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강지은 지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내가 진짜 아는 것은 무엇인가』(2023)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내가 진짜 아는 것은 무엇인가』(2023)

 

서평: 함태원(한철연, 건국대)

 

이제 조금은 알려나?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을 때 당혹감을 잊을 수 없다. 문장에서 모르는 단어가 없었는데도, 심지어 그 글이 한글로 번역된 글인데도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는 단어를 다시 국어사전에 찾아봐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되어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 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그런데 이 생각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나 보다. 이 생각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생각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인식하는 주관과 독립하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과 우리가 인식하는 것을 구분한다. 그리고 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을 ‘사물 자체(Ding an sich)’라고 불렀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이 사물 자체를 온전히 알 수 없다. (105쪽) 이것은 언뜻 이상하게 들린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사물들을 우리가 그대로 알 수 없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아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주제는 자연 세계에서 인간이 얼마나 알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52쪽)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이 어디까지 알 수 있고, 어디부터는 알 수 없으며,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다룬다.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칸트는 인식의 두 원천을 감성과 지성이라 말한다. 먼저 감성은 “대상을 감각하는 능력”으로 인간의 수용력을 말한다. (92쪽) 감성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인간은 대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직관이다. (97쪽) 그러나 아직 직관만으로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받아들인 직관이 무엇인지 사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하는 능력을 칸트는 지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책상을 보고 느껴진 책상의 색에 대해서 ‘갈색’이라고 개념을 적용하는 능력이다. 이런 지성의 규칙이 바로 논리학이다. (107쪽)

그런데 이런 논리학은 대상의 내용을 다루지 않고 사고의 규칙만을 다룬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그 대상이 무엇인지에 관한 인식 내용에는 논리학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인식 내용을 물을 수 있는 논리학으로 ‘초월적 논리학’을 제시한다. (109쪽) 이 초월적 논리학은 초월적 분석학과 초월적 변증학으로 나뉜다.

먼저 초월적 분석학에서는 선험적으로 대상과 관계 맺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이 개념은 순수 지성 개념으로 범주라고도 부른다. (118쪽) 범주는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자 말하자면 모든 판단이 가지는 판단의 형식인 개념이다. 즉, 감성을 통해서 받아들인 직관에 개념을 적용할 때,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는 선험적인 개념이 범주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범주를 통해서 무엇이 무엇이라고 필연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칸트는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이런 범주는 어떻게 직관과 만날 수 있을까? 그래서 칸트는 이 범주의 적용할 수 있는 범위를 확인한다. 그것이 범주의 권리증명 즉, 연역이다. 그리고 우리는 연역을 통해 이 범주는 현상에만 적용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반면에 초월적 변증학에서는 어떻게 아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증학에서는 모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추론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초월적 가상이 있다. 칸트는 이에 대해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모름은 그냥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 없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우리가 진짜로 아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 즉,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우리는 현상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사물 자체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


서평자 함태원: 건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석사수료. 칸트 철학을 공부하고, 주된 관심사는 칸트의 실천철학 및 윤리형이상학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폭력과 나무 불꽃[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한강의 채식주의자-폭력과 나무 불꽃

(예전 2017년에 썼던 글이다. 한강의 소설이 노벨상을 받은 것을 축하하며 다시 올린다)

 

1) 폭력의 세계

제목이 <채식주의자>라서, 채식의 미덕에 관한 이야기인가 하면서 책을 들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아서 작가는 채식의 미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당장 눈에 뜨이는 것은 폭력성이다. 육식을 거부하는 아내인 영혜, 그것보다 섹스를 거부하는 아내를 지배하기 위해 남편은 온 가족을 동원한다. 아내의 부모는 딸에 대한 걱정보다는 사위에 대한 걱정 때문에(차라리 두려움 때문이겠지!) 강제로 고기를 입속으로 틀어넣는다. 이런 코믹한(‘섬뜩한’이라는 뜻도 있다) 폭력이 아직도 딸 가진 게 죄인인 우리 사회에 밑바닥에 깔린 것이 아니겠는가? 폭력에 희생되어 미치게 되는 주인공! 작가는 이 비극을 말하는 것 같다.

나도 연작 소설의 형식을 띤 이 소설의 첫째 편(<채식주의자>)을 읽는 내내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그래서 첫째 편만 읽고 일어서야지 하면서 그 마지막 구절을 읽는 순간 갑자기 눈이 번쩍 띄는 구절이 있었다. 아침, 가슴을 드러낸 채 병원 벤치에 앉은 영혜를 병원 직원들이 끌고 가려는 순간이다. 그녀의 입술에는 루즈가 함부로 번진 듯 피에 젖어 있었다. 작가는 화자인 남편의 눈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아니, 그렇다면 작가가 이 사회의 코믹한 폭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대체 이 반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폭력을 가하는 사회에 대한 영혜의 증오감이 동박새를 뜯어 먹는 힘으로 표현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답이 궁금했기에 책을 놓을 수 없었다.

2) 실체변환

이어지는 두 번째 편 <몽고반점>에서 화자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두 번째 편의 화자는 영혜의 언니의 남편이며 화가이다. 그는 2년 동안 아무것도 새 작품을 내지 못한 불임의 상태이다. 이 기간은 그가 처제인 영혜에 매혹되기 시작된 때와 일치한다. 그 매혹을 격발시킨 것은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아내의 말이다.

상상 속에 그려진 몽고반점 때문에 한 남자가 매혹된다니? 몽고반점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할까? 여기서부터는 나는 작가의 말을 믿지 못하는 의심스러워하는 독자가 되어, 책을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부터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영혜에 대한 의문보다는 약간 포르노적 관심(불륜은 포르노의 주요 주제이다)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몽고반점이라는 이미지로부터 남녀가 몸에 꽃을 그린 채 서로 교합하는 장면이 마음속에 떠올라, 화가는 이를 미리 스케치북에 그려놓는다. 단 두 남녀가 그와 영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무의식 속에 감추어 두기 위해 얼굴은 그리지 않았다. 일단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화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기를 실현한다. 그는 그저 이미지의 노예일 뿐이다. 그는 멧돼지처럼 돌진하면서 그 이미지를 실현하기 위해 돌진한다. 이 과정 끝에서 영혜는 맨몸으로 다가온 그를 거부하지만, 그가 몸에 꽃을 그리고 다가가자 마침내 받아들인다.

‘몽고반점’이라든가, ‘꽃의 문신을 한 채 이루어지는 교합’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먼저 두 이미지 속에 죽음의 이미지가 어려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몽고반점의 푸른빛은 죽음의 빛일 것이다. 또 꽃의 교합도 식물성의 이미지이고, 니르바나라는 관념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미지를 고려할 때 화가와 영혜의 성적 교섭은 일단 죽음으로 넘어가는 길목 또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의 충동을 그려내려 했던가? 성적 교합에 대한 작가의 서술에는 그렇게 이해할만한 단서가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이미 흠뻑 젖은 몸, 무서울 만큼 수축력 있게 조여드는 몸 안에서 그는 혼절하듯 정액을 뿜어냈다.”

정신분석학자 바타이유의 경우 성적 교합이 죽음의 충동이며 이 가운데 쥐상스(열락)가 얻어진다고 말했다. 영혜와 화가가 윤리적 차원을 위반하고 있다는 점도 이런 이해를 지지한다. 그런데 이렇게만 이해하기에는 곤란하다는 것은 아래와 같은 표현을 보면 이해된다. 작가는 두 사람의 성적 교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그녀 안으로 들어갔을 짓무른 잎사귀에서 흐르는 것 같은 초록빛 즙이 그녀의 음부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향긋하면서도 씁쓸한 풀냄새가 점점 아릿해져 그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여기에 교합을 한 이후 더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는 영혜의 반응을 덧붙여 보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꿈을 꾸지 않게 될까?”

그 꿈은 피에 젖은 얼굴에 관한 꿈이다. 게다가 몽고반점이 단순히 푸른빛이 아니고 연두색이 배어있다는 서술도 연관된다. 이런 표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체변환’이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실체변환이란 기독교에서 포도주와 빵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되는 것을 말한다. 영혜와 화가는 서로의 교합을 통해서 죽음에 이른다. 이런 죽음으로 넘어가면서 그들은 실체변환을 하게 된다. 그들은 이제 꽃과 같은 식물적 존재로 변환된다.

이런 실체변환이라는 과정을 매개하는 것이 예술이 아닐까? 작가는 예술이란 문신과 마찬가지로 주술적인 차원이라고 보는 것 같다. 화가와 영혜는 실질적인 죽음 대신, 예술적 차원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이들은 주술적인 차원에서 식물적 존재로 변환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만연하고 편재하는 폭력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는다. 사회는 예술에게 금기를 정한다. 이 금기는 주술적 차원의 실체변환을 파멸시킨다.

이런 실체변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본다면 드디어 영혜의 ‘채식주의’를 이해하는 단서를 얻게 된다. 이 단서는 세째 편 <나무 불꽃>에서 확실하게 드러날 것 같다.

3) 내재하는 폭력성

이 소설의 특징은 연작 소설이라는 점이다. 그 가운데 화자가 변화된다. 첫 번째 편 채식주의자의 화자는 영혜의 남편이다. 그는 두 번째 몽고반점의 화자는 화가가 된다. 세 번째 편 나무 불꽃의 화자는 영혜의 언니 인혜이다.

세째 편은 인혜가 갇힌 정신병원으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회상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런 회상은 시간적으로 지그재그식으로 이동하기에 복잡한 순서를 맞추어 보기 위해 나는 도표를 그렸을 정도이다. 그런데 작가의 서술을 따라가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영혜와 언니가 서로 묘하게도 겹치는 것 때문이다.

인혜의 자살 시도를 보자. 영혜가 남편과 비디오를 찍은 직후로 보인다. 작가는 인혜가 그전 하혈을 하였다고 하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를 덮쳤다고 암시한다. 그리고 비디오를 찍은 직후 “며칠 만에 새벽에 들어온 그가 도둑처럼 그녀를 안았을 때”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자살을 하러 산으로 올라간다.

인혜의 자살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 영혜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인혜의 말은 곧 영혜의 말로 보인다. 앞의 두 편에서 영혜는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자격을 박탈당했다. 대신 영혜의 꿈만이 시적인 언어로(일상적 언어가 아니라, 시적인 언어로 서술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개입되어 있다. 그런 영혜를 대신해서 셋째 편에서는 언니가 말한다. 이 언니의 말을 통해 영혜를 이해할 수 있다.

왜 그들은 죽으려 했을까? 인혜와 영혜가 사는 세계는 복종을 요구하고 폭력이 행사되는 세계, 동물적 세계라 하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세계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평생 성실하고 남을 위해 희생해온 인혜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이다. 그녀는 남편과 영혜의 비디오를 보고서 두 사람을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킨다. 그건 영혜도 마찬가지이다. 영혜 역시 피해자이지만, 가해자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점을 어릴 때 자기를 물은 개가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끌려다니다가 거품을 물고 죽어가는 것을 영혜가 지켜보았다는 서술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섞여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속에 이미 폭력이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나는 작가가 첫째 편 마지막에서 제시한 동박새를 뜯어먹는 영혜의 모습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억압된 폭력적 본성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억압된 폭력의 본성은 영혜에게 수면을 뚫고 의식으로 점차 다가온다. 처음 그것은 꿈으로 나타난다. 이 꿈에서 영혜는 자기가 바로 맹수가 된 것이 아닌지 두려워한다.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 피의 형상, 파헤쳐진 두개골, 그리고 다시 맹수의 눈, 내 뱃속에서 올라온 것과 같은 눈, 떨면서 눈을 뜨면 내 손을 확인해, 내 손톱이 아직 부드러운지, 내 이빨이 아직 온순한지.”

현실 세계는 폭력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 폭력성은 어떤 외적인 것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 흘러나온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누어져 있다면 혁명을 통해 사회는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가 곧 피해자이고, 피해자가 곧 가해자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인간의 내적 본성 속에 이런 폭력성이 내재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혁명은 다만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영혜의 절망은 아니 작가 자신의 절망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4) 영적인 타자

절망만으로 문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절망을 넘어서는 힘을 문학이 보여주어야 한다. 작가 역시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그 힘을 보여주려 한다. 그 힘을 발견하는 단서는 인혜의 깨달음 속에 존재할 것이다.

자살 시도를 통해 상징적으로 죽음을 겪은 인혜는 점차 죽어가는 영혜에게 다가간다. 영혜는 점차 자신이 나무가 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무처럼 물구나무서며, 마침내 먹지 않아도 되고 햇빛만 받으면 되고, 심지어 말과 생각도 곧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말문을 닫는다.

“비에 녹아서 … 전부 다 녹아서 … 땅속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다시 거꾸로 돋아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거든.”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인혜는 영혜의 말을 처음에는 의사가 분석하는 것처럼 정신분열증적인 환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상징적 죽음을 겪은 이후 인혜는 점차 영혜의 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런 이해의 첫 단계에서 인혜는 영혜가 자기처럼 자살하려는 시도로만 이해한다.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그러나 의사가 최후로 영혜에게 강제로 호스를 통해 음식을 집어넣으려 시도할 때 인혜는 처음 병실 밖에 있다가 영혜가 몸부림치자 뛰어들어가 의사를 제지한다. 그러면서 인혜는 달려가 영혜의 몸을 껴안는다. 이때 작가는 “영혜 피를 토한 피가 이때 그녀의 블라우스를 적신다”라고 말한다. 곧이어 의사가 치료를 포기하고 큰 병원으로 데려가라 하자, 인혜는 수속을 마치고 나오면서 화장실에서 “뿌연 차와 함께 노란 위액”을 토한다. 영혜의 피와 인혜의 노란 위액이 서로 감응한다. 작가의 이런 서술은 마치 이제 인혜와 영혜가 하나의 몸이 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직 인혜는 영혜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몸으로는 이미 하나가 된다.

작가는 우리에게 그 비밀을 말로 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는 영혜의 말 가운데서 그 비밀의 단서를 노출하고 있다. 영혜의 말은 결코 무의식의 말은 아니다. 영혜의 말은 너무나도 또렷한 언어로 말해진다. 그렇다고 영혜가 우리가 가진 의식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영혜를 통해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 작가는 영혜가 말하는 가운데 불가사의한 “미소를 짓고” 얼굴이 “환하게 밝았다고” 했다. 영혜는 음식을 거부하면서 의사조차도 신비하게 생각하듯이 온 몸이 긴장되어 있다. 바로 그 미소와 빛, 온몸을 사로잡는 힘이 영혜를 통해 말하는 주체가 아닐까? 이 주체는 바로 영적인 타자가 아닐까?

