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번역)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1 [내게는 이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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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글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의 고전적 저작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독일영화의 심리학적 역사(1947)>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크라카우어는 청소년기 아도르노에게 칸트를 가르쳐 주고, 벤야민에게 많은 사상적 영향을 준 비판이론 계열의 유대계 문예 비평가다. 건축을 전공하긴 했지만 당시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독일에 대한 통찰력 있는 문화 비평을 한 저널리스트로 유명하였다. <대중의 장식>, <사무원>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두 권의 대표적 영화 저작을 발표하는데 <칼라가리…>와 <영화이론>이 그것이다. 이 중 <칼리가리…>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대한 역사적 비평서이자 당대 독일인들의 심태(mentality)를 사회구조적 시각에서 해명한 역작이다. 비판이론적 문화산업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서툰 원고를 쪼개어 올려 본다.

서문

이 책은 독일 영화 그 자체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히틀러 이전의 독일에 대한 지식을 특정한 방식으로 증대시키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1918년에서 1933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에서 우세했던 심리학적 경향성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당시 독일영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논점이다. 이 경향성은 이 시기에 발생한 사건의 추이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히틀러 이후의 시대에서도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다루는 영화가 미국이나 그 이외의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행태에 관한 연구를 확장하는 작업에 유익한 매체로 활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나는 이런 종류의 연구가 다른 의사소통 매체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문화적 목적을 효과적으로 완수하게 만들 영화를 기안하는 일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믿는다.

1946년 5월 뉴욕시에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도입

1920년 이후 독일 영화는 연합국이 [독일에] 설정한 금수 조치를 무력하게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독일 영화는 뉴욕, 런던, 파리의 관객들을 매혹시키면서도 혼란스럽게 만드는 그 어떤 예술적 성취로 각인되었다. 1차 대전 후 뒤이은 모든 영화들의 원형이 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열광적인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한 평론가는 “영화 매체를 가지고 창조적 정신을 표현한 최초의 의미 있는 시도”라고 평했지만, 다른 평론가는 “이 영화는 더러운 음식의 악취를 풍긴다. 입 안에 재를 물고 있는 듯한 뒷맛을 남긴다”라고 말했다. 1차 대전 이후의 영화들은 독일의 정신을 수수께끼 같은 것 이상의 그 무엇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섬뜩하고 사악하며 병적인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당시 독일 영화들을 묘사하는 데에 가장 자주 사용된 형용사들이었다.

독일 영화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연출 방식과 주제를 바꿨다. 그렇지만 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독일 영화는 특유의 충격적 시작이라고 할 만한 어떤 특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장기 불황이 시작되었다고 간주되던 1924년 이후에도 그러했다. 미국과 유럽 관객들 사이에서는 이런 특성을 지닌 독일 영화를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 이견의 여지없이 완전한 만장일치를 이루었다. 그들은 <칼리가리> 이후 독일 영화감독들이 선도했던 시각 영역에 대한 재능에 대해 깊이 탄복하였다. 즉 장엄한 무대장치에 대한 감각을 기탄없이 표현하고, 적절한 조명을 통해 연기의 기교를 발전시키는 독일 감독들을 존경해마지 않은 것이다. 전문가들도 독일 영화들에서 두드러지는 특성, 즉 독일인들이 최초로 완벽하게 구사한 카메라의 움직임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게다가 조명, 무대장치 그리고 배우의 완벽한 융합만큼이나 뛰어났던 내러티브의 통일성을 고려하면서 찍은 독일 영화의 조직적 역량을 알아채지 못한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과 같은 독특한 가치 덕분에, <마지막 웃음(1924)>과 <버라이어티(1925)>에서 카메라 장치와 스튜디오가 총체적으로 진화한 이후 독일 영화는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할리우드에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독일의 카메라 워크(이 용어의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의)이다.” 할리우드는 [독일 영화에] 특히 탄복하면서 가능한 한 모든 독일 영화감독, 배우 그리고 기술자들을 고용하였다. 프랑스 역시 라인강 건너편의 영화 양식이 수용할 만한 것임을 입증해주었다. 그리고 고전 러시아 영화들은 독일 조명과학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감탄과 모방은 내부까지 파고드는 깊이 있는 이해(intrinsic understanding)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 독일 영화에 관한 많은 글들은 기이한 특질에 대한 연이은 분석에 머무르고 있었다. 설사 이를 넘어서는 이해가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은 독일 영화의 실존과 연관되고 있는 불안의 문제를 풀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미학적인 이러한 문헌은 영화를 마치 자율적 구조를 지닌 것이라고 간주하면서 영화에 대한 분석을 수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왜 독일에서 카메라가 최초로 완벽한 움직임을 성취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은 아예 제기되지도 않았다. 독일 영화가 이룩한 진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논의하지 않았다. 영국의 영화 잡지 『클로즈 업 Close up』의 저자들과 협력하고 있었던 폴 로타(Paul Rotha)는 일찍부터 독일 영화의 예술적 장점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연대기적 틀 속에만 제한되어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차 대전이 끝난 후부터 미국 유성 영화가 등장하는 시기까지의 독일 영화를 살펴본다면, 대략 세 개의 모듬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연극조의 사극 영화고, 두 번째는 스튜디오 예술 영화의 중흥기이며, 세 번째로는 미국적 ‘영화 감각(picture-sense)’에 동조하기 위해 독일 영화가 침체되어버리는 시기다.” 로타는 독일 영화들이 왜 이상의 세 모듬으로 묶여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외적 해석은 규범이 되어 버렸다. 이런 식의 여러 해석은 위험한 오해를 낳았다. 1924년에 발생한 독일 영화의 쇠퇴로 인해 독일의 중요한 영화인들이 미국으로 떠났고, 이는 독일 영화 산업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낳았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 시기 독일 영화에 대해 “미국화”되거나 “국제화”된 형태로 생산되고 있다는 식의 평가를 내놓았다. 이른바 “미국화된” 영화가 사실은 이 시기 독일의 삶을 제대로 표현해줬다는 점이 앞으로 서술될 것이다. 나아가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테크닉, 내용, 진화는 그 나라의 심리학적 유형과 연관될 경우에만 충실히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 앞으로 선보이게 될 것이다.

한 나라의 영화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 여타 예술 매체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 나라의 심태(mentality)를 반영한다.

첫째, 영화는 개인의 산물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 영화감독 푸도프킨(Pudovkin)은 영화 제작을 산업적 생산 방식과 동일시함으로써 그것의 집단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기술 관리자는 십장과 인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만일 모든 협력이 기술 관리자의 기능을 기계적으로 이행하는 것에만 국한된다면 그들의 집단적 노력은 결코 좋은 결과물을 낳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팀워크는 모든 일을, 심지어 가장 하찮은 일이라도, 살아있는 노동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만들며, 분화된 노동 작업을 조직적으로 연결하여 전체적 작업을 이루도록 만든다.” 저명한 독일 감독들은 이러한 견해를 공유하면서 그에 따라 행위 하였다. 나는 프랑스 주앵빌 스튜디오에서 G. W. 팝스트(G. W. Pabst)가 연출하는 촬영 현장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그가 무대 장치와 조명의 배분에 관해 제안된 기술자들의 의견을 기꺼이 따르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팝스트는 이것을 영화 제작에 있어서 귀중한 기여로 생각한다고 내게 말하였다. 영화를 제작하는 팀들은 모두 상이한 관심사와 경향성을 융합시키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팀워크는 영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드는 태도를 배제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성향을 위해 개인의 특질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영화는 익명의 다중에게 말을 걸면서 그들의 마음에 호소한다. 따라서 대중영화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중 영화의 모티프는 대중의 현재적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흔히 할리우드는 대중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영화를 그냥저냥 판매하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할리우드 영화는 대개 청중이 지닌 수동성과 압도적인 홍보의 위력을 통해 그들을 우롱하고 잘못된 곳으로 이끈다. 그러나 할리우드 대중 엔터테인먼트가 지닌 왜곡의 영향력은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날조자들은 질료가 지닌 내재적 성질에 의존하고 있다. 심지어 순수한 선전물로서 제작되었던 나치의 어용 전쟁영화조차도 결코 조작할 수 없었던 어떤 민족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치] 영화들에게 유효한 진리는 경쟁사회의 영화들에도 유효하게 적용된다. 할리우드는 청중이 지닌 자발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일반의 불만은 줄어드는 매표 수입에서 뚜렷이 드러나며, 수익에 극도로 관심을 두는 영화 산업은 가능한 한 [청중의] 변덕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실히 할리우드는 관객들이 무언가를 원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그것을 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자면 청중의 욕망이 할리우드 영화의 본성이다.

삶을 고뇌하는 라이더를 위한 철학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코너를 새로 시작하려 합니다.  먼저 흔쾌히 출판책의 원고 사용을 허락해 주신 저자 조광제 선생님과 ‘생각정원’ 출판사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 조광제 선생님의 원고를 바탕으로 한철연 회원 필자분들과 함께 공동 프로젝트 형태로 코너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한 개념어에 대한 원본을 바탕으로 여러 회원분들의 추가글 또는 논쟁, 토론을 함께 담아내는 나름 리좀 같은 개념어 코너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우선 아래는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생각정원, 2012)의 서문에 해당하는 조광제 선생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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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삶을 고뇌하는 라이더를 위한 철학 안내서 

