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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치[퍼농유]

5. 순치(馴致)

 

길들임이란 좋은 것이기도 하며 또 사악한 것이기도 하다. 어느 것이나 반면은 있다.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물었을 때 여우가 말하려는 것은 사랑이었다. 그것은 사이가 좋아진다는 것이고 익숙해진다는 것이며 떨어져 지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길들여지기를 원한다. 날 길들여줘. 날 사랑해줘. 나에게 익숙한 사람이 되어줘. 그것이 편하고 안정된 것이다. 길들임을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순치(馴致)이다. 이 말은 <주역> 곤(坤)괘 초효 「상전」에 나온다.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르니, 음(陰)이 처음 응결한 것이다. 그 도(道)를 따라 점차적으로 이르러서(순치) 단단한 얼음이 된 것이다.”(象曰, 履霜堅冰, 陰始凝也, 馴致其道, 至堅冰也.)

여기서 순치는 서리가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얼음이 되는 과정을 말한다. 많은 유학자들은 순치라는 용어를 자연적 원리와 순서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사용해 왔다. 배움이던 사람과의 관계이던 다스림이던 모든 영역은 순치해야만 했다.

송대 성리학자인 정이천은 그래서 “도로써 순치해야지 강압적인 폭력으로 해서는 안 된다.”(蓋以道馴致, 不以暴爲之也.)는 말을 한다. 순치란 자연적 원리와 순서에 따라서 길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배움도 사랑도 정치도 강압적인 폭력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와 순서에 따라 점차적으로 길들이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질 때 의미를 얻는다. 이 자연의 원리와 순서를 무시하고 고원한 이상을 꿈꾼다는 것은 자기기만적 폭력이다.

 

 

그러나 순치의 어원적 의미는 좀 섬뜩하다. 순(馴)이란 길들이는 것이지만 정확히 말을 길들인다는 의미이다.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는 “말은 먼저 길들인 뒤에 양마(良馬)를 따진다.”(馬先馴而後求良)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잘 달리는 야생마일지라도 좋은 말일 수 없다. 먼저 잘 길들인 뒤에 순치시킨 뒤에 좋은 말이 된다. 양마(良馬)이다.

그렇다면 사람도 길들인 뒤에야 양순(良順)하고 선량(善良)한 사람이 된다. 양순하고 선량한 사람은 자연적인 자질과 품성이 아니라 길들여진 뒤에 따질 수 있는 인위적 결과일 뿐이다. 순치되고 길들여질 때 선량하고 양순한 사람이 된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쇠로 만든 우리’(Iron Cages)이라는 비유를 들면서 관료제의 문제점을 분석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사회가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보상과 희망 때문에 고정된 제도 속에 스스로를 속박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관료제의 문제다. 순치되는 것이다. 근대 이후 자본과 국가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순치시키지 않는다. 생리(生理)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길들이는 것이다. 길들여진 우리는 관료제 사회를 편안하고 안정되게 생각한다. 결국 길들여진 사람들은 스스로 순치되기를 원한다. 날 사랑해줘! 제발!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되게 말들어줘! <장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연못에 사는 꿩은 열 걸음 만에 한 입 쪼아 먹으며, 백 걸음 만에 한 모금 마시지만 우리에 갇혀 길들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잘 먹고 잘 살테지만 새의 본성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澤雉十步一啄, 百步一食, 不蘄畜乎樊中. 神雖王, 不善也.)

우리는 ‘우리’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구시대를 마감하는 이때 구태의연한 관료제 우리에서 벗어나야할 때이다. 이제 우리에서 벗어나 야생의 자신을 찾아야 할 터이다. 순치되지 않은 야생마의 근성을 회복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sallymann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원하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함께 우리가 되고 싶다. 야생의 근성을 잃지 않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살 수 있는 우리를 세워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를 길들여줄 사랑을 원한다. 사랑은 우리이기도 하다.

한국환경보고서 2017 20대 이슈 [최종덕의 책과 리뷰] -16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필자의 홈페이지(http://eyeofphilosophy.net)

 

한국환경보고서 2017 20대 이슈

 

오늘의 서평 책 :  그린 챌린지(한국환경보고서 2017), 녹색사회연구소, 알렙, 2017.

 

 
 
이번 서평 책은 <그린챌린지> (녹색사회연구소, 알렙, 2017) 입니다.
글 대신 사진으로 책의 내용을 대신합니다.
우리들이 환경주제를 잘 읽으려하지 않는 것 같아서 한 눈으로 알아보기 쉽게 책의 목차에 따른 주제 순서대로 사진으로 올렸습니다.
그냥 보시기만 해도 좋아요.
 
그래도 한 마디 하려합니다.
이 책은 올해 5월에 나왔습니다. 그 사에에 바뀐 내용들이 있겠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20개 주제 가운데 8월15일 기준으로  반드시 바꿔야 될 게 바뀌지 않은 것이 있구요,
그리고 바뀌면 안 될 것이 바뀐 것이 있어요
 
설악산케이블카 사업은 작년 2016년 말에  문화재청에 의해 부결된 것인데, 2017년 5월에 보수기관들의 보이지 않은 압력이 작용했는지, 사업진행을 한다는 행정심판으로 뒤집어 졌습니다. 우리네 심사도 뒤집어졌구요. 기필코 다시 케이블카 사업단절로 이끌어 낼 것입니다.
 
더 심사가 뒤집어질 일이 있습니다. 바뀌어야 할 사드 배치를 바꿔야 하는데, 굳이 사드배치를 강행한다고 하니 정말 믿을만한 정권이 없네요. 평화환경은 더 멀어지는군요.

추신>
아래 20장의 그림파일은 책을 요약정리한 것인데, 제가 직접 제작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그림파일을 가져다가 돌려 쓸 수 있습니다. 많은 활용 부탁드립니다.
    

미병(未病) [퍼농유]

4. 미병(未病)

 

아는 선배와 함께 식사를 할 때였다. 그는 음식의 영양 성분과 그 음식을 먹었을 때 일어나는 몸의 효과 등 박식한 지식을 바탕으로 음식을 평가했다. 무엇을 먹어야 하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할지. 놀라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몸이 아프다는 이야기 아닌가. 음식에 관해 많이 안다는 것은 그것을 알 필요가 있다는 말이고, 그것은 관리해야할 병이 있다는 말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음식에 대해 공부하지 않는다. 건강을 해쳤을 때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공부를 시작한다. 음식을 고르고 영양분을 분석하고 신체의 기능에 대해서 학습한다. 분석하고 학습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에 맞는 식생활을 실천한다.

선배의 음식공부는 자신의 통증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공부하지 않는다. 행복을 즐기기에도 시간이 없는데 왜 따로 공부까지 하겠는가?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공부를 한다. 머리 아픈 사람들이 약을 구하는 법이다. 병이 없다면 약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서글픈 일이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는 바람직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의학에는 미병(未病)이라는 개념이 있다. 서양의학적인 검사로는 몸의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형태의 자각증상을 가지고 있는 반 건강상태를 말한다. 특정질환을 진단받은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건강한 상태라고도 말할 수 없는 질병과 건강의 중간상태를 말한다. 완전한 건강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병 상태도 아닌 제3의 상태이다.

 

Bruce Davidson

 

문제일까? <황제내경(黃帝內經)>에는 “최상의 의사는 미병 상태를 치료하고, 중간의 의사는 이미 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한다.”(上工, 治未病. 中工, 治已病,)는 말이 있다고 한다. 병에 걸리기 전에 먼저 아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더 악화되기 전에 치료가 아닌 관리가 중요한 상태이다.

노자는 이런 말을 했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최상이고,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병이다. 오직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에 그래서 병이 될 수 없다. 성인은 병이 없으니 그 병을 병으로 알고 있어서 병이 될 수 없다.”(知不知, 上, 不知知, 病. 夫唯病病, 是以不病. 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노자에 따르면 미병은 결코 나쁜 상태는 아니다. 병을 모르는 것이 병이지 병을 어떤 자각증상을 통해 알고 있다면 병이 아닐 수 있다. 병은 완치할 수 없다. 병이 악화되기 이전에 병을 병으로 인식하는 것은 치료의 첫단계이다.

병을 병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자신의 병을 병으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행동이 옳고 선하다고 강변하기까지 한다. 고집하고 합리화하면서 자기를 기만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의 건강에 대한 문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어쩌면 미병의 상태이어야 오히려 더 건강할 수 있다. 건강한 사회라는 착각을 끊임없이 생산하기보다는 병에 대한 논쟁과 대화가 필요하다.

건강은 병이 완전히 없는 상태가 아니라 병이 있지만 그 병을 병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관리할 줄 아는 적절한 능력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병을 병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진짜 환자다. 병을 병으로 인지하지 못한 사회가 병을 깊게 앓는다.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가 있다. 잭 니콜슨의 광기어린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 정신 병동이라는 전제적이고 강압적인 시스템 하에서 인간이 추구해야할 가치와 어떻게 하면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개인의 자유를 시스템으로 통제하려는 것에 대한 저항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먼저 사회적 병을 병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빈축[퍼농유]

3. 빈축(嚬蹙)

 

흥분하지 말자, 혐오는 온당하다. 어떤 경우 정당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대학>에는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미워하듯이 하고 선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이 한다.”(如惡惡臭, 如好好色)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자신의 감정을 기만하지 않는 진정성(誠)의 문제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비유적으로 하는 말인 듯하지만 결코 비유가 아니다.

누구나 부당하거나 불공정한 처사에 분노를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불공정을 대하는 이 사회적 감정은 공정성을 요구하는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정의감이다. 과연 인간만의 독특한 감정일까? 진화생물학자들은 당연히 이점을 확인하려고 실험을 했다. 장대익의 <울트라소셜>에는 원숭이에게 행한 실험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결론만 말하자. 원숭이는 자신이 부당하게 대우를 받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다른 원숭이의 부당한 대우에는 무관심하다. 인간은 상대를 배려할 줄 안다. 다른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을 때 내가 불편하더라도 불공정의 문제를 해결할 줄 안다. 그러므로 자신만의 불공정만이 아니라 부당하고 불공정한 대우와 처사 자체에 분노할 줄 아는 것이 인간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우리 몸이라는 생물학적 차원에 어떻게 각인되었는지를 묻고 있다. 또 결론만 말하자. 혐오는 공정성이라는 도덕과 관련된다. 근본적으로 혐오는 음식 맛이 나쁠 때, 오염된 것을 접했을 때 나오는 거부반응과 관련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맛이 나쁘고 오염된 음식에는 악취가 난다. 악취나 오염된 음식과 관련된 혐오는 동물의 생리 반응이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혐오는 오럴(oral, 입)에서부터 모럴(moral, 도덕)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또 하나 지적하는 것은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얼굴 표정이 미각 혐오에서 일어나는 얼굴 표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안와하근(眼窩下筋)의 반응과 관련된다. 안와하근은 상한 음식을 먹고 나서 윗입술을 들어 올려 코에 주름이 잡히는 표정을 지을 때 사용되는 얼굴 근육이라 한다. 코를 찡그리는 표정이다.

 

Damien hirst

 

흔히 정의를 뜻하는 의(義)를 수오지심(羞惡之心)과 관련해서 말했던 인물은 맹자다. 수오지심이란 부끄러워하고 혐오하는 마음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제선왕에게 맹자는 제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다.

모든 백성과 함께 그 음악을 즐긴다면, 즉 여민동락(與民同樂)하면 잘 다스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 왕이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들으면 골치아파하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왕이 음악을 좋아하시나 어찌하여 우리를 이런 곤궁에 빠지게 하는가라고 한탄을 할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이맛살을 찌푸린다’고 번역한 말은 ‘축알(蹙頞)’이다. ‘알(頞)’을 흔히 이마로 해석하는데 콧잔등의 뜻이 있다. 맥락적으로 정확히 빈축(嚬蹙)이라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빈축은 얼굴 정확히는 콧잔등을 찡그린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비난이나 미움을 이르는 말이다.

