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2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잘 설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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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anyone’의 한 명에 불과한 존재로 여겨지는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야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단 비교를 시작하면 우리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나보다 나은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런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고, 저 사람은 저런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다. 항상 내게 없는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 있기 마련인 것이다.

이런 식의 비교 속에서 자꾸만 자신에게 절망하게 되면 화가 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미워지고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를 느끼게 된다. 자신에 대한 실망은 자신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을 학대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도 학대하는 방식으로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이 자기 주변 사람들은 공격하지 않겠는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버린 가장은 자신에 대한 실망이 지나쳐서 중독자가 된 것이고 중독자가 되어 다시 또 가족들에게 인정을 못 받게 되니까 가족들을 폭력으로 학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사회구성원들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한 사회구성원의 행복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 순위는 13위인데 행복체감순위가 97위라는 것은 우리가 경제적 요인외의 다른 측면에서 사회구성원의 행복도를 상당히 저해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경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는 단기적으로 나타나지만 이 과정에서 바로 행복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꾸미기_유럽2013.01 192비교는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 이렇게 비교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확인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만 현대인들은 자신의 고유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쓸 데 없이 타인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진다. 그러나 A에게는 A의 장점이 있고, B에게는 B의 장점이 있으며, 나에게는 나의 장점이 있는 법이다. 즉 우리 모두 각자의 장점의 내용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교를 부정확하게 하면서 각자의 장점을 제대로 인식해내지 못해 불행에 빠져버리곤 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우리는 타인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고서는 열등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즉 ‘그 사람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고 나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그걸 잘 하는데 나는 왜 그걸 못하지?’의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사람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니 일이 더 커진다.

내가 모자라는 부분에 신경을 쓰다보면 그 부분에서 잘하는 남이 더욱더 눈에 띄게 마련이다. 잘나고 싶고 잘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남이 잘 하는 게 눈에 잘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를 하게 될 때는 자신이 그 사람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는 식으로 잘못된 비교를 하지는 않는지, 그 사람이 가지지 않은 장점을 내가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제대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잘못된 비교 속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는 고통을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열등감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어디에 열등감을 느끼는가 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보이다. 어차피 열등한 면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으니 나는 나의 열등한 면을 열심히 바꿔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미 생긴 열등감이라면 그 열등감을 분석해서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자신을 계발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것이 열등감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이다. 열등감을 느끼느라 고통스러웠는데 그 고통을 통해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면 정말 손해 보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아들러 역시 열등감을 ‘창조성의 원천’으로 보았다.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에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단점이 있어서 큰 일이다.’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나에게는 나의 성향이 있고 그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는 때는 있을 수밖에 없다. 성향이라는 것이 좋게만 발휘되고 나쁘게 발휘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날씨가 변하지 않고 늘 똑같기를 바라는 것처럼 허황되다. 우선 나의 성향은 성향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나는 ~~한 사람이다.’라는 선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성향이 좋은 방향으로 발휘되도록 발현방식을 조절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단점이 있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과도한 비약을 해서는 곤란하다. 누구에게나 성향이라는 것은 있고 그 성향이 나쁘게 발휘될 때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

안젤름 그륀(Anselm Gr?n) 신부의 말대로 자신의 가치를 느낀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약점과 한계 속에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를 의식함을 의미한다. 그는 『자기 자신 잘 대하기』라는, 우리에게 위로를 많이 주는 책에서 “나는 나에게, 내 실수와 약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과 공감한다. 나는 그것들에게로 향한다. 그것들은 있어도 된다. 사랑하는 이의 눈길 아래에서 그것들은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의 약점이 ‘있어도 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나에게는 이러한 약점이, 타인에게는 저러한 약점이 있을 뿐이다. 약점의 종류가 다를 뿐 약점 자체가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만 크게 보고서는 타인들이 모두 자신의 약점만 쳐다보며 비난할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타인들은 그렇게까지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가 나의 약점에 당당한 태도를 취하면 타인도 나의 약점을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내가 나의 약점에 신경 쓰면 오히려 그 태도가 타인의 공격성을 자극해 계속 공격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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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치는 내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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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은 위안을 얻는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니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사실 근거가 없는 얘기이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또 철학은 삶의 범위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유의미하게 언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철학적으로 따져 묻는 것은 별로 적합한 일이 아니기는 하다. 철학은 따져들 수 없는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다루어서도 안될 것이다.

17살의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은 선한 존재자의 작품일 수 없다!”고 일기장에 썼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깨달음을 전제로 해서 이 고통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철학적으로 고민했다. 살다보면 조물주의 악취미에 대해 절망하는 때가 있다. 왜 존재하게 해서 이 고생을 하며 살게 만드느냐는 원망이 솟구칠 때이다. 사실 ‘세상의 이 모든 것이 왜 존재하는가?’, ‘왜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가?’는 철학의 제1질문이다. 이 역시 답을 유의미하게 낼 수 없는 문제이지만 인간이면 묻게 되는 질문이다. 삶의 이유 자체에 대해서는 철학이 주는 답이 없다. 물론 철학자들은 답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이러저러한 이유를 찾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삶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20대 초반에 삶은 불쾌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불쾌한 인생에 대해 사색하며 지내기로’ 결정한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철학을 접하다보면 그들의 철학 자체가 이유 없이 시작된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유의미하게 살다 가려고 노력한 흔적임을 느끼게 된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체계적이고 정밀한 철학을 구축하기도 하고 문학적이고 울림이 있는 내용의 철학을 구축하기도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설명해내려는 그 노력이 가상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자기 삶의 이유는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 인생의 색깔은 자기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 빈민운동에 헌신한 아베 피에르(Abbe Pierre)신부님

평생 빈민운동에 헌신한 아베 피에르(Abbe Pierre)신부님

아베 피에르 신부님은 인간의 삶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허락된 짧은 순간이라고 하는데 인생에 대해 이보다 더 맞는 답은 없는 것 같다.(지금 나는 논리적 설명없이 비약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비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할 줄 아는 존재로 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논리를 펴는 편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에게서 사랑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

사랑은 자기중심적 논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에로스에 입각한 남녀 간의 사랑의 경우 일정 기간 스스로 이 자기중심적 논리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사자 중에 한 명이라도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소홀한 것 같이 느끼게 되면 그 사랑이 아주 쉽게 파괴되어버리고 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사랑에도 계산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라는 말은 내가 손해를 보았다는 비명이다. 이 역시 사랑이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래서 주고도 잊어버리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인간은 준 것과 받은 것 중 준 것을 훨씬 더 잘 기억하는 편파성의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는 능력과 노력이 요구된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능력과 노력, 그리고 상대방의 고유성을 수용해주고 인정해주는 능력과 노력, 즉 전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력과 인내력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관계가 부부관계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이기 때문에 주고 받는 대차대조표를 많이 신경쓰게 되고 성별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이 든다. 또 부모 자식처럼 본능적으로 연결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많은 노력이 든다.

인간은 누구나 손해에 민감하다. 그런데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는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상대방이 나 때문에 손해본 부분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내가 상대방 때문에 손해본 부분은 너무나 잘 의식하고 기억하는 인간의 인식구조상 사랑을 지속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1등 신랑감, 1등 신부감을 거론하는 데 부모의 유산까지도 감안하는 시대에,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느끼지조차 못하겠다는 시대에 자신이 손해 입는 것을 뻔히 목도하면서 상대방을 참아주는 일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이혼률이 높아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4명 중 한 명은 부모님이 이혼을 하신 상태에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주 말한다. 이혼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말라고 말이다. 내가 결혼생활을 15년 넘게 해보니 이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이다. 이혼이 자연스럽다. 자신이 잘 하고 상대방이 못한 것만 기억하고 상대방이 잘 한 것과 내가 잘못한 것은 의식하기 어려운 인간의 인식구조상 이혼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오히려 결혼이 참으로 부자연스럽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상대방의 생활습관과 가정환경 그리고 상대방 부모님의 비합리성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의 어두움 등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인내하며 결혼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이혼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말고 결혼을 유지하고 계신 부모님을 존경하라고 말이다.

꾸미기_DSCN0699인간이 정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인간을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사랑임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노래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런데 기실 사랑받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랑을 주는 것이다. 당신은 주변 사람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아마도 당신을 가장 사랑해준 사람일 것이다. 설사 당신이 괴롭힐지라도 당신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당신조차 당신의 가치를 의심할 때에도 당신을 믿어주는 사람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을 두고 ‘가치가 있네 없네’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누가 감히 인간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겠는가? 나의 존재가치는 나만 결정할 수 있다. 내가 가치 있게 살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매일 필요가 없다. 사회가 인간의 가치를 등급화해서 그렇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만든 돈에 다시 인간이 노예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현상 속에서 인간은 타인을 인간으로 대우하기보다는 나에게 얼마만큼의 화폐를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인가를 계산해서 ‘가치 있는 존재/가치 없는 존재’로 나누어 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의심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소비할 수 있는가’로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하는 체제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나의 가치를 내가 믿고 내가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가치 없는 존재란 없다. 존재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 존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나의 가치에 대한 판단을 타자에게 맡겨버려서는 안 된다. 나의 가치는 내가 나 스스로를 믿고 나를 만들어나가는 데서 생기고 유지되는 것이므로 내가 만들어가기 나름이다. 나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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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염세주의자의 충고-쇼펜하우어의『행복론』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1

어느 염세주의자의 충고-쇼펜하우어의『행복론』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1

박지용 (경희대 객원교수)

 

이 글은 3월18일 7시에 열린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 ?첫 강연 원고입니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1788. 2. 22 ~ 1860. 9. 21

 

염세주의 철학의 의미

 

B.?러셀은?<서양 철학사>에서 쇼펜하우어를?“특이한 사람”으로 보고,?그 이유를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에서 찾는다.?쇼펜하우어에서처럼 지독한 염세주의는 철학의 역사에서 어떤 유별난 태도라고 말하는 것이다.?철학자는 대체로 삶의 의미를 낙관하는 근거를 설명하고자 한다.?무엇을 낙관하고 또 그 낙관의 기초가 무엇인가는 각기 다를지언정 삶과 세계를 의미있는 것으로 보려는 것이 보통 철학자들의 생각이라면,?삶이 철저하게 의미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 점에서 특이하다는 것이다.

