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16-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이중적 길[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6-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이중적 길

1)

과연 정신현상학의 길과 논리학의 길이 이렇게 이중적인 것인지, 헤겔의 말을 실제로 들어보자. 우선 학문 또는 논리학의 길을 살펴보자.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서문에서 학문의 길을 설명한다. 이 학문 가운데 형식적인 학문이 곧 논리학이니(실재적인 학문은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이다), 이는 곧 논리학의 길을 말할 것이다. 여기서 학문의 길은 개념이 ‘자기를 타자화’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두 가지 운동으로 서술된다.

“존재자의 운동이란 한편으로는 자신을 타자화하면서 그 자신 속에 내재하는 내용으로 되며 또 다른 편에서는 그와 같이 전개된 것, 또는 그의[그렇게 전개된] 현존을 자기 내로 복귀하게 하며”(정신현상학, 38쪽)

‘자신의 타자화’는 자기를 규정하여 구체적 술어가 출현하는 과정이며 ‘자기 내 복귀’는 개별 주어의 근거가 되는 일반적 술어가 출현하는 과정이다.

‘자기를 타자화’하는 운동과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은 교대로 일어나는 운동이라든가, 서로 독립하는 운동으로 파악하면 안 된다. 오히려 자기를 ‘타자화하는 운동’이 곧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논리학의 길이 이중적이라는 사실은 헤겔이 논리학의 시원을 다루는 데서도 동시에 등장한다. 앞에서 논리학의 길이 하강하는 길, 자기를 규정하며, 자기를 타자화하는 길이라는 것을 설명한 적이 있다.

“시원을 이루는 것에서부터 나가는 진행 과정은 시원을 이루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서만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논리학2판, 48쪽)

그러나 동시에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철학(학문을 말한다, 그중 형식적 학문이 논리학이다)에서 앞으로 나간다는 것은 오히려 뒤로 되돌아간다는 것이고 근거를 찾는 것이다.”(논리학2판, 57쪽)

여기서 헤겔은 논리학이 타자화에 못지않게 일반적인 근거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논리학의 길도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자기를 구체화, 타자화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기를 일반화하며, 근거로 복귀한다.

2)

그렇다면 정신현상학의 길은 어떠한가? 이미 앞에서 언급했지만,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길을 의식경험의 길이라고 하면서 이를 소개한 다음 마침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미 인용했지만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이상과 같이 의식은 자기의 진정한 실존을 향하여 끊임없이 육박하면서 최종적 지점에 도달한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이 지점에서 마침내 의식의 현상은 그 본질과 동일하게 되며, 이로써 의식에 관한 서술은 또한 정신에 관한 고유한 학문이 성립하는 바로 그 지점과 합일된다.”(정신현상학, 61-.62쪽)

즉 의식은 점차 자신을 확장하여, 대상과 합일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정신현상학은 대상과 대립하는 직접지에서 나아가 마침내 의식과 대상의 통일인 순수지에 이른다. 이 과정은 곧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정신현상학의 길은 자기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타자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정신현상학의 출발점을 이루는 직접지와 그 최종적 도달점인 순수지를 서로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직접지란 감각적 확신이며, 여기서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의식과 대상의 구분조차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니, 가장 추상적인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의 운동이 출발하는 지점인 감각적 확신 장의 서두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감각적 확신은 가장 참다운 인식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직 대상으로부터 어떤 부분도 제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대상의 전적으로 완전한 모습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감각적 확신은 가장 추상적이며 또한 가장 빈곤한 진리임을 자처한다. 감각적 확신은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서 다만 ‘그것은 있다’라고만 말하니 말이다.”(정신현상학, 63쪽)

반면 순수지는 그 속에 포함된 모든 계기들을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상호 필연적 연관을 맺는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절대지를 그려내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의 운동이 전개하는 계기들은 이런 운동 속에서 더 이상 의식에 나타나는 어떤 특정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으며 오히려 의식이 지녔던 [인식과 대상으로의] 구별은 자아의 내부로 복귀함으로써 이들 계기들은 특정한 개념으로서 나타나고 또한 이런 개념이 자기 자체 내에 근거를 둔 채로 전개하는 유기적 운동으로서 나타날 뿐이다.”(정신현상학, 432쪽)

그러므로 직접지에서 순수지로 나가는 과정은 추상적인 전체가 점차 구체적으로 규정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직접적인 것으로부터의 일어나는 그와 같은 최초의 반성이란 곧 주체가 그 자신의 실체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을 의미하며, 다시 말하면 개념이 스스로를 이원화하는 가운데 순수한 나가 자체 내로 복귀하고 생성하는 것을 의미한다.”(정신현상학, 431쪽)

3)

이상에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이 판단형식이 이행하는 길을 바탕에 깔고 있으며, 이 길은 이중적이어서, 정신현상학이나 논리학도 이중적인 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다만 정신현상학이라는 책과 논리학이란 책은 그 서술의 목표가 다른 것이므로 각자가 포함한 두 가지 길 가운데 어느 길이 우선적으로 표면에 드러나는가는 달라진다.

정신현상학은 의식이 대상을 매개로 발전하는 과정을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여기서는 개별성에서 일반적 근거에로 복귀하는 과정이 자기를 규정하는 타자화의 운동에 우선한다.

반면 형식적 학문에 속하는 논리학의 경우, 자기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타자화의 길이, 근거로 복귀하는 운동에 우선하여 표면에 드러난다.

각자 이런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대립하지만, 그러나 그 이면에 각기 자신의 표면과 대립하는 운동을 포함하고 있으니, 여기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대립과 평행이라는 복합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나게 된 것이다.

4)

이상에서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전개 과정에 관한 설명을 마쳤다. 양자는 이중적인 길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나, 그럼에도 각자 우선하는 길을 갖는다는 것이다.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진행 과정을 도표화하면, 지금까지 논의가 한 눈에 드러날 것이다.

정신현상학 논리학
인식의 시간적인 운동 범주의 자기 전개(순수지 내부에서 운동)
표면 운동 개별에서 일반으로(근거로의 복귀) 자기의 타자화(추상에서 구체)
이면 운동 의식과 대상의 대립에서 통일로, 확신에서 진리로(구체화) 존재에서 개념으로:근거로의 복귀

여기서 서로 교차하고 있는 두 항 즉 ‘추상에서 구체화’와 ‘확신에서 진리로’가 서로 일치하며, 또한 ‘개별에서 일반으로’가 ‘존재에서 개념으로’와 일치한다. 결국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마치 메비우스 띠처럼 서로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같은 평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현상학은 시간의 평면에 있으며, 논리학은 개념의 평면에 놓여 있고, 양자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서로 투영되고 있는 관계에 있다.

이제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시원 문제로 들어가 보자. 정신현상학은 인식의 역사적 발전을 다루므로, 그 출발점은 가장 단순한 인식인 감각적 확신이다. 이 감각적 확신은 가장 개별적이어서 인식이 사물이 마치 두 개의 구처럼 부딪히는 접점처럼 가장 개별적인 지점에서 일어난 인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감각적 확신은 가장 추상적인 인식이어서 사실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인식이다. 그 속에 이미 모든 것이 불명료한 상태로 포함된 인식이다.

직접지는 인식의 전개 과정에 비추어 본다면, 가장 먼저인 직접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그런 직접적인 인식이 출현하기까지 자연은 오랜 기간 발전해야 했다. 물체의 세계를 거쳐, 화학적인 세계, 그리고 생물의 세계가 전개된 끝에 마침내 출현한 인간 의식의 세계이니, 그런 점에서는 이미 매개된 것이다.

5)

이제 논리학의 시원을 보자. 논리학의 바탕은 곧 순수지다. 순수지에 도달하기 위해 정신이 현상학은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쳐 나왔다는 점에서 그것은 매개된 것이다.

앞으로 논리학은 이 순수지의 바탕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순수지의 바탕에서 움직이면서도 논리학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은 모든 논리적 전개의 근거가 되는 가장 일반적인 순수지 즉 가장 추상적인 범주가 된다. 그보다 더 근거가 되는 것은 없는 최초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직접적인 것이다. 이 가장 추상적인 범주가 곧 존재이다.

가장 추상적인 존재 범주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가장 일반적이지만. 그러나 모든 존재자의 가장 피상적인 측면에만 적용되는 범주이다. 그런 존재자들이 갖는 구체적 관계는 조금도 다룰 수 없으니, 단순히 ‘있음’에서 ‘없음’의 관계만 다룰 뿐이다.

앞에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전개 과정에 관해 도표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 다시 한번 시원의 문제에 관해서도 도표의 도움을 받아 보자.

정신현상학 논리학
시원 감각적 확신 존재
표면 가장 개별적 인식 가장 추상적 빈약한 인식
이면 가장 구체적인 인식 모든 존재자에 적용된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15-판단형식이 이행하는 이중적인 길[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15-판단형식이 이행하는 이중적인 길

1)

앞에서 우리는 논리학의 구분과 관련하여, 이를 자연의 일반 원리로 이해하려는 엥겔스의 시도가 부딪힌 한계를 소개했다. 이제 다시 우리에게 더 긴요한 문제인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전개 구조에는 칸트가 제시한 12개의 판단형식, 범주가 깔려 있으니, 어떻게 보면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서로 평행한다고 하겠다. 이런 평행 관계를 도표화 하자면 다음과 같다.

