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극시대의 젊은이들에게 – 제7공화정 시대의 주인, 다양체. [천 하룻밤 이야기]

동지(冬至): 다극시대의 젊은이들에게

– 제7공화정의 시대의 주인, 다양체.

 

인간이 지적 체계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삼천 년 전 이전 시대, 즉 기원전 천년 이전 시대 정도로 잡는다. 나일강,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황허강과 장강(양쯔강) 등으로 4대문명을 이야기한다. 이런 토지 시대의 이야기는, 신화 또는 전승으로 알려지는데, 이 시대에 쓰는 입말은 사라지고 각각에 따른 기호들이 남아있다. 이 기호들이 어느 정도 체계를 갖는 시절이 기원전 오륙백 년의 시대라 한다. 그리고 입말과 기호가 상응하는 체계를 만들어지고, 그리고 기원전 삼사백 년에는 체계가 만들어지는 데, 기하학과 논리학이라 한다.

실제로 정교할 정도의 체계를 갖추었던 기하학과 논리학이, 현실의 사물들과 사건들에게 적용에 맞는 부분들보다 맞지 않는 부분들이 더 많다는 것을 왜 몰랐겠는가? 그럼에도 맞는 부분으로 체계를 세우고 조직화를 이루어 공동체보다 더 확대된 도시국가 또는 황제국가를 만드는 재미와 이권(이익)에 매몰된 부류들이 상층을 형성한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백성과 노예들은 어쩔 수 없이 사물들과 사건들의 성립에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세상은 한시적으로 살다가 간다는 것을 알지만 달리 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달리 산다는 것은 죽음이며, 이를 벗어나는 생각을 하는 것이 무서움과 두려움(공포)이라는 것도 안다. 묵묵히 이런 굴종 속에 살다가 갈 수는 없지 않는가? 이런 부류들은 성(城) 밖으로, 제도 밖으로 밀려난다. 여기서 한 가지 성 안은 정상이고 성 밖은 비정상일까? 성 안은 성 밖에서 생산과 유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성안의 지배를 위한 권력을 구성하였다. 그럼에도 성 밖을 제도의 여분으로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동심원적 테두리 속에 넣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 성 밖의 이탈자(뻬르베르)를 동심원적 구조 속에 묶는 것은 기하학적 사고이고, 이 동심원적 사고의 지배방식을 확장하는 것은 언어(논리학)라 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경에 인류의 인식의 한계이지만, 오관[視(시)·聽(청)·嗅(후)·味(미)·觸(촉)]의 인식이 하나로 통합되어 단일성을 또는 통일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이를 생명체로서 단일성의 유지하는 것으로 생리학(퓌지올로지카)이, 세계의 통일성을 이루는 것으로 천체학(코스몰로지)이 동형구조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상상했고, 이 동형구조는 동심원처럼 되어 있다고 여겨서 체계화가 일정한 정합성, 대응성을 유지하면서, 나도 우리도 서로 이해와 설득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몸(신체)과 세계(천체) 사이의 연관 또는 연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들도 관계와 조성(composition)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고, 안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인식에서 몸들의 조직화와 비슷하게 또는 동상구조로서 도시국가, 황제(참주)국가의 제도가 이루어진다고 여기며, 제도와 체제의 조직화를 생각하는 것도 생리적 조직학(퓌지올로지카)의 확장으로 여겼다. 신체의 조직화(유기체화), 사회의 조직화(체제), 우주의 조직화(우주론), 이 셋은 우선은 기하학적 동일성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기호의 동일성, 또 하나는 하늘의 별들의 동일 운행에서, 같은 방식으로 유지하고 있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것들이 모방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런 인식의 도구는 당연히 5관의 통합을 이룬 의식이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다섯 의식의 통합으로서 여섯째 의식은, 새로운 규칙, 법칙 등을 다루어 일반성을 만들어 낸다고 여겼다. 물론 기하학의 공리와 공준에 의한 정의를 정리하였듯이, 논리학에서는 항목(개념)을 정의하고 전제와 귀결 사이의 추론의 법칙에 맞는 인식이 성립한다고 여겼다, 이런 인식에서 진리의 성립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런 오관이 하나로 통일되는지를 실증적으로 탐구하기보다, 삶에서 일반화를 통해서 보면 성인이 되어서 당연히 오관의 통합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3천년전 이전의 사람들이 5관을 통해 당연시 여긴 항목들이 수의 단위가 성립하고 그리고 배치하여(공간화), 가축의 수나 도시 인구를 셈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서야 수학들(산술학과 기하학)과 논리학처럼 추리의 순서를 갖추고 체계화 정합성을 갖는 것이 아니었을까? 학문의 진리를 논하는 사람들이 가끔 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인류가 살아온 기나긴 과정에서 인간들 사이에 대립항이 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 또는 상부상조와 상호협약이 체계를 만들까?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는 인류가 입말을 형성할 때, 일반화에서 체계와 지배의 언어로서 명사가 먼저일까? 또는 사람들의 삶의 상부상조에서 동사가 먼저 일까?라고 물어볼 수 있다. 벩송(Bergson)은 흥미롭게도 명사(이름)가 일반화에서 먼저이고, 명사의 움직임 방식에서는 동사가 다음으로 성립한다고 한다.

 

우리가 상식(sens commun)의 시대, 양식(bon sens)의 시대, 다양성(multiplicité, 발산)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서양철학사의 변천과정을 설명하는 한 방식이다. 상식의 시대에 중요점은 사람들이 간과하지만, 고대 그리스이래로 ‘산다’, ‘착하다’, ‘장하다’, ‘훌륭타’에 대한 막연한 합의와 일반화가 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양식의 시대는 데카르트 이래로 물체(신체)를 사유의 방법과 어느 정도 상응한다는 점에서 사유의 의미(sens, 방향)를 잘 닦아서, 추론의 길을 열면, 세상의 편리와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17세기의 데카르트 시대에도 물체의 운동에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리고 18세기의 “빛의 세기”에는 삶(의식)의 의미(방향)은 사회제도와 지식체계처럼 의미가 하나가 아니라, 빛의 발산처럼 여러 방향임을 제시하기도 한다. 오죽 했으면 유일신앙의 종교가 빛의 발산처럼 다양한 프로테스탄트가 생겼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다양한 방향의 길들의 전제로서, 신앙인으로서 철학자들은 신의 방향을 생각했을 것이고, 자연주의자 또는 유물론자는 자연의 이법을 아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상식에서 양식의 시대로 이행에서도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착하다’, ‘훌륭타’에 대해 공통감각은 토대로서 유지되고 있었다. 17세기 18세기 철학자가 인간의 자연(인성)을 말할 때도 인간이 자연의 이법에 따라 ‘착하다’와 ‘훌륭타’의 공통감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 자연에서 생명은 또 다른 방향이라는 것을 알린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이런 다양한 길들은 서양철학사에서 여러 과학들이 자기 방향과 범위에서 학문을 성립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루소의 정치경제학 제기에서 맑스(Marx)의 정치경제학 정립, 공산주의의 제기는 인식의 방식에서, 이항대립의 관계를 봉상스(양식)의 방향을 전도된 방향으로 보고, 앞뒤 상하를 뒤집어 놓았다. 그럼에도 같은 시기의 인류학과 언어학은 방향을 뒤집는 것이라 하기보다는 다방향의 문제제기를 하였으나, 산업사회의 편리와 풍요는 다방향의 성립보다, 제도 속에서 민중과 인민의 뒤집기(혁명)에 두려움으로 상층의 강화의 길로 갔다. 이 길이 봉상스와 같은 궤도에서 국가주의에 이어 제국주의를 형성하였다. 제국주의가 식민지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피식민지의 착취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런 시기에 생산력의 발달로, 벩송의 표현으로 원동기(모터)의 발명 이래로, 인간의 손이 기계에서 떨어져 나와 잠시라도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맛보았다. 이로서 자유의 문제가 과거와 달리 인민에게도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상층이 봉상스에서 ‘훌륭타’와 ‘잘 안다’를 결합하여, 국가제도를 체계에 맞게 위계제도를 굳건히 하고, ‘훌륭타’와 ‘잘 안다’는 산업사회에도 적합하며, 상층은 부를 누리고 위계의 상위를 당연하다고 여겼다. 상식의 시대에서는, 중국에서 평천하(平天下)든, 불교에서 안양정토(安養淨土, 불국토), 유럽에서 신 앞에 평등이든, 삶의 터전에서 사람들 사이의 위계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토지와 사회에서 역할을 차이정도가 있을 뿐이라 여겼다. 그런데 봉상스의 방향이 정해져 있다고 여기는 상층은, 계급의 형성을 체계와 체제에 대입하여, 현상의 인식을 바탕으로 권력과 권세를 백성과 대중에게 강요하였다. 여기에 지식의 권위가 봉상스의 방향과 일치를 내세우며 통일성을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지식의 통일성에 의한 정합성은 세계의 단일성도 당연히 여겼다.

맑스의 공산사회의 제기에 이어서, 레닌은 제국주의가 백성과 대중을 피식민지의 노예로 삼으려는 전략이라고 반대하였다. 산업의 발달에서 상층은 하늘 길, 땅 길, 물 길의 도구를 지배하여, 도구를 무기화 하면서 제국주의를 강화하였을 때, 유럽의 국가들은 국가들 사이의 상층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대항하여 식민지 제국주의의 대립각에서 소비에트 연방이 등장했다. 그리고 상층주의자들은 소련을 악마화하고, 소련이 피식민지 신생국가들의 지원을 막았다. 상층은 새로운 질서의 재편을 도모하는 가운데, 또다시 후발 제국주의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다. 20세기 초 소련의 등장이래로, 중후반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등장하였다.

상식의 시대에는 장하다 ‘훌륭타’라는 주제가 현실의 표면에 있었다. 봉상스 시대에서는 인간의 능력과 추론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여겼고, 국가주의를 넘어서 식민지 지배의 제국주의로 확대 강화하면서, 하나의 길이 정당하다는 강조의 길은 인간이 인간의 지배라는 광기(folie)로 들어섰다. 두 번의 전쟁은 광기의 극한으로, 유럽 우월주의 또는 유일신앙 지배를 봉상스로 착각하는 편집증의 망상에 이르렀다. 세계사는 소련과 중국이라는 체제가 자기 방향을 찾는 동안에,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재편된 미국은 두 나라를 악마화 하였다. 즉 20세기 후반에 미국과 유럽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로, 소련과 중국은 사회와 인간의 상부상조를 도모하는 사회주의로 재편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소련이 러시아로 바뀌었지만 기본토대로서 사익보다 공공성 우선이 여전하다고들 한다. 제국은 이들과 소통하지 않을 수 없지만, 식민지 대중들에게, 특히 남녘에서는 여전히 이들 두 나라의 사상을 악마화 또는 빨갱이로 마남(魔男)사냥을 강제하고 있다. 역사의 과정에서 벩송의 표현으로, 인민의 자유 실현은 간헐적이지만 지속하고 있다고 하고, 들뢰즈는 혁명은 간헐적이지만 폭발적이라고 한다. 어느 시절에서든지 평등과 자유의 의식은, 상식의 시대에 ‘훌륭타’는 봉상스에 가려 표면 밑에 있는 것 같지만, 20세기 두 차례나 솟아난다.

유럽 중심주의의 두 전쟁 동안에 세계지도와 인구지도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평면을 비교하면 사회주의 평면이 더 크다고 한다. 산업화에서 맑스와 레닌 다음으로, 어느 사람이 세계사에 빛을 던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즉 미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표면의 균열과 변화의 조짐은 다른 두 학문의 영역에서 나왔다. 하나는 1953년에 반도체의 부분이며, 정보기술(IT)이라 부르는 영역의 발명과 확장이다. 다른 하나는 그래도 생명과 연관된 DNA의 나선구조의 발견이다. 세계사는 표면 위에 사상의 다른 영토화를 제시하고 있다. 푸꼬(Foucault)의 용어로 보면, 세계의 표면에서 배치와 배열이 달라지고 있다.

