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EBS BOOKS와 손잡고, 쉽게 읽히는 고전이란 모토로 기획한 시리즈가 ‘오늘 읽는 클래식’이다. 한철연 회원들이 집필한 이 책들을 선후배 회원들이 읽고 나름의 감상을 여기에 적어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김예호 지음, 『대학·중용: 철학의 시대에서 정치를 배우다』(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대학·중용』,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김예호 지음, EBS 오늘을 읽는 클래식

 

인현정(한철연 회원)

 

‘도는 거시기다’

책을 읽다 보면, 국어사전을 일부러 찾게 되는 일이 있다. 아니, 한국 사람이, 아니, 배운 사람이 영어 사전도 아니고 왜 국어사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정말로, 호기심으로 네이버 사전을 즐겨 찾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책의 154쪽, 저자는 「중용」의 도를 설명하기 위해 <도(道)는 거시기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책의 깨알 재미는 매 챕터 시작에 배치된 저자의 따뜻하고도 비근한 개인적 경험이라 자신 할 수 있는데) 필자는 바로 이 파격적 소제목의 문턱에서 코 찡끗 웃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영화 <황산벌>에 등장하는 계백장군의 대사를 열거하며, 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까다로우면, 바로 ‘거시기’를 떠올리라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왜 나는 이것을 생각 못 했지? 필자 역시 수업에서 ‘도’ 개념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식적 설명은 늘 다음과 같았다: 1) ‘길’ 도, 2) ‘방법 수단’으로서 도 3) ‘말하다’의 도 4) ‘진리’, ‘보편적 이치’로서 도. 문헌의 전거를 따라, 그리고 네이버 사전의 친절한 문자 용례에 따라 이 4가지를 언급했었다. 그런데, 사실 저자가 설명하고 있듯이, “도란 동양의 철학자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할 수 있고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해답이자 진리”였다.

이상의 4가지는 어찌 보면, ‘진짜 도’를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그릇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도’가 사람이라면, 도는 우리에게 “나한테 그 4가지 없거든~”하고 놀릴 수도 있는 셈이다. 오히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거시기’의 의미(/함의), 즉 ‘범위가 매우 넓어서 모든 사물에 적용되면서도, 모든 사물의 이치를 하나로 꿰뚫고 있는 것’이 ‘도’의 의미(/함의)에 다가가게 하는, 그러니까 겁내지 않고, 쫄지 않고, 성큼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최적의 입문 표현’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 이참에 거시기의 정체를 잡고야 말 테다’ 결심한 필자는, p → q의 범주를 q → p로 확인해 보고자 국어사전을 찾았고, 여기에서 뜻밖의 미궁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거시기’의 뜻에는 필자가 원하는 의미가 없었다. 『표준국어대사전』,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우리말샘(opendict.korean.go.kr),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 ‘하려는 말을 바로 말하기 거북할 때 쓴 군소리’, 이뿐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거시기’는 분명한 어떤 사물을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 바로 말하기 곤란해서가 아니라 일부러 숨기려고도 사용한다. 심지어 얼른 생각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가장 적합하기에 당당하게 쓰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 이씹세기도 아닌 작금의 사전이, 현실 용례의 정직한 반영은커녕 이토록 의미를 협소하게 표현하고 있단 말인가. 아, 그래서 저자는 중용의 도는 가깝고도 멀다 강조하고 강조했던 것일까?

필자는 혹시 스스로가 잘못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 우려하여 일부러 <황산벌>을 찾아 다시 봤다. 총관객 수가 27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국어사전을 만드는 거시기들이 270만 명의 의미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살지 않고서는, 어찌 거시기의 의미를 이토록 거시기하게 만들었는지, 도저히 거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필자는 84쪽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지금 필자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대학」의 가르침처럼, 탕왕이 그랫듯, 목욕통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겨두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거시기들을 거시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날로 새롭게 하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2024.07.15


서평자 인현정: (사)한철연 연구협력위원, 세종대와 이화여대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김주일 지음,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2022) – ‘정의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EBS 오늘 읽는 클래식]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2022)

 

진보성(한철연 회원)

 

