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59- 그리스 희극, 아리스토파네스와 발자크
1)
앞에서 헤겔이 제시한 그리스 비극의 기본 특징에 대해 살펴보면서 그의 이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 그리고 니체의 비극론과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았다. 이제 극시의 유형 가운데 두 번째 유형인 그리스 고전 희극에 관해 살펴볼 차례다. 헤겔은 희극의 특성을 주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을 중심으로 파악한다.
2)
헤겔에서 그리스 시대 비극에 대립하는 희극은 비극의 특성과 대조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헤겔은 그리스 희극의 특징을 세 가지 요소로 들고 있다. 첫 번째 요소는 희극에서 주인공은 더 이상 실체적 목적을 위해 행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주관적 목적을 위해 행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의 대표적 예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이라는 희극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자기 빚을 없애기 위해 변론술을 배운다.
두 번째 요소는 주인공은 설사 실체적 목적을 실행하더라도, 지극히 취약한 무력한 수단을 통해 수행할 뿐이다. 이런 예 역시 아리스토파네스에서 찾을 수 있는데, 헤겔은 ‘뤼시스트라테’을 들고 있다. 여기서 여인은 전쟁을 없애기 위해 남자들과의 성관계를 거부한다.
세 번째 요소는 우연적 사건이다. 희극적 주인공은 스스로 자멸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몰락은 비극에서처럼 인륜적 실체의 분열에 기초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을 몰락은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나 수단 자체가 본래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런 허망한 것은 우연한 충돌을 통해 청산될 뿐이다. 주인공의 자멸을 통해 다시 회복되는 것은 곧 실체적 힘이다.
“[희극의] 세 번째 요소를 이루는 것은 외적 우연들의 사용인데 상황들은 이것들의 다양하고 특이한 분규를 통해 출현한다. 그리고 이 상황 속에서 목적들과 그 실행, 내적 성격과 그 외적 상태들은 희극적 대조를 이루며 또한 마찬가지로 희극적으로 해결된다.”[1]
희극의 이런 특징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대표적 희극 구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인공 스트렙시아스는 돈을 밝히고 색을 즐기는 전형적으로 세속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사치스러운 아내와 말 경주에 탐닉하는 아들 때문에 큰 빚을 지고 파산 직전에 있다. 그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빚쟁이에게 돈을 갚지 않는 방법을 찾는다.
스트렙시아스는 “현명한 영혼을 가꾸는 학원”의 소피스트 두목인 소크라테스를 찾아가 변론술을 배운다. 그 변론술은 “옳든 그르든 간에 이기는 법을 가르쳐 준다.”[2] 그들이 모시는 신은 이제 제우스가 아니라 구름이다. 그 여신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3] 신이며 궤변을 가르치는 신이다.
그러나 스트렙시아스는 워낙 머리가 나빠 소크라테스의 변론술을 배우지 못한다. 스트렙시아스는 대신 아들 페이딥피데스를 보내 싫어하는 그를 억지로 배우게 한다.
드디어 빚쟁이가 나타나자 스트렙시스는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운 황당한 것을 질문하면서 어리둥절한 빚쟁이를 무식하다고 하면서 쫓아내고 만다.
3)
그런데 아들인 페이듭피데스에게 스트렙시스가 얻어맞는다. 스트렙시스는 술자리에서 아들에게 시모니데스의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는데, 아들은 그 노래가 시대에 뒤떨어진 노래이고 요즈음은 에우리피데스의 노래를 부른다고 거부한다. 스트렙시스가 아들에게 화를 내자, 아들이 그를 때린 것이다. 스트렙시스는 아들을 고발한다고 날뛰지만 아들은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운 논증 방식을 써서 그의 주장을 꺾어놓는다.
마침내 스트렙시스는 소크라테스가 가르친 지식이란 것이 속임수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이렇게 한탄한다.
