공을 막았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동맹은 각각의 도시가 스스로 자립한다는 생각을 해냈을 것이고, 자립의 도시를 아테네에서 풀어보려고 여겼던 그리스 식민도시들의 현자들은 아테네로 모였을 것이다. 그 시기의 화두는 고르기아스의 카이로스(때에 맞게)였을 것이다. 이 때를 알아보려고, 세상에서 인간의 행복과 자유를 풀어내는 이들을 찾아 나선 이를 소크라테스라 생각해 보자. 인간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공동체 안에서 인간은 무엇이며, 우주 속에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풀어보려고 한 이는 플라톤일 것이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의 배후: 메타피지카』라는 논저를 쓰면서, 자연을 공간에서 숫자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제도와 체제를 유지하려는 참주제, 국가, 제국주의 등에서 유지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서 가르칠 때는 이미 그의 제자인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의 참주(대왕)로서 아테네를 식민화하였고, 그리고 동방으로 정복전쟁을 나갈 때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국주의에 젖어 있었던 어용철학자는 아닐까? 물론 알렉산드로스의 측근이었던 그의 조카가 처형당하고 난 뒤,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에 틈이 생겼다고 한다. 정치편이든 윤리학들이든 권력 속에서 저술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추론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아테네에서 반 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누군가는 그가 소크라테스처럼 인민 속에서 목숨을 내놓고 인민과 더불어 철학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핑계로 도망갔다고도 한다. 그는 도망가면서 “아테네가 철학에게 두 번이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테네를 떠났다고 한다. 1930년대 비엔나에서 프로이트는 나찌의 위협을 피해 영국으로 떠났다. 이 과정에서도 솔직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들뢰즈가 말했지만, 인민 속에서 인민과 흐르면서 산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래도 시대의 변화에서 흥미롭게 살았던 이들이 있다. 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종족이란 단위가 와해되는 시기에 사키야족의 싯달다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의 당나라와 전쟁의 대립적 구도 속에서 해동삼국의 다툼에서 인민 속에서 불교를 통한 고통과 불행을 해소하려는 노력했던 원효도 있었다.

인민 속에서 인민의 흐름으로 산다는 것은 무소유이며, 무자아이며, 무국적인 것은 그래도 유효한 것 같다. 그럼에도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 공동체를 인정하고도 도망치지 않은 현자는 소크라테스와 예수일 것이다. 같이 산다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함께 하는 것이리라. 벩송이 도덕적 영웅과 같은 이를 소크라테스와 예수로 꼽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로 또는 체제로 체계로 나가야만 한다고 주장하지 않은 두 사람이다. 그리고 목숨을 내놓고, 타인과 타자를 향해 문을 열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자 했다. 사적 이익을 챙기는 쪽에서 경계를 긋고, 뺏길 것이 있다고 여기는 한에서 타인이 적이 된다. 뺏기기 전에 빼앗는 것이 전쟁이며, 모든 것을 빼앗을 때 최고의 잉여이익을 챙기는 것이라는 것을 안 것도 이기적 사고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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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孤) 또는 ‘홀로’는 이기적 삶에서 벗어나는 자들에게도 있었다. 퀴니코스학파의 유랑(노마드)에서, 불교의 승단(비구/니집단)에서, 카파도키아의 지하에서, 사막의 천막에서, 초원의 포라에서도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왔다가 간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도 설득할 노력도 하지 않고서 느끼고 살았을 것이다. 이런 수행과 닮은 노마드의 삶에서 누가 시켜서도 스스로 하고 싶어서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연의 섭리와 숙명에 대한 화두가 떠나지 않은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해안에서 근무하던 군대생활에서 방위병과 함께 밤 보초를 섰는데, 동국대 불교전공 석사와 함께 몇 달을 함께 했다. 그 방위병은 추운 겨울에 난로를 쬐기 위해 나에게 선문답의 화제를 내어주었다. 나는 보초에서 이틀에 한 번씩 선문답의 화제를 받았다. 한 삼개월 정도에서 그는 어느 날 “각자(覺者)는 떠난다”는 화두를 주었는데, 그때에 싯달다가 이런 화두를 생각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벩송에서도 깨달은 자는 정지해 있지 않고 지속(운동)하는 자라는 것에 붙여보기도 했다. 그런데 들뢰즈의 여러 글을 읽으면서 노마드가 각자(覺者)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개인은 먹고 자는 것이 해결되어야 깨닫는다는 수련도 실천도 있는 것이 아닐까? 들뢰즈가 노마드라는 규정에 다른 하나를 보태어, 1988년 대담에서 <토인비(Toynbee, 1889-1975)의 구절에 감명을 받는다. 즉 “노마드들은 꿈적이지 않는 자들이고, 이들은 떠나지는 것을 거절하기 때문에 노마드들이 된다.”>고 한다. 떠나봐야 부처님 손바닥이지. 노마드 의식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흐르고 있는 의식이기에 자아도 범아도 아닌 의식일 것이다. 노마드가 고(孤)일까, 고(孤)라고 고정시키는 것이 페라스를 규정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아페이론이 노마드일 것이다.

‘혼자서’라는 용어를 즐기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 그러하다. 그의 아테네는 그 영광을 잃었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처한 도시국가에서 세계를 아우르는 사유를 할 수 있었다. 정지해 있는 듯 하면서 움직이는 사유를 했을 것이다. 그는 제자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고(孤)를 즐겼을 것이다. 어쩌면 (먹거리와 잠자리가 해결된 귀족 계급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말하듯이 여가(σχολή, 스콜레)가 있어야 학문을 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학교와 스콜라철학은 이 그리스어와 연관이 있다. ‘혼자서’라는 용어 속에는 어쩌면 “혼자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구의 사용을 우선으로 여기는 지자든,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하다고 여기는 현자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히 알았으리라. 지자는 터전 또는 사회에서 행할 수 있는 일들을 눈살미로 배울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도구의 사용에는 눈살미가 중요하다. 다른 한편 공동체에서 그럴듯한 삶은 시간 속에서 여러 난제들을 해결해온 이야기를 배울 것이다. 현자는 꼬마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듯이, 입문자(도제)들에게 알 듯 모를 듯 화제들을 제시하였을 것이고, 입에서 입으로 흐르고 있었으리라. 인더스 문명의 브라만의 교육은 암송이었다고 하고, 그리스의 전통에서 호메로스 전통과 시인들의 신화의 이야기는 연극장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승을 더 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나중에 문자화는 공통적이고 체계적인 전달을 가져왔을 것이다.

먹거리와 잠자리의 해결에서 유한계급의 지식 체계와 확장은 그 지식 안에서 즐거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즐거움이 행복과 동일하지 않지만, 행복에 다가가는 방법일 수 있다. 식주(食住)의 해결이 민중과 백성에게도 일반화하여 이루어질 때는 생산력의 발달에서일 것이다.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산업화와 같은 궤도 위에 있을 것이다. 의복은 제도 속에서 치장이라 여기면, 의(衣, 옷과 모자, 신발과 장신구)등은 생산력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본은 식주이다. 식주의 해결이 긴 노동분업에 의해 이루어진 체제에서 고통과 비참도 어느 정도 해소되어 갈 때, 고(孤)라는 개체성 또는 인격의 특이성은 표출된다. 특이성이란 류와 종의 차원에서 인간이나 최고류의 신 등과 연관 없이도 문제거리로 제기되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화두가 되기 시작한 시절에, 특이성(개인, 유일자)이 실질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대혁명과 더불어 산업화에서 나온 것이라고들 한다.

자연이 신에게서 벗어나는 시기이기도 하며, 자연의 섭리를 터득하는 시기를 근대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근대성에서 자기의식은 특이자로서 개인(그 누구, 즉 조국, 최강욱)이다. 그는 논리상으로 최고류, 류, 종, 종차의 지위를 거쳐 가며 특이자라는 지위를 갖는다고들 한다. 그는 혼자서 살 수 있는가? 공공의 토대위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자기의 이익의 전유와 확장으로 살아가는가? 이 즈음에서 공동체나, 공산주의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김건희의 목걸이와 시계에 대한 이야기는 의(衣)의 표시를 드러낸 것이리라. 그 표시는 권력이며, 이 권력 지배방식은 제국의 하수인이라는 점이다. 이런 이야기는 인민의 삶에서 먹거리와 잠자리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빌게이츠가 하루에 수십억을 벌고, 그의 집 입구에서 집까지 들어가는데 수 킬로가 된다고 하더라도, 먹거리와 잠자리는 민중의 기본, 공공성의 문제이다. 공공성이 없는 사적 소유에 대한 무제한 편취 또는 자본축적이 왜 문제가 되지 않는지를 문제 삼지 않고서, 개인의 파편화와 개인의 인격화를 문제 삼는 것은 허구이고 또는 전도된 사고에서 오는 것이다. 전도된 사고에서 최고류에서부터 연역적으로 사고하는 이들이 자본과 제국의 제국은 신앙처럼 믿고 있다. 이 사고는 무기와 전쟁의 공포로서 사적 소유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자들의 논의이다. 윤석열 어게인을 말하는 극우들은 이들의 꼭두각시이다.

경계 없는 우주(아페이론)에서 사유를 출발한다는 것은 홀로 길을 나서는 것과 같다. 세상(우주)에서 생명체는 개체로서 혼자이라고 느끼는 동물은, 진화론적 발전 과정에서 아마도 인간이 처음일 것이다. 자연 속에서 홀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학문에서 먼저(선후)이고 화두로서 중할(중경)것이다. 숙명의 받아들이는 겸손의 철학이 오래 전에 제기되었고, 자연 속에서 자연의 흐름에 맞게 질박하게 살면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소통을 팔방으로 그리고 어제와 아제를 연결하는 사유를 해야 할 것이다. 각자는 이 세상에 아자르(hasard)로 왔으며, 필연적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 이 자연의 섭리 속에서, 세상(코스모스) 속에서 깨달은 자가 먼저 길을 나서는 것이다.

인간이 생태계를 이야기하면서 자연을 훼손 또는 파괴하지 말자고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말로서 떠드는 것이 일이 아니라, 삶의 양식을 변역(變易)하는 일이 나, 너, 우리의 일이다. 곧 떠난다는 것을 자각하며, 그래도 이 터전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도 혼자이다. ‘혼자’를 세상과 멀리 둘 수도 가까이 둘 수 없다는 점에서, 자아는 공(空)이며, 범아 속에서도 어디에도 없으며, 그리고 어느 시점에도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아니다’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삶이 색(色)이며, 말하자면 그렇다는 정도이다. 이 세상에 색칠을 한다? 또는 주사위 놀이를 한다? 그럼에도 자연의 섭리 속에서 혼자서라도, 우리의 터전을 아름답게,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세상으로 만들려 노력하며 강도를 높이려 한다. (4:20, 58S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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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은 1911년 5월 29일 영국 버밍험 대학에서 “의식과 생명(la Conscience et la vie)”을 강연했는데, “우리는 어디서 와서,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Que sommes nous? Où allons Nous?)라는 화두를 제시하였다. 사람들은 이 제목이 고갱(Gauguin, 1848-1903)이 1897년 그린 제목임을 안다. 이 그림에서 고갱은 “나는 죽기 전의 나의 모든 에너지를 이 작품에 쏟았었다”고 “1898년 2월 몽프레에게 보낸, 폴 고갱의 유서”에서 쓰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고 세상을 떠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그는 그림에서 오른쪽에서부터 어린애, 청년, 노년을 그려 삶의 과정을 표현하였고, 그 각 생의 현장에서 주변의 연관들을 표현했다고들 한다. 그림은 삶의 과정을 한꺼번에 보여줄려고 하는 우주론적인 사고이고,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세계는 사실들의 총합과 같다는 발상이다.

위 물음을 제시한 벩송의 사유는 우주발생론적이다. 그는 철학이 실증과학처럼 진보할 것이라 한다. 원시적 생명, 즉 단세포에서부터 사유하자는 것이고, 생명은 기억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20세기 초) 쯤에서 인류는 생명이 기나긴 역사의 과정에서 생성되었다는 것을 겨우 자각한다. 뀌리의 방사능 동위 원소의 발견이후 긴 시간을 지나서야, 오랜 지층에서 한 꽃가루가 몇 억년 전이라는 것도 계산하게 되었다.

세계는 기적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누군가가 마법의 막대기를 사용하지도 않고 말로서 있으라고 해서 창조된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안다. 실증과학의 발달로 의식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사실들(만들어진 것들)의 선들(lignes de faits)”을 따라 추적해 볼 수 있다. 그 의식은 생명인 한에서 우선 기억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미래에 예상참여하려 한다. 그러면서 의식은 자기를 확장시키면서 세분화(가지치기)하여 왔다. 의식은 생명과 공연적(coextensive)이라 한다.

이 우주의 섭리에서 이 과정을 이해하기 시작한 생명체로서 인간은 스스로 떠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터전에서 삶을 중요시하는 것도 인간이다. 여기에서 벩송은 그의 첫 작품에서부터 도덕감과 종교심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보태어 아름답다는 감정을 보태었다. 이런 세 가지는 지성(또는 속 좁은 이성)이 계산할 수도 측정할 수도 없으며, 규정할 수도 없고, 나아가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인간에 대한 연민, 아름다운 감정, 공통 삶에서 장하고 훌륭함 등은 무엇인가? 인간이 스스로 풀어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 깨달은 자들이 행하는 것이리라. (58SLJ)

도덕감과 종교심은 열려진 소통일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삶에서 도구의 발전과 생산력을 증가시켜 왔다. 그리고 소통의 방식도 다변화했다고 할 수 있다. 소리와 문자에서 오랫동안 각 시대마다 소통과 정보의 체계화를 위해 백과전서들을 만들어왔다. 이런 지적 노력과 소통의 확장은 인간들 사이의 신뢰와 조화로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런 정의가 전지구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아직은 없었다.

철의 시대에서 기술발달의 속도와 달리, 규소의 시대에서 기술과 소통의 발달은 엄청나서 세기의 구분도 세대의 구분도 아닌 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현 시점 여기에서 삶의 터전을 잘 만드는 것은 절실한 작업이다. 그 만치 인간들 사이의 신뢰 또는 경제적으로 신용이라 부를 수 있는 덕목도 소중하다. 사회활동에서도 제도의 조직적 연결과 달리 인간적 연결망이 생겨난다. 게다가 터전에서 삶의 양식을 바꾸려는 노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솟아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광복 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일제 부역자들의 잔재를 제거하지 못했던 것들을, 윤석열 집단의 반란에 대한 제압을 통해 밀정들을 제거하려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광장에서 응원봉처럼 이들의 누리소통의 빛들의 퍼짐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제도 속에서 사실들의 문자화로 기록과 등록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이 처서(處暑)이다. 정청래가 백로와 추분을 지나 한로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다. 최강욱이 힘을 보태고, 추미애가 법사위원들을 추스르고, 정성호 법무부 장관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문자화의 길이 현 정부의 일일 진데, 조국혁신당의 조국이 한 걸음 더 나가야 할 것이다. 진보당과 더불어 인민의 입말을 통한 누리 소통과 학습열락(學習悅樂)을 통하여 공화정을 세우리라. 인민 주권의 강도(τόνος 토노스)를 다져가야 할 것이다. (4:31, 58SLJMA) (5:32, 58S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게오르그 모리스 코헨 브란데스(Georg Morris Cohen Brandes)의『유일자와 그의 소유』에 대한 서문(Preface to The Ego and His Own)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Preface to The Ego and His Own

Georg Brandes[게오르그 모리스 코헨 브란데스 (Georg Morris Cohen Brandes, 1842년 2월 4일–1927년 2월 19일)는 덴마크의 비평가이자 학자로, 187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스칸디나비아와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2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 대한 서문

게오르그 모리스 코헨 브란데스/ 박종성 옮김

 

1845년 라이프치히에서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반항적 대담함으로 적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오늘날 개인주의의자 혹은 아나키스트anarchist 가르침을 제시하는 선례로 새롭게 제기되고 검토되었으며, 이제는 덴마크의 찬미자이자 번역가도 찾았다.

