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티르너 연구자인 한철연 박종성 회원이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Der Einzige und sein Eigentum)』(1845)를 읽으며 번역과 자신의 주석을 제시한 글을 게재합니다.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Eigenheit)의 철학이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Eigenheit)의 철학이다.

박종성

 

 

  1. 우리 교육의 주요요소는 도덕적 영향력이다.

 

우리는 앞선 글에서 신성한 것(Heiligen)이 두려운 낯선 것(Unheimlichkeit)이고 초-자아(das Über-Ich)이라는 것에 도달하였다. 이 글에서는 교육의 주요-요소는 도덕적 영향력이라는 것과 고취된 교육은 ‘신성한 것’과 연결되고 우리의 산출로 내맡긴 교육은 ‘소유자’의 교육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나다움의 철학은 신성한 것에 대한 아무것도 아님(Nichts)을 선언하는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의 철학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슈티르너는 헤겔뿐만 아니라 바로 그 당시의 ‘좌파인’, 계몽적 비판가인 포이어바흐와 브루노 바우어와 논쟁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인물, 곧 ‘소유자’의 미래상을 발전시킨다. 대표적으로 헤겔의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헤겔은 어린이의 조기에 시작하는 마음의 교양(Bildung)을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요구한다.

 

“교육(Erziehung)의 주안점은 극기, 훈련에 두어져야 하거니와 극기란 자식의 어리광(Eigenwillen)을 억누르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그의 가장 고유한 주관성으로서의 이성(Vernünftige)이 어린이에게 싹트지 않으면 안 된다. […]윤리(Sittlichkeit)란 것이 감각적으로 어린이에게 심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G.W.F. Hegel: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 174, 175, Zusätze (Hervorhebung B.A.L.) >

 

잠시 ‘Eigenwillen’ 단어를 살펴보자. 헤겔과 달리 슈티르너는 이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미 첫 번째 <e시대와 철학> 글에서 설명하였듯이, ‘Eigenwille’을 ‘멋대로 함’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eigen’(자신의, 자기의)에서 파생된 단어들을 선호하고 이런 단어들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때문에 “자기 의지(Eigenwille), 나다움(Eigenheit)”(186쪽)으로 번역하였다. 또한 그는 ‘자기의지’(Eigenwille)를 ‘자유재량’(Willkür)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한다.(141) 그래서 “자기의지(Eigenwillen)의 지배 자체는 확실히 자유가 아닌 것으로서 가장 완전한 자기 부정(Selbstverleugnung[self-denial])이다.”(172)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헤겔에 있어서 ‘이성적인’ 인간의 생산은 ‘윤리적 인간’의 생산이고, 헤겔 이후 ‘자유인’이라는 계몽주의자에 있어서는 소위 유적본질(Gattungswesens)의 생산이다.<Der “Eigner” bei Max Stirner, Bernd A. Laska: “Katechon” und “Anarch”. Carl Schmitts und Ernst Jüngers Reaktionen auf Max Stirner. Nürnberg: LSR-Verlag 1997 Stirner-Studien Nr. 3.> 유일자로서의 슈티르너는 모든 측면에서 노력했던 그런 식의 ‘교육’을 근본적인 악으로 인식한다. 더욱이 그런 가장 우스꽝스러운 산물들은 그에게 위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초기의 저작에서 “자유로운 인간, 주권을 가진 인물”(freie Personen, souveräne Charaktere)을 주장하는데<Max Stirner: Das unwahre Prinzip unserer Erziehung (1842). In: PKR, S.,77>, 이후의 저작인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더 이상 ‘자유로운’, ‘주권을 가진’, ‘참된’ 등등의 인간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학술적인 경계 설정의 토대에서 ‘소유자’를 말한다. 그는 계몽주의자에 반대하여 “우리 교육의 주요-요소는 도덕적 영향력”(332쪽)이라고 한다. 그리고 “도덕적 영향력”은 “영혼의 구제”(Seelenheil)이다.(77) 나아가 “성직자 냄새가 나는 마음의 효력은 특히 사람들이 빈번히 ‘도덕적 영향력’이라고 부르고 듣는 것에 해당한다.”(88) 좀 더 그의 말을 음미해 보자.

