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돼지 취급이라도 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개·돼지 취급이라도 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진섭(자유기고가)

“민중은 개·돼지로 보면 된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

주지하듯,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47) 공무원의 발언입니다. 2016년 7월 8일 저녁 한 신문사의 보도로 알려진 이 발언은 민중의 뒤통수를 제대로 내리쳤고 이튿날 내내 비난과 조롱, 풍자를 낳으며 포털 사이트를 뜨겁게 달궜습니다.

“99%의 개·돼지가 주는 세금으로 밥 처먹고 사는 놈이…”, “당장 파면해라”, “고위직 인사들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할 듯”, “기득권의 비밀을 누설하다니 승진은 물 건너갔군”, “교육부 폐지하고 농림축산식품부만 있으면 되겠다. 개·돼지만 있는 나라에 교육부가 웬 말?” 등등 인터넷에는 그야말로 격분한 민중들의 목소리가 빗발쳤습니다. 진부하지만 밤길 조심하라는 진심어린 충고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 출근길에는 각자 죽창이라도 들고 나올 기세입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좀’이 아니라 ‘많이’ 다릅니다. 민중을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라도 해주시겠다면 그저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38분마다 1명꼴로 하루에 3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나라 민중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어 먹고 살게 해주시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신은 2014년 궁핍한 생활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한 이른바 ‘송파 세모녀’를 기억하는 가슴이 따뜻한 공무원임에 틀림없습니다. 국가도, 시장도, 이웃 주민도,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이 사회에서 “먹고 살게 해주겠다”며 민중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신은 노인빈곤율 49.8%를 자랑하는 이 나라에서 폐지 줍는 175만 명의 노인들 또한 갸륵하게 여기실 줄 아는 공직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뙤약볕 아래서 하루 종일 1kg에 46원하는 폐지를 주우며 한 달에 고작 10만~20만 원을 손에 쥐는 자들의 고통에 공감하시지 않고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발언임을 저희 개·돼지들은 잘 알고 있답니다.

이뿐이겠습니까. 2년 전(2014년) 납득할 만한 이유도 모른 채 바다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영혼들의 억울함도 잘 알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신다는 말에서 개·돼지가 당하는 죽음보다 못한 죽음은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집니다. 적어도 상위 1%에 계신 고관대작들께서 잡아먹지도 않을 거면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저희 민중을 해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소신 발언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개·돼지로 봐 주신다면 적어도 저희가 죽임을 당하는 이유는 분명할 테니까요.

이번엔 2015년 여름 자고 일어나기가 무섭게 메르스(MERS) 바이러스가 곳곳에서 출몰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신다니 인수(人獸)공통 전염병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자부합니다. 메르스 사태처럼 숨도 마음대로 못 쉬고 억울하게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나아가, 구제역(口蹄疫)이 창궐해도 개·돼지 같은 저희 민중을 도살 처분하지 않으실 테죠. 지금까지는 구제역만 돌면 저희가 인간 취급을 받느라 진짜 개·돼지들이 땅 속에 매몰되었잖아요. 이제 모두 개·돼지가 되었으니 개·돼지 같은 저희들이 아프면 무상으로 치료도 해주시면서 먹고 살게 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경상남도 도지사께서 공공병원인 진주의료원을 폐쇄한 이유도 당신의 발언을 접하니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위한 병원 한 개보다는 개·돼지를 위한 수많은 공공병원을 짓기 위함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당신이 칭찬받아야 할 이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지난 10년간 저출산·고령화에서 벗어나고자 무려 152조 원을 투입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게 다 ‘내 코가 석 자’에서 비롯한 현상이거든요.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해 연애와 결혼과 출산은 꿈도 못 꾸던 차에 단비 같은 소식을 접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제 개·돼지처럼 먹고 살게 해주시겠다니 그동안 못 낳은 새끼도 많이 낳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벌써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습니다. 나향욱 정책기획관님 덕분에 처음으로 희망이란 걸 가져봅니다. 모돈(母豚)이라고 하여 평생 애만 낳다가 죽는 어미돼지처럼 살 수 있다는 꿈이라도 가져볼 수 있어 행복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애도 못 낳고 일찍 죽는 불상사가 인간 세상에 얼마나 많았습니까. 앞으론 저희 개·돼지 같은 민중의 출생률이 급격히 높아져 국익(國益)에도 도움이 되겠죠. 그리고 저희 개·돼지는 인간처럼 자연 수명이 길지 않습니다. 오래 살아봤자 20년입니다. 그러니 이제 고령화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겁니다. “민중을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발언은 바로 며칠 전 정부에서 발표한 새로운 국가 브랜드인 ‘Creative Korea’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발상이라고 확신 또 확신합니다.

이젠 젊은이들 보고 중동으로 가라는 말도 안 나오겠죠. 네 발 달린 짐승이 무슨 수로 중동까지 간단 말입니까. 중동가기 싫어하는 청년들의 마음을 간파하시어 개·돼지로 보고 이 땅에서 먹고 살게 해주신다고 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해당 발언이 보도되고 회자된 시점이 때마침 우리나라에서 제16차 ‘기본소득’ 국제대회가 열리고 있던 기간이었다는 점입니다(7.7.~7.9. 서강대학교). 기본소득(Basic Income)은 노동 여부, 소득·자산의 액수와 무관하게 무조건 일정 소득을 모두에게 보장해 주는 제도로서, 누구든 기본적으로 먹고 살 걱정은 없어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아시아 국가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열린 이번 행사 기간에 맞춰 나온 당신의 발언은 기본소득의 정신과 그 궤를 같이 한다는 걸 저는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자동화 및 인공지능 등으로 인간의 일자리가 급격히 대체되고 있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여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옛 말씀이 설득력을 잃고 있는 요즘,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면 된다”는 말씀은 ‘노동과 소득의 단절’이라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대기 발령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신을, 서울시·성남시 등 지방자치단체의 자율적인 복지 정책에 제동을 걸며 지방 재정에 목줄을 걸고 있는 중앙정부의 ‘기본수탈’의 정신과 정면으로 맞서는 ‘기본소득’의 적극적인 지지자로 임명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결혼수당과 출산수당 지급 등의 공약을 내 건 허경영 후보 못지않게 민생(民生)을 최우선으로 삼는, 아니 견생(犬生)과 돈생(豚生)을 택한 매력적인 당신에게 제 한 표를 드리고 싶습니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하시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오늘은 간만에 네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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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는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이번 글은 건국대 철학과 전공과목에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 영역본을 함께 읽었던 학생이 기말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스펙타클의 사회

정승우(건국대 철학과)

우리는 풍요로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시대를 거치면서 문명과 과학 등의 발달로 인간의 권리는 계속해서 신장되고, 절대적인 재화의 양은 증가했다. 삶의 조건은 점진적으로 나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적인 예로, 자취를 하고 있는 나에게 세탁기가 없는 삶보다 세탁기가 있는 삶이 훨씬 살기가 편하다. 그런데, 그것들과 비례하게 우리의 삶의 행복 또한 늘어나고 있는가? 나의 견해로, 행복의 절대량은 늘지 않았다. 수백 년 전 시대보다 삶의 여건이 무수히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보다 결코 현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 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일까? 외부 환경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왜 내적인 환경은 변화 혹은 나아지지 않는 것일까?