저자는 자신을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라고 불렀지만, 그의 실제 이름은 요한 카스파 슈미트(Johann Kaspar Schmidt)였다. 1806년 바이로이트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교사로 살다가, 책 출판 때문에 그 직업을 그만둬야 했다. 한동안 그는 작가와 번역가로서의 삶에 대한 유혹을 받기도 했다. 그는 1856년 베를린에서 잊혀진 인물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추종자들은 선구자를 찾고자 하는 광범위한 충동에 이끌려 막스 슈티르너에게 돌아왔고, 현대 아나키즘은 슈티르너가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바쿠닌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슈티르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막스 슈티르너는 그의 시대로부터 약 800년 전에 이미 자신이 유령(특히 “인간”과 “인류”)이라는 이름과 싸우는 것과 같은 보편은 그 자체의 실재가 없고 단지 단어와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중세 초기의 유명론자 계통을 잇고 있다. 그들의 싸움은 14세기와 15세기 내내 계속되었고, 나중에 슈티르너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신념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슈티르너는 당시 진보적 사상의 마지막 책으로 여겨졌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The Essence of Christianity)(1841)의 출판을 계기로 행동에 나섰던 것 같다. 이 책에서 당대의 가장 급진적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 책은 “하나님(인간의 신성)은 사랑이고, 하나님은 선하다”를 “사랑은 신성하고 선함은 신성하다”로 대체하고 인간의 모든 것을 찬양함으로써 진리가 드러났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신학을 뒤집어 놓았다. 그러니까 인간(Man)은 신성했고 우정과 결혼도 신성했다.

막스 슈티르너에게 이렇게 신학을 뒤집는 것은 신학의 기본적 사고방식이 보존되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는 이에 정당하게 반항했다. 정신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의 그는 문체에 있어서 포이어바흐보다 열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이어바흐를 뛰어넘는 사상가로서 그는 포이어바흐보다 발전했다.

[헬베티우스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에서 시간을 보낸 여러 프랑스 철학자 중 한 명이었다. ]

포이어바흐가 남긴 인간다움이란 종교에서는 자기부정이 기독교 못지않게 칭찬을 받았다. 자기사랑는 비인간적인 것으로 여겨져 희생되어야 했다. 막스 슈티르너는 헬베티우스(Helvétius)의 연구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았을 수도 있고, 니체보다 앞선 열정으로 종교적 영향을 받아 자기사랑을 악의 원리로 보는 관점에 맞서 싸웠다. 그에게 유일한 나(unique Self)는 유일한 실제 나이며, 따라서 권력과 권리의 유일한 원천이다. 인간, 인민, 교회, 국가, 이 비밀스러운 도덕적 또는 정치적 인물들은 잃어버린 개성들(personalities), 곧 슈티르너가 몰두하는 자기에 숨겨진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들이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반대자들의 관점에서 내가 감각적 나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와 달리 슈티르너는 나의 나(Self)가 나의 육욕성(sensuality) 때문에 고갈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기부정의 계율이 어떤 미신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보여 주고, 부자연스러운 금욕의 희생자들을 강조하여 묘사한다.

그는 자신의 반대자들의 대화에서 숨겨진, 고백하지 않은 자기사랑을 발견한다. 그 자신이 공공연히 자기사랑을 원칙으로 지지하고, 나를 둘러싼 것들을 나 자신의 최선의 이익에 맞게 사용해야만 나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신념을 주장하는 모든 사상가들처럼 그는 내가 내 친구나 애인에게 바치는 모든 희생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통 받거나 원하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도 내 사랑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랑은 계율이 아니라, 내가 나와 관계를 맺는 무료 봉사이다.

자기중심성 철학은(비관주의와 마찬가지로) 개념적 시도, 즉 유일한 나[유일자]를 통해 존재의 조명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는 시도이다. 사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슈티르너에게 있어서 나(Self)는 결코 결과나 산물로서 발생하지 않고, 항상 설명할 수 없는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으로서 발생한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발견자가 자신의 발견을 따르지도 않고, 저자도 자신의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는 근본적 생각을 따르지 않고, 마치 새가 ―노래하는 새이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처럼, 오로지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노래한다는 것을 그가 올바르게 보여줄 때, 그를 따르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는 거짓말과 기만을 하지 않기 위해 인류의 복지를 살펴볼 필요는 없지만, 순전히 자기중심적 이유로 완전히 인류의 복지를 삼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자기사랑의 원칙을 참되고 복된 것으로 정립하고, 일부러 서로를 물건으로 본다는 불쾌한 표현을 사용했을 때, 그는 아마도 아무도 쓸모없는 것에 돈이나 선의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북아메리카인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는 왕을 필요로 하는가?” 그리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왕과 왕의 일은 우리에게 땡전 한 푼의 가치도 없다.” 그리고 자기중심적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나눠주는 것(hand-outs)으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정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는다고 말할 때, ―그는 이 말을 피상적인 것들과 관련된 설익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아이는 자신의 미소, 자신의 놀이, 자신의 외침, 한마디로 말하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그의 현존으로 많은 능력을 소유하지 않는가! 그대는 아이의 요구에 저항할 수 있는가?”

그가 칭찬하는 자기사랑과 자기주장의 가장 완벽한 예를 예수에게서 발견하는데, 예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처럼)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만 국가를 전복하는 단순한 혁명가가 아니라, 정부와 정부의 반대자들에게 숭고해 보이는 모든 것 위로 자신을 높이고, 그들을 속박하는 모든 것에서 자신을 해방한 반란자(insurgent)였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특히 슈티르너는 확립된 질서를 전복하는 데 자신의 힘을 낭비하지 않고, 오히려 벽에 갇힌 사람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그리고 개의치 않게 확립된 질서 위에 자신의 성전 건축을 추진하면서 확립된 질서를 벽으로 둘러쌌다는 점 에 예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런 다음 그는 당연히 기독교 세계 질서도 이교도 세계 질서가 겪었던 것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암시한다.

그가 묘사한 자기의지는 국가가 타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동시대인들이 정치적 자유라는 이름으로 원했던 것은 국가와 그 법에 대한 속박이었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누구도 다른 사람에 신성한 것을 조롱해서는 안 된다. 혼외 성관계는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개인의 자유재량 대신 비인격적 통치자가 등장했을 때, 그들은 만족했고, 이른바 자유주의 헌법인 “자유” 권력으로부터 부여받기를 원했다. 슈티르너는 그들을 강력하게 공격한다. 당신은 자유를 동경하는가? 당신은 바보구나! 당신이 힘을 얻는다면, 자유는 자연히 올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확보한procure 만큼만 자유를 가질 수 있다. 그러니까 자유를 내가 획득한 것이 아니고, 나는 나 자신을 강탈당했다! 그리고 그는 권리가 힘 외에 다른 기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유가 주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조롱한다. 나를 공격하는 호랑이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호랑이를 찌르는 나도 권리가 있다.

훗날 헨리크 입센(Henrik Ibsen)과 니체(Nietzsche)에게도 그랬듯이, 그에게도 국가는 개인의 저주이다. 국가는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통치자이며, 교회가 “경건”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case을 내세운 것처럼 “도덕”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다. 국가는 처음부터 개인에게 국가 문화라는 가위를 들이대며, 국가에 반하는 모든 창조적 작업은 처벌을 받는다. 사람들이 더 자유로울수록 국가, 사회, 당에 대한 개인의 속박은 더 강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대중의 자유는 단순한 이상에 불과했고, 가장 비열한 법이라도 법으로 높이 평가했으며, 검열을 회피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부도덕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준법적이고 충실한 반대파, 즉 독일의 현대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슈티르너의 조롱은 결코 마르지 않았다. 국가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에 맞서 그는 사회가 공동선을 위한 활동만을 조직할 수 있기 때문에, 유일한 것을 생산하는 사람은 사회의 보호 대상이 될 수 없고, 오히려 불온한 요소로 간주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유사점을 그린다.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의 재판관이 아니라, 그의 적이었다.

1843년에 독일 제국은 건국 1000주년을 기념했다. 슈티르너는 그때 이미 책 집필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는 그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들어라,

바로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을 때조차,

우리의 존경하는(lieb) 독일이

천 년 동안 살아 있음을 기념하는 내일의 축제를 위해

딸랑딸랑 종소리를 울리기 시작한다.

울려라,

독일의 상엿소리를 울려라!

마치 시체를 호송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당신의 혀가 움직이는 것처럼, 너는 확실히 충분히 엄숙해 보인다.

—국민은 죽는다.—나는 만수무강하노라(Wohlauf Ich)!

내일 자식들이 그대를 무덤으로 끌고 가리라.

이어 그대의 자매들, 사람들도 그대의 뒤를 따를 것이다.

그들 모두가 그대 뒤를 따르고 나면—인류는 매장된다.

그러면 그 인류의 무덤 위에서 내 유일한 주인인 나,

인류의 상속자인 내가 소리 내어 웃으리라!

 

이로써 최초의 독일 아나키스트가 자신의 사상으로 구상한 승리가 끝났다. 그는 60년 후 독일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국가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했다.

그가 기다리는 위대한 혁명이 오면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내가 아이의 출생 시 별의 위치로 아이의 운명을 점쳐야 한다고 요구할 수도 있다는 문구로 답을 찾지 못한다. 다만 그가 상상하는 것은 국가 사회State society가 자유 연합free union으로 대체되고, 그 속에서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내 자유의 일부를 희생하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이다.

사상가로서 슈티르너의 형식과 행동 방침은 시대에 뒤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미래에 속하는 생각들로 가득하며, 그중 일부는 이미 실현되었고, 일부는 실현이 임박한 것처럼 보인다.

불합리하고 극단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많이 접하게 되고, 과거의 꿈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례도 있다. 하지만 현대의 독자들은 더욱 더 자주 슈티르너의 비상한 통찰력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Retrieved 2005-04-25 from tmh.floonet.net/articles/gbrandes_trans.html

[1902년 덴마크판 The Ego and His Own에 출판되었다. Brandes의 이 서문은 Svein Olav Nyberg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Georg Brandes, 스케치, 1900

Georg Brandes, 스케치, 1900|출처 https://yoda.wiki/wiki/Georg_Brandes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4]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4]

 

  1. 프랑크푸르트, 새로운 세계 그리고 옛 하이델베르크 – ② –

 

□ 이제 선생님의 첫 번째 주요 저작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연구 주제이자 교수자격 논문의 주제로 삼게 된 데에는 어떤 자극과 동기가 있었나요? 분명히 서독에서 여론조사 연구가 한창 주목받던 시기였고, 민주적으로 조직된 미디어 시스템의 문제도 명확히 드러나 있었죠. 하지만 ‘공론장’이라는 복합적 주제를 이론적으로 다루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건가요? 혹시 볼프강 아벤드로트(Wolfgang Abendroth)나 아도르노에게서 영향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폴리스 이론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인간의 조건 The Human Condition』이 그저 우연히 여러 영어권 저서들—예를 들어 당시 영미권에서 잘 알려졌던 C. W. 밀스나 존 듀이(C. ‌W. Mills und John Dewey)의 이론서들과 비슷하게 선생님 손에 들어온 책이었나요, 아니면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 이 주제는 제가 스스로 선택해서 발전시킨 겁니다. 그 배경에는 아데나워 시대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정치적 의견 형성 방식에 대해 제가 실망했기 때문이죠. 질문하신 여러 가지를 역순으로 답변해 보겠습니다. 듀이의 『공중과 그 문제들 The Public and Its Problems』은 1927년에 나왔지만 1996년에야 독일어로 번역됐죠.[1] 저는 그 책을 몰랐습니다. 미드(Mead)와 듀이는 1960년대 프랑크푸르트에서 강의할 때에야 비로소 제 연구에서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C. W. 밀스의 유명한 책[2]은 『공론장의 구조변동』 마지막 부분에서 잠깐 언급할 뿐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출간 당시 읽었고,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쓰기 시작할 때 폴리스에 대한 아렌트의 열정적인 묘사가 우연히 떠올랐어요. 사실 저는 그 책에서 다른 점에 더 주목했습니다. 바로 아렌트가 생생하게 묘사한 행위 유형의 구성 방식과 초기 허버트 마르쿠제가 후설의 생활세계와 하이데거의 존재분석에서 영감을 받아 1930년대 초 사회민주주의 잡지 『사회 Die Gesellschaft』에 발표했던 비슷한 고민들 사이의 친연성이었죠.

볼프강 아벤드로트는 제가 교수자격논문을 이미 완성한 뒤에야 알게 됐어요. 그때까지 저는 플레스너, 셸스키, 베르크슈트레서, 뮐만 등 여러 교수들에게 심사를 요청했다가 모두 거절당했고 마지막으로 아벤드로트에게 전화를 했죠. 제 친구 스피로스 시미티스가 권해서 한 거였어요. 아벤드로트가 보여준 열린 태도와 호의 덕분에 제 학문적 경력이 실제로 구제될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아도르노에게는 1959년 여름에 처음 교수자격논문 의사를 밝혔을 때 1장 초고를 보여줬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결국 호르크하이머에게 거절당했고, 아도르노와는 논문의 내용에 대해 깊이 논의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조교를] 사직한 뒤에는 가다머의 도움을 받아 아도르노가 독일연구재단에 교수자격논문 장학금을 신청해주기도 했죠.

