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기-세계체제론[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⑫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기-세계체제론[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⑫

 

강사 : 김성우(兀人고전학당연구소장)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에서 사건들의 의미를 살펴보자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되는 강좌열두번 째 시간에는 김성우 兀人고전학당연구소장의 안내로 근대 자본주의 체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하는 ‘세계체제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김성우 연구소장은 우리가 시사 문제들을 소비하는 방식을 지적하고, 월러스틴의 관점을 통해 무엇을 새롭게 볼 수 있을지 자문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한국사회에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적당히 자극적인 ‘사건’이 터지면 모든 매체의 관심사가 한 쪽으로 쏠리고 사람들은 그 사건의 추이에만 관심을 가지는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경향과, 그 사건의 의미를 다각도로 고려하기 보다는 그 사건이 끼칠 국가적 영향에만 주로 관심을 쏟는 내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성우 소장은 그런 단선적인 상황 분석과 아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계사적 시각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나열하는 역사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대규모의 관점에서 사건들의 의미를 탐색하자”는 것이 오늘 살펴볼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의 제안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사태의 소비’가 아니라 ‘사태의 통찰’이 가능하기 위한 총체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 분석의 ‘틀’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미국의 비판적인 사회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인 월러스틴이 주창한 독창적인 이론인 ‘세계체제론’에서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정치학, 경제학, 사회 구조, 문화라는 상자들로 나누어 분석”하거나, “국가들의 외적인 관계인 국제적인 틀로 이해하지 않고 장기간과 대규모의 시각에서” 세계를 분석하려고 한다.

 

사회과학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자

월러스틴에 따르면 세계를 분석하려는 다양한 분과학문들이 다루는 체계성은 “실재가 아니라 상상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현상들을 전문화하여 분석하는 것은 철학과 단절”되어 발전한 19세기 사회과학의 특징적인 한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각각의 학문들이 연구하는 대상 세계의 현실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각 부문들이 어우러져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그래서 다학문적인 방식이 아니라 일학문적인(unidisciplinary) 접근이 필요”하며, 여기에 적합한 것이 “역사적 사회과학으로서의 세계체제 분석”이라는 것이다.

▲ 김성우 兀人고전학당연구소장 ⓒ프레시안

 

김성우 소장은 월러스틴이 크게 세 영역에서 연구를 진행해왔다고 소개했다. 그것은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적 발달’,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현대적인 위기’, ‘근대 학문체계 분석을 중심으로 한 지식의 구조’가 그것이다. 그러한 작업들에는 “초역사적인 불변의 구조와 법칙을 탐구하고 정립”하려는 ‘형식주의적 사회과학’과 “사건 중심의 에피소드를 기술하는” ‘실증주의적 역사학’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서, “일직선적인 발전 또는 진보 개념을 비판”하는 월러스틴의 일관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그의 세계체제론이 “구조를 역사로부터 파악하고 특히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역사적인 생성과 팽창 그리고 위기와 소멸을 추적”하는 역사적 사회과학이라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월러스틴은 큰 안목으로 역사를 바라보려는 이러한 의도를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월러스틴은 애초에 미국 정치의 특수성을 밝히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는 머지않아 미국 정치에서 ‘인종’이란 변수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종 문제에 대한 관심은 그를 아프리카 지역연구에 매진하게 만들었고 곧 현재의 아프리카가 처한 조건은 유럽이 주도한 근대 세계경제 체제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월러스틴은 ‘세계체제(World system)’라는 분석틀을 선보이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체제’란 분석을 위한 관점이자 동시에 분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문제의식은 근대세계를 구성한 가장 근본적인 존재양식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출현과 확장 그리고 사멸에 대한 탐구에 집중되어 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몰락의 분기점에 근접하고 있다

월러스틴은 1989년 현실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에 대한 해석의 문제에서 기존의 일반적인 시각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1980년대말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연이은 구소련의 해체는 자유주의의 궁극적인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이 사건들은 (미국이 헤게모니를 가진) 자유주의가 붕괴되고 ‘자유주의 이후’의 세계로 확실히 들어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월러스틴에 따르면 근대 세계를 추동해 온 거대한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인 ‘발전주의’의 몰락을 암시하는 것이며, “맑스주의가 아니라 레닌주의적 발전주의의 몰락”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더 거슬러 올라가 68혁명도 근대적 세계체제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중도 자유주의와 복지 개념의 몰락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945년에서 1968년 사이에 진보적인 세력이 집권한 많은 국가들의 실패에서 보듯이, 68혁명을 ‘자유주의적 지구 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옳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만 하면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들이 체제를 의미심장할 정도로 개혁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이후’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세계경제 체제에 대한 전망을 시도하는 월러스틴은 “사실 경제는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자유주의라는 이념은 인권의 정당성이나 민족의 자결권 같은 보편적 권리를 주장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이 작동될 때는 사실 자유주의는 이 “권리들의 완전한 실행”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정치체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영속적인 지속을 위해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권과 민족의 권리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면,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할 이 불평등한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유주의의 맹점이 드러나면 이 체제 속에서 지속적인 이익을 얻을 수 없는 대다수 계급들에게 이 시스템의 유지가 정당성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또한 월러스틴에 따르면 “자유시장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 디지털 문명의 발전과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기업들에서 보듯이 늘 자본주의에서 막대한 이윤을 가능케 하는, 자본축적의 핵심은 ‘독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경쟁이 치열할수록 이윤은 떨어지기 때문에 독점자본은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마련이고, 그 독점체제의 유지를 위해 ‘국가’라는 이름의 법적 체제와 의회권력은 앞장서서 자본가들을 비호하기도 한다. 결국 국가나 시민사회와 분리된 ‘자유시장’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더욱 공허해짐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은 아직도 ‘대기업이 망하면 나라도 망한다.’, ‘규제를 더 풀어야 하고 아직은 나눠줄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김성우 소장은 “어쩌면 1980년대말의 세계변동은 1970년대말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의 태동으로 인해 10여년 지연된 것뿐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즉,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주기적인 팽창과 수축 과정 속에서 자유주의 이념의 돌연변이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윤율 감소를 막기 위해 인건비, 생산원가, 세금, 관세는 낮추고 자본의 권리는 무제한적으로 확장하며, 치명적인 위기가 발생해도 대기업은 공적자금을 통해 손실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이 ‘유연한 괴물’은 30년 동안 우리의 ‘상식’을 바꾸어 놓았다.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체제도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의 침체 속에서 헤게모니를 점차 잃어가고 있던 미국의 보수주의적 자본가들이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정보기술 혁명을 빌미로 기존의 세계경제 헤게모니에 도전적인 국민국가들의 보호주의를 타파하여 인건비와 관세를 낮추려는 일시적인 몸부림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오늘날의 자유무역협정(FTA)도 이러한 ‘반동적인 세계화 전략들’ 중 하나로서 자본주의 세계경제 자체에 내재한 오래된 구조적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김성우 소장은 월러스틴의 말을 빌어 “결국 이러한 반동적인 세계화 전략으로는 이 구조적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 근대 세계체제는 조만간 분기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다가올 분기점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가 모색해야 할 것은 “모든 모순이 해결된 몰역사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역사적인 대안체제로서 불평등의 해소라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월러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핵심의 자유노동과 주변의 강제노동 간의 조화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며 …… 노동이 모든 곳에서 자유로울 때, 사회주의가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도래하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종말과 함께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새로운 체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월러스틴은 “진정한 맑스주의, 정통 맑스주의를 찾는 것은 신화”를 현실 속에서 찾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 소장의 말처럼, 이념이 아니라 역사의 맥락적 분석에서 출발하는 “월러스틴은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인기 없는’ 학자일지도 모른다.”

결국 월러스틴을 따라 자본주의적 세계경제를 이해하자면, 오늘날의 세계경제란 기나긴 16세기(1450년~1640년)에 유럽에서 태동된 자본주의가 19세기 말 그 경계와 지배력을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결과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그 체제의 탄생 이후에도 1789년 프랑스대혁명, 1968년 세계 혁명이라는 큰 역사적 전환점을 거치며 끊임없이 자신의 작동방식을 변화시켜 왔다. 그보다 작은 지점들인 1968년 세계혁명, 1973년 오일쇼크, 그리고 2008년 가을부터 시작된 미국발 금융 위기 등도 세계경제의 역사적 변동을 설명하는 하나의 ‘국면’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더해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1876년 강화도조약과 개항과 이후의 식민지화, 1945년 광복 이후 민족분단과 전쟁, 1960년 4.19민주혁명, 1961년 5.16군사쿠데타, 1987년 민주화운동, 1997년 외환위기와 IMF체제로의 편입 등도 모두 우리의 ‘지금-여기’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성할 때 참고해야 할 변곡점들이 된다.

 

세계체제론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김성우 소장도 지적했듯이 우리가 ‘세계화’라고 부르던 것은 곧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편입이었고, ‘글로벌화’라고 부르던 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기실 영어만능주의에 길들여지고 미국에 더욱 종속되어왔던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미국 시각, 중국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김 소장의 말은 섬뜩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앞으로 나의 재산가치는 줄어들까’, ‘향후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을 가로 막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시안적 시각을 벗어던지고, “조금 더 넓게, 깊이 있게, 다르게 보고 느끼”려는 노력을 통해 결국 우리의 시각을 확장하는 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물론 자신의 조건을 망각하고 주류와 핵심에 서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월러스틴의 말처럼 “더 주변부적인 생산과정 참여자들”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우선이리라. 예를 들면, 개별 노동자, 그것도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이 아니라, 여성, 문화, 민족, 종교, 세대, 성정체성 등 다층적으로 구성된 ‘계급’ 관점을 통해 세계와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 새로운 창을 통해 보면, 소수자와 약자가 겪고 있는 불평등과 부자유는 얼마나 더 섬세하게 인식될까? 결국 세계체제라는 거시적 관점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포착해야 할 것은 ‘저기 사람이 저렇게 살고 있고 저것을 어떤 방향으로 개선하자’라는 미시적 관점이 아닐까?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우리가 갖고 있는 신념체계와 경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편견과 아집은 얼마나 뿌리 깊은가. 김 소장은 “자신이 떠올리고 있는 생각과 하고 있는 일에 은폐된 ‘전제’를 검토하지 않는 것이 바로 교조주의이자 근본주의”라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민족이라는 신앙과 계급이라는 신앙의 대립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보’의 미래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요즘”에,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1대 99(또는 20대 80의 사회)의 사회에서” 김성우 소장은 역사의 반복과 아이러니가 변증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성찰해보자고 제안했다. 물론 그 역사의 반복은 맑스의 말처럼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 전개되기 일쑤이지만 말이다. 더불어 그는 강의 말미에 수강생들이 월러스틴의 책을 직접 읽고 보다 넓은 시야로 세상의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인식해보자고 주문했다. 한편 프레시안에서도 정식으로 원고료를 지불한 월러스틴의 따끈따근한 칼럼들이 번역?게재되고 있으니 독자 여러분들도 쉽게 국제 문제에 대한 그의 깊이 있는 시각을 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나긴 혁명은 계속된다: 영국문화주의[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⑪

기나긴 혁명은 계속된다: 영국문화주의[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⑪

 

강사 : 현남숙(가톨릭대 초빙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왜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되는 강좌열한번 째 시간의 주제는 ‘영국문화주의’였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것은 프랑스에서 1960년대 이후 맑스주의의 갱신을 주창한 알튀세르에게 영향 받은 일군의 제자들이 사유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와 달리 영국에서 2차대전 후 영국에서 개진된 맑스주의의 한 흐름 속에서 사회변혁을 고민하던 일군의 학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당대를 어떻게 분석하고 사유했을까. 현남숙 카톨릭대 교수가 소개한 영국문화주의는 맑스주의적 관점을 통해 사회구조의 분석 틀을 선취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알튀세르의 고민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영국문화주의는 1950년대 후반 미국을 필두로 한 독점자본주의의 세계지배력 강화와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파시즘적 변환에 회의를 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기획하던 시기에 등장했다. 그것은 정치, 경제, 문화를 분리하여 “문화를 부차적인 것으로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야말로” 문화와 경제가 결합된 새로운 시대에 사회의 진정한 변혁을 이끌어내기 위해선 적합하지 않다고 비판한 것이다. 즉, 영국문화주의 연구자들은 경제적 토대와 그 위의 다른 상부구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지배방식에서 헤게모니의 역할, “제도와 문화의 물질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노동계층의 모순을 설명할 수도, 바로잡을 수도 없다”고 보았다.

경제 정책이 분배적 관점으로 조금 변화한다고 해서, 복지제도가 진보적으로 개선된다고 해서, 기득권 유지밖에 모르는 권력층이 잠시 의회권력을 잃는다고 해서 세상이 나아질 것이란 믿음은 이젠 순진한 착각이 되어버렸다. 그런 면에서 영국문화주의의 시야는 보다 넓고 그들의 인내심은 충분하다. 국가권력을 쟁취하여 정치경제적 혁신으로만 완수될 혁명이 아니라, 우리가 이루어야 할 진정한 혁명은 장구한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야 할 인간과 사회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성하고 개선해나가는 기나긴 혁명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정치혁명과 경제혁명을 포괄하는 ‘제3의 혁명’으로서 “인간과 제도에 관한 문화혁명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국문화주의(British Culturalism)라는 사상적 조류는 영국 사회주의 역사에서 신좌파(New Left)로 불리는 정치적 전통 위에서 발현되었으며, 영국문화이론, 문화유물론, 신(新)그람시주의, 버밍엄학파, CCCS(현대문화연구센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국문화주의의 연구자들은 무엇보다 ‘문화’라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 투쟁과 그 고유한 실천양식에 관심을 가지고, ‘문화혁명’이란 ‘사회적 존재와 의식’을 동시에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즉, 불평하고 부자유한 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정치적 실천 못지않게 노동계급과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문화적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선 영국의 문화주의가 극적으로 변한 만남과 이별의 몇 장면들 즉, 문화 연구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과 만났을 때,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것이 문화유물론의 중핵과 결별했을 때를 중심으로 이 지적 흐름의 단면을 살펴보자.

 

‘문화’가 ‘헤게모니’를 만났을 때

산업혁명, 부르주아 의회혁명, 사회주의 혁명, 민주화 혁명 등이 이룩한 성과와 한계 위에서,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악몽을 딛고서, 현대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더 행복해지지 않는가? 국가의 생산량은 늘어나고 대기업의 생산력은 계속 커지지만 왜 실질적 평등은 더욱 요원해지는가? 왜 피지배 계급의 하위문화는 자생성과 저항성을 잃고 지배 계급의 문화에 종속되기 쉬우며, 어떻게 문화적 지배에 의해 정치적 지배가 더욱 고착화되는가? “노동계급은 과거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이데올로기에 보다 철저하게 비판적이지 못하면서, 왜 지배계급이 만든 논리에 빠져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규정하는가?

