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3월 월례발표회 “페미니즘의 탈자연화와 에코 페미니즘의 신유물론적 전환”(발표:황주영) [월례발표회·세미나]

2023년 한철연 월례발표회의 중점연구주제 기획은 1. 정치사회철학, 2. 여성철학, 3. 한국근현대철학, 4. 생태철학, 5. 대중교양철학입니다.
2023년 3월 월례발표회는 여성철학을 주제로 진행합니다.

이번 3월 월례발표회에는 발표자 1인, 토론자 2인이 참여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3월 월례발표회

주 제 : 페미니즘의 탈자연화와 에코 페미니즘의 신유물론적 전환
발표자 : 황주영(서울시립대학교)
토론자 : 이승준(동국대학교), 주현(건국대학교)
일 시 : 2023년 3월 27일 오후 4시 – 6시
방 식: zoom 온라인 회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Jn8OIcJwJBE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2월 월례발표회 “지성과 공동체: 민주주의와 시민적 집단지성의 가능성”(발표: 한상원) [월례발표회·세미나]

2023년 한철연 월례발표회의 기획은 2022년 9월에 실시한 한철연 회원연구분야 설문조사의 결과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회원들이 제안해주셨던 한철연 중점연구주제(1. 정치사회철학, 2. 여성철학, 3. 한국근현대철학, 4. 생태철학, 5. 대중교양철학)를 중심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2023년 월례발표회의 시작은 정치사회철학입니다.

이번 2월 월례발표회에는 발표자 1인, 토론자 2인이 참여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2월 월례발표회

주 제 : 지성과 공동체: 민주주의와 시민적 집단지성의 가능성
발표자 : 한상원(충북대학교)
토론자 : 김종곤(건국대학교), 한길석(중부대학교)
일 시 : 2023년 2월 27일 오후 7시 – 9시
방 식 : zoom 온라인 회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qtznR3uYrJw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㊻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㊻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2 수호자들의 생활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17b)

 

[415d-416b]

* 소크라테스는 건국 신화에 대한 언급을 마무리한 후 그곳에서 거론된 수호자들이 통치자들의 지도하에ἡγουμένων 어떤 곳에 진을 치고στρατοπεδεύσασθα 어떤 방식으로 생활해야 하는지를 간략히 언급한다. 우선 수호자들이 진을 쳐야 할 곳은 법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 내부자들을 최대한 통제하고κατέχω 외부 적들의 침입을 가장 잘 막아낼 수 있는ἀπαμύνω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은 돈벌이 하는χρηματιστικός 사람들이 아닌 군인στρατιωτικός들에게 적합한 숙소οἴκησις로서 혹한과 혹서에 충분히 버틸만해야 한다.(415d-e)

* 돈벌이하는 사람들과 군인들은 다르다. 양치기ποιμήν들에게는 양 떼의 보조자인 개κύων들이 제멋대로이거나ἀκολασία 배고픔 또는 다른 나쁜 습성으로 인해 개들이 가축πρόβατον들에게 못된 짓을 하려 드는 것은 늑대λύκος를 닮은 개를 키우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끔찍하고δεινός 부끄러운αἰσχρός 일이다. 보조자들ἐπίκουρος이 시민πολίτης들보다 강하다고 해서 우호적인 동맹군σύμμαχος들을 닮기는커녕 사나운 주인δεσπότης을 닮아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다해 감시해야 하고φυλακτέον 정말로 훌륭하게 교육을 받아 스스로도 최대의 경계심εὐλάβει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416a-b)

* 이에 글라우콘은 ‘수호자들이 그렇게 교육을 받은 것 아닌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교육을 받은 수호자들이 꼭 그렇다는 것은 단언할 수διισχυρίζεσθαι 없지만, 수호자들이 자신들끼리는 물론 자신들이 수호하는 사람들에게 온순해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을 갖추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올바른 교육ὀρθῆ παιδεία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단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416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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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바른 교육ὀρθῆ παιδεία(416c)은 단순한 앎을 넘어서 실천을 수반하는 능력의 함양까지 포함하는 교육이다. 플라톤에게 앎은 우리말 ‘운전을 할 줄 안다’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그냥 머릿속에서만 간직하는 그런 수준의 앎을 위한 교육은 아직 제대로 된 올바른 교육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 교육의 구체적 내용은 나중 7권에서 다루어진다. 그 점에서도 글라우콘이 말하는 교육은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의 교육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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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 기술되고 있는 생활 방식은 통치자의 지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통치자 자신들을 포함한 수호자들 전체의 생활방식이다. 여기서 기술되고 있는 여러 가지 생활방식 역시 나라의 수립단계에서 대략의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서 5권 이후에 가서 보다 자세하게 언급된다. 우선 수호자들은 모두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 그들이 공동생활하게 될 거처의 요건부터 언급된다. 진을 쳐야 한다는 말이 시사하고 있듯이 그들의 거처는 말 그대로 병영이자 군사 요새이다. 안으로는 내부자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들의 거처가 이러한 까닭은 이들이 돈벌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힘을 가진 군인들이기 때문이다. 군인들의 본분은 양치기를 보조하는 개의 역할과 같다. 여기서 통치자들은 양치기들로, 수호자들 즉 군인들은 개로 비유되고 양떼와 가축들은 시민들로 늑대는 참주로 비유된다. 무엇보다도 개들은 무절제나 굶주림 또는 기타 나쁜 습성으로 양 떼들 즉 시민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시민들보다 강하다고 해서 우호적인 동맹군들 즉 통치자들을 닮기는커녕 사나운 주인 즉 참주 같은 자를 닮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수호자들이 참주 같은 자들을 닮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다해 감시해야 하고 스스로도 경계심을 갖도록 정말로 훌륭한 교육을 해야 한다.

*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우선 수호자들이 머물 거처의 요건 으로서 법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내부자들에 대한 통제가 언급되고 있고 둘째로 나쁜 습성들로 시민들을 해치지 않도록 수호자들에 대한 다각적인 감시가 언급되어 있으며 셋째로 수호자들끼리는 물론 시민들에게 온순하게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이 필수 조건임은 단언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까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언급들은 수호자들이 천성적으로 훌륭하게 태어났고 그 후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받고 스스로에 대한 경계심을 보전하더라도 언제든지 다른 길로 비껴나 나쁜 습성을 가질 수 있고 극단적으로는 내란을 일으켜 참주 같은 사람까지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내부자들이 법에 복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언급은 그러한 내란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게다가 일부 수호자들은 무절제나 굶주림, 나쁜 습성이 생겨 공동생활에서 이탈할 수도 있으므로 처음부터 공동생활의 거처 또한 외부의 적에 대한 고려는 물론 그러한 내부자들에 대한 통제의 적합성까지도 함께 고려되었던 것이다.

* 이 점은 플라톤 역시 인간의 본성을 신뢰하지 않았거나 처음부터 이기적으로 여겼음을 보여주는 증거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수호자들이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이기적 본성을 드러냈다는 데에 방점이 있지 않고 인간이 나쁜 영향을 받으면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데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 플라톤에게 인간의 본성은 건국신화에도 보이듯이 여전히 태어날 때부터 각기 다르며 그에 따라 소질과 욕망 또한 서로 달라 천성적으로 지식을 좋아하는 사람,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 돈을 좋아하거나 뭔가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크게 나뉜다. 다만 건국신화가 동시에 보여주고 있듯이 이러한 나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어서 선대와 다른 천성을 갖고 태어날 수도 있고 후천적인 교육에 따라 다른 소질과 욕망으로 변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특히 이기적인 사람들의 소질과 욕망들은 매우 공격적이어서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은 물론 이미 교육을 받은 어른들까지도 스스로의 천성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플라톤은 천성이 훌륭한 사람들조차 어느 순간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변질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의 영혼이 아무리 순수해도 신체를 갖고 태어나는 한, 본성이 훼손되는 위기에 늘 둘러싸여 있다. 이에 따라 극단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후천적인 영향에 휩쓸려 영혼의 가장 저급한 물질적 욕구 부분의 지배를 받게 될 경우, 본래의 본성을 상실한 채 결과적으로 모두가 물질적 욕망을 가진 이기적인 인간으로 획일화될 수도 있다. 굳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본성을 사회관계의 외화로서 규정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실제로 플라톤은 제8권에서 다양한 소질과 본성들이 공존하고 있는 이상국가가 타락하여 인간 모두가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면 그때는 다다익선이 최선이 되어 정치체제 또한 다수결에 따른 민주정이 도래하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민주정은 생존의 위기에 몰리면 분별력을 상실한 채 선동정치가들에 이용되면서 결국에는 참주정을 초래하는 근본 바탕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분별 있는 인간이라면 모두 끊임없이 치열하게 올바른 배움을 통해 개인과 국가에서 이성적 영혼의 지배력을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성의 지배가 확립될수록 그에 비례하여 인간은 거꾸로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회복하면서 궁극에는 모두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본래의 이상적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다. 이곳에서 플라톤의 국가 수립 자체가 그러한 거대한 프로젝트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는 내적으로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잃지 않도록 이성적 영혼의 힘을 더욱 강화 발전시키는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되 외적으로도 인간의 본래의 천성과 자연적 소질의 다양성을 변질시키는 위협들에 대한 대처 수단도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거처의 요건들은 그러한 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적절한 방어책으로 제시된 것이고 올바른 교육은 자신의 천성적인 소질과 고유한 욕망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본성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성장 발전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다.

* 물론 글라우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단언διισχυρίζεσθαι이 시사하고 있듯이 교육이 이러한 성장과 발전을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 인간 삶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내외 가릴 것 없이 끊임없이 상존하고 인간의 본성에도 그것의 영향을 받는 측면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수호자의 부정적 양태들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의 발로라고 보는 관점들은 그러한 부차적인 측면을 마치 인간 본성의 본질적 측면인 양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부차적인 측면에 대한 분별력 있는 이해도 포함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고유한 천성과 욕망을 어떻게든 해체되지 않도록 최대한 버텨내려는 인간 영혼의 본질적 측면, 즉 인간 영혼의 이성적 부분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에게 수호자들은 비록 부정적인 영향을 겪을 수는 있을 지라도 여전히 근본적으로 지성과 명예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로서 자신의 천성과 욕망을 배움을 통해 끊임없이 배양하고 보전하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수호자들은 통치를 통해 여타의 욕망을 가진 다른 계층 사람들과 조화를 도모하면서 이상적인 국가를 이끌어가기를 욕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시민들을 온순하게 대할 수 있도록 배움을 통해 늘 지적인 긴장 상태에서 최대한 경계심을 유지함과 동시에 올바른 교육과 실천을 통해 영혼의 이성 부분을 지속해서 배양하고 보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 이와 같은 플라톤의 생각은 플라톤의 존재론과도 연결된다. 존재론의 기저에는 절대적 모순으로서 존재와 무가 자리한다. 존재는 자체적 존재로서 무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에 따라 타자성을 갖고 있지 않다. 플라톤의 존재 세계는 자체적 존재로서 각기 일자의 속성을 갖는 이데아들의 세계이다. 이데아들은 무에 둘러싸여 있어 각기 일자이자 자체 존재로서 변화를 겪지도 운동도 하지 않는 영원불변 부동의 존재 세계이다. 우주는 그러한 이데아들이 우주 영혼의 상태로 관여되어 있어 영혼의 운동으로서 끊임없이 원운동을 하면서 여럿의 조화와 공존이 완벽하게 구현하는 생명체이자 결코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세계이다. 이에 비해 인간은 우주의 일부로서 우주와 같이 영혼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순수성이 우주 영혼과 달라 영혼에 있어 일정 부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되 타자성도 함께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타자와 관계 맺음을 겪으며 변화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결국 신체는 사멸을 면치 못한다. 그리고 현실 세계의 존재자들 또한 인간의 사고가 갖는 모순율에 의해 인간의 개념적 사고 속에서만 형식적 자기 동일성을 가질 뿐 실제로는 물질적 무규정성(apeiron)에 따라 끊임없이 관계 맺음을 겪으며 생성 소멸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물질적 무규정성에 연원하는 해체와 소멸의 위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데아에 관여된 영혼의 힘으로 그 해체와 소멸을 거슬러 우주와 같은 조화와 공존의 삶을 갈망한다. 플라톤에게 우주는 서로 다른 인간들의 조화와 공존을 위한 원초적 모델이자 현실 구제론의 이론적 토대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우주 영혼과 달리 물질적 무규정성을 완벽히 지배할 수 없기에 각기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에 따라 일정 정도 우주적 삶에 다가갈 수도 있고 반대로 내적 조화를 상실하여 짐승 같은 이기적인 삶에서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에게 인간의 삶은 가능성의 영역에 놓여 있을 뿐 신체의 죽음 이외에 운명적이거나 필연적으로 결정된 것이 없다. 목적론이나 운명론 내지 결정론은 플라톤과 거리가 멀다. 다만 인간은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우주적 삶을 향한 적극적인 가능성으로서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삶의 훌륭함을 가르는 기준은 각 개인에 있어 특히 수호자들에 있어 영혼의 자기 고양의 능력(dynamis)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능력을 중시하는 능력주의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말하는 능력은 서로 다른 여럿 들 간의 조화와 공존을 파괴하고 경쟁에서 이겨 자기만이 우뚝 서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능력이고, 반대로 플라톤이 강조하는 능력은 자기다움을 최대한 발휘하되 자기와 다른 타자들과 조화와 공존을 능히 관철하는 공동체적 삶의 능력으로서 포용적이고 이타적인 능력이다.