말씀하셨다시피 그때까지 사회학에서 ‘공론장’이라는 개념은 주로 여론 연구와 관련해서만 다뤄졌습니다. 그런데 제 프로젝트는 훨씬 더 야심찼죠.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는 그동안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던 공론장 개념을 ‘부르주아사회의 범주’ 속에서 새롭게 발전시키고자 했습니다. ‘공론장’은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 형성을 위한 미디어들의 인프라인 동시에 사회적 기반을 이룹니다. 그리고 의회의 의원들이 공식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핵심을 형성하죠. 즉, 사회학적으로 볼 때 ‘주권적’으로 간주되는 ‘인민의 의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규범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요약하면, 제 연구 주제는 가족이나 경제 체계와는 구별되는 시민사회의 기반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발전했고, 이로부터 대중매체를 통해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정치적 여론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잊혀졌지만, 듀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정치적 공론장에 대한 사회이론적으로 정교하게 발전된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이 루흐터한트 출판사의 사회학 시리즈가 아니라 정치학 시리즈로 출간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역사적 관점을 통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지닌 규범적 내용은 자본주의적으로 발전한 산업사회 조건에서는 오직 사회국가적 민주주의의 형태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는 이 책이 출간되기 몇 년 전 독일 헌법학자협회에서 에른스트 포르스트호프와 볼프강 아벤드로트 사이에 치열하게 논의된 바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1959년에 쓴 『학생과 정치 Student und Politik』 서문의 참고문헌을 펼쳐보면, 제가 교수자격논문에서 근거로 삼은 정치학 및 법이론 문헌의 상당 부분이 이미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 서문에서 ‘정치 참여 개념’에 대해 고민한 부분을 보면, 아데나워 시대의 억압적인 분위기, 특히 연구소에서 더 강하게 느껴졌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하면 공론장의 이성적 잠재력을 동원해 권위주의적이고 탈나치적인 사회를 진정한 민주주의의 지적 수준, 즉 승전국들에 의해 부과된 민주 제도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지에 대한 저의 문제의식이 일관되게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비판적 사회이론의 관점에서 발전된 이런 주제에서는 당연히 칸트, 헤겔, 마르크스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제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학문적 동기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이것이 바로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진짜 동기입니다. 스피로스 시미티스는 저에게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국가법 논쟁들과 그 여파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문제점들을 익히게 해주었습니다. 또 다른 한 축은 폴 라자스펠트(Paul Lazarsfeld)의 라디오 리서치[1930~40년대 미국에서 라자스펠드가 주도한 라디오 청취자 연구 프로젝트]에서 시작된, 대중 커뮤니케이션 연구라는 넓은 분야와 이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국에 망명한 독일 출신 학자들은 자신들에게 낯선 미국의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는데—이 점은 아도르노만의 특이한 사례가 아닙니다—, 이들의 폭넓은 문화비평은 대중매체가 지배하는 공론장에서 여론 형성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을 비춰주었습니다. 저는 책의 참고문헌에서 이처럼 처음에는 분리되어 있던 다양한 연구 분야들을 각각 따로 제시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개념을 새로 만들고 정립한 힘(begriffsbildenden Kraft)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까지 사회학에서 통합적으로 정의된 적 없던 ‘공론장 구조’의 여러 복합적 기능들을 역사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해냈다는 점이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최근에 당신께서는 6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이 주제, 더 구체적으로는 상당 부분 탈규제적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 환경 아래 전개된 정치적 공론장의 또 다른 구조적 변화를 다루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이러한 새로운 매체 공론장에 많은 정보를 가지고 참여하면서 정치적 공론장의 새로운 전개를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젊은 동료 연구자들과 세대 간의 간극을 넘어서 학문적 교류를 함으로써 영감을 받고 배울 준비가 된 대담자라는 점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작은 책자[3]에서 저는 젊은 동료들의 연구에 기생하듯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저는 『사실성과 타당성』에서 처음 전개했던 법치국가와 민주주의에 관한 담론 이론의 규범적 함의를 다시 한 번 자세히 풀어보고자 했습니다. 사실 이 글은 출판사의 제안으로 묶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수십 년에 걸쳐 발전시켜온 정치 이론의 관점에서 새로운 미디어의 확산과 함께 나타난 정치적 공론장의 변화와 그 위협에 대해 저 스스로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제 나이를 고려해 볼 때 저보다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훨씬 더 정확한 이해를 갖고 있으리라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학문 여정에서 아마도 가장 오래된 주제 중 하나일 이 문제를 다시금 깊이 파고들게 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떤 우려가 선생님을 그렇게 이끄셨는지요?

 

■ 저는 미국의 공론장이 디지털화와는 무관하게 이미 한동안 붕괴 조짐을 드러내 왔다고 보았습니다. 그 중 하나는, 공적 의사소통이 모든 시민들을 포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런 의사소통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져서, 정당 간의 경쟁과 그들이 공적으로 제시하는 정책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알아보고 이를 명확히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점을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반쯤 실패한 건강보험 개혁을 계기로 몇 달간 미국에 머무르면서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대안적 사실들(alternative Fakten)’에 의한 공론장의 체계적인 오염 문제는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충분할 겁니다. 이미 저는 2006년에 의사소통학적 맥락에서 민주적 의지형성이 과연 여전히 인식론적 차원을 갖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룬 바 있습니다.[4] 이러한 흐름은 미국에서 특히 더 심화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미디어 시스템이 다른 곳에 비해 전면적으로 사유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독일 미디어 환경을 오랜 시간 관찰해온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만약 제 인상이 틀리지 않다면, 독일의 일간지와 주간지 역시 지난 10년에서 20년 사이 디지털화의 흐름 속에서 분명히 변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문사들은 자신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주목받기를 원하면서 소셜 미디어에 오히려 종속되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전국 단위의 주요 일간지와 주간지조차도 ‘일요판 신문’ 스타일을 따르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신문의 지적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정치면과 교양면이 점점 더 흐릿해지고 개성이 사라지는 현상은 잘 알려진 경제적 요인—즉 디지털 경쟁에 따른 광고 수입 급감—에서 주로 기인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문제는 그러한 경제적 압박이 없어도 언론 편집 작업 자체가 선제적으로 비전문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미디어 소비자들이 충분한 정보 없이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주관적으로 보이는 반응에 맞추려는 언론의 태도는 기이한 획일성을 만들어냅니다. 정치적 공론장의 붕괴는 트럼프 집권기 미국에서 특히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유럽에서도 계속되고 있으며, 독일, 스페인, 프랑스와 같이 공영 방송 시스템 덕분에 정치적 의사소통은 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그나마 어느 정도 기능하는 나라들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 다시 선생님의 사유 여정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61년부터 1964년까지 하이델베르크에서 보낸 약 3년의 시간이 철학적으로 특히 자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매우 행복하고 결실이 있는 만남들이 있었던 시기였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 시절을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 전혀 예상치 못했던 교수 임용 —저는 이 소식에 폐렴으로 반응했습니다만—은 저를 철학으로 다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테와 저에게 교수 임용은 경제적 불안정성과 직업적 종속 상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상황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교직 자격 시험 합격자(Assessorin)였던 우테는 새로운 상황 덕분에 교사 일을 잠시 미루고 먼저 두 어린 자식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기이하게도 신분 의식이 강하고, 저희 부부가 금방 알게 되었던 것처럼 매우 부르주아적으로 안온한 삶이 이 오래된 대학 도시에 남아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네카르 강변에 위치한 게르트 칼로(Gert Kalow)의 탑에서 열린 격식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학문적이거나 지역적 한계에 국한되지 않았던 사교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웃한 한트슈스하임에서는 마리 막스(Marie Marcks)와 헬무트 크라우흐(Helmut Krauch) 부부와 가족 같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미처리히 부부와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고, 뢰비트(Löwith) 교수와 가다머(Gadamer) 교수 부부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특히 부인이신 케테 가다머(Käte Gadamer) 여사는 『철학 동향 Philosophische Rundschau』에 실린 제 글들 때문에 이미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그분도 우리에게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물론 프랑크푸르트 연구소 출신인 저의 학문적 배경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우리가 젊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대학 환경에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진 것은 무엇보다도 우테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떠났다고 생각했던 전공으로 다시 강의를 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사회학이나 철학을 가지고 직접 강의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1961년 겨울 학기 가다머의 조언에 따라 마르부르크에서 교수 자격 논문을 마친 후 늦게 시작하게 되었는데, 저는 박사논문 시절에 공부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셸링에 관한 강의와 사회적 유토피아에 관한 세미나를 개설한다고 공지했습니다. 첫 세미나에서는 참가자 수가 많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알브레히트 벨머를 알게 되었고, 나중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제 지도하에 졸업 시험을 치른 두 명의 학생도 만났습니다. 얼마 후에는 만하임에 있던 울리히 외버만(Ulrich Oevermann)도 리케르트(Rickert) 세미나를 위해 건너왔습니다. 하지만 제게 강의는 늘 부담스러웠습니다. 이건 하이델베르크에서 처음 시작할 때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강의를 자유롭게 진행하는 데 익숙해지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저는 콜로키움[소양이 높은 학생들과 하는 토론식 수업] 형식이 가장 편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콜로키움에서는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반응할 수 있어서 저에게 잘 맞았습니다.

철학 교수로 임용된 것은 저에게 전공의 재정립을 의미했습니다. 저는 이미 정치학 교수자격 논문을 마친 사회학자였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서구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이론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에서는 본 대학에서 로타커와 베커 교수님 밑에서 공부했던 철학적 지식과 관심사를 다시 일깨워야 했습니다. 그 연결고리로 가다머 교수의 대표작이 막 출간되어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특히 『진리와 방법 Wahrheit und Methode』 2부, 즉 이해를 통한 전통의 습득에 대한 독창적이고 세심한 분석에 집중했으며 일부러 비판적으로 읽었습니다. 가다머 교수는 ‘해석학적 이해’가 정신과학[독일 학문 전통에서 정신과학 Geisteswissenschaf는 인간의 정신, 문화, 역사, 언어 등을 연구하는 학문군을 뜻한다. 우리식으로는 인문학이 여기에 가깝다]의 한 방법론이라는 오해에 대항하여 이 책을 썼지만, 저는 사회과학자의 방법론적 관점에서 독해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책의 3부에 나오는 존재론적 사변은 제외하고, 해석학의 통찰을 법학과 신학의 고전적 해석을 실천하는 한계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사회과학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사회과학의 논리(die Logik der Sozialwissenschaften)라는 철학적 주제를 발견했고, 그 작업을 하면서 그동안 쌓아온 사회학적 지식과 경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 하이델베르크 시절 이러한 방향 설정에 관련된 이론적 결정들과 철학적 영향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철학적 해석학은 제가 하이델베르크에서 강의하면서 따랐던 적어도 세 가지 흐름 중 하나였습니다. 이 세 가지 흐름이 결국에는 제가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헌 보고서로 이어졌습니다.[5] 이 보고서는 실제로는 1967년에야 『철학 동향 Philosophische Rundschau』 별책부록으로 출간됐습니다. 1960년에는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뿐만 아니라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저작집 1권이 출간되었는데, 이는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철학적 탐구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로 이어지는 전체 저작의 구조를 이미 암시하는 대담한 흐름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어니스트 네이글(Ernest Nagel)의 『과학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ce』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카르납과 빈 학파로부터 유래한 논리실증주의를 사회과학에 적용한 저작으로서 신실증주의적 과학 이론을 전개한 것입니다. 당시 서독에서는 한스 알베르트(Hans Albert)가 1934년에 출간된 칼 포퍼(Karl Popper)의 주저 『탐구의 논리 Logik der Forschung』를 수용함으로써 이에 대응하고 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리처드 헤어(Richard Hare), 피터 스트로슨(Peter Strawson), 윌리엄 올스턴(William Alston), 게오르크 폰 브리히트(Georg von Wright) 등과 함께 영국에서 꽃피운 분석적 언어철학을 아펠과 나는 대륙의 해석학과 분석적 과학이론 사이를 잇는 가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다머의 해석학은 이해의 작업 혹은 해석 작업을 기호로 기록되고 전해지던 것의 해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해석 작업을 통한 이해란 이 기호들을 통해 생각과 느낌을 기록했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고 그들의 존재 방식을 경험하면서 과거의 전통과 대화를 나누며 존재론적 만남으로서의 지평 융합을 스스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분석적 과학이론에서 이해 작업이란 인간 행동이나 사회 현상까지도 자연 과학처럼 엄격한 경험주의적 방법으로 해독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분석적 과학이론은 ‘이해 작용’을 헴펠-오펜하임 모델에 기초하여 경험주의적으로 설명했던 것이죠. 이 간략한 개요가 제가 철학으로 돌아온 길을 스케치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칼-오토(아펠)가 두 분석 철학 전통을 습득하는 데, 특히 프래그머티즘의 뿌리로서 퍼스(Peirce)를 ‘발견’하는 데 저보다 앞섰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배경에서 아펠과 저의 논의가 진행되었고, 1960년대 전반기에 우리의 ‘인식 관심(Erkenntnisinteressen)’ 이론이 발전했습니다.

 

□ 교수의 시각에서 대학을 접하신 건 하이델베르크에서 처음 시작하셨는데요, 이런 경험을 하시면서 학문적 연구 조직에 대해서 어떤 점을 배우셨습니까?

 

■ 돌이켜보면 양면적인(ambivalentes) 그림이 그려집니다. 당시 하이델베르크는 1960년대 학생 운동을 견뎌내지 못했을 ‘옛 독일’ 대학의 모습을 여전히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학장이 제 가족이 이사왔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전체 교수진 앞에서 제게 통상적인 인사 방문을 하라고 권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때 명함을 미리 만들어두는 센스가 없어서, 결과적으로는 일일이 직접 방문하는 수고를 해야 했죠. 덕분에 1962년 봄과 여름 동안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선배 교수 댁을 방문하면서, 석탄난로를 때는, 책과 원고로 가득한 검소하면서도 품격 있는 옛 독일 교수들의 일상 세계를 아주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교수 부인들 역시 조용히 그 삶에 동참하고 계셨고요. 유명한 이집트학자나 미술사가 분들과 마주하게 되면, 저희의 ‘현대적인’ 생활 방식이 그분들보다 조금 더 넉넉했던 탓에 약간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가다머 선생님은 조금 더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하셨고, 그분께서 저에게 이 전통 깊은 대학의 관행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박사논문 심사에 대한 동료 교수들의 평가가 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여도 괜히 들여다보지 않는 게 좋다는 식으로요. 총장 선거에는 여전히 학사 가운을 입고 갔고, 누가 후보로 나왔느냐는 제 질문에 교수들은 [그런 건 생각하지 말고] 누가 당선되기로 정해졌는지 옆 사람에게 물어보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제게는 시간제 비서 한 명이 배정되었는데, 오래된 철학 세미나실이 너무 좁아서 그녀가 저희 집으로 왔습니다. 강당에서 열린 저의 취임 강의[6]는 만원이었습니다만 일본인 관광객들-당시 이미 상당히 많이 독일을 찾아오고 있었죠-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 계속 살면서 짧게 남편을 방문하던 슈테른베르거(Sternberger) 부인은 당시에도 이미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중심가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요컨대, 하이델베르크라는 도시 처럼 이 대학 역시 내부적으로는 정돈된 분위기, 좋은 예절 그리고 약간은 박물관 같은 고풍스러운 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저는 그때 가다머와 뢰비트(Löwith)라는 두 원로 교수님의 보호 아래 은 비정년 교수로 활동하던 처지였기 때문에 대학 내 정치에는 깊이 관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 나중에 프랑크푸르트에 갔을 때는 분위기가 훨씬 거칠었고, 갈등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이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두 곳의 경험을 종합해서, 이후 저는 프리데부르크(Friedeburg), 데닝거(Denninger), 비트휠터(Wiethölter)와 함께 당시 헤센 주 문화부 장관에게 대학 헌법의 ‘민주화’를 위한 개혁안을 제안하게 되었던 거죠. 그런데 이 개혁안은 상당하면서도 양면적인 결과를 낳았을 테지만 새로운 대학법 도입 직후 제가 슈타른베르크(Starnberg)로 옮겼기 때문에 고백하건대 그 결과에 대해서는 부끄럽게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7]

 

□ 가다머, 뢰비트, 미처리히 세 분과 관련해서는 어떤 기억들이 있으신가요?