 

도덕적 영향력은 굴복(Demütigung)이 시작되는 곳에서 출발한다. 그렇다, 도덕적 영향력은 바로 이러한 굴욕 그 자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용기(Mut)의 꺾어버림과 굽힘은 겸손(Demut)에 이른다. 만약 가까이에 있는 암석이 폭발할 때, 내가 어떤 사람에게 도망가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면, 나는 이러한 요구(Zumutung)로 어떤 도덕적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만약 내가 아이들에게, 네가 식탁에 내놓아진 것을 먹지 않는다면, 너는 배고플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어떤 도덕적 영향력도 아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에게, 너는 기도하고, 어른을 존중하고, 십자가를 존경하며, 참 등등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일부를 이루고 인간의 사명이다 혹은 심지어 이것은 신의 의지이라고 말한다면, 도덕적 영향력은 완성된다. 그 때에 인간은 인간의 사명에게 굴복해야만 하고, 고분고분해야만 하며, 순종하게 되어야만 하며, 규칙(Regel)과 법으로 세워진 어떤 낯선 것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어떤 더 높은 것굴종해야(sich erniedrigen)만 한다. 곧 자기 비하(Selbsterniedrigung)이다. “제 몸을 낮추는 사람은 찬양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 어떤 경우든, 아이들은 제때에 깊은 신앙심, 신에 귀의함(Gottseligkeit), 존경할 만함으로 독려되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좋은 교육은 어떤 사람에게 “선한 근본 명제”를 가르쳤고 명심시켰으며 억지로 머릿속에 넣어주었고, 억지로 주입시키고 설교하게 되었다.

 

이렇듯 도덕적 영향력은 굴복(Demütigung)이고 겸손(Demut)이며 인간의 사명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낯선 것에 자기 의지를 포기하여 더 높은 것굴종해야(sich erniedrigen)만 하는 것인데, 이는 의지의 포기이고 자기 비하(Selbsterniedrigung)이다. 위에서 사용된 ‘규칙’의 어원은 ‘규칙’ 또는 ‘길이를 재는 자’를 뜻하는 라틴어 regula이다. 특정한 상황 또는 영역에서 따라야 할 방침, 해야 할 행동을 가리키거나 규정하는 공식을 의미한다. 슈티르너는 291쪽에서 규칙, 지배, 법칙을 같은 부류로 본다. 인간, 자유 등등도 이러한 것과 같은 의미로서 그것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규칙을 지배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의지를 포기하고 자기비하를 하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자기비하를 하는가? 우리는 왜 자기비하를 하는가? 고취된 교육을 받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신들린 상태가 돼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슈티르너의 말을 들어 보자.

 

 

  1. 고취된 교육-‘신성한 것과 우리의 산출로 내맡긴 교육-‘소유자의 것

 

다시 교육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슈티르너는 우리의 교육을 ‘우리에게 감정들을 불어넣는 것’(einzugeben)과 ‘우리의 산출로 내맡기는 것’을 구분한다. 다시 말해 “감정을 나에게 불어넣은(eingeben) 것인가 아니면 감정이 나에게 흥미로운 것인가”고 구분하면서 “후자가 자신의 것, 자기중심적인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은 나에게 감정으로서 각인하지 않고, 따라하도록 불러주지 않으며, 그리고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에게 감정들을 불어넣는 것’ 다시 말해 “고취되었던 것들을 뽐내고, 나는 그것들을 마치 유산의 배당분(Erbteil)처럼 내 속에 품고, 그것들을 경작하여(kultiviere) 그것들에 의해 신들린 상태(besessen)가 된다.”(70)

 

