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비탈진 계단을 내려오며
오늘의 소망도
함께 길을 나섭니다.
수박 향기 같은
비온 뒤의 아침이
살짝 코 끝을 시큰하게 합니다.
하늘 한 번 볼 일 없이
살았던 날들이
언제부터 인지
먼 하늘을 바라 보게 합니다.
버스를 오르며
창 밖의 먼 하늘 끝에
어제처럼
간절한 소망 하나 걸어 놉니다.
*이 글은 시민 인문학 강좌 수강생이 쓴 것입니다
비탈진 계단을 내려오며
오늘의 소망도
함께 길을 나섭니다.
수박 향기 같은
비온 뒤의 아침이
살짝 코 끝을 시큰하게 합니다.
하늘 한 번 볼 일 없이
살았던 날들이
언제부터 인지
먼 하늘을 바라 보게 합니다.
버스를 오르며
창 밖의 먼 하늘 끝에
어제처럼
간절한 소망 하나 걸어 놉니다.
*이 글은 시민 인문학 강좌 수강생이 쓴 것입니다
어제 이사 일을 거들고 돈이 좀 생겼다. 구멍 난 신발을 신고 다닌 지 좀 된 터라 동네 시장을 찾았다. 북적거리는 틈을 돌아다니며 가죽신발과 티셔츠를 샀는데, 티셔츠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레이온, 실크, 스판덱스가 소재였다.
대중화장실에서 티셔츠를 입고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가방 맨 어깨 쪽이 자꾸 신경이 쓰인다. 혹시나 가방끈 때문에 보풀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들어 이렇게 어떤 것 때문에 신경 쓰인 때도 없었다. 나는 요즘 전화도 없고, 그냥 속옷과 잡다한 물건이 든 가방 하나가 지금 가진 전재산이랄까. 가방을 잃어버린다고 해서 많이 속상할 일도 없다. 걱정이라면 오늘 산 실크가 조금 들어간 티셔츠가 당분간 내 걱정거리가 될 것 같다. 없어서 불편한 것보다 있어서 신경 쓰이는 게 좋은 걸까 하는 우스운 생각에 잠시 글을 남긴다.
– 서울역 근처 희망무지개 어린이놀이터에서
*이 글은 시민 인문학 강좌 수강생이 쓴 것입니다.
윤준오(인정복지관 만나샘) /
교도소의 담장은 야트막했다. 오월의 햇살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정문을 지나 발걸음을 옮기자 교도소의 뜰에 핀 봄꽃들이 제 자태를 마음껏 뽐내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이윽고 육중한 철문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 철문 안이 감옥이다. 절로 심호흡이 나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마음을 다잡으며, 오월 햇살이 내리쬐는 철문 안으로 발길을 천천히 옮겼다.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진행된 재소자 인문학 과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나.
2007년 8월부터 자활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던 일로 많이 지쳐 있을 때였고 자활 사업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몸으로 하는 일이니, ‘마음은 좀 쉬자’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들어갔다. 그런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2008년이 되었다. 봄이 되자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 홈페이지를 뻔질나게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소식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해보았다. 언제 시작할지는 모르지만, 교육이 예정되어 있음은 확실하다고 했다. 마음 조이며 기다리던 어느 날, 드디어 모집공고가 났고 참가 신청서를 냈다.
시민 인문학 강좌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경희대학교 실천인문학센터에서 주관하는 소외계층을 위한 강좌이다. 철학, 글쓰기, 예술사, 문학, 역사의 5과목이 12강으로 짜여 있다. 2학기로 나누어 매주 목요일 오후 4시부터 9시까지 두 과목 수업을 하고, 격주로 토요일에 예술사 수업과 현장체험학습이 있다.
둘.
6월 24일 오리엔테이션과 26일 입학식을 거쳐 우리는 경기광역 4기로 입학하였다. 지난 기수의 졸업생들과 기관에서 함께 축하해 주러 왔고, 몇 분의 교수님들 그리고 6개월간 함께 공부할 경기 남부 권역의 자활사업 참여자들 20여명이 자리를 하였다.
서로 돌아가면서 인사를 하였다. 오고 싶어서 왔다는 사람도 있고, 권유로, 때로는 마지못해 왔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이전 수료생에게 들은 글쓰기 숙제에 대한 부담감을 토로하는 사람도 몇 있었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며 문득 얼마 전에 썼던 글이 떠올랐다.
(전략) 여전한 무기력을 이불처럼 덮고 누워서
생각한다
맑은 물이 가득 찬 항아리가 필요해…
쉬고 싶어…
그 물속 깊숙이 웅크리고 있으면
눈을 뜨지 않아도 돼
숨을 쉬지 않아도 돼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후략)
[양수]라는 제목을 붙였던 짧은 글이다.
시작 전부터 이번 교육에 대한 느낌은 매우 특별했다. 기대로 설레던 입학식 날, 문득 양수 속 태아의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배우고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충분히 즐기겠다는 각오를 인사말과 함께 이야기했다. 나는 수업은 물론 뒤풀이 자리까지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단거리 주자의 출발 선상 같은 내 진지함이 조금은 과해 보였는지, 교수님은 더러더러 놓치기도 하면서 여유있게 즐기라고 말씀하셨다.
셋.
수업의 문을 여는 7월 첫째 주 목요일 첫 시간은 철학수업이다. 현재를 거스르지 않고 관성적으로 살아가는 삶은 나름대로 편했지만, 철학 수업은 그 편함을 건드린다. ‘그게 참된 편안함이냐고…’ 고요한 수면에 던져진 돌이 만든 파문처럼 마음이 복잡해졌다. ‘불의와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 뒷골목 좁은 길을 디디며 겨우 의탁하는 내 한 몸도 벅찬 일인데…’ 그러나 며칠 만에 고민을 접고 평상으로 돌아올 때쯤 다시 듣게 되는 철학 강의는 또 다시 마음을 긁는다. 외유내강의 강의는 자꾸만 외면하고 싶던 것들 쪽으로 고개를 돌려놓았다. 철학 수업의 기본 전제는 각자 개개인의 삶 자체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며 우리 스스로가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면서 평등하게 존귀한 존재라는 자각을 하게 한다. 시대의 화두, 품격 있는 삶(well-being)은 품위 있는 죽음(well-dying)을 준비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뚜렷한 메시지를 각인시키면서…
진지하고 충만한 두 시간이 지나면 저녁식사 시간이다. 밥 먹는 시간은 언제나 떠들썩하고 즐거웠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문학과 글쓰기 수업이다. 교수님은 글쓰기를 일상화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제시하신다. 제출한 글은 본인의 동의를 얻어 함께 읽었다. 아픔이 느껴지는 학우들의 글을 보면서 저렇게 힘든 삶도 있음을, 내 아픔은 오히려 어리광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사실, 처음엔 학우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사람 만나는 일을 그다지 좋아 하지 않는 외톨이 성격 탓이다.
글쓰기를 통해 보이는 상처들은 이전의 것들과 같지 않았다. 귀 기울여 듣는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시간들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이전에 없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가식 없는 마음의 손들이 돌아와 따뜻하게 맞잡았다. 글쓰기 외에도 이덕무, 길재를 비롯한 옛 선비들의 글을 읽었고, 손택수, 안도현 등의 서정적인 시를 읽었으며, 나카지마 아츠시와 강희맹의 단편들을 함께 읽고 즐거워했다.
토요일에 진행된 예술사 시간에, 우리는 라스코 동굴 벽화를 보았고, 황소의 의미를 들었다. 독특한 발상의 현대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엿보기도 하였으며, 茶 매니아 교수님의 차 강의도 재미있게 들었다. 먹고 사는 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예술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여유가 되어 돌아왔다. 또 함께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 즐거움은 배가됐다.
10월 첫 주에 시작된 2학기는 문학과 역사 수업이다. 문학 수업 첫 시간엔 1학기를 마친 소감을 돌아가며 얘기하게 되었다. 각자의 소감들이 나왔고, 그때마다 교수님은 문학작품들 속에서 발췌한 비슷한 이야기들을 곁들여 위로하거나 공감을 표하신다. 그런 방식의 수업이 2학기 내내 이어졌는데, 수많은 시와 산문을 읽고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문학으로 문학을 이야기하는 문학의 숲이었다. 시를 읽다 보면 마음속에선 어느새 시의 불이 붙곤 했다. 마음속에서 이는 맹렬한 겨울 들불이었지만, 써놓고 보면 번번이 졸렬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문학에 이어지는 입담 좋은 교수님의 역사 수업은 단군조선의 건국을 시작으로 조선의 건국, 세종의 문화정치, 그리고 또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다고 한탄하곤 하시던 근현대사 이야기들을 줄줄 풀어내시면 우리는 옛날 얘기를 듣듯이 재미나게 들었다. 재미에 빠져 있다 보면 역사와 시대에 대한 차가운 의식이 서늘하게 스쳐가곤 했다.
강의실 수업 이외에 우리는 간간히 현장학습을 했다. 처음 나간 곳은 [어둠속의 대화] 체험이었다. 우리 일상의 주변들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공간에 빛을 배제한 것이다. 시각과 인식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볼 수 있는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예술사 교수님의 친절한 해설을 곁들인 관람을 했다. 예술이란 푯말은 때로는 껄끄러웠고 때로는 향기로웠다.