삶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의미 있기도 하고 무의미하기도 한 시간들이 지속적으로 교차하고 반복한다면 낙관도 비관도 아닌 중간적인 것일 수 있다.?삶에 대한 낙관적 태도는 삶을 전체적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보고 가치를 부여하려는 긍정적인 태도다.?비관적인 삶의 태도는 삶과 세계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고 그 고통으로부터 인간이 벗어날 길이 없다고 말한다.?그러므로 이 세 가지 각기 다른 삶의 태도들은 긍정,?부정,?그 중간 정도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관점을 좀 더 옹호적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삶을 의미있게 보려는 낙관적인 노력이 일종의 철학적인 기만이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그러므로 쇼펜하우어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 바는 삶은 원래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이것이 삶의 진리라는 것이다.?비참한 삶을 직시하고 그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철학이라는 말이다.?삶의 비참함을 애써 포장하여 마치 의미있는 것인냥 호도하는 것이야말로 거짓된 철학이게 된다.?그러므로 쇼펜하우어의 태도는 비참하지 않은 삶을 비참하게 생각하는 삐딱한 태도가 아니라,?오히려 두려움 없이 삶의 허무를 인정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용기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해 갖게 되는 거짓 희망,?삶이 전체로서 의미있다는 태도에 맞서 그 무의미성을 부르짖는 쇼펜하우어를 통해 우리는 삶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취할 수 있다.?동시에 우리가 갖는 낙관이 과도한 것이 아닌지,?혹은 삶의 무의미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누구나 삶의 과정에서 간헐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우리는 삶의 무상성을 자각하게 된다.?무엇하러 우리는 아등바등 애쓰며 살았는가 생각하게 되며 삶은 본래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 한 바로 그 지점에 접근한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일관념론의 철학과 예리한 대립각을 세웠다.?쇼펜하우어는 대표적으로 헤겔의 철학이 대중을 기만하는 철학이고 헤겔은 그 점에서 진정한 철학자가 아니라 사기꾼이라고 보았다.?그럼에도 현실에 있어서는 쇼펜하우어 자신이 기대했던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났다.?쇼펜하우어는 대중들이 자신의 철학의 의미를 이해해주기를 기대했지만 그 소망을 대중들이 저버린 것이다.?당대의 학계와 청중들은 쇼펜하우어보다는 헤겔의 철학에 더 많은 호의를 보이게 되었다.?진실한 삶의 실체를 가리고 기만하는 거짓된 희망일지언정 삶을 낙관함에서 불가능한 희망을 찾고자 애쓴 대중들은 그러한 낙관을 보여준 헤겔에 열광했다.?마치 힘든 현실을 잊기 위해 거짓 성공 신화를 자아내는 헐리웃 영화에 보이는 대중들의 반응과 비슷한 것이다.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만,?그러니 우리에게 희망이 필요한 것이야.?허무한 삶을 허무하다고 말하면 삶이 더 허무해지지 않겠어?”?이러한 대중들의 반응은 낙관이 정점에 이를 때,?다시 허무를 수용할 수 있는 탄력을 갖게 되고,?허무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지나친 낙관이 일종의 중간 상태에 이를 수 있게 된다.?요약하자면 삶의 대한 허무주의,?염세주의는 건강한 삶을 유지시키는 한 방식이지만,?낙관적인 태도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시대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2.?염세주의 철학의 근본토대들.?낙관주의에 입각한 환상 파괴

 

03-18@19-27-36-516-2영원한 진리가 어쩌면 찰나적인 인간의 삶에 의미의 빛을 선사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은 인간이 갖는 근원적인 형이상학적인 초월의 욕망이며,?이 점에서 철학의 목표점은 종교와 같은 것이다.?이러한 진리와 진리를 향한 철학적인 태도를 통해서 삶의 의미가 드러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는 점에서 철학자들은 낙관적이다.?그러나 쇼펜하우어에 있어서,?삶은 그 자체로 고통이고 알면 알수록 더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어 보인다.?가령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지향하는 철학(고대회의주의자,?흄,?몇몇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경우에도,?진리에 대한 회의는 진리에 대한 가상이 오히려 삶을 왜곡시키므로 삶을 위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일종의 삶에 대한 낙관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지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세계의 근본적인 원인 자체가 고통을 유발시키므로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고통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말한다.?쇼펜하우어가 생각한 세계는 왜 고통스러운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단순한 답변으로 삶이 원래 고통으로 느껴진다는 답을 생각해보자.?그 답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어떤 관점이기도 하다.?세상은 고통이다.?불교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쇼펜하우어는 기독교의 교리에 대응되는 철학적인 근본전제들과는 전혀 다른 전제에서 삶을 접근한다.?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은 기독교적인 세계와는 다르며 오히려 불교적인 세계와 유사하다.?구원을 약속하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반대:?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것은 그저 기독교적인 세계관일 따름이다.?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하다면,?그것은 의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밖에는 없다.

의지란 무엇인가??쇼펜하우어 철학의 특이성은 의지 개념에 대한 이해에 달려있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8)에서 표상보다는 의지 개념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더 독창적이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쇼펜하우어는 현상과 물자체라는 칸트의 구분을 따름으로써 칸트 철학의 충실한 후계자임을 자처한다.?그러나 인식불가능한 것으로 남겨진 칸트의 물자체는 쇼펜하우어에 있어서는 의지 개념으로 변형된다.?세계는 한측면 현상으로서,?또다른 한측면 의지로서 이분화된다.?그러나 이분화된 두 세계의 경계,?마야의 장막으로 경계지워진 두 세계의 구분을 인간은 자신의 존재이해를 통해서 이해하고 또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인간에게서는 두 가지 방식의 세계가 동시에 공존한다.?말하자면 인간은 외적으로 신체적 존재로서 현상으로서의 자신을 알고 있고,?내적으로는 자기자신 자체는 곧 의지라는 점을 단적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즉 의지는 물자체이다.?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앎을 통해 의지는 존재의 근본 원리가 된다.?인간,?생명체,?무기적 자연에 이르기까지 전체 존재는 맹목적인 의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이러한 개별적인 존재들의 연결망을 존재계 전체의 지속적인 상승화 충동을 낳고 목표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운동이며,?그것이 세계자체의 의지인 것이다.?그러나 그 끝은 개별적인 존재에게는 존재의 소멸,?죽음밖에는 없다.?죽음은 살려는 의지에 가해지는 강력한 폭력이며,각 개별 존재에게 애쓰기의 최종적인 종결을 선언한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서는 단지 순간적이라 할지라도 의지의 봉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그러나 진정한 해방은 오직 자아에 의해 부과된 개인성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포기하는 행위를 통해서 개인은 해방에 도달할 수 있다.?해방은 적극적인 의지의 포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동정적이고 비이기적이며 친절한 행동에 공감하는 사람,?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성인들이 금욕주의를 통해 달성한 것,?즉 살려는 의지의 포기에 가깝게 가 있는 것이다.

 

3.?그럼에도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

 

행복에 대한 많은 단상들은 쇼펜하우어의?〈소품과 단편집?Parerga und Paralipomena〉(1851)에서 주요한 주제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이 저작은 그의 주저?<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와 비교하자면,?비체계적인 단편들의 묶음이라는 특징을 갖는다.?일종의 에세이적 저작인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우리는 때로는 행복을 느끼고 때로는 불행을 느끼기도 한다.?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행복을 느끼는가??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갈증이 날 때 물을 마실 때 우리는 신체적인 만족감을 느낀다.?그러나 개체의 의지는 어떻게 해도 충족될 수 없어서 끝이 없다.?그저 하루하루를 생존할 뿐 인생은 참다운 행복에 한발짝씩 다가가지 못한다.?왜 그런 것인가??삶은 그저 살려는 맹목적인 의지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도데체 존재하지 않는다.?이루지 못한 욕구는 고통을 주고,?욕구의 성취는 싫증을 낳을 따름이다.?본능은 인간을 생식에로 몰아 세운다”삶에의 의지의 가장 완전한 현상은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다.?삶은 허망한 것이다.?결국은 죽음을 향한 과정으로 삶이 드러나는 것이다.?인생을 환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옳다.?지상의 시간은 모든 행복과 삶의 허망함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수단이다.?의지가 억제당하고 방해받을 때 고통이 생긴다.?인식의 정도에 따라 고통이 커진다.?세상에 부러워할 만한 사람은 없는 반면,매우 슬퍼해야 할 만한 사람은 무수히 많다.?세상을 알면 알수록 살면 살수록 그러한 고통이 산재해 있음을 느낀다.

삶은 마치 힘든 과제를 떠맡는 것과 같아서?“나는 인생을 견뎌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삶이 그렇게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면,?합리적인 사고를 할 경우,?아이를 낳아 고통을 되물림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의 생존이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삶의 의미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설득하고 그러한 종교적인 교리를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철학자들은 모두 사기꾼들이다.

기독교 신은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도?“모든 것이 매우 보기 좋다”고 자화자찬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교의 중에 가장 열등한 것이다.?인간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어떤 것,?죄 많은 것,?불합리한 것,?원죄로 이해된 것,그 때문에 죽을 운명에 처한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좋다.?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맹목적인 의지는 우리로 하여금 살아라고 명령을 내리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따르지만 의지 자체의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허뿐이다.

악몽과 같은 삶에서 깨우나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이다.?자살은 다른 사람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에 비하면,?특별히 도덕적인 오류가 없다.?그러나 세계의 고통이 증대되므로 그리 옳은 행위라고는 할 수 없다.?생명을 소멸시킨다고 해서 의지 자체가 소멸되지는 않는다.?자살은 살려는 의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명을 버리는 것이므로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없다.?오히려 가능한 하나의 해결 방식으로서 쇼펜하우어는 미학적 이념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다.?도덕의 형이상학적 이념보다는 미학적 이념이 마야의 베일 너머 세계의 실재를 인지하게 한다는 것이다.?고통 자체에 대한 순수한 인식은 예술가적인 인식을 통해 가능하다.?현상을 벗어난 나를 현상을 넘어선 물자체를 인식하는 것 그것은 예술이다.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삶으로부터의 구원.?현상적 삶으로부터 구원이다.?기독교적 정신은 금욕적인 정신이다.?금욕적 정신이 삶에의 의지의 부정인 것이다.?의지의 부정이야 말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신약의 성경 정신의 핵심은 바로 의지의 부정 금욕적 삶의 이상을 주장하고 있다.?의지의 긍정은 자의식을 자신의 개체에 한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우연에 의한 행운을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결국 타자의 불행에 공감하는 것이 의지를 부정하는 것의 방법이다.?자기 의식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자기 부정을 이겨내려는 강박증이다.

칸트에서 의지란,?인간의 실천이성과 신이 조화된 세계,?목적으로서의 세계를 말한다.?그러한 의미에서 쇼펜하우어는 근대 서구전통에서 최초의 반기독교적인 철학의 원류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의지라는 점에서 여전히 관념론적이다.?비합리주의는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대항한 관념론이다.?세계는 실재로 의지인 것이다.?서로 살려고 하는 아전투구의 현장이 바로 세계의 실재인 것이다.?허무한 세계를 마주 대할 수 있는 지적인 통찰과 용기를 갖는 것,?무의미한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저력을 갖추는 것이 낮은 시선으로 세계를 통찰하는 철학적인 삶의 의미인 것이다.?즉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낙관에 저항하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철학적인 자세라고 말하는 것이다.?구원은 없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예술은 사물의 현상적인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존재 자체의 본성(이념)을 드러냄으로써 현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현실의 고통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위안이다.?고통을 제거하는 윤리적인 대안으로써 고통에 대한 감수성,?연민과 동정을 들 수 있다.?금욕적 삶의 태도 또한 의지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 할 수 있다.