“스펙타클의 사회” 1장은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이란 책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그 서문은 기호가 기호화된 대상을, 복사본이 원본을 그리고 외양이 본질을 대체하는 것을 비판한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 또한 그와 같다. 아주 단순화 시켜, 이미지로 말할 수 있는 스펙타클이 개인의 삶 전체를 대체하고 있다. 1테제(“현대적인 생산조건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삶의 모든 것이 스펙타클들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에서부터 34테제(“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다.)에 이르기까지 기 드보르는 ‘스펙타클’과, 스펙타클이 만연하고 있는 ‘스펙타클의 사회’에 대해 서술한다.

1테제에서 말하는 현대적인 생산조건이 지배하는 사회는 곧, 자본주의 사회를 말한다. 여기서 스펙타클은 자본주의와 병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모든 것이다. 사용가치는 사라져버리고 교환가치만이 중시된다. 모든 것에 값이 측정되어 본래 목적에 대한 고려는 사라지고 오직 그 값의 규모에 따라서만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다. 자본이 모든 것인 자본주의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자본의 증대이다. 사실, 이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 권리의 신장과 함께 등장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서 개인들은 소유한 자본의 양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진다. 특히 생산수단의 소유 유무로 개인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는데, 자본을 생산할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는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노동을 교환가치로 내세우며 자본가 아래에서 일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 ‘자본을 더 소유하는 순간 너는 언제든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의 특수한 논리를 통해, 그러한 계급의 나뉨을 정당화한다. 이 사회 속에서 개인은 ‘having’ 소유를 통해서만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다. 즉, 모든 것의 가치가 자본으로 매겨지는 사회 속에서, 인정 혹은 사회적 선망은 자본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 개인이 적응하는 순간, 소외가 시작된다. 이 체제 안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노동의 과정에서 또한 소외되며, 인간으로부터도 소외되고 마지막으로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된다. 소외된 노동자의 비참한 삶은 자본가를 선망하게 된다. 즉, 자본을 선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욱 자신의 삶과 멀어진다. 자신과 자신의 삶의 분리, 자기 소외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이다. 개인들의 그와 같은 소외에 힘입어, 자본주의는 더욱 단단해지고 발전한다.

이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자가 발전을 하여 스펙타클의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 이전의 자본이 하던 기능, 목적 등은 스펙타클이 그대로 이어받는다. 다르게 말하면, 자본이 축적되어 스펙타클이 된다. 이제 ‘having’ 소유는 ‘appearing’ 보여져야하는 것이 된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이 자본 혹은 교환가치로 둘러 쌓여있었듯이,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스펙타클로 둘러 쌓여있다. 쉽게 말해, 교환가치로 환원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지화된다. 이제 노동자는 단순히 자본을 쫓지 않고, 자본이 보여주는 이미지를 쫓는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가상을 쫓는다. 하지만 그 가상은 동시에 물질적으로 환원된 실재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라고해서 이 세상과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얼어붙은 호수 위에 눈이 내려앉아 하나가 되듯, 스펙타클은 현실과 분리돼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존재한다. ‘벤츠’를 얻는 것이 벤츠를 사는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듯.

스펙타클의 사회는 파편화된 개인의 삶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스펙타클은 그러한 개인의 삶을 그자체로 통합해버린다. 자본주의 안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통합되었듯이, 모든 것은 스펙타클로 통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통합은 진정한 개인의 삶의 통합이 아니라 찢긴 채 분리된 삶을 단순히 획일적으로 뭉쳐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스펙타클에 의해 통합된 개인의 삶은 더 이상 생생한 삶이 아니라 허위의 삶이다. 왜냐하면 스펙타클 자체가 기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이 단지 소유되는 대상이 아니라 노동자 혹은 개인의 삶을 지배하기에까지 이르는 자립적인 존재였듯이, 스펙타클 또한 단순히 수동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지 않고 자립적으로 움직이며 개인의 삶을 잠식한다. 스펙타클과 개인의 삶이 전도되는 것이다.

스펙타클에 의해 개인의 삶이 잠식된다는 것은, 개인의 삶이 부정됨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펙타클은 보이는 것, 시각을 제외한 그 외적인 부분들을 부정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개인의 실현은 ‘appearing’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오직 시각적으로만 드러낼 수 있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스펙타클을 통해서만 드러내진다. 그래서 스펙타클은 일종의 지도이다. 어떤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서 지도를 봐야하듯이, 스펙타클의 사회 안에서 개인들은 행위 하기 위해 스펙타클을 통해야한다. 스펙타클에 의한 삶의 잠식 혹은 전도는 스펙타클이 더 이상 허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현실이 되어버렸다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제 ‘벤츠’가 없이는 더 이상 벤츠는 벤츠일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 스펙타클이 개인의 실제 삶의 부정이라는 것 혹은 개인의 삶을 점점 해체시킨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펙타클은 자본주의가 발전함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오로지 스펙타클 자체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스펙타클은 오로지 자본의 증대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총체적인 것으로서 스펙타클을 보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합리적 도구다. 즉,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결과이자 프로젝트이다. 자본은 소비를 통해 더욱 축적된다. 스펙타클은 바로 그 소비를 조장하고 정당화시킨다. 자본가는 스펙타클을 만들어서 개인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하지만 그 때의 욕망은 자본가에 의해 투여된 거짓 욕망이다. 개인의 실제 삶이 부정된다는 것은, 생생하게 경험되는 삶이 부정된다는 것이다. 생생하게 경험되는 것이 부정된다는 것은 스펙타클의 사회 안에서는 스펙타클 혹은 이미지만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스펙타클을 자본주의의 합리적 도구로 봤을 때, 스펙타클 혹은 이미지는 자본가에 의해 장치된 것이므로 이는 곧 개인의 삶이 자본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으로 나아간다. 개인의 주도적 선택은 이제 소멸돼버린다. 그렇게, 개인은 점점 자기로부터 소외되고 종국에는 개인의 삶이 산산조각난다. 이처럼 스펙타클은 권력 자체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는 자본주의 안에서 드러나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틈 혹은 모든 문제들을 더욱 더 견고하게 벌려 놓는다. 스펙타클은 개인의 일상에까지 침투하고 노동자는 더욱 더 스펙타클에 그리고 자본에 종속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안에서 군림하며, 스펙타클을 도구로 사용하는 자본가는 과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실제 스펙타클은 자본주의에 갇혀진 의미를 초월한다. 스펙타클은 이미지 일반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한편으로 이미지다. 칸트의 인식론에서처럼, 물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칸트는 지각을 통해 받아들인 대상을 ‘인식의 틀’을 통해 인식한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받아들여진 모든 것이 물자체에 대한 인식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모든 것은 이미지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근접함의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이미지는 본래 자립적이며 지배적이다. 최초로 받아들인 이미지는 우리의 인식을 통하여 떠올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 만들어진 그 후로는 독립적으로 사고를 지배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새로운 사람을 보고 A라는 이미지를 가졌다고 가정하자. 이제 그 A라는 이미지는 내가 떠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볼 때 저절로 떠오르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나의 판단에 계속해서 개입한다.
개인적 인식의 차원에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통합되어 칸트 식의 ‘인식의 틀’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이미지들이 있다. 중세의 ‘신’, 근대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현대의 ‘스펙타클’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들은 ‘인식의 틀’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마치 개인의 주체성을 건드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것들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 완벽한 주체성이란 것이 가능한가? 토마스 쿤은 과학 이론은 패러다임 속에 존재하며, 그 패러다임은 모든 과학적 탐구에 영향을 끼친다고 언급한다. 만약 현재의 패러다임이 무너진다면, 그것으로 패러다임은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무너지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패러다임을 대체한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인간에게 생생하게 경험되었던 삶이란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뿌연 연기 속에서 소외된 상태로 존재해왔다.

