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47-시와 산문의 차이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7-시와 산문의 차이

 

1)

앞에서 말했듯이 헤겔은 문학[Lietrature]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포에지[Poesie: 시문학]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문학은 문자에서 나온 말이니,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모두 다루게 되며, 굉장히 포괄적인 말이다. 헤겔의 경우 시문학의 질료는 관념이지만, 단순히 관념을 질료로 한다고 해서 시문학 즉 포에지[Poesie]가 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시문학 즉 포에지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기존에 문학에 포함하는 많은 영역을 시문학에서 배제하고 산문의 영역에 집어넣는다. 예를 들어 문학 교과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플라톤의 대화편이나, 성경, 인도의 베다, 시저의 웅변, 그리스 로마 신화, 헤로도토스의 역사 등은 시문학에서 배제된다. 이런 산문은 문학에 속할지는 모르지만 시문학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이런 영역을 문학에서 배제한다면, 문학의 영역이 너무 좁아지지 않을까? 그 보다 중요한 물음은 곧 그런 영역이 배제된다면 그 기준이 무엇일까 다시 말해 시문학의 종차, 정의는 무엇인지 하는 의문이다. 이것은 시와 산문의 구별과 관련된 물음이라고 하겠다.

 

2)

흔히 시문학과와 산문은 언어적 기호 즉 음소가 지닌 리듬(운률이나 압운 등)과 관련시킨다. 헤겔은 시문학에서 기호의 측면은 부차적인 요소로 간주하므로, 기호의 리듬이 시를 산문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리듬이 없는 서사시를 시문학에 집어넣는 것만 보아도 리듬이 시문학의 종차는 아니다.

다음으로 시와 산문은 관념의 중류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시는 감각적 표상이나 구체적 이미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관념이 주를 이루는 산문과 구분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문 가운데서도 역사는 구체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사건을 서술하기도 하며, 웅변이나 설교는 감동을 끌어내기 위해 화려한 감각적 관념을 제시하기도 한다. 거꾸로 시문학에서도 조국애나 사랑, 진실과 정의 등과 같은 추상적 관념이 감각적 표상의 매개 없이 직접 표출되는 경우가 많으니, 이런 구분은 무용지물이라고 하겠다.

시문학 즉 포에지가 창조적 형상화라는 의미에서 시문학의 형상은 환상적인 것이며 반면 산문의 경우 그 형상화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구분도 사실 엄밀하지 못하다. 포에지도 역사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현실적인 형상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서사시일 것이다. 거꾸로 철학이나 종교적 문학도 환상적인 경우가 많으니, 성경이나 플라톤 대화록이 그렇다고 하겠다.

 

3)

그렇다면 대체 헤겔은 시[시문학]와 산문을 어떻게 구분하는 것일까?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시를 다루면서 시와 산문의 구분에 관하여, 상당히 길게 논의하고 있는데, 여기서 시와 산문의 구분은 정신의 이념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다. 헤겔은 시적 표현 방식이 지닌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한다.

-먼저 시에서 감각적 관념은 이념과 관계하여 ‘유기적 총체성’의 관계에 있다. 즉 여기서 질료가 되는 감각적 관념은 이념을 통해 전체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체 내 완결되어 있어야 하고 서로 조화하는 총체성이어야 한다. 이런 통일성은 물론 물질적인 인과적 통일성은 아니다. 그것은 합목적적인 통일성이니, 모든 개별적 관념은 최종적인 목적에 나름대로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로 개별적 감각 관념이 목적인 정신적 이념에 대해 단순히 수단적이고 외적인 관계만을 갖는다면 그것은 시문학에서 총체성은 아니다. 그런 외적 수단적 관계는 추상적 보편성에 지나지 않는다. 시문학에서 개별적 감각 관념은 독자적인 형상을 가지니, 그것은 표면적으로 본다면 이념과 무관한 자립적인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개별 감각 관념은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 피어나는 꽃과 같은 모습을 지닌다.

-마지막으로 개별적 감각적 형상은 이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야 하나, 그 연관은 필연적이지만, 구체적 관념의 독자성을 살리는 것이야 하므로 비밀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이런 필연성은 겉보기에 자유롭게 나타난다. 작가는 의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의도를 관철한다. 여기서 진행은 개별적인 감각적 관념을 즐기면서 가므로 느릴 수밖에 없으나, 어느 순간 그 속에서 필연성이 떠오르면서 사건은 급작스럽게 종말에 이르게 된다. 헤겔은 정신적 이념과 개별적 관념 사이의 이런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특수한 부분이 독자성을 띤다. 이것은…. 통일성과 모순되는 양 보이지만 사실 이런 모순은 거짓된 외양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립성은 개별 부분의 상호 절대적인 분리의 방식이 아니라 단지 상이한 측면이 자기 자신 때문에 독특한 생동성 속에서 묘사되고 고유하고도 자유로운 지반 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한에서만 타당하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

 

시문학의 성립 조건은 즉 자유롭고 생동적인 관계인데 이 조건은 예술의 성립조건과 동일하다. 예술이란 본래 정신과 그 감각적 표현 사이에 자유롭고 생동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다른 예술 장르의 경우, 감각적 표현 수단은 그 자체 자립성을 지니므로, 정신의 통일적인 지배를 벗어나는 측면을 지닌다. 반면 시문학의 질료인 감각적 관념은 그 자체가 정신적인 것이니 감각적인 측면에서 자립성을 갖더라도, 정신적인 것이라는 측면에서 정신적인 것의 통일적 지배에 완전하게 복속할 수 있는 것이니, 가장 완전한 예술적 장르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시문학은 예술 장르 전체를 대표하는 장르라 할 수 있다.

 

4)

이런 시문학에 반해서 다양한 산문은 이런 유기적 생동적 총체성을 결여 한다. 일상적 의식에 기초하는 산문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관념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며, 그 속에서 어떤 전체를 통일하는 정신적 이념을 발견하기 어렵다.

또 웅변이나 설교에서 나타나는 산문의 경우 구체적 표현은 자신이 전달하려는 의도에 대해 어떤 관계를 지닌다고 하더라도 이 관계는 외적인 수단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설득에 기여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는 구체적 표현 자체가 지니는 독자성, 자유로움이 상실된다. 시문학이 구체적 표현을 향유한다면, 웅변이나 설교에서는 그런 향유가 없다.

사변적 철학은 유기적 총체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시문학과 가장 유사하지만, 이런 사변철학은 사유를 통해 필연적으로 전개되는 반면 시문학은 자립적인 감각적 관념 속에서 비밀스럽게 전개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시문학과 가장 혼동되기 쉬운 것이 역사적 산문이다. 역사는 정신적 의미가 전개되는 것이기에 유기적 총체성은 역사적 산문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를 전개하는 구체적 사건은 창조될 수는 없으며 오직 발견될 수 있을 뿐이기에 역사는 엄밀하게 정신적 의미에 충실할 수는 없다. 반면 시문학에서 정신적 이념을 전개하는 구체적 관념은 작가가 환상적으로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니 정신적 이념의 전개에 충실하다.

이런 차이 때문에 시문학이 역사를 토대로 작성되는 경우(서사시, 송시, 극시 등) 이미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이 시적 의미와 어울리지 않아 시적 전개를 방해한다. 거꾸로 시가 사실을 창조하게 되면,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 충돌하면서 시적 감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5)

시문학이 이처럼 산문을 배제한다면, 시문학의 범위가 너무 좁혀지는 것이 아닐까? 헤겔이 이런 산문을 문학에서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술 즉 포에지에서 배제할 뿐이다. 과연 산문을 예술에서 배제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사실 웅변과 역사, 철학저서는 비록 그 속에 부분적으로는 예술적 측면이 존재하더라도 예술이라 하지 않더라도 쉽게 반발하기 힘들다. 여기서는 개별적 감각 관념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의도, 법칙, 관념에 수단으로 복종하는 것이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 경전이나 신화나 전설, 영웅 이야기 등은 예술에서 배제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여기서는 좀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고전 시대나 낭만 시대에 종교적 관념이 고전적 현상이나 낭만적 가상으로 표현되는 경우 그게 예술이라는 것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고대 상징적 예술의 시대에는 종교와 예술은 서로 중첩되어 있다. 특히 종교적 관념이 감각적 물질로 표현되는 경우(건축이나 조각, 회화, 음악)는 물질적 차이 때문에 쉽게 구별되지만, 특히 종교적 관념[환상]을 시문학적 관념[상상, 이미지, 감각 관념]으로 표현되는 경우, 둘 다 관념이니 양자는 거의 서로 분리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런 상징적 문학의 경우 그것은 종교적 표현일까 아니면 예술적 표현일까? 난감한 문제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헤겔에서도 혼란이 나타난다. 헤겔은 예술 형식에서 고대 상징적 예술을 다루는 경우, 언어로 된 종교적 경전과 신화에서 많은 예들을 찾아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시문학을 다루는 경우에는 서사시로부터 시작하면서, 경전이나 신화 등을 배제하고 있다.

여기서 상징이 지닌 이중적 의미에 주목해 보면 어떨까? 한편으로 상징은 비밀스러운 연관을 지닌다. 이 경우 상징적 기호와 그것이 상징하는 것 사이의 단절이 눈에 띈다. 다른 한편으로 상징은 적어도 기호적 연관을 지닌다. 상징은 종교적 관념의 한 부분이거나 인접해 있는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만일 상징을 비밀스러운 연관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 연관은 종교적이니, 종교적 표현에 가깝다. 반면 그 연관이 합리성을 띄면서 예술적 표현에 다가간다.

헤겔의 경우 상징적 예술은 종교의 수단이었으니, 상징 예술에서 경전과 신화를 다룬 것은 그 종교 측면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시문학이라는 예술 장르를 다루는 경우 예술 측면에서 판단하면서 경전과 신화를 배제한 것이 아닐까 한다.


[1] 미학강의 3권,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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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46-회화와 음악 그리고 시문학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6-회화와 음악 그리고 시문학

 

1)

헤겔에서 예술 장르는 발전적이다. 조각은 부조가 출현하면서 회화로 넘어간다 회화는 색채의 마법을 통해 음악을 소환한다. 음악은 악극이 출현하면서 시문학[1]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시문학은 예술적 장르에서 최종적 형식이 된다.

시문학을 예술 장르의 최종적 형식으로 보는 관점은 시문학 이외에 다른 예술을 즐기거나 제작하는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 것이다. 필자는 음악을 잘 모르는데, 시인인 필자의 한 친구는 음악을 모르는 필자를 약간 경멸적으로(?) 바라본다. 인간이 아니라 무슨 동물을 보는 듯한 표정이다. 그 친구는 음악이 예술의 최고 형식이다. 아마 그는 자신의 시가 음악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친구에게 헤겔 말을 전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만날지 모른다.

헤겔처럼 예술 장르가 발전적이라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시문학이 다른 예술에 비해 탁월한 어떤 점을 지닌다고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동의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 경험을 소개한다. 필자는 오랫동안 영화를 좋아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영화가 좀 식상해지기 시작했다.

영화는 음악과 회화, 드라마까지 포함하는 종합예술이지만, 핵심은 역시 눈에 보이는, 환상처럼 생생한 영화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눈에 보이는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힘드니, 그 세계는 아무리 풍성하게 만들어도 곧 진부해지고 만다.

이때부터 어릴 때 좋아했던 시가 다시 감동으로 다가왔다. 시인의 그 무한히 약동하는 상상력이 전율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험에서 본다면 시문학의 탁월성을 부정할 수 없다.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시문학처럼 아름다운 예술은 없지만, 거꾸로 시문학에서 한계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헤겔을 통해서 장르의 측면에서 본 시문학의 장단점을 논해 보기로 하자.

 

2)

시문학의 질료는 말할 것도 없이 언어이다.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호로서 언어 즉 문자나 음소가 아니라 기호가 지시하는 의미로서 관념이 시문학의 질료가 된다. 기호로서 언어는 시문학적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2].

헤겔은 시문학의 질료는 다른 예술의 질료와 구분되는 독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시문학 이전의 다른 예술들은 모두 물질적인 자체를 질료로 사용한다. 회화에서 색이나 음악에서 소리를 헤겔은 이미 관념화된 물질[즉 빛이나 시간적인 것]이라 하지만, 그것은 물질성을 떠난 것은 아니다. 시문학의 질료인 관념은 그 자체가 물질성을 벗어난 관념적인 것이다.

헤겔은 회화와 음악을 다루면서, 질료의 관념화가 일어나면서, 낭만적 예술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낭만적 예술은 내밀한[innig: 자기 복귀하는] 주관성을 표현하는 예술인데, 주관성은 물질적인 질료(건축적 덩어리나 조각적 물질성)를 통해서는 표현되기 어렵지만, 관념적 질료는 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관념적 질료는 추상적 원소(음, 색)로 구분되면서 이 원소의 상호 관계를 통해 주관적 내면을 표현한다. 헤겔은 그 방식을 색채의 원근법이나 음악에서 화성을 통해 충분하게 보여주었다.

시문학의 질료인 관념 역시 그 자체로 분화되어 있다. 그것은 문장 속에서는 주어와 술어로, 형용사와 목적어로 관계하고, 다양한 문장형식에 따라서 고유하게 결합한다. 관념은 이런 복잡한 결합을 통해 거의 무한한 정신의 세계를 그려낸다.

회화에서 주관성은 사물을 보는 개별적 주관의 시공간적 위치, 입각 점에 머무른다. 회화에서 그려진 내용은 정신의 현상을 주관이 위치한 한 지점에서 일순간 보여줄 뿐이다. 음악에서 주관성은 심정적 수준인데 이는 상당히 일반적 수준(관습화된 감정)이지만, 감정에 한정된 수준이다. 회화나 음악에서 주관성은 감정을 통해 정신을 다만 간접적(상징적으로)으로 표현한다.