 

 

논현정보도서관 다음 강의는?4월 22일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행복론 :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소장) 입니다. ?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1)[대안도덕교과서]-2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1)[대안도덕교과서]-2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행복

“게임을 더 하고 싶은데 엄마가 못하게 해요. 그래서 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하고 그만둔다고 엄마에게 말했지만, 실제로 인터넷 게임을 그만두고 싶지 않는 것이 저의 솔직한 욕심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게임을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하거든요. 게임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은 생각대로 따로 놀고 몸은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단 말이죠.” 이렇게 사람들의 욕망은 욕망을 실현하려는 대로만 움직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을 일으키는 마음과 욕망을 누그러지게 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는데, 그런 갈등이 바로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감정입니다. 게임을 무작정 못하게 막으면 화가 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게임 아이템을 많이 잃어서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한편 댄스 동아리에서 춤을 추면서 희열을 느낄 때도 있으니, 항상 화만 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또래들과 어울려 놀 때 마음이 편해지지만 집에 들어와 부모로부터 간섭과 핀잔을 받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편안한 마음이 지속되면 행복해지지만, 불편한 마음이 지속되면 고통에 버금갑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고통보다 행복을 원합니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은 어른들도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행복이 무엇일까요? 더 쉽게 말해서 어떤 감정이 행복을 일으킬까요? 아니면 행복의 실체가 무엇인가요? 불행히도 이런 질문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감정이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이든지 그 감정을 걸러내고 아우르고 다스려서 표현하는 방법 안에 행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행복의 실체를 직접 찾으려는 것도 처음부터 잘못된 시도인 것입니다. 동물원 침팬지에게 바나나를 주면 바나나 껍질을 잘 까서 먹습니다. 영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침팬지에게 양파를 던져주면 껍질을 가서 먹으려고 합니다. 껍질을 깠더니 그 속에 다시 껍질이 있어서 껍질을 또 벗깁니다. 그 안에 껍질을 계속 벗기면서 결국은 나무 것도 먹지를 못하게 됩니다. 침팬지의 영리함은 바나나에 통했지만 양파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모른 것입니다. 행복도 양파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양파의 행복을 모르고, 어떤 감정을 벗겨내어야만 그 안에 진짜 행복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오해를 하는 어른들이 많습니다. 행복이란 감정 저 깊이 숨겨진 부동의 실체가 아닙니다. 겉에 드러난 감정을 풀어가는 표현과 방법 그 자체가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깨달음은 생각이 고정된 어른보다 약간의 착오는 있을지언정 생각이 유연한 청소년에서 더 많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을 과감하게 멈추고 혼자 힘으로 몇 달 동안 방치되었던 내 책상을 정리한다고 칩시다. 책상 정리를 내 손으로 끝내고 나면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해 대견한 생각이 듭니다. 뿌듯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감정이 바로 행복의 시작점입니다. 물론 그런 감정도 계속 이어가지 않으면 다시 게을러지거나 인터넷게임으로 또 빠질 수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해 보기로 하죠. 인터넷 게임에 빠지게 되더라도 잠시라도 행복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에서 이외의 상황에서 아이템을 획득했을 때, 작년 겨울에 입었다가 보관해 둔 내 잠바 안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이 나왔을 때, 어제 밤 당일치기로 찍어서 공부한 문제들이 오늘 시험문제에 그대로 나왔을 때, 나는 매우 기쁨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행복이 아니라 일시적 즐거움입니다. 일시적으로 즐거운 감정을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감정을 갖게 되는 행동을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연습하지 않으면 아무리 대단한 성인군자라도 결국 게을러지고 순간 감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청소년이 어른들보다 자기 충동에 빠지게 될 우려가 더 크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언뜻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청소년은 가족, 교사, 또래 등에서부터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매체 등에 이르기까지 주변 환경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현상은 성장과 발달의 자연스런 과정입니다. 그래서 자기충동이라기보다 자기를 변화시키는 힘이 더 크다고 해야 옳은 말입니다. 자기충동이 더 크다는 말을 달리 표현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을 크게 성장시킬 가능성이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 청소년들의 장점은 행복으로 가는 행동을 연습할 시간이 어른들보다 훨씬 많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가능한지 더 말해 봅시다.
 

 

2. 책임과 자유

나의 감정과 욕망 그리고 행복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나의 욕망과 행복은 나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감정이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앞서도 말했지만 행복의 상태가 계속 죽 이어져서 욕망의 감정에 너무 흔들리지 않는 내가 바로 행복한 나입니다.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욕망의 감정은 평생 나와 함께 하며, 욕망의 감정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이기 위하여 본능을 넘어서는 윤리감정이 더없이 중요합니다. 윤리적 감정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따지는 이론들이 대학교 윤리학 교재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런 복잡한 이론들을 여기서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간단히 제목만이라도 아는 것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윤리란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윤리학으로서 서구에서는 근대 나아가 현대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편 윤리의 법칙이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여, 우리는 그것을 쫒으면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이론으로서 그 유명한 칸트의 윤리학입니다. 이런 이론들을 다 나열할 수 없습니다만 기존 윤리학의 공통점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다지는 일이었습니다. 책임을 묻기 위하여 나의 자유의지에 다라서 행동을 했는가를 먼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갓난아기 내 동생이 밥그릇을 엎어도 혼나지 않는데, 나는 밥알을 조금 흘려도 아빠에게 혼줄이 나는 것입니다. 나는 갓난아기 내 동생보다 책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나는 갓난아기 동생보다 자유의지를 담은 행동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윤리학은 책임과 자유의 문제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갓난아기 내 동생은 나만큼 책임질 일이 없지만 한편 내 동생은 나보다 자유롭지도 못한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내가 아끼는 잠바를 물어뜯어서 나는 속상합니다. 나는 화난 김에 강아지 콧등을 한 대 쥐어박을 수는 있지만 손해배상하라고 강아지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 집 강아지는 그만큼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동물원에서 키우던 호랑이가 사육사를 물어서, 사육사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호랑이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많았습니다. 냉정하게 분석하여 말한다면 호랑이는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살해했다면 당연히 책임을 물어서 법정에 세워야겠지만, 호랑이에게는 그런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호랑이는 자유가 없으며 사람에게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유를 원합니까 아니면 철망에 갇힌 노예나 동물원의 노리개가 되기를 원합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우스울 정도입니다. 강아지도 목줄을 메어서 줄을 억지로 끌면 깨갱거리면서 싫어합니다. 그런 강아지 목줄을 풀어주면 좋아라하며 신나게 뛰어다닙니다. 하물며 사람은 더 큰 자유를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동시에 그만큼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와 책임의 얽힘이 바로 윤리학의 기본틀입니다. 윤리학의 고전들은 거의 이런 식으로 윤리이론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칸트라는 철학자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칸트의 윤리학을 잘 몰라도 괜찮습니다만, 바로 그 칸트가 자유와 책임을 연결시킨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책임과 자유의 문제를 동기부여라는 관점에서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자유라는 개념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우리는 자유의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복잡하지 않게 그냥 단순히 생각하면 됩니다. 나의 행동이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했다면 그것을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의 잔소리나 무서운 선생님의 명령에 의해서 혹은 학교 선배의 강압에 의해서 내가 행동을 했다면, 그 행동은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즐겁지도 않고 별 효과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일 때 그 나의 행동은 즐겁고 효과도 크다는 것쯤은 어린아이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청소년이 그렇게 하도록 어른들이 놔두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단순히 청소년 개인의 문제이기보다 한국 교육 전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육의 문제를 개선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주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자유롭고 즐겁고 큰 효과가 나도록 하는 길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 안에서 행동의 동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원하는 행동을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서 할 수 있어야만 바로 앞서 말한 나의 행복한 상태를 갖게 되며 비로소 행복해지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발적인 동기가 중요하다는 말쯤이야 누구나 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구태의연하게 다시 반복하는 것 같아 필자도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서 말해 봅시다. “타인의 압박과 관습 그리고 명령 때문에 내키지 않는 일,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다면 과감하게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라고 말한다면 과연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나요? 물론 쉽지 않지만 그런 용기를 항상 연습하는 모습이 바로 청소년의 본능입니다.
 

 

3. 긍지와 인정욕구

용기의 감정은 청소년의 특징이며 장점입니다. 어른들은 직장, 동창, 혈연 등 사회적 관계들을 이미 많이 가지고 있어서 자신을 변화시킬 용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 청소년은 아직 사회적 연관관계를 적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의 변화와 가능성에서 무한합니다. 친구들이나 대중매체의 아이돌 스타로부터 어떤 때는 문학소설이나 영화로부터 간혹 짜릿한 감성적 메시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감성메시지는 나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와 닿는 동기부여가 생기면 우리들은 어서 빨리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라는 말이 있듯이 행동은 신중함이 필요하고 신중하지 않으며 행동의 용기가 자칫 무모함으로 갈 수 있습니다. 자꾸 머뭇거리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친 무모함도 문제가 생깁니다. 머뭇거리는 주저함과 일시적인 자극에 의해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갈등을 합니다. 실은 그런 갈등의 현실은 바로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우리는 갈등이 없는 그런 인간상이 아니라 갈등을 풀어가려는 마음의 과정에서 윤리적 인간을 형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판단을 위하여 중용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중용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중용이라는 뜻은 이것저것을 섞어 놓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용이란 일차적으로 내가 왜 이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과정을 반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그런 나의 반성을 거쳐서 판단과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이 바로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마음이 커가는 징표입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동기부여를 위하여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믿음을 먼저 필요로 합니다. 자기가 갖는 생각을 자기가 믿지 못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절대 옮길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자부심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자기도취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자기도취보다는 자부심이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동기부여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자기도취는 자신이 남과의 관계망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모른 채 행동하는 양상입니다. 자기도취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관계없이 제멋대로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자기도취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독선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믿음은 반성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런 자기도취에 빠진 생각에서 시작된 행동은 실효성도 없으며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결국 반성이 없는 믿음은 매우 위험스러운 생각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은 남의 믿음과 충돌되는지를 세심하게 둘러봐야 합니다. 반성된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한 생각이 자부심입니다. 자부심을 통해서 이룬 행동은 그만큼 실효성도 높고 남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좋게 해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만족도도 높아집니다. 결국 더 높고 뜻있는은 자부심을 더 쌓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만족을 높이고 타인에게도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자부심을 우리는 긍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긍지를 갖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일상의 연습은 자아를 형성하는 청소년기의 가장 중요한 과정입니다. 자부심이 지나치면 자기도취에 빠질 수 있듯이, 긍지가 너무 지나치게 넘치면 오만이 됩니다. 한편 자부심이 없으면 자기불신이 되듯이, 긍지가 부족하면 비굴함이 됩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비굴함을 느낄 때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에게 비굴함을 갖게 되면 더 큰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 즉 자부심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느낄만한 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서, 자신을 의심하는 청소년이 의외로 많습니다. 학교성적 등과 같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획일적인 기준 때문에 생긴 사회적 문제들입니다. 기성세대 혹은 대중매체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기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정말 깊이 있게 되돌아본다면, 나는 내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학교성적은 떨어지지만 만화를 잘 그리는 자부심이 나만의 긍지입니다. 키는 작지만 나의 다부진 성격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도전정신을 남들보다 더 키울 수 있는 나만의 긍지도 있습니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그룹에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게임프로그램 제작에 일찍 발을 들여놓은 나만의 긍지도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자신을 믿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나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를 믿음의 주체성이라고 합니다.

물론 긍지가 넘쳐서 오만해진다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정말 나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나는 오만함도 비굴함도 갖지 않고 적절한 자부심인 긍지를 갖게 될 것입니다. 청소년은 그런 감정의 시소를 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비굴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오만한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지만 그래도 긍지를 찾아가는 변화의 모습이 청소년의 자랑입니다. 비굴함과 오만함의 시소를 타면서 나는 긍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청소년의 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고나면서 긍지를 갖는 사람, 타고나면서 오만하거나 비굴한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긍지는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과 연관합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사람의 가장 중요한 본성은 바로 남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이를 도덕철학에서는 인정요구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뻔히 속보이고 얄팍한 방식으로 자신을 잘 낫다고 표현합니다. 자신을 남에게 돋보이려고 하는 지나친 태도를 간혹 우리는 접합니다. 그런 지나친 태도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려 합니다. 인정욕구가 지나치면 상대방의 인정요구를 침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정요구는 오만하거나 비굴한 욕망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인정욕구는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으면 먼저 나 자신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야 합니다. 어떤 경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자신에 대한 긍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나 스스로 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남들은 나를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 그 어느 누가 나를 믿어줄 수 있겠습니까? 긍지와 용기, 믿음과 인정, 이 모두 통일된 인격체로 향한 도덕감정의 기초입니다.
 