논리학

정신현상학

질적

긍정판단

현존

감각

부정판단

유한성

지각

무한판단

무한성

지성

양적

단칭판단

순수양

자기의식

특칭판단

양적 무한성

자기의식의 자유

전칭판단

척도

불행한 의식

관계

정언판단

본질

관찰하는 이성

가언판단

현상

자기 자신에 의한 이성적 자기의식의 실현

선언판단

현실

즉자 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성

양상

우연판단

절대자

인륜성

개연판단

현실

자기 소외된 정신

필연판단

절대적 관계

자기를 확신하는 정신

(이상의 도표가 엉성하다는 것은 쉽게 눈에 뜨인다. 논리학에서는 주관논리학이 빠져 있고 정신현상학에서는 절대정신 부분이 빠져 있다. 그 이유는 좀 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생략하려 한다. 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12개 판단형식이 논리학이나 정신현상학의 기본 골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사실만을 말하고자 한다.)

이런 평행을 설명하면서 필자는 투영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다. 즉 역사의 시간적 평면에서 일어난 이행이 사유의 논리 평면에 투영되면, 그것이 곧 논리학이고 거꾸로 논리의 전개 과정을 역사의 평면에 다시 투영하면, 그것이 곧 정신현상학이라고 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역사의 논리적 투영을 ‘내면화(Erinnerun: 기억)’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동시에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정신의 역사 속에 투영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헤겔은 이를 ‘형태화’라고 규정했는데, 필자는 ‘추체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2)

그런데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평행은 단순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행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은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개념에서 보듯이 개별적인 지식[직접지]에서 일반적인 지식[매개된 지]으로, 우연적 진리에서 필연적 진리에로 이행하는 것이다.

일반적이고 필연적 지식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지식의 근거이므로, 이는 곧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필자는 정신현상학의 길을 비유적으로 ‘상승하는 길’로 묘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의식은 자기의 진정한 실존을 향하여 끊임없이 육박하면서 최종적 지점에 도달한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이 지점에서 마침내 의식의 현상은 그 본질과 동일하게 되며, 이로써 의식에 관한 서술은 또한 정신에 관한 고유한 학문이 성립하는 바로 그 지점과 합일된다.”(정신현상학, 61-.62쪽)

반면 논리학에서 진행은 그와 반대이다. 논리학에서 출발점이 되는 것은 곧 정신현상학에서 최종적으로 도달한 가장 일반적인 것, 가장 추상적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가는 논리학의 진행 과정은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마침내 가장 개별적인 것에 이르는 길이다.

이 개별성은 이제 정신현상학에서 출발점이었던 단순히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복잡하게 규정된 개별자, 즉 모든 규정성이 상호 연관된 체계로서 개별자가 된다. 필자는 논리학의 진행과정을 정신현상학의 길과 대비하여 ‘하강의 길’로 규정할 수 있다고 본다.

“시원을 이루는 것에서부터 나가는 진행 과정은 시원을 이루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서만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논리학2판, 48쪽)

이상과 같이 정신현상학이 나가는 길과 논리학이 나가는 길은 이처럼 ‘상승’과 ‘하강’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길이니,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서로 전도된 꼴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마치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연구의 길’과 ‘서술의 길’을 구분한 것과 같다. 연구의 길을 개별 대상들에서 가장 일반적인 원리에 이르는 분석의 길(경험과학에서 보듯이)이며, 반대로 서술의 길은 가장 일반적 원리를 구체화하여 개별자를 끌어내는 종합의 길이다.

“물론 서술의 방법은 형식상 연구의 방법과 구별될 수밖에 없다. 연구는 소재를 자세히 탐구하여 그 상이한 발전형태를 분석하고 그 발전형태의 내적 관련을 찾아내야만 한다. 이 일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그에 상응하여 현실적 운동이 서술될 수 있다. 이것이 성공하여 이제 소재의 생명 활동이 관념적으로 반영되면 마치 선험적 구성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자본론, MEW Bd. 23, 27쪽)

여기서 마르크스는 연구는 (내적 관련의) 분석이며, 서술은 (선험적) 구성이라고 말한다. 유사한 표현은 아래서도 발견된다.

“만일 우리가 인구를 출발점으로 취한다면, 그것은 전체에 관한 하나의 혼란한 표상이 될 것이고, 따라서 좀더 명확한 규정을 통해 분석적으로 끊임없이 단순한 규정으로 도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단순한 규정으로부터 다시 그 반대 방향으로 거슬로 올라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시 인구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구는 앞에서처럼 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많은 규정과 관련을 포함한 하나의 풍부한 총체가 될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경제학에 있어서 초기에 취급되었던 역사적인 방법이다. … 두번째 방법에서는 추상적인 제규정이 사고의 길을 통해 구체적인 것의 재생산으로 되어간다.(정치경제학 비판에 관한 서론, MEW Bd. 13, 631-632쪽)

3)

그런데 서로 평행한다면, 그 나가는 길도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까?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에 12개 판단형식이 전제되어 있다면, 양자는 12개 판단형식이 나가는 길과 동일할 것이니, 서로 대립할 수가 없지 않을까? 한편으로 평행하면서 다른 편으로 전도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런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신현상학의 길이나 논리학의 길이나 각기 이중적이지만, 다만 각자를 이루는 두 개의 길 가운데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우선적으로 드러나는 길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 모두에 전제된 판단형식이 나가는 길을 살펴보자. 헤겔에서 하나의 판단형식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이며, 하나의 판단형식이 다른 판단형식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자. 그것은 곧 이런 주어와 술어의 관계 방식의 변화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질적인 긍정판단인 “이것(사과)이 빨갛다”에서 양적인 개별 판단인 “사과는 빨갛다”라고 할 때, 여기서 ‘빨갛다’라는 술어는 전자에서는 이것에 대해 하나의 우연한 성질에 불과했다. 그것은 외부 주관에 의해 주어에 부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후자에서는 모든 사과에 일반적으로 속하는 속성이면서 사과에 필연적으로 속하는 속성이 된다. 그러므로 이 이행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일반화하면서 동시에 구체화하는 것이다. 일반화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거로 복귀하는 것이며, 필연화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구체화하는 것이다.

하나의 판단형식이 다른 판단형식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이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이 판단형식의 이행을 전제로 하는 정신현상학의 길이나 논리학의 길도 이중적이지 않을 수 없다.

사유(思惟)의 두 갈래 [천 하룻밤 이야기]

사유(思惟)의 두 갈래

– 삶의 사유에서 삼태극을 생각하며

— 상강(霜降) – 가을이 매우 짧은 시대를 맞이 할 것인가?

  이스라엘이 가자에서든 시리아에서든, 전쟁을 수행하는 것에 막을 내릴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고들 한다. 이 말은 이 전쟁의 배후에는 미국의 지지와 지원이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미국이 세상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대항전쟁을 해야 하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전쟁을 거는 쪽이 자유와 안정을 위한 전쟁이라고 하지만, 그 전쟁이 누구의 자유와 누구의 안정인지를 묻는다면, 당연히 전쟁국의 상층들의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들에게 백성은 안중에도 없으며,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은, 소비에트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 다른 삶의 양식들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다른 삶의 양식을 악마화 하는 쪽은 누구인가? 물론 제국주의라고 말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기나긴 철학사 속에서 영원을 하늘(상층)에 두는 주지주의들이 있었고, 이를 백성들에게 심어서 순종하며 신앙으로 심은 것이 유일신앙자들이 있다.

유일신앙자들이 전쟁에서 어느 쪽을 돕는 적대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니체가 설명했던 바로, 한번은 백성에게 적개심을 심었던 랍비들이고, 다른 한번은 백성에게 죄의식을 심은 성직자들일 것이다. 니체의 말대로 적대의식과 전쟁은 백성의 것이 아니라 성직자의 것이라. 왜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과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백성을 인질로 삼았을까? 동양에서는 인질로 삼기보다 백성이 편안해야 천하가 편하다(평천하)는 군자들의 이야기와 지위를 보존하려는 위정자들 사이의 타협이 있었을 것인데 비해, 서양에서는 유일신앙의 중세를 거쳐서 오랫동안 권력과 지식이 신앙에 포획되어 있었다. 그 이유에 하늘의 영원성과 지상의 부질없는 가상성을 심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라는, 한글의 천지인(l, ㅡ, ㆍ)의 삼원성은 인류의 사유의 과제였던 것 같다. 아테네 이전에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듯하다. 이오니아와 엘레아. 그런데 아테네에 와서, 소크라테스가 이런 세 가지를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뭣”이 세 가지로 갈라지게 되는지에 고민했을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파르메니데스를 넘지 못했다고 서술했다. 그 소크라테스가 이오니아의 사유를, 고르기아스와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유를 통해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추측해보면, 흥미 있는 점을 발견한다. 하늘의 영원과 지상의 변화에 대해, 내가 소크라테스의 좌파(빨강이)라고 부르고 있는, 퀴니코스학파의 생각은 달랐다. 시간 속에서 찰나(le moment)는 변하지 않는 영원이고, 살아가는 인간의 과정인 순간(l’instant)은 변화하는 현상으로 보았다. 이런 퀴니코스학파의 영원과 변화의 항목을 정하는 것은 자연에서보다 언어의 개념화에 대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영원이 삶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fait, 만들어진 사실)은 인간이 고칠 수도 변경할 수 없이 지나가면서, 그대로 과거가 된다. 그럼에도 그 사실이란 항목이, 일반화되어 용어로 쓰이고, 그리고 규정하는 방식에 따라 정의되어가는 개념작업을 거칠 것인데, 이 항목, 용어, 개념은 고착성(고정성)을 갖는다. 사실은 덧붙여서 고칠 수 있거나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 찰나라는 개념은 영원하다. 그러나 삶아가는 인간들의 과정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순간들의 지속을 이어간다. 삶의 한 시점이 순간이라 하더다로 그 순간은 지속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라는 개념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살아가는 소크라테스는 변하고 있었고 또는 “뭣”을 추구하고 살아갔다. 그가 어떤 정체성을 갖었는지를 퀴니코스학자들은 잘 모른다. 순간의 이어짐의 연속성에서, 소크라테스라는 항목이, 경계를 그으면서, 정해질 뿐이다. 이에 비해 플라톤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영원성이 ‘천상의 영혼’처럼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 영원한 영혼이 소크라테스 신체에 들어왔다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모습과 과정은 변화의 현상들이라 한다.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불변하고 영원한데, 신체와 더불어 살면서 변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이라 한다.

