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EBS BOOKS와 손잡고, 쉽게 읽히는 고전이란 모토로 기획한 시리즈가 ‘오늘 읽는 클래식’이다. 한철연 회원들이 집필한 이 책들을 선후배 회원들이 읽고 나름의 감상을 여기에 적어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이재유 지음, 『스미스의 국부론: 인간 노동이 부를 낳는다』(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이재유 지음, 『스미스의 국부론 – 인간 노동이 부를 낳는다』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국부론』(1776)을 통해서 자신의 시대에 남아 있던 봉건제와 중상주의적 통제 정책을 비판하며 자유주의적 시스템이 어떻게 생산력 증진을 가져오고 일반 시민들을 전반적으로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논증하고자 했다. 알다시피 『국부론』의 원제는 『국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그런데 이재유의 『스미스의 국부론』의 부제는 『인간 노동이 부를 낳는다』이다. 바로 이 점이 그동안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이해와 구별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재유는 『국부론』이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할 단초를 제공한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국부론』의 저자이기 이전에 『도덕감정론』(1759)의 저자였다. 스미스는 도덕적 판단의 원천을 ‘공감’이라 했다. 이재유는 이 지점을 중심으로 『스미스의 국부론』을 집필하였다.

 

이재유의 『스미스의 국부론』의 1장에서 애덤 스미스의 철학적 세계관을 조명하면서 공감의 원칙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시장자유주의와 복지주의의 인간관, 아울러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인간관을 살펴본다. 여기서 스미스의 인간관을 철학자 흄, 홉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등과 연관하여 설명하는 부분은 스미스의 인간관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국부론』을 읽는다. 이재유는 2장을 마치면서 스미스 사상의 핵심은 “모든 부의 근원은 인간의 노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이므로 노동자가 부를 만드는 주체라는 것이다. 3장 ‘철학의 이정표’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스미스의 친구였던 데이비드 흄의 『오성에 관하여』를 소개한다. 그리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으로 이어지고, 존 로크의 『통치론』, 데이비드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에 대하여』,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다룬다.

 

이재유는 노동이 부의 실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구성원 모두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재화를 만드는 노동이 타인 공감의 실천적 행위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스미스의 이기심은 흄의 ‘공감’의 원리에 영향을 받은 자기애이다. 나아가 『도덕감정론』의 “공평한 관찰자”는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연결시킨다. 이렇듯 스미스의 사상 속에는 철학적 토대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통해 “공감-공평한 관찰자-노동-보이지 않는 손”으로 정리하고 있다. 또한 루소의 사회계약은 스미스와 흄의 공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로크의 노동가치설은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론과 연결된다. 나아가 로크의 저항권은 애덤 스미스의 ‘독점 반대’와 흄의 제한된 공감을 넘어서는 공감의 확장과 연결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다.

더욱더 거세지는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은 『국부론』을 인용하며 이기성이 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스미스의 인간학에는 공감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미스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노동가치설은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노동하는 이들은 가난하다. 노동하지 않는 이들이 부자다. 이러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국부론』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길일 것이다. 그것을 이재유는 ‘공감’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국부론』의 저자가 쓴 『도덕감정론』 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도덕감정론』의 저자가 쓴 『국부론』을 읽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부론』이란 책에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연효숙 지음, 『모어의 유토피아: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연효숙 지음, 『모어의 유토피아 –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이병태(한철연 회원, 경희대)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모어의 『유토피아』는 ‘지나치게’ 유명하다. 한 번 읽어보라는 권유가 심드렁하게 여겨질 정도로. 더욱이 ‘세탁’이나 ‘교육’ 프랜차이즈의 이름에 작품명의 라임이 남아 있어 ‘유토피아’란 말 자체가 식상하기까지 하다. 고전치고는 내용도 짧고 쉽기에, 한 권 읽어냈다는 서푼짜리 정복감 외에 그다지 인상적인 독후감도 남지 않는다. 사실 모어의 『유토피아』에 다가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이처럼 과한 낯익음에 있다.

