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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좀은 흐른다 [천 하룻밤 이야기]

리좀은 흐른다.
2025 03 20 춘분(春分): 책력의 기준이 춘분이라 한다. 동지가 기준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명은 공간의 표면 상에서 흐름과 시간의 심층 에서 흐름이 있고, 이로써 생명의 흐름을 이해할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어서 온갖 말과 문장으로, 그리고 학술적 체계로 서술해 보려고 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자연의 흐름을 탐구해야 한다는 그리스의 자연주의자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의식의 인연연기를 깨달으려 했던 불교가 있다. 이 둘은 소위 말하는 불가지 또는 화두로서 다루었다. 이에 비해 유가에서는 제도 속의 삶에서 안빈낙도 할 수 있는 평천하를 생각하였고, 이들과 달리 로마의 압제 속에서 인민의 비천한(miserable) 삶을 공동체의 삶에서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 인도주의)의 평화를 찾으려 했던 예수 공동체도 있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인민의 삶에는 신 또는 신들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서로 서로 암묵적 합의와 계약을 통하여 인민의 삶 속에서 일반화된 덕목 또는 도덕이 있었다. 왜 상층은 인민의 덕목 위에다 신의 완전성, 황제의 절대성을 놓으려 했던가? 싯달다가 보기에는 그들에게는 그들의 탐욕이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는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민중의 무지에 분노하는 오만함이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서 이를 일깨운 이들은 철학자들이 아니라 비극시인들과 희극작가들이었다.

유가에서든 도가에서든 평천하에서 사적 이익을 탐내는 자들과 이 재산으로 백성을 부리는 자들이 평천하보다 개인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소인배 같은 사고라 하였고, 이를 정화하고자 인의(仁義)든 무위자연(無爲自然)이든 인간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서로 다를 지라도 공동화할 수 있는 공화(共和)를 내세웠다. 현자들은 논리적 사고가 허구이자 이름뿐이라 하였고, 최상위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아도 사람 사는 세상은 물 흐르듯이 흐른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탐만치에 빠진 자들이 끊임없이 민중, 백성, 인민을 노예처럼 대하면서 맑스 표현대로 잉여생산을 사유화하였고, 요즘 표현으로 임자 없는 돈(백성의 생산)을 먼저 먹는 놈이 주인이라고 하면서 탐욕과 오만의 극치를 이룬다. 이 탐욕을 욕망이라 부르는 지자들이 권력에 포획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중생을 권력과 권세에게 받치고, 지자는 자신들의 권위를 누리려는 시대를 만들고자 하였다.

권세, 권력, 권위에 젖은 자들이 계엄령이든 개몽령이든 자신들의 부귀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눈 내리는 가운데 눈보숭이처럼 밤을 새워 지낸 젊은이들이 다른 행동으로 실천한다. 이런 삶의 노력을 들뢰즈가 리좀의 흐름이라 했다. 생명의 흐름이, 즉 리좀의 연결망은 공간에서 그리고 시간에서 흐른다. 입말의 흐름인, 누리소통도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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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서양 철학사에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있을 것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 이오니아학파 이래로 퀴니코스-스토아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이런 종류들이 네 가지라 한다. 시간, 공간, 이데아(관념), 아톰(원자). 앞의 두 가지는 서양학문에서 두고두고 토대로서 다룸으로서 과학이든 철학이든, 그리고 종교이든 첫째 화두로서 남아있다. 그리고 뒤의 두 가지는 개별학문의 발달로서 인간들의 사회와 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두 용어를 정교화하고 개념화하면서 인간이 무엇을 지향(욕망)하는지에 연관이 있다.

서구와 동양에서 각각은 천년이 넘게 종교의 시대, 그리고 오백여년을 넘게 인간의 지위에 대해 현자들이 논의하던 가운데,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현자들의 삶의 태도가 인민과 프롤레타리아의 삶에 지침이 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삶의 터전에서 도구의 공유화(공산화)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현자든 지자든, 공동체주의자든 사적이익 추구자든 하늘과 땅, 공기와 물이 사적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시대의 변역과정에서 기계 생산물의 사적소유를 이론화하는 자들에게, 공유를 주장하는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당하였다. 그럴까? 그 사적 소유를 주장하고, 체제를 만들고,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체계를 정립한 것에는 유일신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세상이 자연 속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모든 소유가 신의 것이라는 착각과 환상, 심하게는 망상에 빠졌다.

이들 유일자 신앙자들은 권력의 체제와 싸움에서 상위를 차지하려고 천년을 싸웠다. 이들이 전쟁에 동조하기도 하였고, 심하게는 예루살렘을 회복한다는 이름을 전쟁을 조직하고 독려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직적 지배가 잘 안 될 때는 길고 긴 시대를 마남사냥도 서슴치 않았다. 이 마남사냥을 지휘하는 신학체계를 신앙이란 이름으로 자연과 지식에 대해 상위의 우월권을 설득하기도 하고, 공포와 위협으로 지배와 명령권을 꾸며내어 거꾸로 민중의 어리석음에 분노하고 화낸다. 윤석열이 격노하고, 이어서 김건희가 한동훈을 죽이겠다고 하거나, 그리고 이재명을 총으로 쏘고 죽겠다고 분노하는 것도 이런 유일자 신앙에 세뇌된 탐만치의 산물이다. 탐욕, 오만, 그리고 치졸함에 빠진 자들을 싯달다가 마구미라고 하지 않았던가.

서구 19세기에 탐욕의 권력으로 세워진 근대 산업국가의 통치자로서 국가의 통치권자가 어느 세기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으며, 게다가 선거를 통하여 체제를 통한 합법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위험에 처했다. 서구에서, 특히 빅토리아왕조(1901년)와 오스트로헝거리 제국(1918)의 무너짐은 이십세기 초이다. 수구파들은 또다시, 국가주의가 아닌 제국주의 또는 자본의 제국을 건설하려했다. 인민을 공포에 밀어 넣는 전쟁을 서슴치 않았다. 유일자 신앙은 이 전쟁에 은연중에 동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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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민주화의 과정은 인민의 삶의 흐름 속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입말이 공공화 되면서부터 4.19를 거치면서 조봉암과 인혁당의 건설에서, 그리고 유신독재에 반대하던 인혁당 재건에서 남민전을 거쳐왔다. 그리고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민주항쟁에서도 흐름은 지속되었지만, 인민들이 서로 소통이 되기에는 규소시대의 발전을 기다려야 했다. 누리 소통이 전지구적으로 소통되는 시대는 코로나19의 전지구화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아마도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시절이라 한다. 하나는 대중과 소통하는 연극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고라 광장의 민회가 있었다. 전자에서 비극들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을 경계하였고, 희극은 사회의 고착화에 각성하게 하였다. 후자에서 아테네 철학은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에 의해 인민의 자각을 일깨웠으나, 데모스의 정치(데모크라시)라는 장치를 겨우 마련했던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전쟁으로 멸망하였다. 그 민주의 흐름은 잠수하였다가, 이를 모방하려는 시도들이 로마에서 솟아나며, 민회와 원로원이란 제도로서 공화제라는 이름을 달았으나, 시저 이후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황제제로 바뀐다. 이 황제제와 더불어 이 제도를 본뜬 교회의 교황제는 서로 권력 다툼으로 중세를 이어갔다. 러셀이 철학사에서 말하듯이 그래도 중세의 민주화 방식은 밀라노 교구에서 있었으며, 성직자를 교인들이 선출해야 한다고 했단다. 그러나 교황청은 왕권에 대한 우월성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교권과 왕권의 다툼은 영국에서 교황청을 벗어나 성공회를 만들면서, 유럽사는 다른 국면을 만들었다. 왕권이 따로 존속하는 가운데, 영국 권력들 간의 싸움에서 크롬웰이 등장하는 의회파와 왕권파의 투쟁에서, 의회파의 승리하면서, 인민의 이름을 빌어 권리장전(1688)을 만든다. 그럼에도 인민이 아니라 상부의 두 권력 사이, 세습귀족들과 신흥시민들 사이에서 권력의 쟁탈인데, 백성은 여전히 권력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인민의 입말과 문자의 전파되기 200여년 만에, 인민의 의사 반영이 솟아난다. 여기에서 카톨릭 신부였던 시에이에스(Sieyès, 1748-1836)는 혁명전야에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1789)을 쓰면서, 귀족과 성직자가 아닌 새로운 신분으로서 인민(부르주아)의 등장을 알렸다.

이 인민이 자치와 자주, 그리고 세기를 거치면서 자율성을 행사하기 위해, 19세기에 여러 번 혁명들을 일으키며, 공동체 사회를 만들려고 하고, 이 과정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의 공산사회를 주장하기도 한다. 인민의 성장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종교 없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였다(프랑스에서 1882년 교육선언). 서구에서 평등사회 구현의 교육이 무상, 보통, 무종교라는 것을 실행하기에는 그래도 길이 멀었다. 그런데 우리의 동학의 성립이 1860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도 세계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세기를 지나면서 우리에게서 인민의 성장은 독립운동을 통해 계속되었다. 그 다음으로 계엄에 저항했던 열사들이 있었고, 그리고 광주에서 인민항쟁이 있었다. 그러나 1945년 이래로 입말과 문자화가 우리방식이라 하더라도, 인민의 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수구권력들은 마구미의 손을 여전히 펼치면서 마남사냥과 같은 빨갱이 사냥으로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뒷편에는 마남사냥에 동조하는 유일신앙의 세력들과 앵글로색슨 철학이 있었다. 하나는 우리의 오랜 전통과 단절하게 하여, 제국을 형성하려는 자들에게 세뇌당하여 돈을 숭배하는 유일신앙에 빠져있는 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학문에서 일차대전의 승전국 일본과 이차대전의 승전국 미국으로부터 과학의 진리를 수용해야 한다는 외세 의존적 지식인들이 지배하였다.

이들에 저항하여 인민은 촛불을 들었고 노무현 대통령을 지켰다. 한번은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을 실세로 하는 박근혜를 탄핵하였다. 한번은 비극 다른 한번은 희극일까? 실권자로서 김건희의 농단 속에서 눈먼 장님의 윤석열을 탄핵하려는 중이다. 이 기득 세력의 저항은 거세다. 벩송이 인민이 수행하는 ‘저항의 저항’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수구의 저항에 대항하는 항쟁과 혁명의 저항은 간헐적이었다. 인민의 등장은 느리고 가늘어 보이지만 지속하고 있다. 우화적이고 허구적인 수구 저항을 이겨내는 인민의 저항은 자연(본성)의 자발성에서 나온다. 박근혜의 탄핵은 쉬웠다. 윤석열의 탄핵은 헌법재판소의 심리가 끝난 지 한 달지났는 데도 기득권의 저항, 즉 반동은 거세다. 인민의 노력과 내공이 필요하다.

이번에 기득권 패거리의 거센 저항(반동)을 맞이했지만, 이들 셋 다 인민의 최종심급으로 이겨낼 것이라는 점에서 희극으로 끝날 것이라 낙관 하지만, 그 대가는 여러 가지로 치루어, 값비싼 수업료로를 지불해야 할 것 같다. 혁명이라면 짧은 시간에 정리할 수 있지만, 기득권의 법률 하에서 절차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시간이 필요하지만 낙관적이라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희극이 사회의 고착성을 벗어나기 위한 추억들의 방편이듯이, 우리에게서는 과거의 매국을 일삼은 극우파와 탐만치에 빠진 수구파의 고착성을 뿌리 뽑는 과정일 것이다.
인민은 누리소통을 통해서, 마치 리좀이 퍼져나가듯이, 인민의 의지가 펼쳐나간다. 루소가 말하듯이, 인민의 의지를 권력자에서 양도하지 않고, 계약을 통해 위임하지만 권력은 여전히 인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인민권은 기본심급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내란 수괴의 탄핵을 인용하게 되는 것은 인민이 최종심급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주권자가 최종심급을 일시 헌법재판소에 위임한 것이지, 그들이 마음대로 결정하라고 양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익히며, 내공을 쌓고 있는 중이다.

여기 현실에서는, 수구파들과 민주파들의 대립 속에서, 프랑스 혁명보다 더 잘 소통하는 연결망을 갖는 인민권이 등장하는 과정일 것이다. 21세기 규소의 시대, 누리소통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여러 리좀들이 아무도 해보지 못한 새로운 연결망을 짜고 있다. 새로운 공화국은 인민에 의한 계약의 사회가 등장할 것이다. 그럼에도 극우의 저항과 반동도 넓이를 더하고 있다. 김건희-윤석열과 극우 집단의 계엄이 얼마나 큰 공포와 위협을 하려했는지는 수거자 명단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전 모의들이 드러났고, 또한 그들의 조직망이 점점 밝혀지는 가운데, 그저께 뉴스에서 등장한 종이관 1천개와 영현백 3천개를 준비하려고 또는 사들였다는 이야기는 윤석열 계엄집단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가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며, 인민에게 공포를 자아내게 한다..

유일신앙자들이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마남사냥을 하였듯이, 김건희와 윤석열은 폭력과 계엄령으로 인민을 말살(Genocide)하려고 하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을 획책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영국의 시민전쟁, 프랑스의 대혁명과 같이, 우리터전의 21세기 새로운 제3신분의 혁명이 일어날 것 같다. 이 규소시대 혁명은 앞의 혁명들과 달리 입말과 문자로 인격의 층위에 리좀의 연결망이 새로이 각인하는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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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 시대의 도래는 21세에 엉뚱하게도 코로나19에서부터 전지구적 소통으로 열려 있었다. 이런 난제들 극복했던 경험을 가지고, 게다가 오랜 우리 문화와 새로운 누리소통을 결합할 줄 아는 우리가 세계사에 새로운 희극을 쓰고 있는 중이리라. 고착된 사회는 변화하고, 착각과 착오에 세뇌당한 기득권의 밀정과 수구파의 탐만치는 젊은 세대에 의해, 혁명이 아니더라도, 생물학적으로 밀려나고 있는 중이다. 공포를 심고 협박하는 이들에게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이들을 밀어낼 리좀망을 연결하고 자발적 생성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외세 의존의 지식인에게서 벗어나는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탐욕(탐만치)의 마군들을 퇴치하는 데는, 잉여생산을 제3신분화 또는 인민화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 상부상조하며 자치와 자주, 우리들 스스로 교육과 의료를 무상화하는 제도를 만들 자율성과 자발성을 실현할 노력과 내공을, 80여년을 쌓아온 지층 속에 그리고 그 위에 리좀의 그물망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들이 만들어가야 할 리좀의 그물망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연결하는 노마드처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소통의 흐름에서 트래픽으로 매듭들의 각각에서 만들어지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혁명이 이루어지는 중일 것이다. 그 혁명은 언제나 하늘에서 일어나는 번개와 같다. 그 번개는 동일한 적이 없어도 계속하여 일어난다.

여기서 노벨 수상자 한강의 수상문을 상기하자. 그 수상자는 수상문의 제목이 “빛과 실”이었다. 세상은 빛의 세계이다. 그 속에서 이 땅과 인민들 속에 반만년을 면면(綿綿)히 이어온 실처럼 있다. 젊은이는 그 목화 꽃의 부플음이 면면히 이어지는 과정처럼, 리좀의 흐름처럼, 우리 이야기를 즐겁고 유쾌하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작은 선함과 작은 상부상조가 또 작은 노력이 긴 시간의 두께에서 내공으로 이루어진다. 돈과 권력, 권세, 권위 패거리 배에서 벗어나 진솔한 벗과 동지를 만들면서 상쾌하고 통쾌하게 극우파와 수구파를 넘어서길 바란다.

혁명은 번개와 같이 일어나고, 하늘은 여전히 비, 구름, 바람으로 변전하며 이어가듯이, 터전에서 인민들은 여전히 자신들 삶을 변역(變易) 속에서 이어가며 펼쳐간다. 리좀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지만, 때에 맞게 제대로 연결망을 면면히 이어간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코로나19 이래로 다른 연결망으로써 리좀의 누리통신이 생겨났다. 그 누리소통은, 남태령의 밤샘의 그 눈 속에서 21세기에 새로운 조직화를 열었다. 공화는 인민들의 누리 소통에서 쌍방소통과 실시간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소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물론 전지구적으로는 전파이용이 가능한 지역이라는 점이 아직도 난점이지만 점점 더 확장되어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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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들처럼, 망상의 파라노이아, 그리고 나만이라고 생각하는 “난가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자아의 각성이고, 나의 성립은 우리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불교가 소자아의 성립의 명상과 돈수에서도, 사대부중이 함께 보살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소아가 보살이 되었다고 한들, 그게 진솔한 자아의 성립이 아니라고 하며, 대승과 용화세계를 강조했던 우리의 선승들도 생각해보자. 유교가 구태라고 하기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평천하(平天下)에까지를 이루고자 노력했던 성현들에게서도 리좀의 그물망을 더 잘 짤 수 있음을 생각해보자.

자아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터전에서 지금 수구들의 난동 같은 탄핵반대 속에도 있음을 명심하자. 이들의 탐만치를 극복하며, 벩송 표현처럼 저항의 저항을 이루고자 노력하며 내공을 쌓아가자.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 젊은이가 자율성과 자발성으로 새로이 나올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생 쥐스트는 스물셋에 대혁명에 참여했고, 스물다섯에 공안위원회를 맡았다. 규소의 시대 공자 말로 서른에, 천문학적으로 서른 여덞에, 플라톤이 말하는 마흔에 자발성의 사회를 만들 수 있게 실천의 노력과 과정의 내공을 쌓으면서 말이다.

리좀은 흐른다. 규소의 시대에 누리소통의 프래픽이 흐른다. 혁명도 흐른다.

(3:26, 58NLI) (4:04, 58NLJ) (5:20, 58NL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맑스 말대로 이 쿠데타가 희극일까? [천 하룻밤 이야기]

변역(變易): 맑스 말대로 이 쿠데타가 희극일까?

2025 02 18, 우수(雨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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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이 풀린다고 하는데, 한강이 얼지 않아서 강물이 풀린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다. 지난 12월 3일 얼어붙었던 터전이 입춘에는 봄바람과 더불어 풀릴 것인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김건희와 함께)은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며 계엄령을 발동했다. 바로 국회가 계엄령 해제를 의결했다. 그럼에도 두 달이 넘도록 계엄은 끝이 난 것 같지 않다. 게다가 그 계엄의 시행은 잘 짜여진 실행계획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광범위한 실행을 모의했다는 정도를 넘어서 사실 증거가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모골이 송연하다고 한다.