이러한 의문들을 품었던 영국문화주의자들은 다양한 세대와 넓은 스펙트럼의 지향점을 가진 연구자들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이지만, 그들에겐 이론적 배경에 있어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에 입각하여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지배에 대처하기 위해 (정치와 경제에서) 문화로 관심을 돌렸다는 점이다.” 바로 “역사유물론의 실천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간파한 사람”인 그람시의 개념들이, 지배양식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위임된 헤게모니 체계로” 밝혀내는 방식 즉, 문화영역에서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강한 영국적 상황을 분석하는 이론적 자원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남숙 교수는 “문화주의는 역사적으로는 영국 맑시즘의 전통 안에서, 또 현대적 의미로는 문화연구라는 영역 안에서 문화를 통해 지배구조를 분석하고 이에 저항하고자 하는 공통의 에토스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사회적 동의를 얻기 위한 지적?도덕적 주도권”으로서, 군대나 경찰이 하는 방식처럼 억압적인 물리력이나 강제가 아니라,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갖추어진 지배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국문화주의는 “국가나 사회의 지배를 무력이나 강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인 동의에 의한 지배체계로 바라본다. 일상성 속에서 문화적 지배의 면면을 살펴보며, “국가와 시장의 대중지배, 힘이나 무력이 아닌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동의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것은 영국문화주의가 가진 독특한 시각인 것이다.

 

윌리엄즈와 홀이 그람시를 만났을 때

일찍이 그람시가에서 강조했던 것도 헤게모니를 활용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분석 자체가 아니라, 그 지배양식의 인식 속에서 대중이 주체로 자립하여 그들이 문화혁명에서 대항문화를 생산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의 생각을 이어 받은 문화주의에서도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인 하위 주체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실천을 중시한다. 그것은 영국문화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만든 레이먼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 1921-1988)가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는, “미완의 혁명을 추구해나가는 과정에서의 장구한 문화혁명”으로서 ‘문화유물론(cultural materialism)’이 지향하는 바인 것이다. 그는 문화유물론을 역사유물론과 관련지어 “사회적이며 물질적인 생산적 과정으로서의 문화이론, 생산의 물질적 수단의 사회적 사용으로서의 특수한 실천이론”으로 규정했다.

레이먼드 윌리엄즈(1921~1988)/ 출처: suite101.com

 

그 자신이 노동계급의 아들인 윌리엄즈는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보다 정교화하여 ‘지배 헤게모니(dominant hegemony)’와 ‘대항 헤게모니(counter hegemony)’ 혹은 ‘대안적 헤게모니(alternative hegemony)’로 구분하고, “헤게모니는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늘 사회적 관계의 ‘사이’에 존재하며, 끊임없이 전복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노동계급의 문화를 분석하면서 지배문화에 의해 규정되고 구성된 그 문화 내부에 지배 이데올로기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것에 저항의 역량을 기를 수 있는 대항문화(counter culture)가 역동적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미 “노동계급의 정서적 구조에 새로운 의미 체계, 가치관, 관행,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것(the emergent)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남숙 교수가 소개한 또 한명의 문화유물론자는 스튜어트 홀(Stuart Hall, 1937-)인데, 그는 자메이카 출신으로 옥스퍼드대에서 수학했으며 윌리엄즈를 통해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접했다. 윌리엄즈가 영국문화주의를 “역사유물론의 새로운 변형으로 이론화”했다면, 그는 “그 토대를 딛고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문화의 영역과 사회적 갈등의 영역을 계급을 넘어 인종, 세대, 종족성, 식민적 경험 등의 다른 배제된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홀은 사회적 삶에서 개인들은 다양한 정체성을 복합적으로 형성하게 되고 진보적 문화의 확장 역시 다양한 집단적 정체성의 블록을 통해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홀은 대처리즘 시기의 이데올로기 분석으로 유명한데, 그는 “대처리즘을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고 대처가 ‘시장에서의 자유주의와 일상에서의 보수주의’를 기치로 대중을 지배하는 방식을 관찰했다. 당시 한편으로는 복지정책 축소와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의 가치, 전통적 여성상, 근면한 노동자상”을 강조하던 지배 이데올로기는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었고 대중은 이러한 문화적 지배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는 대중들의 동의를 자발적으로 얻어 합법적이고 도덕적으로 “주도권을 얻어가는 대처리즘에 속수무책이었다.” 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변혁의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여전히 교조적 맑스주의의” 미래만을 되뇌었던 것이다.

여기서 홀은 문화적 주체가 복수의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고, 중층적으로 결합된 주체의 구조를 설정하기 위해 ‘접합(articul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트레일러를 트럭의 운전실과 떼었다 붙였다할 수 있는 것처럼 사회적 관계 속의 주체들은 어떤 조건 아래에서 서로 서로 ‘탈접합’되거나 ‘재접합’되는 연결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현남숙 교수는 홀이 “필연적으로 결정되거나 절대적이거나 필수적인 것이 아닌, 다양하고 서로 구분되는 요소의 결합”이라는 관점을 통해 문화연구의 지평을 넓혔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계급+세대, 계급+인종, 계급+여성+식민경험 등과 같이 문화연구에서 집단 내의 세부적인 차이까지 고려하며 다양한 주제와 요소의 접합이 가능해진 것이다.

 

‘문화’가 ‘계급적 관점’과 헤어졌을 때

만약 그렇게 ‘계급’과 ‘여성’이 중첩된 여성의 현실에 관한 영화가 있고, 그 영화에 대한 비평에서 연구자가 “생산관계에서의 억압과 저항”을 고려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단지 여성을 대상화하는 영화와 여성의 문제만 다룬 비평이 되고 만다. 윌리엄즈와 홀이 주장했던 문화비평은 단지 문화 자체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더불어 노동계급의 의식변화를 유도하는 것에 그 주안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영국문화주의는 제도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그 정치적 실천성을 잃어버렸고, 문화를 소비적 행위로 용해시키는 단순한 문화연구로 전락하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구조주의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이론들이 문화연구의 방법론을 풍부하게 해주더라도, “헤게모니가 동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그 너머의 진정한 현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영미 문화주의는 문화유물론적 관점이라는 문제의식을 거의 상실하고 “국적불명의 학제간 연구”를 표명하거나 시민운동의 한 경향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일상문화 연구가 사회분석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화가 “토대와 분리되는 순간, 인간의 사회적 존재조건에는 무심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뜻에서 유의미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남숙 교수는 영국문화이론이 “맑스주의와 가깝든 멀든, 문화연구라는 하나의 ‘의제’를 형성했다”고 그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바라본다면, 영국문화 이론은 처음에는 문화‘유물론’이었지만, 지금은 ‘문화’유물론이 되어버린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영국문화주의가 그 유물론적 문제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비평의 정치’를 넘어 그러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문화의 물질적 구성’에 관한 분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저항적 이론을 통해 학문적 관점과 성과 속에서 대중의 대항문화가 온전한 평가를 받을 수 있고, 99%의 사람들이 역동적으로 구성해내는 문화혁명의 과정은 1% 지배문화의 허위성을 제 스스로 폭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치혁명도 산업혁명도 인간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주지 못했”다면, ‘그럭저럭 먹고살만하기에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고 이 세계가 그냥저냥 만족스러운’ 사람들의 무심함이 우리 곁에 넘쳐난다면, “기나긴 문화혁명”의 시간은 계속 진행될 것이다. 아니,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다르게 사유하는 3가지 방법 :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⑩

‘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다르게 사유하는 3가지 방법: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⑩

 

강사 : 박기순(충북대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알튀세르가 남긴 것들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루이 알튀세르의 작업은 맑스주의 내부에서 맑스주의 이론을 개조하고 쇄신하려는 시도들 중 “사실상 최후의 것”이었다. 그는 “맑스주의의 전화(轉化)라는 정치적 문제의식 속에서 사유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우리시대의 사상가였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많은 철학적 논제들과” 비판의 무기가 될 개념들을 지적 유산으로 남겼다. 그런데 현실을 정치하게 분석해 낼 수 있는 ‘맑스주의의 과학성과 비(非)교조성’을 강조했던 그의 작업은 어쩌면 그 이론 자체보다 그것으로 인한 알튀세르적인 효과와 영향이라는 면에서 오늘날 더욱 논쟁적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치열했던 이론적 투쟁은 완수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고, “그가 남긴 유산은 그의 후세대에 의해 비판적으로 전유(傳諭)되고 계승되고 있다.”

또한 알튀세르가 추구하던 비결정론적이며 비환원론적인 이론적 경향과 이단적이고 개방적인 지적 태도로 인해 그의 사상은 “비판적 대결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해되거나 수용될 수 없는 사상, 새롭게 변용되고 굴절됨으로써만 계승되고 재개될 수 있는 사상”으로 이해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강좌의 열 번 째 강의에서는 충북대학교 철학과 박기순 교수의 안내로 ‘포스트 알튀세르주의자들로서의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를 만나 보았다. 이번 강의의 고갱이는 그들이 ‘포스트 알튀세르주의자들’로 묶일 수 있다면, 그들은 어떤 관점에서 또한 어떤 거리에서 알튀세르를 ‘계승’하거나 ‘극복’하려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서 사유하는 법을 배운 직간접적인 제자들이면서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각각 고유한 방식으로 그를 극복하려고 하는, 생존하는 프랑스 현대철학자들 중 가장 각광 받는 세 명의 철학자들을 알튀세르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자.

 

▲ 박기순 충북대교수 ⓒ프레시안

그런데 ‘알튀세르와 함께’ 우리 시대의 문제, 특히 정치적 문제, 아니 정치 자체에 관해 사유하고 있는 그들이 우선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맑스주의로 대표되었던 정치적 운동과 해방의 이념이 가졌던 난점과 실패”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즉, 맑스주의 내부에 만연한 경제 환원론적인 입장에 대한 알튀세르의 비판적 작업을 이어 받은 그들에게 주어진 보다 분명해진 사유 과제는, 사회 각 부문이나 경제적인 영역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정치의 고유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를 독자적인 작동 원리를 가진 하나의 고유한 영역으로서 대상화하고 개념화할 때 드러나는 난점은 분명한 것이었다. 고유한 영역으로서 ‘정치 자체’로의 회귀는 “현실에서는 정치의 소멸”, 즉 정치를 단순히 행정 기능과 국가 관리의 역할로 축소시키고 사회적?경제적 갈등의 조정으로만 바라보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 정치 개념의 협소화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듯이 자본의 침식과 그로 인해 공동체가 가진 정치적인 역량의 침체와 쇠퇴를 동반한다. 그렇다면 정치의 고착화된 사유방식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 가진 무한한 잠재성과 급진성을 보존하며, 그것을 어떻게 양화시키거나 희석시키지 않고 정치의 고유성과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가 가진 주요한 문제 틀은 “정치의 개조, 혹은 고유한 의미의 정치의 가능성”을 ‘정치적 주체성’이 가진 의미와 한계 속에서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발리바르와 인권의 정치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발리바르(Etienne Balibar, 1942~)에게 맑스 혹은 맑스주의는 “우회할 수 없는 지점으로서 그에게 근본적인 사유의 지평을 제공”했다. 그는 맑스주의가 자신의 역사 속에서 드러낸 한계들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의 극복을 여전히 맑스주의의 지평 속에서 사유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스승인 알튀세르의 작업을 가장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도달한 지점, 즉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가진 난점에서부터 그의 독자적인 사유를 개진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이라는 테제가 가진 난점에 대한 답변이다. 즉, 알튀세르가 취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론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기본적으로 경제적 생산관계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위한 장치이자 물질적 도구라는 측면에서, 이데올로기는 구조를 작동시키는 요소로서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하고 그 재생산의 메커니즘은 설명하지만, 그 전화는 설명할 수 없는 기능주의적인 이론이라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과학’에 대립되는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과, 그가 강조한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양립가능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는데, 발리바르는 이 난점을 ‘초개인성(transindividuality)’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박기순 교수는 발리바르가 말하는 주체화가 집단적인 과정임을 강조하면서,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은 어떤 관계들과 공동체성의 효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인의 개체성은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거나 변형”된다는 것이다.

또한 발리바르는 맑스와 알튀세르가 공유하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여,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자들의 체험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 또는 승인과 저항 또는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 피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이데올로기가 “정의, 자유와 평등, 노동, 행복 같은 근대적인 이념들에서 보이는 보편성의 형식을 드러내며, 피지배자들의 이 가상적 보편성의 경험은, 단순한 가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 보편성의 이념 때문에, 기존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물질적 토대가 될 수 있”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박기순 교수는 발리바르가 “‘보편성의 정치’, ‘인권의 정치’라는 개념을 주권 개념에 근거한 근대정치의 전화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인권은 인간의 어떤 자연적인 고유한 설질로부터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획득되고, 상실되고, 재규정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권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태에 국한되지 않는 초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권’ 개념이 끊임없는 시험을 통해 재정식화를 요구하는 유동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시민권’ 개념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인권은 어떤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재해석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 그 자체이다.” 이처럼 인권은 그 내용상 미결정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정치공동체에서 법적 합의를 통해 시민권의 형태로 규정될 수밖에 없지만, 그 본성상 늘 시민권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하는 ‘권리에 대한 권리’라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인권 개념의 난점은 그것이 시민권과 전면적으로 결합할 수도 결별할 수도 없다는 것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박 교수는 발리바르의 이러한 인권 개념은 데리다가 정의(justice)에 관해 말한 것 처럼 어떤 ‘무한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권은 민주주의와 동의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 인권 개념 속에서 “민주주의에 특징적인 본질적 무한성”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권이 무한성으로서 이해되는 한, 그것에 기초해 있는 민주주의 또한 무한성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민주주의 원리이자 정치의 원리로서의 이 인권을 ‘평등한 자유’ 또는 새로운 조어로서 ‘평등-자유(?galibert?)’라는 개념을 통해 표현했다. 박 교수는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평등과 자유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함축하여 서로의 요구를 제한하지 않는 요구의 절대성을 표현한다. 둘째, 평등-자유는 보편성을 함축하여 모든 인간에게로 확장되는 인권, 즉 권리의 보편화를 함축한다. 셋째, 평등-자유는 정치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권리,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의미한다.”

결국 발리바르에 있어 “인권, 민주주의, 정치는 모두 동의어”가 된다. 그에게 인권은 근대 사회계약론 모델에서 초역사적이며 초월적인 개념으로만 설명되던 ‘전(前)-정치적’ 단계의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갖는 권리가 아니라, “시민상태에 내재하고 있는 ‘정치적 계기’로서, 즉 ‘정치의 장소’로서 재규정”되는 권리이다.

 

바디우와 진리의 정치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는 발리바르에 비해 1960년대에 알튀세르가 개진했던 이론적 편향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에는 알튀세르의 유산을 자신의 철학적 체계 속으로 전유하여 새로운 의미를 가진 철학적 개념들을 생산한다. 박기순 교수에 따르면, “이 전유와 계승이 무엇보다도 잘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주체(sujet) 혹은 주체성의 문제이다.” 즉, 알튀세르는 정치를 “어떤 특정한 원리나 조건에 의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귀결이 아니라”,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구조주의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진영 선택’을 통해 이루어지는 어떤 “주체성의 표현”으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박 교수는 바디우가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으로 설명되는 이러한 입장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의 ‘존재와 사건’이라는 독자적인 개념을 형성했다고 설명했다.

바디우에게 있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하나의 대상’으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적인 전체를 거부하는 ‘다양체(le multiple)’로 있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주체’는 어떤 원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름을 붙이면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는 어떤 정치적 ‘사건’의 효과와 귀결을 탐색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치’에 관한 문제에 있어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주체를 상정하지 않으면서도 ‘주체적인 것’의 사유 가능성을 정초하는 것이었다.