단 한 번 주어진 나의 인생을 제대로 살려고 하다 보면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육하원칙이라고 해서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라는 의문사들을 앞세운 질문 형식들이 정착된 것은 이러한 궁금증이 삶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근본적인가를 말해 준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북한의 수령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특히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누가 그러한 평가를 하는 것일까? 그러한 평가에서 핵심은 무엇일까? 언제부터 그런 평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까? 어디에서부터 그러한 평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까? 어떻게 해서 그러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을까? 왜 그러한 평가를 하게 되었을까? 특히 한반도 분단 상태를 견디고 있는 당사자인 우리 남한 주민들로서는 향후 이 사건으로 인해 생겨날 일들에 대해 첨예한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사건이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에 미칠, 군사 ‧ 외교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의 변화에 대해 과연 우리가 주도적인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이다.
만약 이러한 문제를 철학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사건은 하나의 현상이다. 그런데 과연 ‘현상’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지 않고서는 이 사건이 하나의 현상이라는 말을 제대로 피력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건’이라는 말조차 엄격하게 파고들면 무엇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이 사건의 향방에 대해 한반도 주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주체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주체적’ 혹은 ‘주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이에 관해 정확하고 면밀한 논의를 할 수 있을까? 주체와 대립되는 ‘객체’ 혹은 ‘대상’이 무엇인가도 알아야 할 것 같다. 그와 더불어 ‘능동성’과 ‘수동성’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이다.
북한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인데도, 이 사건이 미치는 국제적인 파장이 결코 만만치 않다고 할 때, 하나의 사건이 여러 사건들을 폭넓게 야기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그렇게 해서 생겨난 국제적인 파장은 다시 한반도를 향해 영향을 미친다. 사건을 둘러싸고서 확산과 수렴이 순환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 여러 사건들을 폭넓게 야기하면서 동시에 다시 되돌아와 사건의 진원지에 영향을 미치는 사태에 대해, 그 구조와 성격을 알지 못하고서 이 사건으로 인해 벌어지는 국제적인 정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구조’는 무엇이며, ‘성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수렴’은 무엇이며, ‘확산’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의 사건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일어났던 관련 사건들과 또 앞으로 일어날 관련 사건들에 의거해서 의미를 갖는다. 이때 ‘……에 의거해서’라는 말은 ‘……을 지평으로 해서’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즉 “하나의 사건은 여러 다른 관련 사건들을 지평으로 해서 의미를 갖는다.”라는 바꿀 수 있다. 이때 ‘지평’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이런 말을 피력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다. ‘지평’(예컨대 한반도에서 동북아, 동북아에서 세계 전체)은 항상 그 속에서 문제가 되면서 의미를 갖는 ‘주제화된 대상’(예컨대 김정일의 사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주제화됨’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대상이 됨’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제화된 대상과 지평 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을 모르고서는 이러한 말을 제대로 피력하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피력하고 이해한다 할지라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다들 피상적인 설명과 이해를 통해 제대로 소통을 이루었다고 착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설명과 이해가 혼돈된 상태에서 제대로 질서를 갖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관련되는 기초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흔히 혼돈은 ‘카오스’이고, 질서를 갖춘 것은 ‘코스모스’라고 한다. 과연 ‘카오스’는 무엇이며, ‘코스모스’는 무엇인가? 이를 근본에서부터 파악하는 것은 철학의 몫이다. 그뿐만 아니라, 흔히들 말을 하고 그 말을 이해하고 또 그렇게 이해된 말을 바탕으로 자기 나름의 말을 한다고 할 때, 그 말이 제대로 기능하고 정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 말을 할 때 그 말을 하고 이해하는 당사자들이 거기에서 활용되는 기초 개념들에 대해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소통이 이루어지고, 올바른 소통을 통해서 바람직한 효과를 낳을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철학은 ‘설명’이 무엇인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바람직함’이 무엇인지, ‘효과’가 무엇인지, 또 ‘행동’이 무엇인지 등을 근본에서부터 알고자 한다. 심지어 ‘앎’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하나의 대대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게 된다. 비단 대대적인 특별한 사건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소한 사건도 제대로 깊이 있게 알고 보면 대단히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굳이 나비 효과와 같은 사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소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대대적인 큰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은 어쩌면 역사의 기본적인 법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다. 인생은 결코 나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어져 있으면서 계속 새롭게 다변화해 나가는 사회역사적인 전체의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영위된다. 나와 나 아닌 것들 간의 부단한 상호작용이 곧 삶의 역정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 즉 ‘자아’는 무엇이며, 나 아닌 것 즉 ‘타자’ 무엇이며,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어쩌면 인생을 논할 때 가장 근본적인 기초 개념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나이고자 하는 것을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확대시킬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늘 자기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이고자 할 때, 항상 자기가 아닌 것들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자기임을 전문적으로 ‘자성’(自性)이라고 하고, 자기가 아닌 것들을 ‘타자’(他者)라 하고, 타자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대타적’(對他的)이라 하고, 그러한 대타적인 관계를 통해 자기에게 형성된 것을 ‘대타성’(對他性)이라고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는 것은 결국 자성과 대타성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기초적으로 작동하는 주요 개념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그 개념들 역시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 나름의 존재, 즉 그 나름의 자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나름의 자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즉 대타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의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의 개념을 이해할 때, 다른 개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여러 다른 개념들로써 하나의 개념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개념은 완전하게 설명될 수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다. 설명되어야 할 개념(피설명항)을 설명해 주는 개념들(설명항) 역시 다시 설명되어야 할 개념(피설명항)들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대략 설명했지만,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알면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모든 사태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인간들을 통해서이고, 특히 그 인간들의 말을 통해서다.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바탕에 깔지 않고서는 그러한 말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가능한 한 정확하고 깊이 있게 그리고 폭넓게 이해하고 있으면 인류가 형성 ‧ 축적해 온 온갖 예술 문화적인 보고(寶庫)들을 나의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된다. 여러 장르의 문헌들에서 예사로 쓰이는 것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이 아닌가. 그 문헌들의 맥락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살지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보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은 인간 사유의 기초적인 뼈대를 형성하고 있기에, 어떤 사유를 하건 더욱 논리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익힌다는 것은 모든 사유를 위한 기초적이면서 근본적인 두뇌 체조라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익혀 나의 개인적인 삶을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공동체의 삶을, 나아가 전 인류적인 공동체의 삶을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하는 데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삶이 없이는 나의 삶이 없고, 나의 삶이 없이는 공동체의 삶이 없다고 하는 근본적인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바로 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소략한 이 책은 저자가 일해 온 <철학아카데미>의 2011년 봄 학기에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책의 문장들 중 실제 강의 상황을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 나오더라도 괘념치 마시길 바란다. 당시 강의에 참여한 많은 수강생들에게 특별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이를 알고서 책으로 출판하고자 제안을 하고, 또 솔선수범해서 애써 멋진 책을 만들어 준 출판사 <생각정원>의 대표 박재호 선생께 마찬가지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11년 12월 21일, 녹번동에서
저자 조광제

[안내]한철연 2016년 가을 제51회 정기학술대회(12월3일,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년 가을 제51회 정기학술대회

주제: 21세기 유교의 향방―탈경계시대, 유교 부흥과 전유
일시: 2016년 12월 3일 (토) 오후 12:30 ∼ 6:00
장소: 경희대학교(서울) 본관 2층 대회의실
 

  안녕하세요? 한철연 학술2부입니다.
  이제 가을의 막바지에서 어느 때 보다 황량하게 느껴지는 겨울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철연 가을 정기학술대회(심포지엄)가 열립니다. 이번에는 ‘21세기 유교의 향방─탈경계시대, 유교 부흥과 전유’라는 주제로 동양철학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장을 만들었습니다.

  20세기 전반기, 전통사회의 토대였던 유교는 몰락의 길을 걷는가 싶었으나, 20세기 후반 유교는 동아시아에서 열띤 열기 속에서 부활하였습니다. 하지만 유교가 현대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의미 있는 토론보다 ‘동아시아의 특수한 근대화’를 설명하는 논리, 또는 정당화의 논의에 머물렀습니다.

  90년대 아시아적 가치 논쟁을 필두로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국제적인 호소력을 갖기에는 미진합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유교’는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중국과 한국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과거 8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열에 관한 객관적 조망과 현대신유가에 대한 비판적 토론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러한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이제 다시 소리 없이 확산되어가는 탈경계시대 ‘유교’의 다양한 흐름과 방향을 점검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부디 많은 회원들께서 참석하시어 우리의 학술 얘기와 지금의 현실 얘기를 같이 논할 수 있는 치열한 토론 자리를 만들어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학술2부 드림

 

학술대회 일정

일 시 발 표 및 내 용 비 고
제 1부

12:30~

14:30

12:50~

13:00

개회사

축사

회장

이사장

13:00~

13:30

1부 다시 유교의 시대가 도래하는가?

발표주제 1

21세기 중국, 제국인가 민주인가-소프트 파워와 모더니티의 문제

발표자: 조경란(연세대학교)

논평자: 이지(이화여자대학교)

1부 사회자 :

이병태(경희대학교)

13:30~

14:00

발표주제 2

 21세기 유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를 넘을 수 있는가?      – 어울림의 공동체 사회 건설의 논리를 중심으로

발표자: 이철승(조선대학교)

논평자: 김원열(한국철학사상연구회)

14:00~

14:30

발표주제 3

  유교와 현자 지배 체제 – 현대 중국의 정치 체제

발표자: 손영식(울산대학교)

논평자: 김동민(한밭대학교)

  14:30~

14:40

쉬는 시간  
제 2 부

14:40~

16:50

14:40~

15:10

2부 탈경계시대의 유교, 회고와 전망

발표주제 4

  유학과 서양철학의 만남은 어떻게 이뤄졌나?

발표자: 박영미(한양대학교)

논평자: 김재현(경남대학교)

2부 사회자 :

박민철(건국대학교)

15:10~

15:40

발표주제 5

  탈경계시대, 여성주의 유교는 가능한가?

발표자: 김세서리아(이화여자대학교)

논평자: 한영희(전북대학교)

15:40~

15:50

쉬는 시간
15:50~

16:20

발표주제 6

  유학과 서학: 유학의 변용과 확장

발표자: 김선희(이화여자대학교)

논평자: 김갑수(호원대학교)

16:20~

16:50

발표주제 7

 안회의 눈물 – 도통(道統)은 정말 계승되었는가?

발표자: 김시천(숭실대학교)

논평자: 심의용(숭실대학교)

16:50~

17:00

쉬는 시간  
종합

토론

17:00~

18:00

전체 집담회 및 종합 토론 종합토론 사회자:

김교빈(호서대학교)

종합토론 이후에는 약 30분 가량 총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오시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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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는 길 위치와 교통편 자세한 안내(홈페이지 접속)

http://www.khu.ac.kr/university/campus/seoulcam_location.do

주차료 : 학회, 행사 참석자 1,500원/4시간

대통령의 초월적 자기기만 – 진화생물학과 신경심리학적 배후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4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4

 

오늘의 책

트리버스,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살림 2013

Robert Trivers, <The Folly of Fools: The Logic of Deceit and Self-Deception in Human Life>, Basic Book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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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계적 권위의식과 자기기만

사람들은 당장에 처한 위기상황을 모면하기 위하여 거짓말로 속임수를 쓰곤 한다. 그리고 자신의 속임수가 남에게 탄로나거나 남이 알아채지 못하게 속임수의 수준을 더욱 더 강화한다. 속임수 강화의 마지막 단계는 자기 자신이 먼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즉 남을 기만하고 그런 기만이 들통 나지 않고 성공시키기 위하여 자기기만에 자신도 모르게 빠지게 된다. 기만과 자기기만은 한 개인의 생존과 관련하여 생물학적으로 진화된 것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 책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살림 2013; The Folly of Fools, The Logic of Deceit and Self-Deception in Human Life, 2011)의 저자 트리버스Robert Trivers가 이루어낸 사회심리학적 성과이다. 트리버스는 기만행위를 진화생물학과 신경생리학의 시선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기만행위의 생물학적 진실을 많이 알면 알수록 기만행위로부터 유래된 인류학적 불행들, 즉 전쟁, 테러, 종교 갈등, 인종차별, 독재권력 등의 사회현실을 방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이 책은 전해주고 있다. 한 개인의 기만행위는 개인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집단의 신뢰도를 추락시킨다는 데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인류사에서 볼 때 인간사회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충돌이 생길 경우, 개인의 자기기만 행위는 집단을 넘어서 집단 간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전쟁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회집단 내 불평등 구조는 바로 권력자 혹은 권력집단의 기만과 자기기만 행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권력의 횡포, 일방적 위계구조의 부작용이 심각한 한국사회에서 이 책을 읽는 일은 더욱 의미있다.