내란을 일으키려 시도하며 계엄을 실행한 세력은 광복공간에서 일제부역자들이 이승만과 더불어 하는 짓을 반복하는 듯하다. 그러나 민중이 대체할 방법이 없이 당했던 시절과 달리, 누리소통의 시대에 각성한 인민이 잘 대처하고 있다. 세월은 흐른다. 70년 전 입말의 소통이 거의 없던 시절과 달리 70여 년 동안 입말이 풍부해졌고, 인민이 누리 소통을 통해 자발적으로 문화 창달과 홍익인간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중에 있다. 20세기 철기시대의 전성기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거치면서 미국 제국의 반쯤 식민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한문도, 일어도, 영어도 아닌 우리 입말의 시대를 시작하였다. 이로 부터 79년이 지나, 규소시대의 흐름의 한 중간에 와 있는 것 같다. 이 시대에 누리 소통이 빛의 발산처럼 널리 빠르게 확장되고 전달되고 있다. 이 시대에 우리 젊은이가 천지인(天地人)의 문자로 입말로 세상을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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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서 서양은 천5백 여 년의 크리스트교라는 종교시대를 거쳐서, 350여 년의 합리주의시대, 그리고 인간의 각성과 더불어 실증주의시대에서 부르주와의 등장에 이어 프롤레타리아의 시대를 열었고, 식민지 수탈의 제국주의시대에 소비에트가 성립했으며, 미국이라는 제국시대의 시작에 동양에서 중화인민 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용화세계를 만들려고 천년의 불교시대를 거쳤으나, 고려 말에 중생의 고충을 해결하고자 사찰(寺刹)의 토지소유를 개혁하려다가 고려왕조가 무너졌다. 조선조 500년의 유학(儒學)시대를 거쳐 가는 마지막 100여 년에도 도탄에 빠진 백성을 생각하는 선각자들이 실증적 학문인 실학(實學)과 민중운동을 시도하였으나, 기득권을 지닌 노론이 일본제국주의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광복에는 일제 부일자들이 미국 제국에 빌붙어서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모는 수법을 쓰면서 600여 년의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자들의 기득권이 유지되었다.

동서양이 비슷한 위도 상에서 역사를 이어가는 나라들에서, 문명사적으로 종교시대를 거쳐서, 학문적 논리의 시대를 지나, 대중과 민중, 인민과 프롤레타리아 시대로 변역하고 있었다. 사실은 각 시대마다 동일성을 유지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각각은 다른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이런 변역의 과정에서 상층의 지배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은 항상 권력과 돈(재화)을 차지하였다. 21세기 윤석열 집단도 권력과 돈을 독점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저항하는 세력과 더불어 인민이 그를 파면하려 한다. 18세기 말 이래로 인민주권과 인민 최종심금은 역사 속에 한 찰나처럼 여기지지만, 전 지구상의 인류의 기억 속에 지층의 두께처럼 내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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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변역은 지배세력의 일방통행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백성으로부터 지지받는 새 왕조의 지위를 만들기 위해 우리 입말을 문자로 쓰는 과학적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 입말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뒷방의 글로 밀려났다. 조선 왕조 안에서 상부로부터 개조와 개혁의 노력들이 있었다. 연산군 시대에서부터 시작했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상부의 세력은 부동이었다. 훈구파들이 사림파 김종직 학파를 제거하는 모오사화와 기묘사화를, 그리고 중종 시절에 수구파들이 개혁파인 조광조의 일파를 제거 하는 기묘사회를 일으킨 역사에서도 있었다.

조광조 이후에 유학자들은 은둔지사로서 자신들의 안위를 보존하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다고들 한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서, 두 차례의 외국(일본과 청나라)의 침입에 의해 피해해진 강토에, 수구세력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사라진 나라인 명나라를 존중한다면서, 사대주의로서 유학 중에서도 신유학의 주자의 학문을 중심으로 삼아서, 이에 반하는 글을 쓰는 자를 통제하기 위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기괴한 사상 통제의 지침을 만들었다. 수구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을 몰아내고, 난적으로, 요즘 표현으로 빨갱이 사냥을 한 것이다.

정조가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실학자들과 더불어 개혁을 하려고 했으나, 훈구파, 수구파, 모화파로 이어진 세력들에 의해, 그의 사후에 다시 이익집단인 노론의 지배로 돌아갔다. 19세기 중반부터 우리나라가 세계사와 마주칠 때 젊은 지식인들이 있었지만, 극우집단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와 손을 잡고 나라를 팔아 넘겼다. 이런 과정에서 백성은 가난과 탐관오리의 착취 속에서 살아갔다. 백성이 서로 “니르고자 할배 있어도” 백성들 사이에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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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일요일에 광주에서 탄핵반대 집회를 한다고 전국에서 교회들이 많은 버스를 동원해서 집회를 하였는데, 이는 광복 후 우리역사에서 뒤바뀐 국면을 연출한 사건이 있었다. 얼핏 해방공간에서 신탁통치 오보사건(信託統治誤報事件)을 떠올렸다. 소련이 반대하고 미국이 찬성했다는데,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끝난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의 잘못된 보도를 내보낸 사건이다. 오보는 행방정국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민족의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공간에서 세상은 달리 흘러갔다.

이런 시기에, 여러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지도자들이 암살을 당하고 혼란에 빠졌다. 스스로 소통할 수 있는 입말도 갖추어지지 않는 시기에, 미국을 등에 업은 기독교 세력이 서북청년단을 만들어서 일제부역세력들과 더불어, 반민족처벌특별위원회를 해산시켰고, 제주도 도민을 학살하였다. 이때 민중은 이들에게 저항할 여론을 집결시키지 못했다. 인민이 자주적으로 의사를 결집시키고 퍼뜨릴 도구가 없었다. 부역자들과 기독교세력이 함께 반민족처벌세력을 빨갱이로 몰아갔다. 냉전의 부산물인 우리나라 남북 전쟁은 삶의 터전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중생이, 백성이, 민중이, 인민이 자립적이고 자치적인 사유에서 세상을 꾸려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촛불시위에 다음으로 찬란한 불빛시위에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외치며 축제를 벌였다. 이 둘째의 탄핵 심판에서 인민이 최종심급임을 의심하지 않는 나로서는 당연히 검찰독재 세력도 무너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변에서 속사정을 모르는 근거 없는 낭만주의라고 한다. 나도 저 독재세력이 조선조에서부터 훈구파, 수구파, 모화파, 부일파, 숭미파로 이어져온 역사를 무시하지 않는다. 이들은 백성의 입말보다 상부의 언어와 용어로서 지배해 왔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민중 또는 인민이 자각하고 소통하는 도구를 가졌으며, 스스로 자발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몇 가지 점에서 이들 극우파들이 인민에 의해 밀려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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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사람들이 코로나의 방어를 슬기롭게 거친 우리나라는 지구상의 중요한 나라로서 지위를 가져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가 DNA라든지 바이러스의 면역체를 해결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 질병대처의 방식에서 각 나라가 우리방식을 모방하거나 부러워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역사 속에 생물학적 질병과 위험에도 대처할 능력이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세계 정상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자고나니 선진국의 대열에 서있다고 했듯이, 우리는 어떤 국면에서 세계의 중요국가와 나란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자각이 자주(自主)를 부추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류 문화도 중요하다. 대중음악에서, 영화에서, 클래식 음악연주자들에서, 그리고 식생활에서 우리방식이 다른 나라들에게 일반화하여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계에서 지위 상승에 스포츠도 빠질 수 없다. 그럼에도 더욱 중요한 것은 노벨 문학상에 우리의 젊은 세대의 기수인 한강 작가가 올랐다. 나로서는 어떤 문화적 양태보다 우리글이 세계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말하자면 우리 입말이 문자로서 알려진 것이다. 이번 계엄에 대해 근거없는 낙관주의라고 할 때, 나는 우리 입말과 문자가 인민의 소통기구가 되었기에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오고 최종심급은 인민의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우리말을 입말 쓴지 79년 만에, 그리고 87년 항쟁이래로 우리글을 가로쓰기 신문이 나온 이래 38년이 지나서 인민의 시대를 열었고, 우리글로 세계문학사에 한 시대를 열었다. 자치에서 자주로 한 단계를 올라섰다고 해도 좋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누리소통(SNS)은, 권력의 지배방식과 전혀 다르게, 널리 공유되고 있다. 지식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은 도서관(문자, 음악, 영상)에서 라고 하지만, 인공지능(AI)의 속도와 확장은 코로나 이후 5년 사이에 지금까지의 문명사에서 만들어진 총량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하였다. 그 거대한 양에 짓눌릴 것 같지만, 어느 시대에도 부정확한 사례들이 넘쳐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화되고 정리되어 갔다는 것이 인류의 노력의 소산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극우파들의 가짜뉴스와 짜깁기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런 유투버와 텔레그램 등이 성행한다고 젊은이들이 모두가 그 속에 함몰되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든지 탐욕과 오만이 겉보기에 화려하게 보여도, 내공을 쌓으며 노력하여 얻는 성과와 작은 좋은 일들을 쌓아가는 선량들이 이 세상을 환하게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근거없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진실이라니깐.

이러한 세상의 변화에 늙은이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갈 방식에 대해 진솔하게 마주하고 노력한다. 늙은이들의 괜스런 걱정은 늙은이 자신들의 걱정이며 젊은이에게 전가할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자치와 자주를, 태어나면서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젊은이는 자신들이 살아갈 새로운 시대의 세계의 변화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게다가 5년 정도 사이에 비약적인 소통의 발전에서 젊은이가 스스로 노력하며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철기시대에 보편적 동일성의 요구가, 지금으로 보면 탐욕과 오만이라는 것도 깨닫고 있다. 규소시대 다양한 삶의 양식들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자율성이 이미 몸에 밴 채로 움직이고 새로운 생산을 하고 있다.

전두환의 쿠데타를 겪지 않았어도, 윤석열의 쿠데타가 젊은이 자신들이 살아갈 삶에서 걸림돌이라는 것을 잘 안다. 촛불시위와 다른 불빛시위가 그들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문화이며, “다만세”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젊은이들이 달리 생각하는 가운데, “틀딱”과 성조기부대들이 역사 속에서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입틀막”이나 “입벌구”라는 용어가 윤석열과 김건희같은 이들이 방식으로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근거 없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진실이다. 바로, 천지인(ㅣ,ㅡ, ㆍ)의 삼글표를 기본으로 하는 젊은이가, 크리스트교의 삼신앙이든 철학에서 삼위격이든 간에 지나간 것에 비해, 현실에서 소통의 삼글표가 자율성을 발현하는 도구임에 틀림없기에, 즐겁고 유쾌하게 다음 열릴 시대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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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앙자들이 여섯 먹은 꼬마처럼 자연을 자동인형처럼 철없이 탐욕과 놀이의 도구로서 대하다가, 자연에 자치가 있다는 합리주의시대, 생물학과 심리학의 발달로 자연에 자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자연이 자율성이 있다는 데 놀라고 있다. 이런 자율성의 사유가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에 가깝다면, DNA에 이르러 이제 자발성의 발현의 시대라고 깨닫는다. 이 자연의 자발성을 견디지 못해,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교회가 구시대의 서북청년단과 백골부대 같은 무리들을 동원하고 있고, 인터넷 속에서 신천지의 댓글부대와 명태균의 여론조작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양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을 되돌릴 수 없다.

젊은이의 시대이다. 마치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적으로처럼, 인민 속에서 인민과 더불어 인민으로 산다는 것이다. 벩송은 말한다. 삶이 먼저이고 사유한다(철학한다)는 다음이다. 서양철학사가 이상한 사고와 결합하여 신이 먼저고, 다음에 사유하고, 그리고 산다로 만든 시대가 끝났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의한 자연의 방식으로 사는 삶은 노력이고, 어느 생명체나 자기 강도(내공)를 높이고 있다. 이 강도를 우리는 내공이라 부른다. 열여덟까지 일반화의 방식을 가르친 대로 배웠고, 노력과 내공은 열아홉에서 서른여덟까지 자치를 통한 자율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돌아보며 노력하고 내공을 쌓는 이들을 만나러, 자연을 통한 지식의 광장으로(AI와 DeepSeek가 아니라) 떠나는 다양한 여행도 필요하다.

이 쿠데타가 희극이 되는 것은 낭만주의가 아니라, 젊은이의 내공과 노력에 있다.

이 세상은 젊은이에게 달려 있다.

(4:12, 58MLH) (4:29, 58MLHH)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의식의 발현: 역사는 때에 맞게(카이로스) 변역(變易)한다 – 수괴 체포와 식민지 연관에서 자각 [천 하룻밤 이야기]

의식의 발현: 역사는 때에 맞게(카이로스) 변역(變易)한다.

– 수괴 체포와 식민지 연관에서 자각.

– 2025. 01. 20. 대한(大寒): 소한 추위에 밀린 대한

지난 달 동지 이후에, 그 다음 한 달 후 절후인 대한에 이르기까지, 일부 사람들은 쿠데타와 계엄의 이야기가 점점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드라마와 같다고들 한다. 그리고 역사적 전개과정을 마치 연극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드라마든 연극이든 현상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내밀한 특성들과 그 사유의 뿌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도 한다. 윤석열이 등장인물이면, 이 각본과 대사는 누가 작성하였고, 연출자는 누구일까?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드라마 같은 이야기 있다고 한다. 드라마라기보다 긴 과정에서 크게 보아, 우리의 역사나 서구의 역사에서 비슷한 상사구조 같은 것이 있다. 서유럽도 기원전 역사의 문헌이 자체적으로 없고 외부에 있으며, 우리나라도 김부식의 짤라버린 역사서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원후의 역사에서 천년의 불교시대, 500년 유교시대가 있듯이, 서유럽에서도 1,500여 년의 크리스트교시대, 다음으로 오성의 합리화시대 300년이 있다. 유럽이 실증의 시대로 진행하면서 구시대의 두 가지, 종교시대와 형이상학시대를 벗어나려고 하였고, 그 이후로 상부는 유럽을 벗어나 부의 획득을 위해 전지구적으로, 칼과 방패로 무장한 로마의 식민지 개척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총과 대포의 무력으로 전지구적 식민지를 확장하였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영정조 시대에 몰락한 남인들이 실학이란 이름으로 실증학문에 관심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실증주의가 발현했지만, 서구의 식민지 확장이 중국과 일본을 압박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밀려왔을 때, 우리나라는 로마의 식민지경영보다 훨씬 더 강압적인 제국주의 식민지약탈의 먹잇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이 미국에게 배운 것을 대행해서, 일제 식민지와 광복이후 미국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때부터 미국은 일본을 주구(走狗)로서 소두목으로 앞세워 소련과 중국에 대립하게 하였고, 그 와중에 우리나라는 제국주의와 제국의 세력들이, 이승만, 박정희, 전투환, 이명박을 관리하더니, 이들 모습을 통합 모습으로 21세기에 윤석열의 쿠데타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사에서 기원 후에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몰락하고, 로마 제국이 지중해 주변뿐만 아니라, 유럽의 서부(프랑스와 스페인), 북아프리카(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 포함), 중동지역(현 터어키,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이라크 등)을 깊숙이 장악하였다. 식민지 정책에서 그리스 식민지 개척과 로마의 식민지 지배가 다르다. 그리스 식민지 정책은 그리스인들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그 지역의 상부로 정착하면서 그리스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들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이상)의 공유로서 다자의 평등과 자유를 누릴려고 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중앙집권 시기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몰락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시가 지중해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 참여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통치하면서, 이 장군이 파라오를 대신하면서, 통치를 위한 세 부류의 학자들을 궁정에 불러들여, 통치의 난제들에 대해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학문의 3계보는 소크라테스 좌파라 불릴만한 퀴니코스와 스토아가 한 축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서 로도스 섬으로 떠난 학자들과 달리 아테네에 남은 소요학파 학자들 중에서,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과학에서 해결책을 내려 했던 이들이 당대에 성행했던 의학의 히포크라테스학파와 함께, 민생의 삶을 해결하는 한 축을 형성했다. 그리고 나일강의 전통에서 측량술을 기하학으로, 천체의 운동에서 책력의 만들었던 오랜 이집트 신관들이 수학적 전통을 유지했던 것이 또 다른 한 축이 있다. 이 세 부류의 통합적 결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성립이라 한다. 제국의 체제를 확립하면서 정책의 실현에서 이 세 부류들은 상부로서 인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다. 이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 앞에서, 제도와 인간의 관계와 달리 자연과 인간이라든지, 신(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그래도 여전히 탐구하는 노력은 있어왔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장군이 세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왕조가, 공화정의 로마에서 제국의 로마로 바뀌는 시절에, 지중해와 중동의 패권을 로마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의 식민지 정책은 달랐다. 그리스 식민지처럼 새로운 도시 개척이 아니라, 이미 성립된 도시들이 로마에 복속(예속)하지 않으면, 무참히 말살하였다. 로마는 공화정 시절에도 카르타고라는 도시 자체를 몰살시켰듯이, 로마의 제국은 저항하는 나라들을, 특히 이스라엘을 저항자들을 완전히 몰살시키려했다.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로마의 정복을 통한 식민지 확보는,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듯이, 개척에서 생산력의 증가에 의한 이익의 확대와 달리, 식민지 지배의 생산양식에서 생산에 참여 없이도 잉여의 착취를 하였다. 이런 정복을 통한 잉여착취는 앵글로색슨 철학에 깊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전지구적 교역하기 시작한 1,600년 전후에 네덜란드 상인은 세계 지역들과 상호호혜 무역을 하려고 한데 비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1588년) 영국이 해상권을 지배하면서 식민지 정책은 개척이 아니라 착취와 약탈이었다. 이런 약탈 경제에 의한 부의 확충을 아담 스미스가 눈치 채고, 국가의 부는 상업을 통한 자유경제체제라고 보았다. 물론 아담 스미스의 중요한 업적은 단일체제 내에서도 노동의 분업의 과정을 통한 잉여이익의 창출을 밝힌 점이다. 그럼에도 그의 경제학은 국가 또는 공동체의 총생산의 노동과 분배보다, 국가 경제에서 교환을 통한 이익의 증대를 보았다. 중상주의에 자유시장경제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개척과 착취를 정당화하였고, 께네의 중농주의와 맑스의 정치경제학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총과 대포의 식민지 확장은 세계사를 영국이 주류인 것으로 되었다.

유럽이 중심이 되어 20세기에 두 번의 식민지 세계전쟁을 거치면서, 부의 축적을 이룬 미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쟁을 통해 성립했듯이, 미국이라는 제국은 세계 곳곳에서 쿠데타와 전쟁을 일으키며 잉여의 착취라는 체제를 유지하였다. 제국은 한 세기 동안에 차례로 일어난 자본과 금융의 위기를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소비에트와 중국이라는 대립적 국가들의 성립과 더불어 제3세계는 자주와 자립의 길을 찾기 시작하였다. 세계는 철기문화에서 규소문화 시대로 변화하면서 인도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들이 자기 위상을 만들면서 세계는 다원화되어 가고 있다.