 

■ 크라우흐(Krauch)와 칼로(Kalow) 부부 외에도 이 세 분과의 인연이 제게 정말로 중요한 개인적 관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뢰비트 부부와 맺은 우호적이고 사적인 관계는 오직 하이델베르크에서만 유지되었습니다. 가다머 선생님은 제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막 시작할 무렵 조교직을 제안해 주시면서 이미 알게 되었고요, 평생에 걸친 서신 왕래가 그 관계가 지속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미처리히 부부와는 세대 차이가 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마지막까지 깊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학문적인 관심보다도 우정이 먼저였고, 그 속에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곤 했습니다. 마르가레테는 제 아내 우테가 정신분석전문가 교육을 받기를 간절히 바라며 애써 주셨지만 안타깝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저희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슈타른베르크로 이사했을 때, 알렉산더와 마르가레테 두 분 모두 저희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났다고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로 인해 만남의 빈도는 줄었지만, 우정 자체가 훼손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친밀감에 비해, 뢰비트나 가다머 선생님과의 관계는 여전히 스승이자 저에게 큰 영향을 준 책의 저자분들이라는, 일정한 거리감이 남아 있었습니다.

칼 뢰비트 교수님의 책들을 탐독하며 영향을 받은 건 본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에서 뵈었던 뢰비트 교수님은 이미 젊은 시절의 역사-사회학적이면서 좌파 하이데거주의적 사유에서 거의 벗어나 계셨죠. 고전적 자연 철학으로 돌아가셨기에 이론적으로는 저와는 다소 멀어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분이 제 학문적 관심사와 얼마나 가까웠는지는 사실 제가 하이델베르크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가기 직전 막스 베버 학술회의[8]를 준비하면서 뢰비트 교수님의 마르부르크 시절 1920년대 논문들을 처음 읽었을 때 깨달았습니다. 그분의 교수자격논문[9]에서는 제 자신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논문에서 교수님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해 포이어바흐의 독해를 바탕으로 비판하였습니다. 특히 그 저작에 담긴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언어 이해와 ‘속인(Man)’에 대한 분석을 비판하셨더군요. 1인칭과 2인칭 사이의 상호주관적 관계에 대한 이러한 초기 규명은 제가 가장 최근에 쓴 책에서도 다시 다루었죠.[10] 하지만 마르부르크 시절 뢰비트 교수님에게 제가 배웠던 것에 관해서는 하이델베르크의 뢰비트 교수님과는 더 이상 논의할 수 없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주제에 대해 저희가 건드린 것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예를 들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니체는 이 시대에 더 이상 ‘해로운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라는 –곧 틀린 것으로 드러나버린– 확신에 찬 주장을 펼치면, 그분은 그저 미소만 지으셨을 뿐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다머 교수님과는 당시에도 논쟁을 벌였습니다. 저는 가다머 교수님의 해석학이 전통을 계승하는 역할에 대해 보수적이고 궁극적으로 하이데거주의적인 ‘형이상학적’ 해석을 한다는 점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가다머 교수님이 제 사회 과학의 논리에 대한 문헌 보고서를 읽으셨을 때에야 비로소 그분 이론에 대한 저의 해석을 알아차리신 것 같습니다. 그 보고서가 미국에서의 가다머 수용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교수님도 알고 계셨죠. 가다머 교수님과 저의 논쟁에는 아펠 교수도 참여했는데 이는 책으로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11] 이러한 논쟁이 가다며 교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부담스럽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깊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5회에서 계속~


[1] J. Dewey, The Public and Its Problems, New York 1927; dt. Ausgabe: Die Öffentlichkeit und ihre Probleme, aus dem Amerikanischen von W.-D. Junghanns, herausgegeben mit einem Nachwort von H.-P. Krüger, Bodenheim 1996.

[2] C. ‌W. Mills, The Power Elite, New York 1956; dt. Ausgaben: Die amerikanische Elite. Gesellschaft und Macht in den Vereinigten Staaten, aus dem Amerikanischen von H. Stern, H. Neunes und B. Engelmann, Hamburg 1962; Die Machtelite, neu übersetzt von S. Lübeck, herausgegeben von B. Wendt, M. Walter und M. ‌B. Klöckner, Frankfurt/M. 2019.

[3] Vgl. Habermas (2022).

[4] J. Habermas, »Hat die Demokratie noch eine epistemische Dimension? Empirische Forschung und normative Theorie«, in: ders., Ach Europa. Kleine Politische Schriften XI, Frankfurt/M. 2008, 138-191. Philosophische Texte. Studienausgabe in fünf Bänden, Frankfurt/M. 2009, Bd. 4: Politische Theorie, 87-139에 재수록.

[5] J. Habermas, Zur Logik der Sozialwissenschaften, in: Philosophische Rundschau, 별책부록 5, Tübingen 1967. Zur Logik der Sozialwissenschaften (확장판), Frankfurt/M. 1982, 89-330에 재수록.

[6] J. Habermas, »Hegels Kritik der Französischen Revolution« (Heidelberg대 취임 강의), in: ders., Theorie und Praxis. Sozialphilosophische Studien, Neuwied, Berlin 1963, 89-107. Wieder abgedruckt in: ders., Theorie und Praxis. Sozialphilosophische Studien, Frankfurt/M. 1971, 128-147 확장 신판에 재수록.

[7] Vgl. dazu E. Denninger u. ‌a., »Grundsätze für ein neues Hochschulrecht«; dies., »Ein Beitrag zur Diskussion des Hessischen Hochschulgesetzentwurfs«, in: J. Habermas, Protestbewegung und Hochschulreform, Frankfurt/M. 1969, 202-216; 223-234. Hessischer Kultusminister war von 1959 bis 1969 Ernst Schütte.

[8] Vgl. dazu J. Habermas, »Wertfreiheit und Objektivität. Eine Diskussionsbemerkung« (zum Referat von Talcott Parsons), in: O. Stammer (Hg.), Max Weber und die Soziologie heute (= Kongressband zum Deutschen Soziologentag 1964), Tübingen 1965, 74-81. Habermas (1982), 77-85에 재수록.

[9] K. Löwith, Das Individuum in der Rolle des Mitmenschen. Ein Beitrag zur anthropologischen Grundlegung der ethischen Probleme (Habilitationsschrift von 1928), in: ders., Sämtliche Schriften, herausgegeben von K. Stichweh, Stuttgart 1981.

[10] Vgl. Habermas (2019), Bd. 2, 603-623, hier 613.

[11] Vgl. K.-O. Apel u. ‌a., Hermeneutik und Ideologiekritik, Frankfurt/M. 1971.


지난 회차 글

막스 슈티르너: 에고이즘의 위대한 철학자-6(최종) <슈티르너 이후>, <역사적 결론>,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슈티르너 이후>, <역사적 결론>,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박종성(한철연 회원)

 

 – 차 례 –

  • 서론
  • 헤겔 좌파
  • 헤겔 좌파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 정치적 슈티르너
  •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 슈티르너 이후
  • 역사적 결론
  •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Svein Olav Nyberg [노르웨이 아그데르 대학교(노르웨이어: Universitetet i Agder) 부교수]의 글, Max Stirner: The Great Philosopher Of Egoism(2021)을 번역한 글입니다.

 

<슈티르너 이후>

스코틀랜드계 독일 시인 존헨리 맥케이(John-Henry Mackay)는 오늘날 슈티르너에 관해 알려진 대부분의 내용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맥케이는 슈티르너에 대한 정보와 그가 쓴 내용을 추적하는 데 몇 년과 막대한 재산을 사용했습니다맥케이 자신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였으며슈티르너 역시 그렇게 해석했습니다나는 이것이 슈티르너의 경우에 해당되는지 의심스럽습니다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논의를 위한 것입니다슈티르너는 어떤 경우에 아나키스트특히 맥케이와 같은 개인주의 아나키스트에게 영감을 주었지만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 같은 사회적아나키스트(social-anarchist)도 막스 슈티르너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슈티르너는 세기가 바뀌면서 두 번째 명성을 얻었습니다게오르그 브라데스(Georg Brandes)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를 발견하고 홍보했습니다니체의 팬들은 니체의 선구자를 찾고 있었고이를 슈티르너에게서 발견했습니다따라서 브라데스는 1902년에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덴마크 판의 서문을 출판하고 썼을 때 시장을 확보했습니다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은 브라데스와 자주 서신을 교환했기 때문에입센이 슈티르너의 영향을 받았다고 가정할 이유가 있습니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로서의 슈티르너의 명성은 금세기 초 미국의 대표적 자유주의자를 이끄는 벤저민 터커(Benjamin Tucker)가 1907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첫 번째 영어판을 출판했을 때 이를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겼을 때 더욱 강화되었습니다나중에슈티르너는 대부분 아나키스트 정치 철학자로 여겨졌습니다그러나 비평가 허버트 리드(Herbert Read)에 따르면에리히 프롬(Erich Fromm), (Jung),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및 몇몇 20세기 실존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슈티르너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저는 이러한 다양성이 슈티르너를 기쁘게 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역사적 결론>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출판된 후 막스 슈티르너가 상상했던 방식대로 상황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이 작품은 무겁고즉각적 영향을 미쳤으나, 1848년 정치적 불안과 혁명으로 인해 그와 동시대의 청년 헤겔주의자들의 관심이 사라졌습니다슈티르너를 포함한 대부분의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나 다른 면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슈티르너 자신도 실패한 투자로 곧 전 부인의 전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1856년에 죽기 전에슈티르너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최초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했고스미스를 대중화한 프랑스인 장 바티스트 세이(Jean-Baptiste Say)의 일부 책도 번역했습니다슈티르너는 죽을 때까지 여러 휴게실과 회의실에서 급진적이고 충격적 사상을 언급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1856년 6월 25일 슈티르너는 곤충에 쏘인 후 감염으로 사망했습니다그와 함께 유일한 세계가 죽습니다.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인간의 본질”(the essence of Man)에 대한 슈티르너의 공격은 페미니스트와 가부장제주의자 모두가 가정하는 성 역할(gender roles) 비판에 깔끔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양쪽 모두 여성” 무엇인지에 대한 규범적 견해를 유지합니다예를 들어여성은 근육질일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여성이 강하면 가장들은 그녀에게 여성적이지 않다”, 심지어 “남자같”unwomanly고 꼬리표를 붙입니다이 모든 과정에서 간단한 건강 검진을 통해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80년대의 비슷한 추악한 예는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가 총리였을 때입니다페미니스트들은 그녀가 그들 중 하나인 여성이 아니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녀는 남자였다.” “인간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경향을 따라가면우리는 젠더 본질주의(gender essentialism)와 미리 부여된 젠더 역할(pre-assigned gender)이 단순히 자기 모순적(self-contradictory)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그녀가 여성의 본질과 역할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여성이기를 중단하는 것은 일탈적 여성이 아닙니다더 이상 사실이 아닌 것은 여성의 본질과 역할입니다.

페미니즘은 아마도 세기 전환기 영국의 저명한 개인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였던 도라 마스든(Dora Marsden)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끌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수사법과 생각은 슈티르너와 매우 유사하며 그녀는 이 연관성을 명시적으로 확인했습니다.

이 놀라운 여성에 대해 더 잘 알고 싶다면 다음 웹페이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http://pierce.ee.washington.edu/~davisd/egoist/marsden/

하지만 조심하세요. 마스든과 그녀의 수사법에 비하면 오늘날의 페미니스트들은 지루한 관료처럼 보일 것입니다!

 

– 끝 –


옮긴이 박종성: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공역)이 있다. 논문으로는 「유일한 사람의 사랑」,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고 건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항 대립의 세뇌와 자연에서 교육 [천 하룻밤 이야기]

이항 대립의 세뇌와 자연에서 교육

2025 07 22 대서(大暑) – 소서에 무척 더웠으니 대서에는 좀 덜하려나…

 

류종렬(한철연 회원)

 

한 나라에서 상반된 견해들과 여러 견해들을 통합하여 일정한 방향을 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정당은 자기의 방향을 가지고 나간다는 것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선언한 무리들의 모임이다. 한 모임 안에서 공통적 담론을 가지고 있듯이, 다른 모임(정당, 시민단체)에서는 다른 공통적 담론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19세기 후반 이래로 상업자유주의자(약탈과 수탈을 일삼는 liberaliste)와 사회자유주의자(프롤레타리아 지도, 인민주권, libertaire) 사이에 대립은 서로 담을 쌓아 놓듯이 배제하고 배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민자유주의자들(리베르떼르)은 스스로 공적인 일들을 중히 여기고, 인민들의 삶의 터전(인프라)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고 하면서, 잉여노동을 착취하여 상품을 팔아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타문화를 짓밟는 상품자유주의자들을 경멸한다. 이러한 대비는 마치 인도주의자(l‘humanitaire)가 인문주의자(l‘humaniste)를 경멸하는 것과 같다. 인도주의자들은 자연 속에서 인간이 활동하고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루소주의자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비해, 인문주의자들은 오랜 유일신앙에 세뇌되어 인간의 영혼은 하늘나라(소천)로 간다고 믿는다.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나 평등하게 돌아간다고 할 때, 신 없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 돌아간다고 말하기 이전에 삶의 터전에서 공공을 우선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껏 일하고, 어릴 때나 늙어서나 노동력이 없을 때는 필요에 따라 인도주의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런 인도주의자의 구호, “각자는 역량에 따라 각각은 필요에 따라”라는 구호가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로 퍼져나가서 맑스가 말년에 이 구호를 중히 여겼다.

사회에서 상반된 담론을 전개한다는 것은 정치 경제적 사건들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본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저항과 항쟁에서 기득권의 반동은 거세었고, 두 번의 세계 대전에서 반동들은 인민의 발현과 자유를 억압하고 새로운 제국주의를 형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세계사를 읽는 방식이다. 철학사에서 보면, 참주제(또는 황제제)에 대한 인민의 저항은 수천년 동안 있어왔다. 아마도 신석기 이래로 이런 저항에서 어쩌다가 간신히 아테네에서 민주제라는 것을 실험했다고 본다. 이런 데모스(인민)의 저항, 또는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인민의 저항은 끊임없이 있어왔다.

벩송도 기득권의 저항(반동)에 대한 저항이 도덕감의 발현이라 보았다. 기득권은 이익에 눈이 멀어 도덕감이 없다. 그 도덕감이란 연민이며, 인간이 인간과 함께 산다는 데 공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도덕감이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부터라고 말하는 것은, 서양사에서 단지 “빛들세기(les Lumiere)”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있었다. 그럼에도 인민의 저항에 대한 반동은 거세었다. 혁명에 대한 반혁명은 담론의 상층(주류)을 형성하며, 형식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진리를 구하는 지식, 사회의 제도를 공고히 하여 반동의 지위를 구축하는 국가주의, 그리고 철학적 전통에서 자연의 배후를 가르쳐주는 형이상학(자연배후학)을 하나의 통합으로 구축하려 하였다.

이런 세 패거리로부터 사라져가는 듯했던 종교와 도덕의 배후학으로 도덕형이상학(도덕 배후학)을 논리 체계방식으로 새로이 구성하고 구축하였다. 자연배후학이 유일신앙(국가주의)과 황제제(참주제)의 배경이 되었듯이, 이런 도덕배후학은 제국주의와 제국의 형성의 토대로서 자임하였다. 이런 상반된 담론이 같은 평면위에 놓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다. 그럼에도 유일신항의 변증법은 하나의 평면위에 세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1848년 공산주의 선언문 이래도 두 담론은 같은 평면위에 놓고서 다루는 것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항목 대 항목의 대립은 지구상을 어지럽게 하였다. 냉전시대를 거쳐서 제국의 시대인 지금도.