이 책은 생물학자이면서 인류학, 심리학, 역사,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다층적이고 포괄적인 학문성과를 보여준 트리버스의 최근 작품이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제목은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이다. 이 책에서 저자 트리버스는 속임수와 자기기만이 진화적으로 오래된 인간의 행동양식임을 강조한다. 자기기만의 행동양식들이 누적되거나 집단화 되고 혹은 관습적으로 허용될 때 역사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야기된다. 사회적으로는 전쟁과 같은 역사적 파국이 일어나며 개인적으로는 이혼이나 가정파괴로 이어지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임수와 자기기만은 신체적으로 면역력의 약화를 초래하여 결국 건강까지도 훼손한다고 트리버스는 말한다.

이 책에서 자기기만의 흥미로운 사례로 항공기 사고들을 소개하고 있다. 1994년, 모스크바 발 서울 행 에어로플롯 593편에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추락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사고 비행기의 조종사는 아들과 딸을 조정실에 동승시켰다. 조종사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욕심이 있었다. 그런 욕심은 자기기만적인 인정요구에 해당한다. 조종사는 그의 아들에게 조정칸을 맡기고 아버지의 멋있는 행동을 따라하도록 했고 11살 아들의 실수로 결국 비행기가 추락되었다. 탑승자 75명 전원이 사망한 이런 극도의 불행한 사고는 개인의 사소한 자기기만에서 비롯했다.

이 책은 한국의 대한항공의 경우까지 기술하고 있다. 1988-1998년 사이 대한항공의 사고로 인한 사망율은 미국의 일반 항공사 대비 17배였다. 한때 델타항공사와 에어프랑스 항공사는 대한항공과의 협력관계를 중단하기도 했었다. 미군은 대한항공기의 이용을 금지하는 내부명령을 잠시 내린 적도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대한항공의 비행기가 캐나다 영토 내 착륙권을 금지하는 것을 고려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모두 대한항공의 불안전성 때문이었다. 트리버스는 대한항공 조종사들의 자기기만 요소를 기술했다. 첫째 한국의 고질적인 위계질서는 자기기만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한다. “기내 조종실에는 정/부 두 명의 조종사가 있지만 그들 간의 지배 관계가 확고해서 사실상 한 명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303쪽) 둘째 권위의식 때문에 비행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측하지 못한 오류 발생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한항공에 내재된 이러한 자기기만 요소는 결국 큰 사고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사고내용은 다음과 같다.(주1) 기장과 부기장만 있는 폐쇄된 여객기 조정실에서 기장의 자기기만은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사례를 저자가 대한항공사에서 찾은 것은 정말 씁쓸한 일이다. 1997년 대한항공 비행기가 괌에서 추락하여 무려 228명이 사망한 대참사를 말하고 있다. 당시 기장이 조정키를 맡았었다. 심한 안개로 인해 활주로 1차 착륙시도에 실패한 후 다시 선회하는 중 코앞에 닥친 산등성이에 충돌될 위험을 부기장은 인지하였다. 부기장이 이 위험상황을 기장에게 보고하고 즉시 선회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기장과 부기장 사이에 고착된 위계질서와 권력구조 때문에 기장은 부기장의 말을 무시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이 사고의 원인은 기장에게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괌 공항 항공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문제는 기장의 자기기만적 권력의식 때문에 조종사가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데 매우 취약했다는 데 있다. 조종실과 같은 폐쇄공간에서 자기 과신과 위계적 권위의식은 부조종사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기기만 행태가 더 쉽게 드러난다는 것이 트리버스의 설명이다.

일반적으로 권력구조가 강한 집단일수록 그 집단 안에서는 불의의 사고 및 갈등사태의 발생율을 높인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한국사회의 위계적 권력구조의 문제는 우리 사회를 파국으로 만들 수 있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바로 그러한 상황은 트리버스가 말하는 자기기만으로부터 초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치권력구조에서부터 가부장적인 가족구조에까지 그런 자기기만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위험수위에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설명이 더욱 흥미롭다.

주1) 한국어 번역서에는 대한항공 사고내용에 대한 부분이 모두 빠져있다. 출판사가 의도적으로 뺐는지 아니면 번역자의 실수인지 잘 모르지만, 사고내용마저 침몰시킨 세월호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 때문에 한국어 번역서에는 없지만 영어 원본에 있는 사고경위를 여기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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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대통령에서 드러난 자기기만의 양상

우리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아부, 거짓말, 약자 학대, 가족갈등, 부정부패, 남녀불평등, 조폭사회, 양극화 현상, 경쟁심리조작, 공격성향의 팽배, 종교의 물신화, 이주노동자 학대, 심각한 노조탄압, 마구잡이식 토건개발, 외모지상주의, 사학비리의 천국, 핵발전소 이권 야합, 정치적 매카시즘 등의 개인적 혹은 사회적 갈등구조는 자기기만 행동의 사회적 결과로부터 야기된 것임을 이 책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 책에서 지적한 자기기만의 양태가 한국의 대통령의 모습과 똑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더해 보자. 남을 속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든다. 트리버스는 기만의 비용을 세 가지로 본다. 첫째 인지부하가 크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거짓말할 때 머뭇거리거나 떠듬거린다. 그리고 초조해지는데, 이를 숨기거나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치미를 떼거나 남 탓을 더 한다. 혹은 남을 부정한다.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대신에 남의 의견을 거부하고 부정하며 오히려 남의 의견에 대하여 강하고 과잉된 반응을 한다.(33쪽) 박근혜는 최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에 대한 외부의 비판 일체를 부정하면서 그런 행위에 대하여 <일벌백계>한다는 봉건적 왕권의식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박근혜의 일벌백계론은 하나를 본보기로 처벌하여 대중들 모두에게 경각심을 고조한다는 것인데 이런 강한 표현법은 자신의 의도를 숨기려는 과잉반작용의 한 사례이다. 트리버스는 박근혜식의 반응양태를 “과잉통제”라고 한다. 자신의 기만이 들킬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과잉반응을 유도하며 과잉반응을 숨기기 위하여 과잉통제로 자신의 감정을 포장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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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통령의 과잉통제는 쉽게 노출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기만이 자기기만으로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은 기만의 성공도를 높이기 위해 발달된 양상이다. 자기기만으로 나타난 “기만에 능한 사람은 감정억압 기제도 같이 발달한다.”(35쪽) 기만행위자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믿는 정도가 자기기만자보다 떨어진다. 즉 자기기만의 발달단계에서 기만자는 지나친 자신감(과신)을 표출한다.(38쪽) 과신이 있어야만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게 하고 속임수를 계속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신과 과잉반응은 누가 뭐라고 말해도 관계없이 자신의 행위를 지속시키는 기만적 장치라고 트리버스는 잘 말해주고 있다.

자기기만에는 다음과 같은 9가지 양태가 있다고 저자 트리버스는 말한다.(42-53쪽)
1. 자기기만은 자기 부풀리기를 동반한다.
2. 자기기만은 남을 폄하하고 자화자찬하려는 숨겨진 의도를 갖는다.
3. 나와 너, 내집단과 타집단을 분리하여 상대를 배제한다(배제의 원리)
4. 자기기만의 권력은 편향되고 부패해진다.
5. 자기기만은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다가 결국 도덕적 위선으로 빠진다.
6. 같은 정도의 위험이라 할지라도 불확실한 위험보다는 확실한 위험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
7. 상대방을 통제할 수 있고 통제를 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통제착각)
8. 자기기만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꾸미면서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9. 자기 자신의 권력에 종속된 집단의 자기기만을 유도한다.

이번 박근혜 게이트의 배우 중의 한 사람인 고영태는 스스로 말하기를 “유명한 대기업 간부들조차 자기에게 굽실거린다“고 말할 정도다. 부도덕한 기만행위자의 개인적 위안감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반영한 사례이다. 기만에서 자기기만으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기만행위의 신경생리학적 가소성plasticity이 작용한다. 쉽게 말해서 거짓말도 자주 하고 오래 하면 는다는 뜻이다. 저자는 기만의 가소성을 신경생리학으로 설명한다. 두뇌 피질 중에서 백질(white matter) 부위가 있는데, 이 부분은 신경세포체가 아니라 신경세포의 가지인 수상돌기(dendrite)와 그 부위에 양분을 공급하는 신경아교세포 부분이다. 이 부분은 사용하면 사용하면 할수록 더 증가되고 사용을 멈추면 축소되는 성질이 있다. 즉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학습하거나 연습하면 할수록 그 행동연관성 신경세포가 증가한다. 마찬가지로 거짓말을 하면 할수록 는다. 거짓말을 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의 백질이 증가한다는 경험보고를 저자는 강조한다.(105쪽) 박근혜 자신은 스스로 기만행위를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깊은 자기기만에 빠질 경우 본인 스스로 기만이라고 판단하지 않거나 기만이라고 판단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기기만이 오래 갈 경우 해리disassociation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광신도적 종교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해리현상에 빠져 있다. 그 스스로 하는 행위의 기만성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다. 이런 증상은 자기기만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자기기만을 더 깊이 천착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관련자들의 아부와 아첨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더 깊이 천착된 자기기만은 자기 자신을 재구성하고 재구성된 자기를 기억이라는 장치로 합리화시킨다. 쉽게 말해서 기억이 조작된다는 뜻이다.(232쪽) 자기의 재구성이란 개인의 서사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서사를 창출한다는 것은 가공의 자기를 만들어서 자기 스스로 자기를 해리disassociation시키는 것이다.

해리상태에 이른 자기기만된 자기는 어리숙하게 굴기도하면서 주변 상황파악을 못하는 척하면서 뻔뻔한 행동을 하는 데 능해진다. 또한 자기가 속한 집단의 분위기(혹은 사회적 이념)를 조작하는 합리화를 한다. 나아가 자신의 기만을 남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먼저 상대를 강하게 공격한다. 저자 트리버스는 이런 증상을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이라고 말했다.(117쪽) 또한 자기기만의 병증은 광신도들이 가지는 극도로 편향된 주술적 성향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자기기만의 주술적 성향이란 자기 개인의 내부적 심리상태를 우주적 통일성으로 대체하는 가상세계에 빠지는 경향을 의미한다. 트리버스는 이를 “우주적 의식의 특권화”라고 표현했다.(461쪽) 우주적 의식으로 가장한 한국 대통령의 초월적 자기기만의 심리상태의 특징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몰이성적 행위를 정당화하며 ‘우리는 옳다“라는 주술적 자기기만의 형태와 유사하다. 이런 자기기만의 양상은 모종의 갈등이 생겼을 때 혹은 자신의 기만행위가 탐지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남 탓을 하고 분리주의를 유도하며 결국 자화자찬과 상대비난에 ’빠진다‘.(463쪽)(주2) 

트리버스가 말하는 우주적 의식의 특권화에는 “거짓역사 서사”가 있다.(10장) 거짓역사 서사란 집단수준에서 집단적인 거짓말을 공유하고 집단거짓말에 스스로 참여하여 거짓서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 기꺼이 속는다. 이를 통해 집단의 동일성을 확인한다. 구성원이 어릴 때부터 집단교육을 받으면서 집단의 거짓교육에 순응하게 된다. 자기가 자기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하는 거짓말도 포함한다. 집단 내 극단적 이기주의도 서로 합리화한다. 집단 내 상대의 비리를 묵인하거나 격려하여 자신의 비리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다.