[416C-417B]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지각 있는 사람τις νοῦν이라면 이 교육에 더해 가능한 한 가장 뛰어난 수호자들이 되는 데 지장도 주지도 않고 다른 시민들에게 못된 짓도 유발하지 않을 여건으로서 숙소 및 다른 재산οὐσία들도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할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수호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거주하며 생활해야 할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416c-d)

* 1) 수호자들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닌 한, ‘사적인 재산’ἴδιος οὐσία을 소유해서는κτάομαι 안 된다. 2) 누구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어떠한 숙소나 곳간ταμιεῖον도 있어서는 안 된다. 3) 전사들한테 필요한 만큼의 적합한 것ἐπιτήδειος들은 수호에 대한 보수μισθός로서 일 년간 쓰기에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를 다른 시민들한테서 받는다. 4) 수호자들은 숙영하는 사람들처럼 공동식사συσσιτία를 일상으로 하며 공동으로 살아야 한다.(416d-e)

* 이런 연후에 소크라테스는 특히 수호자들은 금화나 은화를 소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손에 쥐거나 손대는 것, 한 지붕 아래에 두는 것, 그것들로 된 것을 몸에 두르거나 그것들로 된 것으로 마시는 것까지 모두 금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호자들은 이미 영혼 안에 신들로부터 받은 금화χρυσός를 언제나 갖고 있어서 별도로 인간적인ἀνθρώπειος 금화와 은화가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한 신적인θεῖος 금화의 소유κτῆσις를 사멸하는 불경한 금화의 소유와 섞어서 오염시키는 것은 전혀 경건하지 못하다ἀνόσιο.(416e-417a)

* 그럼에도 만약 수호자들이 땅과 집과 화폐를 소유한다면 그들은 수호자가 아니라 가정관리자와 농부가 될 것이고, 다른 시민들에 대해 동맹군이 아니라 적대적인 주인이 되어 미워하기도 하고 미움받기도 하며, 계략을 꾸미기도 하고 계략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평생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외부의ἔξωθεν 적들보다도 내부의ἔνδον 적을 오히려 두려워할 것이며, 그때는 이미 그들 자신도 나라도 파멸ὄλεθρος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417a-b)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숙소와 생활 방식에 대한 이러한 언급을 마무리하면서 그러한 사항들이 법으로 정해져야 한다고 말한다.(41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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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식사συσσιτία(416e)는 스파르타의 상위 계급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ai)의 생활방식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제도는 스파르타인들의 내적 결속과 공동체 정신을 위해 기원전 8세기 뤼쿠르고스 체제에서 확립된 이래 기원전 5세기 멸망기까지 지속했다. 스파르티아타이에 속하는 남성들은 만 7세 이후 우리가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이라 부르는 일종의 집단적 군사 교육으로서 아고게(agōgē)를 받아야 했다.

* 수호자들은 시민들로부터 생활필수품 정도만 보급을 받았다. 그것을 수호에 대한 ‘보수’μισθός라고 일컫는 것은 이상 국가에서 수호자의 활동이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고 나름의 역할에 합당한 대우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상 국가에서 각 계층의 욕구 대상은 서로 다르지만 나름의 소질에 기초한 인정 욕구는 동일하며 그러한 소질을 잘 성취하여 얻게 되는 행복감 또한 동일하다. 수호자들은 비록 재산에서는 생활필수품 정도만 소유하지만, 그들은 다른 계층과 달리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 명예라는 특전을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공평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수호자들의 공동생활과 사유 재산의 금지는 매우 과격해 보이지만 실제 동서양 역사 전체를 보면 오늘날까지도 가톨릭과 불교 수도자 전통에서 그와 비슷한 생활방식이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방식으로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고, 하물며 중동 이슬람 사회에서는 정교일치 차원에까지 급진화 되어 종교 수도자들이 정치 지도자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른바 정치 수도자 집단을 구성하려는 플라톤의 구상이 정치 권력의 편중과 관련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내용 그대로 논의되기는 매우 힘들겠지만, 그 구상의 대원칙만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단순 매도할 수도 없어 보인다. 실제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정치 권력자들과 재력의 결탁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려는 플라톤의 구상은 시대 현실에 부합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채택되면서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 여기서는 수호자들의 계층이동에 있어 하향 이동만 언급되어 있어나 상향 이동도 함께 열려 있다.(415c)

* 권력자들인 수호자들의 거처와 생활 방식에 대한 내용이 모두 법률로 정해져야 한다는 언급 또한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단지 인치에만 의존하는 정치체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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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수호자들을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거처의 요건을 언급한 후에 곧바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으로서 가히 과격하다고 할 정도로 사유 재산의 금지를 선언한다. 수호자들에게는 땅과 집, 화폐의 소유는 물론 사적 공간도 금지되며 금화나 은화들을 손에 쥐거나 손대는 것, 한 지붕 아래에 두는 것, 그것들로 된 것을 몸에 두르거나 그것들로 된 것으로 마시는 것까지 모두 금지된다. 이에 글라우콘도 크게 놀라 그러한 정도의 사적 소유의 금지가 과연 수호자들을 행복하게 할 것인지 의심을 표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도 시민 모두의 행복을 지향하는 원칙의 차원에서 제시된다. 그러나 나중에 5권에 가서 이러한 의심에 더해 처자 공유와 가족 해체에 대한 추가적인 의심들이 더해지면서 소크라테스는 더 힘들고 복잡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그에 따라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해명과 논쟁이 펼쳐진다. 이런 점에서도 이 부분 역시 그 구체적 난관들에 대한 예비적 서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유 재산의 금지와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일단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사유 재산의 금지 선언에 대한 오늘날 정치철학자들의 몇 가지 평가들에 대해서만 간략히 다뤄보고자 한다.

* 우선 오늘날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수호자들에 대한 사유 재산의 금지 는 앞서 수호자들에 대한 감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설적으로 인간의 근원적 이기성을 인정하는 근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나쁜 영향으로부터 수호자들의 타고난 이타적 본성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다. 재산의 사적 소유는 외부의 나쁜 영향들 가운데에서 가장 심대하고 심각한 위험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은 나라가 맞이하는 가장 큰 위해로서 외적의 침입 이상으로 내부의 분열을 꼽고 있다. 특히 나라의 권력층과 부유층들의 사적 소유에 대한 욕망이 그 분열과 내란을 초래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사적 소유가 인정되면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을 더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는 언급도 그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417b) 그리고 내부의 분열은 나라는 물론 개인의 파멸도 포함하고 있다.(417b) 그래서 나라의 수호자들은 ‘이 사람은 이것을, 저 사람은 저것을 내 것이라고 부르면서 나라를 분열시키는 일이 없는’(464c) 사람들이어야 하고 ‘자신의 몸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을 공유’(464d) 해야만 한다.

* 사유재산권의 금지에 관한 플라톤의 주장은 20세기 공산주의의 등장과 함께 그의 이상 국가를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공산주의의 선구적 모델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특히 사유재산을 보편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자연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근대 자유주의자들에게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가장 경계해야 할 정치체제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데는 최소한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결정적으로는 사유재산의 금지가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계층 가운데 수호자 계층에만 한정되어 있을 뿐 정작 생산자 계층에게는 사유 재산이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수호자 계층은 계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수가 가장 작은 최소 집단에 불과하지만(428e), 이상 국가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집단은 나머지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인구수가 가장 많은 생산자 계층이다. 덧붙여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도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생산 및 제작, 유통과 관련한 경제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사적인 계약은 물론 과세의 규칙과 항만의 조례 등 시장 상거래의 세칙 또한 존재한다.(425c-d) 나아가 토지와 생산 시설 및 수익, 경영의 권리를 포함한 생산 수단 역시 사적 소유가 가능하고 노예조차 부분적으로 사유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다. 물론 경제 정책은 일종의 통치와 관련한 업무로서 수호자 계층에 의해 결정되지만, 플라톤이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경제 정책은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해 빈부의 격차를 조정하는 것이 거의 유일하다. 수호자들의 주요 임무는 말 그대로 나라의 수호를 위한 활동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 빈부 격차의 조정은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정부의 주요 업무로 인식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경제 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 헌법(제 119조 2항)에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가져다 준 적도(適度) 이상의 국부의 창출 및 영토의 확장은 반대하고 있지만 <국가>에서 강대한 나라가 되기 위한 국부의 창출 자체를 제한하는 조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423a-c 참고) 플라톤 역시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대규모의 함선 제작이 은광의 발견과 그것의 수출을 통한 국부의 증대에 있었음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수호자들에 대한 사적 소유의 금지가 미치는 경제적 영향은 생각만큼 큰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사적 소유의 금지 대상이 이상 국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수호자라는 최소 집단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수호자 집단이 이상 국가 전체 인구 비중에서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을 차지하는지는 정확히 추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상 국가에서는 ‘비록 나라의 방위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수가 천 명뿐일지라도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언급(423a)과 플라톤이 살았던 아테네 당대의 인구가 최소 21만 명에서 30만 명(V. Ehrenberg)이었음을 고려하면 수호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0.5%에서 1% 정도에 불과하다.(참고로 아테네 전체 인구 중 30-35%가 노예였고 아테네 경제가 기본적으로 노예 노동에 의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상 국가에도 노예가 있다. 플라톤 역시 노예 노동이 일상화된 시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그러나 이상 국가에서는 아테네와 달리 노예를 최대한 이방인 전쟁 포로들에 한정하려 했다.(469c)) 그리고 아테네에서 귀족이나 부유층으로 구성된 중갑 보병(hoplites)의 수가 3만 명의 전체 병사들(이 가운데는 경보병 및 함대 노수병들은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 3000명 정도이고(A. Andrews) 그들만이 공적 목록에 전사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을 근거 삼아 그들을 수호자 계층의 수로 추정한다 해도 그 비중 또한 1.5%에서 3%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이 수치들은 순전히 추정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수호자 계층의 사적 소유의 금지가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근거로 사용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20세기 소련 공산주의를 비롯한 전체주의 및 독재 국가들 대부분이 결국에는 권력층의 사리사욕 때문에 멸망했음을 고려하면 권력층의 사적 소유를 법적으로 아예 봉쇄하고 있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그러한 나라들과 연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접근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는 권력이 수호자들에게 독점되어 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수호자들의 권력의 합목적성이 시민이 이익에 한정되어 있고 복수의 철학자들이 돌아가며 통치하는 데다[<법률>에서는 권력을 견제하는 사정관들이 최상위 권력자들의 하나로 위치하고 최고 통치기구인 야간위원회에 위원으로 포함되어 있다.(945e947c. 961a)] 수호자들에게는 명예 이외에 어떠한 사적 소유나 이익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절대 권력을 철저히 사적 소유의 수단으로 삼은 현대의 전체주의 독재자들과도 원천적으로 구별된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굳이 말한다면 계급 차이 자체를 배격하는 공산주의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역할 간의 조화와 공존을 통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꿈꾸는 공동체주의의 선구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

* 그런데 사적 소유가 분열의 원인이 된다면 이상 국가에서 사적 소유가 가능한 생산자 계층은 내적으로 분열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의 내란 대부분은 생산자 계층 내부의 분열에 기인하기보다는 권력자들이 부유층과 결탁하여 시민의 부를 착취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권력과 부를 함께 가지려는 권력자들의 욕구 때문에 내분이 생겼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에게 이러한 내란의 여지는 평생 올바른 교육으로 단련된 철인 통치자들의 이성적 조화 능력을 통해 사전에 해소될 수 있다고 여겨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경험적 사실을 아는 현대인에게 플라톤의 구상은 여전히 현실성 없는 시대착오적 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주목해야 할 것은 플라톤 역시 현대를 사는 우리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절대 권력의 피폐상을 경험했으며 대화편 곳곳에서 그 절망감을 토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켈리아에서 참주정의 적나라한 실체를 몸소 경험한 것을 비롯해 아테네에서도 오죽하면 30인 참주정을 겪으며 차라리 민주정이 황금 같은 정치체제로까지 보인다고 고백했을까.(<편지들> 324d) 이점에서도 권력과 재력의 분리는 이상 국가의 정치체제를 기초 지우는 대원칙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의 실현 가능성이 오로지 정치와 지성의 결합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플라톤은 어떠한 이론적 실천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철인 통치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지고의 목표이자 이상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멸망해 가는 아테네를 바라보며 현실 정치 참여 대신 골방에 처박혀 거의 집착이라 할 정도의 이상을 향한 그의 집요함은 아마도 그 자신이 겪은 정치적 참혹상에 대한 세계사적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마치 그가 미래를 내다보기나 한 것처럼 그의 원대한 이상은 서구 정치철학사를 관통하여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참혹한 정치적 절망을 겪은 사람들에게 결코 꺼질 수 없는 횃불로 되살아나 결코 꺾일 수 없는 희망의 푯대로 우리들의 열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그 실천을 추동하고 있다. 정치적 이상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변혁을 이끄는 힘이 될 수 있다.