적어도 19세기 후반에는 항목 대 항목이라는 이항 대립을 다루는 방식은 구시대의 산물로 밀려나는 듯하였다. 왜냐하면 수학과 미시물리학은 이원적 대립이 무의미(파라독사)임을 알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사도 다항들의 관계이며, 그 상황과 사건들 속의 개인도 다양체와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자연을 대상으로 바라본 자연배후학(메타피직)이 아니라 자연이 자기 생성과 자기 전개를 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생성론(자연 되기론, 우주발생론)이 담론으로 퍼져가는 듯하였다. 그럼에도 제국은 악의축과 배제의 담론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추가령지구대 이남에서 다른 담론을 전개하는 이들을 마치 개돼지취급하거나, 또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이를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계엄을 하겠다고 하니, 인민의 저항에 대한 저항은 거세고도 지칠 줄을 모른다. 왜 그럴까?

학문을 제대로 해야 하는 이가 없는 나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탄하면서, “자네들 열심히 공부하게”라는 박홍규 선생님은 여전하게 아직도 멀었어 ‘열심히 공부하게’ 하실 것같다.

서양학문사에서 논리학이 중요 지위를 차지하는 한에서 자연은 대상이었다. 인간의 인식과 지식 체계가 대상에서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일부에서부터도, 타문화에서 공자도, 노자도, 싯달다도 자연은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의 일부이며 또는 우리를 낳은 진솔한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도구로 삼는 학문들이 상위를 차지한 것은, 인간의 도덕감과 신앙심보다 이기심과 탐욕을 상위에 올려놓은 유일신앙자와 참주제 옹호자들이었다.

자연을 대상화하는 방식을 학문적으로 틀을 세우려고 한 이는 그 자신의 의도와 달리 플라톤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플라톤은 대립된 두 항목 사이를 다루려고 한 것이라기보다 두 항목 사이에 상호 연대성과 상호연관을 주목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럼에도 이 두 항들 사이의 경계가 분명해야 학문들이 성립한다고 여긴 것은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였고, 그리고 세월이 지나 이를 과도하게 한쪽을 경계 밖으로 몰아, 무 또는 악 또는 악마로 취급하는 방식으로 담론을 전개한 것이 유일신앙자들이었다. 플라톤의 진솔한 의도와 달리, 상층의 주류세력이 인민을 지배하려는 방식으로 담론을 분할하여 지배체계로 만든 것은, 플라톤을 곡해한 플라톤주의자들이라 한다.

이항 대립의 담론이 아니라 다항연관의 담론이라고 여긴 플라톤은 다항들 사이에서는 어느 것이 더 맞다 틀리다는 것을 따지기보다, 서로들 간에 공감을 통한 공평한 조화를 바랐다. 그에게서 정의(la justice)는 계산이라기보다 조화이다. 그런데 그의 제자에 이르면 양적 계산에 의한 몫에 맞는 분할의 평균을 정의로 여긴다. 이런 평균적 정의는 편의와 유용성이 있다고 하는 근대에서 통용되었고, 제국주의 시대에 선진 국가와 식민지 영토 사이에 평균화 방식으로 쓰이기도 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리베랄리스트 지식분자는 이항 대립을 통일시킬 변증법이란 담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최고 수준에서 변증법이 세계의 평준화(통합화)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나아가 공상으로 날개를 펼쳤다. 제국이 지배하는 지구는 오지 않았다. 이제 그 날개에 인위적 정보체계의 디지털을 이용하여, 인공지능이 공상에서 망상으로 치닫게 하는 파라노이아의 길을 걷고 있는 형편이다. 제국이 세계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이항 대립에서 다른 편을 배제하고 무화시키고 있으면서도, 배제하는 편이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고함을 치고 담론장은 열려있다고 해도, 배제 된 쪽에서는 공감도 감흥도 없다. ‘나 이외’에는 이라는 배중율의 전제를 버리지 않은 유일신앙에 매여있는 한, 자기 동일성에 빠져있는 불변의 동일률을 신앙으로 삼는 파라노이아에 불과하다. 벩송이 말하기를 한 신부가 담론을 하는데 성당 안에서 웃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지역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학문에서 제시한 담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그 담론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사유하는 자이다. 이들 사이의 대립이 실재하는가?

*

고대 그리스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연결성이 있다고 믿고 해결하려하였다. 그것은 영원과 시간 사이의 해결방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원과 시간의 논리적 구별과 대응관계보다, 시간 속에서 살다가 죽어서 영원으로 갈 것이라는 것이 훨씬 더 분명하고 설득력 있다고 여긴다. 이는 마치 꼬마애가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을 믿고 지내는 것과 같다. 영원으로 간다는 것이 자연이 아니고, 유일신이 되면서 하늘과 땅 사이의 연관의 설명은 더욱 복잡해지고 더 많은 담론들로 증명하려 하였다. 신앙자는 단순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복잡한 것은 믿음이 없다고 하면서도, 뭐 그리 많은 담론을 만들었던가!

말하자면 얼마나 많은 죽은 자들이 또는 얼마나 다양한 천사들이 산자들에게 목소리와 말씀을 전해야 영원한 하늘의 이야기를 믿겠는가? 그 많은 이야기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 영원 속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떤 담론에도 없다는 것도 안다. 무려 천년이 지나서야, 영원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 영원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라고 물으면서 솔직하게 그게 말 뿐이지 라고 한다. 그 믿음은 인간이 말하는 목소리를 기호화하여 대상화하고 그 대상화를 실재성으로 믿는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단지 이름뿐인 천국과 천사와 악마를 믿고 자시고 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담론을 형성한 것이 유명론이다. 이 이후로 더 이상 보편자의 실재성을 다루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항 대립자들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보편”이라 용어를 쓰고 일반화가 넓어지면 보편이라 주장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보편은 상대성에 의해서 이미 우주가 하나이다. 자연은 자기 발생적이고 변화하는 하나이지만, 자연을 대상으로 여기고 조작가능하고, 지속가능하게 쓸모 있는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면서, 대상으로서 자연이 보편이라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그러나 천만에. 사회와 연관해서도 미국에서 보편화가 러시아에서도 중국에서도 보편인지 묻지 않듯이, 그리고 남녘에서 보편이 북녘에서도 보편인지도 묻지 않고, 남녘의 보편이 북녘의 보편이어야 한다고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세뇌된 자들에게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까? [그럼에도 착한 도덕형이상학론자들은 보편이 변증법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벩송은 네오스콜라주의라고 한다.]

이 부분의 일반화를 세계와 우주의 보편화로 환원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자를 벩송은 착각하는 자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보편화 주장자들은 망상에 사로 잡혀있다고 해야 한다. 학문에서 반역이란 생성의 변역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변역을 반역이라 부르는 자들에게 있다. 반역은 망상을 진리체계로 여기는 곳에는 어디에나 있다. 김건희-윤석열의 빨갱이 타령은 망상이듯이, 리박스쿨에서 이승만, 박정희의 정당성을 복원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로 이어지는 계열의 담론이 망상의 담론장이라고 하면, 이들을 믿는 신앙자들은 펄쩍 뛰면서 아스팔트로 나가서 성조기와 다윗기와 더불어 태극기를 흔들 것이다. 인민의 반역, 인민을 반역으로 몰려고 덤벼든다.며칠 전 인천공항에서 ‘윤어게인’을 주장하는 이들이 미국인 모스탄 교수의 입국에서 환호를 하는 장면은 아스팔트부대와 같았다. 담론의 장에서 대립된 두 항을 다룬다는 것이 배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음양처럼 서로 대립되지만 상호조보관계이며, 밤낮과 계절처럼 순환관계이고, 남녀처럼 서로 상보관계이며, 교류전기의 0과1처럼 교대관계로서 원활해야 빛(전기)도 정보(디지털)도 창조하는 것과 같다.

이항 대립으로 하나의 절대와 완성자를 주장하는 신앙이 세뇌시킨 오랜 역사에서, 프랑스철학은 18세기(빛들세기)에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앵글로색슨 철학은 상층이 이 대립을 즐기면서 부를 축적하며, 세계에 전쟁을 통해 공포를 심으며, 상위를 유지하고자 하는데 봉사하고 있다. 21세기에 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 미합중국이라는 제국일 것이다.

이런 공론의 장이 있다고 여기는 철학자들로서 롤즈와 샌델의 정의가 배타적인 논리위에 있는지를 알려면, 이들의 논리가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칸트가 자연형이상학을 뉴턴의 천문학과 갈릴레이 물리학 이후로 우주의 상대성 위에 세우는 선천적 종합판단은 가능하였지만, 자아, 세계, 이상의 인식을 상대성을 두게 되면 이분화에서 상층이 인민을 지배하는 데 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니 인간이 논리로 판단(심판)하는 생활에도 (도덕)형이상학을 자연형이상학처럼 세워야 했다. 도덕감과 신앙심도 자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앙의 규범과 정언명법아래에 세워야 한다. 이 도덕형이상학에서는 루소이래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없어지고, 지고지순의 하늘의 별로 돌아간다는 플라톤주의의 선의 이데아로, 그리고 경건한 신앙주의로 돌아갔다. 이런 맥락을 이어 앵글로색슨의 도덕론은 엄격한 명법주의에서 국가와 천륜을 동일시하는 논리로 윤리학의 전형을 이루고자 한다. 롤즈, 센델, 하버마스는 같은 담론장의 놀이터의 노는 것은 자기가 잘하는 운동 경기에서만 노는 어느 운동선수와 같다.

이항 대립에서 승자를 찾는 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이를 이용하여 배중률을 가장 잘 사용한 이들이 유일신앙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언제나 자기주장의 완전, 보편을 말하기 위해 전쟁을, 그리고 그 진리를 증거하기를 주장하면서 죽음을 불사하게 만들면서, 죽는 자에게 천국으로 유혹하는데, 이를 세뇌라고 부른다. 이런 사적이익 추구자들이 인민의 도덕감에 동의를 구하고자 자신을 기복신앙으로 포장하며 신앙심이 깊다고 한다. 그 신앙심이 세뇌된 것으로 탐만치에 빠진 것이다. 이를 표현과 이미지로 구출해주는 것도 불교 성직자, 카톨릭 성직자, 기독교 성직자들이다. 왜 이들이 피에 젖은 권력자들에게 기도를 해 주겠는가. 이들 성직자들의 움직임도 인민을 세뇌시키는 한 방식이며, 잠시 지나가는 방식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이런 세뇌를 깨닫게 하는 것이 지속적인 학습이 필요하다. 어떻게,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감옥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플라톤은 슬픔보다 더 큰 상실감이 있지 않았을까? 당대의 여러 담론들 여러 갈래였을 것이며, 용어상으로는 시대가 지나서 성립되었겠지만, 다양한 담론의 논의 방식들이 생겨났으리라 : 논쟁술(sophistique), 논박술(éristique), 대화술(dialogue)과 산파술(la maïeutique), 논리학의 변증술(dialectique, Τοπικά)과 해석론(l’interpretation, Ἑρμηνείας)」, (법정의) 변론술(apologique), 웅변술(rhétorique, 수사학), (종교의 옹호로서) 호교론자(apologiste, le apologétique), 연설가(l’orateur) 등이 있었을 것이고, 중세에는 정해진 원리와 교리의 일반화(보편화가 아니라)로서 설교가들(les prédicateurs)들과 평결론자들(les sententiaires)도 있었다.

플라톤은 교육의 필수성을 느꼈을 것이고, 폴리테이아편에서 국가 안에서 개인의 교육에 대해 쓰면서 어린이에게 음악과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그리고 우주와 터전의 연대에 대한 교육으로 티마이오스편에서 우주 발생론을 전개하였고, 그리고 시민으로서 도시국가에 살아야 하는 방식으로 법률편을 썼을 것이다. 이 거대한 체계의 기본은 어쩌면 아페이론으로부터 생성(함)과 발생(되기), 그리고 과정에서 노력과 강도를 실행한 이들에 있을 것이다. 이런 길을 모색한 이는 플라톤과 달리 퀴니코스-스토아의 계보였다. 교육도 이중화의 계열이 중요할 것 같다. “빛들세기(18세기)”에 대학에서 설교와 평결을 가르칠 때, 곧 등장하게 될 제3신분으로서 대학바깥의 인물들인 볼테르, 흄, 루소, 디드로, 엘베시우스 등은 인간과 제도가 자연(물질)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자연형이상학이란 말을 쓰지 않았지만 도덕감과 신앙심은 자연형이상학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루소가 에밀도 쓰고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도 썼다. 플라톤 이래로 새로운 교육은 종교 없는 교육의 필요성이었다.

“빛들세기” 자연에서 빛이 퍼져나가듯이 의식은 퍼져 나간다. 왜 이들이 계몽이라는 표현대신에 빛들이라고 했겠는가? 16세기부터 외방(중국)에서 전해온 문화에 충격을 받았던 프랑스에서 말브랑쉬(Malebranche, 1638-1715)[일흔일곱]는 유일신이 없어도 우수한 도덕감과 신앙심을 가진 거대한 나라(중국)가 있다는 데 놀랐고, 독일에서는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일흔다섯]도 놀랐다. 그럼에도 자기 나라에 사는 애국자들이라, 맑스와 레닌처럼 세계사로 편입되는 시기는 아니었기에 유일신앙 속에서 사유할 수 밖에 없었다. 21세기에는 교육이 전지구라는 일반성 위에 성립하고 활동하는 과정을 알려주는 방식이어야 할 것 같다. 프랑스가 1871년 프러시아에서 패하고 거대한 전쟁 패배 비용을 갚으면서도, 루소의 사유를 따라, 자연에서 인민의 성장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1883년에 모든 어린이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일반교육, 교육은 무상이어야 한다는 무상교육,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에서 종교의 탈피, 세속화 교육을 실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세뇌에서 벗어나는 여러 방식들 중에, 일반교육, 무상교육, 그리고 모든 교육제도에서 사적 재단 또는 종교 재단의 철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세뇌는 어린이에게서 부터이다. 윤구병이 그렇게 강조했던 어린이 철학 교육은 세뇌의 탈피와 자연 순환과 자연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만드는 것, 벩송이 말하듯이 자연(우주)이 보살(신)들을 만드는 기계라고 하듯이 자연으로부터 도덕감과 신앙심의 생성하고 창안하여, 자연형이상학의 진솔한 모습을 만드는 것이리라.

(5:28, 58RMB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3]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3]

 

  1. 프랑크푸르트, 새로운 세계 그리고 옛 하이델베르크

 

□ 하버마스 선생님 본(Bonn)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그러니까 아도르노 선생님이 계셨던 ‘사회연구소(Institut für Sozialforschung)’로 옮겨가신 일은 선생님의 생애에서 하나의 분기점이었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 그 시기를 어떻게 회고하고 계신가요?