이를테면 고취되었던 것들을 경작하여 그것들에 의해 신들린 상태가 된다는 슈티르너의 생각에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 녹아있다. 문화(kulur)라는 말은 ‘경작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colere에서 나왔다. 예를 들어 루소가 <에밀>에서 “인간은 경작을 통해 식물을 기르고 교육을 통해 인간을 기른다”고 말했다. 이렇듯 경작과 교육은 kulur의 두 의미이다. 그러나 루소는 문명의 진화 과정을 발전으로 보지 않는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루소의 생각을 이어 받아 원시 문화가 서구 문화에 비해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를 뿐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은 문명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슈티르너와 공명할 수 있는 지점이다. 슈티르너의 문화, 혹은 교육에 대한 관점에서 후퇴한 교육은 고취된 교육이다. 그러니까 감정을 나에게 고취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 나에게 흥미로운 것’, 이러한 교육은 자신의 것이고, 이때 나는 ‘소유자’인 것이다. 나는 어떤 교육 속에 있는가?

 

또한 ‘신성한 것’이라는 개념은 소유자 모습의 이해를 위한 열쇄이다. “당신이 어떤 존경 혹은 경외(Ehrfurcht)를 품는 모든 것은 신성한 것(Heiligen)이라는 이름을 얻는다.”(78) 따라서 신성한 것은 아이에게 최초에 낯선, 투사된, 내면화된, 규범적 구조로 나타난다. 이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이전의 글에서 설명하였다. 곧 신성한 것은 모든 교육의 본질적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가? 다시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감정을 나에게 불어넣은(eingeben) 것인가 아니면 감정이 나에게 흥미로운 것인가?” 우리는 한때,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웠다. 아직도 첫 구절은 기억을 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우리가 때어난 것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렇다! ‘사명’이다. 슈티르너 말을 다시 옮기면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때어난 “그 때에 인간은 인간의 사명에게 굴복해야만 하고, 고분고분해야만 하며, 순종하게 되어야만 하며, 규칙(Regel)과 법으로 세워진 어떤 낯선 것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해야만 한다.” 지금 현실에서 작동하는 인간의 사명은 무엇일까? 나의 의지를 포기해야만 하는 인간의 ‘사명’말이다!

 

 

  1. 나다움의 철학이여! 신성한 것의 아무것도 아님(Nichts)을 선언하라!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보자. 왜 신성한 것이 나에게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은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물과 같이, 작은 어린이에게는 아무것도 신성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성한 것이란 표상(Vorstellung)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좋고 나쁜, 정당하고 부당한” 등등과 같은 것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데(zu Verstand)까지 이미 도달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도의 반성 혹은 현명(Verständigkeit)에서만-종교의 고유한 입장에서-자연스러운 두려움(Furcht)의 자리에 “신성한 두려움”이라는 자연스럽지 않은(다시 말해 생각에 의해서 비로소 내보였던) 경외심(Ehrfurcht)이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에 어떤 것을 더 강력한, 더 큰, 더 정당한, 더 나은 것 등등으로 간주한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낯선 힘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그 낯선 힘(Macht eines Fremden)을 단순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확하게 인정하는데, [78]다시 말해 낯선 힘을 시인하고, 그것에게 자리를 내주어, 항복하고, 자신을 속박하도록 한다(헌신, 겸손(Demut), 굴종, 공순 등등)는 것이다.(77-78)

 

