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53- 서정시와 이비코스의 두루미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53-서정시와 이비코스의 두루미
1)
서정시에 관한 헤겔의 논의는 실러에서 시작해서 실러로 끝난다. 서정시를 논의하는 처음에 ‘이비코스의 두루미’이라는 작품이 있고 그 마지막에 ‘종의 노래’가 있다. 실러의 희극에 관해서는 상당히 혹평하는 헤겔이 실러의 시에 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특이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헤겔은 괴테의 시집 서동시집을 또 높이 평가했는데, 앞에서 우리는 괴테의 시, ‘황금의 술잔’과 ‘재회’를 소개한 바가 있다.
서정시에 관한 헤겔의 논의는 그가 높이 평가하는 쉴러와 괴테의 시를 전제로 놓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엄청나게 다양한 서정시의 영역에서 미학적 논의는 길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헤겔은 왜 실러나 괴테의 시를 전제로 놓고 시를 논하는 것일까?
2)
헤겔은 서정시의 본질을 서사시에 대비하여 설명한다. 서사시의 근본적 규정은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사건의 자립성에 있다. 개별 사건은 그 배후에 실체적 정신에서 출현한 것이지만, 실체적 정신은 개별 사건의 배후에 가려져 있다. 그러므로 개별적 사실은 마치 우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처럼 등장한다. 여기서 시인은 뒤로 물러나서 보이지 않으며 마치 사건 자체가 스스로 노래하는 듯이 전개된다.
서사시에 대비해 보면 서정시의 특징이 금방 드러나는데, 헤겔은 서정시의 핵심은 곧 시인이 자신의 내면을 외부로 표출한다는 데 두고 있다. 시인의 내면은 감정에서 표상(관념), 사유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내면은 행위로 이어지는데, 어떤 상황 앞에서 시인의 내면은 실제로 행동하지 못하면서 응축되어 감정적인 에너지가 나머지 표상과 사유를 지배하니, 헤겔은 이런 상태를 ‘단순하고 둔탁한 감정[Empfindung]’의 상태라고 규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상태는 “전체적 심정이 열정과 둔탁하게, 무의식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상태” 또는 “말없고 관념이 결여된 심정의 집중 상태”이다.[1]
이런 감정에 단순히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아직 시가 아닐 것이다. 시인이 자신의 감정이 지닌 에너지를 행동을 통해 표출하게 된다면 그 역시 시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음악이 감정을 심정의 운동 자체로 표출하는 것이라 한다면, 시인은 “심정이 개방되고 귀와 눈이 열려”, “둔탁한 감정을 직관과 관념으로 제고하고”, “내면에 어휘와 언어를 부여해야 한다.”[2] 이렇게 자신을 대상화 또는 객관화하면서, 시인은 “마음을 편집[偏執]으로부터 구출한다”.[3] 이런 시적 표현은 “각종의 우연적 분위기를 정화한 객체가 되며, 여기서 해방된 내면은 동시에 만족스러운 자의식을 가지고 자유롭게 자기에게로 회귀하여 자신 곁에 머문다.”[4]
3)
감정의 대상화, 객관화는 감정을 마치 설사약에 의한 것처럼 감정을 배설하는 것과 다르니, 시적 표현을 통해 감정은 배설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은 시인의 심정에서 독자의 심정으로 전달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시인은 “정신을 감정으로부터 해방하지 않고 감정 속에서 해방한다”[5]고 말한다.
이미 시의 출발점이 되는 감정 상태가 관념과 사유를 포함하는 복합적 사태이듯, 시적 표현을 통해 출현하는 관념과 사유 역시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다만 시인의 내면에서 지배적인 것이 감정이었다면 시적 표현에서 지배적인 것은 관념과 사유이다. 시인의 내면이 그 표현에서 이렇게 전도되고 다시 그런 표현이 독자의 가슴 속에서 감정으로 다시 전도하는 과정이야 말로 시적인 신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시적 표현이 어떤 개인의 특수한 내면성에 머무르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특히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면 개인은 자신의 특수성을 표현하려 하는데, 그 때문에 개인의 특수한 내면이 시의 주요 주제가 되어 왔다. 대표적인 것이 낭만주의 시대 넘치고 넘치는 사랑의 시로 보인다.