상식, 양식, 20세기는 벩송의 표현으로 고등양식의 시대에 들어섰다. 인식은 표면의 현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포함하여 현재와 미래에 예상 참여하는 덩어리가 현존(현전)한다. 이런 과거-현재-예참의 재인식은 갑자기 도래한 것이 아니다.

상식의 시대에는 과거의 상상의 영역에서 원인에 대한 추구로서 공상에 가깝다. 그럼에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상식이전의 의식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했다. 즉 내재의식이 있다. 이런 의식을 양심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5식(5관) 이전에 기억(1식)을 실증적으로 탐구하고 인정한 것은 인류학과 고고학의 발달이었다. 기억의 현존을 실증하면서, 마치 지층의 단면들을 잘라놓은 것 같은, (과거와 현재의) 의식의 현존, 그 다음(예참)과 더불어 긴 덩어리(지속)를 이어가는 토대는 자연이지 신도 원리도 공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상식이 양식의 토대가 아니라, 상식은 오관과 더불어 의식을 형성하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이다. ‘훌륭타’는 공감하는 의식, 착하다는 실행하는 실천은 양식의 방향과 다른 방향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의미는 마치 언어에서 파라독사의 해결이 있었듯이, DNA의 구조와 독해 방식은 코로나19에 발생과 극복에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과학의 발달이 없었다면, 14세기 흑사병(페스트?)의 피폐 이상으로 인류 전체를 위협했을 것이다. 생명의 영역은 사적 이익과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조직화(유기체화)로서 다양체는 수학과 물리학의 연관을 넘어서는(도피안)의 영역으로 사유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질병 역학관계의 해결이 안정을 가져왔다고 여긴다. 자연은 자치, 자율을 넘어서 자발성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사유하지 못하는 유일신앙자들이 사적 이익으로 역학관계를 유지하며, 무기의 지배와 더불어 백신제작의 독점등과 같은 제국이라는 공상을 확장할 수 있다고 여긴다.

반도체, 즉 전류가 흐르지 않은 간격이 있으면서도 흘러가는 현상이 있다. 들뢰즈가 규소의 시대라고 하였다. 맑스의 표현을 빌면, 생산력 발달과 생산된 물질들이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다. 철을 중심으로 다룬 근 3천년의 시대에서 규소를 다루는 시대로 넘어가는 의식의 변화는 다양체라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철학 분야에서는 문명의 시대에서 문화의 시대로 전환 중이라 한다.

식민지 쟁탈의 제국주의가 지나가고, 화폐의 지폐로서 제국을 형성했던 미국도 현재로서는 단일화폐를 통한 지배체제가 와해되고 있다. 블록체인의 기술은 우선은 제국 하에서 비트 코인이 대리(표상)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정보기술의 시대에서 의식의 확장은 18세기의 “빛의 세기”처럼 봉상스의 방향과 다른 방향을, 차히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차히의 생성은, 21세기에 지구상에서 국가들 사이의 다극체를 열었고 한다. 1953년 이래로 꾸준히 계속된 지식 소통의 연결은 다극체의 형성 이전에 이미 다양체들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느끼며 살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유의 갈래에서 이중성이 있었다. 이오니아의 자연과 엘레아의 존재의 대비였고, 알렉산드리아의 자연조직학(푸지올로지카)의 이중성도 있었다. 르네상스에서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의 천체의 구조에 대해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나왔고, 같은 해 베살리우스(Vesalius, 1514-1564)의 인체의 구조에 대해 『인체 해부학 대계』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17세기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이원성의 논리전개, 18세기 자연권의 등장, 19세기에 사회학과 정치경제학만큼이나 의학(두뇌생리학)과 심리학의 정립이 있었다. 20세기에 미국과 유럽(일본 포함) 대 러시아와 중국(쿠바와 베트남 포함)의 대립구도가 있고, 21세기에 국가 간의 다극화시대 이상으로, 전지구적으로 누리소통(SNS)의 다양체화를 실행되고 있다. 소통의 도구로서 화폐의 지위가 어떻게 설정될 것인지가 문제로 남아있다.

 

우리 젊은이는 다극체의 시대에 러시아, 중국, 인도, 미국, 일본을 어느 쪽도 악마화 하거나 먼저 판단을 하지 말고, 역사의 과정에 대한 통찰과 통감(統監), 상호 비교할 수 있는 대조의 노력, 그리고 각각이 지향하는 여러 방향들에 대한 터전(토지, 영토), 등에 대한 탐색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마찬가지로 다양체의 시대에 얼마나 다양한 발신자들(블로거, 카페, 유튜버, 신문, 방송)과 젊은이 자신이 이들 매체들과 접속을 통한 연결방식(배치와 배열)에서, 푸꼬가 말하는 주체화가 성립할 것이다. 주체화는 자아의 위상 정립에 있다. 한 개인의 인격을 판단할 때, 그의 친구들과 읽는 책을 보면, 그 인품을 판별할 수 있다. 말하자면 김어준 겸공, 최욱의 매불쇼, 유시민의 민들레 등에서 접속에 의한 연결망과 태극기부대, 전광훈, 천공 등과 연결망의 연결은 전혀 다른 자아의 형성을 만든다는 것이다. 기술 정보 시대에 접속망에서 트래픽에 따는 도표가 그 사람의 인품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는 것이다.

그 만큼이나 러시아, 중국, 프랑스의 문화를 읽는 것과 미국, 영국, 일본을 읽는 것과 대비에서도 트래픽처럼 드러날 것이다. 전자에 연결방식이 많다면 ‘훌륭타’와 공공의 이익에 연관이 많고, 후자에 연결망이 많다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악마의 속삭임에 빠질 것이다. 르네상스에서 철기시대 마지막까지는 공적이익과 공산화를 악마화 하는 교육을 받았더라도, 그럼에도 다극화 시대, 누리 소통의 시대의 젊은이들은 70여년의 규소의 시대의 선두로서 ‘장하다’와 ‘훌륭타’로서 노력과 내공을 쌓기를 바란다.

철의 시대에 사는 늙이(노인)들은 생물학적으로 이제 곧 간다. 이제 규소 시대에는 젊이(청년)들이 살아갈 시대이다. 젊이는 자기 시대를 맞이하여, 세계를 그리고 자아를 접속방식의 변화를 통해서, – 지도 그리기의 일종인 트래픽이 말해준다 – 달리 접속하기를 통해서 푸꼬가 말하는 지도 제작보다 더 유쾌하고 즐겁게 세계(세상) 지도 그리기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마지막 달력에서 12.3 계엄령의 발표와 해제, 14일 반란 수괴로서 윤석열의 탄핵안 가결 등으로 한 줄로 표현할 수 없는 유기체들 사이에 새로운 조직화가 그려지는 숨가쁜 나날을 이어가고 있다. 여의도 국회 의사당 앞에서 젊은이들 대거 참여하였다. 다극화 시대, 다양체 시대의 주역은 21세기를 사는 젊은이들이다. “산자의 따르라”를 부르는 세대와 동시에 “다만세(다시 만난 세계)”를 부는 세대가 어우르고 있다. 과거-현재-예참을 내재하는 젊은이가 노래와 율동으로 추운 나날을 건강하고 힘차게 이끌고 가고 있다.

새로운 지도 만들기, 7공화정을 이끌 젊은이 만세! 혁명 만세!

(4:41, 57WLI) (5:22, 57W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윤석열의 망상과 분열에 대하여: 과학철학자가 보는 윤석열의 망상과 중독, 그리고 시급한 우리 문제 [윤석열 탄핵과 우리의 민주주의 – 시대와 철학] ②

윤석열의 망상과 분열에 대하여

 

과학철학자가 보는

윤석열의 망상과 중독,

그리고 시급한 우리 문제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원글 출처: https://philonatu.com/home/mainpage_view.php?id=361

 

윤석열의 기이한 행동 양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손바닥에 왕王자를 새기고 정치 권력을 쥐면서 한국사회의 정치-경제-문화-군사 모든 분야에서 퇴락은 시작되었다.

그의 정치적 미숙함에서 비롯된 권력 망상은 일제부터 이어져 온 기득권 집단이 잠재적으로 조직해 온 기회주의적 기획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검찰에서 국회까지 그리고 보수언론에서 대재벌까지 연쇄된 그들의 권력 유지 전략은 상시적이고 포괄적이며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라서, 그들은 이명박에서부터 박근혜를 거쳐 윤석열이라는 욕망의 캐릭터를 조립하여 말초 권력을 확장해가고 있다.

국회, 행정부와 사법부 및 군부까지 골고루 퍼져있는 권력 욕망 중독자들은 그들의 집단 아바타를 만들기 위한 중독 증상을 발현시키고 있다. 그 증상은 바로 난폭성과 기만성이다. 난폭과 기만의 증상을 일일이 설명하기보다 간단한 사례로 그들의 의도를 직파할 수 있다.

첫째, 난폭의 증상이다. 판사 출신 어느 인물은 윤석열의 계엄 행위가 “유혈사태”까지 간 것이 아니라서 내란 행위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끔찍할 정도로 섬뜩한 그러한 괴성은 피의 폭력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둘째, 기만의 증상이다. 무소불위 권력을 쥔 검찰과 안락함을 갖춘 대학교수에서부터 극우 유튜버에 이르는 사람들은 정적들을 비난하는 데 한결같이 ‘위선자’라는 기만적 프레임을 악용하고 있다. 자신들의 대죄를 묻어 놓은 채 상대방 일상생활의 소소한 흠결을 찾아내어 악성 공격에 몰두하는 그들의 모습은 자기-기만의 전형이다.

낭자한 선혈의 폭력이 아니라서 괜찮다는 난폭과 기만이라는 그들의 일상적 성정은 윤석열 개인의 심리를 이용하여 오늘의 끔찍한 내란을 유도하였다. 그렇게 결탁된 윤석열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일이 지금 상황에서 당면한 문제일 수 있다.

 

심리철학의 관점에서 윤석열의 심리상태는 다음의 다섯 가지 행동 양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1) 폭압적 행동 양식

(2) 악성 중독 증상

(3) 사회적 소통 장애

(4) 자기기만의 인지 부조화

(5) 주술 의존 망상장애라는 다섯 가지 행동 양식이다.

 

(1) 폭압적 행동 양식

폭력성과 타자 억압성은 윤석열 행동 전반에 깔린 심리기저이다. 심리적 폭력성 행동 양식은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의 후유증이 거나 과도한 자기중심적 인물이 상당한 권력을 소유했을 때 나타나 는 전형적인 증상이다. 윤석열의 경우, PTSD 사례로 보기보다는 후 자 즉 과도한 자기 중심성 심리가 그의 폭압적 행동 양식의 밑에 있다고 파악된다.

이런 행동 양식의 특징으로서 자기통제력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고 상대를 적반하장으로 공격하는 이중적 행태들이 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행동 양식에 대해 고치거나 변화하려는 태도를 일체 부정한다.

 

(2) 악성 중독 증상

윤석열의 술 중독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술 중독은 다른 양상의 중독 증상을 일으키는 기폭제로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술 중독은 언어폭력 중독과 자기제어 불능증을 배가시킨다.

술좌석에서 대장처럼 으쓱거리는 행동 양태들은 술좌석이 아닌 시간과 공간에서는 이성적 행위가 아닌 언어폭력 증상 그리고 술 마시는 자아와 술 못 마시는 자아가 분리되는 이인화 증상(離人症, Depersonalization)을 유도한다.