반면 시문학에서 모든 발화는 개인적 자아의 발화이지만, 이 자아는 이미 자기의식적이므로 자기를 넘어선 일반적 자아이다. 이 일반적 자아는 발화하는 자아를 규정하면서 발화하는 자아를 반성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므로 언어적 발화에서는 발화 주체와 동시에 언표 주체로 이중화한다.

시문학에서 이중적 자아는 자기를 넘어서는 운동 속에서 정신의 세계를 전개한다. 그것은 감정의 수준에서 일반적 사유의 수준에 이르는 포괄적인 정신의 세계를 표현핟다. 그런 점에서 시문학은 주관적 정신을 표현하는 가장 낭만적 예술이 될 수 있다.

 

3) 음악과 회화의 종합

회화는 색채를 통해 구체적 형상을 보여주는데, 이런 형상은 정신이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구체적 현상이다. 회화는 이를 통해 정신을 명확하게 규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회화는 공간적 평면에 제약된다. 회화는 주관적 정신을 표현하더라도 공간적 평면에 나타나는 순간적인 모습일 뿐이다. 회화가 표현하는 순간적인 모습은 비록 내밀성[Innigkeit]을 지니더라도, 자기를 지양하는 운동을 표현하기 어려우므로, 회화는 한계가 있다. 회화가 운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벌이는 고투(예를 들어 몽타주 기법)를 생각하면 회화의 한계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시문학은 관념을 매개로 하고 이 관념은 그 자체에서 운동성을 지닌 것이므로 자기를 지양하는 정신의 운동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시문학은 그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나 그 속에서 전개되는 드라마를 표현하니, 이런 점에서 회화보다 탁월하다.

 

“시 예술[Dichtkunst]은 회화처럼 어떤 특정한 공간에 제한되거나 어떤 상황이나 특정한 계기의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내적으로 심원한 대상과 그것의 폭넓은 시간적 전개가 표현될 가능성을 부여 받는다.”[3]

 

시문학의 탁월성은 음악과 비교해서도 드러난다. 음악은 음의 조합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지만 이런 감정적 표현은 정신을 다만 간접적으로 표현할 뿐이다. 건축물이 신상을 다만 둘러싸고 있을 뿐이듯이, 음악에서 감정적 운동을 통해 표현되는 정신은 모호하고 무규정적이다. 음악은 정신을 암시할 뿐이지 직접 표현할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음악은 가사와 문학을 자기 편으로 끌어오려 한다. 음악의 출발점에서 가요로 시작했다. 고전 음악이라는 완성 단계에서 다시 악극으로 넘어간 것도 그런 감정의 모호성 때문이다.

시문학은 정신을 관념을 통해 직접 표현할 수 있으며, 정신이 내면 세계 속에 그려놓은 환상의 세계는 눈 앞에 있는 현실 세계보다 더 생생하고 명확하니, 그것은 자주 내면의 회화에 비유되곤 한다. 이 점은 시문학이 음악에 대해 갖는 탁월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정신은 [시문학을 통해] …감정에 그치는 내면성을 떠나되 그것을 여전히 판타지 자체의 내면에서 전개된 객관적 현실의 세계로 다듬는다.”[4]

 

회화와 음악과 비교해 볼 때 시문학은 한편으로는 내면의 회화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처럼 시간적 운동을 표현하니, 시문학은 회화와 음악의 종합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은 시문학은 ‟조형예술과 음악이라는 양극단을 한층 높은 단계에서 즉 정신적 내면성 자체의 영역에서 내적으로 통일하는 총체성이다”[5]라고 말한다.

 

4) 시문학의 한계

이상에서 시문학이 같은 낭만주의 예술 장르인 회화나 음악에 비해 갖는 탁월성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시문학은 고유한 한계를 지니고 있으니, 이 점에서 회화나 음악에 미치지 못하며 항상 회화나 음악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우선 시문학의 특징은 관념이 시간적인 계열을 이룬다는 데 있다. 조형예술의 경우 정신은 공간 속에서 동시에 표현되는 반면, 동일한 정신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시문학의 경우에서 그 표현은 시간적으로 계열화되어서 나타나게 된다.

그 결과 시문학은 조형예술에 비해 한계를 지닌다. 조형예술은 공존하는 것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으므로, 여기서 무한히 세부적인 요소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시문학의 경우는 관념은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만 표현할 수 있으며, 더구나 그 관념은 아무리 구체적인 이미지의 수준으로 내려가더라도 일반성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문학이 아무리 시간을 들여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하더라도 공간적인 세부를 조형 예술처럼 세부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문학은 공간적으로 병존하는 것 가운데 필요한 요소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음악은 소리의 강도[强度: Intensity]를 통해 내적 감정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니, 감정을 산출하는 데서 가장 직접적이며 더구나 시대와 민족의 제약을 벗어나 보편성을 지닌다.

반면 시문학의 매체인 관념은 아무리 구체적인 이미지더라도, 감정을 직접 타격하지 못하는 관념적인 것에 머무른다. 그것이 울리는 것은 감정의 관념 또는 감정의 이미지이지 직접적인 감정이 아니다. 만일 감정을 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시문학은 음악에 비해 한참이나 뒤떨어진다고 하겠다.

시문학은 앞에서 말했듯이 회화나 음악에 비해 탁월성을 지니지만 반대로 한계도 지니고 있으니 시문학은 자주 회화나 음악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그림 책이 등장하는 이유나 시가 가요화하는 지점을 생각해 보면, 시문학의 이런 한계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보편 문학의 개념

시문학의 매체가 이처럼 정신을 정신 속에서 표현하는 관념이므로, 시문학은 모든 시대 모든 예술 형식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시문학은 정신을 수수께끼와 같은 암시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으며, 정신이 현현하는 모습을 언어적으로 서술함으로써 고전적 현상으로도 표현할 수 있고, 또한 현상이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 자체를 가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헤겔은 시문학을 보편적 예술이라 하는데, 그의 보편 문학 개념은 그와 동시대 예술 이론가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보편 문학 개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의미는 상이하다. 슐레겔은 자기 스스로를 넘어서는 아이러니 개념에 따라 문학은 문학을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문학은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다. 우선 문학은 소설과 시, 극이 뒤섞일 수 있으며, 산문인 철학과 역사 자기 비평까지 포함한다.[6]

반면 헤겔에서 문학의 보편성이란 다양한 형식을 동시에 표현한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문학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출현했다는 의미이다.

시문학이 이처럼 예술에서 정점에 이른 보편적 예술이므로 시문학은 동시에 정신의 표현이 예술을 떠나는 지점이기도 한다. 예술의 특수성은 곧 감각적 질료를 통해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이 자기를 지양한다는 것은 곧 특수한 감각적 질료를 넘어선다는 것이며, 이것은 이미 회화와 음악을 통해 질료가 관념화되면서 시작했다. 마침내 문학에 이르러 감각적 질료의 관념화는 완성된다. 하지만 여전히 감각적 관념이 예술의 질료가 된다. 시문학은 예술의 특수성을 지양하는 가운데 보편적으로 된다.

이제 문학을 넘어서면서 정신은 감각적 관념의 지반을 떠나 일반적 사유의 지반에 이르게 된다. 정신은 사유의 지반에서 자기를 표현하니, 그것이 곧 철학이다. 예술은 자기를 넘어서 철학으로 넘어 들어가게 된다.   정신의 표현은 처음 종교를 통해 표현되었다. 그런 다음 예술로 넘어갔고 이제 마지막으로 정신에 대한 철학적 표현이 등장한다.


[1] 헤겔은 문학[Literature]이라 하지 않고 시[Poesie]라 말한다. 전자는 문자로 된 것을 다룬다는 의미이니 매우 포괄적이다. 역사 철학, 웅변 등 산문도 하나의 문학으로서 포함할 수 있다. 반면 시문학이라 하면, 그리스어 제작[Poesie]에서 나온 것이며, 이미 현실을 넘어서 어떤 형상을 창조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니, 여기서는 산문이 예술에서 제거되면서 시문학은 상당히 제한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시라고 하면 문학의 한 특수 분야를 말하나 헤겔은 극시나 서사시까지 포함하는 일반적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번역상 시가 아니라 시문학이라 번역한다.

[2] 기호와 관념 사이의 관계는 언어 이론의 핵심 문제인데, 여기에 다양한 이론이 제시된다. 이 자리에서 이런 언어 이론을 충분하게 논의할 수는 없으나, 주를 통해 간단하게 헤겔의 입장을 소개하기로 하자. 기호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는 본질론자가 오랫동안 언어이론을 지배해왔다. 19세기 비교 역사 언어학자로부터 시작해서, 20세기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벤야민 등의 이론이 그러하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훗셀 등 현상학자를 통해 의미가 의식의 지향작용에 내재하면서도 초월하는 존재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의식의 지향작용에 내재하는 측면을 언어의 언사[言辭]의 측면이라 하며 초월적 의미는 그런 언사측면을 둘러싸여 있다고 보면서 언어의 언사적 측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20세기 중반에 언어혁명을 일으킨 구조주의자는 언어의 의미가 구조적 관계를 통해 결정된다는 측면을 강조했으며, 이런 구조적 관계는 언어의 사용되는 삶의 공간을 통해 규정된다고 본다.

헤겔의 경우, 의미론은 여러 논의에서 분산적으로 설명되었다. 그의 논의는 아래 네 가지 측면으로 종합할 수 있겠다.

①그는 본질론적 언어 이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기호와 언어의 의미는 상징적 관계이며, 의미는 관념 내에서 객관적인 것 즉 객관적 관념[reell]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인 것은 아니며, 문화와 사회의 역사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동시에 ②그의 언어 이론에서 단어의 의미가 주어 술어라는 문장의 구조 속에서 결정된다. 같은 단어라도 주어로 사용되는 경우와 술어로 사용되는 경우 그 의미는 다르며, 어떤 단어가 어떤 판단 구조 속에 들어 있는가에 따라서도 의미가 달라진다. ③세 번째로 헤겔에서 언사나 표현의 문제를 절대정신을 다루면서 설명했다. 절대정신 즉 종교와 예술, 철학은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④헤겔은 발화주체와 언표 주체의 구분을 이해하고 있었다. 문장을 발화하는 자아는 자기의식이어서 스스로 자기 내 반성하므로 여기서 발화 주체와 언표 주체가 분열된다. 이런 분열 때문에 판단은 다른 판단으로 이행할 수 있다.

[3] 미학강의 3권, 232쪽

[4] 미학강의 3권, 233쪽

[5] 미학강의 3권, 231쪽

[6] 필자는 언젠가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쿠의 ‘방랑자’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은 소설과 철학, 에세이, 논문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작품이니, 슐레겔의 보편문학에 가장 접근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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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4년 4월 월례발표회 알림, 4월 20일(토) 오후 4시 [한철연소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4년 4월 월례발표회 안내

안녕하십니까한철연 학술2부입니다.

여러 회원선생님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학구열을 응원합니다. 시대정신을 열원합니다.

이번 4월 월례발표회는 티벳학에 관한 샤오 체텐 선생님의 발표와 김성우 선생님, 신소현 선생님의 토론으로 진행됩니다.

월례발표회 개최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회원님들의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주제 ‘티벳성’에 대한 재개념화 -서구화된 티벳학의 현실과 문제,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

○발표자 샤오 체텐(Shawo, Choeten) (성균관대학교)

○토론자 김성우(상지대학교), 신소현(서강대학교)

○일시 : 2024년 4월 20(오후 4시

○장소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마포구 동교로 114, 3층)

 

상명통(喪明痛) [시대와 철학]

상명통(喪明痛)

※ 이 글은 <경인일보>에 연재하는 [전호근 칼럼]의 2024년 4월 15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함을 알립니다.

 

전호근(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꼭 10년 전 이날 일어난 참사로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하여 모두 304명의 귀중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사고 자체의 비극성뿐 아니라 참사 이후 이 나라에서 벌어진 온갖 비인간적인 일들은 유가족을 비롯한 온 국민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지금까지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내 기억 속 4.16도 그날 아침 다음의 보도를 접하면서 시작한다.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은 전원 구조되었고 사망자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철렁했던 가슴이 진정되는가 싶었지만 얼마 안 가 오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사고 후 선장과 승무원들이 먼저 탈출했고, 구조가 시작되었지만, 정부의 무능과 안이한 대처로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따라 선실에 머물러 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차가운 물 속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후 정부는 진상을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일관하다가 급기야 애도와 추모를 방해하는가 하면 심지어 국가 기관을 동원하여 유가족을 사찰하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기운 건 세월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막말과 패륜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사고 당일 현장에 가서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라면을 먹은 교육부 장관을 비롯하여 정부의 기본 입장은 교통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막말, 구조헬기를 구조에 이용하지 않고 경찰 간부를 실어 나르느라 소중한 생명을 잃은 일, 발견된 유해를 유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은폐한 일, 국가배상금을 둘러싼 저급한 왈가왈부,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조롱하던 패륜의 무리,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고 사건의 진실이나 실체를 가리고 은폐하려고만 들던 정부까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넘쳐났다.

옛날에 세종 임금이 신하들에게 “부모 돌아가신 것과 자식 잃은 것 중 어떤 것이 더 섧은가”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모든 신하가 부모님 돌아가신 것이 더 섧다고 대답했는데 황희 정승만은 말이 없었다. 임금이 다시 물었더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글쎄, 어느 것이 더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종남산(終南山, 서울 남산의 옛이름)이 보였는데 자식이 죽으니 종남산이 보이지 않습디다.” 했다고 한다.

이 글은 함석헌 선생이 1975년 4월 5일에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김태현에게 보낸 위로 편지의 한 대목이다. 선생 또한 일찍이 어린 딸을 잃고 슬픔을 겪은 적이 있었기에 자식 잃은 슬픔이 어떤 고통을 주는지 잘 알고 있었으리라.