5) 나무 불꽃

이제 첫째 편으로 돌아가자. 영혜를 불안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 꿈이다. 그 꿈은 그녀의 내부에 존재하는 폭력성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녀에게 내재하는 폭력을 끌어내는 것은 바로 사회적인 폭력이다. 사회적 폭력에 감응하여 인간 내면의 폭력성이 깨어난다. 영혜는 떠오르는 폭력성에 대해 저항한다. 영혜에게 그 저항의 힘을 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영적 타자의 말이 아닐까? 그 말이 채식으로, 그리고 주술적인 차원으로 최종적으로 죽음으로 그녀를 불러낸다. 그 앞에서 영혜는 단호하고 담담하다. 그녀는 어떤 굴복도 없이 어떤 주저도 없이 영적 타자의 부름에 충실하다.

그런데 인혜는 자살 직전에 멈춘다. 그녀를 멈추게 한 힘은 무엇일까? 아마 이 소설의 백미라면 바로 여기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빈 욕조에 웅크려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 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인혜가 들은 말은 생명의 말이다. 생명이 곧 영혜를 불렀던 그 영적 타자가 아닐까? 그 생명은 인혜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작가는 그것이 무자비한 말이라 했다. 왜 무자비한 것일까? 그 설명은 바로 다음에 나온다. 나무는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이라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인혜에게 자신의 말을 눈에 보여준다. 그 말은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 몸을 버티고 서 있으라!”는 무자비한 말이다.

죽음을 통해 나무가 되려는 영혜, 그에 반해서 나무처럼 살아가려는 인혜, 이렇게 해서 죽음의 길과 삶의 길은 나누어졌다. 하지만 두 길은 서로 통한다. 이 길 가운데서 영혜가 죽음으로 들어가면서 인혜가 삶 속으로 걸어 나온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영혜에게는 책임질 아이가 없지만, 인혜에게는 책임질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숨죽여 의문 했다. 꿈일 뿐, 우연의 일치뿐일까. 박명 속에서 일어서는 뒷산의 나무들에서, 바랜 보라색 티셔츠 차림이 그녀가 뒷걸음질 쳐 내려왔던 그 아침이었다.”

인혜는 아이의 꿈속에서 하얀 새가 날아가던 때 바로 그때 자신이 죽음 향해 걸어갔던 것을 기억한다. 아마 아이의 눈물이 그녀를 되돌아서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악문다. 불현듯 그날 새벽 걸어 내려오던 산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샌들을 적신 이슬이 맨발에 차갑게 스몄었다.”

맨발을 적신 이슬, 그게 아이의 눈물일 것이다. 아이와 엄마 사이의 이 신비한 교감은 인혜를 삶으로 불러들인 바로 그 힘, 생명의 힘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12-논리학 서론의 이해(후반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2-논리학 서론의 이해(2: 논리학의 개혁)

1)

앞에서 소개했듯이 논리학 서론의 앞부분은 형식논리학을 비판하고, 형이상학에서 칸트가 이룬 혁명을 소개한다. 헤겔이 칸트에서 주목했던 것은 판단형식 즉 범주가 그 자체에서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칸트는 선험철학의 혁명으로 나갔으나, 헤겔은 칸트의 선험철학이 판단형식을 좌표축으로 보는 주관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앞에서 이 지점이 헤겔이 칸트와 갈라지는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헤겔은 이런 비판으로부터 판단형식이 지닌 고유한 의미 즉 내용이 자기 운동한다는 주장으로 나갔다.

이제 서론의 뒷부분을 살펴볼 차례다. 헤겔은 처음 논리학의 문제로 되돌아와서 아직 논리학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형식논리학의 입장이 지배하고 있으니, 지금 논리학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형식논리학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차라리 전혀 없을 수는 없다”(S. 36)라는 감정이나 “논리학이 중요하다고 보는 여전히 지속된 관습”(S. 36) 때문일 뿐이다.

그 때문에 그이 시대 다양한 논리학 개혁 작업이 출현했는데, 헤겔은 그런 개혁 작업으로 두 가지를 거론한다. 한편에서 논리학에 대한 심리적 교육학적 생리학적 연구 즉 “극히 천박하고 사소한”(S. 36) 연구가 있다. 그것은 먹고살기 위해 “아주 간단하고 무미건조했을 내용을 어떻게 해서든 확장하려는 문필가나 교사가”(S. 36) 빠진 길이다.

다른 한편에는 형식논리학에서의 수학적 연구이다. 이는 논리적 조작을 좀 더 정교하고 다양하게 발전시키는 것이 있었다. 헤겔은 이를 ‘길이가 다른 막대를 추려내는’ 작업이나 ‘그림 조각을 서로 맞추는’ 유희와 다른 바 없다고 한다(S. 36). 이는 “몰개념적 양의 외면적 진행에 불과한 것을 개념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삼는” 것일 뿐이다.(S. 37)

전자나 후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전자는 훗셀이 논리연구에서 비판했던 19세기 말 심리주의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후자는 20세기 초반 프레게, 러셀 등을 통해 발전된 함수 논리학과 논리학의 수학화를 생각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입장은 어느 것이든 논리학은 단순한 형식적 학문이며 그 내용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어느 입장에서나 논리적 형식은 “고정된 규정을 이루면서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며 유기적인 통일체로 통합되지 못한다고 본다”(S. 32)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헤겔로 볼 때 이런 입장은 논리적 형식을 “죽어 있는 형식”(S. 32)다루는 것에 불과하다.

2)

헤겔은 이상과 같은 논리학의 개혁을 비판한 끝에 이제 논리학의 근본적 개혁이라는 과제에 직면했다고 한다. 그것은 논리학이 지닌 “형이상학적 의미를 고려하는”(S. 31). 즉 논리적 전개란 단순히 심리적 작용도 아니고, 수학적 원리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며, 존재자가 일반적으로 지닌 운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논리학의 형이상학화’(또는 ‘형이상학의 논리학화’)를 칸트가 시작했다고 한다.(S. 35)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언어의 범주는 존재자에 대한 경험을 일반화한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칸트는 판단형식이라는 범주로부터 존재자를 선험적으로 구성하려 했다. 여기서도 범주는 결국 존재자의 일반적 규정으로 된다. 그러므로 칸트는 판단형식을 다루는 논리학이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다고 본 것이다.

①이런 형이상학적 논리학의 출발점은 바로 ‘의식과 대상’, ‘사상과 사태’, ‘형식과 질료’의 합일이라는 학문의 개념 즉 절대지이다. 우리는 이런 개념이 칸트의 생각을 헤겔이 발전시킨 것임을 앞에서 언급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입장은 칸트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의식의 기나긴 역사적 발전 끝에 마침내 도달한 결과라고 말한다. 헤겔은 의식의 이런 발전 과정을 정신현상학에서 서술했으므로 정신현상학을 통해 학문 그 가운데서도 형식적인 학문인 논리학의 출발점이 마련되었다고 말한다.

“정신현상학은 순수한 학문의 개념을 연역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닌 한, 지금 이 논의는 순수한 학문의 개념과 그것을 연역하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S. 33) “따라서 순수학문은 의식의 대립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S. 33)

② 이 절대지, 순수학문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헤겔 논리학의 기본적 특징이 드러나게 된다. 절대지는 단순한 합일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를 정립하고 다시 이로부터 자기 내로 반성하는 개념적 운동을 전개한다. 이 절대지의 운동은 곧 판단형식의 자기 운동을 의미한다. 판단형식이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은 이미 칸트가 제시한 것이지만, 이 판단형식이 자기 운동한다는 것은 헤겔의 고유한 입장이 된다.

③ 헤겔은 이런 판단의 자기 운동을 정초하기 위해 반성 개념을 끌어들였다. 이 반성 개념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곧 ‘특정한 부정성’ 개념이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결과를 끌어내는 것 즉 부정은 특정한 부정이니, 이 부정으로부터 나온 결과는 어떤 내용을 획득한다.”(S. 38)

④ 이런 특정한 부정성 개념을 통해 판단형식의 운동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다. 이 체계는 누적적으로 전개되니, 헤겔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정으로 나온 결과는 이전의 개념을 내포하면서도 또한 그보다도 더 많은 것을 내포하며, 그 이전의 개념과 그것에 대립하는 것의 통일이 된다.”(S. 38)

4)

헤겔은 이런 판단형식의 자기 운동으로서 논리학에 대해 변증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대상을 계속 앞으로 움직여 가는 것은 대상이 그 자체에서 가지고 있는 변증법 즉 자기 내적 내용이기 때문이다.”(S. 38)

헤겔은 변증법이 지금까지 논리학에서 고립적인 부분으로 간주되면서, 그 목적이나 입장에 있어서 전적으로 오해되어 왔다고 한다. 헤겔은 구체적으로 플라톤과 칸트의 변증법 개념을 비판한다. 플라톤에서 변증법은 모순을 통해 가설을 해소하며 “무를 결과로 갖는 것”이다. 여기서 변증법은 “외면적이고 부정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었으며(S. 40) 따라서 그것은 “사태 자체에 속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다만 주관성의 광기에서 나온 공허한 오만에 이끌린 것”(S. 40)이라고 비판한다.

이어서 헤겔은 칸트의 변증법을 비판한다. 칸트는 변증법을 플라톤과 같이 주관의 자의적인 부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규정을 물 자체에 적용하면서 생기는 것 즉 “이성의 필연적 활동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변증법을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헤겔이 보기에 칸트는 이런 변증법을 통해 물 자체의 인식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무를 결과로 했을 뿐이다. 칸트는 이런 변증법이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자아내면서 “사유 규정의 자기 운동을 일으키는 혼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든 자연적 내지 정신적 생명의 일반 원리”(S. 40)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5)

헤겔은 변증법을 사유의 자기 운동으로 파악하면서 여기에는 ‘사변적인 것’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헤겔이 사변적인 것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가 문제다. 보통 사변적인 것이라면 가설추리 또는 유추를 말한다. 이 가설추리는 잘못된 가정에 기초하거나, 추리가 비형식적이어서 자주 혼란에 빠지기에 요즈음 거의 궤변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헤겔 당시에서 사변적인 것은 그런 뉘앙스를 지니는데, 그래도 헤겔은 자기의 논리학, 변증법을 사변적인 것이라 규정한 것이라면, 사변적인 것의 의미가 상당히 다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실제 헤겔은 사변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여기서 받아들여지는 변증법적인 것 속에 다시 말하면 대립물의 통일 속에 혹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 속에 사변적인 것이 깃들여 있다.”(S. 40-41)

‘대립물의 통일’ 즉 모순은 기본적으로 변증법적인 개념이라 말해진다. 반면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앞에서 “부정적인 것에서 나온 결과 긍정적인 것이 된다”는 말과 유사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반성 개념과 그것의 토대인 ‘특정한 부정’ 개념을 설명할 때 제시된 것이다. 이 후자는 플라톤이나 칸트의 변증법 개념 자체에는 원래 없었던 것이다. 헤겔은 모순을 이처럼 반성 개념을 통해 파악하면서 이를 사변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에서 특정한 부정 개념 때문에 즉 사변적인 사유 때문에 논리학의 체계가 형성되며, 이 체계는 단순한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변적인 사유는 개별자로부터 추상하여 일반자에 이르는 추상적 사유와 대립하는 것이다. 이 사변적인 사유는 이 운동을 전도하여 일반자가 개별자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것 즉 “개념에 준해서 인식하는 길”(S. 41)로 파악한다.

이는 단순히 목적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표면적으로는 개별자의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이런 대립과 모순을 통해 내면적인 일반적인 것이 자기를 실현하니, 헤겔이 자주 이성의 간지라고 규정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6)

이상에서 헤겔은 그의 논리학이 지향하는 일반적 특성을 소개한 뒤 마지막으로 논리학을 연구하는 의미를 덧붙인다. 헤겔은 일르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 비유한다. 언어를 처음으로 배우는 사람은 서로 고립된 다수의 규정과 그 각각이 지닌 직접적인 의미만을 발견한다. 그러나 언어에 능통하게 되면 다른 언어를 이 언어와 비교하면서, “자기의 언어가 갖는 문법 속에서 민족의 정신가 문화를 느낄 수 있다.”(S. 41)

이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논리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현실과 유리된 논리적 법칙만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를 다른 지식이나 학문으로까지 적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풍요로운 내용을 결여한 “아무 색깔도 없고 차가운 단순성을 지닐 뿐인 순수한 규정”(S. 42)으로만 나타난다.

하지만 여러 학문에 대한 좀 더 깊은 지식을 획득한 다음에 보면, 논리학은 “한낱 추상적 일반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수적인 것을 풍요하게 포함하는 일반성”(S. 42)이 된다. 마치 청년이 격언을 문자대로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생 경험이 풍부한 노인은 격언 속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이해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이 발휘하는 전체적 힘을 표현하는”(S. 42) 것과 같다고 하겠다.

헤겔에 따르면 “개념을 통해 전진해나가는 것에 친숙하게 되면서”(S. 43) 이제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런 지식이나 학문을 본질적 측면에서 포착하고 고수하면서 [불필요한] 외면적인 것을 벗겨내고 이런 방식으로 다양한 지식과 학문으로부터 논리적인 것을 끌어내는 힘”(S. 43)을 얻는다.

이렇게 헤겔은 서론을 끝맺으며, 다음으로 논리학의 구분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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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8월 제13차 정기세미나 ‘이규성 선생의 비트겐슈타인 연구’-발표:이영철(부산대) 2024.08.16.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8월 제13차 정기세미나

-주제: ‘이규성 선생의 비트겐슈타인 연구’
-발표: 부산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이영철
-일시: 2024년 8월 16일(금) 오후 4시
-장소: 서울시 서대문구 서소문로 45 SK리쳄블 1305호(zoom 병행)

이규성 선생의 사상 가운데 비트겐슈타인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이규성 선생의 관심은 상당히 특이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하라 했는데, 그것이 칸트가 물 자체에 대해 불가지론을 폈던 것과 같다고 본 것일까요?
쇼펜하우어가 칸트를 서구 형이상학의 한계를 비판하는 도구로 삼았던 것처럼, 이규성 선생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서구 현대 철학을 비판하는 도구로 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국내 대표적인 비트겐슈타인 연구자이고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대부분을 번역한 부산대 이영철 교수께서 이규성 선생의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연구의 전말을 분석해서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 발표원고: [웹진발표문편집] 비트겐슈타인과 쇼펜하우어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1jq1b3HsaUE?si=dOMWt2ne4q89gnLL

헤겔 형이상학 산책11-논리학 서론의 이해(전반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1-논리학 서론의 이해(1)

1)

앞에서 설명한 것을 통해 헤겔 논리학 이해를 위한 기본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본다. 이런 발판에 기초하여 지금부터 논리학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오늘부터 우리가 읽을 부분은 2판의 서론[Einleitung]에 해당하는 부분 즉 ‘논리학의 일반 개념’이다. 1판 서론은 그냥 ‘서론’으로 되어 있지만, 약간의 언어 표현상 차이나 부분적 첨삭을 제외하고는 내용은 같다.