 

(3) 사회적 소통 장애

소통장애의 윤석열은 남들과 정서를 공유하는 데 결정적인 결핍상태에 있으며 나아가 공공성 있는 대외적 활동을 피하거나 심각하게 서툴다. 이미 대중매체에서 익숙히 봐왔듯이 윤석열은 대화상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부하거나 혹은 2.5 개 이상의 짧은 문장을 논리적으로 이어나가지 못하는 커뮤니케이션 장애 social communication disorder를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소통 장애는 상황 인지 불능을 수반한다. 상식적으로 독재자는 거대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관련자들에게 작은 권력을 적절히 분산하는 포섭전략을 사용하는 데 반해 윤석열의 독재방식은 소통 장애로 인한 포섭력을 갖추지 못해서 결국 그 스스로 나락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의 권력은 그 자신의 심리구조 때문에 오래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이런 설명은 너무나 일반화된 것이라서, 이를 조금이라도 눈치채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윤석열 권력의 파멸을 쉽게 짐작하기도 했다.

 

(4) 자기기만의 인지부조화

인지편향의 특징 중 하나는 인지편향 난관에 닥쳤을 때 탈출하는 방법이 자기-기만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반대 증거가 아무리 많이 드러난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부딪혀도, 양심에 벗어난 부정불법이 가득해도 자기만이 만든 자기합리화 속에서 자신을 변명하고 타인을 부정한다.

윤석열의 심리구조에서 자기기만의 인지 부조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대외경제력의 손상과 국민의 피해를 가져온 공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손상과 폐해를 시급히 회복해야만 대한민국이 다시 살 수 있다.

 

(5) 주술 의존 망상장애

윤석열이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주변에 주술과

미신을 권력의 도구로 악용한 사람들이 많다는 데 있다. 대중을 위한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 대신에 자기 이익을 위한 가짜 정치를 선택한 정치인 일반은 필연적으로 미신을 쫓게 되어 있다.

가짜 정치인은 자신조차도 규정하지 못하는 불안감에 쫓기게 되기 때문이다. 내면의 불안감에 쫓겨 외면의 미신을 쫓게 된다는 것이 주술의존 망상장애의 현상이다.

정치인을 포함한 다수의 권력자들이 점집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12.3 계엄을 공모한 이들 가운데 아예 무당이나 주술인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을 정도로 무당 정치의 괴이한 권력 구조가 실감 나게 연회되었다.

미신과 권력을 혼재시킨 개인적 망상들이 그들 사이에서 묵시적 합의로 변질되면서 거대한 집단적 주술 상징계로 정착된 것이 한국 권력사회의 특징이다. 이제는 그들 각각이 믿고 있는 미신을 실행할 수 있는 실질 권력을 누가 더 많이 가지느냐의 암투일 뿐이다.

왕王의 망상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주술적 집단 상징계로부터 보호받은 셈이다. 그리고 왕의 망상이 강할수록 뭇사람들의 상상은 갈가리 찢긴다.

주술 의존성은 망상과 자기 통제 불능의 일상을 대신하는 특징을 지닌다. 일상의 생활인이 재미 삼아 점집에 방문하는 것과 다르게 대통령의 주술 의존성은 국가의 정체를 무너트리고 공공성의 파멸을 가져온다.

 

자행된 폭압과 소통 장애, 미신과 중독 증상들을 그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거꾸로 자신의 불법과 폭력, 부정과 독단을 확대 재생산하려는 오도된 윤석열의 의지를 방치하는 것은 곧 국가의 시민으로서 시민 됨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윤석열 개인 차원의 심적 증상은 윤석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온 국민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윤석열의 행동 양식과 의지 양태가 발현되지 못하도록 대통령 행위를 시급히 단절시켜야 한다.

시간이 정말 급하다.

그런 다음 술중독이나 주술중독 치료 등 그에 대한 개인적 심리치료를 나중에 천천히 하도록 배려하면 더 좋다.


문구: 조배준, 편집: 정희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국선언〉 영상|2024년 12월 14일 [윤석열 탄핵과 우리의 민주주의 – 시대와 철학]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12월 3일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을 독재자의 야만적 폭거이자 반란으로 규정하는 대다수 시민들과 뜻을 함께하여 2024년 12월 12일 시국선언문을 작성하였습니다.

시국선언문은 회원들의 동의를 얻어 웹진〈ⓔ시대와 철학〉에 게시(http://ephilosophy.kr/han/57059) 하였으며 이어 12월 14일(토) 숭실대학교에서 거행된 제66회 정기학술대회에 연효숙 회원(전 한철연 회장)의 주도로 참석한 회원들이 함께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탄핵구호를 외쳤습니다.

같은날 오후 4~5시 경 국회에서는 찬성 204명, 반대 85명, 기권 3명, 무효 8명으로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습니다.

한철연은 헌정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윤석열을 즉각 체포하여 구속할 것을 요구합니다. 또 잘못된 권력의 범죄에 복무한 김건희 및 그 부역자들을 철저하게 처벌할 것을 검찰을 제외한 수사기관에 강력히 요구합니다.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ITJ3EVBCcSw?si=E3IVogLdVwNfJJyI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국선언 전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국선언문〉 [윤석열 탄핵과 우리의 민주주의 – 시대와 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국선언문〉1

 

 

지난 12월 3일 밤 우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민주 공화국의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자가 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하여 정치적 반대자들을 처단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이는 민주 공화국을 부정하는 독재자의 야만적 폭거이자 명백한 반란 행위다.

민주 공화국을 전복하려는 반란 수괴의 야수적 책동에 경악한 시민들은 황급히 국회로 달려가 맨몸으로 반란군의 진입을 막았다시민들의 용기 덕에 국회의원들은 반란의 시계를 잠시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야수의 밤은 끝나지 않았다반란 수괴와 하수인들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반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45년이 지난 오늘 반란 수괴 윤석열은 자신의 범죄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고도의 통치 행위이자 구국의 결단이라고 강변하며 지지자들의 결집을 호소했다자유와 민주가 살해당한 순간이었다.

이 자의 썩은 내 나는 발악에 대법원과 국민의힘은 기다렸다는 듯이 호응하고 나섰다반란군의 총칼은 막았지만반란 동조 세력의 반동적 음모는 사그라지지 않았다더구나 군 통수권은 아직도 윤석열에게 있다이 자가 외환을 구실로 내란 범죄를 덮으면서 영구 집권 시도를 하지 않으리라고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방심은 이르다.

동은 아직 트지 않았다야수의 밤을 끝내고 민주의 아침을 맞이하려면 반란자들의 2차 책동과 암약을 막아야 한다우리는 민주 시민의 이름으로 다음을 명령한다.

하나탄핵 가결을 방해한 국민의힘은 국민에게 사죄하고 탄핵 가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물론반란 수괴 윤석열과 그 부역자들을 출당시켜라.

하나검찰은 내란 범죄 수사에서 당장 물러나라내란 범죄 수사권이 없는 검찰의 개입은 공소 기각을 노린 것이라는 의혹을 사고 있다더구나 검찰은 이미 국민의 믿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하나경찰과 공수처는 반란 수괴 윤석열과 내란 중요 임무 종사자들을 긴급 체포하라.

하나헌법재판소는 시민들의 민주적 의지에 부응하여 탄핵 심판을 통해 윤석열을 파면하라.

하나보수 언론은 언론 중립을 구실로 반란 옹호론을 묵인하거나 교묘히 확산시키려는 시도를 포기하라.

이 모든 것은 특정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민들의 직접 참여를 통해 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반란 수괴와 하수인들의 처벌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민주화 이후 사상 초유의 헌정 유린을 경험한 우리는 87년 헌법의 취약성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현재의 헌정 체제는 내란을 획책한 대통령이 선출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물론이요그것을 지지하거나 묵과하려는 이들이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대한민국 국민은 오인된 자유주의가 입헌 민주주의 체제를 치명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목격했다우리 국민은 시민의 민주 역량을 폄하하고 직접 민주주의의 계기를 봉쇄하는 과두적 민주주의 체제가 어떻게 독재자의 준동을 용인하고 입헌 민주주의 질서를 위기에 몰아넣는지 절절하게 경험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입헌 민주주의 체제를 세워야 하는 헌법의 순간에 직면했다새로운 입헌 민주주의 체제는 오염된 자유를 평등과 연대의 정신으로 정화해야 한다시민들이 입법사법행정 엘리트들의 통치를수탈적 자본의 지배를 민주적으로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다양하게 마련하고헌법으로 보장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제해야 한다.

야만의 밤국회 앞에서 야수들의 이빨을 맨몸으로 막으며 몰아낸 민주 시민들의 기백과 지혜를 보라반란군의 총이 두려워 국회를 버리고 도망간 의원들에게반란 수괴의 위세에 질려 반대할 엄두도 내지 못한 장관들에게이태원에서 죽어간 청춘들에 대한 애도조차 금지하는 지도자들에게 나라를 맡기는 체제가 과연 건강한 것인가더는 우리 국민의 용기와 지혜를 의심하지 말라우리 국민을 모욕하지 말라민주 시민의 용기와 지혜를 믿으면서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을 세우도록 하자야수들이 날뛰는 야만의 밤을 몰아내고 누구도 지배하지 않고누구도 지배받지 않으며누구도 저버리지 않는 참다운 민주 국가의 아침을 맞이하자.

민주 시민 만세!

민주주의 만세!

민주공화국 만만세!

2024년 12월 12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일동

 


 


윤석열이 내팽개친 열 가지 가치, 함께 되찾아 가야 할 열 가지 가치 [윤석열 탄핵과 우리의 민주주의 – 시대와 철학] ①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이 내팽개친 열 가지 가치,

함께 되찾아 가야 할 열 가지 가치

 

조배준(숭실대)

 

공화국 : 비상계엄을 빙자해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 친위쿠데타의 어설픈 시도

국민 : 주권자들의 명령을 거부하고 국민의 생명, 안전, 자유를 담보로 내란을 획책한 엄중한 죄

민주주의 : 자유민주주의를 운운하며 민주 헌정을 유린한 군사테러

책임 : 국가 위상과 외교를 박살 내고, 세금과 국력을 낭비하고, 경제지표를 위기에 빠뜨린 대표자의 망국적 배임

정치공동체 : 민족분단과 민중의 피, 땀, 눈물 위에서 구축한 역사의 진보에 대한 신뢰를 깨버리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민중 자치의 상상력을 짓밟는 반역적 도발

평화 : 일상의 안녕과 시민성의 문화를 경악, 공포, 분노의 감정적 소모로 소진케 하는 심리적 만행의 무도함

치유 : 군부독재의 국가폭력으로 인한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고통을 모독하는 몰역사성

인권 : 시민의 기본권과 헌법적 자유를 말살하더라도 폭력으로 지배하면, 정권의 거짓과 멍청한 탐욕을 뒤덮을 수 있다고 믿었던 전 사이비 법률가의 피폐한 양심과 참담한 인격

정의 : 시민사회의 상식과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하고, 실체적 진실을 조롱하고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인식한 퇴행적 무지성

인간성 :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인륜적 판단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저버린 파렴치하고 몰염치한 공공의 적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비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와 87체제의 질곡에 갇힌 우리 시대에 대한 서늘한 얼굴의 자화상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 여러 회원은 2024년 12월 3일 화요일 밤 기습적으로 자행된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 사태를 심판하여 현재 대통령직에 있는 윤석열과 그의 부역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윤석열 탄핵과 체포·구속운동에 민중과 시민의 이름으로 동참할 것입니다. 우리는 탄핵 정국과 그 이후까지 무너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실천으로 이 지면에 현 사태를 대하는 철학·정치적 견해를 연이어 기록합니다. 민주주의가 파괴된 날이 민주주의가 더 명확하고 새롭게 건설되는 시작임을 스스로 잊지 않도록 새기는 것입니다.

문구: 조배준, 편집: 정희수

[내용 수정 재공지]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4년 가을 제66회 정기 학술대회(12월 14일, 토, 오전11시~오후17시) 알림 [한철연소식]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4년 가을 제66회 정기 학술대회 <철학의 뉴페이스: 신진 연구자들의 목소리>를 안내합니다.

<알림>

안녕하세요.

