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철학자의 서재]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철학자의 서재]

?오상현(숭실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나는 스댕 요강과 1986년을 기억한다”

 

우연한 기회에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라는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나타내듯, 사회학자인 저자가 바라본 25년 가난의 기록들을 그림을 그리듯 잘 표현했습니다. 서평을 쓸 생각에 책을 읽다가 계획을 바꿨습니다. 사당동 사람들은 저자의 연구 대상이기 이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한 기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서평은 서평이 아닙니다. 그저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을 기억하는 한 젊은이의 고백입니다.

 

“엄마랑 아빠는 진짜 힘들게 살았다. 너희 두 남매만 집에 남겨두고 일하러 갈 적엔 마음이 정말 …….” 사당동 시절을 떠올리던 엄마는 눈물부터 흘린다. 이제는 아줌마보다 할머니에 가까워진 이 여인의 눈물 앞에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애당초 인터뷰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사당동’은 한숨과 눈물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

 

사당동 더하기 요강

 

▲ (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부모님은 내가 네댓 먹었을 때 서울로 상경했다. 첫 번째 도박이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살던 시골에서 위로 형과 누이를 셋이나 두었고, 아래로 동생 둘을 두었던 아빠. 여기에 엄마와 자식 둘까지 거두어 먹이려면 농사일만으로는 답이 안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서울행, 원래 잃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 중대한 선택을 쉽게 하는 법이다. 그런 선택이란 사실 강요되는 것이니까.

사당동을 생각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첫 번째 물건은 ‘요강’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요강을 ‘방에 두고 오줌을 누는 그릇’이라고 정의하는데, 실제로는 똥도 눈다. 멀쩡한 화장실을 놔두고 왜 요강을 방에 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소리다. 요강을 방에 두고 쓰는 것은 화장실이 없어서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 우리 집은, 아니 우리 방은 (어차피 단칸방이었으니까) 반지하로 주인집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화장실은 그 주인집 마당에 있었다. ‘쾅’하고 대문 여닫는 소리가 주인집을 거슬리게 할까봐 해질녘이면 요강이 등장했다. 마치 해가 지면 나타나는 달과 같았던 은빛 스댕의 요강.

 

‘아이들을 방 안에 둔 채 문을 잠가 두고 일 나가는 경우도 흔했다.'(132쪽) 정말 그랬다. 맞벌이가 아니면 버티는 것조차 까마득하게 먼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시던 엄마가 잘 놀고 있으라고 손을 흔들며 문을 닫으면, 이내 ‘철컥’하고 자물통 잠기는 소리가 났다. 밤이 되어 다시 그 자물통 소리가 날 때까지, 잠긴 방 안에 남겨진 (둘의 나이를 합쳐도 겨우 열 살 남짓이던) 남매가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일은 단 두 가지다. 아직 중천에 이르지도 않은 해가 어서 빨리 서녘으로 지기만을 바라는 일, 그리고 남겨진 밥상을 비우고 텅 빈 요강을 채우는 일이었다. 넘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당동 더하기 산동네

 

아빠는 사당동 대부분의 아저씨들처럼 ‘노가다’를 다녔다. 내게는 ‘목수’라는 전문직에 종사했었다고 포장했지만 사실 건설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였던 셈이다. 여러분이 한 번은 가 보았을 ‘예술의 전당’이나 ‘동작대교’를 짓는 일에 참여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이처럼 사당동 아저씨들의 덕을 한번쯤은 본 셈이다. 나중에는 둔촌동에 있는 시장에서 경비 일을 했다. 경비라는 직업도 사당동 아저씨들이 많이 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아버지의 망치질은 여전히 경이로운 수준이라 환갑이 넘은 지금도 망치질은 손수 한다. 나는 장성한 아들이지만 나서지 않는다. 핀잔 섞인 눈총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작은 효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터 옮기는 일은 이들의 자의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자의처럼 보일 뿐 타의일 때가 더 많다. 이들의 직장은 거의 영세 업체들이어서 수시로 주인이 바뀌거나 부도가 나서 문을 닫는다. 또한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직장이기 때문에 월급이 조금이라도 많거나 노동 조건이 좋은 곳이 나오면 주저 없이 옮긴다.”(153~154쪽)

 

▲ 이 책의 토대가 된 사당동의 한 가정에 대한 긴 관찰을 영상으로 풀어낸 다큐멘터리 (조은, 박경태 감독)의 한 장면. 철거촌의 현장. ⓒhttp://indiespace.kr

▲ 이 책의 토대가 된 사당동의 한 가정에 대한 긴 관찰을 영상으로 풀어낸 다큐멘터리 <사당동 더하기 22>(조은, 박경태 감독)의 한 장면. 철거촌의 현장. ⓒhttp://indiespace.kr

엄마는 사당동 대부분의 아줌마들처럼 다양한 일을 했다. 남성시장 어귀에서 양말 장사도 했었고, 겨울이면 산동네를 돌아다니며 찹쌀떡이나 메밀묵을 팔았다. 당시 엄마의 나이는 20대 후반이다.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며 산동네의 인적 드문 밤길을 홀로 다녔을 엄마다. 떡과 묵이 잔뜩 담긴 나무통의 무게보다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삶의 무게가 더 했을 그때,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나와 동생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이후 엄마는 가발공장엘 나가 미싱사로 일했다. 남성시장에서 아빠랑 같이 포장마차도 했었단다.

 

동작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돼서야 우리 남매는 감금에서 해방되었다.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기에 알아서 문도 잠그고 학교에도 갈 수 있었다. 당시 사당동의 인구밀도는 상상을 초월해서 2부제 수업은 기본이었다. 오후반 수업을 받을 때, 한번은 집에서 놀다가 학교 갈 시간을 놓쳤다. 1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내 울다가 어떤 삼촌이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사실 지각을 한 것인데 사정을 들은 담임선생님이 없던 일로 해주었다. 그 덕에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결석은 물론이거니와 지각도 없다.

??

사당동 더하기 교통사고

 

’86 아시안 게임’이 한창이던 그 때, 사당동의 하늘에도 색색의 애드벌룬이 둥둥 떠 있었다. (<사당동 더하기 25>의 저자가 연구를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다.) 바람에 날리는 그 풍선을 따라가다 나는 생애 최악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뼈가 종아리를 뚫고 삐져나온 상황이었다고 들었다. 사고를 낸 아저씨는 이미 의식을 잃은 나를 안고 가까운 병원으로 뛰었다. 사당동 아이들은 늘 이런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시유지에 아무렇게나 지은 집들이나 축대는 언제 무너질지 아슬아슬했고, 구불구불 좁은 길에는 사각지대가 많아서 차 사고도 빈번했다.

 

가해자 아저씨는 적어도 양심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두 군데 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해야만 한다’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애써 나를 세 번째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 세 번째 병원이 고석주 정형외과다. (자리는 옮겼지만 지금도 이수역 근처에 있다.) 당시 원장선생님은 다른 곳과 달리 일단 수술을 해보겠다고 했단다. 만약 실패를 한다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7살 아이의 다리를 어떻게 쉽게 자르겠냐며. 휴대폰도 없던 시절, 길가에 뿌려진 아들의 핏자국을 따라 정신없이 당도한 병원에서 부모님의 하늘은 무너졌을 것이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20년 뒤에 나는 42.195킬로미터 마라톤 풀코스를 5시간 15분 만에 완주했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던 모양이다. 석 달 넘게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내게 아빠는 컬러텔레비전을 선물했다. 그렇게라도 미안함을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생애 첫 텔레비전을 나는 보물처럼 아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우리 살림에 텔레비전이란, 상상도 못할 물건이었다. 그 신통방통한 텔레비전을 통해 ’86 아시안 게임’을 실컷 볼 수 있었는데, 내가 교통사고 당시를 정확하게 1986년으로 기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텔레비전은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 집에 있었다.

 

100일을 넘기고서야 나는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 석 달 열흘 만에 나오는 것은 무리였을 테지만,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시골에 살던 아주 어린 시절, 나는 감기로 오랫동안 앓았던 경험이 있다. 피를 토할 정도였으니 감기보다 더 심한 병이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저 나는 감기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병원비가 모자라 엄마는 하나뿐인 결혼 패물이던 금가락지를 내다 팔았다고 한다. 더 이상 내다팔 물건이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병원은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을 되팔 수는 없었을 테니까.

 

사당동을 떠나다.

 

철거를 앞두고 부모님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대부분의 사당동 사람들이 같은 고민에 놓였다. 또 다른 사당동으로 옮기거나 근처 위성도시로 떠나야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또 철거를 당할 바에야 근처 지방으로 옮기는 게 나을 듯 했다. ‘안양, 시흥 등 서울 근처 위성도시로 빠져나간 경우도 상당했다.'(147쪽) 우리는 안양을 선택했다. 두 번째 도박이었다. 모은 돈을 모두 털어 철물점을 차렸지만 장사가 잘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비록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만 했지만 아빠에겐 ‘내 사업’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작은 방 하나가 딸린 가게로 이사했다. 역시 단칸방이었고 화장실도 밖에 있었지만 적어도 주인집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나는 이 시절을 행복으로 기억한다.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한 뒤로는 늘 가게(집)엔 아빠와 엄마가 있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고,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다. 가난은 마치 그림자처럼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뒤로도 엄마는 꽤 오랫동안 하나뿐인 그 방에서 이런 저런 부업을 했다. 미싱을 돌려 가발을 만들기도 했고, 어떤 때는 전자부품을 끼우는 일도 했다. 전자부품 끼우는 일은 나도 참 열심히 했었는데, 파란색 플라스틱 가루가 많이 날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일을 하고나면 꼭 그 고약한 가루들이 밥 위로 올라와서 밥을 먹다가도 몇 번씩은 집어내야 했다. 귀찮아서 그냥 씹어 넘긴 일도 많았지만.