헤겔은 서론에 들어가자마자 우선 학문의 방법이나 개념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다른 학문과 달리 논리학은 자기의 개념이나 방법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끌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보통 서론에서 말하는 개념이나 방법은 논리학의 경우에는 논리학이 실제로 전개된 다음에야 얻는 것이니, 지금 서론에서 해명하는 것은 “설왕설래하는 역사적인 의미”(S. 27) 정도에 그친다고 하면서 양해를 구한다.

(앞으로 인용문은 헤겔, 논리학, 재판본, GW 21, 펠릭스 마이너, 1985에 의거하겠다)

2)

그러면서 헤겔은 형식논리학의 문제점부터 제기한다. 형식논리학에서 판단의 형식과 내용은 서로 무관하며, 그 내용은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며, 논리학은 다만 “독자적으로 보면 공허한”(S. 28) 사유의 형식을 다룰 뿐이라 한다.

그러므로 양자의 관계는 “역학적이거나 기껏해야 화학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S. 28) 있어서는 “사유는 소재를 수용하고 이를 형상화한다 할지라도 결코 자기를 넘어서지 않으며” 사유는 “자기를 저버리고 대상에게로 다가서는 일은 없다.” 그러니 “대상은 오직 물 자체로서 단적으로 말해 사유의 피안에 놓인 것으로 머무른다.”(S. 29)

논리학의 형식은 각기 고립되어 있어서 “고정된 규정을 이루면서,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며 유기적 통일체를 이루지 못한다”라고 한다. 헤겔은 이런 형식을 “죽은 형식”이라 하니, “그 속에는 생동적인 구체적 통일성을 의미하는 정신이 거주하지 못한다고”(S. 32) 비판한다.

즉 형식논리학은 죽은 자연이나 파악할 때 사용되지만, 자연조차 죽은 것은 아니니 그조차 파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동적 통일성을 전개하는 정신에 관해서야 전혀 무의미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논리학은 진리의 인식과 무관하니 논리학은 “실재하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사유의 규칙을 가르친다”(S. 28)라고 말하는 것조차 어불성설이라고 한다. 공허한 형식적 규칙을 배워 무엇하겠느냐는 말투다.

형식논리학의 토대는 의식과 대상을 분리면서 대상을 진리의 소재로 파악하는 흔히 일상적 의식 또는 현상적 의식에 있다. 헤겔은 이런 일상적 의식은 항상 진리를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S. 34)으로 보는데, 이런 입장은 심지어 플라톤의 이데아에도 남아 있어 플라톤은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다만 그것은 감각 세계의 피안에 있는 것이기에 이데아는 ‘감성적 탈자존재’일 뿐이다.

3)

헤겔은 의식과 대상을 구분하는 이런 입장보다는 차라리 지난날의 형이상학이 더 탁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난날의 형이상학은 적어도 “사물을 결코 그 직접태 속에서가 아니라 사유의 형식으로 고양되었을 때만 비로소 진리일 수 있다고”(S. 29) 믿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언어의 범주가 사물의 본질이 된다고 믿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의 범주를 마치 대상으로부터 주어져서 추상된 일반적 개념으로 파악한다. 즉 언어의 범주가 “대상의 가장 본질적이며 가장 고유한 본성을 구성하는 것”(S. 34)이라 한다.

‘근대의 반성적 사유’(여기서는 헤겔 이전의 의미에서)는 “추상하고 분리하며 그런 분리에 체류하는 지성”(S. 29)을 말하는데, 이런 추상적 사유는 지난날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출현했다. 여기서 사유의 범주는 이제 주관적인 것으로 되고, 이는 사물과는 무관한 외면적인 것, 낯선 것으로 되고 말았다. 헤겔은 근대의 반성적 사유가 이성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건전한 상식으로 행동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형식논리학의 기본입장이 되었다고 말한다.

헤겔은 의식과 대상을 분리하고 대상을 진리로 보는 “오류를 정신적 우주나 자연적 우주를 망라한 전 영역에 걸쳐서 철저하게 반박하는 것”(S. 29)이야 말로 철학이 할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오류를 제거하는 것은 철학(논리학을 포함한 전체 철학)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이루어야 한다고 하면서 논리학에 앞선 정신현상학의 역할을 제시한다.

4)

그런데도 헤겔은 지난날의 형이상학에서 추상적 사유로의 이행은 불가결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런 추상적 사유야말로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을 위한 통과 과정이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이성 개념에 다다르기 위한 위대한 부정의 발걸음”(S. 30)이라는 것이다.

추상적 사유는 분리하는 가운데 서로 모순된 주장(경험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이르게 되며, “이 모순이야말로 이성을 지성의 제한 너머로 고양하며, 그 제한을 해소하게 하는 것”(S. 30)이라는 사실이 마침내 통찰되었으니, 그것이 칸트 철학이 이룬 업적이다.

칸트가 놓았던 그 단초란 무엇인가? 앞에서 우리가 이미 말했지만, 그것은 곧 판단형식 즉 범주에 고유한 자체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판단형식의 자체적 의미를 칸트는 범주의 도식을 통해 제시했다. 칸트는 이런 판단형식 즉 범주를 통해 대상을 구성한다는 선험적 인식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서 멈추었기에, 헤겔은 칸트 철학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지적한다.

“비판철학은 이성이 자기자신으로부터 자신의 규정을 서술하게 하는 단초를 마련하게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결국은 이러한 시도에 깃든 주관적 태도가 그런 단초를 완성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S. 31)

이 구절에서 헤겔이 주관적 태도라고 비판한 측면이 칸트의 어떤 측면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가 범주를 하나의 좌표축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범주를 좌표축으로 보면, 주관적인 좌표축은 불가피하게 물 자체에 부딪히게 된다.

5)

헤겔은 칸트가 비록 물 자체의 문제를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현상에 관한 보편적 지식에 도달했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는 인식이 진정하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S. 30)는 것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칸트에서 좌표축을 이용한 인식은 심지어 현상계에 대한 인식조차도 불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앞에서 지적했다. 경험을 판단형식으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직관적으로 통찰하던가 아니면, 영원히 미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 말과 연관하여 헤겔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점은 의미심장하다. “유한과 무한의 규정이 세계 표상에 동시에 적용될 경우 우리의 세계 표상이 해소되어 버린다면, 정신 자체도 두 규정을 자체 내에 포함하는 경우 자기 모순적인 것이며 또 자기 해소되는 것으로 된다.”(S. 31)

그의 말은 비단 물 자체에 대해서만 모순이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일상적 경험에서도 모순이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6)

이상과 같이 헤겔은 칸트의 업적과 그 한계를 지적한 다음, 마침내 칸트가 제시한 단초를 발전시킴으로써 마침내 물 자체의 유령을 극복하려 한다. 우선 S. 31에서 S. 35에 걸쳐 전개된 그의 주장을 들어 보자.

“이성이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규정을 서술한다.”(S. 31) 그것은 사유의 형식을 “그 자체에서 연역하는 것”이며, “변증법적으로 고찰하는 것”(S. 31)이다.

사유의 형식은 질료라고 불리는 것을 “어디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이” 자기 자신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런 형식은 “실질적이고도 절대적 구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S. 32)

“순수학문은 오직 사상이 못지않게 그 자체에서 사태인 한에서만 사상을 포함하거나 사태가 못지않게 순수 사상인 한에 있어서만 그 자체에서 사태를 내포한다. 학문에서 본다면 진리는 순수하게 자기를 전개하는 자기의식이다”(S. 33)

“사유의 필연적 형식과 고유한 규정이 내용이면서 최고의 진리 자체이다”(S. 34)

“이들이 자기의식적 사유의 단순한 형식일 뿐만 아니라 대상의 지성에 속하는 형식이기도 하다.”(S. 35)

위에서 제시된 헤겔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①사유의 형식은 그 자체에서 구체적 내용을 지니고 있으며, ②이 사유 형식은 자기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③사상과 사태가 일치하게 된다.

①과 관련해, 우리는 칸트가 판단형식 즉 범주의 의미를 도식을 통해 규정했다는 것을 말했다. 이 도식은 판단형식이 그 자체로 지니는 의미이며, 판단형식을 통해 규정되는 경험의 내용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②과 관련해 우리는 헤겔에서 하나의 판단형식이 모순의 경험과 반성 개념을 통해 새로운 판단형식으로 이행한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③은 앞의 ①과 ②에서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헤겔은, 사유의 자기 운동 개념을 통해 헤겔은 칸트가 부딪혔던 “물 자체의 유령” 또는 “그 어떤 내용으로부터도 절연된 추상적 환영의 허망함”(S. 31)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헤겔은 자신이 칸트의 철학을 계승해서 그 단초를 발전시키려 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철학을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규정한다.

7)

논리학의 이상 기본 개념은 그저 전제된 것이 아니라, 논리학에 앞서서 인식론을 전개한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입증된 결과이다. 정신현상학은 대상과 대립하는 의식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절대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의식과 대상, 확신과 진리 사이의 분리가 제거됨으로써 의식과 대상이 합치하며, 확신은 진리가 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사유 형식 자체가 곧 구체적 내용과 일치한다는 의미이다.

이 절대지가 학문 즉 그 가운데서도 형식적 학문인 논리학의 출발점인데, 우리는 칸트의 판단형식이 지닌 고유한 의미 즉 도식을 통해 주어지는 의미를 통하여 이미 설명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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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10- 판단형식과 논리학의 목차[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0- 종합

1)

이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는 언어의 분류틀을 말한다.

-실체 즉 주어로 될 수 있는 것은 종적 본질이다. 종적 본질을 개체를 통일하는 원리이며, 개체를 통해서 자기를 지속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범주는 판단형식이 되었다. 칸트는 판단형식의 도식을 통해 고유한 의미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각 판단형식은 하나의 좌표축으로 보고 판단형식의 이행을 고려하지 않았다.

-헤겔은 판단형식의 이행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런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반성 개념이고 그 바탕에 ‘특정한 부정성’의 개념이 있다.

-이런 이행을 매개하는 것은 경험이다. 사유는 경험 속에서 자기모순에 부딪힘으로써 새로운 범주 즉 판단형식으로 이행한다.

2)

이상에서 설명한 대로 헤겔의 논리학은 판단형식의 이행을 다룬다. 이런 생각을 통해 대체로 헤겔 논리학의 구성을 이해할 수 있다.

헤겔은 논리학 2부 주관논리학 1장 개념론에서 판단을 다루면서, 12개의 판단형식이 어떻게 이행해 나가는가를 설명했다. 이 12개의 범주가 이행하는 순서는 놀랍게도 논리학의 1부 존재론의 형식 속에 감추어져 있다.

1부 객관논리학

2판 목차

판단형식

1부 1권 존재론

1편 질

질적 판단형식

1장 존재

존재-무-생성

2장 현존

현존 자체-유한성-무한성

긍정-부정-무한

3장 대자존재

대자존재-일과 다-견인과 반발

2편 크기

양적 판단형식

1장 양

순수양-연속적 크기와 분산적 크기-양의 한계

단칭

2장 정량

수-외연양과 내포양-양적 무한성

특칭

3장 양적 비례

직접비례-역비례-제곱비례

3편 척도

척도

전칭

1장 특수적 정량

특수적 정량-특수적 척도(규칙)-척도 내 대자존재(질의 척도)

2장 실재적 척도

(자립적 척도의 관계)

자립적 척도의 관계 -연속적 척도 관계- 척도 없는 것

3장 본질의 생성

절대적 무차별성(무차별성)-역비례로서 무차별성(역비례로서 자립성)-본질로 이행

(괄호 속은 2판과 구별되는 1판의 제목)

1부 2권 본질론

관계(실체) 판단형식

1편 자기 내 반성으로서 본질

1장 가상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가상- 반성

정언

2장 본질 규정

동일성-차이-모순

3장 근거

절대적 근거-규정적 근거-조건

가언

2편 현상

1장 현존

물자체와 성질-사물을 구성하는 질료-사물의 해소

2장 현상

현상의 법칙-현상 세계와 물 자체 세계-현상의 해소

3장 본질 관계

전체와 부분-힘과 외화-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

선언

3편 현실

개념(양상} 판단형식

1장 절대자

절대자의 해석-절대적 속성-절대자의 양상

2장 현실

우연성-상대적 필연성-절대적 필연성

우연-개연-필연

3장 절대적 관계

실체성의 관계-인과관계-상호작용

(본질론은 2판이 없으므로, 1판의 제목이다)

이상의 표는 헤겔 논리학의 1부의 목차이다. 이 목차는 대단히 복잡해서 언뜻 보기에 그 속에 판단형식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러나 필자가 빗금을 그어놓은 부분만을 골라 읽어보면 놀랍게도 판단형식의 이행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2부 주관 논리학이란 무엇이냐? 판단형식의 이행이 왜 이리 복잡하게 보이냐? 등의 의문이 제기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의문을 차차 답하기로 하고, 비록 겉으로 다르게 보이더라도 기본 골격이 동일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헤겔 논리학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9-부정성의 개념과 사유에서 반성 개념의 역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9-부정성의 개념과 사유에서 반성 개념의 역할

1)

앞에서 말했듯이 반성 개념은 서로 배타적 통일의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동일성은 차이의 부정이며, 차이는 동일성의 부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부정의 개념이 형식논리학에서 말하는 부정의 개념과 다르다는 사실은 쉽게 드러난다.

형식논리학에서 어떤 것의 부정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의 부정은 ‘파란색’이 될 수도 있고, ‘수3’이나 ‘코끼리’가 될 수도 있다. 이런 형식논리학에서 부정 개념을 통해서 본다면, ‘동일성’의 부정은 반드시 ‘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운동’도 되고, 무수히 많은 것이 다 ‘동일성’의 부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동일성’의 부정이 ‘차이’라고 못 박고 있으니, 여기서 부정성 개념은 헤겔에게 특유한 것이다. 이런 부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부정이 한정되어 있어야 한다. 즉 부정은 부정되는 대상이 속한 어떤 유의 한계 내에서만 일어나는 부정이다. 즉 ‘빨간색’의 부정은 색깔이라는 유 속에서 ‘빨간색’의 부정이다. 그러므로 그 부정은 ‘빨간색’이 아닌 색, 즉 ‘파란색’이나 ‘노란색’ 등이 된다.

2)

헤겔은 이런 부정성 개념을 특정한 부정성이라고 한다.