그런데 이 통합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러한 통합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기인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한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결핍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결핍을 외부의 무언가로 채우려고 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중 하나인 외로움을 생각해보자. 인간은 항상 외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타인을 만나면서 잠시 그 외로움을 잊는다. 하지만 타인이 떠나면 다시 혼자 남게 되고 외로움은 여전하다. 그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다시 타인을 찾는다. 여기서 타인이 바로 통합 이미지 곧, 스펙타클이다. 스스로 존재함에 대한 불완전함 혹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외부에 무언가를 상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외부로부터 만족을 바라는 태도, 인간의 수동성이 통합 이미지, 스펙타클의 기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가 자립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며 그것에 지배받는 것, 그 모든 과정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다.

다시, 자본가는 스펙타클로부터 자유로운가? 자본가조차 스펙타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가는 자본주의 속에서 자신들만큼은 능동적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소수의 자본가가 스펙타클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스펙타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스펙타클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뿐이다. 자본의 이미지화인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단지 노동자에 비해 자본을 많이 가졌다는 것, 생산수단을 소유하여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자본가들이 자본을 추구한다는 그 자체가 그들이 결핍을 채워줄 외적인 존재, 즉 ‘스펙타클’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의 발전 혹은 삶의 조건의 발전과 개인의 행복이 무관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들에서 비롯된다. 행복의 절대량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삶의 불완전성을 외부로부터 채우려는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해결하려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이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또 다른 ‘스펙타클’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하지만 스펙타클의 사회는 금방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스펙타클은 매우 강력하다. 그 강력함은 곧, 불완전한 인간의 소유욕과 비례한다. 인간은 자본주의가 발생시키는 많은 부조리한 것을 보면서도, 자본주의를 쉽게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소유욕을 개인적 차원에서 가장 잘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자본이 있는 자는 무엇이든 소유할 수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말하는 이미지 또한 인간의 결핍, 소유욕을 채워주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자기실현은 언제나 ‘having’ 소유였다. 단, 그 소유의 대상이 달라진 것일 뿐.

과연 우리는 스펙타클 혹은 통합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의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결핍이 없는 존재로 여길 수 있느냐, 실존 자체만으로 우리 삶을 만족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 인간은 사회 구조를 끊임없이 인간 권리를 지향하는 쪽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무엇을 위해서인가. 바로 삶의 만족 혹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행복 혹은 만족은 외부에서 채울 수 없다. 집단 형성을 통한 혁명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능동적으로 보이는 이조차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물론,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개인적 차원으로 모든 것을 돌리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존 자체에 대한 만족이 없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로 시선을 돌릴 것이고 소외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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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우쑵니다.

덥습니다. 더위만큼이나 저의 삶도 무덥습니다. 슬럼프입니다. 누구나 겪는 것이겠지만 나이들어서 겪는 슬럼프를 제대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싸놓은 똥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는 요즘입니다만 많이 부끄럽습니다. 하여 죄송스런 마음을 전하는 표시로 예전에 썼던 글 하나를 올립니다. 어서 슬럼프를 헤쳐나와 부끄러운 사치의 글쓰기를 감행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꾸뻑.

 

화장실이야말로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를 감추고 있는 인간의 건축물이다. 지젝은 여러 곳에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프랑스 변기는 용변을 보자마자 스위치 누를 필요도 없이 신속하게 구멍으로 빠져나간다. 혁명적이다. 독일은 물도 없는 변기에 변이 빠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있다. 냄새가 지독하다. 성찰과 반성을 하게 만든다. 관념적이다. 미국에선 변기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스위치를 눌러야 내려간다. 실용주의적이다.

Slavoj Žižek

그러나 지젝의 생각과는 달리 더 근본적으로 화장실이야말로 가장 형이상학적 문제가 감추어진 건축물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는 참으로 독특한 질문을 던진다. 신도 똥을 쌀까? 똥과 신은 양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똥은 가장 심각한 신학적 문제이다. 골칫거리다.

그래서 밀란 쿤데라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왜 화장실에서 문을 꼭 잠그는가? 이 질문은 물론 서양 사람들을 향한 질문이었다. 밀란 쿤데라는 이것을 서양의 낭만주의와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중국을 여행하면서 깨달았다.

중국의 화장실에 가 본 일이 있는가? 중국 화장실에는 문을 잠글 일이 없다. 잠글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이 없다. 아니, 문이 필요 없다. 그들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을 잠그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왜 그럴까? 다시 왜 인간은 화장실에서 문을 잠그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벌거벗은 몸이 창피해서? 성기가 노출되어서?

아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기가 노출되는 것이 창피한 것이라면 목욕탕 가는 것조차 거부해야 한다. 그러니, 성기가 노출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똥 누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그것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창피할 뿐 아니라 두렵기까지 한 것이다. 중국 문화는 똥 누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 문화다.

현대의 수세식 화장실은 자신이 똥을 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채, 모든 것을 깨끗하게 처리하고 가뿐하게 나와서 사람들에게 똥을 싸고 나왔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건축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현대의 수세식 화장실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어 인간이 똥을 누지 않는다고 착각할 수 있도록 만든, 신학적 명제를 실현한 건축물이다. 똥을 누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 서양의 낭만주의 시대의 핵심이다. 중국의 화장실은 다르다.

화장실

똥을 누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인간이란 똥을 눌 수밖에 없는 현실을 외면하려는 인간에 대한 은유일 뿐이다. 똥을 누지 않는 신적인 환상에 갇혀 자신이 똥을 누고 있다는 인간적 현실 자체를 회피한다. 결국 그것은 자신의 환상에 갇힌 채 결벽증을 가진 미성숙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이 말처럼 잘못 전파된 말은 없다. 실은 무서워하면서 더럽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일 뿐이다. 인생에 똥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똥은 피할 수 없다. 똥은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여 관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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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 한병철의 ‘피로사회’로 바라본 내 자신 –

최민국(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3학년)

하루하루가 피곤하다. 언제부터인가 이 피로감은 가실 생각을 하질 않는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나도 피곤이 몸에 걸린 족쇄처럼 나를 따라 다닌다. 이 피로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것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건 없다. 모든게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공부도 노는 것도 전부 귀찮다. 그냥 매대에 널린 생선들처럼 침대에 가만히 누워 빈둥대고 싶다. 뭔가를 한다는 것에 대한 의욕이 없어 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 자신이 한심해지고, 내 자신을 구박한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초라해진다.