어느 부위를 주로 묘사하는가의 차이가 있지 맹자의 ‘축알’과 빈축과 안와하근을 가지고 설명하는 혐오와 모두 동일한 얼굴 표정임에 틀림없다. 빈축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비난이나 미움만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부당한 일과 불공정한 처사에 대한 혐오와 관련된다.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혐오다.

맹자가 말하는 빈축의 도덕은 정치적인 부당함에 대한 혐오이며 동시에 악취를 싫어하는 동물의 생리 반응과 관련된다. 빈축은 오럴에서 모럴로 발전된 진화생물학적 근거를 가진 인간의 독특한 현상이다. 빈축의 혐오는 정당하면서 자연스럽다. 악취는 비단 음식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다. 언어와 행위와 마음과 어떤 암시에서조차도 악취는 난다. 악취를 미워하는 인간의 생물학적 취향은 진화된 결과로서 공정성에 대한 도덕적 근거다. 빈축 사는 일을 혐오하는 일은 그래서 온당하다.

 

그나 저나 이 더운 밤 취두부 한 사발이라도 …….

 

 

그럴 리가?[퍼농유]

2. 그럴 리가?

단적으로 말해보자. 나는 대통령이 될 리가 있을까 없을까? 왜들 그러시는가? 있다.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그럴 리가 논리적으로는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을 죽일 리가 있을까 없을까? 또 왜들 그러시는가? 당연히 있다. 당신이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먼저 밝히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문장은 비문이 아니다. 문법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란 말이다. 모두 그럴 리가 있냐는 문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말들은 모두 한글의 문법구조에 타당하다. 여기서 그럴 리라는 말은 분명 리(理)라는 전통적 철학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고 확신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세계관의 언어적 토대이다.

그러므로 다시 질문해 보자. 지금 앉아 있는 그 건물이 무너질 리가 있을까 없을까? 외적인 충격을 전혀 가하지 않았는데도 무너질 리가 있을까, 없을까? 없을까?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 건물 안에 앉아있는 것이겠지만 논리적으로 보자면 건물이 외적 충격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천만년 후에는 무너질 리가 분명히 있다. 그렇지 않은가? 천만년 후에 외적 충격이 없이도 무너져 내리는 건물의 붕괴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 천만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떤 인연과 세력, 즉 가깝거나 혹은 먼 원인과 조건들이 만나고 충돌하고 배열되고 누적되고 형성되어 다른 질적 상태로 전환되는 순간을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 그 과정을 통하여 그럴 리라는 잠재성의 세력이 현실에 드러나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물결이 둑의 틈새를 견디다가 어느 순간 툭 터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럴 리는 틈새로부터 나온다. 그럴 리가 어떤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터진다. 왕필의 문인인 동진(東晉) 시대 한강백(韓康伯)은 <주역>에 나온 기(幾)라는 말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幾)란 균열이다. 틈새이며 기미이며 낌새이며 기회이며 위기이기도 하다.

틈새란 무에서 유로 진입하는 순간이다. 이 틈새의 때는 이치가 작동하고 있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때이다.(幾者, 去無入有, 理而無形)

결국, 이런 일상적 용법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럴 ‘리’라고 했을 때의 리(理)는 객관적 사물의 원리로서 이치나 외부적으로 강제되는 도덕적 당위로서 도리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 감추어진 잠재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세력의 조건들과 접촉하고 충돌하여 어떤 현실을 축적해나가는 과정이 숨겨져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현실에 어떤 균열을 일으킨다. 이 균열은 예측하지 못하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거기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다. 언어가 우리의 세계관을 규정한다면 그럴 리라는 말은 어쩌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에서 악당 이아고가 오셀로에게 흉계를 꾸미기 전에 “시간의 자궁 속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어. 잉태한 것은 달이 차면 나오게 마련이거든.”이라고 말했을 때, 정확히 잉태한 것은 바로 그럴 리를 말한다. 이 그럴 리가 시간의 자궁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현실화시킨다. 그러므로 그럴 리가 있는 균열과 틈새와 낌새를 느꼈다면 어서 조심스럽게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시간의 자궁 속에서 어떤 사건이 잉태될지 모르므로.

 

 

 

 

정치에서 시가 태어나는 순간들 : 예술은 정치적이다 [최종덕의 책과 리뷰] -15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필자의 홈페이지(http://eyeofphilosophy.net)

 

정치에서 시가 태어나는 순간들 : 예술은 정치적이다

 

오늘의 서평 책 :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 문학의 아토포스 더 비기닝: 정치가 생기기 전

 

저 머나먼 은하의 한 별에서 외계인을 만났는데, 사람은 아니지만 나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면 나는 어떤 생각이 들까? 발화행위로 통하지 않는 두 존재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맺어질까? 공존 아니면 경쟁의 관계가 형성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추측이 (i)가장 자연스럽고 (ii)가장 그럴듯하며 (iii)공존과 경쟁 범주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하기 쉽지 않다는 뜻에서 가장 효율적이다.

 

거주자와 외부인이 공존한다고 가정해보자. 공존의 경우도 여러 가지로 가능할 수 있다. (i)두 존재가 원래 싸움에 관심이 없어서 상대방을 그냥 내버려 두거나, 아니면 (ii)서로 힘의 차이가 너무 커 아예 싸움이 되지 않고 힘센 자가 약한 자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는 경우이다. 첫째 경우는 원래 싸움에 관심이 없다면 그 생명종은 이미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어떤 존재이든지 현재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모종의 노력이 있어 왔고, 모종의 노력은 상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과 같은 후손을 복제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존의 첫째 경우는 논리적으로만 가능하고 자연적이지 않다면 실제로 실재할 수 없다. 공존의 둘째 경우는 현실적이며 증거도 충분하다. 영장류 연구자 드발의 관찰보고에 따르면 히말라야 원숭이는 엄격한 서열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새끼는 우두머리에게 감히 엉길 수 있다. 힘의 차이가 뚜렷한 일 년 미만의 어린 새끼에게만 관용을 베푼다. 다 자라난 새끼가 엉기는 것을 대장이 용서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침팬지는 4살까지 봐주고, 인간은 더 오래간다.(드발 2014, 244)

 

1949년 중국은 ‘하나의 중국’(只有一個中國)  정책을 표방하면서 소수민족을 흡수한다. 중국정부가 인정한 55개 소수민족은 인구구성 비율로 약 8.5%이지만(2010년) 전인대 대표자 비율로는 14%나 된다.(제11기 전인대 2,987명 중) 중국은 힘에서 격차가 큰 소수민족과는 공존하지만 티벳이나 최근의 위구르처럼 중앙세력에 도전하는 소수민족에게는 가혹할 정도의 폭력으로 강제 공존정책을 시행한다. 할 만한 상대와만 공존하고 소통한다는 뜻이다.(진은영, 10장)

 

두 존재유형이 경쟁하는 경우는 거주자가 외부인을 쫒아 내거나 지배하는 경우 혹은 침입자로서 외부인이 거주자를 몰아내고 지배하는 경우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너무도 분명하다. 그런데 이 경우라도 상황을 이해하는 주변조건이 있다. 외부인이 거주자보다 힘이 월등하게 크더라도 새로운 거주 환경에 익숙하지 못하면 외부인은 적응에 실패할 것이다. 혹은 거꾸로 외부인에게만 맞는 면역 조건을 새로운 거주지에 심어 놓으면 기존 거주자가 소멸하는 경우도 있다. 책 『총.균.쇠』에서 1532년 스페인 피사로의 인구 168명이 1,000만 명 인구의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은 유럽엔 있었고 아메리카 땅에는 없었던 장티푸스와 천연두였다.

 

관점을 외계가 아닌 지구로 돌려 외계인과 지구인이 조우하던 기분 그대로 4만 년 전을 보자. 우리 조상과 가장 가까웠던 근연종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언스와 유럽 땅에서 4만 년 전 쯤에(여러 가설 중 가장 강력한 이론) 처음으로 조우했다. 당시는 빙하기였기 때문에 그들은 동굴에 살았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언스보다 키도 크고 뇌의 크기도 더 컸다. 외부인이었던 사피언스는 살아남고 추위에 이미 적응했던 기존 거주자인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다. 멸종 이유에 대한 수많은 가설이 있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i)그들 사이에서 공존과 경쟁이 같이 있었고, (ii)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사피언스 모두 석기 시대의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혁명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벽화를 그렸고, 백조의 뼈에 구멍을 낸 피리를 불었다.(미슨, 15장)

 

그들 사이의 차이를 주목하자. 네안데르탈인과 다르게 호모사피언스는 ‘먹는 입’보다 ‘말하는 입’(진은영, 302)이 더 발달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네안데르탈인이 멸절되었다는 해석이 다수 있다. 우리는 먹어야 살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도 그랬다. 그러나 먹는 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오로지 경쟁만이 있고 공존은 불가능하다. 공존은 먹고사는 조건이 평등해지거나 아니면 아예 차이가 크다는 것을 내가 인식해야 하고 또한 상대방도 알아차려야 한다. 나도 알고 상대도 아는 그런 것은 언어행위로 가능하며 언어행위는 ‘말하는 입’을 필요로 한다. 상호인식이 공존가능성의 원형이다. 공존은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진은영도 먹는 입이 아니라 말하는 입이 소통의 조건이라고 했다.(진은영, 10장)

 

고대인도 동굴벽에 그림을 그렸다. 우리 조상은 그들의 사냥감과 사냥방식을 그림으로 그려 후손에게 남기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있다. 그들이 우리이다. 그들은 공간적 소통보다 시간적 소통이 더 필요했다. 3만 년에서 1만 년 전 벽화가 있는 라스코 동굴에는 들소, 사슴, 멧돼지, 염소가 그려져 있다. 그런 동물들은 그들의 입을 채워 줄 객체이다. 그런데 먹는 입의 주체 즉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라스코 벽화 700점 중에서 아래 벽화에만 유일하게 먹는 입의 주체로 사람이 등장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만 년 전 즈음에는 동물 외에도 사람의 모습이 다른 동굴에서 벽화로 등장한다. 먹는 입을 가진 사람들은 벽에 손을 찍는 음화(스텐실) 방식으로 그렸다. 이때부터 이미 먹는 입에서 말하는 입으로 바뀌는 조상의 소통노력을 엿볼 수 있다.

                                                        (라스코, 1만8천 년 전 추정)                                           (라스코, 2만7천 년 전 추정)

 

먹는 입은 들소를 기억하기 위한 정보로서 들소를 그렸다. 말하는 입은 들소에 의미를 입혀서 상징적인 들소를 그렸다. 대상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종교적 의미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라고 문화인류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런 행위는 예술의 시작이었다. 3만 년 전 조상은 사냥법의 개선을 위해 들소의 움직임과 계절에 따른 무리 이동 등을 세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 관찰결과를 ‘기록’하는 벽화를 남겼다. 들소를 관찰한 정보를 보존하는 것이 벽화를 그리는 목적이다. 동굴의 어둠 끝 차가운 벽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동굴 속 가족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돌가루를 미리 물에 개놓아야 하고 동물기름을 모아 횃불을 밝혀야 하는 공동작업이 필요하다. 차가운 돌 표면에 그림을 그리면서 벽은 따듯해지고 가족들도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벽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구체적 정치행위였다. 정치행위이면서 동시에 예술행위였다. 벽화는 사냥감을 기록하는 매체이며 동시에 서로 알 만한 사람들 사이의 감정을 공유하는 매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감정공유의 고대인의 행위는  곧 예술의 원형이며 예술의 시작이었다. 문학, 그림, 음악처럼 모든 예술은 현실의 삶을 투사하는 행위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이렇게 긴 설명을 했다. 나는 이를 예술의 아토포스의 시작점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이런 행위가 정치의 원형이라고 서평자는 이해했다.