 

4학년이 되던 첫 날, 그러니까 1990년 3월 2일에 호계동으로 이사했는데, 그해 2학기에 나는 부반장으로 당선되었다. 부반장이 되고 얼마 뒤가 내 생일이었는데 나는 무턱대고 우리 반 아이들을 죄다 초대했다. 심지어 담임선생님까지. 네 식구 편히 눕기도 어려웠던 단칸방에 그 많은 아이들과 선생님을 초대할 발상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없는 살림에 무슨 음식으로 생일상을 차리겠는가? 1990년 그 해 생일에 30명이 넘는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왔다. 물론 천사 같았던 담임 홍금숙 선생님도 오셨다. 그날 엄마와 아빠는 열 마리가 넘는 통닭 값을 대야 했지만 나는 그날 받은 생일 선물(주로 노트나 연필)을 중학교 다닐 때까지 썼다.

 

당시 친구들을 적어도 내가 단칸방에 산다는 이유로 놀리지는 않았었다. 생일 초대에 응해준 친구들 중에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와 잘 어울렸다. 찻길 하나만 건너면 논밭이 펼쳐졌기에 개구리도 잡고 흙장난도 많이 했다. 이후 그곳은 수도권 신도시를 대표하는 ‘평촌’이 되었고, 나는 그곳에 새로 들어선 범계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가난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뒤에 ‘부끄럽진 않아도 내세울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라고 고쳐 생각하게 되었다. 으리으리한 68평대의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고 나오면서였다. 단칸방으로 돌아온 그날 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 <사당동 더하기 22>의 한 장면. ⓒmovie.naver.com

▲ <사당동 더하기 22>의 한 장면. ⓒmovie.naver.com

 

다시 사당동으로

 

이듬해, 철물점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은 부모님은 의왕시 변두리에 21평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물론 융자를 많이 끼고 샀으며 오래도록 갚아야 했다. 어쨌든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단칸방을 벗어났다. 그러나 여유도 잠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자본은 밑바닥 경제까지 잠식해나갔다. 철물점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형마트에 밀려 점차 손님이 줄었고 대신 부모님의 한숨이 늘어갔다. 내가 안양시청에서 공익근무요원을 하던 때, 우리는 충남 공주로 내려와 떡방앗간을 시작했다. 세 번째 도박이었다. 또 다시 제로에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다시 또 10년이 넘게 흘렀고, 떡방앗간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목수였던 아빠의 빈틈없는 철저함과 악착같이 살아서 얻은 엄마의 넉넉한 마음이 근원이었다. 공주로 내려올 당시, 집안이 어려워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았던 탓에 우리의 첫 ‘내 집’은 그대로 남았다. 나는 지금 부모님의 눈물과 피땀으로 얻은 그 집에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가난의 냄새는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그 냄새는 어쩌면 찌든 때처럼 그들 삶 깊숙이 박혀 있어 좀처럼 씻어 내기 힘들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303쪽)

 

그렇다. 가난이란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다. 지금 우리 가족이 이만큼이나 살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세 번의 도박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빠가 (비록 오른쪽 집게손가락 한 마디를 잃었지만) 건설현장에서 크게 다치지 않아서이고, 엄마가 (비록 미싱일 덕에 지금은 양쪽 눈이 성치 못하지만) 집을 나갔다거나 일수놀이에 돈을 떼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며, 우리 남매가 (비록 교통사고의 흉터를 훈장으로 남겼지만) 죽거나 큰 병에 걸리지 않아서이다. 억세게 운이 좋은 경우이기에 예외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예외는 예외일 뿐.

 

어떻게 우리 사회의 빈곤을 끊을 수 있을까?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고 게으른 사람은 가난해 진다’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거짓이라는 것쯤은 이제 부연이 필요 없는 명제가 되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양극화는 가속화되고 있으며, 생활고를 이유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웃들은 늘어만 간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공자 이래로 2500년 동안 우리는 늘 분배보다는 성장을 꿈꾸었고,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여겼으며,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흙에 묻혔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게 (분배)되지 못함을 걱정하며,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치 않을 것을 걱정한다.’고 들었다. 고르게 (분배)되면 가난함이 없어지고, 조화를 이루면 부족함이 없어지고, 편안하게 되면 (마음을) 기울일 일이 없어지는 법이다.”(孔子曰, … 丘也聞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논어>, ‘계씨’)

 

나는 내일도 모교 강의를 하러 가기 위해 사당동을 지날 것이다.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지독한 가난의 냄새도, 은빛 스댕 요강의 기억도 이제는 가물거리는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이웃의 가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때마침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거짓말로 현혹하는 사람들을 걸러낼 시간이다.

 

 

있음과 없음의 연속성[철학을다시 쓴다]-27

있음과 없음의 연속성[철학을다시 쓴다]-27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파르메니데스(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존재론 및 인식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존재의 철학자라 불림)나 고르기아스 같은 사람 이름을 들어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사실 파르메니데스는 아까 제가 했던 이야기의 뼈대를 세운 분입니다.?파르메니데스는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면, ‘있다’, ‘없는 것은 없다.’?있는 것은 굳이 형상화하자면 하나로 있고,?뭉쳐 있고,?구(球)형태, ‘스파이로에이데스’(sphairoeides)로 있다,이런 식 이야기를 합니다.?만일에 없는 것이 있다고 치자,?있는 것은 공간 속에 있거나 시간 속에 있어야 한다,?공간을 놓고 보면 여기 있는 것은 저기에 없고 저기 있는 것은 여기에 없다,?그런데,?없는 것은 없다,?따라서 공간은 없다.?아주 불친절하지만은 훨씬 더 정교한 논리를 그 제자인 제논이 개발을 해서 스승의 말을 뒷받침합니다.

다음으로 시간이 실제로 있다고 해 보자.?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누어지는데,?있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고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오,?미래는 아직 없는 것이다,?따라서 시간도 없다,?이 말도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를 그 제자 제논이 만들어냅니다.?그런데 제논은 얼마나 우직한 사람이냐 하면 파르메니데스도 그렇고 제논도 그렇고,?여러분들이 잘 아는 피타고라스도 그렇고,?어떤 사람은 유클리드까지 여기에 포함시킵니다.(피타고라스도 유클리드도 이탈리아반도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전부 이태리학파들입니다.?파르메니데스,?티마이오스,?제논 이 사람들이 전부 명석한 이태리학파 사람들이다,?그다음에 운동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적인 운동을 뒤집어버린 사람인 갈릴레오까지 이태리 사람입니다.)?워낙 명석한 사람들입니다.

파르메니데스와 고르기아스는 같은 이태리 사람들인데,?이 두 사람이 내세우는 주장은 정반대입니다.?이 파르메니데스는?‘있다/?없는 것이 없다’,?이렇게 주장을 하고 있죠.

이 말에 고르기아스가 정면으로 치받습니다. ‘없다.?있는 것이 없다’?반대죠.?파르메니데스는?‘있다’고 하는데,?고르기아스는 없다,?무엇인가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무엇인가 그 없는 것을 우리가 안다 치더라도 그걸 다른 사람한테 전달할 길이 없다,?입 밖에 낼 수도 없다,?이렇게 얘기합니다.

“한 사람은 있다고 하고,?한 사람은 없다고 하고.?그런데?‘있는 것’이?‘하나’라 하면 우리가 도대체 이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어요,?없어요?(대답 못하고 일동 웃음.)?조금 생략을 하려고 했는데 여러분들 표정을 보니까 생략을 못할 지점들이 자꾸 생겨납니다.?아까?‘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라고 했죠??이것이 참말이라고 그랬죠,?그렇죠?”

“네.”

“그리고 이것이 참과 거짓을 가리는 기준에도 들어맞죠??앞에 있는 것과 뒤에 있는 것이?‘이다’라는 잇는 말로 연결돼 있으니까.?그런데,?가만 있자, ‘앞에 있는 것’과?‘뒤에 있는 것’이라…….?그럼 있는 것이 둘로 있네요.?우선 있는 자리가 다르지 않습니까??하나는 주어의 자리에 있고 하나는 서술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하나는 임자말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하나는 풀이말 자리에 있는데 이게?‘이다’로 연결이 되네요.?둘 이상이 되어야?‘이다/?아니다’로 연결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그렇죠?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이게 말이 되요??아까 있는 것은 둘로 있을 수 없다고 그랬잖아요.?그런데 지금‘있는 것’이 둘로 나뉘어 멀쩡하게 저마다 자리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잖아요.?이게 말이 되냐고요.?말이 안 되죠.?이건?‘거짓말’이다. ‘참말’임을 보장해주는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근거라고 생각했던 게?‘거짓말’이 돼 버리네요. ‘둘’이 있으면?‘둘’이 차지하는 자리가 있기 때문에?‘이어짐’?곧 연장성이 나온다고 합니다. ‘공간’이 곧 거기에 딱 나와 버립니다.?아까?‘있는 것’과‘없는 것’?둘을 놨을 때?‘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이 둘을 나누는 경계가 되어서 이 세 개가 관계를 맺게 되지요??다 이어져 버리죠??그래서 연장선이 생겼는데…….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여러분들 가운데 수학을 잘 하시는 분 계시죠??뭘 기준으로 해서?‘하나’라 하죠??피타고라스는?‘하나’를 뭘로 봤습니까??점(point). ‘하나’?하면 한계가 하나인 것이죠.?한계가 하나인 것은 보입니까,안보입니까?”

“보여요.”

“연장성이 없는 것도 보입니까?”

“아,?아뇨 안 보여요.”