[제3권 끝, 이어서 제4권 1-3-3 수호자들의 임무(419a-427c) 계속]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

1. 캐롤 페이트만의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을 읽고
하편. ‘시민의 자유와 예속관계는 교환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유가연(여성과철학 분과)

 

캐롤 페이트만(Carole Pateman, 1940~)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계약을 남성과 그에 예속되는 여성과의 관계, 여성과 그녀로 인해 자유에 대한 판타지를 가진 남성과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남녀 간의 자유와 예속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치적인 성차를 토대로 살펴보았다. 성차의 정치적 특성은 혼인계약, 고용계약이나 노예계약에서와 같이 시민법에 의거해 시민 개개인의 행동이 국가로 인해 제한된다는 조건 아래 맺는 사회계약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남녀 간의 자유와 예속의 관계는 정치적으로 시민의 자유와 지배가 예속되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시민은 국가로부터의 보호를 보상으로 되돌려 받는다는 점에서 이 관계는 교환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든다. 과연 시민의 자유와 예속의 교환관계가 제대로 성립되느냐는 것이다. 캐롤 페이트만에 따르면, “자유와 교환가능한 예속이 착취라는 개념에 포함될 수 있다는 사회주의자들”1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호교환할 수 있는 이원 항은 일단 등가물로서 동등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데, 자유와 착취 간의 관계는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20세기 초반만 해도 자유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제대로 규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실상 20세기 중반 영국 런던 출신의 정치가이자 작가이면서 경제학자, 신학자 및 역사학자였던 죠지 콜(George Cole, 1889~1959)은 노동당에 소속되어 있었고, 길드사회주의를 주장했다. 페이트만은 콜의 급진적인 정치이론이나 활동은 일단 논외로 두고, 콜이 언급한 노동자들의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콜에 의하면, 정작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가 가진 잘못된 생산 시스템을 비판하거나 지적하지 못했다.”2는 점에 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 환경이나 조건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조차 깨닫거나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잘못된 사회계약의 노예제와 같은 속성이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노동계약은 그저 추상적이고 막연한 가난이고 불공평한 것이었다. 페이트만이 지적한 사회계약의 어두운 면은 20세기 초반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시민의 몰이해와 편견, 불식, 무지 등으로 인해 폐허로 남아 있다.

캐롤 페이트만은 성과 부부와 관련한 사적인 생활을 비정치적 범주로 묶어 부성의 권력 아래 완전히 감추고 망각시킨 사회계약을 비판하는 반면,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는 강요된 비정치적 자연 및 권리를 종교와 민속학 및 인류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크리스테바는 『여성과 성스러움』에서 가톨릭 미사의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발작증세를 보인 흑인여성에 대해 알린 바 있다. 이 증세에 대한 정확한 명칭은 없었다. 미사 시간에 쓰러져 울부짖은 여성은 “신들림, 미친 여자, 히스테리, 투밥(서구화된 아프리카인 여성), 애니미즘, 미국식 외침 요법, 묘기, 영매 등”3으로 명명되었다. 같은 여성이지만, 엄격한 수도회 교육을 받은 아프리카인 수녀들이나 엘리트층 여성들은 발작 증세를 일으키지 않았다. 대개 하층민 여성들에게 일어난 히스테리는 유럽으로부터 강제 이식된 가톨릭교에 짓눌려 있던 토속종교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신분석학자이면서 기호학자, 철학자, 작가이고, 파리 디드로 대학의 명예교수인 크리스테바는 흑인 여성의 이러한 증세를 “성스러운 착란증”, “가톨릭교의 성스러움과 다른 새로운 성스러움”4이라고 불렀다. 아프리카인들이 노래와 춤을 즐기면서 자신만의 리듬을 만드는 “감응적 기질”5이 성스러움에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녀는 페이트만과 같이 사회계약의 토대를 이루는 성적 계약을 인간이 태어나 최초로 욕망하는 대상으로 만나는 모성, 즉 가부장제로 인해 은폐되고 왜곡된 모성으로 정의하였다. 인간은 태어나 주관적인 입장을 관철하면서 성장하여 모성을 배척하고 거부하는 단계에 들어선다. 인간은 모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모성을 부정하는 것에 집착하고 억압받는다. 페이트만은 시민의 자유와 예속의 관계를 성적 계약으로 밝힌 바와 같이,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를 통해 주체의 모성 배척 행위와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강박증적 억압의 상태를 제시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자유와 예속의 교환관계에서 보상되어 얻는 국가로부터의 보호권을 대신하여, 인간 주체가 내재적으로 드러내는 신경증적 징후를 제시하였다. 인간이 자연을 부인하고 분리하려고 할수록, 그는 무의식의 보상 및 억압 기제로 인해 자연에 더 집착하기를 욕망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회계약을 어머니와 맺는 인간 최초의 애착 관계로 보았다. 어머니와의 욕망과 억압 관계는 성인이 되어서도 불안과 공포의 감정으로 표출되면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무의식을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자아와 지각의 대상을 분리하고, 자아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면서 겪는 근심과 불안감은 안과 밖의 경계성에서 의미를 무수히 창출한다. 이것이 크리스테바가 제시한 문화비평 용어인 “아브젝시옹”6이다. 아브젝트는 공포증이나 자아분열증과 같이 어느 대상을 부인하거나 동일시하는 행위가 뒤섞이는 이념을 말한다. 아브젝트는 사회계약론으로 규정된 성적 계약의 가장 순수하고 강렬한 실재이다.

Carole Pateman in Brazil 2015, 출처: 위키피디아 / <Agência Brasil> https://agenciabrasil.ebc.com.br/

캐롤 페이트만은 원초적 사회계약이 가부장제가 폭로되는 남녀 간의 성적 계약이라고 비판한다. 그녀는 “사회계약론에 나타난 개인은 실체도 정체성도 없이”7 추상적인 자아만을 가지고 있어 행동 발달 과정에서도 구체화되지 못하고 추상적인 단계에 머무른다고 지적한다. 남성의 행동은 보편적이고, 여성의 행동은 개별적이라고 보는 사회계약론은 결코 성차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반면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는 미국 버클리 도시에 위치한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이면서 정치철학, 윤리학, 여성주의, 퀴어 이론, 문화 이론 분야의 전문가로서, 개인의 구체적인 정체성을 담고 있는 것은 ‘나’라는 인칭대명사나 이름이 아니라 언어의 독특한 수행성을 띠는 동사라고 주장한다. 수행언어를 통해 젠더 문제를 논한 그녀는 페미니즘 분야에서 대표적인 젠더이론가이자 퀴어학자, 철학자이다. 버틀러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욕망의 억압 기제에서 더 나아가, 자유와 예속의 보상물로서 잃어버린 모성을 향한 애착을 “우울증”8으로 제시하고, 이것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의 대표 저서인 『젠더 트러블』에서는 젠더의 우울증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한 버틀러의 초기 의도가 후반부에서는 나타나지 않거나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그녀에 따르면, 우울증은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예측할 수 없고 불확실한 젠더의 정치적 특성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 증세는 젠더 문제가 규범적이거나 미리 규정된 형식을 갖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는 고유한 수행적 특성으로부터 발생한다. 버틀러는 젠더를 지배하는 규범들을 파괴하고 해체하고자 하는 “수행”9적 언어를 믿지 않는다. 젠더가 담지하는 사회적 수행성은 자신을 ‘나’일 수 있도록 만드는 조건으로서 투명하지 않을뿐더러 사회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정확히 규명되어있지 않다. 즉, 나를 나이게끔 하는 것은 ‘나’라는 인칭을 나타내는 언어에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나의 이름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버틀러에 의하면, ‘나’는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와 사회 간의 예속관계에 있다. 우리는 이미 언어가 지시하는 행동을 수행하는 맥락에서, 동사 언어는 “계약한다”의 뜻을 지닌 사회계약론을 이미 담지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수행언어가 아닌 진술을 목적으로 하는 명사는 사회계약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버틀러는 사회계약론을 동사의 수행적 정체성이 지니는 지시작용, 현시작용, 의미작용으로 대표되는 기호학적 구조로 정의한다.

캐롤 페이트만이 사회계약의 근간으로 간주되어 온 남녀 간의 성적 계약을 비판했다면,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 1930~)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왜곡된 모성과 관련한 계약을 비판한다. 남성은 모성을 모체와 관련한 사회적 관계, 이성과 권력, 언어 등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물질, 사회에서는 능력 없는 자연으로 여기고, 이것들을 교환할 수 없고, 보상받을 수 없는 가치로 분류하면서, 모성을 단절해버린다(뤼스 이리가레, 『반사경: 타자인 여성에 대하여』, 심하은‧황주영 역, 꿈꾼문고, 2021, 62-65쪽). 이리가레에 따르면, 모성을 현전하는 남성은 특유한 부채 의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남성성에서 벗어난 채로 중성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인 것처럼 가장한다. 끊임없이 사회가 가치 판단을 강요하는 남성성에 대해 자신은 방관하는 척, 무관심 및 무책임한 척, 그것을 가장 보편적인 이성으로 논리정연하며, 도덕적인 질서로 포장한다. 남성성도 여성성도 없는 어느 이의 중성성이 남기고 간 존재의 “빈 공백”(뤼스 이리가레, 위의 책, 2021, 67쪽)은 남성성에 예속된 여성들에게는 하염없이 나약하고 지지부진하며, 어설픈 어느 가치를 다시 만회하고 채워야 하는 것처럼 밑도 끝도 없는 의무감으로 다가온다. 이와 같은 맥락 없는 무책임과 막연한 의무감 사이에 생겨나는 무의식적 억압 기제는 선험적이고 합리적인 인식론의 모습을 한 채 철학사에서 발전되어 왔다. 이 논의와 관련하여, 이리가레는 모성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억압적인 분화과정과 차이 개념이 폭로된다고 본다. 이러한 분화와 차이 관계가 자연에 대한 몰이해나 편견을 없애고, 철학사 속 합리적 이성과 같은 물질을 역설적인 진화 과정에서 살펴보고, 모체와 남성, 여성 간의 관계를 재조명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에게 이리가레가 내세우는 남성과 여성 간의 성적 차이는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이라서 고정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본질이나 실체이다. 즉, 그녀에게는 이리가레가 헤겔의 자연과 정신의 지양 구도를 급진적인 관점에서 분리 구도로 재해석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정신의 관계에서 더 이상적이고 높은 단계에 다다르기 위해 무엇을 멀리하거나 배격하는 관계 양상을 모성에 억압된 남성성과 그것을 계속 회복하려고 하는 여성성의 집착증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이리가레에게 헤겔의 자연과 정신의 지양성은 정신분석학에서 살펴보는 무의식 기제의 핵심적인 원동력이 되므로, 이는 캐롤 페이트만이 사회계약론으로서 남녀 간의 억압된 성적 계약을 비판한 만큼의 분명한 안티테제를 제시할 수 없었다. 이리가레에게 정신과 자연의 분리 구도는 실재가 아니라 단지 상징적 언어에 불과했다. 또한, 그녀는 남성이 얼마나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서의 자연으로 배제하고 타자화하는지를 오롯이 비추는 거울(반사경)은 어떻게 여성에게 자신만의 관점과 세계를 구축하게 하고, 자신을 재현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서, 헤겔의 이상적인 변증법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여성의 자유와 권력은 단지 상징적 언어에 귀속된 상상계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리가레는 여성학자로서 문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을 전공함으로써 여성의 인권과 자유의 문제를 정신병리학적 관점에서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필자는 캐롤 페이트만이 제시한 페미니즘적 사회계약론을 읽고, 저작의 핵심 개념어를 선정하여 이를 중심으로 그녀와 다른 관점을 보이는 여러 여성학자들의 입장을 비교 분석하여 보았다. 페이트만이 논하였듯이, 남성중심주의적인 철학사에서 벗어나 여성과 남성 간의 감추어진 사회계약론을 비판하는 입장은 오늘날 미래 인류의 위기, 우리가 사는 지구가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점을 경고하는 에코페미니즘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할 수 있다. 인본주의, 형이상학, 인식론, 관념론, 존재론, 유물론, 윤리학, 실재론 등 이제까지 철학사를 구성한 주요한 논의들은 모두 미래에는 상상되지도 기억되지도 못할 수 있다. 필자는 글을 끝마치기 전에,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쓰레기와 퇴비와 같은 어두움에 숨겨져 왔거나 감춰왔던 순수 물질, 즉 “방문하기, 일하기, 놀기의 방식과 방향을 결정하는 동물 공생자들”(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역, 마농지, 2021, 191쪽.)을 배치해 본다. 과연 몇 백년이나 몇 천년 후의 세대로 포함할 비-인간은 앞으로 인간과 어떠한 사회계약을 맺으며 살아갈 것인지를 자문해본다.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에서 2023년 4월부터 11월까지 예정으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를 기획·연재합니다. 지난 2018년 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블로그분과진에 연재되었고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에 이어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코너를 연재합니다. 본격 연재 전 자세한 소개는 「연재의 변」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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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에서 2023년 4월부터 11월까지 예정으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를 기획·연재합니다. 지난 2018년 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블로그분과진에 연재되었고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에 이어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코너를 연재합니다. 본격 연재 전 자세한 소개는 「연재의 변」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캐롤 페이트만의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을 읽고
상편. ‘더 이상 우애 정신은 없다 – 포스트 코로나 시기를 앞두고 우애적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유가연(여성과철학 분과)