플라톤은 이중적이다. 개인 영혼의 변전과정도 고민했다고 여기고, 또는 변하지 않은 세계영혼도 있다고 믿었다고들 해석한다. 그 플라톤은 전체의 영혼과 개인의 영혼을 구별하려고 노력했다고 하는 해석가들도 있다. 그런데 플라톤주의자들은 영혼이 영원의 세계에서 내려온 것으로 해석하고, 현상인 지상은 가상의 세계라는 쪽으로 굳혔다. 즉 경계를 긋고(페라스를 중시하고) 고정시켰다. 이 고착적 사고가 정태적 사유의 길이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다른 제자 그룹들은 전혀 달리 생각했다. 삶은 노력(포노스, πόνος)이고, 그 노력의 강도(토노스 τόνος)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아마도 불교에서 수련과 보시에 의해 자아의 성립을 보살이라고 하듯이, 퀴니코스-스토아의 전통에서 지나가는 찰나(영원)들과 달리, 살아가는 순간이 삶에서 소중하고 또한 다루어야 할 철학적 과제라고, 즉 “뭣”이라고 하는 것이 실재성이라 보았다. 이들에 의하면 플라톤주의의 영원은 우화 또는 이야기(mythe)에 지나지 않고, 인간은 지상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se faisant, 만들어짐)이 중요하다고 한다. 주지주의자들이 아폴론 또는 아테네 여신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퀴니코스학자들은 그들의 학교(퀴나고르게스)에서 헤라클레스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한다.

찰나와 순간, 영원과 시간에 대한 사유의 차이는 사유의 역사에서 고비마다 문제제기를 하였다. 그러나 유일신앙과 주지주의의 결탁으로 영원은 하늘나라에 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영원이 지상에서도 돌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제기된 것은 갈릴레이에서였다. 그 이후로 몇 세기를 지나지 않아서 주지주의 학문의 체계가 영원성도 없고, 그리고 체계의 완벽성도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된다. 왜냐하면 주지주의에 따른 모든 개별 학문들은 그 학문의 재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그 학문들 각각의 한계(페라스) 속에서, 고착저이고 정태적으로, 규정 지었기 때문이다. 한 학문이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 다른 학문에 적용하는 것은 오류이기도 하지만, 사유방식의 착오이다. 쉽게 말하면, 피겨의 김연아의 운동과정을 축구의 손홍민에게 적용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운동의 기본은 달리기가 기본이라는 을 부정하지 않는다.

적용의 오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성과 전개의 과정에서 달리 이루어진 경계(페라스)를 아페이론에게 적용하려는 오류가 플라톤주의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에는 아페이론과 같은 영혼의 대상화에 대해 항목, 용어, 개념화의 과정을 찾으려하는 것이라면, 퀴니코스는 삶의 터전에서 영혼의 삶에 대해 장하다, 훌륭타, 경건타를 실행하는 방식을 찾으려 했던 소크라테스를 주목했을 것이다. 주지주의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헌에 없는, 또는 증거가 없는 이야기로 넘긴다. 그런데 그들이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이야기를 증명하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상상의 이야기 또는 칼데아신화의 이야기라고 한다. 이런 완전성의 이야기를 진리라고 받아들인 이들이 유일신앙자들이다.

사유에는 두 가지 방식이 또는 여러 방식이 있다고 할 때, 천지인을 기본으로 하는 사유에서는 최소한 세 가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적어도 두 가지 방식과도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플라톤주의자들의 주지주의는 하늘의 영원성에 항목과 용어를 만들어 이야기해야만 한다는 쪽이고, 다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주의자들은 항목과 용어가 인간들이 쓰는 단어와 문장에서 개념작업을 거쳐서 개념들을 다루어서 체계화해야만 한다는 쪽이다. 달리 사유하는 퀴니코스와 스토아는 삶이 먼저이고, 그리고 사유는 다음이라 할 것이다.

하늘에 영원성을 묶어두고, 제도를 만들고, 학문적으로 체계를 규정하는 이들이 자기들의 이야기가 진리이며, 공정한 체제이고 나아가 평등한 신앙으로 여긴다. 이들은 항목을 고정화하고, 용어들과 개념들을 규정화하여, 전체를 구성하고 구축하였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들의 단초에서 고착(고정)이 정태적 사유의 근본이며, 이를 신앙을 받아들인 유일 신앙이 정태적일 수 밖에 없고, 그 정태성을 절대적 진리로 믿고서, 얼마나 많이 달리 생각하는 자를에게 피를 뿌렸는지는 세계사가 말한다. 중세의 마남사냥으로부터 미국의 맥카시 조작에 의한 빨갱이 사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정태적 사유와 동태적 사유의 이중성이 있다는 것이 제기되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싯달다에도(9/9는 0.9999일까, 1일까), 중국의 주나라 이전에 하도(10, 5)와 낙서(9)에서도 있어왔다. 사악한 자들은 개념, 수, 점에서 승리를 구가하면서, 항목, 지수, 부피 등을 악으로 몰아내려고 하였다. 이런 그들의 생각들에서 전쟁은 자유의 전쟁, 안정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전쟁은 악마의 전쟁이며, 공공재(하늘, 땅, 물)인 것을 사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의 전쟁이며, 이들이 권력, 권세, 권위를 합쳐서 패거리를 만드는 치졸함에서 오는 것이다. 이 치졸함의 정태적 사고임에도, 요상하게도 동태적이고 운동적이라고 가르친다. 교육을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악마같은 자들이 철학사와 역사교육을 왜곡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들 세 가지의 고정된 사고에 저항하는 이들이 셋이 있었다.

권력에 저항하고 항쟁하는 사유를 창안한 이는 정치 경제학에서 루소가 제기하고, 아나키스트들이 불을 지피고, 맑스가 과학적 체계를 통해, 생산도구를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프롤레타리의 공화국을 주장했다. 세 패거리들이 기계 산업일 때는 맑스를 두려워했는데, 규소라는 디지털시대에 제국이 변신하면서도 동적 사유를 빌어온다. 그러나 여전히 맑스의 혁명의식은 중요하다.

유일신앙이 자본주의 국가들 안에서 세상에서 권세를 누리고 산다. 종교는 인민과 더불어 사는 것이고, 헤라클레스를 따르는 퀴니코스의 견해로는 세상사의 어려운 난제를 해결하는데 노력(포노스, πόνος)과 내공(토노스 τόνος)을 써야 한다. 아직도 세계가 가난과 질병으로 시달리며, 이제는 이런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다가온 것이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놓은 지구의 생태계의 문제도 있다. 자연자체, 지구 자체가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야 그 속에서 사는 생명체든 인간이든 안정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유일신상의 신에 종속되고, 포로 되어, 그 신의 명령으로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자연대로 살아가는 과정으로 자발성과 자율성이 있다고 브루노가 주장했었다. 그를 그들은 산채로 태워죽이고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다. 이제는 사람들은 자연이 동적이고, 유일신앙의 사고가 정태적이고 고착적이라 한다. 유일신앙의 사고를 벗어나는 사유의 방식을 학습하고 노력하고 내공을 쌓아야 한다.

지식의 권위는 권력과 권세의 아부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연을 지배하고 제도를 만들고, 인간을 행복하게 살게 하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그러한 지식이 어째서 외골수 방향으로 나아가, 인간만이 잘 사는 휴머니스트(hunaniste)로, 지식을 갖는 인간만이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고도 자유를 누리는 상품자유주의자(liberaliste)로 가고 있는지를, 그들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이들 현상 인식론자들인 지식론자들이 누구의 침을 발라서 문장을 쓰고 판단을 하는 지를 반성해야 한다. 지식론자들은 수학에서 비유클리트기하학, 생물학에서 고생물학과 유전학, 심리학에서 기억이론 등에서 체계의 완전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제도 속에서 안전과 편안을 누리고, 반대파들을 마남사양과 빨갱이 사냥에 동조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누리고 살기를 바란다. 세 패거리들이 시킨 교육에 안주하면서 안락과 편리를 누리는 바탕에는, 정태적 사유와 더불어, 그 사회에 적응하는 동안에 내재하는 탐만치가 가득하다. 탐욕과 오만과 치졸함이다. 누구를 꼬집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태가 그러하다. – 뒷전으로 밀려난 용어들, 인도주의자(humanitaire)와 세계시민사상가(le cosmopolite), 그리고 인성자유주의(libertaire)를 생각해 보시라, 현재 교육이 “뭣”을 감추고 가르치고 있는지…

이들의 탐만치와 정태적 사고는 제국주의와 제국의 사유에 대한 동경과 향수이며, 이는 유일신앙의 하늘나라에 대한 착각에서 온다. 이에 저항하는 백성들과 인민들이 무수히 사라졌지만,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이런 저항이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에 표면 위로 올라왔다. 이 인민들의 여러 차례 저항들에 극우들의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남녘에서 세 패거리들에 포획된 자들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허락을 구걸하면서, 일본의 포로가 되기를 자청하고 있다. 세계사에서 인민의 저항에 대해서도 반동의 극우들이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친일파가 아니라 부일파, 숭미파들이 겁도 없이, 공공재에 대해 사적 소유의 승리를 주장하고 있다.

