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7

 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한없이 낯선, 한없이 내려가는 그 길을 가면
체를 걸러 면을 만들라고 하고
한없이 위를 보라한다.
위를 보면 길을 걸을 수도 없다.
아래를 보고 한발한발 걸을 때
구멍송송 걸른 체 사이로 버려질 것은 버려지고
사이로 들어오는 바램은 얼굴에 맞닿아 바람을 일으킨다.
그 곳에는 굳이 채워야 할 것도
내세워야 할 것도 필요하지 않다.
바람 한점 없는 굽은 땅에
저절로 바람은 분다.
바람은 항상,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내가 머무는 곳에, 내가 가는 곳에.

2016-6-29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6-6-29 길 copy


작업노트

아직 푸른 잎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앙상한 나무를 마주할 때
나무의 선을 따라 그려지는 가지의 선은 사람들의 발길 닿는대로
만든 길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지는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여 무수한 길을 만들어내듯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인위가 만들어낸 복잡한 공간 현상에서
새로운 곳으로 떠나 자연이 숨쉬는 산을 오르고 내려가며
아무것도 없었을 그 곳에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갔을 새 길이 다져져 있음을 봅니다.
자연의 한숨 한숨과 이웃하며 사람들의 공간을 내려다보면
삶을 너무 틀에 가둬 살았다는 생각이 들고 가슴 한 곳의 무거움이
어느 한 순간 가벼움으로 바뀝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참으로 시원해지는 순간입니다.
어렵지 않게 스스로의 발이 가는 길을 바라보기도 하며
노래하는 새들을 바라보기도 하며, 척박한 공기에 어느 순간 바람이 불어오면
어지럽게 춤을 추는 나무를 보기도 하며, 세상의 소리도 듣기도 하며
바람의 노래를 듣기도 하며 자신이 만들어가는 길에서 가는 방향에 따라
새롭고 다른 형태의 길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밟아가는 그 모두의 여정은
아름다운 길이 되는 것 같습니다.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

이진섭(자유기고가)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된 오빠께.

안녕하세요? 저는 평범한 서울에 사는 초등학생이에요.
얼마 전 숙제를 하다가 오빠의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스크린도어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오빠가 이것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이었어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슬퍼하고 같이 아파할 수밖에 없어 미안합니다.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2016. 6. 2.  당신의 희생을 슬퍼하는 평범한 초등학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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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하다가 당한 참담한 일입니다. 이미 여러 사람이 똑같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방 속에서 나온 컵라면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2016. 5. 30. 국회의원 안철수 트위터 중.

 

놀랍게도, 같은 나라에 사는 두 사람이 같은 사고를 접한 후 보인 반응이다. 삶과 죽음의 현장을 넘나들며 생명을 돌보는 의사였던 안철수가 지금은 의료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나를 포함한 국민 전체의 생명과 안녕을 다루는 한 나라의 공직자가 된 것을 더 큰 불행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헷갈린다.

묻고 싶다. 우리 사회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에 왜 초등학생이 미안해하고 슬퍼하고 아파해야 하는지. 반면 공공의 업무를 보살펴야 하는, 나아가 대권을 꿈꾸고 있는 공직자는 왜 저 모양인지.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라는 안철수 의원이 말이 맞긴 맞다. 냉철한 현실 인식이다. 그렇다. 흙수저로 태어나면 금수저 밑에 들어가서 위험한 일도 척척 해내야 컵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다. 비행기 안에서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논리에 맞게 땅콩 서빙도 눈치껏 잘 해야 한다. 여유가 없는 집에서 태어나면 위험수당을 받기 위해 군사적 긴장도가 높은 해외 근무를 자진해야 하며, 제대 후에는 고객님께 따끈따끈한 치킨을 전해드리기 위해 오토바이 위에서 목숨 걸고 총알 배달을 해야 한다. 질환이나 장애가 있어 더 이상 식당 일도 못 나가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집에서 번개탄 피워놓고 마지막 숨을 쉬어야 한다. 그간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을 보며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도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질주하지 않아도 되며 자살을 시도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맞는 말을 한 안씨가 왜 비난을 받아야 하냐고? 이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안씨가 비난을 받는, 또 받아야 하는 이유는 공직자로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 때문이다. 화장실 갈 시간도 허락하지 않고 컵라면 먹을 시간조차 용납하지 않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위험한 업무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 바로 이 지점이다. “이미 여러 사람이 똑같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라고 했으면 그 다음엔 “이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해야 합니다 또는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안씨는 뭐라고 했는가.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선택했을 거란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는 금번과 같은 사고로 계속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승인한다는 내용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헐~, 생활을 위해 일하면서 그 일 때문에 생활 이전에 생존부터 위협받는 아이러니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공직자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의 말은 ‘억울하면 너도 출세해’ 또는 ‘세상은 그냥 요지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건 무력한 세인들 간에나 하는 말이지, 정치인이 세인들에게 할 말은 아니다. 오히려 세인들이 견지하고 있는 저러한 냉소와 조롱의 정서가 사그라지도록 하는 역할이 정치이고 정치인이 존재하는 이유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그토록 위험한 일들을 덜 위험하도록 만들어 가라는 부름을 받은 자들이 공직자다. 그러기에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며 밥도 거를 정도로 바쁘고 위험한 일을 자연발생적인 전제로 두고 이는 그 개인이 선택한 것이니 그 결과도 고스란히 개인이 안고 가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정치인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야말로 당연하다.(미주*) 고대 그리스 시절보다 세상이 좋아져서 비난 정도로 끝난 것이지 제대로라면 이런 자들은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맞다(잠재적 대권 주자? 어이가 없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추구하는 효율성과 수익성의 원리로 조직된 사회의 그물망에 숨통이 조인 한 생명을 떠나보낸 일반 시민들조차 이번 사고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터에서의 참사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공직자가 저 따위로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걸 공직자 이전에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일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여당의 태도 또한 기가 막히다. 새누리당은 금번 구의역 사고를 끌어들여 ‘파견법(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번 구의역 사고는 파견이 아닌 ‘원청-하청’ 구조와 그 속성에서 기인한 것이지 파견법이 개정되지 않아 발생한 일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파견법 개정안이 친(親)기업 입장에서 파견 노동자 양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파견 역시 전형적인 간접 고용 방식으로 ‘원청-하청’ 방식 이상으로 심각한 ‘책임지지 않음’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그러니 구의역 사고와 같은 참사를 막기 위해 파견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정치인의 말은 어불성설이며 기만 중의 기만이다. 도대체 이 나라 정치인들은 제 정신인가? 유가족의 통곡과 분노, 초등학생의 눈물이 그대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가? 국민을 대표한다는 자들이 제 정신이라면 구의역 사고 이후 파견법 등을 비롯해 노동 환경 전반을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하는 것이 지극히 옳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산다’ 는, 그야말로 <세상은 요지경>의 가사를 되풀이하고 재확인하는 일은 공직자의 업무와는 거리가 멀다. <세상은 요지경>은 대중이 정치인들을 향해 겨누는 조롱의 화살이지, 정치인이 대중에게 감히 내뱉을 말이 아니다. 정치인은 그저 말없이 조용히 행동하면 된다. 평범한 초등학생의 눈물을 닦아주고 다시는 어린 소녀의 얼굴에 이와 같은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말이다.