 

4. 겸양

청소년은 수줍음이 많습니다. 수줍음이란 원래 미지의 세상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동양식에서 나왔습니다. 청소년의 수줍음은 어른으로 되는 아주 중요한 감정단계입니다. 부모 밑에서만 자라다가 사회로 나가면서 미지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려는 정신적 면역제인 것입니다. 수줍음이란 일종의 사회화 과정입니다. 즉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감정의 단계이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대표적인 감정의 성장입니다. ‘만약 내가 이러 저러하게 행동을 할 경우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우려심이 지속되는 감정형태로 나타납니다. 거꾸로 말해서 수줍음은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되어가는 소중한 감정입니다. 수줍음은 잘못된 일에 대하여 수치심을 갖는 마음의 시작점입니다. 그래서 내가 수줍음을 탄다고 해서 나 자신을 나쁘게 학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수줍음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서 남에게 양보하며 남에게 베푸는 마음을 키우는 겸양의 시작입니다. 2,500년전 고대중국의 철학자 맹자의 사단설을 들어 보셨나요?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마음을 4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4 가지입니다. 측은지심이란 남의 불행을 보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수오지심이란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사양지심이란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입니다. 시비지심이란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줍음이란 결국 수오지심과 사양지심을 다 합친 마음의 씨앗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수줍어하는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수줍음을 전혀 타지 않는다는 말은 타인의 감정이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행동습관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파렴치하다고 부릅니다. 염치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파렴치하거나 염치가 없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정말 힘들게 합니다. 물론 수줍음의 감정 상태가 너무 지나치면 아무 행동도 못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타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고려하여 행동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부작용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감정이 습관적으로 되면 나의 생각을 내 안에만 가두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나를 이 세상에 표현할 기회를 잃는다는 뜻이다. 그런 기회를 잃었기 때문에 자칫 나 자신을 스스로 자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학에서 벗어나 나의 수줍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생활습관을 들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떻게 하느냐고요? 앞서 말했듯이 자신을 믿고 자부심을 스스로 만들면 우리 모두 수줍음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을 자동적으로(선천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수줍음과 파렴치의 양단에서 겸양의 미덕을 찾을 수 있는 주인은 오로지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의 장점입니다.

제 5 장 자본의 일반 공식의 모순[자본론강독]-13

제 5 장 자본의 일반 공식의 모순

정리 : 김성심

 

 

4장에서는 단순상품유통(C-M-C)이 자본으로서의 화폐유통(M-C-M)으로 전환한 모습을 살핌으로서 자본의 일반 공식을 이끌어냈다.

 

제 5 장 자본의 일반 공식의 모순

 

자본으로서의 화폐유통이 단순상품유통과 구별되는 점은 판매와 구매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화폐로 상품을 구매해 다시 판매함으로써 화폐를 얻은 자본가는 상품을 A에게서 구매하고 다음에 그것을 B에게 판매하지만, 단순한 상품소유자라면 상품을 B에게 판매하고 다른 상품을 A로부터 구매한다. 따라서 두 경우의 A와 B에게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A. 단순상품유통이 가치의 증식을 허용하는가,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순서를 거꾸로 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단순상품유통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단순상품유통이 [거기에 들어가는] 가치의 증식[따라서 잉여가치의 형성]을 그 성질상 허용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연구해 보아야만 한다.”(203쪽)

우선 단순상품유통을 사용가치의 측면에서 본다면 “교환은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거래다”라고 말할 수 있다.(204쪽) 양쪽은 모두 그들 자신에게 사용가치로서는 쓸모없는 상품을 양도하고, 자기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얻을 뿐만 아니라 각자가 모든 상품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환가치의 측면에서 본다면 교환은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건 아니다. 교환 이전에 이미 상품은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교환을 통해서 증대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상품교환은 그 순수한 형태에서는 등가물끼리의 교환이고, 따라서 가치증식의 수단으로 될 수 없다.”(206쪽)는 것을 알게 된다.

B. 등가로 교환되지 않는 경우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 판매자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특권에 의해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예컨대 100의 가치가 있는 것을 110으로 즉 그 가격을 ‘명목상’ 10% 높여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판매자는 10의 잉여가치의 형성을 가져왔는가? 그렇지 않다. 이유는 그 판매가가 다시 구매자로 되어 110에 구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잉여가치의 형성, 따라서 화폐의 자본으로서의 전환은 판매자가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판매한다는 것으로써도 또 구매자가 상품을 그 가치 이하로 구매한다는 것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다.”(209쪽)

“그러므로 잉여가치가 명목상의 가격인상으로부터 생긴다든가 [상품을 가치보다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는] 판매자의 특권에서 발생한다고 하는 환상을 철저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판매하지 않고 구매만 하는 따라서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계급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계급의 존재는 우리가 지금까지 도달한 입장 즉 단순상품유통의 입장에서는 아직 설명할 수 없다.”(210쪽~211쪽)

“그러므로 우리는 판매자는 동시에 구매자이며, 구매자는 동시에 판매자라는 상품교환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기로 하자.”(211쪽)

“이상의 설명으로부터 왜 우리가 자본의 기본형태[즉 근대사회의 경제조직을 규정하는 자본형태]를 분석하면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옛날로부터의 자본형태인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3권 제4편 참조?”(214쪽)

“지금까지 밝힌 대로 잉여가치는 유통에서 발생할 수 없으므로 그것이 형성되려면 유통 그 자체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유통의 배후에서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215쪽)

C. 자본 일반 공식의 모순은 무엇인가?

 

“자본은 유통(의 내부)에서 발생할 수도 없고, 또 유통의 외부에서 발생할 수도 없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해야 하는 동시에 유통의 외부에서 발생해야 한다.”(216쪽)

“화폐의 자본으로서의 전환은 마땅히 상품교환을 규정하는 법칙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등가물끼리의 교환이 당연히 출발점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애벌레 형태의 자본가에 불과한] 화폐소유자는 상품을 그 가치대로 구매해 그 가치대로 판매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과정의 끝에 가서는 자기가 처음 유통해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유통으로부터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나비로서의 성장[즉, 완전한 자본가로의 발전]은 반드시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또 그러면서도 유통영역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조건이다.”(216쪽~217쪽)

에크리[한철연 세미나-라캉분과]

에크리[한철연 세미나-라캉분과]

 

김우철(라캉분과 통신원)

 

1. 분과원: 이병창, 연효숙, 김상현, 신현주, 김형석, 김우철

2. 세미나 진행: 매주 월요일 3시 30분, 2시간 가량 (분과 결성한 지 2~3년 가량 되었음)

3. 세미나 내용: 라캉 텍스트 강독 (<세미나 11권>과 <리비돌로지>를 거쳐 현재 <에크리> 강독 중)

4. <에크리> : 라캉이 쓴 논문들 모음집으로서 라캉 이론의 핵심이 담겨 있는 저작.

라캉분과는 이 저작에서 “거울단계(The Mirror Stage as Formative of the I Function)”, “무의식에서 문자의 심급(The Instance of the Letter in the Unconscious)”을 거쳐 지금은 “모든 정신병 치료에 선행하는 한 가지 문제(On a Question Prior to Any Possible Treatment of Psychosis)”를 영어본으로 읽고 있는 중이다.

“모든 정신병 치료에 선행하는 한 가지 문제”는 라캉이 1955~6년에 진행한 세미나 3권(<정신병(The Psychoses)>)의 핵심 내용을 포함하는 중요한 논문으로서, L 도식과 R 도식에 의한 주체의 설명, 은유의 일반 공식,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버지 이름(부성적 은유)의 기능, 정신증과 아버지 이름의 폐제(foreclosure)에 대한 설명, 그리고 자신의 망상증 경험을 출간한 정신병 환자 슈레버 판사의 자서전을 임상분석의 사례로 다루고 있다.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발전한 문자[철학을다시 쓴다]-24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발전한 문자[철학을다시 쓴다]-24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난번에 제가 이야기했죠.?지역 탐사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거래를 원만히 성사시켜야 하니까 다른 나라의 언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이렇게 해서 여러 나라 사이의 문화 융합이 일어납니다.?가치관이나 종교형태가 저마다 다르고 기록하는 방식들도 이집트사람이 기록하는 방식과 중국 사람이 기록하는 방식이 다 다른데 각 지역의 특수한 언어를 아우를 수 있는 일반 소통구조,?사람들 의식에 어떤 공통치가 있느냐 하는 것을 연구하다 보니까 언어학에 대한 관심과 일반 문법에 대한 연구들도 생겨나죠.

여러분들 가운데?‘뿌리 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본적이 있습니까??그 잡지를 보면?‘1976년’을 글자로 어떻게 표기했습니까??그냥 우리 한글로?‘천구백칠십육년’이라고 표기했습니다.?사람들이?‘6’을 써놓고 거기에 월을 붙일 때‘유월’이라고 읽어야 하는데, ‘육월’이라고 읽고, ‘3살’이라고 써놓고?‘세살’이라고 읽지 않고?‘삼살’이라고 읽는 일이 있습니다.?아라비아 숫자로 쓰인 글을 보고 하나,?둘,?셋,?넷,?하루,?이틀,?사흘,?나흘 이렇게 읽지 않고 일일,?이일,?삼일,?이런 식으로 읽는다고 개탄하는 분을 봤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답 없음)?사실 아라비아 숫자를 중국식으로 읽는 거죠.?그렇지 않습니까??일,?이,?삼,?사,?오,?육,?칠,?팔…?중국 한자를 우리식으로 발음한 것이죠.?아라비아 사람 탓이 아니죠??그리고 아라비아 숫자를 아라비아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안 읽죠??그러면 그것을 우리 방식으로 읽도록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거나 그렇지 않으면?‘뿌리 깊은 나무’처럼 정직하게 우리식 한자음인 천구백칠십육년으로 써야죠.?그런데 그걸 왜 아라비아 숫자로 쓰지 않았냐고 야단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왜 야단치겠어요??습관이 안 돼서 눈에 안 들어온다는 거지요.?이게 시각을 통해서 정보가 한순간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건데,?이것은 도시사회에서 청각문화보다 시각문화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도시사회에서 문자가 발명되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정보가 시각화된 형태로 남아야 서로 믿고 의사소통을 원만히 할 수 있다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사람들이 시각 정보를 신뢰하고,?유기체와 함께 생겨나고 함께 사라지는 청각 정보에 대해서는 믿음을 잃었다는 것은 근본적인 사회변화의 출발을 알리는 현상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이집트를 방문한 그리스 사람들에게 이집트 사람들이?‘네오이’(neoi)라고 부릅니다. ‘네오이’라는 말이 뭐냐면?‘풋내기들’, ‘젊은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어린것들’이라는 뜻도 있지요.?문화의 지층을 두고 말하자면 표면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삶과 땅속 깊이 뿌리내린 사람들의 삶의 결이 다르다고 할까요??아마 이런 사실을 두고 한 말일 겁니다.

제가 초기에 그 이야기를 했지요.?생명의 시간,?모든 생명체의 몸을 관통하는?(의식이 있는 생명체는 의식도 관통하겠죠.)?그런 생명의 시간 가운데서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나누어지게 되는데,?농경민의 의식 속에서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하나였습니다.?달과 해의 순환이 자연의 시간을 규정짓는 것들이어서 자연의 시간은 순환하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하루해가 떴다 지면 하루가 지나고,?날마다 해는 동쪽에서 떠올랐다가 서쪽으로 지고,?달이 차오르고 기우는 것이 되풀이되어 한 달이 되고,?이십사절기를 지내서 한 해가 되고,?이렇게 순환하는 시간의 질서에 맞춰서 사람이 살아갔기 때문에 자연의 시간은 농경민에겐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유목 생활을 시작하는 집단이 나타나게 되면서 인간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에서부터 조금씩 갈라서게 된다,?목초지를 찾아다니는 동안 항구적인 계절을 유지해야 가축과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도려내서 그것을 항구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그래서 유목민의 경우엔 인간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과 더불어 병행해서 나타나는데 그것이 완전한 독립변수로서 자리 잡지는 못했다,?그런데 해안도시 사회에 들어서면서 자연의 시간은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시간이 독립변수가 된다고요.?이 시간의식의 변화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입니다.?여러분들이 현재 알고 있는 시계로 측정하는 시간,?유클리드기하학적인 공간,?이런 게 전부 인위적인 시공간입니다.?자연에 바탕을 둔 시공간이 아닙니다.?아이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에 나오는 우주공간도 자연적인 공간이 아닌 인위적인 공간입니다.?여러분들은 하도 많은 학자들이 떠들어대서 이런 공간들이 실재하는 걸로 착각하기 쉽지만,?그런 시공간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운동을 규제하는?‘정지하는 것은 정지해 있고 마찰이 없는 한 움직이는 것은 일정한 속도로 수평운동을 한다’(관성의 법칙). ‘무게를 지닌 것은 중력에 의해서 낙하 운동을 한다’(중력의 법칙).?이런 이론들 모두 실재하는 운동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법칙으로 보기 쉽습니다.?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제가 여러분들 귀에 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현대인들이 받아들이는 인위적인 시공간 개념은 실재하는 시공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이 이야기는 서양의 과학체계를 뒷받침하는 모든 가정들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저로서도 아주 조심스러운 화제여서 시간이 있으면 나중에 더 자세한 보충설명을 하겠습니다.

