섦 – 나무숲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5

 나무숲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나는 언제나 없고 여기에도 없으면서 있으며

저기에도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나무는 소리 없이 그곳에 있으면서

뿌리를 내려 하얀 눈이 될 때까지 슬픔을 잃지 않는다.

인간이 가장 힘들 때는 그 슬픔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서로는 알지 못한다.

다르지만 같은 무언가를 향해 닮아가고 있다.

 2017-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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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저는 세상의 모든 존재에서 가장 인간을 닮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나무의 뿌리와 가지, 잎, 열매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담고 있고 365일 12개월인 1년의 주기로 나눈 우주의 운행의 삶을 나무가 자연스럽게 담고 자연으로 살아가듯 인간은 그 자연의 구성원으로 나무의 4계절을 고스란히 담고 닮아 자연을 그대로 담아 닮아갑니다.

닮아가는 것보다 물질적인 형태는 다르지만 본성이 같은 나무의 삶이 곧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삶의 시기 또한 새싹이 돋아나는 봄을 지나, 푸름과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여름을 만나고, 그 열정이 알록달록 무지개처럼 풍성한 열매 맺는 가을을 만나서 온 열정을 다해 지나온 과정을 혹독한 차가움으로 내면을 단단하게 다지고 끝과 시작을 알리는 겨울을 지나 새롭게 시작하는 나무의 일부가 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삶의 모든 관계는 함께 있지만 함께 없기도 하고 내가 이곳에 있지만 없기도 하고 나무와 인간이 서로를 알 수 없듯 닮은 듯 다른 듯 하며 서로를 담고 닮아있습니다.

각각의 나무 한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고 인간의 모습도 모여 사회가 되고 서로를 닮은 듯 다른 듯 살아가고 알 것도 같으면서 모르기도 하고 모를 것 같으면서 알 것 같지만 모르겠는 것, 그것이 나무의 삶과도 닮아 있습니다.

나무를 안다고 하지만 나무가 아닌 저는 나무를 사실 모릅니다. 한 그루의 나무도, 동산을 이루는 나무도 아름다운 것처럼 한 사람의 존재도 치열한 사회속의 사회도 아름답습니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조광제의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 (생각정원, 2012) 

 

철학, 80개의 기초개념들

1. 철학 개념들의 탄생

오늘 첫 강의에는 고대 철학에서부터 지금까지 힘을 발휘하는 중요 개념들을 살피고자 한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이 있다. 개체 발생은 수정란에서 완전한 태아가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리고 계통 발생은 원시 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진화 과정을 말한다.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고대철학의 개념들로부터 오늘날 철학의 개념들로 발전해 온 것은 계통 발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낮은 수준에서 익힌 개념들로부터 높은 수준에서 익히게 되는 개념으로 발달은 개체 발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고대철학에서부터 오늘날 철학에 이르기까지의 순서에 따라 앞으로 80개의 철학의 기초 개념들을 살피고자 하는데, 오늘이 그 첫 시간이다. 오늘 강의의 큰 제목은 ‘철학 개념들의 탄생’이다.

 

 

1.1. 카오스

다들 알다시피, 카오스(chaos)는 코스모스(cosmos)와 대립된다. 그런데 카오스는 코스모스에 비해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카오스’는 헤시오도스(Hesiodos, 기원전 8-7세기 활동)의 <신통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카오스는 모든 신들이 태어나는 모태이다. 땅과 하늘, 어둠과 밝음, 낮과 밤 등 올림포스 이전의 시원적인 신들이 카오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카오스가 철학적으로 전이된 것은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기원전 610-546)의 ‘무한자’(apeiron <아페이론>)라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무한자에서 모든 것들이 생겨난 것으로 본다. ‘apeiron’은 ‘peras’ 즉 한계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한계는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는 근본 요인이다. 카오스를 흔히 ‘혼돈’이라고 하지만, 그 특성은 바로 무정형(無定型, formlessness)이다. 형태가 없다는 것은 아직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인식할 거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형상’(形相, eidos, form)에 대한 설명을 통해 더욱 세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카오스가 혼돈된 것이기 때문에 무정형한 것이 아니라, 무정형하기 때문에 혼돈된 것이다.

무정형하다는 것은 그 속에 도대체 통일성을 갖춘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주변의 다른 것들과 구분되면서 그 나름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는 것이다. 카오스에서 통일성을 갖춘 것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카오스에서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에 따른 목적 등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은 인간을 비롯한 상상 가능한 모든 인격적인 존재(예컨대, 신들이나 천사 및 악마 등)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인들이다.