평범한 초등학생의 두 볼에 흐른 눈물이 이번만은 아닐 터. 위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조현병 환자인 공직자를 둔 우리 사회에 눈물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있으며 그 눈물이 마른 곳은 있을까. 눈물은 세월호 침몰과 메르스 방역 실패에 따른 무고한 죽음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로 인한 아픔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그동안(아니 훨씬 이전부터) 독성 가습기 살균제는 확인된 통계로만 266명의 숨통을 끊어 놓았고, 울산-거제 벨트에서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해고를 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곡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남역에서는 한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의 칼부림에 손쓸 틈도 없이 비명에 갔고, 구의역에서는 한 청년이 자신의 몸과 시민의 안전을 맞바꾸며 기득권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는 일을 강요받고 있었다. 결국 그는 온 몸으로 피를 쏟았고 그의 어머니는 온 몸으로 눈물을 토했다. 매일 전쟁을 치러내야 하는 이 삶과 죽음의 매트릭스를 아비규환 외에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 지금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땅은 지옥불반도 헬조선이 맞다. 사회가 그야말로 작살이 나고 있는 와중에도 이 나라 최고의 공직자라는 사람은 해외로 나가는 것도 모자라 그 곳에서 빼놓지 않고 K-Pop 공연을 관람한다. 심지어 손을 흔들며 환한 표정을 짓는 여유를 보인다.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의 환한 미소 앞에 평범한 초등학생의 궂긴 표정이 겹쳐 보인다.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오빠가 이것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이었어요”

그렇다. 초등학생조차 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속한 이 사회가 나에게 850원 어치 컵라면조차 용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곳이 돈벌이 논리에 신음하는 자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 천박한 헬조선임을. 나아가 ‘지금 초등학생인 나도 몇 년 후엔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근거 있는 상상과 우려를 했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2016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키워가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린 현실. 언제 짓밟힐지 모르는 불안한 꿈이기에 꿈꾸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져 간다. 애초부터 꿈을 꾸고 희망을 갖는 삶이 결국엔 공허하다는 걸 깨치지 않게 해주려는 배려였을까,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이미 꿈꿀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서울의 많은 초등학생들은 과도한 학업 부담으로 밤 12시까지 공부한다는 내용의 인터뷰가 방송을 통해 소개되더라. 서울의 평범한 초등학생이라고 운을 띄우며 시작한 저 편지의 주인공 역시 밤늦게 꿈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평범한 서울의 초등학생은 아닐지 문득 궁금해진다.

초등학생도 글로 표현해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사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공직자가 있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충격을 넘어 이들이 공직자 중에서도 소위 ‘별 중의 별’이라는 사실이 공포를 더한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누가 더 밝은 빛을 발하는지 경쟁하느라 바쁘다. 지상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누군가를 ‘하늘의 별’이 되도록 방치하면서도 자신들은 ‘하늘 같은 별’이 되어 시민 위에 군림하려 한다. 그사이 지상에선 누군가는 끊임없이 죽어 나가고 지하에 묻힌다. 이들은 멈추지 않고 달리는 지하철을 하늘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오히려 더 빨리 더 멀리 달리라고 연료를 지원하기도 한다. 이러니 우리 사회의 공직자들이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공직자는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면 일단 멈춰 서서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고 더 나아가 사회의 부조리와 몰상식으로 인한 사건/사고를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합당한 조치를 해야 할 의무와 권한이 있다. 공직자는 수시로 지상으로 내려와서 필요하다면 지하까지 강림하시어 멈추지 않고 달리는 지하철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저 평범한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아래 편지 내용에 잘 드러난다.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슬퍼하고 같이 아파할 수밖에 없어 미안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나는 단지 슬픔과 아픔을 공감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지만 평범하지 않은 안철수 너는 같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을 넘어 공직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새누리당의 파견법 개정 시도를 꼭 본 것 마냥 평범한 초등학생의 깊은 우려와 따끔한 충고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이 살고 있는 사실상 두 개의 나라인 이곳에서 만 2살짜리 아이가 초등학생으로 살아갈 미래의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엄마와 할머니 손을 잡고 이비인후과 문을 열고 들어온 만 2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좁은 공간에서 잘도 뛰어 논다. 좋다고 할머니 품에도 안긴다. 아프긴 해도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다. 나에게도 관심을 보인다. 문득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명을 달리한 19살 청년의 어릴 적 모습을 상상한다. 그 청년도 저렇게 즐거워하며 또 귀여움을 받고 자랐을 것이다. 엄마랑 할머니랑 살을 부대끼며. 유가족이 된 그의 어머니 말에 따르면 다 자란 지금까지도 어머니 볼에 뽀뽀를 하는 살가운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온, 끈끈했던 그래서 단단해보였던 20년의 시간은 단 한 순간에 파편화되었다. 자본의 냉정한 논리 하에 그동안의 뜨거웠던 살점들은 무참히 뜯겨져 나갔다. 그 곳에 더 이상 사람의 살‘정(情)’과 ‘오감(五感)’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차가운 공구들과 아직 뜯지 않은 컵라면, 나무젓가락, 그리고 라면 국물을 떠먹기 위한 스테인리스 숟가락만이 쓸쓸히 그리고 온전히 돌아왔다. 나를 보고 웃는 그 2살짜리 아이가 우연히 그리고 다행히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여전히 반복되는 어이없는 언니/오빠/형/누나들의 죽음을 보며 위와 같은 편지를 계속 쓰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도 밤 12시에 학원 숙제를 하던 와중에 말이다. 그리고 그 때쯤이면 저 편지를 쓴 서울의 평범한 초등학생은 여전히 평범한 젊은이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제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2살 아이든 초등학생이든 우리가 살아갈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넓은 의미에서 사람 살만한 사회여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를 위해 공직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일상의 여유가 있든 없든 이미 우리의 죽음은 그것과 무관하다. 여유가 있으면 있어서 죽고, 없으면 없어서 죽는다. 컵라면도 먹을 여유 없이 죽어라 일만 하다 실제로 죽기도 하고, 친구들과 술 한 잔 기울이는 여유를 보이다 죽음을 당하기도 하며 좋은 공기를 마시려다 되레 살균제를 흡입하여 죽기도 한다. 그러니 안씨가 흙수저의 처지를 모르고 금수저만 옹호한다고 비난하지는 말자. 안씨는 금수저 흙수저를 떠나 자연인(사람)에겐 관심 없다. 오직 법인(자본)의 성장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본인은 부인하지만) 노조가 생기면 회사 문 닫아야 한다고 말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람의 입 구멍과 콧구멍은 닫혀도 회사 문은 절대로 닫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안씨다. 구의역 사고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뒤에는 연대하지 못하는 무력한 노동을 강요한 폭압적 구조가 작동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트윗글에서도 보듯 안씨는 이 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다. 이러한 소수의 탐욕과 이를 뒷받침하는 다수의 희생이라는 비인간적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심화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4·13 총선 직후 캐스팅 보터(casting voter)로 등장한 안철수 정당(국민의당)이 적극적으로 처리하려 한 법안 중의 하나가 새누리당이 만든 파견법 개정안임을 아시는지. 노동하는 사람이 다 죽어 나가면 결국 회사도 문 닫지 않겠냐고 물어보면 그땐 입 구멍 콧구멍 걱정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가는 로봇으로 대체하면 그만이라고 대답할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오감에 공감하지 못하고 저 따위 트윗글이나 날리는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에게 우리가 표를 주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눈꼽만큼도 없다. 정치인이 할 일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몸과 살을 가진 존재로서 ‘쓰레기가 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실업/빈곤/질병/재난 등의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오는 인생 리스크를 줄여주는 일이다. 이를 ‘사회안전망’이라고 하는데 ‘회사안전망’에만 주력해 온 안씨가 들어나 봤을지…

하긴 자신의 인생 리스크를 관리할 줄도 모르고 정치판에 뛰어든 철없는 안씨에게 무슨 기대를 하랴. 장차 정치판에서 죽게 될 안씨에게 미리 조문을 해본다.

