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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슈티르너: 에고이즘의 위대한 철학자-6(최종) <슈티르너 이후>, <역사적 결론>,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슈티르너 이후>, <역사적 결론>,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박종성(한철연 회원)

 

 – 차 례 –

  • 서론
  • 헤겔 좌파
  • 헤겔 좌파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 정치적 슈티르너
  •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 슈티르너 이후
  • 역사적 결론
  •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Svein Olav Nyberg [노르웨이 아그데르 대학교(노르웨이어: Universitetet i Agder) 부교수]의 글, Max Stirner: The Great Philosopher Of Egoism(2021)을 번역한 글입니다.

 

<슈티르너 이후>

스코틀랜드계 독일 시인 존헨리 맥케이(John-Henry Mackay)는 오늘날 슈티르너에 관해 알려진 대부분의 내용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맥케이는 슈티르너에 대한 정보와 그가 쓴 내용을 추적하는 데 몇 년과 막대한 재산을 사용했습니다맥케이 자신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였으며슈티르너 역시 그렇게 해석했습니다나는 이것이 슈티르너의 경우에 해당되는지 의심스럽습니다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논의를 위한 것입니다슈티르너는 어떤 경우에 아나키스트특히 맥케이와 같은 개인주의 아나키스트에게 영감을 주었지만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 같은 사회적아나키스트(social-anarchist)도 막스 슈티르너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슈티르너는 세기가 바뀌면서 두 번째 명성을 얻었습니다게오르그 브라데스(Georg Brandes)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를 발견하고 홍보했습니다니체의 팬들은 니체의 선구자를 찾고 있었고이를 슈티르너에게서 발견했습니다따라서 브라데스는 1902년에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덴마크 판의 서문을 출판하고 썼을 때 시장을 확보했습니다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은 브라데스와 자주 서신을 교환했기 때문에입센이 슈티르너의 영향을 받았다고 가정할 이유가 있습니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로서의 슈티르너의 명성은 금세기 초 미국의 대표적 자유주의자를 이끄는 벤저민 터커(Benjamin Tucker)가 1907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첫 번째 영어판을 출판했을 때 이를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겼을 때 더욱 강화되었습니다나중에슈티르너는 대부분 아나키스트 정치 철학자로 여겨졌습니다그러나 비평가 허버트 리드(Herbert Read)에 따르면에리히 프롬(Erich Fromm), (Jung),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및 몇몇 20세기 실존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슈티르너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저는 이러한 다양성이 슈티르너를 기쁘게 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역사적 결론>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출판된 후 막스 슈티르너가 상상했던 방식대로 상황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이 작품은 무겁고즉각적 영향을 미쳤으나, 1848년 정치적 불안과 혁명으로 인해 그와 동시대의 청년 헤겔주의자들의 관심이 사라졌습니다슈티르너를 포함한 대부분의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나 다른 면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슈티르너 자신도 실패한 투자로 곧 전 부인의 전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1856년에 죽기 전에슈티르너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최초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했고스미스를 대중화한 프랑스인 장 바티스트 세이(Jean-Baptiste Say)의 일부 책도 번역했습니다슈티르너는 죽을 때까지 여러 휴게실과 회의실에서 급진적이고 충격적 사상을 언급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1856년 6월 25일 슈티르너는 곤충에 쏘인 후 감염으로 사망했습니다그와 함께 유일한 세계가 죽습니다.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인간의 본질”(the essence of Man)에 대한 슈티르너의 공격은 페미니스트와 가부장제주의자 모두가 가정하는 성 역할(gender roles) 비판에 깔끔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양쪽 모두 여성” 무엇인지에 대한 규범적 견해를 유지합니다예를 들어여성은 근육질일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여성이 강하면 가장들은 그녀에게 여성적이지 않다”, 심지어 “남자같”unwomanly고 꼬리표를 붙입니다이 모든 과정에서 간단한 건강 검진을 통해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80년대의 비슷한 추악한 예는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가 총리였을 때입니다페미니스트들은 그녀가 그들 중 하나인 여성이 아니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녀는 남자였다.” “인간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경향을 따라가면우리는 젠더 본질주의(gender essentialism)와 미리 부여된 젠더 역할(pre-assigned gender)이 단순히 자기 모순적(self-contradictory)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그녀가 여성의 본질과 역할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여성이기를 중단하는 것은 일탈적 여성이 아닙니다더 이상 사실이 아닌 것은 여성의 본질과 역할입니다.

페미니즘은 아마도 세기 전환기 영국의 저명한 개인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였던 도라 마스든(Dora Marsden)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끌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수사법과 생각은 슈티르너와 매우 유사하며 그녀는 이 연관성을 명시적으로 확인했습니다.

이 놀라운 여성에 대해 더 잘 알고 싶다면 다음 웹페이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http://pierce.ee.washington.edu/~davisd/egoist/marsden/

하지만 조심하세요. 마스든과 그녀의 수사법에 비하면 오늘날의 페미니스트들은 지루한 관료처럼 보일 것입니다!

 

– 끝 –


옮긴이 박종성: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공역)이 있다. 논문으로는 「유일한 사람의 사랑」,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고 건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항 대립의 세뇌와 자연에서 교육 [천 하룻밤 이야기]

이항 대립의 세뇌와 자연에서 교육

2025 07 22 대서(大暑) – 소서에 무척 더웠으니 대서에는 좀 덜하려나…

 

류종렬(한철연 회원)

 

한 나라에서 상반된 견해들과 여러 견해들을 통합하여 일정한 방향을 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정당은 자기의 방향을 가지고 나간다는 것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선언한 무리들의 모임이다. 한 모임 안에서 공통적 담론을 가지고 있듯이, 다른 모임(정당, 시민단체)에서는 다른 공통적 담론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19세기 후반 이래로 상업자유주의자(약탈과 수탈을 일삼는 liberaliste)와 사회자유주의자(프롤레타리아 지도, 인민주권, libertaire) 사이에 대립은 서로 담을 쌓아 놓듯이 배제하고 배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민자유주의자들(리베르떼르)은 스스로 공적인 일들을 중히 여기고, 인민들의 삶의 터전(인프라)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고 하면서, 잉여노동을 착취하여 상품을 팔아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타문화를 짓밟는 상품자유주의자들을 경멸한다. 이러한 대비는 마치 인도주의자(l‘humanitaire)가 인문주의자(l‘humaniste)를 경멸하는 것과 같다. 인도주의자들은 자연 속에서 인간이 활동하고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루소주의자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비해, 인문주의자들은 오랜 유일신앙에 세뇌되어 인간의 영혼은 하늘나라(소천)로 간다고 믿는다.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나 평등하게 돌아간다고 할 때, 신 없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 돌아간다고 말하기 이전에 삶의 터전에서 공공을 우선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껏 일하고, 어릴 때나 늙어서나 노동력이 없을 때는 필요에 따라 인도주의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런 인도주의자의 구호, “각자는 역량에 따라 각각은 필요에 따라”라는 구호가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로 퍼져나가서 맑스가 말년에 이 구호를 중히 여겼다.

사회에서 상반된 담론을 전개한다는 것은 정치 경제적 사건들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본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저항과 항쟁에서 기득권의 반동은 거세었고, 두 번의 세계 대전에서 반동들은 인민의 발현과 자유를 억압하고 새로운 제국주의를 형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세계사를 읽는 방식이다. 철학사에서 보면, 참주제(또는 황제제)에 대한 인민의 저항은 수천년 동안 있어왔다. 아마도 신석기 이래로 이런 저항에서 어쩌다가 간신히 아테네에서 민주제라는 것을 실험했다고 본다. 이런 데모스(인민)의 저항, 또는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인민의 저항은 끊임없이 있어왔다.

벩송도 기득권의 저항(반동)에 대한 저항이 도덕감의 발현이라 보았다. 기득권은 이익에 눈이 멀어 도덕감이 없다. 그 도덕감이란 연민이며, 인간이 인간과 함께 산다는 데 공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도덕감이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부터라고 말하는 것은, 서양사에서 단지 “빛들세기(les Lumiere)”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있었다. 그럼에도 인민의 저항에 대한 반동은 거세었다. 혁명에 대한 반혁명은 담론의 상층(주류)을 형성하며, 형식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진리를 구하는 지식, 사회의 제도를 공고히 하여 반동의 지위를 구축하는 국가주의, 그리고 철학적 전통에서 자연의 배후를 가르쳐주는 형이상학(자연배후학)을 하나의 통합으로 구축하려 하였다.

이런 세 패거리로부터 사라져가는 듯했던 종교와 도덕의 배후학으로 도덕형이상학(도덕 배후학)을 논리 체계방식으로 새로이 구성하고 구축하였다. 자연배후학이 유일신앙(국가주의)과 황제제(참주제)의 배경이 되었듯이, 이런 도덕배후학은 제국주의와 제국의 형성의 토대로서 자임하였다. 이런 상반된 담론이 같은 평면위에 놓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다. 그럼에도 유일신항의 변증법은 하나의 평면위에 세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1848년 공산주의 선언문 이래도 두 담론은 같은 평면위에 놓고서 다루는 것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항목 대 항목의 대립은 지구상을 어지럽게 하였다. 냉전시대를 거쳐서 제국의 시대인 지금도.

적어도 19세기 후반에는 항목 대 항목이라는 이항 대립을 다루는 방식은 구시대의 산물로 밀려나는 듯하였다. 왜냐하면 수학과 미시물리학은 이원적 대립이 무의미(파라독사)임을 알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사도 다항들의 관계이며, 그 상황과 사건들 속의 개인도 다양체와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자연을 대상으로 바라본 자연배후학(메타피직)이 아니라 자연이 자기 생성과 자기 전개를 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생성론(자연 되기론, 우주발생론)이 담론으로 퍼져가는 듯하였다. 그럼에도 제국은 악의축과 배제의 담론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추가령지구대 이남에서 다른 담론을 전개하는 이들을 마치 개돼지취급하거나, 또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이를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계엄을 하겠다고 하니, 인민의 저항에 대한 저항은 거세고도 지칠 줄을 모른다. 왜 그럴까?

학문을 제대로 해야 하는 이가 없는 나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탄하면서, “자네들 열심히 공부하게”라는 박홍규 선생님은 여전하게 아직도 멀었어 ‘열심히 공부하게’ 하실 것같다.

서양학문사에서 논리학이 중요 지위를 차지하는 한에서 자연은 대상이었다. 인간의 인식과 지식 체계가 대상에서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일부에서부터도, 타문화에서 공자도, 노자도, 싯달다도 자연은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의 일부이며 또는 우리를 낳은 진솔한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도구로 삼는 학문들이 상위를 차지한 것은, 인간의 도덕감과 신앙심보다 이기심과 탐욕을 상위에 올려놓은 유일신앙자와 참주제 옹호자들이었다.

자연을 대상화하는 방식을 학문적으로 틀을 세우려고 한 이는 그 자신의 의도와 달리 플라톤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플라톤은 대립된 두 항목 사이를 다루려고 한 것이라기보다 두 항목 사이에 상호 연대성과 상호연관을 주목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럼에도 이 두 항들 사이의 경계가 분명해야 학문들이 성립한다고 여긴 것은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였고, 그리고 세월이 지나 이를 과도하게 한쪽을 경계 밖으로 몰아, 무 또는 악 또는 악마로 취급하는 방식으로 담론을 전개한 것이 유일신앙자들이었다. 플라톤의 진솔한 의도와 달리, 상층의 주류세력이 인민을 지배하려는 방식으로 담론을 분할하여 지배체계로 만든 것은, 플라톤을 곡해한 플라톤주의자들이라 한다.

이항 대립의 담론이 아니라 다항연관의 담론이라고 여긴 플라톤은 다항들 사이에서는 어느 것이 더 맞다 틀리다는 것을 따지기보다, 서로들 간에 공감을 통한 공평한 조화를 바랐다. 그에게서 정의(la justice)는 계산이라기보다 조화이다. 그런데 그의 제자에 이르면 양적 계산에 의한 몫에 맞는 분할의 평균을 정의로 여긴다. 이런 평균적 정의는 편의와 유용성이 있다고 하는 근대에서 통용되었고, 제국주의 시대에 선진 국가와 식민지 영토 사이에 평균화 방식으로 쓰이기도 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리베랄리스트 지식분자는 이항 대립을 통일시킬 변증법이란 담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최고 수준에서 변증법이 세계의 평준화(통합화)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나아가 공상으로 날개를 펼쳤다. 제국이 지배하는 지구는 오지 않았다. 이제 그 날개에 인위적 정보체계의 디지털을 이용하여, 인공지능이 공상에서 망상으로 치닫게 하는 파라노이아의 길을 걷고 있는 형편이다. 제국이 세계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이항 대립에서 다른 편을 배제하고 무화시키고 있으면서도, 배제하는 편이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고함을 치고 담론장은 열려있다고 해도, 배제 된 쪽에서는 공감도 감흥도 없다. ‘나 이외’에는 이라는 배중율의 전제를 버리지 않은 유일신앙에 매여있는 한, 자기 동일성에 빠져있는 불변의 동일률을 신앙으로 삼는 파라노이아에 불과하다. 벩송이 말하기를 한 신부가 담론을 하는데 성당 안에서 웃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지역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학문에서 제시한 담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그 담론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사유하는 자이다. 이들 사이의 대립이 실재하는가?

*

고대 그리스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연결성이 있다고 믿고 해결하려하였다. 그것은 영원과 시간 사이의 해결방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원과 시간의 논리적 구별과 대응관계보다, 시간 속에서 살다가 죽어서 영원으로 갈 것이라는 것이 훨씬 더 분명하고 설득력 있다고 여긴다. 이는 마치 꼬마애가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을 믿고 지내는 것과 같다. 영원으로 간다는 것이 자연이 아니고, 유일신이 되면서 하늘과 땅 사이의 연관의 설명은 더욱 복잡해지고 더 많은 담론들로 증명하려 하였다. 신앙자는 단순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복잡한 것은 믿음이 없다고 하면서도, 뭐 그리 많은 담론을 만들었던가!

말하자면 얼마나 많은 죽은 자들이 또는 얼마나 다양한 천사들이 산자들에게 목소리와 말씀을 전해야 영원한 하늘의 이야기를 믿겠는가? 그 많은 이야기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 영원 속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떤 담론에도 없다는 것도 안다. 무려 천년이 지나서야, 영원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 영원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라고 물으면서 솔직하게 그게 말 뿐이지 라고 한다. 그 믿음은 인간이 말하는 목소리를 기호화하여 대상화하고 그 대상화를 실재성으로 믿는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단지 이름뿐인 천국과 천사와 악마를 믿고 자시고 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담론을 형성한 것이 유명론이다. 이 이후로 더 이상 보편자의 실재성을 다루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항 대립자들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보편”이라 용어를 쓰고 일반화가 넓어지면 보편이라 주장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보편은 상대성에 의해서 이미 우주가 하나이다. 자연은 자기 발생적이고 변화하는 하나이지만, 자연을 대상으로 여기고 조작가능하고, 지속가능하게 쓸모 있는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면서, 대상으로서 자연이 보편이라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그러나 천만에. 사회와 연관해서도 미국에서 보편화가 러시아에서도 중국에서도 보편인지 묻지 않듯이, 그리고 남녘에서 보편이 북녘에서도 보편인지도 묻지 않고, 남녘의 보편이 북녘의 보편이어야 한다고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세뇌된 자들에게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까? [그럼에도 착한 도덕형이상학론자들은 보편이 변증법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벩송은 네오스콜라주의라고 한다.]

이 부분의 일반화를 세계와 우주의 보편화로 환원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자를 벩송은 착각하는 자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보편화 주장자들은 망상에 사로 잡혀있다고 해야 한다. 학문에서 반역이란 생성의 변역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변역을 반역이라 부르는 자들에게 있다. 반역은 망상을 진리체계로 여기는 곳에는 어디에나 있다. 김건희-윤석열의 빨갱이 타령은 망상이듯이, 리박스쿨에서 이승만, 박정희의 정당성을 복원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로 이어지는 계열의 담론이 망상의 담론장이라고 하면, 이들을 믿는 신앙자들은 펄쩍 뛰면서 아스팔트로 나가서 성조기와 다윗기와 더불어 태극기를 흔들 것이다. 인민의 반역, 인민을 반역으로 몰려고 덤벼든다.며칠 전 인천공항에서 ‘윤어게인’을 주장하는 이들이 미국인 모스탄 교수의 입국에서 환호를 하는 장면은 아스팔트부대와 같았다. 담론의 장에서 대립된 두 항을 다룬다는 것이 배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음양처럼 서로 대립되지만 상호조보관계이며, 밤낮과 계절처럼 순환관계이고, 남녀처럼 서로 상보관계이며, 교류전기의 0과1처럼 교대관계로서 원활해야 빛(전기)도 정보(디지털)도 창조하는 것과 같다.

이항 대립으로 하나의 절대와 완성자를 주장하는 신앙이 세뇌시킨 오랜 역사에서, 프랑스철학은 18세기(빛들세기)에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앵글로색슨 철학은 상층이 이 대립을 즐기면서 부를 축적하며, 세계에 전쟁을 통해 공포를 심으며, 상위를 유지하고자 하는데 봉사하고 있다. 21세기에 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 미합중국이라는 제국일 것이다.

이런 공론의 장이 있다고 여기는 철학자들로서 롤즈와 샌델의 정의가 배타적인 논리위에 있는지를 알려면, 이들의 논리가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칸트가 자연형이상학을 뉴턴의 천문학과 갈릴레이 물리학 이후로 우주의 상대성 위에 세우는 선천적 종합판단은 가능하였지만, 자아, 세계, 이상의 인식을 상대성을 두게 되면 이분화에서 상층이 인민을 지배하는 데 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니 인간이 논리로 판단(심판)하는 생활에도 (도덕)형이상학을 자연형이상학처럼 세워야 했다. 도덕감과 신앙심도 자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앙의 규범과 정언명법아래에 세워야 한다. 이 도덕형이상학에서는 루소이래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없어지고, 지고지순의 하늘의 별로 돌아간다는 플라톤주의의 선의 이데아로, 그리고 경건한 신앙주의로 돌아갔다. 이런 맥락을 이어 앵글로색슨의 도덕론은 엄격한 명법주의에서 국가와 천륜을 동일시하는 논리로 윤리학의 전형을 이루고자 한다. 롤즈, 센델, 하버마스는 같은 담론장의 놀이터의 노는 것은 자기가 잘하는 운동 경기에서만 노는 어느 운동선수와 같다.

이항 대립에서 승자를 찾는 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이를 이용하여 배중률을 가장 잘 사용한 이들이 유일신앙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언제나 자기주장의 완전, 보편을 말하기 위해 전쟁을, 그리고 그 진리를 증거하기를 주장하면서 죽음을 불사하게 만들면서, 죽는 자에게 천국으로 유혹하는데, 이를 세뇌라고 부른다. 이런 사적이익 추구자들이 인민의 도덕감에 동의를 구하고자 자신을 기복신앙으로 포장하며 신앙심이 깊다고 한다. 그 신앙심이 세뇌된 것으로 탐만치에 빠진 것이다. 이를 표현과 이미지로 구출해주는 것도 불교 성직자, 카톨릭 성직자, 기독교 성직자들이다. 왜 이들이 피에 젖은 권력자들에게 기도를 해 주겠는가. 이들 성직자들의 움직임도 인민을 세뇌시키는 한 방식이며, 잠시 지나가는 방식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이런 세뇌를 깨닫게 하는 것이 지속적인 학습이 필요하다. 어떻게,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감옥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플라톤은 슬픔보다 더 큰 상실감이 있지 않았을까? 당대의 여러 담론들 여러 갈래였을 것이며, 용어상으로는 시대가 지나서 성립되었겠지만, 다양한 담론의 논의 방식들이 생겨났으리라 : 논쟁술(sophistique), 논박술(éristique), 대화술(dialogue)과 산파술(la maïeutique), 논리학의 변증술(dialectique, Τοπικά)과 해석론(l’interpretation, Ἑρμηνείας)」, (법정의) 변론술(apologique), 웅변술(rhétorique, 수사학), (종교의 옹호로서) 호교론자(apologiste, le apologétique), 연설가(l’orateur) 등이 있었을 것이고, 중세에는 정해진 원리와 교리의 일반화(보편화가 아니라)로서 설교가들(les prédicateurs)들과 평결론자들(les sententiaires)도 있었다.

플라톤은 교육의 필수성을 느꼈을 것이고, 폴리테이아편에서 국가 안에서 개인의 교육에 대해 쓰면서 어린이에게 음악과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그리고 우주와 터전의 연대에 대한 교육으로 티마이오스편에서 우주 발생론을 전개하였고, 그리고 시민으로서 도시국가에 살아야 하는 방식으로 법률편을 썼을 것이다. 이 거대한 체계의 기본은 어쩌면 아페이론으로부터 생성(함)과 발생(되기), 그리고 과정에서 노력과 강도를 실행한 이들에 있을 것이다. 이런 길을 모색한 이는 플라톤과 달리 퀴니코스-스토아의 계보였다. 교육도 이중화의 계열이 중요할 것 같다. “빛들세기(18세기)”에 대학에서 설교와 평결을 가르칠 때, 곧 등장하게 될 제3신분으로서 대학바깥의 인물들인 볼테르, 흄, 루소, 디드로, 엘베시우스 등은 인간과 제도가 자연(물질)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자연형이상학이란 말을 쓰지 않았지만 도덕감과 신앙심은 자연형이상학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루소가 에밀도 쓰고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도 썼다. 플라톤 이래로 새로운 교육은 종교 없는 교육의 필요성이었다.