 

캐롤 페이트만(Carole Pateman, 1940~)은 1940년 영국에서 출생한 정치학자이자 여성학자이다. 1963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72년 시드니대학 정치이론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캘리포니아대학 정치과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부터 현재까지 페이트만은 이 대학의 명예교수로 재직해 있다. 그녀는 민주주의와 관련한 여성이론과 정치이론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이자 교수이며, 자유주의보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입장에 서 있다.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은 1988년에 출간한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로서, 페이트만이 시드니대학 정치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했을 때 나온 책이다. 이 책이 출간된 후인 1990년대 초중반에 그녀는 최초로 국제정치학회에서 여성 학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책의 영문 제목은 The sexual contract로, 한국어로 번역한 제목보다 더 간략하다. 이 책의 내용은 페이트만이 미국과 호주에서 열었던 여러 강연과 토론을 바탕으로 하고, 참고 자료들은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스탠포드대학 행동과학연구소에서 수집하였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프린스턴대학 사회과학연구소에서는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본격적인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1

이 책은 홉스, 칸트, 로크, 루소 등의 근대철학 텍스트들에서 쉽게 간과하거나 가볍게 다룬 부분들을 골라 남성과 여성의 정치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여 기존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페이트만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여러 가지 계약들에 관한 논의들이 정치이론에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에 나타난 여성에 관한 논의를 폄하하거나 과도하게 비난하는 입장을 피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전통적 정치이론과 현대적 정치이론의 역사적, 시대적, 상황적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페이트만이 여성이론 분야에서,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를 정치이론 텍스트로 연구하고 논의하는 이유는 역사의 균열 속에서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가진 지속성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성들이 역사의 굴곡에서조차 없앨 수 없었던 삶과 존재에 대한 열망은 아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넓게 조망하고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내속적이고 존속적인 시간에 담긴 것이었다.

Carole Pateman(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Political Science, Distinguished Professor)  https://ucla.academia.edu/CarolePateman

페이트만에 따르면, 너무 잘 알려진 토머스 홉스, 존 로크나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는 정작 여성들이 배제되어 있다. 정치철학 및 정치이론 분야에서 페미니즘 논의들이 배제되었던 1970~80년대만 해도 여성의 정치적 의무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바라본 입장은 급진적 성향을 띠는 것으로 보였다. 정치학이나 정치이론 분야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를 제기한 것도 낯설었지만,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사회계약설에 대항하는 입장을 내세우는 시도는 더욱 낯설었기 때문이다. 홉스는 여성이 시민사회에서 혼인계약을 할 수 있는 동시에 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무를 내세우지만, 여성이 시민의 자유를 획득하는 사회계약에 참여하지 않고 참여할 수 없는 신민(臣民)이라고 간주하는 실질적인 계약과 시대 및 사회적 한계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2 홉스의 시민 계약론도 남성중심주의를 이상적으로 규정한 점에서 볼 때, 기존의 근대 철학자들의 입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시민들이 스스로 국가와 시민법에 예속되고, 자신들의 보호를 위해 예속이 교환된다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루소는 시민을 자발적으로 지배하고 예속하는 사회계약설을 제시하는데, 시민의 지배 및 예속권이 가지는 자발성은 결국 사회계약을 교의적으로 만들어버렸고, 실질적이고 자유로이 실천가능한 모델로 간주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시민의 권리 문제는 루소의 사회계약설로 인해 진부한 논의로 치부되거나 더 나아가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주제로 전락해 버렸다.3 로크는 가정 내 아버지의 권력과 사회적 권력을 구분하고, 계약을 통해 사회적 관계에서 권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페이트만은 로크의 사회계약설은 성적 계약이나 혼인계약을 배제하였다고 비판한다. 혼인계약은 매춘계약이나 고용계약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을 예속하는 수단이었고, 사회계약은 결국 인류사와 함께 지속되어온 성 계약을 토대로 하고 있다. 성적 계약은 가내 아버지의 정치적 권력이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라진 후에 새로이 등장한 형제계약에 속한 가부장제에 기반해 있다. 가부장제는 더 이상 아버지의 권력이 중심되는 가족구조가 아니라 시민사회와 시민의 자유에도 영향을 주는 형제계약이다. 따라서, 형제계약에 속하는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사회에 예속되는 개인의 신분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가부장제 계약은 항상 국가, 자본과 노동 간의 협상에서 수많은 논쟁과 갈등을 야기하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숱하게 문제를 일으키는 임금에 의한 노예계약과 시장사회주의에서 수많은 페미니즘운동을 일으킨 신체상의 소유권 등이 그 예이다. 사회계약에 대한 노동자나 시민의 예속과 복종의 관계는 언제나 가부장제를 토대로 한다. 사회계약의 전반에 걸쳐 계약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은 가부장제에 있다. 그렇지만, 푸코가 제시한 바와 같이 사회계약이 사법제도나 교육상의 훈육, 통제사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책의 제목과 같이 페이트만은 남녀 관계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다루고 다양한 법적 계약 관계를 주제로 삼지만, 특정한 계약법을 다루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계약과 성 계약은 각각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계약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상호대립관계에서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를 갖고 평등한 상태로 태어나고, 존엄성과 권리를 가진 모든 인간을 토대로 사회계약은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자연에 가까운 원초적 계약의 상태는 남성과 여성 간에 커다란 차이가 남겨져 있다. 은연중이든 의식적이든, 편협적이든 포용적이든, 상징적이든 실재적이든 간에, 사회계약에서 자유를 자연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남성으로 상징하고, 예속을 자연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여성으로 대표하는 질서라는 것을 해체하기란 쉽지 않다. 남성과 여성의 성차는 인간의 원초적 계약상태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관계 차이인 것이다.

17~18세기 국가와 시민, 정부 간의 사회계약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발전이 있었으나 성적 계약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괄시하거나 논의하지 않았다. 성인은 시민이 되고 결혼함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또한,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 시민사회로 접어들면서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성인이 획득하는 자유에 여성을 소유하는 것도 해당해 있다. 페이트만이 내세우는 여성과 관련한 핵심적인 논의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사회계약도 성적 계약에 기초해 있고, 시민이 얻는 자유도 이러한 성적 계약으로 인한 가부장제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은 사회에서 성과 관련한 여러 가지 계약 형태를 고려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논의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남성에게는 사회계약뿐만 아니라 성적 계약까지도 원시적 자연이자 자유라는 의견이 오래된 편견으로 남아 있고,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민주주의를 만든 법에도 남성중심주의가 지닌 오래된 파행이 사라지지 않는다. 시민사회는 왜 가부장제를 문제시 여기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아버지의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구분하지 못한 데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는 가정 내 아버지의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는 아버지의 권력을 형제애로 탈바꿈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것은 남성의 성에 대한 권리가 근대적 사회계약을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프랑스어에는 애인이나 연인을 가리킬 때에 사랑(amour)에서 비롯되는 연인(amant)의 표현 외에 우정(amitie)에서 비롯되는 ‘한 명의 사랑스러운 친구’를 뜻하고, 엉(윈) 쁘띠(뜨) 아미로 발음하는 표현인 ‘un(e) petit(e) ami(e)’가 있다. 한 명의 친구를 프랑스어로 표현하면, un(e) ami(e)인데, 이 어휘에서 ‘petit(e)’와 같은 형용사가 들어가는 이유는 petit(e)가 ‘작다’는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사랑스럽고 귀여우며 정답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다’는 의미를 가진 어휘에 ‘친밀한 감정’의 의미가 함께 포함된 이유는 주니어(junior)와 같은 ‘막내 형제’가 함축되어있기 때문이다. 나의 애인을 가리키는 ‘쁘띠(뜨) 아미’는 마치 맏형이 막내동생을 대하는 태도나 시선 등에서 연유한다. 즉, 성적 계약에 기초한 애인을 표현하는 어휘는 가족애적인 가부장제가 우애적인 가부장제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어휘임을 알 수 있다. 18~19세기 혁명기의 사회계약설에 기반한 새로운 가부장제에서 비롯한 ‘나의 연인’과 같은 어휘에는 혈연관계를 뜻하는 형제애의 맥락과 의미가 비어있는 채 잔여물로 남아 있다. 근대 형제애는 여성이 남성에 종속된다는 뜻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형제계약은 고용계약, 매춘계약을 포함한 성적 계약으로 간주되어서 사회계약에 속한 결혼 계약과 구분된다.