특정하게 주어진 어떤 체계의 원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치적 ‘사건’이 발생한다면, 이 사건은 어떤 해석의 대상도 아니며 오직 명명의 대상일 뿐이다. 바디우에게 ‘정치’란 이렇게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승인으로서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 행위로부터 시작되어, 이 명명된 사건의 귀결들에 대한 탐색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명의 귀결들과 효과들로서 사후에 구성되어지는 것이 바로 정치적 행위를 통해 생산될 수 있는 것 즉, ‘진리(v?rit?)’이며, 바디우는 이 과정을 ‘진리절차’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이 사건에 의존해 있는 요소들을 구별하여 사건의 의미를 구성하는 이 모든 절차를 ‘충실성(fid?lit?)’이라고 개념화하며, 이 진리절차를 구성하는 국지적 지점들을 ‘주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디우에게 정치를 통해 구현되는 “진리는 이렇게 전투적 주체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물론 프랑스혁명에서 보듯이 그 사건이 경과되면 정치적 급진성의 의미가 축소되고 왜곡되며 그것의 영향력도 안정화에 접어들지만 말이다.

현대철학에서 거의 폐기된 ‘진리’ 개념을 새롭게 비틀어서 바디우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건’을 통해서만 생산되어 잠시 드러나는 그 ‘진리’는 지식을 통하여 사후에 표상될 뿐이다. 그리고 진리를 생산해 내는 과정 속에서 각각의 절차는 스스로의 작업이 진리인지 말할 수 없으며, 그저 진리에 무관심하게 고유한 활동에 전념하여 그 사건을 통해 진리의 명명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철학적 작업이 된다. 그런 면에서 바디우에게 ‘철학’이란 정치를 사유하는 장소나 정치이론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들의 조건 속에 존재하는 자기발생적 사유 활동, 행위”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바디우의 ‘주체 없는 주체성’ 개념을 맑스주의와의 연관 속에서 설명하자면, 그것은 주어진 상황인 사건들의 연관 속에서 선택과 결정을 내리고 프롤레타리아트적인 입장을 취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곧 입장의 정당화를 위한 방식이 아니라 해당 사건의 의미를 밝히는 ‘선언’과 그에 뒤따르는 ‘행위’들로 대변되는 ‘전사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디우는 “맑스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과감하게 선언했다. 그에게 있어 맑스주의는 “비정합적인 전체에 붙여진 하나의 비어 있는 이름이며,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의 이름들은 독특한 정치적 사유들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맑스주의자들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정합적 이론 체계를 가진 맑스주의의 한 경우로서 그들을 볼 것이 아니라, 알튀세르의 지적 투쟁 또한 “정치에 대한 하나의 고유하고 독특한 사유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랑시에르와 비분리의 정치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re, 1940~)는 오늘 다루는 세 명의 철학자들 중 알튀세르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며,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한 거부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전개해나갔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알튀세르 입장의 문제점은 정치적 행위자들이 실천하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은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진리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엘리트주의’라는 것이었다. 정치적 행위자들로서 대중들의 능력을 불신하고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입장은 ‘사유하는 지식인 집단’과 ‘사유하지 못하고 생산하는 대중 집단’의 선 긋기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적인 것과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의 구분, 말할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리, 교육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분리에 대한 저항에서 랑시에르는 ‘출발’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분할의 논리’와 부르주아 기득권 세력이 늘 사용하는 ‘지배를 위한 언어’에 대한 비판을 통해 랑시에르가 가진 문제의식의 핵심은 ‘대중은 스스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랑시에르는 정치적 계몽주의, 정치적 주체에 의한 정치적 해방이라는 인식을 애초부터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근원적 평등’은 정치적 목표의 도달점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인 것’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정치적 분할에 관한 조건을 제거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정치적인 입장인 것이다.

박 교수는 알튀세르와의 결별 이후 랑시에르가 오랜 시간 동안의 은둔 작업 끝에 내어 놓은이라는 저작을 통해 19세기 중반의 노동자들은 자본이 규정한 그들의 생활양식을 스스로 부정하고 가장 정치적인 행위를 보장하는 자율성을 획득했음을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낮-노동과 밤-휴식의 반복이라는 ‘시간’의 분할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통제하고 존재양식을 규정하려 했던 자본의 규율에 저항하여,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고, 토론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생산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 자기 자신과 싸우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힘과 가치에 대해 자각했다. 이러한 정치적 주체화와 그 역량에 관한 질문과 답변에서 박 교수는, “정치적 무대에 오르기 전에 각성과 훈련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대 위에서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힘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랑시에르에 따르면 “한 시대의 획을 그었던 맑스주의의 전통은 (현실 맑스주의 체제의 붕괴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가속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이제 실패로서 체험되고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맑스주의의 실패는 한 사상적 조류의 패배를 넘어서 “역사의 진보와 혁명에 대한 믿음의 붕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이 붕괴로부터 상반되는 두 가지 현상,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보았다. 그것은 먼저 “정치에로의 회귀”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의 종말”이다.

즉, 경제적인 힘(생산력)과 사회적인 힘(계급 실천)과 그것의 결합에 의한 혁명이라는 맑스주의의 정식화된 “믿음의 붕괴는 자연스럽게 고유하게 정치적인 것, 사회 및 경제적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치의 고유성으로의 회귀를 추동”했지만, 실상 이러한 흐름은 현실 속에서 정치의 고유한 공간을 “공장이나 거리가 아니라 의회, 정부기관, 사법기관”으로 한정해버렸다는 것이다. 즉, “정치는 사회를 구성하는 상이한 이익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전문가들의 업무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탈정치화에 맞서 랑시에르는 정치를 재사유하려고 한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그 재사유의 출발점은 젊은 시절의 지독한 스승이었던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지점이었다.

 

다르게 사유하기의 어려움

강의와 질의응답은 세 시간이나 이어졌지만, 이 시간 동안 대표적인 포스트 알튀세리안들로 불리는 걸출한 현대 철학자들의 저마다 다른 생각들을 (축약으로 인한 오해의 덫을 감수하며) 일반인 수강생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수강생들은 프랑스 철학자들을 통해 방금 익힌 새로운 개념과 입장들을 곧바로 현실과 역사 문제에 적용하여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개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근거로 그 개념의 적합성을 따지는 것은 손쉬운 일이지만, ‘다르게 사유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보는 과정은 더 오랜 시간과 열정을 요구한다.

초코파이로 저녁의 허기를 달래가며 강사 선생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는 이 강좌의 모든 수강생들과 더불어 필자도 생각의 지도를 넓혀 나갈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오늘날 ‘진보 정치’를 표방하는 정당이 지향하고 있던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들이 어떻게 편협한 파벌주의나 전체주의적 문화와 한 몸이 될 수 있는지를 목도하면서, 나의 언어로 그것을 분석하고, 이해하여, 되풀이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사유 과제이기 때문이다. 자기성찰에 대한 불감증과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의심의 부족, 곧 소크라테스가 죽어가며 질타했던 ‘반성하지 못하는 삶’은 저 숱한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민중의 고난을 낳고 파렴치한 악덕을 쌓아 왔던가.

모든 교조주의에 반대한다 -루이 알튀세르[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⑨

모든 교조주의에 반대한다 -루이 알튀세르[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⑨

 

강사 : 문성원(부산대교수)
후기 :?조배준(한철연회원)

 

강좌의 제2막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총 16강으로 함께 기획한 강좌 <마르크스주의 사상사>가 이제 절반 넘게 진행되었다. 지난 8강까지의 강의들인 “제1부 맑스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까지”가 근대성의 핵심인 주체 중심적 사유에 근거한 이론들에 대한 일별이자 성찰이었다면, “제2부 알튀세르에서 지젝까지”는 보다 탈주체적인 관점에서 범맑스주의 사상 진영 안에서 현재 진행중인 논쟁들을 점검하고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보편적 주체를 중심으로 개진되는 이전의 맑스주의와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실패와 이론적 혼종성을 통해 맑스주의 내의 탈주체적 사유라는, 제1부와 제2부의 구별 지점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2차 대전 이후 전체주의적인 근대성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속에서, 맑스주의의 끊임없는 갱신도 모더니티의 새로운 기획 혹은 포스트 모더니티의 구상과 함께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현대 사상의 분기점을 살펴보기 위해 제9강에서는 문성원 부산대 교수의 소개로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를 만나 보았다. 예민하면서도 자유롭게, 치열하면서도 고통스럽게 살았던 이 문제적 인간은 기존의 맑스주의에 대한 해석을 비판하며 구조주의적 시각에서 맑스를 새롭게 이해하고 맑스주의의 ‘과학성’에 대해 역설했다. 강의 중간에도 그 ‘과학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는데, 알튀세르가 맑스주의에 차용한 관점들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 프랑스 철학 전반과 이번 강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1960년대 맑스주의와 구조주의가 만났을 때 일어났던 화학적 변화와 그것이 가져온 맑스주의의 새로운 전기와 그 한계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도 다음 시간까지 함께 고민해봐야 될 지점일 것이다.

반(反)목적론의 맑스주의

문 교수는 알튀세르의 입장을 설명하며 그가 기존의 맑스주의가 갖고 있던 역사주의, 경제주의, 환원주의, 주의주의(主意主義), 인간주의에 반대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한 모든 사상적 대척점을 문 교수는 “반(反)목적론의 맑스주의”로 요약하며,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있는 목적을 상정할 수 없는 투쟁의 역사라는 관점 속에서 알튀세르는 기존의 맑스주의가 갖고 있던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고 말했다. 역사를 바라보며 어떤 ‘목적’을 배제하면 그 목적을 상정하는 ‘주체’와 그 주체가 가진 ‘의지’를 탈각하게 되고, 보다 넓은 객관적 시야에서 사회 각 영역들의 구조와 각각의 자율성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아직 스탈린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소련 중심의 ‘정통 맑스-레닌주의’를 비판하는 한편, 여기에 대한 반발로 서구에서 일어난 이른바 ‘인간주의적 맑스주의’ 또한 거부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조주의’에 반대하는 동시에 교조주의에 대한 ‘우익적 비판’에도 반대”한다는 것이다. 문 교수는 알튀세르가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의 모든 문제를 ‘토대’인 경제로 환원해서 설명하려는 ‘경제주의’와, 인간의 자유 의지나 의도 따위를 강조함으로써 그 경제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주의’를 “맑스주의 내에 존재하는 상호보완적인 한 쌍의 잘못된 경향“으로 보고, 이 두 가지 모두를 극복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2차 대전 이후 이러한 맑스주의의 사상적 혼란은 이론의 자율성을 훼손시키고 맑스주의 이론을 왜곡하고 빈곤하게 만든 스탈린주의에서 기인한다. 여기서 알튀세르에게 중요했던 것은 맑스주의가 스스로 스탈린 시대의 오류를 해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위기의 시대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 시대의 문제점을 스탈린 개인의 잘못이나 개인 숭배 탓으로 돌리는 것”이나, ‘인간과 소외와 해방’에 관한 들뜬 철학적 담론들은 맑스주의 이론과 관계 없는 비과학적인 비판이었고, 정세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할 수 없는 서구 맑스주의의 무기력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잉여가치론을 통해 노동가치설과 자본증식을 함께 설명할 수 있었던 맑스의 작업처럼, “맑스의 저작을 제대로 해석하여 맑스주의의 과학성을 확립하고 뒷받침”하는 일이었다.

그 작업에 착수한 알튀세르는 청년기 맑스의 저작에 대해서 “‘주체가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면을 역시 그 주체의 힘으로 극복해 나간다’는 근대의 전형적인 주체 중심적 사고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런 점에서 헤겔의 소외론을 변형시킨 청년 맑스의 소박한 휴머니즘적 입장으로만 맑스주의를 설명하는 기존의 입장은 알튀세르에게 모두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러한 청년 맑스는 진정한 맑스의 얼굴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포이에르바하와 “헤겔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난 맑스, 반(反)목적론적 역사 과학을 정초한 맑스, 그러나 이 과학을 철학적으로 제대로 개념화하지 못한 맑스를 상정”했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헤겔주의가 가진 목적론적ㆍ전체론적 사유를 집요하게 비판하며 “맑스의 사상과 헤겔 철학이 사실상 무관하다는 점을 자신의 스승인 (프랑스 철학자)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이란 개념을 빌려와 밝히”려 했고, “헤겔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맑스의 과학(변증법적 유물론)과 철학(맑스가 독자적으로 전개한 역사 유물론)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려 했다.

맑스주의의 과학성을 재건하려는 이러한 알튀세르의 분투 과정은 서구 진보 진영에 큰 영향을 끼치며 맑스주의의 다양한 논쟁 지점들을 생산했지만, 때로는 맑스와 맑스주의에 대한 부정확하고 왜곡된 주장을 포함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문 교수는 알튀세르는 이론적 완결성을 지속하지 못하고 말년에 이르러 스스로 맑스의 과학성에 대한 입장을 수정했으며, 그의 이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사상에 대한 다른 평가들도 그가 서구 진보 진영에 준 영향처럼 논쟁적이고 다양한데 “흔히 따라붙는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라는 딱지 말고도, ‘과학주의’, ‘반(反)경험주의’, ‘엘리트주의’, ‘마오(모택동)주의’,” 심지어 “‘신(新)스탈린주의’와 ‘반(反)스탈린주의’의 같이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투쟁은 맑스주의를 보다 생산적이고 현대사회에 적합한 것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고 사회와 역사를 좀 더 세련되게 분석하는데 참고할 지점들을 제공했는데, 여기서는 강의에서 강조되었던 몇 가지 개념들만 짚어보도록 하자.

‘생산’과 ‘이론적 실천’

알튀세르는 한 사회가 일정한 도달점을 향해 나아간다는 목적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경제주의 같은 환원론을 벗어나기 위해 “서로 자립성을 갖는 여러 영역들의 복합체”로서 사회를 조망하려고 했다. 기계상품을 제조하듯이 사회와 역사를 하나의 메커니즘 속에서 ‘생산하고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짜맞춰진 이 기계와 같은 구도를 분쇄하려고 했다.