“아, 바보 천치. 나는 돌았어. 소크라테스 덕택으로 제신을 저버리려 하다니. 하지만 오 헤르메스님, 저를 노엽게 생각하지 마시고 나를 벌하지 마시며 지껄이고 수다를 부리는 미친 저를 용서하십시오.”[4]
희극은 그가 소크라테스가 주관하는 학원의 지붕에 불을 지르면서 끝난다.
이상의 극에서 잘 보듯이, 주인공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술을 통해 돈을 갚지 않으려는 목적을 추구한다. 그는 성공하는 듯했지만, 아들이 동일한 수단으로 그에게 대항함으로써 자멸하고 만다. 그가 기대했던 아들이 오히려 그를 파멸시킨다는 것은 우연적 상황의 중첩이지만, 희극적 대조를 보여준다. 극은 주인공이 실체성에 호소하면서 끝난다.
3)
이상의 내용을 보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실체적인 것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스트렙시스가 소크라테스의 학원의 지붕에 불을 지르면서 “횃불이여, 타오르는 불길을 뿜는 것은 네 의무다”[5]라고 외칠 때 아리스토파네스의 그런 심정이 노출된다.
헤겔 역시 희극의 이런 실체성을 인정한다.
“즉 희극의 묘사를 통해 이를 테면 즉자 대자적으로 이성적인 내적으로 전도되고 붕괴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되며 오히려 반대로 어리석음과 불합리, 잘못된 대립과 모순들은 현실에서도 승히할 수 없으며 또한 궁극적으로 존속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6]
그런데 그리스 희극 작가가 등장할 시기에 이미 그리스 도시국가라는 실체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국가이면서도 혈연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민족국가인데, 초기에 양자는 상호 보완적이었다. 즉 국가는 개인으로 해체되는 경향을 혈연이라는 자연적 통일성을 통해 단결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런 국가에서 개인의 자립성이 심화되면서 혈연적 통일성은 상실되고, 국가는 개인으로 해체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 결과 등장하는 것이 도시 국가 사이의 계급적 분열, 도시 국가 사이의 내전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 희극 작가가 인륜성, 신, 진리의 복권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이미 사라진 과거로 돌아가려는 복고적 경향성을 의미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철학이 스파르타를 이상화하며, 내적 조화와 통일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복고성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아리스토파네스도 희극에서 최종적으로는 실체적인 것의 복권을 주장했다면, 그도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복고적이라는 말이 되는 것일까?
헤겔은 아리스토파네스 및 그리스의 희극을 이와 같이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 점은 그가 제시하는 희극의 개념과 관련된다.
4)
헤겔은 희극을 논하면서 처음부터 ‘우스꽝스러운 것[Laecherliche]’과 ‘희극적인 것[Komische]’을 구분한다. 그 어느 것이나 토대가 되는 것은 곧 ‘상반적인 것’이다. “현상이 자체 내에서 자신의 스스로 지양되도록 만드는 모순, 목적이 그 실현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표를 사장하도록 만드는 모순”, 또는 “어리석은 난센스, 우둔함”이나 “진부하고 몰취미한 것” 마지막으로는 “극히 중요하고 심오한 것들도…일상적 관점과 모순되는 완전히 무의미한 측면이 보이는” 등[7]의 현상은 모든 희극의 토대가 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희극의 토대는 대체로 웃음에 관한 부조화 이론가[8]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풍자 되고 조롱 되면 헤겔이 말하는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는데, 이는 그런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 즉 작가나 관객이 자신이 우월하다는 입장에서 그런 현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9]. 즉 이 경우 “웃음은 만족스러운 영리함의 표현… 즉 그들이 현명하기도 하다는 표시일 뿐이다”[10]