정의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이게 나라냐’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과 그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된 말이다. 지금은 정치적 진영논리에 따라 상반된 의도를 담은 정치 공세의 구호로 쓰이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나라(폴리스)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바탕이며 그 목적이기도 하다. “시민의 삶을 살거나 시민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살며, 공적인 삶과 관련해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동물”(18쪽)이 인간답게 사는 사람을 뜻한다면,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이 지칭하는 ‘나라’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정의로운 공동체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주일의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2022)은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 국가와 시민의 관계, 사회와 국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서두에도 자세히 밝히고 있듯이 플라톤 『국가』의 원제는 ‘Politeia’로 ‘폴리스의 정치체제’라는 뜻이 있다.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윤리관이 담긴 『국가』는 플라톤의 유토피아인 ‘정의가 살아 있는 이상적인 국가’의 조건을 제시하고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가 어떻게 성립 가능한지, 또 어떻게 타락해 변해갈 수 있는지를 다중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플라톤의 스승이자 불의한 죽음을 맞았던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여러 사람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주제로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에서는 총 10권 분량의 『국가』 서설에 해당하는 1권의 대화 내용을 주로 다룬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파하며 정의의 실체를 논하는 내용을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작은 제목으로 체계적으로 나누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강자의 세계관을 들고 논의에 난입”한 트라쉬마코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시종 “정의(正義)의 정의(定意)를 묻”고 논박한다.

“자신의 이익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부정의(不正義)를 통치자의 기술로 둔갑시킨”(100쪽)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지금 부정의한 통치자들의 그것과 닮았다. 지금 우리의 통치자들은 어떤가? “정의가 남 좋은 것이라 위장해 피통치자들을 속이고, 다 당신들을 위한 것이라며 자신들이 정한 법을 지키게 하고 위법한 자는 부정의한 자라고 하여 처벌한다.”(100~101쪽) 이런 모습이 통치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피치자는 위정자의 모순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감히 부정의를 저지르지 못하고 비난하며, 정의를 지키는 시늉을 한다. 치자와 피치자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속셈을 가지고 있을 때, 이 공동체가 이 모순을 견디며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101~102쪽) “우리 사회가 겪었던 최악의 통치 권력 중 하나였던 제5공화국이 내세웠던 국정지표가 ‘정의사회구현’이었던 것을 보면”(102쪽), 정의라는 이름 아래 모순의 사회가 유지된 역사는 가까운 과거사에서도 목도된다. 현대 사회에서 정의로운 자의 타율적 결핍은 심해지는 데 반해 부정의한 자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현상을 두고 부정의한 자의 ‘능력’이란 말로 칭송될 때 2,500년 전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비극적으로 현실화한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후반부에는 플라톤이 주장한 정의로운 이상적인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 철학자가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는 종합적 견해를 다룬다. 사회 구성원 중 사적 소유를 허용하지 않는 수호자 계층을 지목하여 그들이 함양할 덕목과 함께 교육의 중요성, 제도권 안에서 공적인 삶의 태도 등 가장 지혜롭고 훌륭한 자들이 통치하는 철인정치의 가능성을 다채롭게 짚으며 정치체제뿐 아니라 이에 관계하는 인간의 영혼 및 이데아 개념, 문학 등도 거론하는 대목은 플라톤의 『국가』를 다시 읽어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오늘날 『국가』를 읽는 것은 ‘정의에 이르는 길’을 찾는 지적 여정의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정의에 이르는 길, 즉 정의로운 나라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플라톤의 국가』 논의의 연장으로 한철연 웹진 〈ⓔ 시대와 철학〉에 연재하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의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㉚”의 한 대목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로운 나라란 부정의가 생겨나기 이전에 이른바 자연적 정의 상태가 존재하는 최초의 나라 같은 나라가 아니라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통제하고 이겨내면서 정의를 보전해내는 그러한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장차 플라톤이 구축하려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이다. 그러한 한에서 플라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최초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호사스러운 나라를 최대한 정화하여 최대한 정의를 보전하고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나라라 할 것이다.”1


서평자 진보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전임대우강의교수, (사)한철연 연구협력위원,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박은미 지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2021)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2021)

 

유현상(한철연 회원)

 

박은미의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삶이 불쾌한가』를 읽고

 