자식 잃은 슬픔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아픔을 상명통(喪明痛,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고통)이라 한다. 이 말은 옛날 공자의 제자 자하가 자식을 잃고 슬퍼하다가 마침내 눈이 멀고 말았다는 데서 유래했지만, 어찌 자하뿐이랴. 모든 부모의 마음이 다르지 않을 것이니, 상실의 아픔이 마침내 보이는 것의 상실에까지 미쳐, 눈은 뜨고 있으되 바라보는 그것이 산인지 들인지, 초목에 푸른 잎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황희의 대답처럼 돌아가신 부모는 앞산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랠 수 있지만 먼저 간 자식에 대한 그리움은 그렇게 달랠 수 있는 것이 아닌 성싶다.

참사 이후 10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4월이 되었다. 시퍼런 바다에 기울어 잠겨 들어가던 배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그날 그 시간의 기억은 박제되어 모두의 마음에 묻혔다. 봄이 오면 바다가 일렁이듯 우리 마음이 일렁인다.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지난 토요일, 한동안 서랍에 넣어두었던 노란 리본을 다시 꺼내 달고 세월호 기억문화제에 참여해 함께 울고 함께 노래하며 함께 웃었다. “세월이 지나도 우리는 잊은 적 없다”는 구호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날 이후 시간이 멈춰버린 유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덜어내거나 옅어지지 않는 아픔은 위로할 길이 없고 그리움은 옅어지지 않는다.

<경인일보 제공> – 출처: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240416010001725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4년 2월 월례발표회 영상(일부) “재즈는 소수자 예술이다 – 질 들뢰즈의 소수 문학을 중심으로-“

2024년 2월 월례발표 일부 내용을 담았습니다.

2024년부터 한철연 월례회는 대면으로 진행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4년 2월 월례발표회 “재즈는 소수자 예술이다 – 질 들뢰즈의 소수 문학을 중심으로-“

주제 : 재즈는 소수자 예술이다 – 질 들뢰즈의 소수 문학을 중심으로-
발표자 : 김범수(백석대학교)
토론자 :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유가연(서강대학교)
일시 : 2024년 2월 29일 오후 3시 – 5시
방식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출처: https://youtu.be/rUHr2WgqWo0?si=Sbjks4C0uiaMKdck

헤겔미학산책45-수반음악과 자립음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5-수반음악과 자립음악

 

1) 시문학과 음악의 결합

앞에서 건축과 음악이 공통적으로 수학적 비례 법칙을 지닌다는 점에서 비교되었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고 음악은 생동하는 건축이다. 또한 헤겔은 음악을 시문학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시문학과 음악은 공통적으로 소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소리의 역할은 서로 다르다. 시문학에서 소리는 관념을 담지하는 상징적 기호, ‘독자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관념의 표시자’일 뿐이다. 여기서 하나의 소리는 다른 소리와 변별성을 지니므로, 언어 기호로 사용될 수 있다. 반면 음악에서 소리는 그 자체가 질료 즉 형상화의 수단이다. 음악의 질료인 음은 양적 크기를 지닌 것이며, 이런 양적 크기 자체가 주관의 시간적 평면 위에서 일정한 청각적 인상을 남기면서 음악이 탄생한다.

시문학과 음악 사이의 비교는 정신과 관계해서 볼 수 있다. 시문학의 질료인 관념은 이미지와 상상, 환상 등과 같은 감각적 관념이다. 이런 감각적 관념은 사유의 추상적 관념을 비유적으로 즉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음악은 선율을 통해 내밀한 감정을 드러내지만 이런 감정은 정신을 ‘에워싸는 옷’에 불과하니, 음악을 통해서 정신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게 표현될 뿐이다. 헤겔은 음악은 정신에 대해 ‘무규정적인 공감’ 이상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예술의 목표가 정신을 드러내는 데 있다면 이런 점에서 내밀한 감정의 표현에 머무르는 음악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음악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직접 드러내는 시문학과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신을 직접 드러내는 시문학이 감정의 내밀성을 전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를 위해 음악의 도움을 빌리려는 시도와 맞물려 있다. 그 결과 음악과 시문학의 결합인 합창이나 악극이 출현한다.

그러나 음악과 시문학은 질료의 서로 다른 특성 때문에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런 충돌은 시문학과 음악을 통일시키려는 시도에서 나온 오페라가 다시 내부에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분열되는 것을 보아도 분명하다. 이런 차이 때문에 양자의 결합은 완전한 통일보다는 서로에 대해 종속적인 결과가 된다.

비극에서 합창, 악극에서 음악이 끌어들여질 때, 음악은 시문학을 위해 봉사하는 부수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 경우 음악은 차라리 낭송에 가까워진다. 반면 노래에서 시문학이 끌어들여질 때 사실 가사는 음악에서 표현 불가능한 정신을 표현하여 내밀한 감정을 더 강화하려는 종속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 경우 가사는 무척이나 단순하게 된다.

 

2) 음악의 두 유형

헤겔은 다른 장르의 경우에는 역사적 발전과정을 서술했으나, 음악 장르에서는 그런 역사적 서술을 생략한다. 대신 그는 음악적 표현 수단과 정신적 내용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이 절(음악 장 3절)에서 그는 음악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수반적 음악이며 다른 하나는 자립적 음악이다. 이런 구분에서 중요한 것은 음악이 시문학적 가사 즉 텍스트와 어떻게 관계하느냐이다. 한편으로 음악은 가사를 넘어서려 하며, 다른 한편으로 가사는 음악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기도 하니, 음악은 가사를 버리고 싶으나 버릴 수도 없다.

수반적 음악은 정신적 내용을 강조하면서 시문학과 관련을 가지는 음악이다. 헤겔은 이를 세 유형으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서정적 노래와 찬송의 노래 마지막으로 악극이다. 서정적 노래가 그 출발점을 이루며, 찬송의 노래(칸타타, 오라토리오 등)는 바로크 시대 정점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악극(오페라)은 근대 이후에 등장했다. 반면 자립적 음악은 음악의 내용보다는 형식이 강조되는 음악이다. 여기서 음악은 시문학으로부터 독립하여 고유한 형식적 완성에 이르게 된다.

이런 설명 속에서 어느 정도 음악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짐작할 수는 있다. 아마도 헤겔은 음악의 역사가 전 근대적 수반적 음악에서 근대적 자립적 음악으로 그리고 다시 근대적 수반적 음악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음악을 과연 엄격하게 역사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때문에 음악을 다만 유형적으로 분류하고 말았던 것 같다. 여기서는 헤겔의 입장에 따라서 종류별로 소개하고자 한다.

 

3) 수반적 음악

수반적 음악은 음악이 시문학과 관련하는 것이어서 수반적 음악이라 한다. 수반적 음악의 효시는 개인의 사랑의 기쁨과 헤어짐의 슬픔을 노래하는 서정시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이다. 시문학을 통해 완결된 내용에 내밀한 감정을 입히기 위해 음악이 사용되고 이미 단순한 낭송적인 것을 넘어선다. 따라서 음악은 화성보다는 선율을 따르며, 기악보다는 성악이 위주였다.

음악적 표현방식이 발전하면서 음악적 감정은 강화되며 순화된다. 이제 감정은 그 토대가 되는 자연적 감정 수준을 떠나서 자유롭게 자립적으로 울려 퍼지게 된다. 영혼은 음악을 통해서 “열정의 도취한 광란과 소용돌이치는 소란으로 찢기지 않으며” “기쁨의 환호와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자유로움을”[1] 느낀다.

음악이 더욱 자유롭게 되면서 이제 음악은 정신에 봉사하는 음악으로 발전한다. 음악은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처럼 텍스트에 맞추어 무한한 숭배나 경배의 감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한다. 구체적으로는 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 음악에서 그 단초가 보이며 바로크 시대 교회음악에서 발전하였다.[2] 여기서 성악과 기악, 선율과 화성은 상호 균형과 통일을 이룬다.

음악의 내용과 형식 역시 하나로 통일된 최고의 수준에 이른다. 형식적 측면에서 “일체의 것은 제어된 형식 속에서 굳게 서로 결속하며” 내용적으로는 무한히 내밀한 감정이 지배하니, ‘정신의 고요’ 와 ‘지복의 평온’이 흐른다.

 

“고통이 영혼을 아무리 깊숙이 엄습할 경우라도 다양하게 펼쳐지는 음악들 자체의 향유 속에서 아름다움과 지복, 판타지의 단순한 위대함과 형상화를 발견한다.”[3]

 

여기서 음악은 “예술로서 예술의 향유, 자기 만족하는 영혼의 선율적 소리”[4]에 이른다.

 

“가슴은 … 자기 자신의 청취에 몰입하며 또한 오로지 그럼으로써 마치 순수한 빛이 자기 자신을 보듯이 지복의 내면성과 화해한다는 것에 관한 최고의 표상을 제공한다.“[5]

 

수반적 음악의 마지막은 오페라와 같은 악극의 형식이다. 이 유형은 근대에 음악이 자립적인 음악으로 발전하면서, 정신적 의미를 벗어나 형식적 아름다움에 심취해 들어간 경향에 대한 반발로 보인다. 이런 움직임의 결과 근대의 절대음악의 출현과 동시에 오페라, 오페레타가 발전한다.

오페라는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서창: 敍唱)로 이루어지는데, 아리아는 내밀한 감정을 표현하므로 선율적인 것이며, 음악이 중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서창은 사건의 진행을 서술하므로, 음악은 낭송에서처럼 텍스트에 대해 종속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말의 특수한 내용이 음의 특정한 길이와 강약 고저에 각인된다.

그러므로 오페라는 “말에 대해 상대적으로 높이 떠 있는 선율적인 것”과 “말에 대해 최대한 가깝게 맞닿고자 하는 서창적인 것”[6] 사이에서 매개를 달성하고자 한다. 헤겔은 이 매개 과정에서 서창은 분산적이니, 통일성으로서 선율이 항상 승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그리고 각각의 내용 속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내밀성에 몰두하면서, 자기 자신과의 통일 속에서 정신화되어 있는 심정의 정조이다. 그런 정조의 자기 표현은 선율 자체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선율적인 것은 … [심정의 정조와] 동일한 통일성이며, 자기 내로 완결된 복귀이기 때문이다.”[7]

 

4) 자립적 음악

바로크 시대 성악과 기악, 선율과 화성, 내용과 형식의 완전한 통일 상태를 지나게 되면, 음악은 정신에서 풀려 나와서 거침 없는 자유 속에서 자립적으로 된다. 여기서는 성악보다는 기악이 중심이 되며, 음악적 선율은 화성의 법칙을 통해 화려하고 풍부하게 전개된다. 이제 음악적 향유는 음악이 담지하는 정신적 의미에서보다 오히려 음들이 자체 내에서 전개하는 어울림 속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음악의 고유한 형식의 측면은 완성에 이른다. 그 이전 음악은 시문학 텍스트의 강제적 지배 아래 있었고 종교음악에서 제의나 악극의 경우 다양한 연극적 요소가 음악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고 만다. 이제 음악은 이런 비음악적 요소로부터 해방되어 순수한 상태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음악의 완성으로 볼 수도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절대음악, 순수음악이라 불리는 자립적 음악을 추구한 모차르트는 베토벤 등 고전음악을 음악의 정점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헤겔은 자립적 음악을 완성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음악이 단순한 기교로 전락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순수 음악 또는 절대 음악에서는 음악적 정신적 의미는 더욱 모호하게 되고 심지어 전적으로 결여될 수도 있다. 이런 음악은 정신의 표현으로서 예술을 벗어나게 된다.

음악이 정신으로부터 독립했으므로, 이제 음악은 전문가의 것이 되며 작곡가는 정신적 성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헤겔은 작곡의 재능이 아주 어린 나이에 발전할 수 있거나, 풍부한 재능의 작곡가가 의식 없는 빈곤한 인간의 상태를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음악은 이런 형식적 향유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음악도 예술이기 위해서는 정신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음악 속에 정신적 내용을 다시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출현하게 된다.

 

“한층 깊은 음악은 기악음악에서조차 내용의 표현과 음악의 구조라는 두 측면에 같은 주의를 기울일 때 성립한다.”[8]

 

5) 음악에 대한 구체적 평가

헤겔은 음악의 유형을 서술하면서 틈틈이 여러 음악에 대해 평가했다. 헤겔은 자신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관현악의 대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대해서는 평가가 인색하다. 모차르트는 예로서만 언급하며, 베토벤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헤겔에게서 수반음악 가운데서도 내밀함 감정을 표현하는 종교음악이 최고인데, 그는 마태수난곡과 같이 오라토리오의 형식을 통해 한편으로 화성악적인 완성을 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 텍스트에 봉사하는 음악을 높이 예찬했다.

같은 수반음악이라도 이탈리아에서 주로 발전한 오페라나 오페레타의 형식에 대해서는 은근히 비판적이다. 그러면서도 음악이 앞으로 전개되는 방향은 그런 오페라적 형식이라고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음악이란 장르 자체로만 본다면 이런 기악, 관현악, 절대음악이 가장 순수한 음악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헤겔이 절대음악을 최고로 간주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음악 장르의 자체 내 한계 때문에 시문학과 결합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다. 더구나 헤겔이 예술의 목표를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한 불가피했을 것이다. 여기서 헤겔에서 예술 장르론과 예술 형식론 사이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헤겔에서 음악의 미래는 오페라다. 헤겔이 바그너의 음악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평가했을까? 헤겔은 화성악을 넘어서서 시문학에 다가가는 바그너의 음악을 바흐처럼 높이 평가했을까? 