“빛들세기” 자연에서 빛이 퍼져나가듯이 의식은 퍼져 나간다. 왜 이들이 계몽이라는 표현대신에 빛들이라고 했겠는가? 16세기부터 외방(중국)에서 전해온 문화에 충격을 받았던 프랑스에서 말브랑쉬(Malebranche, 1638-1715)[일흔일곱]는 유일신이 없어도 우수한 도덕감과 신앙심을 가진 거대한 나라(중국)가 있다는 데 놀랐고, 독일에서는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일흔다섯]도 놀랐다. 그럼에도 자기 나라에 사는 애국자들이라, 맑스와 레닌처럼 세계사로 편입되는 시기는 아니었기에 유일신앙 속에서 사유할 수 밖에 없었다. 21세기에는 교육이 전지구라는 일반성 위에 성립하고 활동하는 과정을 알려주는 방식이어야 할 것 같다. 프랑스가 1871년 프러시아에서 패하고 거대한 전쟁 패배 비용을 갚으면서도, 루소의 사유를 따라, 자연에서 인민의 성장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1883년에 모든 어린이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일반교육, 교육은 무상이어야 한다는 무상교육,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에서 종교의 탈피, 세속화 교육을 실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세뇌에서 벗어나는 여러 방식들 중에, 일반교육, 무상교육, 그리고 모든 교육제도에서 사적 재단 또는 종교 재단의 철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세뇌는 어린이에게서 부터이다. 윤구병이 그렇게 강조했던 어린이 철학 교육은 세뇌의 탈피와 자연 순환과 자연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만드는 것, 벩송이 말하듯이 자연(우주)이 보살(신)들을 만드는 기계라고 하듯이 자연으로부터 도덕감과 신앙심의 생성하고 창안하여, 자연형이상학의 진솔한 모습을 만드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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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3]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3]

 

  1. 프랑크푸르트, 새로운 세계 그리고 옛 하이델베르크

 

□ 하버마스 선생님 본(Bonn)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그러니까 아도르노 선생님이 계셨던 ‘사회연구소(Institut für Sozialforschung)’로 옮겨가신 일은 선생님의 생애에서 하나의 분기점이었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 그 시기를 어떻게 회고하고 계신가요?

 

■ 제가 아무런 준비 없이 프랑크푸르트로 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로 간 것은 본 시절의 저와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준비란 『계몽의 변증법』을 읽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 책은 본에 있을 때 암스테르담의 망명 출판사 쿠에리도(Querido)에서 나온 초판으로 구입하긴 했지만, 저로선 그 암울한 문체의 글쓰기에 큰 공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서독의 사회 구조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은 제 정치적 신념과는 거리가 있었던 셈이지요.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를 되돌아보면, 호르크하이머가 「줄리엣」에 대해 쓴 장(章)은 당혹스러웠고, 아도르노가 미국에서 경험한 문화산업 이론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나 『프랑크푸르터 헤프테』에 진지한 연극평론을 기고하던 학생 시절의 제 입장에선 좀처럼 와닿지 않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데 있어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 배경은 고등학교 시절 굼머스바흐에 있던 공산주의 서점에 자주 드나들며 쌓았던 지적 자취들이었습니다. 박사학위 취득 이후 앞서 언급했던 이데올로기 개념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본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들이 무엇보다도 결정적이었습니다. 저는 2년이 넘도록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20세기 초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했던 이들. 신칸트주의와 마르크스 주의의 결합을 시도. 오토 바우어, 막스 아들러 등이 대표자]의 경제 이론 및 민주주의 이론, 신칸트주의 문헌들,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의 잡지들 그리고 칼 코르쉬와 게오르크 루카치 같은 저자들의 저작들을 읽으며 공부했습니다. 특히 루카치나 코르쉬의 글을 읽으며 “안타깝게도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사고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바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우연히 아도르노의 『프리즘 Prismen』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아도르노는 마르크스의 개념어들을 더 이상 1910~20년대의 빛바랜 언어로 다루지 않고 완전히 현대적인 언어로, 동시대의 현상들의 체계를 거리낌 없이 분석하는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반공주의가 극에 달하던 아데나워 시기의 암흑 속에서 말이지요! 그 관성적 개념어들을 더 이상 역사의 유물을 답습하는 방식으로 읽지 않고, 동시대적 현실 속에서 새롭게 ‘재부호화’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 그 순간의 독서 경험은 저에게 하나의 결정적 전환점이자 문학적으로도 찬란한 충격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뒷 바람에 힘 입어 저는 프랑크푸르트로 항해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프랑크푸르트로로 간 것은 단지 학문적 수련의 연장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상적] 내용을 담고 있는 동기가 작용한 것이었습니다.

 

□ 그렇다면 본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옮긴 일은 사상적으로도 깊은 전환점을 의미했던 건가요?

 

■ 저에게 이 시기는 일종의 두 번째 학문적 수련기와도 같은 정신 형성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로 가겠다는 제 결심은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도르노 선생님께서 아돌프 프리제(Adolf Frisé) 편으로 보낸 초청장에 제가 응하여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매우 호의적이었지만, 저는 당시 독일연구재단의 장학금을 받고 있었을 뿐 연구소에서는 고정된 자리를 약속받지 못한 상태로 갔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도르노 선생님은 호르크하이머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호르크하이머 선생님께서 아도르노 선생님만의 ‘첫’ 조수 자리를 승인해 줌으로써 제가 갈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상치 못하게 크게 놀랐던 것은 전혀 다른 점이었습니다. 그 연구소는 당시 서독에서 유일무이한 공간이자 독특한 세계였습니다.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적 과거나 좌파, 심지어 급진적 개혁을 지향한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매일 ‘테디’ 및 그레텔 아도르노(Teddie und Gretel Adorno)와 접촉하면서 문학적 인물과 지적 연대, 과거의 역사적 인물 간의 정신적 관계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중요하지만 사실은 먼 과거처럼 느껴졌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미 잊힌, 나치 시대 때문에 저희와 단절되었던 바이마르 시대의 지적 전통이 중요 망명자들과 함께 오늘의 일상으로 되살아난 셈이었습니다. 그 당시 서독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우주에 있었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토마스만과 에리카 만(Thomas und Erika Mann) 등의 [성이 아니라]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르며 그들을 오늘의 일상으로 소환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당시에 대체로 생존하고 있었음에도 서독에서는 먼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아도르노 선생의 삶과 역사에 비추어 보면, 이런 지적 분위기를 갖고 있는 존재들은 전혀 놀라운 이들이 아니었을 테지만, 저는 그 이전에는 그들과 적어도 문학적인 관계밖에는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56년 서독에서 발터 벤야민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의 저작은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갓 나온 갈색 표지의 두 권짜리 책을 제 아내 우테(Ute)가 아들 틸만(Tilmann)을 유모차에 태우고 사왔을 때 비로소 접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레텔 아도르노는 저에게 벤야민의 첫 사후 출간 작품에 대한 서평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이 글들은 매혹적이고 빛나는 이미지와 종교적 함의가 가득한 역사철학 개념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몇 년 후에서야 철학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공개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연구소에서의 일상은 제가 알던 어떤 것과도 달랐습니다. 망명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났던 정치적·사회적 고립감, 저희의 정치적 감각으로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보였던 호르크하이머 선생의 신중한 처신, 주지사 진(Georg-August Zinn) 그리고 문화부 장관과 그가 맺은 특권적 관계가 대학 내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는 사실 등 여러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도르노 선생님께서 풍기는 천재적 정신의 체취—그의 명료한 언어, 뛰어난 지능, 생각을 멈추지 않는 정신력—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이 연구소와 그 안의 환경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 그리고 우리 젊은 연구자들에게 그곳의 분위기가 얼마나 특별하고 독특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연구소 특유의 독특한 매너리즘과 때때로 낯설고 권위적인 행위 기대 그리고 미처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감지하고 있기는 했던 지적 보물들 말입니다. [이 대화의 흐름 상] 저는 적어도 호르크하이머라는 인물이 종종 양면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여줬던 이러한 배경적 상황에 대해 언급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때 당시 제가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그분의 학설뿐 아니라, 서독 사회에서는 낯설었던 이 지적·정치적 인물 자체 [및 연구소의 분위기]와 제 자신을 동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 당시 대학 그리고 이 도시 전체에는 어떤 지적 분위기가 있었나요?

 

■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사회학 학위 과정이 처음 도입되면서 이 연구소는 제가 강의를 시작할 무렵에야 비로소 대학에 개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 생활과 깊은 연을 맺지 못했어요. 더 이상 수업을 듣지 않았고 가끔 아도르노의 사회학 세미나에서 조수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철학부뿐만 아니라 경제·사회학부에서도 국내에 잔류했던 교수들과 망명에서 돌아온 교수들 사이에 정치적 배경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시의 지적 분위기에 관한 질문은 매우 흥미롭네요. 프랑크푸르트는 여전히 미군의 중심지였고 은행, 경제, 공항 그리고 서독을 남북으로 잇는 중요한 위치 덕분에 경제와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아내와 하버마스]는 본 대학 학생 시절에도 하리 부크비츠(Harry Buckwitz)가 반공주의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올린 브레히트 극을 보러 가곤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막 태어난 아들과 함께 펠트베르크 거리와 리빅 거리 모퉁이에 있는 37제곱미터 크기의 다락방으로 이사했습니다. 우테와 저는 그 당시 안타깝게 파괴된 이 도시가 곧 ‘구’ 서독 연방공화국의 일종의 지적 수도로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베스텐트 구역과 파울 교회 사이에는 극장, 출판사, 대학, 신문사 편집국이 거리에서나 사회적으로나 가깝게 있었으며 주요 신문사와 출판사가 모여 있었고 1960~70년대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도서 박람회도 열렸습니다. 1950년대 동안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정신은 이런 도시의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도르노 부부를 통해 알게 된 알렉산더 클루게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전이었고, 아도르노 선생님 역시 그 시기에야 비로소 자신의 지적 존재감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이름을 이 도시와 연결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저는 1980~90년대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지막으로 지낼 때까지 그 영향력을 계속 누릴 수 있었습니다.

 

□ 오늘날 선생님께서는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초창기 경험과 아도르노 선생과의 관계 그리고 그분께서 추구한 비판 이론의 한 갈래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1956년 연구소에 오셨을 때와 1964년 하이델베르크에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오셨을 때, 그분의 철학적 근본 의도 중 선생님의 이론적 포부와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부분이 있었나요?

 

■ 이에 관해 답하려면 [전 후 시작된 비판이론이 아니라] ‘옛’ 비판 사회이론이 호르크하이머 선생이 아니라 오로지 아도르노 선생에 의해 설득력 있게 대표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도르노 선생은 1956년부터 1969년 사이에는 사후에 [총서로 출간된] 두 권의 위대한 후기 저작으로 얻은 명성에 걸맞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친 철학자는 아직 아니었습니다. 귀국 이후 처음에는 음악과 문학 이론 작업으로 인해 대중의 주목받았고, 키에르케고르와 후설에 관한 책들을 출판했으며, 이후에는 주로 미학 작업과 라디오에서 문화 비평가로 활동했습니다. 반면 교육 분야에서는 마르쿠제의 저작들과 함께 1937년 『사회연구지』에 실린, 당시 저는 아직 몰랐던 중요한 논문들을 통해 공식적으로 시작된 [이 학파] 전통의 유일한 진정한 계승자이자 확신에 찬 대표자였습니다. 요컨대 그는 아직 『부정 변증법』의 저자는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발터 뵐리히(Walter Boehlich. Suhrkamp 출판사의 수석 편집자이자 문학평론가)는 제게 “당신은 당신이 존경하는 아도르노보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호르크하이머의 작품에 더 가깝습니다”라고 말했는데요, 이런 사정을 고려한다면 이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 고전적 사회이론의 기본 골격에 저는 바로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통해 동참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그 책에서 여전히 권위적인 사회에서 민주 제도가 뿌리내리지 못한 점에 주목하여 [철학적이기보다는 역사‧사회학적인] 상이한 어조로 동참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또한 저는 1970년대에 클라우스 오페와의 논의를 바탕으로 『후기자본주의의 정당성 문제』에서 이 고전적 사회이론의 기본 골격을 다시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사회이론적 배경은 의사소통 행위 이론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제 사고를 지배하고 있으며, 또한 탈형이상학적 사유 계보학의 사회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아도르노는 제가 조교로 일하던 1950년대 후반 직접 가까이에서 접했던 그 시기의 아도르노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부정 변증법』의 저자로서의 아도르노는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당시에는 제가 그분을 그렇게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조교로 있던 시절인 1956/57년 겨울학기에는 그분의 강의를 몇 시간밖에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부정 변증법』이 집필되던 시기에는 저는 이미 젊은 동료로서 저만의 과제들에 더 많이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1950년대 후반에도 저는 —특히 발터 벤야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아도르노 특유의 독창적인 사유 방식이 고전적인 비판 이론의 형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아도르노의 독특한 사유를 미리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1930년대 초의 논문이나 강연들, 예컨대 「자연사 개념 Die Idee der Naturgeschichte」이나 「철학의 시의성 Die Aktualität der Philosophie」 같은 글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렇기에 나중에 그가 쓴 두 편의 후기 저작[『부정 변증법』, 『미학이론』]에서 다시 등장하는 사유의 동기들이 저에게 전혀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그 밖에도 저는 1950년대에 아도르노의 헤겔 세미나에 몇 번 참석한 것이 전부였고, 그것도 그레텔의 권유로 참석했던 것이었습니다. 제 관심은 사회 이론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스스로를 사회학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도르노의 사회학 세미나에서 조교 역할도 맡고 있었습니다. 『부정 변증법』은 아도르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 그 책을 연구하시면서 얻으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 이 저작은 바로 다음과 같은 근본 사유에서 생명력을 얻고 있습니다. 즉, 헤겔의 중심 개념인 ‘전체성’ 안에서 하나의 모순이 묵살된 채로 넘어갔다는 것이며, 그 모순이란 바로 고유하며 대체 불가능한 개별성의 항의입니다. 아도르노는 오직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 즉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개별자(Einzelnen)가 제기하는 항의에 목소리를 부여합니다. 헤겔에게 있어 그러한 항의는 구체적 보편자 속의 하나의 특수성으로 동화되는 대가를 치러야만 ‘지양(aufgehoben)’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유는 제가 이미 아도르노의 부고문에서 강조한 바 있었습니다만, 그 사유의 흔적을 제 나름대로 따라간 것은 제 마지막 저서의 헤겔 장(章)에서였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헤겔 변증법이] 개별자와 추상적 보편자 사이의 대립을 화해시키며 구체적 보편자로의 변증법적 전개가 이루어지는 이 구조[개별자와 보편자의 화해로서의 구체적 보편자로 전개되는 헤겔 변증법적 지양 구조]가 도덕적 전체성의 해체 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사회 이론적 모델로서 나름의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런 모델[헤겔 변증법의 ‘화해’ 개념을 사회적·정치적 의미로 확장시킨 하버마스적 헤겔 해석 모델]은 자본주의 위기의 분석 속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이런 식의 모델[헤겔 변증법을 사회 현실에 적용한 모델]은 자본주의적 위기들을 감안하면서 발전된 모델인데, 그것은 서로 충돌하는 당사자들 사이의 갈등을 명제들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는 논리적 작용으로 단순화하여 그 속에 ‘화해’라는 함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모순 자체도 화해되지 않으면서 고통이 드러나게 된다는 함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아도르노는 특수자와 추상적 보편자 간의 대립이 구체적 보편자 안에서 ‘지양(Aufhebung)’될 때, 이것이 실제로는 ‘강요된 화해’이며 허위라는 점, 곧 헤겔이 말한 전체성 개념이 지니고 있는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측면을 간파했습니다. 『부정 변증법』은 헤겔이 말하는 ‘지양’ 개념 속에서 결국 남게 되는, 절대로 환원될 수 없는 개별성의 잔여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상처받기 쉬운 인간 존재들은 자신을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양된 전체성의 시선에서는 그저 그것에 속한 특수자로만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되돌아보는 관점에서는 그것들은 특수한 존재로는 인식되고 고려되지만,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Einzelheit)이라는 관점-오직 그들이 어떻게 고유한 행위를 수행하는가에서만, 그리고 그것이 자기 이외의 다른 것을 지향하면서 의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직접적으로 의식되는 바로 그 개별성 속에서만-에서는 더 이상 인식되고 고려되지 않습니다. 아도르노는 한편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생애사 속에서 직접 경험한 자기만의 것(Unverwechselbarkeit)과 대체 불가능성 사이의 차이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일종의 위로부터 또는 외부로부터 바라보였을 때의 특수성 사이의 차이를 고집스럽게 주장합니다. 『부정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화해된 전체 속에서 고유성(Einzelheit) 또는 개별성(Individualität)의 온전함이 손상되지 않은 채 ‘지양’되기 위해서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그는 이 제3의 관점[변증법적으로 지양된 전체성의 관점]에서 볼 때 [개별성에 대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고, 또 결코 이행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렇게 [아도르노적인] 변증법적으로 전개된 통찰—즉, 궁극적으로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개별적인 것에 대한 [헤겔 변증법적] 논리적으로 불가피한 훼손에 대한 통찰—을 나는 [부정] 변증법적으로 드러낸 전체성 개념에 대한 통찰을 상호주관성이론의 형식화용론적 개념으로 번역함으로써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아도르노가 가했던 개인적인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피하게 훼손된다는 점에 대한 비판을 헤겔의 ―형이상학적― 의미에서의 인격에만 한정하지 않고, 모든 개별 존재자(alle einzelnen Entitäten)로 일반화하면서 『부정변증법』에서 『미학이론』으로 나아간 다음 단계에는 더 이상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유일무이함의 핵심은 예술 작품이나 자연미의 현상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고, 그걸 언어적이든 이미지적이든 음악적이든 간접적으로나마 포착할 수 있는 건 결국 미학적 비판일 뿐이라고 봤던 거죠.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아도르노와 이론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아도르노의 작업 중 미학이 역사철학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남긴 개별 미학적 통찰들 —그 현상학적인 풍부함— 에서 제가 배운 게 다른 어떤 미학보다도 많았다는 사실까지 변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아도르노가 예술의 현대성, 즉 현대 예술이 어디서 어떤 충동을 받았는지에 대해 해석한 부분은 제 개인적인 경험들과도 깊이 맞닿아 있었어요. 비록 저 자신은 그에 대해 가끔 서평이나 짧은 논평으로만 말했을 뿐이지만 말입니다.

 

□ 사회연구소에서는 경험적 사회학으로서 비판적 사회연구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나요?

 

■ 음, 제 생각엔 이론과 경험적 연구 사이에 분명한 간극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1956년 2월에 도착한 직후 아도르노에게서 처음 받은 ‘업무들’도 그 간극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이미 끝나버린 경험적 연구들에 대해서 뒤늦게 이론적인 ‘서론’을 덧붙이는 식이었거든요. 처음엔 사회정책에 관한 조사를 하였고, 그 다음은 주로 크리스토프 욀러(Christoph Oehler)가 작업했던 이른바 ‘대학 연구’였어요. 전 솔직히 그게 좀 사기치는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아도르노가 만족할 만큼은 잘 해냈던 것 같아요. 다행히 그 연구들이 출판됐다는 얘긴 아직까지 못 들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프리더 벨츠(Frieder Weltz)가 전문적으로 설계하고 수행했던 학생들의 ‘정치적 의식’에 대한 연구에서는 피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좋지 않은 일들이 우연히 겹치면서 제가 그 책 표지에 주저자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사실 연구 설계보다는 결과를 정리하는 데 더 많이 관여하긴 했어요. 이런 개인적인 얘기를 넘어서, 사회 이론이라는 게 원래 추상 수준이 높기 때문에 이론적인 전제들이 개별 경험적 결과와 직접 연결되기는 어렵다는 일반적인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루만과 했던 대화가 기억나네요. 그 사람도 자기 이론이 [경험적 사례에 의한 실증에서가 아니라] 개념사적인 연구로만 뒷받침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쉬워했죠. 하지만 저는 다른 데 더 관심이 있었어요.

제가 고전적인 형태의 비판이론에 대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수정 사항들은 이론 구성의 결함뿐 아니라 역사적 전개가 [과거와] 분명히 달라졌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건 이론이 발전할 때 흔히 있는 과정이죠. ‘의사소통 행위 이론’은 슈타른베르크에서 썼습니다. 1980년대 초 프랑크푸르트 철학 세미나에 다시 복직한 이후로는, 정치이론이나 법이론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면서 [규범적] 사회이론 쪽에는 간헐적으로만 관여했습니다. [규범적 사회이론을 바탕으로 한 현실 문제에 대한 해명은] 대부분 『정치 소논문집 Kleine politische Schriften』 같은 맥락에서 했던 개입들이었고, 전문 학술지에 기고한 일은 드물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레비아탄 Leviathan』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 그리고 『공론장의 신 구조변동』에 실린 제 글이 있죠.

 

□ 아도르노에 대한 전기적인 질문 하나 더 드릴게요. 그의 책 『미니마 모랄리아』는 장기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각성의 경험을 주면서 비판이론에 대해 더욱 깊이 탐구하게 만들곤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미니마 모랄리아』를 언제 처음 읽으셨고, 그 책이 선생님께 어떤 인상을 주었나요?

 

■ 확인해 보니 1951년에 나온 초판본으로 이 책을 가지고 있군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깨달음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미니마 모랄리아』는 한 번 읽고 끝낼 책이 아니에요. 자주 다시 꺼내 보게 되는 그런 책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건 마지막 수필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가장 크게 감동을 주었고, 그것이 제가 최근에 쓴 책에서 다룬 철학이 종교로부터 물려받은 관계(Erbschaftsverhältnis zwischen Philosophie und Religion)를 계속 떠올리게 한다는 점입니다.

 

□ 사회연구소에 계실 때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들과 처음 만났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에 대한 논의가 선생님의 사유와 작업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 어릴 적에 《Psyche》라는 잡지를 처음 읽으면서 프로이트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대학 시절에는 발달심리학과 임상심리학 연구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프로이트에 대해 언급이 거의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1956년 여름 프랑크푸르트에서 알렉산더 미처리히(Alexander Mitscherlich)와 호르크하이머가 주최한 프로이트 강연들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고, 저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FAZ)에 열심히 그 강연에 대해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정신분석학은 국제적으로 전성기를 맞고 있었고, 주요 인물들 대부분은 미국과 스위스에서 왔으며 프랑크푸르트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는 막 『에로스와 문명』을 출간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였는데, 저는 그와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델베르크에서 강의하던 알렉산더 미처리히가 저를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62년에 저희가 하이델베르크로 이사한 후 미처리히 가족과 제 가족 간에는 깊은 우정이 생겼습니다. 우테와 저는 알렉산더와 마가레테 부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들을 매우 아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미리우스 가에 지그문트 프로이트 연구소가 설립된 후 외버만, 오페 그리고 저를 위해 마련되었던 사회학 세미나에 참여-저는 사회연구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하면서 [이들과] 협력하였습니다. 저는 미처리히의 심인성 질환에 대한 기본 가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나중에는 정신분석학에 바탕을 둔 여러 시대 진단서들에 대한 서평을 썼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시절 초기에 저는 프로이트의 대형 판본을 구입하였습니다. 이 공부의 결과는 『인식과 관심』의 프로이트 장에서 다루었습니다. 저는 정신분석의와 환자 간에 이루어지는 분석적 대화 경험들을 의사소통 이론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자아(Ich=Ego), 원초아(Es=Id), 초자아(Über-Ich=Super Ego)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확신합니다. 아마도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이 제 언어 이론에도 길을 열어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식과 관심』에서는 인식론적 문제의식이 중심이었고, 정신분석학은 비판 사회이론이의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할 인식관심(Erkenntnisinteresse)의 모델로 기능[정신분석학이 비판 사회이론의 인식론적 모델로 기능]하였습니다. 그러나 알프레드 로렌처(Alfred Lorenzer)의 연구들이 중요시했던 프로이트의 심층 해석학에 대한 체계적 관심이 저를 이성 개념에 대한 의사소통 이론적 해명이라는 길로 이끌었습니다. 정신분석적 ‘대화’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것은 의사가 환자의 무의식적 동기를 환자 스스로 인식하고 진단이 잘 이루어질 정도로 풍부한 의사소통을 하도록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성 지향적 심층 해석학적 언어 사용의 이런 양식은 단어(Wort)로서의 로고스(logos)와 이성(Vernunft)이라는 의미의 로고스 사이의 내적 연관성에 대한 해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였습니다. 저는 신경증적 병리 해소라는 정신분석적 실천에서 언어적 의사소통의 이성적 구조가 드러나야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정신분석학과 해석학에 대한 초기 관심이 후에 언어행위 이론의 경로에 따라 발전시킨 형식적 언어화용론의 길을 열어 주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후 당신의 새 책에서는 프로이트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만.