 

2. 더 비기닝: 정치가 생기면서

 

시간은 흘러갔고 소빙하기가 끝나가면서 추위가 좀 풀렸고, 우리 조상들은 동굴에서 대지로, 숲에서 들로 서서히 나왔다. 들밀(밀)과 피(벼)의 알곡을 남겼다가 그 다음 해 땅에 뿌려 더 많은 알곡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단한 기술혁명이었다. 마침내 위험하고 불안정한 수렵행위보다는 좀 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씨족 구성원들이 이리저리 이동하지 않고 가족이 한 곳에 정착하여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씨족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는 대략 8천 년 전 일이다. 이후 사람들은 공동체 생활에 익숙해졌고 더 큰 부족이 형성되면서 부족 집단 간 갈등이 생겨났다. 사람들 간에 배반과 협동으로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부터 권력과 정치는 동의어가 되었다. 벽화를 그리던 3만 년 전 조상들의 감정공유의 정치 대신 권력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문자가 만들어졌고, 문자 기록은 정치인들의 비밀스런 권력이 되었다. 소수의 권력집단 외에 허락 없이 기록을 소유한 자는 즉시 처벌되었고, 들소가 가는 길, 산속의 호수, 사막 건너 오아시스, 검은 숲속의 통로를 그린 지도나 이야기는 신비화되었다. 뭇사람들이 넘볼 수 없도록 한 기록의 비전은 권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그 사이 철학과 과학이 등장했다. 탈레스로부터 플라톤에 이어지면서 신화는 이성으로 변신하고 교회의 도그마로 위장했다. 이성은 보편적 사유에서 시작되었고, 소 열 마리와 염소 스무 마리를 가진 부족이 10+20=30 이라는 보편적 수학을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보편적 생각, 그 자체도 여전히 비밀스런 기록으로 여겨졌다.

 

화산의 마그마와 지진은 지구가 분노한 것으로, 일식과 월식으로 드러난 해와 달의 운행, 인간에 대한 보복으로 생긴 홍수와 가뭄 등을 해결해줄 수 있는 권력자에 대한 충성심은 권력자에 의해 시로 쓰여 졌고 그림으로 그려졌다. 시와 그림은 이제 들소와 주변의 사람들, 강의 흐름과 강에 비춰진 달의 감정을 공유하는 정치적 행위를 벗어나서 시와 그림 스스로 감정의 주체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람이 만든 예술에 주체를 빼앗겼다. 나로부터 주체를 빼앗아간 예술은 저 혼자 감정을 향유하고 저 혼자 호흡한다. 창window조차 없어서 저 혼자만의 모나드를 자위하고 있다. 후대 사람들은 이런 예술을 자율성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런 예술은 세상을 기록하지 않으며 빼앗아간 주체 자체를 현현할 뿐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그런 현현성은 권력의 수단으로만 이용될 뿐이다. 자율성의 의미를 이렇게 보면 자율성의 예술과 참여성의 예술은 서로 대화가 불가능한 배중율의 관계일 뿐이다. 그러나 진은영은 자율성을 폭넓게 조율한다.

 

3. 감성적 자율성

 

진은영은 예술의 자율성을 독특하게 설명한다. “예술적 자율성이란 정치와 무관한 영역에서 예술이 제 스스로의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배치의 가능성을 포착하여 기계적 인과법칙 속에서 실현된 일들에 또 다른 원인을 부과하는 것이다. 예술은 기계적 인과사태로부터 벗어나면서 자신의 자율성을 확보한다”(진은영 261) 처음에 나는 이 말을 잘 이해 못했다. 꼬이고 꼬이는 사태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지만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것이 자율성인지, 아니면 진짜 자율성이란 이렇게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인지 나는 잘 이해 못했었다. 하지만 그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서 진은영은 자율성이라는 이름의 호젓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지성의 배치를 위반하는 흐름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진은영 262) 이 책의 1장에서 말한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랑시에르와 진은영이 262쪽에서 말한 자율성이란 ‘자율성 2.0’ 버전으로 참여성과 결합한 자율성, 이분법에서 탈피한 자율성을 말한다. 진은영이 강조하고 중시한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의 의미를 그의 책에서 따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감성적 자율성이란 (i) 현실에서 분리된 언어의 자기목적주의autotelism의 신성화를 거부하며, (ii) 예술의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을 거부하고, (iii) 황금새장을 탈출하여 세상을 다시 구성하는 특이성을 추구하며(감성적 자율성의 특징), (iv) 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이지만 (v)그렇다고 해서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현실정치 참여에 제한될 필요가 없으며, (vi) 그런 활동의 내적 동력으로 작용하는 그런 감성분배의 태도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정치적이다”라고 진은영은 확실히 말한다.

 

진은영은 문학이 삶과 결합된 정치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문제된 사태에 대해 명확한 내러티브나 선명한 메시지의 직접적 표현에 제한될 필요가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30-35) 직접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현은 자칫 선전구호로 되거나 관습적 규칙에 헌신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정치의 의도적 윤리화를 비판한 글을 진은영의 책에서 읽어보면 아래와 같다. “윤리의 지배는 예술의 활동이나 정치의 활동에 가해지는 도덕적 판단의 지배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구분되지 않는 영역의 구성을 의미한다. 윤리는 규범이 사실 속에서 해체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윤리는 체류의 행위이며, 이미 가정된 관습적 규칙에 복종하고 안주하는 행동원리이다.(진은영 101)

 

진은영은 한국에서 문학의 정치적 논쟁점을 아주 쉽게 정리해 주었다. 하나는 참여의 문학이며 다른 하나는 자율의 문학이라고 했다. 참여성은 “정치적으로 엄중한 시기임을 강조하여 민족. 민중 문학적 이슈들을 특정한 스타일로 형상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율성은 “시인과 시민의 입장을 구분해서 시민으로서 정치적 자유공간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시인으로서는 비정치적이고 자율적 형식실험에 몰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진은영 267)

 

4.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은 폐쇄적 자율성과 다르다

 

자율성의 태도는 “자율적인 그날이 오기까지” 한번 기다려 보자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유토피아의 허구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런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상실한 것을 오지 않을 미래에 찾아가라는 주문과 같다. 신과 내세의 유토피아도 그렇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박정희에 대한 환상은 권력자들이 뿌린 마약에 취한 집단적 병증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병증이 바로 정치적 색깔론과 경제적 낙수효과에 기인한다. 이 두 가지 마약의 중독성이 우리 한국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

 

‘밝은 미래를 위해 지금은 좀 힘들어도 참고 열심히 일해보자“의 허구는 유토피아 사유구조의 허구를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70년대 평화시장 봉재 노동자들은 절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단지 권력자들이 시민을 부려먹기 위한 도구적 언어일 뿐이었다. 정권과 삼성과 같은 재벌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춤췄던 봉재공장 사장님들은 그런 말을 열심히 외쳐댔다. 그러나 밝은 미래가 정말, 다시 한번 정말 온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재벌과 독재 권력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밝은 진짜 미래가 오지 않도록 악랄한 조치를 해놓았다. 그러한 불행한 역사의 현장이 지금 작동되고 있다. 정권이 조금이나마 바뀌었지만 여전히 지금 우리 사회에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을 올린다고 하니 영세업이 망한다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대놓고 한다. 핵발전을 중지하다고 하니 지역경제 때문에 핵발전 중지를 반대한다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드러난다. 역사적 적폐청산을 대놓고 거부하는 과거의 권력집단들이 갖은 변명과 저지를 시도하고 있다.

 

유토피아 조작자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권력집단의 조작은 대중에게 유토피아의 꿈에서 깨지 못하도록 중독성 믿음을 갖게 한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하자면, 신은 전지전능하여 모든 지식을 갖고 있지만, 신을 믿는 대중은 지식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고 오로지 믿음만을 갖도록 강요될 뿐이라는 논리와 같다. 권력자는 그들만의 기록을 갖지만, 대중에게는 기록 대신 믿음의 환상만을 제공한다. 랑시에르도 감정의 분할, 감각의 분배를 믿음에만 기초해서는 안 된다고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있다. 누구 좋으라는 믿음인가? 이렇게 유토피아는 종교와 만나 사람들의 감각을 더 마비시켜 놓았다. 감각의 분배는 너의 감각, 나의 감각을 먼저 유연하게 연습해 놔야 한다. 현실에 순응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감각의 마비와 경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진은영은 이 시대 너머 미래를 준비하는 감각의 유연성 연습을 권유한다. 진은영의 책, 결론에서 말한 “미래의 불가능성이 가능한 존재로 변모하는 순간”을 나는 이렇게 감각의 유연성 연습을 한다는 순간으로 이해했다. 진은영이 더 이야기해 줄 것이다.

 

5. 감각분배의 정치

 

세상과의 구체적인 접촉이었던 주술과 샤머니즘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추상화되었고, 추상적 신의 존재가 구체적 현실을 지배했다. 나는 신석기 시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은영의 말대로 부족의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조에zoe에서 비오스bios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상적 관념론과 종교적 도그마가 결합하면서 비오스는 오히려 그들만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그래서 겉은 비오스이지만 내용으로는 조에로 퇴락했다. 그것이 오늘의 정치이다. 그런 정치를 진은영은 ‘치안’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들만의 경영’their own managenment라고 하고 싶다. 치안과 그들만의 경영 상태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소통을 위해서는 주체들 사이의 사적 이해와 편견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했고, 그래서 조에가 아닌 비오스 영역에서만 소통이 가능하다고 진은영은 말한다.(275) ‘먹는 입’의 조에는 생명이 시작하던 10억 년 전의 원핵세포에서나 다세포생명을 거쳐 척추동물로 넘어서 늑대와 국화를 거쳐 오늘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하게 작동한다. 이런 점에서 조에의 작동은 초시간적이다. ‘먹는 입’에서 ‘말하는 입’이 추가되면서 우리는 역사의 변화와 시대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비오스로 향한 혁명이다. 이런 지평선에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렌트의 입장이라고 진은영은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275) 물론 진은영은 이런 정치적 비오스가 경제적 조에로, 권력독점의 조에로, 사적이익의 조에로 위장되고 포장되는 현실의 아픔을 지적했다. 그래서 진은영은 치안의 정치에서 벗어나 감각분배의 정치를 말했다.

 

내가 보기에 진은영의 감각분배의 정치는 마치 와이파이나 블루투스와 같은 무선통신과 비슷해 보인다. 와이파이나 블루투스 혹은 위성통신은 정보를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도 무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문학도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감각을 무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독재권력이나 경찰치안은 사람을 잡아두거나 말로 위협하거나 더 먼 땅으로 못 가게 경계를 긋는다. 그러나 문학은 그런 경계를 해체하고 넘어선다. 그래서 권력집단도 예술을 무서워했다. 감각은 감정의 열기emotion’s fever를 지닌다. 권력집단 특히 독재권력은 감각온도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 예술은 감정의 열기까지 무선통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무선인터넷이 깔리지 않은 곳이 있듯이, 수많은 다른 언어의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문자의 예술이나 그렇지 음악이나 미술은 그런 한계에 구속되지도 않는다.

서평자는 인류학자 회벨E. A. Hoebel이 동 그린랜드Eastern Greenland 에스키모 부족에서 1908년 채집하고 기록한 노래를 인용하려 한다. 한 부족에서 두 남자가 한 여인을 두고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몸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통해 그들의 싸움을 대신한다. 그 부족에서는 살인사건을 제외한 모든 갈등관계를 노래로 처리한다고 한다. 노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남자 B가 그의 부인을 학대하고 나중에는 그 부인을 버렸다. 다른 남자 A가 그 나이 든 여인을 데리고 와서 다시 결혼하여 사랑의 마음으로 같이 살았다. 그러나 남자 B는 시기심에 남자 A에게 그 여자를 다시 내놓으라고 싸움을 걸었다. 노래로 말이다. 부족장이나 그들의 법률에 갈등해소 혹은 치안을 맡기지 않고 그들 사이의 감정을 교환하여 스스로 해결하는 감각분배의 사례인 것 같아서 그 노래 가사를 재인용해 보았다.

6. 진은영의 소통의 시학

 

진은영은 랑시에르를 소개하면서 랑시에르를 넘어서 있다. 진은영은 이 책 마지막 장에서 말하는 소통의 인문학에서 “정치적 주체화”를 강조하면서 책을 마무리하였다. 소통의 인문학을 잘 건축하기 위해 “소통의 과학”과 “소통의 시학”을 구분하는 진은영의 방식을 따른다면(진은영 298) 진은영은 <소통의 시학> 차원에서 책을 썼지만, 나는 <소통의 과학> 차원에서 서평을 썼다.