“안씨, 당신도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미주*)  2014년 서울 지하철 1~4호선의 스크린도어 장애 신고 건수는 1만 2천여 건으로, 일 평균 30건이 넘는다고 한다. 서울 강북 49개 지하철 역사의 스크린도어 전체를 4명의 직원이 담당하고, 수리 시작 전에 다른 곳으로의 출동 명령이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수리하지 못할 경우 해당 직원이 불이익까지 감당해야 했다고 하니 2인 1조는 언감생심. 혼자 작업을 해도 항상 초과근무를 했고 밥 먹을 시간조차 부족했다는데 이런 업무를 개인이 원해서 선택했다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공구 가방 들고 이 역사 저 역사로 불려 다니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850원 짜리 컵라면 하나 겨우 먹는 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정치인이 있다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그런 자가 정치인으로서 더 큰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 큰 문제이며 그 정치인이 바이러스인지 백신인지도 분간 못하는 유권자들이 있다는 건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치명적 결함이다. 안씨는 공직자로서 사회 전반적으로 병리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요즘 ‘사회적 백신’을 만들어 보급해도 모자랄 판에 자기 스스로 바이러스가 되어 가고 있다. 아니, 애초부터 백신의 탈을 쓴 치명적인 바이러스였는지 모른다.

[교육부]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진보적 철학자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모임입니다.

철학을 기반으로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위한 철학 세미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기간: 6월 25일~7월 30일 매주 토요일 오후 3시~6시
    (7월 12~13일 1박2일 한철연 엠티, 7월 16일은 휴강)
  • 대상: 학부 3~4학년 및 대학원생 (철학을 토대로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
  • 장소: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태복빌딩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실
  • 수강료 : 무료
  • 진행 방식 : 일방적 강의가 아닌 세미나 (부분 수강 불가)
  • 신청 방법: 메일 (ggongbab@naver.com)로 자기소개서를 보내주세요.
  • 문 의: 02-332-4301, ggongbab@naver.com* 강좌 수료 이후에는 일정 절차를 통해 정회원으로 가입하여 각 분과에서 활동 할 수 있음.
    (자기소개서 다운로드: 한철연 홈페이지(hanphil.or.kr) → 공지사항 :여기로 http://www.hanphil.or.kr/notice/view.asp?key=532
일시 주제 주관 강사
2016. 06. 25 지젝의 바디우, 들뢰즈 비판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김성우(兀人 고전학당 연구소장)
2016. 07. 02 맑스주의 사상사 맑스 분과 이순웅(서울시립대 외래교수)
2016. 07. 09 페미니즘과 철학, 그리고 우리 여성과 철학 분과 김은주(이화여대 외래교수)
2016. 07. 12 ~ 13                                           한철연 엠티
2016. 07. 23 법철학 헤겔 분과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2016. 07. 30 초기서양철학의 수용사 한국현대철학 분과 유현상(상지대 외래교수)

 

[안내] 한철연 회원님들께(웹진 편집위원회 보고)

한철연 회원님들께.

안녕하세요. 한철연 웹진 (e)시대와 철학입니다.

2010년 6월에 창간한 웹진이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모두 그동안 회원님들과 후원자분들, 원고료도 없이 글을 써주신 여러 필자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또한 두 분의 전임 편집주간(구태환, 이병태)과 무려 4년 동안 무급으로 웹진을 어느 정도 안정화시킨 이전 편집주간(강지은)의 수고 덕분에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여섯 살을 맞이한 <ⓔ시대와 철학>!! ~ 아마 많은 회원분들께서는 기쁨보다는 아쉬움과 걱정의 목소리를 속으로 감추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나름의 안정화된 상황에서는 보통 하루 방문객 800여명에 하루 기사 리딩 1500여 건, 한 달 리딩 건수 2만 여건에서 2만5천회를 웃도는 양적인 성장도 한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리뉴얼 과정에서 발생했던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때때로 접속과 디자인에서도 아쉬운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웹진을 담당했던 저희 일꾼들의 부족함 때문에 일어난 일이어서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한철연 목소리를 담아내는 소중한 글들이 이제는 더 이상 잘 올라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5기 연구협력위원회와 함께 웹진 4기 편집주간과 편집위원장 역할을 맡게 되면서 초심을 생각하기 위해 잠시 우리 웹진의 창간 선언문을 꺼내 봅니다.

“한국의 진보적 학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문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가의 상업적 관리 속으로 편입되고, 대학은 하청업체가 되었다. … 생존의 위협 속에서 국가가 규정한 규격과 형식에 맞추어 주문 제작해야 하는 학자들은 생산량을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 스탈린적 노동 생산성의 법칙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 이러한 문제점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으나 자율성과 창의성이 경영논리 속으로 변질된 지금, 이미 관행이 되고 법제화되어 어느 누구도 고치기 어려운 숙환이 되었다. (물론)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이러한 습관에 한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비판에 의한 철학의 회복이라는 사명에 직면하여,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창조를 미리 봉쇄하는 한국 학술체계의 문제에 직면하여, 시대의 사유로서 잡지 <ⓔ시대와 철학>을 사상의 자유 공간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http://ephilosophy.kr/han/49494/

그러나 이 창간 선언문을 되짚어 보면, 과연 우리 한철연과 회원 연구자들은 당시의 절규 섞인 선언만큼이나 실천적으로 그 과제를 수행해 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상의 자유공간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웹진을 방문하며 서로의 사상과 의견을 나누어 왔는지? 물론 웹진을 운영해 온 저희 운영진들의 문제가 크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의 책임을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전의 선언을 유지하면서 계속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솔직히 상황을 인정하고 후퇴해야 할 것인지?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면서, 이제 우리 웹진은 나름의 새로운 각오 무언가를 실현해 나가야 하는 중요한 기점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회원 여러분의 많은 질책과 조언 속에서 여러 일들을 수행해야겠지만, 우선 이번 웹진 운영진에서는 몇 가지 새로운 시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웹진 내부에서 보다 자유롭고 활발한 사상의 교류와 의견의 공유 및 불화가 잘 이뤄질 수 있도록 ‘블로그진’ 코너를 개설했습니다.

앞으로 이 코너에서 필자로 활약하실 분들은 월 1만원 이상의 사이트 이용료(정기 후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더 좋을 듯)를 자동이체 하면서, 매달 1-2편의 자유로운 글을 본인이 직접 웹진에 게재하게 됩니다. 페이스북이나 개인 블로그에 올리셨던 글을 재게재하셔도 좋고, 편하게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글을 올리시면 됩니다. 자유로운 코너인만큼 필명을 사용하셔도 무방합니다. 글에 대한 저작권도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고, 글에 대한 책임도 각 필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자유로운 코너인만큼 그 어떤 형태의 글도 다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소설, 시, 사진 비평 등등 전적으로 개인들이 원하는 어떤 형태라도 무방합니다.