철학자들의 언어는 어렵다.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 자체가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누구나 아는 말로 표현해도 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일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실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선택하는 과정은 철학자들에게도 곤혹스러운 일이다.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사유를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고 인정받았던 하이데거조차도 자신의 사유를 표현할 언어의 한계를 느껴 한동안 집필을 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곤혹감의 표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역시 철학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읽는 것만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마음이 가지 않는 철학 연구자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박은미의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삶이 불쾌한가』 는 많지 않은 분량으로 쇼펜하우어와 그의 대표 저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제한된 지면에서 소개하기가 쉽지 않은 텍스트 임에도 핵심적인 이해를돕기에는 적절한 설명을 담고 있다. 핵심어인 ‘표상’ 개념에 대해서는 언어 분석적 접근을 통해, 그리고 ‘의지’에 대해서는 칸트의 ‘물자체’개념과의 비교를 통해 쇼펜하우어의 세계 인식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내용을 “세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인데 그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의 세계이기도 하다.”라고 하는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덧붙여서 ‘의지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난 세계가 바로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설명한다. 우리들의 세계인식의 양상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이보다 더 간명하게 소개하기란 쉽지 않다. 의지가 객관세계의 존재근거라면 표상은 인식 주관의 인식 내용의 근거라고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삶이 불쾌한가』는 세계 인식의 양상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이 단지 세계 인식에 관한 문제의식만을 담고 있지 않음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책의 필자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나의 밖에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대상으로 한 인식의 중요성, 즉 의지에 근거한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대상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고통스러운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사실 세계를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이성주의 혹은 합리주의적 관점은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역동적 세계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과 논리는 어쩌면 일종의 ‘죽어 있는 사고의 형식’일 수 있다. 헤겔은 이런 난점을 극복하고자 형식논리를 넘어서는 변증법적 논리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철학 역시 법칙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는 없다.

심리학은 세계 못지않은 역동성을 가진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지적 도전이다. 그 도전이 인간의 구체적 존재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많은 진전을 이루어 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 현상을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 역시 규칙성과 논리로 인간의 마음을 읽으려 한다는 점에서 생의 역동성을 근원적으로 구명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나타난 반합리주의 철학이 이성을 통해서만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 철학의 주류적 흐름에 생(生)을 역동적인 모습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유 지평을 연 철학임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 있다.


서평자 유현상: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전호근 지음,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2022) – ‘우리는 지금 어떤 통치자를 얻었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2022)

 

진보성(한철연 회원)


우리는 지금 어떤 통치자를 얻었는가?

 

한여름이다. 연일 폭염에 시원한 소나기는 언제나 내릴지 하늘만 보다가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2022)를 손에 잡았다.

맹자의 글을 두고 한여름 더위를 식히는 소나기 같다고들 한다. 『맹자』에는 속 시원하게 내리는 비, 성대하고 세차게 흐르는 모양을 뜻하는 패연(沛然)이라는 말이 나온다. 벼 이삭을 자라게 하는 자연의 순리처럼 덕으로 펼치는 왕의 통치가 필요했던 전국시대, 백성 돌볼 줄을 몰라 왕 노릇도 하지 못하면서 무력으로 전국을 제패하여 패왕 자리에 오르려던 자들에게 바른 말[正言]을 거침없이 날렸던 맹자의 언변은 예나 지금이나 통치의 기본도 모르면서 자리만 차지한 자들을 보며 쌓인 마음의 답답함을 해소하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

전호근의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는 청량제와 같은 『맹자』를 읽으면서 속만 풀고 말 것이 아니라 지금 현실 정치에서 우리가 원하는 통치자는 어떤 통치자여야 하는지를 알고, 우리가 지금 어떤 통치자를 얻었는지를 다시금 살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책은 맹자 사상의 요점을 밝힌 1장과 『맹자』 원문을 가려 뽑아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번역하고 해설한 2장에서 맹자의 정치론을 간명직절하게 정의한다. 맹자의 왕도론은 “누가 천하를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며, 혁명론은 “누가 천하를 다스려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이 두 주제는 『맹자』를 관통하는 맹자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맹자의 사상은 왕 노릇을 할만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와 왕 노릇 못하는 왕은 끌어내려야 한다는 ‘혁명론’,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 이 세 가지의 주장으로 요약된다. 이 셋은 『맹자』 안에서 유기적으로 엮인다. “혁명은 왕도의 의무를 저버린 군주에 대한 저항이고 왕도정치의 실현 가능성이 성선설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이 세 가지 주장을 분리해서 볼 수는 없다.”(15쪽) 현실 정치에서 무능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보편적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형이상학적 근거는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잘못된 권력에 맞설 수 있고 바람직한 권력을 희망할 수 있다.