 

■ 제가 더 이상 프로이트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보신 것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에요. 사실 제 아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알렉산더 미처리히가 세운 전통을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는 교수이기도 해서 그가 이런 부분을 저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도 제게 프로이트는 여전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얼마 전, 『365×프로이트 365 ‌× ‌Freud』라는 서평집에 짧고 인상적인 글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프로이트가 얼마나 제게 가까운지 새삼 놀랐어요. 저는 그 유명한 문장, ‘칸트의 정언명령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직접적인 상속자다’라는 말을 언급하면서, 프로이트에게서 늘 나타나는 성가신 애매함을 좀 풀어보려고 했어요. 프로이트에게서 자아와는 거리가 먼 초자아(das ich-ferne Über-Ich)는 억압적인 사회 규범의 내면적 대리인으로 등장하죠. 반면에 자아에 가까운 초자아(das ich-nahe Über-Ich)는, 자아가 자기 이익을 주장하려고 할 때, 이성적으로 습득한 도덕적 양심의 목소리로 자아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역할을 해요

이 억압적인 초자아와 비판적 혹은 이성적으로 자율적인 양심의 주체로서의 초자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은 결국 부모의 권위가 내면화되는 과정에서는,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에서는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어린아이의 자아 역시 다른 사람들의 모범적인 행동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힘을 얻는 거죠. 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아이는 처음에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던 부모의 모범성에서 점점 거리를 두게 되면서, 억압하는 아버지(übermächtiger Vater)와 모범적인 아버지(vorbildlicher Vater)를 구분하는 법을 배워요. 이건 나중에 한편으로는 기존 사회의 사실적 권위(faktische Autorität)와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된 권위(moralisch gerechtfertigte Autorität)를 구별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래서 이 둘이 초자아가 하는 ‘말’ 속에서 더 이상 뒤섞이지 않게 되는 거예요. 청소년은 성장 과정에서 사회의 권위와 자기 자신의 도덕적 판단의 권위를 구분하는 법을 배우게 돼요. 이익이 갈등하는 상황이 주어질 경우, 자신의 선택의지(Willkür)를 다른 모든 이들의 이익과 동등하게 놓으면서 갈등을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이죠. 이 규범을 보편화하는 행위가 바로 칸트의 정언명령의 핵심이고, 성인이 된 개인이 스스로 해내야 하는 과제예요. 이런 방식으로 보면 프로이트와 칸트 사이에 일관된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고, 이는 프로이트가 자연주의적 단순화에 빠지지 않도록 해줍니다. 왜냐하면 이성적으로 자율적인 자아의 힘(Ichstärke)이나 이성에 따라 의식화하는 것이 자아 기관(Ich- Instanz: 상황에 맞게 욕망을 조절하고, 도덕적 규범과 욕망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심리적 기관) 기능을 강화하는 치료적 길이라는 점을 철학적으로 해명하지 않는다면, 프로이트의 자아 구조 이론이나 무의식적 동기에 대한 해명 그리고 이를 치료의 목표로 삼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런 개념들의 규범적 의미가 문화마다 다른 가치나 규범에 근거해서도 안 돼요. 프로이트에게서도 이성은 결코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이성이란 근거 있는 통찰력을 의미하고, 이 통찰력은 자아의 힘(Ichstärke)이라는 형태로 동기를 부여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또 성공적인 분석의 결과로 자기 동기를 바꾸는 자기 성찰을 이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2]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2]

 

1. 학문적 생애의 시작 – ② –

 

□ ‘68’ 이전의 시기를 우선 살펴본다면, 선생님의 세대에 속한 독일 철학자 동료들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무엇입니까?

 

■ 돌이켜보면, 전후 독일연방공화국에서 나와 동료 철학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우정 어린 친밀감이나 일정한 거리감을 결정짓는 데, 전문적‧개인적 자질 외에도 하나의 요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철학적 성향에 내재한 정치성이었습니다. 내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세대에는 하나의 정치적 분열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보다 급진적인 돌파구, 새로운 시작을 바랐던 사람들과—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헤르만 륍베(Hermann Lübbe)인데—지배적인 반공주의에 전적으로 기대어 나 같은 사람을 ‘건전한’ 혹은 ‘방어 가능한’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간주했던 사람들 사이의 분열이었습니다. 뮌스터에서는 일종의 마지못한 모더니즘[민주주의를 대놓고 거부하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수용하면서 내심으로는 권위주의적 사상을 추수하는 상태]의 정신 속에서 칼 슈미트(Carl Schmitt)와 접촉하는 일이 재빨리 재개되었습니다. 냉전이라는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68혁명 운동의 양극적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헌법은 좌우 모두 동의했지만 그렇다고해서 보수 진영이 좌파 동료들을 내부의 적으로 의심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우파를 반박할 때 부드러운 말투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치 시절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에서 비롯된 이 공개적인 논쟁은 사실 학생운동이 전개되면서 격화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과 그 편집장 요아힘 페스트(Joachim Fest)에 의해서도 부추겨졌으며,1 철학뿐 아니라 많은 인문학 분야에서도 우리 세대 사람들 사이에서, 즉 우리 선생들이 아니라 우리 또래들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사회학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회학계는 귀국한 망명자들과 옛 나치들이 서로 맞서는 양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회학계의 모임은 이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다. 루트비히 폰 프리데부르크(Ludwig von Friedeburg)의 주도로 1950년대 후반부터 매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남을 가졌던 산업사회학 중심의 ‘젊은 사회학자들’도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뮌스터, 쾰른, 프랑크푸르트와 같이 정치적‧학문 정책적 입장을 뚜렷하게 드러내면서 대립하던 학계 진영들과는 달리, 자신들을 하나의 협력적이고 연대 의식이 있는 세대로 인식하였습니다. 이처럼 ‘학파들’ 간의 대립을 지나치게 극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태도는, 각 진영의 입장 차이가 다양한 정치적 삶의 궤적들과 관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반드시 정치적인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수월하게 가능했습니다. 저는 학문적 경력 속에서 하인리히 포피츠(Heinrich Popitz), 랄프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 레나테 마인츠(Renate Mayntz), 라이너 렙시우스(Rainer Lepsius)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크리스티안 폰 페르버(Christian von Ferber), 크리스티안 폰 크로코우(Christian von Krockow) 같은 플레스너 학파 제자들과도 교류하였습니다. 물론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과도 관계를 맺었는데, 이 분은 좀 더 독립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 울리 베러(Uli Wehler)를 통해 저와 제 아내 우테(Ute)는—그 당시 학문적 친분은 부부 간에도 자연스럽게 형성되곤 했습니다—정치사나 사회사 등 동시대의 역사 주제를 다루었던 역사학자들의 친밀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는 한스 몸젠과 볼프강 몸젠(Hans und Wolfgang Mommsen), 위르겐 코카(Jürgen Kocka),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빈클러(Heinrich August Winkler) 등이 있었습니다.

우리 또래의 모든 동료들은 학문 분야와 무관하게, 성장기 동안 하나의 역사적 단절을 경험했다는 사실에서 공통된 흔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공통의 경험은 하나의 세대를 구성하지만, 동시에 그 경험에 대해 각자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서로 달랐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시대사 연구자들에 의해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주제입니다. 예를 들어,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출간된 저작들을 보면 그 점이 드러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의 역사학 및 역사이론에 대한 혁신적인 기여로부터 아무런 배움을 얻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독일의 전통을 더 이상 여과 없이 계승할 수 없다는 비판적 인식과, 새로운 시작이 불가피하다는 절박한 자각은 주로 자유주의적이거나 좌파 성향의 진영에서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 하지만 전후 시절 젊은 철학자들이 처했던 상황은 이후 몇십 년, 특히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에서 달랐던 것일까요?

 

■ 전후 세대 철학자들의 세대적 특징에 대해 고집스럽게 묻고 계시는군요. 저는 사실 그 세대가 우리 다음 세대, 이를테면 저희의 ‘제자 세대’와 그렇게까지 뚜렷하게 구별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희 세대는 좀 더 동질적인 교육 과정을 겪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문 분야의 세분화가 아직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 같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당시 우리에게 중요했던 고전들은 공통적으로 동일했지요. 왜냐하면 저희는 1920년대의 철학적 거장들을 ‘스승’ 삼아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현상학, 해석학, 철학적 인간학은 독일 관념론의 전통과 더불어 반드시 공부해야 할 분야였고, 칸트와 헤겔에서부터 딜타이, 후설, 하이데거, 그리고 쉘러, 플레스너, 겔렌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요한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학문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한 시대의 정신, 다시 말해 독일 철학이 마지막으로 ‘세계철학’의 지위를 가졌던 그 시기의 사상과 자연스럽게 접속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희는 그러한 ‘세계철학’이라는 이상과의 연을 끊은 첫 세대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스승들의 고양된 관념론적 이상, 혹은 철학만이 [현실과 세계의 본질을 해명할 수 있는 고유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는 태도에서 이탈하였습니다. 단지 좀 더 소박한 작업을 했다는 것뿐 아니라, 철학에 임하는 자세 자체가 비판적 자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대적 태도는 심지어 아도르노나 가다머처럼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스승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물론 누구에게는 약하고 누구에게는 더 강하게 드러났지만요. 게다가 저희는 독일의 전통적인 철학 커리큘럼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영미 철학에서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이를테면 분석적인 논증 스타일, 오류 가능성에 대한 자각, 경험적 사실의 중요성에 대한 민감성, 사회과학에 대한 개방성 등입니다. 저희가 어느 정도 자기 주도적으로 수행했던 학습 과정의 이정표가 되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카르납과 빈 학파의 수용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수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중 몇몇에게는 퍼스와 프래그머티즘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치와 정치철학뿐만 아니라, 철학의 핵심 영역들에서도 서구[영미권]로의 개방이 일어나고 있었던 셈이지요.

 

□ 두 학기는 괴팅겐에서 그리고 한 학기는 취리히에서 공부한 후 본에서는 박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 머물렀다는 점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본에서 철학 공부를 할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점이 있었나요?

 

■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는 많은 우연한 일들과 몇 가지 의식적인 중요한 선택들로 이루어집니다. 괴팅겐에서는 니콜라이 하르트만에게 지루함을 느꼈고, 그곳에서는 인간 관계도 얻지 못했습니다. 차가운 북부 지역보다는 라인강 인근의 본이 더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본에서 친구가 된 굼머스바흐 출신의 만프레드 함비처한테 본의 극장 그룹에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들었을 때 매력을 느꼈죠. 이번에는 공부할 장소를 개인적인 이유로 선택한 셈이었어요. 그래도 에리히 로타커(Erich Rothacker)는 적어도 이름난 철학자긴 했고, 그의 저서들에 대해서도 막연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인상은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치 초창기 멤버였다는 사실은 나중에 차츰 알게 되었지만 이런 우연한 선택이 행운을 만나게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곳에서 우테를 만나 이후 제 삶을 결정지었고, 로타커의 수요일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학문적으로도 매우 자극적이고 배울 점이 많은 토론 환경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타커만의 고유한 철학 이론을 배우지 못했지만, 그의 강의에서는 독일 역사학파의 광범위한 전통을 접할 수 있었고, 심리학 세미나에서는 1920년대 이래 철학적 인간학 논의의 기반이 되어온 풍부한 실증적 연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철학 세미나에서는 ‘사유 그 자체’가 마치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토론이 이루어졌으며, 이때의 경험 덕분에 언어철학에 대한 관심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사회학은 아직 관심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 그곳에서 오랫동안 함께 연구하셨던 동료 칼-오토 아펠을 만나셨죠. 두 분께서는 이론적으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슷한 독서 경험과 체계적 문제 의식을 가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셨습니다.

 

■ 그는 이미 박사 학위를 마친 연장자로서 전쟁 동안 병사로 복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와의 관계가 완전히 비대칭적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개인적으로 가까워졌는데, 저는 박사 과정 때 그의 옆방에 배정받았습니다. 그는 저에게 멘토와 같았고, 저는 그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그는 『존재와 시간』을 실존주의적 색채가 가미된 칸트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저에게 매우 잘 맞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 책을 이미 괴팅겐에서 읽었죠. 아펠은 결코 특별히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를 통해 저는 철학이 현재의 세계관과 자아 인식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살아있는 본보기로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은 삶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펠의 시대 진단은 제가 아침 마다 비판적으로 읽던 FAZ(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부비에 서점에서 구입한 학생용 정기 구독권으로 읽었는데요—에서 자주 접했던 도발적인 시사 문제들과는 아직 꽤나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가 1953년 여름 어느 주말에 아펠이 내 손에 쥐여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을 읽은 것이, 철학 공부와 불타는 정치적 시사 — 하이네만 대 아데나워! — 사이를 가로막던 벽을 단번에 허물어 버렸습니다.2

 

□ 아펠과 맺으신 우정 어린 관계는 일찍 시작되어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특히 1980년대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두 분이 각각 담론윤리를 발전시키던 시기에 다시 아주 긴밀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 우리 사이의 참으로 길고도 복잡한 관계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 속에 아펠과 칸트의 영향이 지나치게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당신의 추측에 답하기 위해서도, 본 시절 학생과 멘토로서의 관계[0단계]는 이후 진정한 의미의 동료이자 우정 어린 관계로 발전한 세 개의 단계[1~3단계]와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1954년 박사학위를 마친 뒤, 나는 아펠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나는 프랑크푸르트로 갔고, 아펠은 건강상 중단하곤 했던 그의 교수 자격 논문을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그 끊어진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것은 거의 우연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철학 강연에 초청받았으나 그 당시 이미 나 자신을 사회학자라고 여기고 있었기에 이를 수락하지 않았고, 대신 아펠에게 초청을 넘겼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다시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리가 나중에 동료가 된 이후 —1960년대에는 각각 하이델베르크와 킬에서— 철학적 작업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교류로 이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손편지들 중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이 편지들이 남았더라면 우리가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를 따로따로 추구하던 시기에 서로에게 끼친 영향을 —저에게는 상호적인 것으로 보이는— 보여줄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 시기 동안 아펠과 나는 철학 작업의 의도에 있어서 가장 가까웠습니다. 한편으로는 ‘인식 관심 이론’이 그러한데, 이 이론은 일종의 반성(reflection) 양식을 지향하며, 우리는 이때 정신분석학적 대화를 그 모델로 삼았습니다. 아펠은 실제로 정신분석을 받은 적이 있었던 듯하며, 나의 경우에는 학생 시절 『Psyche』 지를 읽으면서 지니게 된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프로이트 강의3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60년대 후반부터 담론 윤리(diskursethik)에 대한 고찰이 전개되었고, 저는 그 기본 사상을 『정당화 문제 Legitimationsprobleme』 제3부에서 “실천적 질문의 진리능력(Wahrheitsfähigkeit praktischer Fragen)”이라는 제목 아래 처음으로 발표했습니다.4 이러한 점에서 에를랑겐(Erlangen) 학파와의 논의도 중요했습니다. 아펠과의 관계에 있어 하나 고려할 점은, 제가 언제나 아펠보다 더 빨리 글을 출판했다는 점입니다. 너무 성급하게도요. 예를 들어 저는 아펠에게 『철학의 변형 Transformation der Philosophie』이라는 그의 두 권짜리 대작을 수년 동안 출판하라고 독촉해야 했습니다. 이런 비대칭적인 출판 속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긴밀한 사유 교류에서 그 결과물에 대해 단 한 번도 ‘선점권’ 문제는 불거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초 제가 하이델베르크에서 교수직을 막 시작하던 시기에 아펠은 저보다 훨씬 더 깊이 분석적 언어철학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저작들이 중요하다는 점을 제게 처음 일깨워 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저는 하이데거의 존재사 개념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유물론적 사례와 경험적 고찰로 그를 몰아붙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실천적 칸트 해석과 담론 이성 개념을 향해 서로 접근해갔습니다.

제 기억에 두 번째 단계는 1970년대 초에 종결되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아펠은 내 책 『인식과 관심 Erkenntnis und Interesse』의 한 지점에 대해 아주 정확하고 결정적인 비판을 했습니다. 즉 저는 반성(reflection)의 두 개념을 충분히 구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은 구분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생애사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된 자기반성으로서의 ‘반성’,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하고 행위하며 말하는 방법에 대한 보편적이지만 수행적으로만 현전하는 ‘방법지(Wissen-wie)’에 대한 이성적 재구성으로서의 ‘반성’5. 이 구분을 불충분하게 하는 바람에 저는 세 번째 인식 관심, 즉 ‘해방적(emanzipatorisch)’ 인식 관심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설명하는 체계적 난점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비판을 『인식과 관심』의 다음 판 후기에 즉각 반영했습니다.6

우리의 두 번째 관계 단계는 제가 공부를 마친 후 시작되었는데, 이 두 번째 단계는 다시 또 두 협력의 시기로 나뉩니다. 칼-오토 아펠의 프랑크푸르트 임용과 동시에 저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습니다. 두 협력 시기 중 첫번째는 제가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집필하던 슈타른베르크 시절이었습니다. 아펠이 슈타른베르크를 처음 방문했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 반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서로를 안 지 20년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그 당시엔 다들 그렇게 했습니다.

1970년대 우리의 서신들에는 아마도 촘스키-그의 중요성을 나는 1965년 첫 미국 여행에서 깨달았습니다-, 오스틴과 설의 발화 행위 이론 그리고 그에 기반해 전개된 보편 혹은 형식 화용론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제 입장에서는 사실상 ‘피할 수 없는’ 이성적 담론과 의사소통 행위의 화용론적 전제를 아펠은 언제나 초월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 점에서 우리 사이의 견해차가 분명해졌습니다. 여기서 이미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문제와 관련된 더 깊은 수준의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것이 일종의 ‘약한’ 자연주의(ein schwacher Naturalismus: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기는 하지만 인간의 행위를 뇌과학 등과 같은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환원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의 자율적 규범 구조를 고려하는 자연주의적 입장7에 속하는 것이라 본 반면, 아펠은 언어적 전회 이후에도 여전히 ‘제1철학’8의 개념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그의 입장은 칸트적 지성계의 진지한 탈초월화(detranszendentalisierung)와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탈초월화란 이성이나 도덕을 형이상학적·초월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현실 세계 안에서 해명하려는 시도. 하버마스가 보기에 아펠은 논증의 최종 정당화(Letztbegründung)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탈초월화를 지향하는 아펠의 본래 의도와 충돌한다고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펠은 제가 『또 다른 철학사』에서 이끌어낸 결론들을 매우 불만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슈타른베르크 시기를 지나 프랑크푸르트 세미나에서 함께 강의하던 네 번째 단계, 곧 1980년대의 논의 시기를 규정하던 우리 둘의 입장 차이와 유사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도 존 설, 찰스 테일러, 딕 번스타인 등과 함께 진행한 세미나들에서도 자주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이 논의들은 기존의 입장 차이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 데 그쳤고, 진리 개념, 궁극적 정당화 문제 그리고 아펠이 담론윤리에 추가하고자 했던 ‘B부분’과 관련해도 그 차이가 구체화되었습니다.9

저는 제 박사논문 서론에서 청년 헤겔학파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사유의 흐름을-당시에는 그렇게 불리지 않았던- ‘탈초월화’라는 주제로 진지하게 수용했습니다. 반면 아펠은 이를 ‘제3의 패러다임 속 제1철학’이라고 부르며 끝까지 고수했습니다.10 이제 당신의 질문 속에서 제가 감지한 의심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즉 해석학과 담론윤리, 곧 ‘헤겔보다는 칸트’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과 잘 어울리지 않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를 ‘다른 진영’으로 분류하려 한다는 것이죠. 저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을 이어갈 것이냐, 갱신할 것이냐, -혹은 단절할 것이냐- 하는 논의에 결코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은 새로운 역사적 맥락과 새로운 인식 아래에서 적절히 수정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이어지는’ 것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1937년 『사회연구 저널 Zeitschrift für Sozialforschung』에 실린 호르크하이머와 마르쿠제의 선언적 논문들이 설득력 있게 전개했던 이성 개념과 합리적 자유의 개념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습니다. 아도르노 역시 벤야민적 동기를 특유의 방식으로 해석하면서도 이 개념에 충실했습니다. 저의 사회 이론 역시 –바뀌어야 할 것들은 바꾼다는 생각에서 mutatis mutandis– 이 본래의 개념 틀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 탈형이상학적 사유라는 개념에 대한 언급은, 다시 본 시절로 돌아가 귀하의 셸링 독일 관념론의 문제 지형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한 선생님의 박사 논문으로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이것이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옹호하게 된 일종의 전제였다고 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일까요? 다시 말해, 청년 헤겔파로부터 자극받은 사유의 충동이 셸링과 이론적으로 대결하면서 비롯된 것이고, 특히 역사 속에서 절대자를 찾으려 했던 셸링의 시도를 선생님께서는 실패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선생님께서 당시 셸링 사유의 양면성을 지적하셨던 만큼, 그의 사상 안에는 당신으로 하여금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계속해 나가게 만든 어떤 계기나 자극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 이 질문은 놀랍지만 흥미롭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코 터무니없지 않은 질문입니다. 학업을 마쳤을 때, 저는 어떤 결정적인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철학은 우리의 상황에 대해 더 깊이 해명하고자 하는 제 관심을 만족시키는 알맞은 길이 아닌 것 같아서 저는 철학을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당시 저는 현 상황을 정치적 관점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춰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이고 경험적인 해명을 기대할 수 있는 관점에서는 사회학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사회학을 정식으로 공부하려는 생각은 없었고, 당시 몇몇 대학에서만 교육이 재개되었던 사회학 분야에 옆문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학창 시절에 익히 알고 있던 마르크스주의 문헌들은 칸트와 헤르더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길, 즉 철학에서 사회이론으로 이어지는 길이 얼마나 짧은지 보여주었습니다. 하인리히 포피츠와 랄프 다렌도르프 역시 마르크스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그와 같은 시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또한 헬무트 셸스키는 한때 독일 나치당원이었지만 빠르게 태도를 바꾸고 후학을 구하던 인물로 제가 본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지 몇 주 만에 점심 식사에 초대하여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후 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연구 조교로 일하며, 사회학 공부를 놓친 부분을 마치 현장에서 보충하는 듯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1960년대 교수 시절에도 당시 조교였던 클라우스 오페와 울리히 외버만과 함께 공동 세미나를 하면서 많은 사회학 지식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제가 로타커의 지원을 받아 시작했으나 프랑크푸르트에 두고 온 ‘이데올로기 개념’에 관한 독일연구재단(Deutsche Forschungsgemeinschaft) 연구 과제를 통해 탐구하기 시작한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제가 사회학이라는 방향을 택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의 근본 문제들로부터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셸링의 문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셸링에게 제기된 문제인 ‘역사 과정 속에 고정된 절대자’에 관한 문제를 계속해서 다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쩌면 우회로를 통해서라도 오늘날까지도 제가 끊임없이 씨름하고 있는 문제로 볼 때 같은 주제로 다시 돌아왔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성의 역사적·언어적·사회적 구체화를 숙고하는 탈형이상학적 사유에서도 이성의 보편적 타당성 요구에 위배되지 않도록 개념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자라는 핵심은 진리의 절대성을 절차적으로 유동화한 [탈형이상학적] 보편성 요구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저의 철학사 연구 역시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의사소통 실천은 진리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국 역사적 존재 방식의 내적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논지, 즉 “내적 초월(transzendenz von innen)”이라는 개념으로 귀결됩니다. 이 용어를 제가 처음 쓴 것은 제 기억이 맞다면 1980년대 말 시카고에서 신학자들과 함께 한 학회였습니다.11


다음 회에 계속~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1]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소개글]

하버마스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복잡하기 그지 없는 그의 사상이 무엇을 의도했고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되도록 간명하게 알고 싶어 한다. 여러 개론서들은 독자들의 이런 욕구를 충족하고자 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되지는 못했다. 2024년 출판된 이 인터뷰집은 하버마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독자들의 이러한 불만족을 해소해 준다. 오랫동안 하버마스를 연구했으며, 그의 학문적 전기를 깊이있게 서술했던 질문자들의 역량 덕분이기도 하다.

