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4월 제11차 정기세미나 “이규성의 함석헌 연구” 2024.04.12. (발표:이병창)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이규성 철학(사상) 연구회 11차 연구모임 영상

2024년 4월 연구모임은 이병창 선생님의 발표로 진행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 시절 이규성 선생과 함께 이대 뒤편 봉선사 인근에서 들었던 함석헌 선생의 강의를 지금에 다시 이규성 선생 철학 연구모임 자리에서 되새기게 되니 사상의 흐름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이병창)

-주제: 이규성의 함석헌 연구
-발표자: 이병창(한철연 회원)
-일시: 2024년 4월 12일 금요일 오후 4시
-장소: 서울시 서대문구 서소문로 45 SK 리쳄블 1305호
-줌(zoom) 572 077 4954 (비번1111)

♦발표문 탑재 ☞ 이규성 선생의 함석헌 사상의 연구가 갖는 의미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KJASJfrrTqg

‘혁명의 충동을 연습하기 – 왕의 망상(?)과 나의 슬럼프’ : 김성민과 김성우가 쓴 책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에 대한 서평 [최종덕의 책과 리뷰]

‘혁명의 충동을 연습하기! – 왕의 망상(?)과 나의 슬럼프’ :

김성민과 김성우가 쓴 책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에 대한 서평

 

서평자 :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를 새기고 등장했을 때부터 ‘아, 이 사람은 라캉 정신분석학의 대상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그의 주변 사람들에 주술과 미신에 취한 사람들이 많다는 데 있다. 정치인을 포함한 다수의 권력자가 점집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신과 권력을 혼재시킨 개인적 망상들이 그들 사이에서 묵시적 합의로 변질되면서 거대한 집단적 주술 상징계로 정착된 것이 한국 권력사회의 특징이다. 이제는 그들 각각이 믿고 있는 미신을 실행할 수 있는 실질 권력을 누가 더 많이 가지느냐의 암투일 뿐이다. 왕의 망상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주술적 집단 상징계로부터 보호받은 셈이다. 그리고 왕의 망상이 강할수록 뭇사람들의 상상은 갈가리 찢기어진다.

‘망상’과 ‘상상’은 개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정신·심리적 표상이지만 현실에서는 처절한 차별을 낳는다. 왕의 망상이 지배하는 집단 상징계를 벗어나서 개인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을까? 전통이나 종교 등의 집단상징을 탈출하여 개인의 상상력을 펼치고 싶은 것은 젊은이의 당연한 권리이며 당당한 욕망이다. 불행히도 이런 욕망은 거대 조직의 칼날에 베이고 찔리면서 무참히 부서지고 만다. 그렇다면 개인의 상상계가 집단의 상징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래서 많은 젊은이는 화가 나고 저항도 하지만 풀이 죽고 우울해지면서 슬럼프에 빠진다.

그런 슬럼프에 기죽지 않는 아주 신나는 대안이 최근 출간된 책 한 권에서 묘사되고 있다. 철학자 김성민과 김성우가 같이 쓴 책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 라는 제목의 책이다. 슬럼프를 단죄하고 거부할 수 있다는 각종 묘수를 적은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그런 묘수 자체가 주변 권력이 만들어 준 허망한 처세술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이 책의 매력은 말로만 달콤한 처세술이 아닌 삶의 프레임 자체를 섭동시키는 정신적 북돋음을 준다는 데 있다.

책의 저자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해석하는 문화비평가이자 탁월한 현대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지젝의 철학을 우리 한국인 정서에 맞춰 아주 흥미롭게 풀이한다.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하여 시민강좌를 했던 지젝이 구축한 해체와 주체의 연결망을 엄숙한 사유 대신에 삐딱한 시선으로 현실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라고 이 책은 말한다. 저자는 앞서 말한 망상과 상상의 현실을 보여주면서 그 두 현실이 서로 얽혀 있음을 말하는데, 하나는 권력자의 주술 망상이 일상인의 생활 상상을 파괴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상상계가 거대 사회의 상징계 안에 갇혀 회돌이 되는 현실다운 현실을 말한다. 그 의미를 아주 간단히 묘사해 보자.

일상을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거나 아니면 나를 평가하는 주변 환경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슬럼프란 주위 평가가 나를 압도하면서 짓눌려진 나의 신경증적 생활의 증상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우리는 슬럼프로부터 탈출하기를 추구하지만, 불행히도 그 방법을 모르고 있다. 모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슬럼프로 돌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역설적이게도 나에 대한 죄의식까지 추가로 붙여 다니고 있다.

당신이 슬럼프에 빠진 이유는 당신 개인에게 있지 않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개인이 속한 집단의 현실은 구성원에게 인정욕구를 비롯한 갖가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그렇다면 개인의 슬럼프를 제거하기 위하여 환상을 떨구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겠으나 그런 생각조차도 환상 프로그램의 일부라는 것을 이 책은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집단의 현실이라는 것은 서평자의 표현일 뿐이고, 이 책의 저자는 집단이라는 말 대신에 지젝의 표현 그대로 “큰 타자”big others라는 용어를 쓴다. 욕망을 갖는 개인들을 “작은 타자”라고 한다면 개인들의 전체 사회를 “큰 타자”라고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큰 타자라는 전체 사회의 환상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그런 환상을 제거할 수 없는 지젝의 존재론적 고민을 뼈아프게 통감한다. 예를 들어 충성심이나 민족주의 같은 관념의 이데올로기로부터 강남이나 학벌 혹은 소비와 부동산 같은 물질의 계급주의가 그런 큰 타자에 부수된 환상이고, 그 환상이 현실이라고 한다.

큰 타자 안에서는 욕망의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현실을 벗어나기 위하여 현실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을 확 전도시켜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마찬가지로 슬럼프를 벗어나려면 슬럼프에서 무작정 튀어나오려고 갖은 애를 쓰기보다 슬럼프를 응대하는 시차의 시선을parallax 뒤집어엎어서 세상 보는 각도를 삐딱하게 보라고look awry 말한다. 그런 삐딱함의 시선이란 지젝의 의미를 좆아서 욕망의 굴레로부터 “충동의 혁명”을 가져오는 실질적인 계기라고 한다. 집단 환상의 마력이 강력하므로 시차를 갖고 삐딱하게 보기도 쉽지 않을 진데, 혁명의 충동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 작은 혁명들을 연습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개인 슬럼프의 통증을 겁내 하지 않게 되며 전체 권력의 마취와 도취에서 깨어날 수 있다고 이 책은 강력하게 말한다.

책의 저자는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의 관계를 아주 진지하게 다루면서 우리들 현존하는 삶의 통증을 치유하는 구체적 존재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그 목록 안에는 꿈과 욕망, 슬럼프와 히스테리, 강박증과 도착증, 충동과 혁명 등의 심적 현상과 증상 등이 적혀있다. 이 책은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분석에서 그치지 않고 지젝의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서 약을 사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아주 친절한 철학적 레시피이다. 레시피의 첫 페이지는 ‘큰 타자’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버리는 연습에서부터 시작된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더더욱 기분 좋은 일은 이 책에 전개된 의미 해석과 정신 분석이 여러 편 감성의 시를 읽는 느낌으로 써졌다는 점이다. 분노와 좌절이 증폭된 요즘 시대에 소소하지만, 전환적인 기운을 나에게 심어준 책이다. <끝>

현 상황들 : 인민의 최종 결정권 분출 [천 하룻밤 이야기]

현 상황들: 인민의 최종 결정권 분출

– 2024년, 6월 21일 하지(夏至), 의성 마늘이 장터에 나오고,

-하지 지나 사나흘 전에는 장마가 시작하더라‥…

 

류종렬(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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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사건들에 대한 상상을 정치경제학에서는 정세를 다룬다고 얘기한다. 누군가 현 정세가 어떻게 전개될 것이냐고 문제 거리를 내놓는다면, 현 정세는 과거와 연관해서 어떤 관점들로 토론 할 수 있겠지만, 다음에 정세가 어떤 국면으로 전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미래는 비결정이다. ‘다음에’ 또는 ‘나중에’는 예로부터 점쟁이의 전유물이었고, 좀 더 잘 맞춘다고 하는 선지자들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나로서는 그들의 이야기는 사후 약방문(지나온 이야기), 결과를 원인에 돌려놓은 사고로 여긴다(남사고 이야기). 말하자면 결과를 원인으로 전도시켜, 과거를 미래의 이야기인 것처럼 맞추어 해석하고 설교하는 그들을 존경하거나, 또는 현자로 떠받드는 것이라 본다. 점쟁이든 선지자이든, 그 당시 그다음 이야기와 연결을 보았을 때, 맞는 이야기보다 틀린 이야기가 더 많았지만, 맞는 이야기만 전승되어 그것만 모아도, 그들의 긴 생애에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하늘만큼이나 많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유튜브식 순서대로 남겼다면, 얼마나 앞과 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했을지, 지자들은 잘 안다.