철학과 학문의 발달은 인간이 즐겁고 평화롭게 살려고 하는 노력의 결실들이다. 이런 노력들은 학문이전에 있어왔다. 그런데 로마의 제국은 달랐다. 악랄한 착취에서 식민지 인민의 삶은 비참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철학사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고뇌를 이야기하면서 이를 해소하는 노력과 학설을 제시한다고 보았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 식민지에서 지성의 노력은 인간의 기초적 어려움에 대한 해소로서, 자연학과 도덕론, 나아가 정치학이나 국가체제를 설명하려 하였다. 그런데 로마는 제국화 되면서, 그리고 식민지 총독으로 나가서 식민지의 수탈의 재산과 명성(?)으로 로마로 돌아와 황제에 오르는 방식이 생겨나면서, 식민지 착취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에서도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제 속에서도 식민지 수탈에서 일어나는 반란과 항쟁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이는 20세기가 지난 후, 마치 미국이 전쟁을 통해 세계를 다스리는 경찰을 자임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로마가 무너지고(476년), 동로마가 오스만 투르그에 의해 멸망(1453년)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방식이 유지했던 것은 황제와 유일신앙의 지도자(주교들)의 담합에 있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로마의 교황은 다르다고 할 것이지만, 서유럽은 제국은 없고, 군소 왕국들의 분화, 즉 봉건시대였다.

국가권력에 종교권세가 결합한 것은 둘 사이에 이익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야합 또는 카르텔이 드러난 것은, 고대 이래로 권력과 권세가 한 사람(황제, 참주)에 있어서, 둘 사이의 갈등관계 또는 이질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이질 관계의 봉합이라 부를 수 있는 상부가 성립하기에는 철학적 배경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겉보기에는 철학학파들 사이의 진리 논쟁 또는 각 학파들 사이에 학문적 위상 정립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말하자면 분화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학문의 분화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있었던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학문 또는 철학의 분화는 자연을 다루는 이오니아학파와, 존재를 사유하는 엘레아학파 사이에 있었다. 이 다음에는 소크라테스의 후계자들에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퀴니코스를 이은 스토아의 대립에서 갈래가 일어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학파와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에피쿠르소의 정원학파도 나왔다. 이런 분화가 이루진 것은 천문과 기상학에 대한 설명과 이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해가 상식에 준하였기에, 이미 기원전에도 몇몇 학자들이 지구의 둘레 지구의 자연을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말기에는 시각적 관찰의 학문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이론에 동조하였고, 게다가 권력과 권세는 이런 정태적 지식에게 권위를 부여했다.

권력과 권세와 맞물려 지식의 권의의 문제는 알렉산드리아의 말기에 학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학파들에 별 주목하지 않고, 신플라톤주의, 아리스토레스학문의 복원, 셈계의 유일신앙의 성립으로 나누고 있다.

알렉산드리아학파를 대부분 철학사는 신플라톤주의라고 말하지만, 이오니아 이래로 우주발생론과 우주론 사이에서 체계적 학설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표자는 플로티노스(204-270)이다. 그는 스토아학파의 우주 영혼이라는 생성하고 변화하는 체계를 받아들여 플라톤주의 다시 세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관을 통한 상식이 이 우주발생론을 지탱해 주지 못했을 것이고, 새로이 제기된 유일신앙자들과 부딪히면서, 세계영혼의 신학이 크리스트교의 반박으로 이방종교(이교도)로 몰렸다. 그 몰락은 크리스트교인의 사주를 받은 군중이 여성 수학자이며 신플라톤주의자로 인정했던 히파티아(370-415)를 대로에서 갈갈이 찢어 죽였고, 529년에 아테네의 학당들이 폐쇄되면서 중세의 암흑기로 그늘 속에서 면면히 이어갔다.

알렉산드리아학파와 대등하게 발전한 것은 로도스 섬에서 소아시아 연안의 카리아 지방에 아프로디지아스라는 도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의 계승자들이 어어진다. 그 대표자는 알렉산드로스아프로디지에우스(150경-250경)이다. 소요학파의 특징처럼 논리학을 기본으로 사물들과 대상들을 경험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유효했다. 이들의 논리학의 최고류 용어는 개념적으로 절대자 또는 신과 대등하게 위치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그리고 사물의 대상이든 사유의 대상이든 정태적인 현상에서부터 변화를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도 흥미있게 받아들였다. 이들의 학설이 유일신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크리스트의 신학이 정립되지 못한 시기에, 알렉산드리아학파와 논쟁과 대립에서, 플라톤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성립하듯이, 새로운 신학 특히 신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확립하는데 필수적이었다. 그럼에도 유대-크리스트교 쪽에서 신학과 유대 전통의 역사를 개입시켜, 예수를 드라마의 인물로 만들고자 하였다.

예수-크리스트의 전통은 유대-메시아(크리스트) 전통과 다르다. 전자는 이방종교에 물들었다가 삶에서 비참을 벗어나는 방식에서 그리스철학보다 비유로 설명된 스토아-크리스트교의 설교에 매력을 느꼈다. 이는 유대-크리스트(메시아) 전통처럼 태초의 신(야훼, 유일신이든)에서 보다, 하늘에서 울려오는 신의 말씀 또는 로고스가 진리이다. 그리고 아가페(무상보시)가 세상의 비참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 예수-크리스트가 구원과 부활에 의한 삼신론이 성립하기 전에(324년), 자연의 이법과 학문의 이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위계처럼, 절대적인 부동의 원리와 그 원리의 경험적 연결을 찾으려 했다. 이런 전승에는 오리게네스(185경-253경)가 있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자연과 더불어 이법의 해결에서 진리보다, 또한 숙명의 해결할 수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운명의 논리 전개에서 저세상의 안녕을 통해 삶의 안정과 구원을 찾으려 했다. 이방종교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저세상의 문제 해결을 예수의 속죄에서 찾는다는 알레고리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비슷한 시기였다. 플라톤주의자라 불리는(그런데 알렉산드리아 학파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의 개념이 들어있는데) 플로티노스(204-270)의 우주발생론적 설명,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 속하는 알렉산드로스 아프로디지에우스(150경-250경)의 논리적이고 정태적 세계구축, 그리고 신을 통한 완성된 세계와 구원을 주장하는 오리게네스(185경-253경) 등이 담론을 전개하였다. 이들 중에서 로마 제국 속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점점 더 제국과 같은 체계를 형성하는 쪽은 셋째 예수-크리스트교 쪽이었다. 물론 이런 체계의 완성에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 때 와서였다.

학문적으로 플라톤주의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나름의 체계와 대상을 다루는 방식을 갖추고 있었다. 한마디로 전자는 다자의 공존을 말하고자 하고, 후자는 종과 류 위에 하나의 최고류를 설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자의 단위의 하나(un)이거나 류와 종에서 각각의 단위로서 하나(un)는, 입말로서 표현하는데 같은 하나이다. 그럼에도 전자에서는 유일한 선의 이데아로서 일자(l’Un)를, 후자에서 완전자이며 절대자로서 일자(l’Un)를 말하는데, 용어로서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크리스트의 체계에서도 일자를 수용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둘을 알레고리로서 통합된 방식으로 유대-크리스트교를 만들면서, 유일신의 일자(l’Un)를 설명한다. 이로서 신학의 일자는 최고선이자 불멸자와 같다.

그런데 이방종교에서 이데아의 일자는 미래에 만들어야 할 세상이지, 과거에 만들어진 천국과 같은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유대-크리스트교의 일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율과 모순율 수용하면서, 과거의 일자인 신을 알레고리의 첫 근거로 세웠다. 하나의 신이 있고, 다른 신을 믿는 것을 배격하여, 하나의 신으로 돌아가는 배중률(A 아닌 것이 아니고 A이다)을 받아들인다. 나 이외의 신들이 아닌 신이 진리의 신이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조의 멸망과 로마 제국에 성립에서 신학의 알레고리는 황제제에 맞는 배중률이었다. 예수-크리스트를 공동체 신앙(믿음, 독사)의 대상 밀어내고, 신학이론으로서 유대-크리스트교에서 세계사 변천의 진리로서 신앙(파라독사)을 구사하여 중세 천년을 이어온다. 이 배중율에 따라 교리(파라독사)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온갖 나쁜 짓의 신호탄이 히파티아의 광장에서 공개적 살해였다, 마남사냥은 이를 이어받은 한 방식이었고, 중남미의 식민지에서도, 우리나라에서 한경직에서부터 전광훈에 이르기까지 배중율에 의한, 자기 이외에 다른 신앙을 악이라는 진리의식의 세뇌는, 권력과 결탁하여 많은 백성을 살해해왔다.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세계사에서 황제제(참주제)에 반대의 첫 시도자는 소크라테스라고 한다. 다이몬들을 믿는 그는 민주제도의 성립을 바랐다. 그럼에도 고발 내용 중의 하나로서 전래의 신앙을 믿지 않는다고 하여 사약을 받았다. 하나의 신이든 여러 신이든 신으로부터 믿음에서, 어느 하나가 독사이면 다른 신을 말하는 것이 파라독사이듯이, 거꾸로 유대-크리스트 신앙은 파라독사들 중의 하나이다.

학문은 이를 벗어나기 위해 자연의 이법과 그 실증의 사실들을 탐구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고대와 중세는 실증적으로 연구가 거의 불가능했다. 르네상스이래로 망원경이 세상을 달리 보게 만들었고, 이어서 현미경은 눈에 보이지 않은 대상들을 말할 수 없다고 했던 시대를 넘어서 맨눈에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세계가 점점 넓어져 갔다. 사물의 변화라기보다 사물을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의 변화가 인간의 의식(영혼)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증기기관과 원동기(모터)의 발달은 생산양식을 바꾸어 놓았고 편리와 안녕은 상부만이 아니라 대중에까지 퍼져 나갔다. 그럼에 소유는 소수의 것이었다. 생산양식의 변화는 또 다시 인민의 사유를 변혁하였다.

20세기 중반에 DNA와 디지털의 발견과 발명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었고, 21세기의 인민들의 누리소통은 의식의 민중화를 넘어서 다양체의 길을 열었다. 알레고리에 의한 유대-크리스트교, 미국 제국, 동일율의 논리체계, 이 3자의 야합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종말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이제 이 3자의 야합으로 최고 존재로서 일자가 돈(자본)이라 한다.

세뇌되고 전승된 권세, 권력, 지식이 2천5백 년 전부터 아니 4천 년 전부터이라지만, 인류는 수백만 년 전부터 노력하며 내공을 키워왔다. 자연의 이법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지혜의 탐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규소의 시대에 와서야 다자의 공존과 같은 다양체의 문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일제에 부딪혀 우금치를 넘지 못했던 시절의 아픔을 날려버리며, 우리 젊은 여성들이 농민과 남태령을 넘었으며, 12.3에는 여남, 소노, 천귀없이 함께 여의도에서 불의에 항거하였고, 추운 밤 눈 내리는 도로위에서 눈사람이 될 정도에서도 새로운 공화국의 밝힐 빛을 발하였다. 내란 수괴 윤석열은 어제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제7공화국이 밝아 오리라. 한 가지만 바란다면 다음 선거부터 다양체의 바탕이 될 결선투표제를 실행하기 바란다. 배중률에 빠져 내편 찍지 않았기에 통일성(l’unite, l’un)이 안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자의 공존에서, 결선투표로 가면서 당연히 연대와 계약이 이루어 질 것이다. 루소의 자연권 사상에서 자기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은 합의 계약이 민주제의 기본이라 했다.

세상은 45억 년 전부터도 변역(變易)하고 있다. 벩송이 “저항에 대한 저항”이 열린 도덕사회, 역동적 종교를 만든다고 했다. 극우의 기획과 저항(반동)에 대하여, 이 시대 인민의 저항, 즉 리베르떼르(libertaire)와 휴마니떼르(humanitaire)의 저항의 역사는 지속되었고 이어가고 있다.

(4:25, 58LLI) (5:28, 58LLJ) (5:41, 58LLJ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막스 슈티르너: 에고이즘의 위대한 철학자-5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박종성

 

    – 차 례 –

  • 서론
  • 헤겔 좌파
  • 헤겔 좌파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 정치적 슈티르너
  •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 슈티르너 이후
  • 역사적 결론
  •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Svein Olav Nyberg [노르웨이 아그데르 대학교(노르웨이어: Universitetet i Agder) 부교수]의 글, Max Stirner: The Great Philosopher Of Egoism(2021)을 번역한 글입니다.

슈티르너의 에고이즘(egoism) 개념은 지금까지 부정적 기능을 가진 것, 즉, 상대방을 높은 지위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철학적 또는 정치적 주장을 끼워 넣을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됐습니다. 그러나 슈티르너는 또한 우리에게 긍정적 예로 에고이즘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내가 한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원하고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랜드의 에고이즘과 달리,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은 규범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신-주의(new -ism)의 기초가 되는 용어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슈티르너의 철학은 구체적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철학입니다. 슈티르너의 비판을 넘어 그의 철학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생각은 “유일자”, “개인”, “유일한 한 사람”을 의미하는 Der Einzige입니다.

슈티르너는 각 개인이 유일하다고 지적합니다.[1] 한스 트리그베(Hans Trygve)[2]와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다른 두 개인입니다. 물론, 우리는 둘 다 인간이지만, “인간”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지, 우리가 되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우리의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은 개인의 특성[3]이 아니라 개념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나는 많은 것들과 공통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것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 공통성이 나의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개념이었다면, 당신도 나를 철자할 수 없었을까요?

이것은 간단한 일상의 관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은 일격이 큰 철학의 오크나무를 쓰러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일하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사들도 유일합니다. 즉, 우리의 관심사들이 유일자를 표현합니다.[4] 슈티르너가 에고이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유일한 사람의 유일한 관심사들(unique person’s unique interests)입니다. 에고이즘은 신, 인간 그리고 당신의 국가와 같은 이상들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관심을 위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입니다.

슈티르너는 또한 우리가 이상을 위한 투쟁과 우리의 관심을 동일시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여전히 – 에고이즘에서 비롯된 우리의 자기-관심에 기초하여 그 일을 수행할 것이라고 암시합니다. 즉, 그는 심리적 에고이즘을 제안합니다.[5]

이 일은 우리의 모든 관심사가 기본적으로 유일한 관심사, 즉 우리가 유일한 개인이듯이, 우리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라는 점에서 정확하고 동어 반복적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심리적 에고이즘이라는 생각이 다소 번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테레사 수녀(Mother Theresa)와 같은 “무의식적” 에고이스트와 나 자신 같은 “의식적” 에고이스트를 분리하는 문턱을 높이기 때문입니다.[6]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슈티르너는 나에게 주입된 생각 및 감정과 내 안에서 일어났던 생각과 감정을 결정적으로 구분합니다.[7] 그의 논설 「우리 교육의 잘못된 원리(Das unwahre Prinzip unserer Erziehung)」에서, 그는 교육의 큰 문제를 아이들의 머릿속에 지식을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채워 넣는 것 중 하나로 보는 이론을 공격합니다. 슈티르너는 교육자들이 교육 수단에 관해 서로 격렬하게 의견이 다르지만, 목표가 아이들의 머릿속에 지식을 채워 넣는 것이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한다고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슈티르너는 아이들이 그들 자신의 학습을 선택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들의 함양은 그들 자신의 관심에 기초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지식은 아이들 자신의 이 되고, 떠넘긴 사실들과 이론들의 무거운 짐이 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슈티르너 이후 150년 후의 뇌 연구에서 나온 흥미로운 관찰은, 학습의 화학 작용은 틀림없이 학습자가 관심을 가지고 학습할 때 가장 잘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배움처럼 무언가가 자기 자신의 이라는 생각은 슈티르너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이자 필수적 생각입니다. 슈티르너에 따르면, 당신이 접촉하는 모든 것은 당신의 소유입니다. 이는 법적 의미가 아니라, 유일자로서의 당신이 접촉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그 밖에 누군가가, 어떤 이상 등등이 규정한 관계가 아닌 자기 자신의 관계에 따라 당신이 직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소유”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특이한 방법임이 틀림없으므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겠습니다. 고전적 의미에서 “소유”는 당신이 통제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통제를 명확히 사용하는 방법은 당신과 당신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권리”로서의 “소유”는 슈티르너가 방금 거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권리”는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리는 “인간”(Man)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지배적이고 규범적 이상이 없다면, “소유”는 당신이 접촉하게 되는 모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상과 권위가 규정한 것에 따라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자기소유성(ownness)으로 그것과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이 “소유”입니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당신의 통제력은 당신의 힘, 즉 당신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슈티르너의 마지막 두 번째 생각이 바로 Eigenheit, 즉 “자기소유성”입니다. 이 발상은 당신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평가를 – 당신의 것으로 생각한다는 설명입니다. 자기소유성은 슈티르너의 마지막 생각인 “소유자”를 의미하는 Eigner와 관련이 있습니다.[8]

슈티르너는 “자기소유성”과 “자유”를 대조합니다.[9] 슈티르너는 “자유” 자체가 공허하고[10] 헛된 개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유(“자유”라는 단어)는 “자유”라는 단어와 함께 “부재”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라이트 맥주(Light beer)에는 알코올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마신다고 해서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유”를 추구할 때, 정확히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원하시나요? 단어 자체는 아무런 답을 제공하지 않으며, 당신은 지칠 때까지 단어에 대한 권리에 대해 “인간적 자유주의자”와 논쟁을 벌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당신은 단순히 이 자유에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는지를 자기 자신을 위해 결정할 수 있고, 당신의 자유를 전혀 원하지 않는 군중이 아니라, 아마도 당신의 자유와 모순되는 다른 종류의 자유를 원하는 군중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슈티르너는 “자유”보다 “자기소유성”을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부재하는 자유는 당신 자기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당신의 자유를 좋아하는 영역에서 존재감 드러냈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승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신은 공짜로 자유를 가질 수 없다”라는 악명 높은 문구에 반영되었습니다.

자유와 자기소유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시는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 어린이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괴롭힘을 가하는 사람이 한동안 그 어린이를 괴롭히는 데 지치면, 괴롭힘은 한동안 없어집니다. 그 어린이는 괴롭힘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다른 사람의 수중에 있다는 것이 쉽게 드러납니다. 반면에, 그 어린이가 가라데[태권도;옮긴이;우리 정서에 맞게]를 배우기 시작하거나 운동선수 친구를 사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그런 다음 그 어린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자기 자신의 을 사용합니다. 그 어린이는 자신의 의지로 그들에게 저항합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가해자들이 그 어린이를 다시 괴롭히기로 결정하고, 그 어린이가 자신의 자유를 호소한다면, 이 헛된 호소는 가해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소망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소원은 그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괴롭히는 사람들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랜드와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랜드는 “피해자의 제재”에 대해 말합니다. 당신이 반격하고 거절하지 않는 한,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힘은 무제한입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슈티르너는 어떤 이상의 매개[11]를 통해 서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대 개인으로서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특히 그는 그가 그들의 이상을 무너뜨릴 때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켜줄 이상이 없으면, 우리는 완전히 멸망한다고요, 우리는 악행자들에 맞서 싸울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요!” 여기서 슈티르너는 십자가나 마늘과 마찬가지로 “권리”도 어떤 경우에도 보호받은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12]당신은 무엇을 위해 거기 서 있습니까?” 그는 묻습니다. “당신은 저항할 힘이 없습니까?”