[1] 미학강의 3권, 202쪽

[2] 헤겔은 이 시기 바흐를 대표적 작가로 거론한다. 미학강의 3권, 217쪽

[3] 미학강의 3권, 203쪽

[4] 미학강의 3권, 204쪽

[5] 미학강의 3권, 204쪽

[6] 미학강의 3권, 208쪽

[7] 미학강의 3권, 209쪽

[8] 미학강의 3권, 222쪽

헤겔미학산책44-화성과 선율 그리고 정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4- 화성과 선율 그리고 정신

 

1) 음악의 핵심

음악의 핵심은 무엇일까? 흔히 서양 음악이나 근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음악의 핵심은 화성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화성악적인 찬란함을 보여주는 기악이나 관현악을 음악의 최고봉으로 삼는다. 하지만 일반인에게서 이런 화성악적 음악은 어렵다. 많은 비 서양, 비 근대 음악은 화성악적인 요소가 드물고 주로 선율을 통해 전개된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율은 마음을 사로잡으니, 성악이나 오페라, 가요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화성이냐, 선율이냐 하는 논쟁에 대해 헤겔은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 이런 물음이 헤겔의 음악 장르 분석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음악론을 읽어보면 누구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화성과 선율의 의미를 알아 보아야 하는데, 이 점과 연관하여 헤겔은 미리 사과하면서 시작한다. 음악에서 “세부 기교의 규정 즉 음의 양적 관계, 악기, 조성, 화음” 등이 중요하지만 자신은 “이 영역을 답사한 경험이 거의 없으므로, 일반적 관점과 단편적인 언급들에 그칠 뿐”[1]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가 음악의 구체적 기법을 잘 모른다는 것을 말할 뿐, 그가 음악을 즐기지 않거나 음악의 원리를 모르거나 음악의 가치를 평가절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심지어 음악의 구체적 기법에 관해서도 일반인이 이해하는 간단한 원리 정도는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필자 역시 음악에 관한 한 헤겔보다 더 모르니 그저 그의 언급을 따라 살펴보는 데 그치기로 하겠다.

 

2) 음악의 형식

음악은 소리가 주관의 내면성 속에서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성립한다. 소리가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는 피타고라스 이래 일찍부터 탐구되어 왔다. 템포, 박자, 리듬을 거쳐 화성에 이르는 음들의 관계는 수학적인 비례를 통해 규정된다.

그 출발점에 있는 템포는 대체로 인간의 심장 박동의 규칙성에 따른다고 보는데, 헤겔은 이를 단순한 자아의 반복을 통해 자연의 흐름을 규제함으로써 인간의 자아가 “자기를 지양하여 객체로 되며 다시 대자존재로 되돌아 와서” “자기 관계하는 것”[2]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박자는 세부 단위로 템포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니 빠르고 느린 등 음악 전개의 속도를 규정한다. 헤겔은 이런 박자를 건축의 열주나 창문이 배치된 간격에 비교하면서 인간은 “이런 박자를 통해 자기를 재 발견하며 그 속에서 만족을 얻는다”[3]고 한다.

박자는 음의 강약 즉 악센트와 결합하면서 규칙적인 리듬이 된다. 리듬에 이르러 음악적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리듬은 인간의 활동의 리듬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삶의 다양한 형식, 춤추거나 의식을 거행하거나 행진하는 등의 리듬은 음악적 리듬과 합치한다.

리듬은 음색과 결합된다. 음색은 악기가 내는 음향학적인 배음들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배음의 관계는 악기마다 독특하며 여러 악기의 음색은 서로 어울리거나 대립한다. 헤겔은 교향곡에서 여러 악기들이 서로 응답하면서 교차하는 것이 마치 “연극적인 연주, 일종의 대화처럼”[4] 들린다고 말한다.

음악형식과 관련해 최후로 헤겔은 화성을 설명한다. 일정한 비율로 추상화된 음들의 관계에 따라 음계가 형성된다. 여기서 음정의 배치가 중요한 데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곧 으뜸음이다. 으뜸음에 따라 결정되는 음들의 배치 방식에 따라서 화성이 결정되고 이는 다양한 감정과 연결된다.

 

“”그것들의 으뜸음을 통해 특정한 특성을 갖는데, 이 특성은 다시 나름대로 특정한 방식의 감정 즉 한탄, 기쁨, 슬픔, 고무적 선동 등에 상응한다.”[5]

 

전체적으로 보아서, 리듬과 화성 등은 음들의 관계를 다루는데, 여기에는 수학적인 비례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이처럼 수학적 비례 법칙이 지배한다는 측면에서 헤겔은 음악과 건축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건축이 얼어붙은 음악이라면 음악은 생동하는 건축이라는 것이다.

 

3) 선율

음악의 리듬과 화성이 음악을 풍부하고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 자체로서 감정적 즐거움이나 카타르시스를 주기는 한다.

하지만 헤겔은 음악에 이런 측면만 있다면 그것은 마치 내용이 없이 공허한 형식에 탐닉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 경우 음악은 본격적으로 예술이 될 수 없으며 다른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감각적 요소 안에 정신적 것이 표현될 때 비로소 참된 예술로 고양된다는 것이다.

 

“화성은 … 박자나 리듬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이미 본격적 음악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자유로운 영혼이 산책하는 실체적 토대이자 합법칙적 마당이며 터일 뿐이다. 음악의 시적인 요소인 영혼의 언어는 내면의 열락과 심정의 고통을 음으로 분출한다.”[6]

 

“이런 분출 속에서 감정의 자연 폭력을 완화하여 자신을 그 너머로 제고한다. 까닭인즉 그 언어는 당장의 감동에 휩싸인 내면의 상태를 내면 자체의 청취, 자신 곁의 자유로운 머무름으로 만들며 또한 바로 이를 통해 심정을 기쁨과 고통의 핍박으로부터 해방하기 때문이다.”[7]

 

즉 음악은 그 속에 영혼의 언어가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음악은 자연적 감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며,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다. 그런 가운데 음악은 정신적 높이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적 높이에 도달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선율 즉 멜로디의 역할이다. 이 선율은 음의 운동이지만, 그 운동은 이제 수학적 비례 법칙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신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런 선율은 수학적 비례 법칙에 엄밀하게 종속하는 음악의 형식 즉 리듬, 화성을 넘어서 독립적으로 떠돈다.

음악은 “영혼의 가장 내적인 주관적이고 자유로운 삶과 운동을 내용으로 삼으므로 자유로운 내면성과 양적인 근본 관계 사이에 가장 심각한 대립으로 분열된다. 하지만 음악은 이런 대립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것을 자신 속에 수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난제도 지닌다.”[8]

이제 “일체의 모순과 불협화음이 호출되면서”, 이런 모순 대립 속에서 다시 조화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가운데, “선율적 평온의 승리를 축하한다.” 헤겔은 이런 투쟁은 “화성적 관계가 지닌 필연성”과 “비상[飛翔에 자신을 맡기는 판타지의 자유의 투쟁”[9]이라고 한다. 이런 투쟁을 통해서 정신은 감정에 지배되는 “우연적 자의의 주관성을 벗어나” “자기의 참된 독자성을 드러낸다”[10]고 한다.

리듬과 화성의 법칙을 따르는 음악은 엄밀하게 수학적이다. 그러나 선율에 이런 불협화음과 우연적인 요소가 있으므로, 음악은 산만성을 지닌다. 마치 만화경이 무한히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음악은 자유롭게 유희하는 듯 보이며 그 결과 산만한 느낌을 준다. 음악의 자유로움은 재즈나 산조와 같은 비정형 즉흥적 음악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체로 음악은 통일성을 준수하거나 주관적인 생동성을 띠고 나가면서도 자의적으로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가 하면, 같은 방식으로 이리저리 구부러져 가다가 변덕스럽게 정지하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갑자기 삽입하기도 하며, 다시 흐르는 듯한 음조 속에 자기를 내맡기기도 한다. …음악은 이미 주어진 형태들 밖에서 움직이므로 음악을 붙드는 그러한 자연의 영역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법칙과 형태의 필연성은 주로 음들 자체의 영역에 해당한다.”[11]

 

음악은 선율 때문에 산만성을 가지지만 이런 요소는 다시 극복되면서 선율의 평온이 회복되어야 한다. 헤겔은 선율과 화성의 관계를 ‘자세와 골격의 관계’에 비유한다. 즉 견고한 골격이 부적절한 자세와 운동을 막고 적절한 자세와 운동을 지지하듯 화성은 선율 움직임의 자유를 위해 지지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4) 선율과 정신

문제는 이런 선율과 정신의 관계이다. 헤겔은 선율은 근본적으로 닮음이라는 고전적 형상화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헤겔은 오히려 그 관계를 상징적인 관계로 보면서 건축과 음악을 다시 한번 비교한다.

건축의 공간은 외적인 형태를 갖는다. 이 형태는 자연법칙에 구속되지만 형태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 즉 덩어리는 정신과 관계해서 상징적인 관계를 가진다. 건축은 기능적 합목적성에 따라서 신전이며 왕궁이나 주택이 된다.

음악의 경우 헤겔은 그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음악은 차라리 감정의 요소만을 표현할 수 있으며 건축이 자신의 영역에서 신상을 오성적 형식의 열주들 … 로 에워싸듯이, 그 자체로 언표된 정신적 표상을 감정의 선율적 음향으로 감싼다.”[12]

 

“지극한 깊이의 내면성과 영혼뿐만 아니라 극히 엄격한 오성 역시 음악을 지배하며, 그리하여 음악은 서로에 대해 독립적으로 되기 쉬운 이 두 극단을 자신 속에서 통일한다.”[13]

 

여기서 건축이 정신을 에워싸듯이 음악 역시 정신을 에워싼다고 말한다. 에워쌈에서 매개적 역할을 하는 것은 곧 선율이다. 즉 선율 자체는 리듬이나 화음을 넘어서 전개된(불협화음까지 포함한) 음의 특정한 관계이며 이로부터 어떤 감정이 출현한다. 이렇게 선율에서 표현되는 감정은 자체 내에 어떤 정신적인 것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이다. 음악은 에워싸는 방식을 통해 정신을 표현하니, 건축과 마찬가지로 상징적 관계를 갖는다.

감정적 선율이 정신적 표상을 어떻게 에워쌀 수 있을까? 헤겔은 음악이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을 다루면서 세 가지 방식을 소개한다. 첫 번째 방식은 감정을 무한하게 즉 내밀하게 만듬으로써 정신적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음악은 [조형예술처럼] 가시화를 위해 작업하려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내면성을 내면에 포착하는 일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음악은 내용 자체의 실체적 내적 심연이 심정의 심연으로 파고들도록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내용의 생명과 역동을 개별적 주관의 내면에서 묘사하되, 주관적 내밀성 자체를 그 본격적인 대상으로 삼는 것을 선호할 수도 있다.”

 

여기서 헤겔은 음악은 오직 감정만을 묘사하는데 그치지만 다만 그 감정은 자연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무한히 순수하게 되니, 헤겔은 이를 곧 내밀한 감정이라 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승리의 기쁨을 무한히 고양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하며, 영웅의 죽음 앞에 느끼는 연민을 가장 깊게 표현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와 음악 사이의 연관성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소리는 “영혼상태의 … 생생하기 그지 없는 직접적 표출이자, 심정의 ‘아’와 ‘오’이며” “영혼의 자기 생산. 영혼의 영혼으로서의 객관성”[14]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감정적 언어는 음악적 선율의 출발점이 된다.

이런 관점을 확대하면, 관념을 표현하는 언어의 청각적 특징이 음악의 출발점으로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사실 많은 노래는 특히 오페라에서나, 판소리 등에서 보듯이 언어의 청각적 특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물론 언어의 리듬과 화성이 음악의 리듬과 화성과 완전하게 평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는 대립 속에서도 평행한다.

이런 점에서 노래는 가사에 옷을 입힌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음악과 내용의 관계는 표상과 언어의 관계로 환원된다. 표상과 언어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기호적 연관일 뿐이니 이 역시 상징적이다.

세 번째는 음의 전개와 내용의 본성이 상응하는 경우이다. 어떤 면에서는 내용의 본성은 조형 예술의공간적 방식보다는 시간적인 음악적인 방식이 더 적합하게 상응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내용은 서사적 시간적 요소를 가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음악은 내용을 내용의 내적 관계와 친화적인 음의 관계 속에 감응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내용이 빠르게 전개되는 경우, 음악도 빠르게 나가는 경우를 말할 것이다.

 

5) 음악의 한계

위의 세 가지 경우 가운데 음악에서 핵심적 방식은 역시 첫 번째 방식이다. 음악은 감정을 순수하고 무한하게 표현하면서 정신을 표현하니, 그런 한에서 음악 자체는 낭만적 예술이 된다. 주관의 내밀한 감정은 낭만주의 시대 와서 비로소 예술적 표현의 주요 내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음악이 표현하는 내용은 주로 낭만적 정신이고, 그 질료 역시 가상적인 성격을 지니므로, 낭만주의 시대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음악은 주관의 내밀성이라는 낭만적 정신을 무한한 감정을 통해 표현한다. 무한한 감정 자체는 낭만적이지만, 그 감정과 그 시대의 정신적 실체 사이의 관계는 상징적이다. 양자 사이에는 직접적 관계는 없으며 그 관계는 모호하다. 이 경우 내용과 감정은 비밀스러운 상징처럼 서로 구분할 수 없게 얽히게 된다. 내용은 감정 속에서 “비밀스러운 심연으로서 살아간다.”[15]

음악은 한편으로 고양되고 순수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서 그 어느 예술보다 탁월하다. 다른 한편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정신의 내용은 감정에 그치고 그 나머지 실체적 내용은 수수께끼처럼 감추어져 있으며, 정신의 풍부한 내용을 모호하게만 표현된다.