“안 보이죠??그렇죠??안 보여야 합니다.?그러면?‘둘’은요??점이 둘이 모이면 이건?‘선’(line)이라고 하는데 선분에는 한계가 둘 있죠.?양쪽에.?그렇죠?그런데 두 한계도 안 보이지만 그 사이에 있는 것도 안 보이죠??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연장성을 가진 것입니다.?그래서 눈에 들어오죠??그 다음에 이제?‘셋’?하면 무엇이 되죠?”

“면.”

“그렇죠. ‘면’,?한 계가 셋인 것은 면(plane).?삼각형.?삼각형이 최소의 한계로 이루어진 면이죠.?그러면?‘넷.’?한계점이 네 개 있는 것은 뭐죠??입체!?이렇게 한계가 넷이 있는 것을 입체라고 그러죠.?우주에 있는 삼라만상을 다 살펴봐라,?한계가 하나가 있거나 둘로 있거나 셋으로 있거나 넷으로 있거나 하지 않으냐, ‘점’, ‘선’, ‘면’, ‘입체’로 모두 이루어져 있다,?이 모든 것을 전부 보태면 몇입니까,?점이??열 개죠? 1+2+3+4는?‘열’이 되는데 이것은 신성한 숫자다,?테트락티스(tetraktys)는?‘신성한 수다’라고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주장합니다.?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수로 이 세상의 모든 다(多)와 운동을 규정하려고 들었습니다. ‘결혼’이란 건 수로 나타낼 때 몇이냐??이를테면?24다. ‘행동’이란 건 뭐냐? 36이다라든지 이렇게 모든 것을 수로 규정하려고 들었습니다.?여기서 합리적인 핵심을 여러분들께서 이해해야 합니다.?수와 비례관계로 삼라만상을 파악하려고 했다는 거.?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우주를 지배하는 합리적인 법칙을 찾아내려고 그 나름으로 무척 애를 썼다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우리 사고 내용을 들여다보자,?하나만 있으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입도 벙긋할 수 없다,?왜 그러냐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게 될 때 참과 거짓이 구별되려면 꼭 주어와 술어의 형태로 나와야 하는데,?같음과 다름을 구별하려는 순간에 있는 것이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버린다,?또는?‘있는 것’이 아닌?‘없는 것’을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는 게 거짓말이라고 했죠.?그런데 없는 것을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와 운동을 설명할 길이 없고,?이것과 저것을 가려볼 길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이게?‘거짓말’의 여러 모습인 오류,?실수,?사기…….?이런 모든 것의 존재론적인 근거가 되는 겁니다.?우리가 말을 하면서 이 세상 살아가려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절반쯤 거짓말을 깔고 들어간다는 것을 이해하면 됩니다.?온전한?‘참말’은 입 밖에 낼 수가 없습니다.?온전한 참말이라는 것은 침묵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그래서 선불교에서 면벽수련하는 수좌들이?‘개구즉착’,?입만 벙긋하면 틀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입만 열면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한 이유를 이해하겠죠??이게 죄다 거짓말입니다.?귀가 왜 두 개 있느냐 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라고 양쪽에 있는 겁니다.?절대로 외우지 마세요.?여러분들에게 솔깃했던 말들도 다시 한 번 의심해 보십시오.?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설득술’이라고.?제가 이제까지 했던 말이 바로 그?‘설득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저도 모르는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국어: ‘뭐 하지?’?독일어: ‘Was tun?’?불어: ‘Que faire?’?영어: ‘What do?’

시제는 현재로 되어 있죠,?그렇죠??그런데 이게 현재입니까? (대답 없음.)현재라면 여러분께 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여러분들 멀쩡하게 제 강의 듣고 있잖아요.?뭐 하지??하고 질문 던질 시간도 없어요.?그렇죠??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지??이 이야기죠??미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그렇죠??올 날하고 연결이 되어 있는데…….

저도 사실은?‘할’?일은 많은 거 같은데?‘하는’?일 없이?‘되는’?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래서 그냥 실제로 뭐 할 일이 없을까??되는 대로 살지 않으려면 조금 정신 바짝 차리고 할 일을 찾아야지,?이런 생각을 해서 그 가운데서 골라낸 것이 시골 가서 농사짓는 일인데…….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1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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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로 메이(1909~1994), 미국의 실존주의 상담사ⓒLearnHub.com

롤로 메이(1909~1994), 미국의 실존주의 상담사ⓒLearnHub.com

마음속 깊이 진실로 자기를 아끼는 사람은 겸손하게 행동하는 데 반해 마음속에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자만심이라는 위안을 필요로 한다. – 롤로 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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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기를 원한다. 자신이 하루 학교를 가지 않으면 친구들이 모두 전화를 해대며 나를 걱정해주기를 바란다. 자신이 하루 회사를 가지 않으면 그 다음날 출근했을 때 사람들이 모두 내가 없어서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면서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하루 학교를 안 갔을 때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이라도 전화를 해주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루 회사에 결근했을 때 업무내용 확인차 전화 한 번 오고 다음 날 출근했을 때 멀쩡히 어떻게 어떻게 처리했노라고 전달해주는 것으로 끝이다. ‘나여야 한다.’고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세상은 ‘너가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어.’의 태도이다.

나는 세상의 일부다. 그런데 세상의 일부인 나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곤 한다. 이는 나의 생각의 폭을 넘어서는 세상이 나의 생각의 폭 안에 들어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은 늘 나의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어 있다. 나같은 사람이 수십억 명 모여서 만들어내는 곳이기에 세상은 늘 나의 생각을 벗어난다.

그래도 옳고 그름이라는 게 있지 않냐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인간다움을 저해하는 모든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다움이 어떠한 것이냐에 대한 합의는 어렵다. 여기서 상대주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 옳고 그름도 따지고 보면 내 입장에서의 옳고 그름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다움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원칙은 유지하면서 그 방법론과 관련해서 너무 자기 방식을 고집하려다 보면 세상을 나의 폭에서 제한하려는 우를 범하게 될 가능성이 높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은 나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많고 많은 변인들이 복합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곳이기 때문에 내 눈에 옳은 것이 진짜 옳다는 보장도 없고 내 눈에 옳지 않은 것이 진짜 그르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내 수준에서 인간다움의 가치를 높이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내가 생각한 방식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에 지나치게 스트레스 받고 세상에 대한 원한을 가지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세상의 현실의 복잡한 변인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즉 나의 생각의 폭이 좁기 때문에 세상이 내 생각대로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나의 좁은 생각의 폭 안에 세상이 들어온다면 그 세상은 나만 자유롭고 다른 모든 사람의 자유는 억압되는 곳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이 내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전제는 사실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가지게 되는 전제이다. 그런데 인간 누구나 가지게 되는 전제이기도 하다. 세상을 원망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려면 이 전제로부터 놓여 나야 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전제로부터 얼마나 빨리 졸업하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길 바란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박탈하고 싶어 하는 셈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이 세상을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한 것 같다.

생각해보라. 모두의 자유를 존중하려면 이러한 모습의 세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조물주가 계시다면 그 조물주는 이 피조물들의 자유를 지나치다싶게 인정해주는 조물주이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의 자유의지까지 인정해주니 말이다. 원칙적으로 누군가의 자유의지가 다른 누군가의 자유의지를 제한할 수 없게 만들어놓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세상을 사는 인간들이 이러저러한 사회제도로 누군가의 자유의지는 쉽게 실현되도록, 누군가의 자유의지는 쉽게 실현되지 않도록 구조화해놓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나는 세상의 일부고 세상과 나를 비교해볼 때 극히 미미한 변인일 뿐인 나의 마음에 맞게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스스로에게 되뇌자. ‘세상은 나보다 큰데 어떻게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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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사고’에 빠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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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었으면 좋겠고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를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누구나 가지는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다. 나는 이를 ‘100% 사고’라고 부른다.

우리는 100%를 바란다. 한 명이라도 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 얼마나 괴로워지는가를 생각해보라.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세상 모든 사람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심리학에서 비합리적 전제라고 정리해놓은 것 중에 특히 중요한 것에는 다음 4가지가 있다.

1. 인간은 모든 사람에게서 항상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2. 인간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유능하고 성취적이어야 한다.

3. 어떤 사람은 악하고 나쁘며 야비하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비난과 저주와준엄한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4. 일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은 끔찍스러운 파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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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issus, Caravaggio(1573~1610)

Narcissus, Caravaggio(1573~1610)

내가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분명히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 굉장히 신경이 쓰인다. 이런 내용을 강의하러 다니는 나 자신도 전체적으로 상당히 좋은 강의평가에 한두 명이 약간만 안 좋은 소리를 해도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의 마음 생김새가 그러한 모양이다.