늘 챙기고 배려해야 하는 주부입장에서 누군가로부터 챙김 받고 배려 받는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아무래도 1박2일 코스로 다녀온 문학기행이다. 우리는 운길산의 유서 깊은 사찰 수종사를 거쳐 오래 전부터 소망하던 곳인 가평 아침 고요 수목원을 둘러보았다. 그 중 가장 인상에 남은 시간들은 한옥 체험장인 취옹예술관에서의 밤이었다.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깔린 이불속에 발을 묻고 둘러 앉아 초청 시인의 특강과 함께 11월의 시들을 읽었고, 배깔고 엎드려 우리는 시를 지었다.
오는 동안 모두들 조금씩 들떠서, 하도 웃고 떠들어 대니 그 웃음소리들이 온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통에 글은 제대로 써지지 않았지만, 써지지 않는 대로도 좋은 것이었다. 그래도 글을 제출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1학기 초기 글쓰기 시간을 생각해 보면 큰 변화인 것이다. 각자 쓴 글에 대한 시인의 조언을 듣고 나서 우리는 자유롭게 먹고 마시기로 했다. 사무실에선 술과 음료, 안주와 간식들을 푸짐하고 살뜰하게 챙겨 왔지만, 그것들은 그 날 그 자리에서 엑스트라 역할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재미난 이야기와 대화들 때문이었다. 매 순간순간을 가만 두지 않던 에피소드들… 오고 가는 길 내내 어린 소년 소녀들이 되어 웃음 떠들썩하던 행복한 여행이었다.
그 후, 다시 한 번 역사 기행을 다녀온 후 우리는 곧 졸업식을 했다. 졸업을 앞두고 모두가 서운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지만, 마음을 합쳐 함께 졸업 작품으로 택한 어설픈 춤을 연습하고 우리라는 이름으로 공동작품을 만들어 내면서 유대는 더욱 끈끈하게 다져졌다.
넷.
돌아보면, 밥 한 그릇과 맞바꾸어지는 내 일상의 대부분의 시간들과는 달리, ‘밥과 바꿀 수 없는 시간들’이라서 행복했고 소중했다. 모든 순간순간에 스스로 정성스러워졌다. 수업이 있는 날은 게으른 얼굴에 분도 좀 바르고, 변변치 않은 것들 중에서나마 조금 더 깨끗한 옷을 골라서 입으려 했다. 수업을 듣기 위해 타는 1호선 전철은 금정역을 출발하는 순간, 순간이동을 했다. 세상의 빛과 공기가 달라졌고, 현실은 까맣게 잊혀졌다. 길가 풍경들 위에선 축제를 알리는 무수한 마음의 깃발이 펄럭였고, 나는 늘 봉실봉실한 구름을 타고 다녔다.
행복했다.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시간들은 향기롭고 신선한 천국의 숲이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때 묻은 작업복을 벗고 깨끗하고 순한 옷을 입은 채, 새처럼 떠들고 꽃처럼 웃었다. 항아리 위로 넘치는 물처럼 마음속을 채우고 넘쳐 오른 행복감은 감사함으로, 사랑으로 흘러, 우리는 끝없이 서로 ‘감사하면서 사랑한다고…’ 이전엔 결코 쓰지 않던 말들을 하고 또 했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비슷한 교육들을 받기도 할 것이지만, 어느 곳에서의 교육에서도 지금과 같은 의미는 두 번 다시 찾기 어려우리라. 부모님 슬하에 있던 어린 시절처럼 안온한 시간들이었다. 다시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아름다운 숲의 향기가 온몸과 마음을 적셔, 종내 나도 한그루 향기로운 나무가 되었던 느낌이다. 내 일상은 서늘하고 푸른 기운으로 가득 차 있어 지루함이나 피로를 알지 못했다. 딛는 발자국마다 에너지가 넘쳐흘렀고, 마음속에선 꽃이 피고 또 피었다.
함께 수업 듣던 언니가 졸업식을 한다는 말에 누군가 그걸 배우면 어디에 취직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 보더라고 했다. 우리는 웃었지만 생각해 보니 남은 것은 사람과 추억이다. 세상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다들 얼마만큼씩은 외로운 구석도 없지 않지만, 선뜻 마음 열지 못하는 것이 또한 일상이다. 인문학 수업으로 맺어진 우리는 있는 대로 마음을 열고, 서로 제 일처럼 걱정하고 좋아 한다. 때때로 문자로 계절이 오고 가는 일을 전하며 낭만을 일깨우기도 하고,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도 한다. 공부를 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 이유는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지난 몇 개월의 행복은 참으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이었다. 얼마 전 우리는 첫 동문 모임을 가졌다. 한 달이 조금 덜된 시점이었지만, 우리는 쏟아질 듯 반가움들을 토해 내었고 계속 글을 써서 일 년에 한권씩 우리들의 문집을 만들자고 약속을 하였다.
어느 책 속에 있던,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행복은 하늘의 별을 따는 일이나 한겨울에 봄날의 햇볕을 당겨오는 것처럼 거창한 것들이 필요한 일이 아님을 다시 생각하며, 긴 겨울 끝자락에 만나는 향기로운 후리지아 꽃처럼 내 앞에 펼쳐질 따뜻한 봄날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한 2008년 인문학 수업은 정녕 행운의 열쇠였다. 내게 인문학은 삶의 자활(自活)이기에…
**이 글은 2009년 『녹색평론』 3-4월호에 실렸던 것을 발췌,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편집자)
남자연(경희대 시민인문학강좌 졸업생) /
삶을 고민하는 인문학.
인간은 누구나 풍족하게 살고 싶고, 편리하게 생활하고 싶어 한다. 풍족함과 편리함에 대한 욕망을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런 욕망을 얼마만큼 합리적으로 조율하면서 충족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존재론적으로’ 욕망을 충족시킬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잉여욕망, 즉 거품욕망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삶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말해야 한다.
‘사람은 진실로 무엇으로 살까? – 나는 진실로 무엇으로 살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참으로 오래된 물음들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정신없이 부대끼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진부한 이야기들이고, 어쩌면 사치스럽고 한가한 허영이고 망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물음들은 일생 동안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문득문득 떠오르거나 불쑥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힌다. 예외는 없다. 우리 ‘영혼의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부분 사회적 통념의 가치를 추구하며 그냥 관성적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통속적인 물질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관계에 들어서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영혼의 물음을 내팽개친다. 오히려 통속적인 사회적 가치를 놓치지 않으려고 더 노심초사하고 더 발버둥친다. 우리는 이 ‘영혼의 물음’에 정면으로 답해야 한다. 이 영혼의 물음은 양심의 소리이기도 하고, 철학적으로 ‘존재의 소리’이기도 하다. 이 소리를 듣고 물음에 답하는 것을 우리는 ‘삶의 근원적 성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너도 나도 웰빙을 말한다. 어느덧 웰빙은 질 높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질 높은 상품의 대명사가 되었다. 웰빙 설렁탕까지 있으니 오죽하랴. 웰빙은 삶의 질을 오로지 상품의 가치로 환원하여, 한 달에 몇 번의 외식을 하며, 상품화된 문화 공연을 몇 차례 관람하며, 유기농 채소와 과일 혹은 등 푸른 생선을 먹느냐 그렇지 않느냐, 운동을 하느냐 런닝 머신을 어떻게 활용하는냐 등등을 이용해 객관적 지표로 만들어졌다. 그러다 보니 웰빙 상표가 아니면, 삶의 질을 높일 수 없다는 인식이 암암리에 우리들 의식에 스며들었다.
웰빙인 삶의 질은 곧 행복일 텐테, 행복이 오로지 객관적 지표로 치환되어, 주관적 심리 상태 뿐만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가치를 완전히 찬탈해 버렸다. 웰빙은 문자 그대로 ‘존재의 최적 상태’, 즉 인간 존재가 가장 인간 존재다움을 뜻한다. 그리고 존재다움은 존재(인간)가 자리하고 있는 세계(사회) 속에서 최적의 가치를 실현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다움은 존재와 세계, 인간과 사회의 합리적인 관계에서 빛과 향기를 발하는 인간 존재의 아름다운 ‘사회적 가치’인 것이다. 여기서 웰빙, ‘품격 있는 삶의 방식’을 말할 수 있다.
존재(있음)는 무(없음)에 대한 존재요, 삶은 죽음에 대한 삶이다. 웰빙(well-being)은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웰빙이다. 품격 있는 삶은 품위 있는 죽음을 준비하는 데에서 온다. 몇 백년 몇 천년의 삶은 우리 인간에게 없다. 그래서 반성과 성찰의 삶을 철학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이제 인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말할 수 있다.
삶의 현장과 인문정신
인문학은 다음의 세 가지 역할(혹은 영역)의 연관성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 첫째, 인문학의 순수 연구활동이다. 인문학 각 분야의 이론 연구와 작품 활동을 의미한다. 둘째, 인문학의 응용 연구활동이다. 문화(모든 문화 혹은 문화적 표현은 인간 삶의 가치와 그 고민을 다루기 때문), 민주주의의 실질화, 시민사회의 윤리 등에 관한 연구를 의미한다. 셋째, 인문학과 현실 사회의 합리적ㆍ실천적 결합에 관한 일이다. 인문학의 인문정신이 현실 사회에서 꽃피울 수 있는 실천적인 활동을 전면화해야 한다.
우리의 논의는 이 세 번째의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개개인의 삶이 지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가장 값진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면서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우리의 삶의 과정은 그 자체로 소중한 사상이며 이념이고,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우리 스스로가 가장 위대한 철학자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삶도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인 우리, 우리인 나’라는 공동체적 의식을 갖는다. 이것이 인문학의 핵심인 인문정신이다.