주2) 여기서 서평자는 ’빠진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일반적으로 이는 능동성 행위가 아니라 수동적 행위일 경우에 사용된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기만 행위는 능동성 행위이다. 그래서 기만행위에 대하여분명한 법적 책임이 지워진다. 그 근거로서 자기기만의 경우에도 자기기만 행위자의 전두대상피질(ACC Anterior Cingulated Cortex)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권위기반 자기기만이나 주술적 자기기만 행위 역시 의도적 기만과 같은 능동적 행위이다. 

3. 편향과 인지부조화

이 책은 자기기만의 사회-진화심리학적 배경을 다루고 있다. 자기기만은 진화적 형질의 결과이다. 기만의 성공여부는 자신의 기만이 들통 나지 않도록 즉 남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것에 달렸다. 인간에게서 이러한 기만형질은 인간의 언어 능력보다 더 오래된 진화적 형질이라고 저자 트리버스는 쓰고 있다.

인간 본성 가운데 기만을 알아채는 능력이 따라서 진화되었다고 트리버스 교수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기만하는 자와 기만당하는 자 사이의 공진화적 투쟁이다. 이런 점에서 지능과 기만은 상관성이 높다고 한다. 사람들이 남들로부터 기만을 당했을 때 더 이상 기만을 당하지 않으려는 경고의식을 배우게 된다. 이는 일종의 지능상승의 효과이다. 성공적인 사냥을 위해서 혹은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탄생한 위장술은 자기 혹은 집단 생존과 번영을 위한 사회적 전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기만을 당하는 경우 분노를 표현하고 이는 기만을 진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만 방지 사회의 규범을 만들게 된다. 이는 사회적 윤리 형성과 깊이 연관된다고 한다.

자기기만은 신경생리학적 신체기관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무의식적 자기 인정은 자기기만으로 유도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자립심, 자존감은 자기인정 감정에서 시작하며 이는 자기기만에서 극대화를 이룰 수 있다. 드러낸 자기존중과 숨겨진 자기존중 사이의 상관성을 말하고 있다. 이 점에서 트리버스만의 독특한 시니컬한 필체를 엿볼 수 있다. 인간의 어두운 면을 솔직하게 보여준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사실의 측면에서 아직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자기합리화를 하는 경우는 매우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이다. 자기합리화는 자기기만의 전단계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기만은 마음의 면역계라고 말한다. 자기기만은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를 스스로 창조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한쪽 뇌반구를 자신의 또 다른 뇌반구로부터 숨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것, 그것이 바로 기만행위이라는 것이다.

가족 간 그리고 남녀 간에서 일어나는 자기기만의 현상은 관심이 더 가는 주제였다. 가족 내 자기기만은 분열된 자아를 초래한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에서 부모는 자기기만의 증상을 보인다. 어른은 자신이 어른이라는 권력을 이용하여 아이에게 일방적 권리를 주장한다. 부모라는 지위를 더욱 강화하여 양육에 필요하지 않은 지나친 권력의 요소를 가미하여 아이를 통제하고자 한다. 이런 권위와 권력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기만의 일종이다. 이는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남편이라는 주어진 권력구조에 스스로 빠지고 만다. 이로부터 부부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한다. 남녀관계를 다루는 측면은 더 흥미롭다. 남자와 여자는 공진화하는 서로 다른 두 생명종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상호 자기기만의 정도가 심하여 마치 다른 생명종과 같다는 트리버스만의 메타포이다. 월경주기에 대한 기만, 성적 관심을 우회하는 방식, 동성애와 동성애를 회피하려는 남성의 억제력, 결혼에 대한 의미, 환상과 그에 대한 배신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기존 임상심리학에서 많이 연구되어 온 편향확증의 문제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편향된 정보해석, 편향된 기억, 편향된 판단, 편향된 추측 등의 편향확증의 문제를 자기기만의 상태와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억제와 투사, 즉 부정하려는 억제의 심리상태와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투사의 심리상태는 기존의 것을 보전하거나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기인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 의도와 연관한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인지부조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 현실을 왜곡하여 자신의 생각으로 현실을 포장하는 일이다. 그리고 포장된 현실을 실제 현실로 굳게 믿어버린다. 트리버스는 이런 구조를 진정으로 이해할 때 개인적 인지부조화의 부작용들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 개인의 인지부조화로부터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들을 타개할 수 있는 대안도 마련될 수 있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자기기만 현상들이 도처에 깔려있다. 주식시장에서의 성공환상, 국회의원 후보들의 한결같은 승리 도취감, 자신의 일을 멋있게 포장하는 우월감 혹은 허풍의 행위 등등 수없이 많다.

4. 트리버스가 본 정치적 자기기만의 사례

미국인으로서 트리버스는 미국의 잘못된 역사의 이야기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으로 진보적 학자도 아니면서 미국의 편향적 정치외교 풍토를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소규모 전쟁들과 지역 대리전쟁들을 통한 통제의 역할이 무엇인지, 왜 미국 역사교과서는 중립성이 취약한지, 나아가 이스라엘 국가의 창설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각 나라마다 지난 역사에서 발생한 대학살의 과거를 왜 부정하는 지 말하고 있다. 나아가 나치 등에서 발생한 인종청소의 대학살의 역사, 기독교의 시오니즘과 아랍의 자기기만 형태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러한 오도된 역사는 왜 발생하는지 트리버스는 자신의 자기기만 이론으로부터 끌어내온다.

자기기만은 민족 간 전쟁 유발의 요소라고 본다. 이는 침팬지의 기습공격의 연원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한다. 불행의 역사를 만들게 된 인간의 전쟁은 결국 자기기만으로부터 온다는 점이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도 여기에 속할 수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 가자 지구에서의 학살사태도 여기에 속할 수 있다고 본다. 트리버스가 한 말은 아니지만 서평자의 입장에서 현재 시리아 내전은 현 정권 집단의 자기기만 행위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태들은 지구 곳곳에서 그리고 우리 역사 한가운데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고 한다. 어떤 경우 종교는 자기기만의 처방전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종교에서 자기정당화로 인해 큰 전쟁으로 치닫는 경우들을 보아왔다. 이는 자기기만의 집단적 귀결이다.

현대사회는 곳곳에서 정의를 외치고 있지만, 정의는 권력자의 자기기만의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원시사회 이상으로 자기기만의 부작용이 크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학문적 진실은 이러한 기만적 정의를 폭로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이 트리버스의 생각이다. 생물학에서, 경제학에서, 심리학이나 문화인류학에서 그리고 철학과 역사학에서 그러한 기만의 정체를 대중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자기기만에 스스로 빠지지 않고 또한 타인의 기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고민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한다. 속임수를 통해 남을 꺾고 이기려는 타인 기만과 타인 기만의 성공도를 더 높이는 자기기만이 팽배해지면 그 사회 전체의 존속이 위태로워진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이는 과잉자만심과 연관한다. 예를 들어 과잉자만심의 사례로서 국수주의 애국심은 역사를 지우려는 집단심리의 폭탄과도 같다고 트리버스는 말한다. 이런 집단성 편향은 결국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길로부터 멀어진다. 자기기만의 허울을 벗는 것이야말로 인간도덕의 지향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스스로 자기기만의 굴레를 벗기가 쉽지 않다. 기만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기만을 느끼지 못하거나 반성 자체가 없는 사람들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역시 습관화된 자기기만의 결과이다. 트리버스는 자기기만에 맞서야 할 것을 말한다. 그것만이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개인의 정신적 공항, 충동성,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집단의 전쟁, 외교 분쟁의 실마리도 여기서 찾아야 한다. 자기의 정신적 편향성을 교정하는 노력에서부터 시작한다. 트리버스의 표현대로 말해서 “끝나지 않는 광시곡”, 자기기만의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일이 평화로 이르는 길이다. 특히 한국에 사는 우리들은 그런 자기기만의 어리석음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우리는 평화를 찾기 위하여 기필코 대통령이 연주하는 광시곡의 무대를 하루빨리 철거해야 한다.

<저자 소개>
저자 로버트 트리버스는 러트거스Rutgers 대학교 인류학과 생물과학 교수이다. 트리버스 교수는 생물학에 기반한 대표적인 진화심리학자이다. 그는 갈등구조와 협동성, 권위와 자기기만 행동유형의 연구성과로 2007년도 생명과학 분야 크래이푸어드Crafoord Prize 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신의 자기기만 행동을 스스로 인정하는 등, 시니컬하면서도 사회적 협동성에 관심이 많은 독특한 스타일의 지식인이다. 정치적으로 인종불평등과 편향된 정치권력구조를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독설가로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회과학적 현실 이해방식은 항상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정당성있는 이론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70년대 이후 진화심리학의 과학적 초석을 마련한 최고의 생물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사회에 관심있는 진화생물학 연구자라면 누구나 읽고 가야할 최근작 <Natural Selection and Social Theory>(2002)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서 역사와 인간과 사회 그리고 생물학을 연결하는 다중적이고 통합적이며 초학제적 학문연구의 범례를 보여주고 있다.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과 미국대선 [나인당케의 단상들]

미국에서 트럼프 정권의 탄생은 분노와 좌절을 느끼게 한다. 많은 이들이 슬퍼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분노할 자격이 있다. 또 서로 위로해주어야 할 과제 역시 안고 있다.