물론 선천적으로 이러한 100% 사고에 잘 시달리지 않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100% 사고에 매이지 않는 사람보다는 매이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사실 이 100% 사고는 스트레스의 원천이다. 이 100% 사고만 하지 않아도 많은 심리적 부담을 덜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80%에 만족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80%에 만족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잘 비판해내지 못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잘 비판해낸다. 그런데 그 나의 비판력으로 타인을 보면 타인에게서는 약점을 엄청 많이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원하는 부분을 채워주지 못하는 타인을 보며 실망하게 된다. 자칫하면 우리는 80점인 사람을 -20점으로 대하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의 마음에 안 드는 점에 주목하다보면 나의 장점은 모두 잊고 마치 내가 단점만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80%에 만족하자는 생각은 사실 사람들이 말하는 ‘팔자’라는 것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을 통해서 할 수 있었다. 팔자(八字)라는 것은 나의 생년월일시에 오행, 즉 화수목금토의 다섯 종류의 글자가 모두 8개 정해지는 것을 말한다. 연월일시 4가지의 갑자에 해당하는 오행이 무엇이냐에 따라 나의 팔자가 확인된다. 그런데 이 오행의 다섯 글자가 골고루 들어가는 것이 좋은데 칸이 8개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8개의 글자밖에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다섯 글자를 골고루 2개씩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팔자를 산출하는 방식에서도 인간에게는 아쉬운 부분,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팔자 산출 방식을 보며 ‘인간에게는 100%가 불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는 학문상의 객관적인 근거는 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생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은 타인에게는 100%를 요구하면서도 자신에게서는 약점을 보지 못하기 쉬운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 인식의 편향성에 따라 자신은 100%가 아니면서도 타인에게 100%를 요구하게 되면 인간관계에서는 갈등만 커질 수밖에 없다. 서로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라며 상대방의 단점에만 골몰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야스퍼스(Jaspers)의 말대로 타인이 신이나 성자 같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요구는 모든 관계를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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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괴롭히는 완벽에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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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의 허상은 늘 우리를 괴롭힌다. 만약 스스로에게 어떠한 부족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는 혹시나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끝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잘못된 전제가 우리를 고통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언젠가 집근처 골목을 지나면서 수도 없이 틀리는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되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니 틀리는 부분이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더 세월이 지나니 이제는 몇 개의 음만 빼고는 틀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드디어 전혀 음이 틀리지 않는 연주를 기대해볼 수 있게 되었는데 결국 나는 완벽한 연주를 듣지 못했다. 하도 연습하는 것을 듣다 보니 나도 같이 연습하는 심정이 되었고 완벽하게 연주되는 것을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었지만 연주하는 사람이 꼭 한두 음에서 틀리곤 했다. 한 두 음만 틀리지 않으면 되는데 틀리고 말 때에는 듣는 내가 다 안타까운 심정이 되곤 했다.

ⓒhttp://anngabriel.egloos.com/

ⓒhttp://anngabriel.egloos.com/

그 엄청난 연습량을 목격하며 도대체 피아니스트들은 평생 동안 완벽한 연주를 얼마나 하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피아니스트들이 곡을 연습할 때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경우보다는 틀리면서 연주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틀릴 때마다 틀린다고 괴로워한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연주 연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연습과정에서 수많이 틀려봐야 연주회에서 틀리지 않고 연주해낼 수 있을 것이다. 설사 당일에 틀리지 않고 연주를 해도 연주한 당사자는 음은 틀리지 않았지만 어느 부분에서 연주기법 상의 실수가 있었다면서 또 괴로워하겠지만 말이다. 삶이 이렇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도 어딘가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와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의 확률게임은 0.0001 vs 99.9999의 게임인 것이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수도 없이 시도하고 결과를 마음에 안 들어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시도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자기가 원하던 것과 조금 비슷한 결과를 얻게 되면 어느 정도 기뻐하고, 그러면서도 또 아쉬워하고…. 완벽한 연주 한 번을 하기 위해서 연주자는 수없이 틀린 연주를 하며 그 틀린 음들을 견뎌야 한다. 틀린다는 사실 자체를 견뎌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완전히 틀리지 않게 연주하기 전에는 연주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그것은 실질적으로 연주를 아예 하지 않겠다는 소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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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자본론 강독]-14

제 6 장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정리 : 김성심

 

 

앞에서 화페의 가치변화는 화폐 그 자체에서는 일어날 수 없고 또 상품의 재판매로부터도 발생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가치변화는 오직 그 상품의 사용가치로부터 다시 말해 그 상품의 소비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상품의 소비로부터 가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화폐소유자는 유통 분야의 내부 즉 시장에서 그것의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상품[즉 그것의 현실적 소비 그 자체가 가치의 창조로 되는 그러한 상품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노동능력 즉 노동력이다.

“노동력 또는 노동능력이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 속에 존재하고 있는, 또 그가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를 생산할 때마다 운동시키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총체를 가르킨다.”(219쪽)
 
 

A. 화폐소유자가 시장에서 노동력을 상품으로 발견하기 위한 조건은?

 

– 노동력의 소유자가 그것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만 한다.
– 노동력의 소유자가 그것을 상품으로 시장에 내어 놓아(을 수밖에 없어야)야만 한다.
 
 

B. 어째서 자유로운 노동자가 시장에서 화폐소유자와 대면하게 되는가?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연이 한편으로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를 낳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노동력만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낳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계는 자연사적 관계도 아니며 또한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사회적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과거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며, 수많은 경제적 변혁의 산물이며, 과거의 수많은 사회적 생산구성체의 몰락의 산물이다.
– 생산물이 상품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생산자 자신을 위한 직접적 생활수단으로 생산되어서는 안 되는데, (…)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에서만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자본의 역사적 존재조건은 결코 상품유통과 화폐유통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며 잉여가치의 생산가치 이다.”
 
 

C. 노동력이란?

 
–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가치를 가진다.
–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 노동능력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노동능력의 유지에 필요한 생활수단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 노동력의 판매에 의한 사용가치의 형식적 양도와 구매자의 현실적인 발휘는 시간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어 구매자의 화폐는 대체로 지불수단으로 기능한다.
– 화폐소유자가 교환을 통해 받는 사용가치는 노동력의 현실적 사용, 즉 노동력의 소비과정이라는 알 수 있으며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며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을 소개합니다[베를린에서 온 편지]-1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을 소개합니다[베를린에서 온 편지]-1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왼 쪽이 칼 리프크네히트, 오른 쪽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이다. 가운데 비석에는 “죽은 자는 우리를 깨우친다”고 씌어 있다.

왼 쪽이 칼 리프크네히트, 오른 쪽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이다. 가운데 비석에는 “죽은 자는 우리를 깨우친다”고 씌어 있다.

구름 뒤덮인 흐린 하늘에서 겨울비가 서글프게도 내리던?2011년?12월?26일.이 날은 성탄절 연휴라 도서관도,?음식점도,?상점도 모두 문을 닫았다.?나는 오래 전부터 방문하고 싶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을 가보기로 했다.

S반(S-Bahn)?기차역에서 장미 꽃 두 송이를 샀다.?기차는 동베를린을 향해 달렸고,?나는 베를린 리히텐베르크( Lichtenberg) 지역에 있는?“사회주의자들의 묘”에 도착했다.?이곳은 독일의 저명한 사회주의자들의 묘지들이 안치된 곳으로,구동독 정부가 거대한 공원으로 조성해 사회주의의 역사에 대해 시민들에게 홍보하려 했던 곳이다. (물론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는?“스탈린주의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비석도 공원에 추가되었다.)?묘지공원 안의 거대하게 조각된 동상에는?“죽은 자는 우리를 깨우친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고,?그 아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의 무덤이 있었다.

미리 사 온 두 송이 장미를 하나는 칼 리프크네히트에게,?다른 한 송이는 그 이름도?“장미”라는 뜻을 가진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헌화했다. 1919년?1월,이 두 혁명가가 반혁명 군부 세력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된지도?90여 년이 흘렀다.?그러나 매 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두 혁명가들이 밟았던 길은 단순히 과거의 지나간 역사일 뿐 아니라,?오늘날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현재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 현재의 거울일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딴?“로자 룩셈부르크 재단?(Rosa Luxemburg Stiftung, RLS)”에 장학금 지원서를 냈고,?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올 해부터 매달 생활비 보조를 받게 되었다. RLS는?1990년“사회분석과 정치교육 연합(Verein Gesellschaftsanalyse und politische Bildung e. V.)”이라는 명칭으로 출발한 교육 후원 재단이며,독일 연방의회 제3당인 독일 좌파당(Die Linke)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RLS는?2001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과?2003년 파리에서 열린 유럽사회포럼에 참여했고,?현재까지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적 활동들과 학술적 연구들을 조직하고 후원하고 있다. 1990년 이래 맑스 엥겔스 선집(Marx Engels Werke)의 편집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현재?MEGA라고 불리는,?맑스 엥겔스 전집(Marx Engels Gesamtausgabe)의 출간 역시 후원하고 있다.?전통적 좌파운동뿐 아니라 생태주의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서도 후원하고 있으며,?그 이론적 성과들을 출간하고 관련 행사들을 개최하고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의 로고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의 로고

장학생 선발 과정에서도?RLS는 지원자의 학술적인 역량과 지도교수의 추천과 더불어 지원자의 사회적 참여도를 높은 평가 기준으로 세워놓고 있다.지원자가 정당,?노동조합, NGO,?정치단체 등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지,?또는 사회운동이나 난민 구호 같은 사회참여,?사회봉사 등의 활동을 수행한 경력이 있는지를 검토해,?지원자가 민주적인 사회 발전에 공헌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장학생으로 선발한다.?학술적인 지원과정을 통해 사회적 발전에도 기여하겠다는 재단의 취지가 장학생의 선발과정에도 녹아 있는 것이다.장학생 선발은 일반 전형과 외국인 전형으로 구분되지만,?일반 전형에 외국인도 지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여성과 외국인(특히 개발도상국가 출신)은 할당제를 적용해 선발 비율을 높이려 하고 있다.?여성과 외국인 같은 소수자를 배려한 정책이다.