‘나중에’란, 일상에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해보면, 한 대 처맞은 이가 때린 녀석에게 ‘다음에’ 보자고 한다. 서로 달리 가면서 힘센 녀석은 ‘나중에 보자는 놈치고, 무서운 놈 못 봤다’고 한다. 이 경우에 때린 놈이 발 뻗고 잔다. 선지자가 말한 ‘다음에’가 언제인지 어디서인지, 그리고 그다음의 행동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가 없다. 세상을 뜨고 나서 다시 돌아온 어떠한 이도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독약), 예수(십자가), 로베스삐에르(단두대) 등은 정세에 맞지 않아 죽임을 당했다고들 한다. 나로서는 이들이 스토아적으로 죽음, 즉 스스로 의지적으로 세상을 떴다고 생각한다.

미래에, 다음에, ‘나중에’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두고 스토아학파는 기만(사기)이라고 했고, 에피쿠로스학파는 미신이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근세인은 인간이 신의 자식이 아닌 자연의 자식이라 하고, ‘다음에’ ‘나중에’를 공상 또는 망상으로 여겼고, 벩송은 그런 논리와 용어 자체가 ‘착각’이라 했으며, 들뢰즈는 넌센스(무의미)와 같은 파라독사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은 상징으로서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는 이들이 시인이라고 한다. 다른 이로써 말라르메는 주사위 놀이로 보았다.

그 이야기들 속에는 고통과 비참에서 젖어 있는 백성들에게, 인간의 삶의 가느다란 희망을 불어넣고자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삶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아마도 프랑마송이든, 가톨릭 공동체든, 프랑스 공산주의자든 각각의 몫이었다. 그래도 이 시인들은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세상을 상상을 넘어서 공상하고, 가끔은 아무도 모를 망상에 젖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 ‘나중에’ 또는 ‘미래’, ‘장차’를 강조하는 이들은 신앙자들이다. 신앙자는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다, 판도라 상자 속에서 또는 천국을 꿈꾸며 상자 바깥을 상상하고 있는 자들일 것이다. 이들은 바깥과 같은, 죽은 후의 미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넘어선 신앙을 누가 심었는가? 점쟁이, 예언자, 선지자? 그들이 아닐 것이고, 벩송이 말하듯 용어를 언어로 만들고 그 언어가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천국이란 용어가 있으면 천국이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죽음 후에, 즉 상식으로 설명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기(기만), 미신이라 했을 때, 이런 것이 사기도 아니고 미신도 아니라고 하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잘 생각해보라고 하는 이들이 현자들이다. 싯달다가 잘 설법했다: 무소의 뿔을 설법하면서 탐만치에 벗어나라고. 그런데 서구 역사는 그렇지 않다. 이런 현자들을 마남(魔男) 사냥하듯이 없애버린 자들이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참주의 권력 속에서도 쭉 있었다. 걸리적거리고 거추장스럽다고 말이다. 그건 배제가 아니라 제거였다. 이들은 일찍이 패거리(카르텔)가 무엇을 행해야, 패거리의 사적 이익이 전유되는 지를 안다. 설화와 신화에서 영웅의 전쟁 설화를 보라. 영웅, 참주, 황제, 권력자, 등의 지시체로서 하나인데, 나라마다 기표는 무수히 많을 수 있고, 거기에 기의야 얼마나 많은 파라독사를 붙일 수 있겠는가. 무기/도구의 권력이 성립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한 권력은 하루아침에 성립한 것이 아니다. 영웅설화 이래로, 그리고 로마로 향하여 또는 하나로 향하여(uni-vers)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그 보편(le unversel)이 지배한다고 여기고, 권력에 붙어서 권세를 누리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예수에다가 크리스토스를 덧붙인 것이다. 나중에, 죽은 후에 이야기한다. 염라대왕의 이야기도 크리스토스처럼 이야기이다. 미래는 아무도, 어느 귀신도 모른다. 권력과 권세의 결탁자들 또는 패거리는 서양 중세시기에, 영웅설화에서 상대들 죽여 없애듯이, 비판과 새로운 생각을 하는 자들을 마남 사냥으로 세상에서 사라지게 했다. 굴복하는 자들은 투명인간처럼 배제된 삶을 살게 하였으니, 노예와 농노, 천민과 백정이 되어야 했다. 권력과 권세의 패거리 결탁이 지식인들의 과학에 대해 대항하기에는 어려웠던 시기가 왔다. 르네상스였다. 권력과 권세는 반역과 반동으로 변신의 과정을 걷는데, 지식을 가진 지지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저항하는 이들은 마남 사냥으로 죽이고, 그래도 타협하는 이는 살려둔다. 브루노와 갈릴레이의 삶이 다르다.

권력에서는 무기(/도구)가, 백성에게 중요한 도구(/무기)이다. 이 철기시대의 초기에 무기보다 도구로 백성들에게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생산력이 발달하기도 하여 세상을 변하게 했다. 그리고 기술의 발달로 도구들의 연결 방식은 복잡한 도구를 만들었다. 기계들의 생산은, 노예 생산의 이익보다 엄청난 잉여를 생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성 또는 민중의 머릿수(인구)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면서도, 이들을 위로하는 척하면서 대가리 수를 늘리고, 잉여 생산을 가로채는 동안에는 문자로나마 ‘백성이 하늘’이라고 했다. 게다가 백성 없이 왕(권력)도 종교(권세)도 없다는 것도 패거리들은 알았다. 그 인민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는데도, 생산도구의 변형과 생산력의 발달에서 백성 또는 민중을 그 기계에 묶어두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기계의 노예, 종속이라고 이런 노동자는 자연의 노예와는 엄청 다르다. 맑스가 일곱 살짜리를 탄광에서 석탄을 쪼개는 망치 작업을 시키는데, 얼마나 분노했던가.

도구/무기의 발달과 생산 관계는 기계와 조립의 기술 더욱 세밀하게 엮어서 다루는 데 있어도 지식인이 필요하다. 과학적이란 이름으로 기술과 기계체계가 원리와 법칙에 종속된다고 여겼다. 기계의 조립처럼, 사회제도 체제도 마찬가지로, 원리와 법칙에 종속하는 체계와 제도를 필요로 했다. 그 제도에서 두 패거리에서 셋째 패거리가 가담하여 국가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에 권세를 누리고자 하는 종교인들은 국가주의와 패거리를 만들면서, 교육을 담당하여 과학과 기술을 담당하는 지자들을 포획하였다. – 지자는 포로가 아니었는데, 세월에서 자본의 힘이 강해질수록, 그 속에서 포로가 되었다. – 지자들은 원리와 원칙에 맞추어서 과학을 전개하고, 더욱 복잡한 기계들로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전개한다. 무너져가는 권력과 권세는 지자의 권위와 결탁하여 세 패거리들이 만드는 것이 제국주의였다.

이때까지 말로는 백성이 주인이고 민중이 기본 심급이라고 하지만, 백성이든 민중의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며, 명령 복종의 대상이다. 주인이고 기본이고는 하는 말투는 세 패거리에게는 빈 말투일 뿐이었다. 맑스는 그렇지 않고 인민이 주인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1848년 공산당선언을 하면서 시대가 달라졌다고 선언했다. 이에 패거리의 느슨한 결탁이 견고한 결탁으로 바뀌는 것이 제국주의로 변형이었다. 이 제국주의는 국가 안에서 착취가 아니라 다른 식민지에서 약탈을 통하여 권력, 권세, 권위를, 통일된 방식으로, 강화하는 것이었다. 제국주의에서 세 패거리의 담합과정에서 각각의 다른 요소의 결합이 쉽지 않아서, 통일성을 만들어보겠다고, 두 번의 큰 세계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고서 세 패거리는 지금까지 원리나 법칙을 잠정적으로 신과 같은 절대적 통일성의 논리(용어)로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앎과 동시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상징이자 통일체를 세우기로 했다. 맑스의 용어로 과학적인 대상을, 자본, 즉 돈(달러, 달러는 기표의 일종이다)을 상위에 올려놓았다. 신도 황제도 진리도 아닌, 돈이 세계의 지배 원리가 되었다(브레튼 우즈). 전쟁이 끝나고 권력, 권세, 권위는 서로를 위하여 동의하고 협력하려 했다.