한철연 학술 3부입니다. 학술 발표회 일정 조정에 대한 양해를 구합니다. 지난 12월 3일 우리는 대통령에 의한 내란 시도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습니다. 다행히 1차 시도는 불발하였으나 내란을 일으킨 자가 여전히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국군 통수권을 비롯한 통제 권력을 유지하는 상황이라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점은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국민이 안심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탄핵이 헌법이 보장한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도 아실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한철연 연구협력위원회에서는 다음 주 국회에서 예정된 탄핵 가결 2차 투표에 힘을 모으기 위해 한철연 회원들과 함께 국회의사당 집회에 참여하자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최초 공지한 일정을 앞당겨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학술대회를 마치고 집회에 참석한 후 저녁 즈음에 뒤풀이를 할 계획입니다. 참석 여부는 회원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기고자 합니다.

이에 먼저 발표자, 토론자, 사회자 선생님과 참석 예정이신 여러 선생님께 일정 단축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조정된 일정은 아래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들께 미리 의논하지 않고 결정을 하여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큰 실례인 줄로 압니다만 아무쪼록 너른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철연 학술 3부장 한길석 올림.

 

이번 정기 학술대회는 한철연 신진 연구자들의 연구성과를 모아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데카르트, 칸트, 마르크스, 최제우, 레비나스, 빌렘 플루서까지

철학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지금, 젊은 연구자들이 옛 철학자들의 사상을 다시 읽고 풀어냅니다.
이 자리의 목소리를 듣고 오늘날 철학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주제: <철학의 뉴페이스신진 연구자들의 목소리>

일시: 2024년 12월 14() 11~17시

장소숭실대학교 진리관 522

 

 

[신간안내] 『슈티르너 비평가들』(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주석|알렙|(2024년 11월 25일) [한철연 소식]

『슈티르너 비평가들』(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주석)

 

웹진 <ⓔ 시대와 철학> 블로그진에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를 연재하고 있는 박종성 회원(건국대)이 신간 번역서를 내놓았습니다.

이미 2023년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독일어 원전으로 최초 완역하여 발간(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했던 역자는  이번에도 역시 국내 최초로 막스 슈티르너의 『슈티르너 비평가들(Recensenten Stirner’s)』 독일어 원전을 완역하였습니다. 주요 구문에는 옮긴이가 충실히 주석을 달아 독서의 편의와 함께 역서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이 책은 19세기 철학사에서 가장 도발적이고 혁신적인 에세이로 손꼽히며 슈티르너 철학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인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논쟁 지평을 확장하는 혁신적인 에세이이로 일컬어집니다. 

당대 주요 사상가들과의 논쟁을 담아내어 독일철학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심화할 수 있는 책입니다. 유일자로서 인간다움이 곧 자기다움이라는 화두를 던져주는 책 『슈티르너 비평가들』(2024)입니다.

“모든 번역이 그러하듯이, 『슈티르너 비평가들』의 번역은 힘들었다. 하지만 그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17쪽, 옮긴이 서문 중에서)

 

♦ 책 소개 (출판사 제공)

19세기 철학의 지각 변동을 일으킨 혁신적 에세이
『슈티르너 비평가들』의 국내 최초 독일어 원전 번역・주석본
 
철학적 혁명, 개인의 자유를 외치다!
막스 슈티르너의 통찰이 담긴
급진적 반박의 목소리를 만나다.
 
막스 슈티르너의 『슈티르너 비평가들(Recensenten Stirner’s)』이 국내 최초로 독일어 원전에서 번역되었다. 이는 슈티르너의 대표작인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 대한 비판을 직접 반박하는 그의 사상적 핵심을 담고 있다. 이 책은 19세기 철학사에서 가장 도발적이고 혁신적인 에세이로 손꼽히며 슈티르너 철학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인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논쟁의 지평을 확장하는 혁신적인 에세이이다.
 
슈티르너의 철학은 20세기에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실존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적 뿌리가 되었다. 그는 19세기 당시에는 헤겔 사상에 대한 우파와 좌파 모두의 해석을 무너뜨렸고,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반도 지적으로 무너뜨렸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급진적 대안을 제시했다.
19세기 초반, 아직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이론적 지반이 형성되기 전에 출현했던 문제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 당시 독일 사상가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 1부의 2/3가량을 슈티르너를 비판하는 데에 할애했고, 스첼리가, 포이어바흐, 헤스와 같은 저명한 사상가들은 그의 책에 신랄한 논평을 가했다. 주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 ‘자기중심적 사람’, ‘자기중심적 사람들의 연합’이라는 문구들에 대해서였다. 슈티르너는 이미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방대한 저서를 통해 이를 주장했음에도, 그의 책에 가한 논평과 논적들에 대적하여, 그의 ‘유일자’ 개념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따라서 『슈티르너 비평가들』은 당대 주요 사상가들과의 논쟁을 담아냄으로써, 그의 철학적 입장을 더욱 깊이 탐구하고자 한 시도이다. 슈티르너는 무엇보다도 ‘보편적 인간’의 개념을 부정하고, ‘개인의 독창성’과 ‘자기 주체성’을 강조했다. 슈티르너의 비판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서부터 실존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사조를 예고했으며, 21세기에도 주목받고 있는 철학적 원천이다.
 
막스 슈티르너, 철학의 해체와 창조를 외친 사상가
 
막스 슈티르너(1806-1856)는 바이에른의 바이로이트에서 태어나 헤겔의 강의를 듣고 영향을 받으며 철학적 기초를 다졌다. 그는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자기 소유를 주장하며 기존 철학과 사상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그의 철학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반을 비판하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실존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적 토대를 마련했다.
『슈티르너 비평가들』은 철학적 논쟁의 기록이다. 슈티르너는 이 책에서 포이어바흐, 헤스, 스첼리가의 비판에 응답하며, ‘유일자’라는 개념의 진의를 밝히고자 했다. 그가 말하는 ‘유일자’는 그저 공허한 단어가 아니라, 각 개인의 독립적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유일자는 단지 이름일 뿐이다. 그것은 그대가 그대 자신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개념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추상적 개념이나 이상적 범주로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로 살아야 하며, 보편적 가치나 도덕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 철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슈티르너 비평가들』은 슈티르너를 비판했던 포이어바흐, 스첼리가, 헤스의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철학적 개념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유일자’의 개념
슈티르너는 ‘유일자’를 모든 개인을 지칭하는 단순한 이름으로 정의하며, 이는 개인의 고유성과 자유를 강조한다. 그는 포이어바흐, 헤스, 스첼리가 등 동시대 비평가들이 유일자를 내용 없는 공허한 단어라 비판한 것에 대해, 유일자는 특정 개념이 아닌 개별적 존재를 지칭하는 비(非)개념적 이름이라고 응수했다. 유일자는 고정된 속성을 지니지 않으며, 오직 개인의 행위와 자각을 통해 규정된다. 그는 이러한 설명을 통해 종교적 관념이나 보편적 인간 개념이 개인의 독창성을 억압한다고 주장했다.
 
‘그대’가 유일자의 내용이다
슈티르너는 유일자가 ‘그대는 그대’라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이는 개인이 그 자체로 가치 있고 고유하며, 특정 속성이나 보편적 개념에 의해 정의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포이어바흐가 주장한 보편적 인간 본질에 반대하며, 그는 인간의 개별성이야말로 인간다움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모든 사람의 고유한 본질은 개념화될 수 없으며, 개인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실재적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자기중심적 사람’은 세계의 중심이자 자기소유자이면서 신성모독자이다
슈티르너는 자기중심적 사람을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정의하며, 그들이 외부의 신성한 가치나 이상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이익과 관심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존 사회와 철학이 개인의 자기중심적 성향을 억압하며, 이를 죄악이나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해 왔다고 비판했다. 신성한 양심과 같은 외부의 강제적 가치에 맞서 개인은 자기 자신의 관심과 욕망을 지키며, 이를 통해 자기소유자로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기중심적 사람들의 연합’은 자기관심, 자기향유, 자기성취, 상호의존, 호혜주의이다
슈티르너는 개인들이 상호의존과 호혜주의를 바탕으로 자발적 연합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연합은 사회나 국가처럼 강제적 의무가 아닌, 각 개인의 자기 이익과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관계로 구성된다. 그는 연합이 고정된 체제가 되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며, 연합은 자유롭게 형성되고 해체될 수 있는 관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와 ‘창조가 깃든 무’
슈티르너는 개인을 ‘창조가 깃든 무’로 정의하며, 인간은 자신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을 개념적으로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판하며, “나는 나이다”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선언을 통해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외부의 관념이나 개념이 아닌, 오직 개인의 경험과 자기 자각에서 비롯된다.
 
슈티르너는 개인의 독창성과 자유를 최우선으로 강조하며, 보편적 개념, 종교적 관념, 사회적 이상이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유일자’와 ‘자기중심적 사람’ 개념을 통해, 각 개인이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하고 창조하며, 자발적 연합 속에서 타인과 관계 맺기를 통해 자기 이익을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철학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미친 선구적 사유로 평가받는다.
『슈티르너 비평가들』은 단순히 철학적 논쟁의 기록이 아니다. 이 책은 기존의 관념을 해체하고, 각 개인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슈티르너의 도전적이고 독창적인 사유는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주며, 철학적 자유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막스 슈티르너가 남긴 두 저작

슈티르너의 방대한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철학적 주장과 체계를 제시한 텍스트라면, 『슈티르너 비평가들』은 이에 대한 구체적 반응을 분석하고 논박하는 실천적 논쟁 텍스트이다. 즉, 자신의 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설명하는가 하면, 그에 대해 쏟아진 비판에 대한 견고한 방어 논리를 구축한다. 『슈티르너 비평가들』은 전작에서 생략된 설명이나 모호했던 부분을 구체화하기도 했다. 특히, 특정 비판자들의 논지를 직접 인용하고 반박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재차 강조한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와 『슈티르너 비평가들』은 슈티르너 철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으로 연결되는 저작들이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철학적 출발점이라면, 『슈티르너 비평가들』은 그것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슈티르너 사상을 더 깊이 탐구할 수 있는 창을 제공한다. 두 저작은 서로를 보완하며, 슈티르너의 사상을 비판적 맥락에서 더욱 명료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 알렙 출판사 블로그 책 소개

알렙 새 책 : 철학적 혁명, 개인의 자유! 막스 슈티르너의 <슈티르너 비평가들>

 

옮긴이 박종성 소개

박종성은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2014)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2020, 제8회 소송小松 학술상 수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유일한 사람의 사랑」(2021),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2022), 「철학자를 조롱하는 철학자」(2023)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는 『코뮨의 미래』(2022, 공저), 『대화로 철학하기』(2023, 공저), 국내 첫 독일어 원전 번역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년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국내 첫 독일어 원전 번역 『슈티르너 비평가들』(2024) 등이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강의초빙교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로 재직 중이고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책의 목차

옮긴이 서문

슈티르너 비평가들
스첼리가
포이어바흐
헤스

옮긴이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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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start=short&ItemId=353048010

책 속으로(옮긴이 서문 중)

경탄할 나라에서 모험들 [천 하룻밤 이야기]

소설(小雪): 경탄할 나라에서 모험들

– {# 앨리스가 경탄할 나라에서 겪은 모험(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 2024 11 22. 소설(小雪): 산간에서 눈이 오는 것을 대비해야…

  누구나 배워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행복, 열락(悅樂), 즐김, 고요, 소박함을 추구 하고 산다. 탐욕의 쾌락, 지식과 독단의 오만, 하나의 방식을 다른 모든 것에 적용하려는 치졸함, 탐만치가 독약이라고 고타마 싯달다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문자를 통해 기록을 남기는 과정에서 인류는 익히 알고 있다. 실증과학의 발달 이전에, 문자화가 우선이고 우월이라고 느꼈다. 그러함에서 세계와 자연의 변화에서, 인민이 노력과 내공을 통해 삶의 터전을 바꾸어 간다고 알게 된 것은 250여 년이 채 안 된다. 그럼에도 긴 시간의 흐름에서 보면 느리지만, 세대들의 사이에서는 경과의 흐름은 점점 빨라, 세기의 구분에서 세대의 구분으로 바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과 비슷한 시기에, 실증과 비슷한 실학이라는 방법이 있었음에도 자연과 인민 속에서 그 보다 상부와 문자에 의존하여, 입말로 표현된 문자화로 이루지 못하고, 이제 겨우 백성들 속에서 나랏 말씀을 79년째 공용화하고 있다. 아직도 이루어야 가야할 내공(토노스 τόνος)이 더 필요하다. 삶은 노력(포노스, πόνος)이 먼저이다.