이런 인문정신에는 뚜렷이 자각된 주체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주거의 불안정, 생활의 유목성과 의존성, 심리적 불안, 삶의 박탈감과 체념 등등은 한마디로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의 공통된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각된 주체의식이 엄청나게 약화되어 있다.
인문정신을 매개로 한 만남은 교육자든 피교육자든 주체의식을 자각하는 과정이다. 이런 인문정신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이 더불어 어우러지는 삶의 모둠판 속에서 빛과 향기를 발한다. 이 삶의 모둠판에는 좌초하고 분노하며 환멸을 느끼면서 욕망과 꿈과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개인들의 열정에 가득찬 행위들이 있다. 그래서 갈등과 대립이 있다. 갈등과 대립이 있다는 것은 서로의 생각과 의견에 다름이 있음이요, 생각과 의견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삶의 가치를 똑같이 인정하고 평가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대화와 소통과 만남을 통해 하나의 삶의 모둠판에서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삶의 현장은 개인들의 다양성의 가치가 인정되고 단절 없는 소통이 이루어지며 공동체 의식을 나누는 만남의 광장이다. 인문학을 통한 만남도 이런 것이다.
삶을 나누고 가꾸는 인문학
주체의식의 자각은 개인적 깨침으로도 가능하고 종교적 귀의를 통해서도 가능하며, 어떤 경우에는 개인의 특수한 경험 혹은 옹골찬 노력을 통해서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인문정신을 소재로 삼은 이유는 인류의 다양한 역사적 축적물이 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문정신이 가치 있는 세상살이의 내용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 학적 체계의 형식을 인문학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의 인문정신은 세상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고민하는 한,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항상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문정신은 자각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다시 회복되어 나타나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인문학 교육과정은 함께 진지하게 논의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이런 인문정신을 서로 일깨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각된 주체의식도 영롱한 삶의 사상도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거의 폭력적 수준에 가까운 경제적 물질적 욕망과 이해관계 속에서 일관되게 정신적 가치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기란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통상 말하는 소외계층의 사람들은 자의든 아니든 사회 시스템에서의 일탈 혹은 주변화로 인해 체념에 가까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주체의식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보통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통념의 가치에 내몰리면서 모르는 사이에 주체의식을 상실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통념의 가치에 따르게 되면 돈과 지위만을 추구하고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면서 쾌락을 즐기는 삶을 살게 되고, 그래서 통념의 가치를 추구하고 획득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면 여지없이 명분을 내세워 저항한다.
여기에는 정신적 가치가 자리할 곳이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인문정신이 오염되고 말살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가치는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인문정신의 상실은 자연스레 사회적 윤리의식의 부재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물질적 가치와 이기주의적 의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교육의 측면에서나 가치의 측면에서나 다양하고 창조적인 개인의 능력과 삶의 방식을 인정하는 사회와는 분명히 거리가 멀다. 국가 윤리나 국민 윤리가 아닌 시민사회의 윤리가 부재하고 실종된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결국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강하게 지켜 왔던 인문정신의 와해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문학의 교육과정은 유행도 아니요, 특정 계층에 국한된 것도 아니요, 특별한 사건도 아니다. 인문학의 인문정신은 물, 공기와 동일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 정신적 사회적 가치다. 물과 공기가 오염되면 정수기와 여과기를 거치듯이, 인문정신이 오염되면 인문학적 교육과정을 거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닐까.
물론 여기서 인문학적 교육과정이란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교육행위나 활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이 구성원들 상호간에 교육적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오염된 물과 공기를 들이켜고 있으면서 오염된 사실을 잘 모르거나 아니면 오염되어 있지 않다고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인문학 교육을 통한 인문정신 공유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이때 그 교육과정은 제도교육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삶을 함께 다듬고 가꾸어가는 과정임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우기동(경희대 철학과) / admin@admin.com
자본주의? 국가(State)=네이션(Nation)=자본(Capital)의 트라이앵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되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 열 네 번째 시간에는 일본의 문예비평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을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의 소개로 만나보았다. 고진은 이른바 일본의 ‘안보투쟁 세대’로서 1960년대 초에 ‘일미안전보장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면서 ‘국가(state)’와 ‘네이션(nation)’의 결합과 괴리를 고민했었다. 그는 그렇게 젊은 시절에 관심을 가졌던 국가 권력과 국가-자본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는 자본=네이션=국가라는 결합체”로 존재한다고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견지해 왔다. 또한 고진은 특히 마르크스를 윤리적으로, 그리고 칸트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해왔는데, 그가 생각하는 참다운 문학비평은 소설이나 시에 대해 논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를 읽는 것, 그것도 <자본론>을 읽는 것 … 그것이 문학비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출발점은 바로 그의 생각에 보편타당한 텍스트인 마르크스의을 일본의 안보투쟁 세대로서 견지했던 문제의식을 갖고 읽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진은을 윤리(학)적으로 독해하려는 구상이 ‘새로운 보편적 인식’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구상의 돌파구를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마르크스와 칸트를 연결하는 방향에서” 찾으려했다. 고진의 말처럼 “칸트도 코스모폴리턴으로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보편적 인식 또는 보편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마르크스를 칸트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와 더불어 고진이 ‘보편적 인식’의 다른 측면으로 제시하는 것은 ‘역사의 반복’이다. 역사가 주기적으로 반복하고 세계사적으로도 그러하다는 시각은 앞서 말한 ‘보편적 인식’과 ‘보편타당성’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반복되는 것은 사건이나 ‘내용’이 아니라, 그 반복되는 구조나 ‘형식’이다. 이러한 고진에게 있어서 ‘보편적 인식’과 ‘역사의 반복’이 “하나로 녹아 있음을 보여주는 텍스트가 마르크스의 책들”이다. 고진은 두 책, 《자본론》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의 강박을 설명한다. 즉, 앞의 책은 “‘경제’를 ‘표상(representation) 문제’로 삼아서 근대 경제학을 ‘비판’한 것이고, 뒤의 책은 ‘정치’를 ‘표상 문제’로 삼아서 근대 정치학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즉, 고진이 《자본론》을 읽고 얻은 통찰은 경제의 호황과 불황이라는 경기순환(불황-호황-공황-불황), 그 역사의 강박을 통해 “자본의 축적운동과 자기증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읽고서는 정치의 영역에서 대의제가 지닌 불완전함 때문에 의회제도가 침체되고, 절대권력이 붕괴되고 다시 절대권력이 회귀하는 반복적 강박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고진은 여기서 경제적인 면에서 반복강박을 일으키는 ‘구멍’으로 ‘화폐’를 들면서,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해명한 것은 ‘경제적 하부구조’라기 보다는 화폐에 의해 조직되어 있는 환상 시스템 혹은 경제적 하부구조를 조직하고 은폐하는 상부구조, 바꿔 말해 표상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이정은 교수는 “물론 그 시스템을 발견하는 과정이 자본주의 비판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이것과 유사하게 정치에서 “표상=대표 시스템이 가진 ‘구멍’은 대표 시스템이 죽이고 추방했던 ‘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의회제를 표방하면서 동시에 죽이고 추방했던 ‘왕’을 의회제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다시 ‘황제’로 되살려낸다”는 것이다.
결국 그 ‘화폐’와 ‘왕’이라는 구멍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면서도 아주 강력하게 실재하면서,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반복”되며, 자본주의와 대의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무(無)”로 기능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고진이 말하려는 것은 마르크스의 생각을 이어 받은 그의 말처럼 “‘대표하는 것’과 ‘대표되는 것’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을 수 없다”는 통찰이다. 또한 마르크스가 강조했던 것도 “정당이나 그들의 담론은 실제 (그들이 대변한다고 말하는) 계급들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표하는 자’와 ‘대표된 자’의 관계가 본래적으로 자의적이라고 새삼스럽게 강조하면, 화폐와 대의제에 숨어 있는 그 물신성(物神性)의 실체를 인식하게 되면, 자본으로 인해 숨이 조여 오는 오늘날의 정치와 공동체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생산자협동조합’과 그것들의 네트워크
자본주의 사회와 함께 시작된 근대의 국민국가는 국가와 민족의 조합을 통해 실현되었는데, 고진은 “자본, 국가, 네이션은 독자적 영역이며 동시에 상생하는 관계”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즉, 일반적 인식과 달리 자본을 추동하는 것은 늘 국가였으며, 국가가 자본보다 더 선행적이고 더 독자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고진은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가속화시키는 문제를 ‘자본=네이션=국가’의 ‘바깥’을 보는 상상력을 가진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구상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제안하는 것은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라는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적 모델이다.
고진이 말하는 어소시에이션이즘(associationism)은 “상품교환 원리가 존재하는 도시적 공간에서 국가나 공동체의 구속을 거부함과 동시에 공동체에 있던 ‘호수성’을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려는 운동”이다. 여기서 호수성(互酬性)이란 호혜성(互惠性)으로 번역될 수도 있는데,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서 증여를 받은 쪽이 준 쪽에 뭔가를 갚음[酬]으로써, 상호관계가 갱신,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는 가족관계에서의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에 나타나는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청중들이 이 어소시에이션에 대해 어리둥절할 때쯤, 이정은 교수는 이것의 그 구체적 형태로 아나키즘적 공동체, 평의회 코뮤니즘, ‘파리꼬뮌’에서의 꼬뮌, 봉건제 말기에 형성된 상업 중심의 자유도시, 한나 아렌트가 강조했던 정치적 행위자들의 연대체인 평의회 등에서도 비슷한 맥락이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고진이 말했던 어소시에이션은 “그 어느 것들보다도 칸트의 생산자협동조합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결국 고진은 이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구상을 통해 정체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는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으며, 경제적 결사체에서 출발하여 탈자본주의적 협동조합, 나아가 코뮌(commune)의 형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던 것이다.