그러나 현재 힐러리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몇몇 분들의 과도한 주장들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례로 지금 SNS나 인터넷에서는 힐러리를 비판하는 모든 종류의 주장들을 ‘여성혐오’로 몰아붙이며 극단적인 욕설과 원색적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여기서 여성혐오의 사례로 지적된 발언들은 ‘버니 샌더스가 나왔으면 이겼을지도 모른다’거나, ‘힐러리가 약자를 대변하지 못했다’는 등 근본적으로 ‘여성’혐오라기보다는 힐러리의 무능함을 질책하는 것들이었고, 이러한 발언은 정치인에 대한 비판의 자유로서 보장받되어야 한다. 단지 힐러리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고 해서 힐러리 비판이 여성혐오로 이어진다고 보는 견해는 굉장히 위험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러한 주장들은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의 모든 차별받는 사람들의 정치적 투쟁과 해방을 향한 과정들을 거대한 사기저하와 무기력함으로 고통받게 만든다. 나는 트럼프가 집권했다고 해서 미국의 시민사회가 곧바로 붕괴할 것이라고 비관하지 않는다. 작년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을 때 미국내의 열기, 그리고 그것이 전 세계에 준 신선한 충격을 기억하라. 단지 1년만에 트럼프가 집권했다고 해서 그들이 이 흐름을 하루아침에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힐러리의 패배를 자신의 패배와 동일시한다면, 그들이 트럼프의 공격으로부터 이러한 지난 사회운동의 성과들을 방어하는 투쟁에 곧바로 진지하게 대처하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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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보운동 전체가 힐러리와 자신을 동일시해야 하며, 그녀를 비판하는 모든 주장들은 여성혐오라는 식의 주장은 매우 폭력적이다. 무엇보다도 힐러리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무능한 기성 정치인일 뿐이다. 물론 최초의 여성대통령 도전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유리천장의 존재가 그녀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숨기기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미국 민주당의 보수적 고위관료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버니 샌더스가 일으킨 political revolution의 새로운 흐름을 차단해버리고, 샌더스 효과의 모든 모멘텀들을 대선으로부터 추방해버린 인물이다. 또 그녀는 국무장관 재직시절 미국이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저지른 모든 형태의 전쟁범죄들에 가담한 인물이다. 수억대의 강연료를 받고 월스트리트를 옹호한 수십 년 경력의 ‘기성’ ‘주류’ 정치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는 이번 대선에서 그 어떤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한 무능한 후보였다.

그녀에게 대선때 어떤 전략이 있었던가? 분명 그녀 역시 샌더스의 정치혁명이 일으킨 흐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선택지들이 있었다. 샌더스를 부통령으로 지명한다든가, 무상교육 같은 샌더스의 대대적 복지정책을 수용한다든가, 젊은이들의 좌절스런 삶을 개선할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다던가 하는 전략 등.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펴지 않았다. 그저 트럼프의 역겨운 혐오발언에 반사이익을 누릴 생각 뿐이지 않았는가?

따라서 트럼프와 백인남성들의 혐오공세에 맞서 사회적 약자들, 소수자들의 반격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흐름을 창조해내지 못한 것은 그녀의 무능함 때문이다. 그리고 대선에서 그녀의 패배를 직면한 진보적 유권자들이 그녀의 그러한 무능한 대응들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정치적 권리다. 이러한 비판들을 ‘여성후보’에 대한 공격으로 묵살해선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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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트럼프의 집권은 분명 하나의 예외상태다. 그것은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추구해왔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 전략'(국내에선 개인의 자유를 강조, 국제적으로는 자유를 빌미로 한 군사개입)이 사실상 끝났음을 선언하는 사건이자, 미국 주류 사회가 국제적으로 ‘어메리칸 리버럴리즘’의 위대함을 선언하던 시절이 끝났음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트럼프는 분명 적(라티노, 무슬림, 성적 소수자)을 설정함으로써 백인남성 중심의 ‘우리’를 통합하려는 정치적 술수를 쓸 것이며, 장벽건설, 이민자 추방, 타국과의 외교단절 등의 예외적 조처들을 사용해 초월적 차르와 같은 주권자의 입지를 굳히며 지지기반을 다지려 할 것이다. 이러한 유사 전체주의적 트럼프의 지배에 맞서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에 서서 이러한 예외가 실은 ‘상례’라고 지적함으로써 ‘진정한 예외상태'(벤야민)를 전개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과제인지도 모른다.

힐러리와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을 일치시키는 모든 시도들은 이러한 정치적 과정에 역행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최초의 여성대통령 탄생이 무마되고 극우 혐오주의자 정권이 탄생한 것에 다른 모든 분들과 함께 분노하지만, 동시에 이 패배의 원인을 인식하고, 어째서 힐러리가 트럼프를 넘지 못했는지를 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울지도 웃지도 말고 다만 이해하라. 이것이 우리가 현 순간 취해야 할 자세일 것이다.

 

동서고금의 경계에서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3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3

오늘의 서평: 김영식 저,  유가 전통과 과학(예문서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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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계와 확장

“단어 그대로 번역하지 말라”verbum pro verbo는 키케로의 유명한 말이 있다. 사상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동양에는 왜 플라톤이나 뉴턴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쉽게 한곤 한다. 반면에 “서양에는 왜 공자나 주희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을 생소하게 생각한다.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현실에 너무 쉽게 적응되어 자연과학이 형성된 서구의 문화와 사회적 요소들이 판단의 중심기준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이나 철학 혹은 자연이나 종교와 같은 큰 개념조차도 서구문화의 소산물이거늘, 과학과 철학 그리고 자연과 종교를 주제로 놓고서 서양과 동양을 비교할 경우 과연 비교 자체가 될 것인지를 의심해보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비교란 결국 한 쪽의 기준을 통해서 다른 쪽을 견주어 보는 일이니만큼 비교 자체를 의심해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고민은 번역가능성 테제 혹은 과학철학사에서 유명한 토마스 쿤의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이라는 주제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사상적 고민에도 불구하고 현대는 번역과 통약을 피해갈 수 없다. 현대는 문화적 번역의 시대다. 이미 두 문화는 만났고, 그것이 충돌이 되었건 조화가 되었건 우리는 두 문화의 섞임을 피해갈 수 없다. 12세기 유럽의 르네상스는 희랍어와 아랍어 그리고 라틴어 사이에서 이뤄진 상호 번역의 역사적 소산물이다. 르네상스 번역의 역사는 단순히 텍스트 사이의 비교가 아니라 문명적 콘텍스트의 교환이 이루어진 시간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상으로 오늘 우리의 문화사는 번역과 통약 그리고 비교와 확장 그 자체이다. 마테오 리치나 정약용에서부터 오늘날 동양의 많은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내적 갈등의 원천은 두 경계에 사이에 놓여져 있다. “말 그대로 번역하지 말라” 그리고 ‘현대는 번역의 시대다’라는 두 경계 말이다. 이런 생각에 머뭇거리다가 요즘 새로운 책을 한 권 읽었다. 두 경계 사이에서 텍스트의 비교가 콘텍스트의 확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 질문하는 책이었다. 김영식의 <유가전통과 과학>(2013)이라는 책이다.

2. 다중적이지만 객관적 해석

김영식의 <유가전통과 과학>이라는 책은 동서의 경계만이 아니라 고금의 경계까지 다루었다. 이 책의 저자 김영식은 자신의 다른 책 <주희의 자연철학>(2005)에서 이미 독특한 비교 시선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이 책은 더 나아가 과학이라는 기준으로 동양의 지식을 재단하는 일에 대하여 냉정한 비판을 던져주고 있다. 1970년대 이후 문명비판의 기운을 앞장세워 나온 신과학운동은 동양고전과 첨단의 서양 과학을 직접 비교하는 과단성을 보였다. 서구 과학과 동양 고전 사이의 비유를 통해서 오히려 동양의 고전을 신비주의로 전락시킨 꼴이었다. 이 책은 그런 신비주의 운동과 거리가 멀다. 그러면 저자는 어떻게 유학과 과학을 서로 소통시키려는 것일까? 그의 방법론은 유교 원전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는 독서를 중시하는 데 있다. 책에 등장하는 중국의 주자학, 조선의 성리학과 실학의 원전을 객관적으로 독해함으로써 서양과학의 사상사적 토대와 연결고리를 찾으려 한다. 또한 텍스트를 접근하는 태도에서 독단적 견해를 버리고, 새롭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중시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격물치지 이론이 서구의 과학적 추론방식을 흡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러면서 그는 직접적이고 단언적인 결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다중적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른 사례로서 조선 실학자들의 지전설(지구회전설)이 자칫 그들만의 고유한 이론으로 평가되기 쉬운 점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다. 실학자들의 지전설이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신지식을 수용한 것인지, 아니면 독자적인 창안물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조선유학의 뿌리를 다시 읽는다.

3. 절차적 사유

저자는 우선 주희의 주자학적 방법론에서 과학추론의 하나인 ‘유추’ 방법론을 찾을 수 있는지를 살피고 있다. 유추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아직 알지 못한 것을 알게 해주는 추론이다. 저자는 유추 방법론에서 유가전통의 사고방식인 상관적 사고correlative thought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80쪽) 알고 있는 사물이나 현상 그룹이 알지 못하는 사물이나 현상의 그룹과 같은 종류의 그룹이라는 점을 알게끔 해주는 사고력이 바로 유추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연현상이나 사물이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의 상관적 범주로 나눠지거나 오행이라는 다섯 범주로 나눠지기도 하는 것을 상관적 사고라고 한다. 상관적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법이나 서양과학에서 말하는 차이법과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법에서 한번 분류된 것은 영원히 그 분류에 종속된다. 반면 중국전통의 핵심범주이기도 한 유가의 상관적 분류는 고정된 소속을 강요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은 한때 음이었다가 양이 되기도 한다. 상관성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분류의 고정성은 문제가 아니다. 주자학의 유추 방법을 통해 서구의 과학추론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지만 유추된 실현물은 과학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유추를 통해 사물과 현상을 끝까지 파악하려는 노력은 동서고금에 통하는 공부의 기본 자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주희의 공부하는 자세를 잘 설명하고 있다. 주희가 말하는 공부는 마음의 지각능력을 바탕으로 한 지식이다. 인간의 마음이 사물에 닿아서(卽物) 그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窮理) 각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지식을 아는 것은 우선 (i)누구나 인정하는 단서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ii)알 때까지 추론하며 (iii)그 사물이나 현상을 관통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이다.(90쪽) 다시 말해서 저자가 지적한 주희의 공부법은 바로 과학적 지식을 획득하는 공부법과 같은 것이다. 논리적으로 순서를 밟아가야 하며 사고의 도약은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 점은 중국의 주자학이나 서구의 과학에서 동일하다. 나는 저자의 이런 지적이 매우 신선하며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존의 동서철학 비교는 주로 인식의 결과물에 맞춰져 있었다. 예를 들어 서양의 천문학과 동양의 천문학의 비교에서 천문학이라는 학문의 내용이 서로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하면서 비교를 했다. 어떤 비교철학자는 동양의 기와 서양의 에너지 개념을 직접 비교함으로써, 동양고전에 이미 현대과학의 맹아가 존재했었다는 식으로 만용의 종합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비교방식은 (i)자칫 우연을 필연으로 가장하거나 곡해하는 결과에 이를 수 있으며 (ii)비유나 은유를 직적접인 논리적 대비법으로 착각하기 쉽다. 이 책의 저자 김영식은 그런 외형적 비교에서 탈피하여 사유의 절차 자체를 중시했다. 어떤 역사는 과학을 낳고 어떤 역사는 이슬람을 낳았듯이, 중국역사는 유가전통을 낳은 것이다. 그 낳은 소산물은 다 다르지만 낳게 한 사유구조 사이에는 서로 비교되고 사로 통합될 것이 있다는 이해가 바로 저자의 고유한 생각이라고 본다.