연효숙의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소상한 안내서가 빛을 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저 식상한 인상을 벗겨 『유토피아』가 흥미롭기 그지 없는 작품임을, 그리고 지성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 깨닫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1장 ‘이상 국가를 꿈 꾼 토마스 모어’, 2장 ‘『유토피아』 읽기’, 3장 ‘철학의 이정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토피아』 탄생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 중요한 문제의식까지 꼼꼼하게 짚어낸다. ‘유토피아’에 대한 모어의 상상은 그 자신의 삶과 분리할 수 없기에 “모어의 유토피아”란 제목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 더욱이 모어의 삶, 그리고 그 배면의 역사적 변화를 가장 앞에 배치하고 또 상세하게 설명함은 작품의 진면목에 좀 더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친절하고도 긴요한 배치다.

모어는 근대세계가 급부상하는 격변의 역사를 온 몸으로 관통했던 인물이다. 성속의 대체라는 거대한 역사적 변화가 그의 삶을 통해 극적으로 함축되기 때문이다. 카톨릭의 오랜 종교적 가치를 보듬으면서도 관용적이었던 그의 윤리적 삶은 실제로 헨리8세의 막강한 세속적 권력과 충돌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로 치면 영의정쯤이라 할 수 있는 상서경(Lord Chancellor)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즉 온갖 사회적 수혜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토마스 모어는 오히려 그러한 불평등의 뿌리와 이를 심화하고 있는 당대의 역사적 변화를 지극히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돈과 힘의 위세가 종교적 윤리의 고삐를 벗어던짐으로써 심화되는 새로운 시대의 위험성, 그리고 이같은 변화 속에서 뭇 백성들에게 들이닥친 생존의 위기는 비판을 넘어 반드시 부정되어야 할 문제였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길지 않은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진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지를 차분하고 깔끔하게 보여준다.

일신의 안녕을 등진 치열한 문제의식은 모어로 하여금 전례가 없는 이상사회의 청사진을 그려내도록 한 바탕이었다. 그의 ‘유토피아’가 배고픔과 질병의 고통, 죽음의 공포를 단순 부정했던 종교·신화의 이상향과 판이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근대적 유토피아의 상상은 생산의 풍족함과 분배의 공평성, 모두의 평등과 연대를 가능하게 할 실질적 기반까지 모색하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어의 ‘유토피아’는 기복적 피안의 흐릿한 꿈과 차별화되는 것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이끈다.

나아가 『모어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지닌 지성사적 가치를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책 말미(3장 ‘철학의 이정표’)에 연관된 고전들을 소개함으로써 모어의 상상력과 문제의식을 고대와 중세, 다시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지성사적 계보 하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까닭이다. 주지하다시피 모어의 『유토피아』는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를 잇고 있으며 이는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어의 유토피아』는 마르크스, 캉유웨이, 에른스트 블로흐, 발터 벤야민까지 나란히 연관 저작으로 배열하여 보여준다. 이는 지성사를 통해 이어진 이론의 계보가 부단한 것이었음을 적절하게 환기하는 것이나 사실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처럼 면면한 지성사적 계보 너머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에서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이 결코 중단된 적이 없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소유와 인정을 둘러싼 불평등, 그리고 그에 대한 투쟁은 여전하다. 그래서 『모어의 유토피아』는 친절한 입문서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다. 모어가 넘어서고자 했던 현실의 질곡이 500년 세월이 무색할 만큼 변함없음을, 따라서 ‘희망’ 또한 그치지 않음을 애써 일깨우고 있는 까닭이다.


서평자 이병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사)한철연 한국현대철학분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배기호 지음, 『순자: 악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2022)를 읽고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배기호 지음, 『순자 – 악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읽고

 

윤태양(한철연 회원, 성균관대) 

 

예전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 ‘(동양)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물어오기에, 발간 취기 뒤로 치기를 숨기며, ‘군자가 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군자(君子).

원래 군자는 말 그대로 ‘임금의 자손’, 즉 혈통적 지배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공자(孔子)에 의해 ‘군자’라는 개념은 구분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핏줄로 얻은 지배계층의 지위 (이것은 기존의 의미이지요), 다른 하나는 지배계층에 요구되는 능력과 덕성을 갖춘 사람들 (이것은 공자가 새로 부여한 의미입니다) 로 말이죠. 그리고 후자인 ‘군자다움’은 배움과 자기 수양을 통해 얼마든지 획득 가능한 것이라고, 공자는 설파했습니다.