헤겔은 “직관과 감정이 아무리 개별 개인으로서 시인에게 고유하게 속하더라도” 시가 될 수 있겠지만, 탁월한 시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그것은 보편타당성을 포함해야 한다”고 한다. 즉 탁월한 시는 “참된 감정이자 고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참된 감정과 고찰’이란 곧 그 시대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인데, 이런 것을 통해서 서정시도 서사시와 마찬가지의 수준에 오르게 된다.
다만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은 서정시와 서사시에서 서로 구분된다. 서사시에서 시인은 개별적 자아를 버리고 그 시대 정신 자체가 되어 전체 사건을 굽어 보면서 그 전체 사건의 유기적 전체성을 통해서 명확하게 시대 정신을 표현한다.
반면 서정시에서는 시인은 자신의 개인적 내면을 우선시한다. 시인은 이런 개인적 내면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시대정신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니, 여기서는 “개별적 상황, 감정, 관념 등이 한층 깊은 본질성 속에서 파악되고, 이로써 자체가 실체적 방식으로 언표된다[6]”.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개인적 내면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전체 시대의 정신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즉 시대적 정신이 개인의 내면성을 통해서 “생생하고 독창적으로 짚어 내어”[7]진다는 것이다.
서정시에 단순한 개인적 내면이 아니라 시대 정신이 표출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예술이 시대정신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헤겔 미학의 기본 요구에 따른 것이며, 헤겔은 그런 관점에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실러와 괴테의 시를 서정시의 모범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가운데 헤겔이 극찬하는 실러의 시, ‘이비코스의 두루미’를 보자. 이 시는 발라드 형식으로 상당히 길어서, 여기에 다 소개할 수 없다. 간단한 줄거리만 보자면, 그리스 시인 이비코스[8]는 노래 경연대회에서 참가한 이후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늘을 날던 두루미 떼가 그를 따른다. 그는 숲을 지나가던 중 도둑 떼를 만나 살해된다. 그리스 전역에서 시인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누가 그를 죽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침내 온 그리스인이 모이는 포세이돈 축제가 열린다. 이때 하늘에 두루미 떼가 지나가자, 관중 속에서 ‘이비코스의 두루미다’라는 외침이 들린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무심코 내지른 사람이 바로 이비코스를 죽인 도적임을 알아차렸다. 그 가운데 이 시의 정점에 해당하는 부분만 보도록 하자.
“에리니에스[복수의 여신]의 노래가 그렇게 청중의/ 의식을 잃게 하고 마음을 마비시킬 정도로/ 골수에 사무치게 울려 퍼지자,/ 리라 소리도 견디지 못하고 사그라진다.//
…바로 그때 객석의 맨 위층에서/ 갑자기 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비코스의 두루미다.”/ 그리고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극장 위로/ 검게 무리를 지어/ 두루미 떼가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의문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전광석화처럼 모든 사람의 가슴에/ 어떤 예감이 스치고 지나간다. “여러분 주목해 주세요!/ 이것이 바로 에우메니데스[자비의 여신]의 힘입니다.!/ 마침내 신성한 시인의 복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의 전체에서 헤겔이 주목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시가 단순히 두루미 떼 덕분으로 시인을 살해한 자의 정체가 밝혀졌다는 사건이 아니다. 이 시에서 핵심은 곧 시인과 두루미 떼 즉 자연 사이의 공명이다. 자연은 시인의 노래에 공명한다. 그 때문에 두루미 떼는 시인을 따라 숲을 건너고 있었다. 시인은 죽었으나 두루미 떼 속에 영혼으로 살아 있다. 그 영혼은 다시 만물을 울리니, 그 때문에 다시 나타난 두루미 떼 앞에서 도둑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비밀을 내뱉고 만 것이다. 이 시가 노래하는 것은 어떤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시인과 자연과의 공감이라는 철학적 주제이다.
4) 서정시의 시대
시문학은 서사시이든, 서정시이든, 극시이든 어느 시대나 출현했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문학의 질료가 언어적 표상이며, 이런 언어적 표상은 다양한 예술 형식에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문학의 특수한 장르는 특수한 예술형식에 가장 전형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서사시가 완성된 시기는 아직 민족적 정신이 지배한 영웅의 시대였다. 개인은 민족 정신을 무의식적으로 또는 관습적으로 수행할 뿐이었다. 그 언어는 정신이 자기를 직접 표현하는 말, ‛일차적인 직접적인 말’이다. 여기서 직접적인 말은 감각적 표상과 사유의 개념이 직접 통일되어 있는 말, 원초적 언어를 말한다.