 

진은영은 소통의 시학에서 “철학자의 아름다운 거짓말”을 말하면서 거짓말의 현실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진은영 297) 나는 이런 그의 말을 ‘세상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시선으로 그려야만 멀리 그리고 오래 감각을 분배할 수 있다’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이고 싶다. 맞는지 모르겠다. 신비화를 경계하고, 이상주의를 비판하고, 현실을 차갑게 진단하는 사회과학적 지식의 의미를 갖는 “소통의 과학”에서 더 나아가 진은영은 “미래의 불가능성이 가능한 존재로 변모하는 순간”을 그려내고, “불가능한 동일시를 통한 정치적 주체화”를 시도하는 “소통의 시학”에 시선을 뿌리고 있다.

 

이 서평의 제목을 나는 “정치에서 시가 태어나는 순간들 : 예술은 정치적이다”라고 했다. 이는 진은영의 “정치적 주체화”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노룩패스, 레밍, 갑질, 밥하는 동네아줌마, 각목과 추행의 언어가 횡행하는 사회, 소통단절 권력이 여전한 사회에서 우리는 정치적 감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느꼈다. 다시 말해서 대중의 감각을 무시하는 감각독재, 소통을 두려워하는 공감부재의 권력과 그 적폐를 i) 강하게 저항하고 ii) 냉정하게 청산해야만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온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다.

 

<진은영의 『문학의 아토포스』 서평을 위한 참고문헌>

 

진은영 2012, 『훔쳐가는 노래』, 창비

진은영 2009,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웅진주니어

드발  2014. 『착한 인류』, 오준호 옮김, 미지북스

S. 미슨  2008.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김명주 옮김, 뿌리와 이파리 외

최종덕  2016, 『비판적 생명철학』, 당대

방심[퍼농유]

우쑵니다.
너무도 오랫만이라 쑥스러움을 넘어서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낯섭니다. 죄송합니다. 먹고 사느냐 나름 힘겹게 생활했습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방학이라 이렇게 한숨돌리며 세월에 지치고 더위에 지친 몸 건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예능프로그램처럼 시즌 투가 되어버렸습니다.

요즘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모대학 모 전공 모 교수가 우리말로 철학하기라는 걸 시도한 적이 있었죠. 송구스럽지만 웃었습니다. 의도는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실 내용을 들여다보니, 국어순화운동 차원이더군요. 이화여자대학을 배꽃계집애큰배움터 정도로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순수 우리말로 철학하자는 것이었죠. 우리말로 철학한다는 것은 순수한 한글을 고집하면서 철학한다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내용의 차원을 어떻게 분석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를 생각했습죠.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과 그 말들의 맥락과 그 말들의 효과들이 어떻게 작용하고 기능하는지를 분석해하지 않을까요. 그 사유의 이면에 깔린 구조와 양태를 언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 같은 것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또한 단지 분석철학에서 말하는 일상언어의 메타적 분석하고는 다른 차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단어들이 족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의식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도 그가 사용하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에 희랍어를 분석하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던가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대부분은 한자문화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송명 성리학과 선진 철학이 그러합니다. 일본 학자들이 서양학문을 수용하면서 많은 번역어 조어를 만들어내었고 또 그것을 우리가 상당부분 사용하고 있지만 그들도 기본적으로 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이 어떤 족보를 가지고 있는가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의미 맥락과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전환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어원적 차원에서 분명한 족보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하나마 관심과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총총 건승하시길…..

1. 방심(放心)

모든 방치된 것은 썩는다. 어쩌면 이 명제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만큼이나 예외가 없다. 방치에는 무관심과 무책임이 묻어있다. 화초에 물과 공기가 부족하면 썩게 되듯이 어떤 것이든 관심과 책임이 부족할 때 썩는다. 타인의 관심과 애정과 책임과 인정이 철수되었을 때 남는 것은 무기력하게 메마른 황무지일 뿐이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메말라 강퍅하다.
인간의 근본적 욕망은 다시 정의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흔히들 근본적 욕망을 식색(食色)과 관련된 생리적 욕구라고 본다. 대표적으로 매슬로(maslow)는 인간의 욕구에 위계가 있다고 하여 욕구 피라미드를 가정했다.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로부터 시작하여 안전의 욕구, 사회적 욕구, 존경의 욕구, 마지만 자아 실현의 욕구로 구분했다.
장대익의 <울트라소셜>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진화생물학에 의하면 이런 욕구의 위계는 뒤집어져야만 한다. 논리는 이렇다. 어린 아기에게 이런 욕구의 위계를 적용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린 아이에게는 먼저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당연하다. 먹을 것이 필요하고 따뜻한 품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욕구를 충족시킬 대상은 음식, 집, 물 등이 아니다. 아이에게는 이런 대상이 아무 쓸모가 없다. 어린 아이는 이것을 직접 욕망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이런 대상을 가져다줄 ‘사람’이다. 사회적 연결망이 없으면 아기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기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미숙아로 태어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약함과 취약함과 미숙함이 최초로 이 세상에 나온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이다.
그럴 때 가장 근본적 욕망은 생리적 욕구가 아니라 사회적 욕구이다. 이는 진화가 만든 결과이다. 사회적 욕구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보다 상위에 있는 욕구가 아니다. 오히려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를 사회적 방식으로 충족시켜 주기 위한 근본적 욕구”이다. 인간은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다양한 자원을 사회적 자산, 즉 부모, 친지, 친구, 동료 등과의 관계를 통해 획득하는 전략을 취해왔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매슬로의 욕구 피라미드는 뒤집어져야 한다.
맹자는 이런 말을 한다. “인(仁)은 사람의 본래 마음이고, 의(義)는 본래 마음을 실현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며, 그 마음을 방치하고 찾을 줄을 모르니 애처롭다. 사람이 닭과 개가 도망가면 찾을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방치하고서도 찾을 줄을 알지 못한다.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그 방치된 마음(放心)을 찾는 것일 뿐이다.”(仁, 人心也, 義, 人路也. 舍其路而不由, 放其心而不知求, 哀哉! 人有鷄犬放, 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 學問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
인의(仁義)란 사회적 욕구이다. 방심은 긴장이 풀려 마음을 다잡지 않고 놓아 버린 상태이다. 부주의하고 조심성이 없는 상태이기도 하다. 맹자에게서 방심은 방치된 사회적 마음이다. 적당한 물과 공기로 길러지지 못해 썩어가는 사회적 욕구이기도 하다. 본심의 상실이기도 하다. 맹자에게서 방심은 정확히 본심에 주의하지 못한 부주의이고 본심을 상실하여 조심성이 없는 것이다.
만약 이 사회적 욕구를 방치한 채로 살아간다면 맹자에 의하면 그것만큼 애처로운 일은 없다. 이 애처로움을 깨우치는 것이 학문의 요체이다. 학문이란 구방심(求放心)이다. 도망간 닭과 개를 찾는 것과 같이 방심(放心)을 구하는 일이다. 방심이란 잃어버린 마음이고 방치된 마음이다. 학문은 단지 이 사회적 욕구인 인의(仁義)의 마음이 방치된 채로 썩지 않지 않게 하는 일이다. 그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얀-사우데크(Jan-Saudek)

국민을 협박하는 삼성의 정치자본 [최종덕의 책과 리뷰] -14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국민을 협박하는 삼성의 정치자본

 

오늘의 서평 책 :  이종보, 삼성독재, 빨간소금, 2017.

 

 

 

독재정권과의 동맹이 삼성재벌의 핵심이라는 점은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혹은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누구나 대충은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오늘날까지 존속한 이유는 재벌기업이 국가경제를 살려줄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강력한 기대감에 의해 지지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기대감이 지난 정권의 역사를 통해서 기만적으로 조작되고 가공된 허상이었음을 어느 책 한 권을 읽고 깨닫게 되었다. 그 책은 최근에 나온 <삼성독재>(이종보 씀, 빨간소금출판사, 2017)라는 책이다

 

이 책 초반부에서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도 그러했지만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절대적 비호 아래 성장한 삼성의 매판자본 형성과정이 잘 그려지고 있다.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 삼성의 자본독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미국 원조물자 배분과정을 포함한 거의 모든 상거래에서 삼성은 특혜를 받아왔다는 과거사를 주목해야 한다.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부터 박근혜 빙의정권에 이르기까지 삼성은 탈법, 세습, 불법, 유착, 매판, 독점, 축재, 착취의 범례라 할만한 일들을 수행해 왔다. 요약해서 말하면 부정축재와 매판자본 그리고 독점자본이 삼성의 키워드라는 것을 이 책은 선명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1939년 2백만 평의 땅장사를 시작으로 한 지난 80여 년을 거치면서 일상화된 삼성의 자본권력이 우리의 마음까지를 빼앗아 갔는지를 되돌아 봐야 한다. 이 책은 우리 자신도 혹시 삼성바이러스에 면역되었는지를 반성하게 한다. 저자 이종보는 말한다. “우리는 삼성에 감염되었다” 그리고 “삼성은 우리 사회의 욕망을 표현하는 위대한 신이 되었다”.(9쪽) 이러한 삼성의 막강한 지배력이 산업기술과 통상 기반 경제 영역만이 아니라 일상성의 문화와 지식을 포함한 정치 영역까지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저자는 이런 삼성의 속살을 “정치적 자본가”로 표현하고 있다.(20쪽) 한국에서 피어오른 “정치적 자본가”로서 삼성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 i) 가족지배 ii) 개발독재 iii) 문어발식 종합상사 iv) 정경유착이다.

 

이 책은 삼성의 이런 모습들 가운데 정경유착의 역사를 상세히 설명한다. 그 역사는 땅장사를 시작하던 삼성 상회(1938년)의 일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땅장사는 땅을 구입할 큰 돈을 필요로 한다. 이병철은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돈으로 2백만 평의 대지주가 된다. 삼성의 출발부터가 매판자본의 시작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잘 알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일제와 미국의 상속자인 이승만의 강건한 방호벽에 힘입어 삼성의 세력은 전국화 되었다.

삼성상회 – 사진출처 : Wikimedia Commons

 

이승만의 권유로 삼성물산공사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서울로 진출한 삼성은 일제 적산과 미국의 원조물자를 기반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쌓게 되었다. 설탕과 밀가루 그리고 모직 사업으로 50-60년대 이미 한국의 자본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1956년에 이르기까지 한일은행, 조흥은행, 상업은행을 인수하면서 삼성과 정치권력이 한 몸통이 된 경과를  이 책은 아주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1959년 이승만 자유당 내각 명단을 이병철이 작성하여 당시 이승만 다음의 정치권력 2인자였던 이기붕에게 전달했다는 이 책의 내용은 정말 충격적이다.

 

419 혁명과 함께 이승만 정권은 붕괴되었지만 삼성이 살아남게된 경위를 이 책은 소상히 기술했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삼성은 무한한 것인가. 정말 삼성은 위대한 신이었나 보다. 419 혁명은 정치혁명일 뿐 사회경제혁명이 아니기 때문에 삼성은 죽을 수 없다는 기묘한 논리를 삼성은 조작해 내었다. 곧 이어 이뤄진 삼성과 박정희 정권과의 동맹은 한국 근대인의 흉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1963년 박정희는 재벌 폭리의 상당 금액인 50억 원을 상납 받았다고 이 책은 폭로한다. 그 금액은 당시 정부 예산의 1/15 수준이었다고 하니 오늘의 가치로 따진다면 27조원에 해당한다. 박정희가 갈취하고 또한 재벌이 알아서 기면서 상납한 바로 그 돈이 오늘의 박근혜-최순실 농단의 지하수장고였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니 더더욱 몸서리가 처진다.