 

가네코 후미코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철학자의 서재]

가네코 후미코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철학자의 서재]

박종성(호원대학교 외래교수)

 

짧은 삶과 옥중수고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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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가네코 후미코 지음, 정애영 옮김, 이학사 펴냄)ⓒ이학사

이 책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정애영 옮김, 이학사 펴냄)는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에서 쓴 글이다. 그러니까 옥중수고인 셈이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이들이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아나키스트 박열의 동지이자 부인이었다고 한다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박열의 부인이자 동지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삶에 공감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으로서 혹은 부모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또는 세상을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녀가 옥중수기를 쓴 목적이기도 하다. 그녀는 23살이라는 짧은 생을 감옥에서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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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그녀의 연보를 보면, 그녀의 삶이 얼마나 처절하고 불행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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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1903년 1월 25일에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1903년생이나 실제 나이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그가 6살 무렵 아버지와 이모가 정을 통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아버지가 끝내 이모와 집을 나가자 어머니는 대장장이와 동거를 하였고, 대장장이와 헤어지고 난 뒤엔 항구의 노역꾼과 동거를 한다. 다음해 노역꾼인 고바야시의 고향으로 이주하여 고바야시의 형수의 친정집 오두막에 살기 시작하였고 그 다음 해인 1911년 고바야시와 헤어지고 외갓집으로 이사한다. 어머니는 후미코를 친정에 두고 잡화점을 하는 후루야 쇼헤이와 결혼한다. 그녀는 그때까지 무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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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에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5녀로 입적하여 친할머니가 사는 조선 충청북도 청주군(현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의 고모집으로 가서 살게 된다. 1915~1917년 부강공립심상소학교,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감동하였고 7년에 걸친 식모살이를 벗어나 야마나시의 외갓집으로 돌아온다. 그 다음해에 도쿄에 사는 작은 외할아버지의 집으로 옮겼고, 신문 보급소에서 생활하며 신문을 팔면서 영어 학교와 겐슈학관에 다녔다. 또 그해 연말까지는 도쿄 유시마의 신하나 초에 셋방을 얻어 살면서 가루비누를 팔았고 사탕가게 주인집에서 식모살이를 하였다. 그동안은 학교를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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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경이 조선인을 해치고 있다.

일본 군경이 조선인을 해치고 있다.

1921년 사회주의자 호리 기요토시의 집에서 일하며 기숙하였으나 호리의 생활방식에 염증을 느꼈고, 결국 작은 외할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녔다. 그때 사회주의자들을 알게 되고 사상을 접한다. 1923년 간토대지진이 일어나고 이것이 조선인 때문이라는 유언비어가 돈 것을 계기로 조선인이 6000~8000명이 학살된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대학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불령선인의 비밀 결사 사건’을 발표한다. 이 대중 조직에 박열과 후미코가 있었다.

1925년 후미코는 예심판사가 요구한 전향을 거부한다. 대심원으로 넘어가면 사형을 선고받는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26년 후미코는 박열과 결혼신고서를 구청에 제출하고 그 해 7월 23일, 그녀의 나이 23세에 형무소에서 목매달아 죽는다.?

다른 옥중수고와는 달리 이 저작은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자신의 삶을 모두 지워버리고자 쓴 것이다. 후미코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 생활의 폭로이며 말살입니다. 저주받은 나 자신의 생활의 마지막 기록이며 이 세상을 하직하는 유품입니다. 아무 재산도 없는 나의 유일한 선물로 이를 택하(宅下, 수형자자 소지품이나 영치물 등을 친족에게 인도하는 것)합니다.” (7쪽)?

 

또한 그녀는 이 옥중수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로서는 누구보다도 이 세상의 부모들이 이것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아니, 부모들뿐만 아니라 사회를 좋게 하고자 하는 교육가, 정치가, 사회사상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읽어주면 좋겠다.” (18쪽)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읽기를 그녀는 바랐던 것이다. 우리는 누구의 부모이거나 사회를 좋게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수기를 읽기 바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수기를 읽으면서 그녀가 자주 간절히 목 놓아 외치는 단어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과 그 이후에 사회주의 사상가들,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더욱더 자유에 대한 갈증이 확장되고 깊어짐을 느낀다.

그렇다면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 삶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희망했는지, 처참한 삶은 그녀로 하여금 어떤 이념을 자극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녀의 글 속에서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고 자신의 삶 전체를 음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노예의 삶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후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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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옥중수기는 참으로 슬펐다. 이런 사건도 있었다. 후미코는 친할머니 집에 살면서 식모로 일을 했다. 나물을 삶다가 솥을 깨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할머니는 그 솥 값 1엔 20전을 내라고 하였다. 할머니 집에 와서 식모로 일하면서 딱 한 번 10전을 받은 적 밖에 없던 후미코는 그 돈을 낼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그 솥 값은 일본을 떠나올 때 전별금으로 받은 12,3엔의 돈에서 변상하였다. 할머니 젓가락이 부러진 날은 “정초부터 웬일이냐. 후미, 넌 내가 죽어버리기를 비는 모양이구나. 좋아 단단히 기억하고 있으마.”(101쪽)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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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들이 생기면 후미코는 늘 아침에 밥도 먹지 못하고 겨울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벌을 받았다. 그 상황을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겨울 아침의 추위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저녁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 추위와 피곤으로 얼굴은 나무판처럼 딱딱해지고, 다리는 막대기같이 굳어지고 저렸다. 꼬집어도 감각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배는 고파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103쪽) 그는 이러한 벌을 받은 뒤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이라도 사죄를 해야 했고, 할머니와 고모의 위엄을 위해 ‘앞으로는 절대로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맹세해야 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이러한 경험은 끝이 없었다. 그의 나이 12살 정도였다. 그는 이러한 체험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라. 자기 행동을 남에게 맹세케 하지 말라. 그것은 아이로 하여금 책임감을 빼앗은 일이다. 비겁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음에도 행동에도 겉과 속이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누구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남에게 약속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위를 감시인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위의 주체는 완전히 자기 자신이어야 함을 자각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사람은 누구도 속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진실로 떳떳하고?자율적인 책임감?있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104쪽)

 

그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자율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징벌을 두려워하게 되면서 접시 하나를 깨도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이러한 자율적 인간에 대한 그리움은 그녀를 언제나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늘 불안했고 겁에 질려 있고 차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그녀는 이 수기를 부모들이 읽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렇다. 위의 후미코의 말은 부모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아이를 자율적인 주체로 성장하게 만드는 일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인간이 아닌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책임지는 그러한 인간, 행위의 주체가 되는 인간, 그리하여 어떤 이들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진실로 떳떳한 자율적인 책임감을 지닌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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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기_유럽2013.01 396그녀의 또 다른 경험도 소개해 볼 필요가 있다. 외할머니와 고모의 집에서 식모로 착취당하며 모든 아이들이 하는 생활을 금지당한 후미코는 어른이 되어 길가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게 된다. 거기서 아이들의 엄마가 달려와 기모노가 더러워지니 놀이를 하지 말하고 야단치는 장면을 본다. 아이는 놀이에 빠져 그만두려 하지 않으려 했고, 엄마는 울부짖는 아이를 억지로 잡아끌고 갔다. 그것을 보고 후미코는 마음 속으로 외친다.

 

“왜 그렇게 무리는 하는 거죠? 당신은 대체 아이가 귀한가요, 기모노가 귀한가요? 아이는 기모노를 위해 있는 게 아니랍니다. 아이를 위해 기모노가 있는 거죠. 그렇게 때 타는 게 무서우면 좋지 않은 허름한 기모노를 입혀놓으면 되잖아요.

어른은 자신의 체면이나 안락을 위해 아이를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어른은, 특히 어머니는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지키고 아이의 재능을 키워주는 게 일입니다. 아이의?자유(강조는 필자)를 빼앗고 아이의 인격을 빼앗는 것은 엄청난 죄악입니다. 아이를 자유롭게 놓아두세요. 자유의 천지에서 뛰어노는 건 자연이 아이에게 준 유일한 특권입니다. 그래야만 아이는 무럭무럭 인간다운 인간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128쪽)

 

그가 바라는 인간의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였다. 그리고 자유는 아이들의 유일한 특권인 것이다. 아이들은 자유를 먹고 자라나는 존재다. 따라서 그녀에게 자유의 억압은 가장 큰 죄악이었다. 이것은 아나키즘의 핵심적 주장과 같다. 물론 아나키즘이 자유방임을 허하는 논리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의 자유, 그야말로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오히려 인간이 자본으로부터 착취당하는 자유를 옹호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이러한 자유와는 구분하여 그의 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녀는 스스로의 비참한 삶을 통하여 인간이 착취 받고 이웃이 고통 받는 것을 슬퍼하였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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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결코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얼마나 아이들의 자유를 질식시키고 있는지 다시금 반성해야 한다. 후미코는 할머니와 고모에 의한 고통과 위엄에 질식당한 자신의 모습 속에서 절절히 자유를 외치고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찾고자 했다. 타인의 노예가 아닌 자기 자신의 삶 말이다. 이러한 그의 말은 우리에게 공명한다. 그것은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보편성에 억압된 자아가 아니라 개별적인 자아에의 희구, 자율적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처절한 삶의 반성과 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옥중수고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또 다른 것은 그의 문체다. 그는 화려하거나 추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지 않는다. 옮긴이가 인용한 쓰루미 슌스케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수기는 번역서에 떼어낸 추상어로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고 15년의 전쟁을 겪고도 별로 변하지 않았던 오늘의 일본 지식인들의 허를 찌른다.”(365쪽) 이 구절 또한 우리들에게 반성의 계기를 만든다. 우리는 추상적인 말을 통해서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는가? 비단 지식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사물과 사태를 이해하기 쉽게 하는 것은 중요한 글쓰기의 자세일 것이다.

 

이제 최초의 질문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즉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이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녀는 수기를 마치며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나 스스로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단지 나의 반생의 역사를 여기에 펼쳐놓았으니 다행인 것이다. 마음 있는 독자는 이 기록으로 충분히 알아주리라. 나는 그것을 믿는다.”(353쪽) 그녀가 답을 하지 않은 이 질문에 대한 몫은 우리에게 남는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무엇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그녀의 삶을 둘러싼 시대였으며, 그녀의 삶을 둘러싼 가족이었고 교사였고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였다. 즉 그녀의 삶의 총체적 연관 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을 만든 것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제국주의로 전화하던 시기였다.

더욱이 다이쇼데모크라시로 명명되는 ‘안으로는 입헌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를 표방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3.1운동에 감동한 그녀는 삶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었다. 이렇듯 그녀의 처절하고 짧은 인생, 불꽃처럼 살다간 삶, 지지리 운도 없는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받아 안고 무엇에 공감하고 무엇에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그것은 이 슬픈 옥중수기의 저류에 흐르는 그의 희망이고 행복한 인간의 지향점이다. 그것은 자율적인 인간을 꿈꾼, 가족에 버림받고 가족에 착취당하며 놓고 싶지 않던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자 온전히 자신의 삶을 찾고자 했던 23년의 짧지만 결코 짧지 않은 삶이다. 그녀는 예언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며 수기를 마친다.