무의식적인 통일을 이루었던 정신을 벗어나 개인이 자각되면서 개인과 사회적 실체 사이에 대립이 생겨나며 개인의 행동은 억눌리면서 감정이 응축되고 서정시가 출현하게 된다. 그리스에서는 대체로 기원전 4세기경 왕과 귀족에 대한 평민과 이주민의 저항이 시작될 무렵이다.
서정시의 시대에 이르러 시적이며 동시에 개념적인 원초적 언어는 사라졌다. 언어는 추상적 개념을 지시하는 언어와 구체적 감각 관념을 지시하는 언어로 구분되면서, 서정시가 일반적 정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비유의 수단 즉 ‛풍요로운 표현’이 사용되어야 한다. 여기서 비유란 곧 구체적 감각적 관념이 추상적 실체적 정신을 지시하는 기호로 사용되는 것을 말한다.
헤겔은 이런 비유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교양이 발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서정시를 민요와 예술시[Kunst Poesie]로 대별한다. 민요는 민족적 감정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개인적 주관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치 서사시에서처럼 주관이 뒤로 물러나서 그 감정을 서술한다.
반면 예술시의 경우 시인의 주관적인 감각 관념을 통해 시대 정신을 표현한다. 서정시는 정신을 표현하더라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철학적 사유와 구분된다. 헤겔은 서정시는 예술을 넘어서되 아직 철학에 정주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예술과 철학 모두에게 폭력을 가한다고 말한다.
‟서정시는 내적으로 투쟁하고 씨름하는, 그 발효 속에서 예술과 철학 모두에게 폭력을 가하는 영혼의 토로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영역을 넘어서되 다른 한 영역에 정주할 수도, 혹은 그것을 고향으로 삼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9]
5)서정 시인
서정시는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관념과 사유로 대상화 또는 객관화 한다. 헤겔은 그 가운데 참된 감정과 관념을 표현하는 시만이 예술적으로 가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시에 이르기 위해 시인은 “자신의 의식을 들여다보며” “주관적 심정, 가슴의 경험과 관념을 반성하며”[10], 자기에 대해 관계하는 자기 반성적인 자아는 되어야 한다. 이런 자기 관계적 자아가 되기 위해 시인은 실제로 활동하거나, 극적 갈등의 동요에 휘말려서는 안 되며, 그의 유일한 활동은 자기의 내면에 말을 부여하는 것이고 독자가 자신의 것과 같은 내면에 이르도록 자극하고 일깨우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감정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감정을 대상화하는 자아는 곧 더 이상 개인적 자아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곧 그 시대의 일반적 정신이다. 이처럼 자아가 이중적으로 분열된다는 점에서 서사적 화자나 시적 화자는 동일하다 하겠다. 다만 서사적 화자에서 주관적 자아는 전적으로 사라지며, 민족적 정신을 대변하는 자아가 표면에 등장한다. 반면 서정적 화자는 표면적으로는 전적으로 주관적 자아이다. 다만 시대 정신을 대변하는 자아는 그런 주관적 자아의 배후에서 반성하는 자아가 있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핀다르의 송가를 높이 평가하는데 핀다르는 운동경기에서 승리자를 찬양한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자신의 정신과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승자를 찬양하는 것이 그[핀다르]의 영예가 아니라, 오히려 핀다로스가 그들을 찬양했다는 것이 그들의 명예였다고”[11]말한다. 즉 시인 자신이 불멸의 존재라는 것이다.
[1] 미학강의 3권, 424쪽
[2] 미학강의 3권, 423쪽
[3] 미학강의 3권, 424쪽
[4] 미학강의 3권, 424쪽
[5] 미학강의 3권, 423-424쪽
[6] 미학강의 3권, 427쪽
[7] 미학강의 3권, 423쪽
[8] 이비코스(Ἴβυκος, Ibycus: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활동)는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으로, 마그나 그라에카에 위치한 레기움 시민이었고, 참주 폴뤼크라테스의 치세 동안 사모스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9] 미학강의3권, 444쪽
[10] 미학강의 3권, 423쪽
[11] 미학강의3권, 4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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