기나긴 역사에서 혁명이 성공한 것은 얼마 되지 않지만, 인민의 승리를 부정하는 이들이 없다. 단지 그 과정의 강도와 속도가 조금씩 달리 할 뿐이다.(4:01, 57UMB) (4:19, 57U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14-엥겔스 자연변증법에 관해[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14-엥겔스 자연변증법에 관해

1)

헤겔은 정신현상학 끝에 순수지에 이르러서, 마침내 학문 그 가운데서도 형식적 학문인 논리학이 시작된다고 한다.(실제적 학문은 자연철학과 정신철학-법, 예술 종교- 등이 속한다) 앞에서 정신현상학의 구별은 역사적으로 전개된 형태이고, 반면 논리학의 구분은 사유 순수지, 또는 논리의 영역 내에서의 구별이라고 했다.

이는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다시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헤겔이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에서 다루고 있으니 잠시 미루어 두기로 하고, 우선 논리학의 구분 문제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자.

헤겔은 논리학의 구분은 자의적, 역사적 구분이 아니며, 오히려 ‘개념’ 자체가 전개하는 고유한 구분이라고 한다. 즉 ‘개념’은 정신현상학의 최종 결과인 순수지를 말하니, 그것은 곧 사유와 존재의 통일을 말한다. 이런 통일이 다시 전개되면서 한편에는 존재로 다른 한편에는 사유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에 따라 전자는 객체 논리학이 되고 후자는 주관 논리학이 된다.

물론 이 구분은 인식의 형태가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정신현상학에서처럼 더이상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형태가 아니며, 다만 순수지를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계기의 구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객체 논리학이라고 하더라도 존재자 자체를 직접 다루는 형이상학은 아니다. 그것은 순수지의 형식 내에서 존재자와 관련된 형식일 뿐이니, 객체 논리학은 존재자에 관련된 하나의 판단형식이나 범주를 다룰 뿐이다.

마찬가지로 주관 논리학은 사유를 다루는 순수지의 형태, 즉 판단형식인데, 이때 사유는 정신철학에서 사유를 하나의 대상으로 다룰 때처럼 대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오직 사유를 다루는 판단형식이나 범주를 다룬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본다면, 논리학은 전체적으로 판단형식, 범주를 다룬다고 보겠으며, 그러므로 논리학의 지반은 다만 순수지, 또는 판단형식이다. 순수지의 형식이 전개되는 과정이 곧 논리학이다.

2)

헤겔은 객체 논리학에서 주관 논리학으로 발전하는 이 과정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따라서 전체 개념은 한번은 존재하는 개념이며 다른 한번은 개념으로 고찰될 수 있다. 전자에서 개념은 다만 그 자체적인 것으로 개념일 뿐이며 그러므로 실재하고 존재하는 것으로서 개념이다. 반면 후자에서 개념은 개념 자체 또는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헤겔은 논리학의 지반인 순수지 즉 개념이 자기를 전개하면서 처음[객체 논리학]에는 순수지가 “그 자체적인 것으로” 또는 잠재적으로[an sich] 자기를 드러낼 뿐이라고 한다. 여기서 순수지는 존재자의 운동 속에 가려져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순수지의 운동이 아니라 마치 존재자가 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논리학인데도 이것은 마치 형이상학처럼 보이다.

그러나 순수지 즉 개념이 마지막[주관 논리학]에 이르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실현해서 실현된 자기로부터 자기를 자각하면서 “대자적[fuer sich]으로” 된다. 여기서는 대상이 아니라 순수지가 스스로 운동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순수지 자신의 운동이 존재자를 이끌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여기서는 논리학은 논리학답게 판단형식으로 출현한다.

3)

알다시피 1부 객체 논리학은 1권 존재론과 2권 본질론으로 나누어진다. 존재론은 직접 우리 눈 앞에 존재하는 존재자를 다룬다.

반면 본질론은 이중적이다. 헤겔에서 본질은 아직 “자기 내에 머무르고 있는 개념[In Sich Sein des Begriffs]”이다. 즉 자기를 구체적으로 전개하지는 못하면서 추상적으로 사물의 내부에 머무르고 있는 개념이라는 뜻이다. 이런 개념을 헤겔은 본질이라 한다.

본질론에서는 직접적 존재와 이런 내적인 본질 사이의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침투하는 모습이 다루어진다. 이 경우 헤겔은 본질이 “외적 존재에 들러붙어 있다”라고 표현한다.

“이 개념은 이런 방식[본질론]에서는 아직 그 자체로서 독자적으로 정립되지 않고 그것에 외적인 존재인 직접적 존재가 동시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본질론이며 이 본질론은 존재론과 개념론 사이에 있다.”(2판, 46쪽)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보면, 논리학이 다루는 대상은 직접적인 존재에서 존재와 본질의 상호 관계로 마지막으로는 자기 전개하는 개념으로 나가니 점차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물론 논리학은 대상 자체가 발전하는 운동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논리학은 대상의 발전을 매개로 하여 자기를 전개하는 순수지, 개념, 판단형식, 범주를 다룰 뿐이다.

4)

이것과 관련하여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이라는 책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미완성된 이 책에서 엥겔스는 자연의 변증법적 전개 과정을 세 가지로 서술했다.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그 하나는 질, 양 전환의 법칙이다. 두 번째는 상호 침투의 관계이다. 세 번째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법칙이다.

엥겔스는 자연의 세 가지 변증법적인 전개 과정을 어디서 발견했을까? 그의 저서 자연 변증법에서 보듯이 그가 물론 자연과학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는 이처럼 자연을 연구하여 이런 법칙을 일반화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보기에는 그의 자연 연구는 1870년대라는 시대적 제약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법칙은 헤겔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하듯이 바로 그의 논리학에서 흘러나오는 법칙이다.

질량 전환의 법칙을 헤겔은 존재론에서 제시한다. 본질론의 영역에서 존재와 본질의 반성 관계는 근본적으로 상호 침투의 관계이다. 마지막으로 개념론에서 개념의 발전을 서술하면서 헤겔은 이중 부정, 자기 부정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엥겔스의 이 세 가지 법칙은 잘못 알려진 대로 자연의 모든 영역에 동시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 질량 전환의 법칙은 물리학의 영역에, 상호 침투의 법칙은 화학의 영역에 그리고 생물학, 역사학에는 이중 부정을 통한 발전의 법칙이 적용된다. 이런 차이를 간과하면 소박 유물론자처럼 역사 속에 질량 법칙을 적용하든가, 역사에는 변증법이 있지만, 자연에는 변증법이 없다는 루카치와 같은 오해가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엥겔스는 이런 법칙을 자연의 일반 원리로 보았으니, 말하자면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은 형이상학적이라고 하겠다. 그런 가정 아래 그는 자연과학의 연구를 통해서 그런 법칙을 실증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엥겔스는 자연과학을 연구하여, 헤겔이 판단형식의 발전으로 규정한 논리학의 법칙을 존재자의 일반적 운동 원리로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후일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에너지와 물질의 전환법칙이 발전되기 이전 1870년대라는 시대적 제약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변증법을 자연의 원리로 확립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자연의 원리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서로 독립적인 질량과 에너지라는 뉴톤적 원리가 극복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엥겔스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모두 포기하고, 그의 연구를 비발표 논고로 남기고 말았다.)

5)

여기서 마침내 헤겔이 형이상학이라는 표현을 제쳐두고 논리학이라는 표현을 이용한 이유가 드러난다. 헤겔의 논리학은 순수지를 지반으로 전개된다. 사유의 판단형식 즉 범주가 자기를 전개하는 과정이 곧 논리학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형식이 존재자에 대한 경험을 매개로 전개되기에, 존재론, 본질론, 개념론이라는 이름이 붙더라도, 그것은 형이상학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사유, 판단형식, 범주를 다루는 것이니, 헤겔의 말대로 논리학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다만, 논리학이 형식적 학문이 아니라, 존재자에 대한 경험을 매개로 하여 발전한다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로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여 헤겔 논리학을 서술하지만, 서두에 밝힌 대로 헤겔의 이 책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논리학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말이 될 것이다)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10월 제14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2020)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발제: 인현정 선생님│2024.10.18. 영상

◎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10월 제14차 정기세미나 『중국현대철학사론』(2020)

 

-주제: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발제: 인현정 선생님
-일시: 2024년 10월 18일(금) 오후 4시
-장소: 한철연 강의실 & 줌(zoom) 병행

이규성 사상 연구 모임에서는 요즈음 이규성 선생이 지은 『중국현대철학사론』(2020)을 강독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비트겐슈타인 발표로 한 번 건너 뛰고,
6월에 읽은 서론에 이어서 1장 진독수(陳獨秀) 편을 10월에 읽습니다.

 

○ 『중국현대철학사론』(2020) 목차
서론. 동서 ‘융회’와 현대 ‘신철학’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2장.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의 실천론: 모택동(毛澤東)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
5장. ‘체용불이’와 ‘흡벽’ 생성론: 웅십력(熊十力)
6장. 동서 ‘융회’와 형식주의 신이학: 풍우란(馮友蘭)
7장. ‘도’의 형이상학과 ‘이사겸중’의 지식론: 김악림(金岳霖)
8장. 변증법의 ‘합리적 내핵’과 심미적 ‘신철학’: 장세영(張世英)
결론. 상실과 전망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NiCr_Yn8GW0?si=Mmc6EkDDteXqb4WM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3년 12월 제9차 정기세미나|’이규성 선생의 동학사상 연구 -발제: 이병창(동아대)’|2023.12.08. 영상

지난 영상을 올립니다.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3년 12월 제9차 정기세미나

-주제: ‘이규성 선생의 동학사상 연구’
-발제: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일시: 2023년 12월 8일(금) 오후 4시
-장소: 서울시 서대문구 서소문로 45 SK리쳄블 1305호(zoom 병행)

이번 모임에서는 이규성 선생의 동학사상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동학사상에 관한 철학적 해석은 여러 갈래입니다만, 이규성 선생은 내외 합일이라는 자신의 관점에서 동학사상을 “안으로 개체의 활력이 자주적으로 표출되고 밖으로 다른 생명체들과의 우주적 연대성을 자각하는” 사상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내외 합일의 관점에서 동학사상은 한편으로 “새로운 삶의 형식으로서 사상의 개벽”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조직화 운동”으로서 혁명적 실천 즉 역사적 개벽으로 해석합니다. 아마도 이규성 선생의 철학적 모색에서 동학사상은 하나의 철학적 이상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관점은 이돈화 선생과 김지하 시인의 동학 해석과 유사하면서도 차이를 보여주는데, 이번 모임에서는 이규성 선생의 동학사상 해석을 놓고 토론해 보고자 합니다.