왜일까? 나는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시간을 거슬러 고등학교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그때는 하나의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대학에 가는 것. 수능을 잘 보는 것. 이 두 가지 목표만을 향해 나를 채찍질 해왔다. 가끔은 내가 이렇게 공부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을 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그렇게 나를 다그쳐 달려온 길에는 몇 가지 타이틀이 놓여졌다. 그리고 그 길은 그 곳이 끝이었다. 그 길은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전혀 알려주지 못했다. 나는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그저 이 허울만을 위해 달려 왔던 것이었다. 그때는 거창한 목표였던 줄 알았던 그것이 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목표를 이루게 되면 나의 삶도 자연스레 다음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나는 어느새 사회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던져져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아이와 같이 어디로 갈지를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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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온 인생은 어쩌면 한병철이 제시한 ‘성과주의의 피로사회’에 충실한 삶이 아니었나 싶다. 내게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너는 할 수 있다.’ 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천에서 용 나듯 바닥부터 시작하여 성공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너희도 노력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프다하면 ‘힐링’이라는 명목으로 다 괜찮다고 말했다. 그때는 원래 아픈 거라면서. 노력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재촉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뒤쳐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성공과 실패에 대해 나는 ‘노력’이 부족한 나 자신을 탓하게 됐다. 성과에 매몰된 삶을 살았던 나는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사회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이전에 나의 결점을 찾게 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똑바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더하여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일들을 해 가는데 있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고려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에 대한 성찰도 없이 그저 사회가 제시한 목표를 따라 충실하게 일을 수행하는 그런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또한 이런 삶속에서 내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했고 그 끝에 탈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상태까지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한병철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사색할 여유를 가지고 긍정적 피로를 만들어 낸다면 더 이상 이러한 성과에 집착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좀 아쉽다.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자기 자신의 성찰과 사색이 부족해서 이렇게 성과를 만들어 내는데 집착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았다. 왜 그렇게도 노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자신의 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은 성과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구조가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도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도 없는 환경에서 사색을 통한 성찰만이 힘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돈벌이가 안 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일만을 하면서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마치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그 방향을 향해 달려나가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사회가 제시하는 주류에 속하는 길은 너무도 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길에 들기 위해 열심히 경쟁하고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면 삶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사회와 기업의 좋은 부품이 되기 위한 레이스같다.

이런 치열한 레이스 속에서 내가 여유롭고 싶다고 여유로워 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한 가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사회 구조를 하나하나씩 바꾸어 나가는 것. 말로는 너무나 쉽다. 하지만 요즘 들어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구조가 바뀔 수 있냐는 의문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왜 움직이지 못하고 이러한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것일까? 결국은 자신이 당장 먹고 살길이 없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하루 살기 급급한 상황에서 결국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내 눈앞에 던져진 문제들뿐일 것이다. 더 큰 문제들을 알더라도 애써 그것들을 무시하고 다시 일상의 문제들로 눈을 돌린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무척이나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절망할 수는 없다. 이 상황 속에서 적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 먼저 우리는 이 문제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불씨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사회를 똑바로 보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잘못된 것들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잘못된 것들을 잘못된 줄 모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게 하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작은 일상의 사소한 부분부터 바꾸어 나간다면 지금 당장 바뀌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미래가 그리 절망적이진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즉 우리가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에만 어떤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다. 우리가 변화 하지 않으면 바뀌는 것은 없다. 나는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가? 오늘도 질문을 던져본다.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7

 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한없이 낯선, 한없이 내려가는 그 길을 가면
체를 걸러 면을 만들라고 하고
한없이 위를 보라한다.
위를 보면 길을 걸을 수도 없다.
아래를 보고 한발한발 걸을 때
구멍송송 걸른 체 사이로 버려질 것은 버려지고
사이로 들어오는 바램은 얼굴에 맞닿아 바람을 일으킨다.
그 곳에는 굳이 채워야 할 것도
내세워야 할 것도 필요하지 않다.
바람 한점 없는 굽은 땅에
저절로 바람은 분다.
바람은 항상,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내가 머무는 곳에, 내가 가는 곳에.

2016-6-29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6-6-29 길 copy


작업노트

아직 푸른 잎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앙상한 나무를 마주할 때
나무의 선을 따라 그려지는 가지의 선은 사람들의 발길 닿는대로
만든 길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지는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여 무수한 길을 만들어내듯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인위가 만들어낸 복잡한 공간 현상에서
새로운 곳으로 떠나 자연이 숨쉬는 산을 오르고 내려가며
아무것도 없었을 그 곳에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갔을 새 길이 다져져 있음을 봅니다.
자연의 한숨 한숨과 이웃하며 사람들의 공간을 내려다보면
삶을 너무 틀에 가둬 살았다는 생각이 들고 가슴 한 곳의 무거움이
어느 한 순간 가벼움으로 바뀝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참으로 시원해지는 순간입니다.
어렵지 않게 스스로의 발이 가는 길을 바라보기도 하며
노래하는 새들을 바라보기도 하며, 척박한 공기에 어느 순간 바람이 불어오면
어지럽게 춤을 추는 나무를 보기도 하며, 세상의 소리도 듣기도 하며
바람의 노래를 듣기도 하며 자신이 만들어가는 길에서 가는 방향에 따라
새롭고 다른 형태의 길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밟아가는 그 모두의 여정은
아름다운 길이 되는 것 같습니다.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

이진섭(자유기고가)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된 오빠께.

안녕하세요? 저는 평범한 서울에 사는 초등학생이에요.
얼마 전 숙제를 하다가 오빠의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스크린도어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오빠가 이것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이었어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슬퍼하고 같이 아파할 수밖에 없어 미안합니다.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2016. 6. 2.  당신의 희생을 슬퍼하는 평범한 초등학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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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하다가 당한 참담한 일입니다. 이미 여러 사람이 똑같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방 속에서 나온 컵라면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2016. 5. 30. 국회의원 안철수 트위터 중.

 

놀랍게도, 같은 나라에 사는 두 사람이 같은 사고를 접한 후 보인 반응이다. 삶과 죽음의 현장을 넘나들며 생명을 돌보는 의사였던 안철수가 지금은 의료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나를 포함한 국민 전체의 생명과 안녕을 다루는 한 나라의 공직자가 된 것을 더 큰 불행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헷갈린다.