이 인터뷰는 하버마스의 어릴적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그의 학문적 여정을 차근차근 다루고 있다. 인터뷰를 따라가다보면 하버마스와 스승 세대, 동료들 그리고 제자 세대에게서 받은 여러 영향들이 정치적 현실을 배경으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이해하게 된다. 독자들은 이런 영향들이 하버마스의 사유에 있어서 어떤 동기를 부여했으며, 발전 방향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그리고 하버마스가 이런 영향을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면서 수용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인터뷰는 학문적 생애를 단순히 회고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2019년 두 권으로 출판된 대작 『또 다른 철학사』를 통해 구현된 ‘탈형이상학적 사유의 계보학’이 어떤 과정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었으며 관철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는 하버마스 취하고 있는 탈형이상학적 사유가 무엇이고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그의 철학이 현실 사회의 모순과 비판적으로 대결하면서 형성된 지적 정치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종종 내비치는 소소한 개인사와 사적 인연들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딱딱하고 진지하기만 한 이 이론가가 살아있는 인간의 몸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느끼게 하면서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번역은 AI의 도움을 받아 수정했다. 저본은 Habermas, Jürgen. 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 :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Stefan Müller-Doohm, Roman Yos, Frankfurt am Main: Suhrkamp.


[1]

 

1. 학문적 생애의 시작 – ① –

 

□ 하버마스 선생님, 예전에 “살면서 자기의 근본적인 의도를 쏟아부을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근본 의도’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이론 발전과 직업 경로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습니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49년 괴팅겐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 1949년 제 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역사적으로 급격한 어떤 단절을 경험한 세대로 회고해 볼 수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할 무렵, 우리는 4년 동안 나치 지배가 남긴 심연을 시간을 갖고 되새기며, 그 시절 우리가 살아갔던 ‘정상적’ 일상의 이면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었는지를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윗세대보다 우리에게 더 쉬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젊었기 때문에, 우리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상적 일상 속에 숨어 있던 심연의 깊이를 민감하게 너끈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짓이나 방조(放棄)한 일에 대해 책임져야만 할 기억이 없었기에, 그런 통찰을 중지하게 할 만한 ‘죄책감’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헬무트 콜이 말했던 ‘늦게 태어난 것의 은혜’라는 표현은 이 점을 정확히 짚었습니다. 우리보다 조금이라도 나이 많은 이들은 우리 세대와 전혀 다른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역사학자 논쟁(Historikerstreit)에 참여한 이들의 세대차를 늘 매우 의미 있게 보아왔습니다. 그처럼 완전히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는 민족적 환경 한가운데서, 우리 젊은 세대는 방향 감각과 계몽에 대한 갈망,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는 데 심리적인 장애물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의 비판적 성향을 지닌 이들이 주변의 ‘굳어 버린 사고 방식’과 결별하게 된 것은 일종의 직관적 통찰 덕분이었습니다. 즉, 나치는 ‘본질적으로 건전한 문화’ 안에 침투한 이질적인 물질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한낱 지나간 ‘악몽’ 같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 민족 문화의 가장 어두운 유산을 자신들의 자양분으로 삼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문화 유산은 심지어 토마스 만 같은 국민적 대문호조차도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1789년의 정신[프랑스 혁명 정신]’에 맞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직 그런 배경만이 나치가 공습 대피소 안까지도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그 ‘감염력’을 설명해줍니다.

통화 개혁 전까지 이어진 전후 초 잡지와 문학 속에는, ‘문명 파괴’라는 이름조차 미처 붙이지 못했지만 그런 단절에 대해 스스로 책임 있게 성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학 공부는 저에게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다가왔습니다.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한 가정 환경, 그리고 학비를 기꺼이 대려 했던 아버지도 한 몫 했습니다. 그러나 전공 선택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기로 했을 당시 저는 특정한 직업—그리고 특히 교수라는 직업은 전혀—염두에 두지 않았고, 단지 관심을 충족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1949년에는 한 세대의 약 5%만이 대학에 진학했지만 오늘날에는 50%에 달하죠.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유가 보장된 시기였습니다. 단순히 한 전공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 학부라는 틀 안에서 자신이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주제나 대상들을 중심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거의 스스로 구성한 셈인 공부 과정을 통해, 중간 시험 같은 것을 본 적도 없이, 박사 시험에 필요한 두 개의 부전공을 나중에 선택하곤 했습니다. 저는 이미 대학 입학 시험(Abitur)을 통과하기 전부터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그 결심에 이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당시 선생님의 삶의 상황, 특히 철학에 이르게 된 과정에 대해 들려주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경험이 있었을까요? 청소년기에는 의사가 되고 싶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어릴적 의사가 되고 싶다고 희망해서 해부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열두 살 무렵 ‘융폴크(Jungvolk)’에서 ‘펠트셰어(Feldscher, 야전 의무병)’로 옮겨서 훈련받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마도 사춘기 시절 입천장 갈림병(구개열) 문제와 관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 그 문제를 뚜렷이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이 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제 친구 유프 되어(Jupp Dörr)와 함께 학교 운동장에서 불쾌한 경험을 몇 번 당한 것을 제외하면 순진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도록 꽤 잘 보호받으면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의학에 대한 관심은 생물 수업의 영향을 받아 점차 이론적인 방향으로 옮겨갔습니다. 제 흥미를 자극했던 생물 선생님은 사실 전쟁 이후에 나폴라(Napola, 나치 엘리트 학교)에서 우리 학교로 부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나치였던 셈이죠. 그러나 매우 해박했고, ‘인종생물학’의 함의를 이미 넘어선 학문 자세를 견지하면서 우리를 유전학과 다윈의 진화론에 입문하게 했습니다.

그 이후 제 관심은 생물학을 넘어서 인간학적 질문들로 확장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통화 개혁 이후 어느 날 저는 우연히 슐츠-헨케(Schultz-Hencke)1의 책을 손에 넣었는데, 이는 나치 체제에 순응한 정신분석학 교재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김나지움(고등학교) 마지막 2년 동안에는 심리학 잡지 《Psyche》를 정기 구독할 수 있게 되었죠. 이처럼 넓은 의미의 ‘인간에 대한 관심’이 결국 제가 고교 졸업 시험을 보기 전 몇 해 동안 칸트와 헤르더의 역사철학을 읽으면서 철학적 관심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아이러니하게도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우(Otto Friedrich Bollnow)라는 구 나치 인사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은 특히 그의 희곡을 통해 우리 세대 전체를 사로잡았습니다. 또한 굼머스바흐(Gummersbach)역 근처에 있던 공산당 서점에서 접한 마르크스주의 문헌들 그리고 그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로서 제 아버지 세대가 선호했던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과 빌헬름 뢰프케(Wilhelm Röpke)의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도 저의 지적 환경을 함께 구성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저는 개인적인 ‘에세이’(Aufsätze) 속에서 풀어냈습니다. 그 에세이를 가지고 저는 학교에서 몇 안 되는 비(非)나치 교사 중 한 명이자 제가 깊이 존경하던 라틴어 교사 클링홀츠(Klingholz) 선생님을 꽤 괴롭혔습니다. 그는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었고, 저는 그에게 그런 글을 자주 들이밀었기 때문에 꽤 성가신 존재였을 겁니다. 또한 저의 외삼촌 페터 빈겐더(Peter Wingender)는 철학을 가르치는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칸트의 『프로레고메나(Prolegomena)』와 같은 ‘진지한’ 책을 추천해주며 제게 자극을 줬던 수많 내용들이 단순한 ‘흥미’ 수준에서 끝나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이처럼 지적으로 무수한 세계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환경에 살다 보면,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은 따로 의식적으로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한 ‘근본 의도’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철학 같은 학문을 전공하며 살아가겠다는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불안감’은 오랫동안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나중에, 뜻밖에도 제가 교수가 될 수 있었을 때조차도, 저는 제 능력이나 성과 나아가 제 직업에 대해 별로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직업—대학교수이자 학자—를 어느 정도 잘 해내고 있다는 감각이 비로소 생기기 시작한 건, 1980~90년대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마지막 재직 시절부터였습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생님이 전공을 선택하게 된 어떤 ‘내면적’ 동기가 없었던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가치 지향을 정리하고자 하는 욕구 같은 건 없었나요?

 

■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건 오히려 철학에 대한 플라톤적인 자기 이해에 가깝습니다. 저는 그런 관점을 한 번도 공유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이 늘 ‘진짜 철학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곤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그런 철학자들 말이죠. 즉 자기 삶을 깊이 성찰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심오하고 형이상학적으로 타당한 통찰을 추구하는 그런 철학자들 말입니다. 오히려 저는 마르크스주의와 프래그머티즘에서 [철학적 탐구에 대한] 제 동기들을 더 많이 발견했습니다. 세상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노력, 아니 최소한 늘 되풀이 될 위험이 있는 퇴행을 막으려는 노력이야말로 결코 하찮게 볼 수 없는 동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라는 호칭에 꽤 만족하고 있습니다.

 

□ ‘철학자’라는 호칭만 붙이면 선생님께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표현이었던 건가요?

 

■ 그건 오랫동안 말 그대로 느낌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보면, 동료들 가운데 제가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되어버린 지금 가끔 그 점을 곱씹어보게 됩니다. 확실히 위대한 형이상학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아무 거리낌 없이-하지만 아무 맥락 없이 그런 건 아니죠- 직접적으로 계승한 사람 중 로베르트 슈페만(Robert Spaemann)만한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고전 텍스트에 대해 깊이 있는 정독을 통해 놀라운 통찰을 끌어내는 능력을 지닌 인물로, 그 점에서 저는 종종 레오 슈트라우스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제 가까운 철학 동료들 역시 각자 고유의 이론적 구상 속에 겉보기엔 냉철해 보이면서도 ‘위대한 철학’ 전통에 다소간 뿌리박고 있는 동기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락하신다면 몇 가지 대략적인 도식으로 설명드리죠. 예컨대 칼-오토 아펠(Karl-Otto Apel)의 경우, 도덕의 최종적 정당화(die Letztbegründung der Moral)를 향한 그의 열정만 보아도, 그는 ‘탈형이상학적 사고’를 너무 멀리 밀어붙여선 안 된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그건 우리 사이의 핵심적인 의견 차이기도 했습니다. 디터 헨리히(Dieter Henrich)의 경우, 형이상학적 근본 동기는 명백합니다. 즉, 성찰로 진입하기 이전에 이미 자기와 낯익은 것(Mit-sich-Vertraut-Sein)과 같은 게 있다는 직관을 확신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직관 같은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의식으로 하여금 [모든 존재자들의 바탕이 되는 형이상학적 근거와 같은] ‘포괄적 전체(Allumfassenden)’를 이해하게 하는 문턱이 된다는 것이죠. 미하엘 토이니센(Michael Theunissen)은 평생 동안 종교적 동기들과 씨름해 왔습니다. 초기에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에는 상호주관성과 청년 헤겔적 관점에서 해석한 헤겔 독해를 거쳐 말년에는 후기 하이데거로의 회귀를 시도했죠. 저는 그 시도가 그리 생산적이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가장 명석하고 냉철한 철학자였던 에른스트 투겐트하트(Ernst Tugendhat)조차도 자신의 언어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번역한 작업으로 이해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윤리학 사상에서 형이상학적 지향성은 그의 후기 작업인 신비주의로의 전환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는 자기중심적 주체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압도적인 우주에 대한 관조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고는 칸트의 보편주의적 정의 개념과 이성적 자유 개념을 구제할 수 없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죠. 저에게는 그런 종류의 ‘심층적인’ 동기들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붙잡고 있는 문제는 왜 인간 사회는 그토록 쉽게 파괴되고 반복적으로 붕괴되어왔는가 그리고 그런 취약한 사회적 공존을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철학적 탐구의 동기가 될 수 있느냐고요? 저에게 인간의 자연 의존성[죽음의 숙명과 같은 것을 탐구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경향]은 철학적 탐구의 동기가 되지 않습니다. 저의 철학적 탐구는 다만 인류가 언어를 통한 사회화라는 완전히 새로운 진화적 도약을 이뤄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인간 사회 외부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바탕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삶에 중심을 두고 사유됩니다. 제 철학의 ‘궁극적’ 동기를 굳이 꼽자면, 그것은 아마도 ‘언어의 해방적 힘(die befreiende Kraft des Wortes)’일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개별화된 사회화가 오직 상호 평등한 인정 관계 속에서 이뤄질 때에만 온전히 펼쳐질 수 있습니다. 가까이함과 멀리함, 예와 아니오, 해방과 퇴행, 찬성과 반대(Zustimmung und Widerspruch), 자립과 의존(Selbstsein und Abhängigkeit), 이 모든 것은 개인들이 사회화 과정을 통해 자아가 되어가는 과정을 치러낸 의사소통적 경험들입니다. 그런 개인들은 서로 상반된 극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때만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인간 사회 외적 토대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어느 정도 통합된 사회적 조건 속에서만 가능하죠. 저는 이런 직관을 가지고 철학과 사회 이론을 전개해 왔습니다. 저의 이론은 역사적으로 볼 때, 칸트, 피히테, 쉘링, 헤겔 이후 [세속주의적] 철학자들과 연결되어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직관을 세속적 사유로 완전히 이행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철학은 그리스적 동기보다는 성서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 말씀도 이미 어떤 근본적인 직관에 따른 것처럼 들리는 데요.

 

■ [관념적이기보다는] 좀 더 사실적인 측면에서 얘기해 봅시다. [앞에서 저는 인간의 사회적 삶의 성공 여부가 취약하다고 했어요. 이와같은] 성공적이거나 실패하지 않은 형태의 사회적 통합(soziale Integration)에 대한 직관은 저를 의사소통 행위 이론으로 이끌었고, 이 점은 제가 언어학적 전회에 주목했음을 말해줍니다. 처음 시작할 땐 명확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훔볼트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발전해 온 사고, 즉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의 생활 형식을 언어적으로 구성한다는 사고만이 언어학적 전회로서의 패러다임 전환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반면에 카르납, 콰인, 데이비드슨 같은 주요 분석철학자들에게 언어학적 전회는 단지 방법론적인 의미에 불과했습니다. 덧붙여 이[렇게 언어학적으로 전회한] 패러다임은 조지 허버트 미드와 윌리엄 제임스 같은 프래그머티스트들이 제기한 개별화와 사회화의 동시 기원성과 상호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통과할 때에만, 제1인칭, 제2인칭, 제3인칭 간 관계의 역동적인 긴장 구조에 내재한 변증법적 요소를 획득합니다. ‘나-너(Ich-Du) 관계’는 ‘우리(Wir) 관계’의 틀 안에서 형성되며, 이 ‘우리’는 [어떤 의견 등에 대해] ‘예’와 ‘아니오’라고 말하는 행위 주체들이 자신들이 공유하는 언어라는 공동 배경과 그로 인해 열리는 근거들의 공간을 인식하면서, 세계의 어떤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에 대해 합의를 이루려는 관계입니다. 저는 이 관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즉 헤겔의 변증법처럼 행위 주체들 상호 간의 대립과 투쟁 관계에서 발생하는 위기적인 분위기의 변증법과는 다른 의미에서의—‘변증법적’ 관계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성장해 가는 이들은 자신들이 ‘나(Ich)’로서 경험하고 자의식을 형성하는 정도가, 자신들이 각각 ‘너(Du)’로 인식하는 제2인칭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그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법을 배우는 정도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매개되는 것은 자의식만이 아닙니다. 의사소통 행위와 담론을 통한 이해는 타당성 주장에 대한 상호 비판을 목표로 하며, 그 점에서 문자 그대로 변증법적[변증술적] 과정입니다. 동시에 이 과정은 의사소통 행위를 하는 주체들로 하여금 ‘예’ 또는 ‘아니오’의 입장을 취하도록 강제하며, 이 입장에 대해 그들은 개인적으로 책임을 집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중요한 상황들에서는 이 책임감이 단지 개인의 자립성과 대체 불가능성에 대한 의식만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고유의 독특한 특성 또한 형성합니다.

 

□ 선생님의 생애로 돌아가 보죠. 이를테면 당신의 ‘첫 번째’ 대학 이야기말입니다. 왜 괴팅겐 대학이었나요?

 

■ 대학 입학 시험을 마친 후 어디서 공부할지는 자연스럽게 결정됐습니다. 그 당시에는 마르틴 하이데거와 니콜라이 하르트만이 ‘누구나 꼭 가서 배워야 할’ 두 명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프랑크푸르트에 대학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어요. 프라이부르크 대학은 전쟁 때문에 ‘중단된’ 학년이 있었고 전후에 여전히 의무적으로 시행되던 정리 작업들(시설 재건 등) 때문에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거기서 공부하려면 몇 달, 어쩌면 한 학기를 더 보내야 했기 때문이죠. 반면 괴팅겐 대학에서는 하르트만과 ‘입학 면담’만 하면 됐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별 관심 없어 보이던 그에게 저는 릴케의 작품을 읽은 경험만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 첫 학기는 마침 제1차 독일 연방의회 선거운동 기간과 겹쳤습니다. 우리는 나치 시대에 성장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마지막 몇 해 동안에서야 어느 정도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도덕적인 반응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정치적으로도 깨어나게 되었죠. 그래서 괴팅겐에서 열리는 선거 유세 행사들을 거의 빠짐없이 찾아갔지요. 그때 저는 민주주의를 대부분 책을 통해서만 배워 온 젊은이로서 아주 극단적인 실망을 경험했습니다. 현실 민주주의와 했던 첫 대면은 충격이었죠. 그 충격은 1944년 7월 20일 베를린에서 반(反)히틀러 음모자들을 체포했던 오토 에른스트 레머(Otto Ernst Remer)가 극우 독일제국당 대표로 등장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저를 진정으로 충격에 빠뜨린 것은 BHE(동유럽 국가들에서 거주하다가 추방된 독일인 연합 Bund der Heimatvertriebenen und Entrechteten), 독일당 그리고 기독교민주당의 선동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레머 못지않게 극우적인 태도를 보였거든요. 그때 제가 알게 된 오버렌더, 제보움, 메르카츠(Oberländer, Seebohm, Merkatz) 같은 인물들은 거만하고, 모욕적이고, 점령국들에 맞서 들끓는 말투의 뻔뻔한 태도로 연설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아데나워 초대 내각에 전원 포함되었던 겁니다! 그들의 무책임한 언설에서는 나치 시대와의 단절이라는 필수적인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 장면이 기억납니다. 어떤 행사에서 독일 국가의 첫 소절이 연주되자 저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그 순간 청중들의 야유와 환호가 동시에 터져 나왔습니다. 그 국가가 12년 동안 나치의 당가였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Horst-Wessel-Lied)’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떠올렸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원래는 별 문제가 없는 국가였지만, 그런 식으로 악용되었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독일 국가에 대해 일종의 저항감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4년 연방총회에서 요하네스 라우가 로만 헤어초크와 경쟁해 낙선했을 때, 저는 그 자리에 있던 페터 글로츠에게 ‘독일 국가가 연주되기 전에 미리 알려달라’고 부탁해서 그 시점에 맞춰 회의장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제 첫 학기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그 시절 우리 세대가 ‘정치적으로 자명한 것들(die politischen Selbstverständlichkeiten 정치적으로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원칙이나 가치들)’을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철학적 깨달음에 대한 지적 욕구는 그런 자명성에 깊이 젖어 있었지요. 세상은 더 나아져야만 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 전후 시절 당시 철학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계셨나요? 디터 헨리히가 ‘1945년 이후 세대 철학자들만의 고유한 세대적 특징이 있으며, 그것이 특히 현재에 대한 특정한 시각으로 표현되었다’고 한 말에 동의하십니까?