“부정적인 것은 또한 그에 못지않게 긍정적인 것이며, 자기 모순적인 것은 0이나 추상적인 무로 해소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것이 지닌 특수적 내용의 부정으로 해소된다는 것이다. 또 달리 말하자면 그와 같은 부정은 전면적 부정이 아니라 해소되기 마련인 특정한 사태의 부정이며, 특정한 부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 속에는 본질적으로 이 결과가 유래한 원인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논리학, S. 38)

헤겔은 이 구절에서 특정한 부정 개념을 제시한다. 그것은 추상적인 무로 해소되는 부정과 달리 그것이 지닌 특수적 내용의 부정에 그친다. 즉 부정의 대상이 되는 ‘빨간색’의 특수한 내용이라면 곧 ‘빨강’이다. ‘빨간색’의 부정은 ‘빨강’의 부정에 한정되지 색의 부정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빨간색의 부정은 ‘파란색’이나 ‘노란색’ 등에만 한정된다.

물론 반성 개념일 경우는 특정한 부정성이 적용되는 특별한 경우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이중부정이 성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부정이 가능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색깔의 유에는 ‘빨간색’과 ‘파란색’, ‘노란색’ 등 상이한 다양한 색깔이 존재한다. 여기서는 이중부정은 불가능하다. ‘파란색’은 ‘빨간색’의 부정이지만, 자기를 부정한다고 다시 ‘빨간색’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인간의 유 속에 ‘남자’와 ‘여자’만이 존재한다고 할 때, ‘여자’는 ‘남자’의 부정이며, 자기를 부정하면 다시 ‘남자’가 된다. 여기서 이중부정이 성립하는 데 이런 경우는 일반적으로 말해 유에 속하는 원소 사이에 배타적 통일의 관계(즉 X=P or -P)가 존재하는 경우다.

반성 개념도 마찬가지다. 좌우, 상하, 선후 등은 물론하고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개념인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형식과 내용,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은 배타적 통일의 관계 속에 있다. 그러기에 이중부정이 가능하면서 반성 개념이 된다.

3)

지금껏 우리는 반성 개념을 추적해 왔다. 이제 반성 개념이 사유에서 하는 역할을 밝힐 때가 되었다.

일상적으로 반성은 인간에게 속한 특유한 능력이 된다. 라캉이 들고 있는 유명한 예를 들어 보자. 주인이 노예의 이마에 글을 새겼다. ‘이 사람을 만나는 즉시 죽여라’라는 글자다. 그리고 주인은 이 노예를 자기 친구에게 보냈다. 노예는 자기 이마이므로 무슨 글을 썼는지 알 수가 없다(단 거울이 없다고 하자). 노예는 자기 이마에 쓴 글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그것은 노예가 주인의 친구를 만났을 때, 주인 친구의 반응을 보고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 반응이 노예에게 거울이 된 것이다.

인간은 이처럼 거울에 비친 자기의 반영[Reflection]을 보고 자기를 알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졌으니, 이게 바로 반성적 사유라고 하는 것이다. 소위 전략적 개임 이론의 기초가 된 것도 이런 반성적 사유이다.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를 보자. 증거가 없다. 죄수 두 사람이 자백하지 않으면, 처벌받지 않는다. 검사가 자백하지 않으면 두 배의 벌을 주겠다고 한다. 이때 죄수는 서로 먼저 자백하려 하는 가운데 둘 다 처벌받는다. 만일 상대방의 행동을 예상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백하지 않고 처벌도 면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타자의 행동에 대해서 이루어진 행동 즉 전략적 행동이다.

4)

이런 예를 통해서 인간에게 반성적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했다. 이제 이 반성적 사유의 역할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자. 구체적 예를 가지고 설명해 보자.

‘어떤 물체는 질량을 지닌다’라는 판단을 부정하면 ‘어떤 다른 물체(예를 들어 빛과 같은 물체)는 질량을 지니지 않는다’가 된다. 전자는 양적 긍정판단이고 후자는 양적 부정판단이다.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하는 것은 양자의 모순을 경험하게 한다. 이 모순적 경험은 양적 무한판단을 낳는다. 즉 ‘물체는 질량을 지닌 것인 동시에 질량을 지니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질량과 비질량은 부정적 관계를 갖는다.

이제 양적 무한판단 즉 모순 경험을 살펴보자. 칸트는 범주를 물 자체에 적용한다면 모순에 부딪힌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모순 경험으로부터 물 자체의 인식 불가능성이라는 주장으로 나간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겔은 다른 태도를 취한다.

헤겔은 여기서 이 양적 무한판단을 부정한다면, 질량[M]과 비질량[E: 즉 에너지]의 통일체, 즉 질량과 비질량을 동시에 산출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질량과 비질량의 미분적 차이 즉 dM/dE다. 이 미분적 차이가 사물의 본질이며 때로는 질량을 낳고 때로는 비질량을 낳는다.

이제 ‘물체는 미분적 차이다’라는 명제가 나온다. 이 판단은 이제 사물의 본질을 언표하는 정언 판단이다. 앞에서 ‘물체는 질량이다’라는 판단은 양적 긍정판단은 사물에 본질에 대한 주관적 판단에 그친다. 이제 사물의 객관적 본질에 관한 판단이 출현했다.

5)

이 과정에서 두 번에 걸쳐 부정이 작용했다. 첫 번째 부정은 양적 긍정판단에서 양적 부정판단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 부정은 사유가 주관적으로 전개하는 부정이 아니다. 이런 부정은 실제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즉 우리는 경험을 통해 질량을 지니지 않는 물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빛과 같은 것일 것이다.

두 번째 일어난 부정은 양적 무한판단을 부정하여 정언 판단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p or -p라는 형식에서 그것의 통일체인 X로 이행하는 것인데, 이는 사실 p와 -p 사이에 배타적 통일의 관계가 있을 때만 성립한다.

그런데 첫 번째 부정의 경험은 양자 사이에 배타적 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비질량에 속하는 것은 에너지도 있고 또 다른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일단 처음에 비질량으로서 에너지에 대한 경험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부정은 사유의 내에서 일어나는 자기 내 반성이다. 여기서는 질량과 에너지 사이에 일단 배타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양자의 미분적 차이로서 통일 개념이 출현했다. 쉽게 말해서 이는 새로운 하나의 가설이다.

이런 가설은 이어지는 경험에서 실제로 질량과 에너지가 배타적 관계가 있고, 비질량에 에너지 외에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때 가설을 넘어서 실제로 확립된다고 하겠다. 이것을 가설적으로 출현한 정언 판단을 실제로 확립하는 과정은 이제부터 일어나는 판단형식의 운동 즉 실체 범주의 판단형식에서 전개되는 운동(정언 판단-가언판단-선언판단)에서 일어난다.

이 전체적 과정에서 양적 긍정판단(‘물체는 질량을 갖는다’)은 물체에 대한 지각 판단에 그친다. 그것은 물체의 일반적 술어를 발견한다. 양적 범주의 판단형식에서의 운동을 통해 물체의 객관적 본질(‘이것은 dm/de이다’)에 대한 지성적 인식에 도달한다. 즉 판단형식의 운동을 통해 더 근본적인 인식이 일어난다. 즉 인식에서 발전이 일어난 것이다.

6)

헤겔이 논리학 판단론에서 전개한 이와 같은 이행 가운데 반성 개념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자.

우선 양적 긍정판단과 양적 부정판단이 서로 반성 관계에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양적 긍정판단에는 반성 개념 가운데 동일성의 개념이 작용한다. 어떤 물체는 질량을 기준으로 서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반면 양적 부정판단은 반성 개념으로 차이의 개념이 적용된 판단이다. 어떤 물체는 질량을 기준으로 앞의 물체와 다르다는 것이다.

두 판단형식은 반성 개념 즉 반성적 사유를 통해서 모순에 이르게 된다. 만일 이런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개념이 없다면 두 판단형식이 서로 모순이라는 것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양적 무한판단에서 정언 판단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양적 무한판단과 정언 판단 사이의 관계 역시 이중부정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양자 역시 반성적 관계에 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양적 무한판단에서 두 술어가 상호 배타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 전제되는 한에서 이런 이중부정이 성립한다. 이것은 사유의 가설인데, 여기서 적용되는 반성 관계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라는 반성 개념이다. 즉 양적 무한판단에서 배타적 관계에 있는 것은 외적인 것이다. 미분적 차이라는 개념은 내적인 것이다.

결국, 헤겔은 양적 범주의 판단형식에서 관계 범주의 정언 판단형식으로 이행에서 두 번에 걸쳐 반성 개념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번은 모순의 경험이며 한번은 전도의 경험이다. 만일 반성적 사유가 없었다면 모순 경험이 가능하지 않았듯이 전도의 경험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헤겔의 반성 개념의 역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하나의 판단형식에서 다른 판단형식으로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이행은 추론에 속하는 것이다. 판단형식 즉 범주가 경험을 구성하는 데 사용되는 것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분명하다. 판단형식은 경험을 구성하는 지성의 능력이라면 반성 개념은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의 능력이다.

7)

물론 앞에서 언급했듯이 양적 무한판단이 성립하는 것이 경험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여기서 간과할 수는 없다. 모순적 경험은 물론 반성적 개념이 있기에 모순이 되지만, 그런 모순적인 경험이 출현하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출현한다.

그러므로 헤겔의 논리학은 형식논리학과 구별된다. 형식논리학은 경험과 무관하다. 그것은 마치 판단의 벽돌을 사유의 공간에서 이리저리 옮기는 것과 같다. 벽돌 자체는 경험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공간에서 이동은 경험과 무관하다. 그것은 순수한 사유 내의 운동이니 마치 유클리드의 순수한 기하학적 공간에서 공간적 형태를 이리저리 옮기더라도 그 형태 자체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헤겔의 논리학은 하나의 판단형식 또는 범주에서 다른 판단형식 또는 범주로 이행한다. 이런 이행은 사유를 매개로 한다. 즉 반성적 사유이다. 그러나 이런 반성적 사유는 경험을 매개로 한다. 이런 경험이 없다면 사유 속에서 아무리 반성하더라도 새로운 판단형식으로 이행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의문에 이르게 된다. 경험을 매개로 새로운 인식에 이르는 것은 사실 인식론의 역할이 아닌가? 정신현상학에서 우리는 이런 인식의 발전을 보았다. 그런데 논리학도 마찬가지로 이런 경험을 매개로 한 판단형식 즉 인식의 변화라면, 논리학과 인식론은 어떻게 다른가? 논리학과 인식론 또는 정신현상학의 관계는 논리학을 다룰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결정적 문제이지만, 일단 하나의 의문으로 남겨놓자. 그것을 다루게 될 때가 올 것이다.

8)

앞에서 헤겔의 반성 개념을 추적하다가 우리는 헤겔의 배타적 통일의 관계에 있는 반성 개념 속에서 변별적 차이라는 구조주의적 개념을 발견했다. 그러면 헤겔의 사유도 구조주의와 같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그런데도 구조주의와 헤겔의 논리학은 결정적 차이를 지닌다.

구조는 다양한 변별적 차이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이 복합체는 하나의 좌표축을 이룬다. 구조주의는 경험을 이런 좌표 속에 할당하므로, 마치 칸트가 경험을 범주의 좌표축 속에 할당했던 것과 같다.

이런 구조주의는 알다시피 역사적 발전 개념이 없다. 그런데 앞에서 헤겔의 출발점은 칸트에서 인식의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비판이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헤겔은 “내용의 자기 운동”을 논리학의 기본 개념으로 삼았는데, 구조주의로부터는 이런 가능성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구조주의적 반성 개념에 기초하면서도 헤겔이 내용의 자기 운동을 끌어낸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반성 개념을 다루면서 하나의 판단형식에서 다른 판단형식으로 이행을 살펴보았다. 이 이행의 과정이 곧 내용의 자기 운동이다. 여기서 내용은 판단형식이 지닌 의미 즉 범주를 말하니, 범주의 자기 운동은 반성적 사유를 통한 운동이다.

‘혁명’ 대 ‘쿠데타’ – ‘인민의 생동감’ 대 ‘탐만치의 독극물을 마신 자들의 망상’ [천 하룻밤 이야기]

  혁명 대 쿠데타

– 인민의 생동감 대 탐만치의 독극물을 마신 자들의 망상

— 2024년 9월 22일. 추분(秋分): 그저께 밤새 비가 내리더니, 더위가 꺾였다.

ㆍ학문에는 경계가 없다. 현자도,

ㆍ학자는 경계 안에 있다. 지자는 패거리에 갇혀 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면서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 하늘에서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온 것은 착한 이야기로 남아있는 것만이 아니다. 이런 신선놀이 하는 천국 같은 이야기를 하던 시대는 어디에나 있었을 것이고, 표현하는 방법이 시대마다 또는 삶의 터전마다 다를 것이다. 어느 나라의 구전 전승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삶이 먼저이기에, 이 산, 이 강물, 이 땅, 이것들이 누구의 것이고 저것들이 누구의 것이라는 사적 소유 관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대상으로 하면 공산사회가 먼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시절에도 인간은 자연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끈질긴 노력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문명의 발달이전에, 정보의 전달이 문자화되기 이전에, 자연재해에 대해, 즉 자연에서 규칙성을 찾지 못해 기후변화나 태풍, 지구변화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지진과 화산 등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 시절 인간이 소유를 말했기나 했을까?

소유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추상 관념이 설정되는 시기에 대상이 현상적 표현 또는 재현 가능한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세상에서 살면서 공유와 터전을 말한다면 이것은 서양철학사에서 퀴니코스-스토아의 전통일 것이다. 하늘의 영원과 땅의 시간으로 대비시켜 설명한 것이 플라톤이었는데, 퀴니코스-스토아는 현재가 있는데, 미래는 오지 않았고 과거는 지나갔지만 그 현재의 항상된 이중적 방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 파들의 현자들은 그 현재라는 시점에서 점이라고 여기는 찰나는 영원하며, 즉 한번 이루어진 것, 만들어진 것은 사진의 장면처럼 영원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점이 아니라 열린 덩어리로 보았을 경우에, 그 덩어리는 그 변화하는 중에 있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찰나와 달리 순간은 과거(어제) 온갖 찌꺼기들을 포함하고 또한 미래(아제)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지속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찰나와 순간의 구별은 삶의 과정의 태도와 의식을 보여줄 뿐만아니라, 세상에서 “뭣”을 대하는 인식에서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늘이 땅의 대조에서 시간의 기준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상식적이라 하지만, 양자의 구별에는 그 만큼의 뜻이 있다. 현실의 삶에서 어떤 측면은 변할 수 없는 것이 있기도 하고, 삶의 과정은 끊임없는 변화의 측면이라고 한다. 이중성은 하늘과 땅의 대조에서만일까? 그런데 사실상 현재가 이중적이지 않는가? 이 이중적인 것을 한번은 하늘에 기준을, 다음번에는 땅에 옮겨서 그림자를 재는 편리를 생각하는 자들이 누구일까? 삶의 터전에 따라 인간들 각각의 심성이 그림자를 재는 것만큼이나 달리 표출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영원에게 삶의 태도를 묻고자하는 사고방식은 언제 어디서 왔을까? 영원을 하늘에 묶어 두는 한, 인민의 저항과 봉기도 반란과 역적으로 몰리는 것이 아닌가.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시대에선가부터 현실의 변화를 인도하는 인민의 항쟁과 혁명이 있었다. 어쩌면 플라톤주의자들을 전복하는 사유가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인민의 혁명의식을 하늘에 맡기라고 누가 말하는가? 18세기 말 대혁명과 20세기 초 공공재의 공산화하는 두 나라의 성립 이후, 거꾸로 하늘에서 천사와 성자들끼리 개혁이니 변혁이니 말씀하는 자들의 사고방식은 인민에게 반역과 모반을 꾀하는 쿠데타 사고방식이 아닌가.