그런데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철기시대가 전성기를 넘어가면서, 규소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동시에 생물학에서 새로운 생명체 단위(DNA)라는 용어를 끌어들였다. 그럼에도 패거리들은 규소든 디엔에이든 지식체계에 복속된다고 주장하고, 21세기에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가고 있는 방식이 AI와 빅데이터 등이다. 그런데 모순을 타파하자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맑스-레닌의 생각과 달리, 통일성도 추상성(자본)도 없다는 저항자, 용출자가 등장했다. 현재로서는 저항자들은 포획되거나 배제되어 핍박받거나, 예외적 존재로서 투명인간처럼 취급받는다. 이 저항자들은 인민‘속에서’ 흐른다. 인민을 위하여, 의한, 의란 제국주의 시대의 결과물이다. 세 패거리와 달리 ‘자연권’에서부터 나온 인민들의 저항, 그리고 그 봉기는 20세기 후반에서부터 진행 중이다. 금본위 달러가 아니라, 무기가 뒷배를 봐주는 기표의 달러가 지배하고 있다. 이에 인민은 리좀처럼 흐르면서 여전히 생성과 연대로서 확장하며, 간헐적으로 저항과 봉기를 분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현 정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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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때문만은 아니지만, 자연과 지구도 변하고 있고, “그 속에서” 인간들의 삶의 과정도 변하는 중이다. 절대 권력을 누리던 영웅의 시대는 정복을 통한 약탈의 부를 획득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권력이, 시대적 과정을 정리하는 종교의 권세와 결탁하여, 가끔은 약탈과 민중의 수탈을 병행했다. 이들은 하늘과 땅 사이의 연관이 불합리를 수학(기하학)과 논리(산술학)의 결합을 통해 하나의 통일성이 있다는 것으로 만들었다. 현대에 와서 보면 상징과 표시를 추상적으로 체계를 세운 논리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구시대의 민중은 하늘의 360도를 재고 있을 수도 없고, 식량과 가축의 수를 산술적으로만 세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이 결과를 측정하는 권력은 그렇게 성립했을 것이다. 수학과 언어는 일찍이 결탁하였고 샤만과 같은 참주(황제)의 시대를 이어갔을 것이다

수학과 논리의 적용이 하늘과 땅에 거의 맞아 들어가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거의 없었겠지만, 혹시라도 제기자가 있으면 제거하거나 상부에 포획하여 편입시키는 것은 간단했을 것이다. 강압과 폭력으로 편입하지 못하는 사건이 브루노를 산채로 태워 죽이는 짓이었다. 우주와 물질계는 권력의 강압에 의해 또는 종교의 권세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고, 게다가 봄 다음 여름이듯이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이법은 따로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천문학과 물리학이 권력과 권세에 벗어났다. 아직도 두 패거리는 지식분자인 지자들을 포획하여 편입시키려 노력했고, 자연체계와 물질체계가 원리에 복속되기나 하는 듯이, 이런 지자들은 패거리에 끌어들이려 했다. 뉴턴과 다윈은 아직도 자신들이 발견한 자연의 이법이 권세와 권위보다 상위에 있는 신과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고, 아이슈타인까지도 이 패거리와 같이 통일성이 먼저 있다고 생각하여, 겉보기와 달리 패거리와 따로 있는 것 같지만 복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삶과 과정들을 보면 그렇다.

권력, 권세, 권위가 식민지 정책과 제국주의에 포획된 것만큼이나, 이 패거리들은 포섭되지 않는 부류들을, 지자들과 상층 철학자들을 통해서 단죄하고자 했다. 절대공간을 넘어서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은하계를 넘어서는 천문학이, 열역학과 원자 내부 물리학이, 화학에서 원자들의 결합방식이, 생물학의 발생 기원이, 심리학에서 본능과 습관을 다루는 현자들이 세 패거리에 저항하고 혁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를 누르는 방식은 세 패거리의 방식으로 되지 않아서, 제국주의(l’empirisme) 구성보다 상위의 ‘제국(l’empire)’을 구축하고, 그 상징과 표시로서 달러는 금과도 상관없는 상징기호로(구조주의 표현으로 기표로) 대체했다. 그 대체물이 꼭 자본이어야 하는지를 문제 삼는 것이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이다. 통일성과 그 위의 상징계가, 실재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이야기가 제기되고 있었다.

그래도 자본 제국이 최상위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달러라기보다, 무기이다. 무기는 무기/도구시대, 즉 철기시대의 마지막이다. 1953년 시작한 규소시대가, 철기 3천 년에 비해, 아직 백 년도 안 되었지만, 그럼에도 철기시대의 에너지가 재래식 광물이거나, 발달된 원자와 수소인 것에 비교하여, 이 규소의 시대는 태양이 에너지라는 것이다. 겨우 70년 밖에 안 되었지만,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와 전혀 다른 새로운 국면을 제시하거나, 또는 분출하고 있다. 미래는 알 수 없다. 70여 년의 속도로 보아, 그리고 유인원, 현생인, 구석기, 신석기 등등으로 전개되었던 속도에 비하면, 규소의 시대는 어마어마한 속도라서, 미래가 더욱 비결정이다. 제국이 패거리들이 더이상 예언, 점쟁이가 아니라, 사기꾼을 넘어서 약장수 야바위꾼이 될 판이다. 이 판을 유지해 주는 것이 투기로서 주식시장이다.

미래는 규정할 수 없다. 그런데 윤석열 집단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을 이어가는 방식을 답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 방식과 과정에서 보아, 그에 앞선 인간들과 같은 궤도를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미래를 알 수 없으면서도, 그들과 같이 가고 있으면서, 앞에 나열한 그들처럼 미래를 포장하여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이 세상을 기만했듯이 그도 이 나라를 기만하고 있지 않은가? 뭐, 석유가 나온다고?

촛불시위에 놀라 등장한 것에 반응으로, 5년 동안 꿍꿍이 수작으로, 정치권에서는 내각제 개헌이란 소리가 들렸다. 인민의 동의 없이 또는 기본심급의 움직임과 흐름의 감을 잡을 수 없었던 우리나라의 패거리(카르텔)들이 윤석열을 앞세워 예속 권력을 구축했다. 이 패거리들의 과거와 연결에는 1894년 동학을 무너뜨리고, 1919년 백성들이 시위에 놀라,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쪽이었다. 이와 다른 한쪽은 만주로 갔다. 이 두 방향이, 우리 입말로 소통할 수 있는 79년 동안에 양 진영처럼 보인다. 만주와 일본. 중국은 1919년 5.4운동 이래로 일본에서 배우는 것에 벗어나 서구를 직접 배웠다. 우리는 일제 침탈로 그럴 기회가 놓쳤다. 우선 일본에게, 그리고 전후에 미국에게 배움을 청했다.

서양의 패거리 문화에 포획되고 포로가 되었다. 남한은 어쩌다가 제국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브루노처럼 제거하는 과정을 거쳤던가? 보도연맹, 조봉암, 인민혁명당, 민주청년연합, 남민전 등으로 계속되었다. 마남 사냥에 겁먹은 경북은 결과를 원인으로 세우려는 박정희를 내세우려 하고 있고, 일본과 미국을 따르는 패거리들은 단절의 역사를 만들면서 이승만의 망상까지도 불러오려 한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같은 제국, 일본과 같은 제국주의 등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고, 그리고 “천하루 밤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미국을 배우자고? 미국은 유럽계의 패거리에 속하는 소수자가 상층을 차지하고, 나머지를 하부로 삼는 방식으로 이원화 되어 있고, 전쟁 이후에 로마 황제 이상으로 옥상옥의 체계를 구축했다. 그 속에서 인민의 자주성과 자연의 자발성은 패거리의 속성상 배제된다. 일본과 같이 가자고? 일본은 입말과 말투, 문자로 정립에서 이원화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다고 한다. 그 속에서 패거리가 승리를 구축한 것이 일본의 내각제이다.

왜 미국도 일본도 아닌가? 남쪽에서 입말의 문자화가 87년 이후로 치면, 겨우 40년이 채 안 되지만, 팔천만이 공유하는 입말의 씀씀이는 79년이나 된다. 게다가 문화적으로 우리는 천년의 불교, 오백 년의 유학의 전통이 있고, 다른 한편 1446년 이래로 내재적으로 이어온 입말 있다. 이제 겨우 입말의 세대가 되어 인민이 계속하여 이끌어 갈 것이다. 그 입말은 한 덩어리로 움직이기 때문에, 위계로서 이분화 된 내각제는 안 될 것이라 했다.