 

■ 전후 세대 철학자들에 관해 헨리히가 말한 ‘특유한 세대적 특징’이라는 감성을 제가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세대 구분으로 철학자들을 다른 학문 동료들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쉽지 않다고 봅니다. 저와 제 아내는 같은 또래 사회학자들 그리고 역사학자들과 우정을 맺으며 매우 비슷한 사고 방식을 경험했습니다. 인문학부 내 모든 학문 분야에 존재하던 더 깨어 있고 더 뚜렷한 개성을 가진 정신들 속에서 어떤 공통된 세대적 특성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전통이 부패한 뒤 모든 것이 오염되었다는 혐의를 얻었고, 모든 것이 회의와 불신, 비판의 여과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우리는 철학 교수로서 나중에 플라톤 전통의 엄숙한 제스처에 맞서서, 우리의 직업적 역할에 대해 냉철하고 소박한 이해, 특히 우리의 주장과 이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뿌리내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이데거가 여전히 찬양하던 진리에 대한 특권적 접근권을 주장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분석철학의 방법과 정신을 습득하려 노력했습니다. 독일에서 한때 경멸받던 프래그머티즘조차도 금방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이러한 서구에 대한 무조건적 개방은 독일 철학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저희 세대는, 자랑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각기 다른 이유로 저는 전쟁을 겪은 칼-오토 아펠, 에른스트 투겐트하트, 디터 헨리히, 미하엘 토이니센과 가장 가까웠습니다. 앞에서 말한 동기들 때문에, 우리는 모두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각자 철학 프로젝트를 발전시켰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다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서로를 지켜본 것 같습니다. 브루멘베르크(Blumenberg)는 독불장군이었고,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는 1960년대 초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뮌스터 대학 동료들, 특히 슈패만(Spaemann), 륍베(Lübbe), 마르쿠바트(Marquard)를 포함한 뮌스터(Münster)의 동료 철학자들은, 제가 보기엔 리터 학파(Ritter-Schule) 소속이라는 관점에서 받아들여졌을 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파울 로렌젠(Paul Lorenzen)의 ‘에를랑겐 학파’와 특히 ‘콘스탄츠 학파’인 프리드리히 캄바르텔(Friedrich Kambartel), 위르겐 미텔슈트라스(Jürgen Mittelstraß), 나중에는 페터 야니히(Peter Janich)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세대 철학자에는 알브레히트 벨머(Albrecht Wellmer)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을 공부할 때 수학을 전공했던 그가 제 첫 제자였는데, 우리는 곧 매우 우정 어린 관계를 맺었고, 다른 경우들처럼 가족 간 교류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알브레히트는 뉴스쿨(New School)에서 수년 간 가르치면서 미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벨머는 뉴 스쿨에서 비판이론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 과정에서 토마스 매카시와 그의 제자들도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전통은 오늘날 독일보다 미국에서 더 생생합니다. 197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딕 번스타인(Dick Bernstein 리처드 번스타인), 딕 로티(Dick Rorty 리처드 로티), 특히 긴밀한 연구 협력 관계를 맺은 톰 매카시와의 우정이 수많은 다른 인맥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존버’ 대 ‘난가’ [천 하룻밤 이야기]

‘존버’ 대 ‘난가’

2025년 5월 21일 소만(小滿):

비가 오고 모내기를 하는 절후 소만인데, 예전에는 논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생산도구의 발달로 논길에는 뛰엄뛰엄 모심기 기계들이 있다. 새참은 택배로 하는가? 잘 네모진 논들을 가로 세로 지르는 논길에는 오토바이가 지나가기도 한다.

*

까마득한 옛 이야기 속에는 신선(神仙)이 살았다고 하고, 그 하늘에서부터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는 환인(桓因)에서부터 맑고 상쾌한 아침의 햇살을 받는 나무들이 잘 자라는 곳에 터전을 잡은 단군(檀君)도 있었다. 이런 선도(仙道) 또는 샤먼의 이야기는 오래 즐겁고 평온하게 살아가려는 욕망(탐욕이 아니다)을 표현하였으리라. 그러다가 마을 공동체가 모여서 도시를 형성하고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체계화하면서, 제도를 전승하는 방식에서 입말의 소통을 넘어서 문자를 필요로 해서 중국의 문자를 받아들였고, 그러다가 불교라는 문화가 들어와 천년을 지내면서, 이 땅을 안양정토 또는 불국토를 만든다고 하면서, 불교는 백성들의 고통과 불안에 치유와 위로를 하는 방식으로 삼았다. 세계는 언제나 변전하였다. 토지 소유의 불평등을 해소하려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왔다고 여기는 변역(變易)은 삶의 태도를 바꾸었다. 차(茶)를 마시는 문화에서 누룽지의 숭늉을 마시는 문화로 이행으로는 불교에서 유교로 전향을 설명해 주지 못하지만, 학문의 변화와 삶의 양식의 변화가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맑스라면 생산도구의 변화와 이 도구를 전유(소유)하는 방식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토지를 절(사 寺)의 소유에서 왕조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선후(先後)든 중경(重輕)이든 유학을 토대로 하는 지배층의 담론으로 넘어갔다고 할 것이다.

유교의 전래에서 주자학 또는 신유학은 불교에서 공과 색의 선문답(변증법적 논변)에 대항하여, 선진유학에다가 태극이 무극이라는 담론으로부터, 음양(陰陽)과는 다르지만 이기(理氣)를 중심 논의로 전개하였다. 이런 이원론은 서양의 근세에서 영혼과 신체(정신과 물질)와 유비적으로 닮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담론을 생산하였다. 이런 담론의 대조 또는 유비는 하늘과 땅의 이원화를 대상화하여 다루는 방식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며, 둥글고 자전하는 지구 위에서 인간들이 산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그리고 인간은 지구상에서 자연에서 여러 종들 중의 하나의 종임을 알게 되었다. 점점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물자의 소통이 늘어나고, 서양의 선교사들이나 동양의 군자들 사이에서 소통으로 세계가 하나임이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런 소통의 초기, 17세기에 서양의 학자들이 놀란 것이 있다. 유일신 또는 신학이 없이도, 높은 도덕심과 국가체제를 형성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중국은 유일신이 없음에도 백성들이 훌륭한 덕성을 지신 도덕적 삶을 살아가며, 지식인들이 체제 유지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신학적 사유에서 타종교와 문화를 알지도 못하면서 비하시키는 경향은 오만과 치졸함이 섞여있었다. 동양에서는 자연에 대해 격물치지(格物致知)한다는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신 앞에서 평등과 달리, 동양에서 하늘아래 평천하를 이루기 위해 군자들과 학식 있는 선비들은 사적 탐욕을 벗어나 공화(화이부동)를 실행하려 한다는 점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서양은 기술발달과 도구의 무기화로, 타 지역의 지배를 통한 부의 축적을 신의 착한 부름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들의 탐욕과 오만은 지구상에서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며 식민지를 확장하였다. 수탈과 약탈이 신의 부름일까? 지금도 그들이 행한 전쟁은 그들만의 신의 축복이겠는가? 동양의 도덕과 지식의 습득시기에 서양이 자연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탐욕(욕망이 아니다)의 서양인들은 식민지지배를 보다 확장하고 견고하게 하기 위해 교묘한 조합을 시도하였다. 이런 패거리의 내밀한 결탁(음모)은 19세기 말에 종교의 교리, 국가의 폭력, 지식의 독단, 이 셋을 결합하여 세 패거리(카르텔)의 야합을 이루었다. 이들이 행한 야합 또는 음모에는 벩송이 말하는 선전제미해결(악순환)의 오류를 감추고 있었다. 이 은폐에는 절대자 또는 완전성에 이르는 변증법이 있다고 선전했었다. 이 변증법에는 백성과 인민이 없다. 이런 전도된 사상을 뒤엎어서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독재)를 변증법으로 설명한 이는 맑스였다.

이들은 식민지 약탈과 강압은 기술 문명(문화가 아니다)을 전유하면서 도구를 무기화하였다. 패거리들이 무기를 가지고 식민지에 협박과 공포를 심으며, 패거리들의 재화의 획득을 혈안이 되어 욕망의 충족이라 가르치지만, 욕망이 아니나 탐욕과 도적질의 미화였다. 19세기말 제국주의와 20세기 후반의 제국은 국제질서라는 이름으로 전쟁의 위협으로 여전히 도적질을 실행했었다. 물론 이런 약탈에 대해 저항과 항쟁을 통한 세계사적 혁명은 20세기 전반에 소련과 중국을 낳았다.

그럼에도 패거리들은 지배의 논리를 버리지 않았고, 더욱 견고한 제국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자신들의 삿된(메샹, mechant) 생각을 은폐하고, – 미군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주둔하면서 신식민지에게 비용을 떠넘기는 수법은 여전하다 – 기술문명의 이식에 서투른(mauvais) 민중들에게 죄를 덮어씌우려는 방식으로, 식민지에 독재자를 심으며, 잉여 착취와 자원 수탈을 자행했다. 마치 중세의 마남 사냥을 하듯이, 그들은 식민지 민중을 억압하면서 이에 대해 저항과 항거를, 거꾸로 마치 항쟁자를 음모자처럼 말하는 것도 이 패거리들이었다. 이들은 반역이니 역적이니 하면서, 악순환의 잘못을 민중에게 넘겼다. 루소의 말대로 인민은 선량하게 태어났으나 사회와 제도의 감옥에서 살게 만들었다고 하듯이, 태어나면서 제국의 수탈을 당해야만 했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제국의 세계화는 두 가지 점에서 그들의 방식대로 이루어지 않았다. 하나는 생명계에서 유전자와 그 변이들은 과학의 발달로 질병 없고 고통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 같았지만 지구상에 질병과 비참은 여전하다. 다른 하나는 기술의 무기화를 통해 제국이 주도권을 가질 것만 같았지만 규소의 시대에 누리소통은 지배와 피지배의 방식을 바꾸어 문화의 다양성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과거가 현재를 살리거나, 죽은 자가 산자를 영향을 주는 것을 넘어서, 기나긴 자기 터전에서 생명과 영혼의 생성 과정을 잊는 자 또는 무시하는 자는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잃고서 세계와 합일하는 것이 유일신앙자들의 망상이다. 자기를 잃지 않고서 세계영혼 속에서 자아의 영혼을 ‘존버’하면서 함양하는 것이 루소가 말하는 자기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고 계약을 맺어 합의를 통한 일반의지로 실행하는 것이다. 일반의지 속에 개별의지는 자기를 잊지 않으면서 일반의지를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규소의 시대가 다양체의 흐름으로 이를 증거하고 있다.

*

광복 후에 독립운동가들의 집안은 피폐하고, 일제에 호의호식하던 일제 부역자(부일자)들이 미군이 들어오면서, 미국의 식민지를 자처하는 숭미자로 변하였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치와 자주를 실행하려는 개혁가들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를 만들었으나, 매국적이고 매판적으로 사적이익만을 챙기는 자들이 반민특위를 무산시켰다. 이번 계엄세력에게는 특별조사법을 만들어 꼭 신상필벌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런 자들이 80여년동안 상층을 구성하여 대중을 지배하였으나, 대중은 스스로 자치와 자주를 이루기에는 교육과 학습, 의식화의 과정이 거쳐왔다. 그 중에서도 우리 입말로 소통하고 우리 문자로 전승하는데 엄청난 노력과 내공을 쌓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저항과 항거, 항쟁과 광장시위를 하면서. 지금도 부일자와 숭미자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으리라.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로, “범이 없는 골에 여우들이 설친다”고 하는 할배들은 일제 잔재가 나라를 말아먹는다고 걱정했다. 할배들은 일제의 부역자들이 이 나라를 일본에게 넘겨주듯이 숭미자들이 미국으로 넘겨주는 것을 걱정했다. 그 과정에서 범들의 후예는 몰락하여 개장수와 각설이가 되고, 제국주의 좀비가 제국의 주구(走狗)가 되어, 범 없는 골이 여우가 왕질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이 ‘왕’자를 들고 나온 것은 그 패거리(음모자)들의 일부가 표면으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공화국을 만들려는 대중과 인민의 저항은 수면 아래로 잠시 감춰져 있다가도 이어지면서, 적들의 심장을 향한 항쟁은 불쑥불쑥 솟아나왔다. 이 요상한 세력들은, 인민의 저항을 반체제, 반민주로라고 지 멋대로 규정하고, 마남사냥과 반국가주의로 몰아붙이면서, 자신들의 상층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전승의 이야기에서 “곰과 범”의 이야기에서, 왜 우리의 민담과 설화 속에서 범이 남아있는데 비해, 곰을 이야기는 사라졌는가. 문화의 전승은 백성의 입말에서 이어져 왔을 것이고,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범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1894 동학혁명으로, 그리고 1895년부터 공공연하게 우리 입말이 문자로 등장하였다. 마치 범이 독립운동을 하려 만주로 떠나고 난 자리에 여우와 원숭이가 설치듯이, 일제에서 조선어조차 말할 수 없는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광복후 입말과 문자화는 그 당시에는 지식인의 것이었으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대중화를 이어지면서, 공화국의 헌법에서 지적하듯이 국민 주권자이며, 인민주권 사상은 점점 대중화를 되어갔다. 1987년 이래 입말의 문자화와 가로쓰기가 전개되었고, 인민은 스스로 자치와 자주의 길을 찾아가면서, 인민이 존나 버티면서 기본심급이면서 최종심금이라고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법원도 최종판단의 결재를 인민에게 받아야 한다. 인민의 권리로 이명박과 박근혜를 감옥에 보내었고, 탈옥 중인 윤석열도 곧 감옥으로 보낼 것이다.

“지구는 둥글다”에서, 원주를 구성하는 모든 점들은 그 점이 하나하나가 중심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21세기에는 그 점이 트래픽(접합)의 다양체이다. 한반도가 다른 어느 터전들과 마찬가지로 고유성이 있고, 자치와 자주를 넘어서 자율성과 자발성이 분출되었다. 입말과 그 문자의 독특성은 새로운 문화의 전승과 확산으로 이어졌다. 사회의 도덕성은 인민의 것이며, 사회의 제도화가 인민의 것이라는 것라고 문자화하면서 제헌 헌법이래로 공화정을 추구해 왔었다. 그럼에도 매국적이고 제국의 주구의 지배에서는 공화가 아니었다.

정당정치는 상층은 자기들의 잘못(mal) 또는 삿된(méchant) 것을 감추고자하였고, 이를 드러내고 저항하는 세력에게 반국가, 반체제 또는 빨갱이로 몰았다. 제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을 보며 나무라는 방식은, 세 패거리들으 좀비들이 실행했던 방식을 그대로 이 터전의 인민들에게 강제하고 위협하였다. 군비, 검비, 법비, 재비 등이 이참에 드러났다. 국민은 굴복하지 않았고 20세기 후반 내내 저항과 항쟁이 있었듯이, 21세기에 촛불시위와 응원봉 빛축제와 키세스 시위는 새로운 문화의 창달이었다. 이런 운동과 분출은 한류라는 문화의 세계화에서, 스포츠에서도, 대중음악에서도, 영화에서도, 게다가 문학에서도 전 세계 대중들에게 감응과 공감을 불러왔다. 범이 내려왔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터전에서 누리소통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순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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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첫 사반세기에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의 터전에서 삶의 양식과 문화가 갑자기 세계 속에 있은 것이 아니라, 별종, 덕후, 존버들이 스토아 표현으로 노력(포노스) 내공(토노스)을 거쳐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출이 된 것은 단지 5년 사이이다.

하나는 코로나로 전 세계가 우왕좌왕하던 시기에 우리 문제인 정부는 새로운 방식으로 역병에 대처하여 우리나라가 자연스럽게 세계사에서 주목을 받았다. 역병은 공간의 구별이 아니라, 지구가 공전하고 자전 하듯이, 공간자체가 운동하고 흐른다는 것을 알게 했다. 지구가 움직인다고 해도, 살아가는 보통사람은 이 터전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여기며 습관적으로 산다. 그 습관의 방식에 젖어서, 어쩌면 세 패거리들이 대중 의식을 포획하고 포로로 삼고서, 노예 상태로 만드는 세뇌의 방식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를 대중들도 깨닫기 시작했다. 혼밥, 혼술, 혼일, 혼발신과 혼소통 등은 산다는 것이, 한 리좀이 다른 리좀들과 여러 방식으로 접속하는 가운데, 덩어리(트래픽)를 만들고 살아간다는 것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 리좀의 덩어리가 운동하고 있고, 기나긴 과거의 노력을 통한 ‘존버’의 특성이다. .

다른 하나는 여러 번 말했지만 철의 시대를 지나 규소의 시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것도 코로나 2년에 혼밥 혼술, 혼일, 혼소통(일인 유투버) 들로 누리소통 공간은 각각이 지구상의 한 점이 되었다. 이 점들 각각은 다방향으로 확장되고, 또한 접속의 덩어리는 리좀 덩어리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이 도구로서 소통 방식에서, 방송과 신문과 다른 방식으로 쌍방이 정보와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와 제국은 정보 또는 명령의 전달이라는 일방통행을 넘어서, 선전제의 해결 없이 담론과 판단을 강제하면서 지배하려 하였다. 그 20세기가 지나가고 21세기에 다양체의 활동은 제국의 통제가 바랐던 대로 일방통행이 될 수 없었다. 일방통행인 양식이 광기라는 것을 알아챈 것도 한 몫을 하였다. 제국이 광기라는 것이다.

서양 사상사에서 인간 류(인류)와 인간 종(인종)에 의한 구별은 논리학의 류와 종의 방식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 개인 또는 개체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뭔가 이탈하고 저항하고 반항하는 것으로 여겼고, 심지어는 이탈을 도착자로, 저항을 분열자(별종들)로, 항쟁을 악마 또는 빨갱이로 몰아가면, 세 패거리는 절대성과 완전성이라는 요상한 용어를 들먹이며 민중 또는 인민을 배제하거나, 포로를 만들지 못하면 제거하려 하고, 포섭되지 않은 자들을 개돼지 취급하기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패거리의 습관적 사고에는 탐만치가 가득 차 있으면서, 습관의 조건반사처럼 민중을 세뇌시켜 요상한 사건들을 만들었다. ‘국민의 힘’에서 서울의 강남구에 태영호를 내세우든 김정은을 내세우든 극우 꼴꽁들은 묻지마 투표를 하며 지지하였다. 이런 패거리 사고의 세뇌가 영남에서는 부지깽이를 내세우든 똥작대기를 꽂든 지지한다고 한다. 모든 사물이 ‘부타야!’라는 선승에게 부지깽이와 똥작대기도 부처이지라고 하듯이, 선거에서 우리 편에 투표하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또는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같은 단어 부지깽이라는 용어가 선승에게는 노력과 각성의 지표가 되는가 하면, 강남과 영남에서 하나님과 같은 신주가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개선하고 개혁하여 통일로 나가는 운동은 여전히 있다. 요즘은 영세중립국으로 나가자고 하기도 한다. 생명체의 소통 방식은 아직도 해결해야할 부분이, 코로나 해결보다 무한정하게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디지털의 세계는 누리소통의 확장이 기하급수적을 넘어서 불교의 숫자처럼 4제곱승으로 비약하고 있다. – 3제곱은 공간인데 4제곱승으로 확장은 무엇일까? 어쩌면 누리소통의 공간이 4제곱승일 것이다. – 이 비약의 미래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신선만이, 붓타만이, 신만이 안다고 하면, 그것은 부정형(4승의 형상은 아무도 모른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누리 소통의 확장과 다양체의 흐름을 아무도 모르는 차원의 무한의 다양체가 펼쳐지고 있다. 이런 세계와 문화의 창달에서 입말과 문자(이미지 포함)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살아가는 방식은 젊은이의 사유와 놀이(게임)에 달려있다. 이 젊은이는 “난가”라고 하며 기다는 것이 아니라, 노력(포노스)와 내공(토노스)의 과정을 겪으면서 잘못(mal)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투름(mauvais)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학습하면서 벗과 즐거이 유쾌하게 사는 방법을 찾는 존버(덕후, 별종)를 만날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언제나 삶이 먼저이고 그 다음 사유하는 것이다.

코로나와 같은 생명체의 변이와 확장 속에서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제국이 없는 세계 속에서 또는 세 패거리가 없는 터전에서 사유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젊은이는 오래 깊이 사유할 수 밖에 없다. 열여덟에서 서른여덞 정도까지. 우리의 기나긴 과정에서 서투르고 착오와 오류도 있었지만, 우리가 창안해낸 입말과 문자화가 있으며, 누리소통을 통하여 문화의 창달로 널리 인류뿐만이 아니라 생명계도 전지구도 사유할 수 있는 길을 넓혀간다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 일까. 이런 임무에서 또한 우리 터전으로부터 지작할 수 있는 우리 입말과 우리 문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상쾌하고 통쾌한 일을 이룰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라, 불평등 해소와 통일은 여러분의 덕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별종들이 제국주의와 제국에 저항하고 항쟁하였듯이, 존버와 덕후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통일은 도구의 무기화에서가 아니라, 도구를 널리 이롭게 사용하는 누리 소통에서 다양체의 발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 도구가 인민들 각각의 손바닥에 놓여있다, 쳇지피티의 문자화나 인공지능(AI)의 지식화와 달리 덕후들과 존버들의 창안과 생성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생명학과 디지털의 발전은 철의 시대의 2천5백년의 과정을 거의 한 세기만에 이룰 것이라 한다. 생명과학의 정보축적 만큼이나 디지털 사용의 확장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우리의 자발성에 의한 입말과 문자화, 남북의 소통은 곧 이어질 것이다.