고진은 ‘어소시에이션’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자본, 네이션, 국가라는 세 항의 역할과 이들의 관계를 부각시킨다. 여기에서 그가 독창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교환양식’을 통한 새로운 사회의 구성인데, 이것은 “호수(증여와 답례), 재분배(약탈과 분배), 상품교환(화폐와 상품)으로 나눌 수 있다.” 고진이 보기에 마르크스는 청년기에는 ‘교통’이라는 개념을 통해 ‘교환양식’의 밑그림을 드러냈지만, 차후에 그는 새로운 사회구성체의 원동력을 교환양식이 아닌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결합한 생산양식’으로 축소했다는 것이다. 이정은 교수는 이 교환양식이 인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지만 자본주의 시기에 전면화된 것은 그것의 한 형태인 상품교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것을 원활하게 작동시키기 위해 도입된 것이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의 독특한 산물인 자본=네이션=국가의 매듭이라는 것이다. 물론 국가도 고대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민족과 국가, 네이션과 스테이트가 하나로 합쳐진 차원의 근대의 국민국가와, 자본 활동과 연동하는 국가는 자본주의 시기에야 가능해진 것이다.
세계공화국 – ‘국가 바깥에서’ ‘국가를 지양하는 방법’을 생각하기
이정은 교수는 이러한 “어소시에이션을 실현하는 ‘부단한 과정’과 그것들의 네트워크 자체가 우리의 미래가 된다”고 말하며, 고진이 강조한 것은 자본이 국가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네이션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 있고, 자본주의는 소멸할 수 있지만 국가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관점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오늘날 “국가 간 경계를 해체하면서까지 확장되는 자본의 위력에도 불구하고” 국가 사이의 대립은 여전히 잔존하며, 국가문제는 국내의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인식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고진은 새로운 공동체를 실험하고 안정되게 실현하려는 노력도 국내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국가 대 국가의 대립으로 진행되는 국가 외적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국가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으며, 자본과 국가가 그동안 형성해온 교환양식을 활용하여 국가적 차원의 대안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제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공화국’이라는 이념이다.
이 개념은 고진이 칸트의 ‘세계시민사회’ 개념을 빌려와서 ‘세계공화국’이라는 용어로 변형하고, 그곳에서 “국가에 의한 통제나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며 자본주의 문제를 해소해 나갈 수 있다고 보았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고진이 ‘세계공화국’의 개념으로 나아간 것은 국가 권력이 인민을 제대로 대표하고 대변하지 못하는 문제를, 자본과 지구화의 문제와 연결하여 해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마르크스와 칸트의 조합’은 이론의 원리적인 면에서 이루어진다. ‘세계공화국’은 완성된 기획 형태의 ‘구성적 이념’이 아니라 실천적 지향으로서의 ‘규제적 이념’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정은 교수는 말했다.
한편 칸트가 《실천이성 비판》에서 궁극적인 준거점으로 제시했던 “타자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하라”라는 언명도 “자본주의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경제적 기반이 없는 빈곤 상태에 처하면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목적성과 인격성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를 통과한 칸트는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계급 격차’를 해소하자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경제적인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어렵고 정치적 차원인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문제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정은 교수는 “칸트가 구상했던 세계시민사회, 세계국가가 ‘정치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의 동시 작용이라고 해석할만한 여지를 남긴” 것이라면, 고진이 칸트에게서 특화시킨 것은 “경제와 맞물려 있는 정치”라고 말했다.
고진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어소시에이션 모델을 구상했지만 경제 분석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국가’의 자립성을 무시하고 국가를 독립된 개념으로 다루지 않게 되었다. 국가의 소멸을 위해 과도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쟁취하여 국가의 작동방식을 바꾸자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면, “고진이 보기에 마르크스의 결함은 국가사회주의나 소련식 전체주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자립성을 보지 않은 아나키즘”적 성향에 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권력을 잡고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했던 좌파들이 “항상 민족 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파시즘에 굴복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몸소 내셔널리즘을 칭송하게” 된 것도 이 ‘경제 중심적 아나키즘’적 요소가 작동한 결과라는 것이다. 과연 지난 세월 좌파들은 보다 철저하게 국가를 검토하지 못했던 것일까? 혁명가들은 혁명 이후에 국가가 자본을 어떻게 추동하고 통제하고 비호해야지 혁명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일까? 정말 그런 것일까? 필자는 강의를 들으면서도 계속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칸트적 착상으로 마르크스를 읽고 헤겔적 대안을 제시하다
이정은 교수의 평가를 요약하자면, 고진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정식화된 ‘헤겔의 관념론을 거꾸로 뒤집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보편타당성’을 사유하는 칸트적인 착상으로 마르크스를 새롭게 독해하여 반자본 운동의 세계사적인 전망을 새롭고 보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고진이 “칸트에 빗대어서 제시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상당히 헤겔적”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고진은 일본의 현대사라는 ‘특수성’ 위에서 자신만의 문제의식을 갖게 된 학자이면서도, 독일관념론의 변주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국가와 자본이 어떻게 결탁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사유한, ‘보편성’을 지향했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다.
필자 또한 고진을 통해서, 마르크스를 통해 볼 수 있는 현실변혁의 ‘가능성’과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제한된 ‘한계’를 동시에 추적하여 비판과 저항의 알레고리를 부단하게 사유하는 것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나아가야 할 길임을 볼 수 있었다. 이정은 교수가 말했듯이, “고진은 어소시에이션을 실제로 실현가능한 것이라기보다는 칸트의 ‘규제적 이념’과” 같은 것으로 보며,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 그 바깥을 보는 이념 또는 상상력”이 쇠퇴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고진이 더 우려스러워 하는 것은 그 쇠퇴의 경향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추종으로 나아갔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승리로 간주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2012년, 이제는 더 암울하지 않을까. “머지않아 경제위기나 공황이 찾아 올 수 있고 자본주의가 쇠락을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하더라도,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기보다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무감각하고 무기력하게 반응할 뿐이다. 자본이 요구한 욕망이 아니라 내면에서 억압된 자연스러운 생명의 욕망을 긍정해보는 것, 국가와 민족이 부여한 역사적 사명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들의 민주적인 공동체’를 발칙하게 상상해보는 것, 참 어렵지만 ‘인류’의 역사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이정은 교수가 소개하는 가라타니 고진 사상의 마지막 부분은 그 ‘인류가 긴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 세 가지였다. ‘전쟁’, ‘환경 파괴’, ‘경제적 격차’가 그것인데, 고진은 선정 이유를 이 문제들에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집약되어 있는데, 결국 이것들은 현실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문제로 귀착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국가와 자본을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대로 파국의 길을 걷고 말 것입니다. 이것들은 일국 단위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 글로벌한 비국가조직이나 네트워크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효하게 기능하지 않는 것은 결국 제 국가의 방해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 각국에서 일어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은 ‘위로부터’ 봉합함으로써만 단절을 면합니다.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의 운동의 연계에 의해 새로운 교환양식에 기초한 글로벌 커뮤니티(어소시에이션)가 서서히 실현됩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정치적 기획의 부재와 헤게모니 전략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열 세 번째 시간은 숙명여대 박영욱 교수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대표작인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의 내용을 주로 소개하는 형식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이 책은 국내에서 1990년에 《사회변혁과 헤게모니》라는 제목으로 초역된 이후 20여년만에 최근 다시 번역되어 출간된 현대의 고전이자 문제작이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교조화되고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의 주류 흐름을 비판하고 좌파의 새로운 정치이론과 사회이론을 모색한 1980년대 이후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경향을 일컫는다. 이 책에서 라클라우와 무페는 ‘계급성’과 ‘경제결정론’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환원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재해석하여 다원화된 정치적 실천의 중요성을 제시했다.
그런데 알튀세르의 사상을 다루었던 강좌에서처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논의를 이해할 때도 우리는 과연 무엇이 맑스주의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가 정통성을 강조하며 본질주의적 환원주의적 결정주의적 경향으로 흐르던 것을 해체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토대와 상부’라는 사회구조에 관한 고정된 인식과 노동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변혁적 주체를 설정하려는 관점을 비판한다. 이러한 시도는 이론적 정합성을 높이려는 의도일 뿐만 아니라 소위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체제 혹은 진영 내부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세력의 권위와 독점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래서 라클라우와 무페의 이 책은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사라진 후에도 좌파 진영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새로운 실천이론을 모색하던 당시에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람시의《옥중수고》를 연구했던 무페는 이데올로기 담론 분석연구를 진행했던 라클라우와의 협동 연구로, 우선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쟁점화된 정치적 기획의 실패 사례들을 분석하면서 그람시를 분기점으로 삼아 마르크스주의적 해방에서 결여되어 있는 정치적 전략을 만들어가려 했다. 그들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이미 내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본질주의 담론에서 비롯된 헤게모니 지형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룩셈부르크, 카우츠기, 베른슈타인, 혁명적 생디칼리즘 등은 이 위기에 대한 대응 전략을 세웠지만 그들의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특히 파시즘의 승리로 끝나 버린 1930년대 서유럽에서의 가장 결정적인 실패는 참혹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람시는 “레닌주의의 계급동맹 개념을 극복하는 헤게모니적 결합에 대한 이론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재해석하여 부르주아가 만들어 놓은 기존의 지배 질서에 적대적인 새로운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혁명적 주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혁명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자본주의의 역사적 운명이 다한 다음에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적 단계가 도래한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면,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과연 지배와 부자유가 사라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면, “언제나 중요한 것은 중심부 권력을 탈취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다양한 세력들을 ‘헤게모니적 접합’을 통해 아우를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라는 것이다.