게다가, 슈티르너는 힘과 능력이 크고 건장한 남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다른 사람들과 합치면, 나의 힘은 몇 배로 배가되기 때문입니다.[13] 그리고 역사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모든 변화는 이상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든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이루어졌든, 항상 구체적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상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은 기껏해야 구체적 사람들의 마음속에 밀항자나 무용지물에 머물렀을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얻은 것은 환상과 이상을 잃어도 사라지지 않으며, 잃어버린 이상이 “권리”와 “자유”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내가 얻은 것을 누군가가 나에게 더 이상 허락하지 않더라도 나는 더 이상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얻은 것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괴롭힘을 당한 남학생이 얻은 “자유”는 자유를 위한 청원보다는[14]이고 그 자신의 자기소유성에 더 잘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주류 판매 면허를 상실했다고 해서, 내가 자동으로 음료 판매를 중단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는 특정 한도를 초과하는 수입이 거부되어, 고전적인 정치적 의미에서 나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기소유성으로 -밀수입합니다.


옮긴이 박종성: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공역)이 있다. 논문으로는 「유일한 사람의 사랑」,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고 건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1] “나의 관심은 전체에 두루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유일한 나이듯이,—유일한(einzig) 것이다.” 12쪽, “나는 나 자신을 어떤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존재로 여긴다. 확실히 나는 남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견주어 보거나 돌이켜보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실제로 나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며, 유일한 사람이다.”, 218쪽, “하지만 이제부터 더 이상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아니외다. 오히려 유일한 것이외다.” 231쪽, “자유주의자는 그대에게서 그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개념을 보고, 또는 철수나 영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보며, 현실적인 사람 혹은 유일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의 본질이나 그대의 개념을 보고, 뼈와 살을 갖춘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을 본다.” 268-9쪽, “그러면 그 인류의 무덤 위에서 내 유일한 주인인 나,”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 338쪽.

[2] 원주 5, 번역자.[이 글을 노르웨이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옮긴이]

[3] 그래서 나는 에고이즘을 자기중심성으로 옮겼다. 나아가 개인의 특성이 자기중심성이고 그런 개인을 자기중심적 사람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4] 같은 책, “나의 관심은 전체에 두루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유일한 나이듯이,—유일한(einzig) 것이다.” 12쪽.

[5] 같은 책, “비록 인간 본질의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아르놀트 루게와 같은 “정치적 자유주의자”에게는 인간 본질이 ‘시민권’과 동일시되고, 모제스 헤스와 같은 “사회적 자유주의자”에게는 인간 본성이 ‘노동’과 동일시되며, 브루노 바우어와 같은 “인간적 자유주의자”에게는 인간 본질이 ‘비판적 활동’과 동일시됩니다.” 575쪽, 옮긴이 해제.

[6] 같은 책,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슈티르너는 물질적 부를 추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탐욕스러운 개인의 중요한 예를 논의합니다. 그러한 개인은 분명히 자기유용을 갖고 있지만(그는 단지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만 행동합니다), 그 일은 슈티르너가 일방적이고 편협하다고 거부하는 자기중심성이며 정신을 빼앗긴 상태입니다.” 579쪽. 옮긴이 해제 참조.

[7] 같은 책, “자신의 것(Eigene)이 고취된 것(Eingegebenen)과 대조될 때,” 102쪽, “그 밖의 어떤 것들을 통해 내 안에서 일어났던 감정이나 생각과 나에게 주어진(gegeben) 감정이나 생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03쪽, “그렇다면 차이는 나에게 불어 넣어진(eingegeben) 감정인지 혹은 단지 나를 마음 내키게 했던 감정인지이다. 나를 마음 내키게 했던 감정들은 나 자신의, 자기중심적 감정들이다.” 104쪽.

[8] 같은 책, “이와는 반대로 자기소유성, 그것은 내 온전한 존재이자 현존을 의미한다. 자기소유성은 나 자신이다. 나는 내가 벗어난 것에서부터 자유롭다. 나는 나의 힘 속에 가지고 있는 것 혹은 내가 마음대로 제어하는 것의 소유자이다.”, 246쪽, “그러한 기독교적 희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자기소유성’은 어떤 현실성이다.”, 256쪽, “자기소유성은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인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자기소유성은 기독교의 언어가 명예롭지 않게 만든 것을 다시 명예롭게 만든다. 그러나 또한 자기소유성은 타자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자기소유성은 자유, 도덕, 인간다움 따위와 같은 이념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소유성은—소유자의 묘사일 뿐이다.”, 267쪽.

[9] 같은 책, “자유와 자기소유성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큰가!” 246쪽, “자유와 자기소유성 사이에, 그저 말 사이의 차이에 불과한 것보다 더 깊고 심한 대립이 여전히 있다.”, 248쪽.

[10] 같은 책, “왜냐하면 자유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이용할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쓸모없는 허용은 어떤 가치도 없다. [172] 하지만 내가 자유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나 자신의 자기소유성에 달려있다.”244, “나의 자유가 나의—힘일 때에만, 나의 자유는 완성된다.”, 261쪽.

[11] 같은 책, “사람은 다른 사람과 즐거운 방식으로 교류해서는 안 되고, ‘더 높은 감독과 중재’ 없이 교류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행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허락한 것만큼만 실행해야만 한다. 나는 나 자신의 생각, 나 자신의 노동, 또는 대체로 나 자신의 어떤 것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351쪽.

[12] 원주 6, 노르웨이의 저명한 자유주의자인 Bjørn Borg Kjølseth는 “누군가가 당신의 권리를 상하게 한다면”, “권리가 이에 대응하여 그의 다리를 물겠습니까, 아니면 스스로 그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13] 같은 책, “이러한 결속[상호 의존; 3쇄 교정할 때]에서 나는 내 힘의 상승만을 본다. 그리고 오로지 결속이 내 증가된 힘인 한에서만, 나는 결속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렇게 결속은 어떤—연합이다.”, 483쪽.

[14] 같은 책, “전자는 국가에 대한 청원이고, 후자는 국가에 맞선 반란이다. ‘권리에 대한 청원’, 심지어 언론 자유의 권리에 대한 진지한 요구는 국가를 주는 사람(Geber)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직 선물(Geschenk)과 허가, 승낙을 기대할 수 있다.”, 435쪽.

다극시대의 젊은이들에게 – 제7공화정 시대의 주인, 다양체. [천 하룻밤 이야기]

동지(冬至): 다극시대의 젊은이들에게

– 제7공화정의 시대의 주인, 다양체.

 

인간이 지적 체계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삼천 년 전 이전 시대, 즉 기원전 천년 이전 시대 정도로 잡는다. 나일강,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황허강과 장강(양쯔강) 등으로 4대문명을 이야기한다. 이런 토지 시대의 이야기는, 신화 또는 전승으로 알려지는데, 이 시대에 쓰는 입말은 사라지고 각각에 따른 기호들이 남아있다. 이 기호들이 어느 정도 체계를 갖는 시절이 기원전 오륙백 년의 시대라 한다. 그리고 입말과 기호가 상응하는 체계를 만들어지고, 그리고 기원전 삼사백 년에는 체계가 만들어지는 데, 기하학과 논리학이라 한다.

실제로 정교할 정도의 체계를 갖추었던 기하학과 논리학이, 현실의 사물들과 사건들에게 적용에 맞는 부분들보다 맞지 않는 부분들이 더 많다는 것을 왜 몰랐겠는가? 그럼에도 맞는 부분으로 체계를 세우고 조직화를 이루어 공동체보다 더 확대된 도시국가 또는 황제국가를 만드는 재미와 이권(이익)에 매몰된 부류들이 상층을 형성한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백성과 노예들은 어쩔 수 없이 사물들과 사건들의 성립에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세상은 한시적으로 살다가 간다는 것을 알지만 달리 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달리 산다는 것은 죽음이며, 이를 벗어나는 생각을 하는 것이 무서움과 두려움(공포)이라는 것도 안다. 묵묵히 이런 굴종 속에 살다가 갈 수는 없지 않는가? 이런 부류들은 성(城) 밖으로, 제도 밖으로 밀려난다. 여기서 한 가지 성 안은 정상이고 성 밖은 비정상일까? 성 안은 성 밖에서 생산과 유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성안의 지배를 위한 권력을 구성하였다. 그럼에도 성 밖을 제도의 여분으로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동심원적 테두리 속에 넣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 성 밖의 이탈자(뻬르베르)를 동심원적 구조 속에 묶는 것은 기하학적 사고이고, 이 동심원적 사고의 지배방식을 확장하는 것은 언어(논리학)라 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경에 인류의 인식의 한계이지만, 오관[視(시)·聽(청)·嗅(후)·味(미)·觸(촉)]의 인식이 하나로 통합되어 단일성을 또는 통일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이를 생명체로서 단일성의 유지하는 것으로 생리학(퓌지올로지카)이, 세계의 통일성을 이루는 것으로 천체학(코스몰로지)이 동형구조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상상했고, 이 동형구조는 동심원처럼 되어 있다고 여겨서 체계화가 일정한 정합성, 대응성을 유지하면서, 나도 우리도 서로 이해와 설득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몸(신체)과 세계(천체) 사이의 연관 또는 연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들도 관계와 조성(composition)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고, 안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인식에서 몸들의 조직화와 비슷하게 또는 동상구조로서 도시국가, 황제(참주)국가의 제도가 이루어진다고 여기며, 제도와 체제의 조직화를 생각하는 것도 생리적 조직학(퓌지올로지카)의 확장으로 여겼다. 신체의 조직화(유기체화), 사회의 조직화(체제), 우주의 조직화(우주론), 이 셋은 우선은 기하학적 동일성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기호의 동일성, 또 하나는 하늘의 별들의 동일 운행에서, 같은 방식으로 유지하고 있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것들이 모방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런 인식의 도구는 당연히 5관의 통합을 이룬 의식이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다섯 의식의 통합으로서 여섯째 의식은, 새로운 규칙, 법칙 등을 다루어 일반성을 만들어 낸다고 여겼다. 물론 기하학의 공리와 공준에 의한 정의를 정리하였듯이, 논리학에서는 항목(개념)을 정의하고 전제와 귀결 사이의 추론의 법칙에 맞는 인식이 성립한다고 여겼다, 이런 인식에서 진리의 성립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런 오관이 하나로 통일되는지를 실증적으로 탐구하기보다, 삶에서 일반화를 통해서 보면 성인이 되어서 당연히 오관의 통합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3천년전 이전의 사람들이 5관을 통해 당연시 여긴 항목들이 수의 단위가 성립하고 그리고 배치하여(공간화), 가축의 수나 도시 인구를 셈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서야 수학들(산술학과 기하학)과 논리학처럼 추리의 순서를 갖추고 체계화 정합성을 갖는 것이 아니었을까? 학문의 진리를 논하는 사람들이 가끔 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인류가 살아온 기나긴 과정에서 인간들 사이에 대립항이 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 또는 상부상조와 상호협약이 체계를 만들까?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는 인류가 입말을 형성할 때, 일반화에서 체계와 지배의 언어로서 명사가 먼저일까? 또는 사람들의 삶의 상부상조에서 동사가 먼저 일까?라고 물어볼 수 있다. 벩송(Bergson)은 흥미롭게도 명사(이름)가 일반화에서 먼저이고, 명사의 움직임 방식에서는 동사가 다음으로 성립한다고 한다.

 

우리가 상식(sens commun)의 시대, 양식(bon sens)의 시대, 다양성(multiplicité, 발산)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서양철학사의 변천과정을 설명하는 한 방식이다. 상식의 시대에 중요점은 사람들이 간과하지만, 고대 그리스이래로 ‘산다’, ‘착하다’, ‘장하다’, ‘훌륭타’에 대한 막연한 합의와 일반화가 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양식의 시대는 데카르트 이래로 물체(신체)를 사유의 방법과 어느 정도 상응한다는 점에서 사유의 의미(sens, 방향)를 잘 닦아서, 추론의 길을 열면, 세상의 편리와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17세기의 데카르트 시대에도 물체의 운동에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리고 18세기의 “빛의 세기”에는 삶(의식)의 의미(방향)은 사회제도와 지식체계처럼 의미가 하나가 아니라, 빛의 발산처럼 여러 방향임을 제시하기도 한다. 오죽 했으면 유일신앙의 종교가 빛의 발산처럼 다양한 프로테스탄트가 생겼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다양한 방향의 길들의 전제로서, 신앙인으로서 철학자들은 신의 방향을 생각했을 것이고, 자연주의자 또는 유물론자는 자연의 이법을 아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상식에서 양식의 시대로 이행에서도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착하다’, ‘훌륭타’에 대해 공통감각은 토대로서 유지되고 있었다. 17세기 18세기 철학자가 인간의 자연(인성)을 말할 때도 인간이 자연의 이법에 따라 ‘착하다’와 ‘훌륭타’의 공통감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 자연에서 생명은 또 다른 방향이라는 것을 알린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이런 다양한 길들은 서양철학사에서 여러 과학들이 자기 방향과 범위에서 학문을 성립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루소의 정치경제학 제기에서 맑스(Marx)의 정치경제학 정립, 공산주의의 제기는 인식의 방식에서, 이항대립의 관계를 봉상스(양식)의 방향을 전도된 방향으로 보고, 앞뒤 상하를 뒤집어 놓았다. 그럼에도 같은 시기의 인류학과 언어학은 방향을 뒤집는 것이라 하기보다는 다방향의 문제제기를 하였으나, 산업사회의 편리와 풍요는 다방향의 성립보다, 제도 속에서 민중과 인민의 뒤집기(혁명)에 두려움으로 상층의 강화의 길로 갔다. 이 길이 봉상스와 같은 궤도에서 국가주의에 이어 제국주의를 형성하였다. 제국주의가 식민지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피식민지의 착취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런 시기에 생산력의 발달로, 벩송의 표현으로 원동기(모터)의 발명 이래로, 인간의 손이 기계에서 떨어져 나와 잠시라도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맛보았다. 이로서 자유의 문제가 과거와 달리 인민에게도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상층이 봉상스에서 ‘훌륭타’와 ‘잘 안다’를 결합하여, 국가제도를 체계에 맞게 위계제도를 굳건히 하고, ‘훌륭타’와 ‘잘 안다’는 산업사회에도 적합하며, 상층은 부를 누리고 위계의 상위를 당연하다고 여겼다. 상식의 시대에서는, 중국에서 평천하(平天下)든, 불교에서 안양정토(安養淨土, 불국토), 유럽에서 신 앞에 평등이든, 삶의 터전에서 사람들 사이의 위계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토지와 사회에서 역할을 차이정도가 있을 뿐이라 여겼다. 그런데 봉상스의 방향이 정해져 있다고 여기는 상층은, 계급의 형성을 체계와 체제에 대입하여, 현상의 인식을 바탕으로 권력과 권세를 백성과 대중에게 강요하였다. 여기에 지식의 권위가 봉상스의 방향과 일치를 내세우며 통일성을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지식의 통일성에 의한 정합성은 세계의 단일성도 당연히 여겼다.

맑스의 공산사회의 제기에 이어서, 레닌은 제국주의가 백성과 대중을 피식민지의 노예로 삼으려는 전략이라고 반대하였다. 산업의 발달에서 상층은 하늘 길, 땅 길, 물 길의 도구를 지배하여, 도구를 무기화 하면서 제국주의를 강화하였을 때, 유럽의 국가들은 국가들 사이의 상층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대항하여 식민지 제국주의의 대립각에서 소비에트 연방이 등장했다. 그리고 상층주의자들은 소련을 악마화하고, 소련이 피식민지 신생국가들의 지원을 막았다. 상층은 새로운 질서의 재편을 도모하는 가운데, 또다시 후발 제국주의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다. 20세기 초 소련의 등장이래로, 중후반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등장하였다.

상식의 시대에는 장하다 ‘훌륭타’라는 주제가 현실의 표면에 있었다. 봉상스 시대에서는 인간의 능력과 추론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여겼고, 국가주의를 넘어서 식민지 지배의 제국주의로 확대 강화하면서, 하나의 길이 정당하다는 강조의 길은 인간이 인간의 지배라는 광기(folie)로 들어섰다. 두 번의 전쟁은 광기의 극한으로, 유럽 우월주의 또는 유일신앙 지배를 봉상스로 착각하는 편집증의 망상에 이르렀다. 세계사는 소련과 중국이라는 체제가 자기 방향을 찾는 동안에,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재편된 미국은 두 나라를 악마화 하였다. 즉 20세기 후반에 미국과 유럽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로, 소련과 중국은 사회와 인간의 상부상조를 도모하는 사회주의로 재편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소련이 러시아로 바뀌었지만 기본토대로서 사익보다 공공성 우선이 여전하다고들 한다. 제국은 이들과 소통하지 않을 수 없지만, 식민지 대중들에게, 특히 남녘에서는 여전히 이들 두 나라의 사상을 악마화 또는 빨갱이로 마남(魔男)사냥을 강제하고 있다. 역사의 과정에서 벩송의 표현으로, 인민의 자유 실현은 간헐적이지만 지속하고 있다고 하고, 들뢰즈는 혁명은 간헐적이지만 폭발적이라고 한다. 어느 시절에서든지 평등과 자유의 의식은, 상식의 시대에 ‘훌륭타’는 봉상스에 가려 표면 밑에 있는 것 같지만, 20세기 두 차례나 솟아난다.

유럽 중심주의의 두 전쟁 동안에 세계지도와 인구지도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평면을 비교하면 사회주의 평면이 더 크다고 한다. 산업화에서 맑스와 레닌 다음으로, 어느 사람이 세계사에 빛을 던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즉 미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표면의 균열과 변화의 조짐은 다른 두 학문의 영역에서 나왔다. 하나는 1953년에 반도체의 부분이며, 정보기술(IT)이라 부르는 영역의 발명과 확장이다. 다른 하나는 그래도 생명과 연관된 DNA의 나선구조의 발견이다. 세계사는 표면 위에 사상의 다른 영토화를 제시하고 있다. 푸꼬(Foucault)의 용어로 보면, 세계의 표면에서 배치와 배열이 달라지고 있다.