(4:11, 58PMA) (5:24, 58P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상부상조 대 이기주의 – 자연권과 생태계 시대로 [천 하룻밤 이야기]

상부상조 대 이기주의 – 자연권과 생태계 시대로

2025년 4월 20일 곡우(穀雨), 비가 올라오더니 빌라 밑 처마에 제비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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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백성이 근본이고 백성의 뜻이 하늘이라 했었다. 공동체에서 각각이 고유 권리로서 사회권과 자연권이 있다는 이야기는 유일신앙의 첫 화두인 하늘이 무한하다는 하는 브루노의 무한 개념이 열리고 난 뒤이다. 하늘이 열리는 것에 대한 놀라움은 망원경을 통해 하늘에 뚜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뚜껑위에 옥황상제나 유일신, 선녀나 천사가 머물고 있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나라 이야기가 하늘에 대해 경외심을 심었던 것은 여섯 살 꼬마에게 삶에서 도덕과 은덕을 가르치는 도덕론이었다. 서양사에서 하늘과 땅 다음으로 ‘인간이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하면서 인간이 황제의 신민도 아니고 신앙의 예속자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종속하다는 뜻이 바뀌어 인간이 주체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들어선다. 화두는 하늘과 땅에서 인간으로 바뀌는 것이 근대의 시작인 셈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하늘의 완전성과 땅의 불완전성의 대비는 고대로부터 요즘의 AI시대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화두로 남아있다. 하늘의 무한성도 땅의 개연성도 인간의 오성 또는 지성이 만든 체계이거나 배치에 따른 질서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가 만든 원리와 공리를 알고, 법칙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공동체를 안전하고 원활하게 이끌어간다는 것을 안다. 그 안전과 편리를 기준으로 도덕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도구의 발달에서 인간이 눈과 귀로 익히는 것 이상으로 순서에 맞게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도덕교육을 넘어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의 최소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1750년대 증기기관과 1830년대 모터의 발명이후 배, 자동차 등에서 도구를 다루는 것은 과정의 순서와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 공동체에서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면 질서를 따라야 한다. 이런 배치와 질서의 존중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는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그런데 삶의 터전이 넓어지고, 같은 배치와 질서 속에서 있지 않은 공동체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도 통일적인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면 그 통일성의 기원과 원천은 언제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편리와 선후 문제에 앞서 있어야 하는 화두가 다시 불려 나온다. 절차와 순서들은 선문답들로서 파라독사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멋이 중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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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기 지금 하나의 사물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그 이외에 다른 사물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다른 법칙과 질서가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터전에서도 동일한 질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동일한 질서는 무엇인가? 이 질서 이외에 다른 질서에 따라 행동하는 이들은 질서를 어기는 것으로 여긴다. 동일성에 벗어나는 것은 이탈자 또는 반대자로 생각한다. 동일성 속에 산다는 것이 통일성 속에 사는 것이고, 하나의 법칙과 질서로 사는 것이다. 이 법칙과 질서는 어디서 오는가? 하나의 원리와 공리 속에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원리와 공리는 어디서 오는가? 이것을 신앙자들은 신에게서 온다고 믿었다. 적어도 크리스토스를 내세우기 이전에는 현자들은 논리의 원리와 기하학의 공리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원리와 공리가 매우 정합적이고 체계적이라 이를 잘 아는 것이, 천체의 운행에도 지구 위에서 삶의 이동에서도 잘(bien) 실행하며 산다는 것이다. 이 원리와 공리가 누가 만들었는지를 모르지만 두 가지 방향에서 인간들 사이에 전승되었다. 땅위의 10진법과 하늘의 60진법을 은연중체 체계화 세웠듯이, 터전에서 인간이 서로 소통하면서 말하는 데도 언어(입말)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원리와 공리에 걸 맞는 논리의 법칙이 동일률의 규칙이다. 이 동일률의 성립은 자연(땅)에도 하늘(신)에도 성립하는 통일성을 갖추었다고 여겼다. 말로 표현하여 하늘(신)은 하늘(신)이고, 땅은 땅이다, ‘사람은 사람이다’를 부정하는 이는 없다. 이것은 하나는 맞다 이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하는 경우에, 동일률에 맞으면 맞고, 아니면 틀렸다고 한다. 동일률이라는 것이 먼저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같은 것과 다른 것은 항상 같이 있어왔다. 하나를 질서 또는 순서로 정하게 되면, 다른 질서는 틀린(다른, 맞지 않은, 나쁜) 질서인 것처럼 여긴다. 게다가 공동체에서 달리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경에 입말의 논리학이 성립하는 시기에 동일률과 더불어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는 논리도 생긴다. 간단히 A는 A아닌 것이 아니다(A=~A)이다.

배중률의 편리는 공동체 안에서 편가르기를 한다. 이런 편가르기는 터전(땅)의 논리에서 이곳은 내꺼 라는 소유의 방식에서 온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삶에서 터전과 하늘은 공유의 것인데, 이런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경계를 만든다. 농경이나 목축에서 토지와 하늘(기후)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것들 덕분에(음덕으로 은총으로) 생산된 것은 생산하는 자의 소유가 된다. 그 시대에 생산자는 그 덕분에게 감사한다. 생산물을 수확하면 첫물의 곡식으로, 첫물의 새끼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 자연(하늘과 땅)의 덕분임을 감사한다. 이 생산물을 전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는 전유의 생각은 단지 “덕분”에게만 감사하고, 주변의 이외에 사람들에게 나눈다는 것을 배제하는 방식이 도래한다. 사적 소유의 생각에서 배제의 방식이, 즉 이로서 배중률이 생활 속에서 젖어든다. 이를 좀 더 사유의 외골수로(공상으로)가면, 나 이외에 다른 이를 믿지 말라 이며, 더욱 추상화의 길로(망상으로)가면 나외의 다른 신을 믿지 말라가 나온다. 배중률이 사유규칙으로 나오기 전에 이 ‘나이외’라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회의 사적 소유가 생기고, 도적질 하지 말하는 규약은 어느 초기 공동체에도 있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너도 노동하고 노력해서 먹고 살려고 해야지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당연히 개인이 노동력이 있을 경우인데, 어린 시절과 늙은 시절에 노동력이 없는 경우를 생각하여, 가족과 씨족 공동체 안에서 능력있을 때 일하며 노동력없는 이들을 먹여 살리고, 스스로 노동력 없을 때 도움을 받아서 산다. 사적 소유가 없는 작은 공동체에서 남의 것을 훔친다는 개념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도와서 살아가고 또한 삶의 과정 전체에서 노동과 필요가 상부상조로 배치되고 분배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배중률은 언어 소통에서, 이 말투와 판단(명제)은 맞기에 이에 맞게 행동해야 하고, 저 말투와 저 판단은 논리적 과정에서 위반되기에 행동을 하거나 함께 일하게 되면 어긋나거나 질서 파괴가 이루어 질 수 있기에 수정 또는 교정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배중률이 공동체 삶의 확장에서 하늘과 땅을 소유할 수 없듯이, 많은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소유 없는 공동체와 달리, 공동체가 확장되고 생산력(분업)도 생산량도 많아지면서 자연의 위험에 대비하고 외부의 적들에 공격에 대응한 군사들도 필요하게 되면서 공동체 안에서 체계를 갖추고, 이를 총괄하는 우두머리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공동체의 체계는 중한 것과 먼저인 것(중경과 선후)에 따라 실행하는 방식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중경과 선후를 공동체에서는 평의를 거쳐서 평결을 내리고 합의하여 실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급박한 천재지변과 또는 외적의 급습에 대비하는 군사조직과 행정조직의 필요에 따라 배치의 질서가 위계적 질서로 가는 것이 편리하고 안정적이라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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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상부상조 하는 방식으로 함께 산다는 점에서, 또한 타인의 또는 기술의 전승의 덕분으로 산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이기심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지냈다. 이런 공동체의 사유에 말 그대로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를 걸쳐서 몸에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기시대의 도구발달은 전혀 다른 공동체 상황을 만들었다. 동일생산물의 다량제작이라는 거푸집의 발달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금속들을 다룬다는 것은 생산력 뿐만 아니라 도구/무기의 발달을 가져왔다. 도구의 소유를 개인의 능력으로 착가하는 이들이 배중률을 심는다. 나 이외 다른 이를 믿지 않는다. 이 이기심은 자기와 달리 생각하고 다른 발명과 창안을 배제한다. 이런 관계들 두 질서 사이에 모순이라고 하며 모순률을 들이 민다. 그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승된 지식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배제하고 자기의 것으로 여긴다. 이 배제를 믿게 만든 신앙이 유일신앙이다. 다른 질서가 있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들이, 스스로 체계와 통치에서 상층에 있다고 여긴다. 인간위에 인간, 인간 밑에 인간을 만드는 사고가 고착되어간다. 그럼에도 모순을 해소하고 변증법적으로 통일성을 이루어 간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공동체에서는 배중률이라는 것이 착각과 자기기만이라고 한다. 우주라는 세계에서 자연의 발생은 언제나 여러 갈래였고, 각각의 길들은 터전에서 여러 삶의 방식들을 표현한다.

질서는 하나의 질서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질서가 있다. 한 질서에 비해 다른 질서가 배제되거나 모순된다고 하면서 자기 동일성만이 진리이고 덕분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속에 탐욕과 오만이 스며들어있다.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들을 만들어가면서, 타인의 삶과도 함께하면서 배치와 배열을 만들어가는 것이 사회이고 국가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동일률과 배중률에 세뇌된 상층은 다른 질서를 나쁜 것으로 또는 악마로 몰아갔다. 이런 놀이에서 가장 나쁜 사례가 브루노를 산채로 화형 시킨 것이다. 이 치졸한 부류는 1889년에도 브루노를 단죄하였으며, 반성과 사과는 없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화두는 여전히 유일 신앙자들에게는 배중률에 속한다. 인간의 스스로 아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동일률과 배중률이 삶에서 필요인가 또는 다른 인간을 도구로서 개돼지 취급의 지식인가? 인간이 자연과 하늘의 이법을 정립할 것인가는 선문답처럼 남아있다. 나 이외 다른 것(똥짝대기)을 믿지 말하는 화두는 불교에서 이미 오래 전에 불성이 똥짝대기에도 있다고 여겼고, 그리고 서양사상사에서 12세기에 유명론에 의해 논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으며, 의식과 인식의 주인이 신이 아니라 인간일 수 있다는 이신론이 등장하기도 하였고, 인민이 주체화될 수 있는지를 말하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시대에서는 유일신앙의 화두를 아편쯤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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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배우는 하나 더하기 하나, 한 점과 다른 점을 잇는 가장 바른 선은 하나다 라고 하는 상식은 오관을 통한 지식이다. 오관을 넘어서 의식이 다루는 지식은 근대 이래로 여러 갈래이다. 동일률과 배중률을 기반으로 하는 지식은 상층의 원리와 공리가 지구(터전)에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온다. 그 믿음은 그리스어로 플라톤이 쓴 피스티스(억측)이었으며, 번역 상으로 견해이며, 영미 철학에서 믿음이라 한다. 이런 믿음은 더 이상 묻지 않은 선천성으로 진리는 통일성을 갖고 동일률에 근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였다. 경험론의 믿음에는 삶의 공동체에서 감정과 감화가 있고도 한다. 이 시대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에, 서양이 중국을 알면서 놀란 사실이 있다. 종교개혁이후로 카톨릭이 자신의 내부에서 불화와 반대에 부딪히면서 이방지역(다른 문화지역)에 종교전파를 위해 군대식으로 만든 제수이트들이 중국의 문화를 보았다. 그들이 놀란 것은 유일신앙 없이도 도덕과 사회를 잘 건설하였던 역사와 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구 안에서 문화들이 통일성을 갖는가? 서구는 원리와 공리의 학문이 전지구적이라는 문명을 들이대며, 다양한 문화에 대해 문명의 통일성이란 측면에서 서구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전지구적으로 유일신앙 밑에다가 식민지들을 만들어 가려했다. 이 탐욕과 오만에는 철학사적으로 사적 소유의 인정과 위계질서에서 공동체의 질서 위에 유일신앙의 질서가 있다고 한다. 이 무지몽매한 질서가 하나이며, 다른 질서는 모순이며 배제이며, 불온세력이라며 악마화하고, 자신들의 망상을 감추려 빨갱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20세기에 두 번의 전쟁에서 유일신앙에 반대하여 생긴 소비에트와 중국에 대해 우월권을 행사하기 위해, 미국의 패권 제국이 20세기 후반 내내 해왔던 수법이다. 21세기에 뭔가 달라지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을 미국이 굴복시키려고 하다가, 제국주의 붕괴처럼 미국의 제국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상부상조로서 터전을 가꾸어가는 방식(공유질서)과 하나의 질서 아래 다른 문화를 배척하고 한 문명 속에 굴종시키려는 방식(패권질서) 사이에 차히를 보게 된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배제의 원리로서 윤석열이 계엄을 하듯이,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고 한다. 달리 사유하고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는 윤석열에 항쟁하는 반정권세력인 셈이다. 다양성은 전지구적으로 퍼지고 있다.

여전히 문화의 다양성을 만든 것은 지구라는 터전이 통일성이라기보다 다양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도가 먼저가 아니라, 자연과 생태계가 먼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일찍이 벩송은 한 질서의 규정과는 다른 질서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 질서가 다른 질서들을 거짓 또는 나쁜 질서라고 보는 것이, 벩송의 부드러운 어법으로 유일신앙이 정태적 종교로서 착각이라고 한 것이다. 착각은 자기 탐욕과 오만한 자식 그리고 배중률의 신에 예속되어 망상에 빠지는 것이고, 그 망상을 피스티스 또는 신앙으로 받아들여 착란에 빠진다. 이러한 일들은 지구에서 밀농사를 짓는 문화과 쌀농사를 짓는 문화의 차이에서만이 아니고, 날씨에서 더운 열대 그리고 온대와 난대 사이에서 문화의 차히는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우선이라는 것이 생태계의 섭리이다. 벩송이 말한다. 사는 것이 먼저이고(primum vivere) 그리고 철학적으로 사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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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말했지만, 유일신앙의 권세, 국가주의의 권력, 앵글로색슨 철학의 권위의 세 패거리를 만들어 세상사를 지배하려하며, 로마제국이 식민지들 다스리듯이, 제국을 형성하려 했다. 그게 쉽지 않아서,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금본위를 그 다음 기축통화로, 그리고 20세기 후반에는 지역 전쟁으로 그리고 21세기에는 무역으로 지배하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제국이 여전히 자연에서 인간이 주체로서, 패권으로서 하늘과 땅을 인간의 지배하에 둘 수 있다는 신앙에 갖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그런 오만한 인간중심주의 신앙과 차히를 생성하고 발산하고 있다. 신앙에 체계화든, 사회의 조직화든, 지식의 통일화이든, 인간이 만든 것이지 신의 계시나 은총이 아니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터전에 맞게, 사건들의 연관에 평의와 평결에 의해 제도화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솔하게 타자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만드는 것이 주체화이다. 아직 인간의 우주 안에서 지구의 터전에서 주체화가 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중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체화는 지구의 터전에 따라 다르다. 어쩌면 20세기에 소련과 중국을 통하여 실험과정을 겪으면서, 미국 패권의 제국과 다른(차히)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성립에서, 이기심을 주장하는 문명의 도구 사용에 대한 지식이 49퍼센트쯤, 상부상조와 더불어 자연의 섭리와 함께 생태계를 따르면서 살아가는 의식이 51퍼센트가 되어 갈 것 같다. 이런 사회의 건설에서 전자의 카르텔에 젖어서 김건희와 윤석열 집단은 자기들만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망상과 착란에 젖었다. 인민은 그렇지 않다고 광장에서 불빛을 들고 함성을 질렀다. 소수의 분파적 지식 인간이 아니라, 인민이 주체화를 만든다. 상층이 아무리 인민을 개돼지 취급한다고 해도, 인민이 합의하는 평의와 평결은 인민의 최종심급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단지 국회, 정부, 사법의 고위직위자들이 자신들이 판단과 심판이 최종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21세기의 누리소통은 인민의 최종판결 없이는 어떠한 질서, 법칙, 원리, 공리도 현상화에서 사건들에 그들의 뜻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주체화는 우선 같은 입말을 쓰는 8천만의 방식에서 공통감각으로서 상식과 생명의식으로서 공통 감정과 공감이 세 패거리의 야합보다 먼저 기본으로 깔려 있다(밑에 있는 것이 실체 sub-stance 라는 개념이다)는 것이다.

패거리가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들의 지배가 당연하고 필연적이라고 여기며, 불온세력이니 중국추종자니, 반국가적 빨갱이니 하면서 배중률에 의한 자기 동일성에 논의 또는 문답을 하면서도, 그 말을 하는 그네들이 파라독사에 빠졌다는 것을 젊은이들은 잘 안다. 젊은이는 과거의 어떤 시대와 달리 상층의 지배 사고와 차히나는 주체화 과정의 흐름에서 트래픽 덩어리의 연관들을 보고 있다. 젊은 세대는 이미 새로운 시대에, 달리 사유하고 문명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의 차히를 생산하고 창안하는 시대 속에 있다. 과거에는 상층이 인민에 반란이란 표현을 섰지만, 거꾸로 누리소통 시대에는 김건희와 윤석열이 반란세력이라는 것을 안다.

세계사에서 공동체사회를 만들려는 국가들이 반세계적이 아니라, 전쟁의 위협과 공포를 만드는 미국 제국의 패권이 반세계적이라는 것을 안다. 일부사상가들은 18세기를 계몽의 시대라고 표현하는 것은 상층이 백성과 대중을 교화하는 것으로 여겼으나, 프랑스 18세기는 “빛들 시대”라고 하는데, 빛은 중심에서 밖으로 무한히 다양하게 발산한다. 그 세기의 사상가들은 탈종교의 시대였으며, 계몽이 아니라 인민이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시기였다. 게다가 그 시대에 똑같은 단어(pitié)가, 상층은 민중에게 동정을 배푼다고 하였고, 빛들의 사상가들은 인민이 인민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고 한다. 동정과 연민의 용어 사용의 변화가 있듯이, 인간이 사회를 조직화하면서 위계를 모방 속에 사는 백성들은 서로간에 전쟁으로 보았던 홉스 같은 사회권(자연권)을 주장하는가 하면, 루소는 인민들 사이에 연민이 있어서 자연권을 지니고 그 권리를 국가권력에 양도하지 않고서, 권력이 인민의 의사에 벗어나면 언제든지 그를 소환하거나 파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공화국은 동정이 연민으로 사회권이 자연권으로, 반란이 항쟁(발현)으로, 같은 입말이라도 사용방식이 바뀌는 시절에 대혁명이 도래했으며, 국가권력인 왕을, 교회권력인 일부 성직자를 단두대에 보내면서 공화국을 세워보았고, 반동들에 의해 왕정으로 되돌아갔더라도 인민의 의식화와 주체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공화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민의 저항에 대해 권력의 반란이라는 12월 3일 이후, 사법권에서도 반란수괴를 파면시키는 4월4일을 거쳤다. 동학혁명으로 한글이 전면에 나온 1895년 이래로 그리고 1987년 가로쓰기와 순 우리말쓰기는 인민의 주체화 과정이었다. 젊은이들의 손바닥에 놓인, 부처님 손바닥처럼, 누리소통의 도구 속에서 입말만이 아니라 그림과 노래까지도 리좀이 흐르고 있다. 고착적이고 고정된 유일신앙의 사고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새로운 소통도구와 입말이 그 소임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는 새로이 조직화(3.3.3,3)의 발현과 창안과 흐름으로 새로운 시대를 만들 것이다. 영웅, 호걸, 성인, 군자가 세상을 만드는 시대가 아니라, 인민이 주체화로 등장하면서 스스로 인물과 덕후 만들기(생성, 되기)의 시대에 있다. 이 만들기에는 노력과 내공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노력과 내공을 이루려는 젊은이들 조직을 창안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자발성으로 주체화를 이루는 시대가 왔다.

삶이 먼저이며, 혁명은 여전히 흐른다. 흐름에서 즐겁게 잘 흐르는 트래픽의 덩어리를 만드는 것이 젊은이의 멋있는 삶이 될 것이다.

(5:28, 58OLI) (6:06, 58OL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리좀은 흐른다 [천 하룻밤 이야기]

리좀은 흐른다.
2025 03 20 춘분(春分): 책력의 기준이 춘분이라 한다. 동지가 기준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명은 공간의 표면 상에서 흐름과 시간의 심층 에서 흐름이 있고, 이로써 생명의 흐름을 이해할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어서 온갖 말과 문장으로, 그리고 학술적 체계로 서술해 보려고 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자연의 흐름을 탐구해야 한다는 그리스의 자연주의자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의식의 인연연기를 깨달으려 했던 불교가 있다. 이 둘은 소위 말하는 불가지 또는 화두로서 다루었다. 이에 비해 유가에서는 제도 속의 삶에서 안빈낙도 할 수 있는 평천하를 생각하였고, 이들과 달리 로마의 압제 속에서 인민의 비천한(miserable) 삶을 공동체의 삶에서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 인도주의)의 평화를 찾으려 했던 예수 공동체도 있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인민의 삶에는 신 또는 신들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서로 서로 암묵적 합의와 계약을 통하여 인민의 삶 속에서 일반화된 덕목 또는 도덕이 있었다. 왜 상층은 인민의 덕목 위에다 신의 완전성, 황제의 절대성을 놓으려 했던가? 싯달다가 보기에는 그들에게는 그들의 탐욕이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는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민중의 무지에 분노하는 오만함이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서 이를 일깨운 이들은 철학자들이 아니라 비극시인들과 희극작가들이었다.

유가에서든 도가에서든 평천하에서 사적 이익을 탐내는 자들과 이 재산으로 백성을 부리는 자들이 평천하보다 개인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소인배 같은 사고라 하였고, 이를 정화하고자 인의(仁義)든 무위자연(無爲自然)이든 인간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서로 다를 지라도 공동화할 수 있는 공화(共和)를 내세웠다. 현자들은 논리적 사고가 허구이자 이름뿐이라 하였고, 최상위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아도 사람 사는 세상은 물 흐르듯이 흐른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탐만치에 빠진 자들이 끊임없이 민중, 백성, 인민을 노예처럼 대하면서 맑스 표현대로 잉여생산을 사유화하였고, 요즘 표현으로 임자 없는 돈(백성의 생산)을 먼저 먹는 놈이 주인이라고 하면서 탐욕과 오만의 극치를 이룬다. 이 탐욕을 욕망이라 부르는 지자들이 권력에 포획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중생을 권력과 권세에게 받치고, 지자는 자신들의 권위를 누리려는 시대를 만들고자 하였다.

권세, 권력, 권위에 젖은 자들이 계엄령이든 개몽령이든 자신들의 부귀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눈 내리는 가운데 눈보숭이처럼 밤을 새워 지낸 젊은이들이 다른 행동으로 실천한다. 이런 삶의 노력을 들뢰즈가 리좀의 흐름이라 했다. 생명의 흐름이, 즉 리좀의 연결망은 공간에서 그리고 시간에서 흐른다. 입말의 흐름인, 누리소통도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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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서양 철학사에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있을 것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 이오니아학파 이래로 퀴니코스-스토아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이런 종류들이 네 가지라 한다. 시간, 공간, 이데아(관념), 아톰(원자). 앞의 두 가지는 서양학문에서 두고두고 토대로서 다룸으로서 과학이든 철학이든, 그리고 종교이든 첫째 화두로서 남아있다. 그리고 뒤의 두 가지는 개별학문의 발달로서 인간들의 사회와 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두 용어를 정교화하고 개념화하면서 인간이 무엇을 지향(욕망)하는지에 연관이 있다.

서구와 동양에서 각각은 천년이 넘게 종교의 시대, 그리고 오백여년을 넘게 인간의 지위에 대해 현자들이 논의하던 가운데,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현자들의 삶의 태도가 인민과 프롤레타리아의 삶에 지침이 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삶의 터전에서 도구의 공유화(공산화)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현자든 지자든, 공동체주의자든 사적이익 추구자든 하늘과 땅, 공기와 물이 사적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시대의 변역과정에서 기계 생산물의 사적소유를 이론화하는 자들에게, 공유를 주장하는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당하였다. 그럴까? 그 사적 소유를 주장하고, 체제를 만들고,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체계를 정립한 것에는 유일신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세상이 자연 속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모든 소유가 신의 것이라는 착각과 환상, 심하게는 망상에 빠졌다.