☞ 발표 원고: 이규성의동학사상연구 발표문 (이병창)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WpW-xBKSGjs?si=cTCF8SyBrE4YLSvc

헤겔 형이상학 산책13-논리학의 구분에 관해[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3-논리학의 구분에 관해

1)

앞에서 논리학이 기본적으로 칸트의 12개 판단형식 즉 범주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논리학의 1부 객체 논리학의 목차를 보면, 거기서 질-량-관계-양상으로 전개되는 12개 범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필자가 굳이 흔적이라고 말한 것은 각 판단형식의 이행 중간에 또 다른 세부 범주들이 끼어들어 있어서 언뜻 보면 그게 눈에 뜨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논리학 그 가운데서도 객체 논리학이 이처럼 12개 판단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헤겔이 논리학을 3권으로 즉 1부 객체 논리학의 1권 존재론과 2권 본질로, 2부 주관논리학으로 구분한 것에 관하여,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도대체 논리학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사유의 형식을 다루는 데 객체 논리학이란 것이 말이 되는지가 문제다. 사실 3부 주관논리학을 보면, 그중 1편이 개념-판단-추론을 다루니, 전통적 논리학과 다루는 것이 일치한다. (여기서 3부 주관논리학의 2편 객관성(기계론-화학론-목적론)을 다루고 3편이 이념(삶-인식의 이념-절대이념)을 다루는 데, 이처럼 객관성이나 이념이 주관 논리학에 함께 다루어지는 이유는 나중에 고찰하기로 하자)

그런데 객체 논리학이라면 그건 그 자신의 말대로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왜 그가 이를 논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 문제는 단순히 논리학을 구분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존재론 맨 앞부분에 부록처럼 끼어들어 있는 부분 즉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나”라는 절의 문제의식과 연관되어 있으니, 두 부분을 이제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이 부분에서 헤겔이 다루는 것은 정신현상학과 논리학 사이의 관계이다.

결국, 논리학의 구분 문제는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관계 문제와도 연관된 문제이니, 우리는 불가피하게 그런 참으로 논의하기 힘든 문제를 여기서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2)

1판에서 논리학의 구분과 관련된 절은 ‘Allgemeine Einteilung Derselben’이라는 이름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전체는 3쪽에 그치며 비교적 간단하다. 2판에서 헤겔은 이 부분을 대폭 확대(6쪽)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제목은 ‘Allgemeine Einteilung der logik’으로 되어 있다.

이 절에서 헤겔이 논의하는 핵심 문제는 곧 논리학의 구분이 주관의 자의적인 산물이 아니라, 논리학의 토대인 개념 자체가 그 스스로 전개하는 구분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 자체 즉 논리학의 지반은 “존재가 순수 개념 자체이며 단지 순수 개념만이 진정한 존재라는”(1판, 30쪽) 것을 전제로 한다.

존재와 사유(또는 개념)의 통일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기나긴 역사적 발전의 길 끝에 마침내 도달한 최종적 결과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것에 ‘순수지’ 또는 ‘절대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점은 2판 ‘논리학의 일반적 구분’ 앞부분에 헤겔이 말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논리학의 구분에서 전제되어 있는 개념은 자신의 맞은편에 놓여 있는 학문[정신현상학]의 결과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기에서는 전제가 된다. 논리학은 순수 사유의 학문으로서 규정되며, 이 순수 사유의 학문은 순수지를 자신의 원리로 삼는다.”(2판, 44-45쪽)

순수지는 존재와 의식의 대립이 극복되면서 “존재가 순수한 개념 자체이며, 순수한 개념이 진정한 존재로서 의식된다”(2판, 45, 문장은 1판과 동일)고 한다.

물론 순수지의 이런 토대, 존재와 의식의 통일이라는 개념적 토대는 칸트의 선험철학을 통해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여러번 얘기했으니, 다시 또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 구절들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논리학은 순수지의 전개라면, 이것은 존재와 의식의 대립이 지양된 것이니, 더이상 구별을 전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다. 여기가 바로 로도스이니, 이제 모든 것은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헤겔은 논리학에서 이 순수지에서 다시 구별을 전개하니, 이게 대체 무슨 까닭인가? 헤겔 자신도 자기의 말이 듣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함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는 곧이어서 정신현상학에서 전개된 과정과 논리학에서 전개된 과정이 다르다고 말한다.

2)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통일이 지반이 되어 논리학의 원리를 이루니, 그 구별은 그 원리에 내재하는 것이지만, 그런 구별의 발전은 다만 이런 지반 내부에서만 출현한다. 왜냐하면 논리학의 구분은 이미 말했듯이 개념의 판단이며, 자신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규정에 따라 그 자신의 구별이 정립된 것이므로, 이러한 구별을 정립하는 것은 구체적 통일이 다시 그 규정성 속으로 해소되는 것으로 그리하여 마치 각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없다.”(2판, 45쪽)

헤겔은 논리학에서 구별이 전개되더라도 그 구별은 순수지 또는 개념의 지반 내부에 머물러 있으며, 따라서 과거 즉 정신현상학에서처럼 그 구별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규정성” 속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 한다.

즉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형태는 역사적으로 출현한 개별적인 형태이었고 이 의식은 구체적인 자립적인 형태이었다. 그러나 논리학에서 이제 전개되는 사유 즉 순수지의 구별된 형식은 그런 구체적 형태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순수지 내부에서 전개된 구별이며, 이런 점에서 우리는 순수지의 전개된 형식을 개념의 논리적 계기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논리학에서 헤겔은 논리학의 구별에 형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따라서 이전에(진리에 이르는 도정에서)[정신현상학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규정 즉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또는 사유와 존재 또는 개념과 실재라든가 다시 말하자면 어떤 고려하는 관점에서 특정한 것으로 될 수도 있는 것들은 이제 그 진리인 통일 속에서는[논리학에서] 형식으로 격하된다. 따라서 그 형식은 서로 구별되는 가운데서도 본래 전체적인 개념이며, 이 전체적 개념은 그 구분 속에서 다만 자신의 고유한 규정[사유, 순수지] 아래서 정립된다.”(2판, 45쪽)

사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도 그 서문에서 이와 유사한 그러나 반대의 관점에서 전개된 이야기를 서술한 적이 있다. 헤겔은 그 서문에서 학문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신현상학의 도정을 거쳐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때 역사적으로 출현한 의식의 구체적 형태는 이제 내면화되어서[erinnerung: 기억] 논리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관점에서 의식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다시 한 번 되살리는 것은 이미 논리적 계기가 되었던 것을 그 역사적 형태로 되돌려서 이해할(추체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학문은[정신현상학] 의식이 형성하는 운동을 상세하고 필연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이미 계기로 전락하여 정신의 소유로 된 것을 그 형태 속에서 서술하는 것이다.”(정신현상학, S. 25)

3)

개별적 형태와 논리적 계기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개별적 형태는 그 속에 여러 논리적 계기를 포함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의 계기가 지배적으로 되면서 나타나는 전체적 모습이다. 여기서 계기들은 지배적 요소의 지배를 받아서 왜곡되니 후일 발전된 명확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 반면 계기란 전체 형태에 포함된 여러 계기가 서로 명확한 관계를 이루는 가운데, 그 관계 중의 한 계기를 말한다. 이 계기는 전체의 한 계기이므로 전체의 지배적 계기에 따라서 규정된다.

법철학에 나오는 예를 들자면, 가족은 선사 시대에는 역사적 형태이었다. 그 시대는 작은 가정만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 전체가 가족적인 것이었다. 반면 오늘날 가족은 자본주의 사회의 전체를 이루는 한 계기에 불과하다. 가족은 이제 구시대의 의미를 상실하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규정되니, 가족도 이제 계약관계가 되었다.

역사적 형태가 자기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역사 속에서 모순된 경험, 대립과 투쟁 등을 거쳐야 한다. 이는 역사적 투쟁을 매개로 한다. 그것은 헤겔 말대로 “세계 정신의 인내”와 “세계사의 엄청난 노동”을 거쳐야만 한다.

반면 이미 논리적 계기가 되었을 때는 전체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므로 “이미 본래적으로는 an sich 이런 지양이 이루어졌으므로, 더 작은 노력만이 필요하다”(정신현상학, 26쪽)라고 말한다. 여기서 작은 노력이란 곧 사유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일 것이다.