오늘날 『맹자』를 제대로 읽었다면 “방관자들의 압도적 무관심 속에서 독재와 억압의 부조리가 창궐했던 경우”(73쪽)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맹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75쪽) 이것이 맹자가 말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써서 행하는 기준이다.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사람”(74쪽)들이 권력을 탈취하면 사회에서 차마 그러지 못할 일들이 버젓이 횡횡한다.

옛날에는 자신을 수양하는 군자가 이러한 마음 씀과 행위의 기준을 담지하고 세상에 나아가 제시했다면, 민주 사회에서는 보통 시민들이 이 일의 당사자이기에, 그러함에 뻔뻔한 권력자들이 우리 사회에 여전한 것이 그저 남의 부끄러움의 몫은 아닌 것 같다.

맹자는 제선왕이 제사에 희생으로 쓰일 소가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에 소 대신 양을 쓰라 명한 것을 두고 제선왕이 왕도정치를 베풀 수 있다고 말했다. 의아해 하는 제선왕에게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임금님의 은혜가 소 한 마리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런데 그 공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결국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이지 은혜를 베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지금 임금께서 왕도정치를 베풀지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양혜왕상」)”(154쪽)

짐승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찮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맹자에 의하면 이 작은 마음은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과 남에게 차마 못할 일을 하지 않는 마음으로까지 확장된다. 2011년 구제역 살처분 당시 “우리 소는 평소에 제대로 먹이지도 못해 비루 말랐는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배불리 먹여주고 싶습니다.”라는 축산인의 말에 현장 사람들이 모두 공감하고 눈시울을 적셨다는 일화(153쪽)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선함을 믿고 그 가능성의 길을 따라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맹자의 꿈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왕도정치가 짐승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정치적 상상을 그 누가 할 수 있었을까.

맹자가 말한 것처럼 백성을 위하고 시민을 위한 정치는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데도 방기하고 안 하는 경우가 많다. 전국시대가 그랬고 지금 시대가 그러하다. 맹자도 그랬지만 아마 우리가 원하는 통치자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자’일 것이다. 이런 자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많은 수의 우리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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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자 진보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전임대우강의교수, (사)한철연 연구협력위원,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유재민 지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초빙교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는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69-399), 플라톤(Platon, 기원전 429?-347)과 함께 고전기 그리스 철학, 나아가 서양 사상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그리스 북동부 칼키디케 반도의 스파케이로스로 그리스 변방 출신이다. 기원전 367년, 17세에 그는 당대 문화의 중심이었던 아테네로 유학을 가서, 플라톤이 교장으로 있었던 아카데미아에서 20년 동안 공부한다. 학생 시절 그를 가리키는 몇 가지 별명은 “학원의 지성”, “부지런한 독서가”였다. 그는 20년 후 아카데미아를 떠나 자신의 독자적 학파를 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사상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한 철학자이다. 그는 ‘만학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서양 사상사 거의 전 분야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서양 최초로 학문을 분류한 사람이다. 그의 저술은 크게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적 저술로 분류된다. 그리고 ‘실천적 학문’에 윤리학과 정치학적 저술들이 포함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과 함께 실천적 학문에 속한다. 그중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대표하는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윤리학적 저술에 『에우데모스 윤리』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포함되는데, 이 책의 제목은 에우데모스[아폴론 뤼케이오스(아폴론 신의 별칭) 신전 근체에 세운 학교인 뤼케이온 학원 구성원 중 한 명]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인 니코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록을 편집해서 붙인 것이다.