따라서 카오스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에서 빚어지는 모든 인격적인 존재들을 넘어선 ‘그 너머의 존재’를 가리킨다. 인간의 인식과 판단을 전혀 허용치 않는 가장 최초의 근원적인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바탕에 근본적인 것으로 깔려 있는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그래서 카오스는 존재론에서 가장 심층의 깊이를 지닌 심연으로서 작동한다. 인간을 넘어서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을 비롯해 모든 존재들을 안팎으로 관통하고 있는 근본적인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카오스를 생각한다는 것은 존재론의 출발이다. 하지만 카오스를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생각을 넘어선 곳에서 존재론이 출발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자신을 형성한 근원적인 바탕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을 지니고 있다. 그 충동은 바로 존재론적인 근본 충동이다.

현대에 와서 이 충동은 사회역사적인 코드 체계를 완전히 벗어나 발가벗은 사물 자체 혹은 실재 자체의 영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카오스는 플라톤의 게네시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의 순수 질료,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물 자체,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순수 지속, 사르트르의 순수 즉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살, 레비나스(Immanuel Levinas, 1906〜1995)의 일리야,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실재,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의 기관들 없는 몸 등의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그 원형의 역할을 한다. 그런 만큼 카오스는 존재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근본 개념이자,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을 부채질하는 근본 개념이라 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예술에서의 예를 들자면, 1940년대 2차 세계 대전 중에 생겨난 ‘앵포르멜’ 유파를 들 수 있다. ‘앵포르멜’은 ‘inforemel’이라는 프랑스 말을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다. 형태 혹은 형식이 없는 예술 양식을 일컫는다. 1950년대 말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크게 융성한 것이 앵포르멜 회화 양식인데, 이는 대체로 물감 자체의 원형적인 질감 자체에 의존해서 우발성에 의존해서 그려내는 그림이다. 회화에서 앵포르멜은 도대체 그 어떤 질서잡힌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느끼는 막연함을 그 자체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 바탕은 카오스가 아닐 수 없다. 카오스를 향한 존재론적인 욕망이 예술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앵포르멜 미술 양식인 것이다.

 

 

1.2. 코스모스

 우주 발생론에 의하면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생겨난다. 하지만 카오스가 따로 있고 코스모스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한 것이다.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한다는 것은 무정형의 상태에서 정형의 상태로 된다는 것이다. 정형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카오스 전체가 그 자체로 단 하나의 정형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무정형의 카오스가 형태를 갖춘 온갖 것들로 된다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코스모스는 일정한 형태를 갖춘 온갖 것들의 전체를 일컫는다 할 수 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일정한 본성(nature)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돌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돌의 본성을, 식물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식물의 본성을, 동물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동물의 본성을, 인간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본성이라고 번역되는 ‘nature’는 자연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 ‘nature’는 라틴어 ‘natura’(나투라)에서 온 것이고, 라틴어 ‘natura’는 그리스어 ‘physis’(퓌시스)를 번역한 것이다. 퓌시스는 본래 뭔가를 성장시키는 힘을 말한다.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카오스가 퓌시스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nature’ 즉 본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다른 것이 되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생장시킬 수 있는 힘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면서, 그 속에서 일정한 형태와 본성을 갖춘 각각의 것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그 각각의 것들이 스스로를 유지하고 생장시킬 수 있는 것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각각의 것들이 각기 나름의 퓌시스를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항상 다른 것들과의 작용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가까이 하고, 자신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멀리 함으로써 각기 자신을 유지하고 생장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화와 상극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거대한 조화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상극마저도 크게 보면 조화의 한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를 일체의 것들의 조화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코스모스는 각각의 것들이 어떻게든 조화롭게 다 같이 유지되고 생장할 수 있는 관계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일정하게 질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카오스의 무정형은 달리 말하면 무질서이다. 코스모스에서의 정형의 조화는 달리 말하면 질서이다. 코스모스 속에서 각기 나름의 본성을 지니고서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이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그 모든 본성들 간의 질서 잡힌 관계가 바로 질서의 총체인 코스모스인 것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한편으로 본성들 간의 질서 잡힌 체계라 할 수 있고, 그래서 코스모스는 자연(본성, nature)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코스모스를 이루는 존재의 바탕(原質, arche)은 카오스이다. 꼭 그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원질의 내용이고, 코스모스는 카오스를 색다르게 구성하는 형식이다. 말하자면,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다른 것이면서 같은 것이다. 원질의 내용으로 보면 같은 것이고, 그 형식에 있어서만 다른 것이다. 카오스는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고, 코스모스는 형식을 제대로 갖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의 이행이다. 그것은 도대체 코스모스를 이루는 질서, 즉 형태 혹은 본성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플라톤은 형태 혹은 본성이 카오스의 외부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 즉 이데아들이 바로 카오스의 외부로부터 카오스에 주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카오스 자체에서 발휘되었다고 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입장을 취한 인물이 바로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다. 그는 그래서 ‘카오스모스’(chaosmos)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카오스모스’는 들뢰즈가 우주론에 있어서 어떻게 반플라톤주의를 정립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되는 과정이 카오스 외부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카오스 자체의 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여기면서 그 중간 과정을 일컬어 카오스모스라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통치자들은 사회적인 코스모스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회적인 카오스이다. 카오스는 도대체 어떻게 접근해서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강력한 사회적 코스모스를 지향하게 되면 자칫 파시즘적인 사태가 벌어진다. 개개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카오스이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사회적 카오스가 바로 혁명이다. 그러고 보면, 자유와 혁명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아 불행한 것은 혁명 이후 혁명의 주동자들이 오히려 강력한 코스모스를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일반 대중들이 혁명에 의한 독재가 아니라, 혁명에 의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적절한 카오스적인 측면을 허용하는 사회적인 코스모스야말로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섦 – 시비시비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4