 

1966년 삼성과 박정희가 공모했던 대규모 밀수사건은 정말 대단한 국가회롱의 사태였다. 그러나 박정희와 삼성의 결탁권력은 이런 사실까지도 잠잠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한국에서는 삼성보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경주 최 부자가 설립한 대구대학을 삼성이 인수하고, 삼성은 이를 박정희에게 헌납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박근혜의 이름으로 존속하는 영남대학교가 그것이다. 책을 읽다보니 이런 어마어마한 사태들이 한 두 건이 아니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박정희는 역사의 심판을 받고 죽었지만, 삼성은 역시 불사의 존재였다. 삼성과 전두환과의 밀월은 더 가관이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산업경제 전반에서부터 국방산업에까지 미쳤던 그들의 정경유착은 방송매체와 스포츠산업을 포함한 문화산업 전반에 뻗쳤다. 그런 문화 공략전술이 오늘의 정유라를 낳은 것이다. 군부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에도 삼성은 건재했다. 오히려 삼성의 권력은 ‘글로벌’이라는 미명으로 정당화되고, 과거처럼 독재정권의 눈치조차도 볼 필요 없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독주가 정착되었다. 이건희의 개인 우상화는 극에 달했는데, 이 책은 그런 우상화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부분을 정말 재미나게 읽었다. 책으로 읽기에는 재미났지만,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불행했던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사진 출처 : vimeo.com

 

문민정부에서 삼성은 과거 독재정권과 다르게 오히려 정부와 정치를 하대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이 책에서 알게 되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삼성의 이건희는 “정치는 4류,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라는 노골적인 무시 발언을 한다.(120쪽) 노무현 정부 때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삼성은 악독한 정권에는 아부전략으로, 상대적으로 민주지향의 정권에는 무시전략을 이중적으로 적용하는 야비한 전술을 이어갔다. 이런 전략이 바로 삼성 전략기획의 기초인 것 같다.

 

이제 이병철과 이건희는 가고, 이재용이 대를 잇고자 기를 쓰고 있다. 3대를 이어 권력을 계승하려는 삼성을 보면 김일성과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이 계승한 북한 독재권력과 그대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딱 맞다. 삼성 이름만 들어도 숭상하는 유행이 여전하다. 삼성이 개인 기업인데 자식들이 대를 이어 승계하는 게 뭔 대수냐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삼성은 개인 소유 기업이 아니라 주식회사이며, 개인 투자도 아니고 국민세금을 그럴듯한 방식으로 탈취한 돈으로 꾸려간 기업이다. 상속이 법적으로 가능한 개인재산 부문조차도 상속세를 제대로 낸 것도 아니다. 게다가 계열사 모두를 지배하려는 소유구조를 통해 불법을 일상화하고 있다. 노조를 허용하고 있지 않으니 공공성이란 아예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밀수에 친일, 탈세와 횡령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경제가 국민경제를 살린다는 환상에 빠져 삼성파티를 대신 해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용의 승계시도는 아버지의 승계조건을 그대로 답습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통해서 계열사를 피라미드 안으로 가두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재용의 승계를 위한 기초작업은 이미 1996년 그 유명한 삼성애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에서 시작했다. 20년에 걸친 승계작업은 전적으로 정권의 인정없인 불가능했다. 책에 나온 이야기를 써본다면,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2015년 합병으로 이재용은 8,549억 원의 이득을 보았지만, 국민연금공단은 1,388억 원을 손해봤다. 그 사라진 돈은 모조리 국민의 세금이다. 이런 방식의 소유구조 조작과 횡포는 삼성에서 누워 죽먹듯 해왔던 일들이었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사진출처 : vimeo.com

 

다시 말하지만 삼성은 적은 지분으로도 계열사를 통해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소유구조를 항상 유지해 왔다. 삼성은 비서실, 구조조정본부에서 전략기획실과 미래전략실이라는 이름으로 바꿔가면서 계열사 전체의 소유구조를 관장하는 비서조직을 존속시켜 왔다. 최순실 농단 이후 최근 해체되었지만 말이다. 그런 식의 소유구조의 일방적 결정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정권의 비호 없이는 불가능했다. 결국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의 역사적 배경에는 삼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이재용의 후계 승계를 인정해주고, 그 대가로 이재용은 문화재단 후원 298억 원을 내놓았다. 결국 박근혜는 탄핵으로 끝났지만, 삼성의 내재적 자본독재는 여전하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삼성은 ‘성장논리’와 ‘글로벌경영’, ‘국가경쟁력’과 ‘창조적 파괴’ 등, 교묘한 혼란의 언어를 사용하여 자본독재를 영위하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묘한 언어포장을 벗겨보면 삼성의 속내는 불법과 유착으로 형성한 매판자본을 통하여 부정축재를 누적시켜 자본독점을 안착시켜가는 행위를 숨기는 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

 

냉정하게 삼성을 알아야 한다. 삼성 경제가 국가 경제가 아니라, 국민 경제가 삼성 경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정말 대단한 역사였다. 박정희가 경제성장의 주역이라는 둥, 삼성이 있어서 한국경제가 커졌다는 등의 억지는 부정비리의 당사자들과 매판의 역사적 관련자들 그리고 독재권력의 주관자 집단이 노리는 기본전술이다. 한국 경제성장의 대단한 역사는 한국인이 만든 것이지 삼성과 박정희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삼성과 박정희 관련자들은 한국이라는 유무형의 몸체 가운데 있는 흉부를 그들 마음대로 도려낸 살점을 가지고서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대한민국 흉부를 도려낸 후의 서민의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삼성브랜드의 마취제를 사용했지만 그나마도 마취약이 풀리는 곧 다가올 시간에 그 고통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온 몸에 퍼질 것이다. 삼성이 저지른 위해요소들을 거꾸로 해결해 갈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비로소 실질적인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맞이할 수 있다.

 

이 책 <삼성독재>의 저자 이종보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책을 마무리했다. 첫째 재벌이 투자를 기피하는 이유는 정부를 길들이려는 의도에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권유착 목적이 아닌 순수 재투자가 되도록 하는 기업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재벌기업은 항상 ‘성장논리’와 ‘국가경쟁력’이라는 구호를 도용하여 국민을 협박하기 때문에 정부와 국민은 그런 협박에 밀리지 않고 객관적이고 투명한 기준을 제시하면 된다. 셋째 이 책이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서술했듯이 정치와 재벌의 유착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매우 강하게 맺어져 있다. 거꾸로 말해서 재벌개혁은 정치개혁 없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정치개혁을 통해 관습적 정경유착의 끈을 끊을 때 비로소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한국경제의 환상을 깨야 한다. 삼성이 세계 1위의 기업이라고 자축하는 것은 삼성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다. 삼성이 커지면서 빈부격차는 더 커졌고, 사회적 우울증은 급증했고, 국부 반출은 더 많아졌고, 소기업은 더 망가졌으며, 노사관계는 더 나빠졌고, 청년실업은 더 늘어가기만 했다. 그런 직접적 인과관계는 아직 명료하지 않지만, 그 상관관계는 분명하다.

 

부자가 권력을 잡으면 서민들도 부자가 흘린 국물이라도 더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낙수효과때문에 우리 국민은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놓았고 삼성과 같은 재벌들에게 제공한 막대한 불법적 혜택에 대해 눈감고 있었다. 이제 낙수효과의 허상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실감나게 느꼈다. 어려운 전문용어나 에둘러 돌려치는 말도 쓰지 않은 책이라서 술술 읽히면서도 진짜 공감을 주니, 한번 읽어볼 만하다. 이번 여름에 읽은 이 책은 무더위를 식히지는 못할지언정 잠시 잊을 수 있을 정도로 몰입을 시켜준 좋은 책이었다. 강추!

한국철학은 누가 세우겠나 [최종덕의 책과 리뷰] -13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한국철학은 누가 세우겠나

 

오늘의 서평 책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 동녘, 2015

 

1. 우리의 철학을 찾아서

 

어린이날이 왜 좋을까?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아니면 공휴일이라서? 어린이날하면 방정환 선생이 떠오른다.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직접 제정한 것은 아니지만, 방정환 선생이 만드신 <색동회>가 오늘의 어린이날 전신이었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를 어린이답게 만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동학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개천절이 어떻게 국가공휴일로 되었는지,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촉발된 한글날이 왜 한국철학과 연관되는지를 알게 되었는데,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쓴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동녘, 2015)을 읽은 덕분이다.

 

이 책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은 “우리에게 철학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으며 매우 분명한 문제의식을 세우고 있다. 이 책에서 한국현대철학의 문제의식을 대신한 한 마디의 표현이 있는데, 일본 제국주의자를 비판적으로 흘겨본다는 표현이다. 독립운동가 신규식이 일제에 항거하며 독약을 마시고 한쪽 눈을 잃었는데, 그 이후 그는 자신의 호를 한쪽 눈으로 흘겨본다는 뜻으로 예관晲觀이라고 붙였다.(344쪽) 예관이란 반성하고 비판하며 행동하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한철연의 책은 우리에게 철학이 어떤 의미인지 지식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철학함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출세와 입신양명의 도구로 전락한 지식을 비판하며, 권력에 결탁하는 학문을 거부하는 새로운 비판과 부정, 저항과 혁명의 철학이 현대한국철학의 기초였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341쪽) 한철연의 한국현대철학은 부제로 “동학에서 함석헌까지, 우리 철학의 정체성 찾기”에서 암시하듯이 철학의 의미를 스스로 질문하며 나아가 분열의 시대를 마주한 현대인의 철학적 지혜를 모색하고 있다.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은 현대인이 한국의 현대철학을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입문서로서 최소한의 한국현대철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동학의 최제우, 대종교의 나철, 양명학의 박은식, 민족주의형 무정부주의의 신채호, 사회적 휴머니즘의 신남철, 실천철학의 박치우, 국가주의의 박종홍, 씨알철학의 함석헌의 철학을 잘 풀이해주고 있다. 동학의 최제우에서 씨알 함석헌에 관통하는 철학은 이념적으로 평등과 자유에 있었으며, 방법론으로 저항과 실천에 있었으며, 내재적으로는 주체와 성찰에 있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2. 생명존재론

 

이 책에서 주로 다룬 동학이나 대종교 그리고 당대 양명학은 인격의 선천적 동등성을 강조한다. 당대에서 문제된 인격의 선천적 동등성이란 계급 차별, 직위 차별, 남녀 차별, 부자간 차별과 나이 차별의 역사적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생명의 존재론이다. 생명의존재론이라는 말은 서평자 마음대로 붙인 것이지만 나름대로 전체 맥락을 상징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브랜드를 붙어보았다.

 

인격에서 존재론적 동등성의 실현되면 그것이 비로소 삶의 자유이다. 인격적 동등성을 누릴 수 있다는 민중의 희망이 자유를 실현하며 이런 자유의 실현이 당대의 일제 침략으로부터 자신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동학과 대종교 그리고 당대 양명학에서 말하는 생명의 자유론은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의 기초가 된다는 뜻이다. 특히 자유를 희망하는 당대의 동학은 계급에 대한 탈피와 일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두 가지 통과제의를 거쳐야 했다. 탈피와 저항이 바로 동학의 기본정신이다. 저항과 탈피는 거창한 독립운동 이데올로기나 종교 경전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저항과 탈피는 일상생활에서 남녀 혹은 부부 사이에 가로놓여진 사회적 차별이나 어린이를 함부로 다루는 어른들의 관습을 버리고 동등한 관계임을 실천하는 것에서 실현된다는 것이 동학의 기본 철학이다.

 

서평자는 이 책을 읽고 교훈이나 경험담을 민중에게, 여성에게, 학생에게, 어린이에게 억지로 가르치려들거나 강요하지 말라는 뜻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어린이와 같이 모르는 사실이 세상으로부터 어떻게 복잡한 세상사를 배워갈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간단하다. 아이들도 혹은 학생들도 다 알고 있거나 크면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저 올바르고 제대로 돈 행동과 생각을 하면 아이들이 모방을 하고 따라서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나쁜 짓하면 어린이도 따라서 할 것이다. 자기 자식을 아비가 원하는 어떤 방향으로 잘 키우고 싶으면 아비가 그렇게 하고 싶은 방향대로 잘 행동하면 될 뿐이다. 이런 선천성의 가능성이 바로 존재론적 동등성이다. 좀 어려운 말이지만 존재가 서로 동등해야만 비로소 존재의 생명성이 부여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동등성은 생명 존재론의 전제이다. 쉽게 말해서 생명존재론이란 일상생활에서 남녀, 부부, 계급, 직위, 나이의 차이가 사회적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철학적 토대이다.