그 결과 음악에서 아주 짧은 테마는 무척이나 깊은 감동을 주지만, 조금만 길어지면 같은 것이 되풀이 되는 것과 같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고전 관현악을 즐기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신적 실천적 훈련을 쌓아야 하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그것은 음악이 지닌 장점과 한계는 음악가를 대표하는 오르페우스의 신화에서 잘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오르페우스는 음악으로 하데스까지 감동시켜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해내지만, 그의 음악은 자기 내에 머무르면서 음악의 정신적 가치를 알지 못하는 디오니소스 신도 바카이에 의해 살해된다. 음악이 지닌 한계 때문에 음악은 불가피하게 시문학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


[1] 미학강의 3권, 145쪽

[2] 미학강의 3권, 171쪽

[3] 미학강의 3권, 172쪽

[4] 미학강의 3권, 182쪽

[5] 미학강의 3권, 186족

[6] 미학강의 3권, 190쪽

[7] 미학강의 3권, 190쪽

[8] 미학강의 3권, 168쪽

[9] 미학강의 3권, 194쪽

[10] 미학강의 3권, 192쪽

[11] 미학강의 3권, 150쪽[번역은 필자 자신이 수정한 것임]

[12] 미학강의 3권, 146쪽

[13] 미학강의 3권, 148쪽

[14] 미학강의 3권, 157쪽

[15] 미학강의 3권, 159쪽

헤겔미학산책43-심정의 예술로서 음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3-심정의 예술로서 음악

 

1) 음악의 질료

낭만주의적 장르의 두 번째 형태가 음악이다. 많은 사람이 음악 장르가 특별하다는 점에 대해 언급한다. 음악은 그 어떤 예술보다 마음을 직접적으로 흔든다. 음악은 시대와 민족을 뛰어넘어 감동을 준다. 음악은 심정을 무한히 고양시켜 탈아 상태에 이르게 한다. 등등. 이런 음악의 일반적 독특성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 질료 또는 매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음악의 질료는 소리이다. 헤겔에서 이 소리는 물체의 진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체를 이루는 부분은 응집된 상태에서 고정되어 있다. 물체의 부분이 충격을 받으면 진동하게 된다. 진동은 물체의 부분이 제 자리를 이탈하였다가 다시 제 자리로 복귀하는 것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운동이다. 헤겔은 이를 자기를 부정하고 부정된 자기를 다시 부정하는 ‘이중 부정’의 운동으로 설명한다.

헤겔은 진동이 물체의 공간적 고정성을 극복하는 운동이며 이를 통해 물체 내에 잠재하는 운동성이 밖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물체의 운동성이 해방된다고 말한다. 물체에 대립하는 순수 운동성으로서 빛이 물질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관념화라면, 물체의 진동은 두 번째 관념화에 해당한다. 진동은 빛처럼 물체에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운동이 아니라 물체 내에서 나온 운동이다. 헤겔은 진동을 ‘역학적인 영혼성[mechanische Seelenhaftigkeit]’[1]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 질료를 통해 더 이상 정태적 질료적 형상이 아닌 최초의 한층 관념적 물질[ideelle[2]]인 영혼성이 나타난다. … 음은 진동 즉 공간적 상태의 지양이지만, 반작용에 의해 다시 자기를 지양하는 것이므로 이중적 부정이다. 따라서 이런 음은 발생 속에서는 외면성은 그 현존재를 통해 자신을 다시 폐기하여 그 자체로 사라지고 만다.”[3]

 

진동은 물체의 속성에 따라 다양하며, 또 전달되는 매질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전달되는데, 그 가운데 음악적 소리는 가청적인 비교적 고른 음을 내는 진동이 공기 중에 전달되는 소리로 제한된다.

 

2) 소리의 가상성

진동은 운동성의 해방이기는 하지만 다시 물체로 복귀하고 마는 것이어서 그것이 내는 소리는 일시적이다. 소리는 공간적 형태와 같이 존속하지 않으며, 한번 울렸다가는 곧 바로 사라지는 것이니, 이런 일시적인 소리 그 자체로서는 음악의 질료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소리는 일시성 때문에 서로 끊어지면서 다양한 소리로 분화될 수 있다. 빛이 분화된 색채가 가상화되면서 회화의 질료가 듯이 소리도 분화되면서 비로소 예술적 질료가 될 수 있다. 색채가 다른 색채와 대비되어 의미를 지니듯, 소리는 다른 소리와 대비되어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빛은 타자적인 물체에 반사되면서 분화되지만, 태어나면서 이미 분화되고 결합 가능한 소리는 색채 이상으로 가상적인 질료가 된다.

가상적 질료는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할 수 있으니, 낭만적 예술을 가능하게 한다. 소리는 색채보다 더 가상적이므로,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하기에 더 적합한 질료가 될 수 있다.

 

[소리 자체는] “이미 물질적 관념[ideell]이지만, 이런 물질적 관념의 현존을 포기하면서, 내적인 것에 적합한 표현방식으로 된다.”[4]

 

색채가 되려면 빛의 외부에 반사의 평면이 필요하다. 이 반사 평면에서 색채는 공존할 수 있기에 서로 대비되면서 주관성을 표현한다. 일시적인 음이 대비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음이 보존되면서 시간적으로 지속하는 지반이 있어야 하는데, 그 지반은 무엇일까? 음이 서로 대비되는 평면은 무엇인가?

베르그송처럼 어떤 시간적 지속체가 있는 것이라면, 그런 지속 위에서 소리가 서로 대비될 수 있겠다. 하지만 헤겔은 시간적 지속체를 상정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헤겔은 시간적 지속이 주관의 내면성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본다.  

소리는 인간의 주관적 내면 속에 받아들여짐으로써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며 과거 보존된 소리는 현재 다시 받아들여지는 소리와 더불어 하나의 시간적 공존을 이루게 된다. 소리는 시간적 내면의 평면 속에서 보존되면서 서로 연관을 맺는다.

회화의 질료가 색채이지만 그 색채는 공간적 평면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만큼 회화에서 공간적 평면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음악의 질료는 소리이지만, 그 소리가 지속되는 주관적 내면이라는 바탕이 없으면 소리로만은 음악의 질료가 될 수 없다. 그만큼 소리가 연관되는 주관적 내면성이 음악에서 중요하다.  

색채가 나타나는 평면은 외면적 공간이지만 음악이 나타나는 평면은 내면적 평면이다. 회화가 나타나는 평면은 주관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이 출현하는 시간적 평면은 주관 없이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음악은 소리를 받아들여 연결하는 바탕으로서 주관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예술이다.

 

“음악의 표현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공간적으로 상존하는 객관성으로 만들지 않고 … 음악은 오직 내면적 주관적인 것에 의해 수행되며 또한 오직 주관적 내면에 대해서만 현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5]

 

3) 시간성의 종합

그렇다면 음악의 소리가 지속하는 지반인 내면적 시간 평면은 어떤 평면인가? 헤겔은 주관성의 차원을 다양하게 구분한다. 그 첫 번째 차원은 지각적 인상이 주어지는 차원이며 두 번째 차원은 표상[Vorstellung: 관념]의 단계이다. 관념의 차원은 이미지에서 상상(또는 환상), 기호를 거쳐 관념(언어)에 이른다. 세 번째 차원은 분석하고 종합하는 사유의 단계이다.

두 번째 관념의 단계는 나중에 나오는 시문학의 질료가 된다. 시문학은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나 상상이나 환상을 통해 추상적 사유를 표현한다. 이 첫 번째 차원 즉 외적 자극이 처음으로 직접 받아들여지는 차원이 음악과 관련된 주관적 내면이다.

이 첫 번째 차원에서 주관성은 외적 자극은 내적인 인상을 남기는데, 여기서 시각적 인상과 청각적 인상 등 다양한 인상의 구분이 일어나게 된다. 시각, 청각 등 각각의 감각 영역에서 한정해 본다면, 어떤 인상은 같은 영역의 다른 인상과 구별되는 질적 차이가 없으며 다만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양적 차이만 가질 뿐이다. 헤겔은 이를 ‘흥분[Affekt]’ 또는 ‘육체화한[Verleiblichung] 정신’[6]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시각적 인상은 명도나 온도, 채도의 크기 차이를 가지며, 청각적 인상의 경우, 고저와 장단, 강약 등의 크기 차이를 갖는다.

어느 감각의 영역에서든 인상이 완전히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미 주관적 자아가 움직이면서 일차적으로 관념화가 일어나니, 관념화는 주관의 자기 관계에서 나온다. 모든 인상이 동일한 주관 속에 들어오면서 주관은 그 인상에 대해서 자기 관계를 갖는다. 이런 대자성 때문에 지각인상은 관념화된 것이다. 빛은 색채감각을 남기며, 음파는 소리라는 소리감각[7]을 남긴다.   

지각 인상은 동일한 하나의 주관 속에 들어오므로, 이 관념화된 지각인상에서 이미 일차적 종합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지각 인상이 하나의 흐름 속에서 공존하고 계기[繼起]하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지각 인상이 하나의 주관 속에서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가 곧 시간성이다.

시간성 속에서 지각관념은 분석되거나 결합되는 법이 없이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만을 유지한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종합이며 가장 단순한 종합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동일한 시간적 주관을 “완전히 빈 자아”, “그 어떤 내용도 없는 자기”, “추상적 주관성 자체”[8]라고 말한다.

 

“자아는 시간 속에 있고 시간은 현존하는 자아 자체[Das Sein des Subjekts selber]이다.”[9]

 

헤겔은 시간을 ‘개념의 현존{Dasein des Begriffs}’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개념’은 자기 운동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자기를 구분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주관이 대상을 자기 내에서 분석하고 종합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개념이 여기 시간성의 차원에서는 단순히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일 뿐이므로 헤겔은 이를 ‘현존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감각적 인상의 첫 번째 주관화의 단계에서 등장하는 시간적 내면성 영역이 곧 소리가 받아들여져서 서로 공존하고 계기하면서 음악으로 발전하는 내면적 평면이다.

 

4) 심정의 차원

헤겔에서 지각적 인상에서 표상을 거쳐 사유까지는 이론적 인식의 영역이다. 반면 감정은 욕망 다음으로 일어나는 실천적 의지의 영역이다. 실천적 의지는 나중에 표상과 결합하면서 자유의지로 발전하는데, 감정은 욕망과 자유의지 사이의 중간 단계이다.

외적으로 주어진 감각적 인상은 시간성 속에서 최초로 내면화된 것이다. 이런 내면화된 감각 인상이 실천적으로 연결되면서 감정으로 발전한다. 이 감정은 실천적 의지의 일종인데, 감각 인상과 감정 사이의 연결은 조건-반사적이다. 즉 감각은 특정한 주관이 가진 습관적 기제에 따라 감정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욕망이 자극에 대해 직접 반응하는 본능적 행동이라면 자유의지는 전적으로 주관의 선택에 달려 있다. 반면 감각과 감정은 조건-반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감정은 다중적으로 분화된 반사 체계가 구축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 반사 체계 속에서 주어진 조건에 따라 어떤 반응이 나타나게 될 때 이를 조건-반사적이라 한다. 여기서 반사 체계는 오랜 경험, 습관을 통해 학습된 것이다. 감정은 이미 학습된 체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능동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주어진 조건이 주어지면 곧바로 반응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음악은 대체로 감정이라는 반응을 낳지만 때로는 이 반응이 직접 행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행진곡이나 춤곡을 예로 들고 있다.

이처럼 감각과 감정을 매개하는 주관은 다만 습관적인 체계일 뿐인, 헤겔은 이를 정신이 아니라 영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주관은 단순한 것이며, 헤겔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연의 즉자적인 총체성이다. 영혼은 개체적이며 배타성을 가지지만 이는 자기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감정, 자기 정체성[Selbstgefuel]에 머무른다. 헤겔은 이런 자기감정을 지닌 주관 즉 영혼을 가슴[Herz] 또는 심정[Gemuet]이라고 규정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적 시간의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청각적 관념의 결합은 감정을 조건 반사적으로 즉 습관적으로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악의 주요 과제는 … 가장 내면적인 자기가 그 주관성과 추상 관념적[ideelle] 영혼의 면에서 내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방식을 반향하는[widerklingen] 데서 성립한다.”[10]

 

5) 음악의 독특성

음악에서 외적 자극이 지각을 거쳐 곧바로 감정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아의 활동이 시간적 종합에 머무르고, 감정은 습관성에 그치므로, 이 셋 사이에 수동적인 직접적 연결만 있을 때가 많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자극과 지각, 그리고 감정은 마치 하나로 결합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외면적 평면을 필요로 하는 회화가 독자성을 지니는 것과 달리 음악은 주관의 내면적 평면이 있어야 하므로 주관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예술로서 존재할 수가 없다. 악보에 쓰인 음악은 아직 아무런 음악이 아니다. 음악은 연주자가 있어야 하고 감상자가 있어야 한다. 그들의 주관이 살아서 움직이는 동안만 음악이 존재할 수 있다.

 

“음악을 통해 요구되는 것은 궁극의 주관적 내면성 자체이다. 음악은 심정 자체에 직접 호소하는 심정의 예술이다.”[11]

 

“음악이 목적과 내용으로 삼는 주관적 내면 자체는 … 주관적인 내면성으로 현상시킨다. 그런 한에서 음악적 외화는 … 생동적인 주관의 전달로서 제시되어야 한다.”[12]

 

이 주관적 내면이 시간적 종합의 차원이며 조건 반사적이므로, 이로부터 음악의 독특성이 생겨난다. 음악에서 주관적 내면은 표상 아래의 가장 단순한 차원이므로 음악은 문학과 달리 민족과 상관 없는 보편적인 예술이 된다[13]. 음악은 이 매개과정이 거의 수동적으로 일어나므로, 가장 직접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예술이 된다.

 

“음악은 의식을 사로잡는다. 의식은 더 이상 객체에 맞서지 않으며 자유의 상실 속에서 음 자체의 계속적 흐름에 의해 감화[fortgerissen]된다.”[14]

 

또한 음악에서 작동하는 내면성은 추상적 자아와 영혼의 차원이므로, 자기의식적인 관념의 차원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음악은 마치 사유하는 정신의 차원을 벗어나 감정의 차원인 영혼으로 되돌아가서 황홀경에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발생하게 된다.