슈티르너는 이 “모든 환영의 무리가 유령으로 돌아다닌다.”(spukt)고 말하고 있다.(78) 그렇다면 이러한 신성한 것, 유령이자 ‘정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틀림없이 사람들은 ‘도덕’(Sittlichkeit)이란 말을 자발성(Selbsttätigkeit), 자기결정(Selbstbestimmung)과 동의어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단어에는 그런 의미가 없다.”(76) 그는 ‘이성적 자기결정’,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이 단어는 때로 부정적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정신의 ‘자율성’(Autonomie)(233)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자율성은 한 번만 쓰고 있기 때문에 그와 유사하게 사용하는 ‘자기결정’이라는 말을 살펴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자기발전이라든가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몸에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116)고 한다. “질투가 심한 시민적(bürgerlich) 자유주의가 감시하는 ‘개인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자유로운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하여 행위가 완전히 나의 것이 되는 것을 결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만 개인들(Personen)의 독립(Unabhängigkeit)을 의미”(117)하고, 다시 말해서 “자기 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한,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강조는 옮긴이], 그리고 어떤 절대적인 것, 모든 가치의 인정에 따른 자유에 대한 갈망은 우리에게 나다움(Eigenheit)”(172)을 요구한다고 한다. 결국 자율성은 자기결정에 의한 행위가 나의 것이 되는 것이고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이며, 그것이 바로 ‘나다움’이다. 곧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의 철학이다. 나의 삶을 다른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나의 삶은 유일하다는 것을 자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신성한 것에 대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다음과 같이 제공한다. “어떤 존재물(Ding)도 스스로 신성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내가 어떤 것에 대한 신성의 선포(Heiligsprechung)에 의해, 나의 선언, 나의 판단, 나의 무릎 굽히기에 의해, 한마디로 말하면 나의-양심에 의해 신성한 것이다.”(77) 결국의 나의-양심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다시금 ‘나’이다. 곧 “무제약적인 자아”(unumschränktes Ich)로서의 ‘에고이스트(Egoist)가 신성한 것을 ‘덧없음’(Nichtigkeit), ‘아무것도 아님(Nichts)으로 해체’시키는 것이다.(77) 그의 저작 첫 문장과 똑같은 마지막 문장을 보자.

 

“나는 모든 일을 아무것도 아님(Nichts) 위에 놓았다.”(Ich hab’ Mein’ Sach’ auf Nichts gestellt.)

 

달리 말하면 모든 일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님(Nichts)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non ens)이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무(Nichts)의 지위는 슈티르너 철학의 존재론의 핵심을 잘 드러내고 있는 “창조적 무”를 정립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유적 본질의 부정은 창조적 무를 긍정하게 만드는 계기(monent)라고 볼 수 있다. 5쪽에서 잘 드러나듯이 “창조적 무”라는 개념은 부정의 활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창조적인 자아로 회귀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자아는 존재할 수 없고 부정의 활동으로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다. 창조적 무로서의 유일자는 현실 극복을 위한 부정의 부정이라는 끊임없는 변증법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언어에서 sein이 ‘항구적으로 있음’을 의미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다. 그리고 있음이 필연적이다’라는 것을 신념하며 있지 않음(Nichts-Sein)은 인식할 수도 없고 밝혀 보여줄 수도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자아의 모습을 항구적으로 있음으로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Nichts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번역하였다. 무엇이라고 규정되거나 고정될 수 없는 아직 아무것도 아닌 그런 존재가 유일자이다. 이렇듯 유일자의 철학은 ‘아무것도 아님’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님’이기 때문에 자유가 성립할 수 있다. 세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자유다! 우리는 자유이다. 그렇기 위해서 세계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야 한다!

 

‘나다움’의 철학이여! 신성한 것의 아무것도 아님(Nichts)을 선언하라!

 

소유자(Eigner)와 ‘친숙하지-않음’(Un-heimlichkeit)은 초-자아(das Über-Ich)이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소유자(Eigner)친숙하지않음’(Un-heimlichkeit)은 초자아(das Über-Ich)이다.

 

1) 신성한 것(Heiligen)경외심(Ehrfurcht)이고 두렵고 낯선 것(Unheimlich)이다.