앞에서 예로 들었듯이 아리스토파네스는 자신은 실체적인 것, 진리, 신을 대변하면서 그의 극중에 등장하는 사람들 즉 그리스 시민들이나 그 정치적 지도자인 소피스트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대체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이런 풍자와 조롱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헤겔은 그리스 희극은 이런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라 희극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희극적인 것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헤겔에 의하면 희극적인 것은 자멸하는 개인을 조롱하거나 풍자하지 않는다. 우수꽝스러운 것에 대립하는 희극적인 것에 관한 헤겔의 개념은 프로이드나 바흐친 등으로 이어지는 웃음의 해방이론이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로이드는 억압된 무의식이 농담이나 웃음으로 표출된다고 했다. 바흐친은 중세에서 억압된 민중의 내적 욕망이 다양한 익살극으로 분출한다고 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중에서 주인공은 자멸하면서도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낙천성을 지니고 있으니, 희극적 개인은 이를 통해 자기 확신 속에서 평온하며 정신의 절대적 자유, 명랑성을 획득한다고 말한다. 자멸하는 개인의 낙천성, 그것이 헤겔이 말하는 희극적인 것인데, 이런 그 낙천성은 감추어진 욕망의 분출이며 이른바 실체의 세계라는 억압적 질서에 대한 반항이 아닐까 한다. [11]
“무릇 희극적인 것에는 그 자신의 모순을 철저히 극복하여 이를 테면 그 속에서 괴롭고 불행하게 머물지 않는 주관성의 끝없는 낙천성과 자기 신뢰, 그 희열과 편안함이 속하며 또한 자기 확신에 찬 이 주관성은 그 목적과 실현의 해체를 감당할 수 있다.”[12]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진력하는 유한성에 진지하게 매이지 않는다는 점, 오히려 그 위로 넘어가며, 또한 실패와 상실을 당하고서도 내적으로 공고하고 확신에 차 있다는 점을 통해 스스로를 한층 높은 본성들인 것으로 공표한다.”[13]
5)
이런 점에서 헤겔은 희극적 개인은 “비극의 종착점을 즉 내면에서 절대적 화해를 구한 밝은 심정을 자신의 토대이자 출발점으로 삼는다”[14]고 한다. 비극의 종착점이라면 예를 들어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와 같은 존재를 말할 것이다. 그는 스스로 저지른 죄를 짊어지고 자신의 눈을 찔러 처벌함으로써 마침내 자기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며 이를 통해 그는 복수의 여신의 추적을 벗어나 영원한 평안을 얻는 존재를 말할 것이다.
그가 여기서 깨닫는 것은 곧 자신의 유한성의 한계이며 거꾸로 말하자면 이를 통하여 무한한 신적 주관성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 무한한 주관성은 곧 새로이 등장하는 시대의 신 즉 기독교적 신의 모습이다.
“그의 먼눈은 밝아지고 그의 사지는 쾌유되어” “죽음 속에서 이러한 변용은 … 현대적 의미에서의 화해이기도 하다…. 그것은 신이 은총으로 용서하는 죄인의 모습이자 …기독교적 종교적 화해는 영혼의 변용으로 존재한다. 영원한 구원의 생물로 정화된 영혼은 그 현실과 행동들 너머로 솟으니, …영원하고 순수한 정신적 내면의 지복에 대한 확신으로 굳건히 대처하기 때문이다.”[15]
자기 내로 복귀하는 유한한 인간이 주관적 목적을 추구하다가 자멸하면서도 자신을 긍정하는 희극적 개인의 토대이자 출발점이다. 그는 현재로서는 몰락하지만 앞으로는 자기의 자립성을 확보하게 될 이행기적 인간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희극적 개인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그리스 쇠락의 거대한 징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현상하는 것의 지배자가 된다”[16]고 말한다.
‟그러나 …주관성의 이러한 승리 속에는 그리스 쇠락의 거대한 징후 역시 들어 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파네스는 한편으로 신들의 진정한 본질과 인륜적 현존재 다른 한편으로 그 의미 내용을 실현해야 할 시민적 개인적 주관성 사이의 절대적 모순을 노정하기 때문이다.”[17]
6)
헤겔이 주장하는 이 점을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에서 직접 확인해 보자.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 구름에서는 특이하게도 정론과 사론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서로 논쟁을 벌인다. 스트렙시스의 강요에 의해 아들 페이딥피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찾아가 변론술을 배우게 되는 장면에서 그 논쟁은 시작한다. 페이딥피데스가 그들의 논쟁을 들어보고 원하는 대로 선택하라는 취지이다.