페미니즘에서 연구한 가부장제에 관한 모호하거나 불명확한 특성으로 인해, 페이트만은 사회적 결사를 위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개인이 신체를 자유로이 소유한다는 의미에서의 재산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사회적 결사란, “시민들끼리의 개인적 우애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대를 도모하는 집단으로서의 복수 형태인 우애‘들’을 의미한다.”4 이 용어는 남성 중심적인 비밀결사단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모든 계약은 재산이나 권리의 상호교환과 이에 따른 평등이 전제해 있다. 그러나 한쪽이 “잠재적인 재산이 되면 불평등하게 된다.”5 재산은 기본적으로 물질에 기반하므로, 잠재성을 전제로 한다면, 반드시 현실화되는 실재가 동반한다. 이것은 물질에 이미 담겨 있는 가치상에서의 평등이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상상적인 신체로만 여기고, 실재적 신체를 가상화하는 관계에 제한한다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더 이상 합법적이거나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여기에서 잠재성은 어느 행위가 현실화되는 가능성(계기나 준원인 등)을 의미하는 한에서의 가상성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실재하는 신체를 가진 남편이 현실에서 실재적인 아내의 신체를 특정한 가상 세계의 도구로 삼거나 특정한 성적 행위를 포함한 행위를 일삼는 경우, 혹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을 만큼 아바타나 메타버스, 인터넷게임 등으로 가상화되어 있는 경우에 가상 남편이 가상 세계에서 연장된 현실의 실재적 아내에게 실질적 행위를 하는 경우 등, 전혀 현실화되지 않는 상태에서 전적인 가상 세계에 의해 선택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언어와 행위의 실질적인 영향력 등의 경우에 남녀의 성적 차이는 가상과 실재 간의 관계에 기인하는 것이지 자연적 성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남녀 간의 성차가 순수한 자연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가상과 실재의 차이에서 비롯된 다양한 법적 지위와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소유하는 권리를 가상과 실재의 불평등한 관계로 인해 박탈당하는 경우는 여성의 인권뿐만 아니라 성적 정체성을 박탈당하는 경우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민의 자발적인 신체 소유권 문제는 남성과 여성 간에 형제애를 토대로 한 형제계약에서 비롯된다. 이 계약이 가능하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 이어온 자본경제의 역사와 관련된다. 자본경제는 남녀 간의 형제애를 이상적인 모델로 규정하여 현실과 신화 간의 간격을 모호하게 만들며, 그 틈에서 용암이 분출하듯이 남성에게는 오이디푸스의 신화가 끊임없이 솟구치고, 여성에게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뿜어져 나온다. 근대 정치사상으로부터 탄생한 민주주의와 공화국 이념은 언제나 신화적 특성을 배제할 수 없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이자 보편적인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 중 박애는 프랑스어로 fraternite라고 하며, 우애 혹은 형제애라는 의미도 가진다. 프랑스 공화국의 기본이념인 박애 정신은 근대 시민사회 시민들끼리 강하게 유대하도록 이끌어 오늘날에는 관용 정신(똘레랑스)으로 불린다. 박애 이념은 사회를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기능을 맡아왔다. 그러나, 현대 프랑스 사회에서 관용 정신은 본래의 기능을 벗어나 사회적인 문제와 갈등을 심각하게 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애나 형제애 정신으로 대변되는 다양한 사회계약, 특히 성적 계약이나 혼인계약, 매춘계약, 고용계약, 노예계약 등은 여러 유형의 가정폭력과 성범죄, 각종 중범죄, 빈부격차, 인종차별, 성차별, 난민수용의 문제 등을 초래하였다. 오늘날의 관용 정신이든 근대사회의 기반을 마련하고 공화국 및 민주주의를 형성한 주요 정치이념마저도 가부장제의 어두운 면을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를 민주주의 공화국을 향한 혁명의 길로 이끌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시민들이 민중이 되어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끈 정치이념은 더 이상 사회통합의 계기가 아니라 사회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근대 사회계약의 토대를 이루는 성적 계약에 대해 살펴보았다. 페이트만은 이 책에서 사회계약론을 살펴보려면 우선 성적 계약을 논해야 한다는 페미니즘적 이념을 내세웠다. 그녀는 다양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이념을 연구하면서, 가부장제에 대한 심층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여성운동이 일어난 지 약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가부장제에 대한 개념과 범위 규정,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살펴보는 역사적 고찰, 사회적 권력의 구조화 문제, 사회의 보편성인지 특수성인지의 여부, 자본주의와의 관련성, 여성성과 관련한 식민제국주의의 역사적 고찰 등과 같은 연구 과제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긴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는 페미니즘 연구는 현대 여성들의 사법 판결권을 개혁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자 작업이다. 4년 전 현 인류에게 느닷없이 닥친 코로나19 팬데믹은 또 다른 현대적 우애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전 세계 통계상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망한 자가 약 670만 명이 넘고,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노동자들은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었으며, 시민들의 경제 및 사회활동이 줄어들자 자영업자들의 소득이 크게 감소하여, 많은 점포들이 문을 닫아 길거리 문화가 사라질 위기가 처해 있다. 또한, 20~30대 청년들은 사회의 양극화 구조가 심각해지고, 기존의 산업 패러다임이 해체된 가운데 일자리를 얻거나 정식적인 학교 교육을 받는 데 어려움이 늘고 있다. 2023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17세기 근대정치사상으로부터 탄생한 민주주의 공화국의 이념과 시민의식, 인권사상, 자본주의 경제사회 등이 300년 넘게 이어온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계약의 지배와 예속관계를 새로이 깨닫는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시민사회는 또 다른 정치적 의무이자 권리, 자유를 실천하고, 논의를 확장 및 발전시키는 과제를 미래에 남겨두고 있다. 오늘날까지 은연중에 교의적으로 수용되었던 시민의 자유와 권리의 문제는 이제 허물을 벗었다. 우리는 신종바이러스의 발견과 감염경로, 방역 대책, 예방진료,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 통계 및 이와 관련한 신기술들을 경험하면서, 진부하고 하찮게만 여겨졌던 근대 사회계약설을 재고찰하게 되었다. 끝내 사회계약은 시민들에게 진실을 은폐하고 기만한 성적 계약의 진면모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성적 계약은 시민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제3의 성이든 간에 어떠한 성(性)이라도 띠며 살고 있음을 폭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페이트만이 이 책에서 강조한 형제애적 가부장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꼭 고려해야 할 논의이다.

—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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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

‘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여성과철학 분과

 

지난 2019년에 발행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의 작업을 잇는 연속 작업으로, 이번 기획은 페미니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조명할 수 있는 확장된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우리의 이전 기획 이후 지난 3년간 출판된 여러 편의 페미니즘의 고전을 비롯해, 페미니즘을 혁신하거나 다양화시키는 여러 텍스트들이 번역‧출판되었으며, 우리는 페미니즘 사상의 발전을 위해서 이들의 추상적 개념, 전개되는 논리,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기존의 질서 및 이데올로기와의 전투, 마르크스주의-생태주의-아나키즘-자유주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정신분석학 등과의 우호적이거나 적대적 마주침, 철학-법학-사회학-생물학-인류학-문학-언어학-공학-자연과학의 분과학문적 틀 안에서 혹은 그것과 투쟁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모험 등을 쉽고 익숙한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오늘날 여성학이라는 분과학문의 형태로 정규화되고 규범화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사유의 궤적과 흐름을 추적 및 구성하면서 현재의 사회지형 안에서 페미니즘의 다양한 철학적 면모를 드러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기획은 한편으로는 이론의 관점에서는 이론적‧분석적‧논리적‧비판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실천의 형태에서는 실천적‧대중(지향)적‧구성적‧상상적인 성격을 띤다. 즉 자유롭게 상상함으로써 페미니즘의 외연과 의미를 더 넓게 확장시킬 수 있는 연구를 하면서도, 그것의 서술과 전개과정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며, 실천적 활동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자 한다.

이것은 지난 2016-2018년을 경과하며 미투 운동으로 상승했던 페미니즘 운동이 최근 하강/침체기에 접어든 상황에서 운동에서의 다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이론적 계기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이 기획은 이전의 운동이 가진 단조로움이나 협소함을 넘어서 다양성과 깊이, 그리고 더 넓은 연대의 가능성을 마련하기 위한 이론적 포용성을 넓히는 것에 초점이 두어진다. 또한 이 기획은 “한철연” 내에서 ‘여성과철학’ 분과의 지난 활동들의 결과물을 모으는 것이기도 하며, 그래서 활동을 강화하고 신규회원을 모집하는 계기도 지니고 있다.

이 기획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가 진행하는 것으로, 먼저 웹진 <e-시대와 철학> ‘블로그 분과진’에 글을 업로드하고, 모든 글이 최종 마무리 제출된 이후에는 글들을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펴낼 생각이다.

 

집필자 : 김세서리아, 김은주, 연효숙, 유가연, 이승준, 이지영, 정유진, 주현


  • 연재 글의 저자와 주제

[1] 전반기

  • 유가연 : 남과 여, 은폐된 성적계약(캐롤 페이트먼)
  • 이승준 :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샌드라 하딩)
  • 연효숙 : 『2의 성』(시몬 드 보부아르),
  • 주현 : 『스트레이트 마인드』(모니크 위티그)
  • 이지영 : 『몸 페미니즘을 향해』(엘리자베스 그로스)
  • 정유진 : 『캘리번과 마녀』 / 『혁명의 영점』(실비아 페데리치)
  • 주현 : 『섹스할 권리』(아미아 스리니바산)
  • 김은주 : 『변신』 / 『포스트휴먼』(로지 브라이도티)

[2] 후반기

  • 연효숙 : 『시적언어의 혁명』(줄리아 크리스테바),
  • 이승준 : 『여성 인종 계급』(앤절라 데이비스)
  • 김은주 :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캐서린 헤일스)
  • 김세서리아 :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프리드리히 엥겔스)
  • 유가연 : 『반사경』(뤼스 이리가레)
  • 김세서리아 : 『권력의 정신적 삶』(주디스 버틀러)
  • 이지영 :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트러블과 함께하기』(도나 해러웨이)
  • 정유진 : 『대항성 선언』(폴 프레시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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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유재민 지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초빙교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는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69-399), 플라톤(Platon, 기원전 429?-347)과 함께 고전기 그리스 철학, 나아가 서양 사상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그리스 북동부 칼키디케 반도의 스파케이로스로 그리스 변방 출신이다. 기원전 367년, 17세에 그는 당대 문화의 중심이었던 아테네로 유학을 가서, 플라톤이 교장으로 있었던 아카데미아에서 20년 동안 공부한다. 학생 시절 그를 가리키는 몇 가지 별명은 “학원의 지성”, “부지런한 독서가”였다. 그는 20년 후 아카데미아를 떠나 자신의 독자적 학파를 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사상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한 철학자이다. 그는 ‘만학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서양 사상사 거의 전 분야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서양 최초로 학문을 분류한 사람이다. 그의 저술은 크게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적 저술로 분류된다. 그리고 ‘실천적 학문’에 윤리학과 정치학적 저술들이 포함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과 함께 실천적 학문에 속한다. 그중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대표하는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윤리학적 저술에 『에우데모스 윤리』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포함되는데, 이 책의 제목은 에우데모스[아폴론 뤼케이오스(아폴론 신의 별칭) 신전 근체에 세운 학교인 뤼케이온 학원 구성원 중 한 명]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인 니코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록을 편집해서 붙인 것이다.

유재민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부제를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로 붙였다.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은 제1장의 첫 소제목인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이다. 그리고 유재민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다음 소제목을 “행복에서 시작하여 덕으로 나아가다”, “행복, 윤리의 사다리”, “객관적 행복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으로 정했다.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재민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어를 ‘행복’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자인 그는 제2장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행복이란 무엇인가”, “덕과 중용”, “정의와 우정”, “공동체의 행복”이라는 주제어를 중심으로 읽기 시작한다. 마지막 제3장에서는 “철학의 이정표”라는 제목으로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테오프라스토의 『성격의 유형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 에피쿠로스의 『세 통의 편지』, 윌리엄 프라이어의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을 소개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와 함께 읽어야 할 책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지,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돌진하는 군인은 ‘착한’ 군인이 아니라, ‘훌륭한’ 군인이다. ‘윤리’는 그리스어 ‘에티코스’(êthikos)를 번역한 말이다. ‘에티코스’의 어원은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이다. 사람이 습관을 들여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것은 ‘윤리’가 아니라 ‘성격’ 혹은 ‘성품’이다. 따라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성격에 관한 책’ 혹은 ‘성품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 행위자의 본성적이고 본질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어떤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도덕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인간의 행복에 관한 설명을 통해 제시된다. 또한 이 원리는 좋은 사람을 만들어주고 행복한 사람을 살게 해주는 여러 덕목들에 관한 설명을 통해 제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 덕과 중용, 정의와 우정, 공동체의 행복이라는 덕목들을 개인 안에 구체화하는 것이 바로 국가이다.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어떤 국가에 살고 있는가?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 최근(2023)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하여 출간했다.

‘나와 한철연’ – 한길석 편 [나와 한철연] ②

나와 한철연

 

한길석(중부대)

 

내가 한철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9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나는 인문대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선배가 일러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송종서 선배였다. 당시 종서형은 한철연 교육부장이었다. 내 전화를 받고 다소 의아했다고 한다. 대뜸 전화해서 입회(?)를 신청한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던가? 어쨌든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내게 세상은 종말적 분위기로 가득했다. 구제금융 시대에 접어든 터라 오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캐쥬얼하게 전화해서 쿨하게 받아들여 준 유일한 곳이 한철연이었다(라고 말하면 한철연이 너무 쉽게 보일까?).