상식, 양식, 20세기는 벩송의 표현으로 고등양식의 시대에 들어섰다. 인식은 표면의 현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포함하여 현재와 미래에 예상 참여하는 덩어리가 현존(현전)한다. 이런 과거-현재-예참의 재인식은 갑자기 도래한 것이 아니다.

상식의 시대에는 과거의 상상의 영역에서 원인에 대한 추구로서 공상에 가깝다. 그럼에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상식이전의 의식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했다. 즉 내재의식이 있다. 이런 의식을 양심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5식(5관) 이전에 기억(1식)을 실증적으로 탐구하고 인정한 것은 인류학과 고고학의 발달이었다. 기억의 현존을 실증하면서, 마치 지층의 단면들을 잘라놓은 것 같은, (과거와 현재의) 의식의 현존, 그 다음(예참)과 더불어 긴 덩어리(지속)를 이어가는 토대는 자연이지 신도 원리도 공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상식이 양식의 토대가 아니라, 상식은 오관과 더불어 의식을 형성하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이다. ‘훌륭타’는 공감하는 의식, 착하다는 실행하는 실천은 양식의 방향과 다른 방향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의미는 마치 언어에서 파라독사의 해결이 있었듯이, DNA의 구조와 독해 방식은 코로나19에 발생과 극복에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과학의 발달이 없었다면, 14세기 흑사병(페스트?)의 피폐 이상으로 인류 전체를 위협했을 것이다. 생명의 영역은 사적 이익과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조직화(유기체화)로서 다양체는 수학과 물리학의 연관을 넘어서는(도피안)의 영역으로 사유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질병 역학관계의 해결이 안정을 가져왔다고 여긴다. 자연은 자치, 자율을 넘어서 자발성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사유하지 못하는 유일신앙자들이 사적 이익으로 역학관계를 유지하며, 무기의 지배와 더불어 백신제작의 독점등과 같은 제국이라는 공상을 확장할 수 있다고 여긴다.

반도체, 즉 전류가 흐르지 않은 간격이 있으면서도 흘러가는 현상이 있다. 들뢰즈가 규소의 시대라고 하였다. 맑스의 표현을 빌면, 생산력 발달과 생산된 물질들이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다. 철을 중심으로 다룬 근 3천년의 시대에서 규소를 다루는 시대로 넘어가는 의식의 변화는 다양체라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철학 분야에서는 문명의 시대에서 문화의 시대로 전환 중이라 한다.

식민지 쟁탈의 제국주의가 지나가고, 화폐의 지폐로서 제국을 형성했던 미국도 현재로서는 단일화폐를 통한 지배체제가 와해되고 있다. 블록체인의 기술은 우선은 제국 하에서 비트 코인이 대리(표상)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정보기술의 시대에서 의식의 확장은 18세기의 “빛의 세기”처럼 봉상스의 방향과 다른 방향을, 차히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차히의 생성은, 21세기에 지구상에서 국가들 사이의 다극체를 열었고 한다. 1953년 이래로 꾸준히 계속된 지식 소통의 연결은 다극체의 형성 이전에 이미 다양체들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느끼며 살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유의 갈래에서 이중성이 있었다. 이오니아의 자연과 엘레아의 존재의 대비였고, 알렉산드리아의 자연조직학(푸지올로지카)의 이중성도 있었다. 르네상스에서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의 천체의 구조에 대해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나왔고, 같은 해 베살리우스(Vesalius, 1514-1564)의 인체의 구조에 대해 『인체 해부학 대계』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17세기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이원성의 논리전개, 18세기 자연권의 등장, 19세기에 사회학과 정치경제학만큼이나 의학(두뇌생리학)과 심리학의 정립이 있었다. 20세기에 미국과 유럽(일본 포함) 대 러시아와 중국(쿠바와 베트남 포함)의 대립구도가 있고, 21세기에 국가 간의 다극화시대 이상으로, 전지구적으로 누리소통(SNS)의 다양체화를 실행되고 있다. 소통의 도구로서 화폐의 지위가 어떻게 설정될 것인지가 문제로 남아있다.

 

우리 젊은이는 다극체의 시대에 러시아, 중국, 인도, 미국, 일본을 어느 쪽도 악마화 하거나 먼저 판단을 하지 말고, 역사의 과정에 대한 통찰과 통감(統監), 상호 비교할 수 있는 대조의 노력, 그리고 각각이 지향하는 여러 방향들에 대한 터전(토지, 영토), 등에 대한 탐색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마찬가지로 다양체의 시대에 얼마나 다양한 발신자들(블로거, 카페, 유튜버, 신문, 방송)과 젊은이 자신이 이들 매체들과 접속을 통한 연결방식(배치와 배열)에서, 푸꼬가 말하는 주체화가 성립할 것이다. 주체화는 자아의 위상 정립에 있다. 한 개인의 인격을 판단할 때, 그의 친구들과 읽는 책을 보면, 그 인품을 판별할 수 있다. 말하자면 김어준 겸공, 최욱의 매불쇼, 유시민의 민들레 등에서 접속에 의한 연결망과 태극기부대, 전광훈, 천공 등과 연결망의 연결은 전혀 다른 자아의 형성을 만든다는 것이다. 기술 정보 시대에 접속망에서 트래픽에 따는 도표가 그 사람의 인품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는 것이다.

그 만큼이나 러시아, 중국, 프랑스의 문화를 읽는 것과 미국, 영국, 일본을 읽는 것과 대비에서도 트래픽처럼 드러날 것이다. 전자에 연결방식이 많다면 ‘훌륭타’와 공공의 이익에 연관이 많고, 후자에 연결망이 많다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악마의 속삭임에 빠질 것이다. 르네상스에서 철기시대 마지막까지는 공적이익과 공산화를 악마화 하는 교육을 받았더라도, 그럼에도 다극화 시대, 누리 소통의 시대의 젊은이들은 70여년의 규소의 시대의 선두로서 ‘장하다’와 ‘훌륭타’로서 노력과 내공을 쌓기를 바란다.

철의 시대에 사는 늙이(노인)들은 생물학적으로 이제 곧 간다. 이제 규소 시대에는 젊이(청년)들이 살아갈 시대이다. 젊이는 자기 시대를 맞이하여, 세계를 그리고 자아를 접속방식의 변화를 통해서, – 지도 그리기의 일종인 트래픽이 말해준다 – 달리 접속하기를 통해서 푸꼬가 말하는 지도 제작보다 더 유쾌하고 즐겁게 세계(세상) 지도 그리기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마지막 달력에서 12.3 계엄령의 발표와 해제, 14일 반란 수괴로서 윤석열의 탄핵안 가결 등으로 한 줄로 표현할 수 없는 유기체들 사이에 새로운 조직화가 그려지는 숨가쁜 나날을 이어가고 있다. 여의도 국회 의사당 앞에서 젊은이들 대거 참여하였다. 다극화 시대, 다양체 시대의 주역은 21세기를 사는 젊은이들이다. “산자의 따르라”를 부르는 세대와 동시에 “다만세(다시 만난 세계)”를 부는 세대가 어우르고 있다. 과거-현재-예참을 내재하는 젊은이가 노래와 율동으로 추운 나날을 건강하고 힘차게 이끌고 가고 있다.

새로운 지도 만들기, 7공화정을 이끌 젊은이 만세! 혁명 만세!

(4:41, 57WLI) (5:22, 57W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경탄할 나라에서 모험들 [천 하룻밤 이야기]

소설(小雪): 경탄할 나라에서 모험들

– {# 앨리스가 경탄할 나라에서 겪은 모험(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 2024 11 22. 소설(小雪): 산간에서 눈이 오는 것을 대비해야…

  누구나 배워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행복, 열락(悅樂), 즐김, 고요, 소박함을 추구 하고 산다. 탐욕의 쾌락, 지식과 독단의 오만, 하나의 방식을 다른 모든 것에 적용하려는 치졸함, 탐만치가 독약이라고 고타마 싯달다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문자를 통해 기록을 남기는 과정에서 인류는 익히 알고 있다. 실증과학의 발달 이전에, 문자화가 우선이고 우월이라고 느꼈다. 그러함에서 세계와 자연의 변화에서, 인민이 노력과 내공을 통해 삶의 터전을 바꾸어 간다고 알게 된 것은 250여 년이 채 안 된다. 그럼에도 긴 시간의 흐름에서 보면 느리지만, 세대들의 사이에서는 경과의 흐름은 점점 빨라, 세기의 구분에서 세대의 구분으로 바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과 비슷한 시기에, 실증과 비슷한 실학이라는 방법이 있었음에도 자연과 인민 속에서 그 보다 상부와 문자에 의존하여, 입말로 표현된 문자화로 이루지 못하고, 이제 겨우 백성들 속에서 나랏 말씀을 79년째 공용화하고 있다. 아직도 이루어야 가야할 내공(토노스 τόνος)이 더 필요하다. 삶은 노력(포노스, πόνος)이 먼저이다.

   오래 전에 미국 영화에서, 한 백화점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실재 인물로 설정하여 돈을 버는 것을 두고, 이 백화점의 상업주의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누군가 산타가 실재 인물이 아니라는 소송을 걸었다. 변호를 맡은 인물이나 이에 동의하는 이들은 당연히 산타가 실재인물이 아니라고 한다. 영화는 변호인이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진행되었는데, 그 변호인의 여섯 살 아들이 아버지에게 산타가 실재하지 않으면, 누가 나의 착한 행동에 선물을 주었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산타가 너에게 선물했다고 선언한다. 이로서 재판에서 변호사가 지고 백화점이 이겼다.

   우리나라 극우 정부들이 인민을 대하는 방식은, 이익집단의 사적이익에 대한 문제제기를 마치 산타의 현존의 문제로 바꾸듯이, 문제거리를 여럿으로 잘라서 그 중에 작은 잘못을 끄집어내어, 법률적으로 문제를 규정하여 자기의 이익의 착취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 같다. 꼬리 자르기라는 표현은 사건들의 비교도 아니고 사실들의 대조도 아니며, 게다가 실증적이지도 않다. 역사적으로 왜 이런 사태들이 지속되고, 성명서를 내야 하는가. 우리 입말과 문자의 학문적 전통이 아직 층위가 얇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노력이 모자란다. 학자들이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이런 자들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는 박홍규(1919~1994)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다.

  — 그러나 학문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가까운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의 학문적 전통의 층위가 얇아진 이유가 노정되어 있어 매우 안타깝다. 조선 초기에 평천하의 이상을 지녔던 사림파의 전통이 이익집단의 사장파들에 의해 제거되고서 오랫동안 다시 회복되지 못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유배와 낙향하는 선비들의 학풍인 실학이 등장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가 침탈하면서 사장파의 후신인 노론이 일본에 투항하고 미국에 포획되어 상층의 층위를 만들고 말았다 —

   서양 철학사는 흥미롭다. 우선 서양은 이오니아학파(자연주의)와 엘레아학파(관념주의)의 대립에서부터 아테네 시절에 민주정이라는 제도를 맛보았다. 게다가 가능성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가상성이 언젠가 실현되리라고 여기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사유’가 실재한다고 믿는 아테네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에 이방인 출신이 퀴니코스 학파에게 배운 스토아학자인 제논의 후배들은 현실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있을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찰나(le moment)처럼 이미 만들어진 사건이 누구도 고칠 수 없고, 그 있었던 사건으로 실재한다고 한다. 다른 한편 현재의 순간(un instant)은 끊임없이 지속하며 현존하면서도, 마치 신체처럼 변형하며(몸의 크기), 변질하며(피부의 색깔변화), 변화하며(먹고 자고), 살아가면서도 하나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실재성이 있다고 한다. 전자들의 이상적이고 추상적 사유가 서양 학문발달사에 추동력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후자들의 사유에서, 아테네의 영원과 시간의 용어 규정과 달리, 영원(찰나)과 시간(순간)의 구별에서는 현실의 삶은 사건들 속에 이중성(또는 다중성)이 있고, 그 이중성 안에는 여러 관계들과 이와 더불어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연관들과 연대들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투로서는 후자들의 삶이 현실적이고 진솔한 삶이라고 하면서도, 전자들의 이야기로부터 삶을 규정하고 재단하고, 그리고 판단하고 심판하려고 든다. 전자의 플라톤주의와 후자의 스토아주의 사이의 차이다.

   다시 플라톤주의의 이상(공상)을 잇는 주지주의자들은 이상세계가 실재한다고 믿고, 하늘나라에다가 영원을 심었다. 이에 비해 스토아주의 합리(이법)주의는 현실에서 변하는 실재성을 현실이라 두고, 불변하는 찰나들이야말로 영원하고, 순간은 삶의 태도와 행실에 따라 달리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들 사이에서 또 다른 하나가 있다. 삶은 행실에 따라 다르지만, 그 행실이 자연 자체에서 또는 자연에게 인간이 관여하는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이 있다. 게다가 거꾸로 인간의 행실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의 연속, 즉 드라마 같은 장면(국면)들로 연결된 이야기들 또는 판단들로 된 기록들이 있다. 이처럼 역사는 다른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다. 인간이 현상 속에서, 또는 현실 속에서, 또는 이야기의 역사 속에서 산다는 것이, 인류 역사에서 많은 관점들과 국면들을 표출하였다.

   장면들의 연속으로 이야기들의 끝이 거의 다 권선징악으로 흐르는 것은 여전히 주지주의자들의 이상이 그래도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늘나라를 설정하길 잘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 삶에서 노력과 내공을 쌓은 일을 하면서 평생(환갑, 요즘 표현 80평생)을 착하게 살면서 섭리(φρένες, 프레네스)에 맞게, 진솔하게 살았다고 자족하는 이들이 있다. 이 삶의 순간의 지속은 한 덩어리이고, 마치 개미 쳇바퀴였다고 하더라도, 자연으로 돌아간다(한줌의 재, 한줌의 흙)는 소박한 생각에 미치면, 평생을 착하게 살아가게 하는 하늘나라를 설정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한평생이 짧지만, 역사의 과정 속에서 삶의 우여곡절은 마치 타산지석처럼 다음 사람들에게 거울이 되기도 한다.

   하늘나라든, 순간의 지속이든, 둘 다 삶의 현장(상황, 터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유의 방식이 영원을 생각하는 관점이 뒤바뀐 것으로 보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구나가 이 터전에서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방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도덕성에 관심이 내재해 있다. 이 관점을 먼 미래에 두던지, 현실에 두던지 간에, 경건, 돈수(頓修), 행복, 즐김(열락) 등은 하나의 최선(온선)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온선에 이르는 방식, 방향, 노력, 내공은 각 개인에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온갖 변증술(소피스트), 논변술(플라톤), 변론술(종교옹호가), 수사학(연설가, 교육자), 반박술(변호인), 산파술(소크라테스) 등을 만들고 활용하였다. 그러한 이야기가 전승되어 온갖 논의, 토론, 담론, 서설, 강연 등이 있다는 것은, 그 만치 많은 사건들의 경우의 수들이 많아져서, 이 사건들을 분할하여 이항 대립으로 설명하기에는 이에 벗어나는 항목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항 대립을 하나로 통일(통합)하는 변증법이라는 것 자체가, 지식 체계와 사회 체제를 성립하게 하는 원리(규칙, 공리)를 먼저 인정하는 것인데 비해, 현실에서는 다른 경우의 수들이, 갈래들이 많아진다. 인간은 적어도 기원후 천년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은 종교의 시대였다. 한 쪽은 유일신앙으로 다른 쪽으로 동양은 불교의 시대였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까지 그러하다.

여기서 통합과 통일에 이르는 방식을 안으로 들여다보면, 수 세기의 과정들에서 서적을 쌓은 두께만큼이나 또는 마치 지층과 같은 층위만큼이나 사건들이 쌓여 있다. 기록 문헌이 있기에 사건들마다 검토해 보는 노력이 생긴다. 묘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동양의 통감(通鑑, 비추어보기)이란 용어나, 서양어로 사변(speculation, 거울 비추기)이란 용어가 이런 과정에서 나온다.

   주지주의와 스토아주의의 학파들이 관여했던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에서, 전개된 철학적 사유는 사건들 속에서, 어쩌면 세계주의(코스모폴리트, 세계시민주의) 속에서 사건들을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제국과 같은 참주제(황제제)에서 인간은 순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개인은 사건들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의 유지가 절실했으리라. 이에 사건의 드라마로서 유일신앙이 개인에게 개입했다고들 한다. 너희 (각자)에게 천국이 있다고, 바울은 크리스토스 속에 있다고 바꾸었지만 말이다. 이상도 자연도 밀려났지만, 수 세기를 거치면서, 인간들의 삶의 관계와 연관의 다양성에서, 사건들의 이야기(드라마)들은 여전히 전개되고 있었다.

   이 사건들의 연쇄에는 원인과 귀결이 규정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고, 우발적이고 우연적이고 특히 주사위 놀이처럼 아자르(hasard)라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사건들이 이어지는 계속들을 시대의 과정들로 생각하고, 또는 마치 지층의 두께들처럼 서로 다른 층들이 이어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이상적 규정과 이법적 조성(composition)과 달리, 자연의 층위도 그리고 역사의 단계들도, 연속과 지속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층들 위에 층을 쌓는 단절들의 두께이다. 이 불연속적 층들의 두께가 역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연에서도 인간에서도 마찬가지의 두께와 층위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 생리학(physiologie, 자연조직학)에 대한 발상에서 왔다.

기나긴 세월 동안에 쌓인 층들의 이야기를 한 줄로 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빛이 무한 방향으로 발산한다는 것도 안다. 빛을 통해 거울에 비추기에서, 수많은 방향으로 발산하는 빛살들 사이의 대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들 한다. 통감의 시대에서 대조의 역할이 들어섰다.

  개별 학문들이 자리를 잡아야 대조의 방식이 보다 더 분명해 질 것이다.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이 자기 방식으로 층위와 영역(영토화)을 이루어 가면서, 대조에는 항들의 분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우주론적 사고), 발생의 분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을 다시 생각해 낸다(우주발생론적 사유). 사실 유일신앙은 이즈음에 거의 망조가 들었는데, 이 종교는 인간을 겁박하고 위협하면서 자기의 현존을 이어갔다. 이 현존 방식을 신학적 생리학(신앙자들의 조직학)이라 할 수 있고, 이를 성립시킨 것이 로마의 군대조직처럼 상명하복의 제수이트들이었을 것이고, 이들이 아메리카 장악에서 얼마나 많은 제노시드(인종학살)를 행했던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역사의 조직화는 천문학의 조직화, 인체의 조직화와 함께 더불어 이루어진다. 그리고 역사의 드라마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무엇”인지 규명하기를 추구한다. 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 연대와 사건들의 대조에 이어서 학자들은 자연을 두고 ‘자동적’이라고 이해하는 태도를 바꾸어 ‘자발성’의 의미로 이해하면서 자연의 자기 생성과 자기 발전을 탐구하고 탐색한다.