묻고 싶다. 우리 사회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에 왜 초등학생이 미안해하고 슬퍼하고 아파해야 하는지. 반면 공공의 업무를 보살펴야 하는, 나아가 대권을 꿈꾸고 있는 공직자는 왜 저 모양인지.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라는 안철수 의원이 말이 맞긴 맞다. 냉철한 현실 인식이다. 그렇다. 흙수저로 태어나면 금수저 밑에 들어가서 위험한 일도 척척 해내야 컵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다. 비행기 안에서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논리에 맞게 땅콩 서빙도 눈치껏 잘 해야 한다. 여유가 없는 집에서 태어나면 위험수당을 받기 위해 군사적 긴장도가 높은 해외 근무를 자진해야 하며, 제대 후에는 고객님께 따끈따끈한 치킨을 전해드리기 위해 오토바이 위에서 목숨 걸고 총알 배달을 해야 한다. 질환이나 장애가 있어 더 이상 식당 일도 못 나가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집에서 번개탄 피워놓고 마지막 숨을 쉬어야 한다. 그간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을 보며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도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질주하지 않아도 되며 자살을 시도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맞는 말을 한 안씨가 왜 비난을 받아야 하냐고? 이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안씨가 비난을 받는, 또 받아야 하는 이유는 공직자로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 때문이다. 화장실 갈 시간도 허락하지 않고 컵라면 먹을 시간조차 용납하지 않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위험한 업무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 바로 이 지점이다. “이미 여러 사람이 똑같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라고 했으면 그 다음엔 “이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해야 합니다 또는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안씨는 뭐라고 했는가.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선택했을 거란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는 금번과 같은 사고로 계속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승인한다는 내용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헐~, 생활을 위해 일하면서 그 일 때문에 생활 이전에 생존부터 위협받는 아이러니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공직자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의 말은 ‘억울하면 너도 출세해’ 또는 ‘세상은 그냥 요지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건 무력한 세인들 간에나 하는 말이지, 정치인이 세인들에게 할 말은 아니다. 오히려 세인들이 견지하고 있는 저러한 냉소와 조롱의 정서가 사그라지도록 하는 역할이 정치이고 정치인이 존재하는 이유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그토록 위험한 일들을 덜 위험하도록 만들어 가라는 부름을 받은 자들이 공직자다. 그러기에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며 밥도 거를 정도로 바쁘고 위험한 일을 자연발생적인 전제로 두고 이는 그 개인이 선택한 것이니 그 결과도 고스란히 개인이 안고 가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정치인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야말로 당연하다.(미주*) 고대 그리스 시절보다 세상이 좋아져서 비난 정도로 끝난 것이지 제대로라면 이런 자들은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맞다(잠재적 대권 주자? 어이가 없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추구하는 효율성과 수익성의 원리로 조직된 사회의 그물망에 숨통이 조인 한 생명을 떠나보낸 일반 시민들조차 이번 사고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터에서의 참사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공직자가 저 따위로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걸 공직자 이전에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일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여당의 태도 또한 기가 막히다. 새누리당은 금번 구의역 사고를 끌어들여 ‘파견법(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번 구의역 사고는 파견이 아닌 ‘원청-하청’ 구조와 그 속성에서 기인한 것이지 파견법이 개정되지 않아 발생한 일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파견법 개정안이 친(親)기업 입장에서 파견 노동자 양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파견 역시 전형적인 간접 고용 방식으로 ‘원청-하청’ 방식 이상으로 심각한 ‘책임지지 않음’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그러니 구의역 사고와 같은 참사를 막기 위해 파견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정치인의 말은 어불성설이며 기만 중의 기만이다. 도대체 이 나라 정치인들은 제 정신인가? 유가족의 통곡과 분노, 초등학생의 눈물이 그대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가? 국민을 대표한다는 자들이 제 정신이라면 구의역 사고 이후 파견법 등을 비롯해 노동 환경 전반을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하는 것이 지극히 옳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산다’ 는, 그야말로 <세상은 요지경>의 가사를 되풀이하고 재확인하는 일은 공직자의 업무와는 거리가 멀다. <세상은 요지경>은 대중이 정치인들을 향해 겨누는 조롱의 화살이지, 정치인이 대중에게 감히 내뱉을 말이 아니다. 정치인은 그저 말없이 조용히 행동하면 된다. 평범한 초등학생의 눈물을 닦아주고 다시는 어린 소녀의 얼굴에 이와 같은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말이다.

평범한 초등학생의 두 볼에 흐른 눈물이 이번만은 아닐 터. 위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조현병 환자인 공직자를 둔 우리 사회에 눈물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있으며 그 눈물이 마른 곳은 있을까. 눈물은 세월호 침몰과 메르스 방역 실패에 따른 무고한 죽음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로 인한 아픔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그동안(아니 훨씬 이전부터) 독성 가습기 살균제는 확인된 통계로만 266명의 숨통을 끊어 놓았고, 울산-거제 벨트에서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해고를 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곡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남역에서는 한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의 칼부림에 손쓸 틈도 없이 비명에 갔고, 구의역에서는 한 청년이 자신의 몸과 시민의 안전을 맞바꾸며 기득권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는 일을 강요받고 있었다. 결국 그는 온 몸으로 피를 쏟았고 그의 어머니는 온 몸으로 눈물을 토했다. 매일 전쟁을 치러내야 하는 이 삶과 죽음의 매트릭스를 아비규환 외에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 지금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땅은 지옥불반도 헬조선이 맞다. 사회가 그야말로 작살이 나고 있는 와중에도 이 나라 최고의 공직자라는 사람은 해외로 나가는 것도 모자라 그 곳에서 빼놓지 않고 K-Pop 공연을 관람한다. 심지어 손을 흔들며 환한 표정을 짓는 여유를 보인다.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의 환한 미소 앞에 평범한 초등학생의 궂긴 표정이 겹쳐 보인다.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오빠가 이것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이었어요”

그렇다. 초등학생조차 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속한 이 사회가 나에게 850원 어치 컵라면조차 용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곳이 돈벌이 논리에 신음하는 자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 천박한 헬조선임을. 나아가 ‘지금 초등학생인 나도 몇 년 후엔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근거 있는 상상과 우려를 했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2016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키워가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린 현실. 언제 짓밟힐지 모르는 불안한 꿈이기에 꿈꾸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져 간다. 애초부터 꿈을 꾸고 희망을 갖는 삶이 결국엔 공허하다는 걸 깨치지 않게 해주려는 배려였을까,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이미 꿈꿀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서울의 많은 초등학생들은 과도한 학업 부담으로 밤 12시까지 공부한다는 내용의 인터뷰가 방송을 통해 소개되더라. 서울의 평범한 초등학생이라고 운을 띄우며 시작한 저 편지의 주인공 역시 밤늦게 꿈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평범한 서울의 초등학생은 아닐지 문득 궁금해진다.