   오래 전에 미국 영화에서, 한 백화점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실재 인물로 설정하여 돈을 버는 것을 두고, 이 백화점의 상업주의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누군가 산타가 실재 인물이 아니라는 소송을 걸었다. 변호를 맡은 인물이나 이에 동의하는 이들은 당연히 산타가 실재인물이 아니라고 한다. 영화는 변호인이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진행되었는데, 그 변호인의 여섯 살 아들이 아버지에게 산타가 실재하지 않으면, 누가 나의 착한 행동에 선물을 주었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산타가 너에게 선물했다고 선언한다. 이로서 재판에서 변호사가 지고 백화점이 이겼다.

   우리나라 극우 정부들이 인민을 대하는 방식은, 이익집단의 사적이익에 대한 문제제기를 마치 산타의 현존의 문제로 바꾸듯이, 문제거리를 여럿으로 잘라서 그 중에 작은 잘못을 끄집어내어, 법률적으로 문제를 규정하여 자기의 이익의 착취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 같다. 꼬리 자르기라는 표현은 사건들의 비교도 아니고 사실들의 대조도 아니며, 게다가 실증적이지도 않다. 역사적으로 왜 이런 사태들이 지속되고, 성명서를 내야 하는가. 우리 입말과 문자의 학문적 전통이 아직 층위가 얇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노력이 모자란다. 학자들이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이런 자들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는 박홍규(1919~1994)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다.

  — 그러나 학문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가까운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의 학문적 전통의 층위가 얇아진 이유가 노정되어 있어 매우 안타깝다. 조선 초기에 평천하의 이상을 지녔던 사림파의 전통이 이익집단의 사장파들에 의해 제거되고서 오랫동안 다시 회복되지 못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유배와 낙향하는 선비들의 학풍인 실학이 등장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가 침탈하면서 사장파의 후신인 노론이 일본에 투항하고 미국에 포획되어 상층의 층위를 만들고 말았다 —

   서양 철학사는 흥미롭다. 우선 서양은 이오니아학파(자연주의)와 엘레아학파(관념주의)의 대립에서부터 아테네 시절에 민주정이라는 제도를 맛보았다. 게다가 가능성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가상성이 언젠가 실현되리라고 여기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사유’가 실재한다고 믿는 아테네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에 이방인 출신이 퀴니코스 학파에게 배운 스토아학자인 제논의 후배들은 현실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있을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찰나(le moment)처럼 이미 만들어진 사건이 누구도 고칠 수 없고, 그 있었던 사건으로 실재한다고 한다. 다른 한편 현재의 순간(un instant)은 끊임없이 지속하며 현존하면서도, 마치 신체처럼 변형하며(몸의 크기), 변질하며(피부의 색깔변화), 변화하며(먹고 자고), 살아가면서도 하나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실재성이 있다고 한다. 전자들의 이상적이고 추상적 사유가 서양 학문발달사에 추동력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후자들의 사유에서, 아테네의 영원과 시간의 용어 규정과 달리, 영원(찰나)과 시간(순간)의 구별에서는 현실의 삶은 사건들 속에 이중성(또는 다중성)이 있고, 그 이중성 안에는 여러 관계들과 이와 더불어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연관들과 연대들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투로서는 후자들의 삶이 현실적이고 진솔한 삶이라고 하면서도, 전자들의 이야기로부터 삶을 규정하고 재단하고, 그리고 판단하고 심판하려고 든다. 전자의 플라톤주의와 후자의 스토아주의 사이의 차이다.

   다시 플라톤주의의 이상(공상)을 잇는 주지주의자들은 이상세계가 실재한다고 믿고, 하늘나라에다가 영원을 심었다. 이에 비해 스토아주의 합리(이법)주의는 현실에서 변하는 실재성을 현실이라 두고, 불변하는 찰나들이야말로 영원하고, 순간은 삶의 태도와 행실에 따라 달리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들 사이에서 또 다른 하나가 있다. 삶은 행실에 따라 다르지만, 그 행실이 자연 자체에서 또는 자연에게 인간이 관여하는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이 있다. 게다가 거꾸로 인간의 행실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의 연속, 즉 드라마 같은 장면(국면)들로 연결된 이야기들 또는 판단들로 된 기록들이 있다. 이처럼 역사는 다른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다. 인간이 현상 속에서, 또는 현실 속에서, 또는 이야기의 역사 속에서 산다는 것이, 인류 역사에서 많은 관점들과 국면들을 표출하였다.

   장면들의 연속으로 이야기들의 끝이 거의 다 권선징악으로 흐르는 것은 여전히 주지주의자들의 이상이 그래도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늘나라를 설정하길 잘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 삶에서 노력과 내공을 쌓은 일을 하면서 평생(환갑, 요즘 표현 80평생)을 착하게 살면서 섭리(φρένες, 프레네스)에 맞게, 진솔하게 살았다고 자족하는 이들이 있다. 이 삶의 순간의 지속은 한 덩어리이고, 마치 개미 쳇바퀴였다고 하더라도, 자연으로 돌아간다(한줌의 재, 한줌의 흙)는 소박한 생각에 미치면, 평생을 착하게 살아가게 하는 하늘나라를 설정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한평생이 짧지만, 역사의 과정 속에서 삶의 우여곡절은 마치 타산지석처럼 다음 사람들에게 거울이 되기도 한다.

   하늘나라든, 순간의 지속이든, 둘 다 삶의 현장(상황, 터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유의 방식이 영원을 생각하는 관점이 뒤바뀐 것으로 보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구나가 이 터전에서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방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도덕성에 관심이 내재해 있다. 이 관점을 먼 미래에 두던지, 현실에 두던지 간에, 경건, 돈수(頓修), 행복, 즐김(열락) 등은 하나의 최선(온선)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온선에 이르는 방식, 방향, 노력, 내공은 각 개인에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온갖 변증술(소피스트), 논변술(플라톤), 변론술(종교옹호가), 수사학(연설가, 교육자), 반박술(변호인), 산파술(소크라테스) 등을 만들고 활용하였다. 그러한 이야기가 전승되어 온갖 논의, 토론, 담론, 서설, 강연 등이 있다는 것은, 그 만치 많은 사건들의 경우의 수들이 많아져서, 이 사건들을 분할하여 이항 대립으로 설명하기에는 이에 벗어나는 항목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항 대립을 하나로 통일(통합)하는 변증법이라는 것 자체가, 지식 체계와 사회 체제를 성립하게 하는 원리(규칙, 공리)를 먼저 인정하는 것인데 비해, 현실에서는 다른 경우의 수들이, 갈래들이 많아진다. 인간은 적어도 기원후 천년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은 종교의 시대였다. 한 쪽은 유일신앙으로 다른 쪽으로 동양은 불교의 시대였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까지 그러하다.

여기서 통합과 통일에 이르는 방식을 안으로 들여다보면, 수 세기의 과정들에서 서적을 쌓은 두께만큼이나 또는 마치 지층과 같은 층위만큼이나 사건들이 쌓여 있다. 기록 문헌이 있기에 사건들마다 검토해 보는 노력이 생긴다. 묘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동양의 통감(通鑑, 비추어보기)이란 용어나, 서양어로 사변(speculation, 거울 비추기)이란 용어가 이런 과정에서 나온다.

   주지주의와 스토아주의의 학파들이 관여했던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에서, 전개된 철학적 사유는 사건들 속에서, 어쩌면 세계주의(코스모폴리트, 세계시민주의) 속에서 사건들을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제국과 같은 참주제(황제제)에서 인간은 순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개인은 사건들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의 유지가 절실했으리라. 이에 사건의 드라마로서 유일신앙이 개인에게 개입했다고들 한다. 너희 (각자)에게 천국이 있다고, 바울은 크리스토스 속에 있다고 바꾸었지만 말이다. 이상도 자연도 밀려났지만, 수 세기를 거치면서, 인간들의 삶의 관계와 연관의 다양성에서, 사건들의 이야기(드라마)들은 여전히 전개되고 있었다.

   이 사건들의 연쇄에는 원인과 귀결이 규정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고, 우발적이고 우연적이고 특히 주사위 놀이처럼 아자르(hasard)라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사건들이 이어지는 계속들을 시대의 과정들로 생각하고, 또는 마치 지층의 두께들처럼 서로 다른 층들이 이어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이상적 규정과 이법적 조성(composition)과 달리, 자연의 층위도 그리고 역사의 단계들도, 연속과 지속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층들 위에 층을 쌓는 단절들의 두께이다. 이 불연속적 층들의 두께가 역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연에서도 인간에서도 마찬가지의 두께와 층위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 생리학(physiologie, 자연조직학)에 대한 발상에서 왔다.

기나긴 세월 동안에 쌓인 층들의 이야기를 한 줄로 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빛이 무한 방향으로 발산한다는 것도 안다. 빛을 통해 거울에 비추기에서, 수많은 방향으로 발산하는 빛살들 사이의 대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들 한다. 통감의 시대에서 대조의 역할이 들어섰다.

  개별 학문들이 자리를 잡아야 대조의 방식이 보다 더 분명해 질 것이다.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이 자기 방식으로 층위와 영역(영토화)을 이루어 가면서, 대조에는 항들의 분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우주론적 사고), 발생의 분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을 다시 생각해 낸다(우주발생론적 사유). 사실 유일신앙은 이즈음에 거의 망조가 들었는데, 이 종교는 인간을 겁박하고 위협하면서 자기의 현존을 이어갔다. 이 현존 방식을 신학적 생리학(신앙자들의 조직학)이라 할 수 있고, 이를 성립시킨 것이 로마의 군대조직처럼 상명하복의 제수이트들이었을 것이고, 이들이 아메리카 장악에서 얼마나 많은 제노시드(인종학살)를 행했던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역사의 조직화는 천문학의 조직화, 인체의 조직화와 함께 더불어 이루어진다. 그리고 역사의 드라마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무엇”인지 규명하기를 추구한다. 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 연대와 사건들의 대조에 이어서 학자들은 자연을 두고 ‘자동적’이라고 이해하는 태도를 바꾸어 ‘자발성’의 의미로 이해하면서 자연의 자기 생성과 자기 발전을 탐구하고 탐색한다.

   드라마는 왕실과 성직자들에서 또는 국가권력과 사대부들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백성, 대중, 인민 속에서도 있어왔다. 이들은 삶의 터전에 있었고, 저들은 이익과 지위의 보존에 있었을 뿐이다. 동양에서도 항상 백성이 하늘이라 하고, 수운 최재우가 인민을 하늘처럼 모시라고 시천주(侍天主)라고 하였듯이, 서양에서도 인간이 자연에서부터 또는 빛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러고 나서 새로운 계층인 제3신분도 등장했다. 다음에는 프롤레타리아도 등장한다. 이런 인민의 등장이 의식의 주체화인 셈이다. 삶의 터전에서 공감성이 먼저 있고, 그리고 일반화와 개념화는 나중이다.