4. 상관적 사유와 격물

주희는 많은 자연학적 지식을 주자어류에 담아 놓았다. 그러나 주희에게 서구식의 과학이라는 별개의 독자적 범주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저자는 강조한다.(98쪽) 당연한 말이지만 주자의 자연철학을 너무 쉽게 과학기술에 비교하는 사례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저자의 이런 강조는 의미있다. 이 책에 의하면 주희의 자연학적 관심은 (i)내단의 경전에 해당하는 참동계(參同契) (ii)예(禮)에 해당하는 음악 (iii)역학의 상수학과 양생론에 몰려 있다. 주희는 이 밖에 농사법, 의학, 점술 등에도 관심을 두었지만 상대적으로 약했다고 한다. 그러한 주희의 자연학적 관심을 현대의 과학기술에 대비시키는 것은 무리다. 주희의 자연학은 자연의 운동성을 통하여 결국 도덕이론을 강화하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사회생물학이다. 굳이 억지표현을 하자면 ‘사회자연학’인 셈이다. 화석에 관한 주희의 설명도 역시 변화의 음양론을 강화하는 유비법에 지나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105쪽)

이러한 유비법은 결국 상관적 사고를 조직하는 데 쓰였다. 저자에 의하면 주희에게 자연계와 도덕계는 상관적 사고 안으로 흡수되어 같은 차원에서 범주화되었다. 사물이나 현상도 그렇지만 주희가 관심을 가졌던 음악의 소리도 오성(五聲)이나 12율(律)처럼 상관적 사고 안에 흡수되었다. 자연의 사물이나 자연현상이 오행이나 음양같은 상관적 사고로 범주화되듯이, 주희에게 인간의 성정을 오행으로 범주화시키거나 혹은 덕성을 사덕(四德: 元, 亨, 利, 貞)으로 범주화시키는 것이 중요했다고 한다. 자연계와 도덕계를 동일한 수준에서 본 것은 주희의 중심적인 관점이면서 동시에 주역 이래 한자문화권 전반에 걸친 사유구조의 특징이다. 상수학이 가능한 이유는 역경에서 말하는 자연의 운동원리가 인간의 운동원리와 동형적이라는 점에서 찾아진다. 주희의 理一分殊를 도덕계와 자연계를 묶어내는 핵심이론으로 본 저자의 시선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주희는 하나의 리를 天理와 동일시했다고 한다. 인간 본연의 性에 仁이나 義같은 윤리적 덕목의 형태로 天理가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악한 속성이란 人慾이 天理의 발현을 방해하고 차단하기 때문이라고 본 주희의 생각은 인욕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런 수양의 방법론이 바로 격물格物이라고 저자는 쓰고 있다. 격물을 통해 天理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면 道와 理를 똑똑히 볼 수 있다고 한다.(73쪽) 그래서 마음의 리와 사물의 리를 동일시한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격물에 마음을 다하면 理에 대한 지식 자체가 아니라 理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이넓고 깊어진다는 데 있음을 주희가 강조한 것으로 저자는 지적한다.

서구과학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객관과 주관을 분리하는데서 출발한다. 과학은 두 가지 사유의 절차를 필요로 한다. 하나는 가설연역적 추론이다, 사고의 조직적 구조에 따라 연역적 가설을 형성하는 추론이다. 또 하나는 관찰을 통한 귀납적 추론이다. 흔히들 말하듯이 플라톤의 실재론적 사유가 왜 자연과학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첫 번째 가설연역 추론과 연관한다. 관찰된 자료들을 ‘무엇인가를 지향하여 혹은 어디로 초점을 맞추어 묶어내는’ 귀납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 ‘무엇인가를 지향하여 혹은 어디로 초점을 맞추는’ 사전의 사유기능은 연역의 마음에 해당한다. 플라톤의 실재가 과학에 영향을 미쳤다는 과학사적 의미는 연역사유의 중요성에 있다. 물론 플라톤 식의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과학의 경험적 추론과 무관하다. 뭐니뭐니해도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귀납적 추론이다. 앞서 말했듯이 관찰을 통해 얻어진 경험자료를 종합하는 귀납추론 말이다. 관찰자료들을 일반화하는 추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찰하는 주관을 관찰되는 객관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경험적 관찰을 과학적이라고 부를 수 없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자연과학의 핵심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작업에서 시작한다. 주희의 언어로 말하자면 도덕계와 자연계가 분리되어야만 혹은 분리되어 있어야만 과학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결국 자연계와 도덕계를 하나로 묶어서 보는 주희의 자연관은 서구과학의 자연관과 이념적으로 충돌된다.

서구과학의 자연관은 통찰력보다 관찰된 결과를 중시한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 주희에게서는 통찰력이 더 중시된다. 이점에서 격물의 개념이 찾아질 것이다. 格物이라는 글자에 얽매어서 격물을 마치 서구과학의 관찰이라는 방식으로 이해하려했던 서구의 비교학자들이 더러 있었다. 현대의 동아시아 독자들도 사물의 ‘물’ 자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서구 문명이 들어온 이후 物은 생명계를 제외한 고정되고 운동없어 죽어있는 대상적 사물이라는 개념으로 변모되었다. 격물의 물은 그런 물이 아니라 생명계를 포함한 모든 자연계를 말한다. 이런 개념의 혼돈으로부터 동아시아 자연학이 오해되곤 한다. 저자 역시 이런 단순한 오해를 하지 말 것을 이 책에서 당부하고 있다.

5. 이성적 사유의 발현

저자는 주희를 조금 벗어난 이황의 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理氣互發論으로서 이황의 이기론은 主理論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황의 기는 생성과 소멸을 하며 선과 더불어 악도 발현될 수 있는 반면, 주희의 생각은 氣가 별개가 아니라 理 안에 들어와 있어서 마음 밖으로 리를 둘 수 없다고 했다. 저자의 책 1장에서 주희의 기 개념에 대한 현대 주석가들의 해석들이 다뤄지고 있다. 저자가 정리한 기를 서평자가 다시 요약한다면, 기는 (i)연속성(心田慶兒) (ii)에너지(Manfred Porkert) (iii) 취산 (iv)자연발생성(J. Needham) (v)생명성 (vi)만물발육력 (vii)비초월성/자연성으로 요약 가능하다.

이 앞의 한 문단만 언뜻 보기에도 이황의 생각은 플라톤과 닮았으며 주희의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황과 주희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직접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과학과 관련하여 굳이 말한다면 이황의 주리론은 가설연역적 사고에 연관지을 수 있으며, 주희의 기론은 경험관찰적 귀납추론에 연관지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런 추론은 순전히 저자의 책을 읽고 나서 생긴 자연적 느낌이라서, 나의 이런 추론에 대한 책임을 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저자에게도 조금 분담시키고 싶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황이나 주희에게 공통된 생각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성적 사유를 중시했다는 점이다. 이 책 2부 3장에서 다루었듯이, 미신을 거부하는 정약용의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주희가 다룬 많은 자연학에는 과학기술의 측면과 나아가 초자연적 요소까지 포함한다. 자연학을 다룬 주희의 태도는 이성적 기준을 잃지 않고 있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주희나 이황이나 서구과학을 접했던 정약용에서조차 모두 점술이나 내단 그리고 귀신같은 범주를 언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들의 입장을 오늘날의 과학적 태도와 직접 비교해서는 안 된다. 만유인력법칙을 통해 땅의 작용력과 천체의 작용력을 하나로 종합한 뉴턴은 세계문명사 통 털어서 가장 과학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그런 뉴턴도 소위 비과학적이고 초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금술에 매달려 말년을 다 보냈다. 오늘의 편견 그리고 서양의 선입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선으로 주희, 이황과 정약용을 볼 수 있다면, 유가의 이성적 사유구조가 과학적 사유구조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김영식의 책 <유가 전통과 과학>, 그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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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수호자 [나인당케의 단상들]

지난 주말 광화문에 모인 20만명의 사람들에게 어떤 동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왜 그곳에 모인 것일까?

분명 그들에게도 개인적인 욕구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사용할 것이다. 예컨대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 그 시간에 취준생은 취직준비를 더 할 수 있었을 것이고, TV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한도전을 보면서 맥주 한 잔을 들이킬 수 있었을 것이고, 연인이 있는 사람은 놀이공원이나 극장에 가서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20만 명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황금같은 주말 오후를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다.

그들의 동기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고전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계급적 이해관계? 아니 그들은 동일한 집단과 계급도 아니었다. 정치권의 부패를 본 후의 즉자적인 분노?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정서를 분노라고 단정짓긴 힘들다. 시위 참여자들의 밝은 표정, SNS 곳곳에 그들이 남긴 후기들을 읽어보면 그들의 정서는 분노라는 감정의 표출보다는 새로운 종류의 자신감이었다.

나는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의 동기를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자신이 속한 ‘정치적 공동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위기에 처한 그 공동체를 구제하기 위하여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말한 ‘공화주의적 인민의 덕성’, 스피노자가 말한 ‘정념(정동?)’, 혹은 헤겔이 말한 ‘정치적 신념'(물론 헤겔은 이것을 애국심과 동일한 것으로 불렀다만, 만약 우리가 그의 철학에서 국가주의적 요소를 빼고 재해석을 해본다면), 혹은 발리바르가 말한 ‘시빌리테’가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말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해 시위현장에 모여 촛불을 드는 시민들은 정치적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로서, (아마도 ‘애국자’라는 단어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공동체의 수호자’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마치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1세가 이끄는 수십만 병력에 맞서 스스로 갑옷으로 무장하고 마라톤 평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공동체를 수호한 아테네의 시민들처럼, 그들은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진정한 주권은 국가원수가 아닌 광장(아고라)의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들, 권력을 실현하는 demos인 것이다. 주류 정치권과 재벌, 언론이 그토록 부패해 있음에도, 이토록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수많은 demos를 보유한 것은 우리에겐 하나의 축복이자, 어둠 속의 빛과 같은 희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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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5일 광화문

냉소 [퍼농유]

우쑵니다.