4월?11일과?12일에는 이번에 로자 룩셈부르크 장학금을 받게 된 학생들의 오리엔테이션 행사가 있었다.?이틀간 진행된 이 행사는 장학생들이 서로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장학생들이 알아야 할 행정적인 규칙들과 절차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동시에?RLS에서 진행하는 여러 연구 프로젝트들과 연구모임들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들도 마련해 놓았다. RLS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유럽’?협동 연구과정”, “다원적 좌파의 재조직‘?연구과정”, “사회적 변형?:?사회-생태적 정의”?등이 있고, RLS?내에서 진행되는 자율적 연구모임들에는?“비판이론”, “비판적 심리학”, “페미니즘과 성 연구”, “아프리카 정책 연구”, “동유럽 정책 연구”, “법 정책과 인권”, “자본주의와 계급투쟁”, “유로화와 경체위기”?등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나와 비슷한 철학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 두 명의 친구를 새로 알게 되었다.?터키에서 온 에크렘은 베를린 자유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생인데,?그는 자신의 논문 주제를?“알튀세르의 반국가적 코뮤니즘”으로 소개했다.?그에 따르면,?맑스주의는?20세

마리아나와 에크렘

마리아나와 에크렘

기 후반부터 심각한 위기를 겪었는데,이 위기는 단순한 정치적 위기가 아니라 존재론적 위기이며,?본인은 주로 알튀세르의 후기 저작들을 근거로,?알튀세르의 존재론적 연구들이 궁극적으로는 맑스주의의 존재론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작업이었음을 밝히겠다고 한다.?그는 이 때문에 알튀세르에게서 철학적 요소와 정치적 요소는 분리될 수 없으며,?이러한?“이론 내에서의 계급투쟁”으로서 철학이라는 알튀세르의 구상은 그의?“반국가적 코뮤니즘”이라는 정치적 귀결로 이어져야 한다며,?이것이 그의 학위논문에 대한 구상이라고 소개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 정치학 박사과정생이지만 베를린에서 거주하고 있으며,?앞으로는 빈에서 공부할 예정이라는(참고로 최근 빈 대학교 정치학과는 비판이론,?후기 구조주의,?맑시즘,?여성주의 등 젊은 급진 성향의 학생들이 선호하는 이론들이 집중적으로 다뤄지는 정치이론의?‘메카’로 부상하고 있다.)?마리아나는 비판적 정신분석학의 재구성을 학위논문의 이론적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고 한다.?그녀에 따르면, 1920년대 지식인들은 맑시즘과 정신분석학을 통합하려 시도했고 이러한 시도가?60년대까지 이어졌지만, 1960년대 이후 후기구조주의를 중심으로 정신분석학이 지닌 억압적 성격을 폭로하는 일련의 철학자들이 등장하면서,?정신분석학과 정치철학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큰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그러나 마리아나에 따르면,?이러한 후기구조주의의 반(anti)정신분석학은 반(anti)과학주의라는 이론적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본인은 정신분석학을 새로이 전유함으로써 전통적 정신분석학의 억압적 성격을 탈피하면서도 후기구조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관점을 도출하고자 시도하겠다고 한다.

이렇게?RLS에서 나는 철학과 정치이론에 관심을 가진 다른 연구자 친구들을 만나 교류할 수 있었으며,?나의 관점을 넓힐 수 있었다.?나아가 구좌파의 획일성을 벗어난 다원주의적인 유럽 좌파의 재구성 같은 관심이 가는 주제들에 대해서 다른 연구자들과 관심을 교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로자 룩셈부르크는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했지만,?오늘날 그녀를 추모하며 그녀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곳저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붉은 로자’를 애도하고 있다.?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은 학술적 영역에서?‘이론적 실천’을 통해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세계를 위해 한 발 한 발,?무겁지만 동시에 사뿐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이 재단에서 재정적인 수혜와 더불어 폭넓은 학술적 교류 기회를 얻게 된 사실에 감사하며,?다시 한 번 그녀의 묘지를 찾아 장미꽃을 헌화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있음과 없음의 구분[철학을다시 쓴다]-26

있음과 없음의 구분[철학을다시 쓴다]-26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 몇 가지로 정리를 해봅시다. ‘있다/?없다가 가장 위에서 모든 것을 가려주는 근거가 된다.’?라는 이야기를 방금 드렸죠??철학은?‘원인학’(aitiology)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그러니까 왜,?왜,?왜를 끝까지 묻고,그 원인을 밝혀서 맨 위에 있는 놈이 뭐냐,?최초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철학이라고 합니다.?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같고 다르고,?이고 아닌 것을 뒤에서 끈으로 허수아비처럼 놀리는 두 놈이 있다,?그 두 놈은?‘있음’과?‘없음’이다 하는 것까지는 밝혀냈습니다.?그러면 있다/?없다라는 게 도대체 어떤 괴물이길래 이렇게 삼라만상을 다 뒤에서 조종하고 있느냐,?이걸 한번 살펴보죠.

여기까지는 여러분들이 혹시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있음과 없음’이라는 제 존재론 강의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이 이야기를 지루하게 반복하는 까닭은 여러분들이 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정리를 해 보죠.

1.?있는 것이 있다.

2.?있는 것이 없다.

3.?없는 것이 있다.

4.?없는 것이 없다.

“‘있는 것은 있다’?하고?‘없는 것은 없다’?하는 것을 참이라 그랬죠. 2번도 아까 말씀드렸습니다.?참말입니까,?거짓말입니까?”

“거짓이요.”

“3번도 이렇게 되면 거짓말이라 그랬죠.?제가 앞에 적은 글 가운데?1과?4번은 참, 2와?3은 거짓의 근거가 된다고 말씀드렸죠.?그런데 정말 그런지 봅시다.

있는 것이 있다는 말,?여러분들 잘 이해하실 수 있죠??그냥 머리에 딱 들어옵니다.?그렇죠??있는 것이 있지.?그다음에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했는데,?이 말에는 뜻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 뜻도 없습니까??이렇게 있다/?없다로 끝나는 말을 논리학에서는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합니다.?그러니까 임자말과 풀이말이 이다/?아니다로 연결되는 말만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진술’이고, ‘판단’이고, ‘명제’라고 합니다.존재의 영역에 있는 말들은 참과 거짓을 가릴 수가 없고 다만 뜻이 있느냐 없느냐만 따지면 됩니다. ‘있는 것이 없다’라는 말이 뜻이 있습니까,?없습니까?”

“…….”

“지금 여러분들이 못 알아들을 말을 제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알아듣겠죠??그렇습니다.?이 말에는 분명히 뜻이 있습니다.?무슨 뜻을 가졌을까요? ‘있는 것이 없다’라는 말에는?‘하나도 없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분명히 대답하십시오.?그 다음에?‘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했는데 이 말에 뜻이 있습니까,?없습니까? ‘없는 것이 있다’는 말에도 뜻이 담겨 있지요?무슨 말입니까??혹시 이 말이?‘빠진 것이 있다’라는 말과 같은 말인지 보십시오.?맞습니까?”

“네.”

“그다음에?‘없는 것이 없다’는 말에는 뜻이 있습니까,?없습니까?

“있어요. ‘다 있다.’”

“그렇죠!?똑똑한 학생들이네. ‘다 있다’라는 뜻이죠.

자,?그러면 이제 여러분,?수수께끼입니다.?분명히 이유가 있을 텐데?‘있는 것이 없다’라고 해버리면 부정이 되는데,?왜 느닷없이?‘하나’가 튀어 나오지요??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 사유구조가,?우리 생각이 어떻게 움직여 가길래?‘있는 것이 없다’가 느닷없이?‘하나도 없다’는 말로 바뀔 수 있느냐??그리고?‘없는 것이 있다’고 할 때,?실제로는 이 말도?‘거짓’의 울타리 속에 있는데 왜?‘없는 것’이 갑자기?‘빠진 것’이 돼 버리느냐.?우리 머리가 어떻게 움직이기에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고 이런 의미를 가진 낱말들이 갑자기 도깨비처럼 튀어나오는지,?그리고‘없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왜 이것이 여럿을,?모두를 가리키는?‘다 있다’는 말로 바뀌게 되느냐,?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없죠?”

“전체를 머릿속에 두고서 없는 것이 있다라고 하고 그 전체성에 없는 것들이 꽉 찬 상태로 있다 생각하면 그 중 빠진 게 있다,?있는 것이 없다,?원래 다 있어야 되는데 그 있는 게 없으니까 하나도 없는 거죠.”

“제가 저 야바위 놀음을 하려고 그랬는데 대신해 주네요.(일동 웃음.)

그런데?‘전체’라고 하려면 최소한의?‘단위’가 있어야 합니다.?여럿의 최소 단위가 있어야 그것들을 모두 뭉뚱그려 전체라고 합니다.?하나 가지고 전체라고는 안 하죠.?그러면 전체라고 할 때 전체를 이루는 최소단위는 몇이어야 합니까??적어도?‘둘’이어야 하지요??여기서 여럿의 최소단위인 둘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합니다.?둘 이상이 있어야 좌우간 다(多)라는 말을 쓸 수 있고,전체라는 말을 쓸 수 있어요.?그 둘이 무엇입니까?(대답 없음.)

지금까지 이야기한 가운데 밝혀진 것은?‘있는 것’과?‘없는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이?‘있는 것’과?‘없는 것’이?‘전체’를 구성한다고 봐야죠.?그러면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까,?없어야 합니까?”

“있어야 해요.”

“있어야죠.?지금 우리는 당장 속절없는 거짓말의 수렁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거짓말을 한다고 그랬죠.?그렇죠??그러니까 우주의 구조,?그것을 반영하는 우리 사유의 구조.?이게 사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없는 것’을 실체화해서 있다고 생각하거나 상상하거나 혹은 그런 것을 실제로?‘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그렇죠.?이제 여러분들 반은 제 거짓말에 넘어갔습니다.?없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꼭 필요하다,?없는 것이 있을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는데,?그 말을 여러분이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시간이 저로서는 괜찮습니다.?왜냐 하면 제가 한 스무 해 전에 풀어먹었던 것을 그냥 되풀이하면서 그냥 적당히 강의시간 때울 수 있으니까,?저로서는 이런 강의가 괜찮은데…….?아마 바쁘신 여러분들한테는 시간낭비가 될 겁니다.?이런?‘거짓말’이 바닥에 깔린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까.”

“안 바쁜데…….”