입말의 문자화가 얼마 되지 않더라도, 서구의 저항과 혁명이 기나긴 종교와 근대과학에서 자연의 빛을 느끼는 “권능”에서 유지하고 있듯이, 우리에서는 권능이 있어서, 패거리 방식으로 일본 제국주의, 미국의 제국이라는 단절된 계급방식으로 체계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윤석열 집단이 만주파가 아니라 섬나라파라는 것은 공공연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내각제 물 건너갔다고 하면서도, 윤석열을 조기 퇴각시키면서 내각제로 갈려는 거대 양당의 말투가 있었다. 인민의 최종심급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상부 패거리들이 계속적으로 정치를 하려 한다. 79년 동안에 인민은 자기 소통을 상부와 달리 이루어왔고, 거대한 촛불의 경험을 느끼고 산다. 인민이 헌법 제안권과 세 패거리에 굴종하는 자와 사적이익을 취한 자들을 소환하는 소환권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권은 제도 속에서이고, 입말과 말투에서 인민이 주인이며 최종심급으로서 자연권을 이루어야 할 때이다. 내각제가 아니라, 인민의 자연권에 대한 윤석열 집단에 대한 저항과 항거가 민주당 안에서 일어날 것 같다. 정당에서는 당원이 중심이 되고, 나라에서는 인민이 주인이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사회권과 더불어 자연권이 소통될 때, 이때 생물학과 심리학이 내재성의 철학의 본류라는 것도 잘 소통될 것이다. 수학과 언어논리는 패거리의 담합 도구(Organ)였다.

*

다른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들 패거리는 원리와 법칙이 보편이듯이, 이 보편성이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아직도 세 패거리가 자신들이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으며, 저항이 올라오면 가끔은 ‘백성이 하늘이다’라고 매체들을 통해 떠들거나, 성동격서의 방식으로 문제를 흐리게 하여 넘어간다. 백성은 잘 잊는다고 한다. 백성은, 생명체로서 살 듯이, 기억을 지니고 있어서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긴 역사를 기억하고 있고, 생명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패거리들은 인민에게서 배척되거나 밀려난다면, 자신들의 부정 축적과 갈취의 삶이 더이상 없다고 생각한다. 주식시장을 만들지 않았으면, 어떻게 김건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를 통해 수억을 벌겠는가? 이런 집단들은 개미의 피를 빨아서 번다는 것도 잘 안다. 제국의 시대에 돈을 번다는 것은 무기/도구와 다른 지배방식임을 그들은 잘 안다. 그 집단은 패거리에게서 배웠고, 패거리들에게 마름의 노릇을 자처하고 있다.

세 패거리가 이미 제국주의 이래로 돈을 통하여 돈을 통일과 절대의 상위에 두면서, 이제 까지 상위였던 신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게다가 세 패거리 중에는, 생물학과 기상학 등의 자연에 비추어보아, 지자의 권위가 통일성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 우리 땅의 국가 권력을 세 패거리 수준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매우 많다. 이들은 패거리가 아니라 패거리의 똘마니이다. 이들의 공통성은 1894년 이래로, 과학에 대한 경외와 1905년 일본이 러시아함대를 이겼다는 사실에 배울 것도 일본이고, 일본을 따르면 해결된다고 한다. 이 자들이 130여 년 전부터 지금도 믿고 따르고 있다. 토착 왜구 또는 부일자들이 있다. 이들은 제국의 세 패거리에 속하지도 못한다. 국가 권력도 없었고, 오랜 전통을 버렸으니 종교와 도덕의 권세도 없고, 단지 조선의 무지렁이가 아닌, 일본과 독일을 통해 19세기 철기의 마지막 지식을 받아서 합류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합류에 국가를 일본에 넘겨주는 것과 같은 줄 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미제의 마름인 일제의 똘마니로서 세 패거리로 합류하고 싶었지만, 일본 제국이 용납했겠는가? 어째거나 그래도 일본 제국주의의 권력에 아부하여야지. 그 추종하는 지식분자들의 세력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이어 일본의 합류가 아니라 봉사(service, 하녀라는 뜻도 있다)로 나섰다. – 당연하게도 이런 지자들은 독일을 이어받은 일본의 지식과 영국과 독일(앵글로 색슨)의 체계에 관한 책들을 읽고, 매체를 통해 선전한다. 잘 들어 보시라, 극우 매체에 인용된 인물과 책은 앵글로 색슨의 책이 아닌 것이 있는가?

일제 강점기에 일부 지식인들은 일본이 제국주의로 유럽의 절대 국가처럼 오래 간다고 생각했는데, 1945년에 미국 제국주의에 패배했지. 이 일본을 통해 배운 어설픈 지식인의 권위는 폭상 망했지. 그래서 미국의 과학으로 갈아탔지. 미국 제국주의는 세 패거리가 모습을 분명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따라갈 수 없었다. 반도의 전쟁은 기회를 주었지. 그리고 미국을 숭배하며 따랐지. 숭미주의자들은 미국에 복속하고자 원했다. 그런데 웬걸 미국은 남한에 관심이 아니라 중국 대륙이라. 이 계륵 같은 남한을 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인민은 잘 구슬리어지지 않고, 게다가 입말 방식이 서로 사맛디 않아서 말투의 상위로서 영어를 심는 데 실패했다. 미국은 자국보다 긴 역사를 지닌 한국 인민이 반미를 하기도 한다. 그 반미의 입말을 미국이 모른다. 아마도 촛불시위 같은 것을 보고서야, 총독 같은 주한 미국대사가 놀랐을 것이다. 미국이 반도 남쪽을 직접 식민 하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복속을 시키려면,

그래도 반도 내부에 일본에 복속하는 부일자들이 남아있으니, 미국은 정복자로서 중국을 향한다는 명목으로(1592년에도 일본이 중국을 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 했듯이) 무력(군대)으로 반도 남쪽을 차지하고, 저항하는 민중이 사는 것에 관해서는 경제적 방책으로 일본에게 넘기는 전술을 쓰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보수정당과 극우 정당이 내각제를 상상했던 것에 한몫했을 것이다. 이들의 말투가 얼마나 앵글로 색슨인지를 보라. 미국과 일본의 하부로서, 이에 협조자는 박정희에서부터, 이명박, 박근혜를 이어오다가 노골적으로 윤석열 집단이, 언론과 지식이 이미 포획되고 포로가 되었기에, 하부로 들어가자고 실행에 옮기고 있을 뿐이다. 중국과 싸워야 하는 미국이, 군대를 남겨둘 자리로서 남한을 지배하면서, 일본에게 남한의 경제를 넘기려는 것이다. 라인을 일본에 넘겨주고, SK의 지분을 일본에 넘기고서, 그리고 마치 시혜를 베풀 듯이, 남한이 먹고 살 수 없는 경제 구조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럴 경우가 내각제로 가는 징표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가 내각제를 물 건너갔다고 하는데, 이는 인민을 현혹하는 수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윤석열 집단뿐만 아니라 이들 이전에도 남한의 권력, 그리고 권세도, 권위도 제국주의 또는 제국의 전략에 협력하는 길이 살길이라고들 했었다. 묻지마 투표는 이에 기인한다. 이는 1905년 이후 나라 팔아먹은 5적들도 당시에 그렇게 생각하고 넘겨주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들 5적 연관자들을 해방 후에 처벌하고, 중요한 것은 재산을 몰수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번에도 윤석열 집단이 1910년 그 이상의 작업을 법률적으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결제의 권리인 최종심급은 인민에게 있다. 아직 결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민이 제헌입법권과 소환권을 쟁취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내각제라는 말은 들어간다. 교육과 제도에서도 인민은 기본심급이자 최종심급이다. 이 최종심급으로 세 패거리에 아부하고 마름을 자청하는 이들을 엄벌하고, 부정 재산을 몰수해야 할 것이다.

다시, 내각제를 입에 올리는 정치인들을 매국노와 손잡는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총선이 있기 전에 떠돌던, 내각제 개헌의 이야기가 또다시 돈다. 윤석열을 명예롭게 퇴각시키는 방법도 말한다. 인민의 최종심급을 받아야 할 자들을, 위임받은 국회의원들에 처분을 맡기는 것에서, 해방 후 부일자들에게 속았듯이, 제국의 마름들에게 속는 것이다. 이들이 일본세력에 부역하는 자들이라고 여기는 것이 인민만이 아닐 것이다. 인민의 저항, 봉기, 혁명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총선이 끝나자마자 현재 시점에서도 일본의 종속과 예속을 넘어서, 나라를 넘겨주려는 자들이 있다고들 한다. 그 세력들은 세 패거리가 역사의 주류라고 망상한다. 백성, 민중, 인민은 스스로 깨어있는 시민으로 자각하고, 입말과 말투, 규소의 시대의 이미지와 문자로서, 새로운 생성과 창조를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75년의 세월이 세계사에서 매우 짧지만, 우리나라만큼이나 역동적이고 속도와 강도(내공)를 가진 나라가 없다. 현재의 노력으로 보아, 그리고 내년으로 가는 과정에서 더 빠른 속도의 더 깊은 강도의 역동성이 분출할 것이다. 그 분출이 시대를 바꿀 것이다.