4)

필자는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이런 관계를 일종의 투영 관계로 해석한 바가 있다. 즉 역사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정신현상학의 운동을 논리학 즉 순수지의 평면에 투영한다면 이것이 바로 논리학이며 거꾸로 논리학의 전개 과정을 역사의 시간 평면에 투영한다면 그것이 곧 정신현상학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서로 동일한 것이 다시 시간적 형태에서 다루어졌는가 아니면 논리적 계기로서 다루어졌는가 하는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정신현상학은 논리적 전개를 이면에 깔고 있으며 거꾸로 논리학은 의식의 역사적 운동을 이면에 깔고 있는 사실은 서로 동일한 내용을 지닌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논리학에서 칸트의 12개 판단범주를 발견했듯이 정신현상학의 서술에서도 12개 판단형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구체적으로 질적 범주가 의식 장에서 다루어진다면, 양적 범주는 자기의식 장에서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성 장은 관계 범주가 마지막 정신 장은 양상 범주가 다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이 기본적으로 서로 평형 상태에 있다면, 이미 정신현상학을 서술한 다음에 굳이 다시 논리학을 서술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가 논리학을 서술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역시 그야말로 골을 부수는 두 권의 책 중의 한 권이라도 읽는 것을 생략할 수 있었을 것이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겠는가? 그러면 우리를 헤겔이 후대인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다시 어마어마한 분량의 논리학을 서술했다는 말인 되는가? 이런 고민은 역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강지은 지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내가 진짜 아는 것은 무엇인가』(2023)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내가 진짜 아는 것은 무엇인가』(2023)

 

서평: 함태원(한철연, 건국대)

 

이제 조금은 알려나?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을 때 당혹감을 잊을 수 없다. 문장에서 모르는 단어가 없었는데도, 심지어 그 글이 한글로 번역된 글인데도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는 단어를 다시 국어사전에 찾아봐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되어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 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그런데 이 생각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나 보다. 이 생각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생각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인식하는 주관과 독립하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과 우리가 인식하는 것을 구분한다. 그리고 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을 ‘사물 자체(Ding an sich)’라고 불렀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이 사물 자체를 온전히 알 수 없다. (105쪽) 이것은 언뜻 이상하게 들린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사물들을 우리가 그대로 알 수 없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아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주제는 자연 세계에서 인간이 얼마나 알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52쪽)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이 어디까지 알 수 있고, 어디부터는 알 수 없으며,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다룬다.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칸트는 인식의 두 원천을 감성과 지성이라 말한다. 먼저 감성은 “대상을 감각하는 능력”으로 인간의 수용력을 말한다. (92쪽) 감성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인간은 대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직관이다. (97쪽) 그러나 아직 직관만으로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받아들인 직관이 무엇인지 사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하는 능력을 칸트는 지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책상을 보고 느껴진 책상의 색에 대해서 ‘갈색’이라고 개념을 적용하는 능력이다. 이런 지성의 규칙이 바로 논리학이다. (107쪽)

그런데 이런 논리학은 대상의 내용을 다루지 않고 사고의 규칙만을 다룬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그 대상이 무엇인지에 관한 인식 내용에는 논리학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인식 내용을 물을 수 있는 논리학으로 ‘초월적 논리학’을 제시한다. (109쪽) 이 초월적 논리학은 초월적 분석학과 초월적 변증학으로 나뉜다.

먼저 초월적 분석학에서는 선험적으로 대상과 관계 맺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이 개념은 순수 지성 개념으로 범주라고도 부른다. (118쪽) 범주는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자 말하자면 모든 판단이 가지는 판단의 형식인 개념이다. 즉, 감성을 통해서 받아들인 직관에 개념을 적용할 때,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는 선험적인 개념이 범주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범주를 통해서 무엇이 무엇이라고 필연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칸트는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이런 범주는 어떻게 직관과 만날 수 있을까? 그래서 칸트는 이 범주의 적용할 수 있는 범위를 확인한다. 그것이 범주의 권리증명 즉, 연역이다. 그리고 우리는 연역을 통해 이 범주는 현상에만 적용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반면에 초월적 변증학에서는 어떻게 아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증학에서는 모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추론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초월적 가상이 있다. 칸트는 이에 대해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모름은 그냥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 없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우리가 진짜로 아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 즉,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우리는 현상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사물 자체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


서평자 함태원: 건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석사수료. 칸트 철학을 공부하고, 주된 관심사는 칸트의 실천철학 및 윤리형이상학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폭력과 나무 불꽃[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한강의 채식주의자-폭력과 나무 불꽃

(예전 2017년에 썼던 글이다. 한강의 소설이 노벨상을 받은 것을 축하하며 다시 올린다)

 

1) 폭력의 세계

제목이 <채식주의자>라서, 채식의 미덕에 관한 이야기인가 하면서 책을 들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아서 작가는 채식의 미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당장 눈에 뜨이는 것은 폭력성이다. 육식을 거부하는 아내인 영혜, 그것보다 섹스를 거부하는 아내를 지배하기 위해 남편은 온 가족을 동원한다. 아내의 부모는 딸에 대한 걱정보다는 사위에 대한 걱정 때문에(차라리 두려움 때문이겠지!) 강제로 고기를 입속으로 틀어넣는다. 이런 코믹한(‘섬뜩한’이라는 뜻도 있다) 폭력이 아직도 딸 가진 게 죄인인 우리 사회에 밑바닥에 깔린 것이 아니겠는가? 폭력에 희생되어 미치게 되는 주인공! 작가는 이 비극을 말하는 것 같다.

나도 연작 소설의 형식을 띤 이 소설의 첫째 편(<채식주의자>)을 읽는 내내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그래서 첫째 편만 읽고 일어서야지 하면서 그 마지막 구절을 읽는 순간 갑자기 눈이 번쩍 띄는 구절이 있었다. 아침, 가슴을 드러낸 채 병원 벤치에 앉은 영혜를 병원 직원들이 끌고 가려는 순간이다. 그녀의 입술에는 루즈가 함부로 번진 듯 피에 젖어 있었다. 작가는 화자인 남편의 눈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아니, 그렇다면 작가가 이 사회의 코믹한 폭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대체 이 반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폭력을 가하는 사회에 대한 영혜의 증오감이 동박새를 뜯어 먹는 힘으로 표현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답이 궁금했기에 책을 놓을 수 없었다.

2) 실체변환

이어지는 두 번째 편 <몽고반점>에서 화자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두 번째 편의 화자는 영혜의 언니의 남편이며 화가이다. 그는 2년 동안 아무것도 새 작품을 내지 못한 불임의 상태이다. 이 기간은 그가 처제인 영혜에 매혹되기 시작된 때와 일치한다. 그 매혹을 격발시킨 것은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아내의 말이다.

상상 속에 그려진 몽고반점 때문에 한 남자가 매혹된다니? 몽고반점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할까? 여기서부터는 나는 작가의 말을 믿지 못하는 의심스러워하는 독자가 되어, 책을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부터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영혜에 대한 의문보다는 약간 포르노적 관심(불륜은 포르노의 주요 주제이다)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몽고반점이라는 이미지로부터 남녀가 몸에 꽃을 그린 채 서로 교합하는 장면이 마음속에 떠올라, 화가는 이를 미리 스케치북에 그려놓는다. 단 두 남녀가 그와 영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무의식 속에 감추어 두기 위해 얼굴은 그리지 않았다. 일단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화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기를 실현한다. 그는 그저 이미지의 노예일 뿐이다. 그는 멧돼지처럼 돌진하면서 그 이미지를 실현하기 위해 돌진한다. 이 과정 끝에서 영혜는 맨몸으로 다가온 그를 거부하지만, 그가 몸에 꽃을 그리고 다가가자 마침내 받아들인다.

‘몽고반점’이라든가, ‘꽃의 문신을 한 채 이루어지는 교합’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먼저 두 이미지 속에 죽음의 이미지가 어려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몽고반점의 푸른빛은 죽음의 빛일 것이다. 또 꽃의 교합도 식물성의 이미지이고, 니르바나라는 관념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미지를 고려할 때 화가와 영혜의 성적 교섭은 일단 죽음으로 넘어가는 길목 또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의 충동을 그려내려 했던가? 성적 교합에 대한 작가의 서술에는 그렇게 이해할만한 단서가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이미 흠뻑 젖은 몸, 무서울 만큼 수축력 있게 조여드는 몸 안에서 그는 혼절하듯 정액을 뿜어냈다.”

정신분석학자 바타이유의 경우 성적 교합이 죽음의 충동이며 이 가운데 쥐상스(열락)가 얻어진다고 말했다. 영혜와 화가가 윤리적 차원을 위반하고 있다는 점도 이런 이해를 지지한다. 그런데 이렇게만 이해하기에는 곤란하다는 것은 아래와 같은 표현을 보면 이해된다. 작가는 두 사람의 성적 교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그녀 안으로 들어갔을 짓무른 잎사귀에서 흐르는 것 같은 초록빛 즙이 그녀의 음부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향긋하면서도 씁쓸한 풀냄새가 점점 아릿해져 그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여기에 교합을 한 이후 더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는 영혜의 반응을 덧붙여 보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꿈을 꾸지 않게 될까?”

그 꿈은 피에 젖은 얼굴에 관한 꿈이다. 게다가 몽고반점이 단순히 푸른빛이 아니고 연두색이 배어있다는 서술도 연관된다. 이런 표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체변환’이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실체변환이란 기독교에서 포도주와 빵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되는 것을 말한다. 영혜와 화가는 서로의 교합을 통해서 죽음에 이른다. 이런 죽음으로 넘어가면서 그들은 실체변환을 하게 된다. 그들은 이제 꽃과 같은 식물적 존재로 변환된다.

이런 실체변환이라는 과정을 매개하는 것이 예술이 아닐까? 작가는 예술이란 문신과 마찬가지로 주술적인 차원이라고 보는 것 같다. 화가와 영혜는 실질적인 죽음 대신, 예술적 차원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이들은 주술적인 차원에서 식물적 존재로 변환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만연하고 편재하는 폭력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는다. 사회는 예술에게 금기를 정한다. 이 금기는 주술적 차원의 실체변환을 파멸시킨다.