쉽게 들어왔지만, 정식 회원이 되려면 거쳐야 할 과정이 있었다. 근 한 학기 동안 매주 토요일 교육부 강좌를 이수하고 회비를 납부해야 정식 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매주 토요일 홍대역 산울림 소극장 부근의 사무실에 들락날락하면서 강의도 듣고, 소금구이도 먹으며 한철연과 조금씩 가까워졌다.

현재(2022년) 산울림 소극장 일대 모습, 출처: 네이버지도

교육부 과정을 마친 후 한철연 쪽으로의 발길은 뜸해졌다. 석사 논문 때문에 이래저래 바쁘기도 했다. 논문을 마무리하고 나서 한숨 돌리고 있는데 여전히 오라는 곳은 없었다. 9.11 테러로 무역센터가 무너졌다. 내 맘도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 가을쯤 조은평 선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힘든 자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라며 간사를 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21세기가 되도록 여전히 갈 곳 없는 자의 신세를 면치 못했던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한철연의 품속에 안겼다.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는 비밀이다.

간사 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에 비하면 업무 부담 값은 ‘0’에 수렴했다. 오히려 어려웠던 것은 무료함 뒤의 불안감이었다고 할까? 2002년 월드컵이 끝나자 나의 한철연 간사 생활도 끝났다. 혼란스럽고 불안한 시기여서 그때 무엇을 하고 돌아다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학 준비를 하다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포기하니 또 갈 곳이 막막했다. 그리고 또 전화벨이 울렸다. 벌써 세 번째다. 이쯤 되면 ‘갈 곳 없는 자에게는 늘 한철연 전화벨이 울린다’라는 귀납원칙이 성립한다. 이번에는 이정호 선생님이셨다. 방송대에서 튜터로 일해보라는 제안이었다(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홈페이지 공고를 보고 지원한 것인지 이정호 선생님의 귀띔 전화 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귀띔 전화 쪽이 더 흐뭇하니 그렇게 기억하기로 하자).

이정호 선생님 덕에 안정을 찾은 나는 박사 과정에 진학하면서 한참이나 미뤄뒀던 공부를 헤겔 분과원들과 함께 시작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헤겔 분과는 일관되게 헤겔을 읽지 않는다. 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헤겔 분과원의 공부를 도와주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공공성과 정치적 공영역에 관한 논의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제안한 텍스트가 아렌트의 저작들이었다. 헤겔 분과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꽤 오랫동안 참을성 있게 아렌트를 읽어 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헤겔 분과원들과 보낸 시간은 내 삶에서 가장 따뜻한 한때 중 하나였다.

끔찍하게도 나는 오십 줄에 들어섰다. 한철연에는 이십 대에 들어왔으니 나와 한철연의 인연은 이십 년을 훌쩍 넘었다. 그사이 많은 일이 있었고 이러저러한 일을 맡아 이런저런 일을 해보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한철연은 내게 늘 곁을 내주던 곳이었다. 응달진 곳에서 떨고 있으면, 한 조각 양달이라도 내준 곳이 아니었나 싶다. 그 속에서 몸과 맘을 덥히며 못되고 못난 학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한철연이 많이 어려워 보인다. 예전만 못하게 찾는 이도 적고 점점 기성 학회와 다를 바 없어지는 구석도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패기 있고 젊은 학자들이 한철연을 찾지 않는 데 있다. 학교나 기관에 몸을 담지 못하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독립 연구자들의 발길이 끊어진 데 있다. 갈 곳 없어 헤매던 나를 한철연이 보듬어 주었듯이 앞으로도 계속 고군분투하며 학문의 길을 가고 있는 청년 연구자들이 쉬기도 하고 공부도 하는 둥지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 건승을 빈다.

한철연이 입주하고 있는 태복빌딩의 현재 모습(2022년), 출처: 네이버지도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㊺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 통치자와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412b-427c)

   1-3-1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의 선발과 자격(412b-414b) – (2), 건국신화(414c-415d)

 

[412d-414b]

* 통치자들은 연장자이며 수호자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어야 하고 그에 따라 슬기롭고 유능하며 나라에 유익한 것에 평생 열성을 다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들을 통치자들로 선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들이 ‘전 연령대에 걸쳐’ἐν ἁπάσαις ταῖς ἡλικίαις 그러한 신념δόγμα을 수호하는지φυλακικοί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홀려서든 강요를 받아서든 나라에 가장 좋은 것을 행해야 한다는 소신δόξα을 잊거나ἐπιλανθάνομα 내팽개치는ἐκβάλλουσιν 일이 없는지도 지켜보아야 한다.(412e) 소신이 염두διανοία에서 사라지는 경우는 자발적인ἑκούσιος 경우와 마지못한ἀεκούσιος 경우로 나뉜다. 그런데 잘못된 소신은 나쁜 것이어서 자발적으로 버리겠지만ἐξίημι, 진실한 소신은 좋은ἀγαθός 것이고 좋은 것은 누구나 빼앗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뭔가에 홀리거나 마지못해ἀκουσίως 버리게 된다.(413a)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진실한 소신을 앗기는 경우를 크게 도둑맞는κλαπέντες 경우, 홀리는γοητευθέντες 경우, 강제에 의한βιασθέντες 경우로 나누어 설명한다. 도둑을 맞는 경우는 말λόγος로 설득되어 소신이 바뀌는 경우와 시간이 흘러 자신도 모르게 잊어버리는 경우이다. 그리고 강제에 의한 경우는 고통ὀδύνη이나 슬픔ἀλγηδών 때문에 소신을 고쳐 갖게 되는 경우이다. 그리고 홀리는 경우는 쾌락ἡδονή으로 넋을 잃거나κηληθέντες 공포φόβος로 뭔가에 두려움을 느껴δείσαντες 소신을 고쳐 갖게 되는 경우이다.(413b-c)

* 그러므로 어릴 적부터 이런 경우에 수호자들이 빠져드는지 아닌지를 여러 가지 시험ἅμιλλα을 통해 잘 살펴본 후 나라에 가장 좋은 것을 행하려는 신념δόγμα을 늘 명심하여 좀처럼 속지 않고 어떤 공포나 고통에도 휘둘리지 않는 사람을 가장 훌륭한 수호자로 뽑아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시험은 이러하다. 우선 수호자가 가져야 할 신념을 가장 잘 잊어버리게 되거나 가장 잘 속게 될 그런 일들 하도록 지정하여 시험한다. 또한, 갖가지 힘든 일과 고통 그리고 경합ἀγών을 그들에게 부과하여 시험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홀리는 경우에 대한 시험으로 공포의 대상들 속에 몰아넣거나 환락 속에 옮겨 놓아 지켜본다. 그리고 이러한 시험들을 황금을 불 속에서 시험하는 것보다 더 많이 치르게 한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며 모든 상황에서 자기가 배운 시가μουσικῆ의 훌륭한 수호자이자 장단εὔρυθμος과 화음εὐάρμοστον이 잘 맞는 사람이야말로 자기 자신과 나라에 가장 유용한χρησιμώτατος 사람이다.(413e)

* 이처럼 ‘어려서나 젊어서나 어른이 되어서나 그때마다 시험을 받아 입증된 사람을’τὸν ἀεὶ ἔν τε παισὶ καὶ νεανίσκοις καὶ ἐν ἀνδράσι βασανιζόμενον나라의 통치자요 수호자로 임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예τιμή는 물론 가장 큰 특전μέγιστα γέρα을 누려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배제해야 한다.(413e-414a)

* 소크라테스는 이상과 같이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의 선발ἐκλογή과 임명κατάστασις에 관한 사항을 마무리하면서 그것을 ‘자세하지는 않은 대략의 설명’ὡς ἐν τύπῳ, μὴ δι᾽ ἀκριβείας, εἰρῆσθαι이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임명된 통치자를 수호자 가운데 진정으로 ‘완벽한 수호자’φύλακας παντελεῖς로 따로 구분하고 지금까지 수호자로 불렀던 그 나머지 수호자들을 그 통치자들의 신념을 지지하는 보조자ἐπίκουροι요 조력자βοηθοι로 부른다. (413e-41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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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신념δόγμα은 뭔가 분석하거나 따지기 이전에 태도를 결정할 정도로 이미 확고하게 원칙으로 자리 잡은 생각들이고 소신δόξα은 그러한 신념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 또는 그 신념에 부합하는 좀 더 구체적인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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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논의 계획에 따라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여기서 처음으로 최상위 계층으로서 통치자 계층의 등장을 알림과 동시에 그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과 자격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 정도로 훌륭한 통치자들을 선발하고 임명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혹독한 시험 과정이 언급된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주목해야 할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들을 선발하기 위한 과정이 ‘전 연령대에 걸쳐’(413a), ‘어려서나 젊어서나 어른이 되어서나 그때마다’(413e)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려서부터 시가와 체육 교육을 통해 수호자들의 양성을 위한 기초 교육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통치자들을 선발하기까지 젊은 시절은 물론 어른이 되어서도 아주 오랜 기간 수호자들 사이에서 단계 단계마다 선발 과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만큼 통치자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통치자들의 선발과 임명 과정은 그 중대성만큼이나 자세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정작 여기서 그에 관한 내용은 의외로 간략하다. 게다가 소크라테스 스스로도 통치자의 선발과 임명에 관한 자신의 언급들을 ‘자세하지는 않은 대략의 설명’(414a)이라고 토까지 달고 있다. 이것은 이 부분이 일단 논의 계획상 통치자들을 최상층으로 하는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구조를 드러내는데 우선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통치자들의 선발과 임명 과정에 대한 설명이 장차 자세하게 다루어질 것임을 암시 또는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제7권에 가서 통치자가 되기 위한 수호자들의 철학 교육과정을 논하면서 그 선발 단계를 구체적인 연령까지 언급하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그와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해당 부분에서 살피겠지만 참고로 그 개요만 미리 간단히 언급해두면 다음과 같다. 일단 수호자들의 양성을 위한 청소년기의 시가 및 체육 교육이 18세까지 필수적으로 이루어진 다음에 20세가 되면 그들 가운데 시험을 거쳐 수호자들이 선발된다.(537b-c)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변증술을 위한 예비 교육을 받고 30세가 되면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보다 훌륭한 수호자들이 임명된다.(537d) 그리고 그들은 35세까지 5년 동안 집중적으로 철학 교육을 받고 그 후 15년 동안 철학 연구는 물론 전쟁의 지휘 및 관직도 맡아가며 통치자가 되기 위한 실무를 수행한다.(540a) 그리고 마침내 연장자로서 50세가 되었을 때 두루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 통치자들로 선발된다.(540b) 누가 통치자들을 선발하는지는 여전히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최소한 ‘최선자들의 정체’를 구성하는 ‘최선자들’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선발되는지 잘 드러나 있다.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의 선발과 임명에 관해 간략히 언급한 후에 통치자들을 ‘완벽한 수호자들’이라고 언급하는 방식으로 통치자 계층의 등장을 알린다. 그리고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통치자의 선발과 임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함께 수호자들로 불리었던 젊은이들은 이제부터 그 통치자들의 신념을 위한 보조자들이자 조력자들로 불러 마땅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수호자 계층은 비로소 통치자 계층과 조력자 계층 즉 군인 계층으로 분화되고 나라 전체의 기본구조가 통치자 계층, 군인 계층, 생산자 계층으로 이루어졌음이 선언된다.

* 요컨대 이 부분은 정의로운 나라를 세부적으로 다루기 이전에 그 나라의 기본구조가 통치자 계층을 비롯해 세 계층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그러한 계층들에 상응하는 덕목들과 특징들을 예비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총론적 서론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쓰이는 말들과 표현들 그리고 예시된 상황들은 앞으로 개념적으로 드러나게 될 4개의 덕목과 각기 내용상 서로 조응을 이룬다. 소크라테스가 설명하고 있는 그러한 위험들과 그것의 극복을 위한 시험들은 아래와 같다. 우선 소신을 앗기는 위험한 경우들로 크게 1. 도둑맞는 경우, 2. 강제에 의한 경우, 3. 홀리는 경우로 나누고, 내용상 그 경우들은 순서에 따라 각기 1) 말로 설득되어 소신이 바뀌거나 시간이 흘러 잊어버리는 경우, 2) 고통이나 슬픔 때문에 소신을 바꾸는 경우 3) 쾌락이나 공포 때문에 소신을 고쳐 갖게 되는 경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위험을 극복하기 위한 시험도 이에 상응하여 아래와 같이 제시된다. 1의 경우는 신념을 가장 잘 잊게 하거나 속게 만드는 시험을 부과하고 2의 경우는 갖가지 힘든 일과 고통 그리고 경합을 부과한다. 3의 경우는 공포나 환락의 상황을 부과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부여된 상황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이겨낸 사람들을 나라에 가장 유용한 통치자와 수호자로 임명하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예와 특전을 부여한다.