   드라마는 왕실과 성직자들에서 또는 국가권력과 사대부들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백성, 대중, 인민 속에서도 있어왔다. 이들은 삶의 터전에 있었고, 저들은 이익과 지위의 보존에 있었을 뿐이다. 동양에서도 항상 백성이 하늘이라 하고, 수운 최재우가 인민을 하늘처럼 모시라고 시천주(侍天主)라고 하였듯이, 서양에서도 인간이 자연에서부터 또는 빛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러고 나서 새로운 계층인 제3신분도 등장했다. 다음에는 프롤레타리아도 등장한다. 이런 인민의 등장이 의식의 주체화인 셈이다. 삶의 터전에서 공감성이 먼저 있고, 그리고 일반화와 개념화는 나중이다.

  이 글을 여기까지 다시 고쳐 쓰고 있을 때까지도, 자랑스러운 서울대 동문으로 윤석열을 선정한 적이 있었던 그 학교에서, 이 영향은 아니겠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 선언문은 나오지 않았다. 참고로 예전에 내가 만났던 서울대 출신 교수들 중에서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을 인정하는 교수들과 인정하지 않는 교수들 사이의 경계가 1971학번이었다. 지금 이들이 정년으로 모두 퇴직했는데도 여전히 서울대 교수들이 극우집단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세대의 경계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태도에 있을 것이다. 철학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지배 아래 있는 앵글로색슨 철학이 주류이기 때문이리라. 바깥과 비교하는 통감과 대조의 방식을 넘어서, 인민 속에서 새로운 생성이 도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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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사유(思惟)의 두 갈래 [천 하룻밤 이야기]

사유(思惟)의 두 갈래

– 삶의 사유에서 삼태극을 생각하며

— 상강(霜降) – 가을이 매우 짧은 시대를 맞이 할 것인가?

  이스라엘이 가자에서든 시리아에서든, 전쟁을 수행하는 것에 막을 내릴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고들 한다. 이 말은 이 전쟁의 배후에는 미국의 지지와 지원이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미국이 세상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대항전쟁을 해야 하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전쟁을 거는 쪽이 자유와 안정을 위한 전쟁이라고 하지만, 그 전쟁이 누구의 자유와 누구의 안정인지를 묻는다면, 당연히 전쟁국의 상층들의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들에게 백성은 안중에도 없으며,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은, 소비에트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 다른 삶의 양식들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다른 삶의 양식을 악마화 하는 쪽은 누구인가? 물론 제국주의라고 말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기나긴 철학사 속에서 영원을 하늘(상층)에 두는 주지주의들이 있었고, 이를 백성들에게 심어서 순종하며 신앙으로 심은 것이 유일신앙자들이 있다.

유일신앙자들이 전쟁에서 어느 쪽을 돕는 적대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니체가 설명했던 바로, 한번은 백성에게 적개심을 심었던 랍비들이고, 다른 한번은 백성에게 죄의식을 심은 성직자들일 것이다. 니체의 말대로 적대의식과 전쟁은 백성의 것이 아니라 성직자의 것이라. 왜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과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백성을 인질로 삼았을까? 동양에서는 인질로 삼기보다 백성이 편안해야 천하가 편하다(평천하)는 군자들의 이야기와 지위를 보존하려는 위정자들 사이의 타협이 있었을 것인데 비해, 서양에서는 유일신앙의 중세를 거쳐서 오랫동안 권력과 지식이 신앙에 포획되어 있었다. 그 이유에 하늘의 영원성과 지상의 부질없는 가상성을 심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라는, 한글의 천지인(l, ㅡ, ㆍ)의 삼원성은 인류의 사유의 과제였던 것 같다. 아테네 이전에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듯하다. 이오니아와 엘레아. 그런데 아테네에 와서, 소크라테스가 이런 세 가지를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뭣”이 세 가지로 갈라지게 되는지에 고민했을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파르메니데스를 넘지 못했다고 서술했다. 그 소크라테스가 이오니아의 사유를, 고르기아스와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유를 통해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추측해보면, 흥미 있는 점을 발견한다. 하늘의 영원과 지상의 변화에 대해, 내가 소크라테스의 좌파(빨강이)라고 부르고 있는, 퀴니코스학파의 생각은 달랐다. 시간 속에서 찰나(le moment)는 변하지 않는 영원이고, 살아가는 인간의 과정인 순간(l’instant)은 변화하는 현상으로 보았다. 이런 퀴니코스학파의 영원과 변화의 항목을 정하는 것은 자연에서보다 언어의 개념화에 대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영원이 삶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fait, 만들어진 사실)은 인간이 고칠 수도 변경할 수 없이 지나가면서, 그대로 과거가 된다. 그럼에도 그 사실이란 항목이, 일반화되어 용어로 쓰이고, 그리고 규정하는 방식에 따라 정의되어가는 개념작업을 거칠 것인데, 이 항목, 용어, 개념은 고착성(고정성)을 갖는다. 사실은 덧붙여서 고칠 수 있거나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 찰나라는 개념은 영원하다. 그러나 삶아가는 인간들의 과정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순간들의 지속을 이어간다. 삶의 한 시점이 순간이라 하더다로 그 순간은 지속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라는 개념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살아가는 소크라테스는 변하고 있었고 또는 “뭣”을 추구하고 살아갔다. 그가 어떤 정체성을 갖었는지를 퀴니코스학자들은 잘 모른다. 순간의 이어짐의 연속성에서, 소크라테스라는 항목이, 경계를 그으면서, 정해질 뿐이다. 이에 비해 플라톤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영원성이 ‘천상의 영혼’처럼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 영원한 영혼이 소크라테스 신체에 들어왔다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모습과 과정은 변화의 현상들이라 한다.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불변하고 영원한데, 신체와 더불어 살면서 변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이라 한다.

플라톤은 이중적이다. 개인 영혼의 변전과정도 고민했다고 여기고, 또는 변하지 않은 세계영혼도 있다고 믿었다고들 해석한다. 그 플라톤은 전체의 영혼과 개인의 영혼을 구별하려고 노력했다고 하는 해석가들도 있다. 그런데 플라톤주의자들은 영혼이 영원의 세계에서 내려온 것으로 해석하고, 현상인 지상은 가상의 세계라는 쪽으로 굳혔다. 즉 경계를 긋고(페라스를 중시하고) 고정시켰다. 이 고착적 사고가 정태적 사유의 길이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다른 제자 그룹들은 전혀 달리 생각했다. 삶은 노력(포노스, πόνος)이고, 그 노력의 강도(토노스 τόνος)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아마도 불교에서 수련과 보시에 의해 자아의 성립을 보살이라고 하듯이, 퀴니코스-스토아의 전통에서 지나가는 찰나(영원)들과 달리, 살아가는 순간이 삶에서 소중하고 또한 다루어야 할 철학적 과제라고, 즉 “뭣”이라고 하는 것이 실재성이라 보았다. 이들에 의하면 플라톤주의의 영원은 우화 또는 이야기(mythe)에 지나지 않고, 인간은 지상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se faisant, 만들어짐)이 중요하다고 한다. 주지주의자들이 아폴론 또는 아테네 여신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퀴니코스학자들은 그들의 학교(퀴나고르게스)에서 헤라클레스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한다.

찰나와 순간, 영원과 시간에 대한 사유의 차이는 사유의 역사에서 고비마다 문제제기를 하였다. 그러나 유일신앙과 주지주의의 결탁으로 영원은 하늘나라에 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영원이 지상에서도 돌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제기된 것은 갈릴레이에서였다. 그 이후로 몇 세기를 지나지 않아서 주지주의 학문의 체계가 영원성도 없고, 그리고 체계의 완벽성도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된다. 왜냐하면 주지주의에 따른 모든 개별 학문들은 그 학문의 재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그 학문들 각각의 한계(페라스) 속에서, 고착저이고 정태적으로, 규정 지었기 때문이다. 한 학문이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 다른 학문에 적용하는 것은 오류이기도 하지만, 사유방식의 착오이다. 쉽게 말하면, 피겨의 김연아의 운동과정을 축구의 손홍민에게 적용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운동의 기본은 달리기가 기본이라는 을 부정하지 않는다.

적용의 오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성과 전개의 과정에서 달리 이루어진 경계(페라스)를 아페이론에게 적용하려는 오류가 플라톤주의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에는 아페이론과 같은 영혼의 대상화에 대해 항목, 용어, 개념화의 과정을 찾으려하는 것이라면, 퀴니코스는 삶의 터전에서 영혼의 삶에 대해 장하다, 훌륭타, 경건타를 실행하는 방식을 찾으려 했던 소크라테스를 주목했을 것이다. 주지주의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헌에 없는, 또는 증거가 없는 이야기로 넘긴다. 그런데 그들이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이야기를 증명하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상상의 이야기 또는 칼데아신화의 이야기라고 한다. 이런 완전성의 이야기를 진리라고 받아들인 이들이 유일신앙자들이다.

사유에는 두 가지 방식이 또는 여러 방식이 있다고 할 때, 천지인을 기본으로 하는 사유에서는 최소한 세 가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적어도 두 가지 방식과도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플라톤주의자들의 주지주의는 하늘의 영원성에 항목과 용어를 만들어 이야기해야만 한다는 쪽이고, 다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주의자들은 항목과 용어가 인간들이 쓰는 단어와 문장에서 개념작업을 거쳐서 개념들을 다루어서 체계화해야만 한다는 쪽이다. 달리 사유하는 퀴니코스와 스토아는 삶이 먼저이고, 그리고 사유는 다음이라 할 것이다.

하늘에 영원성을 묶어두고, 제도를 만들고, 학문적으로 체계를 규정하는 이들이 자기들의 이야기가 진리이며, 공정한 체제이고 나아가 평등한 신앙으로 여긴다. 이들은 항목을 고정화하고, 용어들과 개념들을 규정화하여, 전체를 구성하고 구축하였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들의 단초에서 고착(고정)이 정태적 사유의 근본이며, 이를 신앙을 받아들인 유일 신앙이 정태적일 수 밖에 없고, 그 정태성을 절대적 진리로 믿고서, 얼마나 많이 달리 생각하는 자를에게 피를 뿌렸는지는 세계사가 말한다. 중세의 마남사냥으로부터 미국의 맥카시 조작에 의한 빨갱이 사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정태적 사유와 동태적 사유의 이중성이 있다는 것이 제기되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싯달다에도(9/9는 0.9999일까, 1일까), 중국의 주나라 이전에 하도(10, 5)와 낙서(9)에서도 있어왔다. 사악한 자들은 개념, 수, 점에서 승리를 구가하면서, 항목, 지수, 부피 등을 악으로 몰아내려고 하였다. 이런 그들의 생각들에서 전쟁은 자유의 전쟁, 안정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전쟁은 악마의 전쟁이며, 공공재(하늘, 땅, 물)인 것을 사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의 전쟁이며, 이들이 권력, 권세, 권위를 합쳐서 패거리를 만드는 치졸함에서 오는 것이다. 이 치졸함의 정태적 사고임에도, 요상하게도 동태적이고 운동적이라고 가르친다. 교육을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악마같은 자들이 철학사와 역사교육을 왜곡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들 세 가지의 고정된 사고에 저항하는 이들이 셋이 있었다.

권력에 저항하고 항쟁하는 사유를 창안한 이는 정치 경제학에서 루소가 제기하고, 아나키스트들이 불을 지피고, 맑스가 과학적 체계를 통해, 생산도구를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프롤레타리의 공화국을 주장했다. 세 패거리들이 기계 산업일 때는 맑스를 두려워했는데, 규소라는 디지털시대에 제국이 변신하면서도 동적 사유를 빌어온다. 그러나 여전히 맑스의 혁명의식은 중요하다.

유일신앙이 자본주의 국가들 안에서 세상에서 권세를 누리고 산다. 종교는 인민과 더불어 사는 것이고, 헤라클레스를 따르는 퀴니코스의 견해로는 세상사의 어려운 난제를 해결하는데 노력(포노스, πόνος)과 내공(토노스 τόνος)을 써야 한다. 아직도 세계가 가난과 질병으로 시달리며, 이제는 이런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다가온 것이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놓은 지구의 생태계의 문제도 있다. 자연자체, 지구 자체가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야 그 속에서 사는 생명체든 인간이든 안정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유일신상의 신에 종속되고, 포로 되어, 그 신의 명령으로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자연대로 살아가는 과정으로 자발성과 자율성이 있다고 브루노가 주장했었다. 그를 그들은 산채로 태워죽이고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다. 이제는 사람들은 자연이 동적이고, 유일신앙의 사고가 정태적이고 고착적이라 한다. 유일신앙의 사고를 벗어나는 사유의 방식을 학습하고 노력하고 내공을 쌓아야 한다.

지식의 권위는 권력과 권세의 아부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연을 지배하고 제도를 만들고, 인간을 행복하게 살게 하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그러한 지식이 어째서 외골수 방향으로 나아가, 인간만이 잘 사는 휴머니스트(hunaniste)로, 지식을 갖는 인간만이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고도 자유를 누리는 상품자유주의자(liberaliste)로 가고 있는지를, 그들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이들 현상 인식론자들인 지식론자들이 누구의 침을 발라서 문장을 쓰고 판단을 하는 지를 반성해야 한다. 지식론자들은 수학에서 비유클리트기하학, 생물학에서 고생물학과 유전학, 심리학에서 기억이론 등에서 체계의 완전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제도 속에서 안전과 편안을 누리고, 반대파들을 마남사양과 빨갱이 사냥에 동조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누리고 살기를 바란다. 세 패거리들이 시킨 교육에 안주하면서 안락과 편리를 누리는 바탕에는, 정태적 사유와 더불어, 그 사회에 적응하는 동안에 내재하는 탐만치가 가득하다. 탐욕과 오만과 치졸함이다. 누구를 꼬집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태가 그러하다. – 뒷전으로 밀려난 용어들, 인도주의자(humanitaire)와 세계시민사상가(le cosmopolite), 그리고 인성자유주의(libertaire)를 생각해 보시라, 현재 교육이 “뭣”을 감추고 가르치고 있는지…

이들의 탐만치와 정태적 사고는 제국주의와 제국의 사유에 대한 동경과 향수이며, 이는 유일신앙의 하늘나라에 대한 착각에서 온다. 이에 저항하는 백성들과 인민들이 무수히 사라졌지만,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이런 저항이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에 표면 위로 올라왔다. 이 인민들의 여러 차례 저항들에 극우들의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남녘에서 세 패거리들에 포획된 자들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허락을 구걸하면서, 일본의 포로가 되기를 자청하고 있다. 세계사에서 인민의 저항에 대해서도 반동의 극우들이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친일파가 아니라 부일파, 숭미파들이 겁도 없이, 공공재에 대해 사적 소유의 승리를 주장하고 있다.

기나긴 역사에서 혁명이 성공한 것은 얼마 되지 않지만, 인민의 승리를 부정하는 이들이 없다. 단지 그 과정의 강도와 속도가 조금씩 달리 할 뿐이다.(4:01, 57UMB) (4:19, 57U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혁명’ 대 ‘쿠데타’ – ‘인민의 생동감’ 대 ‘탐만치의 독극물을 마신 자들의 망상’ [천 하룻밤 이야기]

  혁명 대 쿠데타

– 인민의 생동감 대 탐만치의 독극물을 마신 자들의 망상

— 2024년 9월 22일. 추분(秋分): 그저께 밤새 비가 내리더니, 더위가 꺾였다.

ㆍ학문에는 경계가 없다. 현자도,

ㆍ학자는 경계 안에 있다. 지자는 패거리에 갇혀 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면서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 하늘에서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온 것은 착한 이야기로 남아있는 것만이 아니다. 이런 신선놀이 하는 천국 같은 이야기를 하던 시대는 어디에나 있었을 것이고, 표현하는 방법이 시대마다 또는 삶의 터전마다 다를 것이다. 어느 나라의 구전 전승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삶이 먼저이기에, 이 산, 이 강물, 이 땅, 이것들이 누구의 것이고 저것들이 누구의 것이라는 사적 소유 관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대상으로 하면 공산사회가 먼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시절에도 인간은 자연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끈질긴 노력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문명의 발달이전에, 정보의 전달이 문자화되기 이전에, 자연재해에 대해, 즉 자연에서 규칙성을 찾지 못해 기후변화나 태풍, 지구변화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지진과 화산 등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 시절 인간이 소유를 말했기나 했을까?

소유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추상 관념이 설정되는 시기에 대상이 현상적 표현 또는 재현 가능한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세상에서 살면서 공유와 터전을 말한다면 이것은 서양철학사에서 퀴니코스-스토아의 전통일 것이다. 하늘의 영원과 땅의 시간으로 대비시켜 설명한 것이 플라톤이었는데, 퀴니코스-스토아는 현재가 있는데, 미래는 오지 않았고 과거는 지나갔지만 그 현재의 항상된 이중적 방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 파들의 현자들은 그 현재라는 시점에서 점이라고 여기는 찰나는 영원하며, 즉 한번 이루어진 것, 만들어진 것은 사진의 장면처럼 영원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점이 아니라 열린 덩어리로 보았을 경우에, 그 덩어리는 그 변화하는 중에 있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찰나와 달리 순간은 과거(어제) 온갖 찌꺼기들을 포함하고 또한 미래(아제)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지속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찰나와 순간의 구별은 삶의 과정의 태도와 의식을 보여줄 뿐만아니라, 세상에서 “뭣”을 대하는 인식에서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늘이 땅의 대조에서 시간의 기준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상식적이라 하지만, 양자의 구별에는 그 만큼의 뜻이 있다. 현실의 삶에서 어떤 측면은 변할 수 없는 것이 있기도 하고, 삶의 과정은 끊임없는 변화의 측면이라고 한다. 이중성은 하늘과 땅의 대조에서만일까? 그런데 사실상 현재가 이중적이지 않는가? 이 이중적인 것을 한번은 하늘에 기준을, 다음번에는 땅에 옮겨서 그림자를 재는 편리를 생각하는 자들이 누구일까? 삶의 터전에 따라 인간들 각각의 심성이 그림자를 재는 것만큼이나 달리 표출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영원에게 삶의 태도를 묻고자하는 사고방식은 언제 어디서 왔을까? 영원을 하늘에 묶어 두는 한, 인민의 저항과 봉기도 반란과 역적으로 몰리는 것이 아닌가.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시대에선가부터 현실의 변화를 인도하는 인민의 항쟁과 혁명이 있었다. 어쩌면 플라톤주의자들을 전복하는 사유가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인민의 혁명의식을 하늘에 맡기라고 누가 말하는가? 18세기 말 대혁명과 20세기 초 공공재의 공산화하는 두 나라의 성립 이후, 거꾸로 하늘에서 천사와 성자들끼리 개혁이니 변혁이니 말씀하는 자들의 사고방식은 인민에게 반역과 모반을 꾀하는 쿠데타 사고방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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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를 상층의 이데아(관념) 중심으로 읽으면 쿠데타 세력을 플라톤이 주장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박홍규와 들뢰즈는 플라톤 사유에는 이중성이 있었다고 한다. 플라톤에서 아페이론이란 용어를 사회(토지)에서 인민으로 읽으면, 인민의 활동에 능동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이상한 종족이나 신앙자들은 플라톤의 아페이론을 이데아(관념)의 설득의 대상처럼, 피조물로서 다루어야 할 자연, 지배해야할 인민 등으로 여겼을 뿐이라 한다. 서양철학사에서 이런 상반된 관점을 갖게 하는 것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서양철학사의 기원을 기원전 7세기 이오니아의 탈레스로 잡는데, 그 탈레스가 자연을 대상으로 착각했다고 여긴 것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한다. 그런 사고방식을 크리스토스 신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을 받아들여 자연을 대상으로, 그리고 신의 피조물처럼 여기듯이 인민을 다루어야할 지배 대상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젖었다.