“하하하,?안 바쁩니까??그러면 이제 한 단계 더 진전시켜서 봅시다.?있는 것이 하나로 있다고 칩시다.?있는 것이 없다고 했을 때?‘하나도 없다’가 된다고 했죠??있는 것은 하나로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된 거죠.?여러분 가운데?‘선생님 무슨 그런 헛소리하세요??이게 어디 하나로 있습니까??둘로 있죠.?귤과 무화과 둘로 있는데 하나로 있다니요?멍청한 소리 그만하세요.?우리가 하나로 있으면 입이나 벙긋할 수 있고 이것저것 가려나 볼 수 있겠어요??똥,?오줌도 못 가리지.?그러니까 이제 그런 헛소리하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그런데 여럿의 최소단위는 뭐라고 그랬죠??둘!?여럿의 최소단위는 둘입니다.?그러면 이제 여기 있는 것을 둘로 나눠 보자,?하나는 있는 것 기역(ㄱ)이고,?하나는 있는 것 니은(ㄴ)이다,?그러면 이 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을 나누는 경계선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그렇죠??그래야 나눠지지 않겠습니까?그런데 이 둘을 나누는 선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있는 거요.”

“예??있으면 하나로 합쳐져 버리죠.?있는 것,?있는 것,?있는 것인데 뭣 때문에 둘로 있습니까??또 다른 대안은 이 경계선이?‘없는 것’이어야 하겠죠??그런데 없는 것은 그 자체 규정상 없습니다.?그러니까 또 하나가 되는 거죠.있는 것은 하나로 있죠.”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다시.?만일에 여럿의 최소단위는 둘인데 있는 것이 둘로 있다고 쳐 보자,그러면 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그러려면 나누어 주는 경계선이 있어야 될 것 아니냐,?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을 나누어 주는 것이 있어야 그걸 둘이라 그러지,?달라붙어 있어서 하나로 있다,?그러면 둘이라고 안 하지 않느냐,?그러면 이 나누는 경계선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있다.”

“그렇게 있다고 가정을 한다면 있는 것,?있는 것,?있는 것이 되어서 달라붙어 버린다.?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이라고 가정을 해버리면 경계선이 없는 것이 돼죠??또 달라붙죠??그래서 있는 것은 하나로 있습니다. ‘있는 것이 없다’고 할 때?‘하나도 없다’라는 말과 같아져서?‘있는 것’이 통째로 부정이 돼 버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있는 것은 하나로 있기 때문이요.”

우리 나라 사람들 굉장히 머리 좋죠.?그걸 압니다.?우리는 옛날부터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그래서 있는 것이 부정이 되면 통째로 부정되어서 하나도 없다라는 말이 된다.?그 다음에 없는 것이 있다 할 때 이건 빠진 것이 있다고 그랬죠.?그런데 실제로?‘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 서양의 존재론 역사를 이끌어오면서 말썽에 말썽을 거듭해서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이것은 서양 사람들의 사유 구조에서는 실제로 논리적인 사고에서나 초월적인 사유에서나 똑같이 어려움을 불러일으키는데,?기독교에서는 더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이 사람들은?creatio ex nihilo (무로부터의 창조),?무에서 창조하는 것.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겨난다는 창조를 믿습니다.?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겨난다는 가정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열역학 제일의 법칙이 다 무너져 버리죠.?그렇지 않습니까??무에서 유가 나온다,?그러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무너져 버립니다.?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말을 히브리 사람들은 하거든요.?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다,?하나님이 주물럭주물럭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nihil)이 구원을 받으려면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있는 것’은 하나님뿐이다,?그래서 유일신(有―神)이다,?하나로 있다,?그러니까?‘있는 것’은?‘하나’고 그래서?‘하나’님인데,하나님만 있고 나머지는 전부 헛되고 헛된 것이다,?없는 것에서부터 만들어진 거니까 헛되다고 하는 건데 그리스 철학의 전통에서 보면,?없는 것은 없는 것일 뿐입니다.?없는 건 없다,?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그러니까 없는 것이 있다고 하지 말고 다른 말로 바꿔 보자,?이렇게 해서 계속 맴도는 쳇바퀴를 만들어 낸 게 그리스 철학의 전통이고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서 현대 실증과학에까지 내려옵니다.

자,?그러면 이제?‘없는 것이 있다’,?거짓의 근거가 되는 말이라고 했지만?‘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 사고가 요청하는 거니까 없는 것을 있다고 놓고 한번 가 보도록 하죠.

그러면 우선 여럿(多)은 확보되죠??없는 것도 있고,?있는 것도 있다고 하면 둘이 확보되지 않습니까??이렇게 해서 이 세상은 구제받을 길이 열리는 겁니다. ‘같고’, ‘다르고’, ‘이고’, ‘아니고’,?하는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겁니다.?없다는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없는 것을 빼놓고는?‘아니다’라는 부정사 쓸 수 없죠??그리고 다르다는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없는 것이 있다고 보면 여기서도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가르는 경계선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그렇죠??그러면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가르는 경계선이 있습니까,?없습니까?”

“있습니다.”

“경계선이 있으면 있는 것,?있는 것,?있는 것,?해 가지고 없는 것이 차츰차츰 줄어들어서 다 없어져 버려요.?그럼 거꾸로 경계선이 없는 것이라고 치면 없는 것,?없는 것,?없는 것,?해서 있는 것이 다 없어져 버려요.?그렇죠??이 경계선이 누구 편을 드느냐에 따라서 없는 것이 온통 다 삼라만상을 지배하기도 하고 있는 것이 온통 다 이 세상을 지배하기도 하고,?그렇게 되는데 그러면 이게 뭐죠??이 경계선은 어떻게 봐야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아야죠.?있는 것이 아니니까 있는 것과도 구별되고 없는 것이 아니니까 없는 것하고도 구별되면서 경계선 노릇을 하는 거죠.?그렇죠?”

어떤 것이 끝나는 지점,?이를테면 선분(line)의 두 끝을 그리스 사람들은‘페라스’(peras)라고 합니다.?우리말로 바꾸면?‘끝’입니다.?끝,?갓,?겉,?다 같은 어원에서 나오는 말입니다.?그것과 그것이 아닌 것을 나누어주는 경계 지점에 있는 것을 우리는?‘겉’이라 하고?‘갓’이라 하고?‘끝’이라 하기도 합니다.?그러면?‘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은 뭐냐고 하느냐?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합니다.?이것은 끝이 아닌 것,?끝이 없는 것,?경계가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라틴어로는?‘인피니스’(intfinis),?영어로는?‘인피니트’(infinite)입니다.?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하나는 무한한 것,?무한히 연장되어 있는 것이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그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이것이 그리스어?‘apeiron’이 지니고 있는 뜻입니다.?그러면 이제 세 가지가 나왔죠??없는 것 하나,?있는 것 하나,?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세 가지가 나왔죠??여러분,어떤 원시인들 가운데 수를 셀 때?‘하나’, ‘둘’, ‘많다’?그렇게 표현하는 부족들이 있다고 하죠??그게 아주 정확한 겁니다.?하나,?둘,?그 다음에?‘많다’입니다.?그 이유도 여러분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마는 아마 여기서 밤새 설명해도 못 알아들을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앞에서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그랬죠??그런데 없는 것은 하나로 있겠습니까,?여럿으로 있겠습니까??하나로 있습니까?”

“아니요,?여럿으로.”

“이유는?”

“아까 없는 것이 없다 그래서…….”

“‘다 있다’고 그랬죠.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빠진 것’이 있다는 말도 된다고 그랬고.”

“그 빠진?‘디펙트’(defect)가 꼭 하나일 이유는 없어요.”

“그렇죠.?빠진 것이 꼭 요렇게 빠져야 하고 이만큼 빠지게 할 필요는 없다,빠진 것에는 정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없는 것은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없는 것은 많다,?있는 것은 하나이지만 없는 것은 무한이 많다,?이래 없고,?저래 없고 없는 사람 죽을 맛이지만 어쨌든 없는 것은 엄청 많다.”

 

한철연 맑스분과 MT-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한철연 맑스분과 MT-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글/사진 윤지미(한철연 회원)

 

맑스분과가 4월 11일부터 1박 2일 동안 MT를 다녀왔다.

한철연에서는 각 분과의 엠티비를 1년에 두 번에 한하여 일정액을 지원하고 있다. 단 참여인원이 7인 이상일 경우이다.

공식적인 엠티 기간은 11일부터 1박 2일이었지만 10일 밤 9시 30분, 선발대가 충남 서산의 삼길포항으로 출발했다.

낚시터의 좋은 자리를 일찍부터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금요일인 11일 오후 1시 MT 참여를 밝힌 맑스분과원과 그 가족들이 모두 합류하여,

충남 서산 삼길포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근처 왜목마을 바닷가에서 휴식을 취했다.

아직도 이원혁 분과원이 끓여준 도다리 매운탕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도다리를 낚아 올린 이는 조배준 분과원이었고,

그 도다리를 요리하기 좋게 손질한 사람은 김종곤 분과원이었다.

박영균 분과원은 작은 물고기에 속한다며 놓아주자고 낮은 소리로 거듭 외쳤지만, 그의 호소는 우리의 귓전에서 사라졌다.

새벽부터 오후 5시까지 벌벌 떨며 겨우 잡은 고기였기 때문이다.

7개의 낚싯대로 잡은 수확량은 작은 도다리 세 마리.

낚시터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수온이 낮아 물고기들이 움직이지 않는 날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도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낚싯대를 걸쳐만 놓은 채, 바닷가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술잔만을 비웠다.