이들 유일자 신앙자들은 권력의 체제와 싸움에서 상위를 차지하려고 천년을 싸웠다. 이들이 전쟁에 동조하기도 하였고, 심하게는 예루살렘을 회복한다는 이름을 전쟁을 조직하고 독려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직적 지배가 잘 안 될 때는 길고 긴 시대를 마남사냥도 서슴치 않았다. 이 마남사냥을 지휘하는 신학체계를 신앙이란 이름으로 자연과 지식에 대해 상위의 우월권을 설득하기도 하고, 공포와 위협으로 지배와 명령권을 꾸며내어 거꾸로 민중의 어리석음에 분노하고 화낸다. 윤석열이 격노하고, 이어서 김건희가 한동훈을 죽이겠다고 하거나, 그리고 이재명을 총으로 쏘고 죽겠다고 분노하는 것도 이런 유일자 신앙에 세뇌된 탐만치의 산물이다. 탐욕, 오만, 그리고 치졸함에 빠진 자들을 싯달다가 마구미라고 하지 않았던가.

서구 19세기에 탐욕의 권력으로 세워진 근대 산업국가의 통치자로서 국가의 통치권자가 어느 세기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으며, 게다가 선거를 통하여 체제를 통한 합법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위험에 처했다. 서구에서, 특히 빅토리아왕조(1901년)와 오스트로헝거리 제국(1918)의 무너짐은 이십세기 초이다. 수구파들은 또다시, 국가주의가 아닌 제국주의 또는 자본의 제국을 건설하려했다. 인민을 공포에 밀어 넣는 전쟁을 서슴치 않았다. 유일자 신앙은 이 전쟁에 은연중에 동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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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민주화의 과정은 인민의 삶의 흐름 속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입말이 공공화 되면서부터 4.19를 거치면서 조봉암과 인혁당의 건설에서, 그리고 유신독재에 반대하던 인혁당 재건에서 남민전을 거쳐왔다. 그리고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민주항쟁에서도 흐름은 지속되었지만, 인민들이 서로 소통이 되기에는 규소시대의 발전을 기다려야 했다. 누리 소통이 전지구적으로 소통되는 시대는 코로나19의 전지구화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아마도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시절이라 한다. 하나는 대중과 소통하는 연극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고라 광장의 민회가 있었다. 전자에서 비극들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을 경계하였고, 희극은 사회의 고착화에 각성하게 하였다. 후자에서 아테네 철학은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에 의해 인민의 자각을 일깨웠으나, 데모스의 정치(데모크라시)라는 장치를 겨우 마련했던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전쟁으로 멸망하였다. 그 민주의 흐름은 잠수하였다가, 이를 모방하려는 시도들이 로마에서 솟아나며, 민회와 원로원이란 제도로서 공화제라는 이름을 달았으나, 시저 이후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황제제로 바뀐다. 이 황제제와 더불어 이 제도를 본뜬 교회의 교황제는 서로 권력 다툼으로 중세를 이어갔다. 러셀이 철학사에서 말하듯이 그래도 중세의 민주화 방식은 밀라노 교구에서 있었으며, 성직자를 교인들이 선출해야 한다고 했단다. 그러나 교황청은 왕권에 대한 우월성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교권과 왕권의 다툼은 영국에서 교황청을 벗어나 성공회를 만들면서, 유럽사는 다른 국면을 만들었다. 왕권이 따로 존속하는 가운데, 영국 권력들 간의 싸움에서 크롬웰이 등장하는 의회파와 왕권파의 투쟁에서, 의회파의 승리하면서, 인민의 이름을 빌어 권리장전(1688)을 만든다. 그럼에도 인민이 아니라 상부의 두 권력 사이, 세습귀족들과 신흥시민들 사이에서 권력의 쟁탈인데, 백성은 여전히 권력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인민의 입말과 문자의 전파되기 200여년 만에, 인민의 의사 반영이 솟아난다. 여기에서 카톨릭 신부였던 시에이에스(Sieyès, 1748-1836)는 혁명전야에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1789)을 쓰면서, 귀족과 성직자가 아닌 새로운 신분으로서 인민(부르주아)의 등장을 알렸다.

이 인민이 자치와 자주, 그리고 세기를 거치면서 자율성을 행사하기 위해, 19세기에 여러 번 혁명들을 일으키며, 공동체 사회를 만들려고 하고, 이 과정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의 공산사회를 주장하기도 한다. 인민의 성장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종교 없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였다(프랑스에서 1882년 교육선언). 서구에서 평등사회 구현의 교육이 무상, 보통, 무종교라는 것을 실행하기에는 그래도 길이 멀었다. 그런데 우리의 동학의 성립이 1860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도 세계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세기를 지나면서 우리에게서 인민의 성장은 독립운동을 통해 계속되었다. 그 다음으로 계엄에 저항했던 열사들이 있었고, 그리고 광주에서 인민항쟁이 있었다. 그러나 1945년 이래로 입말과 문자화가 우리방식이라 하더라도, 인민의 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수구권력들은 마구미의 손을 여전히 펼치면서 마남사냥과 같은 빨갱이 사냥으로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뒷편에는 마남사냥에 동조하는 유일신앙의 세력들과 앵글로색슨 철학이 있었다. 하나는 우리의 오랜 전통과 단절하게 하여, 제국을 형성하려는 자들에게 세뇌당하여 돈을 숭배하는 유일신앙에 빠져있는 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학문에서 일차대전의 승전국 일본과 이차대전의 승전국 미국으로부터 과학의 진리를 수용해야 한다는 외세 의존적 지식인들이 지배하였다.

이들에 저항하여 인민은 촛불을 들었고 노무현 대통령을 지켰다. 한번은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을 실세로 하는 박근혜를 탄핵하였다. 한번은 비극 다른 한번은 희극일까? 실권자로서 김건희의 농단 속에서 눈먼 장님의 윤석열을 탄핵하려는 중이다. 이 기득 세력의 저항은 거세다. 벩송이 인민이 수행하는 ‘저항의 저항’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수구의 저항에 대항하는 항쟁과 혁명의 저항은 간헐적이었다. 인민의 등장은 느리고 가늘어 보이지만 지속하고 있다. 우화적이고 허구적인 수구 저항을 이겨내는 인민의 저항은 자연(본성)의 자발성에서 나온다. 박근혜의 탄핵은 쉬웠다. 윤석열의 탄핵은 헌법재판소의 심리가 끝난 지 한 달지났는 데도 기득권의 저항, 즉 반동은 거세다. 인민의 노력과 내공이 필요하다.

이번에 기득권 패거리의 거센 저항(반동)을 맞이했지만, 이들 셋 다 인민의 최종심급으로 이겨낼 것이라는 점에서 희극으로 끝날 것이라 낙관 하지만, 그 대가는 여러 가지로 치루어, 값비싼 수업료로를 지불해야 할 것 같다. 혁명이라면 짧은 시간에 정리할 수 있지만, 기득권의 법률 하에서 절차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시간이 필요하지만 낙관적이라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희극이 사회의 고착성을 벗어나기 위한 추억들의 방편이듯이, 우리에게서는 과거의 매국을 일삼은 극우파와 탐만치에 빠진 수구파의 고착성을 뿌리 뽑는 과정일 것이다.
인민은 누리소통을 통해서, 마치 리좀이 퍼져나가듯이, 인민의 의지가 펼쳐나간다. 루소가 말하듯이, 인민의 의지를 권력자에서 양도하지 않고, 계약을 통해 위임하지만 권력은 여전히 인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인민권은 기본심급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내란 수괴의 탄핵을 인용하게 되는 것은 인민이 최종심급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주권자가 최종심급을 일시 헌법재판소에 위임한 것이지, 그들이 마음대로 결정하라고 양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익히며, 내공을 쌓고 있는 중이다.

여기 현실에서는, 수구파들과 민주파들의 대립 속에서, 프랑스 혁명보다 더 잘 소통하는 연결망을 갖는 인민권이 등장하는 과정일 것이다. 21세기 규소의 시대, 누리소통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여러 리좀들이 아무도 해보지 못한 새로운 연결망을 짜고 있다. 새로운 공화국은 인민에 의한 계약의 사회가 등장할 것이다. 그럼에도 극우의 저항과 반동도 넓이를 더하고 있다. 김건희-윤석열과 극우 집단의 계엄이 얼마나 큰 공포와 위협을 하려했는지는 수거자 명단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전 모의들이 드러났고, 또한 그들의 조직망이 점점 밝혀지는 가운데, 그저께 뉴스에서 등장한 종이관 1천개와 영현백 3천개를 준비하려고 또는 사들였다는 이야기는 윤석열 계엄집단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가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며, 인민에게 공포를 자아내게 한다..

유일신앙자들이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마남사냥을 하였듯이, 김건희와 윤석열은 폭력과 계엄령으로 인민을 말살(Genocide)하려고 하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을 획책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영국의 시민전쟁, 프랑스의 대혁명과 같이, 우리터전의 21세기 새로운 제3신분의 혁명이 일어날 것 같다. 이 규소시대 혁명은 앞의 혁명들과 달리 입말과 문자로 인격의 층위에 리좀의 연결망이 새로이 각인하는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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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 시대의 도래는 21세에 엉뚱하게도 코로나19에서부터 전지구적 소통으로 열려 있었다. 이런 난제들 극복했던 경험을 가지고, 게다가 오랜 우리 문화와 새로운 누리소통을 결합할 줄 아는 우리가 세계사에 새로운 희극을 쓰고 있는 중이리라. 고착된 사회는 변화하고, 착각과 착오에 세뇌당한 기득권의 밀정과 수구파의 탐만치는 젊은 세대에 의해, 혁명이 아니더라도, 생물학적으로 밀려나고 있는 중이다. 공포를 심고 협박하는 이들에게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이들을 밀어낼 리좀망을 연결하고 자발적 생성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외세 의존의 지식인에게서 벗어나는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탐욕(탐만치)의 마군들을 퇴치하는 데는, 잉여생산을 제3신분화 또는 인민화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 상부상조하며 자치와 자주, 우리들 스스로 교육과 의료를 무상화하는 제도를 만들 자율성과 자발성을 실현할 노력과 내공을, 80여년을 쌓아온 지층 속에 그리고 그 위에 리좀의 그물망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들이 만들어가야 할 리좀의 그물망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연결하는 노마드처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소통의 흐름에서 트래픽으로 매듭들의 각각에서 만들어지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혁명이 이루어지는 중일 것이다. 그 혁명은 언제나 하늘에서 일어나는 번개와 같다. 그 번개는 동일한 적이 없어도 계속하여 일어난다.

여기서 노벨 수상자 한강의 수상문을 상기하자. 그 수상자는 수상문의 제목이 “빛과 실”이었다. 세상은 빛의 세계이다. 그 속에서 이 땅과 인민들 속에 반만년을 면면(綿綿)히 이어온 실처럼 있다. 젊은이는 그 목화 꽃의 부플음이 면면히 이어지는 과정처럼, 리좀의 흐름처럼, 우리 이야기를 즐겁고 유쾌하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작은 선함과 작은 상부상조가 또 작은 노력이 긴 시간의 두께에서 내공으로 이루어진다. 돈과 권력, 권세, 권위 패거리 배에서 벗어나 진솔한 벗과 동지를 만들면서 상쾌하고 통쾌하게 극우파와 수구파를 넘어서길 바란다.

혁명은 번개와 같이 일어나고, 하늘은 여전히 비, 구름, 바람으로 변전하며 이어가듯이, 터전에서 인민들은 여전히 자신들 삶을 변역(變易) 속에서 이어가며 펼쳐간다. 리좀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지만, 때에 맞게 제대로 연결망을 면면히 이어간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코로나19 이래로 다른 연결망으로써 리좀의 누리통신이 생겨났다. 그 누리소통은, 남태령의 밤샘의 그 눈 속에서 21세기에 새로운 조직화를 열었다. 공화는 인민들의 누리 소통에서 쌍방소통과 실시간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소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물론 전지구적으로는 전파이용이 가능한 지역이라는 점이 아직도 난점이지만 점점 더 확장되어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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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들처럼, 망상의 파라노이아, 그리고 나만이라고 생각하는 “난가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자아의 각성이고, 나의 성립은 우리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불교가 소자아의 성립의 명상과 돈수에서도, 사대부중이 함께 보살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소아가 보살이 되었다고 한들, 그게 진솔한 자아의 성립이 아니라고 하며, 대승과 용화세계를 강조했던 우리의 선승들도 생각해보자. 유교가 구태라고 하기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평천하(平天下)에까지를 이루고자 노력했던 성현들에게서도 리좀의 그물망을 더 잘 짤 수 있음을 생각해보자.

자아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터전에서 지금 수구들의 난동 같은 탄핵반대 속에도 있음을 명심하자. 이들의 탐만치를 극복하며, 벩송 표현처럼 저항의 저항을 이루고자 노력하며 내공을 쌓아가자.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 젊은이가 자율성과 자발성으로 새로이 나올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생 쥐스트는 스물셋에 대혁명에 참여했고, 스물다섯에 공안위원회를 맡았다. 규소의 시대 공자 말로 서른에, 천문학적으로 서른 여덞에, 플라톤이 말하는 마흔에 자발성의 사회를 만들 수 있게 실천의 노력과 과정의 내공을 쌓으면서 말이다.

리좀은 흐른다. 규소의 시대에 누리소통의 프래픽이 흐른다. 혁명도 흐른다.

(3:26, 58NLI) (4:04, 58NLJ) (5:20, 58NL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맑스 말대로 이 쿠데타가 희극일까? [천 하룻밤 이야기]

변역(變易): 맑스 말대로 이 쿠데타가 희극일까?

2025 02 18, 우수(雨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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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이 풀린다고 하는데, 한강이 얼지 않아서 강물이 풀린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다. 지난 12월 3일 얼어붙었던 터전이 입춘에는 봄바람과 더불어 풀릴 것인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김건희와 함께)은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며 계엄령을 발동했다. 바로 국회가 계엄령 해제를 의결했다. 그럼에도 두 달이 넘도록 계엄은 끝이 난 것 같지 않다. 게다가 그 계엄의 시행은 잘 짜여진 실행계획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광범위한 실행을 모의했다는 정도를 넘어서 사실 증거가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모골이 송연하다고 한다.

내란을 일으키려 시도하며 계엄을 실행한 세력은 광복공간에서 일제부역자들이 이승만과 더불어 하는 짓을 반복하는 듯하다. 그러나 민중이 대체할 방법이 없이 당했던 시절과 달리, 누리소통의 시대에 각성한 인민이 잘 대처하고 있다. 세월은 흐른다. 70년 전 입말의 소통이 거의 없던 시절과 달리 70여 년 동안 입말이 풍부해졌고, 인민이 누리 소통을 통해 자발적으로 문화 창달과 홍익인간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중에 있다. 20세기 철기시대의 전성기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거치면서 미국 제국의 반쯤 식민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한문도, 일어도, 영어도 아닌 우리 입말의 시대를 시작하였다. 이로 부터 79년이 지나, 규소시대의 흐름의 한 중간에 와 있는 것 같다. 이 시대에 누리 소통이 빛의 발산처럼 널리 빠르게 확장되고 전달되고 있다. 이 시대에 우리 젊은이가 천지인(天地人)의 문자로 입말로 세상을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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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서 서양은 천5백 여 년의 크리스트교라는 종교시대를 거쳐서, 350여 년의 합리주의시대, 그리고 인간의 각성과 더불어 실증주의시대에서 부르주와의 등장에 이어 프롤레타리아의 시대를 열었고, 식민지 수탈의 제국주의시대에 소비에트가 성립했으며, 미국이라는 제국시대의 시작에 동양에서 중화인민 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용화세계를 만들려고 천년의 불교시대를 거쳤으나, 고려 말에 중생의 고충을 해결하고자 사찰(寺刹)의 토지소유를 개혁하려다가 고려왕조가 무너졌다. 조선조 500년의 유학(儒學)시대를 거쳐 가는 마지막 100여 년에도 도탄에 빠진 백성을 생각하는 선각자들이 실증적 학문인 실학(實學)과 민중운동을 시도하였으나, 기득권을 지닌 노론이 일본제국주의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광복에는 일제 부일자들이 미국 제국에 빌붙어서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모는 수법을 쓰면서 600여 년의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자들의 기득권이 유지되었다.

동서양이 비슷한 위도 상에서 역사를 이어가는 나라들에서, 문명사적으로 종교시대를 거쳐서, 학문적 논리의 시대를 지나, 대중과 민중, 인민과 프롤레타리아 시대로 변역하고 있었다. 사실은 각 시대마다 동일성을 유지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각각은 다른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이런 변역의 과정에서 상층의 지배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은 항상 권력과 돈(재화)을 차지하였다. 21세기 윤석열 집단도 권력과 돈을 독점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저항하는 세력과 더불어 인민이 그를 파면하려 한다. 18세기 말 이래로 인민주권과 인민 최종심금은 역사 속에 한 찰나처럼 여기지지만, 전 지구상의 인류의 기억 속에 지층의 두께처럼 내재해 있다.

*

조선시대의 변역은 지배세력의 일방통행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백성으로부터 지지받는 새 왕조의 지위를 만들기 위해 우리 입말을 문자로 쓰는 과학적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 입말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뒷방의 글로 밀려났다. 조선 왕조 안에서 상부로부터 개조와 개혁의 노력들이 있었다. 연산군 시대에서부터 시작했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상부의 세력은 부동이었다. 훈구파들이 사림파 김종직 학파를 제거하는 모오사화와 기묘사화를, 그리고 중종 시절에 수구파들이 개혁파인 조광조의 일파를 제거 하는 기묘사회를 일으킨 역사에서도 있었다.

조광조 이후에 유학자들은 은둔지사로서 자신들의 안위를 보존하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다고들 한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서, 두 차례의 외국(일본과 청나라)의 침입에 의해 피해해진 강토에, 수구세력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사라진 나라인 명나라를 존중한다면서, 사대주의로서 유학 중에서도 신유학의 주자의 학문을 중심으로 삼아서, 이에 반하는 글을 쓰는 자를 통제하기 위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기괴한 사상 통제의 지침을 만들었다. 수구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을 몰아내고, 난적으로, 요즘 표현으로 빨갱이 사냥을 한 것이다.

정조가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실학자들과 더불어 개혁을 하려고 했으나, 훈구파, 수구파, 모화파로 이어진 세력들에 의해, 그의 사후에 다시 이익집단인 노론의 지배로 돌아갔다. 19세기 중반부터 우리나라가 세계사와 마주칠 때 젊은 지식인들이 있었지만, 극우집단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와 손을 잡고 나라를 팔아 넘겼다. 이런 과정에서 백성은 가난과 탐관오리의 착취 속에서 살아갔다. 백성이 서로 “니르고자 할배 있어도” 백성들 사이에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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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일요일에 광주에서 탄핵반대 집회를 한다고 전국에서 교회들이 많은 버스를 동원해서 집회를 하였는데, 이는 광복 후 우리역사에서 뒤바뀐 국면을 연출한 사건이 있었다. 얼핏 해방공간에서 신탁통치 오보사건(信託統治誤報事件)을 떠올렸다. 소련이 반대하고 미국이 찬성했다는데,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끝난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의 잘못된 보도를 내보낸 사건이다. 오보는 행방정국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민족의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공간에서 세상은 달리 흘러갔다.

이런 시기에, 여러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지도자들이 암살을 당하고 혼란에 빠졌다. 스스로 소통할 수 있는 입말도 갖추어지지 않는 시기에, 미국을 등에 업은 기독교 세력이 서북청년단을 만들어서 일제부역세력들과 더불어, 반민족처벌특별위원회를 해산시켰고, 제주도 도민을 학살하였다. 이때 민중은 이들에게 저항할 여론을 집결시키지 못했다. 인민이 자주적으로 의사를 결집시키고 퍼뜨릴 도구가 없었다. 부역자들과 기독교세력이 함께 반민족처벌세력을 빨갱이로 몰아갔다. 냉전의 부산물인 우리나라 남북 전쟁은 삶의 터전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중생이, 백성이, 민중이, 인민이 자립적이고 자치적인 사유에서 세상을 꾸려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촛불시위에 다음으로 찬란한 불빛시위에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외치며 축제를 벌였다. 이 둘째의 탄핵 심판에서 인민이 최종심급임을 의심하지 않는 나로서는 당연히 검찰독재 세력도 무너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변에서 속사정을 모르는 근거 없는 낭만주의라고 한다. 나도 저 독재세력이 조선조에서부터 훈구파, 수구파, 모화파, 부일파, 숭미파로 이어져온 역사를 무시하지 않는다. 이들은 백성의 입말보다 상부의 언어와 용어로서 지배해 왔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민중 또는 인민이 자각하고 소통하는 도구를 가졌으며, 스스로 자발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몇 가지 점에서 이들 극우파들이 인민에 의해 밀려난다고 생각한다.

*

하나는 사람들이 코로나의 방어를 슬기롭게 거친 우리나라는 지구상의 중요한 나라로서 지위를 가져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가 DNA라든지 바이러스의 면역체를 해결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 질병대처의 방식에서 각 나라가 우리방식을 모방하거나 부러워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역사 속에 생물학적 질병과 위험에도 대처할 능력이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세계 정상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자고나니 선진국의 대열에 서있다고 했듯이, 우리는 어떤 국면에서 세계의 중요국가와 나란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자각이 자주(自主)를 부추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류 문화도 중요하다. 대중음악에서, 영화에서, 클래식 음악연주자들에서, 그리고 식생활에서 우리방식이 다른 나라들에게 일반화하여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계에서 지위 상승에 스포츠도 빠질 수 없다. 그럼에도 더욱 중요한 것은 노벨 문학상에 우리의 젊은 세대의 기수인 한강 작가가 올랐다. 나로서는 어떤 문화적 양태보다 우리글이 세계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말하자면 우리 입말이 문자로서 알려진 것이다. 이번 계엄에 대해 근거없는 낙관주의라고 할 때, 나는 우리 입말과 문자가 인민의 소통기구가 되었기에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오고 최종심급은 인민의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우리말을 입말 쓴지 79년 만에, 그리고 87년 항쟁이래로 우리글을 가로쓰기 신문이 나온 이래 38년이 지나서 인민의 시대를 열었고, 우리글로 세계문학사에 한 시대를 열었다. 자치에서 자주로 한 단계를 올라섰다고 해도 좋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누리소통(SNS)은, 권력의 지배방식과 전혀 다르게, 널리 공유되고 있다. 지식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은 도서관(문자, 음악, 영상)에서 라고 하지만, 인공지능(AI)의 속도와 확장은 코로나 이후 5년 사이에 지금까지의 문명사에서 만들어진 총량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하였다. 그 거대한 양에 짓눌릴 것 같지만, 어느 시대에도 부정확한 사례들이 넘쳐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화되고 정리되어 갔다는 것이 인류의 노력의 소산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극우파들의 가짜뉴스와 짜깁기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런 유투버와 텔레그램 등이 성행한다고 젊은이들이 모두가 그 속에 함몰되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든지 탐욕과 오만이 겉보기에 화려하게 보여도, 내공을 쌓으며 노력하여 얻는 성과와 작은 좋은 일들을 쌓아가는 선량들이 이 세상을 환하게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근거없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진실이라니깐.