 

특히 동학에서 생명존재론의 생명이란 풀 한 잎, 한 잎의 작은 생명이 우주의 생명을 반영하고 있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계급이나 성별, 지식이나 재산에 관계없이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안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백성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백성 한 사람마다에게서 대생명의 흔적을 찾아내어 되살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의 생명존재론은 조선 전통의 성리학 전통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기존 성리학에서 대인은 소인이 지향해야할 모델이며, 거꾸로 소인은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계도되어야 할 계층이었다. 기존의 유가적 수양론에 의하면 성인의 훈교를 통해 무지한 자는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무지한 자가 훈교되지 않는다면 계속 무지한 채로 남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반면 동학으로 촉발된 생명존재론은 일방향적 군주정치나 성인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다. 동학은 빈한한 유랑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크나큰 인간관의 변혁을 일으켰다. 군자가 소인을 훈교하도록 정초된 성리학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동학은 세상의 도탄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생명존재론의 씨앗은 일방적 계몽정치를 부정한다. 오히려 개인들 즉 백성은 이미 남녀의 평등성, 아이와 어른의 평등성, 양반과 상인의 평등성의 마음을 선천적으로 구비한 상태다. 단지 그런 마음이 미발현 상태일 뿐이라는 철학적 존재론을 표명한다. 이 책에서는 이런 미발현 상태의 인격적 잠재성을 조선 양명학으로 설명하고 있다.

 

미발현의 마음을 발현되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사람들은 생명과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조선말 생명 존재론의 고유성이며 독특성이다. 그런 변화로의 반등을 촉발하는 철학적 기반은 조선 양명학이다. 중국 명나라 시기 왕양명에서 시작된 양명학이라는 철학은 대학의 격물치지를 양지良知라고 해석했다. 즉 생명의 힘과 자유의 권리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에 관계없이 임금이나 신하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그런 내재된 자기를 발견하는 힘이 바로 양지인 것이다. 자기 안에 이미 군자가 들어 있는 것이며 그래서 소인도 자기 안에서 군자를 찾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양명학의 인식론은 조선말에서 일제 압정기로 거치면서 생명사상의 뿌리로 발전했다.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의 사유구조는 평등과 주체, 자립과 현존을 세울 수 있는 철학적 기초이다. 또한 양지는 양명학의 인식론적 기초인 몸과 마음이 하나 되도록 하는 생명사상의 근간인 지행합일의 논리 위에 정초되어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2대 교조 해월(1827-1898) 선생은 35세 동학에 입교하였는데, 입교한지 불과 2년만인 37세에 교조가 되었다. 그렇게 가능한 이유는 동학 안에 내재된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良知와 맥을 같이하는 인내천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천적 양지가 있었기에 단박에 도를 깨칠 수 있는 것이고, 도를 깨치면 누구나 교조가 될 수 있다고 1대 교조 수은 선생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울이니 사람을 한울처럼 섬기라”는 평등사상은 백성 한 사람마다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무계급의 철학을 포함한다. 나아가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77쪽)는 말이 내 안의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라고 이 책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방정환 선생의 예를 더 말해보자. 일본에서 막 돌아온 방정환 선생은 이런 동학의 인내천 철학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방정환 선생의 심장이 휘둥그레졌었다. 이런 인내천의 철학이 어린이에게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방정환 선생이 깨달았다. 이후 그는 짧았던 인생기 내내 어린이를 위해 살았다. 철학에서 별로 혹은 크게 다루지 않은 어린이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실제로는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 원래 우리 안에 이미 양지(良知)로 있었지만 감춰져있었거나 억압되어 드러나지 않았던 관점일 것이라고 재해석할 수 있다. 그런 관점을 읽을 수 있고 덧붙여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 이 책을 읽는 행운이다.

 

3. 동학 말고 한국철학의 다른 주제들

 

단군교로 시작한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1863-1916)은 단군을 부흥시키는 일에 머물지 않고 일제탄압에 정면으로 맞서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다. 천지인, 혹은 한인-한웅-한검이라는 3의 구성체는 단순히 절대적인 구원의 길을 제시한 단순 종교적 특성을 넘어서서, 인간이 살면서 겪는 “느끼고 숨 쉬고 부딪치는” 세 가지를 가리켜 ‘세 길’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인간은 이 세 길에서 방황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했다.(112쪽)

 

황성신문을 창간한 박은식(1859-1925)은 사회진화론을 도입하여 서양과학에 친화적인 양명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박은식이 말하려는 양지를 잘 요약해주었다. 양지는 주자학의 주지주의적 도덕론에서 벗어나 있으며, 오히려 맹자가 말한 측은심의 기반이라고 했다.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이 아닌 내재된 도덕적 정감의 의미를 포함하는데, 공정함과 시비선악의 기준으로서 성선함의 기초라고 설명한다. 특히 박은식은 양지를 자연을 밝게 통찰하는 앎, 순일하고 거짓없는 앎, 끊임없이 유행하며 쉬지 않는 앎, 두루 감응하며 막힘이 없는 앎,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과 차이가 없는 앎, 우주와 인간을 합일하는 앎이라고 쉽게 풀어주었음을 이 책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149쪽)

 

우리에게 민족 개념이 들어온 역사는 짧다. 그나마도 박정희 군부독재 국가주의를 옹립하기 위한 이념적 도구로서 ‘단일민족’이라는 선전구호로 왜곡되었다. 이념적 도구가 아닌 주체로서의 민족 개념을 처음으로 안착시킨 철학자는 바로 신채호(1880-1936)였다.(173-6쪽)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교수 지위)로 임용되었지만 과감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첫째 이유로서 전통이 유교적 세계관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둘째 이유는 자신의 스승 신기선을 포함해서 당시 유가적 전통을 따르는 집단이 친일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적 역사와 내적 성찰을 거치면서 신채호는 군주와 양반 중심의 일방향적 군주 사회가 아니라 백성과 민중이 주인되는 민족 개념을 형성하였다. 신채호의 민족주의는 오늘날 해석에 따르면 ‘방어적’ 민족주의에 해당한다. 민족이란 민중이 주인 되는 주체의 국민을 의미하며, 서구식으로 말하면 시민에 해당한다. 신채호는 나중에 국가 차원의 주인성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더 중시하게 된다. 결국 신채호의 철학적 관심은 1928년 이후 민족주의에서 탈피하고 사회진화론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나서 아나키즘으로 변화한다.(190쪽) 이런 점에서 신채호의 철학은 한국현대철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한철연 책은 신채호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민족주의자와 독립투사로만 부각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주체들이 자기성찰과 자기각오를 통해 궁극의 자유를 창조하는 사유의 발판”을 신채호가 마련했다는 점에서(194쪽) 신채호 철학의 의미는 과거에 그칠 일이 아니라 미래의 지표로 될 수 있음을 이 책은 강조했다.

 

브렌타노 현상학 논문으로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한 신남철(1907-1958)은 헤겔과 고대그리스 자연철학 연구를 지속해 왔다. 헤겔의 정신철학 연구에서 신남철은 역사철학과 인식론을 연결시켰고, 나아가 철학을 현실역사에 접목시켰다.(215쪽) 신남철은 헤겔의 정신철학을 단순한 관념의 발전이 아니라 세계와 인식주체 사이의 끊임없는 실천적 상호작용으로 해석한 점이 독특하다.(215쪽) 결국 신남철의 관심은 서구 르네상스 문화가 조선역사에 출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묻는 실천적 질문이었다. 신남철은 그 답을 계몽과 인간 그리고 자유라는 세 가지 키워드에 초점 맞추었다. 1942년 7월 1일 매일신보에 실린 신남철의 “자유주의 종언” 은 그의 현실참여형 정치철학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 글에서 첫째 대동아공영권 개념을 강조한다. 이 점으로부터 신남철을 비롯한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세계보편주의로 오해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서구 국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위상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셋째 국가를 떠나서는 자유를 실현할 수 없다고 했다. 넷째 자본주의를 비판한다.(226-7쪽) 이후 중국식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고 월북한다. 신남철은 1948년부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서양철학사를 강의하다가, 나중에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힌 후 1958년 사망했다. 결국 그는 정치적으로 남한 정부나 북한 정부에도 적응할 수 없었으며, 자유주의와 이상주의를 영원히 품고 있었던 휴머니스트였을 뿐이다.

 

총을 든 빨치산 철학자로 알려진 박치우(1909-1949)의 삶은 정말 실천철학의 범례였다. 박치우의 실천은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한다. 박치우는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숭의실업전문학교 교수와 조선일보기자로 있다가 월북했다. 그는 문학평론가이며 마르크스 철학의 학자였지만 유격투쟁의 일선에서 삶의 실천을 더 중시했다. 그는 빨치산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 1949년 태백산에서 사살되었다. 그는 근대철학의 방법론을 배우고 실천하려 했던 최초의 강단철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233쪽) 그는 현실에서 실천으로 이행하는 철학적 단계를 그의 책 <사상과 현실>(1946)에서 해명하였다. 그것은 ‘교섭적 파악’, ‘모순적 파악’, 그리고 ‘실천적 파악’의 세 단계이다. 위기의 파악과 극복은 이성에 근거하지만 실제로는 ‘실천’으로만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 박치우의 기본 명제이다. 이를 그는 “로고스와 파토스의 변증법적 결합”이라고 불렀다.(239쪽) 철학이 이론으로만 머물 때 가장 호사스러우면서도 가장 허울에 찬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박치우는 강조한다. 우리는 박치우의 실천 행로가 꼭 옳은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철학의 할 바가 무엇인지를 박치우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철학은 오늘. 이 땅, 우리에게 있어서 ,,,, 어떤 책임을 분담해야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박치우는 한시라도 떨어진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243쪽) 한철연은 박치우에 대한 평가를 다음의 한 마디로 하고 있다. “한국에도 사유와 삶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분투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267쪽)

 

이 글을 쓰는 서평자는 어렸을 적 학교에서 박정희 군부독재의 의식화 사업의 하나였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해 선생님에게 매를 맞은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국민교육헌장을 작성한 이가 박종홍(1903-1976)이다. 근대의 폭력적 권력이 전근대의 전제적 왕권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퇴행의 역사, 박정희의 ‘10월 유신’이라는 이름도 박종홍이 붙인 것임을 서평자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박종홍은 신남철이나 박치우처럼 경성제대 철학과 출신이었으며, 1968년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평온하게 은퇴했다. 다른 한국현대철학자들이 철학과 현실을 접목시키려 시도한 지식인으로 평가된다면, 박종홍은 철학과 현실에 권력까지 접목시킨 국가주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청년 지식기는 헤겔과 하이데거 그리고 퇴계를 통해서 전통철학과 서구철학을 연결하는 데 있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박종홍은 그의 후반기로 이행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보다는 집단의 운명을 강조한다. 집단의 공동체적 운명이 자각과 자유를 지닌 개체로서의 ‘나’보다 선행한다고 했다. 이러한 박종홍의 입장은 그가 향후 왜 독재권력에 적극적으로 승차한 정치적 이유를 알게 해준다. 그의 철학은 보통 ‘부정과 창조의 철학’으로 이름 붙여지기도 하는데, 그 내용인즉 부정을 통해 집단성의 힘을 창조한다는 데 있다. 박종홍에게 주체는 개체가 아니라 철저히 우리 민족이라는 결론에 이른다.(294-9쪽) 해방 후 미군정 중심으로 경성제대를 편성한 ‘서울국립종합대학안’을 많은 지식인이 반대했지만 박종홍은 관여하지 않았으며 이승만 독재에 대해서도 박종홍은 묵인의 함구를 했다. 이러한 사실과 대조적으로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박종홍은 대통령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을 역임하는 둥 적극적인 권력참여를 했다.