 

▲삼길포항

▲삼길포항

▲왜목마을 바닷가

▲왜목마을 바닷가

▲맑스분과 MT

▲맑스분과 MT

▲분과장과 분과원들

▲분과장과 분과원들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2)[대안도덕교과서]-3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2)[대안도덕교과서]-3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5. 정의

현실사회에서 우리는 공정하지 못한 상황, 평등하지 못한 상황, 거짓이 판을 치는 상황 등에 대하여 부당하다는 마음의 상태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우리는 이런 상황들을 자주 접합니다. 같은 학급 안에서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편애하는 선생님, 몰래 커닝하는 친구들, 왕따당하고 집단폭행당하는 친구를 뻔히 보고도 어쩌지 못하는 나 자신, 등등 부당하다고 느끼는 상황을 극복하고 개선해야 된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그런 마음 상태를 우리는 정의로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의로움이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며 거짓된 상황을 고쳐보려는 감정 상태입니다. 물론 정의로운 마음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사회에는 불공정과 불평등 그리고 거짓의 현실이 많기 때문에 개인이 혼자서 그런 불공정과 불평등 및 거짓된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속한 사회, 즉 가족, 학교, 지역공동체, 나아가 국가와 세계 속에서 내가 불공정과 불평등 그리고 거짓됨의 많은 상황에 대하여 나는 그냥 눈감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눈을 뜨고 그런 사회적 오류를 지적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관하기 때문입니다. 학교 구석진 곳에서 내가 아는 학우가 폭력으로 돈을 빼앗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고 칩시다. 나는 그런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냥 모른 척하는 경우가 많습닏. 일제고사 기간에 남들이 몰래 부정행위를 하니까 나도 그냥 따라 하는 것이 별 문제없다는 자기 위안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의로운 마음을 누구나 다 갖고 있으면서도 부정의한 사태를 고치려는 행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사람들 내면에 숨겨져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척하거나 동조하는 것도 부정의한 것입니다. 문제는 불의를 고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개인의 책임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불의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지면 그 사회는 건강하고 행복해지지만, 그런 불의와 부정에 대하여 눈감고 있는 사람이 많으면 결국 그 사회는 병들고 불행해질 뿐더러 나 개인의 삶도 행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길거리 보행자 보도에 화분이 있고 그 화분에는 담배꽁초가 이미 열대여섯 개 정도 버려져 있었다고 칩시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던 내가 꽁초를 버리려고 쓰레기를 찾던 중인데 마땅한 쓰레기통을 찾지 못하다가 그 길거리 화분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 화분이 쓰레기통이 아닌 줄은 알고 있지만, 이미 그 화분은 남들이 버린 꽁초가 쌓였으므로 나도 하나 더 버린다는 것입니다. 내 담배꽁초 하나 더 보탠다고 큰 일이 날 것도 아니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나도 불의와 부정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소위 ‘무임승차’라고 부릅니다. 무임승차는 정의로움을 파괴하는 사회적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임승차를 자주 반복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나의 행동이 나쁘다는 판단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반면에 화분이 깨끗한 상태였다면 나도 담배공초를 거기에 버리지 않게 됩니다. 결국 나의 행동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임승차하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기하급수적으로 더 부정의한 사회가 됩니다. 반면 이를 고치려는 사람이 한둘 모이면 이 사회는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의로움의 마음은 다른 겸양이나 긍지의 마음과 달리 사회적인 윤리감정에 해당합니다.
 

 

6. 관심

청소년 시기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듯이, 나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리고 설계한 대로 ‘자아’라는 미래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인생의 재료를 많이 확보하는 시기입니다. 청소년기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이것저것 눈에 뜨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따라하고 싶은 연예인 스타에 몰입하기도 합니다. 갑자기 사회탐구 영역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면서 방학 내내 부모님 몰래 사회과학 책만 읽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인터넷 게임에 확 빠져서 공부고 뭐고 오로지 게임 캐릭터만 머릿속에 꽉 차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정열이 있다는 것은 청소년의 자랑입니다. 단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 그리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 나아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게임에 중독이 되었다고 해도 그런 중독증을 좀 더 포괄적인 정열로 바꿀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것이 바로 청소년의 특징입니다. 게임을 하고 싶은 정열이 있었기에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다는 정열에 불이 붙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열의 마음은 무엇을 행동하고 실현하느냐 하는 대상에 무관합니다. 정열의 마음을 잃지 않도록 마음의 샘을 파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샘물을 파기 위하여 어디에 물기가 스며있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눈이 필요합니다. 달리 말해서 정열을 키우려면 우선 사람과 사물에 대한 깊은 관심이 요청됩니다.

관심은 일종의 호기심이기도 합니다. 호기심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도 없습니다. 즉 관심이 있어야만 사물이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으로부터 정열이 생긴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상생활의 논리입니다. 어떤 사람을 나의 진정한 친구로 삼고 싶다면, 나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옷색깔까지 맞춰 주고 싶은 마음이 자동적으로 생길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그에게 진정한 관심을 보이면 그 사람도 나를 따라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친이 됩니다. 친구들끼리 몰려다니기는 하지만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그 친구관계는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인터넷 게임조차도 관심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관심이라는 마음의 힘은 인터넷 게임이나 아이돌 연예인에 대한 열광을 일으킬 뿐만이 아니라 내 인생 전체를 성공적으로 이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청년 벤처기업을 용기있게 기획하는 관심, 사회복지 분야로 미래의 꿈을 두는 관심, 영어공부도 할 겸 당장 미드에 빠져보는 관심, 이 모두 세상을 창조하는 마음의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과 사람에 대한 관심을 내 마음 속에 잘 키우는 일이 소중합니다. 특히 청소년은 무엇에든지 관심을 둘 수 있는 잠재적 창조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관심이 이것저것에 너무 많아서, 집중이 안 되고 산만해진다고 불평을 호소합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이 일도 해보다가 아니면 저 일도 해보면서,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자기 자신을 질책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런 산만함조차도 아무 것도 안 하는 무관심보다 좋은 것이니 자신을 질책할 필요 없습니다. 청소년기의 중요한 발달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방황이라는 사실이다. 방황은 관심이 너무 많아서 그 어느 하나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성장기에서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나의 방황은 성장기 뇌가 안정화되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런 방황은 진정한 관심을 찾아가는 삶의 시도입니다. 관심은 방황을 거쳐야만 비로소 ‘집중함’으로 정착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긴 인생에서 따져볼 경우 방황이 없는 정착은 자칫 인생의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원래 영어표현으로서 시행착오Trial and Error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실수가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시도를 했기 때문에 실수가 생긴 것이고, 그 실수를 거울삼아 새로운 시도로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도하고 실수하지만 또 다시 시도하는 용기를 일으키는 방아쇠는 바로 청소년기의 관심입니다. 방황은 일시적으로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청소년기에 그런 방황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성장의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어른에게 있어서 방황은 인생의 실패일 수 있으나, 청소년에게 있어서 방황은 성공하는 인생의 단계입니다. 청소년은 철학적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유전적으로 결정된 생물학적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청소년은 변화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통일된 존재입니다. 이러한 엄연한 인간본성의 모습을 어른과 청소년이 함께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청소년 윤리 교과서는 더 이상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참말과 거짓말[철학을다시 쓴다]-25

참말과 거짓말[철학을다시 쓴다]-25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짝짝짝짝.)

“안녕하세요.?앉아서 해도 상관없겠습니까?”

“네.”

“제가 여기 계시는 선완규 선생님하고,?또 다른 한 분에게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차피 모든 학문은 거짓말에서부터 시작한다.?그리고 특히,?제가 하는 거짓말은 멀쩡한 거짓말이어서 윤구병과 함께 하는?‘거짓말 잔치’?이렇게 강좌 제목을 붙였으면 참 좋겠다.’?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거짓말이 된다는 각오 없이는 입도 벙긋 할 수 없는,?그런 지점이 있거든요,?그래서 선불교에서 스님들이?‘입만 벙긋하면 틀린다’는 말을 합니다. ‘개구즉착’(開口卽錯),?입만 벌리면 거짓말한다는 뜻이죠.

제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왜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죠.

우리가 무엇이 참말이고 무엇이 거짓말이냐 라고 물어볼 때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가 있죠.?여기서 가장 총명해 보이는 분에게 여쭤 볼까요??여기 어머니,?학구열이 대단하신 거 같은데 우리는 어떤 때 참말을 한다고 그러고 어떤 때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말은 거짓말이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은 참말이라고…….”

“저는 마음에서 우러나서 거짓말하는 건데요.(일동 웃음.?하하하하.)?제가 워낙 여자를 좋아하니까 이번에는 저쪽에 있는 여자 분에게 여쭤 보겠습니다.?우리는 거짓말을 허위라고 하기도 하고 오류라고 하기도 하고 착오라고 하기도 하고,?참말은 진리라고 하기도 하고 진실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러는데,?우리는 어떤 때 참말을 한다고 하고 어떤 때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까?”

“똑같은 말을 해도 어떨 땐 거짓이 되고 어떤 땐 참이 되고…….”

“지금 철학 선생 앞에 두고 철학하실래요?”(일동 웃음.)

여러분들이 죄다 우리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렸을 때부터 생각을 어렵게 어렵게 하는 연구만 하고 그런 교육만 받았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고 쉽게 대답할 줄 모릅니다.

내가 우리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한테 여쭤 보면 바로 튀어 나오거든요.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게 참말이고 없는 걸 있다 하거나 있는 걸 없다 하면 거짓말이지.?안 그려?”?이렇게 대답하십니다.?여러분들 그 말 틀렸습니까??있는 것을 없다 하고 없는 것을 있다 하면,?그건 거짓말이죠.?참말은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하는 게 참말이고.?인 걸 아니라 하고 아닌 걸 이라 하는 게 거짓말 아닙니까,?그렇죠?