알튀세르/ 출처: http://blog.aladin.co.kr/sinthome/4021316

그래서 알튀세르는 그 ‘생산’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개념을 반(反)목적론적인 것으로 변형하여 사회의 각 영역에 도입하여, 각 부문이 상대적인 자립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은 어떤 주체에 의해 추진되거나 지배되는 근대적인 의미의 생산이 아니라, 주어진 생산 수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보다 객관적인 생산 형식을 말한다. 문성원 교수는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의 철학을 모던포스트모던의 경계에 선 역사철학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알튀세르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과학, 이데올로기 영역 등도 생산의 구조를 가진다는 점과, “경제 영역이 다른 영역을 일방적으로 규정하거나 ‘결정’하거나, 모든 것을 경제 문제로 ‘환원’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물론 알튀세르에게 있어 때로는 정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 한 사회 속에서 다양한 실천 영역을 심급이라고 부르더라도 전체의 방향을 규정하는 것은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의 결정’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구조 내의 인과성을 ‘중층결정’이라는 말로 설명하려 했다. 결국 그는 사회를 자립적인 영역들이 ‘구조적 인과성’ 속에 얽혀 있는 거대한 ‘복합적 전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또한 알튀세르는 학문 영역의 과학이나 이론적 활동도 하나의 ‘생산’ 활동으로, 곧 ‘이론적 실천’으로 취급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정치나 문화의 영역도 경제 영역과 마찬가지로 ‘생산’이나 ‘실천’이라는 구조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하면, 일방적인 환원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튀세르에게 있어 ‘과학’은 “어떤 외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기준은 과학 자체 내에 있는 것이며, 과학의 특성은 그 차원에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내는 데 있다.” 이것을 알튀세르의 ‘반(反)경험주의 과학관‘이라고 부를 때, “과학이 생산한 지식이 실재의 대상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참된 지식이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이러한 “지식과 실재 대상 사이의 관계를 ‘전유(專有;appropriation)’라는 말로 설명한다.” 지식이 실재 세계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실재의 대상은 지식 생산과정에 대하여 ‘절대적인 준거점’으로 남아서 지식 생산의 영역은 실재 대상 영역에 대한 지식을 산출해 낸다. 그래서 우리가 실재의 대상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지식은 이렇게 생산된 지식뿐이다. “이 지식을 넘어서서 실재 대상과 이 지식 사이의 실제적인 관계를 조망하려는 것은 헛된 욕심이다.” 결국 ‘전유’라는 것은 지식이 경험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지식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계급은 계급투쟁에 의해 구성된다.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구조와 인간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문 교수는 이렇게 답변했다. “알튀세르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거부하고, 역사는 주체의 의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그치지 않고, 아예 주체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있어서는 특정한 ‘계급’도 변혁의 주체가 아니라, 주어진 구조와 상황 속에서 ‘생산’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도 역사는 계급투쟁에 의해 발전한다는 생각을 버리진 않지만, 그 과정은 어떤 각성된 주체가 아닌 계급투쟁을 통해 구성되는 계급에 의한 것이지요.” 알튀세르에게 역사란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으로서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투쟁”이라는 것이다.

한편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내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재해석하여 근대 세계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를 가능케 했다. 고전적 맑스주의에서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알튀세르는 목적론에 대한 거부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실재 존재양식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그 어떤 사회에서나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무의식은 영원하다’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그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아닌 물질적 존재를 통해 실현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불리는 학교, 교회, 공장, 가족 등에서 이데올로기는 ‘부름’과 그에 대한 ‘응답’의 과정으로 개인을 주체로서 호명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주체를 생산해낸다.

결론적으로 문성원 교수는 알튀세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맑스주의 안에 있는 목적론적이고 결정론적인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비록 자신은 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구조주의적 문제틀을 도입함으로써 ‘과학적’ 맑스주의를 새롭게 확립해 보려 한 철학자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는 애당초 이질적인 것을 결합하려는 무리를 안고 있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알튀세르의 말처럼 목적론적인 색채를 가진 것이라 할지라도, 과연 “이 모순의 설정을 떠나서 맑스주의가 맑스주의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도는 맑스주의의 “한계와 맞닿은 극한적이었던 것”이며 그의 작업은 19세기 사람인 맑스를 20세기의 탈근대적 공간에 치열하게 투영시키려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고 90년대에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어 ‘인기 있었던’ 알튀세르가 오늘날에는 왜 자주 회자되지 않는 것일까?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들던 당시 시대상황도 한 몫 했겠고, 우루루 달려들었다가 ‘유통기한’이 다 되면 가차 없이 창고에 넣어 버리는 한국지성계의 고질적 관행도 한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알튀세르를 읽다 보면 결국 궁극적인 물음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 ‘결국, 무엇이 맑스주의인가?’ ‘결국 중요한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면, 맑스주의는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한 때 ‘다시 맑스로 돌아가자!’라고 소위 맑스주의자들은 외쳤었지만, 문 교수는 강의 말미에 “맑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제 강좌 후반부로 갈수록 다시 질문을 벼릴 필요가 있겠다. 맑스를 버리면 맑스가 달리 보일까? 다음 시간에는 알튀세르의 성과와 한계 위에서 그의 제자들과 후학들이 어떤 사유를 종횡무진 펼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야만과 불통을 넘어서 -프랑크푸르트학파[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⑧

야만과 불통을 넘어서 -프랑크푸르트학파[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⑧

 

강사 : 이현재(서울시립대 HK교수)
후기 :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서유럽의 혁명이 좌절된 후 서유럽에 남겨진 좌파들은 난감한 문제에 직면했다. 자본주의는 생각보다 견고했고 무너지기는커녕 수시로 모습까지 바꿔가며 저항에 적응해갔다. 그러는 한편 자본의 지배는 노동자의 처우와 임금문제를 넘어 생활세계 깊숙이 들어와 그 손을 뻗히기 시작했다. 일상에 대한 자본주의의 지배와 그 지배법칙은 이들에게 자본주의와 사회에 대한 다른 접근방식을 고민하게 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매개로 나타난 대표적인 학파가 프랑크푸르트학파다. 그들은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자본주의의 현대적 지배양식에 대해 연구를 하였다. 그들은 서구 유럽에서 체계보다 일상에 더욱 주목함으로써 수정주의라 비판받기도 했지만 그들이 진행한 비판이론은 자본주의가 펼치는 지배법칙을 다각도로 고민하는데 여전히 좋은 실마리를 안겨주고 있다.의 1부 마지막 시간인 8강에서는 이현재 서울시립대 HK교수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계보를 추적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자유를 원한 계몽, 양화의 노예로

2차 대전의 참상을 겪은 호르크하이머(1895~ 1973)와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전쟁과 테러의 참화 속에서 ‘인류는 왜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가는가?’라는 질문은 던진다. 소크라테스 이래 끊임없이 발전했다 자부하는 인간의 이성과 도덕이 어찌 홀로코스트와 같은 야만을 저지르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이 교수에 따르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소위 신화를 극복했다고 간주되었던 계몽이 실제로는 신화론적 계기들에 여전히 얽매 있어 이같은 결과가 발생했다는 진단을 내린다고 한다. 즉 야만의 상태인 신화를 극복하고 이성의 상태인 계몽이 나타났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그 계몽 역시 여전히 신화의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그들에게 신화의 상태는 ‘황금의 시기’가 아닌 야만의 상태로 폐쇄적이며 적나라한 지배법칙을 가지는 부정적 상태라 설명한다. 따라서 계몽의 시기인 근대 역시 폐쇄성과 적나라한 지배법칙의 시기라는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근대 계몽주의는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전자에 의해 후자가 지배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는 주체가 객체에 비해 더 큰 권한을 가지며 객체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바로 이러한 것이 지배법칙으로, 한편으론 야만으로 작용한다고 보는데 이 교수는 『계몽의 변증법』저자들이 인간이 인간 밖에 있는 자연과 사물에 대한 지배, 더 나아가 자신의 육체와 타자에 대한 지배를 계몽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고 말한다.
계몽의 기획 속에서 인간은 자연을 사물과 동일화시킨 후 이를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파악하고 이용하려한다. 이 교수는 바로 여기서 계몽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는데 사실성과 유용성, 계산 가능성과 교환가능성이 없는 자연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감금되고 배제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대상의 효용성을 극대화하기위해서만 자연을 이용하기 때문에 대상으로서 자연은 주체를 위한 순수한 도구로 전락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이성의 도구화이다. 이 교수는 이것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자본주의비판으로 이어진다고 말하는데 자본주의의 가장 큰 미덕인 효율성 추구의 근간에 바로 계몽과 이성이 자리한다고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계몽은 자연에 의한 인간 지배를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로 역전시킴으로써 인간을 자연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만들었지만 이는 곧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로 귀결되었다. 이런 계몽의 기획은 살아있는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까지도 죽은 자연 사물 혹은 객체로 취급하는 과학과 시장 지상주의로 빠져 지배법칙으로 타락했다.

만약 이성이 도구화됨에 따라 비판의식이 상실되었다면 우리는 갇힌 이성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 교수는 이에 아도르노는 이성 자체의 폐기가 아닌 더 합리적인 이성을 꿈꾼다고 말한다. 즉 계몽의 폐기가 아닌 미완의 계몽을 완성하자는 것이 아도르노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장인 것이다.

 

내 안의 파시즘,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을 넘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아도르노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한 실증주의적 사유가 사실을 입증하고 현실을 긍정하는 것으로만 작동있음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 교수는 아도르노의 또 다른 대표적 저서 『부정의 변증법』은 이러한 실증주의에 맞서기 위해 그가 변증법을 선택하고 그만의 이론을 진행한 것이라 설명한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변증법과 당시 소련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모두 비판하며 자신만의 부정변증법을 발전시킨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주관의 선차성을 주장하며 객체를 이미 주체를 통해 개념화된 것으로 본다고 비판한다. 이는 주관 밖에 있는 비동일성의 이성을 만들지 못하고 주관 안에서 동일성을 유지할 뿐이라고 한다. 즉 주체 밖에 있는 객체를 모두 주관화하여 타자를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비판한 계몽의 지배법칙과 유사하다.
그리고 객체의 독립성과 주체의 무용(無用)을 말한 소련의 변증법은 어떤 것을 통해서도 매개되지 않은 대상 세계를 가정함으로써 의식과 사상을 사물의 반영과 모상으로 환원시킬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이는 주체의 자발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고 객관적임을 자칭하는 공산당이 파시즘적 독재 세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이 교수는 아도르노의 변증법을 비동일성의 변증법이라 소개하며 그가 헤겔과 달리 객체의 우선성을 인정하지만 주체의 권좌를 객체가 대신한다는 것은 아니라 설명한다. 즉 아도르노가 말하는 “객체는 순수한 사실성(Faktizitaet)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객체는 주체를 통해 매개되어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주체의 동일성 체계에 동화되지 않는 비동일적 객체를 인정한다. 객체는 주체의 안과 밖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로써 아도르노가 모든 것을 자신의 안에서 구성하고 이해하려는 주체의 횡포를 주체에게 포섭되지 않는 비동일성에 대한 인정으로 극복하고 한다고 한다. 즉 타자, 이방 등으로서 대표되는 비동일성에 집중함으로써 계몽의 야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생활세계의 식민화와 토의 민주주의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성의 문제를 진단했던 1세대와는 달리 위르겐 하버마스(1929~ )는 의사소통적 이성 즉 주체가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갖는 이성에 주목한다. 하버마스는 사회를 물질적 차원인 체계와 상징적 차원의 재생산인 생활세계로 구분한다. 하버마스는 경제적, 정치적인 구조로서 체계와는 달리 문화, 사회, 인격 등을 구성요소로 하는 생활세계를 사회학적 차원으로 확대하고 체계와 생활 세계는 다른 영역이므로 구분해야하며 자본주의에서는 체계가 생활세계를 침범하여 손상시켰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생활 세계의 질서가 파괴된 것이(을) 작금의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하고 생활세계의 규칙을 왕성하게 복구하여 생활세계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시민사회, 공론의 장, 토의민주주의를 발전시킴으로써 “생활세계의 식민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토의민주주의의 핵심원리를 의사소통적 행위라 한다. 이 행위는 인지-도구적 행위, 도덕-실천적 행위, 미적-표현적 행위 등의 측면을 가지는데 바로 이 세 가지를 통해 상호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즉 이는 도구적 이성과 구분되는 포괄적 이성으로서 타자를 토론의 멤버를 인정하고 비판과논거를 통한 토론 및 정당화를 가능함으로써 합리적 논의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 교수는 하버마스의 이러한 합리적 의사소통 이론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재분배와 체계 자체에 대한 외면은 대표적으로 좌파진영에서 제기되는 문제이다. 이뿐만 아니라 생활세계의 침식만을 병리현상으로 보면 동성애, 이민자, 소수집단 등 다양한 사회영역에서 발생하는 고유한 갈등구조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점을 이 교수는 하버마스의 한계 중 하나로 지적한다. 이어 이 교수는 하버마스가 생활세계는 합리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하는 것에 의문을 던지며 생활세계를 이상화시킴으로서 생활세계 내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생활 속 투쟁, 인정투쟁

악셀 호네트(1949 ~ )는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뿐만 아니라 규범적 혹은 사회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체성 무시까지도 포괄하는 이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 교수는 3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인 호네트를 소개하면서 그에게 있어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는 사회적 인정을 통해 성공적인 자아실현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라 설명한다. 따라서 그에게 도덕 발전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인정투쟁이라고 전한다. 이 교수는 이러한 인정투쟁은 무시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무시는 자신감, 자기존중, 자기존경에 대한 훼손이라고 한다. 자신감은 자신이 충분히 배려 받을 가치가 있다고 보는 등 물리적 욕구등을 포함한다. 또 참정권과 같은 자율성에 관련한 것이 자기존중이며, 사회적 관계에서 나타는 명예와 같이 특수한 수행에 대한 인정욕구가 바로 자기존경이다. 호네트는 이러한 3가지 욕구에 대한 무시가 사회적 병리를 낳고 이를 극복하고자 인정투쟁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러한 점이 하버마스가 설명하지 못한 생활세계 속의 차별, 예를 들면 이민자들에 대한 생활세계 속의 문제를 호네트가 설명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악셀 호네트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확연한 차이들 보인다. 그들이 자본주의체계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체계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수정주의로 폄하하기에는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의 긍정성이 아쉽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인간해방은 단순히 물질적 문제의 해결이 아닌 자기관계를 해방하는 것으로 본다. 그들은 체계에 대한 공격과 재분배를 통한 해방담론이 고려하지 못한 미시적 해방 즉 생활공간에 발생하는 소외와 문제들을 인간해방의 주요테마로 가져오며 ‘해방’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한번 고민하게 만든다. 이 교수는 재분배에 대한 담론이 혹시 물리적 계산, 즉 도구적 양화적 이성에 기울지는 않았는지, 또 재분배 투쟁도 인정투쟁의 문제의식과 무관해 질 수 없다는 호네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교수는 낸시 플레이져가 여전히 재분배의 유효성은 주장하며 호네트와 논쟁을 벌이듯 재분배와 생활세계에 대한 문제는 소위 ‘해방’을 말하는 담론에서 깊은 고민 속에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며 이날 강의를 마쳤다.

 

고통의 기억과 유물론적 구원의 유토피아 ? 벤야민[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⑦

고통의 기억과 유물론적 구원의 유토피아 ? 벤야민[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⑦

 

강사 : 연효숙(중앙대 외래교수)
후기 :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포기되지 않는 구원, 그러나 다른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구원을 꿈꾼다. 그리고 그 구원을 위해 기존의 정치, 경제체제와의 투쟁은 물론 학문과 신학에 대해서도 맹렬한 투쟁을 진행해 왔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은 내세나 관념의 혁명이 아닌 현실의 혁명을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부분 마이키아벨리식의 노선을 꿈꿔왔다.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집합적 의지를 모아내는 것이 정치라 하며 그를 위한 현실적 힘에 대해 그의 관심을 집중했다. 레닌의 전위정당과 로자의 자발성은 이러한 맥락을 함께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구원을 꿈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있다. 때문에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7번째 시간의 주인공인 발터 벤야민(1892~1940)이 바로 그이다. 그는 인간의 구원을 꿈꾸지만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으면서도 관념적이지 않은 유물론적 구원을 꿈꾸는 마르크시스트이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사상사’에서 다룬 사상가들과 확연히 다른 그는 혁명을 혁명하고자 한 혁명가가 아닌 듯싶다. 이번 강연은 연효숙 중앙대 외래교수가 발터 벤야민과 우리를 이어주며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발터 벤야민은 1892년 부유한 독일계 유대인 집안에 태어나 1940년 나치를 피해 탈출하다 스페인 국경에서 피할 수 없는 나치의 추격이 다가오자 다량의 아편을 복용하여 이른 나이에 사망한 불운의 지성인이다. 그는 베른대학에서 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교수자격시험논문으로 제출한 이 탈락하자 학계에 머물기를 포기하고 문화평론가로서 지적 작업을 지속하였다. 이후 그는 잘 알려진 과 ,,등을 저술했다.