  이 글을 여기까지 다시 고쳐 쓰고 있을 때까지도, 자랑스러운 서울대 동문으로 윤석열을 선정한 적이 있었던 그 학교에서, 이 영향은 아니겠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 선언문은 나오지 않았다. 참고로 예전에 내가 만났던 서울대 출신 교수들 중에서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을 인정하는 교수들과 인정하지 않는 교수들 사이의 경계가 1971학번이었다. 지금 이들이 정년으로 모두 퇴직했는데도 여전히 서울대 교수들이 극우집단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세대의 경계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태도에 있을 것이다. 철학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지배 아래 있는 앵글로색슨 철학이 주류이기 때문이리라. 바깥과 비교하는 통감과 대조의 방식을 넘어서, 인민 속에서 새로운 생성이 도래해야 할 것이다.

(3:12, 57VMA) (4:015, 57V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65)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5)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최상의 배움, 좋음의 이데아 서론(502c-507a)

 

*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철학자)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501e) 플라톤은 마침내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그토록 꺼내고 싶었던 생각 즉 철학과 정치의 결합이 갖는 필연적 정당성을 과감하게 선언한다. 사실 플라톤은 <국가> 제1권에서 통치자를 언급하기 시작할 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철학 통치자를 언급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길고 먼 길을 돌아 지금에야 털어놓는 것은, 만일 그렇게 했을 경우 아예 논의 시작부터가 어렵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화자들은 물론 선입견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득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제4권까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에 관한 기본 틀을 제시한 후 제5권 이후 대화자들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논의 방향을 전환한 후 그것을 계기로 이제 철학과 철학 통치자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이 국면에서 플라톤은 무엇보다 우선 철학자가 세상의 평판과 달리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엄밀한 의미의 수호자로 적합한지를 적극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그러한 철학 통치자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즉 철학 통치자가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가를 심도 있게 제시하려 한다. 그리하여 논의는 이제 철학 통치자 즉 철학자 왕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 과정으로 전환되고 마침내 철학자 왕의 가장 크고 중요한 배움으로서 이른바 ‘좋음의 이데아’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가 핵심 논의 주제로서 제기되기에 이른다. 우리에게 잘 알려 있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정점에 자리한 가장 어렵고도 핵심적인 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로써 우리는 드디어 이제 <국가>를 통해 플라톤이 계획했던 철학적 논의의 최정점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 제7권 ‘동굴의 비유’까지 이어지는 가히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논의는 이렇게 시작한다.

 

[502c-507a]

* 소크라테스는 앞서 통치자들을 언급하면서 철학과 철학자를 끌어들이지 않은 것은 철학과 철학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을 의식해서 그랬지만 이의제기에 답하다 보니 그렇게 논의를 미룬 것이 지혜롭지 못했다고 고백한다.(502d) 그래서 그는 이제부터는 더는 주저함ὄκνος이 없이 정치체제의 구원자들οἱ σωτῆρες이자 가장 엄밀한 의미의ἀκριβεστάτος 수호자들로서 철학 통치자들이 임명되어야 함을 과감히 선언한다.(503b) 물론 철학 통치자들 역시 지난번 언급했던(제4권 412b-415d) 통치자, 수호자의 자질과 자격들을 갖추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신념은 물론(503a) 기억력과 재치 활달하고νεανικός 민첩한 성향, 차분함ἡσυχία과 진중함βεβαιότης 등 대조적인 양쪽 성향 모두를 훌륭하게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503d) 특히 소크라테스는 시험과 훈련을 통해 이들의 성향이 과연 ‘가장 큰 배울 거리’μαθήματα μέγιστα도 감당할 힘이 있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다른 일들에서 비겁하게 물러서는지 잘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503e)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가장 큰 배울거리’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앞서 영혼의 세 부분을 나누면서 정의와 절제와 용기와 지혜 각각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했던 때(제4권 436a ff)를 환기케 한 후 그것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더 먼 다른 우회로περίοδος가 있음에도 그 당시에는 엄밀성이 결여한 채로 이야기했음을 토로한다.(504a-b) 그때는 그것을 재는 척도μέτρον가 ‘있는 것’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불완전한 것은 어떤 것이든 그 어떤 것의 척도도 아님에도 당시는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 이상 탐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나라와 법의 수호자에게 가장 불필요한 일이다. 나라와 법의 수호자들은 더 먼 길을 돌아서 가야하고 신체를 단련하는 수고만큼 배우는데도 더 큰 수고를 해야 한다.(504c)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가장 크고 가장 적절한 배울 거리의 마지막 지점’τοῦ μεγίστου τε καὶ μάλιστα προσήκοντος μαθήματος ἐπὶ τέλος까지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앞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것인지를 되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덕들에 대한 밑그림일 뿐이고 이제 그것들을 완벽하게 완성해내는 일, 즉 그것들을 가능하면 엄밀하고 순수하게 되도록 애를 써야 하며 그 엄밀성도 가장 커야 한다고 말한다.(504d) 그런 연후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아테이만토스를 향해 ‘좋음의 형상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προσχρησάμενα 것들이 그것에 의해 쓸모 있고χρήσιμος 이롭게ὠφέλιμος 된다는 이야기를 자네가 여러 번 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우리에게 아무 이로움ὄφελος이 없다고까지 말한다.(505a) 그것은 마치 좋음을 빼고 어떤 것을 갖는 것은 아무 이로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좋음ἀγαθός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현명φρονεῖν하고 반대로 ‘아름답고 좋은 것’καλὸν καὶ ἀγαθὸν에 대해서는 전혀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κτῆσις이 없다는 것이다.(505b)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대중πολλοῖ들은 좋음을 즐거움ἡδονὴ이라고 여기고, 보다 세련된 이들은 그걸 현명함φρόνησις이라 여긴다고 말한 후 후자의 경우는 그게 어떤 현명함인지를 밝혀줄 수 없어서, 결국 좋음에 대한 현명함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한다.(505b). 그들은 좋음이 뭔지 모른다고 우리를 비난하면서도 우습게도 자기들이 이야기할 때는 다시 우리를 그걸 아는 사람인 듯이 대한다. 그것이 좋음에 대한 현명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좋음’이란 이름을 그들이 언급하기만 하면 우리가 그들이 뭘 말하는 것인지 알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다.(505c) 즐거움이 좋음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의 경우 나쁜 즐거움이 있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것은 동일한 것들이 좋으면서 나쁘다는 데에 동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505c)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정의로운δίκαια 것들과 아름다운 καλὰ 것들과 관련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래 보이는 것’τὰ δοκοῦντα을 택하여 행하고 소유하며 또 그래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좋은 것들과 관련해서는, 누구도 ‘그렇게 보이는 것’τὰ δοκοῦντα을 얻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좋은 것’τὰ ὄντα을 추구한다.ζητοῦσιν. 좋은 것의 경우 이미 사람들 모두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은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ἀτιμάζει.(505d)

* 게다가 모든 영혼이 이것을 추구하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면서, 그런 뭔가가 있으리라는 짐작은 하지만ἀπομαντευομένη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충분히 파악λαβεῖν할 수 없어 당혹해하며 지속적인 확신을 가질 수도 없다. 그러나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자 우리가 모든 것을 맡기게 될 저 사람들이 이토록 중요한 이러한 것에 대해 그토록 깜깜한σκοτόω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된다.(505e) 정의로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좋은지’ὅπῃ ποτὲ ἀγαθά ἐστιν를 모르는 경우 별 가치가 없는οὐ ἄξιον 사람을 자신들의 수호자로 두게 될 것이다. (506a) 그것들을 아는 수호자가 정치체제를 감독ἐπισκοπή할 때 우리의 정치체제가 완벽하게 질서 잡힐 것이다.(506b)

*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형상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하자 아데이만토스는 좋음τὸ ἀγαθὸν이 앎ἐπιστήμη인지 즐거움인지 아니면 이것들 말고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지를 묻는다. 이제 좋음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생각 말고 자기 생각, 즉 좋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신념δόγμα을 말해 달라는 것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이것들에 관해 씨름해 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신념은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건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다.(506b)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마치 아는 사람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온당해 보이는지를 되묻는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아는 사람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지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가진 생각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괜찮다’라고 답한다.(506c)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앎ἐπιστήμη이 없는 믿음δόξα은 그중 최고의 것αἱ βέλτισται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추하고 눈먼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지성이νόος 없는 채로 ‘참인 믿음’ἀληθές τι δοξάζοντες을 갖고 눈먼 채로 길을 제대로 가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지금 좋음에 대해 직접 말한다면 그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부디 여기에서 물러서지 말고 지금까지 정의와 절제,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해 말씀해주신διῆλθες 것처럼 그런 식으로 좋음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506d)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그거면 충분하고 남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고ὅπως μὴ οὐχ οἷός τ᾽ ἔσομαι 열심히 해 봐야προθυμούμενος 흉한 꼴ἀσχήμων이나 보이고 비웃음γέλωτα을 사게 될 것 같으니 비록 이야기는 하겠지만 ‘좋음 자체가 무엇인지’αὐτὸ μὲν τί ποτ᾽ ἐστὶ τἀγαθὸν는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자ἐάσωμεν고 말한다. 그것에 대해 내가 지금 지닌 생각에 이르는 것만도 벅차다πλέον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화자들이 괜찮다면 좋음은 말고 ‘좋음의 자식ἔκγονός이자 좋음과 가장 닮은ὁμοιότατος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그 아버지πατήρ에 대한 이야기διήγησις는 다음 기회에 갚아주셔도 된다고 말한다.(506e)

* 그리하여 마침내 좋음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른바 ‘좋음 자체의 이자이자 자식’τὸν τόκον τε καὶ ἔκγονον αὐτοῦ τοῦ ἀγαθοῦ 즉 좋음에 대한 소크라테스 나름의 생각τοῦ δοκοῦντος이 펼쳐지기에 이른다. (50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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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3b 가장 엄밀한 의미의akribestos : ‘엄밀한’의 그리스어 akribēs는 exact, accurate, precise 즉 ‘정확한’, ‘엄밀한’의 의미를 물론 갖지만 내용적으로 ‘자세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관련하여 부족이나 결핍 상태가 없는 순전하고도 완벽한’의 의미를 갖고 있다.

* 503d 대조적인 양쪽 성향 모두를 훌륭하게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 : 정치가나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기술 즉 통치술의 기본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요소나 반대인 것들을 조화롭게 하나로 결합해 내는 기술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정치가>는 이러한 통치술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씨줄과 날줄을 하나로 엮는 직조술의 비유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논리의 세계에서는 반대적인 것(to anantion)이나 모순적인 것이 동시에 하나로 공존할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그 현실이 나라에서 공동체적 현실로 구현되어야 하는 한, 그것들은 동시에 하나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통치자는 그러한 반대적 성향들을 이미 자신 안에서 하나로 조화롭게 통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정치가> 281a-283b 참고)

* 504 b ‘정의와 절제, 용기 및 지혜 그것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더 먼 다른 우회로’(우회로(迂廻路) perihodos : going round, marching round, slow walk, patrol, survey in thought) 이 우회로는 제4권 435d에서 언급되었고 곧이어서 504d에서도 ‘에돌아 가야 할περιιτέον 더 먼 길’이란 말로 다시 또 언급된다. 제4권 435d에서 그 말이 언급되는 배경을 지금의 논의 관점에서 되돌아보면, 정의, 절제, 용기, 지혜를 개인의 혼과 연결지어 논의하면서 정말 제대로 논의가 되려면  기존의 관습 차원에서 거론되어온 덕들에 대한  비판적 논의 수준을 넘어,  철학 통치자의 영혼에 자리 잡은 덕목들의 기초에 관한 고도의 철학적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덕에 관한 완벽한 논의임을 소크라테스가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국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철학 통치자를 입에 올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 논의 수준의 적절성에 따라  이상국가의 철학적 덕목으로  새롭게 다시 확립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제6권 지금의 논의 국면에서 그것은 논의의 척도상 결코 완벽하지도 적절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때 언급했었던 ‘그 덕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우회로’를 따라가며 논의가 ‘좋음의 이데아’라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토대로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504c-d에서도 그 길은 ‘나라와 법의 수호자들이 에돌아 가야할 더 먼 길’로 언급되면서 내용적으로는 보다 심화된 훈련을 통한 심도 있는 논의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이 이곳에서 표현하고 있는 ‘우회로’perihodos의 의미는 지름길을 갈 수도 있는데 길게 돌아서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철학 통치자로서 다다라야 할 지고의 목표 즉 ‘좋음의 이데아’에 이르기까지 감내해야 할 길고도 힘든 철학적 훈련의 길 단순히 말해 ‘보다 길고 먼 길’을 의미한다.