 

우리는 이미 책의 제목인 ‘유일자’(Einzigen)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저작의 다른 곳에서 그는 개별자(Einzelnen), 자기 소유자(Eigenen, self-owned,106, 254)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결론적으로 이 말들은 모두 소유자(Eigner) 내지 에고이스트(Egoisten)란 말과 연관되어 있다. 그럼, 다시 유일자를 ‘소유자’의 모습 속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당신이 어떤 존경 혹은 경외(공경하면서 두려워함Ehrfurcht)를 품는 모든 것은 신성한 것(Heiligen)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당신 자신조차, 당신은 그것을 살짝 건드리며 “신성한 두려움”(heilige Scheu)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은 신성하지 못한 것에게조차 이러한 색체를 갖게 한다(교수대, 범죄 등등.). 당신은 바로 신성한 것의 접촉이 무섭다. 그 점에 있어서 신성한 것은 두렵고 낯선(Unheimlich) 어떤 것, 다시 말해 친숙하지 못한 것(Unheimisches) 혹은 자신의 것이 아닌(Uneigen) 어떤 것이 있다.(78)

 

여기서 먼저 알 수 있듯이 신성한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물(Ding)도 스스로 신성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내가 어떤 것에 대한 신성의 선포(Heiligsprechung)에 의해, 나의 선언, 나의 판단, 나의 무릎 굽히기에 의해, 한마디로 말하면 나의-양심에 의해 신성한 것이다.”(77) “그것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에 어떤 것을 더 강력한, 더 큰, 더 정당한, 더 나은 것 등등으로 간주한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낯선 힘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그 낯선 힘(Macht eines Fremden)을 단순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확하게 인정하는데, [78]다시 말해 낯선 힘을 시인하고, 그것에게 자리를 내주어, 항복하고, 자신을 속박하도록 한다(헌신, 겸손(Demut), 굴종, 공순 등등)는 것이다.”

이렇듯 신성한 것은 자신의 신성의 선포에 의해 가능한 것이고 그것을 내가 낯선 힘으로 시인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신성한 것은 두렵고 낯선 것이고 친숙하지 못한 것이며 나의 것이 아니다.

 

 

2) 신성한 것은 두려운 낯선 것’(Unheimlichkeit)이고 친숙하지않음’(Un-heimlichkeit)이다.

 

또한 슈티르너는 신성한 것의 특징을 낯섦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을 ‘자신의(eigen) , 곧 소유자의 모습과 대립시켜 논의하고 있다.

 

낯섦(Fremdheit)은 ‘신성한 것들’의 특징이다. 모든 신성한 것에는 어떤 ‘두렵고 낯선 것’(Unheimliches), 다시 말해 낯선 것(Fremdes)이 놓여있다. 우리는 그 낯선 것 안에서 전혀 친숙하지(heimisch) 않고 익숙하지(zu Hause) 않다. 나에게 신성한 것은 나에게 자신의(eigen) 것이 아니다.(40)

 

unheimlich는 원래 뜻은 “섬뜩한”, “으스스한”이다. 데리다는 프로이트 이래 현대 이론가들은 이 단어를 복합적으로 사용하였다고 본다. 이 단어가 “Heim”, 곧 “집”, “고향”, “조국” 등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했고, 이 단어 안에 이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친숙한 것, 국민적인 것(heimlich)에 가장 낯선 것, 위협적인 것이 있다. 프로이트는 Unheimlichkeit을 “두려운 낯선 것”으로 파악한다. 이 단어를 그대로 분철하면 Un-heimlichkeit은 “친숙하지-않음”, 또는 “낯선 친숙함”이다. 데리다는 『에코그라피』 226쪽 이하에서 프로이트를 설명하면서 “두려운 낯선 것”은 언제나 이미 존재해 왔기에 친숙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unheimlich와 heimlich의 대립을 해체한다. 이렇듯 이 단어에 내재한 의미는 역설적이다. 곧 두려운 낯선 것은 친숙하지 않음, “낯선 친숙함”이다. 그런데 위 단락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슈티르너가 사용하는 이 단어도 프로이트의 사용법을 함축하고 있다. “두려운 낯선 것”은 “낯섦(Fremdheit)이고 “낯선 친숙함”이다. 슈티르너는 여러 곳에서 ‘유령’, ‘인간’을 두렵고 낯선 것으로 이해한다.(37쪽, 44쪽, 78쪽 참조)