이러한 세상의 변화에 늙은이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갈 방식에 대해 진솔하게 마주하고 노력한다. 늙은이들의 괜스런 걱정은 늙은이 자신들의 걱정이며 젊은이에게 전가할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자치와 자주를, 태어나면서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젊은이는 자신들이 살아갈 새로운 시대의 세계의 변화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게다가 5년 정도 사이에 비약적인 소통의 발전에서 젊은이가 스스로 노력하며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철기시대에 보편적 동일성의 요구가, 지금으로 보면 탐욕과 오만이라는 것도 깨닫고 있다. 규소시대 다양한 삶의 양식들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자율성이 이미 몸에 밴 채로 움직이고 새로운 생산을 하고 있다.

전두환의 쿠데타를 겪지 않았어도, 윤석열의 쿠데타가 젊은이 자신들이 살아갈 삶에서 걸림돌이라는 것을 잘 안다. 촛불시위와 다른 불빛시위가 그들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문화이며, “다만세”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젊은이들이 달리 생각하는 가운데, “틀딱”과 성조기부대들이 역사 속에서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입틀막”이나 “입벌구”라는 용어가 윤석열과 김건희같은 이들이 방식으로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근거 없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진실이다. 바로, 천지인(ㅣ,ㅡ, ㆍ)의 삼글표를 기본으로 하는 젊은이가, 크리스트교의 삼신앙이든 철학에서 삼위격이든 간에 지나간 것에 비해, 현실에서 소통의 삼글표가 자율성을 발현하는 도구임에 틀림없기에, 즐겁고 유쾌하게 다음 열릴 시대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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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앙자들이 여섯 먹은 꼬마처럼 자연을 자동인형처럼 철없이 탐욕과 놀이의 도구로서 대하다가, 자연에 자치가 있다는 합리주의시대, 생물학과 심리학의 발달로 자연에 자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자연이 자율성이 있다는 데 놀라고 있다. 이런 자율성의 사유가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에 가깝다면, DNA에 이르러 이제 자발성의 발현의 시대라고 깨닫는다. 이 자연의 자발성을 견디지 못해,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교회가 구시대의 서북청년단과 백골부대 같은 무리들을 동원하고 있고, 인터넷 속에서 신천지의 댓글부대와 명태균의 여론조작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양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을 되돌릴 수 없다.

젊은이의 시대이다. 마치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적으로처럼, 인민 속에서 인민과 더불어 인민으로 산다는 것이다. 벩송은 말한다. 삶이 먼저이고 사유한다(철학한다)는 다음이다. 서양철학사가 이상한 사고와 결합하여 신이 먼저고, 다음에 사유하고, 그리고 산다로 만든 시대가 끝났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의한 자연의 방식으로 사는 삶은 노력이고, 어느 생명체나 자기 강도(내공)를 높이고 있다. 이 강도를 우리는 내공이라 부른다. 열여덟까지 일반화의 방식을 가르친 대로 배웠고, 노력과 내공은 열아홉에서 서른여덟까지 자치를 통한 자율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돌아보며 노력하고 내공을 쌓는 이들을 만나러, 자연을 통한 지식의 광장으로(AI와 DeepSeek가 아니라) 떠나는 다양한 여행도 필요하다.

이 쿠데타가 희극이 되는 것은 낭만주의가 아니라, 젊은이의 내공과 노력에 있다.

이 세상은 젊은이에게 달려 있다.

(4:12, 58MLH) (4:29, 58MLHH)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의식의 발현: 역사는 때에 맞게(카이로스) 변역(變易)한다 – 수괴 체포와 식민지 연관에서 자각 [천 하룻밤 이야기]

의식의 발현: 역사는 때에 맞게(카이로스) 변역(變易)한다.

– 수괴 체포와 식민지 연관에서 자각.

– 2025. 01. 20. 대한(大寒): 소한 추위에 밀린 대한

지난 달 동지 이후에, 그 다음 한 달 후 절후인 대한에 이르기까지, 일부 사람들은 쿠데타와 계엄의 이야기가 점점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드라마와 같다고들 한다. 그리고 역사적 전개과정을 마치 연극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드라마든 연극이든 현상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내밀한 특성들과 그 사유의 뿌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도 한다. 윤석열이 등장인물이면, 이 각본과 대사는 누가 작성하였고, 연출자는 누구일까?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드라마 같은 이야기 있다고 한다. 드라마라기보다 긴 과정에서 크게 보아, 우리의 역사나 서구의 역사에서 비슷한 상사구조 같은 것이 있다. 서유럽도 기원전 역사의 문헌이 자체적으로 없고 외부에 있으며, 우리나라도 김부식의 짤라버린 역사서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원후의 역사에서 천년의 불교시대, 500년 유교시대가 있듯이, 서유럽에서도 1,500여 년의 크리스트교시대, 다음으로 오성의 합리화시대 300년이 있다. 유럽이 실증의 시대로 진행하면서 구시대의 두 가지, 종교시대와 형이상학시대를 벗어나려고 하였고, 그 이후로 상부는 유럽을 벗어나 부의 획득을 위해 전지구적으로, 칼과 방패로 무장한 로마의 식민지 개척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총과 대포의 무력으로 전지구적 식민지를 확장하였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영정조 시대에 몰락한 남인들이 실학이란 이름으로 실증학문에 관심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실증주의가 발현했지만, 서구의 식민지 확장이 중국과 일본을 압박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밀려왔을 때, 우리나라는 로마의 식민지경영보다 훨씬 더 강압적인 제국주의 식민지약탈의 먹잇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이 미국에게 배운 것을 대행해서, 일제 식민지와 광복이후 미국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때부터 미국은 일본을 주구(走狗)로서 소두목으로 앞세워 소련과 중국에 대립하게 하였고, 그 와중에 우리나라는 제국주의와 제국의 세력들이, 이승만, 박정희, 전투환, 이명박을 관리하더니, 이들 모습을 통합 모습으로 21세기에 윤석열의 쿠데타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사에서 기원 후에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몰락하고, 로마 제국이 지중해 주변뿐만 아니라, 유럽의 서부(프랑스와 스페인), 북아프리카(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 포함), 중동지역(현 터어키,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이라크 등)을 깊숙이 장악하였다. 식민지 정책에서 그리스 식민지 개척과 로마의 식민지 지배가 다르다. 그리스 식민지 정책은 그리스인들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그 지역의 상부로 정착하면서 그리스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들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이상)의 공유로서 다자의 평등과 자유를 누릴려고 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중앙집권 시기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몰락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시가 지중해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 참여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통치하면서, 이 장군이 파라오를 대신하면서, 통치를 위한 세 부류의 학자들을 궁정에 불러들여, 통치의 난제들에 대해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학문의 3계보는 소크라테스 좌파라 불릴만한 퀴니코스와 스토아가 한 축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서 로도스 섬으로 떠난 학자들과 달리 아테네에 남은 소요학파 학자들 중에서,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과학에서 해결책을 내려 했던 이들이 당대에 성행했던 의학의 히포크라테스학파와 함께, 민생의 삶을 해결하는 한 축을 형성했다. 그리고 나일강의 전통에서 측량술을 기하학으로, 천체의 운동에서 책력의 만들었던 오랜 이집트 신관들이 수학적 전통을 유지했던 것이 또 다른 한 축이 있다. 이 세 부류의 통합적 결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성립이라 한다. 제국의 체제를 확립하면서 정책의 실현에서 이 세 부류들은 상부로서 인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다. 이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 앞에서, 제도와 인간의 관계와 달리 자연과 인간이라든지, 신(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그래도 여전히 탐구하는 노력은 있어왔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장군이 세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왕조가, 공화정의 로마에서 제국의 로마로 바뀌는 시절에, 지중해와 중동의 패권을 로마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의 식민지 정책은 달랐다. 그리스 식민지처럼 새로운 도시 개척이 아니라, 이미 성립된 도시들이 로마에 복속(예속)하지 않으면, 무참히 말살하였다. 로마는 공화정 시절에도 카르타고라는 도시 자체를 몰살시켰듯이, 로마의 제국은 저항하는 나라들을, 특히 이스라엘을 저항자들을 완전히 몰살시키려했다.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로마의 정복을 통한 식민지 확보는,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듯이, 개척에서 생산력의 증가에 의한 이익의 확대와 달리, 식민지 지배의 생산양식에서 생산에 참여 없이도 잉여의 착취를 하였다. 이런 정복을 통한 잉여착취는 앵글로색슨 철학에 깊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전지구적 교역하기 시작한 1,600년 전후에 네덜란드 상인은 세계 지역들과 상호호혜 무역을 하려고 한데 비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1588년) 영국이 해상권을 지배하면서 식민지 정책은 개척이 아니라 착취와 약탈이었다. 이런 약탈 경제에 의한 부의 확충을 아담 스미스가 눈치 채고, 국가의 부는 상업을 통한 자유경제체제라고 보았다. 물론 아담 스미스의 중요한 업적은 단일체제 내에서도 노동의 분업의 과정을 통한 잉여이익의 창출을 밝힌 점이다. 그럼에도 그의 경제학은 국가 또는 공동체의 총생산의 노동과 분배보다, 국가 경제에서 교환을 통한 이익의 증대를 보았다. 중상주의에 자유시장경제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개척과 착취를 정당화하였고, 께네의 중농주의와 맑스의 정치경제학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총과 대포의 식민지 확장은 세계사를 영국이 주류인 것으로 되었다.

유럽이 중심이 되어 20세기에 두 번의 식민지 세계전쟁을 거치면서, 부의 축적을 이룬 미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쟁을 통해 성립했듯이, 미국이라는 제국은 세계 곳곳에서 쿠데타와 전쟁을 일으키며 잉여의 착취라는 체제를 유지하였다. 제국은 한 세기 동안에 차례로 일어난 자본과 금융의 위기를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소비에트와 중국이라는 대립적 국가들의 성립과 더불어 제3세계는 자주와 자립의 길을 찾기 시작하였다. 세계는 철기문화에서 규소문화 시대로 변화하면서 인도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들이 자기 위상을 만들면서 세계는 다원화되어 가고 있다.

철학과 학문의 발달은 인간이 즐겁고 평화롭게 살려고 하는 노력의 결실들이다. 이런 노력들은 학문이전에 있어왔다. 그런데 로마의 제국은 달랐다. 악랄한 착취에서 식민지 인민의 삶은 비참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철학사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고뇌를 이야기하면서 이를 해소하는 노력과 학설을 제시한다고 보았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 식민지에서 지성의 노력은 인간의 기초적 어려움에 대한 해소로서, 자연학과 도덕론, 나아가 정치학이나 국가체제를 설명하려 하였다. 그런데 로마는 제국화 되면서, 그리고 식민지 총독으로 나가서 식민지의 수탈의 재산과 명성(?)으로 로마로 돌아와 황제에 오르는 방식이 생겨나면서, 식민지 착취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에서도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제 속에서도 식민지 수탈에서 일어나는 반란과 항쟁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이는 20세기가 지난 후, 마치 미국이 전쟁을 통해 세계를 다스리는 경찰을 자임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로마가 무너지고(476년), 동로마가 오스만 투르그에 의해 멸망(1453년)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방식이 유지했던 것은 황제와 유일신앙의 지도자(주교들)의 담합에 있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로마의 교황은 다르다고 할 것이지만, 서유럽은 제국은 없고, 군소 왕국들의 분화, 즉 봉건시대였다.

국가권력에 종교권세가 결합한 것은 둘 사이에 이익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야합 또는 카르텔이 드러난 것은, 고대 이래로 권력과 권세가 한 사람(황제, 참주)에 있어서, 둘 사이의 갈등관계 또는 이질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이질 관계의 봉합이라 부를 수 있는 상부가 성립하기에는 철학적 배경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겉보기에는 철학학파들 사이의 진리 논쟁 또는 각 학파들 사이에 학문적 위상 정립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말하자면 분화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학문의 분화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있었던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학문 또는 철학의 분화는 자연을 다루는 이오니아학파와, 존재를 사유하는 엘레아학파 사이에 있었다. 이 다음에는 소크라테스의 후계자들에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퀴니코스를 이은 스토아의 대립에서 갈래가 일어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학파와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에피쿠르소의 정원학파도 나왔다. 이런 분화가 이루진 것은 천문과 기상학에 대한 설명과 이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해가 상식에 준하였기에, 이미 기원전에도 몇몇 학자들이 지구의 둘레 지구의 자연을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말기에는 시각적 관찰의 학문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이론에 동조하였고, 게다가 권력과 권세는 이런 정태적 지식에게 권위를 부여했다.

권력과 권세와 맞물려 지식의 권의의 문제는 알렉산드리아의 말기에 학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학파들에 별 주목하지 않고, 신플라톤주의, 아리스토레스학문의 복원, 셈계의 유일신앙의 성립으로 나누고 있다.

알렉산드리아학파를 대부분 철학사는 신플라톤주의라고 말하지만, 이오니아 이래로 우주발생론과 우주론 사이에서 체계적 학설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표자는 플로티노스(204-270)이다. 그는 스토아학파의 우주 영혼이라는 생성하고 변화하는 체계를 받아들여 플라톤주의 다시 세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관을 통한 상식이 이 우주발생론을 지탱해 주지 못했을 것이고, 새로이 제기된 유일신앙자들과 부딪히면서, 세계영혼의 신학이 크리스트교의 반박으로 이방종교(이교도)로 몰렸다. 그 몰락은 크리스트교인의 사주를 받은 군중이 여성 수학자이며 신플라톤주의자로 인정했던 히파티아(370-415)를 대로에서 갈갈이 찢어 죽였고, 529년에 아테네의 학당들이 폐쇄되면서 중세의 암흑기로 그늘 속에서 면면히 이어갔다.

알렉산드리아학파와 대등하게 발전한 것은 로도스 섬에서 소아시아 연안의 카리아 지방에 아프로디지아스라는 도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의 계승자들이 어어진다. 그 대표자는 알렉산드로스아프로디지에우스(150경-250경)이다. 소요학파의 특징처럼 논리학을 기본으로 사물들과 대상들을 경험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유효했다. 이들의 논리학의 최고류 용어는 개념적으로 절대자 또는 신과 대등하게 위치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그리고 사물의 대상이든 사유의 대상이든 정태적인 현상에서부터 변화를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도 흥미있게 받아들였다. 이들의 학설이 유일신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크리스트의 신학이 정립되지 못한 시기에, 알렉산드리아학파와 논쟁과 대립에서, 플라톤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성립하듯이, 새로운 신학 특히 신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확립하는데 필수적이었다. 그럼에도 유대-크리스트교 쪽에서 신학과 유대 전통의 역사를 개입시켜, 예수를 드라마의 인물로 만들고자 하였다.

예수-크리스트의 전통은 유대-메시아(크리스트) 전통과 다르다. 전자는 이방종교에 물들었다가 삶에서 비참을 벗어나는 방식에서 그리스철학보다 비유로 설명된 스토아-크리스트교의 설교에 매력을 느꼈다. 이는 유대-크리스트(메시아) 전통처럼 태초의 신(야훼, 유일신이든)에서 보다, 하늘에서 울려오는 신의 말씀 또는 로고스가 진리이다. 그리고 아가페(무상보시)가 세상의 비참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 예수-크리스트가 구원과 부활에 의한 삼신론이 성립하기 전에(324년), 자연의 이법과 학문의 이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위계처럼, 절대적인 부동의 원리와 그 원리의 경험적 연결을 찾으려 했다. 이런 전승에는 오리게네스(185경-253경)가 있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자연과 더불어 이법의 해결에서 진리보다, 또한 숙명의 해결할 수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운명의 논리 전개에서 저세상의 안녕을 통해 삶의 안정과 구원을 찾으려 했다. 이방종교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저세상의 문제 해결을 예수의 속죄에서 찾는다는 알레고리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비슷한 시기였다. 플라톤주의자라 불리는(그런데 알렉산드리아 학파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의 개념이 들어있는데) 플로티노스(204-270)의 우주발생론적 설명,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 속하는 알렉산드로스 아프로디지에우스(150경-250경)의 논리적이고 정태적 세계구축, 그리고 신을 통한 완성된 세계와 구원을 주장하는 오리게네스(185경-253경) 등이 담론을 전개하였다. 이들 중에서 로마 제국 속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점점 더 제국과 같은 체계를 형성하는 쪽은 셋째 예수-크리스트교 쪽이었다. 물론 이런 체계의 완성에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 때 와서였다.

학문적으로 플라톤주의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나름의 체계와 대상을 다루는 방식을 갖추고 있었다. 한마디로 전자는 다자의 공존을 말하고자 하고, 후자는 종과 류 위에 하나의 최고류를 설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자의 단위의 하나(un)이거나 류와 종에서 각각의 단위로서 하나(un)는, 입말로서 표현하는데 같은 하나이다. 그럼에도 전자에서는 유일한 선의 이데아로서 일자(l’Un)를, 후자에서 완전자이며 절대자로서 일자(l’Un)를 말하는데, 용어로서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크리스트의 체계에서도 일자를 수용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둘을 알레고리로서 통합된 방식으로 유대-크리스트교를 만들면서, 유일신의 일자(l’Un)를 설명한다. 이로서 신학의 일자는 최고선이자 불멸자와 같다.

그런데 이방종교에서 이데아의 일자는 미래에 만들어야 할 세상이지, 과거에 만들어진 천국과 같은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유대-크리스트교의 일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율과 모순율 수용하면서, 과거의 일자인 신을 알레고리의 첫 근거로 세웠다. 하나의 신이 있고, 다른 신을 믿는 것을 배격하여, 하나의 신으로 돌아가는 배중률(A 아닌 것이 아니고 A이다)을 받아들인다. 나 이외의 신들이 아닌 신이 진리의 신이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조의 멸망과 로마 제국에 성립에서 신학의 알레고리는 황제제에 맞는 배중률이었다. 예수-크리스트를 공동체 신앙(믿음, 독사)의 대상 밀어내고, 신학이론으로서 유대-크리스트교에서 세계사 변천의 진리로서 신앙(파라독사)을 구사하여 중세 천년을 이어온다. 이 배중율에 따라 교리(파라독사)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온갖 나쁜 짓의 신호탄이 히파티아의 광장에서 공개적 살해였다, 마남사냥은 이를 이어받은 한 방식이었고, 중남미의 식민지에서도, 우리나라에서 한경직에서부터 전광훈에 이르기까지 배중율에 의한, 자기 이외에 다른 신앙을 악이라는 진리의식의 세뇌는, 권력과 결탁하여 많은 백성을 살해해왔다.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세계사에서 황제제(참주제)에 반대의 첫 시도자는 소크라테스라고 한다. 다이몬들을 믿는 그는 민주제도의 성립을 바랐다. 그럼에도 고발 내용 중의 하나로서 전래의 신앙을 믿지 않는다고 하여 사약을 받았다. 하나의 신이든 여러 신이든 신으로부터 믿음에서, 어느 하나가 독사이면 다른 신을 말하는 것이 파라독사이듯이, 거꾸로 유대-크리스트 신앙은 파라독사들 중의 하나이다.

학문은 이를 벗어나기 위해 자연의 이법과 그 실증의 사실들을 탐구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고대와 중세는 실증적으로 연구가 거의 불가능했다. 르네상스이래로 망원경이 세상을 달리 보게 만들었고, 이어서 현미경은 눈에 보이지 않은 대상들을 말할 수 없다고 했던 시대를 넘어서 맨눈에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세계가 점점 넓어져 갔다. 사물의 변화라기보다 사물을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의 변화가 인간의 의식(영혼)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증기기관과 원동기(모터)의 발달은 생산양식을 바꾸어 놓았고 편리와 안녕은 상부만이 아니라 대중에까지 퍼져 나갔다. 그럼에 소유는 소수의 것이었다. 생산양식의 변화는 또 다시 인민의 사유를 변혁하였다.

20세기 중반에 DNA와 디지털의 발견과 발명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었고, 21세기의 인민들의 누리소통은 의식의 민중화를 넘어서 다양체의 길을 열었다. 알레고리에 의한 유대-크리스트교, 미국 제국, 동일율의 논리체계, 이 3자의 야합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종말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이제 이 3자의 야합으로 최고 존재로서 일자가 돈(자본)이라 한다.

세뇌되고 전승된 권세, 권력, 지식이 2천5백 년 전부터 아니 4천 년 전부터이라지만, 인류는 수백만 년 전부터 노력하며 내공을 키워왔다. 자연의 이법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지혜의 탐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규소의 시대에 와서야 다자의 공존과 같은 다양체의 문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일제에 부딪혀 우금치를 넘지 못했던 시절의 아픔을 날려버리며, 우리 젊은 여성들이 농민과 남태령을 넘었으며, 12.3에는 여남, 소노, 천귀없이 함께 여의도에서 불의에 항거하였고, 추운 밤 눈 내리는 도로위에서 눈사람이 될 정도에서도 새로운 공화국의 밝힐 빛을 발하였다. 내란 수괴 윤석열은 어제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제7공화국이 밝아 오리라. 한 가지만 바란다면 다음 선거부터 다양체의 바탕이 될 결선투표제를 실행하기 바란다. 배중률에 빠져 내편 찍지 않았기에 통일성(l’unite, l’un)이 안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자의 공존에서, 결선투표로 가면서 당연히 연대와 계약이 이루어 질 것이다. 루소의 자연권 사상에서 자기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은 합의 계약이 민주제의 기본이라 했다.

세상은 45억 년 전부터도 변역(變易)하고 있다. 벩송이 “저항에 대한 저항”이 열린 도덕사회, 역동적 종교를 만든다고 했다. 극우의 기획과 저항(반동)에 대하여, 이 시대 인민의 저항, 즉 리베르떼르(libertaire)와 휴마니떼르(humanitaire)의 저항의 역사는 지속되었고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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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