*

서양 철학사를 상층의 이데아(관념) 중심으로 읽으면 쿠데타 세력을 플라톤이 주장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박홍규와 들뢰즈는 플라톤 사유에는 이중성이 있었다고 한다. 플라톤에서 아페이론이란 용어를 사회(토지)에서 인민으로 읽으면, 인민의 활동에 능동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이상한 종족이나 신앙자들은 플라톤의 아페이론을 이데아(관념)의 설득의 대상처럼, 피조물로서 다루어야 할 자연, 지배해야할 인민 등으로 여겼을 뿐이라 한다. 서양철학사에서 이런 상반된 관점을 갖게 하는 것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서양철학사의 기원을 기원전 7세기 이오니아의 탈레스로 잡는데, 그 탈레스가 자연을 대상으로 착각했다고 여긴 것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한다. 그런 사고방식을 크리스토스 신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을 받아들여 자연을 대상으로, 그리고 신의 피조물처럼 여기듯이 인민을 다루어야할 지배 대상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젖었다.

서양철학사가 왜곡되는 것은 한 찰나이다. 찰나의 고정은 불변이며, 천국도 불변이다. 그런데 지속하는(살아있는) 순간은 변화하며 지속한다. 그것을 영원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어서, 순간조차 쪼개어서 마치 원자가 불변인 것처럼, 순간을 찰나로 고정하여 불변으로 만들었다. 그 속임수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서양 철학사는 누누이 말하였지만, 이법과 신앙을 별개 사항으로 따로 놓음으로서 신앙은 찰나이면서 순간이라고 망상 또는 착란에 빠진다. 이를 프로이트 후학들은 파라노이아(편집증)라고 한다.

신앙자들은 왜 이 둘이 따로, 별개라고 하고 신앙이 우선이라고 하는가? 억지, 편집증의 초기와 닮은 자폐증의 치졸함이, 산타클로스 할배가 실재한다고 믿는 여섯 살 꼬마처럼 유치함이 상식의 이름으로, 그리고 탐만치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극우는 강박관념과 파라노이아를 사회 속에서 펼친다는 점에서 윤석열 집단처럼 일곱 살쯤 돼 보인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들을 침묵하게 하는 것은 중세 말기에 성행했던 마남사냥처럼, 현실에서 제대로 살아남지도 못할 지경으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별개의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길고도 흥미롭게 시로 쓴 철학자가 니체이다. 신앙자들은 니체가 사유의 전복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삶의 허무라고 해석하지만, 니체는 신앙자들의 질병(강박과 편집)과 탐만치에 빠진 아집을 벗어나라고 하면서, 불교의 도피안과 같은 저 너머 보살행을 행하자고 한 것이라 한다. 니체는 신앙자가 아니다. 그는 이슬람의 신의 놀이와 같은 아자르(주사위 놀이)로 설명하려 했겠는가? 자연의 다양한 발현이 아자르이다. 자연, 즉 이법은 신앙과 아무 연관도 없이, 45억 년의 오래 세월 동안 거기서 여전히 변화하고 있었고, 이제도 변하고 있고 아제도 변할 것이다.

서양에서 뿐만 아니라 사상의 발전은 그리스 이전에도 있었다. 들뢰즈가 흥미있게 전개한 것은 도구/무기의 방식이 인류사상사의 변역(變易)의 과정이었다고 한 것이다. 그리스 최초 철학자라는 탈레스 이전에도 인간이 살았다. 1859년 인류학회 이래로 인류의 과거를 연결하는 6백만 년 전의 유인원까지 갈 필요 없이, 3만 년 전 구석기. 만 년 전 신석기, 7천 년 전 현 터키지방의 아나톨리아의 자연동광의 발견으로 구리시대, 청동기시대, 기원전 천 년 전쯤에 철기시대로 이르기까지 도구의 발달로 여기지만, 도구를 무기를 사용하여 자연의 위험에 대처하고 동물이든 타종족이든 위협에 저항하기를 넘어서, 타를 정복하여 잉여이익의 착취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정복이 농경과 목축보다 많은 잉여생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집단을 형성하고 분업을 하는 과정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효율적인 정복에서 정복자는 집단을 다스릴 체제로서 참주제를 이용하였고, 제도 속에 정보와 배치는 소수의 소유로 이루어 졌다. 이 제도에서는 의식의 변화과정보다, 인식의 활용과 전승에 중요성을 알아서, 소위 말하는 지성의 체계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도구/무기를 기호와 문자로 전승하는 철기시대의 발달 시기쯤에서 권력의 유지와 체제의 확립이 이루어졌으리라 이 즈음에 플라톤의 “폴리테이아(국가)”편과 “법률”은 방어와 번영을 염두에 두었다고하는데, 이런 체제가 현실상에 있을 수 없다고 상상적 나라 또는 이상국가라 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고려해 보건데, 원시 공산사회가 있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상부상조의 나라가 있을 수 있는가를 의미할 것이다. 자연 속에서 소규모의 집단들은 자체의 존립을 위해 상부상조했을 것이나, 무기/도구를 먼저 생각하는 참주제와 같은 우두머리 체제가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정복의 잉여이익의 착취가 집단의 표본처럼 되어가는 것이 고대 문명사회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부상조의 삶의 터전에 대한 향수는 남아있었을 것이다. 정복의 문화 대 상부상조의 문화라고 맞대응 시킬 수 없겠지만, 기록과 유물의 역사는 정복의 체제에 치중해 있는 것 같다.

*

그리스 사상이 철학적 사유의 근본 또는 기원이 아니라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제기되었고, 20세기에는 당연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19세기 전반까지도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앙자들의 사고가 인민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절에 인민이 주인이라고 하면, 반역이니 반국가세력이니 하여 마남사냥처럼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조차 사형 또는 참수하였다. 프랑스가 세 번의 혁명을 거치면서, 인민 주권을 확실하게 만들고 나서, 그리고 20세기의 두 번의 전쟁에서 인민이 주축이 된 나라, 소비에트 공화국, 중화인민 공화국이 들어서고 난 뒤에야, 세계사에서 인민의 저항과 항쟁이 자기 방어로서 정당화되고, 상부의 정권을 쟁취하는 세력이 쿠데타 즉 반역의 세력으로 인식하게 된다. 현재 윤석열 정부도 인민의 의사를 거슬러 권력을 사유화하려 한다면, 반국가세력의 반역이 될 것이다.

그리스 사상이 의식적 사유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하며, 그리스 사유의 심정적 공감의 사유는 그리스 이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의 문명의 사유가 전개되었다는 것도 당연히 받아들인다. 이들에게 이상하게도 인더스 문명을 말하지만 인더스 문명은 거의 지워져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선 문명에서 산술과 기하, 천문과 지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전승되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나라처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홍익인가) 한다고 표명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원시사회라고 말한다면, 아름다운 동산에 사는 것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보건데 청동기 시대 이래로 거의 정복의 역사이고, 전쟁의 승리자가 신격화되는 시대이다. 몇몇 상부의 사유와 지식의 전유(생산도구의 전유보다 더 전횡을 할 수 있다)라는 시대를 거쳐서, 인간이 각자 자기 스스로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철기시대에 진입하여 생산력이 발달해야 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생산물의 잉여가 있어야 동냥하며 수도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 쯤에서 자기의식의 발동이 걸렸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 초기를 인도의 갠지스강에서 싯달다, 지중해 바닷가에서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 이후의 여러 사유의 갈래들은 통일성을 갖기에는 인간의 도구(언어, 문자, 학설)가 (실증적이라는 의미에서) 정확하지도 않았고, 획일적이지도 않았다. 4세기가 지나 신앙이라는 이상야릇한 사고방식이 침입하였고, 크리스토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황제와 보편을 본따서) 신앙을 획일적으로 보편화하는 사고방식으로 고정시키려 했다. 언어/무기를 사용하여 3세기 간의 피튀기는 투쟁으로 단일화하였고, 서양은 그런 방식에 묶여서 중세 천 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다시 개인의 자의식의 발현이 있었다. 그리고 400여 년을 신앙자들과 달리 생각하는 도구/언어를 사용하고자 노력했다. 자의식이 무엇인가를 도구로 만들면 무기로 바꾸어 사용하는 쪽이 참주제의 사고방식으로 있어왓다. 이에 비해 마남사냥 속에서도 소수의 자의식은 인민으로 퍼져나갔고, 세기를 지나 인민의 혁명들을 거치면서, 제도에서도 인민이 기본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 의식의 확장과 더불어, 인식의 발전과 진보를 믿는 이들은 다른 지역을 정복하고 쟁취하는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간단히 말하면, 여러 문화(문명)들 간에 충돌에서, 다양한 문화들 사이에 우월성을 주장하는 논리의 성립이 정복의 피비린내 속에서 피지배지의 확장을 통한 권력을 쟁취와 확장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로마의 황제가 그러했고, 크리스토스의 주장자들이 따라 배웠으며, 십자군전쟁까지도 치르면서, 천년의 신앙의 황제(교황)를 만들었다. 시대의 변화에서 유럽의 민족들은 자기의식에 따라 각 지방의 언어가 성립하고 개별 국가가 성립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과학의 일반화로 상식을 넘어 양식에 따른 사유체계를 정립하여, 인간들의 자유와 사유의 발전을 기여한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 사고의 정립은 다른 사고방식의 지배에 있었으며, 식민지 확장으로 이어갔다. 그러나 타 지역의 다른 문명이 도구 사용방식은 다르더라도 문화가 낮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제국주의 내부에서 두 번의 대전쟁을 치루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도구/무기의 문명이란 도구를 무기로 사용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사상은 정복에서 탈취와 착취를 쉽게 손 놓지 못하였다. 제국주의에 이어서 정복의 사고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제국은 신앙자들의 형이상학적(주지주의) 논리, 국가주의자들의 법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진리를 주장하는 분석과학철학 등과 패거리(카르텔)를 형성하여 지식/무기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21세기 SNS라는 도구/무기를 지배하려들면서, 또한 핵 발전도구와 핵무기의 이중성 함께, 전지구적으로 위협과 공포를 통해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공공재 공유를 우선으로 하는 사회주의와 이익창출을 위한 사유를 우선시 하는 자본주의 사이의 균열은 한 세기를 지나 분명한 간극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는 공공재는 사유화하는 방식과 공공화 하려는 방식의 사이에서 심한 갈등에 있다. 이 갈등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이 사유화의 세력은 신앙, 법률, 지식의 카르텔 형성하면서 돈을 신으로 모시며 지배하려고 한다. 그런데 인민의 자의식은 고대나 르네상스 시대와 달리, 확장과 강도의 수준이 전파와 속도 덕분으로 엄청나게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민이 주인이고 인민이 토대인데, 패거리의 장난과 놀음이 강압적 법률로도 이룰 수 없을 것이고, 신앙은 공공재화의 사적소유가 폐기되면 무너질 것이고, 지식을 달리하는 사유하는 자의식의 확산으로 새로운 분출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혁명은 번개처럼 갑자기 도래한다. 기나긴 의식의 역사 속에 간헐적으로 분출되었지만 폭발적이었다. 세계사는 공공재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간다. 공공재의 공유화가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살리는 길이고, 그 속에서 인간이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

서양에서 역사상 자의식의 발동은 여러 번 있었다고 하더라도, 인민들 개인에게 자의식의 분출은 그들에게도 사회주의 국가 성립이후 20세기 후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우리 입말과 문자로 통용한지 79년째이다. 그럼에도 외교에서는 미국과 관계에서 영어를 우선으로 하지만 말이다. 서양도 경험시대, 종교시대, 지성주의 시대, 현대이듯이 우리나라도 전승의 시대, 불교 천년, 유교 오백년이다. 상동구조가 아니라 상사구조로 변역을 겪어왔다.

환시대, 단군시대, 부여와 고구려 등으로 내려오는 신선사상의 시대가 있었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천년의 불교 영향, 그리고 유학이 들어와 군왕제를 확립한 유학 영향 500년이다. 이 조선 말기에 권력으로부터 밀려난 상부의 몰락 양반들 중에 백성의 삶에 대해 생각했던 실학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백성의 입말과 자신들의 문자와 서로 사맛디 아니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했었다. 이런 과정에서 19세기의 학문적 관심은 분명히 새로운 질서와 삶의 터전에 대해서, 그리고 서양 문물의 유입을 통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수의 열망이 있었음에도 우리 입말과 우리 글로 표기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백성 또는 중생이 자각하여 자기의식을 발동하는데 힘을 보태지 못했다. 이런 과정에서 사적 소유의 상부는 외세와 결탁하고, 백성의 저항과 봉기는 문자를 쓰는 선비들에 의해 지도되어 널리 퍼뜨리지 못하고 1894년 일본군대에 의해 민중의식은 수면 밑으로 흐르게 되었다.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상층은 서양을 직접 찾아가기보다 손쉽게 일본의 지식과 제도를 통하여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고, 일본의 주구(走狗)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저항하는 몰락한 소수의 상부는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이들에게는, 이제 만주에서 세계사의 접속과 일본을 통한 세계사의 편입이라는 이항 대립적 구도가 있음을 깨닫는다. 1919년 두 개의 독립선언문이 이를 증빙한다고 할 수 있다. 묘하게도 만주로 간 독립운동은 지식인이면서 중국과 연계 속에서 한문에 능한 반면, 일본과 연계 속에서 새로운 식자층은 한자를 알고 있다는 지식으로 일본에 급속히 빨려들어가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익힌 일본에 복속되어 갔다. 말하자면 후자들은 들뢰즈 용어로 일본에 “포획”된 형국이었고 곧 이어 일본의 “포로”가 되었다. 이를 식민지 시대에 지식인이라고 한다.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함께 하는 이들은 상부가 아니라 몰락한 양반층들과 백성들이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금지되고 수면아래 흐르면서, 또한 마남 사냥과 같은 빨갱이 사냥이 몰아치는 동안에, 남한에서는 윤똑똑이 지식인들이나 문학인이들 겉멋이 들어 19세기 초 독일 낭만주의와 같은 아이러니가 뭔지도 모르고, 산업화에 편승하여 원숭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수면 밑에서는 사라져가는 이야기를 분출 시켜려는 이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한글을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 입말과 문자의 공유가 세계사적으로 보면 늦었지만, 결코 뒤늦은 것은 아니다. 21세기에서 자의식의 발동은 싯달다시대, 소크라테스시대, 데카르트시대, 로베스삐에르 시대, 레닌과 마오 시대와 달리 사유하기가 전개되고 있다. 깨닫든 느끼지 못하던 이 달리 말하기 글쓰기는 젊은이들에게, 프로이트의 구강단계가 아니라 들뢰즈가 말하는 구강성의 활성화에 의해 확장되고 있다. 이 확장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3세대가 거의 다른 입말을 쓸 정도 이지만, 어제-이제-아제의 지속성은 강도(내공)를 더해가고 있다.