내각제라는 용어를 말을 입에 올리는 자들을 조심하라, 그가 이완용처럼 시대의 타협자이며, 적군의 세작이다. 그들이 끌어들여 인용하는 앵글로 색슨의 책들과 학자들의 말투와 용어를 들을 때 조심하라. 마치 철학사에서 ‘누스’라는 용어를 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을 조심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인민의 기본심급과 최종심금, 적어도 사회권과 자연권의 전개를 분출하는 자들과 같은 발걸음을 걷기를 노력하자. 75년의 입말과 말투의 기간이 짧지만, 그 속도와 강도는 규소시대 만큼이나 기하급수 이상으로 상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당신의 노력과 내공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소요, 반역, 폭동이라는 용어를 쓰는 자들이 나라를 왜놈과 제국에 넘겨주는 자들이다. 저항, 봉기, 항거는 인민의 미덕이다. 한 인간의 삶은 기나긴 생명의 역사에서 보아 찰나이다. 45억 년 역사에서 눈 깜짝할 사이. 그 찰나를 노력과 내공으로!

(57A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3년 10월 제8차 정기세미나 “『한국현대철학사론』에 관하여” 2023.10.13. (발표:이병태)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한철연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2013년에 이규성 선생의 『한국현대철학사론』(2012)을 함께 읽었고, 『시대와 철학』 24권 4호에 서평이 실렸습니다.
2023년 10월 세미나는 지난 서평을 중심으로 서평자 이병태 선생님의 발표로 진행합니다.

◎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계간 학술지 『시대와 철학』 24권 4호에 실린 이병태의 글 「서평 : 우리 철학사의 창으로 본 미래 철학의 풍경 -『한국현대철학사론』 (이규성 지음,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12)-」(2013)을 참고하길 바랍니다. 아래 자료실 주소를 참조하세요.

‘시대와 철학’ – ‘2013’ – ’24권 4호’를 검색하여 텍스트를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   http://www.hanphil.or.kr/html/sub02_01.asp

-주제: ‘『한국현대철학사론』에 관하여’
-발표: 이병태(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일시: 2023년 10월 13일(금) 오후 4시
-장소: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로 45 SK리쳄블 1305호 진보 정치학교 교실
-진행: 줌(Zoom)온라인 회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zjmMA_ZiTMw?si=r68PzeCzNtWJ3dIS

[신간안내]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김성민·김성우 지음|이음출판컨텐츠|(2024년 5월 20일) [한철연 소식]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김성민·김성우 지음)

 

김성민, 김성우 회원이 같이 쓴 신간을 소개합니다.  이 책의 원 제목은 좀 깁니다. [욕망의 희생자, 환상의 피해자, 죄의식에 갇힌 나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 – 스무 살, 그리고 우리 모두, 나를 위해 미리 읽는 슬라보예 지젝] “어렵고 난해한 슬로보예 지젝의 이론을 대중문화와 일상의 에피소드로 간결하고 쉽게 정리한 흥미로운 철학서”입니다. 저자들은 우리의 욕망이 과연 내가 원하는 욕망인지 ‘삐딱하게 생각’하는 연습을 해보기를 권합니다. 이 책은 지젝의 입으로 위로를 전하지 않습니다. 지젝과 더불어 나와 세상을 달리 보며 사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슬럼프에 빠질 때 그것을 부정하기보다는 그 증상 위 감정을 횡단하여 타인에 의지 말고 나만의 다른 시각으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아래 출판사의 서평을 읽어보면 이 책에서 말하는 바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책소개

출판사 서평

1. 이 책을 실험적으로 쓴 이유

핸드폰과 컴퓨터로 다양한 정보와 문화 콘텐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책이라는 존재의 위상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철학은 어찌 보면 책 시대의 산물이다.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가 전한 말을 기록한 데서 시작했기에.

그 찬란한 철학적 전통과 현란한 개념들을 어떻게 대중과 소통시킬 수 있을까? 철학의 대중화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철학자라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화두다. 이론의 두께를 덜어내지 않으면 일반 시민에게 철학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입장이 허가되지 않은 궁정 도서관과 같으리다. 정답을 제시하는 식이라면 독자들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화를 내지 않을까? ‘꼰대 같은 작가’가 던져준 떡에 체한 듯이.

독자의 삶과 연결되는 질문을 구체적인 에피소드로 연결해서 던져본다면 혹시라도 마음에 가닿지 않을까를 고민했다. 지젝은 철학적 방대함과 현대 사회와 문화에 대해 해박하지만 절묘한 유머와 조크로 대중과 소통하는 데 성공한 현대 철학자다. 이 책은 그 방대함을 덜어내고 그 해박함을 줄여 지젝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를 간결하고 구체적으로 정리하려고 애쓴 결과이다. 그렇다고 해서 질문의 수준을 낮춘 것은 아니며 전체의 연결 관계가 느슨한 것도 아니다. 약간은 반복을 이용해서 독자에게 앞선 내용을 환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금 더 심층적인 분석을 하도록 의도했다. 지젝의 말들을 읽으며 독자들이 자기 삶과 욕망을 스스로 분석하기를 원했다.

우리의 현실과 환상이 분리되지 않으며 현실을 바꾸려면 그 기본 틀인 환상을 먼저 횡단해야 함을 말한다. 그 방법으로 ‘삐딱하게 보기’라는 다소 소심한 전략을 소개한다. 그 소심함이 분리와 횡단을 거쳐 욕망의 좌표계를 재설정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기에. 실패해 슬럼프에 빠질 때가 오히려 이렇게 삐딱하게 보기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은 서론 첫 부분에 잘 정리되어 있다. 성공주의와 능력주의가 판치는 우리 사회에서 능력 없는 게, 노력 안 하는 게, 스펙이 부족한 게 죄가 된다는 현실을 환기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청년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슬럼프에 빠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 시기에는 소중한 사람들의 충고도 무섭게 느껴지고 점점 위축되는 자신에 절망하기도 한다. 이때 지젝이 던지는 위로의 말은 사회적 평가와 가족의 충고가 알고 보면 환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 평가에 못 미친 나 자신이야말로 죄인이 아니라, 그 환상의 희생자임이 드러난다. 사회적 낙인은 영화 〈에일리언〉의 에일리언처럼 나의 죄의식을 숙주 삼아 나의 배를 뚫고 나온다.

우리의 문제는 환상의 희생자가 될 때 욕망하는 존재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욕망은 가짜이다. 사회의 상징 체계라는 큰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 셈이다. 라디오 피디에게는 청취율, 회사 대표이사에게는 영업이익률, 수험생에게는 점수 등이 큰 타자에 해당한다. 큰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늘 문제였다. 물론 성공은 좋은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정 받으면 당연히 행복하다. 하지만 성공 신화를 삐딱하게 보면, 인정 윤리에 딴지를 걸어보면 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우리 존재 자체는 환상에 지배받지 않는 진짜이므로 성공 못 해도, 인정 못 받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서 삐딱하게 보는 태도는 용서받지 못할 죄로 낙인찍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회라는 큰 타자가 원하는 욕망을 무시하거나 다른 욕망을 꿈꾸는 자는 악마보다 더 미움받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미움받는 것에 떨지 않아도 된다. 사회의 욕망이라는 감옥에 자기 스스로 가두는 게 더 큰 비극임을 깨달아야 한다.

죄의식과 체념은 다르다. 죄의식은 현실에 갇혀 있지만, 체념은 현실에서 빠져나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체념할 때 사회적 낙인은 내가 무시할 수 있는 소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강철로 만들어진 현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체념은 일종의 딴죽걸기이다. 현실에 균열을 내면 현실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지젝과 함께, 사회가 강요하는 가짜 환상, 왜곡된 욕망에 딴지를 걸어보고 삐딱하게 생각해보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그래서 증상을 즐기고 슬럼프를 환영하자. 다르게 살기의 출발점이 되니까!

2. 지젝은 누구인가?

슬라보예 지젝(1949년 3월 21일)은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붕괴로 구 유고연방에서 갈라져 나온 슬로베니아 출신이다. 철학적으로 변방이었지만 자국 철학계의 다양한 철학 사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 마르크스주의, 하이데거주의, 분석철학 등. 그의 말처럼 “그래서 나는 운이 좋게도 모든 주요한 (철학적) 경향에 노출되었다.” 하이데거를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쓴 후, 데리다의 해체론을 통해 하이데거를 넘어서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 철학을 공부한 다음, 자국에 라캉 정신분석학회를 결성하고 라캉 사위인 자크 알렝 밀레의 초대를 받아 파리 제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다시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영어로 출간한 많은 책과 정력적인 강연들로 라캉 정신분석학의 소개자이자 독일관념론의 재해석의 선두 주자, 급진적인 정치철학의 주도자이자 ‘삐딱한’ 문화비평가로 ‘지젝 신드롬’을 일으켰다.