연 교수는 그의 글쓰기와 사유방식의 독특함을 설명하며 그러한 파격이 당시 근대적 논증방식에 익숙한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았고 그것이 교수자격시험논문의 큰 탈락사유였을 것이라 말한다. 그의 자유롭고 파편적인 글쓰기 외에도 연 교수는 그의 또 다른 파격으로 사유의 독특함을 뽑았다. 그는 전통과 전통의 문법을 어기는 것 둘을 종합하여 사용했는데 겉으로는 충돌되는 것을 절묘하게 결합시켜서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다. 연 교수는 벤야민의 이러한 이종적 종합의 대표적인 것으로 심미성과 사회성, 예술과 정치, 예술과 종교, 신화와 계몽 등을 뽑으며 그의 양면성의 사유를 설명했다. 벤야민의 이러한 사유의 독특함이 벤야민으로 하여금 마르크스와 그의 혁명을 도식적인 프레임이 아닌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것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싶었다.

진보로서 역사? 파국으로서의 역사!

연 교수는 벤야민의 사회철학적 사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의 마지막 글인 를 중심으로 강연을 이어갔다. 이 저작은 18개의 짧은 테제로 구성되어있으며 벤야민의 사후에 출간된 글이다.

그는 이 저작에서 종교와 정치의 결합을 시도하는데 연 교수는 이를 유대인인 벤야민이 유대교의 시오니즘과 메시아니즘을 버리지 않는 한편 역사적 유물론과 마르크스주의를 거기에 결합시키려는 시도였다고 설명한다. 연 교수는 벤야민이 억압된 계급, 집단적 주체, 노동자 계급을 강조하며 현재 상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려는 정치적 의식을 유지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 맥락을 잇지만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여긴 마르크스와 달리 유대교적인 메시아니즘을 벤야민이 결코 포기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벤야민이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을 연 교수는 역사와 시간에 대한 관점을 뽑았다. 벤야민은 역사주의와 헤겔과 같은 목적론을 강하게 거부하며 역사적 연속성과 뉴턴식의 직선적 시간론을 비판했다. 그는 역사의 진보를 믿은 낙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역사주의를 비판했으며, 독일 사회민주당이 이러한 진보에 경도되어 있음을 비판했다. 벤야민은 진보주의가 오히려 현재의 고통에 대해 눈을 감는다고 보았다.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나타난 그 당시는 도무지 역사의 진보를 신뢰할 수 없는 시기였다. 이에 벤야민은 오히려 파국(Katastrope)을 주장한다. 이는 니힐리즘적 역사관으로 흐를 소지가 있으나 연 교수는 벤야민이 과거와 지금시간(Jetztzeit)의 인식 가능성이 결합함으로써 시간이 정지하는 구원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연 교수는 벤야민이 세계의 연속성을 부정하며 단절적인 역사관을 내세움으로써 지금의 고통을 비로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벤야민은 인과적이며 직선적인 객관적 논증이 아니라 주관적 심미로서 나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 가장 중요한 관심인 현실의 고통을 벤야민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다.

다음 그림은 1780년 볼프강 폰 켐펠렌이라는 사람이 고안한 자동 장기기계이다. 이 기계는 명령자가 지정하는 쪽이 이기게 되는 신기한 자동으로 장기가 둬지는 기계이다. 하지만 오른쪽 그림과 같이 사실은 장기명수 난쟁이가 숨어 승부를 조작하는 것에 불과하다. 연 교수는 벤야민이 여기에 아이디어를 얻어 정통 역사유물론을 비판하다고 하는데 벤야민은 진보를 믿는 역사유물론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난쟁이를 고용한 장기의 명령자와 같이 신학이라는 난장이를 고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역사의 진보라는 것이 신학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신화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기며 진행한 비판으로 보인다.


(오른쪽이 난쟁이가 숨어있는 자동기계장치이다)

파국과 새로운 천사

연 교수는 파울 클레의 에 대한 벤야민의 독특한 해석을 통해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시간과는 다른 그만의 인식에 대해 소개했다. 벤야민은 의 9번째 테제에서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그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그의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도 없다.”라고 말했다. 연 교수는 여기서 천사의 눈은 휘둥그레지고 날갯짓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마치 자기가 응시하는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하는 듯한데 벤야민이 말하는 천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천국’으로부터 불어오는 ‘폭풍’이라고 한다. 여기서 천국이 의미하는 것은 미래이며 폭풍은 진보를 말한다. 그리고 천사는 역사적 유물론자를 말한다. 보통 천국은 인간 뒤에 있으며 인간은 미래에 천국으로 다시 돌아간다. 즉 전통적으로는 과거-현재-미래의 직선적 시간 속에 항상 미래를 향하는 인간이 고려되지만 벤야민과 역사적 유물론자로서 이 그림의 천사는 현재를 구원하기 위해 미래의 공간(천국)으로부터 다가오는 진보를 부정하고 오로지 파국으로서의 현재 자체를 중시한다. 벤야민의 천사는 미래에 살지 않고 현재에 살고 있는 현재에만 역사적 유물론자로서 존재한다. 이 역사적 유물론자는 통상적인 유물론자처럼 역사를 진보의 아름다운 가상, 발전으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어두운 파국으로 보며 진보에 맞서고, 진보의 폭풍우에 맞서는 자이다. 연 교수는 이러한 해석은 역사를 파국으로 보고자 한 벤야민의 독특한 시선을 설명해 주며 그가 강조하는 것은 미래가 아닌 지금의 고통과 현재의 파국이라고 말했다.

▲ 파울 클레의 ‘새로운천사’

 

기억과 찰나적 시간으로서 역사

벤야민은 진보의 역사주의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뉴턴식의 직선적 시간개념에 갇혀있다고 보았다. 직선적이고 연속적인 시간 개념과 달리 벤야민은 프루스트의 에서 보여진 무의지적 기억으로서의 시간 개념에 근접하여, 갑작스럽게 과거가 현재에 무의도적으로 기억되는 새로운 현재의 시간을 발굴하고자 했다고 연 교수는 분석했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과거의 사건은 과거라는 기억의 박물관에 저장되어 있는 불변의 고정된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 아니라고 연 교수는 이야기한다. 연 교수는 벤야민에게 기억은 현재의 순간과 함께 숨 쉬는 것이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시간은 연속적이지 않으며 순간이며 찰나이다. 그래서 기억 역시 지금 매 순간 순간에 떠올려진 장면이며 그것이 현재에서 포착된 지금진리이다.

이어 연 교수는 벤야민을 계속 인용하는데 벤야민은 “억압된 자들의 역사는 불연속성이다. 역사의 연속성은 억압하는 자들의 연속성이다.”라고 한다. 이는 벤야민이 거대 시간에 의해 구조화될 수 없는 순간을 상상적이고도 현실적인 차원에서 역사를 고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 교수는 그렇다고 벤야민이 객관적인 시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객관적인 역사적 사건이 순간적으로 나에게 어떤 식으로 사건이 이미지화되어 나에게 다가와 의미가 되고 파국에 이르렀는가를 벤야민이 중시한다는 것이다.

 
혁명의 시간에서 시간의 혁명으로

유물론과 유토피아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유물론은 현실성을 이야기하는 반면 유토피아는 어원상 ‘여기에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유토피아를 지금여기에 가능하게 하고자 한다. 벤야민은 “역사는 구성의 대상이며, 그 구성의 장소는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시간으로서의 충만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즉 메시아적 시간은 연속성의 모델로서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시간(Jetztzeit)이라는 것이다. 벤야민에게 메시아적 시간은 마르크스의 계급 없는 사회와 동일시된다. 연 교수는 이러한 사유를 통해 비로소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사유가 중지된다고 보았다. 연 교수는 벤야민의 지금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비동시적인 시간이 함께 존재하는 역사적 시간이며 유일한 시간으로 보았다. 따라서 연 교수는 벤야민에게 직선으로서의 시간은 허구적이며, 비현실적이고, 운명적인 시간으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음을 설명한다. 이러한 벤야민의 시간관은 매순간 메시아가 역사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즉 벤야민에게 메시아는 역사적 결론으로서 미래에 강림하는 것이 아니라 파국으로서 매순간 지금시간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 교수는 마르크스가 ‘혁명의 시간’을 말했다면 벤야민은 ‘시간의 혁명’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시간이 주관적 시간이고 리얼리티가 쇠퇴하는 것으로 보여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연 교수의 말을 이해하자면 과거와 현재, 객체와 주체간의 유물 변증법적인 사고를 지향한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리얼리티인데, 이를 벤야민은 마르크스의 다른 계승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금시간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것을 잡으면서 리얼리티를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이 순간과 파국 그리고 구원이 주는 의미가 많이 있겠지만 강의를 들으면서 그 동안 한국에 팽배했던 발전주의들을 되돌아보게 했다. 장밋빛 미래를 위해 당연시되어 왔던 현재의 희생과 고통이 벤야민의 생각들과 오버랩 된다. 장밋빛 미래는 언젠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한 줌 거리에 있으면서 항상 과거와 현재를 연료로써 태우기를 바랐다. 이러한 도식에서 과감히 벗어나고자한 벤야민은 여전히 많은 공감을 준다. 그래서일까 요절한 모든 선지자들이 그렇듯 벤야민이 좀 더 많은 이야기와 목소리를 우리에게 전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공상을 해본다. 오늘도 4대강은 미래를 향해 공사 중이다.

자본의 지배, 그 세련된 가면을 벗겨라-게오르그 루카치[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⑥

자본의 지배, 그 세련된 가면을 벗겨라-게오르그 루카치[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⑥

 

강사 :?이성백(시립대교수)
후기 :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열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소위 혁명의 시기에 마르크스의 깃발을 든 돌격대는 세계 곳곳에서 그의 함성을 남겼다. 마르크스의 사도 바울, 레닌에서부터 순교자 로자 룩셈부르크까지.. 그러나 그 시기가 격동의 시대여서 그런지 돌격대에 비해 본진에서 보급부대의 역할을 하는 혁명가는 드물었다. 그람시의 진지도 적진 깊숙이 있지 않았던가. 게오르크 루카치의 혁명과 투쟁은 레닌이나 마오쩌둥처럼 찬란하지도, 로자나 그람시처럼 처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론적 재정립을 시도한 이론적 보급부대로서 투철한 혁명가이다.

<마르크스주의사상사> 6번째 강연에서 이성백 서울시립대 교수와 함께 게오르크 루카치(1885~1971)와 그의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루카치는 스파르타쿠스단을 통해 독일에서, 그리고 인민위원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이 시도된 헝가리에서 봉기에 가담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모스크바로 망명 한 뒤 훗날 헝가리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재정립을 시도한 학자이다.

이성백 서울시립대 교수 ⓒ교수신문

한국에서는 70년대 문학 평론, 미학 등에서 많이 다루며 변혁의 이론으로 많이 소개되었으나 그 후 소련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가 수입되자 도식적인 규정으로 루카치는 기회주의나 헤겔주의의 관념적 편향으로서 치부되어 과소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 후 서구의 프랑크푸르트학파 등이 주목받자 국내에서도 다시금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이성백 교수는 루카치를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정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하면서 그가 없었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철학 자체가 발전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라 평한다. 그러면서 오늘날 루카치에 대한 재평가와 새로운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이날의 강연을 열었다.

 

세련된 자본의 미시적 지배

아도르노(1903~1969)가 2차 대전을 경험한 후 ‘어떻게 인류가 이런 야만의 상태로 빠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 속에 『계몽의 변증법』등을 펴내며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낸 것과 마찬가지로 이 교수는 이에 앞서 루카치 역시 1차 대전이라는 악몽 속에서 절망을 느끼며 ‘누가 우리를 서구 문명으로부터 구해 줄 것인가?’라는 절박한 문제에 직면했다고 말한다.

후진 러시아는 혁명에 성공한 반면 객관적 조건이 성숙한 서구는 오히려 혁명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상황은 루카치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주었다. 훗날 그람시와 알튀세가 ‘강제와 이데올로기 생산을 통해 스스로 지배당하게 한다’는 것을 지적했고 푸코는 국가권력이 아닌 미시권력이 노동자를 지배한다고 지적했다. 또 들뢰즈가 인간의 무의식인 욕망까지도 자본이 포획하고 그래서 노동자는 자본에 대한 저항을 하지 못한다고 봤다. 그러나 이 교수는 루카치가 이미 이들에 앞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국가권력이 아니라 미시적 지배 장치가 작동하고 있음을 선지적으로 간파했다고 말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루카치는 당시 혁명 운동의 위기의 근원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의 위기,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를 지니지 못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위기보다 뒤쳐져 있는데서 찾고 있다고 한다. 이 교수는 루카치가 아직 그 빈자리에 지배이데올로기가 들어온다는 것을 못 봤지만 이데올로기의 위기를 진단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했다.

루카치는 베른슈타인류의 수정주의나 카우츠키류의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모두 실천적 기회주의와 이론적 실증주의에 빠져 있으며 이것들이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 교수는 마르크스주의가 낡을 수도 있지만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써 방법론인 변증법은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가지며 그것만이 정통성을 가지는데 루카치는 이러한 정통성을 유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 평했다.

루카치가 보기엔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주의를 진화론과 같은 것으로 봄으로써 목적론에 매몰되어 변증법을 진화론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전락시켰다. ‘인간이 추구하든 말든 사회주의로 가게 돼있다’는 식의 진화론은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실천의 역할을 상쇄시키고 관념적 운명론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 교수는 베른슈타인은 이러한 배경에서 목적론과 법칙을 상정하지 않고 눈앞에 현실적 문제에 천착하게 된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루카치는 이 둘을 모두 비판하면서 역사는 이미 정해진 법칙을 따라 자동으로 공산주의로 가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것을 자의적으로 실천하는 것도 옳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변증법을 주장했다고 말한다. 이에 루카치는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과 통일로써 변증법을 말하는데 이 교수는 루카치가 역사를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 따라서 형성되는 것으로 둘 간의 관계는 대립, 선택이 아니라 상호결합의 결과로 본다고 설명했다.