유재민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부제를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로 붙였다.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은 제1장의 첫 소제목인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이다. 그리고 유재민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다음 소제목을 “행복에서 시작하여 덕으로 나아가다”, “행복, 윤리의 사다리”, “객관적 행복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으로 정했다.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재민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어를 ‘행복’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자인 그는 제2장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행복이란 무엇인가”, “덕과 중용”, “정의와 우정”, “공동체의 행복”이라는 주제어를 중심으로 읽기 시작한다. 마지막 제3장에서는 “철학의 이정표”라는 제목으로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테오프라스토의 『성격의 유형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 에피쿠로스의 『세 통의 편지』, 윌리엄 프라이어의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을 소개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와 함께 읽어야 할 책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지,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돌진하는 군인은 ‘착한’ 군인이 아니라, ‘훌륭한’ 군인이다. ‘윤리’는 그리스어 ‘에티코스’(êthikos)를 번역한 말이다. ‘에티코스’의 어원은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이다. 사람이 습관을 들여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것은 ‘윤리’가 아니라 ‘성격’ 혹은 ‘성품’이다. 따라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성격에 관한 책’ 혹은 ‘성품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 행위자의 본성적이고 본질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어떤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도덕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인간의 행복에 관한 설명을 통해 제시된다. 또한 이 원리는 좋은 사람을 만들어주고 행복한 사람을 살게 해주는 여러 덕목들에 관한 설명을 통해 제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 덕과 중용, 정의와 우정, 공동체의 행복이라는 덕목들을 개인 안에 구체화하는 것이 바로 국가이다.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어떤 국가에 살고 있는가?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 최근(2023)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하여 출간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손철성 지음, 『베이컨의 신기관: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손철성 지음,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현남숙(한철연 회원, 성균관대)

 

프랜시스 베이컨은 근대의 서막을 연 인물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신유물론, 생태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서양철학의 극복되어야 할 유산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베이컨의 『신기관』의 부제는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이다. 이것이 시사하듯, 자연에 대한 투명한 인식과 그로부터 지배가 가능하다고 보는 관념은, 인류세라 불리는 기후위기의 시대에 인간중심적이고 무모한 생각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이 아닌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올 때의 시간지평에서 보면, 베이컨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그의 학문적 공과 중에 ‘과’만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한편, 베이컨은 당대의 사유관행에 맞서 싸운 우상타파자이자 새로운 학문 방법론의 창안자인 점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손철성(이후 저자)의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은 베이컨의 『신기관』에 관한 대중적 해설서이자 비평서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organon)과 구별되는 당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신의 도구를 의미한다(‘오르가논’이란 ‘도구, 특히 생각의 도구란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그의 논리학 저작 전체에 붙여진 이름이다).

1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을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을 제시한 인물로 위치 지운다. 그는 베이컨을 근대를 기획한 인물로 명명하면서,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초입에 도달할 무렵인 16세기에 학문의 대혁신을 이룬 인물로 그려낸다. 대혁신의 요체는 자연을 인간의 통제가 가능한 대상으로 보고, 그것을 위한 인식의 방법을 창안하여 지식의 진보를 이루는 것이다.

2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의 『신기관』의 실제적 내용을 두 각도에서 소개한다. 하나는 지식의 진보를 가로막는 우상타파(종족의 한계, 개인적 편견, 언어의 오염, 기존철학의 방해)에 관한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자연의 해석과 지배를 가능케 할 정신의 도구로서의 참된 귀납법에 관한 내용이다. 베이컨은 개별공리로부터 단번에 일반화된 공리로 나아나는 일반적 귀납법과 달리, 경험의 재료를 모아 중간 공리들을 끌어내고 그것을 다시 개별 사례에 적용해 보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참된 귀납법을 제시했다.