출처: 교보문고

 

목차

남의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살고 싶은 이들을 위해: 머리글을 대신하여

I. 현실, 환상, 욕망
1. 현실은 생각처럼 단단하지 않다
2. 삐딱하게 보면 다르게 살 기회가 생기는 게 아닐까
3. 객관적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4. 중립은 대개 강자의 편이다
5. 슬럼프야말로 가짜 욕망을 버릴 기회다
6. 나는 텅 비어 있기에 욕망한다
7. 환상은 제거되지 않는다
8. 무의식, 참을 수 없는 진실이 있어 펼쳐보기 싫은 책
9. 매트릭스라는 큰 타자의 배터리가 된 현대인
10. 언어는 끊임없이 우리 욕망을 채찍질하며 우리를 고문한다
11. 욕망의 수수께끼, 나는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12. 욕망은 해방되지 않는다II. 증상, 정신병, 도착증, 신경증

II. 증상, 정신병, 도착증, 신경증
1. 증상, 불편한 진실의 암호로 된 편지
2. 무의식의 저항 방식: 뭉개기, 생까기, 횡설수설
3. 우리가 인정에 목매는 이유
4. ‘아버지의 이름’을 결여하면 정신병자가 된다
5. 소외, 자신의 존재를 잃고 사회적 이름을 얻는 과정
6. 분리, 큰 타자가 붙여준 이름을 거부하는 과정
7. 작은 대상 a, 내가 나쁜 애인을 자꾸 사귀는 원인
8. 도덕주의자는 도덕의 도구가 된 도착증자다
9. 극우주의자나 근본주의자도 도착증자다
10.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11. 히스테리적인 의심, 환상 횡단의 출발점
12. 치유의 최종 단계: 해석, 거세, 횡단

III. 충동, 주이상스, 프레임, 혁명
1. 충동, 환상의 근본 프레임을 바꾸는 힘
2. 빨간 약도 아닌, 파란 약도 아닌, 제3의 약
3. 죽음충동, 증상이 해석되어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
4. 충동, 일상을 해체하는 힘: 삶의 의미를 상실할 때 세상이 달리 보인다
5. 상실을 메우려 하지 않을 때 환상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6. 빨간 구두는 끝없이 춤추라는, 소녀의 죽음충동이다
7. 주체의 포기, 자기 희생을 인정받으려는 욕망마저 버린 태도
8. 충동 윤리, 부정적인 것을 감내하기
9. 상처는 오로지 그를 찌른 창에 의해서만 아물 수 있다
10. 틀을 다시 짜는 충동,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힘

독자에게 추천하는 지젝 저서 한국어판 목록


저자 김성민: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정치/사회철학, 역사철학, 문화철학, 미디어 철학 등의 과목을 주로 강의했고, 현재 명예교수이다. 그동안 문과대학 학장과 인문학연구원 원장을 지냈고, (사)한국철학회 회장과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통일인문학’이라는 아젠다를 제시하고, 인문학적 패러다임을 통해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론을 연구했다.

저자 김성우: 현재 올인고전학당 연구소장이고, 상지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를 지냈다.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사업부장을 맡아 영화, 미술, 음악, 문학을 철학적인 시각에서 읽는 <청춘의 고전> 강연 시리즈와 <다시 쓰는 철학사> 강연 시리즈를 기획하였다. 정독도서관과 도봉도서관 등의 공공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고, 광진정보도서관에서는 <공주 인문학> 강좌 시리즈를 진행하는 등 철학 고전과 인문학의 대중화에 노력했다.


 

일상언어와 분석철학의 전통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일상언어와 분석철학의 전통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내가 철학을 처음 배우던 시절에는 한국 사회의 80년 대 분위기 때문에 주로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이 주도했다. 처음에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이 들어왔고, 다음에는 시대와 현실을 담은 헤겔 철학이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변혁 철학의 심장과 브레인 역할을 하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철학이 한 시대를 휘어 잡았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영미권의 분석 철학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반 시대적이어서 특별히 관심 있는 학생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외면 당했다. 비판적 합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K. 포퍼의 철학 조차도 완전히 무시당했다.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가서 내가 배운 철학은 프레게와 러셀과 논리실증주의자 그리고 전후기 비트겐슈타인 등이었다. 이들 철학은 일단 분석적이고 명쾌해서 접근하기가 쉬웠다. 덕분에 나도 석사 3학기 때 까지는 비트겐슈타인 후기 철학을 가지고 논문을 쓸까 고민을 했었다.

분석 철학은 영미 철학의 전통에서 성장한 철학이다. 영국의 경험론은 대체로 반 형이상학적이고 반목적론적이었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이 실체가 무엇이고, 그것이 하나인지 둘인지 아니면 라이프니츠 처럼 수도 없이 많다고 하는 지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 로크는 적어도 우리 정신 밖의 실체인 X를 인정했지만, 그것이 무엇인 지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했다. 버클리는 그것을 지각적 표상으로 환원했다. 그의 유명한 “존재는 지각이다”는 명제가 그것을 말해준다. 데이비드 흄에 오면 이런 실체는 단순히 인상들의 다발로 간주된다. 불멸의 영혼이라는 실체는 감각의 다발이고, 뉴턴의 기계론적 인과법칙도 반복적 습관에서 이루어지는 연상의 법칙으로 주관화된다. 이런 면에서 데이비드 흄은 근대 경험론이 갈 수 있는 막다른 골목까지 간 셈이다. 20 세기의 ‘논리 실증주의’는 흄의 20세기 버젼이나 다름 없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역할을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애매하고 모호한 말들로 인해 철학의 문제들이 생긴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추방한다면 철학의 전통적인 문제들도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그의 정신을 추종한 비엔나 써클은 세상에는 단 두 가지의 명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의미있는 명제’와 ‘의미없는 명제’가 그렇다. 수학과 논리학의 명제들, 그리고 경험적 검증이 가능한 명제들이 전자에 속하고, 가치 명제나 형이상학적 명제는 논리적인 명제도 아니고 경험적으로 검증이 되는 명제도 아니기 때문에 후자에 속한다. 비엔나 써클의 철학자들은 검증이론(verification theory)의 이러한 분석을 통해 철학의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러한 도발적인 주장들이 철학적 문제들을 다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끼친 공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엔나 써클의 일원인 루돌프 카르납은 그 당시 대단히 떠 받들어졌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모호하고 애매한 명제들을 하나 하나 까 뒤집으면서 분석 비판을 시도한 적이 있다. 철학을 형이상학의 모호한 구름 위에서 지상의 밝은 빛 한 가운데로 끌고 내려오려 한 것이다. 물론 형이상학의 전 체계를 낱낱의 명제들로 해체해서 명제 단위로 비판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하지만 카르납의 작업은 적어도 비판적 언어 철학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준 셈이다. 이런 전통이 미국으로 건너가 분석 철학의 초석을 만들었다.

<트락타투스>(Logico-Tractatus)에 나타난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은 언어와 세계의 대응을 통해 명제의 의미를 단순화 시켰다. 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서 일상 언어의 문맥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의 쓰임을 통해 언어의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저항이 없으면 더 빨리 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진공 상태를 가정했는데, 오히려 더 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들은 대륙의 철학자들처럼 사변의 전체로 얽혀 있지 않고, 일상 속에 살아 있는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만큼 이해하기 쉽고 철학적 작업이 무엇인 지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삶과 현실에서 유리된 추상 개념들을 현란하게 구사해야지만 철학을 하는 거라는 전통 철학의 모호한 환상을 확실하게 깨버린 것이다.

내가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을 할 때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차원에서 영미권의 분석 철학을 무조건 백안시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일상 언어에 기초한 에세이 철학을 하면서 분석 철학의 정신, 그들이 사용하는 일상 언어, 삶에 기초한 철학 등과 같은 분석 철학의 정신이 에세이 철학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철학의 정신을 살려서 삶과 시대의 문제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굳이 대륙권 인가 영미권 인가의 구분도 무색해질 수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미권의 철학에서 헤겔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헤겔 철학에 대한 논문과 연구서들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분석 철학의 한계를 대륙 철학의 정신을 받아들여 돌파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가 있다. 독일 철학 역시 하버마스 이래로 어중쩡한 포지션 때문에 새로운 철학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영미권의 철학에 대해 적극 관심을 보이는 철학자들도 적지 않다.