* 그런데 <국가>의 논의 과정 전체의 관점에서 플라톤이 그 먼 길을 왜 우회의 의미를 지니는 perihodos란 말로 사용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플라톤 스스로 이미 두 가지 복합적인 의도를 갖고 그 말을 중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하나는 텍스트상 의미한 그대로 감내해야 할 길고도 힘든 철학적 훈련의 길이고, 다른 또 하나는 우회로perihodos라는 말의 원래 뜻(going round, marching round, slow walk) 그대로, 말로 나라를 세우던 단계에서는 논의 정황상 철학 통치자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 힘들어 일단 그때 수준에 맞추어 논의하는데 만족하되, 다만 정확한 척도에 맞는 제대로 된 논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준비 차원에서 그 기초가 될 내용들을 두루 잘 살펴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플라톤은 논의의 성격과 정황을 고려하여 통치자의 임명 문제와 관련하여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논의를 에둘러 미뤄오다가 제6권에 와서야 불가불 털어놓게 되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502d)

* 우회로의 의미를 이와 같이 복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플라톤의 <국가>의 논의 과정 전체가 좋음의 이데아로 향한 멀고 긴 철학적 준비와 논의과정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에서 주도면밀한 우회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핵심 주제로 철인 통치론을 염두에 두었으나 처음부터 당장 철학자나 철학 통치자 이야기를 꺼내들면 대화 자체가 출발조차도 못할 것을 우려하여 논의 및 대화 전개의 문학적 구성(plot)상 1) 일반 공통관심사인 개인의 행복과 정의를 화두로 꺼낸 후 2)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거쳐 국가에 관한 논의로 전환한 다음, 3) 말로 세운 이상국가론을 펼치고, 4) 그에 대한 이의 제기를 빌미로 철학과 철학 통치자에 관한 자신의 애초 의도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그야말로 주도면밀하게 길고 먼 우회로를 에둘러 가는 방식을 택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같이 자신의 속내인 철학 통치론을 <국가> 논의의 정점에서 강력하게 피력한 후 논의의 후반부를 현실 국가론과의 비교를 통해 최초의 정의 주제에 맞게 자연스럽게 조정해가면서 논의를 마무리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본 강해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는 마치 등산할 때처럼 등정에 앞서 행하는 준비운동 단계부터 산을 오르는 과정, 올라선 정상의 모습, 내려오는 과정, 마지막 호흡을 정리하고 산행을 뒤돌아보는 과정까지, 진리라는 산을 오르는 위대한 등반여정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그려내고 있다.

* 505a ‘좋음의 형상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προσχρησάμενα 것들이 그것에 의해 쓸모 있고χρήσιμος 이롭게 된다는 이야기를 자네가 여러 번 들었으니 말이네’ : 이곳 소크라테스의 언급만 보면 좋음의 형상과 그것의 쓸모나 유용성이 여러 번 거론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좋음이란 말이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형상으로 언급된 곳(476a)도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음이 쓸모나 이로움과 연관되어 있다는 언급도 있다(<메논> 87e-88e, <알키비아데스 II> 144d, 147d). 그렇지만 그것들은 모두 형상 일반의 차원에서 언급되었거나 좋은 것과 관련한 일반적인 논의 차원에서 거론된 것이지 이곳에서처럼 ‘가장 큰 배울 거리’로서 특별하고도 독자적인 위상을 갖는 것으로 언급된 곳은 없다. 이곳의 언급은 아마도 대화편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아데이만토스와 플라톤 사이에 그와 관련한 언급이 있었던가 아니면 좋음을 매우 특별한 형상으로 언급하기 전에 좋음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차원에서 다른 곳에서 일반적인 수준에서 여러 번 언급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알키비아데스 II> 144d, 147d, <카르미데스>173 a, <에우튀데모스> 280e, 289a, <라케스> 199c, <뤼시스> 219b, <파이돈> 69b 참고)

* 506b-c ‘ 대중들은 좋음을 즐거움이라고 여기고, 보다 세련된 이들은 그걸 현명함이라 여긴다’ : 이 주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박은 각기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전자의 경우는 즐거움에  좋은 즐거움만이 아니라 나쁜 즐거움도 있다는 것을 제시하여 그 주장의 자기 당착을 드러내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좋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혜’라는 답이 주어지자 다시 그 ‘지혜’가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에게 ‘너도 알고 있잖아?’라는 식으로 다시 ‘좋음’이라고 답하는 일종의 순환논법의 오류에 빠졌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506d ‘앎이 없는 믿음, 지성이 없는 채로 참인 믿음 : 플라톤은 앎과 믿음을 엄격히 구별한다. 그러나 나중 선분의 비유에서도 그렇고 앞서 시민적 덕을 언급할 때도 그랬듯이 믿음이라도 모두 동일한 믿음이 아니라 인식론적 정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도 차이를 갖는 것이 무규정성을 갖는 믿음의 존재론적 특징이다. 이곳에서는 다만 통치자들가 갖추어야 앎과 엄격히 구분한다는 차원에서 눈먼 상태로 언급되고 있을 뿐, 시민적 덕 또는 시민적 용기 등 이른바 올바른 믿음(aretē doxa)은 덕에 준하는 것으로서 앎에 상당 정도 관여되어 있다.

* 507a ‘좋음 자체의 이자이자 자식’ : 이자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tokos는 그 자체로 ‘자식’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원금이자 아버지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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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드디어 철학 통치자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가장 큰 배울 거리’로서 ‘좋음의 형상’(ē tou agathou idea)을 언급한다. 물론 앞서도 언급했지만,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좋음’(to agathon)이란 말 자체는 우리말 역본 색인만 참고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좋음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 것들이 그것에 의해 비로소 쓸모 있고 이롭게’ 되며, 나아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우리에게 아무 이로움이 없다’고까지(505a) 말하는 것은 이곳에 처음이고 유일하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좋음 말고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현명해도 좋음에 대해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κτῆσις이 없다’(505b)까지 말한다. 사실 대중들은 좋음을 즐거움이라 여기고 세련된 사람들은 그것을 현명함으로 여기지만 그들 모두 좋음을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정작 추구하는 것은 좋은 것과 관련된 것인 한 ‘그렇게 보이는 것’(ta dokouta)이 아니라 ‘실제로 좋은 것’ta onta)을 추구한다.(505d) 겉만 정의롭거나 겉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만족하거나 그 자체를 추구하는 사람은 있으나 겉만 좋은 것에 만족하거나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다 좋은 것과 관련해서만은 좋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좋은 것을 원한다. 요컨대 좋음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제약적인 것이다.

* 좋음에 대한 추구가 모든 사람들, 모든 시민들에게 무제약적인 한, 모든 사람들, 모든 시민들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 있건 간에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들은 그들 모두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라와 개인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그들의 통치 이념이자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목표를 가능케 하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점차 드러나겠지만 플라톤에게 좋음의 이데아가 바로 그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사람 모든 시민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지고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 통치자가 알아야 하는 앎들 가운에 최고의 앎이다. 실제로 좋은 것의 획득은 진정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결코 좋음에 대해 캄캄한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505e) 그러나 모든 시민들 각각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가능할까? 누군가에게 좋은 것은 누군가에게 나쁘기도 한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면 실제로 좋은 것은 공리주의 주장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최선이 아닐까? 그러나 플라톤에게 좋음의 이데아는 무제약적으로 좋음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제약적으로 그것을 가져다주는 앎이다.  그리고 철학 통치자는 그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을 통해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착한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모든 시민들 각각에게 실제 좋은 것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 모두는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철학 통치자의 앎을 통해 진정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거나 그러한 상태로 변화될 수 있다. 이를테면 부정의한 행위를 저지른 자일지라도 철학 통치자에게 그 사람은 강제와 징벌을  통한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기초한 교육과 설득,  교정과 변화를 통해 공동체적 조화와 공존의 대상으로 다시 끌어 안아야 할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가히 신적인 토대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우주와 자연은 그 자체로 지고의 좋음을 구유하고 있는 영원 불변의 실재이다. 그러한 한, 철학의 목표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와 같은 우주적 좋음에 대한 참되고 객관적인 앎이다. 그리고 플라톤에게 그 참되고 객관적인 앎을 구성하는 지고의 형상이 다름 아닌 좋음의 이데아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들을 무제약적으로 다 좋게 하는 것을 정치의 이념으로 하는 가장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에게 그 좋음의 이데아는 그 자체로 이르러야 할 지고의 앎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적 낭만의 끝이 어디인지, 정치적, 도덕적 이상주의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가히 절망이라 할 정도의 시대 현실에서조차 그  한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끊임없는 저항과 도전은  회의와 데카당이 아니라 좋음에 대한 이러한  위대한 이상과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 <국가>에서 플라톤이 지금까지 논의해온 것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라와 개인의 덕들 즉 지혜와 용기와 절제 정의의 덕들이다. 사실 그 덕들은 그리스 사회에서 기본적인 사주덕(四柱德)으로 이미 익숙한 덕목들이다. 그러다 플라톤에 와서 그러한 덕목들은 단순한 관습상의 경험심리학적 차원을 넘어 나라와 개인 영혼을 구성하는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철학적 덕목들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그렇게 새롭게 확립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덕들마저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서론 격에 해당하는 이곳에서부터 단칼에 그 좋음의 이데아의 하위에 속하는 것으로 내려앉는다. 이것은 아예 <국가> 논의의 시작부터 플라톤 스스로 그 철학적 덕목들조차 전적으로 ‘좋음의 이데아’에 의지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제반 철학적 덕목들조차 넘어서는 자신의 철학에서 최고 최상의 지위를 갖는 형이상학적 원리였던 것이다. 특히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좋음의 형상’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비롯한 그 모든 덕목들의 ‘쓸모와 이로움’ 말 그대로  홍익(弘益)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알지 못한다면 설사 다른 그 어떤 것들을 알아도 아무 이로움ophelos이 없다고까지 말한다.(505a) 게다가 현명함phronesis과 관련해서도 좋음에 대해서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 또한 아무런 소용ktēsis이 없다고도 말한다.(505b) 나중 태양의 비유를 다룰 때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지고의 우월성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겠지만 그 하나만 미리 소개하자면 이 좋음의 이데아는 ‘앎epistēmē과 진리alētheia 보다 한층 더 아름답고kalos 그것의 원인aitia으로서 지위prosbeia와 능력dynamis에서 있음ousia을 한층 넘어서는hyperchontos 것’으로까지 언급되고 있다.(508e-509b). 이것은 플라톤 형이상학의 마지막 결산으로 평가되고 있는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제작의 기본 목표 내지 합목정성을 오로지 ‘좋음’에서 찾는 것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이것은 앞서도 간략히 밝혔지만 좋음의 이데아가 왜 플라톤 철학의 기본 토대일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철학자와 철학자 통치체제의 이념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그리고 그것이 후대 철학자들에 의해 왜 가히 신적인 위상을 갖는 것으로까지 받아 들여졌는지를 미리 짐작케 한다.