 

마르크스 적통의 인장, 변증법

루카치는 이러한 주객의 변증법을 통해 총체성의 관점을 취한다. 이 교수는 총체성에 관한 루카치의 관점은 헤겔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헤겔은 세계를 하나의 구조로 보고 그 안에 많은 개체들을 어떻게 긴밀하게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에 주목했는데 루카치는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면서 부분에 대한 인식이 전체를 구성하며 그 역도 성립함을 주목한다. 이에 루카치는 주체와 객체의 유기적인 상호관계를 보고 총체성을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루카치는 구조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있을 때 총체적 실천과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헤겔은 인간의 의식을 즉자적 의식과 대자적 의식으로 나누었다. 즉자적 의식은 일상적이며 개체적 인식인 데 반해, 타자와의 비교를 통해 자기반성을 고려하는 것이 대자적 의식이다. 이 교수는 루카치가 이런 헤겔의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도 구분되는 것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프롤레타리아트 개개인이나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이 지닌 일상적 의식과 진정한 계급의식이 그 두 가지인데 루카치는 자본에 대한 총체적 의식이 없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일상적 의식에 머무는 것으로 본다. 그렇게 되면 사적이해에 매몰되고 혁명에 나서지 못한다. 이에 반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참된 의식인 진정한 계급의식을 가지면 비로소 혁명에 나선다고 루카치는 말한다. 이 교수는 루카치의 이런 시각이 혁명에 관한 선구적인 지적으로 보았다. 혁명을 위해 필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의 필요성을 자각하는 하는 것인데 지식인의 역할은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진지전인데 이는 그람시에 앞서 이미 루카치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화라는 것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는 것인데 이는 스스로 볼 수 있는 비판의식이다.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은 훗날 리오타르와 아도르노에게 있어 비판받지만 이러한 비판의식은 아도르노를 통해 비판이론으로 계승되어 더욱 빛을 발한다.

주체와 객체 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주목으로서 루카치의 총체성은 리오타르와 포스트구조주의에서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1980년대 이 후 서구를 포함한 진보진영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상실하고 이론의 안개 속에서 헤매는데 이는 루카치의 총체성이 그 지위를 상실한 뒤 그의 대체자를 찾지 못한 결과이다.

 

새로운 신을 발견하다

마르크스의 물신숭배는 이제 너무 익숙한 마르크스의 대표적 이론이지만 루카치 당시만 하더라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던 이론적 주변부였다. 그러나 루카치는 『자본』에 나오는 상품물신숭배에 주목함으로써 무력이 아닌 또 다른 지배자를 발견해낸다. 마르크스의 물신은 원시종교에서 사물에 초자연적 힘이 있다고 믿고 이를 숭배하는 것인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 사물의 역할을 상품이 대신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성을 자본이 노동자를 지배하고 그들 은폐하기 위해 작동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자신의 언어인 사물화로 바꾸어 부르며 강조한다. 이를 통해 지배가 은폐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은 더욱 일상성 속에 갇힌다. 이 교수는 ‘물 속의 젓가락은 휘어 보이지만 물 속에 있는 사람은 그 휘어있음을 볼 수 없는 것’에 비유하며 사물화로 인해 은폐와 지배를 설명했다.

사물화는 돈, 상품 자체가 가치가 있다는 의식에서 시작한다. 이 교수는 상품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단순히 상품 그 자체가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노동의 투여되어야 비로소 가치를 가진다는 아담 스미스, 리카도와 같은 고전경제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설명했다. 사회와 상품은 인간의 노동과 생산에 의해 창조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대상이 그 스스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에 매달리는데 이가 바로 루카치가 말하는 사물화다. 이런 사물화는 일상성에 사람들을 매몰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의 마이카(My car) 열풍과 같이 ‘나도 갖고 싶다.’라는 생각, ‘돈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내 자본주의에 대한 극복의지를 잠재운다. 자본주의의 지배방식은 페르시아 대왕의 채찍과 다르다. 이 교수는 루카치가 지적한 대로 자본의 지배 방식은 세련되게 사람들을 포섭하여 스스로 혁명하지 않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면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교수는 루카치도 완전히 자신있어 하지는 않아 보인다고 말한다. 다만 루카치는 일상성을 극복하고 참된 계급의식만 심어주면 혁명이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본의 지배는 계속해서 세련되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모두가 법정스님이 되긴 힘들어

이 교수는 루카치가 사물화를 말하고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밝혀 자본의 지배 양식과 그 은폐를 폭로했지만 이로 인해 마르크스주의 진영에 엄청난 선입견이 생겨버렸다ㅗ 지적하며 루카치의 한계에 대해 설명했다. 루카치는 일상성을 참된 계급의식에 대한 인식을 가리는 ‘나쁜 것’으로 규정했는데 이 교수는 이것이 엄청난 부작용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즉 먹고 사는 것은 일상의식으로 나타나는데 일상의식이 폄하되니깐 노동자의 일상적 삶이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소수의 성직자를 제외하고 일상적 소유와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 어디 많겠는가? 이 교수는 흔히 진보진영에서의 결정적인 분기점인 베른슈타인과 급진주의는 일상에 대한 긍정과 일상에 대한 부정의 대립에 다른 이름이기도 한데 이 분열로 인해 오히려 혁명운동을 긍정하는 노동자가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개량이냐 혁명이냐라는 이분법을 극복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어 노동자에게 일상을 버리고 참된 의식만 가지라는 것은 공상으로 갈뿐이라 충고한다. 일상과 결합되지 않는 참된 의식은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일상성을 긍정하면서도 어떻게 변혁으로 갈 것인가에 대한 이론적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교수는 베른슈타인과 같은 개량과 계급의식에 대한 폐기를 경계하면서도 이들이 주목한 일상성을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요소로 본 것이다. 이 교수의 말을 듣다보니 인간해방에 대한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마르크스가 바로 이런 일상성과 참된 계급의식의 일치를 꿈꾼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교수의 말대로 자본의 지배는 너무도 세련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한편 강연을 통해 더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왜냐면 외부의 전선이 흐려져 적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시대인데 내적인 전선마저 흐려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루카치 이래로 내적인 전선은 일상성에 대한 적대로 어쩜 명확했다. 그러나 내 안에 고민해야하는 일상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것에 대한 공감이 들자마자 전선은 내외적으로 오히려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사물화와 일상성에 대한 구분 혹은 정리는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했다. 그러나 일상성에 대한 이 교수의 주목은 결국 변혁은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원점에서 공감이 갔다. 그렇기 때문에 변혁은 더욱 어려워 보이며 그 전망은 항상 가리어져 있었지만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마침 그날은 4.11총선의 다음 날이었다.

 

햇볕이 들지 않는 바위틈에서도 이끼는 자란다-안토니오 그람시[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⑤

햇볕이 들지 않는 바위틈에서도 이끼는 자란다-안토니오 그람시[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⑤

 

강사 : 이순웅(숭실대 외래교수)
후기 :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

혁명가에게 가장 잔혹한 것은 어쩌면 혁명의 좌절도, 혁명의 과정에서 당하는 희생도 아닌 혁명의 장, 그 자체를 박탈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는 그의 짧은 인생의 1/4가량을 감옥에서 보내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버린 불운의 혁명가이다. 그가 살았던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민주적 투표를 통해 집권하고 서유럽의 혁명의 열기가 전반적인 위기를 겪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암울한 이탈리아의 정세와 자신의 갇힌 몸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혁명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위해 구명운동을 펼쳐준 로맹 롤랑의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경구로 삼았다. 아마 그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혁명을 준비하고 이야기한 혁명가 중 하나일 것이다.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5번째 시간에서는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한철연 연구협력위원장)와 함께 그람시와 그의 꺼지지 않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교수는 그람시의 생애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 뒤 그의 사상을 안내하는 것으로 강연을 이어갔다.

그람시는 1891년 이탈리아 서쪽에 있는 섬 사르데냐에서 태어났다. 그는 척추장애를 앓았으며 어려서부터 병약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등기소 소장에 해당하는 공무원이었으나 지지하던 후보가 낙선하자 승리한 측의 ‘정치보복성 조치’로 감옥에 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람시의 가난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장학생으로 토리노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람시는 대학시절 훗날 이탈리아 사회주의운동의 주역이 되는 ‘보르디가’, ‘톨리아티’, ‘타스카’ 등을 만나고 이때부터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공산당을 사회당으로부터 분리하여 창당한 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 1926년 무솔리니로부터 구속되어 사망할 때까지 감옥과 병원에 있었다. 옥중수고를 기록한 기간은 1929년부터 35년까지로 약 6년간이며 1937년 4월 21일로 형기를 마쳤지만 건강이 악화된 상태라 귀향하지 못하고 27일 사망한다. 옥중수고는 갇힌 그의 육신을 대신해 온 대지에 혁명을 전달하는 그의 날갯짓이었을 것이다.

 

가장 잊기 쉬운 건? 당신이 지배받고 있단 사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율적 존재, 주체라 생각하면서 지배(domination)는 물론이고 지도(leadership)까지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람시에게 정치는 지배뿐만 아니라 지도하고 지도받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깨닫는 데 있다고 한다. 이 교수는 여기서 그람시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관계를 잊기 쉽다’는 점이라고 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의 정치와 지배는 세련되어 지배를 지도로 가장할 뿐만 아니라 피지배자로 하여금 자신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지배하더라도 동의를 얻으면서 지배한다고 한다. 이러한 환상을 누군가는 깨주어야 하며 그것이 이 교수가 강조하는 그람시가 가지는 오늘날의 가장 큰 의의다.

 

혁명의 길, 극복과 투쟁

그람시는 공장평의회운동이 기존 노조 등과의 충돌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실패하자 농민 등 파시스트 세력에 반하는 다른 세력과의 통일전선전략을 강구한다. 그리고 이 전략에 따라 그는 다른 이론과 대립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그람시와 동시대에 혁명을 고민하지만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던 대표적 인물로 보르디가, 스탈린,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로 뽑으며 그들과 그람시를 비교하면서 강연을 이어갔다. 그람시는 어떤 면에서는 그들에게 공감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노선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혁명의 길을 닦았다.

보르디가는 교육과 학습을 강조한 그람시와 달리 지식인의 영향을 부정하면서 코민테른의 ‘통일전선’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 교수는 코민테른의 결정에 대한 입장 차이가 그 둘의 간격을 명확하게 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때 코민테른의 결정은 “반동의 공격에 견뎌내기 위해 ‘사회당원’과 ‘통일전선’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보르디가는 이런 ‘일보우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중간단계도 생각할 수 없고 그러한 민주주의는 오히려 파시즘보다 더 유해하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현재 이탈리아의 인민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향해서 싸우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실의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그람시의 말을 인용하면서 보르디가에 대한 그람시의 반대 입장을 설명했다. 이 일로 그람시가 사회민주주의로 후퇴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대중으로부터의 통일전선을 통해 대중 속에 침투할 수 있다고 여긴 그람시는 농민과 노동자들로 구성된 국민적, 대중적 세력의 동질적인 블록의 창설이라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람시의 이러한 노선의 고수는 그를 이탈리아공산당의 지도자로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얼마안가 그를 고립시키는 비수가 되었다. 이 교수는 그람시가 코민테른과 이탈리아공산당으로부터 고립되는 결정적인 이유를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에서 ‘우익적 국면은 끝났다.’라고 정한 방침에 그람시가 불복한 것에서 찾았다. 그람시는 민족부르주아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등에 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스탈린으로부터 완전히 배제 당한다. 훗날 홉스봄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무솔리니가 감옥에 가두는 바람에 스탈린으로부터 구출된 그람시’라고 표현한다. 스페인의 상황은 그람시로 하여금 평소에 가졌던 신념을 더욱더 확고하게 했을 것이다. 1936년 2월 인민전선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단기적이고 공세적인 기동전과 장기적이고 수세의 공간에서도 활용 가능한 진지전을 자신의 혁명의 전술로 적용한다. 그는 러시아에 비해 서구는 진지전이 적합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가 기동전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닌데 상황과 정세에 따라 전술은 고려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람시는 비교적 레닌의 생각에는 충실했지만 로자 룩셈부르크와 트로츠키에게 있어서는 비판적 입장을 유지하기도 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그람시는 로자의 자생론을 경제주의의 하나로 보았다. 이 교수는 제임스 졸의 전기(이종은 역,, 까치, 1984)를 인용하면서 그람시가 로자의 혁명적 순교를 흠모하긴 했지만 그녀가 주장하는 자생론에 대해서는 비판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교수는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로자를 비판하는 내용을 소개하는데, 로자는 “공황이 발생했을 때 이는 자본의 방어망을 교란시키는 야포(野砲)로 역할하며 이가 순식간에 잠재되어 있던 아군의 역량을 조직하고 필요한 요원을 창출하며 이들은 공통목표에 요구되는 이념적 집중을 순식간에 가져온다.”고 말하는데 그람시가 보기에 이는 명백한 역사적 신비주의였으며 일종의 기적적인 빛에 대한 기대였다는 것이다.(『옥중수고1』 274~275쪽)

그람시가 보기에 러시아에서의 혁명 성공 이후에도 서유럽 등으로 혁명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기동전의 일환이다. 그러나 그람시는 서구에서는 기동전보다 진지전이 더욱 적합하기 때문에 트로츠키식의 혁명론과 슬로건에는 공감하지 않았다.

 

민주주의 문제는 헤게모니 개념과 함께 보아야

이 교수는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는 아감벤의 말을 인용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절대적 숭배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역시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그람시가 민주주의를 진지전의 요소로 보는 한편, 민주주의 일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람시가 민주주의를 완전히 신봉하지 않는 이유는 무솔리니나 히틀러 역시 민주주의의 제도를 통해 집권했기 때문이며 레닌의 ‘외부로부터 도입’과 같은 혁명노선에 상당부분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람시에 따르면 현대 민주주의의 구조들은 진지전의 전선에서 설치된 ‘참호’와 항구적인 요새를 구성한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그람시에게 ‘진지전’이 가능하게 하는 한편, 이전 전쟁의 모든 것이었던 ‘기동전’이 이제 부분적인 것이 되게 하는 구조이자 장치였다.

헤게모니와 관련해서는 지도받는 집단으로부터 지도하는 집단으로의 이동을 보장하는 한 두 집단 사이에는 민주주의가 존재한다고 그람시는 본다. 이 교수에 따르면 그람시는 헤게모니 개념을 혼용하여 사용한다. 지도와 지배를 합한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강제와 동의를 합한 뜻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배’보다는 ‘지도’에 가까운 개념으로서 헤게모니를 다루었는데 이는 강제에 의해 지배하는 좁은 의미의 국가, 즉 정치사회로서의 국가에 대비되는 통합국가, 즉 동의의 기제를 발달시킨 ‘시민사회가 모든 것’인 통합국가의 특징이다. 그람시가 민주주의를 그 자체로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동의를 얻으면서 지배를 관철시키는 지배 계급의 헤게모니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람시에 따르면 피지배 계급이 지도 계급이 되려면, 이는 대항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길이기도 한데, 지배계급이 되기 전이든 후든 늘 지도해야 하며 때로는 경제적 조합주의적 측면에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진지전의 전술로서 활용할 수는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도시인이 농민을, 남성이 여성을 차별해서는 헤게모니를 확보할 수 없다.

 

타협은 강자가 하는 것, 어떻게 민중이 강자가 될 수 있나?