우리가 고정된 하나의 길만 고집하려는 것은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한 한계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형이상학자들이 믿는 전통적인 명제 하나가 있다. 화엄의 인드라 망처럼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는 하나이지만, 그것에 이르는 길은 여럿이다.”라는 명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본다면 진리는 그것을 어떤 길로 어떻게 접근하느 냐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한계를 인정한다면 동과 서, 그리고 고금의 벽을 얼마든지 벗어 던지고 철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와 장자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부활하고, 화엄과 주역의 존재론이 양자역학과 대화하고, 분석적 정신과 종합적 정신이 동양의 음양의 관계처럼 대대 관계를 이루어 하나의 방법론을 구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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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른바 선사들이 토굴 속에서 수년 동안 참선을 하면서 마침내 무언가 깨달았다고 할 때 그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오랜 수행 끝에 그들이 우주 만물의 통일적 원리인지 혹은 삶의 궁극의 원리인지를 발견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들이 치열한 수행 끝에 강렬한 확신이나 체험을 얻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생각일 뿐 그것 자체가 보편화되고 객관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하면 사적 체험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깨달음을 판정해 주는 구루(Guru)가 있다고 해도, 그 구루가 깨달은 자(Buddha)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구루가 깨달은 자라는 것을 다른 구루가 판정해 준다고 하자. 하지만 이런 물음을 제기하다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나타나는 ‘제3자 논변의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근거 지우는 것을 새롭게 근거 짓는 것의 무한 퇴행 문제이다. 결국 유한자들에서 무한자이자 궁극적 해결사인 신에 이를 때는 일종의 근거 지움이 아니라 점핑(jumping)이 일어난다.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도 비슷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자기 만이 상자 속의 딱정벌레를 보았다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딱정벌레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각각이 보았다는 말을 최종적으로 근거지울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사실 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은 빼어난 저서들이나 과학적 발견들을 통해 자신들의 궁극의 연구 결과를 보여줄 수 있고, 예술가들도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그리고 기술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생산한 기술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깨침을 상징하는 상자 속의 딱정벌레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백분 양보를 해서 그런 깨달음의 존재에 대해 인정도 하지 않고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그런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치열한 수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만은 엄연한 ‘팩트’로 인정을 한다. 그런데 이런 팩트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똑같이 한다. 이를테면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운동선수들도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노력을 하는 것이다.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예술가도 그렇고, 문자를 통해 최고의 작품을 쓰고자 하는 학자의 경우들도 마찬가지다.

깨친 자의 깨달음에 심오한 형이상학적 원리에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한 자들이 갖는 신비감이고 그릇된 신앙일 뿐이다. 때문에 깨달음을 가장한 자들이 몽매한 대중들을 데리고 사기 치는 경우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이런 오류나 그릇된 믿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 혹은 궁극의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깨달음이 진정 무엇인가?”라는 절박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이를테면 “도道가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등 특정한 문제를 가지고 싸울 수도 있고, 만공 스님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처럼 오직 하나(一)를 잡을 수도 있고, 아예 그도 저도 아닌 ‘이 모꼬?’와 같이 무자화두(無字話頭)를 가지고도 수행 정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물음들이 도달하는 것이 무엇일까? 무나 도가 실체가 없듯, 깨달음의 실체도 없고 내용도 따로 없다. 칸트가 현상을 초월한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를 말했지만, 도대체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본질이 어디에 있고, 본질을 담지 않은 현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장막 뒤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들추어 보지만 그저 어둠뿐이 없는 것이다. 현상과 본질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과 일상도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불교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 /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0240000,37&pageNo=1_1_1_0

부처가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은 것이 무얼까? 나는 아주 단순하다고 본다. 부처는 생(生) 속에 담긴 고(苦)를 본 것이고,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해탈)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통찰과 깨달음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다. 이 단순한 통찰과 단순한 해법을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부처는 입적을 할 때 자신이 평생 설법한 8만 법문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던졌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일까?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단순하다. 예수의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저 ‘사랑’이란 말이다. 구약이 ‘정의’를 세우고자 했다면 예수로부터 시작하는 신약은 ‘사랑’이 알파요 오메가이다. 사랑만이 우리가 삶을 지속할 이유이고,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 사랑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의 공자의 정신도 그리 복잡할 것 없다. 공자가 말한 인(仁)은 부처가 말한 자비와 예수의 사랑과 표현 언어는 달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베풂과 보살핌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고, 우주 만물에까지 확장을 한다고 하면 생육의 도와 다르지가 않다. 남송의 주자는 리(理) 가 우주 만물의 원리라고 하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끌고 들어와 공자의 말씀을 형이상학의 차원으로 체계화해서 성리학을 세웠다. 조선의 선비들은 오로지 그것만이 공자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지만 그들은 공자의 말을 너무 번쇄하게 만들고 너무 추상화시켰을 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공자의 사상은 너무나 단순 명확한 인(仁)에 다 들어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남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 나를 남들 속에서 보려고 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교양인이라면 누구든지 알 수 있고, 선한 마음을 갖는 자라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지극히 단순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대접 받고자 하는 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과 같다. 세분 성인의 말씀이 이처럼 단순 명확한 것은 그들 모두가 삶에서 진실을 끌어 올렸었고, 삶에 깊숙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석가나 예수, 그리고 공자와 같은 성인들이 말씀한 이 단순한 원리가 후대로 갈수록 복잡한 교리로 체계화되고 형이상학적 원리로 추상화되고, 신비한 언설로 간주돼 삶과 유리되고 만 것이다. 그런 필연적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참으로 본질을 볼 수 있어야지 똥폼이나 잡고 허접데기 껍데기만 붙잡고 있으면 되겠는가?

출처: https://contents.premium.naver.com/leejongcheol/knowledge/contents/230121203900063sv

눈치(Noonchi)의 해석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눈치(Noonchi)의 해석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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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Noonchi)는 사태를 이해하는 한국인들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눈치가 없다’ 거나 ‘눈치가 빠르다’라는 말들은 거의 일상적으로 한국인들의 이해 방식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런 눈치가 과거에는 자기 검열의 방식이거나 처세술의 의미로서 부정적으로만 이해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상황 전체에 대한 빠른 인식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이 ‘눈치’의 개념을 생각하다 보면 다양한 해석의 소지가 있다. 이 눈치를 한국적 해석학의 차원에서 해석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눈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속도’이다. ‘눈치가 빠르다’라는 말이 그렇다. ‘눈치가 빠르면 절간에서도 고기 맛을 본다’라는 말이 있다. 절(寺)은 채식을 하기 때문에 고기와는 거리가 먼 곳인데, 그런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이 눈치다. 그런데 여기서 ‘빠르다’라고 할 때의 ‘속도’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눈치가 빠르면 그만큼 상황을 빨리 인식하고 그에 따른 후속적 대처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이 말하는 ‘빨리빨리’는 이제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말이 되었지만, 한국인들은 이 특유의 ‘빨리빨리’의 정신에 의해 식민지와 전쟁 폐허의 상황을 겪고서도 이렇게 빨리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차이가 크다. ‘빨리빨리’의 문화를 반성하자는 말도 많지만, 이것은 디지털 시대에 더 잘 어울리는 정신이다.

뉴턴의 제2 운동 법칙인 f=ma에서 보듯, 가속도가 힘을 결정하는 주요 원인이다. 속도가 빠르면 일 처리도 빠르고 영향력도 클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그곳에서 인터넷 라인이 문제가 생겼거나 잘 달리던 차가 고장이 나서 A/S를 한 번 받으려면 얼마나 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한지 말이다. 한국의 배달 서비스는 분초를 다툰다. 물론 이것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는 의미다. 과거 칭기즈칸의 군대가 빠른 시간에 전 세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빠른 기동력에 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을 오가는 그의 파발마는 하루 352km라는 상상 불가의 속도로 전달했고, 그의 군대의 이동 속도는 하루에 130km를 이동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현대의 군대들도 따라 잡지 못할 속도이다. 몽골의 기마병의 이동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유럽의 기사들이 미처 대비책도 세우기 전에 순식간에 몰아쳐 헝가리 평원에서 유럽의 연합 기사단들을 전멸시켰다. 이로 인해 몽골 군대에 대해 유럽인들이 가졌던 공포나 트라우마는 대단했다. 그런데 내가 몽골에서 지내보며 알게 되었지만 이런 빠른 유전자들은 더는 몽골인들에게서가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남아 있는 것 같다. ‘빨리빨리’의 정신은 무엇보다 빠른 상황 판단, 즉 눈치가 빠를 때 가능하다. 그 점에서 눈치에서 속도가 갖는 긍정성의 의미가 더 크다.

이런 빠른 눈치가 때로는 자기검열과 차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눈치가 보인다’거나 ‘눈치를 준다’라는 의미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일종의 단절감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상대의 행동을 제어하는 차별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이런 눈치를 남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조심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눈치는 간주관적(intersubjective) 인식 방식의 하나인데, 눈치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눈치에서 ‘속도’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상호 간 혹은 다자 간의 관계에서 아주 미묘한 차이와 기미, 이를테면 눈빛 혹은 얼굴 표정, 미세한 손동작이나 발동작 혹은 헛기침같이 모든 행동거지들이 하나의 해석을 위한 메시지로 작동할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남들이 알아채기 힘든 것들 속에서 의미 있는 해석의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는 해석학자이고 기호학자이다. 반대로 그런 메시지를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사람들 역시 상당한 고수라고 할 수 있다. SNS의 단추를 보면 그냥 ‘좋아요’라는 버튼 말고도 ‘웃겨요’ ‘멋져요’ 슬퍼요’ ‘화나요’ 같은 감정 신호를 보여주는 버튼이 있고, 최근에는 ‘힘내요’라는 버튼까지 추가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감정 신호를 담은 버튼을 많이 누르는데 어떤 이들은 절대 그것을 보여주지 않고 무조건 ‘좋아요’만 누르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싫어도 싫다고 하지 않는다. 일종의 포커페이스 같은 이들의 행동을 보면서 상당한 고수라는 생각도 든다. 아예 잠행조차 하는 그런 보이지 않는 고수들이 SNS에는 의외로 많다.