 

“머지않아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은 현상으로서는 멸해도 영원의 실재 중에는 존속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그녀는 현상으로는 죽었지만 사상의 기억, 삶의 치열함과 그녀의 삶 자체는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그녀의 옥중수기를 읽으며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아를 찾아가는 그 고단하고 치열한 삶, 그것은 우리가 그녀의 삶 속에서 보다 따듯한 가슴으로 받아 안아야 할 영원의 실재가 아닌가!

그의 글을 읽다보면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자유’다. 어린 시절 자살을 시도하다가 그녀는 ‘내 안에 살아 있는 생명’, ‘생명의 의욕(意慾)’을 느끼고(150쪽), 이후에 그녀는 자신의 진실한 목적은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나 자신의 생명을 고양’시키는 일이었다고 서술한다.(221쪽)

그녀는 자신이 동정의 마음을 갖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쓴다. “나는 돈 있는 사람에게 혹사당하고, 가혹한 대우를 받고, 괴롭힘에 짓눌리며, 자유를 빼앗기고, 착취당하고, 지배받아왔다.”(304) 인간에 대한 공감을 자신의 비참한 삶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삶을 공감한다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다. 그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을 통해 타자를 보고, 타자를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타자에 대한 공감은 다시 또 다른 이들의 삶을 공감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베르그송과 헤겔을 알게 되었다. 또 무엇보다 자신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로 슈티르너, 알티바세프, 니체를 들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실제로 그즈음 나는 그것(꼭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희망에 불탔던 나는 고학을 하여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왔다. 하지만 나는 지금 확실히 알았다. 지금 세상에서는 고학 같은 것을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이 아니다. 소위 훌륭한 인간만큼 하찮은 것도 없다는 것을. 남들이 훌륭하다고 하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나는 남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진정한 만족과?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는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타인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자의 장난감이었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나 자신의 일을 말이다. 그러나 그 나 자신의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알아서 그것을 실행하고 싶다.”(334-335쪽)

 

그녀는 삶의 목적이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며 타인의 노예로 살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녀는 사회주의 사상가, 혹은 아나키스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어린 시절부터 희망하고자 했던 자유의 추구를 더욱 확고하게 삶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진정한 자신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들은 아이들을 부모의 욕망을 관철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고민과 결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하고는 있는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찾고 희망하고 실천하고 있는 그러한 인간을 그녀는 추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러한 삶의 추구는 타자에 의한 욕망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살면서 마치 그 욕망이 자신의 욕망이듯이 간주하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타인의 노예가 아닌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것, 그것은 더 많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처럼 자문한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녀는 이 물음에 자신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금 다음과 같이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혹은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이러한 물음의 중요성은 나의 행동 당신들의 행동과 말이 타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은 관계성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상호영향을 강하게 미치고 있는 존재이다. 이것을 가슴 깊게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과 타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데 모든 힘을 쏟으며 살아갔던 후미코의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자문해야 한다. 정말로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1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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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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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오스트리아 의사 및 정신분석학자로 개인 심리학을 세웠다.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오스트리아 의사 및 정신분석학자로 개인 심리학을 세웠다.

지금 발현되고 있지 않은 자신의 능력과 특성에 대한 잠재력을 마음껏 펼침으로써 우리는 궁극적으로 열등감을 우리의 창조성을 깨우는 연료로 사용할 수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이기고 더 괜찮은 나로 발전시키는 데 써야 할 것이다. – 아들러?

?현대인들은 남들과 다르기를 욕망하면서도 남들에게 뒤떨어질까봐 불안해한다. 광고는 “나는 달라요.” 하면서 남들과 달라보일 수 있는 물건을 구매하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물건을 같이 구매해서 남들과 같아진다. 남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하면 불안해하며 남들과 같은 물건을 가지려 하면서도 남들과는 달리 돋보이고 싶어 한다.

프랑스 철학자 르페브르(Lef?vre)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이라는 책에서 ‘일상성’이란 현대인들이 지겨워하면서도 놓치면 불안해하고 전전긍긍해하는 이상한 것이라고 했다. 일상성으로 인한 극도의 권태와 피로 속에서도 일상성에서 벗어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일상성은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벗어날까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복잡한 감정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남들에게 뒤떨어지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남들과 똑같이 도매금으로 취급되는 것도 싫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심리를 르페브르는 잘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르페브르는 일상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는 덧없음을 사랑하고 탐욕적이며 생산적이고 역동적이라고 진단한다. 유행과 같은 덧없음을 사랑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대해 늘 탐욕적이고, 이렇게 새로운 것을 갈구하니 역동적으로 생산해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인들은 현실에서는 자꾸 새로운 것을 찾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지속적인 것, 영원한 것을 갈구하게 된다. 핸드폰이 새로 나올 때마다 바꾸고 싶어지는 자신을 보면서 옆 사람이 나에게 진력낼까봐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나를 영원히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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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우리가 구매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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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의 소비 패턴을 보면 그 물건이 꼭 필요해서 사는 것만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은 기분 전환을 위해 쇼핑을 가는 경우가 많다.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 자체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패턴을 두고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인들은 기호가치를 얻기 위해 소비한다고 했다. 쉽게 말해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써?얻게 되는 어떤 상징성 때문에 물건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꾸미기_2007_1~3저렴한 큐빅을 구매하지 않고 비싼 다이아몬드를 구매하는 데에는 기호가치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에는 ‘쉽게 살 수 없는 것’이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큐빅과 다이아몬드를 한 눈에 구분해내지 못하고 “그거 큐빅이야, 다이아몬드야?”라고 물으면서도 몇 백 배의 돈을 지불하고 다이아몬드를 구입하는 데에는 상징성이 개입된다. 이는 짝퉁과 명품을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명품가방을 들고 다니며 자부심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백화점에 가지고 가서 진품인지 짝퉁인지를 가려야 할 정도로 맨 눈으로는 진품과 짝퉁을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굳이 몇 십 배, 몇 백 배의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명품을 구입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명품에는 ‘아무나 들 수 없음’, ‘함부로 살 수 없음’이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엄청난 가격 차이를 감수하고서도 (그리고 명품과 짝퉁의 차이를 스스로 판별하지 못하면서도) 아주 높은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명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그래서 명품 마케팅의 비법은 가격을 올리는 것이라고도 한다. 가격을 올려야 더 잘 팔린다는 것은 비싸기 때문에 쉽게 구매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더 가지고 싶어진다는 구매심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원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명품의 상징성이다. 보드리야르가 현대인들은 상품의 구입과 사용을 통해 자신을 돋보이게 하며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위세를 나타낸다고 했는데, 명품구매는 이러한 소비 특성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례이다. 만약에 모두가 명품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어제까지 그렇게도 명품을 원하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명품에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남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바로 명품의 매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명품을 사는 행위에서 ‘남들이 사고 싶어하지만 함부로 살 수 없음의 상징성을 구매하는 것이고 결국은 ‘남들과의 차이’를 구매하는 것이다.

이는 부도 회사의 상품을 대하는 현대인들의 태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제까지 비싼 가격에 팔렸던 제품이 부도난 오늘 갑자기 덤핑 처리된다. 어제의 그 물건과 오늘의 그 물건이 다르지 않지만 품질도 변하지 않았고 기능도 디자인도 변하지 않았지만 어제의 가격과 오늘의 가격은 다르다. 이제 그 물건이 싸게 처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은 옛날과 같은 가격을 지불할 의사가 없는 것이다. (물론 AS를 받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가격 차이가 AS를 받을 수 없다는 단점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가격은 물건의 고유한 가치에 의해서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상황에 의해 매겨지는 것이다.

싸게 팔릴 것이라는 예측이 값을 싸게 책정하도록 하고 비싸게 팔릴 것이라는 예측이 비싼 가격을 책정하게 한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의 소비자들은 상품의 상대적인 사회적 위세 및 가치를 결정하는 의미작용의 질서에 지배받고 있다고 보았다. 부도 회사의 제품은 품질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이 가치결정의 의미작용의 질서에서 평가절하되는 제품이기에 선택될 가능성이 낮고 선택될 가능성이 낮기에 가격을 싸게 책정하는 것이다. 이 의미작용의 질서에서는 ‘쉽게 살 수 없음’, ‘남들이 부러워함’ 등의 요인이 높은 층위에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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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에 손상을 입은 현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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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제품을 한 번 사서 오래 쓰는 것이 미덕이 아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오고 그 물건이 소비되어야 시장체계가 역동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구매해야 시장이 성장하고 경제에 활력이 생긴다. 이러한 메커니즘 때문에 100만 화소 디지털카메라의 생산력을 확보하고도 5만 화소 디지털 카메라부터 팔기 시작하는 식의 기업의 행태가 일반화된다. 제품의 회전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물건에 대한 사람들의 인내력은 그만큼 떨어져간다. 불편함을 참으면서까지 기존의 제품을 쓰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기능이 있는 훨씬 더 편리한 제품이 늘 우리의 구매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모든 것이 빨리 변하는 시대, 그래서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이 없어진 시대에 나도 누군가를 인간으로 존중하기가 어렵고 나의 옆 사람도 나를 인간으로 존중하기가 어려워졌다. 사물이 주는 불편이 빨리 제거해버려야 하는 것으로 되어버린 시대에 사람이 주는 불편을 견뎌야 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옆 사람이 주는 불편을 견디지 않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옆 사람이 나를 불편해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게 된다. 사물과의 관계든, 사람과의 관계든 모든 관계가 인스턴트화하는 시대에 우리는 자꾸만 불안해진다.

인생 전체를 실업자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채워야 하는 현대인들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묻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조차 찾지 못한 채 방황한다.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인생의 가장 기초적인 물음조차 사치로 여기며 취업에 필요한 지식으로만 자신을 채워야 하는 상황이니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어떤 물건을 사고 싶은가는 알지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알지 못한다.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해 느끼게 되는 막막한 공허감과 고독감을 이기려고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물건을 산다. 공허감과 고독감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찾고 소비를 하지만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고 있음을 각자는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노력은 별 소용이 없다. 마음 저 밑바닥에서는 그런 노력을 통해서 채울 수 없는 공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꾸미기_성연현대인들은 공허감과 고독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무감각하고 느낌이 없는 상태에 처하기도 한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무감각하거나 느낌이 없는 상태는 마음속에 있는 불안을 느끼지 않기 위해 방어하는 상태이다. 불안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불안을 느끼는 센서 자체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소외된 채 살면서도 소외되어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상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불안하고 고독하고 공허하기는 한데 어떻게 하면 그 불안과 고독과 공허를 극복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공허감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제3자가 방향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기가 홀로 있지 않다는 위안이라도 얻고자 한다. 인간이 공허하고 불안해지면 혼자 있기가 두려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서 텅빈 마음을 다른 사람이나 물건으로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이 현대인의 전반적인 특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 자존감과 힐링이 주요 화두가 되는 것같다. 서점에 가보면 대중서의 대부분은 자존감이나 힐링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는 역으로 현대인들이 그만큼 자존감에 상처를 입어 힐링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말해준다. ‘무한경쟁’이라는, 듣기만 해도 숨차는 단어가 난무하는 시대이니 그 무한경쟁에서 1등을 할 수 없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자존감에 손상을 입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지금의 사회에서 ‘나’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일 뿐이다. 내가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다. 일자리가 모자라지 사람이 모자라지 않는 시대에 나에게 “너 아니면 안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우리는 너무도 그립다.