 

■ 제가 아무런 준비 없이 프랑크푸르트로 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로 간 것은 본 시절의 저와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준비란 『계몽의 변증법』을 읽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 책은 본에 있을 때 암스테르담의 망명 출판사 쿠에리도(Querido)에서 나온 초판으로 구입하긴 했지만, 저로선 그 암울한 문체의 글쓰기에 큰 공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서독의 사회 구조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은 제 정치적 신념과는 거리가 있었던 셈이지요.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를 되돌아보면, 호르크하이머가 「줄리엣」에 대해 쓴 장(章)은 당혹스러웠고, 아도르노가 미국에서 경험한 문화산업 이론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나 『프랑크푸르터 헤프테』에 진지한 연극평론을 기고하던 학생 시절의 제 입장에선 좀처럼 와닿지 않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데 있어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 배경은 고등학교 시절 굼머스바흐에 있던 공산주의 서점에 자주 드나들며 쌓았던 지적 자취들이었습니다. 박사학위 취득 이후 앞서 언급했던 이데올로기 개념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본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들이 무엇보다도 결정적이었습니다. 저는 2년이 넘도록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20세기 초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했던 이들. 신칸트주의와 마르크스 주의의 결합을 시도. 오토 바우어, 막스 아들러 등이 대표자]의 경제 이론 및 민주주의 이론, 신칸트주의 문헌들,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의 잡지들 그리고 칼 코르쉬와 게오르크 루카치 같은 저자들의 저작들을 읽으며 공부했습니다. 특히 루카치나 코르쉬의 글을 읽으며 “안타깝게도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사고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바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우연히 아도르노의 『프리즘 Prismen』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아도르노는 마르크스의 개념어들을 더 이상 1910~20년대의 빛바랜 언어로 다루지 않고 완전히 현대적인 언어로, 동시대의 현상들의 체계를 거리낌 없이 분석하는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반공주의가 극에 달하던 아데나워 시기의 암흑 속에서 말이지요! 그 관성적 개념어들을 더 이상 역사의 유물을 답습하는 방식으로 읽지 않고, 동시대적 현실 속에서 새롭게 ‘재부호화’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 그 순간의 독서 경험은 저에게 하나의 결정적 전환점이자 문학적으로도 찬란한 충격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뒷 바람에 힘 입어 저는 프랑크푸르트로 항해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프랑크푸르트로로 간 것은 단지 학문적 수련의 연장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상적] 내용을 담고 있는 동기가 작용한 것이었습니다.

 

□ 그렇다면 본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옮긴 일은 사상적으로도 깊은 전환점을 의미했던 건가요?

 

■ 저에게 이 시기는 일종의 두 번째 학문적 수련기와도 같은 정신 형성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로 가겠다는 제 결심은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도르노 선생님께서 아돌프 프리제(Adolf Frisé) 편으로 보낸 초청장에 제가 응하여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매우 호의적이었지만, 저는 당시 독일연구재단의 장학금을 받고 있었을 뿐 연구소에서는 고정된 자리를 약속받지 못한 상태로 갔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도르노 선생님은 호르크하이머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호르크하이머 선생님께서 아도르노 선생님만의 ‘첫’ 조수 자리를 승인해 줌으로써 제가 갈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상치 못하게 크게 놀랐던 것은 전혀 다른 점이었습니다. 그 연구소는 당시 서독에서 유일무이한 공간이자 독특한 세계였습니다.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적 과거나 좌파, 심지어 급진적 개혁을 지향한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매일 ‘테디’ 및 그레텔 아도르노(Teddie und Gretel Adorno)와 접촉하면서 문학적 인물과 지적 연대, 과거의 역사적 인물 간의 정신적 관계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중요하지만 사실은 먼 과거처럼 느껴졌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미 잊힌, 나치 시대 때문에 저희와 단절되었던 바이마르 시대의 지적 전통이 중요 망명자들과 함께 오늘의 일상으로 되살아난 셈이었습니다. 그 당시 서독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우주에 있었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토마스만과 에리카 만(Thomas und Erika Mann) 등의 [성이 아니라]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르며 그들을 오늘의 일상으로 소환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당시에 대체로 생존하고 있었음에도 서독에서는 먼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아도르노 선생의 삶과 역사에 비추어 보면, 이런 지적 분위기를 갖고 있는 존재들은 전혀 놀라운 이들이 아니었을 테지만, 저는 그 이전에는 그들과 적어도 문학적인 관계밖에는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56년 서독에서 발터 벤야민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의 저작은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갓 나온 갈색 표지의 두 권짜리 책을 제 아내 우테(Ute)가 아들 틸만(Tilmann)을 유모차에 태우고 사왔을 때 비로소 접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레텔 아도르노는 저에게 벤야민의 첫 사후 출간 작품에 대한 서평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이 글들은 매혹적이고 빛나는 이미지와 종교적 함의가 가득한 역사철학 개념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몇 년 후에서야 철학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공개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연구소에서의 일상은 제가 알던 어떤 것과도 달랐습니다. 망명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났던 정치적·사회적 고립감, 저희의 정치적 감각으로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보였던 호르크하이머 선생의 신중한 처신, 주지사 진(Georg-August Zinn) 그리고 문화부 장관과 그가 맺은 특권적 관계가 대학 내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는 사실 등 여러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도르노 선생님께서 풍기는 천재적 정신의 체취—그의 명료한 언어, 뛰어난 지능, 생각을 멈추지 않는 정신력—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이 연구소와 그 안의 환경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 그리고 우리 젊은 연구자들에게 그곳의 분위기가 얼마나 특별하고 독특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연구소 특유의 독특한 매너리즘과 때때로 낯설고 권위적인 행위 기대 그리고 미처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감지하고 있기는 했던 지적 보물들 말입니다. [이 대화의 흐름 상] 저는 적어도 호르크하이머라는 인물이 종종 양면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여줬던 이러한 배경적 상황에 대해 언급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때 당시 제가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그분의 학설뿐 아니라, 서독 사회에서는 낯설었던 이 지적·정치적 인물 자체 [및 연구소의 분위기]와 제 자신을 동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 당시 대학 그리고 이 도시 전체에는 어떤 지적 분위기가 있었나요?

 

■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사회학 학위 과정이 처음 도입되면서 이 연구소는 제가 강의를 시작할 무렵에야 비로소 대학에 개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 생활과 깊은 연을 맺지 못했어요. 더 이상 수업을 듣지 않았고 가끔 아도르노의 사회학 세미나에서 조수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철학부뿐만 아니라 경제·사회학부에서도 국내에 잔류했던 교수들과 망명에서 돌아온 교수들 사이에 정치적 배경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시의 지적 분위기에 관한 질문은 매우 흥미롭네요. 프랑크푸르트는 여전히 미군의 중심지였고 은행, 경제, 공항 그리고 서독을 남북으로 잇는 중요한 위치 덕분에 경제와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아내와 하버마스]는 본 대학 학생 시절에도 하리 부크비츠(Harry Buckwitz)가 반공주의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올린 브레히트 극을 보러 가곤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막 태어난 아들과 함께 펠트베르크 거리와 리빅 거리 모퉁이에 있는 37제곱미터 크기의 다락방으로 이사했습니다. 우테와 저는 그 당시 안타깝게 파괴된 이 도시가 곧 ‘구’ 서독 연방공화국의 일종의 지적 수도로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베스텐트 구역과 파울 교회 사이에는 극장, 출판사, 대학, 신문사 편집국이 거리에서나 사회적으로나 가깝게 있었으며 주요 신문사와 출판사가 모여 있었고 1960~70년대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도서 박람회도 열렸습니다. 1950년대 동안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정신은 이런 도시의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도르노 부부를 통해 알게 된 알렉산더 클루게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전이었고, 아도르노 선생님 역시 그 시기에야 비로소 자신의 지적 존재감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이름을 이 도시와 연결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저는 1980~90년대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지막으로 지낼 때까지 그 영향력을 계속 누릴 수 있었습니다.

 

□ 오늘날 선생님께서는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초창기 경험과 아도르노 선생과의 관계 그리고 그분께서 추구한 비판 이론의 한 갈래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1956년 연구소에 오셨을 때와 1964년 하이델베르크에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오셨을 때, 그분의 철학적 근본 의도 중 선생님의 이론적 포부와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부분이 있었나요?

 

■ 이에 관해 답하려면 [전 후 시작된 비판이론이 아니라] ‘옛’ 비판 사회이론이 호르크하이머 선생이 아니라 오로지 아도르노 선생에 의해 설득력 있게 대표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도르노 선생은 1956년부터 1969년 사이에는 사후에 [총서로 출간된] 두 권의 위대한 후기 저작으로 얻은 명성에 걸맞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친 철학자는 아직 아니었습니다. 귀국 이후 처음에는 음악과 문학 이론 작업으로 인해 대중의 주목받았고, 키에르케고르와 후설에 관한 책들을 출판했으며, 이후에는 주로 미학 작업과 라디오에서 문화 비평가로 활동했습니다. 반면 교육 분야에서는 마르쿠제의 저작들과 함께 1937년 『사회연구지』에 실린, 당시 저는 아직 몰랐던 중요한 논문들을 통해 공식적으로 시작된 [이 학파] 전통의 유일한 진정한 계승자이자 확신에 찬 대표자였습니다. 요컨대 그는 아직 『부정 변증법』의 저자는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발터 뵐리히(Walter Boehlich. Suhrkamp 출판사의 수석 편집자이자 문학평론가)는 제게 “당신은 당신이 존경하는 아도르노보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호르크하이머의 작품에 더 가깝습니다”라고 말했는데요, 이런 사정을 고려한다면 이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 고전적 사회이론의 기본 골격에 저는 바로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통해 동참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그 책에서 여전히 권위적인 사회에서 민주 제도가 뿌리내리지 못한 점에 주목하여 [철학적이기보다는 역사‧사회학적인] 상이한 어조로 동참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또한 저는 1970년대에 클라우스 오페와의 논의를 바탕으로 『후기자본주의의 정당성 문제』에서 이 고전적 사회이론의 기본 골격을 다시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사회이론적 배경은 의사소통 행위 이론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제 사고를 지배하고 있으며, 또한 탈형이상학적 사유 계보학의 사회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아도르노는 제가 조교로 일하던 1950년대 후반 직접 가까이에서 접했던 그 시기의 아도르노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부정 변증법』의 저자로서의 아도르노는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당시에는 제가 그분을 그렇게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조교로 있던 시절인 1956/57년 겨울학기에는 그분의 강의를 몇 시간밖에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부정 변증법』이 집필되던 시기에는 저는 이미 젊은 동료로서 저만의 과제들에 더 많이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1950년대 후반에도 저는 —특히 발터 벤야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아도르노 특유의 독창적인 사유 방식이 고전적인 비판 이론의 형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아도르노의 독특한 사유를 미리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1930년대 초의 논문이나 강연들, 예컨대 「자연사 개념 Die Idee der Naturgeschichte」이나 「철학의 시의성 Die Aktualität der Philosophie」 같은 글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렇기에 나중에 그가 쓴 두 편의 후기 저작[『부정 변증법』, 『미학이론』]에서 다시 등장하는 사유의 동기들이 저에게 전혀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그 밖에도 저는 1950년대에 아도르노의 헤겔 세미나에 몇 번 참석한 것이 전부였고, 그것도 그레텔의 권유로 참석했던 것이었습니다. 제 관심은 사회 이론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스스로를 사회학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도르노의 사회학 세미나에서 조교 역할도 맡고 있었습니다. 『부정 변증법』은 아도르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 그 책을 연구하시면서 얻으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 이 저작은 바로 다음과 같은 근본 사유에서 생명력을 얻고 있습니다. 즉, 헤겔의 중심 개념인 ‘전체성’ 안에서 하나의 모순이 묵살된 채로 넘어갔다는 것이며, 그 모순이란 바로 고유하며 대체 불가능한 개별성의 항의입니다. 아도르노는 오직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 즉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개별자(Einzelnen)가 제기하는 항의에 목소리를 부여합니다. 헤겔에게 있어 그러한 항의는 구체적 보편자 속의 하나의 특수성으로 동화되는 대가를 치러야만 ‘지양(aufgehoben)’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유는 제가 이미 아도르노의 부고문에서 강조한 바 있었습니다만, 그 사유의 흔적을 제 나름대로 따라간 것은 제 마지막 저서의 헤겔 장(章)에서였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헤겔 변증법이] 개별자와 추상적 보편자 사이의 대립을 화해시키며 구체적 보편자로의 변증법적 전개가 이루어지는 이 구조[개별자와 보편자의 화해로서의 구체적 보편자로 전개되는 헤겔 변증법적 지양 구조]가 도덕적 전체성의 해체 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사회 이론적 모델로서 나름의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런 모델[헤겔 변증법의 ‘화해’ 개념을 사회적·정치적 의미로 확장시킨 하버마스적 헤겔 해석 모델]은 자본주의 위기의 분석 속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이런 식의 모델[헤겔 변증법을 사회 현실에 적용한 모델]은 자본주의적 위기들을 감안하면서 발전된 모델인데, 그것은 서로 충돌하는 당사자들 사이의 갈등을 명제들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는 논리적 작용으로 단순화하여 그 속에 ‘화해’라는 함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모순 자체도 화해되지 않으면서 고통이 드러나게 된다는 함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아도르노는 특수자와 추상적 보편자 간의 대립이 구체적 보편자 안에서 ‘지양(Aufhebung)’될 때, 이것이 실제로는 ‘강요된 화해’이며 허위라는 점, 곧 헤겔이 말한 전체성 개념이 지니고 있는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측면을 간파했습니다. 『부정 변증법』은 헤겔이 말하는 ‘지양’ 개념 속에서 결국 남게 되는, 절대로 환원될 수 없는 개별성의 잔여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상처받기 쉬운 인간 존재들은 자신을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양된 전체성의 시선에서는 그저 그것에 속한 특수자로만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되돌아보는 관점에서는 그것들은 특수한 존재로는 인식되고 고려되지만,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Einzelheit)이라는 관점-오직 그들이 어떻게 고유한 행위를 수행하는가에서만, 그리고 그것이 자기 이외의 다른 것을 지향하면서 의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직접적으로 의식되는 바로 그 개별성 속에서만-에서는 더 이상 인식되고 고려되지 않습니다. 아도르노는 한편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생애사 속에서 직접 경험한 자기만의 것(Unverwechselbarkeit)과 대체 불가능성 사이의 차이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일종의 위로부터 또는 외부로부터 바라보였을 때의 특수성 사이의 차이를 고집스럽게 주장합니다. 『부정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화해된 전체 속에서 고유성(Einzelheit) 또는 개별성(Individualität)의 온전함이 손상되지 않은 채 ‘지양’되기 위해서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그는 이 제3의 관점[변증법적으로 지양된 전체성의 관점]에서 볼 때 [개별성에 대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고, 또 결코 이행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렇게 [아도르노적인] 변증법적으로 전개된 통찰—즉, 궁극적으로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개별적인 것에 대한 [헤겔 변증법적] 논리적으로 불가피한 훼손에 대한 통찰—을 나는 [부정] 변증법적으로 드러낸 전체성 개념에 대한 통찰을 상호주관성이론의 형식화용론적 개념으로 번역함으로써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아도르노가 가했던 개인적인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피하게 훼손된다는 점에 대한 비판을 헤겔의 ―형이상학적― 의미에서의 인격에만 한정하지 않고, 모든 개별 존재자(alle einzelnen Entitäten)로 일반화하면서 『부정변증법』에서 『미학이론』으로 나아간 다음 단계에는 더 이상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유일무이함의 핵심은 예술 작품이나 자연미의 현상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고, 그걸 언어적이든 이미지적이든 음악적이든 간접적으로나마 포착할 수 있는 건 결국 미학적 비판일 뿐이라고 봤던 거죠.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아도르노와 이론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아도르노의 작업 중 미학이 역사철학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남긴 개별 미학적 통찰들 —그 현상학적인 풍부함— 에서 제가 배운 게 다른 어떤 미학보다도 많았다는 사실까지 변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아도르노가 예술의 현대성, 즉 현대 예술이 어디서 어떤 충동을 받았는지에 대해 해석한 부분은 제 개인적인 경험들과도 깊이 맞닿아 있었어요. 비록 저 자신은 그에 대해 가끔 서평이나 짧은 논평으로만 말했을 뿐이지만 말입니다.