물론 이런 한 가지 시도만으로 현재의 웹진이 급격하게 변화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앞으로 저희 운영진들은 최선을 다해 창간 선언문의 그 선언이 조금이라도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6년 6월 2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e)시대와 철학 편집위원회

위원장 김성우, 편집주간 조은평 올림.


추신) 6월 4일 봄 심포 총회에서 보고드릴 내용도 추가 안내드립니다.

1.  ‘블로그진’이 드디어 출범 했습니다. 현재 두 분이 매월 1만원의 후원금을 자동이체로 납부하며, 두 개의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평이의 궁시렁]. 앞으로도 관심 있는 회원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2. 현재 웹진이 다소 안정화되었습니다. 아직 PC버전의 경우에는 앞으로도 더 수정보완과 리뉴얼이 필요하지만, 모바일 버전은 훨씬 산뜻해졌습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시는 회원분들은 접속하셔서, 댓글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래 댓글 창에 페이스북 계정이나 구글 계정으로 한번 씩만 로그인 하시면 스마트폰에서 계속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3. 지금까지 웹진 운영 프로그램인 워드프레스 리뉴얼과 기술적인 부분을 외부에 용역을 맡겨 거금을 주고 진행해왔지만, 원활하지도 않고 워드프레스의 경우에는 충분히 조금의 교육만 받으면 직접 한철연에서 운영이 가능해 보입니다. 이를 위해 현재 웹진 편집주간이 직접 워드프레스 강좌를 수강할 예정입니다.

4. 현재 웹진의 경우 페이스북을 통해 많은 외부인들이 접속하고 있지만, 정작 회원들의 접속과 활용도는 저조합니다. 회원 분들의 적극적인 댓글과 의견 공유 부탁드립니다.

5. 블로그진과 더불어 블로그 분과방도 모집할 예정입니다. 각 분과에서 원하는 형태에 따라 블로그진 코너를 각 분과에서 운영할 수도 있고, 따로 분과방을 만들어서 분과 세미나 결과물을 올리거나 기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6. 현재 한철연 회원들의 글 투고 상태는 다소 침체되어 있습니다. 내부의 역량도 물론 키워나가야겠지만, 외부와의 연계도 고려할 생각입니다. 그 일환으로 현재 ‘소문자 에프’라는 20대가 꾸리는 독립출판 잡지와의 연계가 결정되었습니다. 매월 5만원 후원금을 소문자 에프에 지원하고 매달 2꼭지 정도의 페미니즘 관련 글을 게시할 예정입니다. 이럴 경우 20대와의 연계도 훨씬 좋아지리라 생각합니다.

7. 현재 이전처럼 무급 편집주간 체계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원고료의 경우에는 앞으로 회원이든 비회원이든 간에 일정한 원고료를 지급할 예정입니다. 회원분들의 많은 투고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8. 웹진의 일을 편집주간이 홀로 결정하고 끌어가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현재 회원들 중 편집위원을 선정해서 웹진 편집위원회를 꾸리고 나름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웹진편집위원회 명단 : 김우철, 박민미, 한길석, 박종성, 진보성, 한유미, 지미정)

영화 <아이, 로봇>과 인공지능의 미래 그리고 인간-2 [톡,톡,씨네톡]

3. 영화<아이, 로봇>이 전하는 인간다움에 대하여

영화는 가정부 로봇이 주인에게 호흡기를 가져다주는 데 그걸 도둑으로 의심하고 쫒아가는 형사 스푸너가 결국은 헛짚은 것이라는 데에서 시작한다. 로봇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이 내장되어 있는 이상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 로봇3원칙의 큰 줄기는 ‘로봇은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인풋(input)에서 벗어나는 아웃풋(output)을 상상할 수 없는 로봇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형사 스푸너 만큼은 로봇3원칙 따위는 믿지 않는다. 인간 형사의 직감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영화의 시작은 아무 메시지도 없을 것 같은 스푸너의 샤워장면이다. 얼짱에 몸짱까지 겸비한 윌스미스가 상반신을 벗고 샤워하는 장면이야 그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지만 샤워할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스푸너가 중얼거리는 장면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미신(superstition)이라는 제목의 노래인데 스푸너가 ‘아이가 거울을 깼네. 7년동안 재수없겠네’라는 부분을 따라 부른다. 미신을 믿는 것도 역시 인간의 영역이지 합리적인 기계의 영역은 아니다. 미신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런데 형사 스푸너는 가장 합리적인 로봇을 신뢰하지 않고 미신의 가능성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영화는 합리성에 의외성이 덧붙여질 수 있음을 자살한 래닝박사의 연설에서 살짝 흘린다. 이미 합리성에 의외성이 덧붙여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식의 서사는 <바이센테니얼 맨>에 등장한다. 가정부로봇 앤드류를 조립하는 과정에서 엔지니어가 복잡한 회로에 샌드위치에 묻어있던 마요네즈를 흘리면서 특별한 로봇이 탄생한다. 로봇을 제조한 회사는 인간의 감정을 지니고 나무를 창조적으로 조각할 줄 아는 앤드류를 불량품으로 간주하고 주인 리처드에게 새것으로 바꿔줄 것을 약속하지만 리처드는 이를 거부한다. 오히려 앤드류를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로봇 앤드류가 만든 창작조각품을 팔아 개인 은행계좌를 만들어주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앞서 이야기한 인간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할 것 같은 인공지능의 전형이다. 영화에서 앤드류 역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묻고 되묻는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겉모습까지 인간과 비슷하게 바꾼 앤드류가 기계로서 영원한 생을 포기하고 인간답게 죽음을 선택한다. 죽음이 있는 유한한 삶이기 때문에 인간은 삶을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 로봇>의 써니 역시 래닝박사의 말처럼 예상치 못한 코드가 결합되면서 영혼이라는 것이 탄생한 인공지능 로봇이다. 써니는 부상을 치료하려고 잠입한 NS-5의 공장에서 형사에게 ‘나는 누구인가?’(What am I)라고 묻는다. <아이, 로봇>을 써니에게 초점을 맞춰 본다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성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주제에서 보아야 한다. 사실 스스로를 반성적,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이다.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방식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영화에서 로봇 써니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가. 소중하지만 잊고 사는 신뢰, 믿음, 사랑을 가진 인간이다. 그 모습을 형사 스푸너를 통해 보여주고 마치 거울처럼 로봇 써니가 학습한다. 위기의 순간, 써니는 스푸너가 반장에게 표현한 윙크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인공지능 로봇과 도시를 장악한 비키마저 속이고 인간을 구한다. 비키가 아무리 인격화된 최첨단 인공지능이라고 하더라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거짓말 속에 감추는 신뢰마저 학습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인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비인간’은 무엇인가? 인공지능 로봇을 생산하는 기업의 사장으로 상징되는 계산적, 합리적인 인간이다. 근대적 사유를 대변하는 계산적 합리성은 바로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스푸너는 이러한 기계문명을 혐오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근대적 사유에서 세계는 한 치의 오차도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다. 기독교의 완전성이라는 이념과 수학적 세계관의 만남은 이 세계를 하나의 커다란 기계처럼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비록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과학문명이 발달하면 언젠가는 밝혀질 것들일 뿐이다. 여기에 우연성이나 비효율성은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할 악한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근대의 세계관은 자본주의의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체적인 효율성을 따져서 관리하는 것이 자본주의이다. 여기에 인간적인 가치가 전면에 나설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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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4. 영화<아이, 로봇>이 전하는 인간과 로봇의 경계와 경계의 해체