실로 우리나라에서 자의식의 첫 발동인 훈민정음 창제에서 거의 600여 년을 침잠하여 흐르고 있었다가 솟아나고 있다. 어느 국가 제국에게도 시달리지 않을 자유의 쟁취로서 혁명도 분출할 것이다. 인민의 혁명 대 사적 소유자의 쿠데타, 당신은 위상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에 속하지 않고 별종으로 세계를 누비려고 한다고? 이 이항대립을 타파해야 걸어서 개마고원과 만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남쪽의 섬 같은 삶은 쿠데타 세력에 동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일본 제국의 개가 되고 미국 제국의 피를 빨리는 짐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4:11, 57TMA) (5:36, 57T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8-반성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8-반성 개념

1)

앞에서 칸트는 판단형식이 그 자체로 가지는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그 의미는 구체적으로 도식을 통해 주어졌다. 칸트는 이런 판단형식을 마치 좌표축처럼 생각하면서 어떤 경험과 어떤 판단형식을 관계시켰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경험이 충분히 주어지기 전에는 어느 판단형식에 속할지를 가리기 힘들며, 판단형식을 결정하기 위해 충분한 경험은 무한히 지연되므로, 칸트의 인식론은 물 자체뿐만 아니라 심지어 현상에 대한 인식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우리의 인식에서 우리는 잘못된 인식에서 참된 인식으로, 현상의 표면적 인식에서 그 내부 본질에 대한 인식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헤겔은 칸트의 좌표축 개념을 넘어서서, 인식의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헤겔은 이점을 논리학에서 “내용의 자기 운동”이라는 말로 표현해 왔다. 그것은 하나의 판단형식이 그 스스로 다른 판단형식으로 이행한다는 의미이다.

누구나 어렵지 않게 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듯이 헤겔 역시 여기서 간단하게 생각했다. 판단형식이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면, 하나의 판단형식은 어떤 사태에 부합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만일 판단형식이 현재 주어진 사태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 판단형식은 변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 문제 되는 논의는 예를 들어 ‘철수가 죽었다’가 잘못이고 오히려 ‘영희가 죽었다’가 진리라고 말할 때처럼, 동일한 판단형식이 적용되는 구체적 내용 자체가 바뀌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판단형식 즉 범주 자체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철수가 죽었다’가 아니라 ‘누구나 죽는다’와 같은 판단으로의 변화이다. 이런 판단의 변화는 판단형식 즉 범주 자체의 변화를 동반한다. 즉 개별긍정 판단에서 일반긍정 판단으로의 변화이다.)

헤겔은 판단형식 즉 범주 자체의 변화 가능성을 반성 개념을 통해 개념화했다. 여기서 우리는 반성 개념에 관한 좀 복잡한 논의를 거쳐나가야 할 것 같다.

2)

철학사에서 반성 개념에 관한 논의는 칸트가 촉발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그는 지나가는 투로 또는 주변적 문제를 다루는 투로 이 반성 개념을 논했다. 이 개념 쌍은 칸트 순수이성 비판 2편 원칙의 분석론 끝에 대상을 현상체와 가상체로 구별하는 3장 끝에 부록으로 다루어졌다. 그는 이 부록에 “라이프니츠 반성 개념의 모호성‘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칸트가 여기서 다룬 반성 개념으로는 네 가지가 있다.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질료와 형식이다. 이 개념은 개념쌍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특징인데, 유사한 좌우나 선후, 명암과 같은 개념과 같이 비교에서는 나오는 비교개념이지만, 위의 네 자기 반성 개념은 어떤 특수한 맥락에서가 아니라 존재자 일반에 사용되는 개념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 개념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는 현상계를 다루는 선험적 분석론을 끝내고 물 자체를 다루는 선험적 변증론으로 이행하는 중에, 그러니까 분석론 2부 원칙론, 3장에서 현상체와 가상체를 구별하는 근거를 다루면서 그것에 덧붙여 이 반성 개념을 다루었다. 그래서 전체 논의 핵심은 반성 개념들을 현상체에 적용하느냐, 가상체 즉 물자체에 적용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다.

여기서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동일성과 차이의 개념에만 집중한다면, 칸트는 위와 같이 현상체와 가상체를 구분한다는 관점에서 라이프니츠를 동일률을 비판한다. 라이프니츠는 ‘두 사물의 모든 성질이 동일하다면 동일한 사물이다’라고 말한다. 즉 HaGa.. & HbGb..이면 a=b라는 것이다. 칸트는 그렇다면 물방울이나 나뭇잎은 서로 동일한 성질을 지니니, 하나의 물방울이나 나뭇잎만이 있다는 말인가 하면서 반론을 전개한다.

실제로 라이프니츠의 주장과 달리 다수의 물방울이나 나뭇잎이 존재하는 까닭을 생각해 보면,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개념을 현상체에 적용하는 것과 가상체에 적용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두 물방울에 관해서, 우리는 그 두 낱[개]의 내적 차이(질과 양)를 죄다 도외시한다 할 수 있더라도, 그 두 낱[개]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보이는 사실은 두 물방울을 수적으로 다른 것으로 간주하기에 족[충분]하다”(순수이성비판, A319, 최재희 역, 박영사, 개정판, 1883, 248쪽)

즉 물방울의 성질은 동일하더라도 장소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공간은 직관 표상에 속하고 성질은 지성의 표상에 속한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장소조차도 성질처럼 지성에 속한다고 보면서, 여기에 동일률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지성 표상과 직관 표상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런 구분에 따르면 성질 즉 본질의 동일성과 상관없이 직관에서의 차이가 즉 현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3)

그러므로 칸트는 논리적 비교와 선험적 반성을 구분한다.

“개념들을 논리적으로 비교하는 일은 개념들의 객체가 어디에 속하느냐 즉 가상체로서 순수 오성에 속하느냐 혹은 현상체로서 감성에 속하느냐 하는 것을 돌보지 않고 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을 우리가 대상에 적용하려 하면, 그런 개념이 어느 인식능력의 대상일 것인가, 순수오성[지성]의 대상일 것인가 혹은 감성의 대상일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선험적 반성이 필요하다.”(순수이성비판, A 325, 최재희 역, 249쪽)

칸트는 여기서 논리적 비교를 선험적 반성과 구분한다. 논리적 비교 이전에 선험적 반성이 필요한데, 그것은 비교의 대상을 직관의 차원(시공간성, 현존)에서 볼 것인지 아니면 지성(성질, 본질)의 차원에서 볼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위의 예를 들자면 물방울의 성질을 비교할 것인지 아니면 그 현존을 비교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선험적 반성이 없다면, 반성 개념에서 모호성이 출현한다. 그것이 라이프니츠의 동일률이 일견 옳은 듯 보이지만, 우리의 현실적 경험과 대립하는 이율 배반에 빠지는 이유라는 것이다.

“이런 반성이 없고 보면, 나는 개념을 자못 불확실하게 사용하는 것이 되고, 비판적 이성이 승인할 수 없는 사이비 종합적 원칙이 발생한다. 이런 원칙은 선험적인 모호성에 기본하고 있다. 즉 순수 오성의 대상을 현상과 뒤섞는 데에 있다.”(순수이성비판, A 325, 최재희 역, 249쪽)

칸트의 논의는 여기서 그치고 말았다. 그는 위의 네 가지 반성 개념을 가지고 논의했지만, 사실 그는 판단형식으로서 범주를 적용하는 문제를 다루었을 뿐이고, 반성 개념 자체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하지 않았다.

칸트는 선험적 반성론에서는 위에 제시된 네 가지 반성 개념을 단순히 ‘비교개념’이라고만 보았다. 이 비교라는 개념은 반성 개념을 설명하지 못한다. 비교되는 것은 서로 동일성과 차이가 규정된다는 것이니,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반성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성 개념은 비교로부터 설명되지 않으며, 오히려 비교는 반성 개념을 전제로 할 뿐이다.

사실 철학사 전체에서 반성 개념에 대한 분석은 결여되었다. 반성 개념은 로크에 이르러 내적 직관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즉 사물의 성질을 경험하는 것이 외적 직관이라면, 내면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 내적 직관, 즉 반성이라 한다.

로크에서 반성은 더 고차적인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다. 즉 내적 관념을 다시 관찰하는 것이다. 합리론 철학에서 반성은 이런 고차적 반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니, 이것이 의식에 대한 의식 즉 자기의식이라는 개념으로 발전된다.

내적 관찰이든 더 고차적 자기의식이든 반성은 직관적이라고 규정되면서, 외적 직관과 동일한 유형으로 환원되었을 뿐, 반성이 지닌 독자적인 의미는 상실되었다.

4)

칸트에 이르면 반성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에 이르러 구성판단과 반성판단을 구분한다. 구성판단은 추상적 범주를 구체적 경험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식론적 판단에 속한다. 반면 반성판단은 개별적 경험을 일반적인 개념에 귀속시키는 것인데, 이는 미적 판단이 지닌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한다. 즉 예를 들어 어떤 다양한 자연의 현상을 자연의 합목적성이라는 통일적 원리에 귀속시킬 때, 이것은 반성판단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신 우연적인 것으로서 인식하는 하나의 결합에 있어서의 이 법칙적 통일은, 객체의 합목적성으로 표상되기 때문에, 가능적 경험적 법칙 아래 있는 사물들에 관해서는 판단력은 단지 반성적이요”(판단력 비판, 이석윤 역, 박영사, 재판, 2001, 27쪽)

여기서 반성판단은 일반에서 개별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개별에서 일반으로 올라가는 과정이며, 이 과정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며, 우연성을 포함한다. 이는 지성(오성)의 작업이라기보다는 상상력의 작업이다.

칸트가 이를 반성이라고 한 것은 반성(reflexion: 굴절)이라는 말 자체에 충실한 표현으로 보인다. 여기서 개별에 대해 일반이 근거로 작용하므로, 근거에서 나온 것으로부터 다시 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즉 굴절, 반사라고 하겠다.

칸트가 앞에서 선험적 반성이라고 규정했을 때 그것은 어떤 대상을 어떤 차원에 귀속시키는가 하는 문제였으니, 개별에서 보편으로 올라가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칸트는 반성 개념을 굴절, 반사라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반성 개념을 이해하는 데서 중요한 단서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함축된 의미를 더 분석하지는 않았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제시한 반성 개념의 단서를 발전시켜 위의 네 가지 개념을 반성 개념으로 규정한 당사자는 곧 헤겔이었다.

5)

헤겔에서 반성이란 곧 어떤 것이 자기에 대립하는 타자를 통해 규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좌가 좌인 이유는 우에 대해 대립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우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아버지인 것은 아버지가 지닌 나이 때문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대립물인 아이에 대해서 아버지이며, 아이가 없다면 그는 아버지도 아닐 것이다. 밝은 것은 어두운 것에 대해서 밝으며, 어두운 것은 밝은 것에 대해서 어둡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것은 차이에 대해 동일하며, 차이가 없다면 동일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무차별한 존재들이 있다. 학교, 수3, 코끼리는 서로 무차별하며 그러기에 그들 사이에 어떤 동일성도 발견하기 어렵다. 그것은 질료나 형식도 마찬가지다. 질료는 그 형식의 질료이며, 형식은 그 질료의 형식이다.

어떤 것이 자신에 대립하는 타자에 대립해 규정된다면, 그 자신의 규정 속에 이미 타자의 규정을 포함한다. 타자는 이미 그 자신의 규정을 포함하고 있으니, 자기 자신의 규정은 자기 자신의 부정인 타자를 다시 부정하면서 규정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의 규정은 독자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반성된 것, 되돌아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반성 규정에는 부정성, 그것도 이중 부정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부정하면 타자가 되지만, 자기 속에 이미 타자가 들어 있으니 자기의 부정은 곧 자기의 타자의 부정이며, 그러므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렇게 반성 규정 속에는 무한한 순환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은 반성 개념은 일정한 틀을 전제로 한다. 그 틀 속에서 어떤 것과 그 타자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으며, 그런 대립은 배타적인 통일을 형성한다. 즉 X=P or -P이다. 이 배타적 통일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들의 관계를 구조주의는 변별적 차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반성 개념은 구조주의적 사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알튀세는 마르크스의 철학을 헤겔적 논리로 이해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헤겔적 총체성과 자신의 구조적 총체성 개념을 구분했는데, 헤겔의 반성 개념과 구조주의의 변별적 차이가 같은 의미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기절초풍하지 않았을까?

플라톤의 <국가> 강해(6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4)

 

B.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c)

4. 철학자 왕정과 그것의 실현 가능성(497a-502c)

 

*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비난은 앞서 살핀 바대로 그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소피스트들과 다중이 지배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적, 교육적 환경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정은 가짜 철학자들을 활개 치게 만들어 철학에 대한 비난을 더욱 심화시켰고 소수의 철학자들은 현실 정치를 등지고 스스로 고고한 삶을 영위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자의 삶은 철학자로서 최대의 것을 성취하는 삶이 아니다. 철학자에게 최대의 것은 그에게 맞는 정치체제를 만나 그 자신도 더 성장하고 나라도 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제 대화의 주제는 과연 철학자에게 맞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무엇인가로 자연스럽게 옮겨진다.