 

□ 사회연구소에서는 경험적 사회학으로서 비판적 사회연구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나요?

 

■ 음, 제 생각엔 이론과 경험적 연구 사이에 분명한 간극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1956년 2월에 도착한 직후 아도르노에게서 처음 받은 ‘업무들’도 그 간극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이미 끝나버린 경험적 연구들에 대해서 뒤늦게 이론적인 ‘서론’을 덧붙이는 식이었거든요. 처음엔 사회정책에 관한 조사를 하였고, 그 다음은 주로 크리스토프 욀러(Christoph Oehler)가 작업했던 이른바 ‘대학 연구’였어요. 전 솔직히 그게 좀 사기치는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아도르노가 만족할 만큼은 잘 해냈던 것 같아요. 다행히 그 연구들이 출판됐다는 얘긴 아직까지 못 들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프리더 벨츠(Frieder Weltz)가 전문적으로 설계하고 수행했던 학생들의 ‘정치적 의식’에 대한 연구에서는 피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좋지 않은 일들이 우연히 겹치면서 제가 그 책 표지에 주저자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사실 연구 설계보다는 결과를 정리하는 데 더 많이 관여하긴 했어요. 이런 개인적인 얘기를 넘어서, 사회 이론이라는 게 원래 추상 수준이 높기 때문에 이론적인 전제들이 개별 경험적 결과와 직접 연결되기는 어렵다는 일반적인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루만과 했던 대화가 기억나네요. 그 사람도 자기 이론이 [경험적 사례에 의한 실증에서가 아니라] 개념사적인 연구로만 뒷받침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쉬워했죠. 하지만 저는 다른 데 더 관심이 있었어요.

제가 고전적인 형태의 비판이론에 대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수정 사항들은 이론 구성의 결함뿐 아니라 역사적 전개가 [과거와] 분명히 달라졌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건 이론이 발전할 때 흔히 있는 과정이죠. ‘의사소통 행위 이론’은 슈타른베르크에서 썼습니다. 1980년대 초 프랑크푸르트 철학 세미나에 다시 복직한 이후로는, 정치이론이나 법이론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면서 [규범적] 사회이론 쪽에는 간헐적으로만 관여했습니다. [규범적 사회이론을 바탕으로 한 현실 문제에 대한 해명은] 대부분 『정치 소논문집 Kleine politische Schriften』 같은 맥락에서 했던 개입들이었고, 전문 학술지에 기고한 일은 드물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레비아탄 Leviathan』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 그리고 『공론장의 신 구조변동』에 실린 제 글이 있죠.

 

□ 아도르노에 대한 전기적인 질문 하나 더 드릴게요. 그의 책 『미니마 모랄리아』는 장기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각성의 경험을 주면서 비판이론에 대해 더욱 깊이 탐구하게 만들곤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미니마 모랄리아』를 언제 처음 읽으셨고, 그 책이 선생님께 어떤 인상을 주었나요?

 

■ 확인해 보니 1951년에 나온 초판본으로 이 책을 가지고 있군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깨달음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미니마 모랄리아』는 한 번 읽고 끝낼 책이 아니에요. 자주 다시 꺼내 보게 되는 그런 책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건 마지막 수필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가장 크게 감동을 주었고, 그것이 제가 최근에 쓴 책에서 다룬 철학이 종교로부터 물려받은 관계(Erbschaftsverhältnis zwischen Philosophie und Religion)를 계속 떠올리게 한다는 점입니다.

 

□ 사회연구소에 계실 때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들과 처음 만났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에 대한 논의가 선생님의 사유와 작업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 어릴 적에 《Psyche》라는 잡지를 처음 읽으면서 프로이트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대학 시절에는 발달심리학과 임상심리학 연구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프로이트에 대해 언급이 거의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1956년 여름 프랑크푸르트에서 알렉산더 미처리히(Alexander Mitscherlich)와 호르크하이머가 주최한 프로이트 강연들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고, 저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FAZ)에 열심히 그 강연에 대해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정신분석학은 국제적으로 전성기를 맞고 있었고, 주요 인물들 대부분은 미국과 스위스에서 왔으며 프랑크푸르트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는 막 『에로스와 문명』을 출간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였는데, 저는 그와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델베르크에서 강의하던 알렉산더 미처리히가 저를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62년에 저희가 하이델베르크로 이사한 후 미처리히 가족과 제 가족 간에는 깊은 우정이 생겼습니다. 우테와 저는 알렉산더와 마가레테 부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들을 매우 아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미리우스 가에 지그문트 프로이트 연구소가 설립된 후 외버만, 오페 그리고 저를 위해 마련되었던 사회학 세미나에 참여-저는 사회연구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하면서 [이들과] 협력하였습니다. 저는 미처리히의 심인성 질환에 대한 기본 가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나중에는 정신분석학에 바탕을 둔 여러 시대 진단서들에 대한 서평을 썼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시절 초기에 저는 프로이트의 대형 판본을 구입하였습니다. 이 공부의 결과는 『인식과 관심』의 프로이트 장에서 다루었습니다. 저는 정신분석의와 환자 간에 이루어지는 분석적 대화 경험들을 의사소통 이론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자아(Ich=Ego), 원초아(Es=Id), 초자아(Über-Ich=Super Ego)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확신합니다. 아마도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이 제 언어 이론에도 길을 열어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식과 관심』에서는 인식론적 문제의식이 중심이었고, 정신분석학은 비판 사회이론이의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할 인식관심(Erkenntnisinteresse)의 모델로 기능[정신분석학이 비판 사회이론의 인식론적 모델로 기능]하였습니다. 그러나 알프레드 로렌처(Alfred Lorenzer)의 연구들이 중요시했던 프로이트의 심층 해석학에 대한 체계적 관심이 저를 이성 개념에 대한 의사소통 이론적 해명이라는 길로 이끌었습니다. 정신분석적 ‘대화’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것은 의사가 환자의 무의식적 동기를 환자 스스로 인식하고 진단이 잘 이루어질 정도로 풍부한 의사소통을 하도록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성 지향적 심층 해석학적 언어 사용의 이런 양식은 단어(Wort)로서의 로고스(logos)와 이성(Vernunft)이라는 의미의 로고스 사이의 내적 연관성에 대한 해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였습니다. 저는 신경증적 병리 해소라는 정신분석적 실천에서 언어적 의사소통의 이성적 구조가 드러나야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정신분석학과 해석학에 대한 초기 관심이 후에 언어행위 이론의 경로에 따라 발전시킨 형식적 언어화용론의 길을 열어 주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후 당신의 새 책에서는 프로이트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만.

 

■ 제가 더 이상 프로이트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보신 것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에요. 사실 제 아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알렉산더 미처리히가 세운 전통을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는 교수이기도 해서 그가 이런 부분을 저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도 제게 프로이트는 여전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얼마 전, 『365×프로이트 365 ‌× ‌Freud』라는 서평집에 짧고 인상적인 글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프로이트가 얼마나 제게 가까운지 새삼 놀랐어요. 저는 그 유명한 문장, ‘칸트의 정언명령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직접적인 상속자다’라는 말을 언급하면서, 프로이트에게서 늘 나타나는 성가신 애매함을 좀 풀어보려고 했어요. 프로이트에게서 자아와는 거리가 먼 초자아(das ich-ferne Über-Ich)는 억압적인 사회 규범의 내면적 대리인으로 등장하죠. 반면에 자아에 가까운 초자아(das ich-nahe Über-Ich)는, 자아가 자기 이익을 주장하려고 할 때, 이성적으로 습득한 도덕적 양심의 목소리로 자아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역할을 해요

이 억압적인 초자아와 비판적 혹은 이성적으로 자율적인 양심의 주체로서의 초자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은 결국 부모의 권위가 내면화되는 과정에서는,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에서는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어린아이의 자아 역시 다른 사람들의 모범적인 행동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힘을 얻는 거죠. 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아이는 처음에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던 부모의 모범성에서 점점 거리를 두게 되면서, 억압하는 아버지(übermächtiger Vater)와 모범적인 아버지(vorbildlicher Vater)를 구분하는 법을 배워요. 이건 나중에 한편으로는 기존 사회의 사실적 권위(faktische Autorität)와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된 권위(moralisch gerechtfertigte Autorität)를 구별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래서 이 둘이 초자아가 하는 ‘말’ 속에서 더 이상 뒤섞이지 않게 되는 거예요. 청소년은 성장 과정에서 사회의 권위와 자기 자신의 도덕적 판단의 권위를 구분하는 법을 배우게 돼요. 이익이 갈등하는 상황이 주어질 경우, 자신의 선택의지(Willkür)를 다른 모든 이들의 이익과 동등하게 놓으면서 갈등을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이죠. 이 규범을 보편화하는 행위가 바로 칸트의 정언명령의 핵심이고, 성인이 된 개인이 스스로 해내야 하는 과제예요. 이런 방식으로 보면 프로이트와 칸트 사이에 일관된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고, 이는 프로이트가 자연주의적 단순화에 빠지지 않도록 해줍니다. 왜냐하면 이성적으로 자율적인 자아의 힘(Ichstärke)이나 이성에 따라 의식화하는 것이 자아 기관(Ich- Instanz: 상황에 맞게 욕망을 조절하고, 도덕적 규범과 욕망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심리적 기관) 기능을 강화하는 치료적 길이라는 점을 철학적으로 해명하지 않는다면, 프로이트의 자아 구조 이론이나 무의식적 동기에 대한 해명 그리고 이를 치료의 목표로 삼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런 개념들의 규범적 의미가 문화마다 다른 가치나 규범에 근거해서도 안 돼요. 프로이트에게서도 이성은 결코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이성이란 근거 있는 통찰력을 의미하고, 이 통찰력은 자아의 힘(Ichstärke)이라는 형태로 동기를 부여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또 성공적인 분석의 결과로 자기 동기를 바꾸는 자기 성찰을 이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2]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2]

 

1. 학문적 생애의 시작 – ② –

 

□ ‘68’ 이전의 시기를 우선 살펴본다면, 선생님의 세대에 속한 독일 철학자 동료들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무엇입니까?

 

■ 돌이켜보면, 전후 독일연방공화국에서 나와 동료 철학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우정 어린 친밀감이나 일정한 거리감을 결정짓는 데, 전문적‧개인적 자질 외에도 하나의 요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철학적 성향에 내재한 정치성이었습니다. 내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세대에는 하나의 정치적 분열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보다 급진적인 돌파구, 새로운 시작을 바랐던 사람들과—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헤르만 륍베(Hermann Lübbe)인데—지배적인 반공주의에 전적으로 기대어 나 같은 사람을 ‘건전한’ 혹은 ‘방어 가능한’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간주했던 사람들 사이의 분열이었습니다. 뮌스터에서는 일종의 마지못한 모더니즘[민주주의를 대놓고 거부하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수용하면서 내심으로는 권위주의적 사상을 추수하는 상태]의 정신 속에서 칼 슈미트(Carl Schmitt)와 접촉하는 일이 재빨리 재개되었습니다. 냉전이라는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68혁명 운동의 양극적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헌법은 좌우 모두 동의했지만 그렇다고해서 보수 진영이 좌파 동료들을 내부의 적으로 의심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우파를 반박할 때 부드러운 말투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치 시절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에서 비롯된 이 공개적인 논쟁은 사실 학생운동이 전개되면서 격화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과 그 편집장 요아힘 페스트(Joachim Fest)에 의해서도 부추겨졌으며,1 철학뿐 아니라 많은 인문학 분야에서도 우리 세대 사람들 사이에서, 즉 우리 선생들이 아니라 우리 또래들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사회학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회학계는 귀국한 망명자들과 옛 나치들이 서로 맞서는 양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회학계의 모임은 이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다. 루트비히 폰 프리데부르크(Ludwig von Friedeburg)의 주도로 1950년대 후반부터 매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남을 가졌던 산업사회학 중심의 ‘젊은 사회학자들’도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뮌스터, 쾰른, 프랑크푸르트와 같이 정치적‧학문 정책적 입장을 뚜렷하게 드러내면서 대립하던 학계 진영들과는 달리, 자신들을 하나의 협력적이고 연대 의식이 있는 세대로 인식하였습니다. 이처럼 ‘학파들’ 간의 대립을 지나치게 극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태도는, 각 진영의 입장 차이가 다양한 정치적 삶의 궤적들과 관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반드시 정치적인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수월하게 가능했습니다. 저는 학문적 경력 속에서 하인리히 포피츠(Heinrich Popitz), 랄프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 레나테 마인츠(Renate Mayntz), 라이너 렙시우스(Rainer Lepsius)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크리스티안 폰 페르버(Christian von Ferber), 크리스티안 폰 크로코우(Christian von Krockow) 같은 플레스너 학파 제자들과도 교류하였습니다. 물론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과도 관계를 맺었는데, 이 분은 좀 더 독립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 울리 베러(Uli Wehler)를 통해 저와 제 아내 우테(Ute)는—그 당시 학문적 친분은 부부 간에도 자연스럽게 형성되곤 했습니다—정치사나 사회사 등 동시대의 역사 주제를 다루었던 역사학자들의 친밀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는 한스 몸젠과 볼프강 몸젠(Hans und Wolfgang Mommsen), 위르겐 코카(Jürgen Kocka),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빈클러(Heinrich August Winkler) 등이 있었습니다.

우리 또래의 모든 동료들은 학문 분야와 무관하게, 성장기 동안 하나의 역사적 단절을 경험했다는 사실에서 공통된 흔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공통의 경험은 하나의 세대를 구성하지만, 동시에 그 경험에 대해 각자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서로 달랐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시대사 연구자들에 의해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주제입니다. 예를 들어,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출간된 저작들을 보면 그 점이 드러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의 역사학 및 역사이론에 대한 혁신적인 기여로부터 아무런 배움을 얻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독일의 전통을 더 이상 여과 없이 계승할 수 없다는 비판적 인식과, 새로운 시작이 불가피하다는 절박한 자각은 주로 자유주의적이거나 좌파 성향의 진영에서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 하지만 전후 시절 젊은 철학자들이 처했던 상황은 이후 몇십 년, 특히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에서 달랐던 것일까요?