 

씨알의 철학자로 알려진 함석헌(1901-1989)은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젊은 함석헌의 오산학교 시절은 일제 저항의 민족적 정신과 스승 유영모를 통한 노자 철학 그리고 개신교와 세계의 문화적 보편성에 다층적으로 영향받은 시간이었다. 이후 일본 유학기에 범신론적 종교성, 평화주의, 반자본주의, 노장 사상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 실천적 지식의 지평을 넓혔다. 함석헌의 철학은 평화사상과 생명사상으로 줄여 표현할 수 있다. 평화와 생명은 저항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함석헌 씨알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비폭력, 불복종, 총단결”로 요약되는 ‘민주시민을 위한 헌장’(1974)은 앞서 말한 박종홍의 국가주의 칙령인 국민교육헌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씨알의 지표였다. 한철연의 책에 써진 그대로 씨알의 의미를 서평자가 대신 요약하면, 씨알이란 진보의 역사를 끌고 가는 주체, ‘고난의 역사와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역사’의 주체이다. 서평자는 이 책에서 가장 기억나는 함석헌의 말이 있어서 인용한다. “저항하는 것이 사람이고,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334쪽) 서평자는 함석헌을 현대 생명사상의 기초를 다져준 지식인으로 평가한다. 나의 이런 평가는 전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겼다. 함석헌의 생명의 원리는 첫째 자연적이며, 둘째 스스로 드러나며, 셋째 환경에 맞서 고난하며, 넷째 자유로우며 능동적이다.(321-8쪽) 즉 생명 자체가 평화의 근원임을 보여준 것은 함석헌 철학의 역사적 혁명이었다.

 

4. “다시 읽는 한국현대철학의 탄생을 위하여

 

서평자는 이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을 꼼꼼히 읽으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나의 한국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몰랐던 것이 너무 많았고, 내가 아는 척 한 것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단순히 한국의 현대철학사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삶의 이유를 스스로 묻게 해주었다. 철학은 답변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점을 정말로 실감하게 해 준 책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여름휴가 동안 한번 읽어 보시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강하게 추천한다.

 

한마디 더 붙여보자. 2017년 7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름 학회는 <동학>을 주제로 열린다고 들었다. 이번 학회의 주제를 토대로 하여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에서 “다시 읽는 한국현대철학”의 탄생이 있기를 한 번 더 강하게 기대한다. i) 서구의 사유를 배제하진 않지만 스스로 창발된 한국철학, ii) 자아민족주의에 빠지지 않는 한국철학, iii) 정서적 믿음이 아닌 엄밀한 지성에서 쌓아올려진 한국철학의 탄생은 이미 이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에서 예고된 것이기 때문이다. <끝>

인간적 사회과학의 가능성: 맑스와 뒤르케임이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최종덕의 책과 리뷰] – 12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인간적 사회과학의 가능성: 맑스와 뒤르케임이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오늘의 책 : 김명희, 통합적 인간과학의 가능성, 맑스와 뒤르케임의 실재론적 귀환, 한울, 2017

 

1.  이분법의 과학에서 통합의 인간과학으로

우리는 이분법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신화로부터 벗어나 과학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신과 기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가치중립적이라는 구호 아래 객관적 사실을 추구한다지만, 우리가 사실이라고 여겨왔던 사실들은 여전히 주관적 가치에 염색된 것들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덩어리이지만, 그 자체로 신이나 알파고도 흉내낼 수 없는 실존적 존재임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분화된 것을 종합하고 통합하고 통섭하고 결합하고 융합한다고 하지만 제대로 된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다가 어떤 책 한권을 집었는데, 이 책은 이런 이분법을 굳이 종합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둔 채 서로에게 대화를 유도하여 새로운 노벨티를 발생하게 하는 변증법적 연합을 보여주고 있다. 그 책은 김명희의 『통합적 인간과학의 가능성』이다. 저자는 사회과학자이지만 과학철학의 방법론을 흡입하여 소위 ‘인간과학’이라는 장르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인간과학이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변증법적 통합의 소산물이다. 이는 정량적 결합도 아니고 화학적 종합도 아니다. 단지 있는 것을 그대로 둔 채 그들 사이에 갈등을 생태적 공존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여겨졌다.

 

19세기 들어 자연사실을 취급하는 지식방법론은 실증주의로 굳혀졌다. 실증주의는 자연주의와 환원주의 기반위에 과학에 대한 방법론적 해석을 시도한 철학적 방법론으로 정의할 수 있다. 20세기 사회과학도 그러한 실증주의에 기반한 방법론을 중시했었다. 인간이 배제되고 사물 중심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사회를 해석하려 했던 이러한 실증주의 분위기를 거부하고 인간의 관점에서 사회를 이해하려 한 도전이 일어났으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사회과학에서 이런 분위기를 루카치나 사르트르 혹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원조는 맑스와 뒤르케임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러한 도전을 저자는 인간과학이라고 표현했다.

 

2. 비판적 실재론 도입

이 책이 던지는 중심주제는 맑스와 뒤르케임의 사회과학방법론을 비판적 실재론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데 있다. 여기서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이란 바스카R. Bhaskar가 처음으로 사용한 개념으로, 실재 그 자체를 되찾아 사회적인 관점에서 실재론의 주장을 전개한 내용을 함의한다. 사회적 관점에서 본 실재론을 의미하는데, 자자가 의도한 비판적 실재론의 속 내용은 과학적인 논리와 사회문화적 구성이 종합되어야만 일상의 세계문제를 조명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 책은 사회과학에서 논쟁 중인 이분법적 딜레마를 저자의 특유한 종합법으로 재구성하려 했다. 다시 말해서 다음과 같은 ①청년 맑스와 노년 맑스, ②초기 뒤르케임과 후기 뒤르케임, ③자연과학과 사회과학, ④자연주의와 반자연주의, ⑤사실과 가치,⑥과학과 비판이라는 이분법의 틀을 종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점이다. 그 목표를 수행하기 위하여 저자는 맑스와 뒤르케임을 끌어왔다. 저자는 이 두 사람이 이분법의 통합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22쪽).

 

저자는 이런 종합을 두 문화의 통합에 비유할 수 있다고 했다. 저자가 추구하는 통합적인 인간과학으로 가는 여정으로 표현될 수 있다.(23) 그 여정으로서 첫째 이분법적 해석의 통합을 시도하며, 둘째 자연주의 사회과학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저자의 이런 시도는 실증주의와 낭만주의를 갈라놓은 기존의 사회과학방법론의 분위기를 벗어나서 제 3의 방법론을 정착시킨다는 점에서 정말 고무적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생긴다.

 

통합의 이론적 도구로서 저자는 바스카R. Bhaskar의 비판적 실재론을 소개한다. 비판적 실재론이란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틀을 인정하면서도 물질로 환원불가능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고유한 관점을 덧붙이는 공존과 병합의 태도를 말한다. ‘가치’를 다룰 수밖에 없는 사회과학이지만, 사회과학은 말 그대로 ‘과학’이라는 말꼬투리를 붙인 만큼 사실을 다루는 방법론을 안고가야 한다. 종래의 사회과학자들은 사회과학을 자연과학처럼 취급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이런 그들만의 자랑스러움이 오류였음을 처음으로 지적한 이가 바로 맑스다. 사회현상을 자연과학의 방법론으로 모조리 설명할 수 있다는 기존의 사회과학방법론의 한계는 역사를 관통하는 사회의 동력학적 맥동을 파악하지 못한 데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맥동이 실재하며, 그 실재가 역사 위에 얹혀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저자는 비판적 실재론을 도입하였다.

 

3. 맑스의 비판적 자연주의

비판적 자연주의는 맑스의 과학방법론이며 이를 통해서 실증주의 방법론으로 포섭되지 않는 삶과 사회의 영역까지를 포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연주의와 인본주의를 연결시킴으로써 구조와 행위가 이어지고 설명과 비판이 하나로 묶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론과 경험의 이분법, 이론과 역사의 이분법을 통합하는 것은 바로 인간과학의 핵심이며, 저자는 그 원류를 맑스에서 찾는다. 그런데 저자는 맑스의 인간과학과 분석 맑스주의를 혼동하지 말고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분석 맑스주의는 형이상학으로 변한 맑스 이론의 하나이다. 분석 맑스주의는 전통과학의 규범을 인정하며, 논리적 개념을 추구하며, 공식적인 모델을 정립하려 한다. 저자는 이런 분석 맑스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맑스의 언어를 차용했다고 하더라도 인간과학의 영역으로 들어 올 수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분석 맑스주의의 존재론은 맑스의 사회적 존재론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분석 맑스주의는 방법론적으로 개인주의를 취한다. 방법론적 개인주의란 존재론적 원자론과 이론적 환원주의를 합친 것으로 이해하면 좋다. 즉 사회현상은 개인을 통해서 설명되어야 다는 것이다. 반면 맑스의 사회적 존재론이란 개인들 간의 관계가 사회전체를 형성하지만 개인의 정량적 통합이 전제사회로 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저자는 이런 환원주의에 기반한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맑스를 조명했다.

 

그 대안의 하나로서 비판적 자연주의가 있으며 이는 맑스의 과학방법론에 맞닿아 있다. 맑스의 과학방법론은 자연주의와 인본주의가 어울려 있으며, 구조와 행위가 이어져 있고, 이론과 실천이 합쳐져 있어서 세상과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고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뒤르케임의 윤리적 자연주의

저자는 사회과학 안에서 과학활동의 몰이해를 지적한 이기홍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실재론적 사회과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실재론적 사회과학이란 피어스가 소개한 것으로서 비판적 자연주의의 기반을 갖고 사회를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관념적이 아니라 실재적이다. 동시에 환원주의에 갇혀 있지 않고 세계를 통합적으로 보는 시선을 제공한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실재론은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그치지 않고 사회현상 이면에서 사회현상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있는 포괄성을 지닌다.

 

그 실례로서 저자는 뒤르케임의 과학방법론을 아래처럼 설명한다.

 

  1. 뒤르케임의 실증주의는 환원적 실증주의가 아니라 자연주의에 가깝다.
  2. 뒤르케임 방법론의 핵심은 행위와 사유가 서로 이어져 있고 묶여져 있다는 데 있다.
  3. 뒤르케임의 <자살론>을 사회생물학의 전거로 보는 과잉 자연주의적 해석도 있지만 저자는 뒤르케임의 자살론을 전통적인 자연주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 그리고 사회적 관점에서 생물학적 동력을 관찬한다.

 

자살론에 적용된 방법론은 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다. 경험에 기초하고 있지만 경험을 불러일으킨 발생메커니즘을 중시한 것이다. 경험에서 원리를 추론하는 사유의 힘을 통해서 자살의 근원을 파헤친 것이다. 이런 추론법은 소위 역행추론retroduction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저자는 행위와 이론이 합쳐지고 사회와 역행추론을 통해서 자살을 설명했다.

 

저자는 뒤르케임의 과학방법론을 비판적 실재론의 틀에서 설명했다. 저자의 탁월한 설명법이란 전통적인 자연주의를 극복하여 소위 환원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윤리적 자연주의’의 틀을 마련했으며, 둘째 이런 윤리적 자연주의를 비판적 실재론과 연결하여 설명했다는 데 있다. 나아가 저자는 뒤르케임을 통해 사회의 도덕적 가치가 자연의 원형적 사실위에 성립된 것임을 보여준다. 윤리적 자연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치와 사실, 나아가 도덕학과 경제학 사이의 통합을 말했다. 사회의 윤리적 규범조차도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생존하는 데 가장 합당하게 자연에 적응된 결과로 형성된 것이라고 논증한다. 사회적 가치와 자연적 사실 사이에 장구한 인류의 역사를 매개체로 집어넣은 것이 바로 뒤르케임의 윤리적 자연주의인 셈이다. 자연주의에 대한 오해에 바지지 않기 위하여 저자는 자연주의를 부연설명했다. 자연주의에는 통상의 유물론적 자연주의와 생물학적 자연주의 그리고 심리학적 자연주의가 있는데 뒤르케임의 자연주의는 이와 다르게 사회학적 자연주의라고 한다. 뒤르케임이 말하는 사회학적 자연주의에서 사회적 환경은 초월영성성hyper-spirituality을 포괄한다.