급진 민주주의 전략과 오늘날의 세계
라클라우와 무페가 개진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두 번째 문제제기는 ‘급진 민주주의’의 실천을 통해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에 결핍된 전략적인 방안들을 구상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좌파들이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와 제도를 거부하기보다는 이것을 더욱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기획으로 재생산하여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심화시키고 확장하는 전략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박영욱 교수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서 구상한 “민주주의적 관계는 차별이 아닌, 차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 정체성 이외에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배제하는 것이야말로 관념적인 태도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다.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이 단일한 연대체를 이루어 혁명적인 상황까지 전진한다는 생각 또한 이제 환상일 뿐이다. 또한 “‘노동자’라는 단일한 카테고리가 선험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그것만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의 부분에서만 등가적인 일시적 연대만을 이룰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요한 물음은 대항 헤게모니 확보를 위한 정치적 실천의 주체가 누구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과 실천은 무엇을 어떻게 극복하고 어디를 지향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된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한 ‘총체성’은 대중들의 서로 다른 ‘차이’를 제거하지 않는 연대 전선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늘 유동적이고 현실에 밀착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헤게모니 전략과 급진 민주주의의 정치실천에서 좌파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근본적인 갈등 조건으로 전제되어 있는 적대적 관점의 실천성이다. ‘적대’ 개념에 근거한 갈등과 차별의 요소가 다원적 민주주의와 헤게모니 정치전략을 추동시키는 원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던 지난 시기 동안 좌파는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적 절차의 중요성을 수용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현존 헤게모니 질서를 전환하려는 시도를 포기함을 의미한다는 잘못된 신념을 동반했다”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페의 지적이다.
1970년대말 이후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양극화로 황폐해져가는 이 세계에서 약삭빠른 기득권층은 이해관계에 따라 여전히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금융자본은 먹잇감을 찾아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닌다. 그리고 ‘적(敵)’이 사라진 시대, ‘전선(戰線)’이 애매해진 시대에서 구태의연한 진보 진영의 한 쪽은 무능하게 자멸하고 있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논의가 우리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는 이러한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토론하고 대응전략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에 달려 있다.
한편 이번 강의가 수강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쇄신 혹은 해체를 주창하며 내놓은 좌파의 새로운 이론적 경향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큼 적절한 소개 시간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사변적이고 난해하기로 소문난 이 책(특히 3장)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여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논의가 진보담론에 주었던 충격과 신선함이 어떤 것이었으며, 세상에 나온지 27년이 지난 이 책의 자극이 오늘날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지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총 16강으로 기획되었던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에는 이제 가라타니 고진, 안토니오 네그리,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세 번의 ‘만남’이 남아 있다. 그들이 품고 있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간략하게나마 곱씹어보며, 우리는 역사의 향배에 대한 회의를 떨쳐내고 진보의 미래에 대해 어떠한 전망과 대결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런데 과연 그 숱한 이론적 경향과 철학적 담론들이 세상을 바꾸는 데 얼마나 기여했을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때 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 또한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강좌를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추동해 온 이 근대세계를 분석하고 비판해온 거대한 이론적?실천적 투쟁의 물결들을 살펴보며 마지막까지 기억해야 될 지점이 있다. 제1강에서 서유석 교수가 강조했듯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어떤 ‘이론’으로의 편향이나, 단순한 논리로 고난의 상황을 돌파하려는 맹목적 ‘실천’ 자체가 아니라, 적대와 차별이 만연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 이론적 실천, 지속가능한 이론을 모색해나가는 과학적인 태도가 아닐까? 일련의 사태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의미를 도출하여 섣부른 기대나 실망을 품지 않고 우리의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것, 늘 출발점은 거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에서 사건들의 의미를 살펴보자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되는 강좌열두번 째 시간에는 김성우 兀人고전학당연구소장의 안내로 근대 자본주의 체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하는 ‘세계체제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김성우 연구소장은 우리가 시사 문제들을 소비하는 방식을 지적하고, 월러스틴의 관점을 통해 무엇을 새롭게 볼 수 있을지 자문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한국사회에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적당히 자극적인 ‘사건’이 터지면 모든 매체의 관심사가 한 쪽으로 쏠리고 사람들은 그 사건의 추이에만 관심을 가지는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경향과, 그 사건의 의미를 다각도로 고려하기 보다는 그 사건이 끼칠 국가적 영향에만 주로 관심을 쏟는 내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성우 소장은 그런 단선적인 상황 분석과 아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계사적 시각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나열하는 역사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대규모의 관점에서 사건들의 의미를 탐색하자”는 것이 오늘 살펴볼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의 제안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사태의 소비’가 아니라 ‘사태의 통찰’이 가능하기 위한 총체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 분석의 ‘틀’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미국의 비판적인 사회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인 월러스틴이 주창한 독창적인 이론인 ‘세계체제론’에서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정치학, 경제학, 사회 구조, 문화라는 상자들로 나누어 분석”하거나, “국가들의 외적인 관계인 국제적인 틀로 이해하지 않고 장기간과 대규모의 시각에서” 세계를 분석하려고 한다.
사회과학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자
월러스틴에 따르면 세계를 분석하려는 다양한 분과학문들이 다루는 체계성은 “실재가 아니라 상상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현상들을 전문화하여 분석하는 것은 철학과 단절”되어 발전한 19세기 사회과학의 특징적인 한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각각의 학문들이 연구하는 대상 세계의 현실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각 부문들이 어우러져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그래서 다학문적인 방식이 아니라 일학문적인(unidisciplinary) 접근이 필요”하며, 여기에 적합한 것이 “역사적 사회과학으로서의 세계체제 분석”이라는 것이다.
김성우 소장은 월러스틴이 크게 세 영역에서 연구를 진행해왔다고 소개했다. 그것은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적 발달’,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현대적인 위기’, ‘근대 학문체계 분석을 중심으로 한 지식의 구조’가 그것이다. 그러한 작업들에는 “초역사적인 불변의 구조와 법칙을 탐구하고 정립”하려는 ‘형식주의적 사회과학’과 “사건 중심의 에피소드를 기술하는” ‘실증주의적 역사학’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서, “일직선적인 발전 또는 진보 개념을 비판”하는 월러스틴의 일관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그의 세계체제론이 “구조를 역사로부터 파악하고 특히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역사적인 생성과 팽창 그리고 위기와 소멸을 추적”하는 역사적 사회과학이라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월러스틴은 큰 안목으로 역사를 바라보려는 이러한 의도를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월러스틴은 애초에 미국 정치의 특수성을 밝히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는 머지않아 미국 정치에서 ‘인종’이란 변수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종 문제에 대한 관심은 그를 아프리카 지역연구에 매진하게 만들었고 곧 현재의 아프리카가 처한 조건은 유럽이 주도한 근대 세계경제 체제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월러스틴은 ‘세계체제(World system)’라는 분석틀을 선보이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체제’란 분석을 위한 관점이자 동시에 분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문제의식은 근대세계를 구성한 가장 근본적인 존재양식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출현과 확장 그리고 사멸에 대한 탐구에 집중되어 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몰락의 분기점에 근접하고 있다
월러스틴은 1989년 현실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에 대한 해석의 문제에서 기존의 일반적인 시각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1980년대말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연이은 구소련의 해체는 자유주의의 궁극적인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이 사건들은 (미국이 헤게모니를 가진) 자유주의가 붕괴되고 ‘자유주의 이후’의 세계로 확실히 들어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월러스틴에 따르면 근대 세계를 추동해 온 거대한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인 ‘발전주의’의 몰락을 암시하는 것이며, “맑스주의가 아니라 레닌주의적 발전주의의 몰락”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더 거슬러 올라가 68혁명도 근대적 세계체제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중도 자유주의와 복지 개념의 몰락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945년에서 1968년 사이에 진보적인 세력이 집권한 많은 국가들의 실패에서 보듯이, 68혁명을 ‘자유주의적 지구 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옳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만 하면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들이 체제를 의미심장할 정도로 개혁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이후’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세계경제 체제에 대한 전망을 시도하는 월러스틴은 “사실 경제는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자유주의라는 이념은 인권의 정당성이나 민족의 자결권 같은 보편적 권리를 주장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이 작동될 때는 사실 자유주의는 이 “권리들의 완전한 실행”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정치체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영속적인 지속을 위해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권과 민족의 권리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면,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할 이 불평등한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유주의의 맹점이 드러나면 이 체제 속에서 지속적인 이익을 얻을 수 없는 대다수 계급들에게 이 시스템의 유지가 정당성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또한 월러스틴에 따르면 “자유시장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 디지털 문명의 발전과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기업들에서 보듯이 늘 자본주의에서 막대한 이윤을 가능케 하는, 자본축적의 핵심은 ‘독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경쟁이 치열할수록 이윤은 떨어지기 때문에 독점자본은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마련이고, 그 독점체제의 유지를 위해 ‘국가’라는 이름의 법적 체제와 의회권력은 앞장서서 자본가들을 비호하기도 한다. 결국 국가나 시민사회와 분리된 ‘자유시장’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더욱 공허해짐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은 아직도 ‘대기업이 망하면 나라도 망한다.’, ‘규제를 더 풀어야 하고 아직은 나눠줄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김성우 소장은 “어쩌면 1980년대말의 세계변동은 1970년대말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의 태동으로 인해 10여년 지연된 것뿐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즉,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주기적인 팽창과 수축 과정 속에서 자유주의 이념의 돌연변이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윤율 감소를 막기 위해 인건비, 생산원가, 세금, 관세는 낮추고 자본의 권리는 무제한적으로 확장하며, 치명적인 위기가 발생해도 대기업은 공적자금을 통해 손실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이 ‘유연한 괴물’은 30년 동안 우리의 ‘상식’을 바꾸어 놓았다.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체제도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의 침체 속에서 헤게모니를 점차 잃어가고 있던 미국의 보수주의적 자본가들이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정보기술 혁명을 빌미로 기존의 세계경제 헤게모니에 도전적인 국민국가들의 보호주의를 타파하여 인건비와 관세를 낮추려는 일시적인 몸부림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오늘날의 자유무역협정(FTA)도 이러한 ‘반동적인 세계화 전략들’ 중 하나로서 자본주의 세계경제 자체에 내재한 오래된 구조적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김성우 소장은 월러스틴의 말을 빌어 “결국 이러한 반동적인 세계화 전략으로는 이 구조적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 근대 세계체제는 조만간 분기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다가올 분기점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가 모색해야 할 것은 “모든 모순이 해결된 몰역사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역사적인 대안체제로서 불평등의 해소라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월러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핵심의 자유노동과 주변의 강제노동 간의 조화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며 …… 노동이 모든 곳에서 자유로울 때, 사회주의가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도래하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종말과 함께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새로운 체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월러스틴은 “진정한 맑스주의, 정통 맑스주의를 찾는 것은 신화”를 현실 속에서 찾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 소장의 말처럼, 이념이 아니라 역사의 맥락적 분석에서 출발하는 “월러스틴은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인기 없는’ 학자일지도 모른다.”