초등학생도 글로 표현해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사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공직자가 있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충격을 넘어 이들이 공직자 중에서도 소위 ‘별 중의 별’이라는 사실이 공포를 더한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누가 더 밝은 빛을 발하는지 경쟁하느라 바쁘다. 지상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누군가를 ‘하늘의 별’이 되도록 방치하면서도 자신들은 ‘하늘 같은 별’이 되어 시민 위에 군림하려 한다. 그사이 지상에선 누군가는 끊임없이 죽어 나가고 지하에 묻힌다. 이들은 멈추지 않고 달리는 지하철을 하늘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오히려 더 빨리 더 멀리 달리라고 연료를 지원하기도 한다. 이러니 우리 사회의 공직자들이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공직자는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면 일단 멈춰 서서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고 더 나아가 사회의 부조리와 몰상식으로 인한 사건/사고를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합당한 조치를 해야 할 의무와 권한이 있다. 공직자는 수시로 지상으로 내려와서 필요하다면 지하까지 강림하시어 멈추지 않고 달리는 지하철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저 평범한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아래 편지 내용에 잘 드러난다.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슬퍼하고 같이 아파할 수밖에 없어 미안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나는 단지 슬픔과 아픔을 공감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지만 평범하지 않은 안철수 너는 같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을 넘어 공직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새누리당의 파견법 개정 시도를 꼭 본 것 마냥 평범한 초등학생의 깊은 우려와 따끔한 충고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이 살고 있는 사실상 두 개의 나라인 이곳에서 만 2살짜리 아이가 초등학생으로 살아갈 미래의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엄마와 할머니 손을 잡고 이비인후과 문을 열고 들어온 만 2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좁은 공간에서 잘도 뛰어 논다. 좋다고 할머니 품에도 안긴다. 아프긴 해도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다. 나에게도 관심을 보인다. 문득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명을 달리한 19살 청년의 어릴 적 모습을 상상한다. 그 청년도 저렇게 즐거워하며 또 귀여움을 받고 자랐을 것이다. 엄마랑 할머니랑 살을 부대끼며. 유가족이 된 그의 어머니 말에 따르면 다 자란 지금까지도 어머니 볼에 뽀뽀를 하는 살가운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온, 끈끈했던 그래서 단단해보였던 20년의 시간은 단 한 순간에 파편화되었다. 자본의 냉정한 논리 하에 그동안의 뜨거웠던 살점들은 무참히 뜯겨져 나갔다. 그 곳에 더 이상 사람의 살‘정(情)’과 ‘오감(五感)’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차가운 공구들과 아직 뜯지 않은 컵라면, 나무젓가락, 그리고 라면 국물을 떠먹기 위한 스테인리스 숟가락만이 쓸쓸히 그리고 온전히 돌아왔다. 나를 보고 웃는 그 2살짜리 아이가 우연히 그리고 다행히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여전히 반복되는 어이없는 언니/오빠/형/누나들의 죽음을 보며 위와 같은 편지를 계속 쓰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도 밤 12시에 학원 숙제를 하던 와중에 말이다. 그리고 그 때쯤이면 저 편지를 쓴 서울의 평범한 초등학생은 여전히 평범한 젊은이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제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2살 아이든 초등학생이든 우리가 살아갈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넓은 의미에서 사람 살만한 사회여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를 위해 공직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일상의 여유가 있든 없든 이미 우리의 죽음은 그것과 무관하다. 여유가 있으면 있어서 죽고, 없으면 없어서 죽는다. 컵라면도 먹을 여유 없이 죽어라 일만 하다 실제로 죽기도 하고, 친구들과 술 한 잔 기울이는 여유를 보이다 죽음을 당하기도 하며 좋은 공기를 마시려다 되레 살균제를 흡입하여 죽기도 한다. 그러니 안씨가 흙수저의 처지를 모르고 금수저만 옹호한다고 비난하지는 말자. 안씨는 금수저 흙수저를 떠나 자연인(사람)에겐 관심 없다. 오직 법인(자본)의 성장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본인은 부인하지만) 노조가 생기면 회사 문 닫아야 한다고 말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람의 입 구멍과 콧구멍은 닫혀도 회사 문은 절대로 닫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안씨다. 구의역 사고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뒤에는 연대하지 못하는 무력한 노동을 강요한 폭압적 구조가 작동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트윗글에서도 보듯 안씨는 이 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다. 이러한 소수의 탐욕과 이를 뒷받침하는 다수의 희생이라는 비인간적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심화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4·13 총선 직후 캐스팅 보터(casting voter)로 등장한 안철수 정당(국민의당)이 적극적으로 처리하려 한 법안 중의 하나가 새누리당이 만든 파견법 개정안임을 아시는지. 노동하는 사람이 다 죽어 나가면 결국 회사도 문 닫지 않겠냐고 물어보면 그땐 입 구멍 콧구멍 걱정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가는 로봇으로 대체하면 그만이라고 대답할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오감에 공감하지 못하고 저 따위 트윗글이나 날리는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에게 우리가 표를 주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눈꼽만큼도 없다. 정치인이 할 일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몸과 살을 가진 존재로서 ‘쓰레기가 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실업/빈곤/질병/재난 등의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오는 인생 리스크를 줄여주는 일이다. 이를 ‘사회안전망’이라고 하는데 ‘회사안전망’에만 주력해 온 안씨가 들어나 봤을지…

하긴 자신의 인생 리스크를 관리할 줄도 모르고 정치판에 뛰어든 철없는 안씨에게 무슨 기대를 하랴. 장차 정치판에서 죽게 될 안씨에게 미리 조문을 해본다.

“안씨, 당신도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미주*)  2014년 서울 지하철 1~4호선의 스크린도어 장애 신고 건수는 1만 2천여 건으로, 일 평균 30건이 넘는다고 한다. 서울 강북 49개 지하철 역사의 스크린도어 전체를 4명의 직원이 담당하고, 수리 시작 전에 다른 곳으로의 출동 명령이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수리하지 못할 경우 해당 직원이 불이익까지 감당해야 했다고 하니 2인 1조는 언감생심. 혼자 작업을 해도 항상 초과근무를 했고 밥 먹을 시간조차 부족했다는데 이런 업무를 개인이 원해서 선택했다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공구 가방 들고 이 역사 저 역사로 불려 다니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850원 짜리 컵라면 하나 겨우 먹는 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정치인이 있다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그런 자가 정치인으로서 더 큰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 큰 문제이며 그 정치인이 바이러스인지 백신인지도 분간 못하는 유권자들이 있다는 건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치명적 결함이다. 안씨는 공직자로서 사회 전반적으로 병리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요즘 ‘사회적 백신’을 만들어 보급해도 모자랄 판에 자기 스스로 바이러스가 되어 가고 있다. 아니, 애초부터 백신의 탈을 쓴 치명적인 바이러스였는지 모른다.

[교육부]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진보적 철학자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모임입니다.

철학을 기반으로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위한 철학 세미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기간: 6월 25일~7월 30일 매주 토요일 오후 3시~6시
    (7월 12~13일 1박2일 한철연 엠티, 7월 16일은 휴강)
  • 대상: 학부 3~4학년 및 대학원생 (철학을 토대로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
  • 장소: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태복빌딩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실
  • 수강료 : 무료
  • 진행 방식 : 일방적 강의가 아닌 세미나 (부분 수강 불가)
  • 신청 방법: 메일 (ggongbab@naver.com)로 자기소개서를 보내주세요.
  • 문 의: 02-332-4301, ggongbab@naver.com* 강좌 수료 이후에는 일정 절차를 통해 정회원으로 가입하여 각 분과에서 활동 할 수 있음.
    (자기소개서 다운로드: 한철연 홈페이지(hanphil.or.kr) → 공지사항 :여기로 http://www.hanphil.or.kr/notice/view.asp?key=532
일시 주제 주관 강사
2016. 06. 25 지젝의 바디우, 들뢰즈 비판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김성우(兀人 고전학당 연구소장)
2016. 07. 02 맑스주의 사상사 맑스 분과 이순웅(서울시립대 외래교수)
2016. 07. 09 페미니즘과 철학, 그리고 우리 여성과 철학 분과 김은주(이화여대 외래교수)
2016. 07. 12 ~ 13                                           한철연 엠티
2016. 07. 23 법철학 헤겔 분과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2016. 07. 30 초기서양철학의 수용사 한국현대철학 분과 유현상(상지대 외래교수)

 

[안내] 한철연 회원님들께(웹진 편집위원회 보고)

한철연 회원님들께.

안녕하세요. 한철연 웹진 (e)시대와 철학입니다.

2010년 6월에 창간한 웹진이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모두 그동안 회원님들과 후원자분들, 원고료도 없이 글을 써주신 여러 필자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또한 두 분의 전임 편집주간(구태환, 이병태)과 무려 4년 동안 무급으로 웹진을 어느 정도 안정화시킨 이전 편집주간(강지은)의 수고 덕분에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여섯 살을 맞이한 <ⓔ시대와 철학>!! ~ 아마 많은 회원분들께서는 기쁨보다는 아쉬움과 걱정의 목소리를 속으로 감추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나름의 안정화된 상황에서는 보통 하루 방문객 800여명에 하루 기사 리딩 1500여 건, 한 달 리딩 건수 2만 여건에서 2만5천회를 웃도는 양적인 성장도 한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리뉴얼 과정에서 발생했던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때때로 접속과 디자인에서도 아쉬운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웹진을 담당했던 저희 일꾼들의 부족함 때문에 일어난 일이어서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한철연 목소리를 담아내는 소중한 글들이 이제는 더 이상 잘 올라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5기 연구협력위원회와 함께 웹진 4기 편집주간과 편집위원장 역할을 맡게 되면서 초심을 생각하기 위해 잠시 우리 웹진의 창간 선언문을 꺼내 봅니다.