*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예시하고 있는 이와 같은 설명들 가운데 1과 1)은 나중에 명시적으로 드러날 영혼의 각 부분 중 주로 이성 부분과 관련된 상황들이고 2와 2)는 기개 부분, 3과 3)은 욕구 부분과 관련된 상황들임을 어렵지 않게 직감할 수 있다. 그리고 나중 밝혀지겠지만 이러한 영혼의 각 부분은 그 역할과 기능이 고유하기는 하지만 다른 부분들과 상호 유기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최종적인 결과로서 그 개인 전체 영혼의 상태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유기적인 상호작용 전체를 통제하고 조정하는 주체는 영혼의 각 부분 가운데 이성 부분이다.

* 이 부분에서 고통과 슬픔, 공포와 쾌락 등 인간의 희로애락과 관련한 감정 내지는 심리 상태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들 역시 모두 영혼 각 부분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영혼의 상태이다. 즉 신체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 주어진 상황 및 사태에 대한 영혼 각 부분의 대응과 그 대응들의 상호 유기적인 작용의 결과들이다. 요컨대 인간의 제반 심리 상태는 몸에서 생긴 감각적 사태들에 대한 영혼 각 부분의 유기적인 대응 및 관계 양상에 따라 다양하게 드러나는 영혼 전체의 상태들이다. 이를테면 신체적 고통을 겪거나 쾌락에 빠지는 것은 일차로 몸에서 생긴 감각적 자극에 대해 영혼의 욕구 부분이 기피 또는 애착 욕구를 증대시킴으로써 영혼 전체의 부조화가 야기된 상태이다. 그러나 그 부조화는 이성 부분에 의해 즉시 통제되고 조화의 회복은 영혼 전체의 조화를 관장하는 이성 부분의 힘으로 결정된다. 이성 부분의 통제력이 약해 조화를 회복하지 못하면 상태는 악화되고 통제력을 발휘하면 그 발휘하는 힘의 크기만큼 최선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몸의 건강 상태도 변수가 될 수 있다. 영혼의 이성 부분이 아무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도 몸을 다치거나 쇠약하면 그만큼 회복이 어려울 수 있다.

* 우리는 흔히 육체적으로 쾌락에 빠지거나 도덕적으로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을 영혼의 세 부분 가운데 욕구 부분 탓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욕구 부분의 과잉이나 결핍 또는, 좋거나 나쁜 상태는 조화를 구현하는데 일정 부분 영향은 줄 수 있을 테지만 궁극적으로 행위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영혼 전체의 조화를 관장하는 영혼의 이성 부분이다. 영혼의 이성 부분이 병들어 있으면 욕구 부분의 과잉이나 결핍을 조정할 수 없거나 아예 반대로 영악한 도구적 이성이 되어 악화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 부분이 건강하면 기개 부분의 힘도 빌어 욕구 부분이 과잉 또는 결핍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것을 조정하여 부조화 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은 오감의 기능과 식욕과 성욕 등 본능적 욕구를 가진다. 그러한 기능과 욕구 자체는 도덕과 무관하다. 문제는 감각과 본능에 조응하여 발생하는 그 다양한 욕구들을 이성 부분이 얼마나 상황과 적도에 맞게 조정 하느냐 못 하느냐이다. 당연히 조정의 목표는 다른 영혼의 부분들과의 조화이고 그 조화의 방식과 수준은 천성과 교육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조화의 수준에 따라 도덕적인 차이도 드러날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사고나 행동 양태는 영혼의 상태 특히 이성 부분이 어떤 상태에서 어떤 방식과 어떤 수준으로 조화를 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렇게 보면 “욕망하는 대로 살아라!”라는 요즈음 욕망론자들의 권고조차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의 욕구 부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 부분이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성은 오히려 오로지 욕구 부분의 크기만을 증대시키는 고도화된 도구적 계산 능력, 즉 병든 영혼의 다른 이름이다. 어떠한 입장이건 그만큼 이성이 중요한 것이다. 다만 플라톤에게 ‘가장 훌륭한 삶’이란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 간의 조화를 통해 몸과 영혼 모두 특히 영혼의 이성 부분의 건강을 꾀하고 철학 교육을 통해 그 이성 부분의 힘을 극대화하여 최상의 가치로서 ‘좋음 자체’를 인식하고 그 상태를 흔들림 없이 보전하는 것이다.

* 우리는 종종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는 말의 의미를 곡해하여 철학자들이란 영혼만을 위해 아예 차라리 자살할 것을 권하는 자들이라고 비아냥대기도 한다. 물론 영혼은 몸과 떨어져도 살아 있고 그만큼 순수하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러나 철학이 현실에서 추구하는 ‘좋은 삶’이란 영혼은 물론 몸의 건강까지 포함하는 것이므로 살아 있는 몸의 존재를 필수적 상수로 이미 전제하고 있다. 플라톤 철학은 현실 도피론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현실 구제론이자 생존의 존재론이다. 이 점에서도 플라톤이 몸의 보전 즉 생존을 경시한다고 것은 전혀 진실이 아니다. 신체적 감각을 비판하는 경우도 신체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감각이 이성과 비교하여 진리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 현실에서 참된 삶은 말 그대로 몸이 없으면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 소소하게는 일상에서 먹는 즐거움은 물론 영혼의 조화와 관련된 좋은 음악을 듣거나 좋은 가르침이 담긴 말을 듣는 것도 일단 몸의 감각을 통해서이다. 그만큼 몸은 영혼과 더불어 삶을 담보하는 하나의 축으로 매우 소중한 것이다. 게다가 나라의 수호자들이 시가 교육에만 치우쳐 체육 교육을 게을리하면 몸의 상태가 나빠지고 몸이 나빠지면 결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다. 몸을 다치거나 상하면 그것을 회복하려는 영혼도 힘들고 그만큼 생존도 힘들다. 가장 나쁜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 병들어서 영혼 내부의 관계는 물론 몸의 건강도 악화시켜 개인은 물론 나라까지 불행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다.

* 재판에서 선고 형량으로 주어지는 몸에 대한 고통은 일반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지겠지만 그 고통의 크기는 당사자가 영혼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전하고 있냐에 따라 전혀 다를 수 있다. 정의로운 사람이 핍박으로 겪는 고통은 이성이 잘 감내하여 영혼의 조화를 이루어 고통을 이겨낼 수도 있지만, 그 핍박을 못 견디는 사람은 그만큼 영혼의 관계가 부조화를 이루어 고통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의 크기도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이 땅에서 철학 함의 목표는 영혼들의 조화를 통해 영혼과 몸의 건강을 함께 보전하는 것이지 몸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이미 영혼이 건강하지 않다는 증거이다. 물론 불가피하게 스스로 몸의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는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어 차라리 몸의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이거나 또는 몸과 영혼 하나만의 선택이 강요되었을 때 불가피하게 몸의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경우일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몸을 경시하는 사람으로 보기는 힘들다. 전자는 살고 싶지만 더는 살기가 힘들어 죽는 것이고 후자는 그야말로 영혼의 저질화 내지 훼손(영혼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몸의 죽음 중 선택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몸의 죽음을 선택한 경우이다. 이른바 철학의 연습으로 인식될 만한 죽음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 불가피한 선택 상황에서 지성의 힘으로 아테네인들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감행한 죽음의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삶의 마지막에 감행된 좋은 삶의 한 방식이 되는 것이다.

* 아무려나 몸과 영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위와 같은 해석들은 기본적으로 몸 내지 신체 기관들을 영혼이 사용하는 도구로 파악하고 있는 <국가>와 <알키비아데스 I> 등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파이돈>, <파이드로스> 등을 끌어들여 함께 비교하면 일정 부분 이견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최소한 <국가>가 플라톤의 영혼론의 핵심이자 가장 발전적인 내용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이견이 없다. 이와 관련한 내용들은 나중 영혼의 세 부분을 본격적으로 다룰 때 플라톤의 심신이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좀 더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414b-415d>

*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의 선발과 임명에 관한 언급에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이상 국가 구성원들을 설득하여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고상한γενναῖος 거짓말 즉 건국 신화에 관한 언급을 아주 조심스럽게 주저하며 꺼내어 든다. 건국 신화는 앞선 시대에 여러 사례가 있었긴 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그런 일들이 있지도 않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아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414b-c)

* 그러자 글라우콘은 두려워 말고 말해주기를 청하고 소크라테스는 내가 무슨 배짱으로 어떤 표현을 써서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아래와 같이 이른바 건국 신화로 일컬어지는 고상한 거짓말을 옛날 설화μῦθος를 빌어 풀어낸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414d – 415d) “당신들이 수호자들이 되기 위해 실제 겪은 앞에서의 양육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 땅γῆ속에서 형성되고 양육되었던 일들에 비하면 꿈과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이고 이미 땅인 어머니가 땅속에서 그들 자신은 물론 무기와 장비까지 다 만들어 당신들을 땅 위로 올려보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어머니와 유모에 대하듯이 국토χώρα를 수호하고 다른 시민들 역시 땅에서 태어난 형제들로 생각해야 한다. 신ὁ θεὸς은 당신들 중에서 다스리기 충분한 사람들의 경우 황금χρυσός을 섞어 빚어냈고 반면에 보조자들은 은ἄργυρος을 그리고 농부와 다른 장인들은 철σίδηρος과 청동χαλκός을 섞어 빚어냈다. 그런데 당신들은 대개 자신과 닮은 자손들을 낳지만 때로는 황금으로 된 사람에게서 은으로 된 자손이 태어나고 은으로 된 사람으로부터 황금으로 된 자손이 태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신은 통치자들에게 가장 뛰어난 수호자가 될 자손을 염두에 두고 자손들의 영혼에 그중 무엇이 섞였는지를 열성적으로 지켜보라 명령했고 그에 따라 자손 중 청동이나 철이 섞여서 태어나면 그들의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 만큼의 존중τιμή을 해줘서 장인들이나 농부들로 살게 하고 또한 장인이나 농부들에게서 금이나 은이 섞인 아이가 출생하면 그 역시 존중하여 수호자나 보조자로 상승시키라ἀνάξουσι 했다. 그리고 끝으로 철로 되거나 청동으로 된 수호자가 나라를 수호하게 되는 때에는 나라가 망하리라는 신탁이 있었다.”