 

사회적 자연주의로부터 사회는 인간 개체들의 합 이상의 무엇이 발현된다는 생각이 정립된다. 뒤르케임에게서 이런 생각은 그의 <분업론>과 밀접하다. <분업>에서 우리는 개별 분업성과의 총합이 전체 성과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며 전체 성과가 개별 성과의 합으로만 환원되지 않고 그 이상의 무엇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 이상 혹은 그 이하로 될 수 있다. 즉 개인의 총합이 집단이 되는 것은 아니며, 거꾸로 집단은 개인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자연에 속하지만 자연을 지배한다는 것이(Durkheim 1953, 97) 뒤르케임을 보는 중요한 관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윤리적 자연주의가 성립된다.

 

뒤르케임의 윤리적 자연주의는 도덕적 사실이 자연의 현상의 일부라는 점을 말한다. 이로서 결정론과 자유의 대립을 해소한다. 이는 즉 개방적 결정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아가 뒤르케임의 윤리적 자연주의란 사실과 가치를 통합하려는 의지가 드러난 인식론적 통로이다. 통합하는 방법론적 논리로서 뒤르케임은 공변법method of concomitant variation을 사용했다. 공변법이란 동시에 발생한 사건들 혹은 현상들 사이에 내적 연관성을 찾는 방법으로, 두 사건(현상)이 동일한 원인을 갖거나 아니면 공통으로 의존된 제3의 조건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둔 방법론이다. 뒤르케임은 자신의 공변법을 통해 자연과 사회 사시의 내적 연관성이 있음을 밝히려 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뒤르케임은 이런 공변법을 통해 사회학과 자연과학의 태도를 연결했으며, 도덕론과 경제학을 합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실제로 그는 당대 칸트주의 도덕론과 공리주의 경제학의 이원론을 통합하려는 뒤르케임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생각보다는 인간과 자연이 둘이지만 같이 공존한다는 생각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인간은 동물적 요소에서 탈피할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동물과 다른 발현적 속성을 갖는다고 한다.(Durkheim 1958, 197) (130쪽) 그렇게 발현된 것이 문화이며 종교기고 제도이다. 제도는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고 정형화된 믿음체계와 행위양식이다. 마찬가지로 종교와 같은 정신현상은 사회현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뒤르케임은 말한다.(Review of H. Spencer 1886)

 

5. 비판적 실재론: 바스카와 저자의 입장

이론은 사실을 기초로 하는 과학적 설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실천은 가치를 기초로 하는 도덕적 비판을 위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은 실증주의적 자연주의로 설명될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사회는 반실증주의의 자연주의로 접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비판적 실재론이라고 부른다. 이는 저자가 말한 새로운 독해의 한 통로이며, 새로운 과학철학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비판적 실재론에 대해 아래와 같이 더 자세히 설명한다.

  1. 과학의 자동적 차원 : 과학 내부의 독립적 논리를 갖는다. 과학이 타동적 차원은 과학과 사회의 상관성을 함의하다. 개별과학은 사이의 층화가 있다. (콜리어 2010, 161)
  2. 개인주의와 집합주의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한다.
  3. 자원론(환경론)과 물상화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한다.
  4. 정신과 물질 이분법 극복, 정신은 물질의 발혀적 히이다. (바스카 2005a, 21) 이는 철학적 수반이론과 비슷하다.

 

“비판적 실재론의 과학관은 통상 지식추구의 인식론적 절차로만 이해되어 왔던 과학의 암묵적인 존재론적 차원을 불러옴으로써 실증주의의 잘못된 과학관을 바로잡고자 한다. 비판적 실재론의 과학관에 기초할 때 경험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좀처럼 이해될 수 없었던 맑스와 뒤르케임의 실재론적 과학관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60쪽) 다시 말하지만 과학과 비판, 사실과 가치의 이항대립에 멈춰있다면 사회를 이해하기 어려우며 사회과학조차도 설명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 유물론과 관념론, 결정론과 자유의지, 과학과 철학, 설명과 비판, 사실과 가치, 인간과 자연처럼 서로 분화되고 대립된 양면을 잇고 맞대고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저자의 시도는 충분히 호평 받을 만하다. 자연과학에서도 오해될 소지가 많지만 사회과학에서조차 가치중립적이라는 명분과 구호가 지배되고 있는 현실에서 저자의 이런 통합시도는 새롭지만 힘든 학문적 도전이다.

 

인간과학은 자연과학과 별개의 차원이 아니지만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노벨티를 포함한다. 이런 인간과학의 조망은 비판적 자연주의의 핵심이며, 사회를 자연학적 총체성으로 설명하는 시도의 하나이다. 방법론적 개인주의 혹은 환원주의와 정반대의 설명법이라고 보면 좋다. 바스카를 인간과학의 입장에서 보려고 저자는 시도한다. 바스카에게서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들의 총합을 나타낸다”는 표현은 아마도 뒤르케임의 사회과학 조망론일 것이다. 바스카는 뒤르케임을 해석할 때 항상 집합주의 사회학과 실증주의적 (경험주의) 방법론을 결합한 독특한 방법론의 소유자로 말한다.(95쪽) 바스카는 맑스를 해석하 대도 마찬가지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맑스 방법론의 핵심은 실재론과 관계적 사회학의 결합에 있다고 한다.(95쪽)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에서 전제된 철학적 존재론이 있는데, 그것을 바스카는 이중의 탈중심화라고 부른 것 같다. 저자가 표현한 탈중심화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인간 개인들의 총합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창발적인 사회 속성이 있다.
  2. 사회는 개인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3. 개인으로 설명할 없는 창발적 정신 속성이 있다.
  4. 인간은 개인의 심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정신을 갖는다.

 

결국 사회는 존재론적 고유성이 있는 구조라고 한다.(97-98쪽) 바스카에서 사회구조는 자연구조와 달리 그것이 지배하는 행위와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구조는 자연구조와 달리 행위주체들이 활동하면서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관념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사회구조는 자연구조와 달리 행위주체들이 활동하면서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관념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구조는 자연구조와 달리 오직 상대적으로만 지속된다.

 

6. 비판적 유물론

인간과학을 위한 유물론을 저자는 강조한다. 비판적 유물론은 이론적 이분법에서 탈피하자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과학을 물질주의 과학의 제한에서 탈피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면 유물론과 관념론, 결정론과 환경론 나아가 과학과 철학의 이분법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뒤르케임의 통합방법론을 맑스의 통합론과 동일한 지평에서 다루었다. 비판주의와 과학주의, 자연주의와 문화주의, 실증주의와 역사주의를 하나의 틀로 묶어내었다는 점 이상으로 맑스와 뒤르케임을 공통의 사유틀로 엮어낸 저자의 학문적 조망력은 더많은 독자의 시선을 끌 것 같다. 그런 시선은 인간과학의 범주를 끌어내고 있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가 블로흐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맑스 엥겔스 1997, 508) “경제의 변화는 유물론이지만 결정론이 아니다. 생산과 재생산들의 계기를 다루는 경제적 계기는 매우 복잡한 상황들의 연관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단일한 인과법칙으로 환원되거나 결정론적이지 않다.” 이 편지 내용은 유물론이면서 어떻게 인간주의 과학이 가능한지를 시도하는 데서 시작된다. 저자는 맑스와 뒤르케임의 새로운 유물론이 바로 이러한 인간과학의 옷을 입은 유물론이라고 매우 의미있는 주장을 전개했다. 서평자는 저자의 주장을 아래처럼 요약했다.

 

  •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기존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다.
  • 환원주의가 아닌 과학적 유물론, 즉 사회적 실재에 대한 과학적 믿음의 내용이 중요하다.
  • 사회적 형태의 재생산과 주체적 인간의 구성적 역할을 강조하는 실천적 유물론이다.
  • 자연은 단지 인간에 대립적인 감각경험의 대상만이 아니다.
  • 자연은 인과적으로 상호의존하는 실천적 관계의 장이다.
  • 경험주의적 존재론에서 벗어나 있으며, 이를 비판적 자연주의 관점으로 맑스와 뒤르케임 두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 가시적 인과론을 밝히려는 일반경제학과 달리 경험계 밖 인과관계까지 다루는 과학의 근저이다.(219쪽)
  • 물신주의에서 탈출하는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 리카르도 경제학의 “환원주의 오류”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된다.(요강 III, 22)
  • 역사와 가치 이분법, 비판과 과학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유물론이다.

 

7. 맑스와 뒤르케임에 대한 “새로운 독해”

인간이 배제된 채 자연과 사회를 해석하려 했던 19세기 실증주의 분위기를 거부하고 탈피하려는 사상적 도전이 바로 20세기 중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사회과학의 루카치에서 프랑스의 사르트르 나아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그 포스트모더니티와의 공조를 엿볼 수 있다. 그런 사조의 원조가 맑스와 뒤르케임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 사회과학을 저자는 인간과학이라고 표현했다.

 

이분법의 틀에서 벗어난 인간과학으로서의 사회과학은 방법론적 개인주의 혹은 계량적 환원주의를 비판하며, 관념적인 추상의 연역법칙이 아니라 실재하는 자연주의를 무시하지 말도록 우리를 설득한다. 저자는 비판적 자연주의를 더 확장하여 사회과학적 실재론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실재론을 이해하기 위하여 저자는 “새로운 독해”를 제시한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독해”란 첫째 형식적 이분법에서 탈피하며, 둘째 과학을 재조명하는 데 있다. 과학과 비판, 사실과 가치의 이항대립에 멈춰있다면 사회를 이해하기 어려우며 사회과학조차도 설명하기 어렵다고 역설한다. 이 점에서 유물론과 관념론, 결정론과 자유의지, 과학과 철학, 설명과 비판, 사실과 가치, 인간과 자연처럼 서로 분화되고 대립된 양면을 맞대어 잇고 하나로 묶으려는 저자의 시도는 충분히 호평 받을 만하다. 자연과학에서도 오해될 소지가 많지만 사회과학에서조차 가치중립성의 구호가 팽배해진 오늘의 현실에서 저자의 이런 통합시도는 새롭지만 아마도 힘든 학문적 도전으로 될 것 같다.

 

새로운 독해의 구체적 사례로서 저자는 소이어의 <발현이론>을 들었다.(Sawyer 2002, 227) 발현이론이란 주어진 부분들의 합으로부터 전체가 구성되지만, 전제 안에는 부분들에 없었던 새로운 것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전체가 부분들의 합과 똑같지 않고,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전체는 부분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결정론과 자유론(환경론 혹은 자원론)이 서로 공존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정신은 물질의 창조적 발현이라는 점을 저자는 논증한다. 인간과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무엇에도 환원되지 않고 스스로 고유한 노벨티를 머금고 있다고 한다. 개인들 하나하나를 설명한다고 해서 사회 전체가 설명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사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물 안에는 없었지만 사물 사이에서 새롭게 창출된 관계항까지가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이러한 파악은 정적인 사물을 촬영한 한 컷의 사진기로 가능하지 않다. 관계의 창출을 파악하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사물을 연속적으로 촬영한 복수의 사진컷을 필요로 한다. 연속의 사진컷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를 보지 못하는 사진사는 인간과학의 살아있는 장면장면들을 생생하게 촬영할 수 없다는 점을 이 책을 읽고 깨닫게 되었다.

 

8. 청중을 위한 사회과학, 독자를 위한 사회과학서

이 책에서 이런 글귀를 읽었다. “사회과학은 주제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청중을 위한 것이다”.(292쪽) 이 책은 저자만의 고유한 주제의식과 창의적인 내용을 충분히 담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내용이 전문적이라서 읽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전문적 내용이라도 독자들이 읽어 내지 못하면 책의 의미가 반감된다. 사회과학은 청중을 위한 것이라고 저자는 분명히 말했다. 그만큼 독자가 다가갈 수 있는 글쓰기로 책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한 것은 이 책의 약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의 홍수 속에서 그렇게 분열된 것들을 공존시킬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보려는 독자들은 이 책 구석구석에서 대단한 읽을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