그런데 텅빈 공허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또 다른 공허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기대거나 친밀감을 느끼려 해도 그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공허한 각자 각자는 자신의 텅빈 내면 때문에 타인의 텅빈 내면을 들여다보거나 돌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면에 공허를 안고 있는 사람은 사랑으로 그 공허를 채우고 싶어 한다. 그렇게 자신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기는 하지만 타인의 공허를 채우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사랑받으려만 하지 사랑하려 노력하지는 않기 때문에 사랑에 실패한다. 서로가 사랑을 달라고만 하지 사랑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서로 서로 사랑받지 못한다는 쓰라린 마음으로 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악순환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친구가 되지 않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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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의 윤리학에서 자유의 윤리학으로[대안도덕교과서]-1

금지의 윤리학에서 자유의 윤리학으로[대안도덕교과서]-1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청소년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결핍의 존재가 아니다

청소년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발전적 과정이다. 청소년은 어른이 아니지만 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자기 정체성이라는 말이 어렵지만 쉽게 말한다면 “나로서의 나다움을 갖고 나는 태어났다”는 뜻이다. 성숙함에서 볼 때 청소년은 어른만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다운 정체성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청소년 윤리학도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만약 어른이 청소년을 결핍된 존재로서만 일방적으로 다루려만 한다면, 그에 따르는 청소년 윤리학은 타이르고 훈계하고 지시하거나 못 하게하고 칭찬하거나 벌주는 등의 일방적인 규범윤리학이 될 것이다. 일방적 규범윤리학은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이기보다 어른을 위한 윤리학이 될 수 있다.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은 어른이 청소년을 주체적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은 청소년 스스로 미래를 찾아가도록 하는 범례를 제시하거나 청소년 스스로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게 하는 동반적 생활윤리학이다. 청소년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결핍의 존재인지 아니면 자기정체성을 지닌 존재인지는 어른이 청소년을 보는 관점이며, 이런 관점은 청소년 윤리학의 방향을 잡는 핵심이기도 하다.

 

2. 좋음, 착함, 선함

윤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착한 행동으로 이끄는 삶의 준칙이다. 이것이 윤리를 설명하는 언어적 정의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착하다는 것이 무엇이고 행동을 이끈다는 것에 대해서도 더 설명이 필요하고 그리고 삶의 준칙이라는 용어도 혹시 지나친 강령이 아닌지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행동을 자아내기 위하여 그런 착한 행동은 반드시 좋은 행동이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착하다는 것은 좋다는 것과 같은 뜻에서 나왔다. 영어로 말할 때는 다 같이 ‘굳’good이어서 별 문제없이 보인다. 그런데 우리말로 착한 것과 좋은 것을 말할 때 혹시 그 두 표현이 다른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선과 악이라는 대비된 말을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선이라는 표현은 추상적이어서 마치 저 높은 하늘에 존재하여 절대적인 도덕의 완성체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는 선도 역시 ‘굳’의 명사goodness로 쓰인 것이다. 영어로 말하면 다 하나거늘 우리말로 하면 ‘좋은’ ‘착한’ 그리고 ‘선善한’ 것처럼 다른 뜻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그 답을 말하자면 영어에서 ‘굳’은 사물이나 사람에게 같이 적용하여 사용하지만, 우리 국어에서는 ‘착한’이라는 표현은 사람에게만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이라는 수식어는 사람에게나 사물에게나 다 쓰고 있다. 윤리학은 사람의 행동을 문제삼는 것이지 물건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체계가 아니다.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좋음이란 결국 착함이 되어야 한다. 좋은 사람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다. 멋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 공부 잘 하는 사람, 건강한 사람, 인간관계에 능한 사람, 스포츠를 잘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여기서 어떤 학생이 질문할 수 있다. 어떤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착취되고 나쁜 일에 늘 이용당한다면, 그 착한 사람을 과연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가능하다. 그러난 이런 질문은 사물에 적용되는 좋음의 기준을 사람에 적용했기 때문에 생긴 의문이다. 이렇게 좋음을 해석한다면 인간을 위한 윤리학이 아니라 사물을 위한 윤리학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인간을 위한 윤리학을 원하며, 여기서는 특히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을 모색한다. 사람을 위한 윤리학에는 좋음이 바람직함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를 평소에 생각해 본 착한 사람은 나쁜 일에 자신을 이용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으로 자신을 이끌어야한다는 점에서 착하거나 좋거나 선이라는 말은 다 같은 뜻이다.

 

3. 바람직함

바람직한 행동은 또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것이 사람들 일반이 바라는 것과 같을 경우 나의 행동은 바람직한 행동이 된다. 여기서 사람들 일반이란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같은 경우 이를 바람직하다고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은 경험적 설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람직함에는 대부분의 사람들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바라는 그런 바람직함이 있다고 한다. 그런 바람직함은 구체적인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형이상학 세계에 존재한다고 한다. 이런 설명은 형이상학적 설명이라고 한다. 우리는 경험적 설명을 먼저 살펴보려 한다.

경험적 의미에서 바람직하다는 것은 행동을 한 나 자신 말고 행동을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이 나의 행동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기도 하고 혹은 나의 행동양식을 따라하기도 하는 그런 행동을 말한다. 그래서 바람직함이란 나의 특수한 관점이 아니라 남의 일반적 관점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바람직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엄마와 갈등이 생겨서 한 동안 대화가 뜸할 때 엄마와의 화해의 표시로 엄마가 좋아할 듯한 행동을 시도한다. 평소 하지 않았던 방청소를 한다든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엄마가 나의 행동을 인정해주고 칭찬하다면 그런 나의 행동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바람직한 행동, 바람직스러움이라는 것은 내가 속한 가족, 학교, 지역, 사회, 국가가 일반적으로 원하는 것에 맞춰져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행동을 했지만 내 가족이나 학교 선생님은 의외로 나의 행동을 싫어할 수 있다. 이 경우 내가 좋아하는 행동유형과 집단이 원하는 바람직한 행동유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다행히 우리 사회적인 인간은 성장하면서 사회가 원하는 바람직함에 대하여 자기의 행동유형을 조절해가는 탁월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조절의 연습기간이 바로 청소년기이다.

 

4. 모방하는 사회적 자아

청소년기는 바람직한 행동유형을 찾아가는 시기이다. 결국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라는 뜻이다.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바람직한 과정은 자기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판단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어른이 젖먹이 아이를 키우듯 벌과 상이라는 제도를 통한 일방적인 훈육의 윤리학이라면, 청소년 스스로의 자율적 판단으로 세상을 헤아리는 능력은 만들어지기 쉽지 않다. 아이들은 거울을 통해 어른을 바라보고 따라하면서 성장한다. 이미 교육은 학교 입학 이전부터 거울에 반사된 어른의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거울에 비춰진 모습은 고슴도치인데 토끼처럼 행동하라는 어른들의 강요된 윤리 책이라면 그런 윤리 책이 만 권이 된들, 우리들은 강요된 토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춰진 고슴도치를 자동적으로 따라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안다. 동물원에서 어느 정도 훈련된 침팬지 정도라면 모를까, 동물은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고 자기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울을 향해 흥분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한다. 거울에 나타난 모습이 나임을 안다는 것은 인간다움의 기본이다. 그래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 타인에 대한 의식은 윤리학의 출발이다. 왜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내가 다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첫째 나는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한다. 둘째 나는 남을 따라하면서 내가 성장한다. 즉 나는 남을 모방하면서 나의 자기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다. 그만큼 남을 모방하는 행위는 아주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아이는 어른을 모방한다. 우리 모두는 타인을 모방하면서 타인과 함께 하려는 의식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특히 우리 청소년은 어린이와 달리 또래와 어울리기를 시작한다. 또래 어울림은 이제 부모의 그늘아래서 벗어나서 스스로 정체성을 시험하는 중요한 성장단계이다. 또래집단의 특징은 내가 또래들의 친구들을 모방하면서 동시에 남의 모방을 서로 받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또래 모임의 출발은 나도 어엿하게 남의 거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데 있다. 나는 이제 남의 거울이 되어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비춰지는 지를 자각하고 그에 따라 나를 잘 가꾸어간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남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것을 나도 따라하게 되는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나의 사회화 과정이며 나의 나다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러나 또래와 어울리는 시간은 시행착오를 포함한다. 사회적 거울을 통해 타인에게 비춰지는 자아을 잘 닦는 시절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거울 자체를 부정하고 거울보기를 거부한다. 거울보기를 거부하는 시기에, 부모가 자기를 남과 비교하면 가장 싫고 가장 힘들어진다. 어찌보면 거울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다. 거울을 통해 자기가 남에게 비교당하는 그런 모습이 싫기 때문에 거울도 싫어진 것이다. 또래와의 시간은 이렇게 거울과 함께 하지만 어떤 때는 거울이 싫어지기도 하는 그런 기간이다. 즉 사회적 자아를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혼자서 만들어가는 나만의 자아를 추구한다. 모방을 통한 사회적 화해를 배우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만의 성곽을 쌓는 개성을 만들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조절과 타협을 배우며 나아가 주체와 개성을 키워가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뜻이다. 개성을 만들어가는 시간은 창의성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화해를 만들어가는 시간은 도덕을 위하여 정말 중요하다. 사회적 자아와 창의적 자아를 결합시키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다. 모방하기와 개성쌓기의 행동양식을 배워가는 통로가 바로 청소년 윤리학이다.

 

5. 규범은 절대적인가

그런데 윤리가 딱딱하면 윤리는 사람 행동을 바꿀 수 없다. 윤리적 규범, 윤리 행동강령이 윤리적 강요로 된다면 너무 무서워 겉으로는 응하겠지만 속으로는 상황을 피할 궁리만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응대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윤리는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이어야 한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 같은 유명한 철학자는 윤리적인 마음이 원래부터 사람 마음속에 구비되어 있어서 자발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양의 맹자 역시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누구나 다 자동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고 말했다. 강요된 윤리가 아니라 상황을 잘 맞추어준다면 자동적으로 윤리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은 그런 마음이 속에 깊이 감춰져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평소부터 생활 속에서 윤리적 행동규범의 연습이 필요하다. 윤리적인 마음 혹은 측은한 마음이 곧 올바른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측은함을 느끼는 마음이 나의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는 생활의 연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름과 선함이 같은 것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올바름 역시 바람직함처럼 나 자신만의 문제이기보다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많은 여러 윤리학자들은 말한다. 철학적으로 반성한다면, 한 특정한 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정치지도자들이 올바른 행동의 규범을 지나치게 많이 가르치려 든다면 그 올바름이란 반드시 좋은 윤리가 아닐 수도 있다. 정말 올바른 행동 혹은 올바름이란 좋음이나 선한 행동에서 자동적으로 유발되기 때문에 억지로 가르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문명인으로서 올바른 행동양식은 상호간 다양한 약속들의 체계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약속을 존중한다는 행동규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길거리 신호등 지키기, 껌밷지 말기에서부터 인터넷 에티켓이나 공공장소에서의 금연, 전철안의 사회적 예절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행동규범은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십년 전에는 식당에서 흡연이 부정한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 공공장소 흡연은 옳지 않은 행동의 표본이다. 시대와 문화의 차이에 따라 올바름의 기준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착함이나 좋음의 기준도 문화적 차이에 따라 바뀌는 것인가? 이에 대한 생각은 윤리학자마다 다를 수 있다. 우리 책 본문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6. 즐거운 윤리 : 자유 윤리학

결국 외부에서 강요된 딱딱한 윤리보다 내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윤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외부로부터 강요된 윤리를 종속윤리학이라면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윤리를 자유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자유윤리학을 내 삶의 토대로 만들어야 한다. 자유윤리학을 위하여 윤리규범에 따르는 나의 행동은 즐거워야 한다. 규범에 따라서 행동하기는 하지만 나의 행동이 억지스러워 짜증나기만 한다면 그런 윤리는 진정한 윤리행동이 아닐 것이다.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고통일 뿐이며, 이런 종류의 고통을 피하려는 것은 인간의 성향이다. 짜증나지 않는 윤리는 결국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결정한 행동을 하는데서 만들어질 것이다. 짜증나는 윤리보다 즐거운 윤리를 추구하는 것도 역시 사람의 상식적인 성향이다. 즐거운 윤리를 인생에서 구현하는 것이 곧 행복의 열쇠이다.