그람시는 러시아혁명은 『자본론』에 반하는 혁명이며 역사의 무대에 ‘철의 시간표’는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는 그람시는 반(反)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그람시는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렇듯 혁명에 관념이 아닌 현실성을 부여하고자하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토대결정론,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의식의 상대적 자율성, 의식이 토대에 미치는 영향도 중요시한다. 이 교수는 훗날 알튀세가 최종 심급에서만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말한 것과 이는 비슷한 맥락이라 지적하며 그람시는 상부구조를 토대의 부수현상으로만 보는 것을 부정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상부구조와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그람시의 시각은 엘리트주의로 보일 수도 있었다는 점은 이 교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이러한 비판에 앞서 당시 이탈리아 봉기의 무조직성과 공장평의회 운동의 실패원인 즉, 운동을 조직할 정당과 지도 부재 등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분석한다.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이 교수는 그람시가 당시 라디오, 영화와 같은 대중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무솔리니와 달리 문학 등 문자매체에 주목함으로써 문화적 영향력의 한계를 보이며 어느 정도 엘리트주의적인 지식인론을 펼친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어서 이데올로기 시대에서 환상의 시대로 옮겨가고 있는 지금, 그 환상이 갖고 있는 의미를 해석하고 그 환상이 가진 힘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자는 필요하지 않느냐고 질문을 던지며 그람시의 현대적 의의 찾는다. 그리고 이 교수는 지도와 당의 역할을 쉽게 폐기하는 것에도 경계를 보낸다. 즉 그간의 혁명 운동을 평가한다면, 잘했는데 잘 안 된 것이 아니라 잘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잘 못했다고 해서 당과 대중의 관계 자체를 폐기하기도 어렵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교수가 보는 오늘날의 한국정치의 위기는 그람시의 위기 즉, 전선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람시가 지적하는 문제 즉, 도덕적인, 능력적인 면에서 자격 없는 운동권이나 정당의 문제이며 또 주체 형성에 실패한 국민, 참여 정부의 문제라고 지적하며 이날 강연의 결론을 대신하였다.

자본이 이미 정치권력을 넘어서고 현 정부의 권력남용이 도를 지나치는 암울한 시대, 더 어두운 곳에서 촛불을 켰던 그람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여전히 희망으로 다가온다. 전체 강연이 중반으로 접어들었음에도 이날 역시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 희망을 찾아온 청중들로 강의실이 가득 찼다. 이 희망이 강의실 넘어 멀리멀리 퍼지질 기대하면서 그날의 밤도 마무리 되었다.

 

승리와 인간성 모두를 쟁취한 혁명이 가능한가?-마오쩌둥[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④

승리와 인간성 모두를 쟁취한 혁명이 가능한가?-마오쩌둥[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④

이철승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연구교수
이원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13억의 혁명의 상징 마오쩌둥

최근 중국의 급성장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과 경계를 받고 있다. 중국이 급성장한 것은 과거 악마적 마오이즘과 결별하고 개과천선한 결과일까? 중국과 중국인들은 자신 있게 아니라고 말한다. 오늘도 천안문 앞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시신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중국인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그에 대한 중국인의 애착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아쉽게도 우리는 그에 대해 잘 모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오쩌둥은 대장정을 성공한 판타지스타이거나 문화혁명을 수행한 괴수이다. 그러나 이런 단편적 사건으로 13억 인구의 애착을 이해하긴 힘들다.에서는 4번째 시간으로 이철승교수(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연구교수)와 함께 마오쩌둥과 그 사상인 마오이즘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마오쩌둥은 역사 속 인물이다. 그저 지나간 인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마오쩌둥과 마오이즘은 ‘갑자기 불어 닥친 광풍’도 아니고, 19세기말, 20세초 세계를 강타한 마르크스주의라는 ‘유행’에 무임승차한 것도 아니다. 이 교수는 중국역사 속에서 마오쩌둥을 봐야 하고, 그래야만 마오쩌둥을 이해할 수 있으며, 현대 중국을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현대 중국의 역사적 형성 과정에서 마오이즘을 이해해야한다. 이 교수의 말대로 현대 중국과 마오쩌둥은 구분되지 않는다.

흙을 딛지 않는 꽃은 없다. 마오쩌둥이 대륙을 설득하고 그의 이념이 정신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오늘날까지 중국의 주요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에 맞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서방에서 날아와 중국대지에 잠시 앉은 나비가 아니라, 인민의 ‘바람’이라는 ‘바람’을 타고 날아온 민들레 꽃씨가 중국의 토양 속에서 싹을 틔운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 교수는 마오쩌둥에 관한 강연을 마오쩌둥의 출생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중국의 정치적, 사상적 동요를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의 시각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단지 1893년 어느 중농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봉건시대의 몰락과 그 후 다양한 위기 극복 시도,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도입과 그 시행착오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마오쩌둥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마오쩌둥이 뚝 떨어진 하늘은 중국의 역사였다.

중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심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부심일 것이다. 대륙을 지배하고, 감히 그곳을 ‘천하’라 칭하며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중국인들에게는 강한 중화사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교수는 이러한 자부심이 무너지는 계기를 아편전쟁으로 뽑았다. 그리고 이는 수천 년을 이어온 중국사상계에 큰 충격이었기에 많은 동요를 불러왔다. 이 교수의 지적대로 아편전쟁은 중국에게 정치적, 사상적, 문화적으로 큰 전환점이었다.

이철승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연구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무너진 중국의 현실과 사상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19세기 후반부터 중국사상계에서는 백가쟁명이 일어났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당시 유행한 중체서용론은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서양을 방법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현실과 사상적 위기를 극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당시 중국의 현실이 “서양의 과학 등만을 받아들이는 문제, 즉 ‘도구’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사상에도 문제가 있다는 의식”이 나타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입헌민주주의론이 나타났다. 이 교수는 이것이 신해혁명과 5·4운동의 기반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어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등장과 군벌의 난립 등으로 혼란을 겪어 입헌민주주의론은 크게 진척되지 못하고, 오히려 통치체제의 부재를 낳았다. 중국의 무정부주의는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사회에 등장했으며 30년대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는 이 무정부주의를 비판하면서 성장했다.

한편 혼란이 가중되면서 근대중국사상운동은 극단적 모습을 띄기도 했는데, 이 교수는 이러한 것으로 서화론과 동방문화파를 들었다. 서화론은 ‘이제 더 이상 중국은 전통을 유지하지 말고 서양을 완전히 받아들이자는 것’으로 서구적 자유주의화를 주장했다. 그에 비해 동방문화파는 ‘서양 자유주의의 근간인 이기주의를 비판하며, 이는 타자를 주변, 반주변으로 모는 배타주의이기 때문에 서화는 중국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였다고 비판하며 전통 도덕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근대중국의 노력은 자유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대한 담론을 끌어냈으며,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근대적 담론 속에서 그들을 비판하면서 성장했다. 그리고 그 결론이 마오이즘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이 교수는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의 계보를 소개하며 마오쩌둥에게로의 안내를 진행했다.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는 자유주의적 서양화에 대한 한계 체감으로 등장하기 시작해 1917년 볼셰비키혁명의 영향으로 사상적 통일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통일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중국마르크스주의 내의 시행착오와 사상투쟁 끝의 산물이었다. 이 교수는 이러한 과정에서 큰 영향을 준 사상가로 5명의 중국 마르크스주의자를 꼽았다.

이 교수 처음으로 꼽은 초기 중구 마르크스주의자 천두슈(陳獨秀)는 무정부주의를 비판하면서 초기 중국공산당을 이끌었으며 제1차 국공합작을 이루었다. 그는 당시의 문제를 사회적 관점에서 봐야지 개인적, 윤리적 관점에서 봐서는 그 해결이 요원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르주아도 필요하다고 여긴 그는 국공합작이 깨어진 후 우경기회주의자로 낙인 받고 당에서 축출되었다. 이 교수는 이어 북경대 도서관장으로서 마오쩌둥에게 사서보조원으로 근무하게 하면서 학습의 장을 마련해준 리다자오(李大釗), 사적유물론만 존재하던 중국 마르크스주의 진영에 유물변증법을 소개함으로써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지만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무리한 광저우 봉기를 시도하다 장제스(蔣介石)에게 패배하고 좌경모험주의자로 낙인 받은 취치우바이(瞿秋白), 뛰어난 저술활동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상세하게 소개한 리다(李達)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 교수가 가장 강조한 인물은 마오쩌둥의 이론적, 사상적 호위무사인 아이스치(艾思奇)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데 80~90년대 대학가를 강타한 『철학에세이』가 그의 저서 『대중철학(1934)』을 모티브로 한국 상황에 맞게 재서술 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철학에세이』가 그랬듯이 아이스치의 『대중철학』은 마르크스주의를 쉽게 풀이하면서 그 사상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이 책을 읽은 마오쩌둥이 그에게 편지를 하고, 이를 인연으로 그와 마오쩌둥은 정치적, 사상적 동지로서 마오이즘을 함께 형성해갔다.

 

실사구시, 유학과 마르크스주의가 만나다.

이 교수는 마오쩌둥사상의 성립 근거로 당시 중국의 실정,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전통사상 이 세 가지를 꼽았다. 반제반봉건 사회로서 당시 중국은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공존하는 사회였는데, 이 교수는 앞서 설명한 사상적 연원과 함께 이러한 중국의 실정이 마오이즘이 나타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유물변증법과 사적 유물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마오이즘의 가장 큰 핵심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마오쩌둥이 중국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고 마오쩌둥이 중국인민들의 동의를 획득한 것에는 이미 중국 전통사상에 유물론의 단초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소비에트적인 혁명관을 가져들어온 왕밍(王明)과 충돌했다. 왕밍은 프롤레타리아 전위를 내세웠지만, 당시 중국은 노동자는커녕 도시조차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면서 중국적인 혁명을 준비했고, 이에 마오쩌둥은 전통사상을 가져온다.

이 교수는 중국 전통사상의 실사구시적 성향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사구시적 사고가 마르크스주의의 중국 안착을 도왔다고 분석했다. 맹자(孟子)와 성리학, 양명학으로 이어지는 리철학(理哲學)뿐만 아니라, 현실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치가 나온다는 순자(荀子), 왕충(王充), 왕부지(王夫之)로 이어지는 기철학(氣哲學)적 전통 역시 중국사상에는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성리학 일색인 한국과 달리, 중국의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전통사상을 고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물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했다. 이 교수는 특히 “현실에 부딪쳐 이치를 알아야지 관념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왕부지에 주목했는데, 이러한 기철학을 바탕으로 마오쩌둥은 낯설지 않게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접목 시킬 수 있었다.

이 교수가 주목하는 중국전통과 마르크스주의의 교차점은 기철학뿐만 아니다. 탕왕(湯王), 무왕(武王), 맹자 이래로 이어져 온 혁명 사상 역시 중국인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중국만큼 혁명에 익숙한 나라도 없을 듯 했다. 역사 속에 빈번하게 이어져 온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중국인들에게 백성이 국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가지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교수는 이어서 서로 마주하면서 서로를 이뤄주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을 설명하는 『주역』의 변증법적 사고, 『손자병법』의 전술 등을 들며 중국 전통사상에서 마오이즘의 단초를 찾았다. 마오쩌둥이 전통사상에서 주목한 것은 대부분 유학적 전통이었다. 마오쩌둥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유학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도덕주의를 견지하면서 ‘인간적 혁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의 도덕주의는 대장정 과정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는데, 당시 인민군이 보여준 인민에 대한 예의와 보은 그리고 낙오자에게 보여준 마오쩌둥의 인간적 이해는 그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지 간에 그람시가 말한 도덕적 헤게모니를 획득하여 혁명을 승리로 이끈 가장 큰 힘이 되었다. 버림받지 않고 배려 받은 낙오자들은 그 지역을 조직하여 훗날 마오쩌둥의 가장 큰 후원군이 되었다.

이 교수는 마오쩌둥의 주요 사상으로 모순론, 실천론, 그리고 인민민주주의론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모순론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간의 대립을 말하는 정통마르크스주의의 적대적 모순뿐만 아니라, 공산당 내부에도 모순이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계급적 모순이 아니기 때문에 비적대적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론은 모순에 대해 교조적으로만 받아들여 현실의 대립을 외면하는 것을 관념론으로 보며 비판하는 마오쩌둥의 시각이 들어 있다. 그리고 앎과 행함의 우선 순위를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중국 전통사상에서 그 근거를 제시하는 실천론 역시 마오쩌둥만의 마르크스주의이다. 인민민주주의론은 마오쩌둥만의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설명하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인민민주주의에 이르는 방식에서 정통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전술을 구사한다. 당시 아직 사회주의에 이르지 못한 중국에서의 신민주주의론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뿐만 아니라 농민, 소유산계급, 민족자본가, 지식인의 연합으로서 현실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반제국주의 전선으로서 민족모순을 극복하고, 또 도덕적 헤게모니를 통하여 이들을 국민당이 아닌 공산당과의 협력관계를 유지시켜 혁명을 이룬다. 마오쩌둥의 인민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독재이기는 하지만, 당시 중국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피지배 혹은 양심적 구성원들로부터 형성되었다는 특징을 가진다.

 

마오쩌둥의 그림자와 개혁개방의 그늘

마오쩌둥의 혁명은 승리했고 전 중국이 붉은 깃발로 펄럭였지만 농민, 소유산계급,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혼재되어 있었던 그 혁명대열은 혁명 이후에도 내부갈등이 존재했다. 이에 중국 내부의 반우파 투쟁이 발생했고, 인위적으로 사회주의를 만드는 인민공사와 대약진 운동이 진행되었다. 특히 노동자, 농민, 군인 등의 철학 배우기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 교수는 이를 일종의 사상투쟁으로 설명했다. 당시 유행하던 ‘하나가 나눠 둘이 되고, 둘이 합쳐 하나가 된다.’는 통일적인 변증담론을 계급조화론의 반영이라고 판단한 아이스치가 이 사상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이러한 사상투쟁은 내부의 자유주의적 담론이 너무 커져 중국이 ‘말만 사회주의’국가가 되는 것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는 다양성보다는 한 면만을 바라보는 경직성의 시작이기도 했다. 홍위병이 이를 계기로 조직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문화혁명은 반혁명적 자유주의와의 투쟁에서 지식인과 다양성에 대한 탄압의 상징이라는 오명으로 바뀌어버렸다. 이 교수는 문화혁명을 옹호할 의도는 없어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과정에서 나타났는지를 분명히 파악해야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 마오쩌둥과 현대중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고 했다. 문화혁명의 끝자락에서 마오쩌둥과 그의 사상적 동지들은 세상을 저버렸지만, 그가 남긴 과제는 여전히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수의 강연도 그 사후 중국의 개혁개방을 설명하는 것으로 계속 이어졌다.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혁명이 끝난 후 중국은 문화혁명을 평균주의로 규정하고 실패를 선언한다.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한 도입을 서서히 진행하며 마오이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주요담론은 조금씩 폐기되었다. 이 교수는 이러한 것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사회주의 안에서도 소외가 발생할 수 있다.’는 소외 논쟁과 중국을 사회주의초급단계로 규정하고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간의 모순을 부정하는 생산력주의를 들었다. 이는 사실상 계급투쟁의 폐기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도입은 지역별, 개인별 양극화를 발생시켰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이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중국이 흘러가게 되었다. 천안문사건은 자유주의 도입을 시도하던 세력에 의해 오히려 진행되었다. 천안문사건을 이 교수는 밀려오는 자유주의에 대한 경계에 따른 속도조절론의 일환으로 진단했다. 자유주의는 가진 자들의 논리인데, 이것에 대한 무분별한 도입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로 받아들여졌기에 이것에 대한 중국의 심각한 고민이 생겼다. 개혁개방으로 인한 중국의 양극화 등 그 폐단을 이 교수는 그림자를 넘어 그늘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하며 중국 사회주의의 위기를 설명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최근에는 중국 내부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해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했다.’라는 자조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그러한 바람을 타고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마르크스와 마오쩌둥을 바라보는 신좌파가 등장하기도 했으며, 마오쩌둥사상의 재평가가 이뤄지기도 한다. 또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다른 이론적 힘으로서 자유주의에 대한 대책이 필요해 최근에는 중국학 열풍과 신중화사상이 퍼져나가고 있다. 단대공정은 이러한 운동의 일환이다.