서양철학사가 왜곡되는 것은 한 찰나이다. 찰나의 고정은 불변이며, 천국도 불변이다. 그런데 지속하는(살아있는) 순간은 변화하며 지속한다. 그것을 영원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어서, 순간조차 쪼개어서 마치 원자가 불변인 것처럼, 순간을 찰나로 고정하여 불변으로 만들었다. 그 속임수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서양 철학사는 누누이 말하였지만, 이법과 신앙을 별개 사항으로 따로 놓음으로서 신앙은 찰나이면서 순간이라고 망상 또는 착란에 빠진다. 이를 프로이트 후학들은 파라노이아(편집증)라고 한다.

신앙자들은 왜 이 둘이 따로, 별개라고 하고 신앙이 우선이라고 하는가? 억지, 편집증의 초기와 닮은 자폐증의 치졸함이, 산타클로스 할배가 실재한다고 믿는 여섯 살 꼬마처럼 유치함이 상식의 이름으로, 그리고 탐만치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극우는 강박관념과 파라노이아를 사회 속에서 펼친다는 점에서 윤석열 집단처럼 일곱 살쯤 돼 보인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들을 침묵하게 하는 것은 중세 말기에 성행했던 마남사냥처럼, 현실에서 제대로 살아남지도 못할 지경으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별개의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길고도 흥미롭게 시로 쓴 철학자가 니체이다. 신앙자들은 니체가 사유의 전복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삶의 허무라고 해석하지만, 니체는 신앙자들의 질병(강박과 편집)과 탐만치에 빠진 아집을 벗어나라고 하면서, 불교의 도피안과 같은 저 너머 보살행을 행하자고 한 것이라 한다. 니체는 신앙자가 아니다. 그는 이슬람의 신의 놀이와 같은 아자르(주사위 놀이)로 설명하려 했겠는가? 자연의 다양한 발현이 아자르이다. 자연, 즉 이법은 신앙과 아무 연관도 없이, 45억 년의 오래 세월 동안 거기서 여전히 변화하고 있었고, 이제도 변하고 있고 아제도 변할 것이다.

서양에서 뿐만 아니라 사상의 발전은 그리스 이전에도 있었다. 들뢰즈가 흥미있게 전개한 것은 도구/무기의 방식이 인류사상사의 변역(變易)의 과정이었다고 한 것이다. 그리스 최초 철학자라는 탈레스 이전에도 인간이 살았다. 1859년 인류학회 이래로 인류의 과거를 연결하는 6백만 년 전의 유인원까지 갈 필요 없이, 3만 년 전 구석기. 만 년 전 신석기, 7천 년 전 현 터키지방의 아나톨리아의 자연동광의 발견으로 구리시대, 청동기시대, 기원전 천 년 전쯤에 철기시대로 이르기까지 도구의 발달로 여기지만, 도구를 무기를 사용하여 자연의 위험에 대처하고 동물이든 타종족이든 위협에 저항하기를 넘어서, 타를 정복하여 잉여이익의 착취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정복이 농경과 목축보다 많은 잉여생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집단을 형성하고 분업을 하는 과정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효율적인 정복에서 정복자는 집단을 다스릴 체제로서 참주제를 이용하였고, 제도 속에 정보와 배치는 소수의 소유로 이루어 졌다. 이 제도에서는 의식의 변화과정보다, 인식의 활용과 전승에 중요성을 알아서, 소위 말하는 지성의 체계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도구/무기를 기호와 문자로 전승하는 철기시대의 발달 시기쯤에서 권력의 유지와 체제의 확립이 이루어졌으리라 이 즈음에 플라톤의 “폴리테이아(국가)”편과 “법률”은 방어와 번영을 염두에 두었다고하는데, 이런 체제가 현실상에 있을 수 없다고 상상적 나라 또는 이상국가라 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고려해 보건데, 원시 공산사회가 있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상부상조의 나라가 있을 수 있는가를 의미할 것이다. 자연 속에서 소규모의 집단들은 자체의 존립을 위해 상부상조했을 것이나, 무기/도구를 먼저 생각하는 참주제와 같은 우두머리 체제가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정복의 잉여이익의 착취가 집단의 표본처럼 되어가는 것이 고대 문명사회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부상조의 삶의 터전에 대한 향수는 남아있었을 것이다. 정복의 문화 대 상부상조의 문화라고 맞대응 시킬 수 없겠지만, 기록과 유물의 역사는 정복의 체제에 치중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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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상이 철학적 사유의 근본 또는 기원이 아니라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제기되었고, 20세기에는 당연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19세기 전반까지도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앙자들의 사고가 인민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절에 인민이 주인이라고 하면, 반역이니 반국가세력이니 하여 마남사냥처럼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조차 사형 또는 참수하였다. 프랑스가 세 번의 혁명을 거치면서, 인민 주권을 확실하게 만들고 나서, 그리고 20세기의 두 번의 전쟁에서 인민이 주축이 된 나라, 소비에트 공화국, 중화인민 공화국이 들어서고 난 뒤에야, 세계사에서 인민의 저항과 항쟁이 자기 방어로서 정당화되고, 상부의 정권을 쟁취하는 세력이 쿠데타 즉 반역의 세력으로 인식하게 된다. 현재 윤석열 정부도 인민의 의사를 거슬러 권력을 사유화하려 한다면, 반국가세력의 반역이 될 것이다.

그리스 사상이 의식적 사유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하며, 그리스 사유의 심정적 공감의 사유는 그리스 이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의 문명의 사유가 전개되었다는 것도 당연히 받아들인다. 이들에게 이상하게도 인더스 문명을 말하지만 인더스 문명은 거의 지워져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선 문명에서 산술과 기하, 천문과 지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전승되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나라처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홍익인가) 한다고 표명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원시사회라고 말한다면, 아름다운 동산에 사는 것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보건데 청동기 시대 이래로 거의 정복의 역사이고, 전쟁의 승리자가 신격화되는 시대이다. 몇몇 상부의 사유와 지식의 전유(생산도구의 전유보다 더 전횡을 할 수 있다)라는 시대를 거쳐서, 인간이 각자 자기 스스로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철기시대에 진입하여 생산력이 발달해야 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생산물의 잉여가 있어야 동냥하며 수도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 쯤에서 자기의식의 발동이 걸렸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 초기를 인도의 갠지스강에서 싯달다, 지중해 바닷가에서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 이후의 여러 사유의 갈래들은 통일성을 갖기에는 인간의 도구(언어, 문자, 학설)가 (실증적이라는 의미에서) 정확하지도 않았고, 획일적이지도 않았다. 4세기가 지나 신앙이라는 이상야릇한 사고방식이 침입하였고, 크리스토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황제와 보편을 본따서) 신앙을 획일적으로 보편화하는 사고방식으로 고정시키려 했다. 언어/무기를 사용하여 3세기 간의 피튀기는 투쟁으로 단일화하였고, 서양은 그런 방식에 묶여서 중세 천 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다시 개인의 자의식의 발현이 있었다. 그리고 400여 년을 신앙자들과 달리 생각하는 도구/언어를 사용하고자 노력했다. 자의식이 무엇인가를 도구로 만들면 무기로 바꾸어 사용하는 쪽이 참주제의 사고방식으로 있어왓다. 이에 비해 마남사냥 속에서도 소수의 자의식은 인민으로 퍼져나갔고, 세기를 지나 인민의 혁명들을 거치면서, 제도에서도 인민이 기본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 의식의 확장과 더불어, 인식의 발전과 진보를 믿는 이들은 다른 지역을 정복하고 쟁취하는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간단히 말하면, 여러 문화(문명)들 간에 충돌에서, 다양한 문화들 사이에 우월성을 주장하는 논리의 성립이 정복의 피비린내 속에서 피지배지의 확장을 통한 권력을 쟁취와 확장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로마의 황제가 그러했고, 크리스토스의 주장자들이 따라 배웠으며, 십자군전쟁까지도 치르면서, 천년의 신앙의 황제(교황)를 만들었다. 시대의 변화에서 유럽의 민족들은 자기의식에 따라 각 지방의 언어가 성립하고 개별 국가가 성립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과학의 일반화로 상식을 넘어 양식에 따른 사유체계를 정립하여, 인간들의 자유와 사유의 발전을 기여한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 사고의 정립은 다른 사고방식의 지배에 있었으며, 식민지 확장으로 이어갔다. 그러나 타 지역의 다른 문명이 도구 사용방식은 다르더라도 문화가 낮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제국주의 내부에서 두 번의 대전쟁을 치루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도구/무기의 문명이란 도구를 무기로 사용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사상은 정복에서 탈취와 착취를 쉽게 손 놓지 못하였다. 제국주의에 이어서 정복의 사고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제국은 신앙자들의 형이상학적(주지주의) 논리, 국가주의자들의 법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진리를 주장하는 분석과학철학 등과 패거리(카르텔)를 형성하여 지식/무기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21세기 SNS라는 도구/무기를 지배하려들면서, 또한 핵 발전도구와 핵무기의 이중성 함께, 전지구적으로 위협과 공포를 통해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공공재 공유를 우선으로 하는 사회주의와 이익창출을 위한 사유를 우선시 하는 자본주의 사이의 균열은 한 세기를 지나 분명한 간극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는 공공재는 사유화하는 방식과 공공화 하려는 방식의 사이에서 심한 갈등에 있다. 이 갈등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이 사유화의 세력은 신앙, 법률, 지식의 카르텔 형성하면서 돈을 신으로 모시며 지배하려고 한다. 그런데 인민의 자의식은 고대나 르네상스 시대와 달리, 확장과 강도의 수준이 전파와 속도 덕분으로 엄청나게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민이 주인이고 인민이 토대인데, 패거리의 장난과 놀음이 강압적 법률로도 이룰 수 없을 것이고, 신앙은 공공재화의 사적소유가 폐기되면 무너질 것이고, 지식을 달리하는 사유하는 자의식의 확산으로 새로운 분출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혁명은 번개처럼 갑자기 도래한다. 기나긴 의식의 역사 속에 간헐적으로 분출되었지만 폭발적이었다. 세계사는 공공재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간다. 공공재의 공유화가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살리는 길이고, 그 속에서 인간이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

서양에서 역사상 자의식의 발동은 여러 번 있었다고 하더라도, 인민들 개인에게 자의식의 분출은 그들에게도 사회주의 국가 성립이후 20세기 후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우리 입말과 문자로 통용한지 79년째이다. 그럼에도 외교에서는 미국과 관계에서 영어를 우선으로 하지만 말이다. 서양도 경험시대, 종교시대, 지성주의 시대, 현대이듯이 우리나라도 전승의 시대, 불교 천년, 유교 오백년이다. 상동구조가 아니라 상사구조로 변역을 겪어왔다.

환시대, 단군시대, 부여와 고구려 등으로 내려오는 신선사상의 시대가 있었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천년의 불교 영향, 그리고 유학이 들어와 군왕제를 확립한 유학 영향 500년이다. 이 조선 말기에 권력으로부터 밀려난 상부의 몰락 양반들 중에 백성의 삶에 대해 생각했던 실학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백성의 입말과 자신들의 문자와 서로 사맛디 아니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했었다. 이런 과정에서 19세기의 학문적 관심은 분명히 새로운 질서와 삶의 터전에 대해서, 그리고 서양 문물의 유입을 통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수의 열망이 있었음에도 우리 입말과 우리 글로 표기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백성 또는 중생이 자각하여 자기의식을 발동하는데 힘을 보태지 못했다. 이런 과정에서 사적 소유의 상부는 외세와 결탁하고, 백성의 저항과 봉기는 문자를 쓰는 선비들에 의해 지도되어 널리 퍼뜨리지 못하고 1894년 일본군대에 의해 민중의식은 수면 밑으로 흐르게 되었다.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상층은 서양을 직접 찾아가기보다 손쉽게 일본의 지식과 제도를 통하여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고, 일본의 주구(走狗)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저항하는 몰락한 소수의 상부는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이들에게는, 이제 만주에서 세계사의 접속과 일본을 통한 세계사의 편입이라는 이항 대립적 구도가 있음을 깨닫는다. 1919년 두 개의 독립선언문이 이를 증빙한다고 할 수 있다. 묘하게도 만주로 간 독립운동은 지식인이면서 중국과 연계 속에서 한문에 능한 반면, 일본과 연계 속에서 새로운 식자층은 한자를 알고 있다는 지식으로 일본에 급속히 빨려들어가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익힌 일본에 복속되어 갔다. 말하자면 후자들은 들뢰즈 용어로 일본에 “포획”된 형국이었고 곧 이어 일본의 “포로”가 되었다. 이를 식민지 시대에 지식인이라고 한다.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함께 하는 이들은 상부가 아니라 몰락한 양반층들과 백성들이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금지되고 수면아래 흐르면서, 또한 마남 사냥과 같은 빨갱이 사냥이 몰아치는 동안에, 남한에서는 윤똑똑이 지식인들이나 문학인이들 겉멋이 들어 19세기 초 독일 낭만주의와 같은 아이러니가 뭔지도 모르고, 산업화에 편승하여 원숭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수면 밑에서는 사라져가는 이야기를 분출 시켜려는 이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한글을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 입말과 문자의 공유가 세계사적으로 보면 늦었지만, 결코 뒤늦은 것은 아니다. 21세기에서 자의식의 발동은 싯달다시대, 소크라테스시대, 데카르트시대, 로베스삐에르 시대, 레닌과 마오 시대와 달리 사유하기가 전개되고 있다. 깨닫든 느끼지 못하던 이 달리 말하기 글쓰기는 젊은이들에게, 프로이트의 구강단계가 아니라 들뢰즈가 말하는 구강성의 활성화에 의해 확장되고 있다. 이 확장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3세대가 거의 다른 입말을 쓸 정도 이지만, 어제-이제-아제의 지속성은 강도(내공)를 더해가고 있다.

실로 우리나라에서 자의식의 첫 발동인 훈민정음 창제에서 거의 600여 년을 침잠하여 흐르고 있었다가 솟아나고 있다. 어느 국가 제국에게도 시달리지 않을 자유의 쟁취로서 혁명도 분출할 것이다. 인민의 혁명 대 사적 소유자의 쿠데타, 당신은 위상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에 속하지 않고 별종으로 세계를 누비려고 한다고? 이 이항대립을 타파해야 걸어서 개마고원과 만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남쪽의 섬 같은 삶은 쿠데타 세력에 동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일본 제국의 개가 되고 미국 제국의 피를 빨리는 짐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4:11, 57TMA) (5:36, 57T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자유, 철학의 역사에서 ‘뭣’을 다루는 방식들 [천 하룻밤 이야기]

자유,

– 철학의 역사에서 을 다루는 방식들.

— 2024 08 22 처서(處暑): 더위가 물러나려나.

류종렬(한철연 회원)

 

서양철학사는 인간의 지식 또는 인식의 발달사일까어쩌면 서양의 학문은 늦게서야 철이 들어 인간이 자연 속에서 무엇이며어떤 지위를 갖는지를자연의 거울에 비추어 반성하는(speculation)것이 아닐까이제 신의 이야기는 허구(우화또는 수많은 파라독사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고.

서양 사상사에서 인간이 자기의식 또는 자의식을 갖는 시기를 르네상스 이후 데카르트에 와서야 신학에서 벗어나 두 가지 실체를 주장하면서또는 주체과 객체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시기에 나왔다고 한다그 자의식에서 문장과 판단에서 주어 문제이기도 하고두 실체에서 사유의 실체만큼이나 너비의 실체도 그와 상응한다고 하는 점에서주어 또는 주체가 주도권을 지니는 관념적 성격에서 나왔다고 한다그럼에도 인류라는 종이 자연에 대해 지배권을 갖는다고 여기는 시대가 되어서야 인간이 주체로서 지위를 갖는다고 한다이런 의미에서 볼때 인간은 르네상스 이후 과학 발달로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서 생각하는 경향 위에서 주인의 역할로서 주체이다르네상스가 중세 종교의 시대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인간은 종교적으로 신의 부속물 또는 대리자로 생각하기도 하였다그런데 그 대리자가 신과 연관에서 벗어나종교에서 신의 피조물인 자연의 이법(la raison)을 인간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두 실체론(이원론)에 들어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서는 신의 피조물인 자연이라기보다 자연의 자기 발생의 능동적 능력도 있음을 보았고데카르트 이후에 이분법의 주체인 사유와 마찬가지도 객체인 물체의 운동에도 능동적 성격(신체의 감정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이 주체로서 자연 속에 제국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l’illusion)하면 안된다는 것이다말하자면 자연의 자기 풀림 또는 전개(발전)이 인간에 의한 것도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이 자연의 풀림과 같은 방향(봉상스)로 나가는 인간의 풀림이 상응할 수 있다는 것으로 여기는데이를 평행적이라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자연의 생성과 전개인간의 파악과 추리이 둘은 평행도 대칭도 아니며 각각이 다른 계열이다이를 당시의 수학적 방식으로 설명을 뿐이다르네상스 이후 17세기 철학자들은 인간이 독자적인 인식능력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고 증거하려고 했기에 수학적 방식들을 동원하였다그 수학들은 증빙자료를 제시하기보다자료들을 체계화하고 정합성을 유지하려 했으며그 질서가 있음을 아는 인간이 주체로서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그럼에도 후대의 철학자들은 이들이 인간의 개별성이라든지인간 의식의 시간지속성을 설명하지 못했다고 본다말하자면 시대와 세기를 거치면서 인간이 동일한 역할즉 개인의 동일 정체성이 시대를 거쳐서도 동일성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를시대의 한계로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온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서술은 고대에도 있었다그리스에서 가이아우라노스(하늘시대크로노스(시대제우스 시대 등으로 변전의 과정이 있었다이 우화적 이야기를 고대 시대의 변화들에 관한 알레고리라고 하더라도인간 사유의 변화와 연관을 설명하는 것 같지는 않다몇몇 역사가들이 시대의 과정에서 중요한 고비들을 서술하는 연대기나 사건들의 기록들이 역사적 과정과 변화에 관한 규칙 또는 법칙을 찾기보다 사실의 기록으로 후대의 참고로 삼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양의 감()과 서양의 사변(spéculation, 비춰봄)이 등장하는 것도 시기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다양한 자료들에 대한 검토가 시대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동시에 한 평면위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비추어보는 것이지만사유의 차이를 대조(le contraste)하는 것이다대조는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경우(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적절한 처방 또는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그래도 13세기는 대조의 시대라 한다).