또한 unheimlich와 heimlich의 대립의 해체는 이미 위의 인용문(78쪽)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의 문장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나 우리에게 친숙하게(heimisch) 느꼈고 더 이상 두렵고 낯선 것(Unheimlichen), 다시 말해 신성한 것과 신성한 전율(Schauer)을 느끼지 않았다는 거만한 망상이 생길 것이다.(311쪽)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두렵고 낯선 것은 무엇일까? 국민적인 것(heimlich)은 아닐까? 그것은 가장 낯선 것, 그래서 위협적인 것일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가족, 애인, 고향, 국가, 사회, 도덕, 인간, 학교, 교육 등등 이라면, 그것들은 또한 우리에게 가장 낯선 것이고, 두렵고 낯선 것은 아닐까?

 

3) 신성한 것(Heiligen)은 두려운 낯선 것(Unheimlichkeit)이고 자아(das Über-Ich)이다.

 

그는 ‘자연스러운 두려움(Furcht)’과 “신성한 두려움” 곧 경외심(Ehrfurcht)을 구별한다. 요컨대 두려움은 해방의 여지가 있지만 경외심은 자아를 지배하는 내적인 힘이다.

 

두려움에는 간지(奸智:List), 기만(Betrug), 책략(Pfiffe) 등을 통해 두려웠던 것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한 시도가 여전히 남아있다. 이와 반대로 경외(공경하면서 두려워함Ehrfurcht)는 완전히 다르다. 경외에는 두려워 할뿐만 아니라 존경하는(geehrt) 것이다. 이를테면 두려웠던 것은 내가 더 이상 빼앗을 수 없는 내적인 힘(Macht)으로 되었던 것이다. 나는 완전히 그 권력의 지배권 안에 존재하고….. 나와 두려웠던 것은 같은 것(eins)이다.(78)

 

신성한 것은 에고이스트가 접근할 수 없어야만 하는 모든 것이고, 에고이스트의 (Gewalt) 밖에 있어서, 다시 말해 에고이스트보다 위에 있어서 건드릴 수 없는 모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성하다는 것은 모든 양심의 문제(Gewissenssache)이다.(77)

 

‘신성한 것’은 프로이트(Das Ich und das Es, 1923; 슈티르너의 저작은 1844년에 출판되었다)이래로 간단명료한, 더 현대적인, 익히 알고 있는 표현인 초-자아(das Über-Ich)이다(Bernd A. Laska, Der “Eigner” bei Max Stirner, 46). 따라서 슈티르너의 의미에서 신성한 것은 아이에게 그때그때의 (우연적인)사회의 최초에 낯선, 투사된, 내면화된, 규범적 구조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성한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교육의 본질적 결과물이다.(Bernd A. Laska) 우리의 교육은 어떤가? 우리들은 소유자인가? 아래의 글을 음미해 보자.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우는(알고 있는, 연구하는 등등) 것인데, 다시 말해 어떤 고정된 대상에 전념하고, 그것에 침잠(沈潛)하여, [79]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과의 관계는 폐지의 관계(Auflösens)(제거의 관계 등등)가 아니라, 앎의 관계, 근본을 캐는 관계이고 토대를 굳히는 관계 등등이다.