이런 영혼이 동물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은 정신을 표현하면서 순수한 내밀성의 단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음악적 감정이 어떻게 무한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가? 이는 앞으로 살펴볼 문제가 된다.


[1] 헤겔, 철학강요, §300

[2] 헤겔의 용어 ‘ideell’ 이나 ‘reell’을 번역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관념적[ideal]’, ‘실재적[real]’이라는 의미를 지니면서도 차별성을 지닌다. ‘ideell’ 이나 ‘reell’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본다면 양자는 실재하는 것과 관념적인 것 사이의 중간에 있다. 실재하는 물질이 물질성의 영역 내에서 관념화[ideell]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빛과 소리가 그렇다. 반면 관념적인 것이 관념의 영역 안에서 실재하면, 그것이 reell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의 의미나 수의 관념과 같은 객관화된 관념이 reell한 것이다. 그 의미를 살려 ideell은 ‘관념적 물질’로, reell은 ‘객관적 관념’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3] 미학강의 3권, 142쪽

[4] 미학강의 3권, 142쪽

[5] 미학강의 3권, 143-144쪽

[6] 헤겔, 철학강요, §401

[7] 시각이나 청각 인상이 시각이나 청각 관념과 다른 것은 아니다. 인상은 어디까지나 관념으로 존재한다. 인상이라 말할 때는 외부에서 자극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관념이라 말할 때는 주관 자신이 자기의 구별과 관계하는 대자적 관계의 측면을 말한다.

[8] 미학강의 3권, 143쪽

[9] 미학강의 3권, 163쪽. 여기서 시간이 자아 자체의 ‘존재’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시간이 개념의 현존이라 했을 때와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즉 아직 존재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자아, 개념이라는 뜻이다. 

[10] 미학강의 3권, 143쪽

[11] 미학강의 3권, 143쪽

[12] 미학강의 3권, 165쪽

[13] 엄밀하게 말하면 음악도 민족성이나 계급성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적 반응 체계는 습관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습관적 체계는 모호하며 일반성을 가지므로, 음악이 민족과 계급을 뛰어넘은 가능성이 생긴다.

[14] 미학강의 3권, 160쪽

플라톤의 <국가> 강해(60)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0)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철학자의 자질(제6권 484a-487a)

* 제5권에서 소크라테스는 말로 세운 나라가 실제로 행위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 나라의 통치자가 철학자일 경우 최대한 그에 가깝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대화 참가자들 모두는 철학자가 뭐길래 소크라테스가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의아해한다. 이에 따라 과연 철학자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철학자란 진리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며 그 진리가 다름 아닌 언제나 한결같이 존재하는 형상임을 밝힌다. 그리고 그 형상이 일상인들의 믿음과 어떻게 다른지도 함께 언급되면서 이른바 플라톤의 형상론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제6권에 들어와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철학자가 어떻게 나라의 수호자이자 통치자로서도 적합한지를 드러내기 위해 철학자의 자질에 관한 논의를 이어간다. 철학자의 자질이 얼마나 통치자의 자질로도 유효한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제6권 484a-487a]

*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해보려면 논의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곧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질을 주제로 다음의 논의를 이어가려 한다. 그런데 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수호자φύλαξ이자 지도자ἡγεμονεύς로 지혜로운 사람을 내세우는 것이 마땅하다면 그 사람은 무엇보다 ‘이 나라의 법νόμος과 수행할 일들ἐπιτηδεύματα을 수호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갖추어야 할 그 능력의 기본 조건이 다름 아닌 ‘좋은 시력을 갖춘’ὀξὺ ὁρῶντα 감찰τηρεῖν 능력에 있음을 밝힌 후 그 감찰 능력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484a-b)

* 수호자는 무릇 진실로 있는 것 각각에 대한 앎γνῶσις을 가지고 영혼ψυχῇ 안에 뚜렷한 본 παράδειγμα으로서 가장 참된 것τὸ ἀληθέστατον을 바라보고ἀποβλέποντες 항상 거기에 조회하며κἀκεῖσε ἀεὶ ἀναφέροντές 가능한 한 정확하게 관찰할 수’καὶ θεώμενοι ὡς οἷόν τε ἀκριβέστατα있어야 한다.(484c) 그렇게 해서 아름다운καλός 것들과 정의로운δίκαιος 것들, 좋은ἀγαθός 것들에 관한 이 땅에서의 법규τά νόμιμα를 설정τίθεσθαί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설정하고 세워진 것은 수호해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화가γραφεύς들이나 눈이 먼 사람들τι τυφλῶν은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게다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ἐμπειρία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 덕ἀρετή의 다른 어떤 부분에서도 뒤처지지 않는 사람들이다.(484d)

*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능력을 위와 같이 언급한 후에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연적 성향φύσις 즉 자질을 갖추었기에 그러한 능력들을 두루 다 가질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485a)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연적 성향은 아래와 같다.

1) 그들은 항상 있으며ἀεὶ οὔσης 생성γένεσις과 소멸φθορά에 의해 방황하지 않는μὴ πλανωμένης 저 존재οὐσία를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배움μαθήματός과 ‘항상 사랑에 빠져 있다’ἀεὶ ἐρῶσιν.(485b)

2) 그들은 그 모두와 사랑에 빠져 있어서, 큰 부분이든 작은 부분이든 더 가치 있는 부분이든 덜 가치 있는 부분이든, 어떤 부분이든 포기하지 않는다οὔτε ἀφίενται.

3) 그들은 거짓 없음ἀψεύδεια, 그리고 어떤 식으로도 거짓τὸ ψεῦδος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미워하며, 진리ἀλήθεια를 좋아한다στέργειν. 자연적 성향상 누군가에 대한 정욕을 가진ἐρωτικός 사람은 그 애인과 친족이고syggenes 그에게 속한oikeios 모든 것πᾶν을 반기는 것이 전적으로 필연적인 한, 진리보다 지혜σοφίᾳ와 더 가까운 것은 없다.(485c) 그러므로 진정으로 ‘배움을 사랑하는’φιλομαθής 사람은 어려서부터 곧장 모든 진리를 가능한 한 최대로 추구할 수밖에 없다.

4) 그들은 배울 거리들과 그러한 모든 것을 향해서 욕구의 물길이 뚫린 사람들로서 영혼 그 자체의 즐거움ἡδονή들을 추구하며 육체σῶμα로부터 생기는 즐거움은 저버린다.(485d)

5) 그들은 분별σώφρων이 있어서 결코 ‘돈을 사랑하는’φιλοχρήματος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돈과 많은 소비δαπάνη에 몰두σπουδάζειν하지 않는다.(485e)

6)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전체 모두를 항상 추구할ἐπορέξεσθαι 영혼에게 좀스러움 σμικρολογία이란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호방함μεγαλοπρέπεια과 모든 시간χρόνος과 모든 존재οὐσία에 대해 관조θεωρία함을 갖춘 정신διανοίᾳ을 지닌 사람에게 인간적인 삶은 뭔가 대단한μέγας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θάνατος도 무서운δεῖνος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486a) 비겁하고δειλός 자유인답지 못한ἀνελευθερίος 자연적 성향은 참된 지혜·사랑과 상관이 없다. 이에 더해 그들은 규율이 있고(품행이 단정하고)κόσμιος 허풍ἀλαζών을 떨지도 않는 사람으로서 계약을 파기하지δυσσύμβολος 않는 사람들이다.(486b)

7) 그들은 영혼이 정의롭고 온순하며ἥμερος 쉽게 배우고εὐμαθὴς 기억력μνημονικός이 좋아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잘 보존σῴζειν하는 사람이다.(486c-d)

8) 그들은 균형ἐμμετρία과 동족인συγγενής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므로 본래적 성향τὸ αὐτοφυής상 균형 잡히고 우아한εὔχαρις 정신διάνοια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정신이 그들을 있는 것 각각의 형상ἰδέα으로 이끌어 준다.(486d)

9) 있는ὄντος 것에 충분하게ἱκανῶς, 그리고 완전하게 τελέως 참여할μεταλήψεσθαι 영혼에게 이 각각의 것들은 필수적이며ἀναγκαίη 상호 연관된ἑπόμενα 것들이다. 요컨대 그들은 자연적 성향상 기억력이 좋고νήμων 쉽게 배우며εὐμαθής 호방하고μεγαλοπρεπής 우아하며εὔχαρις 진리ἀληθεία, 정의δικαιοσύνη, 용기ἀνδρεία, 절제σωφροσύνη와 친구φίλος이자 친족적인συγγενής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교육παιδείᾳ과 연륜ἡλικία에서 원숙해지면τελειωθεῖσι 바로 그들에게만 나라를 맡겨야 한다ἐπιτρέπειν.(486e-48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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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4a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해보려면 논의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국가> 논의의 근본 출발점이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요청(362-367)에 따라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환기한다. 플라톤은 이곳 말고도 이점을 <국가> 중간중간에 여러 번 환기하고 있는데(420b-c, 427d, 434d-435a, 445a-b, 427b, 545d, 588b) 이것에 주목하여 일부 학자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다루고자 하는 근본 관심사가 정치철학적 문제라기보다는 행복한 삶과 관련한 윤리학 내지 도덕철학의 문제라고 주장하고 그에 기초하여 dikaiosynē도 ‘정의’justice보다도 ‘올바름’righteousness으로 옮기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 강해 서두에서 <국가>의 원제 politeia의 의미를 설명할 때 언급했던 것처럼 고대 아테네인들에게 삶이란 그 자체로 시민적 삶, 폴리스적 삶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구분 자체가 특별히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철학과 윤리학을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배타적 이기주의를 토대로 개인의 자의식이 확립된 근대 이후의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오도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 아테이만토스 형제의 요청에 응하면서 곧바로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아무런 사전 설명이나 전제 없이 개인을 국가로 확장하는 것도 플라톤 스스로 이미 politeia 즉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개인의 삶과 시민적 삶의 방식을 별개로 여기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렇듯 플라톤이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히려 개인의 영혼에 대해서도 ‘정의롭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 특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성격을 보다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좀 더 타당성을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본 강해에서도 수시로 강조했듯이 20세기 일부 비평가들의 견해들처럼 플라톤이 개인의 삶을 국가주의에 복속시켜 그들의 희생을 정당화하거나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국가>에서 정의로운 이상 국가의 통치 목표는 그 대상인 시민들 모두의 행복이며, 개인들 또한 어떤 계층에 속하건 시민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본성에 따른 직책을 기꺼이 수행하는 방식으로 나랏일에 참여하는 것이 나라의 이익은 물론 자신의 이익과 행복에도 부합하는 것임을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절제의 덕을 통해 이미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즉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시민들 각각의 행복을 담보하는 통치의 방식으로 공동체로서 국가의 이익과 안전을 구현하는 나라이다.

* 484c ‘수호자는 진실로 있는 것 각각에 대한 앎을 가지고 영혼 안에 뚜렷한 본으로서 가장 참된 것을 바라보고 항상 거기에 조회하며 가능한 한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구절은 우주를 제작하면서 오직 본으로서 원상만을 바라보고 그것에 기초해서 우주를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려 하는 <티마이오스>의 데미우르고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티마이오스>는 <국가>의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즉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고 운영하는 통치자 즉 철인 통치자의 이상적 모델인 것이다. 이곳에서 본(paradeigma)은 <티마이오스>에서도 그대로 사용되면서 내용적으로 공히 이데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apoblepontes) 관찰하고(theomenoi) 조회한다(anapherontes)는 말은 이데아에 대한 앎 즉 장차 다루어질 변증술의 기초가 기본적으로 철학적 직관 내지 관조(theoria)에 기초해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 철학자 왕을 다루는 제6권 500c, 500e-501c에서 여기서 언급된 본에 대한 관조가 다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아담(J. Adam)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데아에 대한 철학자의 지식이 단순히 인식적 가치만이 아니라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정치적 앎으로서도 가치가 있음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명백하게 주장되고 있다.(J. Adam 해당 노트 참고)

* 484d ‘이 땅에서의 법규를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설정하고 세워진 것은 수호해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 철학자가 이상적인 나라에서 태어났을 경우 그 나라는 이미 형상에 기초하여 세워진 나라이므로 그는 단지 이미 확립된 법규를 수호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철학자들은 현실 국가의 개선을 위해 바람직한 법률을 세우고 관철하려는 입법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J. Adam 해당 노트 참고)