이런 사유가 르네상스 이후에우선은 두 가지 방식사유와 운동또는 영혼과 신체 인 것으로 보이지만인식적으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대비로서종교적으로 정신과 물질로서 생각하는 경향을 또는 양식(bon sens)을 갖는다시대가 달라도 삶의 터전이 달라도 이런 이분법적 구분에서 인간이 자연에 대한 우월성과 지도성(조작성)으로 이어질 것이다그런데 이런 이항대립에서 자의식이라는 자아가 나오는 것인가인식과 형이상학의 문제로 남는다삶의 터전에서 대조란 소수의 관계와 다수의 연관들이 도덕적정치적 문제거리로 남아있다는 것을 18세기(빛들의 세기계몽기칸트 표현으로 청년기)에 와서야 인간들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는 역사의 시대구분에서 신들의 시대영웅들의 시대인간들의 시대로 나누었다고 하는데말하자면 첫째의 경우에종교의 강제적 힘 이외 다른 강제적 힘은 없었다고 한다둘째에서는 평민은 법률 밖에 있는 시대라고 하고근대에서 자연권의 관계들이 인간들 사이에 일반화된다고 한다이를 체제와 연관하여신정체귀족정체인간적 정부(가끔은 군주정체이다)라는 구별을 하였다이런 시대적 과정에 대한 통찰이 다음 시대의 철학자들에게 계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헤겔(Hegel, 1770-1831)은 역사철학 강의에서인간은 이법(이성)에 대한 깨달음에서 인간의 자유가 점점 확대된다고 보았다고대에는 황제 또는 참주의 1인의 자유의 시대였다면봉건 시대에는 귀족들이 자유를 누리고 평민을 사회적 부속물로 그리고 농노를 고대 이래로 경제적 도구 정도로 여겼다그도 놀랐던 프랑스 대혁명 이래로 시민들이 자기의 의사를 표출하고 협의하며법제적인 노력을 한다는 측면에서 시민들에게까지 자유가 확대되어 점점 자유가 인간에게 보편적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꽁트(Auguste Comte, 1798-1857)는 혁명이 질서를 혼란시키고 무정부 상태를 만든다는 이유 때문에 혁명에 대해 부정적이며사회에는 어떠한 큰 덩어리의 체제가 있고 그 내부에서 맞는 여러 제도들을 마련하는 과정으로 보았다그래서 그 제도들의 성립의 과정이 실증철학의 성립인데이러한 과정은 역사의 발전과 같은 방향을 간다고 보았다그는 학문들이 성립과 그 발전 과정들을 보면서즉 수학들이 대수학과 미적분학들로 확장되고천문학이 점성술을 넘어서 정확성을그리고 물리학이 체계와 법칙들을 세우고화학이 연금술을 넘어서는 분자들의 성격을 규명하고생물학에서 개체의 생명의 고유성이 전개되고 또한 변형이론이 나옴으로서 개인(개체)의 단위가 성립하게 되고사회 또는 국가의 체제 속에서 배제 되었던 평민의 역할이 확장되면서어쩌면 자의식의 발흥으로언론집회결사(협회정치조직)들이 이루어지면서 사회라는 문제가 제기된다고 보았다이 여섯째 등장하는 사회는 꽁트는 우선 사회 덩어리가 먼저 있다는 점에서 정태적으로 보았지만각 학문 발달의 과정만큼이 제도에서도 새로운 제도의 성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그는 루소 자연권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앞 시대에 인간은 이기심을 토대로 체제가 성립한데 비해사회는 상부상조와 여러 조직체들의 협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지배의 이기심(l’égoïsme)과 달리 사람들 사이에 이타심(l’altruisme 꽁트가 창안한 용어이다)이 있다고 하여다음 세상은 협업과 협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따라서 꽁트는 삶의 터전에서 실증성의 발전과정을 설명한다고대의 시대에 실증성이 결핍된 시대이라 젖혀두고그리고 3단계로서 신학의 시대형이상학의 시대실증의 시대라 한다실증시대의 학문은 사회학이 주축이라는 것이다.

맑스(Marx, 1818-1883)는 정치경제학을 창안하였다사회 제도와 그 체제 자체의 역사적 변화를 설명했다원시공산사회고대 노예 경제시대중세 봉건사회자본주의 사회이 사회의 자기모순에 의해 공산주의사회가 도래한다고 하였다그는 꽁트의 사회조직화와 체제에 대한 논의와 달리사회와 국가의 부의 축적과 재생산이란 측면노동상품화폐자본의 개념들을 정립하면서 생산과 소비 그리고 재생산의 과정에서 잉여와 착취를 찾아냈다이런 착취의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가치 생산의 노동을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강조하며프롤레타리아의 자유와 해방을 주장하였다그 자본주의 사회는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생산도구를 무기로 삼고전쟁의 무기를 확장하여 대중과 인민을 겁주고 달래며잉여와 이자를 통한 착취를 이어가고 있다이런 전쟁 국가의 무너짐이 아니라 카르텔을 공고히 하는 데는 로마카톨릭의 교회조직론과 앵글로색슨의 분석논리철학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벩송(Bergson, 1859-1941)은 역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를 정태적으로 우주론으로 다루어서 안 되고통태적으로 우주발생론(cosmogonie)”으로 다루어야 하다고 보았다꽁트 설명이 이래로 선전제의 요청에 의해 세워진 제반 학문이 무너졌고나머지 남은 학문이 영혼(심리)학 인데이것을 기억이론으로 새롭게 정립하였다이로서 자아의 지속성을 말하게 된다과정과 강도를 높이는 노력에 의해 자아의 정립은 지속하고 있는 중이며아직 완성이니 완전이니 절대니 하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그런데 앞 시대에서는 자연의 지배를 이해한데 비해벩송은 자연의 자기생성과 자발성을즉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기 창조를 강조하였다그는 실증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사실들과 상태들에 대한 자료들은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또한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면 문제는 해소된다고 보았다완전자보편자절대자라는 용어들은 선전제 미해결의 용어들로서이런 용어를 앞세워서 학문의 체계를 세우는 것은 착각에 빠진 것이며도덕과 종교의 제도를 세우는 것은 정태적 관계만을 서술하는 우화적이 된다고 보고끊임없이 노력과 강도를 높이는 개인의 영혼(프쉬케심리)의 함양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며라이프니츠 이래로 개체의 자유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보았다이런 관점에서 벩송은 서양 학문의 발달사를 상층의 이데아와 에이도스 시대에서갈릴레이의 빗금을 따라 내려와 표면에서 재현과 재생의 사실들과 상태들을 이루며이러한 표면을 성립하게 하는 것은 사물들 안에서 생성하고 생장하는 힘(충력엘랑)이 있다고 하면서생명은 내재성의 발현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표면의 일반화(개념자업)와 이에 걸 맞는 추상화로서 상징과 기호를 다룬다고 하였다.

벩송의 꼴레쥬드 프랑스 강의들을 수강했던 에밀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는 이법과 신앙의 대립에서 근대성의 발달로 실증성이 첨가되어 세 가지 방향으로 정립된다고 보았다순수 논리와 같은 학문개별적 학문들그리고 인간관계 사실들과 사건들에 관한 학문으로 분화되는 것으로 보았다학문의 분화와 개열들에서 자유의 방향들을 제시하려 하였다.

들뢰즈(Deleuze, 1925-1995)는 벩송의 상층 표면 심층이라는 학문과 인식의 역사적 발전의 설명을벩송의 물질과 기억의 회로 이론을 받아들이면서그리고 플라톤의 영원과 시간을 퀴니코스스토아의 영원과 시간으로 바꾸어 보았다들뢰즈는 우주 발생론적 과정을 기억의 발현으로 보아심층의 생성에서 표면의 이중성 그리고 이중성의 두 방식이 하나의 가지만을 강조하는 봉상스(좋은 감관)의 길이 있다그 길이 상층의 스콜라주의이데올로기속 좁은 이성의 현상학을 만들었다고 본다그렇다면 다른 하나의 가지는 무엇인가심층의 덩어리의 생성 방식은 추리의 일반화에 의한 표면의 현상(재현시뮬라크르)와 달리 자기 발생과 자기 개체성(특이성)을 생성하고 형성하려 한다는 것이다이 생성의 현상도 시뮬라크르인데원본에 따른 현상의 시뮬라크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근대 이후로 봉상스의 기준에서 두 시뮬라크르는 영혼과 신체의 관계의 유비 또는 알레고리로 설명하는데 비해들뢰즈는 두 시뮬라크르가 기원과 원인이 다르다고 보았다(벩송의 두 원천처럼). 이로서 들뢰즈는 벩송의 삼단계의 지식의 전개과정과 달리 발생의 도식을 만들며 달리 말한다스토아학파와도 달리 리좀(Rhizome)이란 개념을 창안하면서리좀들의 움직임과 엮음에서 나오는 배치에 따른 새로운 지도그리기(cartographie)를 제안한다(데카르트 식의 좌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리좀은 나무처럼 고정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흐르고 또 생장하면서도 흐른다그 흐름이 이익을 따라 흐르는 것 같지만자연의 자기 생성과 자기 만들기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이 흐름이 인민의 의식이며이와 더불어 인민으로서 자아의 주체성은 생성 중이라는 의미가 된다.

들뢰즈가 디지털 시대즉 규소의 시대는 속도와 강도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그는 맥루한의 이론즉 빛이 이미지들(기호들)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빛 자체가 의미 전달체이며 생성의 흐름 덩어리라는 것을 인용하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인터넷에서 다양한 빛의 정거장의 한 항(terme)이 플랫폼(정거장)이라 한다물론 다른 항들의 플렛폼도 여럿 있을 수 있다그러나 대중적인 정거장은 수렴과 발산의 점이라기보다 떠도는 리좀과 같지 않을까플랫폼이 정확한 증거가 될 수 있는지 현재로서 알 수 없지만빛의 흐름과 에너지가 우선은 선을 따라 다녔다이제는 선 없이 전 지구를 모으기도 하고 발산하기도 하면서발산과 수렴이 앞의 순간(l’instant)과 다른 순간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21세기 초반에 인민들의 손안에 든 누리소통(SNS) 도구가어느덧 제국의 도구/무기 체계를 넘어서 무기가 되어 가고 있다누리소통이 인민들 사이의 자유 또는 소통을 통한 협의와 상부상조가 아니라자본의 세 가지 세력들(국가교회구성 학문)의 패거리에게 인민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무기가 되어 가는 듯하다윤석열 정권은 미 제국의 이런 힘을 믿고 있다. 일본의 부역자밀정 노릇을 해도 누리소통을 지배하면 대중과 인민을 개돼지 취급하면서 노리개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이런 시대에 20퍼센트 정도의 지지를 받고도 미국의 지시를 받은 일본그 일본의 사주를 받는 밀정과 매국노가 누리소통을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그게 실현이 될까이광수와 부역파들이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고 했듯이부일자들과 밀정들이 또 한번 이런 말을 한다면한번은 비극한번은 희극이 아니라역사의 발전에서 3패거리들의 박멸과 소멸을 하지 않는 한상식의 믿음을 확장한 양식의 외연확장은 소수의 이기심(탐만치)으로 전승될 것이다그래서 혁명은 당연하다혁명은 이기심이 악라는 것을 증거할 것이며이기심이 자연을 피폐하게 하고 인간도 피폐하게 하여왔다는 것을 증거하는 장면이 될 것이다.

세 패거리의 인식론이 탐만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그들의 행동에게 욕망이라 부르자 말라 그것은 탐욕이며그들에게 보편이라 부르지 말라 인민은 보편을 추구하지도 말하지도 않았다는데 그 보편이 맞다고 오만하게 떠든다부를 누리면서공공적 이익을 사적으로 횡령하는 이들에게 무슨 보편이 있는가부일자 숭일자모미자(숭미자)들의 치졸함은 그들은 그들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자주와 자치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미국의 말을 듣고 일본에게서 가져오면 된다고 한다일제 말기에 부일자 또는 밀정들이 되었던 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그러나 1446년 훈민정음 이래로 자의식 발동이 이었지만 느리게 진행되어심층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한자 문화 속에서 표면으로 올라올 수 없었다한글로 입말을 쓴지 79년인데 이 속도와 강도는 이전 600년의 속도보다 빠르고 강도가 높다누리소통이 79년의 흐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의 발산과 수렴이 있다이 효과가 인지 아무도 모른다단지 강도와 속도만큼이나 인민의 노력에는 내공이 쌓이고 있다.

심층의 발산 곧 자유의 분출은마치 혁명처럼간헐적이고 폭발적이다누리소통 시대에 균열이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시대의 균열로 흐름은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발성으로 솟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4:18, 57SMA) (4:41, 57SMB) (5:09, 57SMBB) (5:11, 57S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플라톤과 베르그송)』(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막스 슈티르너: 에고이즘의 위대한 철학자-4 <정치적 슈티르너>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정치적 슈티르너>

 

박종성(한철연 회원)

 

                           – 차 례 –

  • 서론
  • 헤겔 좌파
  • 헤겔 좌파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 정치적 슈티르너
  •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 슈티르너 이후
  • 역사적 결론
  •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Svein Olav Nyberg [노르웨이 아그데르 대학교(노르웨이어: Universitetet i Agder) 부교수]의 글, Max Stirner: The Great Philosopher Of Egoism(2021)을 번역한 글입니다.

앞서 우리는 입센처럼 슈티르너도 국가를 “개인의 저주”로 여겼다고 언급했습니다. 국가를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독특한 일이 아닙니다. 국가는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는다”, “사람들을 계급적으로 억압한다”, “신의 의지에 어긋난다”, “환경을 파괴한다”, “누군가의 국가/인종 등등을 억압하고 있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잊지 마세요 – 등등

모두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상(ideal)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저주합니다. 그들의 불만은 국가가 이상의 자유로운 전개를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슈티르너와 입센은 국가가 그들 자신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방해하기 때문에 국가를 저주합니다.

슈티르너는 -개인과 보편이라는 두 가지 반대 방향을 식별합니다. 문제는 누가 이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자신의 의지와 개인적 목표를 요구하는 개인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평등을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보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양측이 “자유”를 규정하는 방식은 얼마나 다를까요? 개인은 개인을 지배하는 권력을 요구하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움직임이 방해받지 않을 때, 개인은 개인의 자유를 찾습니다. 반면에 보편은 보편이 무한할 때 자유를 찾습니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해방된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 이후 노르웨이 개인들은 더 많은 자유를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어쨌든 그것은 오해일 것입니다. 해방된 것은 국가이었습니다. 국가는 더 많은 권력을 얻었습니다.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지배자의 교체1였습니다. 스웨덴 왕의 통치를 받은 후, 이제 노르웨이인들은 자신의 왕권을 노르웨이에만 바치는 왕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해방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베트남은 제국주의자들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남베트남 개인들은 -새롭고 더 엄격한 주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란은 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란은 해방되었지만 살만 루슈디(Salman Rushdie)2와 같은 사람들은 목숨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Salman Rushdie 출처: pakistantoday.com.pk

 

슈티르너의 동시대 사람들 중, 특히 브루노 바우어는 보편을 해방하는 방법에 대한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특히 “인간”(Man)을 해방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그는 구체적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적대감은 민족 해방의 경우보다 피상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슈티르너는 “인간”의 해방이라는 발전을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가져온 것이고, 나머지 두 개는 슈티르너와 동시대의 정치 비평가들에게서 따온 것입니다.

  1. 인간 최초의 해방은 1789년 혁명 중에 일어났습니다. 개인의 권력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 어느 누구도 개인으로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시민(citšyen), 즉 국가의 시민입니다. 이것을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해방은 그들 모두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지닌 그 어떤 실제적이고 구체적 존재들(슈티르너가 부르는 대로 “자기중심적 사람들”(egoists”)의 해방이 아닌, 인간(Man)의 해방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1789년 혁명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유의 분배는 국가에 의해 통제되어, 가진 자를 가지지 못한 자로부터 보호합니다. 소유는 자기중심적 사람들의 영역에 맡겨져 있으며, 인간(Man)이나 인류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2. 그러므로 – 인간(Man)을 해방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자기중심적 사람들이 소유에 대해 획득한 권력을 제거해야 하고, 이를 인류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공산주의, 즉 사회적 자유주의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이는 미끄러운 경사면의 시작일 뿐입니다. 브루노 바우어가 이끄는 인본주의자들은 사회적 자유주의 아래에서도 여가 시간이 여전히 개인적 관심사, 즉 자기 중심성을 위해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몹시 싫어합니다.
  3. 따라서 이러한 사악한 자기중심적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인간의 완전한 해방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여가 시간 역시 “인간다워”야만 합니다. 모든 것은 “인간”을 중심으로 조직되어야 하며, -모든 자기 자신의 관심사와 개인적 관심사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 “인간적 자유주의”는 에인 랜드의 『성가』(Anthem)에서 주인공이 깨어난 사회와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여기서 랜드와 슈티르너는 공통의 비평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즉 랜드는 소설을 통해 비평을 수행했고, 슈티르너는 이러한 추상적 존재들, 즉 이러한 정신과 유령의 해방에 반대하는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3 논증을 통해 비평을 했습니다!

포이어바흐는 신을 인간으로 바꾸었지만, 바우어는 인간을 나의 구체적 나(my concrete I)로 바꾸고 싶었다고 슈티르너는 말합니다. 다음을 기억하세요: 헤겔주의에서 보편은 보편의 구체적 표명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슈티르너는 “내가 없으면 인간은 완전히 절망적이다(der Mensch ohne Mich verloren ist).”고 말했습니다.4 그래서 그[포이어바흐와 바우어;옮긴이]는 “인간”을 슈티르너나 어떤 다른 구체적 개인의 정체성(the identity)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등을 돌립니다.


옮긴이 박종성: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공역)이 있다. 논문으로는 「유일한 사람의 사랑」,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고 건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