3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의 『신기관』이 자신과 다른 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알려준다. 그 중 두 가지만 언급하자면, 베이컨 자신이 그려낸 과학기술 유토피아에 관한 소설인 『새로운 아틀란티스』와 과학기술에 대한 베이컨의 지나친 낙관을 비판하는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이 있다. 베이컨은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학문의 대혁신으로 만들어갈 과학기술 유토피아에 관한 우화를 제시한다. 한편, 요나스는 『책임의 원칙』에서 베이컨의 이러한 구상이 갖는 인간에 의한 자연지배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이처럼,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은 베이컨의 『신기관』에 대한 쉽고도 신뢰할 만한 입문서 역할을 한다. 뿐더러, 근대 경험주의 계열의 철학자와 만날 수 있는 유의미한 통로로서의 역할도 한다. 특히, 베이컨의 학문적 공과를 균형 있게 풀어나간 점은 저자가 가진 철학적 내공이자 미덕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베이컨의 프로젝트, 즉 인간을 자연과 분리하여 자연의 우위에 두고,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인식하고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생각은 대체로 비판받고 있다. 근래 팬데믹이나 기후위기에서 보듯, 자연은 인간의 생각만큼 잘 예측되거나 통제되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관념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누적되어 온 생태적 부작용도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베이컨이 당대에 새로운 정신의 도구를 제시했듯, 오늘날 철학은 인류세에 요청되는 새로운 지식의 도구나 사유의 방향을 제시할 책무를 갖는다. 길을 잃었을 때 왔던 길을 되짚어가서 새 길을 찾듯, 베이컨의 철학을 성찰적으로 복기해 보아야 한다. 저자가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중에, 이러한 점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서평자 현남숙: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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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이재유 지음, 『스미스의 국부론: 인간 노동이 부를 낳는다』(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이재유 지음, 『스미스의 국부론 – 인간 노동이 부를 낳는다』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국부론』(1776)을 통해서 자신의 시대에 남아 있던 봉건제와 중상주의적 통제 정책을 비판하며 자유주의적 시스템이 어떻게 생산력 증진을 가져오고 일반 시민들을 전반적으로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논증하고자 했다. 알다시피 『국부론』의 원제는 『국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그런데 이재유의 『스미스의 국부론』의 부제는 『인간 노동이 부를 낳는다』이다. 바로 이 점이 그동안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이해와 구별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재유는 『국부론』이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할 단초를 제공한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국부론』의 저자이기 이전에 『도덕감정론』(1759)의 저자였다. 스미스는 도덕적 판단의 원천을 ‘공감’이라 했다. 이재유는 이 지점을 중심으로 『스미스의 국부론』을 집필하였다.

 

이재유의 『스미스의 국부론』의 1장에서 애덤 스미스의 철학적 세계관을 조명하면서 공감의 원칙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시장자유주의와 복지주의의 인간관, 아울러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인간관을 살펴본다. 여기서 스미스의 인간관을 철학자 흄, 홉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등과 연관하여 설명하는 부분은 스미스의 인간관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국부론』을 읽는다. 이재유는 2장을 마치면서 스미스 사상의 핵심은 “모든 부의 근원은 인간의 노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이므로 노동자가 부를 만드는 주체라는 것이다. 3장 ‘철학의 이정표’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스미스의 친구였던 데이비드 흄의 『오성에 관하여』를 소개한다. 그리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으로 이어지고, 존 로크의 『통치론』, 데이비드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에 대하여』,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다룬다.

 

이재유는 노동이 부의 실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구성원 모두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재화를 만드는 노동이 타인 공감의 실천적 행위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스미스의 이기심은 흄의 ‘공감’의 원리에 영향을 받은 자기애이다. 나아가 『도덕감정론』의 “공평한 관찰자”는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연결시킨다. 이렇듯 스미스의 사상 속에는 철학적 토대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통해 “공감-공평한 관찰자-노동-보이지 않는 손”으로 정리하고 있다. 또한 루소의 사회계약은 스미스와 흄의 공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로크의 노동가치설은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론과 연결된다. 나아가 로크의 저항권은 애덤 스미스의 ‘독점 반대’와 흄의 제한된 공감을 넘어서는 공감의 확장과 연결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다.

더욱더 거세지는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은 『국부론』을 인용하며 이기성이 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스미스의 인간학에는 공감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미스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노동가치설은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노동하는 이들은 가난하다. 노동하지 않는 이들이 부자다. 이러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국부론』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길일 것이다. 그것을 이재유는 ‘공감’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국부론』의 저자가 쓴 『도덕감정론』 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도덕감정론』의 저자가 쓴 『국부론』을 읽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부론』이란 책에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연효숙 지음, 『모어의 유토피아: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연효숙 지음, 『모어의 유토피아 –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이병태(한철연 회원, 경희대)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모어의 『유토피아』는 ‘지나치게’ 유명하다. 한 번 읽어보라는 권유가 심드렁하게 여겨질 정도로. 더욱이 ‘세탁’이나 ‘교육’ 프랜차이즈의 이름에 작품명의 라임이 남아 있어 ‘유토피아’란 말 자체가 식상하기까지 하다. 고전치고는 내용도 짧고 쉽기에, 한 권 읽어냈다는 서푼짜리 정복감 외에 그다지 인상적인 독후감도 남지 않는다. 사실 모어의 『유토피아』에 다가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이처럼 과한 낯익음에 있다.