* 이에 글라우콘은 후대 사람들은 몰라도 이런 이야기를 당대 사람들에게 설득하기란 어려울 것이라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 소크라테스는 다만 이 이야기는 최소한 나라와 서로에게 관심을 쏟게κήδεσθαι 하는 데 좋을 것 같아 한 말이며 어쨌든 설득 여부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에 맡기겠다고 말한 후 다시 통치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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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구조와 수호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에 관한 사항을 개략적으로 언급한 후에 고상한 거짓말이라는 명분으로 일종의 건국 신화를 꺼내어 든다. 지금의 논의가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는 시작 단계에서 일종의 총론적 서론으로 펼쳐지는 것임을 고려하면 당대 그리스 나라들이 그래 왔듯이 나라를 수립하면서 건국 신화를 내건다는 것은 그리 어색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고상한 거짓말 역시 이미 앞에서(382c-d, 389b-c) 그 필요성이 제시된 만큼 새롭게 다시 문제 삼을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플라톤이 여기서 건국 신화를 꺼내어 든 것은 아래와 같은 배경 때문일 것이다. 즉, 새롭게 수립될 나라에서도 앞서 시가 교육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나라 구성원들의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유대를 위해 일종의 종교 교육이 필요하고 그러한 종교 교육의 출발점으로서 새로운 건국 신화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건국 신화는 아래와 같이 앞으로 전개될 분업적 공동체로서 정의로운 국가의 기본구조를 설화적인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우선 신화는 나라의 모든 계층이 같은 어머니 즉 땅의 자손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앞으로 펼쳐질 정의로운 나라에서 모두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사람들인 만큼 서로 하나같은 유대감과 충성심으로 하나의 나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신화는 신들이 사람들 각각에 황금, 은, 철이나 동을 섞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고 언급한다. 이것 역시 앞으로 수립될 정의로운 나라가 천성에 따라 세 계층으로 구성되고 그들의 역할 또한 기본적으로 천성적인 차이들을 갖고 있음을 미리 강조해두려는 것이다. 동시에 신화는 때로는 황금으로 된 사람에게서 은으로 된 자손이, 은으로 된 사람으로부터 황금으로 된 자손이 태어나기도 한다고 언급한다. 게다가 그러한 경우 그들의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 만큼의 존중을 해줘서 장인들이나 농부들로 살게 하거나 수호자나 보조자로 상승시켜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그리고 끝으로 신탁의 이름으로 철로 되거나 청동으로 된 수호자가 나라를 수호하게 되는 때에는 나라가 망하리라는 실로 엄중한 경고가 제시된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건국 신화가 그토록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앞에서 유익한 거짓말을 정당화할 때와 다르게 아주 주저하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하물며 무슨 배짱으로 어떤 표현을 써서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한다.(414d)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왜 이토록 주저하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일까? 필자가 짐작하는 그 배경과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앞에서 살핀 고상한 거짓말들의 사례들(382c)은 다 나름의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었고 옛날의 설화 경우에도 진실을 알지 못하는 탓에 허구를 가능한 진실과 같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 유익함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382d) 2) 그러나 지금 말하려는 고상한 거짓말로서 건국 신화는 있지도 않고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데다 당장은 그 유익성도 증명할 수 없어 옛날 설화처럼 설득력이 있기 힘들다. 3) 그러나 옛날부터 페니키아를 비롯해(414c) 많은 나라에 건국 신화가 있는 데다가 아테네도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설화를 바탕으로 시가 교육을 해 왔듯이(377d) 정의로운 나라에도 시가 교육의 기초가 될 만한 건국 설화가 필요하다. 4) 신화는 여전히 시민들에게 가장 친숙한 정보 전달 방식인 데다 건국 신화 또한 옛날 설화처럼 언젠가 후손들에게 유익한 허구로 받아들여 지는 날이 올 것이다.(415d) 5) 그리고 지금도 최소한 나라와 서로에게 더 많이 관심을 쏟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415d) 요컨대 건국 신화는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 단계에서 나라의 구조와 정신의 요체를 밝힌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고 장차 시가 교육의 토대로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으나 당장은 옛날 설화들과 달리 사실 기술에 있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어 소크라테스는 건국 신화를 내놓는 것에 그토록 주저하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저와 조심스러움은 역설적으로 앞으로 보다 더 자세하고 많은 논변을 통해 고상한 거짓말로서 건국 신화의 진실성과 유익성을 보다 설득력 있게 뒷받침하겠다는 소크라테스의 의지와 계획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암시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지금은 세상 사람들 생각에 맡기겠다고 말하면서도(415d) 행간 곳곳에서 설득의 방도와 의지를 반복해서 묻거나 피력하고 있는 것도(414c, 414e, 415c) 그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나중 5권 이후 7권에 가서 이른바 격랑 속 파도κῦμα들로 불릴 정도의 수많은 난관을 마주하며 건국 신화의 내용은 물론 정의로운 나라의 정당성에 관한 보다 구체적이고도 자세한 논변들을 전개한다.

* 아무려나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건국 신화는 장차 자세한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표피적으로만 보면 왕권신수설과 세습군주정을 뒷받침할 수도 있고 사회 신분이 공고화된 봉건사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특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태생적 또는 생물학적 차이를 그대로 사회적 차별로 연결하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의 고전적 발상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이러한 플라톤의 의도를 허구적 슬로건을 내세워 나치의 이념을 주입하려 했던 괴벨스의 프로퍼갠더와 연결해 플라톤을 혹세무민의 고대적 뿌리라고 극렬하게 비난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 부분은 플라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 그러나 앞으로 보다 자세하게 밝혀지겠지만 정작 건국 신화에서 태어날 때 섞여 있다는 황금, 은, 철이나 동은 단순히 천성적으로 정해진 세습적 신분상의 차별과 위계를 의미하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분업공동체에서 나라의 구성원들이 나누어 가져야 할 역할들의 차이와 위계를 의미한다. 이들 역할의 종류와 차이는 천성에 크게 영향을 받지만,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건국 신화는 태어날 때부터 선대의 천성과 다르게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후 후천적인 교육에 따라 그 소질과 능력이 다시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은 사회 구성원들 모두 태생에 의해서건 그 후 후천적인 교육에 의해서건 소질과 능력이 다르게 판정될 수 있고 그에 따라 다른 계층으로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구성원들 모두는 자질과 능력에 따라 단계마다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 게다가 그 위계의 변동이 상승이건 하강이건 자신이 소질에 따라 그 계층에 귀속되는 한, 모든 계층의 구성원들은 행복감의 크기에서 차이가 없다. 군대에서 사령관 한 사람의 역할이 병사 한 사람의 역할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역할 상의 위계는 중요도에서 분명 차이가 있지만, 개인들 각각의 차원에서 서로를 선망하거나 폄훼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정의로운 나라에서 각자는 각자의 소질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할 때 비로소 가장 자기답고 행복하다.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 이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이러한 건국 신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앞으로 설득력 있는 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414c) 끝.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21c) 다음에 계속)


 

나의 철학일지(7)[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일지(7)

1)

앞에서 박사학위 논문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가 재직했던 학교에서 승진의 조건으로 요구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했던 짓이기는 하지만, 철학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 생각이란 곧 당시 유행하던 구조주의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내가 박사 논문의 주제로 헤겔 책 가운데 정신현상학을 택했던 것은 정신현상학의 서론(Einleitung]에 나오는 회의의 길이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나는 이 개념이야 말로 구조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믿었다.

헤겔은 회의의 길을 설명하면서, 물 자체란 의식 자체를 넘어서 있기에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물 자체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의식에 대해서 나타나는 물 자체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그런 특정한 의식을 넘어선다면, 그 의식에 대해 물 자체로 나타난 것조차, 넘어서게 되며, 이제 새로운 의식에서는 과거 물 자체로 여겨진 것조차 하나의 계기로 포괄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떤 의식이 물 자체에 부딪혔을 때, 그것이 모순적인 경험이다. 왜냐하면, 그때 부딪히는 물 자체는 그런 특정 의식에서는 이렇게 규정할 수도 없고 그 반대로 규정할 수 없는 것 즉 이율배반이나 딜레마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의식에 나타나는 모순 경험은 실재 즉 물 자체에 대해 의식이 부딪히는 원초적인 경험이다.

헤겔은 이런 원초적인 모순 경험을 통해 의식은 새로운 형태의 의식으로 역사적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모순을 통해 나가는 길을 헤겔은 서론에서 ‘회의의 길’이라고 불렀으며, 이런 회의를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진리를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정신현상학이 이렇게 모순을 통해 나가는 회의의 길이라고 한다면, 이 길은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가는 길이며, 영원히 최종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열린 길이 아닐 수 없다.

2)

내가 논문에서 추구했던 것은 모순을 통해 나가는 회의의 길이 실제로 정신현상학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나는 헤겔 정신현상학을 처음부터 샅샅이 읽어 나가면서, 과연 모순의 경험이 어떻게 의식의 발전에 기여하는가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기쁘게도 나는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발전하는 변곡점마다 다양한 형태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모순은 다양한 모습으로 감추어져 있었는데, 이율배반이나 딜레마는 물론이며,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절대적 자유의 공포’나, 칸트 비판에서 나오는 ‘전치’, 또 낭만주의 비판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영혼’조차 모순 개념의 변장된 구체적인 형태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박사학위 논문 자체에서 구조주의 한계를 거론한 것은 아니었다. 박사학위 논문은 그저 정신현상학에서 회의의 길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회의의 길이 확립된다면, 이것을 통해 구조주의가 극복될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했다. 또한 나는 내가 발견한 바로 이 길이 마르크스가 주장한 유물론적 변증법의 길을 말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받는 과정 중에 나의 이런 기대는 심사위원들이 가지고 있는 헤겔에 대한 선입견과 정면으로 충돌되었다. 일반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은 개념이 자기를 대상화하며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전개하는 길이었다. 이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은 일반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이며, 당연히 이런 길은 마침내 자기 자신에 도달하면서 끝나게 되는 폐쇄된 길이었다.

사실 정신현상학 서문에 나오는 여러 가지 표현들은 이런 관념론적 해석의 길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심사위원들에게 이런 서문에 나오는 길 즉 관념 변증법의 길은 논리학과 같은 학문에서 전개되는 길이며 이 길은 학문에 이르는 도정에 있는 정신현상학의 길과는 구분된다고 역설하였으나, 심사위원들은 나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해 서문에서 설명한 관념 변증법의 길과 서론에서 설명한 회의의 길을 매개할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나는 곧 정신현상학에서 ‘형태’와 ‘계기’라는 개념이나 ‘내면화’와 ‘시간화’라는 개념을 발견하면서, 이 개념이 두 가지 대립하는 길을 매개해 준다고 생각하면서 논문을 보완하였다.

이런 보완의 덕분인지, 다행히 심사위원들은 나의 주장을, 비록 자신들은 인정하기 어렵지만, 하나의 실험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여 주면서 논문은 통과될 수 있었다. 나는 마치 헤겔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진리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처럼 기뻐했다.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내가 마치 학문적으로는 새로이 태어나는 것처럼 느꼈다.

4)

간신히 90년대 이후 전개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상의 흐름은 또다시 변화했다. 21세기로 들어가면서, 1990년대 서구 사상을 지배했던 후기구조주의의 흐름도 퇴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상의 물결이 밀어닥쳤는데 내가 보기에 두 가지 흐름이었다. 하나는 들뢰즈와 같은 미분적 차이의 철학이었고 다른 하나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이었다.

흔히 들뢰즈나 라캉은 푸코와 데리다와 같이 프랑스 출신 사상가이었으므로, 그냥 프랑스 철학을 통칭되었으나, 내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 흐름의 사상이었다. 왜냐하면, 푸코와 데리다가 후기구조주의에 기초해서, 상대주의적 결론에 이르면서 어떤 객관적 가치나 진리의 존재를 부정햇지만, 들뢰즈나 라캉의 경우는 이와 달리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들뢰즈는 가장 원초적인 미분적인 감각적 경험이 모든 진리의 기초이었다. 그의 이런 입장은 욕망 개념을 서술한 ‘앙티 외디푸스’라는 책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났다. 거기서 그는 욕망이란 원초적인 미분적인 욕망이 무한히 적분되면서 출현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곧 생산이라고 하였다. 그의 이런 논리는 전반적으로 진리 개념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라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라캉 역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을 진리의 기초로 보았다. 라캉은 이때 무의식이라는 개념보다는 ‘대타자의 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라캉적인 해석이었다.

들뢰즈나 라캉은 진리를 인식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구조주의가 부딪힌 상대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사실 들뢰즈나 라캉이 푸코나 데리다보다 먼저 나타난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또는 세계적으로) 오히려 푸코나 데리다 뒤에 유행하게 된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닌가 생각했다. 즉 사람들이 이 시대에 이르러 객관적 가치와 진리를 부정하는 구조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런 상대주의를 극복하려는 갈망이 사람들이 들뢰즈나 라캉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5)

나는 들뢰즈나 라캉이 등장한 것은 곧 신자유주의 붕괴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2008년 미국에서 경제위기는 30년간 세계를 제패한 미국의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일거에 폭로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세계 곳곳에서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 쏟아졌고 ‘나는 분노한다는’ 함성이나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월가를 점령하라’는 운동이 전 세계에 펼쳐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자유주의는 김대중 선생의 IMF 극복 노선을 타고 들어왔으며, 노무현 정권의 경제 개혁을 통해 번성하게 되었다. 특히 노무현 정권은 삼성에게 나라의 경제에 대한 진단을 맡겼으며,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을 세계 금융 허브로 만들고,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압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노무현 정권이 정권을 다시 보수 진영으로 넘기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부동산 투기 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금융 허브를 만든다고 하면서 금융개방을 가속화했는데, 그 때문에 당시 신자유주의 시대 낮은 금리로 떠돌던 과잉 화폐(특히 일본 자본)가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왔으니, 기술적 발전이 정체되면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과잉 화폐는 부동산 투기에 몰려들었다. 그러니 노무현 정권이 실패하게 된 진짜 원인은 다름 아닌 그가 추진했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 아니었을까?

노무현 정권이 말기 전개된 세계적 금융위기는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파산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적 민주정권 즉 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와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또한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도 쇠퇴했으며, 이에 대체하여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는 철학적 흐름도 등장했다. 바로 그것이 곧 들뢰즈의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의 폭발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