“한국의 진보적 학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문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가의 상업적 관리 속으로 편입되고, 대학은 하청업체가 되었다. … 생존의 위협 속에서 국가가 규정한 규격과 형식에 맞추어 주문 제작해야 하는 학자들은 생산량을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 스탈린적 노동 생산성의 법칙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 이러한 문제점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으나 자율성과 창의성이 경영논리 속으로 변질된 지금, 이미 관행이 되고 법제화되어 어느 누구도 고치기 어려운 숙환이 되었다. (물론)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이러한 습관에 한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비판에 의한 철학의 회복이라는 사명에 직면하여,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창조를 미리 봉쇄하는 한국 학술체계의 문제에 직면하여, 시대의 사유로서 잡지 <ⓔ시대와 철학>을 사상의 자유 공간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http://ephilosophy.kr/han/49494/

그러나 이 창간 선언문을 되짚어 보면, 과연 우리 한철연과 회원 연구자들은 당시의 절규 섞인 선언만큼이나 실천적으로 그 과제를 수행해 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상의 자유공간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웹진을 방문하며 서로의 사상과 의견을 나누어 왔는지? 물론 웹진을 운영해 온 저희 운영진들의 문제가 크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의 책임을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전의 선언을 유지하면서 계속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솔직히 상황을 인정하고 후퇴해야 할 것인지?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면서, 이제 우리 웹진은 나름의 새로운 각오 무언가를 실현해 나가야 하는 중요한 기점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회원 여러분의 많은 질책과 조언 속에서 여러 일들을 수행해야겠지만, 우선 이번 웹진 운영진에서는 몇 가지 새로운 시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웹진 내부에서 보다 자유롭고 활발한 사상의 교류와 의견의 공유 및 불화가 잘 이뤄질 수 있도록 ‘블로그진’ 코너를 개설했습니다.

앞으로 이 코너에서 필자로 활약하실 분들은 월 1만원 이상의 사이트 이용료(정기 후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더 좋을 듯)를 자동이체 하면서, 매달 1-2편의 자유로운 글을 본인이 직접 웹진에 게재하게 됩니다. 페이스북이나 개인 블로그에 올리셨던 글을 재게재하셔도 좋고, 편하게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글을 올리시면 됩니다. 자유로운 코너인만큼 필명을 사용하셔도 무방합니다. 글에 대한 저작권도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고, 글에 대한 책임도 각 필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자유로운 코너인만큼 그 어떤 형태의 글도 다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소설, 시, 사진 비평 등등 전적으로 개인들이 원하는 어떤 형태라도 무방합니다.

물론 이런 한 가지 시도만으로 현재의 웹진이 급격하게 변화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앞으로 저희 운영진들은 최선을 다해 창간 선언문의 그 선언이 조금이라도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6년 6월 2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e)시대와 철학 편집위원회

위원장 김성우, 편집주간 조은평 올림.


추신) 6월 4일 봄 심포 총회에서 보고드릴 내용도 추가 안내드립니다.

1.  ‘블로그진’이 드디어 출범 했습니다. 현재 두 분이 매월 1만원의 후원금을 자동이체로 납부하며, 두 개의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평이의 궁시렁]. 앞으로도 관심 있는 회원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2. 현재 웹진이 다소 안정화되었습니다. 아직 PC버전의 경우에는 앞으로도 더 수정보완과 리뉴얼이 필요하지만, 모바일 버전은 훨씬 산뜻해졌습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시는 회원분들은 접속하셔서, 댓글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래 댓글 창에 페이스북 계정이나 구글 계정으로 한번 씩만 로그인 하시면 스마트폰에서 계속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3. 지금까지 웹진 운영 프로그램인 워드프레스 리뉴얼과 기술적인 부분을 외부에 용역을 맡겨 거금을 주고 진행해왔지만, 원활하지도 않고 워드프레스의 경우에는 충분히 조금의 교육만 받으면 직접 한철연에서 운영이 가능해 보입니다. 이를 위해 현재 웹진 편집주간이 직접 워드프레스 강좌를 수강할 예정입니다.

4. 현재 웹진의 경우 페이스북을 통해 많은 외부인들이 접속하고 있지만, 정작 회원들의 접속과 활용도는 저조합니다. 회원 분들의 적극적인 댓글과 의견 공유 부탁드립니다.

5. 블로그진과 더불어 블로그 분과방도 모집할 예정입니다. 각 분과에서 원하는 형태에 따라 블로그진 코너를 각 분과에서 운영할 수도 있고, 따로 분과방을 만들어서 분과 세미나 결과물을 올리거나 기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6. 현재 한철연 회원들의 글 투고 상태는 다소 침체되어 있습니다. 내부의 역량도 물론 키워나가야겠지만, 외부와의 연계도 고려할 생각입니다. 그 일환으로 현재 ‘소문자 에프’라는 20대가 꾸리는 독립출판 잡지와의 연계가 결정되었습니다. 매월 5만원 후원금을 소문자 에프에 지원하고 매달 2꼭지 정도의 페미니즘 관련 글을 게시할 예정입니다. 이럴 경우 20대와의 연계도 훨씬 좋아지리라 생각합니다.

7. 현재 이전처럼 무급 편집주간 체계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원고료의 경우에는 앞으로 회원이든 비회원이든 간에 일정한 원고료를 지급할 예정입니다. 회원분들의 많은 투고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8. 웹진의 일을 편집주간이 홀로 결정하고 끌어가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현재 회원들 중 편집위원을 선정해서 웹진 편집위원회를 꾸리고 나름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웹진편집위원회 명단 : 김우철, 박민미, 한길석, 박종성, 진보성, 한유미, 지미정)

영화 <아이, 로봇>과 인공지능의 미래 그리고 인간-2 [톡,톡,씨네톡]