 

[497a-502c]

1) 우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런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오늘날의 정치체제들 중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497a) 이에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들 중 지혜를 사랑하는 자연적 성향φύσις에 걸맞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그것들 안에서는 그러한 성향의 부류가 힘을 유지하기는커녕 이질적인 성품 ἦθος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그 체제가 다름 아닌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해가며 수립했던 나라일 것이라 생각한다.(497b)

2) 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 즉 ‘정치체제의 원리λόγος를 이해하고 있는 부류 하나가 나라 안에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만 빼고 모든 점에서 바로 그 나라라고 말한다.(497c) 그런데 그때는 제기된 반론들 때문에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렵다’τὰ καλὰ τῷ ὄντι χαλεπά는 말도 있듯이 비록 어렵더라도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을 대해야 파멸을 피할 수 있을까”에 답하려 한다고 말한다.(497d)

3) 오늘날에는 철학 자질이 있는 청소년들이 철학 활동에서 떠나버리는 바람에 어른이 되어서 철학적 논의λόγος를 접해도 그것을 부차적인πάρεργος 것으로 여겨 결국 노년에 이르면 소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철학의 불꽃이 꺼져버린다.(497e-498a) 그러므로 나라가 제대로 철학을 대하고 그것을 통해 나라의 파멸을 피하려면 민주정의 현실과 정반대로 어렸을 때부터 교육과 지혜 사랑을 접하게 하여 철학에 봉사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영혼이 완성되기τελεοῦσθα 시작하는 시기에 영혼의 단련ἐπιτείνειν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498b) 그리고 기력이 쇠해 정치와 군사 업무에서 벗어나면 그들은 비로소 세상일에서 떠나ἄφετος 철학의 들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후 저승에서 살아온 삶에 어울리는 운명을 받게 된다.(498c)

4)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열의에 탄복하지만 트라쉬마코스를 위시해서 대다수 사람들이 반발하며 어떻게도 설득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설득할 때까지 혹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 자신의 논의를 접하고 그때의 삶에 뭔가 도움이 될 때까지 그러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498d)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민주정 하에서 ‘인위적으로 서로 닮게 만들어진 표현들’ῥήματα ἐξεπίτηδες ἀλλήλοις ὡμοιωμένα에만 익숙해진 대중들이 설득되지 않는 까닭도 언급한다.(498e) 그들은 ‘말과 행동에서’ἔργῳ τε καὶ λόγῳ 완벽하게 덕ἀρετῇ과 닮은 사람이 권력을 갖는 것을 본 적이 없고(498e) ‘아름답고 자유로운’καλῶν τε καὶ ἐλευθέρων 논변을 충분히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 논변이란 앎을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진리τὸ ἀληθὲς를 추구하고 반대로 명성δόξα과 말다툼ἔρις만을 목표로 삼는 교언τὰ κομψά과 쟁론τὰ ἐριστικὰ들에는 안녕을 고하는 논변이다.(499a)

5) 소크라테스는 이같이 서두적 결의를 표한 후 마침내 “소수의 철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나라를 돌보며 나라에 봉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거나, 아니면 오늘날 권좌δυναστεία나 왕좌βασίλεια에 앉아 있는 자들의 자식들, 또는 그들 자신이 어떤 ‘신적인 영감’θεία ἐπιπνοία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랑ἔρος에 사로잡히기 전에는 나라도 정치체제도,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음”을 선언한다.(499b-c)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것이며 또 있게 될 것이며 무사 여신이 나라를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한, 비록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6)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대중들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499d)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를 향해 “대중들을 아주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라.μὴ πάνυ οὕτω τῶν πολλῶν κατηγόρει 그들을 이기려 들지 말고μὴ φιλονικῶν 그들의 마음을 가라 앉게 하고παραμυθούμενος 배움 사랑φιλομάθεια에 대한 그들의 편견διαβολή을 해소해 주면서(499e) 어떤 사람들이 철학자인지 그들의 자연적 성향과 활동을 규정해서 잘 알려 주면 그들은 분명 다른 의견δόξα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500a) 왜냐하면 시기심 없고ἄφθονος 온순한πρᾶος 사람이 사납지 않은 사람에게 사납게χαλεπῶς 구는 법도 없고 시기하지 않는 사람을 시기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사나운χαλεπός 경우란 소수에게나 있지 다수에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500a) 결국 대중들이 철학에 대해 사나운 태도를 갖는 까닭은, 부적절하게οὐ προσῆκον 철학에 뛰어들어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는 가짜 철학자들 때문이다.(500b)

7) 진정 철학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시기와 악의로 가득 차 있을 여유가 전혀 없다. 그들은 오로지 ‘있는 것’들τὰ ὄντα에 진정으로 생각이 향해 있어 ‘항상 동일하게κατὰ ταὐτὰ ἀεὶ 있는 것’들을 보고ὁρῶντας 그것들이 모두가 정의롭고 모두가 질서 있고κόσμῳ 이성에 맞는κατὰ λόγον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구경하고는θεωμένους, 그것들을 모방하고μιμεῖσθαί 그것들과 최대한 닮으려고ἀφομοιοῦσθα 하는 사람들이다.(500c) 그러므로 철학자는 신적이고 질서 있는 것과 어울려서, 비록 어디에나 비방이 널려 있기는 하지만 가능한 한도까지 신적이고 질서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철학자는 절제와 정의, 그리고 모든 대중적 덕δημοτικῆ ἀρετῆ을 구현하는 장인δημιουργός으로서 어떤 강제ἀνάγκη가 생겨서 이로 인해 그가 거기서 본ὁρᾷ 것을 가지고 단지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사람들의 성품 안에 집어넣도록 애쓸 수밖에 없게 된다.(500d)

8) 철학자에 관한 이러한 말들이 진실임을 대중οἱ πολλοὶ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결코 철학자들에게 사납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신적인 본παράδειγμα을 사용하는 화가διαγραφεύς들이 나라의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달리 어떻게 해도 나라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우리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500e) 그러나 철학자들이 사람들의 성품과 나라를 마치 화판처럼 취급해서 우선 그것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개인이든 나라든 깨끗한 상태에서 넘겨받거나 그들이 직접 깨끗하게 만들기 전에는 거기에 손을 대거나 법률을 써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것ὑπογράψασθα이다.(501a) 그들은 이를 완성해가면서 ‘양쪽을 반복적으로’πυκνά ἑκατέρωσε 살펴보며ἀποβλέποιεν 즉 한편으로 ‘본성상 정의로운 것, 아름다운 것, 절제 있는 것’과 그러한 모든 것들을 살펴보고, 다른 한편으로 다시 인간들 안에 있는 그런 것들을 살펴보면서 그 밑그림을 채워간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섞어서 이것들로부터 ‘인간 상’τὸ ἀνδρείκελον을 합성해낸다. 호메로스가 말한 ‘신의 모습을 한 것’ θεοειδές이자 ‘신을 닮은 것’θεοείκελον이란 바로 그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501b)

9)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들이 이처럼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밑그림을 그리는 화가ζώγραφος임을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사납게 굴었던 태도도 바뀌어 훨씬 온순해질 것이다.(501c) 그리고 그들은 철학자들이 ‘있는 것’τὸ ὄν과 진리 ἀληθεία를 상대로 사랑에 빠진 사람ἐραστής임을 철학자들의 자연적 성향 또한 그것에 알맞은 활동을 만났을 때, 다른 어떤 성향보다도 완벽하게 뛰어난 것이자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501d) 그래서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말로 꾸미고 있는 정치체제 또한 실제로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우리의 이야기에 대중들이 설득된 것πεπεισμένοι ἔστων으로 보면 어떨까 물은 후 그의 동의를 받아낸다.(501e)

10)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왕들과 권력자들의 자손들은 자연적 성향상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로 태어날 수 없다”, “그런 사람이 태어나면 필연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 말한다.(502a)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비록 왕들과 권력자들의 자손들이 구원받기σωθῆναι 어렵다는 데 동의하지만 모든 시대χρόνος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타락을 면하고 어디선가 통치자가 되어 우리가 설명했던 법과 활동들τὰ ἐπιτηδεύματα을 제정한다면, 시민πολίτης들이 그것을 기꺼이 이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분명 아니라고 말한다.(502b) 요컨대 가능하기만 하면 그것이 최선’βέλτιστα, εἴπερ δυνατά이다. 그리고 입법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실현된다면 그것들이 가장 좋은ἄριστα 것들이고, 비록 실현이 어렵긴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50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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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497d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렵다’ta kala tō onti chalepa :  오늘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속담으로 435c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 2) 497c ‘그때’, ‘한 가지’, ‘정치체제의 원리’ : 소크라테스가 오늘날의 현실 정치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절망을 피력하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정치체제가 그들 서로가 제2권 369a에서 제4권 445d에 이르기까지 ‘말로 수립한 나라’(logopolis)라고 여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만 빼고 다른 모든 점들에서 그 나라임에 동의를 표한다. 그 한 가지의 핵심은 ‘정치체제의 원리(logos)를 이해하고 있는 부류의 존재’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 부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말로 나라를 세우는 제4권까지는 철학자들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비난을 의식하여 그는 ‘통치자들(hoi archontes)’을 ‘철학자(philosophos)’로 명시하는 것을 피하고 ‘감독자(epistatēs)’(412a), ‘가장 훌륭한 사람들(hoi aristoi)’(412c),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ntaleis)’(414b)로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한 가지를 뺐다는 것은 내용적으로 그때 통치자들의 임명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철학자들임을 밝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소크라테스도 실토하고 있듯이(502d) 만약 그때 그 점을 밝혔다면 논의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할 정도로 반감을 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제4권까지 ‘말로 수립하는 나라’에서도 통치자들이 철학자임을 암시하는 부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소크라테스도 503a에서 밝히고 있듯이 앞서 살핀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375a-412b),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412b-427c) 관련 부분과  그 후 제시된 통치자로서 철학자의 자질(484a-487a) 부분을 비교하면 양자가 일치하거나 어울리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특히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치체제의 원리(logos)가 기본적으로 나라에서건 혼에서건 ‘서로 다른 부분들의 조화의 원리’로서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과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부분도 발견된다. 이를테면 시가 교육을 다루는 402a를 보면 ‘제대로 시가 교육을 받은 자가 나중 커서 제대로 알아보는 준거’로서 ‘원리’(logos)(402a)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 원리가 철학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감독자’를 언급할 때도 그 감독자란 ‘완벽한 의미에서 가장 시가적이며 가장 조화로운 사람’(412a)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렇게 보면 여기서 말하는 ‘그때’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 명료하지는 않지만, 내용상으로는 제4권까지  ‘말로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할 때’로 보아도 어색할 것은 없다.

* <국가>의 전체 구도를 논의할 때 살폈듯이 소크라테스는 제4권까지 말로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한 후 이어서 부정의한 나라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그러나 제5권 서두에 대화자들이 처자공유 등의 문제에 대해 이의를 표명함에 따라 그 이의에 대한 논의가 제7권까지 이어지고 정작 부정의한 나라에 대해서는 제8권에 가서야 다루어진다. 이 점에서 보면 제5권에서 제7권까지는 일단 논의 순서상 일종의 일탈이다. 그러나 앞서 제5권 서두 내용을 살필 때 언급했듯이 이러한 논의의 일탈은 정작 플라톤이 가장 중요한 주제로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철학과 철학자들’ 그리고 ‘철학자 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국가> 서술 계획의 일환이다. 요컨대 대화자들의 이의 제기는 사정상 ‘그때’ 못 꺼낸 철학과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인 주제로 전환함과 동시에 그것을 통해 실질적인 이상국가로서 철학자 왕정을 다루기 위한 플라톤 나름의 주도면밀한 포석이었던 것이었다. <국가>에서 형식상 논의의 일탈로 보이는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실제로는 <국가>의 핵심이자 플라톤 철학의 백미로 평가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 3) 497d- 498a : 이제 주제는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을 대해야 파멸을 피할 수 있을까?”로 전환된다. 기존의 정치체제 특히 민주정에서는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최상의 존재로서 철학자들이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생존하기조차 힘들고 그 속에서 소수 살아남은 철학자들조차 현실을 등지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진정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제대로 평가받고 제대로 그에 적합한 활동을 최선으로 펼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민주정은 청년들의 철학적 자질들을 나날이 뒤떨어지게 하여 어른이 된 후 철학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그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 속에서 설사 소수의 철학자들이 살아남았더라도 그들에게서 철학의 불꽃이 지속해서 타오르기를 기대하기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민주정이 철학을 멀리하여 나라를 파멸에 이르게 하였다면 이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진정한 통치자로서 철학자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철학자 왕 정치체제가 들어서야 철학자가 가장 자신에 적합한 활동을 가장 잘 할 수 있으므로 나라를 파멸로부터 구해 모두가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 3) 498b-c : 흥미롭게도 이 부분은 철학자왕 체제에서 철학자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교육과 책무 전 과정을 아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와 관련한 연령 및 시기별 자세한 사항은 강해 45에서도 언급하였고 제7권 해당 부분에서도 살피겠지만 다시 한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수호자들의 양성을 위한 청소년기의 시가 및 체육 교육이 어려서부터 18세까지 필수적으로 이루어진 다음에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한 후 20세가 되면 그들 가운데 시험을 거쳐 수호자들이 선발된다.(537b-c)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변증술을 위한 예비 교육을 받고 30세가 되면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보다 훌륭한 수호자들이 임명된다.(537d) 그리고 그들은 35세까지 5년 동안 집중적으로 철학 교육을 받고 그 후 15년 동안 철학 연구는 물론 전쟁의 지휘 및 관직도 맡아가며 통치자가 되기 위한 실무를 수행한다.(540a) 그리고 마침내 연장자로서 50세가 되었을 때 두루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 ‘좋음 자체’(to aghaton auto),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보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본으로 삼아 여생 동안 번갈아 가며 나라와 개개인들 그리고 자신들을 다스린다.(540b) 그리고 직무에서 해방되면 여생을 철학으로 소일하다 사후 ‘축복받은 자들의 섬들’로 간다.(519c, 540b)

* 4) 498d ‘트라쉬마코스와 다른 이들을 설득할 때까지, 혹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서 이러한 논의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때의 삶에 도움이 될 뭔가를 해줄 수 있을 때까지 이러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네.’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플라톤이 철학과 정치의 결합을 얼마나 열망했는지 그리고 당대 지식인은 물론 대중들이 그 철학적 논변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플라톤이 얼마나 열의를 갖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설득의 시도는 사람들이 이생에서는 물론 저승에서건 다시 태어나서건 그때 그 주장이 도움이 되는 것이라 깨달을 때까지 결코 포기될 수도 멈춰질 수도 없다. 그 긴 시간을 아데이만토스가 ‘참 짧은 시간을 말씀하시네요.’(498d)라고 반어적으로 답하는 것은 냉소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사후까지 끌어들이고 이생의 기간을 그쯤이야 정도로 여기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태도에 대한 의구심과 놀라움의 표현이다. 제10권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소크라테스가 사후 영혼이 불멸하다면 이생의 시간들은 그저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자 글라우콘 또한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608c-d) 486a에서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와 관련하여 인간적 삶의 시간과 구분되는 ‘모든 시간’(pas chronos)이 언급되고 있다. 저승과 혼의 불멸과 관련한 논의는 제10권에 가서(608c-621d)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된다.