즐거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즐거운 상태란 고통이 적거나 거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아픔과 즐거움 사이에는 칼로 베듯 선명한 구획이 없다. 즐거움을 갖기 위하여 그 전에 아픔이 동반되는 경우도 있다. 청소년에서 청년에 이르는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갈등과 고민을 한다. 방황과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정체성을 조금씩 확보해간다. 그런 아픔을 뚫고 새로운 즐거움이 잉태될 수 있다. 현재의 아픔이 아프더라도 미래의 즐거움이 예상되고 이 아픔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이 아픔은 아픔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변신한다. 반면에 혀에 달콤한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충치와 당뇨 그리고 비만의 원인이 된다면 그 달콤함의 즐거움은 고통의 씨앗이 될 것이다. 즉 즐거움과 아픔의 차이는 내가 스스로 선택한 나의 자율적 행동에 달려있다. 다시 말한다면 나의 짜증은 내가 하기 싫은 것은 억지로 하기 때문에 생긴 고통의 감정이지, 그 행동을 유발한 대상에 짜증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종속 윤리학에 따르는 나의 행동은 아무리 선하고 바람직하고 올바르게 보여도 즐겁지 않으며, 결국 나의 미래를 행복하게 설계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이 약간은 힘들고 어렵고 아파도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대로 행동하는 그런 자유윤리학에 수반하는 행동은 결국 즐거움을 자아내게 한다.

무어(G. E. Moore 1873-1958)

무어(G. E. Moore 1873-1958)

올바름과 바람직함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행동규범이라면 좋음과 착함 그리고 즐거움 등은 나의 주체적 자유를 유발하는 심적 동기와 맞닿아있다. 무어(G. E. Moore 1873-1958)라는 20세기 초 유명한 윤리학자가 있었다. 그는 윤리학의 많은 기준들이 자연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좋은 사과라고 말할 때 ‘좋음’이라는 것이 마치 사과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음, 착함, 선함은 곧 자연적인 대상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 안에 있는 심리적 판단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미적인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이란 어디에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실제로 나의 감정이 어떻게 발현되는가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많다. 이런 입장은 상대주의 윤리학의 극단적 경우이다. 이런 상대적 입장도 있지만, 최근에는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대한 대체로 일반적인 기준이 우리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과학적 주장들도 많다. 문화양식이나 역사적 변화에 따라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입장을 상대주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우리 문화나 관습에 관계없이 보편적인 기준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입장을 절대주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이런 기준은 윤리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좋음의 기준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다른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윤리학 이론이 있으며, 인간사회와 무관하게 좋음의 절대적인 윤리법칙이 존재한다는 절대주의 윤리이론도 있다. 좋음이라는 것이 나만의 느낌 혹은 공유된 느낌이라면 그런 좋음의 기준은 주관적이거나 상대적인 나의 마음에 소속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나아가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느낌에 의존한 것이라면 그런 윤리는 간주관적 혹은 공리주의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절대주의 윤리학은 느낌이나 정서 등의 인간의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윤리법칙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며, 형이상학적 윤리학이 여기에 속한다.

윤리학의 이론들은 이렇게 복잡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나 자신의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주는 실질적인 윤리가 필요하다. 나 자신으로부터 형성된 동기에 의한 행동 준칙이어야 한다. 나로부터의 동기만이 지속적인 자발적 행동을 이끌 수 있다. 그런 행동을 자발적 행동이라고 부른다. 자발성에 의한 행동준칙들이 바로 자유윤리학의 기초이다. 이런 자유윤리학에 기초한 청소년 윤리학은 크게 두 가지 삶의 안내서를 제공한다. 하나는 욕망에 대한 안내서이며 다른 하나는 행동에 대한 안내서이다. 먼저 욕망에 대한 삶의 안내서를 살펴보자.

금지의 윤리학에서는 모든 욕망적 행동을 금지해야 한다는 규범만이 있다. “신발을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 “껌을 씹어서는 안 된다”, “떠들어서는 안 된다”, “10등 안에 들도록 공부를 해야 한다”, 등의 행동제약 규범은 많은데 내가 자율적으로 하는 행동안내는 없다.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윤리학 전체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렇지만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는 일과 욕망을 누구에 의해서 금지되는 일은 다르다. 욕망이 누구에 의해서 금지되는 그런 금지의 윤리학은 권력의 종속된 윤리학일 수 있다. “너는 오늘부터 날마다 매점에서 우유를 사다가 책상위에 놓아야 해” 라는 명령의 윤리학은 명령자의 욕망의 권력을 채우기 위하여 나의 욕망을 금지하는 일과 같다. 욕망은 나쁜 것이어서 제거되어야 할 무엇이라는 식으로 윤리학이 구성되었지만 그런 윤리학은 진정으로 삶의 행복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욕망은 한편으로 문화적 창의성을 생산하는 끊임없는 생명의 힘이기 때문이다. 금지의 윤리학으로 욕망을 금지시킬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금지된 욕망 속에 창의성을 낳는 욕망도 같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금지의 윤리학이 아닌 자유의 윤리학이 필요하다.

도시사회에서 의사소통 수단의 변화[철학을다시 쓴다]-23

도시사회에서 의사소통 수단의 변화[철학을다시 쓴다]-2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난번에 농경민과 유목민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화,?의식,?관습 이런 것을 이야기했는데,?오늘은 도시사회 중에서도 전제군주가 다스리던 행정도시가 아니라 이오니아 식민지라는 지중해 해안도시에서 성립한 도시사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멈췄습니다.?제가 농경사회에서는 시간을 두고 쌓은 경험이 지혜의 함수가 되고,?유목사회에서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된다고 그랬죠.?그러니까 시간적인 경험의 축적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사회가 있고,?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사회가 있는데,?최초의 서양식 철학자인 탈레스가 태어나고 활동했다는 이오니아 지방의 식민지인 밀레토스,?이런 상업 중심의 도시사회에서는 실제로 두뇌의 회전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사회입니다.?물론 이 사람들은 뱃길을 통해 이곳저곳 많은 곳을 여행하고,?불평등 거래를 평등거래로 위장하는 데 필요해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그 지역 언어를 익히고,?말하는 최초의‘코스모폴리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말하자면?‘세계인’들이죠.

지중해 연안 뱃길로 여러 군데를 다니면서 거래를 해야 하니까,?수시로 바다에 나가 장사를 하면서 자기들이 힘이 세고,?다른 사람들이 힘이 약할 때는 수시로 서로 노략질을 하는 해적으로 바뀌기도 하고,(호머 서사시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도 해적선에 붙들려 가서 오랫동안 고생한 적이 있죠.)?때로는 떼강도로 바뀌기도 하고 때로는 장사꾼으로 거래를 하기도 하고 하는데,실제로 사업을 하는 사람이 대체로 도둑놈 기질이 있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혹시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상처되는 말이 아니기를 바랍니다.(하하.)

어쨌든 지난 시간에도 잠깐 이야기했습니다만,?조그만 해안도시에 아시리아인,?바빌로니아인,?리디아인,?페니키아인,?인도인,?이집트인 등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는데,?그 좁은 도시 공간 안에는 생산지가 없어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외부에서 의식주에 필요한 것도 끌어들어야 하고,?그 밖의 살림밑천이 될 만한 물건들도 끌어들여야 하는데,?그러기 위해선 내부 결속력이 생겨야 하고,?그것이 생기기 위해선 일정한 규율에 따라서 위계질서가 성립할 필요가 있습니다.?이?‘하이라키’(hierarchy)를 설립시키는 데 두 가지 계기가 작용할 수 있죠.?물리적인 강제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설득입니다.

‘폭력적인 국가 기구’와?‘이념적인 국가 기구’의 원초적인 형태가 이 도시에서 나타난다는 것,?어차피 도시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식민주의자의 습성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생산지에서 생산의 교란이 일어난다는 것은 도시민으로서는 목숨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먹을 것이 제 때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도시 사람들은 굶어죽거나 도시를 떠나야 합니다.?생산지를 확보하고 생산물을 장악하는 것은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주변 생산 공동체를 설득해서 고분고분 양식을 내놓게 할 길이 막히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바로 이때가 폭력적인 국가 기구가 작동을 하는 순간입니다.?도시 거주자들은 외교관이나 교사 같은 설득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필요하지만 폭력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군대나 경찰도 그 내부에서 같이 길러 내야합니다.?살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시인들이 주변 생산 공동체를 식민화하는 작업은 불가피한 생존 조건이 됩니다.?한걸음 더 나아가 더 안정된 삶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해외식민지까지 두게 되는데,?델로스 동맹 이후로 아테네 제국주의가 걸었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습니다.(나중에 로마도 같은 길을 밟게 되지요.)

농경공동체에서는 마을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최소 단위였으니까 말로 소통이 가능했고,?유목민들도 소단위로 천막을 치면서 흩어져 다녔기 때문에 의사소통 수단이 말이었습니다.?그런데 지중해 연안의 광범한 지역에 장삿길이 열리고 삶터가 넓어지면서 말만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그 대안으로 글을 통한 의사소통이 요구되지요.?시골에서는 말과 행동이 다르면?24시간도 버텨내기가 힘듭니다.?유목사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나 도시인들의 삶은 대부분이 서로에게 은폐되어 있고,?거리로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말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길이 차츰차츰 막히게 됩니다.?서로 속셈이 달라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더라도 쉽게 가려볼 수가 없습니다.?말로는?‘그쪽에서 소 한 마리 보내면 여기서 곡식 세 말 보낼게’?하다가도 곡식을 구하기 힘들어지면 소 한 마리를 받고도?‘내가 언제 세말 보낸다고 그랬어??여기 흉년이라 한말 보낸다고 그랬지.’?하고 시치미를 떼면 할 말이 없거든요.?그러니까 계약을 글로 맺어야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온 거죠.

이렇게 세계의 온갖 생산물이 도시로 모이게 되면서 삶의 양식은 급속도로 바뀌게 됩니다.?단일 공동체에서는 생산하고 소비하는 양식이 비교적 단순합니다.?자산은 거의 모두 유기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농경사회에서 생산되는 것,?재산가치가 있는 것은 거의 모두 유기물이고,?유목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온갖 물류가 이곳을 거쳐 이동을 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는 도시사회에서는 상황이 바뀝니다.?돈으로 바꿀 수 있는 환전가치가 큰 무기물들이 유기물을 대신해서 도시인들의 자산가치를 무한히 부풀리게 하지요.

유기물이 의식주에 꼭 필요한 것인데도 교역품목에서 뒷전에 밀리고 무기물들이나 사치품들이 더 활발히 거래된 까닭은 어디 있을까요??유기물은 수요가 일정하지 않습니다.?도시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 보았자 곧 썩어버려서 하루아침에 자산가치가 없어져버리기도 하고 가격탄력성이 없어서,?이른바?‘한계효용의 법칙’이라는 기묘한 법칙이 작용해서 조금만 공급이 넘쳐버려도 똥값이 됩니다.?유기물은 도시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공급받으면 되고,?떼돈을 벌어 주는 것은 사치품이나 금,?은,?보석,?향신료나 비단 같은 것입니다.?다행히 사치품들은 무게도 적게 나가 짐이 가벼워요.오늘날에도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유럽과 교역을 하는데 흘수선이 잠기도록 과일이나 곡식 같은 것들을 잔뜩 실어 가지만,?내려올 때는 동당동당 기계 하나 달랑 싣고 내려오는 일들이 벌어지죠.?옛날부터 육로를 통해서건,해로를 통해서건,?장사꾼들은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장삿길에 나서야 했는데 위기의 순간에 짐이 가벼워야 빨리 달아날 수 있고,?싸워도 홀가분하게 싸울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된 측면도 있어요.?이런 이야기 웃자고 한 이야기죠?(일동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