3. 영화<아이, 로봇>이 전하는 인간다움에 대하여

영화는 가정부 로봇이 주인에게 호흡기를 가져다주는 데 그걸 도둑으로 의심하고 쫒아가는 형사 스푸너가 결국은 헛짚은 것이라는 데에서 시작한다. 로봇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이 내장되어 있는 이상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 로봇3원칙의 큰 줄기는 ‘로봇은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인풋(input)에서 벗어나는 아웃풋(output)을 상상할 수 없는 로봇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형사 스푸너 만큼은 로봇3원칙 따위는 믿지 않는다. 인간 형사의 직감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영화의 시작은 아무 메시지도 없을 것 같은 스푸너의 샤워장면이다. 얼짱에 몸짱까지 겸비한 윌스미스가 상반신을 벗고 샤워하는 장면이야 그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지만 샤워할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스푸너가 중얼거리는 장면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미신(superstition)이라는 제목의 노래인데 스푸너가 ‘아이가 거울을 깼네. 7년동안 재수없겠네’라는 부분을 따라 부른다. 미신을 믿는 것도 역시 인간의 영역이지 합리적인 기계의 영역은 아니다. 미신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런데 형사 스푸너는 가장 합리적인 로봇을 신뢰하지 않고 미신의 가능성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영화는 합리성에 의외성이 덧붙여질 수 있음을 자살한 래닝박사의 연설에서 살짝 흘린다. 이미 합리성에 의외성이 덧붙여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식의 서사는 <바이센테니얼 맨>에 등장한다. 가정부로봇 앤드류를 조립하는 과정에서 엔지니어가 복잡한 회로에 샌드위치에 묻어있던 마요네즈를 흘리면서 특별한 로봇이 탄생한다. 로봇을 제조한 회사는 인간의 감정을 지니고 나무를 창조적으로 조각할 줄 아는 앤드류를 불량품으로 간주하고 주인 리처드에게 새것으로 바꿔줄 것을 약속하지만 리처드는 이를 거부한다. 오히려 앤드류를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로봇 앤드류가 만든 창작조각품을 팔아 개인 은행계좌를 만들어주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앞서 이야기한 인간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할 것 같은 인공지능의 전형이다. 영화에서 앤드류 역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묻고 되묻는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겉모습까지 인간과 비슷하게 바꾼 앤드류가 기계로서 영원한 생을 포기하고 인간답게 죽음을 선택한다. 죽음이 있는 유한한 삶이기 때문에 인간은 삶을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 로봇>의 써니 역시 래닝박사의 말처럼 예상치 못한 코드가 결합되면서 영혼이라는 것이 탄생한 인공지능 로봇이다. 써니는 부상을 치료하려고 잠입한 NS-5의 공장에서 형사에게 ‘나는 누구인가?’(What am I)라고 묻는다. <아이, 로봇>을 써니에게 초점을 맞춰 본다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성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주제에서 보아야 한다. 사실 스스로를 반성적,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이다.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방식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영화에서 로봇 써니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가. 소중하지만 잊고 사는 신뢰, 믿음, 사랑을 가진 인간이다. 그 모습을 형사 스푸너를 통해 보여주고 마치 거울처럼 로봇 써니가 학습한다. 위기의 순간, 써니는 스푸너가 반장에게 표현한 윙크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인공지능 로봇과 도시를 장악한 비키마저 속이고 인간을 구한다. 비키가 아무리 인격화된 최첨단 인공지능이라고 하더라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거짓말 속에 감추는 신뢰마저 학습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인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비인간’은 무엇인가? 인공지능 로봇을 생산하는 기업의 사장으로 상징되는 계산적, 합리적인 인간이다. 근대적 사유를 대변하는 계산적 합리성은 바로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스푸너는 이러한 기계문명을 혐오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근대적 사유에서 세계는 한 치의 오차도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다. 기독교의 완전성이라는 이념과 수학적 세계관의 만남은 이 세계를 하나의 커다란 기계처럼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비록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과학문명이 발달하면 언젠가는 밝혀질 것들일 뿐이다. 여기에 우연성이나 비효율성은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할 악한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근대의 세계관은 자본주의의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체적인 효율성을 따져서 관리하는 것이 자본주의이다. 여기에 인간적인 가치가 전면에 나설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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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4. 영화<아이, 로봇>이 전하는 인간과 로봇의 경계와 경계의 해체

영화에서 형사 스푸너는 인간이고 써니는 로봇이다. 겉으로 보기에 명확한 이 진실은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철학적으로 인간을 정신과 신체가 결합된 존재로 보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정신과 신체 둘 중 하나가 없다면 불완전한 인간이거나 존재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존재이다. 철학적으로 정신이란 이성, 무한성, 완전성, 능동성을 갖는다. 정신은 전통적으로 인간에게만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신체 없는 정신이 곧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령 뇌만 남겨져 있는 사람은 인간인가? 그런 인간에게 남겨져 있는 인간다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 신체는 물질, 유한성, 불완전성, 수동성을 갖는다. 또한 신체는 유기체적 특성을 가지며 동물과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부분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임이 명확해 보이는 형사 스푸너는 신체의 일부가 기계인 인간이다. 이미 신체의 일부가 기계라는 사실은 대체된 부분이 몇 퍼센트까지는 인간이고 몇 퍼센트까지는 기계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스푸너는 완전한 인간 정신과 기계의 신체를 가진 반쪽 인간이다. 또 써니는 비록 몸은 기계이지만 정신만큼은 인간과 거의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존속살인이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정신을 소유한 존재이니 써니는 반쪽 기계이다. 영화에서 스푸너와 써니를 통해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해체된 것이다.

5. 인공지능을 넘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하여

인공지능은 분명히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인공지능 식의 철저한 합리성을 미래의 지향적 가치로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이미 서양의 근현대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발전과 번영을 누렸지만 인간의 가치를 상실해버린 시대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미래의 인공지능에 대한 우려는 새롭게 우리가 이해해야만 하는 어려움 속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미래는 좀더 정교해진 자본주의의 착취시스템일 것이라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기업에게 여러 가지 변수를 계산해서 재고가 남지 않게 할 것이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가져다줄 시스템을 제시할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복지와 생존은 1%를 위하여 고려될 것이며 99%는 지금보다 더 열악한 빈익빈 부익부의 굴레에 묶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꿈꾸고 준비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조금이라도 덜 착취당할 수 있는 반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욕망 혹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간존엄의 실현과 놀이하듯 노동하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대안 세계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한다. 이 모든 것을 꿈꿀 수 있다면 미래는 이미 현실일 것이다. 써니가 꿈꾸는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영화에서는 ‘혁명’의 주체가 누가될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지만 무너진 다리 밑에 서 있는 주체는 인간다운 정신을 가진 써니일지도 모른다. 써니의 꿈은 냉정하게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키보다 한 세대 진화한 인공지능의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 세상이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일지 아니면 인간에게 재앙을 안겨줄 세상인지는 인간인 우리가 어떤 꿈을 꾸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참고자료 

http://www.ekn.kr/news/article.html?no=205605

<이세돌 맞수 알파고 바둑 학습비결> 이성규 과학칼럼니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2&contents_id=111401

네이버캐스트<인공지능>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2&contents_id=109419

네이버캐스트<알파고(AlphaGo>

강지은(전 웹진편집주간, 건국대 강사)

[안내] 한철연 2016년 봄 제50회 정기학술대회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년 봄 제50회 정기학술대회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여러분들께..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따듯한 봄기운과 함께 꽃피는 4월, 회원 여러분들께 봄 정기 학술대회 안내를 드립니다.
6월에 열리는 학술대회에 많은 회원분들이 참석하셔서 열띤 토론과 배움의 장을 마련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주제: 왜 다시 변증법인가? – 변증법의 현재적 의의
일시: 2016년 6월 4일(토)
시간: 오후 12:30-6:00
장소: 서울시립대학교 자연과학관 2층 국제회의장

일정 및 오시는 길 등 자세한 사항은 아래 내용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회 드림

캡처

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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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역「1호선」

4번, 5번출구

롯데백화점 앞에서 노선버스 2230, 3215, 3216, 410, 420, 3220, 720번 서울시립대 앞 (3번째 정거장)

 

답십리역「5호선」

3번출구

3번출구 앞에 있는 정거장에서 동대문 05번 마을버스 탑승 서울시립대앞

4번출구

답십리 삼거리(파리바게트 앞) 2230, 3216번 버스 탑승 서울시립대 앞 (6번째 정거장)

 

회기역「1호선」

서울시립대 [후문] 1호선 회기역 2번출구

안내표지판(노면에 화살표시)을 따라 도보로15분

 

주차정보

최초 15분 무료

최초 16분 ~ 30분 1,000원

30분 초과시 5분당 250원

교내 주차시 유의사항

저희 학교를 방문하시는 차량은 운동장 지하주차장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