이런 실체변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본다면 드디어 영혜의 ‘채식주의’를 이해하는 단서를 얻게 된다. 이 단서는 세째 편 <나무 불꽃>에서 확실하게 드러날 것 같다.

3) 내재하는 폭력성

이 소설의 특징은 연작 소설이라는 점이다. 그 가운데 화자가 변화된다. 첫 번째 편 채식주의자의 화자는 영혜의 남편이다. 그는 두 번째 몽고반점의 화자는 화가가 된다. 세 번째 편 나무 불꽃의 화자는 영혜의 언니 인혜이다.

세째 편은 인혜가 갇힌 정신병원으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회상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런 회상은 시간적으로 지그재그식으로 이동하기에 복잡한 순서를 맞추어 보기 위해 나는 도표를 그렸을 정도이다. 그런데 작가의 서술을 따라가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영혜와 언니가 서로 묘하게도 겹치는 것 때문이다.

인혜의 자살 시도를 보자. 영혜가 남편과 비디오를 찍은 직후로 보인다. 작가는 인혜가 그전 하혈을 하였다고 하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를 덮쳤다고 암시한다. 그리고 비디오를 찍은 직후 “며칠 만에 새벽에 들어온 그가 도둑처럼 그녀를 안았을 때”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자살을 하러 산으로 올라간다.

인혜의 자살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 영혜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인혜의 말은 곧 영혜의 말로 보인다. 앞의 두 편에서 영혜는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자격을 박탈당했다. 대신 영혜의 꿈만이 시적인 언어로(일상적 언어가 아니라, 시적인 언어로 서술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개입되어 있다. 그런 영혜를 대신해서 셋째 편에서는 언니가 말한다. 이 언니의 말을 통해 영혜를 이해할 수 있다.

왜 그들은 죽으려 했을까? 인혜와 영혜가 사는 세계는 복종을 요구하고 폭력이 행사되는 세계, 동물적 세계라 하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세계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평생 성실하고 남을 위해 희생해온 인혜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이다. 그녀는 남편과 영혜의 비디오를 보고서 두 사람을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킨다. 그건 영혜도 마찬가지이다. 영혜 역시 피해자이지만, 가해자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점을 어릴 때 자기를 물은 개가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끌려다니다가 거품을 물고 죽어가는 것을 영혜가 지켜보았다는 서술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섞여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속에 이미 폭력이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나는 작가가 첫째 편 마지막에서 제시한 동박새를 뜯어먹는 영혜의 모습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억압된 폭력적 본성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억압된 폭력의 본성은 영혜에게 수면을 뚫고 의식으로 점차 다가온다. 처음 그것은 꿈으로 나타난다. 이 꿈에서 영혜는 자기가 바로 맹수가 된 것이 아닌지 두려워한다.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 피의 형상, 파헤쳐진 두개골, 그리고 다시 맹수의 눈, 내 뱃속에서 올라온 것과 같은 눈, 떨면서 눈을 뜨면 내 손을 확인해, 내 손톱이 아직 부드러운지, 내 이빨이 아직 온순한지.”

현실 세계는 폭력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 폭력성은 어떤 외적인 것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 흘러나온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누어져 있다면 혁명을 통해 사회는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가 곧 피해자이고, 피해자가 곧 가해자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인간의 내적 본성 속에 이런 폭력성이 내재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혁명은 다만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영혜의 절망은 아니 작가 자신의 절망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4) 영적인 타자

절망만으로 문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절망을 넘어서는 힘을 문학이 보여주어야 한다. 작가 역시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그 힘을 보여주려 한다. 그 힘을 발견하는 단서는 인혜의 깨달음 속에 존재할 것이다.

자살 시도를 통해 상징적으로 죽음을 겪은 인혜는 점차 죽어가는 영혜에게 다가간다. 영혜는 점차 자신이 나무가 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무처럼 물구나무서며, 마침내 먹지 않아도 되고 햇빛만 받으면 되고, 심지어 말과 생각도 곧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말문을 닫는다.

“비에 녹아서 … 전부 다 녹아서 … 땅속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다시 거꾸로 돋아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거든.”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인혜는 영혜의 말을 처음에는 의사가 분석하는 것처럼 정신분열증적인 환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상징적 죽음을 겪은 이후 인혜는 점차 영혜의 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런 이해의 첫 단계에서 인혜는 영혜가 자기처럼 자살하려는 시도로만 이해한다.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그러나 의사가 최후로 영혜에게 강제로 호스를 통해 음식을 집어넣으려 시도할 때 인혜는 처음 병실 밖에 있다가 영혜가 몸부림치자 뛰어들어가 의사를 제지한다. 그러면서 인혜는 달려가 영혜의 몸을 껴안는다. 이때 작가는 “영혜 피를 토한 피가 이때 그녀의 블라우스를 적신다”라고 말한다. 곧이어 의사가 치료를 포기하고 큰 병원으로 데려가라 하자, 인혜는 수속을 마치고 나오면서 화장실에서 “뿌연 차와 함께 노란 위액”을 토한다. 영혜의 피와 인혜의 노란 위액이 서로 감응한다. 작가의 이런 서술은 마치 이제 인혜와 영혜가 하나의 몸이 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직 인혜는 영혜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몸으로는 이미 하나가 된다.

작가는 우리에게 그 비밀을 말로 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는 영혜의 말 가운데서 그 비밀의 단서를 노출하고 있다. 영혜의 말은 결코 무의식의 말은 아니다. 영혜의 말은 너무나도 또렷한 언어로 말해진다. 그렇다고 영혜가 우리가 가진 의식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영혜를 통해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 작가는 영혜가 말하는 가운데 불가사의한 “미소를 짓고” 얼굴이 “환하게 밝았다고” 했다. 영혜는 음식을 거부하면서 의사조차도 신비하게 생각하듯이 온 몸이 긴장되어 있다. 바로 그 미소와 빛, 온몸을 사로잡는 힘이 영혜를 통해 말하는 주체가 아닐까? 이 주체는 바로 영적인 타자가 아닐까?

5) 나무 불꽃

이제 첫째 편으로 돌아가자. 영혜를 불안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 꿈이다. 그 꿈은 그녀의 내부에 존재하는 폭력성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녀에게 내재하는 폭력을 끌어내는 것은 바로 사회적인 폭력이다. 사회적 폭력에 감응하여 인간 내면의 폭력성이 깨어난다. 영혜는 떠오르는 폭력성에 대해 저항한다. 영혜에게 그 저항의 힘을 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영적 타자의 말이 아닐까? 그 말이 채식으로, 그리고 주술적인 차원으로 최종적으로 죽음으로 그녀를 불러낸다. 그 앞에서 영혜는 단호하고 담담하다. 그녀는 어떤 굴복도 없이 어떤 주저도 없이 영적 타자의 부름에 충실하다.

그런데 인혜는 자살 직전에 멈춘다. 그녀를 멈추게 한 힘은 무엇일까? 아마 이 소설의 백미라면 바로 여기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빈 욕조에 웅크려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 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인혜가 들은 말은 생명의 말이다. 생명이 곧 영혜를 불렀던 그 영적 타자가 아닐까? 그 생명은 인혜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작가는 그것이 무자비한 말이라 했다. 왜 무자비한 것일까? 그 설명은 바로 다음에 나온다. 나무는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이라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인혜에게 자신의 말을 눈에 보여준다. 그 말은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 몸을 버티고 서 있으라!”는 무자비한 말이다.

죽음을 통해 나무가 되려는 영혜, 그에 반해서 나무처럼 살아가려는 인혜, 이렇게 해서 죽음의 길과 삶의 길은 나누어졌다. 하지만 두 길은 서로 통한다. 이 길 가운데서 영혜가 죽음으로 들어가면서 인혜가 삶 속으로 걸어 나온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영혜에게는 책임질 아이가 없지만, 인혜에게는 책임질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숨죽여 의문 했다. 꿈일 뿐, 우연의 일치뿐일까. 박명 속에서 일어서는 뒷산의 나무들에서, 바랜 보라색 티셔츠 차림이 그녀가 뒷걸음질 쳐 내려왔던 그 아침이었다.”

인혜는 아이의 꿈속에서 하얀 새가 날아가던 때 바로 그때 자신이 죽음 향해 걸어갔던 것을 기억한다. 아마 아이의 눈물이 그녀를 되돌아서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악문다. 불현듯 그날 새벽 걸어 내려오던 산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샌들을 적신 이슬이 맨발에 차갑게 스몄었다.”

맨발을 적신 이슬, 그게 아이의 눈물일 것이다. 아이와 엄마 사이의 이 신비한 교감은 인혜를 삶으로 불러들인 바로 그 힘, 생명의 힘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12-논리학 서론의 이해(후반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2-논리학 서론의 이해(2: 논리학의 개혁)

1)

앞에서 소개했듯이 논리학 서론의 앞부분은 형식논리학을 비판하고, 형이상학에서 칸트가 이룬 혁명을 소개한다. 헤겔이 칸트에서 주목했던 것은 판단형식 즉 범주가 그 자체에서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칸트는 선험철학의 혁명으로 나갔으나, 헤겔은 칸트의 선험철학이 판단형식을 좌표축으로 보는 주관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앞에서 이 지점이 헤겔이 칸트와 갈라지는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헤겔은 이런 비판으로부터 판단형식이 지닌 고유한 의미 즉 내용이 자기 운동한다는 주장으로 나갔다.

이제 서론의 뒷부분을 살펴볼 차례다. 헤겔은 처음 논리학의 문제로 되돌아와서 아직 논리학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형식논리학의 입장이 지배하고 있으니, 지금 논리학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형식논리학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차라리 전혀 없을 수는 없다”(S. 36)라는 감정이나 “논리학이 중요하다고 보는 여전히 지속된 관습”(S. 36) 때문일 뿐이다.