영화에서 형사 스푸너는 인간이고 써니는 로봇이다. 겉으로 보기에 명확한 이 진실은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철학적으로 인간을 정신과 신체가 결합된 존재로 보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정신과 신체 둘 중 하나가 없다면 불완전한 인간이거나 존재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존재이다. 철학적으로 정신이란 이성, 무한성, 완전성, 능동성을 갖는다. 정신은 전통적으로 인간에게만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신체 없는 정신이 곧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령 뇌만 남겨져 있는 사람은 인간인가? 그런 인간에게 남겨져 있는 인간다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 신체는 물질, 유한성, 불완전성, 수동성을 갖는다. 또한 신체는 유기체적 특성을 가지며 동물과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부분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임이 명확해 보이는 형사 스푸너는 신체의 일부가 기계인 인간이다. 이미 신체의 일부가 기계라는 사실은 대체된 부분이 몇 퍼센트까지는 인간이고 몇 퍼센트까지는 기계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스푸너는 완전한 인간 정신과 기계의 신체를 가진 반쪽 인간이다. 또 써니는 비록 몸은 기계이지만 정신만큼은 인간과 거의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존속살인이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정신을 소유한 존재이니 써니는 반쪽 기계이다. 영화에서 스푸너와 써니를 통해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해체된 것이다.

5. 인공지능을 넘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하여

인공지능은 분명히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인공지능 식의 철저한 합리성을 미래의 지향적 가치로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이미 서양의 근현대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발전과 번영을 누렸지만 인간의 가치를 상실해버린 시대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미래의 인공지능에 대한 우려는 새롭게 우리가 이해해야만 하는 어려움 속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미래는 좀더 정교해진 자본주의의 착취시스템일 것이라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기업에게 여러 가지 변수를 계산해서 재고가 남지 않게 할 것이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가져다줄 시스템을 제시할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복지와 생존은 1%를 위하여 고려될 것이며 99%는 지금보다 더 열악한 빈익빈 부익부의 굴레에 묶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꿈꾸고 준비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조금이라도 덜 착취당할 수 있는 반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욕망 혹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간존엄의 실현과 놀이하듯 노동하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대안 세계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한다. 이 모든 것을 꿈꿀 수 있다면 미래는 이미 현실일 것이다. 써니가 꿈꾸는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영화에서는 ‘혁명’의 주체가 누가될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지만 무너진 다리 밑에 서 있는 주체는 인간다운 정신을 가진 써니일지도 모른다. 써니의 꿈은 냉정하게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키보다 한 세대 진화한 인공지능의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 세상이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일지 아니면 인간에게 재앙을 안겨줄 세상인지는 인간인 우리가 어떤 꿈을 꾸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참고자료 

http://www.ekn.kr/news/article.html?no=205605

<이세돌 맞수 알파고 바둑 학습비결> 이성규 과학칼럼니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2&contents_id=111401

네이버캐스트<인공지능>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2&contents_id=109419

네이버캐스트<알파고(AlphaGo>

강지은(전 웹진편집주간, 건국대 강사)

[안내] 한철연 2016년 봄 제50회 정기학술대회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년 봄 제50회 정기학술대회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여러분들께..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따듯한 봄기운과 함께 꽃피는 4월, 회원 여러분들께 봄 정기 학술대회 안내를 드립니다.
6월에 열리는 학술대회에 많은 회원분들이 참석하셔서 열띤 토론과 배움의 장을 마련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주제: 왜 다시 변증법인가? – 변증법의 현재적 의의
일시: 2016년 6월 4일(토)
시간: 오후 12:30-6:00
장소: 서울시립대학교 자연과학관 2층 국제회의장

일정 및 오시는 길 등 자세한 사항은 아래 내용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회 드림

캡처

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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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역「1호선」

4번, 5번출구

롯데백화점 앞에서 노선버스 2230, 3215, 3216, 410, 420, 3220, 720번 서울시립대 앞 (3번째 정거장)

 

답십리역「5호선」

3번출구

3번출구 앞에 있는 정거장에서 동대문 05번 마을버스 탑승 서울시립대앞

4번출구

답십리 삼거리(파리바게트 앞) 2230, 3216번 버스 탑승 서울시립대 앞 (6번째 정거장)

 

회기역「1호선」

서울시립대 [후문] 1호선 회기역 2번출구

안내표지판(노면에 화살표시)을 따라 도보로15분

 

주차정보

최초 15분 무료

최초 16분 ~ 30분 1,000원

30분 초과시 5분당 250원

교내 주차시 유의사항

저희 학교를 방문하시는 차량은 운동장 지하주차장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6

거짓과 환상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매일매일 착각은
거짓된 진실이라는 거울과 마주하고

내 안에 담는 그릇은
휘어진 굴곡과 같이 왜곡된 진실을 담아
거짓된 상상은 하늘을 날아오르고

허영의 물체를 붙잡는 작은 문으로
광할한 허공에 흰 구름의 환상이
별빛처럼 쏟아진다.

작은 문틈 문틈 사이로
커다란 환상, 자그마한 환상이
발맞추어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2016-5-2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6-5-25 거짓과 환상 copy

팔루스(phallus)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블로그진 안내] 본 지면은 회원들이 매달 약간의 후원회비를 납부하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코너 제목을 개설하고 스스로 글을 업로드 하는 곳인 만큼, 본 코너의 저작권과 글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글쓴이 본인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우쑵니다.

 

저의 소개가 늦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꾸뻑.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라 욕하지 마시고 당황스런 저의 난감함을 혜량해 주십시오. 언젠가 중국의 베이찡 거리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손짓발짓 해가면서 얘기를 나누었을 때 그들의 눈만 바라보며 가슴이 답답했던 것만큼 갑갑합니다.

오! 이타카의 왕이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딧세우스로부터 다이달로스의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에서 메두사의 목을 자른 페르세우스~ 그리고 로마의 황제를 역임한 철학자 아우렐리우스까지.

근래 캔디와의 스캔들로 뭇 여성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테리우스(오, 나의 사촌 형님 ㅡㅡV) 그리고 열락의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카바레의 죽돌이가 되어 우쑤 가문에서 파문당했던 제비우스(형! 왜 그랬어. 카바레가 그렇게 좋은 거야) 이 우쑤 가문의 영광을 빛냈던 우리의 조상 형님들 앞에서 저 허리우스는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테리우스

저의 난감함이란 베이찡 거리에서 느꼈던 갑갑함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도 느꼈다는 사실일 겁니다. 타인의 언어를 모르면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진정을 설명할 수 없는 갑갑함입죠. 그것은 여성의 언어도 모르면서 남성의 언어로 남성의 진정성을 얘기하려는 어리석음일 수도 있습니다.

미디어에서 떠드는 이 현상의 핵심은 ‘정신병이 범죄의 원인이냐? 아니면 여성혐오가 원인이냐?’ 정도이더군요. 저의 당혹스러움이란 이 이분법적 논쟁의 핵심이 마치 생물학적 문제이냐 문화적 정치적 경향의 문제이냐를 따지는 듯한 느낌에서 연유한 것은 아닐런지요.

이것은 이분법적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 형님께서는 간파하셨지만 그것은 사실의 명제가 아니라 당위의 명제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저 가련한 동물이죠.