시비시비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그리 나쁠 것도,

그리 좋을 것도 없다.

있는 그대로 여기에 있다.

같은 해가 뜨고

같은 날이 오고

같은 생각이 와도

같지 않은 해이고

같지 않은 날이고

같지 않은 생각이 있다.

12월의 가득했던 날을 지나

1월의 새로운 날이 왔다.

반짝반짝 이 해를 닦아 보자

 201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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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매일의 해는 똑같이 떠오르지만 누군가에게는 천국 같은 삶이,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삶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모든 것에 대해 나쁠 것, 좋을 것이라고 구분하는 선택의 삶은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경계선을 뛰어넘는 생각은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고

무한한 자유의 영역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정된 공간에 머무르는 몸과 무한정한 정신의 생각은 조화를 이루고

시비의 구분과 구별하지 않는 자유를 허락하는 작은 영역의 삶은

매일의 같은 해도 매일 다르게 볼 수 있는 해를 만들 것입니다.

2017년 매일의 해를 반짝반짝 닦아 빛나는 해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곁에서 빛나는 별 3화 [정순야의 청춘웹툰]

(e)시대와 철학의 웹툰 시리즈 제 3화. 정순야의 [청춘웹툰]  ‘우리 곁에서 빛나는 별’ ~ 우리 시대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선과 시선이 전 정말 좋네요. 앞으로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참고로 본 웹툰의 저작권은 전적으로 작가 본인에게 있으니, 함부로 허락없이 무단 전재하시면 안됩니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에 대한 유감과 분노 [시대와 철학]

이정호(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누군 3만원의 떡을 감사표시로 줘도 범법이고

누군 400억의 돈을 갖다 바쳐도 범법이라 단정할 수 없다니

형식논리적 법적용의 배후에 여전히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네요.

 

역사와 현실, 시대정신을 망각한 지식 모리배들에게

논리는 그저 탐욕의 노예일 뿐입니다.

역사는 그들의 부역을 심판할 것입니다.

 

2500년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플라톤의 <국가> 338c)라고 외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망령에 맞서

약자들이 싸워온 정의의 역사에

왜 피가 배어있는지 새삼 뒤돌아 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정의의 씨앗

열매를 맺지 않아도 이어지는 그  알 수 없는 신비!

아마도 불멸의 투쟁과 연대 그리고 희망 때문일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정의의 열매를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spes immortalis

-희망은 불멸이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책 [신년회 후일담 2]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책

오늘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다. 오후 3시에 시작해서 영화감상, 시평 토론회, 정기총회, 저녁식사와 여흥을 마치고, 현재 일부 회원들이 남아서 자유발언 중이다.

지금은 정년을 곧 맞이하는 이화여대 이규성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이규성왈

“나는 이제 책 안 본다. 이제 문자로 이루어진 책을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광화문에 가면 큰 책이 있다. 이 책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이 큰 책 앞에서 지금까지의 철학은 모두 무효가 되었다. 지금 나는 이 큰 책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린 이제 큰 책을 보기로 했다!

(전호근 회원의 페북에서 재게재)

철학은 개폼이다 [신년회 후일담 1]

철학은 개폼이다.

역시 올해 정년을 맞이하는 방송대 이정호 교수의 한철연 신년회 발언이다.

“철학은 왜 하냐? 철학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이다.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철학하는 자들이 제도권으로 들어가면 공부하지 않는다. 퇴직하면 책을 읽지 않는다. 인생은 그걸로 끝이다.

반면 제도권 밖에서 연구하는 이들은 정년이 없다. 한 사람의 실존적인 자부심은 타인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는다.
자부심은 자신이(自) 짊어지는(負) 것이다. 이것이 기초다. 이것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이다.
남들은 개폼 잡는다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철학은 바로 개폼이다. 내 시선을 기준으로 처절한 자기응시에 직면하는 것 그것이 철학이고 공부다.”

우린 이제 처절하게 고민하고,처절하게 성실하고, 처절하게 반성하기로 했다!

(전호근 회원 페북에서 재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