* 4) 498e ‘인위적으로 서로 닮게 만들어진 표현들’ : 이 말은 당대 이소크라테스(Isōkratēs)가 수사학을 가르치며 즐겨 쓴 표현들을 가리킨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소크라테스와 같은 부류의 수사학자들을 가짜 철학자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법정에서든 사적인 교류에서든 오로지 명성과 말다툼(eris)만을 목표로 교언과 쟁론(ta eristika)을 일삼는 자들이다. 그에 반해 진정한 철학자는 저절로 짜임새와 운이 맞는 표현을 사용하여 아름답고 자유로운 논변을 구사하고 말과 행동에서 덕과 같은 짜임새를 가지고 가능한 한도까지 완벽하게 덕과 닮은 사람이다.(499a)

* 5) 499b-c : 이 부분에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제기한다. 이 내용은 플라톤의 철학자 왕정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테제이자 플라톤 정치철학의 목표가 왜 철학과 정치 권력의 결합으로 운위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핵심 테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 <국가>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 내용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표현상 다소 차이도 있어 그 부분들 전문을 소개하면 각기 아래와 같다.

i) 우선 <국가>에서 플라톤은 앞서 대화자들의 이의에 따라 제기된 난관들에 직면하여(471c-474c) 처음으로 통치자가 왜 철학자이어야 하는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아래와 같이 피력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나라의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자들과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어느 한쪽으로만 향하고 있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 사랑하는 글라우콘, 나라들에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말로 설명해온 바로 그 정치체제가 자랄 수 있는 한도까지 자라나서 햇빛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473c-d)

ii) 그런 연후 플라톤은 이곳에서 가짜 철학자들의 주장에 휩싸여 있는 대중들에게 철학자 왕의 정당성을 다시 한번 설득하고 환기한다는 차원에서 그 내용을 다시 또 아래와 같이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쓸모없다고 불리는 이 소수의 철학자들을 운이 좋게도 어떤 강제가 에워싸서,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라를 돌보며 나라에 봉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거나, 아니면 오늘날 권좌나 왕좌에 앉아 있는 자들의 자식들, 또는 그들 자신이 어떤 ‘신적인 영감’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랑ἔρος에 사로잡히기 전에는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499b-c)

iii)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플라톤은 그러한 철학자 왕정 체제의 실현이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님을 언급하면서 이 내용을 아래와 같이 또다시 꺼내 든다.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말로 꾸미고 있는 정치체제 또한 실제로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다.”(501e)

iv) 그런데 이 내용은 그의 <편지들> 가운데 일흔 살이 넘어 쓴 것으로 알려진 ‘일곱 번째 편지’에도 나온다. “올바르고 진실 되게 철학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아니면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 모종의 신적 도움을 받아 진정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질 않을 것이다.”(<편지들> 326b).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곳에서 플라톤은 그 생각을 이미 자신의 첫 번째 시칠리아 방문 당시부터 그러니까 그의 나이 38세 전후쯤 지니고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것은 플라톤 정치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철학자 왕정 사상이 중기 대화편인 <국가>에 와서야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초기 대화편을 집필하면서부터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국가>에서 나라를 건설하는 철학자의 모습(500c)과 플라톤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습(29a)이 활동 구도에서 전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 자신 <국가>에서 펼친 철학자왕 사상을 말년에 가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론적으로 더 확고하게 뒷받침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펼친 플라톤의 정치적 이상은 젊은 시절 이래 이상으로서 일관된 지위와 의미를 갖고 플라톤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것이다. 이점에서도 말년의 정치철학 저작 <법률>을 플라톤 신념의 변화에 따른 <국가>의 현실 수정판으로 여기는 일부 견해들은 잘못된 것이다. 누구라도 이상과 현실적 대안을 동시에 함께 가질 수 있듯이 플라톤 역시 <국가>의 이상은 최선의 이상 그대로, 최선의 현실적 대안으로서 <법률>의 세부 입법은 그 나름의 최선 그대로 그의 정치철학 전체를 구성하는 두 축으로 함께 병립해 있는 것이다.

* 7) 499e : 소크라테스가 철학과 정치의 결합과 관련하여 대중을 설득하는 데 있어 이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애 때까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겠다(498d)고 말하고 있는 것은 철학과 정치의 결합에 관한 논변이 플라톤에게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그 논변의 진실을 설득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지난한 것임을 함께 보여준다. 사실 설득의 기한에 사후의 시간까지 포함될 정도면 사실 이생에서 그것을 설득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대중들이 이런 이야기에 설득되지 않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토로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도 철학과 정치의 결합 가능성과 관련한 그의 이야기에 대중들 역시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499d) 그러나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대중들을 아주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바로 반박한다.(499e)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바로 앞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대중에 대한 태도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그의 태도는 대중에 관해 이어지는 그의 말을 통해 이내 해소되는데 이 부분은 플라톤 대중관의 진면목을 들여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대중들이 설득 불가능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대중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가 빚어낸 선동정치와 소피스트들이 이끄는 그릇된 교육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로 민주정 체제 아래에서는 철학에 가장 부적합한 자들이 철학에 뛰어들어 명성과 말다툼만을 목표로 교언과 쟁론을 일삼는 행태가 일상에 넘쳐난다. 게다가 대중들은 말과 행동에서 가능한 한도까지 완벽하게 덕과 닮은 사람이 나라에서 권력을 갖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으므로 철학과 정치의 결합, 즉 철학자가 통치를 할 수 있기 전까지는 나라도 정치체제도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주장이 전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것이며 또 있게 될 것(499d)이라는 확신으로 대중들이 그러한 정치체제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설득해간다면 그들의 생각 또한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500a)

* 이곳에서 그려지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플라톤의 대중관, 즉 대중에 대한 폄하와 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대중이 사납고 시기심이 많은 것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민주정 아래에서 가짜 철학자들이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지 원래부터 본성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굳이 본성을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사나운 경우란 소수에게나 있지 다수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500a)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대중들의 생각과 태도가 본성상 정해진 것이 아니라 대중들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살핀 ‘말로 수립한 나라’ 즉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들여다보면 그 나라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산자 계급, 이른바 대중들은 절대 사납지 않고 다른 계층에 대한 시기심도 없다. 여기에서도(500d)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나 철학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결코 그들이 사나워지지 않고 오히려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500a, d)

* 우리가 제4권에서 살폈듯이 말로 세운 이상국가의 생산자 계급은 다른 계층과 더불어 절제라는 덕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다른 계층과 갈등 없이 나라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내용에 비추어 표현하자면 요컨대 대중들은 훌륭한 정치체제 아래에서는 철학자들의 말에 충분히 귀를 기울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철학자들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논변을 통해 그들을 ‘설득’(peithos)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설득의 과정에는 어떠한 ‘강제’(anangchē)나 ‘폭력’(bia)도 개입되지 않는다. 설사 철학자의 설득이 성공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강제는커녕 하물며 이생을 넘어 그러한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 그들의 말의 진실을 깨달을 때까지 순전히 설득의 방식으로만 일관되게 이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의 대중관은 민주정 통치 아래 선동 정치가에 휩쓸려 군중심리에 빠진 상태의 대중에 대한 플라톤의 혹독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일 뿐 결코 대중 일반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시민으로서 절제와 대중적 덕을 갖춘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 완성을 기약하기 힘든 정치체제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공동체 일원으로서 대중의 가능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그가 견지하고 있는 정치 원리에 기반하여 있는 것으로서 결코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정치체제도 법을 갖춘 정치체제인 한에서는 강제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통치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이곳에서도(499b, 500d) ‘강제’란 말이 나온다. 그러나 그 말도 어떻게든 정무를 피해 철학에만 머물러 있으려는 철학자들에 대한 강제로 언급된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와 대화자들이 수립하는 입법은 강제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나라건 개인이건 설득을 통한 내적 조화의 가능성을 보다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된 것이다. 실제로 훗날 <법률>에서 표명된 구체적인 법률들조차 징벌과 강제보다는 교육과 교정에 그 입법의 근본 취지가 자리하고 있다.

* 7) 500d ‘대중적 덕’dēmotikē aretē :  ‘철학과 지성 없이도 습관과 단련에 의해 생길 수 있는 시민적 덕'(<파이돈> 82a-b)을 의미한다.  제4권 430c에 나오는 ‘시민적 용기’도 이러한 덕에 해당한다.

* 8) 500c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들을 보고’, 500d ‘거기서 본ὁρᾷ 것을 가지고’ : 이 부분은 철학자들이 가짜 철학자들과 달리 어떻게 진정으로 ‘있는 것들’에 생각이 향해 있고 그에 따라 나라에서건 개인에서건 얼마나 철학자로서 통치자로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들은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이 모두가 정의롭고 모두가 질서 있고 이성에 맞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그것들을 모방하고 그것들과 최대한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자 모든 ‘대중적 덕’을 구현하는 장인(dēmiourgos)로서 거기서 본 것을 자기 자신과 사람들의 성품 안에 집어넣도록 애쓰는 사람들이다.(500d) 이들은 마치 신적인 본(paradeigma)을 사용하는 화가처럼 사람들의 성품과 나라를 마치 화판처럼 취급해서 우선 그것들을 깨끗하게 만든 후 본과 그림 양쪽을 반복적으로 ‘살펴보며’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린다.(501a) 이러한 철학자들의 모습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에서 언급된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플라톤 말년의 저작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플라톤이 여기서 치열할 정도의 열의를 갖고 그려내는 진정한 철학자의 모습들은 나라 차원에서건 개인 차원에서건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신적인 것’, ‘신을 닮은 것’으로 만들어가려는 플라톤 자신의 내적 의지와 열망이 얼마나 지대하고 진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누차 언급했지만, 플라톤 철학은 위계상 ‘있는 것들’이 최상위에 있지만 진정 플라톤 자신이 정작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은 그 ‘있는 것들’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니라 그 ‘있는 것들’이 어떻게 현실의 삶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가, 즉 ‘지상에 있는 것들’의 구제와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었다. 앞으로 살피게 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514a-521b)에서 철학자가 동굴에서 빠져 나와 참된 세계와 그것을 비추는 태양을 보았음에도 다시 동굴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 이곳에서 철학자왕의 임무는 ‘있는 것들’을 보고 나라와 개인에서 그것과 최대한 닮은 것을 만들어낸다는 원칙과 원리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지만, 처자공유를 비롯한 수호자 집단의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부분을 되돌아보면(464b–466d) 우리는 완벽한 수호자로서 철학자왕이 지향하는 핵심가치와 임무가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2,500여 년 전 제시된 통치자의 임무와 지침들임에도 현금의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 윤석열의 행태와 비교해 보면 그가 얼마나 뻔뻔하고 무도한 자인지,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대중이 기득권자들, 곡학아세를 일삼는 자들에 휘둘려 통치자를 잘못 뽑으면 얼마나 참담할 정도로 나라가 도탄에 빠트리는지 뼈저리게 통감할 수 있다. 그러한 견지에서 그것을 다시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입법의 목표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 하나가 아니라 여러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2) 나라를 결속시켜주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시민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기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3) 통치자들은 민중을 구원하고 지키는 조력자이고 민중은 통치자들에게 보수를 주고 부양하는 자로서 서로를 똑같이 시민들로 불러야 한다.

4) 통치자들은 서로 형제자매, 부모와 자식 등 친족으로 부르고 서로를 공경하고 봉양하며 서로에 대해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해야 한다.

5) 수호자들은 집과 토지, 자식과 배우자 등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6) 통치자들은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모든 영역에서 시민들과 반목함이 없이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 10) 502c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 소크라테스는 가짜 철학자에 대비되는 진정한 철학자 특히 진정한 통치자로서 철학자 왕에 대한 논의와 그러한 논의의 설득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그 철학자 왕정 체제 즉 ‘가장 아름다운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를 다시 꺼내어 든다. 이 철학자 왕정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는 사실 앞서 세 번째 파도로서 제기된 그때까지 말로 수립한 이상국가의 가능성을 다루면서 함께 다루었기 때문에(강해 56 참고) 여기서는 그 내용을 간략한 요약 선에서 그치기로 한다.

*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플라톤의 답변을 요약하면 1) 말로 수립한 이상국가(logopolis)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2) 그러나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행위를 통해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3) 그와 같이 본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권좌에 있는 자가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4) 결국 이상 국가의 가능성은 철학자왕의 존재 가능성으로 귀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자왕의 존재 가능성은 이후에 제시될 교육과정이 제도화되는 한 ‘불가능하지 않다’. 요컨대 어렵기는 하지만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타락을 면하고 어디선가 통치자가 되어 우리가 설명했던 법과 활동들을 제정한다면, 시민들이 그것을 기꺼이 이행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상국가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502b)

*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이 가느다란 가능성에 기대어 플라톤 자신 이상국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구현하려 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당연히 그는 자신이 그린 이상국가를 이상적 목표로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 자신 불가능에 가까운 꿈에만 매달리는 몽상가가 아닌 한, 그것에 최대한 가까운 현실적인 대안을 병행하여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앞서도 누차 언급했듯이 어떤 이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상 국가가 본(本)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가 말년에 가서 그러한 가능성이 결국 무망함을 깨닫고 <국가>의 주장을 포기하고 <법률>에서 최선의 현실 국가론을 새로 구상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포기했다면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의 의도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상국가가 본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주장은 <국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상국가는 현실 통치자가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주어진 본일 뿐이다. 플라톤이 이곳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철학자 왕정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라도 기대하고 제도화할 만할 정도로 쉽게 출현하는 것도 아니다. 플라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에게 이상으로서 <국가>와 현실적 대안으로서 <법률>이 함께 병립하는 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플라톤은 우선 <국가>에서 가장 최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장차 만들어질 실물의 본이 될 수 있는 이상적 목표와 조건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본을 닮은 최선의 나라로 그가 도달한 것이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527c) 즉 철학과 권력의 결합으로서 철학자 왕정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상적 철학자 왕정의 원리를 최대한 현실적 조건에 부합하게 적용하여 관철한 것이 <법률>이다. 이렇게 보면 <법률>은 <국가>의 이상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이상이자 궁극적 지향이라는 깨달음과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세워진 실질적 대안인 것이다. 비록 <법률>에서는 철학자 왕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국가>와 <법률>의 나라 모두 하나같이 철학과의 결합, 철학자들의 통치라는 기본 원리 위에 서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법률>에서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체득한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탐문을 토대로 <국가>의 입법 취지에 따라 나라를 실제 건설하는 형식으로 구체적인 법률들이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법률>은 이렇게 이상과 현실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것의 연관을 순차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다루고자 한 플라톤의 평생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플라톤 정치철학의 위대한 두 축이다.

* 이제 철학자 왕정의 구현을 위한 다음 과정은 그 철학자를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즉 철학자의 교육과정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끝-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최상의 배움 : 좋음의 이데아(502c-506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