그 때문에 그이 시대 다양한 논리학 개혁 작업이 출현했는데, 헤겔은 그런 개혁 작업으로 두 가지를 거론한다. 한편에서 논리학에 대한 심리적 교육학적 생리학적 연구 즉 “극히 천박하고 사소한”(S. 36) 연구가 있다. 그것은 먹고살기 위해 “아주 간단하고 무미건조했을 내용을 어떻게 해서든 확장하려는 문필가나 교사가”(S. 36) 빠진 길이다.

다른 한편에는 형식논리학에서의 수학적 연구이다. 이는 논리적 조작을 좀 더 정교하고 다양하게 발전시키는 것이 있었다. 헤겔은 이를 ‘길이가 다른 막대를 추려내는’ 작업이나 ‘그림 조각을 서로 맞추는’ 유희와 다른 바 없다고 한다(S. 36). 이는 “몰개념적 양의 외면적 진행에 불과한 것을 개념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삼는” 것일 뿐이다.(S. 37)

전자나 후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전자는 훗셀이 논리연구에서 비판했던 19세기 말 심리주의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후자는 20세기 초반 프레게, 러셀 등을 통해 발전된 함수 논리학과 논리학의 수학화를 생각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입장은 어느 것이든 논리학은 단순한 형식적 학문이며 그 내용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어느 입장에서나 논리적 형식은 “고정된 규정을 이루면서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며 유기적인 통일체로 통합되지 못한다고 본다”(S. 32)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헤겔로 볼 때 이런 입장은 논리적 형식을 “죽어 있는 형식”(S. 32)다루는 것에 불과하다.

2)

헤겔은 이상과 같은 논리학의 개혁을 비판한 끝에 이제 논리학의 근본적 개혁이라는 과제에 직면했다고 한다. 그것은 논리학이 지닌 “형이상학적 의미를 고려하는”(S. 31). 즉 논리적 전개란 단순히 심리적 작용도 아니고, 수학적 원리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며, 존재자가 일반적으로 지닌 운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논리학의 형이상학화’(또는 ‘형이상학의 논리학화’)를 칸트가 시작했다고 한다.(S. 35)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언어의 범주는 존재자에 대한 경험을 일반화한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칸트는 판단형식이라는 범주로부터 존재자를 선험적으로 구성하려 했다. 여기서도 범주는 결국 존재자의 일반적 규정으로 된다. 그러므로 칸트는 판단형식을 다루는 논리학이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다고 본 것이다.

①이런 형이상학적 논리학의 출발점은 바로 ‘의식과 대상’, ‘사상과 사태’, ‘형식과 질료’의 합일이라는 학문의 개념 즉 절대지이다. 우리는 이런 개념이 칸트의 생각을 헤겔이 발전시킨 것임을 앞에서 언급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입장은 칸트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의식의 기나긴 역사적 발전 끝에 마침내 도달한 결과라고 말한다. 헤겔은 의식의 이런 발전 과정을 정신현상학에서 서술했으므로 정신현상학을 통해 학문 그 가운데서도 형식적인 학문인 논리학의 출발점이 마련되었다고 말한다.

“정신현상학은 순수한 학문의 개념을 연역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닌 한, 지금 이 논의는 순수한 학문의 개념과 그것을 연역하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S. 33) “따라서 순수학문은 의식의 대립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S. 33)

② 이 절대지, 순수학문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헤겔 논리학의 기본적 특징이 드러나게 된다. 절대지는 단순한 합일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를 정립하고 다시 이로부터 자기 내로 반성하는 개념적 운동을 전개한다. 이 절대지의 운동은 곧 판단형식의 자기 운동을 의미한다. 판단형식이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은 이미 칸트가 제시한 것이지만, 이 판단형식이 자기 운동한다는 것은 헤겔의 고유한 입장이 된다.

③ 헤겔은 이런 판단의 자기 운동을 정초하기 위해 반성 개념을 끌어들였다. 이 반성 개념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곧 ‘특정한 부정성’ 개념이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결과를 끌어내는 것 즉 부정은 특정한 부정이니, 이 부정으로부터 나온 결과는 어떤 내용을 획득한다.”(S. 38)

④ 이런 특정한 부정성 개념을 통해 판단형식의 운동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다. 이 체계는 누적적으로 전개되니, 헤겔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정으로 나온 결과는 이전의 개념을 내포하면서도 또한 그보다도 더 많은 것을 내포하며, 그 이전의 개념과 그것에 대립하는 것의 통일이 된다.”(S. 38)

4)

헤겔은 이런 판단형식의 자기 운동으로서 논리학에 대해 변증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대상을 계속 앞으로 움직여 가는 것은 대상이 그 자체에서 가지고 있는 변증법 즉 자기 내적 내용이기 때문이다.”(S. 38)

헤겔은 변증법이 지금까지 논리학에서 고립적인 부분으로 간주되면서, 그 목적이나 입장에 있어서 전적으로 오해되어 왔다고 한다. 헤겔은 구체적으로 플라톤과 칸트의 변증법 개념을 비판한다. 플라톤에서 변증법은 모순을 통해 가설을 해소하며 “무를 결과로 갖는 것”이다. 여기서 변증법은 “외면적이고 부정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었으며(S. 40) 따라서 그것은 “사태 자체에 속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다만 주관성의 광기에서 나온 공허한 오만에 이끌린 것”(S. 40)이라고 비판한다.

이어서 헤겔은 칸트의 변증법을 비판한다. 칸트는 변증법을 플라톤과 같이 주관의 자의적인 부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규정을 물 자체에 적용하면서 생기는 것 즉 “이성의 필연적 활동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변증법을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헤겔이 보기에 칸트는 이런 변증법을 통해 물 자체의 인식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무를 결과로 했을 뿐이다. 칸트는 이런 변증법이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자아내면서 “사유 규정의 자기 운동을 일으키는 혼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든 자연적 내지 정신적 생명의 일반 원리”(S. 40)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5)

헤겔은 변증법을 사유의 자기 운동으로 파악하면서 여기에는 ‘사변적인 것’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헤겔이 사변적인 것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가 문제다. 보통 사변적인 것이라면 가설추리 또는 유추를 말한다. 이 가설추리는 잘못된 가정에 기초하거나, 추리가 비형식적이어서 자주 혼란에 빠지기에 요즈음 거의 궤변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헤겔 당시에서 사변적인 것은 그런 뉘앙스를 지니는데, 그래도 헤겔은 자기의 논리학, 변증법을 사변적인 것이라 규정한 것이라면, 사변적인 것의 의미가 상당히 다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실제 헤겔은 사변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여기서 받아들여지는 변증법적인 것 속에 다시 말하면 대립물의 통일 속에 혹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 속에 사변적인 것이 깃들여 있다.”(S. 40-41)

‘대립물의 통일’ 즉 모순은 기본적으로 변증법적인 개념이라 말해진다. 반면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앞에서 “부정적인 것에서 나온 결과 긍정적인 것이 된다”는 말과 유사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반성 개념과 그것의 토대인 ‘특정한 부정’ 개념을 설명할 때 제시된 것이다. 이 후자는 플라톤이나 칸트의 변증법 개념 자체에는 원래 없었던 것이다. 헤겔은 모순을 이처럼 반성 개념을 통해 파악하면서 이를 사변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에서 특정한 부정 개념 때문에 즉 사변적인 사유 때문에 논리학의 체계가 형성되며, 이 체계는 단순한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변적인 사유는 개별자로부터 추상하여 일반자에 이르는 추상적 사유와 대립하는 것이다. 이 사변적인 사유는 이 운동을 전도하여 일반자가 개별자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것 즉 “개념에 준해서 인식하는 길”(S. 41)로 파악한다.

이는 단순히 목적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표면적으로는 개별자의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이런 대립과 모순을 통해 내면적인 일반적인 것이 자기를 실현하니, 헤겔이 자주 이성의 간지라고 규정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6)

이상에서 헤겔은 그의 논리학이 지향하는 일반적 특성을 소개한 뒤 마지막으로 논리학을 연구하는 의미를 덧붙인다. 헤겔은 일르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 비유한다. 언어를 처음으로 배우는 사람은 서로 고립된 다수의 규정과 그 각각이 지닌 직접적인 의미만을 발견한다. 그러나 언어에 능통하게 되면 다른 언어를 이 언어와 비교하면서, “자기의 언어가 갖는 문법 속에서 민족의 정신가 문화를 느낄 수 있다.”(S. 41)

이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논리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현실과 유리된 논리적 법칙만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를 다른 지식이나 학문으로까지 적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풍요로운 내용을 결여한 “아무 색깔도 없고 차가운 단순성을 지닐 뿐인 순수한 규정”(S. 42)으로만 나타난다.

하지만 여러 학문에 대한 좀 더 깊은 지식을 획득한 다음에 보면, 논리학은 “한낱 추상적 일반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수적인 것을 풍요하게 포함하는 일반성”(S. 42)이 된다. 마치 청년이 격언을 문자대로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생 경험이 풍부한 노인은 격언 속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이해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이 발휘하는 전체적 힘을 표현하는”(S. 42) 것과 같다고 하겠다.

헤겔에 따르면 “개념을 통해 전진해나가는 것에 친숙하게 되면서”(S. 43) 이제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런 지식이나 학문을 본질적 측면에서 포착하고 고수하면서 [불필요한] 외면적인 것을 벗겨내고 이런 방식으로 다양한 지식과 학문으로부터 논리적인 것을 끌어내는 힘”(S. 43)을 얻는다.

이렇게 헤겔은 서론을 끝맺으며, 다음으로 논리학의 구분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로 넘어간다.


☞ 이전 글 바로가기 헤겔 형이상학 산책11-논리학 서론의 이해(전반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