정론은 관객 앞에서 인륜적 사회의 참된 질서에 관해 옹호하는데, 사론은 그것을 일일이 반박한다. 대체로 전자는 절조와 같은 사회적 덕목이고 후자는 색욕(“이불 속에서 기분 좋게 하는 법”)과 같은 개인적 행복을 추구한다. 그 논쟁에서 정론은 사론에게 패배하고 페이딥피데스는 사론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론의 반박을 살펴보면 정론이 덕목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시대에 뒤진 것이며, 겉으로는 덕목을 추구하는 체하지만 실제로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풍자하고 조롱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겉으로는 정의를 사회적 덕목을 추구하는 것처럼 은폐하는 자, 자신을 이처럼 사회적 덕목으로 정당화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민중을 오도하는 소피스트나 정치적 지도자이다. 그것은 이미 아리스토파네스 역시 자신이 추구하는 질서, 참된 진리가 이미 낡은 것이며, 개인적 행복이 추구되는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내심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헤겔이 아리스토파네스를 통해 제시한 자멸적이면서도 자기 확신에 찬 개인을 슐레겔 등이 제시한 아이러니적 인간의 모습을 해석할 여지도 있다. 슐레겔의 아이러니의 작가는 자기가 만든 것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유한한 세계를 벗어나 무한한 자유에 이른다. 이 자유는 실제로 실현된 자유가 아니라 유한한 세계를 벗어나는 자유, 주관적 자유이지만 그럼에도 모든 고정된 것을 넘어선 무한한 자유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의 욕망을 추구하는 주인공은 자기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우연에 부딪혀 자멸할 뿐이며 그의 목적인 주관적 욕망에 머무른다. 그는 결코 세계를 벗어나려는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로마 말기나 중세 초기에 등장한 인격적 존재, 창 하나를 들고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는 기사와 닮았을 뿐이다.
7)
아리스토파네스의 모습은 마치 발자크를 연상시킨다. 발자크 역시 구 시대 귀족적 질서를 옹호했지만 이미 그런 귀족의 세계에 부르주아적인 이익 추구가 개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편으로 표면적으로는 귀족의 타락에 대한 풍자이지만 다른 한편 내심에는 다가오는 욕망의 세계에 대한 긍정이다. 그의 작품 제목이 ‘인간 희극’인 것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아리스토파네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다가오는 세계에 대한 표면적인 부정에도 불구하고 내적 긍정이 시대의 타락에 대한 준열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희극의 자멸하는 주인공이 스스로에 대해 낙천적인 이유가 아닐까?
[1] 미학강의 3권, 536쪽
[2] 희랍극전집 3권, 28쪽
[3] 희랍극전집 3권, 36쪽
[4] 희랍극전집 3권, 68쪽
[5] 희랍극전집3권, 68쪽
[6] 미학강의 3권, 536쪽
[7] 미학강의 3권, 534쪽
[8] 18세기 칸트, 장 파울, 졸거 등 대부분의 이론가는 웃음은 다양한 부조화에서 나온다고 본다. 헤겔도 이 이론을 따른다.
[9] 이런 입장은 현대에 들어와서 대표적으로 베르그송이 취하고 있다. 베르그송은 웃음은 가볍게 처벌함으로써 교정하려는 의도를 가진다고 말한다.
[10] 미학강의 3권, 534쪽
[11] 류재국,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의 지향성에 관하여, 연극공연연구 30호, 2017. 그러나 여기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회적 덕목, 사회지도자이고, 비판하는 자는 주로 개인이고 행복을 추구하는 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억압의 해방이라는 측면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 미학강의 3권, 534쪽
[13] 미학강의 3권, 559쪽
[14] 미학강의 3권, 558쪽
[15] 미학강의 3권, 557-558쪽
[16] 미학강의 3권, 537쪽
[17] 미학강의 3권, 5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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