 

‘군자’를 요샛말로 풀자면 어떨까요. 진지하고 단정한, 겸손하면서도 비굴하지 않은, 자기 자신에게는 단호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정한, 행동은 예의에 알맞고 마음은 올바름을 좇는, 공평한 정신으로 공공선을 추구하고, 사사로운 이익 앞에서 의(義)를 실천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요.

 

여덟 글자로 말하자면 ‘극기복례(克己復禮)’ 와 ‘수기안인(修己安人)’.

저는 이것이 『논어(論語)』의 핵심이고, 유학(儒學)의 중추라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강하게 폭발했던 때를 꼽으라면, 누구도 주저하지 않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꼽을 것입니다. 벌떼처럼 일어났던 것은 패자의 자리를 노리고 전쟁(戰爭)을 일삼았던 군웅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사학의 창시자인 공자 이래로 온갖 ‘자(子)’들이 저마다의 논리로 치열하게 논쟁(論爭)을 벌였던 때 역시 바로 이때입니다. 그래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대략 기원전 6세기 중반부터 기원전 3세기 초까지인 저 제자백가 시대를 장식했던 무수한 이름들은 무심한 세월 속에 먼지처럼 스러져 갔습니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孟子)의 이름만은 우뚝하게 ‘유학’의 근본으로 추앙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서울의 성균관과 각지에 있는 231개 향교의 대성전에 이들의 위패를 (물론 가짜이지만) 봉안하고, 아직까지도 매년 석전대제를 지낼 정도입니다. ‘공맹’의 병칭은 ‘유학’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순자(荀子)는 뭐랄까, 유학의 방계(傍系) 혹은 별종으로 취급을 받아온 터라 대성전에 없습니다. 널리 아시는 것처럼 ‘한유가 흠을 잡고, 주희가 낙인을 찍은’ 뒤로 이 한반도에서 순자는 일종의 터부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순자가 터부시 되었던 것은 적어도 고려 중기 이후입니다. 고려의 이규보와 이제현의 비판 뒤로, 특히 주자학이 들어와 조선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한 이후에는 순자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실패자’로 등한시 되었고, 정조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금씩 순자에 대한 재평가 혹은 취사의 시도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윤무학, 2009 참고)

 

순자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는 크게 그 논리를 둘로 갈래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진(秦)에 대한 매도의 역사관 위에서 진의 강성과 통일을 가능케 했던 이사(李斯)와 법가의 모체라는 비난이고, 다른 하나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던 것으로 박혀버린 미운털 탓입니다. 순자의 입장에서는 양자 모두 정정당당한 논리적 비판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순자에 대한 연구는 맹자-주자 계열의 연구에 비해 턱없이 적었습니다.

 

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직하의 좨주이자 당대의 대학자 순자는 작금까지의 외면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어쩔 수 없지, 괜찮아.’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순자가 존숭해 마지않던 공자의 언행이 기록된 논어 제일 첫 편 첫 장의 말처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 라는 말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렇게 자신을 알아주는 이역만리 한국의 젊은 연구자가, ‘멀리서 찾아온 벗’ 마냥 반갑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요.

 

그래서 이 책은 더욱 반갑습니다. 평소 보아왔던 배기호 선배의 모습처럼 ‘지금의 눈으로 옛것을 읽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그의 고민이 장마다 물씬물씬 풍겨서 더 그런 것도 같습니다.

 

오랜만에 순자를 다시 읽다 보니 문두의 옛 감상이 다시금 차오릅니다. ‘나는 공부를 왜 하는가. 결국 더 나은 자신으로 스스로를 다듬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하는 반성과 함께 말이죠.

 

저도 순자를 전공했습니다. 군자의 길을 따르기 위해 그토록 예의를 중시하고, 욕망의 힘을 인정하여 매우 경계했으며, 그래서 더욱 학문과 수양을 권장하고, 궁극적으로 공공선의 추구를 가장 앞에 두려 했던 순자의 사상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순자는 아주 논리적이고, 치밀하며, 매우 현대적입니다. 짧은 서평에서 다 말하려니 힘드네요. 배기호 선배가 이 책에서 너무나 잘 설명했는데 말이죠.


서평자 윤태양: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순자 도덕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K학술확산연구센터에서 일하고 있고, 유가 도덕론과 한국 근대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