실제로 참과 거짓의 구별이 왜 이렇게 중요한지 말하자면,?어차피 사람도 생명체니까 제 앞가림을 해야 하는데 사람 가운데 혼자서 자기 앞가림하는 사람은 드물죠.?지금 끼고 계시는 안경,?곱게 매만지는 생머리,?두텁게 껴입은 양복,?이거 다 스스로 만드신 거 아니죠??이렇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더불어 살 길을 찾아야 살 수 있는 운명을 안고 태어났습니다.?저는 사실은 제가 맹수였으면 더 좋겠습니다.?그러나 제가 사람 탈을 썼으니 여러 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를 끼치고 이렇게 삽니다.?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서로 말을 주고받아서?‘나 지금 뭐 없는데 너 지금 가진 거 있냐?’?라든지 서로 이렇게 의사소통을 해서 남거나 모자라는 것을 주고받고 나누면서 살 길을 찾지 않습니까??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게 죄다 거짓말이다.?그렇게 되면 의사소통할 길이 차단돼 버려요.?그러면 혼자 살기 싫어도 혼자 웅크리고 살 수밖에 없는 그런 형편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말을 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거짓말 한 번도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분 손들어 보세요.?그런 뻔뻔한 분이 있는지 한번 보고 싶습니다.예,?없을 겁니다.?누구나 경우에 따라 거짓말은 할 수밖에 없고 어쨌든 거짓말은 필요악이기도 합니다.

러셀을 비롯해서 널리 실증주의자들에게 난제로 알려졌던 것들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어떤 크레타 사람이 아테네에 와서 이야기하기를?‘크레타 사람은 죄다 거짓말쟁이다’라고 했대요.?그 사람 말이 참말이겠어요,?거짓말이겠어요??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세요??해답을 알고 계신 분 한번 이야기를 해 주시죠.?참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참말이요.”

“참말입니까??그 사람은 크레타 사람이니까 거짓말쟁이입니다.?그런데 거짓말쟁이가 참말을 해요?”

그 형편입니다.

여러분 앞에 선 제가 그 크레타 사람이라고 여기십시오.

제가 하려는 이야기가 그 거짓말인데 넘어가지 마세요.?거짓말에도 계보가 있고,?전제하는 근거가 있습니다.?거짓말의 계보를 여러분들에게 잠깐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기 한번 써 봅시다.(칠판에 적음.)

 

참말?: 1.?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

2.?인 것을 이라고 하고,?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것

3.?같은 것을 같다고 하고,?다른 것을 다르다고 하는 것

 

거짓말은 여러분들이 거꾸로 대입해 보면 되겠죠.?따로 쓰지 않겠습니다.

귤과 무화과는 다르죠.?그럼 한번 적어 보죠.(칠판에 적음.)

 

*?귤과 무화과는 다르다?:?일상 언어의 차원(보통 말)

 

‘같다/?다르다’라는 말이 철학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요즘 철학자들은 이런 천한 말을 안 쓰고,?차별성과 동일성,?이런 말을 써서 그런데,?실제로?‘같다/?다르다’라는 말이거든요. ‘귤과 무화과는 다르다’?우리가 왜?‘같다/?다르다’라는 말을 많이 쓰냐면,?같은 것끼리 모아서 일반화하고 추상화해야 말에 효율성이 생기고,?의사소통을 빨리 할 수 있거든요.?그러려고 어떤 때는 추상화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구체화하기도 하는데 만일에?‘같다/다르다’라는 말로 이 귤과 무화과를 구별하지 못하고 이 매직펜과 마이크를 구별하지 못하면 참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힘들겠죠.?이 세상은?‘여럿’과?‘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다(多)와 운동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익숙할지 모르겠습니다.?보통 말(일상 언어)에서?‘귤은 무화과와 다르다’고 하는데 이 말을 참과 거짓이 갈라서는 논리 언어로는 어떻게 나타냅니까?

귤과 무화과는 왜 다르다고 하느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학생들이 대답이 없자)?꿀들 안 잡수셨죠?(일동 웃음.)

간단합니다.?굉장히 쉽게 생각하십시오.?제 강의는 제가 알고 있는 낱말이 몇 개 안 되기 때문에 복잡하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귤은 무화과가 아니고 무화과는 귤이 아니다. (논리 언어)

 

우리가?‘이다/?아니다’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임자말과 풀이말을?‘이다’와?‘아니다’로 연결시키게 되면 거기서 참과 거짓이 쉽게 드러납니다.?그래서 이것을 논리적인?‘진술’이라 부르기도 하고?‘판단’이라 하기도 하고?‘명제’라 유식하게 말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혹시 대학 다닐 때 논리학 강의를 들어 보신 분 있습니까??우리는 논리학시간에?‘프로포지션’(proposition)이라는 끔찍한 낱말,?괴물 같은 낱말을 배웁니다.?그것을 또 괴물 같은 한자로?‘명제(命題)’라고 번역하는데,?이 낱말을 그냥?‘논리 언어’라고 부릅시다.?여러분들이 조금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요.?그럼 왜 귤은 무화과가 아니고 무화과는 귤이 아니라고 그러죠?”

“귤은 귤이고 무화과는 무화과니까.”

“어휴.(일동 웃음.)?이거 보세요.?제가 질문을 다시 하고 여러 사람의 답변을 충분히 들어보고 싶습니다마는 지금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나중에 토의 시간 때 자세히 이야기합시다.”

‘귤에 있는 어떤 것이 무화과에는 없고,?귤에 없는 어떤 것이 무화과에는 있다.’(존재언어)가 정답입니다.?왜 귤과 무화과는 다르냐고 했을 때에,?귤은 무화과가 아니고 무화과가 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고,?그럼 왜 귤은 무화과가 아니고 무화과는 귤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귤에 있는 어떤 것,?그것이 형태가 됐든 맛이 됐든 색소가 됐든 무엇이든지 귤에 있는 어떤 것이 무화과에는 없고,?귤에 없는 어떤 것이 무화과에는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귤은 무화과와 다르다 하고 귤은 무화과가 아니라고 합니다.?여러분들이 여기에 동의 안 하면 저는 더 이상 강의를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죠??바로 여기까지!

‘있다’, ‘없다’는 말이 끼어들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존재 언어’라고 합니다.

‘있음’과?‘없음’을 나타내는 말을?‘존재 언어’라고 하니까 뭔가 있어 보이죠?그런데 여러분들 지난 한 주일 동안?‘존재’나?‘무’(無)같은 말을 한 번이라도 입에 올린 분이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없을 겁니다.?그러면 여러분 중에 단 오 분이라도?‘있다/?없다’, ‘이다/?아니다’라는 낱말을 쓰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분은 손들어 보세요.

있습니까??없죠.?우리가 다(多)와 운동 속에 있는 서로 다른 삼라만상을 가려보는데?‘있다/?없다’, ‘이다/?아니다’, ‘같다/?다르다’라는 말이 아주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을 쓰지 않고는 우리의 생각을 펼쳐 나갈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이 모두 다 참말인가요?”

“네.”

“여러분 같은 분들만 있으면 제가 농사 안 짓습니다.?힘들여서 농사지을 까닭이 없어요.?속여서 먹고 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땀 흘리며 힘들여서 농사짓습니까??제가 한 말을 참말이라고 보시다니 참 딱합니다.(일동 웃음.)

말하자면 여기까지 제가 지꺼린 말 재주도?‘기술’입니다. ‘설득술.’?제 말을 듣고 내적인 확신이 여러분에게 생겼습니까??아직 아닙니다.?다 동의를 했지만(처음부터 끝까지 동의를 얻지 않고 진행시킨 말이 없지요.)?왜 동의를 했지요??그럴듯하게 말했기 때문입니다.?이게 바로?‘설득술’인데 제가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상당히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이야기해 갑니다.?곧 파탄이 나게 되고요.”(일동 웃음.)

 

네그리의 제국강의[한철연 세미나-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세미나-네그리의 제국

 

지금의 세계는 통제 네트워크,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소통방식, 초국적 기업들과 비물질노동의 등장 등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상호작용으로 새로운 전세계적 질서를 규정한다. 자본주의가 한창이던 시기의 제국주의(Imperial)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계나 한계가 없는 보편적 정치 질서를 가진 지금 세계화된 지구적 정치질서를 ?네그리는 제국(Empire)이라 한다. 변화한 세계만큼 기존의 사회철학의 모든 개념은 제국(Empire)의 세계에서 모두 해체되고 다시 재정립되어야 한다. 네그리의 이론은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변형들은 근대 정치철학의 기본 개념들인 주권, 국민, 인민과 같은 개념들의 새로운 反변증법적 접근을 보여준다.

또한 경제체계와 정치, 노동의 변화로 더 이상 제국(Empire) 내에서 혁명의 주체는 더 이상 정형화된 노동자일 수 없다. 네그리는 오늘날의 세계 질서를 보여주는 제국의 착취와 통제 체제들을 넘어서 새로운 저항 주체인 다중(Multitude)을 들어, 다중의 힘으로 민주적인 세계화된 공동체를 지향한다.

네그리가 정치적 망명의 시기가 끝나고 전 세계를 다니며 다중들과 함께 당면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강연 모음집인, <네그리의 제국강의>를 통하여 제국, 평화, 전쟁, 다중, 유토피아, 예술, 유럽 통일, 포스트사회주의 전략, 자유와 해방, 삶-권력과 삶-정치 등의 핵심 개념과 네그리의 사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가 확신하는 가능성의 유토피아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한다.

 

교 재 : Antonio Negri, Empire and Beyond (Polity, 2008)

안또니오 네그리, <네그리의 제국 강의>,서창현 옮김, 갈무리, 2010.

시 간 : 격주 월요일 오후 8시 약 2시간 진행

장 소 : 兀人고전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