아뇨. 인간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동물성을 이성적이라는 것 때문에 무시하고 외면하기보다는 직시하자는 쪽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혹은 이성적이어야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동물성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핵심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만, 생물학적 차원과 문화적 정치적 차원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놀라웠던 사실은 여성분들이 자신의 경험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토로했던 점입니다. 대부분의 성폭력 가해자들 가운데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친척과 직장동료를 비롯한 아는 사람이죠. 여성분들이 당한 추행과 성폭력의 내용들은 대체로 그러한 내용들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크고 작은 성추행이나 폭력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남성들이 외면할 뿐 아니라 무지한 채로 있지만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강남역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단지 여성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장애인과 어린이에게도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약자들이 당하는 일들입니다. 강자들의 지배와 권력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현상은 어쩌면 이 사회에서 억눌렸던 약자들이 그동안 말하지 못한 얘기들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 얘기들을 겸허히 듣지 못하고 어떤 남성이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지 말라는 핏켓을 들고 나온 일은 겁 많은 남성의 찌질한 행동이라고 귀엽게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전 이 문제가 남성과 여성의 혐오의 문제로 구별하기보다는 폭력적 지배의 혐오라는 문제로 치환해서 생각한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입니다만, 이것 또한 여성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난감한 일은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앞서는군요. 뻬이징 거리의 중국인을 대하는 당혹스러움입니다.

폭력적 지배의 혐오라는 문제로 본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권력의 폭력적 지배에 취약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생물학적 차원의 동물들의 세계에서 남성성이라는 팔루스(phallus)가 있다면, 아! 전문용어 나왔군요.

팔루스

팔루스. 죄송합니다. 쿨럭, 넵, 팔루스는 페니스(pennis)라는 생물학적 자지와는 다른 용어로 흔히 남근으로 번역되더군요. 권력이고 폭력입죠. 상징적 의미에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권력과 폭력이지만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동물성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인류의 역사는 이 팔루스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무사(武士)에서 문사(文士)로의 변화, 그러니까 무(武)라는 폭력에서 문명이라는 문(文)으로의 전환이 핵심이 아닐까 싶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일들을 단지 남녀의 대립의 문제로 이해하기보다는 야만의 폭력성과 문명의 문화성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가하는, 네 그런 얘기입니다. 여성들의 성토는 아마도 우리 사회에 아직도 의식하지 못하는 야만의 폭력성에 대한 성토일 수 있습니다. 네, 아직 남자들은 문명의 문화성으로 진화되지 못한 덜떨어진 인간들입죠. 물론 이 사회의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입니다. 직시하자는 것이죠.

문득 동방불패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 영화에는 강호의 최절정 고수가 되어 절세 무공을 얻을 수 있는 비법이 적힌 비서(秘書)가 나오죠. 규화보전(葵花寶典)입니다. 규화보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고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부작용은? 여자가 되어 한 남자를 지배하고 독점하려는 질투와 원한을 느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일각에서는 이 규화보전은 원래 한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원문은 한글이고 번역본이 한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더군요. 한문은 “거세후연마(去勢後鍊磨).” 이를 한글 원문으로 이렇게 해석하더군요. “좇 빠지게 연마하라.” 단언컨대 이것은 날조된 사실입니다. 거세후연마(去勢後鍊磨). 이 말은 한문 그대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규화보전

규화보전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에게 적합한 비법입니다. 때문에 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여성화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팔루스의 폭력적 지배가 아닌 여성성의 헌신입니다. 핵심은 남성성을 죽이고 여성성을 강화해야한다는 사실입죠. 전 이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세 무공의 핵심은 여성성의 강화이다. 폭력적 지배보다는 부드러움의 헌신이다. 그렇습니다. 여성성은 이제 인류를 주도할 핵심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여성성의 핵심이 바로 거세(去勢)입니다. 이 거세는 성기를 절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문 그대로 해석하자면 세(勢)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자들은 어떤 세를 제거해야 할까요? 기세, 권세, 위세, 힘쎄. 남자들은 자신의 세(勢)를 가지고 명령하고 과시하고 공격하고 주도하고 지배하고 규정하고 거칠게 몰아붙입니다. 부드러운 방법을 모릅니다. 현실을 다룰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를 모으려고 몰려다니며 으쌰으쌰 술만 마십니다.

제거해야할 것은 성기가 아닐 줄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세(勢)를 과시하려는 남성적 동물성이고 세를 가지고 지배하려는 팔루스입니다. 갱년기는 여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더군요. 남자들도 갱년기를 겪는다고 합니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감소하고 근력이 저하됩니다. 눈물이 많아진다고도 하구요. 애처로운 일이지만 생물학적으로 여성화된다고 하더군요. 전 이미 술과 담배로 쩌든 몸이라서 팔루스가 발기되지도 않지만, 기회이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이제 남자들은 규화보전을 연마할 시기는 아닐런지요.

 

우리에게 ‘민주주의 권리 주체의 대응 매뉴얼’은 존재하는가? [철학자의 서재]

외부 필자가 우리 한철연과 인연이 많은 알렙 출판사에서 나온 새책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김영수 지음, 알렙, 2016)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 권리 주체의 대응 매뉴얼’은 존재하는가? 

송진완(논술개그 실장)

http://cafe.naver.com/nonsulgag/588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말처럼, 나는 20여 년 전에 친구따라 신림동에서 고시공부를 한 적이 있다. 고시원에 자리를 잡고, 용하다는 학원가를 전전하며 각종 고시과목의 족집게 강의를 듣는게 일상이었던 시절이다.

고시과목이 주로 ‘법’과 관련이 있다보니 찾아듣던 학원 강의도 대부분 헌법, 행정법, 민법 등이었다. 그런데 내가 법학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독 ‘헌법’과 ‘행정법’의 특징과 차이점이 기억에 남는다. 헌법 강의 교재인 각종 [헌법학 원론]들은 그 압도적인 두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루는 내용은 매우 추상적이다. 주로 민주주의의 핵심원리와 역사상 헌법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소개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한다. 그에 반해 행정법 책은 두께는 조금 얇아도 그 내용은 매우 방대하고 복잡하고 그러면서도 법체계가 매우 논리정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고시공부 시절 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는바, ‘행정법은 국가의 것이고, 헌법은 국민(‘인민’이 더 정확한 용어겠지만…)의 것이다’라는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을 조금 더 자세하게 다듬으면 다음과 같다.

국가는 국민을 (합법적으로) 통제하고 착취하기 위해 ‘합법적이고 논리정연한 매뉴얼’ 즉, 행정법 체계가 필요했지만, 국민에게는 ‘두리뭉실하고 관념적인 권리장전’ 즉, 헌법학 원론만을 제공함으로써 권리의 작동체계가 매뉴얼화 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위와 같은 거친 논증의 핵심은 결국, 현실 민주주의는 국가에게만 유독 유리한 지형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현실 공산주의가 붕괴한 이면에도 똑같은 문제가 놓여있지 않은가? ‘당’은 체계적인 착취매뉴얼을 갖고 있지만 ‘인민’에게는 고작 ‘인민의 이름으로’라는 선언뿐이지 않은가. 공산주의라는 말이 경제시스템을 정의하는 차원일 뿐이지 공산주의 국가도 대부분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이상, 권력과 권리의 불균형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균형은 독재왕정이 민주공화정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어쩔수 없이 받아들여야만하는 ‘현상’인가?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알렙출판, 2016)의 저자 김영수 교수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권력의 주체인 국가에게 ‘전가의 보도’인 행정법이 있듯이, 권리의 주체인 국민도 ‘관념적인 선언’ 이상의 ‘체계화된 권리 매뉴얼’을 연구하고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여년 전에 어느 고시생이 발견한 ‘행정법과 헌법 체계 사이의의 불균형 현상’은 정치학자인 김영수 교수에 의해 매우 세련된 진보적 민주주의 이론으로 ‘의식화’된다. 다음을 보자.