* 484d 화가(grapheus)들이나 눈이 먼 사람들은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 화가들에 대한 비판을 예술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시가 교육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플라톤에게 음악과 조각 등 조화미와 관련한 예술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다만 이곳과 10권에서 화가에 대한 비판은 화가가 형상의 모상으로서 현실의 대상을 또다시 모상한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형상적 앎의 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 484d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empeiria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 : ‘경험’의 그리스 원어 empeiria는 영어로 ‘experience’, acquaintace with’, ‘practice, without knowledge of principles’의 뜻을 지니고 있다. 플라톤도 그 말을 사전적 의미와 크게 벗어나지 않게 다음 세 가지 의미로 쓰고 있다. 첫째는 넓은 의미에서 ‘~을 접해 본 적이 있음’이라는 경험 일반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원리적 추론과 지식이 아닌 ‘감각적 경험이나 지각’으로 좁혀 사용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익숙함’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467d, 529e, 601c)가 있다. <국가>에서 첫째의 경우는 ‘진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584e)이라는 표현에서처럼, 지식이나 감각과 상관없이 ‘접해 보았음’ 일반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로서, 위의 용례 외에 ‘앎이나 이득에서 오는 즐거움에 대한 경험’(582a), ‘문답하는 것에 대한 무경험’(apeiria)(487b), ‘진리에 대한 무체험’(apeiros)(519b), ‘교과들을 경험한 자’(533a), ‘사려분별과 덕에 대한 경험’(585e) 등의 용례가 있다. 그리고 셋째의 경우는 ‘경험과 연령에 있어서(467d), ‘기하학에 익숙한 사람’(tis emperos)(529e), ‘사용함에 있어 가장 경험이 많은 자’(601c) 등의 용례가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는 경험을 ‘감각적 경험’으로 한정하여 사용하는 용례로서 대부분 원리적 추론, 실재나 앎과 분명하게 구분하거나 대비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험이 아닌 지식을 이용함으로써’(409c), ‘권투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422c), ‘전투 관련 경험과 관찰에 의해서’(467a), ‘이들이 (앎에서 뿐만 아니라) 경험에 있어서도 남들에 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539e) 등의 용례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484d)라는 이곳의 표현 또한 이 둘째 용례에 해당한다. 이 경우 ‘경험’은 원리적 사고로서 ‘사려분별(pronesis) 또는 이성적 추론’(logos)(582a)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것은 설사 그 경험이 수없이 축적되더라도 진정한 앎에 다다를 수 없는, 지식의 단계상 본질적으로 낮은 수준의 것이다. 그러나 유념할 것은 비록 경험이 진정한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낮은 수준의 것일지라도 결코 그것을 무시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앞서 앎보다 믿음이 지식의 단계에서 저급한 수준의 것이지만 믿음이 실제 생활 영역에서 기술적 훈련을 통해 학술의 수준까지 고양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기 고유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라를 수호하는 수호자들에게 전쟁 전체에 대한 정책적 결정과 전략에 대한 앎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전투 역량의 향상을 위한 지휘 및 전투 등 전쟁 실무 능력의 향상도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 실무 역량의 향상은 실제 전투 경험을 포함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 끊임없는 반복적 관찰과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영혼을 통해 획득되는 지성적 앎의 능력과 더불어 반복적인 연습과 체험을 통해 몸에 밸 정도로 숙달된 신체 능력이자 실천 기술인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수호자들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체육을 통한 끊임없는 신체 단련은 물론 경험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도록 35세부터 50세까지 15년 동안 전쟁 지휘 및 관직의 수행 등 실무 경험을 쌓게 하고 그것을 마친 연후에야 비로소 그들 중 가장 훌륭한 자들을 통치자로 뽑아 최고의 철학 교육으로서 변증술을 익히게 하는 것이다. 이 점만 고려하더라도 지성적 앎은 물론이고 통치와 관련한 어떠한 경험도 쌓지 않은 자가 그저 권력욕에 사로잡혀 기득권층을 등에 업고 졸지에 최고 통치자가 되어 분별없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현금의 우리나라 현실은 실로 통탄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 근세 합리론과 경험론(empiricism)을 이야기할 때 ‘경험’의 의미도 이 두 번째 용례에 기초해 있다. 그래서 경험론이 말하는 지식은 경험적 감각자료들의 귀납에 의해 개념적 일반지의 지위를 갖는다. 그렇지만 귀납지가 귀납적 비약(inductive leap)을 전제로 성립하는 한, 플라톤이 이미 포착하고 있듯이 그것은 보편성을 가질 수 없는 개연지일 뿐이다. 플라톤에게 보편지는 형상적 앎 또는 그에 준한 수학적 기하학적 지식으로부터 연역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이 형상적 앎과 감각적 경험을 통한 믿음 모두 일정 수준에서 모두 각기 인간 삶의 보전에 기여하는 한, 플라톤에게 있어 그 각각은 비록 인식론적 지위는 다를지라도 모두 각각의 영역에서 앎으로서 고유성과 의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플라톤이 형상적 앎을 논리적 추론 차원을 넘어선 소수 철학자들의 직관지로 파악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왜 칸트가 근대 과학지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 과학지를 ‘인간 나름의 해석’ 즉 지각에 대한 오성의 구성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그리고 그에 따라 오늘날 과학적 지식이 본질적으로 왜 가설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도 함께 해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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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면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직위로서 수호자를 처음 언급했을 때(374d) 수호자(phylax)는 나중(414b)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taleis)로서 통치자들(hoi archontes)과 그들의 보조자들(epikouroi) 내지 협력자들(boētoi)로서 전사들(stratiōtas)을 두루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플라톤 이상 국가의 최고 지도자는 수호자에서 통치자로 좁혀졌다가 이곳에서부터 그 통치자가 다시 철인 통치자로 더욱 좁혀진다. 이에 따라 이들에 대한 성향이나 자질도 처음 포괄적으로 제시된 이후 점차로 보다 구체적인 자질들이 추가되면서 이곳에서 철학자의 자질이 언급되고 있다. 물론 주제 상으로는 철학자가 지닌 자연적 성향이나 자질로 언급되고 있지만, 이 철학자들의 자질이 통치자의 자질로서도 적합하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것인 만큼 내용적으로는 철학자의 자질이면서도 동시에 통치자가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자질들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장차 철인 통치자를 염두에 두고 제시되고 있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은 지금까지 언급된 수호자와 통치자들의 자연적 성향과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것들이 특히 추가되었을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호자의 성향을 다룰 때(375a-376c)와 달리 지혜의 친족이자 진리로서 ‘형상’(idea)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때에도 용기와 더불어 배움과 지혜가 주요 자연적 성향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그때 배움과 지혜에는 보조자들이 갖는 ‘올바른 믿음’(orthē doxa)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임에 비해,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철학자들의 배움은 ‘존재’(ousia)를 보여 줄 수 있는 ‘배움’이고(485b) 지혜를 사랑하는 것 또한 우아한 정신으로 참된 앎 곧 ‘형상’(idea)에 다가가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486d) 그리고 보조자들이 아닌 통치자들의 선발과 자격을 언급할 때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dogma)과 소신(doxa)이 추가적으로 강조되고 있을 뿐(412e) 이곳에서처럼 형상에로 이끌린다거나 그것을 열망했다거나 하는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요컨대 지금까지 수호자의 자연적 성향과 관련해서는 도덕과 지식이 하나라는 전제를 염두에 둘지라도 기본적으로 도덕의 고양에 크게 방점이 주어져 언급되었다면 지금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과 관련해서는 영혼의 고양을 통해 존재 내지 형상에로 다가가는 것에(486d-e) 크게 방점이 찍혀 있다.(J. Adam 497c note 참고)

* 그러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 하나하나를 음미해보기로 하자.

위 요약문 1)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수호자의 자질에 더해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으로서 가장 먼저 ‘생성과 소멸에 의해 방황하지 않는 존재ousia’가 자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철인 통치의 근본 토대와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에 ‘항상 사랑에 빠져 있다’함은 철학자이자 통치자로서 존재를 향한 지향이 결코 잠정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긴장과 열정을 수반하면서 늘 항상성을 갖고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위 요약문 2) : 철학적 지향이 그러하듯 철학 통치 또한 총체성과 전면성을 가지며 어떠한 것도 따로 차별해서 다루지 않는다. 요컨대 철인 통치자라고 한다면 특정 계층, 특정 대상, 특정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크건 작건, 가치가 더 있건 덜 있건 간에 상관없이 통치와 관련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그것들 전체에 대한 관심으로 전면적이고도 총체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그 문제 해결에 다가서며 동시에 그러한 노력을 결코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철학적 문제의식의 전면성 내지 총체성과 더불어 문제 해결에 있어 철학 통치자에게 불타협적 끈기와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위 요약문 3) : ‘어떤 식으로도 거짓(to pseudos)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미워하며’라는 말은 플라톤이 특수한 조건에서 ‘통치자의 거짓말’이 옹호될 수 있다는 내용(414b 등)과 상충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하게 플라톤적 의미에서 ‘진리를 향한 영혼의 결여에서 나오는 무지’를 의미한다. 다만 플라톤은 엄밀한 의미의 앎을 가진 통치자가 자신이 아닌 대상의 이익을 분명하게 담보하는 전제하에서 거짓말을 허용한다. 그들은 자연적 성향상 정욕을 가진 사람이 애인을 대하듯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반기는 사람들이므로 결코 진실을 결여한 거짓과 가까이하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지혜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위 요약문 4), 5) : 철학자란 배울 거리들과 그러한 모든 것을 향해서 욕구의 물길이 뚫린 사람들로서 욕구의 물길이 크게 뚫린 그만큼 영혼 그 자체의 즐거움 쪽으로 깊숙이 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깊숙이 가 있는 그만큼 분별력 또한 뚜렷해져 육체로부터 생기는 즐거움이나 돈에 대한 사랑은 아예 생겨날 여지가 없고 그에 따라 감각적 향락을 위한 소비도 없다.

위 요약문 6) : 철학자의 영혼이 그러한 상태에 있는 한 그들은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전체 모두를 항상 추구하며 그에 따라 전혀 좀스럽지 않고 반대로 호방하게 모든 시간과 모든 존재를 관조하는 정신을 갖춘 사람들이다. 중국 송대 지식인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에서 노래하듯 물여아개무진야이우하선호(物與我皆無盡也而又何羨乎. 세상 만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이 하나이거늘 달리 또 무엇을 부러워하랴)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인간적인 삶이란 대단하게 여겨지지도 않고 죽음도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며 그에 따라 행위에서 비겁할 이유가 없다. 공자가 70세에 이른 사람의 경지를 일컬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고 했듯이 철학자는 자유인답게 늘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어떤 행위를 해도 지혜사랑 안에 있으므로 규율에서 벗어나지 않고 허풍도 떨지 않으며 매사에 있어 사회적 연대나 계약에 어긋남이 없다.

위 요약문 7) : 여기에서는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로서 정의로움과 온순함에 더해 우수한 학습력과 기억력이 강조되고 있다. 1)에서 6)까지 언급된 내용들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러한 내용들 대부분은 후천적 노력에 의해서 일정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우수한 학습력과 기억력은 그것들에 비해 다분히 천부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철학 통치자는 그 스스로도 이미 건국신화를 통해 황금족으로 따로 구분했듯이(415b) 자격에서부터 원천적으로 소수 엘리트로 제한될 수밖에 없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위 요약문 8), 9) :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균형과 동족이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철학 통치자란 위와 같은 성향들을 영혼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시켜가면서 균형 잡히고 우아한 정신으로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존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통치의 궁극적 이념으로서 형상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은 기억력이 좋고 쉽게 배우며 호방하고 우아하며 진리 정의, 용기, 절제와 친구이자 친족인 사람들이다. 위와 같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은 통치자들이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자질로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이러한 사람들을 교육과 연륜에서 원숙해지면 바로 그들에게만 나라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 플라톤이 말하는 이와 같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이자 동시에 바람직한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들은 하나같이 도덕과 지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정치이념으로서 도덕과 정치를 분리한 마키아벨리즘과 철저히 대척적이다. 특히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가 그러하듯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자 개인이나 파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그것은 당대의 참주정의 목표와 그대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설사 그러한 통속적 이해와 달리 마키아벨리즘을 마키아벨리(N. Machiavelli)가 의도한 그대로 ‘수단의 도덕적 선악과 관계없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정치 행위에 있어 그 유용성과 효율성만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연 그러한 정치이념이 말 그대로 과연 ‘정치 현실에서 국익을 위한 공적 권력의 성공적인 유지와 관리를 담보’해왔는지는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근대 이후 개인적인 관계에서건 계층 간 나라 간 관계에서건 배타적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는 이른바 냉혹한 현실에서 그것은 나름 성공적인 평가를 받아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평가는 근대 이후 형성된 정치 현실에 대한 단기적 진단에 토대를 둔 것에 불과하고 실제로 그러한 처방은 현실의 질곡을 극복하거나 치유하기보다는 그 질곡을 더욱 부채질하고 강화하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오늘날 배타적 자국 이기주의와 패권주의에 토대를 둔 신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불평등의 괴리를 더욱 심화시키면서 원천적으로 국제간 평화 공존이 그 자체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이른바 나라이건 개인이건 ‘신의와 약속’은 자기 보존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으며 오로지 살길은 각자도생하며 각자 의심의 눈을 부릅뜨고 배타적 경쟁력을 갖는 힘을 키우는 것뿐이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을 견인한 산업혁명은 오늘날 막대한 자본력과 정보 통신 기술의 융합을 토대로 하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면서 개인 간 계층 간 나라 간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를 마치 문명 발전이 수반하는 불가피한 실재로 정당화하면서 나날이 그 끝을 모를 정도로 기세를 떨쳐가고 있다. 그 최전선에 도구적 지식인들이 창궐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소한 통속적인 의미에서 오늘날 마키아벨리즘은 강대한 나라에게는 타국에 대한 패권적 억압을 합리화하는 이념적 토대가 되어 불평등한 국제질서를 고착화하는데 기여하고 있고, 반대로 약소국에서는 정치권력의 폭압성과 기득권 세력의 피폐성을 정당화하고 약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열패성을 마치 숙명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구 환경 및 기후의 급격한 변화가 보여주듯이,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이 초래한 생태적 위기는 강대국 약소국을 막론하고 세계 시민들 모두를 앞이 빤히 보일 정도의 문명적 재앙으로 점점 더 몰아가고 있다. 게다가 정치 영역에서도 미국의 트럼프 등을 비롯한 극우주의자들이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고 서구에서 쥐꼬리만큼이나마 연명하고 있었던 톨레랑스도 이제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윤석열이란 무도한 자가 검찰, 언론, 종교 등 강고한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형식 민주주의의 약점을 이용하여 통치 권력을 장악한 후 하루가 멀게 반민중적 횡포를 일삼고 있다. 그래도 촛불혁명을 이끈 민중의 저력을 보여주듯 24년 3월 현재 다가올 총선을 앞두고 피폐한 윤석열 정권에 대한 심판의 목소리가 나날이 커지는 것은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차원에서 정치 사회적 진보의 전망은 물질문명에 눈이 멀어 문명적 재앙을 선도하는 초국적 자본과 각 나라의 기득권 세력이 갖는 위세 등등함에 비하면 여전히 너무도 미약한 게 현실이다. 그러나 모든 혁명적 변화의 시작이 민초들의 자각에서부터 시작했듯이 시민 모두가 담론 생산자가 되어 비판적 담론들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조직화해가면서 그 씨앗을 더욱 크게 키우고 더욱 넓게 퍼트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순진한 지식인들의 낭만적 이상론으로 불리면서 그 현실성에 대한 의구심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플라톤이 여기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진리를 향해 터져 나오는 욕구의 물길처럼 이상을 향한 인간의 정신과 의지가 내뿜는 힘은 결코 현실에 압도되거나 줄어들거나 약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의 영역에서건 현실 분석의 영역에서건 마키아벨리즘의 냉철함과 영악함을 크게 압도하는 진보에 대한 절실한 열망을 토대로 철저함과 진지함을 하나같이 보전하고 키워가면서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끊임없이 견인해 나갈 것이다. 정치의 지성화를 본질로 하는 플라톤의 관점은 분명 원리적 사고의 측면에서 그러한 진보적 담론 형성과 투쟁에 일조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정치철학이 간과하고 있는 문명과 인간 본성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성찰은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의 발전과 변화를 꿈꾸며 고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날 인간의 본성으로 당연시 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란 게 결코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상수도 진실도 아니라는 것을 큰 울림으로 일깨워주고 있다. 세계 사상사의 전체 흐름이 보여주듯이 현대 물질문명 각 영역에 대한 지식인들의 개별적인 분석과 미시적 비판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모순을 딛고 문명의 전환을 꿈꾸면서 그 모든 고려 요소들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아우르고 통합하는 형이상학적 거대 담론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형이상학이 매몰된 현금의 철학적 정황 속에서 인간과 우주의 생태적 연대와 소통을 기반으로 세계관 차원에서 문명의 전환을 모색하는 이 시대의 한국 철학자 이규성(李圭成, 1952-2021)의 철학이 필자에게 빛나게 다가오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 그러나 철학자의 자질이 통치자의 자질로도 유효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제기된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마치 철학에 대한 현대인의 의구심을 선구적으로 궤 뚫어 보기나 한 듯이 이내 아데이만토스의 반박에 부딪친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그와 같이 주장을 해도 현실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설사 그러한 자질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철학자들 대다수가 스스로 그러한 자질들을 나라의 공적 이익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쓸모없는 이들이 되거나 반대로 그 소질들을 개인의 이익과 영달에 이용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그러한 지적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현재의 상황에서 철학자가 그렇게 평가되고 있는 이유를 냉정한 눈으로 분석한다. 그러한 현실 인식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임을 철저히 밝혀내야 철학자에 대한 현실 인식을 온전하게 바로잡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끝-