연효숙의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소상한 안내서가 빛을 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저 식상한 인상을 벗겨 『유토피아』가 흥미롭기 그지 없는 작품임을, 그리고 지성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 깨닫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1장 ‘이상 국가를 꿈 꾼 토마스 모어’, 2장 ‘『유토피아』 읽기’, 3장 ‘철학의 이정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토피아』 탄생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 중요한 문제의식까지 꼼꼼하게 짚어낸다. ‘유토피아’에 대한 모어의 상상은 그 자신의 삶과 분리할 수 없기에 “모어의 유토피아”란 제목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 더욱이 모어의 삶, 그리고 그 배면의 역사적 변화를 가장 앞에 배치하고 또 상세하게 설명함은 작품의 진면목에 좀 더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친절하고도 긴요한 배치다.

모어는 근대세계가 급부상하는 격변의 역사를 온 몸으로 관통했던 인물이다. 성속의 대체라는 거대한 역사적 변화가 그의 삶을 통해 극적으로 함축되기 때문이다. 카톨릭의 오랜 종교적 가치를 보듬으면서도 관용적이었던 그의 윤리적 삶은 실제로 헨리8세의 막강한 세속적 권력과 충돌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로 치면 영의정쯤이라 할 수 있는 상서경(Lord Chancellor)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즉 온갖 사회적 수혜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토마스 모어는 오히려 그러한 불평등의 뿌리와 이를 심화하고 있는 당대의 역사적 변화를 지극히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돈과 힘의 위세가 종교적 윤리의 고삐를 벗어던짐으로써 심화되는 새로운 시대의 위험성, 그리고 이같은 변화 속에서 뭇 백성들에게 들이닥친 생존의 위기는 비판을 넘어 반드시 부정되어야 할 문제였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길지 않은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진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지를 차분하고 깔끔하게 보여준다.

일신의 안녕을 등진 치열한 문제의식은 모어로 하여금 전례가 없는 이상사회의 청사진을 그려내도록 한 바탕이었다. 그의 ‘유토피아’가 배고픔과 질병의 고통, 죽음의 공포를 단순 부정했던 종교·신화의 이상향과 판이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근대적 유토피아의 상상은 생산의 풍족함과 분배의 공평성, 모두의 평등과 연대를 가능하게 할 실질적 기반까지 모색하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어의 ‘유토피아’는 기복적 피안의 흐릿한 꿈과 차별화되는 것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이끈다.

나아가 『모어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지닌 지성사적 가치를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책 말미(3장 ‘철학의 이정표’)에 연관된 고전들을 소개함으로써 모어의 상상력과 문제의식을 고대와 중세, 다시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지성사적 계보 하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까닭이다. 주지하다시피 모어의 『유토피아』는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를 잇고 있으며 이는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어의 유토피아』는 마르크스, 캉유웨이, 에른스트 블로흐, 발터 벤야민까지 나란히 연관 저작으로 배열하여 보여준다. 이는 지성사를 통해 이어진 이론의 계보가 부단한 것이었음을 적절하게 환기하는 것이나 사실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처럼 면면한 지성사적 계보 너머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에서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이 결코 중단된 적이 없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소유와 인정을 둘러싼 불평등, 그리고 그에 대한 투쟁은 여전하다. 그래서 『모어의 유토피아』는 친절한 입문서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다. 모어가 넘어서고자 했던 현실의 질곡이 500년 세월이 무색할 만큼 변함없음을, 따라서 ‘희망’ 또한 그치지 않음을 애써 일깨우고 있는 까닭이다.


서평자 이병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사)한철연 한국현대철학분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배기호 지음, 『순자: 악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2022)를 읽고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배기호 지음, 『순자 – 악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읽고

 

윤태양(한철연 회원, 성균관대) 

 

예전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 ‘(동양)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물어오기에, 발간 취기 뒤로 치기를 숨기며, ‘군자가 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군자(君子).

원래 군자는 말 그대로 ‘임금의 자손’, 즉 혈통적 지배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공자(孔子)에 의해 ‘군자’라는 개념은 구분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핏줄로 얻은 지배계층의 지위 (이것은 기존의 의미이지요), 다른 하나는 지배계층에 요구되는 능력과 덕성을 갖춘 사람들 (이것은 공자가 새로 부여한 의미입니다) 로 말이죠. 그리고 후자인 ‘군자다움’은 배움과 자기 수양을 통해 얼마든지 획득 가능한 것이라고, 공자는 설파했습니다.