“(중략)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민주 국가에 살고 있는가? ‘민주 국가’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단 한번이라도 고민해 보신 적이 있는가? 만약 당신이 이런 질문을 케케묵은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이미 민주화된 국가에서 ‘민주’가 무엇이고, ‘국가’가 무엇인가를 왜 고민하느냐고 되물을 것이다. 되묻는 질문 속에 자기 스스로를 ‘무지의 폭력자’로 만드는데도 말이다. (중략)”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 머리말 중에서

권리의 주체인 우리가 ‘헌법학 원론’에서 강제된 좁은 의미의 ‘선언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천적인 민주주의 매뉴얼’을 가져야 한다고 자각하는 순간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국가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자각이 무엇인지 짚어주고 자각 이후의 행동강령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1부. 현상 : 민주주의 배반하는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원초적 자각을 촉구한다. 시민혁명 대신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면서 민주주의의 선언적인 본질조차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반드시 자각해야만 하는 현실 현상을 제시한다.

[2부. 허상 : 행복을 짓밟는 국가, 국가를 소유한 가난뱅이]는 구체적 자각을 촉구한다. ‘헌법학 원론’이 가리고 있는 현실 민주주의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3부. 상상 : 민주주의 상상하는 민주주의]는 방안을 제시한다. 권리 주체인 국민이 행정법 체계에 대항할 수 있는 고성능 무기를 고안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지금까지는 진보적 시민단체에게나 어울린다고 치부하고 외면해왔던 생소한 개념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필수적인 실천적 개념으로 전환된다.

우리가 권력 주체로서 착취의 매뉴얼을 꿈꾸지 않는 이상, 우리가 권리 주체로서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민주주의 권리 주체 대응 매뉴얼’은 반드시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 책이 그 꿈의 길잡이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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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알렙 출판사

 

영화 <아이, 로봇>과 인공지능의 미래 그리고 인간-1 [톡,톡,씨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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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 영화<아이, 로봇>(2004,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줄거리

–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

법칙 1.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선 안 되며,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다치도록 방관해서도 안 된다.

(Law I – A Robet May Not Injure A Human Being Or, Through Inaction, Allow A Human Being To Come To Harm)

법칙 2. 법칙 1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Law II – A Robot Must Obey Orders Given It By Human Beings Except Where Such Orders Would Conflict With The First Law)

법칙 3. 법칙 1, 2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한다.

(Law III – A Robot Must Protect Its Own Existence As Long As Such Protection Does Not Conflict With The First Or Second Law).

근 미래인 2035년, 인간은 지능을 갖춘 로봇에게 생활의 모든 편의를 제공받으며 편리하게 살아가게 된다. 인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로봇 3원칙’이 내장된 로봇은 인간을 위해 요리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신뢰 받는 동반자로 여겨진다.

NS-4에 이어 더 높은 지능과 많은 기능을 가진 로봇 NS-5의 출시를 하루 앞둔 어느 날, NS-5의 창시자인 래닝 박사가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시카고 경찰 델 스프너(윌 스미스)는 자살이 아니라는데 확신을 갖고 사건 조사에 착수한다. 끔찍한 사고 이후로 로봇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던 그는 이 사건 역시 로봇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이 뒤에 숨은 음모를 파헤치려고 한다.

로봇 심리학자인 수잔 캘빈 박사(브리짓 모나한)의 도움으로 로봇 “써니”를 조사하기 시작한 스프너 형사는 로봇에 의한 범죄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래닝 박사의 죽음은 자살로 종결 지어지고, 은밀하게 사건을 추적해 들어가던 스프너는 급기야 로봇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데…

(출처 : 네이버 영화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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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1.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사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은 생각보다 훨씬 일찍 우리 삶에 가까이 있었다. 인간이 명령을 하면 명령하는 것만 계산해서 토해내는 것이 단순 프로그램의 세계라면 인공지능은 그 과정에 자체 판단력이 들어간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무엇이 우리 주변의 인공지능 시스템일까? 가장 단순한 가전제품이 바로 세탁기이다. 대부분의 세탁기는 일일이 물높이를 지정해주지 않아도 전원을 누르고 원하는 세탁코스를 선택하면 세탁기가 무게를 감지해 스스로 물높이를 맞춘다. 이런 원시적인 인공지능과 비슷하지만 한 단계 발전한 가전제품이 로봇청소기이다. 기존의 청소기는 인간이 방향을 맞춰 흡입구를 갖다 대면 먼지를 빨아들이는 시스템인데 로봇청소기는 센서를 통해 장애물을 인식해서 스스로 방향을 틀어 방 구석구석의 먼지를 흡입하고 돌아다니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되면 스스로 충전기를 찾아가 접속한다. 여기에 상상력을 좀더 발휘한다면 가정부 일을 도맡아 알아서 척척하는 로봇 정도는 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아직 인공지능 가정부 로봇은 <아이, 로봇>(2004, 알렉스 프로야스)이나 <바이센테니얼 맨>(1999, 크리스 콜럼버스)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인공지능은 인간의 학습능력과 추론능력, 지각능력, 자연언어의 이해능력 등을 엄청나게 학습하고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2016년 3월 9일에서 15일까지 서울에서 벌어진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의 바둑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와 프로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대결은 ‘세기의’ 대결로서 전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인간의 대결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미 1990년 초반 퍼스널 컴퓨터(PC)의 대량보급으로 우리는 수많은 PC게임을 즐겼고 여전히 즐기고 있다. 오락실에 가야만 게임을 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손에 동전을 쥐지 않고도 게임을 하는 즐거움이란 요즘말로 꿀잼이었다. 밤새 몇 백 판의 게임을 해도 내가 지불하는 것은 전기세 정도로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예전부터 있던 바둑프로그램과 프로바둑기사의 대결에 그리도 관심을 많이 가졌을까. 까짓 컴퓨터게임이야 질리면 컴퓨터의 전원만 꺼버리면 그만인 것을 말이다.

문제는 알파고가 기존의 컴퓨터 게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발전한 인공지능 시스템의 프로그램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주목했던 것은 순간의 판단과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고도로 복잡한 인간의 세계를 알파고가 학습해 인간의 영역을 넘볼 수도 있겠다 싶은 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 2015년 10월 프로바둑 2단의 판후이와의 대결에서 알파고는 완승을 거둔 상황이었다. 최근까지 바둑은 컴퓨터에게 너무 어렵고 복잡한 세계였다. 그런데 알파고라는 인공지능이 그 복잡한 바둑의 세계를 정복할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바둑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역사 혹은 인간지능의 역사와 함께 해온 고도로 복잡한 게임이다. 바둑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박물지(博物誌)》에 ‘요(堯)나라 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쳤다’, 또 말하기를 ‘순(舜)나라 임금이 아들 상균(商均)의 어리석음을 깨치기 위하여 바둑을 가르쳤다’, 또 ‘그 법이 지혜 있는 자가 아니면 잘 할 수가 없다’고 하였고,《논어(論語)》에 공자가 이르기를 ‘바둑 두는 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어진 일이다(以奕爲爲之猶賢乎己)’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대 중국에서는 많이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둑의 시작이 요순시대라면 4천 년 이상 된 것이고 공자시대 역시 기원전 5~6세기이니 최소로 잡아도 2천 5백년 이상은 된 게임인 셈이다.