다음 강해 B. 3. 철학이 비난받는 현실(487b-497a)

1) 철학이 쓸모없게 여겨지는 이유(487b-488e)

2) 철학자들이 스스로 타락하는 이유(488e-495b)

헤겔미학산책42-내밀성(숭고함)의 회화[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2-내밀성(숭고함)의 회화

 

1)

원시인의 동굴 벽화부터 따진다면 회화의 역사는 아마 가장 오래되었을 것이다. 회화는 고대, 그리고 고전 시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출현했다. 그런데도 헤겔은 마치 고대나 고전 시대에는 회화가 없었다는 듯이 낭만주의 시대 이후부터 회화를 다루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고전 시대 예술은 일반적 정신을 표현하려 하지만,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등장했다. 회화는 질료의 특성상 고대, 고전 시대의 관심을 충족하기 어려웠다. 그 당시 무덤 벽화나 도자기 그림은 다만 장식적이고 종속적인 역할만 담당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에 회화는 구체적 현실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 장르로 주목 받으면서 예술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낭만주의 시대 회화가 특히 고전 시대의 신화적 인물을 다루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르네상스 회화나 신고전주의 시대 회화가 그렇다. 그러나 그런 회화는 그 표현 내용을 더 이상 고전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고전 시대 신화조차도 낭만주의적 방식으로 즉 그 특칭적 주관성과 개별적 사건을 중심으로 표현하려 한다.

 

2)

헤겔은 회화의 내용을 설명할 때에는 낭만주의 시대 출현한 회화를 주제에 따라 세 가지 주제로 구분한다. 그것은 종교적 내밀성[innigkeit][1]과 실체적 내밀성, 그리고 현실 자체이다. 회화의 역사적 발전을 설명할 때는 시대적으로 세 단계에 걸쳐 구분한다. 이 세 단계는 중세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낭만주의 시대가 발전하는 역사와 대체로 일치한다. 고딕 시대까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까지, 그리고 계몽주의 이후의 시대이다. 주제와 시대의 관계는 세 가지 주제별 분포 곡선이 약간 중첩되면서 시대적으로 중심을 이동하는 방식으로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시대적 구분보다는 주제별로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

첫 번째 주제는 종교적 내밀성을 다룬다. 이는 인간인 동시에 신적인 존재의 주관성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 성인에게서 나타나는 주관성이다. 그 주관성의 내용은 성령의 정신이다. 성령은 곧 무한한 사랑의 정신이니 이는 주로 성서나 실제 역사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역사적 현실의 리얼리티를 살리면서, 신성한 존재의 내밀한 주관성이 표현된다.

언뜻 보면 신성한 존재의 모습은 고전 시대 영웅의 모습과 닮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나 마리아, 성인 등의 내밀한 사랑의 정신이 회화에서는 그 외면적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전 시대 영웅의 모습이 이상화된 표현이라고 한다면, 여기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건 속에서 사랑의 정신이 표현된다.

전자가 고요함과 지복에 머물러 있다면 여기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고통을 매개로 한다. 이런 회화는 신성한 존재를 “인간의 죄악과 회한과 참회, 비열과 사악과 대비하여” 나타내거나 역으로 “경배자를 통해 가시화한다”[2].

헤겔은 고전적 영웅의 정신과 낭만적 종교적 내밀성을 비교하면서 전자의 예로 니오베와 라오쿤의 고통을 들고 있다. 니오베와 라오쿤은 신체적 고통 속에서도 “회한과 실망 속으로 스러지는 대신” “자신을 위대하게 보존한다”. 이런 자기 보존은 실체적 명령을 수행하는 것일 뿐, “공허하며” “차가운 체념이 화해와 만족을 대신하며” 이 속에서 개인은 이 속에서 “자기가 집착했던 것을 포기하며” 그것은 “경직된 침착함일 뿐이며 운명에 대한 만족 없는[erfullungslos] 순응일 뿐이다”.[3]

반면 종교적 사랑의 정신은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내면의 고통을 표현하며, 감각적 고통을 참는 의연함이 아니라, 내면의 참회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의 감정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감당하기 벅찬 지복의 감정으로 남는다.”[4] 낭만적 회화에서 사랑의 정신과 개인적 특성은 서로 자유롭다. 가장 개인적이면서 가장 사랑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으니, 그러면서도 양자는 서로 하나로 합일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인적 특성은 … 낭만적 예술 원칙에 따라 자유로워지며, 그럴수록 더 특성적으로 표출된다. 그런데도 이 특성적인 것은 내밀한 사랑을 흐리게 할 수도 없고 또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사랑도 … 특성적인 것 자체에 매임이 없이 자유롭고 또한 그자체로서 진정 독자적인 정신적 이상을 형성하기 때문이다.”[5]

 

헤겔은 종교적 내밀성을 표현하는 대표적 회화로 주로 르네상스 시대 종교화를 들고 있다. 그 대표적 작품은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상일 것이다. 헤겔은 특히 성모의 자애로운 모습 외에도 십자가 아래 성 식스토스 1세와 성녀 바르바라의 기도하는 모습과 대비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2)

낭만적 회화에서 두 번째 주제는 실체적 내밀성을 다룬다. 여기서 개인은 성스러운 존재가 아닌 세속적 존재이다. 그의 주관성 역시 무한한 내밀성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은 종교적 내밀성처럼 사랑이나 자애, 경건성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 내밀성은 인간의 특정한 성격으로 나타난다. 이 성격은 긍정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부정적인 성격도 있으니, 그것이 무한하다는 점에서는 종교적 내밀성에 못지 않는다. 르네상스 화가는 종교화에도 뛰어나지만 이런 실체적 내밀성을 표현하는 데도 탁월하다. 헤겔은 그 대표적 예로 무리요의 ‘거지 소년’을 들고 있다.

이런 내밀함은 군중의 혁명적 열정이나 전쟁이나 학살로 받는 고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곧 들라크루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일 것이다.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이라든가, 고야가 그려낸 전쟁의 참화도 그와 마찬가지다.

회화의 경우 실체적 내밀성은 개인적 주관보다는 오히려 자연이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도 출현하니 “격랑을 일으키는 무한한 위력을 지닌 바다의 고요한 그 깊이”라든가 “폭풍우가 몰아쳐 울부짖고 솟구치면서 거품을 내며 부서지는 파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헤겔이 묘사한 것과 가장 닮은 화가라면 폭풍우 치는 바다를 자주 그린 윌리엄 터너가 아닐까?

알프스를 넘어가는 한니발의 군대, 자연 앞에서의 숭고함, 헤겔은 이를 실체적 내밀성이라 이름붙였다

3)

낭만주의 회화의 세 번째 주제는 현실의 긍정적 모습이다. 즉 “전적으로 우연적일 뿐만 아니라 저급하고 천박한 것으로도 보일 수 있는 인간의 삶의 장면들”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사악한 포주라도, 또는 단순히 식탁을 장식하는 꽃병이라도 이제 관심의 대상이 된다.

과거에는 이런 주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주제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 끝에 특히 근대 부르주아 질서가 형성되는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이런 우연적이며 천박한 것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으로 된다.

흔히 이런 예술은 사실주의로 간주되며, 여기서 구체적 현실을 얼마나 잘 모방할 수 있는가가 예술평가의 기준으로 된다. 하지만 헤겔은 이런 우연적이고 천박한 것에 대한 관심은 현실을 모방하려는 욕구 때문에 나온 것이라 보지 않는다. 이런 관심은 이 시대 정신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즉 이 시대 정신은 가장 구체적인 것 속에 가장 일반적인 정신이 존재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것 자체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구체적인 것을, 그것이 아무리 무의미하고 천박하더라도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하려 했으니, 사실 그것은 그것을 넘어 존재하는 초월적 정신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마치 근대 자연과학자가 자연 속에서 신의 흔적을 찾기 위해 자연을 연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예술작품이 이른바 자연성과 자연의 기만적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경탄될 만하다고 부추겨지더라도 이를 통해 [진정한] 향유가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부추김은 본래적 핵심을 호도하는 는 기만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모방의 경탄은 자연작품과 예술작품의 외적 비교에서 귀결할 뿐이며 … 여기서 … 본연의 내용과 예술적 요소는 표현된 사태가 사태 자체와 일치하는가 즉 실재에 영혼이 깃든 것인가 때문이다.”[6]

 

4)

우연적이고 무가치한 현실 속에서 영적 생기를 발견하려는 시도로 헤겔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독일과 네델란드 풍속화이다. 우선 이런 풍속화가 다루는 대상을 보자. 네델란드 풍속화는 “자연의 대상들과 자잘한 현상들, 가정생활의 품위, 평온함과 안빈낙도, 국경일의 행사, 축제와 행렬, 농부의 춤, 놀이공원에서의 재미, 흥청거림에서 얻는 기쁨” 등을 소재로 삼는다. 헤겔은 이런 작품이 단순히 세속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세속적인 것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건하며, 그 부에 오만함이 없이 만족하며, 가정과 주위에 대해 담백하고 기품 있고 순수하게 머물며, 그들의 모든 상태들을 철저히 염려하고 즐기는 가운데 독립성 및 진취적 자유로써 자신을 지킨다”[7]

 

한마디로 말해서 세속적 삶 속에 정신의 생동성이 살아 있다는 것인데, 이 정신적 생동성은 바로 종교 혁명과 해방, 그리고 세계 무역, 바다의 간척 속에서 활동했던 네델란드인의 올바른 대담성과 끈기, 충직하고 평온하고 인정 있는 시민성을 표현한다고 한다.

이런 순간적 현실로 들어갈수록 단순히 공간적 형태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이런 순간적 현실은 색채의 마법을 통해서 표현될 수 있으니 헤겔은 네델란드 풍속화가 보여주는 이런 기법에 대해 주목한다.

 

“이 회화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최대한의 예술적 진리로 발전시킨 것은 한편으로는 ..선술집의 광경들, 결혼식 및 기타 농부들의 잔치…등에서 표현된 빛, 조명, 그리고 채색 일반의 마법 및 색채 마술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히 생동적인 성격의 특성화이다.”[8]

 

여기서 다시 헤겔은 색채의 마법을 강조하는데, 이는 앞에서 회화의 질료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제시했던 바로 그 색채의 음악과 색채의 마법이다.

 

5)

헤겔은 색채의 마법과 음악을 통해 구체적 형상을 창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색채의 마법은 단순히 색채원근법을 통해 입체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니다. 색채의 음악은 동시에 감정을 생산하니, 이를 통해 회화의 특칭적 주관성의 원리를 실현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헤겔이 칸딘스키가 주장했던 것처럼 회화가 형상의 창조를 넘어서서, 색채 자체의 음악으로 나간다고 보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색채가 색채의 음악으로 발전하면서 이제 회화 장르를 넘어서는 음악 장르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1] 헤겔이 자주 사용하는 내밀성[innigkeit]라는 말의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내면성 또는 심정성을 의미하면서도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자기 내 복귀라는 운동성을 의미하며, 따라서 항상 무한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무한성은 한없이 크거나 작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내볼 복귀하여,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규정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칸트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숭고성 가운데 특히 역학적 숭고성에 해당한다.

[2] 미학강의 3권, 53쪽

[3] 미학강의 3권, 47쪽

[4] 미학강의 3권, 48쪽

[5] 미학강의 3권, 49쪽

[6] 미학강의 3권, 69쪽

[7] 미학강의 3권, 135쪽

[8] 미학강의 3권, 1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