 

‘군자’를 요샛말로 풀자면 어떨까요. 진지하고 단정한, 겸손하면서도 비굴하지 않은, 자기 자신에게는 단호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정한, 행동은 예의에 알맞고 마음은 올바름을 좇는, 공평한 정신으로 공공선을 추구하고, 사사로운 이익 앞에서 의(義)를 실천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요.

 

여덟 글자로 말하자면 ‘극기복례(克己復禮)’ 와 ‘수기안인(修己安人)’.

저는 이것이 『논어(論語)』의 핵심이고, 유학(儒學)의 중추라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강하게 폭발했던 때를 꼽으라면, 누구도 주저하지 않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꼽을 것입니다. 벌떼처럼 일어났던 것은 패자의 자리를 노리고 전쟁(戰爭)을 일삼았던 군웅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사학의 창시자인 공자 이래로 온갖 ‘자(子)’들이 저마다의 논리로 치열하게 논쟁(論爭)을 벌였던 때 역시 바로 이때입니다. 그래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대략 기원전 6세기 중반부터 기원전 3세기 초까지인 저 제자백가 시대를 장식했던 무수한 이름들은 무심한 세월 속에 먼지처럼 스러져 갔습니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孟子)의 이름만은 우뚝하게 ‘유학’의 근본으로 추앙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서울의 성균관과 각지에 있는 231개 향교의 대성전에 이들의 위패를 (물론 가짜이지만) 봉안하고, 아직까지도 매년 석전대제를 지낼 정도입니다. ‘공맹’의 병칭은 ‘유학’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순자(荀子)는 뭐랄까, 유학의 방계(傍系) 혹은 별종으로 취급을 받아온 터라 대성전에 없습니다. 널리 아시는 것처럼 ‘한유가 흠을 잡고, 주희가 낙인을 찍은’ 뒤로 이 한반도에서 순자는 일종의 터부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순자가 터부시 되었던 것은 적어도 고려 중기 이후입니다. 고려의 이규보와 이제현의 비판 뒤로, 특히 주자학이 들어와 조선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한 이후에는 순자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실패자’로 등한시 되었고, 정조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금씩 순자에 대한 재평가 혹은 취사의 시도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윤무학, 2009 참고)

 

순자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는 크게 그 논리를 둘로 갈래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진(秦)에 대한 매도의 역사관 위에서 진의 강성과 통일을 가능케 했던 이사(李斯)와 법가의 모체라는 비난이고, 다른 하나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던 것으로 박혀버린 미운털 탓입니다. 순자의 입장에서는 양자 모두 정정당당한 논리적 비판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순자에 대한 연구는 맹자-주자 계열의 연구에 비해 턱없이 적었습니다.

 

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직하의 좨주이자 당대의 대학자 순자는 작금까지의 외면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어쩔 수 없지, 괜찮아.’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순자가 존숭해 마지않던 공자의 언행이 기록된 논어 제일 첫 편 첫 장의 말처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 라는 말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렇게 자신을 알아주는 이역만리 한국의 젊은 연구자가, ‘멀리서 찾아온 벗’ 마냥 반갑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요.

 

그래서 이 책은 더욱 반갑습니다. 평소 보아왔던 배기호 선배의 모습처럼 ‘지금의 눈으로 옛것을 읽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그의 고민이 장마다 물씬물씬 풍겨서 더 그런 것도 같습니다.

 

오랜만에 순자를 다시 읽다 보니 문두의 옛 감상이 다시금 차오릅니다. ‘나는 공부를 왜 하는가. 결국 더 나은 자신으로 스스로를 다듬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하는 반성과 함께 말이죠.

 

저도 순자를 전공했습니다. 군자의 길을 따르기 위해 그토록 예의를 중시하고, 욕망의 힘을 인정하여 매우 경계했으며, 그래서 더욱 학문과 수양을 권장하고, 궁극적으로 공공선의 추구를 가장 앞에 두려 했던 순자의 사상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순자는 아주 논리적이고, 치밀하며, 매우 현대적입니다. 짧은 서평에서 다 말하려니 힘드네요. 배기호 선배가 이 책에서 너무나 잘 설명했는데 말이죠.


서평자 윤태양: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순자 도덕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K학술확산연구센터에서 일하고 있고, 유가 도덕론과 한국 근대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