어제 광화문에 홀로 나가 나에게도 이런 감정이 있었던가를 느끼며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싸돌아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한철연 식구들을 만나 술한잔 했습니다. 아! 이런 인연이! 빈속에 마구 쐬주를 들이켰던지라 마니 취했습니다. 노래방까지 가는 호기를 부렸지만 체력적 한계를 느껴서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도망가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우철이형 미안해 ㅠㅠ) 고3때에도 밤샘을 하며 공부하지 않았던 체력인지라 급격한 노화로 제대로 버티지 못했습니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또다시 욕 들어 먹을 짓을 하려고 합니다. 홍보질입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짓인 줄 왜 모르겠습니까. 박최순실의 짓거리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라고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책을 한 권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낸다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 책에는 뭔가 남다른 사연과 감회가 있습니다. 하나의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출발선상에서 다시 마음 다잡고 신발끈 매고 몸을 푸는 마라톤 선수의 심정이라고 할까요. 제목은 ‘마흔의 단어들’입니다. 살만큼 살았음에도 아직 살아야할 날들이 많이 남은 마흔들이 가진 애환들을 묶어보았습니다. 마음은 아직 젊은데 사회에서는 밀려나기 시작하기에 더 이상 젊지 않은 사정들이 절박한 마흔의 감정들을 모아보았습니다. 다음 주에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부끄럽고 염치없지만 널리 홍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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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한 꼭지 올려봅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냉소적 이성비판]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구성해보았습니다. 니체의 이런 말을 좋아합니다. “너희는 사자가 먹이를 갈구하듯이 그렇게 지식을 갈구하는가?” 과연 우리는 철학을 통해 진리 그 자체를 그렇게도 목말라 갈구했었던 것일까요? 회의적입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이 점에 대해서 냉소적입니다. 그는 철학이 임종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선언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아직 그 임무를 다하지도 못해서 죽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임종을 맞은 철학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거창한 주제들은 모두 핑계였고 신이나 우주, 주체나 객체, 의미나 무 등의 추상적 주제들은 모두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슬로터다이크는 칸트의 사유, 아니 철학적 사유 자체와 접촉할 때 안게 되는 위험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더군요. 우숩지만 멋진 표현입니다. “격렬하고 급작스러운 노화 현상.” 철학을 한다는 것은 급격하게 늙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곤 이렇게 묻더군요. “과연 지식에 대한 혈기왕성한 젊은 의지는 지금 철학에 어느 정도 남아 있는가?”
그는 이성과 비판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신화는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하더군요. 전통적 이데올로기 비판은 냉소주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냉소주의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냉소주의를 계몽된 허위의식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계몽주의는 종교적 환상을 비판했고 형이상학적 허구를 비판했고 도덕적 허구를 비판했고 관념론적인 상부 구조 등을 비판했습니다. 이제 계몽된 의식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러나 계몽되었지만 무감각해졌을 뿐 아니라 냉소적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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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슬로터다이크는 현대인들의 냉소주의에 맞서 유머, 욕설, 아이러니, 반항적 몸짓 등 고대적 냉소주의의 선구자인 디오게네스의 미덕들을 제시하더군요. 슬로터다이크는 철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해를 바탕으로 한 몸(physis)과 정신(logos)의 상호작용이 철학이지,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철학은 아니다.” 슬로터다이크는 비판정신과 저항정신을 잃은 근대인들은 실제로 저항도 못하면서 그저 머리로만 사회적 부정의를 냉소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근성도 오기도 없이 너무도 허약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저하는 허약한 사유가 아닙니다. 개 같은 곤조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정치적 상황 속에서는 개 같은 곤조와 함께 더욱더 냉정한 사유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더욱더 교활한 정치적 상상력, 더욱더 냉정한 법적인 태도, 더욱더 강직한 도덕적 힘들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입니다.

부끄럽고 염치없습니다.

냉소

1.
이방인의 뫼르소가 정오의 태양빛이 너무 강렬하여 방아쇠를 당긴 일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모든 것이 태양 빛 아래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명명백백해지는 순간 그는 권태를 느꼈던 것은 아닐까? 이 따분한 권태가 그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했던 것은 아닐지. 아! 이 너무나도 뻔한 세상의 가증스런 노골(露骨)이란! 세상이란 고작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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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정오를 맞이한 40대는 그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뻔하게 그 몰골을 드러내는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낄까? 뫼르소가 느낀 따분한 권태가 아닐까? 이 한낮의 뙤약볕 무기력에는 어떤 섬뜩함이 있다. 무관심, 냉담, 냉소, 불안, 분노, 탐욕, 외로움이 자리한다. 그리고 이 섬뜩한 무기력의 정체는 바로 권태이다. 내가 살아온 삶이 고작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섬뜩한 권태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스벤젠(Svendsen)은 지루함의 철학이란 책에서 “존재 차원의 지루함, 다시 말해 삶 자체와 결부된 지루함은 근대에 들어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근대 이전에 귀족만이 누렸던 여가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근대인 모두가 가진 특권이 되었다. 그러나 왜 근대와 함께 존재 차원의 권태가 시작되었을까?
근대는 종교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신비의 세계에서 합리의 세계로 이행했던 시대이다. 그래서 신의 세계에서 이성의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이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서 세상은 정확하게 계산되고 명증하게 드러난다. 이해하지 못할 신비의 영역은 사라지고 이해 가능한 합리적인 영역이 펼쳐진다.
그런데 왜 이러한 명증하고 합리적인 세계인 근대로부터 권태가 시작할까? 어쩌면 권태란 세계의 무의미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권태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의미의 명백함에서 온다. 모든 것의 의미가 뻔하게 이해될 때 오히려 의미가 없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의미의 결여에서 권태가 오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과잉에서 권태가 온다.
이제 세상은 명백해졌고, 미지의 세계는 사라져 버린다. 이제 낯선 두려움도, 흥미도, 설렘도 없게 된다. 모든 것을 드러낸 세상은 뻔해진다. 뻔해진 세상은 뻔하기 때문에 알 필요가 없어진다. 권태가 시작되는 것이다. 근대의 권태와 함께 과시적인 스펙타클한 소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년에 찾아오는 권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을 살아볼 만큼 살아본 나이이기에 이제 세상은 뻔해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뻔해진 세상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중년들은 뻔뻔해진다. 뻔뻔함은 중년들의 특권이다. 뻔한 세상에 중년에게 찾아온 뻔뻔함, 이것은 이 시대에서 성공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 되었다.
그래서 바야흐로 뻔뻔스러운 시대이다. 모진 사람이 이기고 뻔뻔한 사람이 성공한다. 어진 사람은 바보취급 당하고 어수룩한 사람은 언제나 실패한다. 뻔뻔함은 강한 자기 확신이며 배짱이다. 일을 성취하려는 현실주의자의 추진력이다.
자신의 이익과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그것에 대해 비난을 하는 사람에게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하며 오히려 역정이다. 1억을 거절하는 청렴에 대해서는 “10억이면 되겠어?”라며 떠본다. 성적 유혹을 부끄러워하는 순진함에 대해서는 “왠 내숭이야, 내숭떠니 더 섹시한데?”라며 수치심을 조롱한다.
뻔뻔함은 인간의 탐욕과 욕망과 쾌락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다. 너도 별 수 있겠어라는 의심에 기초한다. 이것은 인간의 도덕성과 선함에 대한 무의식적 불신에 근거한다. 이러한 냉소적 의심은 뻔뻔함의 철학적 토대다.

2.
서양의 근대적 이성이 낳은 결과는 무엇일까? 중세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의외의 답안을 내놓은 사람은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이다. 그는 근대 문화가 가진 새로운 특질을 냉소주의(Zynismus)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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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계몽주의자들이 중세적 세계관에 현혹되었던 대중들을 대하는 이데올로기적 태도는 무엇인가? “그들은 그들이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행한다.”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은 계몽되어야 했다. 자신이 속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계몽적 태도는 권위적이다.
계몽을 통해 무지몽매한 대중들은 자신이 속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깨닫고 계몽된 삶을 살았을까? 아니다.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그들의 논리는 이러하다. 그들은 계몽되었다.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그대로 행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상황 논리나 자기 보존의 욕망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근대의 계몽된 인간들은 근대 사회의 자본들이 현혹하는 이데올로기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속이는 것을 알지만 그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그대로 행한다. 근대적 인간들은 그들이 가진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비판하더라도 꿈적하지 않는다. 냉소적이 된 것이다.
자본가들의 뻔뻔한 탐욕과 염치없는 비도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하더라도 그들은 냉소할 뿐이다. “그래서 어쩔 건데. 억울하면 돈 벌던지.” 이 냉소주의적 태도는 단지 자본가들만의 태도는 아니다. 현대 대중이 가진 일반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쩔 수 없잖아.”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이런 태도는 비도덕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바보로만 살지 않겠다는 계몽된 인간들의 행동 방식이다. 냉소주의자는 바보가 아니다.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사정과 이유를 대면서, 그래 그렇지만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러한 냉소주의를 ‘계몽된 허위의식’이라고 규정했다. 중세시대의 거짓과 억압의 환상에서 스스로 계몽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근대적 먹고사니즘의 실존적 한계에 무릎을 꿇는다.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중세의 신학적 세계관에서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으로 변했다. 신이 죽은 음울한 회색빛 공간에 과시적인 스펙타클한 소비의 문화가 들어섰다. 돈이 신이 된 시대다. 그리고 돈이 신이라는 것이 환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돈을 섬긴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활한 어른이 되어야 했다. 뻔뻔함은 이 계몽된 허위의식이 낳은 어른들의 불행한 의식이다. 삶이 너무 각박해지고 있다. 각박한 세상에서 ‘계몽된 허위의식’은 냉소할 뿐이다. 그래봐야 어쩔 수 없다고 냉소한다.
문제는 계몽된 허위의식의 뻔뻔함은 스스로 고결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고상한 도덕적 탈을 쓰면서 유체이탈 현상이 일어난다. 뻔뻔한 사람들은 자신의 뻔뻔함이 자기 확신적 도덕에 근거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무거운 표정으로 진지한 자신의 도덕을 늘어놓곤 한다.
뻔뻔한 철면피들을 대중들은 증오한다는 뻔한 사실을 뻔뻔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뻔뻔한 사람들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도덕적이고 근엄하다. 어느 대기업 그룹 회장은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돼야한다.”고 심각하게 말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믿는 척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이 믿는 척하는 태도에 담긴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 믿는 척하는 자기기만적 태도를 유지해야 안락한 삶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결하고 깨끗하며 우아하다고 생각한다. 계몽된 허위의식의 이러한 태도를 키치(kitsch)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키치적 삶이란 무엇인가?