 

우리는 기존의 교육에 대해 어떤 관계를 취하고 있었고 있었어야만 했는가? 고정된 대상에 대한 침잠의 관계인가? 아니면 고정된 대상과의 폐지인가? 신성의 선포(Heiligsprechung)인가? 아니면 탈신성화인가?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소유자’의 모습은 또한 ‘자율성’(Autonomie)과 관련된다.(‘그 자신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을 뜻하는 autonomos을 어원으로 한다. 이 말은 ‘그 자체’를 뜻하는 그리스어 ‘auto’와 ‘법칙’을 뜻하는 nomos의 합성어이다.) 물론 이 단어는 233쪽에서 한번 언급되지만, 이 단어는 자유재량(Willkür)과 자기결정(Selbstbestimmung)과 관련되는 것이며 유일자의 모습을 해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후에는 다시 자율성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나는 유일한 존재이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새 블로그진을 개시합니다. 슈티르너 연구자인 박종성 회원이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Der Einzige und sein Eigentum)』(1845)를 읽으며 번역과 자신의 의견을 조합한 글을 게재합니다.

앞으로 쭉 연재합니다. 좀 어려운 글이지만 관심있는 분들 많으실 줄 압니다. 일독 바랍니다~

 

 

“나는 유일한 존재이다.”

요한 카스파 슈미트(Johann Kaspar Schmidt) (1806–1856)는 필명인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로 더욱 잘 알려진 독일 철학자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쳤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슈티르너의 주저인 『유일자와 그의 소유』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는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필자는 그의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을 현실의 문제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 책 제목에서 ‘유일자’(Einzige)는 영문판에서 ‘the only one’, ‘the ego’, ‘unique’ 등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정작 슈티르너는 이것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을 153쪽에서 말한다. 먼저 아래 구절을 보면서 유일자 개념을 파악해 봐야 할 것이다.

 

“사람은 유대인이나 기독인처럼 자신을 ‘어떤 특수한 존재’(Besonderes)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나 자신을 어떤 특수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einzig) 존재로 간주한다. 물론 나는 다른 사람과 비슷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교나 반성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나는 비교될 수 없는 유일한(einzig) 존재이다. 나의 육신은 다른 사람의 육신이 아니며, 나의 정신은 다른 사람의 정신이 아니다. 만약 당신들이 나의 정신과 육신을 ‘육신이나 정신’이라는 진부한 말(Allgemeinheiten)에 포섭시킬 경우에, 그것은 나의 육신, 나의 정신으로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는 당신들의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기껏해야 나의 것에 대해 하나의 ‘호명’(Beruf)을 할 수 있다.”(153쪽)

 

 

“비교될 수 없는 유일한(einzig) 존재”라는 슈티르너의 생각을 다시 생각해 보면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비교될 수 없다고 읽을 수 있다. 그런 존재가 우리들이다. 따라서 비교는 타자를 전제로 하는데 근원적으로 우리들은 비교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라고 한다면, 타자에 의한 인정의 욕구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타자로부터의 인정이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동등’해지고 싶다는 욕구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슈티르너가 말하는 ‘유일자’는 자신을 ‘유일자’로 인정하라는 요구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유일자는 ‘호명’될 수 있을 뿐이지 실제로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은 타자에 의한 인정 이전에 유일자라는 존재론적 차이가 선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게 인정은 타자에 의한 인정이 아니라 자신을 유일자로 이해하는 자기 존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슈티르너는 ‘비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가? 아니다. 그는 ‘비교’(Vergleichung)을 말한다(229쪽). 그런데 그가 말하는 비교는 ‘동등한 비동등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립은 완전한 -구별성과 유일성 속에서 사라진다. 이것이 새로운 공동성 혹은 새로운 동등성(Gleichheit)으로 간주될 수 있긴 하더라도, 여기서 동등성은 바로 비동등성으로 존재하고 단지 비동등성일 뿐이다.”(같은 쪽) 유일자는 비동등성의 동등성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유일자라는 동등성으로 볼 때, 그 동등성은 비동등성의 동등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유일자의 존재론적 의미는 ‘자기 부정(Selbstverleugnung)’이 아니라 “너의 독특함(Absonderlichkeit[distinctness])이나 특이성(Eigentümlichkeit[peculiarity])”(228쪽)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개인을 종속된 사람으로 생각했었고 실제로 단지 어떤 사회이론이었”기 때문에 개인에게 모든 ‘자신의 것’(Eigene)은 가장 화나게 하는 나쁜 평판을 얻어야만 했다(186쪽). 흔히 Eigennutz(사리(私利)), Eigensinn(고집), Eigenwille(멋대로 함), Eigenheit(이상함), Eigenliebe(이기심)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eigen’(자신의, 자기의)에서 파생된 단어들을 선호하고 이런 단어들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용(Eigennutz), 자신의 생각(Eigensinn), 자기 의지(Eigenwille), 자기 자신임(Eigenheit), 자신의 사랑(Eigenliebe) 등등.”(186쪽)을 선호한다. 결국 ‘자아가 강한 사람’(Eigenwilligen)을 추구하는 것이다(243쪽). 자아 존중을 포기하라는 것은 일종의 체념인데, “체념(Entsagung)의 관례는 너의 갈망(Verlangen)의 격정을 냉각시킨다”(67쪽). 유일자로 자신을 존중하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은 ‘가장 엄격한 체념-론’(Entsagungs-Theorie)(153쪽)이다.