* 그러나 놀랍게도 정작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완전하고도 충분한 설명은 그 자체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이 소크라테스 자신에 의해 시사되고 있다. 이것은 실로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이곳에서부터 좋음의 이데아에 대해 충분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고 열심히 해 봐야 흉한 꼴이나 보이고 비웃음을 사게 될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금 갖는 자기 생각에 이르는 것만도 벅차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는 하겠지만 ‘좋음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고 다만 ‘좋음의 자식이자 좋음과 가장 닮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후에 펼쳐질 그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자신의 그 생각을 오로지 비유들을 통해서만 이야기한다. 이른바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가 그것이다. 실제로 그 비유들 모두는 그가 예고한 대로 좋음의 이데아를 어떻게든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한 소크라테스 자신의 열의를 반영함과 동시에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유일무이한 설명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비록 플라톤 철학에서 지고의 위상을 갖는 철학적 원리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비유로서만 제시되는 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데에는 원천적인 한계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플라톤의 좋음’(to Platōnos agathon)이란 말이 그의 시대에서 모호한 말을 가리키는 속담으로까지 사용되었겠는가!(J. Adam. 해당 부분 참고) 이러한 플라톤의 태도는 비슷한 시기 동양에서 ‘道可道 非常道(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설파한 노자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플라톤 철학이 합리주의 철학의 극치라 일컬어지면서도 지고의 철학적 원리와 관련해서는 추론과 설명(logos)을 넘어서는  이른바 변증술적 깨달음의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아포리아이자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거나 플라톤 철학을 구성하는 원리로서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근원적 우월성은 플라톤 철학을 탐구하려는 사람들에게 되레 탐구의 열망에 더욱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에 따라 플라톤 연구사를 되돌아보면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고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것을 해명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실제로 그러한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철학적 성과와 더불어 플라톤 철학에 대한 다양한 논란과 해석을 낳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반 철학 분야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을 불어넣는 배경이 되었다.

*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논의 전개의 이와 같은 특성상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 좋음의 이데아를 주제로 하는 차후 몇 차례 강해는 일단 해당 부분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해설에 우선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비유들 각각을 살피면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 또한 일정 부분 병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비유들 전체를 살펴본 후 그것들에 대한 유기적이고도 종합적인 고찰을 통해서야만 비로소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논의의 전반적인 구도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끝-

 

<다음 주제>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 좋음의 이데아와 태양의 비유(507b-509b)

헤겔 형이상학 산책19- 시원에 관한 기존 이론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9- 시원에 관한 기존 이론 비판

1)

이상과 같이 일단 헤겔은 왜 논리학의 시원이 순수 존재인지를 밝혔다. 이야기를 좀 정리해 보자.

①논리학의 운동은 순수지를 바탕으로 전개한다.

②순수지는 정신현상학 운동의 결과이다. 정신현상학의 운동은 개별로부터 일반으로 나가는 운동이다.(근거로의 복귀)

③순수지의 이면은 곧 순수 존재이다.

④논리학의 시원은 순수 존재이다. 왜냐하면, 논리학의 운동은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운동이기 때문이다.(자기 정립)

이상 서술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③‘순수지의 이면이 순수 존재다’라는 것으로 보인다. 지식이라는 주관이 존재라는 객체로 전환하는 것이 무언가 신비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심층적인 근거로의 복귀가 곧 내면적 본질이 외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는 순수지가 곧 순수 존재임을 보여주는 확고한 논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헤겔은 다른 관점에서 이를 설명하는데, 이번에는 그의 설명을 들어 보자. 우선 예비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알다시피 순수지는 의식과 대상의 통일, 즉 대상을 자기로 인식하는 자기의식으로부터 출현한다. 이런 자기의식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자기의식 즉 절대정신이 곧 순수지다. 여기서 의식과 대상의 구별이 철저하게 사라졌으므로, 자기의식이라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순수한 통일 자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식은 객체와 합일하는 최정점에서 전면적으로 몰락하면서 통일성으로 들어가며 이 통일성이 다름 아닌 순수 존재이므로, 지식은 이런 통일성 안에서는 사라지고 말며, 이 통일성으로부터 전혀 구별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규정도 그런 통일성에 남아 있지 않다.”(논리학, S.59)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헤겔에서 순수 존재는 곧 판단 형식에서 주어와 술어의 통일로서 계사인 ‘이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순수 존재는 그런 계사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계사, 즉 주어와 술어가 무구별적인 통일 상태에 있는 것이다. 순수 존재 역시 통일 자체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원으로서 간주된 것 즉 존재라는 규정조차도 제거될 수 있으니, 다만 요구되어야 할 것은 시원이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다.”(논리학, S. 59-60)

2)

순수지와 순수 존재의 의미를 이처럼 이해한다면, 순수지가 순수지인 이유가 금방 드러난다. 양자는 모두 ‘무구별적 통일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무구별적 통일은 인식의 운동에서 본다면 최후로 등장하지만, 논리학의 운동에서 본다면 처음에 전제된 것이다. 동일한 무구별적 통일이 정신현상학의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순수지(의식과 대상의 통일로서)라고 표현한 것이며, 논리학의 운동에서 본다면 순수 존재(주어와 술어의 통일로서)로 표현된 것이다.

무구별적 통일 자체는 사실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다. 그것은 지식도 아니며 존재도 아니다. 그러나 인식의 운동에서 본다면 그 무구별적 통일체는 순수지가 되며, 논리의 운동에서 본다면 그것은 순수 존재가 된다. 그래서 순수지가 나타나면 그 이면에 순수 존재가 나타나고, 순수 존재가 나타나면 그 이면에 순수지가 나타나게 된다. 헤겔은 이 무구별적 통일을 순수지로 본다면, 이에 대립해서 순수 존재가 나타나는데, 전자는 형식에 해당하고 후자는 내용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 순수 존재는 순수지가 되돌아간 통일성이며, 달리 말하자면 순수지 자체가 여전히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 통일로부터 구별된 채 유지되어야 한다면, 순수 존재는 그런 순수지의 내용이기도 하다.”(논리학, S. 59)

3)

이어지는 부분에서 헤겔은 주로 다른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논리학의 전개 과정을 비판적으로 설명한다. 헤겔은 우선 근대에 들어와서 철학 또는 학문(그 가운데 논리학도 포함한다)이 “가설적이고 개연적인 진리”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검토한다. 즉 어떤 학문의 대상에 관한 흔히 통용되는 진리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이런 진리를 비판하면서 진리에 다가간다는 것인데, 흔히 플라톤적 대화록이 취하고 있는 방법이 그러하다.

헤겔은 대표적으로 이렇게 주장하는 철학자를 라인홀트로 들고 있는데, 라인홀트가 당대의 여러 철학자를 일종의 범신론으로 비판하면서 기독교의 인격신 개념을 옹호한 것을 잘 알려진 얘기다.

겉으로 보기에 변증법적인 전개를 옹호하는 헤겔로서는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주장이지만, 헤겔은 이런 주장이 갖는 맹점을 지적한다. 이런 주장은 학문이 일반적인 진리인 근거에 이르는 모색의 길이라는 점에서 주장된 것이다.

이런 주장은 진리에 이르는 인식의 과정에서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철학이나 논리학의 길이 근거를 시원으로 삼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런 길에서 본다면, 개연적이고 가설적인 진리는 시원인 근거로부터 도출된 결과일 뿐이다.

“사실 시원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그런 근원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런 것에 의해 사실상 산출된 것이다.”(논리학, S. 57)

4)

이어서 헤겔은 기하학적 작도와 같은 시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기하학에서는 증명을 위해 먼저 작도가 필요하다. 작도가 제대로 놓인다면 증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만일 작도가 잘못 놓인다면, 증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헤겔은 작도가 올바로 놓인다는 것은 증명이 실제로 성공한 다음에서야 확인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작도가 증명하는 과정에 외면적이고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하학적 증명은 선배가 해 놓은 작업을 기억할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그 스스로에게서는 독창적인 상상이 필요하다.

논리학은 외면적이고 우연적인 과정을 통해 나가지 않고 필연적이며 내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므로, 기하학에서 작도와 같은 것을 시원으로 삼을 수는 없다.

5)

학문에서 시원은 자주 ‘이미 널리 알려진 관념’을 말한다. 학문은 어떤 대상을 전제로 하여, 이 대상에 관해 누구나 동일한 관념을 가지며, 그런 관념은 이미 누구에게나 알려진 것이다. 학문은 그런 관념 속에서 “분석과 비교 또는 그 밖의 추론”을 통해 동일한 규정을 발견해 이것을 학문의 개념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경우도 앞에서 말한 개연적인 진리를 시원으로 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미 알려진 것은 다양한 규정의 구체적 관계를 갖는데, 그런 관계는 그 자체로 직접적인 것이 아니며, 추상적인 어떤 것이 구체화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매개된 것이며, 진정한 시원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비판의 핵심은 오히려 분석과 비교, 추론이라는 방법에 있다. 학문이 이런 알려진 관념에서 분석과 비교, 추론을 통해 일반적 개념을 얻으려 할 때, 그런 방법은 주관적인 자의에 따라서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그것을 통해 얻은 학문의 개념은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런 관계에 관한 필연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가장 근원적인 것에서 필연적으로 생성된 것, 추상적인 것이 자기 자신을 통해서 정립된 것이 되어야 하니, 헤겔은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구체적인 것 즉 종합적으로 통일된 것 속에 함축된 관계가 필연적이어야 한다면 이것은 이 관계가 미리 발견되는 관계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계기가 자신의 통일로 되돌아가는 고유한 운동 가운데 산출된 관계인 경우에만 한정된다. 이런 운동은 분석적 경과 즉 사상 자체에 외적인 주관에 귀속되는 활동과 반대되는 운동이다.”(논리학, S. 61-62)

여기서 ‘자신의 통일로 되돌아간다’라는 말은 곧 구체적인 것이 지닌 모호한 통일이 다양한 규정이 명확한 관계를 맺는 통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런 명확한 관계는 필연적이고 내적인 생성을 통해 출현하는 것이다.

6)

시원에 관한 논의는 마침내 데카르트가 철학의 시원으로 삼은 에고 고키토의 문제로 나간다. 데카르트는 에고 고기토의 확실성이야 말로 철학의 시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명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에고 고기토는 경험적 자아가 아니라 사유하는 자아이다. 그것은 순수한 자아인데, 이런 자아에 이르기 위해서는 경험적 자아를 벗어나는 운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경험적 자아로부터 순수한 자아에 이르는 운동은 곧 정신현상학의 운동이니 감각적 확신에서 순수지에 이르는 운동과 다르지 않다.

헤겔은 철학적 시원으로서 에고 고기토는 이중적인 혼란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런 주장은 마치 경험적 자아가 그 자체로 자명하고 근원적인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순수한 자아에 대해 말한다면, 그런 주장은 사실 순수지에 대해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을 순수지라고 하지 않고 순수한 자아로 규정한다면, 헤겔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순수한 자아로 규정한다면, 여전히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순수 본질을 나로 규정하는 것은 애먹이는 모호성을 동반할 뿐만 아니라 또한 좀 더 상세하게 고찰해 볼 때 여전히 주관적 나로 머무른다.”(논리학, S. 64)

그러므로 헤겔은 데카르트의 시원은 차라리 순수지라고 말해야 옳다고 한다. 순수지는 이미 자아와 대상의 통일이니, 자아의 한계 자체를 벗어난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시원이 될 수 있다.

7)

마지막으로 헤겔은 철학의 시원으로서 ‘영원한 것’, ‘신적인 것’, ‘절대자’를 거론하는 주장을 비판한다. 이런 것은 헤겔이 논리학의 시원으로 삼은 가장 추상적인 순수 존재보다 구체적 내용 즉 영원, 신, 절대라는 내용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추상적 시원보다는 더 확실하게 시원으로 다가온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그런 것이 사유 속에 들어오고 또 언표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이들은 지적 직관을 들고 있다. 그러나 헤겔이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말했듯이 지적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잠 속에서 주어지는 꿈처럼 몽롱한 것이며, 명확하고 체계화된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영원한 것, 신적인 것, 절대자로 규정하더라도 그 의미는 알 수 없는 단순한 지칭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이런 것들 속에 어떤 구체적 내용이 주어진다면, 이 구체적 내용은 그 자체가 시원적인 것이 될 수는 없으며, 그것은 앞에서 말한 개연적 지식과 마찬가지로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운동 가운데서 출현한 매개된 것이니, 시원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