3.
키치(kitsch)란 단순하게 말하자면 고급예술과는 다른 통속예술이다.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예술 상품을 이르는 말이다. 모나리자 그림이 있는 시골이발소 풍경이 키치의 전형이다.
주목해야할 것은 통속 예술 작품과 관련한 키치보다는 하나의 삶의 태도와 관련된 키치이다. 키치는 바로 근대적 존재 양식이다. 신의 죽음이 선언된 근대에서 그 죽음이라는 빈 공간속에 색칠해 놓은 환상과 소비의 과시적 세계이다.
우리는 대량으로 생산되고 모방되는 다양한 상품들을 소비하고 향유한다. 귀족들이 가진 고급 예술과 삶의 양식을 근대 이후 경제적인 성공을 이룬 신흥 계급이 키치로서 즐긴다. 마찬가지로 경제적 성공을 이룬 중년들도 귀족적 삶의 양식을 키치적으로서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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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이 아니라 아저씨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후줄근하고 촌티 나는 행색이다. 요즘 이런 아저씨들은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한다. 꽃중년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외모, 패션, 건강, 운동, 자기계발 등 치장이나 옷차림에 금전적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피부 관리, 두발, 성형도 불사한다. 몸짱은 기본이다.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꽃중년의 삶은 이제 외모에서 태도에 이르기까지 엘레강스하고 클래식하거나, 스마트하고 모던하다. 최신형 자동차를 사고, 유행에 따라 옷을 입으며, 맛집을 찾아 식도락을 즐기고, 고급 상품을 소유하고, 독특한 취미생활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것도 예술적으로. 물론 키치적이다.
계몽된 허위의식을 가진 중년들은 바로 키치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의미가 없는 뻔한 세상의 권태와 부조리를 키치가 메꾸고 있다. 이 키치적 삶을 살고 있는 중년의 삶의 태도가 냉소주의다. 다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행한다.
밀란 쿤데라의 키치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키치는 어떤 세계관에 의해 뒷받침된 미학, 거의 철학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건 인식이 제외된 아름다움이고 사물을 아름답게 만들어 남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지이며 총체적인 순응주의입니다.”
“인식이 제외되”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총체적인 순응주의이다.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굴복하지만 거기에는 다른 욕망이 숨어 있다. “너희들만 즐기냐? 나도 좀 즐기자”거나 “너희들만 고상하냐? 나도 좀 고상하게 살아보자”는 욕망이다.
고상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부패와 부조리와 부정의는 은폐되어야 한다. 은폐되어야할 것은 우리들의 삶의 추악함이다. 세상이 부패했고 부조리하고 부정의하다는 것 쯤 나도 다 알어. 하지만 나도 좀 즐기자.
밀란 쿤데라는 그래서 키치를 이렇게 정의한다. “똥이 부정되고, 각자가 마치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처신하는 세계를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것이다. 바로 이런 미학적 이상을 키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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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한다면 똥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부패와 부조리와 부정의는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은폐되는 것이다. 은폐란 세상의 청렴과 합리와 정의를 냉소하는 것이고, 다 알지만 모르는 척 무관심하게 지루해하는 것이다. 권태로운 것이다.
계몽된 허위의식은 실존적 한계를 잘 알고 있지만, 키치적 삶을 욕망하고 있다. 똥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세상에서 총체적 순응주의자들인 중년은 진심으로 고상한 신사의 품격을 지니고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키치적이다.

4.
계몽된 허위의식은 계몽을 통해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들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하면서 행하기 때문이다. 대안은 있을까? 슬로터다이크가 제안하는 바는 이렇다. 이 계몽된 허위의식의 ‘냉소주의’(Zynismus)의 대안으로 고대 희랍시대의 ‘견유주의’(犬儒主義, Kynismus)를 제안한다. 왜 그럴까?
냉소를 뜻하는 영어의 ‘시니컬’(cynical)은 원래 고대 그리스어의 ‘퀴니코스’(kynikos)에서 나온 말이다. 슬로터다이크는 현대의 시니컬한 냉소주의를 그리스어인 ‘퀴니코스’로 대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퀴니코스’란 ‘개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견유주의’(犬儒主義)라고 번역되었다.
왜 개 같다고 했을까? 디오게네스의 삶 자체가 개 같은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디오게네스를 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리도 ‘개 같다’라는 말을 욕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개는 개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에 따라 사는 도덕적 동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디오게네스를 개 같다고 욕을 했을 때 디오게네스는 그래 나는 개라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개만도 못한 위선적인 놈들이라고 폭로했던 것이 아닐까? 개가 자연적으로 살 때 인간은 유체이탈의 위선을 범하면서도 개를 욕하며 자신의 위선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Alexander and Diogenes exhibited 1848 Sir Edwin Henry Landseer 1802-1873 Bequeathed by Jacob Bell 1859 http://www.tate.org.uk/art/work/N00608

Alexander and Diogenes exhibited 1848 Sir Edwin Henry Landseer 1802-1873 Bequeathed by Jacob Bell 1859 http://www.tate.org.uk/art/work/N00608

똥이 없는 듯이 세상을 고결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이상화하는 뻔뻔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비도덕적이거나 사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뻔뻔한 냉소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바보는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뚜렷한 명분이나 냉철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모르고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하기 때문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런 계몽된 허위의식의 뻔뻔한 냉소에 대해서는 더더욱 개 같은 냉소로 맞서기를 권한다. 머리로 싸움하려고 하지 말고 직접 몸으로 보여준다. 똥을 무시하는 그들의 고상함에 대해서 똥과 오줌과 정액으로 조롱한다. 무관심한 냉소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냉소를 권유하고 있다.
알면서도 모른 척 고상한 태도로 뻔뻔한 냉소를 취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고상함에 감춰진 똥들을 폭로하면서 맞서라는 얘기다. 그들의 계몽된 이성에 맞서 육체적인 분노와 조롱으로 그들의 계몽된 허위의식을 일깨우라는 말이기도 하다.
슬로터다이크의 계몽된 허위의식에 대항하는 방법은 뻔해진 세상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뻔뻔해진 중년들의 냉소와 권태와 무관심에 대항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뻔뻔한 키치에 저항하라. 그것이 디오니게스적 저항이다.
뻔해진 세상에 뻔뻔해진 중년들은 그래서 알고도 행하는 허위의식에 빠진 뻔뻔스러움보다는 디오니소스적 냉소를 실천해 볼만하다. 그래 나는 개다. 하지만 개만도 못한 너희들보다는 적어도 자연스럽다. 그러니 웃자. 이것이 슬로터다이크가 뻔뻔해진 중년에게 권하는 디오게네스적인 냉소와 유머다.

우리는 또 다른 최순실을 원하는가? [피켓2030]

건국대학교 철학과 사회철학반 일동: 이동구, 이윤하, 서동기

2016년 11월 4일

 

2016년 11월 4일의 이른 새벽, 저희 사회철학반은 철학과 학술제를 위한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작성을 중지하기로 했습니다. 학문과 진리를 사랑하는 철학도로서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이 현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최순실-박근혜로 이어지는 국정농단 사태는 단순히 그들 개인의 도덕성과 판단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가 이제까지 추구해왔던 가치에 대한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희 사회철학반은 우리 사회를 향해 철학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하고자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 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역, 책세상 출판, 1부 <세 변화에 대하여>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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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희는 질문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당연해서 의심조차 들지 않는 것에 ‘그것이 정말 그러한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라고 말입니다. 최근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사건에 국민들의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스스로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핵심적 권한들을 최순실씨에게 위임하였습니다. 지금 모든 분노는 최순실씨를,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분노의 화살은 올바르게 향하고 있을까요?

이명박 전 대통령과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가 직접 만든 대통령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들이 정의하는 잘 사는 삶은 곧 부자가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선택하였고, 이는 곧 ‘부자가 되는 것=잘 사는 삶’에 동의한 것입니다. 그들을 지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 또한 ‘부자가 되는 것, 풍요로운 삶=잘 사는 삶’에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것이 정말로 잘 사는 삶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우리의 그 대단한 꿈, 청춘, 행복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공을 목표로 살아갑니다. 공무원이 되기를, 안정적 직장을 갖기를 꿈꾸고 우리의 자식들과 친구들에게 성공신화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성공한 자들을 보십시오. 무당의 말을 받아 적고 있던 고시 출신의 청와대 엘리트 행정 관료들을 보십시오. 새파란 아이들 300명이 죽었는데도, 뉴스에 나오는 게 지겹고 노란리본이 지겹다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혹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용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합니다.

누군가는 이 혼란한 시국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결단으로 거국중립내각을, 또 어떤 이는 다음 대선 주자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어쩌면 이 혼란을 수습할 인물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 나타난 인물들이 만약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한다면? 오늘의 절망적 현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좌절과 분노를 되풀이하고, 또 다른 구세주를 기다릴 것인가요? 이렇듯 우리는 언제나 구원자를 기다려왔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구원자가 선택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하기보다, 구세주를 선택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보다,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훌륭한’ 인물들에게 삶을 맡겨왔습니다. 하지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우리는 대단한 자유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자유란, 어떤 기업에 들어가든지 정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희망퇴직을 당해 치킨집을 차릴지 고민할 자유거나, 비정규직으로 내일의 불안을 견뎌내며 어떤 컵라면을 먹을지 선택할 자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지 어떤 스펙을 쌓을지 고민할 자유들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일단 먹고 살아야지”라는 명분하에, 금전적 성공과 안정적 삶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로 남아있는 건 아닐까요? 정작 지금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하며 탐욕과 욕망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스스로 노예가 될 수 있는 자유밖에는 남아 있는 게 없을지도 모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정념에 이끌리고, 정념에 예속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욕망으로부터 기인한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것도 실상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욕망을 통한 자유가 아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욕망을 통해서만 자유를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의 욕망을 방해하는 사소한 것들에 분노합니다. 카드를 거절하고 현금지불을 요청하는 업주,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편의점 알바생,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젊은이, 자꾸만 비싸지는 물가,  성심껏 써낸 자소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일들처럼. 우리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것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는 기껏해야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업주와 알바생, 젊은이, 물가, 면접관들을 향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다르게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조그마한 분노가 과연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를 말입니다. 우리의 초라한 분노가 생겨난 까닭은 작은 몫이라도 얻어내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현실 때문입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내 눈앞에 있는 알바생과 업주, 젊은이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 바로 그 구세주들이 만들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작은 일들에 다투고 있을 때, 정작 우리의 마땅한 몫은 탐욕스러운 구세주들이 차지해왔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부당한 처우를 당했던 것은 단순히 우리가 나약한 ‘개, 돼지’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탐욕스러운 구조를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수만 명의 관중들이 모인 스포츠 경기장을 상상해보십시오. 멋진 경기와 훌륭한 기예를 펼치는 선수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경기는 그런 스타플레이어들을 통해서만 구성되는 것일까요? 경기장을 진정으로 완성 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응원하고 바라보는 관중들입니다. 관중들이 없다면, 경기는 남들보다 조금 특출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몸짓일 뿐입니다. 관중들의 시선이 있을 때 비로소 선수들은 인정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힘을 통해 구성된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명박 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한 좋은 삶에 대한 정의와 성장과 성공에 동의했고 그들을 지탱해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이 사태를 만들어낸 동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지극히 평범한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토록 힘겹게 얻어낸 87년의 승리는 우리 스스로가 주인임을 제도적으로 확인해낸 업적입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통해서 만들어진 헌법은 우리가 국가의 주권자이며, 그 권력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시위를 한다고 해도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허무와 회의 역시 존재합니다. 하지만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시국을 구원할 구세주를 기다리는 우리는, 또 다른 최순실을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분고분한 우리는 그들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될 것입니다. 최순실씨와 박근혜 대통령께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우리가 더 이상 이렇게 짐이 실리기를 바라지만은 않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어떤 자유여야 하는지,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지, 우리가 추구하고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가 꾸는 꿈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상상합시다. 그리고 현실이 우리의 상상들과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면 단호하게 저항해야 합시다. 다시, ‘상상력에게 권력을!’ (L’imagination au pouvo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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