그런데 마음을 감추고 눈치를 주지 않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모든 이를 무심코 평정하게 대하려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평정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초연'(Gelassenheit)이란 개념이 이런 경지를 말할 수도 있다. 사물이나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특별히 어떤 마음을 내지 않고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개념은 ‘들어가기(Sicheinlassen)’와 ‘나가기(Sichlosslassen)’의 양면성을 띠고 있다. 전자를 ‘몰입’이라 하고, 후자를 ‘거리 두기’라고도 한다. 이 두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생각을 더 해 보자. 사물이건 인간이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해와 관심이 요구된다. 이러한 이해와 관심은 사랑과 증오, 거래와 배려 등 모든 관계에서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런 관심이 지나치다 보면 중독처럼 빠질 수도 있고, 집착처럼 상대에 부담을 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도하게 들어가는 것 혹은 몰입은 양자의 정상적 관계를 해칠 수도 있다. 스토커는 이런 거리 두기를 조절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장애라 할 수 있다.

나가기나 거리 두기는 이로부터 역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거리를 두다 보면 상대를 더 정확하게 볼 수도 있고 더 잘 이해를 할 수도 있다. 바둑에서도 훈수 두는 사람이 더 잘 보는 경우가 그렇다. 예를 들어 자식의 미래를 걱정한 엄마가 아이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할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종종 부모 자식 간의 관계 혹은 무촌이라고 할 부부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지나치게 상대에 몰입할 때 나타난다. 이럴 때 상대와 반성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거리는 심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공간적 거리도 포함될 수 있다. 아무래도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 보면 덜 집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SNS가 발달해서 이런 공간적 거리 유지가 잘 안되는 데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들어가기와 나가기는 인간관계의 밸런스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개념이고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한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해당한다. 

금강경에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곳 없는 곳에서 마음을 내다. 내 마음이 어떤 것에 머물다 보면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이 솟구친다. 그런 마음이 가라앉는 곳, 무심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마음이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을 하거나 놀이에 빠지거나 음악을 듣거나 할 때 내가 빠져 있는 그런 상태가 내 마음이 머물지 않은 곳이고 무심의 경지이다. 이런 마음에 희로애락이나 재물욕이나 권세욕이 개입되니까 집착도 생기고 고통도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마음을 키울 수 있을까? 한국인들의 눈치가 결코 간단한 개념이 아니다. 눈치가 빨라야 알 수 있다.

출처: https://contents.premium.naver.com/leejongcheol/knowledge/contents/220602123804205zd

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다!

 

이종철(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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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여성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학살자인 아이히만의 법정을 참관하고 내놓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본인이 유태인으로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아렌트 입장에서는 도대체 나치 전범들은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들이기에 그런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는가가 궁금했다. 아렌트는 이 법정을 참관하기 위해 한 학기 강의를 반납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나서 내놓은 진단은 너무나 평범했다. 아렌트는 유태인 학살과 같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아이히만이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이웃집에서 평범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아저씨 같다고 했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대단히 가정적이고, 딸아이들 한 테는 좋은 아빠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여기서 아렌트가 내놓은 진단이 저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괴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들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행동하다 보니 저런 범죄에 휩쓸리고,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은 것이다. 사고의 부재가 저런 엄청난 범죄를 야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전혀 사고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렌트는 여기서 제대로 사고하지 않았다고, 말하자면 반성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를 하지 않다 보니 저런 행동을 했다고 덧붙인다. 아렌트가 여기서 도출한 ‘악의 평범성’은 나치의 행태에 대한 거의 고전적인 해석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젊은 시절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밑에서 철학을 공부한 명민한 학생이 보기에 나치에 부역한 그녀의 스승 하이데거가 별생각 없이 행동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철학자의 나라 독일, 유럽에서도 가장 지성적이라고 자부했던 독일의 국민이 과연 아무런 생각 없이, 비판적이거나 반성적인 사고를 하지 않아서 나치에 열광하고, 유태인 학살과 같은 인종 청소에 동조를 했단 말인가? 나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진단이 틀렸다고 본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 없이 행동해서 저런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을 할 때도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말이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생각과 이성적 사고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하는 종적인 차이(종차)이기도 하다. 그런 인간이 생각이 없이 행동했다는 말은 그 말의 의미를 백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적확한 진단이 아니다. 인간은 생각이 없이 행동하다가 범죄를 저지르고 악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에 휩쓸리고 도덕적인 판단과 행동을 이끌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도덕은 오래전 플라톤이 이야기했듯 인간을 구성하는 이성이나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사(military man) 들의 용기의 원천인 의지(will)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이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능적인 감성과 욕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싸움에 임하는 전사들의 용기와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길래 플라톤은 이성의 덕이 지혜이고, 절제가 욕구의 덕이라고 한 반면 의지의 덕은 전사들에게 요구되는 용기라고 말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 초판(1963) / 출처: 위키피디아

도덕적 행동을 의지에서 찾는 플라톤의 전통은 근대의 도덕 철학을 종합하고자 한 칸트에게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칸트는 ” 이 세계 안에서, 아니 그 밖에서조차 우리가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Good will)뿐이다.”(도덕형이상학 원론)라고 말했다. 고대인들이 덕(virtue)이라고 간주했던 우수한 두뇌, 강인한 체력, 뛰어난 판단력 같은 것들도 그 밑에 선 의지가 깔려 있지 않다면 오히려 가장 큰 악덕이 될 수 있다. 빼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 가장 나쁜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예를 우리는 수도 없이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인들이 중시한 덕이 아니라 선한 의지만이 덕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그런데 이런 선 의지는 저절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보자. 밤에 산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부상을 당해 신음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보자. 산길을 갈 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산짐승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다. 그런데 밤중에 산길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대부분은 머리끝이 솟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자기도 똑같이 저런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설 것이다. 이 경우 감성적 판단은 끊임없이 두려움을 피하고 싶어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는 이성적인 판단에 따르더라도 이성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합리적 행동이라고 자위하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도덕적인 양심이 있는 사람은 두렵기도 하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을 내가 구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선한 마음이 앞서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덕적 행동은 감정적 두려움과 이성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부상당한 사람을 돕는 것이다.

도덕이란 이처럼 전사들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의무감에 따라 행동하듯, 감정과 이성을 넘어서 마땅히 선의지(양심)가 명령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적 욕망을 나치가 대변하고 있고, 그들이 반대할 경우 닥칠 수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나치에 동조하거나 적극적으로 부역 행위를 하는 데 있다. 그것은 결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욕구와 합리적인 이유에 따른 행동인 것이다. 이런 행동에 대해 아렌트처럼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이라고 딱지를 붙일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단순화시킨다면 그것은 본질을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많은 학자들이 앵무새처럼 아렌트의 말을 반복하고 있을까? 정작 생각이 없다는 말,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은 학자들의 그런 태도에 있지 않을까?

아렌트가 말한 것과 다르게 ‘생각 없는 행동’이나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악은 단순히 선의 부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훨씬 더 이기적이고 교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선과 악을 결단하는 삶의 매 순간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려는 선의지 와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전사의 용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의지와 전사의 용기야말로 플라톤과 칸트가 강조해 마지않았던 도덕의 본질이고 도덕적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출처: https://contents.premium.naver.com/leejongcheol/knowledge/contents/220527103113033qc

한철연 회원 신간소개 발표_좌담회 ‘이 책을 말하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영상 20230707 [월례발표회•세미나]

한철연 회원 신간소개 발표_좌담회 ‘이 책을 말하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영상 20230707

주제: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
저자 발표: 박종성
논평·토론: 이병창, 이병태
일시: 2023년 7월 7일(금) 오후 5시 30분
장소: 한철연 강의실

한철연 웹진 [이 시대와 철학]에서 진행
박종성 회원(건국대)이 번역한 슈티르너의 저서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는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된 슈티르너의 저작
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 웹진 [이 시대와 철학] 논평_토론문 링크
▶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1) – 이병창 [철학자의 서재]
http://ephilosophy.kr/han/55230/
▶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2): ‘나’의 개방과 해방에 관한 가장 지독한 사유 – 이병태 [철학자의 서재]
http://ephilosophy.kr/han/55235/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M4_T0zODMSU?si=vnE3ZqbNBxOLV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