결국 월러스틴을 따라 자본주의적 세계경제를 이해하자면, 오늘날의 세계경제란 기나긴 16세기(1450년~1640년)에 유럽에서 태동된 자본주의가 19세기 말 그 경계와 지배력을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결과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그 체제의 탄생 이후에도 1789년 프랑스대혁명, 1968년 세계 혁명이라는 큰 역사적 전환점을 거치며 끊임없이 자신의 작동방식을 변화시켜 왔다. 그보다 작은 지점들인 1968년 세계혁명, 1973년 오일쇼크, 그리고 2008년 가을부터 시작된 미국발 금융 위기 등도 세계경제의 역사적 변동을 설명하는 하나의 ‘국면’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더해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1876년 강화도조약과 개항과 이후의 식민지화, 1945년 광복 이후 민족분단과 전쟁, 1960년 4.19민주혁명, 1961년 5.16군사쿠데타, 1987년 민주화운동, 1997년 외환위기와 IMF체제로의 편입 등도 모두 우리의 ‘지금-여기’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성할 때 참고해야 할 변곡점들이 된다.
세계체제론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김성우 소장도 지적했듯이 우리가 ‘세계화’라고 부르던 것은 곧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편입이었고, ‘글로벌화’라고 부르던 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기실 영어만능주의에 길들여지고 미국에 더욱 종속되어왔던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미국 시각, 중국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김 소장의 말은 섬뜩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앞으로 나의 재산가치는 줄어들까’, ‘향후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을 가로 막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시안적 시각을 벗어던지고, “조금 더 넓게, 깊이 있게, 다르게 보고 느끼”려는 노력을 통해 결국 우리의 시각을 확장하는 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물론 자신의 조건을 망각하고 주류와 핵심에 서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월러스틴의 말처럼 “더 주변부적인 생산과정 참여자들”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우선이리라. 예를 들면, 개별 노동자, 그것도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이 아니라, 여성, 문화, 민족, 종교, 세대, 성정체성 등 다층적으로 구성된 ‘계급’ 관점을 통해 세계와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 새로운 창을 통해 보면, 소수자와 약자가 겪고 있는 불평등과 부자유는 얼마나 더 섬세하게 인식될까? 결국 세계체제라는 거시적 관점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포착해야 할 것은 ‘저기 사람이 저렇게 살고 있고 저것을 어떤 방향으로 개선하자’라는 미시적 관점이 아닐까?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우리가 갖고 있는 신념체계와 경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편견과 아집은 얼마나 뿌리 깊은가. 김 소장은 “자신이 떠올리고 있는 생각과 하고 있는 일에 은폐된 ‘전제’를 검토하지 않는 것이 바로 교조주의이자 근본주의”라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민족이라는 신앙과 계급이라는 신앙의 대립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보’의 미래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요즘”에,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1대 99(또는 20대 80의 사회)의 사회에서” 김성우 소장은 역사의 반복과 아이러니가 변증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성찰해보자고 제안했다. 물론 그 역사의 반복은 맑스의 말처럼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 전개되기 일쑤이지만 말이다. 더불어 그는 강의 말미에 수강생들이 월러스틴의 책을 직접 읽고 보다 넓은 시야로 세상의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인식해보자고 주문했다. 한편 프레시안에서도 정식으로 원고료를 지불한 월러스틴의 따끈따근한 칼럼들이 번역?게재되고 있으니 독자 여러분들도 쉽게 국제 문제에 대한 그의 깊이 있는 시각을 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되는 강좌열한번 째 시간의 주제는 ‘영국문화주의’였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것은 프랑스에서 1960년대 이후 맑스주의의 갱신을 주창한 알튀세르에게 영향 받은 일군의 제자들이 사유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와 달리 영국에서 2차대전 후 영국에서 개진된 맑스주의의 한 흐름 속에서 사회변혁을 고민하던 일군의 학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당대를 어떻게 분석하고 사유했을까. 현남숙 카톨릭대 교수가 소개한 영국문화주의는 맑스주의적 관점을 통해 사회구조의 분석 틀을 선취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알튀세르의 고민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영국문화주의는 1950년대 후반 미국을 필두로 한 독점자본주의의 세계지배력 강화와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파시즘적 변환에 회의를 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기획하던 시기에 등장했다. 그것은 정치, 경제, 문화를 분리하여 “문화를 부차적인 것으로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야말로” 문화와 경제가 결합된 새로운 시대에 사회의 진정한 변혁을 이끌어내기 위해선 적합하지 않다고 비판한 것이다. 즉, 영국문화주의 연구자들은 경제적 토대와 그 위의 다른 상부구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지배방식에서 헤게모니의 역할, “제도와 문화의 물질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노동계층의 모순을 설명할 수도, 바로잡을 수도 없다”고 보았다.
경제 정책이 분배적 관점으로 조금 변화한다고 해서, 복지제도가 진보적으로 개선된다고 해서, 기득권 유지밖에 모르는 권력층이 잠시 의회권력을 잃는다고 해서 세상이 나아질 것이란 믿음은 이젠 순진한 착각이 되어버렸다. 그런 면에서 영국문화주의의 시야는 보다 넓고 그들의 인내심은 충분하다. 국가권력을 쟁취하여 정치경제적 혁신으로만 완수될 혁명이 아니라, 우리가 이루어야 할 진정한 혁명은 장구한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야 할 인간과 사회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성하고 개선해나가는 기나긴 혁명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정치혁명과 경제혁명을 포괄하는 ‘제3의 혁명’으로서 “인간과 제도에 관한 문화혁명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국문화주의(British Culturalism)라는 사상적 조류는 영국 사회주의 역사에서 신좌파(New Left)로 불리는 정치적 전통 위에서 발현되었으며, 영국문화이론, 문화유물론, 신(新)그람시주의, 버밍엄학파, CCCS(현대문화연구센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국문화주의의 연구자들은 무엇보다 ‘문화’라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 투쟁과 그 고유한 실천양식에 관심을 가지고, ‘문화혁명’이란 ‘사회적 존재와 의식’을 동시에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즉, 불평하고 부자유한 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정치적 실천 못지않게 노동계급과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문화적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선 영국의 문화주의가 극적으로 변한 만남과 이별의 몇 장면들 즉, 문화 연구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과 만났을 때,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것이 문화유물론의 중핵과 결별했을 때를 중심으로 이 지적 흐름의 단면을 살펴보자.
‘문화’가 ‘헤게모니’를 만났을 때
산업혁명, 부르주아 의회혁명, 사회주의 혁명, 민주화 혁명 등이 이룩한 성과와 한계 위에서,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악몽을 딛고서, 현대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더 행복해지지 않는가? 국가의 생산량은 늘어나고 대기업의 생산력은 계속 커지지만 왜 실질적 평등은 더욱 요원해지는가? 왜 피지배 계급의 하위문화는 자생성과 저항성을 잃고 지배 계급의 문화에 종속되기 쉬우며, 어떻게 문화적 지배에 의해 정치적 지배가 더욱 고착화되는가? “노동계급은 과거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이데올로기에 보다 철저하게 비판적이지 못하면서, 왜 지배계급이 만든 논리에 빠져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규정하는가?