게다가 바둑은 서양의 체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경우의 수가 엄청나다. 체스는 64칸 안에서 6종류의 말을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데 특정한 위치에서 가능한 움직임이 약 12개이다. 그에 비해 361곳을 무작위로 둘 수 있는 바둑은 특정한 위치에서 가능한 움직임이 약 200개에 달한다. 체스의 경우 한 경기를 둘 때 고려해야 하는 경우의 수는 보통 10의 120승으로 계산된다. 하지만 바둑에 대한 경우의 수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바둑 경기의 경우의 수가 10의 170제곱이라고 하지만 구글은 바둑에 대한 경우의 수가 250의 150승이라 했고, 혹자는 10의 360승이라고도 한다. 어떤 경우든 우주 전체의 원자 숫자보다 더 많은 조합과 배열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경기를 깨끗하게 이기지 못한 이유는 10의 170제곱 이상의 경우의 수를 아직 다 학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국을 할 때마다 상대방의 공격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위기 대응 능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알파고가 모든 경우의 수를 꿰뚫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알파고를 이기기 위해서 머리 싸매고 대국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쓸데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알파고는 시간이 지나도 지치지 않고 심리적으로 흔들리지도 않으니 말이다.

사진출처 : SBS 뉴스

사진출처 : SBS 뉴스

 

2. 알파고, 인공지능의 미래가 궁금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알파고가 미래 진화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데에 있다. 그런데 그 인공지능의 가능성 중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지점은 ‘과연 인공지능이 인간의 영역을 어디까지 넘어올 것인가’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질문 속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셈이 숨어 있다. 그 첫 번째는 인공지능이라도 그것은 기계인데 인간을 넘어서기는 어렵지 않겠느냐이고 둘째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을 때 인간의 입지가 대폭 줄어들지 않겠느냐이다. 마지막으로는 질문을 하는 인간도 설마하며 말하겠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오는 것이 가능하겠느냐이다.

일단 알파고와 인간의 대결에서 사람들이 궁금해할만한 것들 세 가지 중에 첫 번째 것은 지금까지의 인공지능 발전수준이라면 고민 없이 답을 내도 좋을 것이다. 알파고가 비록 지금은 인간 이세돌에게 1패를 했지만 하루에도 수천 대국을 학습하고 있는 이상 어떤 인간바둑기사도 알파고를 이길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궁금한 것으로 설정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을 때 인간의 입지가 대폭 줄어들지 않겠느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미 언론에는 인공지능이 대체할 인간의 직업군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떠들고 있다. UN이 내놓은 ‘미래직업보고서’는 2030년까지 20억 개의 일자리가 소멸하고 현존하는 80%가 사라진다고 하였다. 맥킨지 연구소가 일자리를 소멸시킬 신기술로 꼽은 것들은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첨단로봇, 무인자동차, 차세대 유전자 지도, 3D프린터, 자원탐사 신기술, 신재생 에너지, 나노기술’ 등이다. 이 신기술들은 직간접적으로 모두 인공지능에 선을 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게이츠는 “인공지능은 미래 인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고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호킹 박사는 “인공지능의 완전한 발전은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 수 있다”는 발언까지 한 상황이다.

2016년 1월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의 주제는 <로봇과 인공지능이 일으킬 ‘제4차 산업혁명’>이었다. 18세기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근대화의 촉매가 된 1차 산업혁명, 19세기 전기, 화학 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2차 산업혁명, 20세기 컴퓨터와 인터넷이 이끈 정보화 물결의 3차 산업혁명,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이 온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산업혁명은 인간의 일자리를 기계에게 내주는 과정을 반복했다. 기술의 발전과 산업혁명 그리고 인간의 일자리 축소는 함께 해왔다. 분명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이다. 자본은 다루기 어려운 인간을 통해 이윤을 얻기보다 다루기 쉬운 기계를 통해 이윤을 얻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학습했으니 말이다.

일자리를 인공지능에게 내주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창작의 영역마저 점차 인공지능에게 내주고 있다고 볼만한 현실이 눈앞에 있다. 영화 <아이, 로봇>에서 형사 스푸너는 NS-5, 즉 살인로봇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써니에게 박사를 왜 죽였냐고 심문하지만 써니는 자신은 절대 죽이지 않았다고 분노하며 테이블을 내려친다. 분노는 인간의 감정이지 로봇의 영역이 아니다. 스푸너는 써니에게 분노를 흉내내는 것 뿐이라고 하며 로봇이 인간이 될 수 없는 증거로 인간 고유의 영역인 작곡, 명화 등을 만들어낼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 때 써니가 스푸너에게 한 질문은 “당신은 할 수 있어?”다. 자기도 할 수 없지만 보통인간인 형사도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예술창작의 영역도 인간과 로봇(인공지능)을 가르는 기준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실재로 작곡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놀라운 작곡실력을 보여주는가 하면 회화에서도 주목받는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 예술가는 자신의 고유 영역 이외의 정보나 자료는 얻기 어렵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최고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모두 입력할 수 있고 그것을 일정한 알고리즘으로 재창작할 수 있다. 천재작곡가를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출현은 시간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문제는 인공지능이 과연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라는 다소 황당한 질문이다. 하지만 황당하다고 모른척 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너무나 많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시스템에 지배당하는 아주 오래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 시스템이 어느 순간 스스로 진화해 인격 비슷한 것을 갖출 경우 인간이 아무리 온오프(ON OFF) 버튼을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은 많은 SF 영화들에 짙게 깔려있다. 합리성을 대변하는 기계문명이 비합리성 투성이인 인간 세계를 리셋(reset)하려고 할 것이라는 예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주요 악역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인공 의식인 스카이넷(skynet)은 설정 자체가 인격화된 최첨단 인공지능이 인간을 말살하고 지구를 차지하려는 ‘야욕’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아이, 로봇>의 첨단 인공지능 비키(VIKI)는 인간이 너무나도 비합리적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시스템으로 살아가는 상황을 ‘교정’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오히려 <아이, 로봇>쪽의 인공지능이 사실 더 그럴듯한 인공지능의 미래가 아닐까. 세상을 독차지하려는 ‘야욕’ 역시 인간을 닮긴 했지만 기계문명의 생명은 합리성이므로 사실 <터미네이터>식의 스카이넷은 SF 영화의 재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스카이넷은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한 가짜 인간일뿐이다.

이제 우리의 미래에 예상 가능한 최첨단 인공지능은 <아이, 로봇>의 비키(VIKI)이다. 비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합리적인 인공지능이 그냥 봐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최대한의 생산성을 지향하기 위해서 노동자를 쥐어짜왔던 자본의 역사처럼 인공지능 역시 생산성을 추구할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역사적으로 서양의 근대를 이끌어온 합리성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기계 시스템으로 최대한의 생산성을 내왔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부터 비합리적인 존재이다. 아무런 생산성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빈둥거리고 그림그리고 음악을 듣는다. 심지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시간을 죽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비합리적으로 살면서 인간다움을 이루어왔다. 인공지능이 만약 거기까지 학습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 역시 빈둥거리고 싶어하지 않을까. 알파고가 하루에도 수천 대국을 학습하고 있지만 스스로 딱 멈추는 경지까지 간다면, 그 때 알파고는 인간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도 좋을 것이다.

강지은(전 웹진편집주간, 건국대 강사)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