한편 류샤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과 달리 후진타오(胡錦濤)에 이르러서는 빈부격차의 문제에 포커스를 두며 인민내부의 갈등을 화해해 중국의 미래를 만든다는 사회주의 화해사상을 말하고 있다. 이 교수는 사회주의 화해사상의 핵심을 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신중국은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혁명을 부정하면 국가정통성이 사라지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만을 바로 인민들에게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완충제로서 유학을 내세우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미덕인 이기심의 확산을 유학은 반대한다. 유학이 가지는 이타성은 21세기에 중국식 사회주의를 진행하는 측면에 중요한 사상으로 여겨진다. 최근 중국에서 왕성하게 부는 전통의 부활에 관한 열기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지금 지난 백 수십여 년 동안 잃었던 사상적 리더의 역할을 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으로 이루려고 한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한 상징적인 모습으로 베이징의 공자상 건립과 유학 열풍 증대, 마오이즘 재평가와 평등의식 확산 등을 들며, 이를 바탕으로 중국의 성장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21세기 한중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도모해야 한다고 설명하며 강연을 마무리 했다.

중국에 대한 가까운 정서적 거리감 때문인지, 아니면 마오쩌둥과 그 사상의 장대함 때문인지, 이날 강연은 넓은 중국대륙만큼이나 화려했으며, 청중의 집중도 어느 날보다 높았다. 68혁명 때처럼 그가 다시 혁명의 아이콘이 될 수 없을지 몰라도, 여전히 그의 혁명은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적셔주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날 밤 강연은 꿈속에서 떠다니던 ‘혁명’이라는 단어가 현실에서 실감나게 해준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혁명의 진정한 힘, 자발성-로자 룩셈부르크[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③

혁명의 진정한 힘, 자발성-로자 룩셈부르크[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③

 

강사 : 김성민(건국대학교 교수)
후기 : 이원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얼마 전 영화 ‘철의 여인’이 메릴 스트립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과 영화의 흥행으로 주목받았다. 이 영화로 인해 마거릿 대처가 다시 조명을 받고 있는데 대처와 전혀 다른 또 다른 철의 여인이 있다. 겨우 150cm정도의 작은 키에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다리를 저는 작은 여인, 그러나 독일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하고 집권당인 사회민주당과의 타협을 거부한 채 혁명을 준비해갔던 로자 룩셈부르크가 바로 그녀다. 신자유주의를 열어젖힌 ‘철의 여인’에 비해 인간해방과 혁명의 기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그녀는 대처에 앞서 이미 ‘철의 여인’으로 불렸다.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꿈꾸던 그녀의 의지를 독일우파세력은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나서야 겨우 멈추게 할 수 있었다. 꽃으로 비유하자면 성공한 레닌은 활짝 핀 대지의 해바라기와 같다면 로자는 다 피지 못하고 져 버린 장미 같다. 다 보여주지 못한 그녀의 꽃망울은 어떤 모습일까? 잔혹하게 살해 된 그녀와 그녀의 꿈을 연민으로 남기기에는 그녀의 꽃잎이 너무 붉다.에서는 3번째 강연으로 김성민 한국철학사상연구회회장(건국대 철학과 교수)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꿈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녀가 잔혹하게 죽은 지 백년이 다돼가지만 아직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꿈만은 아직 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한해살이풀 해바라기와 달리 장미는 나무에서 자란다.

자본주의적 현대인과 로자 룩셈부르크

김 교수는 그의 강연에 오늘의 주인공인 로자를 등장시키기에 앞서 무대를 먼저 마련했다. 그 무대는 현대자본주의의 특징과 마르크스주의의 주요쟁점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특징과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쟁점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비로소 로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삼성 겔럭시S2의 알람벨소리에 기상하고 CJ의 햇반과 김으로 아침을 먹고, 롯데 캔 커피를 마시며, 현대로템에서 운영하는 지하철 9호선을 타고 출근해 삼전전자 컴퓨터에 앉아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현대인의 삶을 예로 들며 김 교수는 현대자본주의의 독점과 양극화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이날의 강연을 열었다. 그의 설명대로 현대는 30대 재벌의 연매출이 국내총생산의 96.7%에 달하고, 세계 상위 20%가 점유하는 소득이 전체의 84.7%를 차지하며 하위 20%가 차지하는 비율이 겨우 1%에 그치는 기이한 시대다. 마치 기네스북의 기록을 보는 기분이 들 정도로 가히 경이롭다할만한 수치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세계화되면서 더욱 가속화되는 현상인데 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금융화, 자본자유화, 노동의 유연성 강화, 개방화, 탈규제화를 꼽았다. 그리고 이어 신자유주의는 바이러스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관계이며 사회적 관계의 표현이자 대중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행위 또는 사고하게 만드는 ‘구조적인 힘’과 같은 것이라 설명했다. 즉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특히 분단체제 안에서 강한 자기검열이 사회 전체를 휘감고 있는 한국 상황은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아무런 통제장치 없이 더욱 그 위력을 발휘하기에 너무나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반공주의와 관련하여 보수주의는 극우반공주의로, 자유주의세력은 어용화, 진보세력은 비합법화로 접어들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고민은 금기시되어 사회변혁에 대한 대중들의 자발성이 제한되어 있다고 김 교수는 오늘날을 분석했다. 한반도의 특수적인 구조적 조건, 세계체제적인 거시적 조건, 한국사회 내부의 계급적 조건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현대의 위기의 다층성을 봐야하고 그러한 시각의 연장선으로 21세기 한국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도출되어야 한다는 그의 문제의식은 많은 것을 던져주었다.

김성민 건국대 철학과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김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마르크스를 봐야하고 로자를 만나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그는 로자에 대한 이해를 위해 역사적 유물론과 생산력-생산관계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쟁점을 제시했다. 인간소외와 역사에 대한 합목적성 그리고 역사과정에 대한 합법칙성간의 논쟁이 역사적 유물론의 주요 쟁점인데 김 교수는 이 관점에 따라 역사 변혁의 주체가 설정되고 변혁의 전술이 달라지기 때문에 중요한 쟁점으로 지적했고 실제로 마르크스주의 내의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역사 주체에 대한 레닌과 베른슈타인 그리고 로자의 가장 큰 차이가 발생했다.

그리고 역사발전의 추동력을 생산력의 발전으로 보는 생산력주의, 국가 및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역할을 강조하는 생산관계 우위론, 생산력-생산관계의 기능적 의존관계 등으로 설명하는데 이 역시 역사적 유물론의 쟁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쟁점으로 자본주의의 변혁을 위한 전술선택의 시발점이다. 이러한 쟁점들 속에서 로자의 문제의식은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수정주의와의 투쟁 그리고 총체성의 철학

제2인터내셔널 이후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제기된 주요한 문제는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대립이었다. 김 교수는 주관주의적으로 역사를 파악한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의 문제를 인간의 의지, 도덕의 문제로 해석하여 수정주의가 되었다고 설명하며 로자는 객관주의인 카우츠키와 달리 둘이 상호 의존성을 가진다고 말했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를 결정론으로 몰지만 정작 본인은 철저한 경험주의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이 사회의 여러 과정들을 서로의 연관 속에서 고찰하지 않고 ‘생명 없는 기계의 흩어진 부품’으로 본다고 비판하며 역사들 상호간의 운동관계, 즉 변증법적으로 보는 ‘총체성’의 관점에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바로 이점이 로자에게 주목해야할 점이며 로자에 대한 이해의 핵심이라 지적했다. 베른슈타인은 물론 레닌과의 분명한 차이점으로서 로자만의 대중이론, 혁명이론이 바로 이 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로자가 주장하는 개혁에 대한 혁명의 정당성, 자발성과 조직의 문제는 역사에 대한 로자의 총체성이라는 개념정의에서 출발한다.

김 교수는 로자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개혁주의와의 대결에 주목하며 이에 가장 중요한 상대인 베른슈타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변증법을 부정하기 때문에 공황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붕괴 가능성을 부정하며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아닌 점진적 개혁을 주장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더 심화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으며 자본주의는 점차 “길들여지고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카르텔과 트러스트 그리고 신용제도가 자본의 무정부적 성격을 조정하며, 주식회사를 통해 민주적 배분과 중간 계급의 생존이 확보되며,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결과 노동자 계급의 정치경제적 조건이 향상됨에 따라 체제에 대한 ‘적응성’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로자는 “카르텔이 소비자와 생산자 간의 투쟁을 첨예하게 만든다는 점을 들고 또 자본과 노동의 적대관계를 심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리고 개별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 극단적인 적대감을 불러일으켜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국제적 성격과 자본주의 국가의 민족적 성격 사이의 모순을 증가시킨다고” 반박한다. 이어 신용제도는 생산과 소유를 분리함으로써 생산력을 소수의 손 안에 밀어 넣고, 노동조합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근로조건과 임금 개선과 같은 경제투쟁에 한정된다고 말한다. 때문에 노동 입법 등을 통한 사회 조정은 임금 수준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만 그것 자체로 임금체제를 전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베른슈타인이 지적한 중소기업의 지속적인 생존은 기업의 집중화를 극복하기 힘들다. 베른슈타인에게 의회는 초계급적 제도였지만 로자는 현재 자본주의국가에서 의회는 계급적이며 부르주아 계급 국가의 특수한 형태의 하나로 의회를 바라봐야한다고 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로자가 모든 개혁을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로자는 개혁의 역할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한계를 분명히 해한다고 말한 것이라 김 교수는 설명한다. 김 교수의 이러한 설명은 앞서 말한 총체성과 연관 있어 보이는데 수정주의는 자본주의와 역사를 개별적 인간관계로 봐라봄으로써 사회를 구조로서 그리고 전체로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로자의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를 인용해 “수정주의의 정치적 견해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 대신에 자본주의의 폐해의 제거로 나아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로자의 주장대로라면 자본주의의 폐해의 제거 역시 쉽지 않아 보인다.

혁명의 진정한 힘, 자발성

로자가 보기에 대중 파업이란 계획에 따라서 인위적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터지는 것이다. 김 교수는 ‘혁명은 교육될 수 없다’라는 로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발성’을 혁명의 가장 결정적인 역할로 본 로자의 ‘자발성과 조직’에 관한 입장을 설명했다. 로자는 혁명이 객관적인 상황의 성숙과 당의 변증법적인 관계, 즉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시’에 터지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당이 아무리 대중 파업을 호소해도 대중을 호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로자는 대중파업을 오랫동안 지속된 계급투쟁의 전체기간의 축척으로서 총체성 개념으로 본다.

이러한 로자의 입장은 계급투쟁에서 의식적이고 조직된 행동, 그리고 당의 지도적 역할을 부정 내지 과소평가하고,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인 요소, 역사의 필연성과 숙명성을 과대평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이러한 비판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로자는 대중파업을 이전의 투쟁이 쌓인 것이지 그저 가만히 있은 결과로서 숙명론이 아니며 가장 계몽된 전위로서 사태의 발전을 항상 앞지르고 그것을 가속화시키는 것으로 당의 역할을 강조한다고 한다. 또 그녀는 항상 가변적인 존재로서 대중성에 대한 비판 역시 진행했다. 로자가 말하는 자발성은 투쟁의 과정 속에서 축척된 혁명의 힘이며 이는 당에 의해 가속화는 되지만 교육되거나 기획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자의 ‘자발성’에 숙명론적 비판을 가져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김 교수는 설명하며 로자의 그것에 다시금 주목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섣불리 로자의 이론으로 레닌을 비판하는 것 역시 경계해야한다고 말한다. 로자의 상황은 관료적 중앙집권제가 혁명적 사회주의를 망치는 상황이었고, 레닌은 러시아 노동운동의 무정형성과 싸워야만 했던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 교수는 로자와 레닌에 대한 이해는 그들의 구체적,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져야하며 한 가지 잣대로 두 가지 상황에 대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하며 레닌과 로자를 분리한다.

21세기에 붙이는 로자의 편지

로자는 자신을 객관주의로 몰아붙이는 것에 대해 “인간이 그들의 역사를 마음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프롤레타리아는 그 행동이 사회 발전의 성숙 정도에 따라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사회 발전은 프롤레타리아와 무관하게 진행되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는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며 원인임과 동시에 사회발전의 산물이다.”라고 반박한다. 즉 역사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설명한다.

김 교수는 이러한 유물 변증법이 로자의 사상을 관통한다고 말한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인간’의 문제로 치부하면서 개인의 도덕, 의지, 성품의 변화와 그로 인한 변혁을 꿈꾸지만 로자가 보기에 이는 인간과 사회를 총체가 아닌 파편으로 보는 것으로 현실적이 아니라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각은 ‘당과 대중’ 그리고 ‘정치와 경제’를 보는 관점에서도 이어지는데 로자는 이를 변증법적으로 보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만 환원하는 데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생긴다고 보았다. 김 교수는 이점은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말하는데 이는 상부구조와 토대 간에 무수한 상호작용을 무시한 채 도식화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로자의 경고로 느껴졌다.

ⓒ프레시안(최형락)

그녀는 ‘무오류의 권위’로부터 생기는 ‘자동인형’으로서 대중을 가장 경계했다. 그녀는 마르크스의 이상은 바로 개인의 완연한 자유라는 것을 믿었다. 따라서 개인을 압도하는 당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의식을 정확히 짚어주고 준비하는 매개로서 당의 역할을 말한다. 그녀의 변증법이 말하는 ‘총체성’과 ‘자발성’은 인간의 혁명과 인간이 그것의 완전한 주인이 되는 것을 바라는 그녀의 혁명의 가장 큰 무기가 아닐까한다. 인간에 대한 믿음을 관념적 휴머니즘이 아닌 인간의 역사 속으로 가져 들어와 인간적 혁명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 로자는 여전히 혁명의 꽃으로 영원히 지지 않을 것이다.

김 교수의 이날 강연은 탈냉전, 탈권위시대에 요청되는 새로운 방식의 운동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강연 후 질의응답에서 청중들은 베른슈타인의 문제의식에도 못 미치는 현실의 한국정치를 개탄 하는가 하면 로자적 관점에서 오늘날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질의하는 등 적극적 대쉬를 하는 참석자도 있었다. 열띤 토론 속에 이번 강연 역시 이날 밤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마칠 수 있었다. 밤이 깊은 만큼 별이 밝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