이러한 의문들을 품었던 영국문화주의자들은 다양한 세대와 넓은 스펙트럼의 지향점을 가진 연구자들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이지만, 그들에겐 이론적 배경에 있어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에 입각하여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지배에 대처하기 위해 (정치와 경제에서) 문화로 관심을 돌렸다는 점이다.” 바로 “역사유물론의 실천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간파한 사람”인 그람시의 개념들이, 지배양식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위임된 헤게모니 체계로” 밝혀내는 방식 즉, 문화영역에서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강한 영국적 상황을 분석하는 이론적 자원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남숙 교수는 “문화주의는 역사적으로는 영국 맑시즘의 전통 안에서, 또 현대적 의미로는 문화연구라는 영역 안에서 문화를 통해 지배구조를 분석하고 이에 저항하고자 하는 공통의 에토스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사회적 동의를 얻기 위한 지적?도덕적 주도권”으로서, 군대나 경찰이 하는 방식처럼 억압적인 물리력이나 강제가 아니라,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갖추어진 지배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국문화주의는 “국가나 사회의 지배를 무력이나 강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인 동의에 의한 지배체계로 바라본다. 일상성 속에서 문화적 지배의 면면을 살펴보며, “국가와 시장의 대중지배, 힘이나 무력이 아닌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동의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것은 영국문화주의가 가진 독특한 시각인 것이다.
윌리엄즈와 홀이 그람시를 만났을 때
일찍이 그람시가에서 강조했던 것도 헤게모니를 활용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분석 자체가 아니라, 그 지배양식의 인식 속에서 대중이 주체로 자립하여 그들이 문화혁명에서 대항문화를 생산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의 생각을 이어 받은 문화주의에서도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인 하위 주체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실천을 중시한다. 그것은 영국문화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만든 레이먼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 1921-1988)가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는, “미완의 혁명을 추구해나가는 과정에서의 장구한 문화혁명”으로서 ‘문화유물론(cultural materialism)’이 지향하는 바인 것이다. 그는 문화유물론을 역사유물론과 관련지어 “사회적이며 물질적인 생산적 과정으로서의 문화이론, 생산의 물질적 수단의 사회적 사용으로서의 특수한 실천이론”으로 규정했다.
그 자신이 노동계급의 아들인 윌리엄즈는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보다 정교화하여 ‘지배 헤게모니(dominant hegemony)’와 ‘대항 헤게모니(counter hegemony)’ 혹은 ‘대안적 헤게모니(alternative hegemony)’로 구분하고, “헤게모니는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늘 사회적 관계의 ‘사이’에 존재하며, 끊임없이 전복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노동계급의 문화를 분석하면서 지배문화에 의해 규정되고 구성된 그 문화 내부에 지배 이데올로기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것에 저항의 역량을 기를 수 있는 대항문화(counter culture)가 역동적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미 “노동계급의 정서적 구조에 새로운 의미 체계, 가치관, 관행,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것(the emergent)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남숙 교수가 소개한 또 한명의 문화유물론자는 스튜어트 홀(Stuart Hall, 1937-)인데, 그는 자메이카 출신으로 옥스퍼드대에서 수학했으며 윌리엄즈를 통해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접했다. 윌리엄즈가 영국문화주의를 “역사유물론의 새로운 변형으로 이론화”했다면, 그는 “그 토대를 딛고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문화의 영역과 사회적 갈등의 영역을 계급을 넘어 인종, 세대, 종족성, 식민적 경험 등의 다른 배제된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홀은 사회적 삶에서 개인들은 다양한 정체성을 복합적으로 형성하게 되고 진보적 문화의 확장 역시 다양한 집단적 정체성의 블록을 통해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홀은 대처리즘 시기의 이데올로기 분석으로 유명한데, 그는 “대처리즘을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고 대처가 ‘시장에서의 자유주의와 일상에서의 보수주의’를 기치로 대중을 지배하는 방식을 관찰했다. 당시 한편으로는 복지정책 축소와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의 가치, 전통적 여성상, 근면한 노동자상”을 강조하던 지배 이데올로기는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었고 대중은 이러한 문화적 지배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는 대중들의 동의를 자발적으로 얻어 합법적이고 도덕적으로 “주도권을 얻어가는 대처리즘에 속수무책이었다.” 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변혁의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여전히 교조적 맑스주의의” 미래만을 되뇌었던 것이다.
여기서 홀은 문화적 주체가 복수의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고, 중층적으로 결합된 주체의 구조를 설정하기 위해 ‘접합(articul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트레일러를 트럭의 운전실과 떼었다 붙였다할 수 있는 것처럼 사회적 관계 속의 주체들은 어떤 조건 아래에서 서로 서로 ‘탈접합’되거나 ‘재접합’되는 연결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현남숙 교수는 홀이 “필연적으로 결정되거나 절대적이거나 필수적인 것이 아닌, 다양하고 서로 구분되는 요소의 결합”이라는 관점을 통해 문화연구의 지평을 넓혔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계급+세대, 계급+인종, 계급+여성+식민경험 등과 같이 문화연구에서 집단 내의 세부적인 차이까지 고려하며 다양한 주제와 요소의 접합이 가능해진 것이다.
‘문화’가 ‘계급적 관점’과 헤어졌을 때
만약 그렇게 ‘계급’과 ‘여성’이 중첩된 여성의 현실에 관한 영화가 있고, 그 영화에 대한 비평에서 연구자가 “생산관계에서의 억압과 저항”을 고려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단지 여성을 대상화하는 영화와 여성의 문제만 다룬 비평이 되고 만다. 윌리엄즈와 홀이 주장했던 문화비평은 단지 문화 자체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더불어 노동계급의 의식변화를 유도하는 것에 그 주안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영국문화주의는 제도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그 정치적 실천성을 잃어버렸고, 문화를 소비적 행위로 용해시키는 단순한 문화연구로 전락하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구조주의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이론들이 문화연구의 방법론을 풍부하게 해주더라도, “헤게모니가 동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그 너머의 진정한 현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영미 문화주의는 문화유물론적 관점이라는 문제의식을 거의 상실하고 “국적불명의 학제간 연구”를 표명하거나 시민운동의 한 경향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일상문화 연구가 사회분석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화가 “토대와 분리되는 순간, 인간의 사회적 존재조건에는 무심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뜻에서 유의미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남숙 교수는 영국문화이론이 “맑스주의와 가깝든 멀든, 문화연구라는 하나의 ‘의제’를 형성했다”고 그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바라본다면, 영국문화 이론은 처음에는 문화‘유물론’이었지만, 지금은 ‘문화’유물론이 되어버린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영국문화주의가 그 유물론적 문제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비평의 정치’를 넘어 그러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문화의 물질적 구성’에 관한 분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저항적 이론을 통해 학문적 관점과 성과 속에서 대중의 대항문화가 온전한 평가를 받을 수 있고, 99%의 사람들이 역동적으로 구성해내는 문화혁명의 과정은 1% 지배문화의 허위성을 제 스스로 폭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치혁명도 산업혁명도 인간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주지 못했”다면, ‘그럭저럭 먹고살만하기에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고 이 세계가 그냥저냥 만족스러운’ 사람들의 무심함이 우리 곁에 넘쳐난다면, “기나긴 문화혁명”의 시간은 계속 진행될 것이다. 아니,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알튀세르가 남긴 것들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루이 알튀세르의 작업은 맑스주의 내부에서 맑스주의 이론을 개조하고 쇄신하려는 시도들 중 “사실상 최후의 것”이었다. 그는 “맑스주의의 전화(轉化)라는 정치적 문제의식 속에서 사유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우리시대의 사상가였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많은 철학적 논제들과” 비판의 무기가 될 개념들을 지적 유산으로 남겼다. 그런데 현실을 정치하게 분석해 낼 수 있는 ‘맑스주의의 과학성과 비(非)교조성’을 강조했던 그의 작업은 어쩌면 그 이론 자체보다 그것으로 인한 알튀세르적인 효과와 영향이라는 면에서 오늘날 더욱 논쟁적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치열했던 이론적 투쟁은 완수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고, “그가 남긴 유산은 그의 후세대에 의해 비판적으로 전유(傳諭)되고 계승되고 있다.”
또한 알튀세르가 추구하던 비결정론적이며 비환원론적인 이론적 경향과 이단적이고 개방적인 지적 태도로 인해 그의 사상은 “비판적 대결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해되거나 수용될 수 없는 사상, 새롭게 변용되고 굴절됨으로써만 계승되고 재개될 수 있는 사상”으로 이해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강좌의 열 번 째 강의에서는 충북대학교 철학과 박기순 교수의 안내로 ‘포스트 알튀세르주의자들로서의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를 만나 보았다. 이번 강의의 고갱이는 그들이 ‘포스트 알튀세르주의자들’로 묶일 수 있다면, 그들은 어떤 관점에서 또한 어떤 거리에서 알튀세르를 ‘계승’하거나 ‘극복’하려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서 사유하는 법을 배운 직간접적인 제자들이면서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각각 고유한 방식으로 그를 극복하려고 하는, 생존하는 프랑스 현대철학자들 중 가장 각광 받는 세 명의 철학자들을 알튀세르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자.