 

■ 전후 세대 철학자들의 세대적 특징에 대해 고집스럽게 묻고 계시는군요. 저는 사실 그 세대가 우리 다음 세대, 이를테면 저희의 ‘제자 세대’와 그렇게까지 뚜렷하게 구별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희 세대는 좀 더 동질적인 교육 과정을 겪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문 분야의 세분화가 아직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 같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당시 우리에게 중요했던 고전들은 공통적으로 동일했지요. 왜냐하면 저희는 1920년대의 철학적 거장들을 ‘스승’ 삼아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현상학, 해석학, 철학적 인간학은 독일 관념론의 전통과 더불어 반드시 공부해야 할 분야였고, 칸트와 헤겔에서부터 딜타이, 후설, 하이데거, 그리고 쉘러, 플레스너, 겔렌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요한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학문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한 시대의 정신, 다시 말해 독일 철학이 마지막으로 ‘세계철학’의 지위를 가졌던 그 시기의 사상과 자연스럽게 접속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희는 그러한 ‘세계철학’이라는 이상과의 연을 끊은 첫 세대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스승들의 고양된 관념론적 이상, 혹은 철학만이 [현실과 세계의 본질을 해명할 수 있는 고유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는 태도에서 이탈하였습니다. 단지 좀 더 소박한 작업을 했다는 것뿐 아니라, 철학에 임하는 자세 자체가 비판적 자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대적 태도는 심지어 아도르노나 가다머처럼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스승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물론 누구에게는 약하고 누구에게는 더 강하게 드러났지만요. 게다가 저희는 독일의 전통적인 철학 커리큘럼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영미 철학에서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이를테면 분석적인 논증 스타일, 오류 가능성에 대한 자각, 경험적 사실의 중요성에 대한 민감성, 사회과학에 대한 개방성 등입니다. 저희가 어느 정도 자기 주도적으로 수행했던 학습 과정의 이정표가 되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카르납과 빈 학파의 수용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수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중 몇몇에게는 퍼스와 프래그머티즘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치와 정치철학뿐만 아니라, 철학의 핵심 영역들에서도 서구[영미권]로의 개방이 일어나고 있었던 셈이지요.

 

□ 두 학기는 괴팅겐에서 그리고 한 학기는 취리히에서 공부한 후 본에서는 박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 머물렀다는 점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본에서 철학 공부를 할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점이 있었나요?

 

■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는 많은 우연한 일들과 몇 가지 의식적인 중요한 선택들로 이루어집니다. 괴팅겐에서는 니콜라이 하르트만에게 지루함을 느꼈고, 그곳에서는 인간 관계도 얻지 못했습니다. 차가운 북부 지역보다는 라인강 인근의 본이 더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본에서 친구가 된 굼머스바흐 출신의 만프레드 함비처한테 본의 극장 그룹에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들었을 때 매력을 느꼈죠. 이번에는 공부할 장소를 개인적인 이유로 선택한 셈이었어요. 그래도 에리히 로타커(Erich Rothacker)는 적어도 이름난 철학자긴 했고, 그의 저서들에 대해서도 막연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인상은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치 초창기 멤버였다는 사실은 나중에 차츰 알게 되었지만 이런 우연한 선택이 행운을 만나게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곳에서 우테를 만나 이후 제 삶을 결정지었고, 로타커의 수요일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학문적으로도 매우 자극적이고 배울 점이 많은 토론 환경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타커만의 고유한 철학 이론을 배우지 못했지만, 그의 강의에서는 독일 역사학파의 광범위한 전통을 접할 수 있었고, 심리학 세미나에서는 1920년대 이래 철학적 인간학 논의의 기반이 되어온 풍부한 실증적 연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철학 세미나에서는 ‘사유 그 자체’가 마치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토론이 이루어졌으며, 이때의 경험 덕분에 언어철학에 대한 관심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사회학은 아직 관심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 그곳에서 오랫동안 함께 연구하셨던 동료 칼-오토 아펠을 만나셨죠. 두 분께서는 이론적으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슷한 독서 경험과 체계적 문제 의식을 가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셨습니다.

 

■ 그는 이미 박사 학위를 마친 연장자로서 전쟁 동안 병사로 복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와의 관계가 완전히 비대칭적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개인적으로 가까워졌는데, 저는 박사 과정 때 그의 옆방에 배정받았습니다. 그는 저에게 멘토와 같았고, 저는 그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그는 『존재와 시간』을 실존주의적 색채가 가미된 칸트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저에게 매우 잘 맞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 책을 이미 괴팅겐에서 읽었죠. 아펠은 결코 특별히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를 통해 저는 철학이 현재의 세계관과 자아 인식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살아있는 본보기로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은 삶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펠의 시대 진단은 제가 아침 마다 비판적으로 읽던 FAZ(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부비에 서점에서 구입한 학생용 정기 구독권으로 읽었는데요—에서 자주 접했던 도발적인 시사 문제들과는 아직 꽤나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가 1953년 여름 어느 주말에 아펠이 내 손에 쥐여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을 읽은 것이, 철학 공부와 불타는 정치적 시사 — 하이네만 대 아데나워! — 사이를 가로막던 벽을 단번에 허물어 버렸습니다.2

 

□ 아펠과 맺으신 우정 어린 관계는 일찍 시작되어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특히 1980년대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두 분이 각각 담론윤리를 발전시키던 시기에 다시 아주 긴밀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 우리 사이의 참으로 길고도 복잡한 관계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 속에 아펠과 칸트의 영향이 지나치게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당신의 추측에 답하기 위해서도, 본 시절 학생과 멘토로서의 관계[0단계]는 이후 진정한 의미의 동료이자 우정 어린 관계로 발전한 세 개의 단계[1~3단계]와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1954년 박사학위를 마친 뒤, 나는 아펠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나는 프랑크푸르트로 갔고, 아펠은 건강상 중단하곤 했던 그의 교수 자격 논문을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그 끊어진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것은 거의 우연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철학 강연에 초청받았으나 그 당시 이미 나 자신을 사회학자라고 여기고 있었기에 이를 수락하지 않았고, 대신 아펠에게 초청을 넘겼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다시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리가 나중에 동료가 된 이후 —1960년대에는 각각 하이델베르크와 킬에서— 철학적 작업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교류로 이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손편지들 중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이 편지들이 남았더라면 우리가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를 따로따로 추구하던 시기에 서로에게 끼친 영향을 —저에게는 상호적인 것으로 보이는— 보여줄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 시기 동안 아펠과 나는 철학 작업의 의도에 있어서 가장 가까웠습니다. 한편으로는 ‘인식 관심 이론’이 그러한데, 이 이론은 일종의 반성(reflection) 양식을 지향하며, 우리는 이때 정신분석학적 대화를 그 모델로 삼았습니다. 아펠은 실제로 정신분석을 받은 적이 있었던 듯하며, 나의 경우에는 학생 시절 『Psyche』 지를 읽으면서 지니게 된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프로이트 강의3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60년대 후반부터 담론 윤리(diskursethik)에 대한 고찰이 전개되었고, 저는 그 기본 사상을 『정당화 문제 Legitimationsprobleme』 제3부에서 “실천적 질문의 진리능력(Wahrheitsfähigkeit praktischer Fragen)”이라는 제목 아래 처음으로 발표했습니다.4 이러한 점에서 에를랑겐(Erlangen) 학파와의 논의도 중요했습니다. 아펠과의 관계에 있어 하나 고려할 점은, 제가 언제나 아펠보다 더 빨리 글을 출판했다는 점입니다. 너무 성급하게도요. 예를 들어 저는 아펠에게 『철학의 변형 Transformation der Philosophie』이라는 그의 두 권짜리 대작을 수년 동안 출판하라고 독촉해야 했습니다. 이런 비대칭적인 출판 속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긴밀한 사유 교류에서 그 결과물에 대해 단 한 번도 ‘선점권’ 문제는 불거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초 제가 하이델베르크에서 교수직을 막 시작하던 시기에 아펠은 저보다 훨씬 더 깊이 분석적 언어철학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저작들이 중요하다는 점을 제게 처음 일깨워 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저는 하이데거의 존재사 개념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유물론적 사례와 경험적 고찰로 그를 몰아붙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실천적 칸트 해석과 담론 이성 개념을 향해 서로 접근해갔습니다.

제 기억에 두 번째 단계는 1970년대 초에 종결되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아펠은 내 책 『인식과 관심 Erkenntnis und Interesse』의 한 지점에 대해 아주 정확하고 결정적인 비판을 했습니다. 즉 저는 반성(reflection)의 두 개념을 충분히 구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은 구분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생애사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된 자기반성으로서의 ‘반성’,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하고 행위하며 말하는 방법에 대한 보편적이지만 수행적으로만 현전하는 ‘방법지(Wissen-wie)’에 대한 이성적 재구성으로서의 ‘반성’5. 이 구분을 불충분하게 하는 바람에 저는 세 번째 인식 관심, 즉 ‘해방적(emanzipatorisch)’ 인식 관심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설명하는 체계적 난점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비판을 『인식과 관심』의 다음 판 후기에 즉각 반영했습니다.6

우리의 두 번째 관계 단계는 제가 공부를 마친 후 시작되었는데, 이 두 번째 단계는 다시 또 두 협력의 시기로 나뉩니다. 칼-오토 아펠의 프랑크푸르트 임용과 동시에 저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습니다. 두 협력 시기 중 첫번째는 제가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집필하던 슈타른베르크 시절이었습니다. 아펠이 슈타른베르크를 처음 방문했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 반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서로를 안 지 20년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그 당시엔 다들 그렇게 했습니다.

1970년대 우리의 서신들에는 아마도 촘스키-그의 중요성을 나는 1965년 첫 미국 여행에서 깨달았습니다-, 오스틴과 설의 발화 행위 이론 그리고 그에 기반해 전개된 보편 혹은 형식 화용론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제 입장에서는 사실상 ‘피할 수 없는’ 이성적 담론과 의사소통 행위의 화용론적 전제를 아펠은 언제나 초월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 점에서 우리 사이의 견해차가 분명해졌습니다. 여기서 이미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문제와 관련된 더 깊은 수준의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것이 일종의 ‘약한’ 자연주의(ein schwacher Naturalismus: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기는 하지만 인간의 행위를 뇌과학 등과 같은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환원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의 자율적 규범 구조를 고려하는 자연주의적 입장7에 속하는 것이라 본 반면, 아펠은 언어적 전회 이후에도 여전히 ‘제1철학’8의 개념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그의 입장은 칸트적 지성계의 진지한 탈초월화(detranszendentalisierung)와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탈초월화란 이성이나 도덕을 형이상학적·초월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현실 세계 안에서 해명하려는 시도. 하버마스가 보기에 아펠은 논증의 최종 정당화(Letztbegründung)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탈초월화를 지향하는 아펠의 본래 의도와 충돌한다고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펠은 제가 『또 다른 철학사』에서 이끌어낸 결론들을 매우 불만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슈타른베르크 시기를 지나 프랑크푸르트 세미나에서 함께 강의하던 네 번째 단계, 곧 1980년대의 논의 시기를 규정하던 우리 둘의 입장 차이와 유사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도 존 설, 찰스 테일러, 딕 번스타인 등과 함께 진행한 세미나들에서도 자주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이 논의들은 기존의 입장 차이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 데 그쳤고, 진리 개념, 궁극적 정당화 문제 그리고 아펠이 담론윤리에 추가하고자 했던 ‘B부분’과 관련해도 그 차이가 구체화되었습니다.9

저는 제 박사논문 서론에서 청년 헤겔학파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사유의 흐름을-당시에는 그렇게 불리지 않았던- ‘탈초월화’라는 주제로 진지하게 수용했습니다. 반면 아펠은 이를 ‘제3의 패러다임 속 제1철학’이라고 부르며 끝까지 고수했습니다.10 이제 당신의 질문 속에서 제가 감지한 의심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즉 해석학과 담론윤리, 곧 ‘헤겔보다는 칸트’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과 잘 어울리지 않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를 ‘다른 진영’으로 분류하려 한다는 것이죠. 저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을 이어갈 것이냐, 갱신할 것이냐, -혹은 단절할 것이냐- 하는 논의에 결코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은 새로운 역사적 맥락과 새로운 인식 아래에서 적절히 수정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이어지는’ 것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1937년 『사회연구 저널 Zeitschrift für Sozialforschung』에 실린 호르크하이머와 마르쿠제의 선언적 논문들이 설득력 있게 전개했던 이성 개념과 합리적 자유의 개념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습니다. 아도르노 역시 벤야민적 동기를 특유의 방식으로 해석하면서도 이 개념에 충실했습니다. 저의 사회 이론 역시 –바뀌어야 할 것들은 바꾼다는 생각에서 mutatis mutandis– 이 본래의 개념 틀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 탈형이상학적 사유라는 개념에 대한 언급은, 다시 본 시절로 돌아가 귀하의 셸링 독일 관념론의 문제 지형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한 선생님의 박사 논문으로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이것이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옹호하게 된 일종의 전제였다고 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일까요? 다시 말해, 청년 헤겔파로부터 자극받은 사유의 충동이 셸링과 이론적으로 대결하면서 비롯된 것이고, 특히 역사 속에서 절대자를 찾으려 했던 셸링의 시도를 선생님께서는 실패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선생님께서 당시 셸링 사유의 양면성을 지적하셨던 만큼, 그의 사상 안에는 당신으로 하여금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계속해 나가게 만든 어떤 계기나 자극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 이 질문은 놀랍지만 흥미롭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코 터무니없지 않은 질문입니다. 학업을 마쳤을 때, 저는 어떤 결정적인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철학은 우리의 상황에 대해 더 깊이 해명하고자 하는 제 관심을 만족시키는 알맞은 길이 아닌 것 같아서 저는 철학을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당시 저는 현 상황을 정치적 관점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춰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이고 경험적인 해명을 기대할 수 있는 관점에서는 사회학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사회학을 정식으로 공부하려는 생각은 없었고, 당시 몇몇 대학에서만 교육이 재개되었던 사회학 분야에 옆문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학창 시절에 익히 알고 있던 마르크스주의 문헌들은 칸트와 헤르더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길, 즉 철학에서 사회이론으로 이어지는 길이 얼마나 짧은지 보여주었습니다. 하인리히 포피츠와 랄프 다렌도르프 역시 마르크스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그와 같은 시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또한 헬무트 셸스키는 한때 독일 나치당원이었지만 빠르게 태도를 바꾸고 후학을 구하던 인물로 제가 본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지 몇 주 만에 점심 식사에 초대하여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후 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연구 조교로 일하며, 사회학 공부를 놓친 부분을 마치 현장에서 보충하는 듯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1960년대 교수 시절에도 당시 조교였던 클라우스 오페와 울리히 외버만과 함께 공동 세미나를 하면서 많은 사회학 지식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제가 로타커의 지원을 받아 시작했으나 프랑크푸르트에 두고 온 ‘이데올로기 개념’에 관한 독일연구재단(Deutsche Forschungsgemeinschaft) 연구 과제를 통해 탐구하기 시작한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제가 사회학이라는 방향을 택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의 근본 문제들로부터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셸링의 문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셸링에게 제기된 문제인 ‘역사 과정 속에 고정된 절대자’에 관한 문제를 계속해서 다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쩌면 우회로를 통해서라도 오늘날까지도 제가 끊임없이 씨름하고 있는 문제로 볼 때 같은 주제로 다시 돌아왔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성의 역사적·언어적·사회적 구체화를 숙고하는 탈형이상학적 사유에서도 이성의 보편적 타당성 요구에 위배되지 않도록 개념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자라는 핵심은 진리의 절대성을 절차적으로 유동화한 [탈형이상학적] 보편성 요구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저의 철학사 연구 역시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의사소통 실천은 진리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국 역사적 존재 방식의 내적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논지, 즉 “내적 초월(transzendenz von innen)”이라는 개념으로 귀결됩니다. 이 용어를 제가 처음 쓴 것은 제 기억이 맞다면 1980년대 말 시카고에서 신학자들과 함께 한 학회였습니다.11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