 

우리는 자신으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신을 존중했는가! 아직도 우리 사회는 가장 엄격한 체념-론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자기 존중이 약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약한 자아는 온갖 열등감과 우월감, 자존심이 아닌 자만심으로 살아가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다른 눈으로 자신을 이해할 필요가 절실히 요구된다.

 

“나는 인간으로서(als Mensch)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곧 인간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나로서(als Ich) -나를(Mich) 발전시킨다.”

 

“이것이 -유일자의 의미이다.” (406쪽)

 

 

위와 같은 존재론, 곧 ‘인간’이라는 추상성이 아니라 ‘나’라는 구체적인 존재를 더욱 강조하는 것은 개념의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언젠가 사람들이 인간(Menschen)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표상하게 만들었던 이후에, 우리에게 바로 그 개념을 이런 혹은 저런 존경받는 사람으로서 존중할 것을 요구하고, 마침내 이러한 개념의 가장 확장된 이해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인간을 존중하도록 하라”는 명령이 생겨난다.”(271쪽) 위 인용한 문장에서 ‘인간으로서’(als Mensch)와 ‘나로서’(als Ich)는 대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대립에 주목하여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나’에 대하여 ‘인간’(Mensch)이라는 정체성 혹은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곧 인간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나’에 대하여 ‘나’(Ich)라는 정체성 혹은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유일성(Einzigkeit)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에 실존을 제공한다.”(272쪽) 결국 ‘나’라는 유일자에 대해 추상적 의미를 지닌 ‘인간’이라는 정체성과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유일자이기에 ‘나’라는 정체성과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유일한 존재이다.”(406쪽) 우리는 이것을 자아 존중의 욕구로 이해할 수 있다. 인본주의 심리학자인 매슬로(Maslow)는 타인으로부터 존경 받고 싶은 욕구는 지위, 명성, 인정, 권위, 지배에 대한 욕구를 포함하는 반면에 조금 더 높은 욕구인 자기 존중에 대한 욕구는 자신감, 독립심, 자유 등에 대한 욕구를 포함한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다면 ‘유일한 존재’는 후자에 해당될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둘의 만남이라는 사랑에 있어서 ‘경계 넘기’의 예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제시한다. 슈티르너는 “효성보다는 당신의 열정에 더 귀를 기울이는 저 자아가 강한 사람(Eigenwilligen)”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라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Eigensinn)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효성(Pietät)이라는 말은 우리가 효도라고 말하듯이 가족의 유대에 대한 충실성을 의미한다. “만약 순종하는 여성이 자신의 의지(Eigenwillen)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고 어떤 높은 힘에 겸허히 굴복하고 있는 것을 의식한다면 어떨까? 효성이라는 미신이 그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굴복했고 희생했다!”(243-244)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