그런데 ‘알튀세르와 함께’ 우리 시대의 문제, 특히 정치적 문제, 아니 정치 자체에 관해 사유하고 있는 그들이 우선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맑스주의로 대표되었던 정치적 운동과 해방의 이념이 가졌던 난점과 실패”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즉, 맑스주의 내부에 만연한 경제 환원론적인 입장에 대한 알튀세르의 비판적 작업을 이어 받은 그들에게 주어진 보다 분명해진 사유 과제는, 사회 각 부문이나 경제적인 영역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정치의 고유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를 독자적인 작동 원리를 가진 하나의 고유한 영역으로서 대상화하고 개념화할 때 드러나는 난점은 분명한 것이었다. 고유한 영역으로서 ‘정치 자체’로의 회귀는 “현실에서는 정치의 소멸”, 즉 정치를 단순히 행정 기능과 국가 관리의 역할로 축소시키고 사회적?경제적 갈등의 조정으로만 바라보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 정치 개념의 협소화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듯이 자본의 침식과 그로 인해 공동체가 가진 정치적인 역량의 침체와 쇠퇴를 동반한다. 그렇다면 정치의 고착화된 사유방식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 가진 무한한 잠재성과 급진성을 보존하며, 그것을 어떻게 양화시키거나 희석시키지 않고 정치의 고유성과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가 가진 주요한 문제 틀은 “정치의 개조, 혹은 고유한 의미의 정치의 가능성”을 ‘정치적 주체성’이 가진 의미와 한계 속에서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발리바르와 인권의 정치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발리바르(Etienne Balibar, 1942~)에게 맑스 혹은 맑스주의는 “우회할 수 없는 지점으로서 그에게 근본적인 사유의 지평을 제공”했다. 그는 맑스주의가 자신의 역사 속에서 드러낸 한계들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의 극복을 여전히 맑스주의의 지평 속에서 사유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스승인 알튀세르의 작업을 가장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도달한 지점, 즉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가진 난점에서부터 그의 독자적인 사유를 개진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이라는 테제가 가진 난점에 대한 답변이다. 즉, 알튀세르가 취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론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기본적으로 경제적 생산관계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위한 장치이자 물질적 도구라는 측면에서, 이데올로기는 구조를 작동시키는 요소로서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하고 그 재생산의 메커니즘은 설명하지만, 그 전화는 설명할 수 없는 기능주의적인 이론이라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과학’에 대립되는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과, 그가 강조한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양립가능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는데, 발리바르는 이 난점을 ‘초개인성(transindividuality)’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박기순 교수는 발리바르가 말하는 주체화가 집단적인 과정임을 강조하면서,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은 어떤 관계들과 공동체성의 효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인의 개체성은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거나 변형”된다는 것이다.
또한 발리바르는 맑스와 알튀세르가 공유하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여,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자들의 체험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 또는 승인과 저항 또는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 피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이데올로기가 “정의, 자유와 평등, 노동, 행복 같은 근대적인 이념들에서 보이는 보편성의 형식을 드러내며, 피지배자들의 이 가상적 보편성의 경험은, 단순한 가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 보편성의 이념 때문에, 기존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물질적 토대가 될 수 있”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박기순 교수는 발리바르가 “‘보편성의 정치’, ‘인권의 정치’라는 개념을 주권 개념에 근거한 근대정치의 전화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인권은 인간의 어떤 자연적인 고유한 설질로부터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획득되고, 상실되고, 재규정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권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태에 국한되지 않는 초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권’ 개념이 끊임없는 시험을 통해 재정식화를 요구하는 유동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시민권’ 개념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인권은 어떤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재해석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 그 자체이다.” 이처럼 인권은 그 내용상 미결정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정치공동체에서 법적 합의를 통해 시민권의 형태로 규정될 수밖에 없지만, 그 본성상 늘 시민권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하는 ‘권리에 대한 권리’라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인권 개념의 난점은 그것이 시민권과 전면적으로 결합할 수도 결별할 수도 없다는 것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박 교수는 발리바르의 이러한 인권 개념은 데리다가 정의(justice)에 관해 말한 것 처럼 어떤 ‘무한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권은 민주주의와 동의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 인권 개념 속에서 “민주주의에 특징적인 본질적 무한성”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권이 무한성으로서 이해되는 한, 그것에 기초해 있는 민주주의 또한 무한성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민주주의 원리이자 정치의 원리로서의 이 인권을 ‘평등한 자유’ 또는 새로운 조어로서 ‘평등-자유(?galibert?)’라는 개념을 통해 표현했다. 박 교수는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평등과 자유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함축하여 서로의 요구를 제한하지 않는 요구의 절대성을 표현한다. 둘째, 평등-자유는 보편성을 함축하여 모든 인간에게로 확장되는 인권, 즉 권리의 보편화를 함축한다. 셋째, 평등-자유는 정치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권리,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의미한다.”
결국 발리바르에 있어 “인권, 민주주의, 정치는 모두 동의어”가 된다. 그에게 인권은 근대 사회계약론 모델에서 초역사적이며 초월적인 개념으로만 설명되던 ‘전(前)-정치적’ 단계의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갖는 권리가 아니라, “시민상태에 내재하고 있는 ‘정치적 계기’로서, 즉 ‘정치의 장소’로서 재규정”되는 권리이다.
바디우와 진리의 정치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는 발리바르에 비해 1960년대에 알튀세르가 개진했던 이론적 편향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에는 알튀세르의 유산을 자신의 철학적 체계 속으로 전유하여 새로운 의미를 가진 철학적 개념들을 생산한다. 박기순 교수에 따르면, “이 전유와 계승이 무엇보다도 잘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주체(sujet) 혹은 주체성의 문제이다.” 즉, 알튀세르는 정치를 “어떤 특정한 원리나 조건에 의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귀결이 아니라”,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구조주의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진영 선택’을 통해 이루어지는 어떤 “주체성의 표현”으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박 교수는 바디우가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으로 설명되는 이러한 입장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의 ‘존재와 사건’이라는 독자적인 개념을 형성했다고 설명했다.
바디우에게 있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하나의 대상’으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적인 전체를 거부하는 ‘다양체(le multiple)’로 있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주체’는 어떤 원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름을 붙이면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는 어떤 정치적 ‘사건’의 효과와 귀결을 탐색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치’에 관한 문제에 있어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주체를 상정하지 않으면서도 ‘주체적인 것’의 사유 가능성을 정초하는 것이었다.
특정하게 주어진 어떤 체계의 원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치적 ‘사건’이 발생한다면, 이 사건은 어떤 해석의 대상도 아니며 오직 명명의 대상일 뿐이다. 바디우에게 ‘정치’란 이렇게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승인으로서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 행위로부터 시작되어, 이 명명된 사건의 귀결들에 대한 탐색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명의 귀결들과 효과들로서 사후에 구성되어지는 것이 바로 정치적 행위를 통해 생산될 수 있는 것 즉, ‘진리(v?rit?)’이며, 바디우는 이 과정을 ‘진리절차’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이 사건에 의존해 있는 요소들을 구별하여 사건의 의미를 구성하는 이 모든 절차를 ‘충실성(fid?lit?)’이라고 개념화하며, 이 진리절차를 구성하는 국지적 지점들을 ‘주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디우에게 정치를 통해 구현되는 “진리는 이렇게 전투적 주체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물론 프랑스혁명에서 보듯이 그 사건이 경과되면 정치적 급진성의 의미가 축소되고 왜곡되며 그것의 영향력도 안정화에 접어들지만 말이다.
현대철학에서 거의 폐기된 ‘진리’ 개념을 새롭게 비틀어서 바디우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건’을 통해서만 생산되어 잠시 드러나는 그 ‘진리’는 지식을 통하여 사후에 표상될 뿐이다. 그리고 진리를 생산해 내는 과정 속에서 각각의 절차는 스스로의 작업이 진리인지 말할 수 없으며, 그저 진리에 무관심하게 고유한 활동에 전념하여 그 사건을 통해 진리의 명명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철학적 작업이 된다. 그런 면에서 바디우에게 ‘철학’이란 정치를 사유하는 장소나 정치이론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들의 조건 속에 존재하는 자기발생적 사유 활동, 행위”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바디우의 ‘주체 없는 주체성’ 개념을 맑스주의와의 연관 속에서 설명하자면, 그것은 주어진 상황인 사건들의 연관 속에서 선택과 결정을 내리고 프롤레타리아트적인 입장을 취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곧 입장의 정당화를 위한 방식이 아니라 해당 사건의 의미를 밝히는 ‘선언’과 그에 뒤따르는 ‘행위’들로 대변되는 ‘전사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디우는 “맑스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과감하게 선언했다. 그에게 있어 맑스주의는 “비정합적인 전체에 붙여진 하나의 비어 있는 이름이며,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의 이름들은 독특한 정치적 사유들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맑스주의자들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정합적 이론 체계를 가진 맑스주의의 한 경우로서 그들을 볼 것이 아니라, 알튀세르의 지적 투쟁 또한 “정치에 대한 하나의 고유하고 독특한 사유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랑시에르와 비분리의 정치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re, 1940~)는 오늘 다루는 세 명의 철학자들 중 알튀세르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며,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한 거부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전개해나갔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알튀세르 입장의 문제점은 정치적 행위자들이 실천하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은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진리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엘리트주의’라는 것이었다. 정치적 행위자들로서 대중들의 능력을 불신하고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입장은 ‘사유하는 지식인 집단’과 ‘사유하지 못하고 생산하는 대중 집단’의 선 긋기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적인 것과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의 구분, 말할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리, 교육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분리에 대한 저항에서 랑시에르는 ‘출발’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분할의 논리’와 부르주아 기득권 세력이 늘 사용하는 ‘지배를 위한 언어’에 대한 비판을 통해 랑시에르가 가진 문제의식의 핵심은 ‘대중은 스스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랑시에르는 정치적 계몽주의, 정치적 주체에 의한 정치적 해방이라는 인식을 애초부터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근원적 평등’은 정치적 목표의 도달점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인 것’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정치적 분할에 관한 조건을 제거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정치적인 입장인 것이다.
박 교수는 알튀세르와의 결별 이후 랑시에르가 오랜 시간 동안의 은둔 작업 끝에 내어 놓은이라는 저작을 통해 19세기 중반의 노동자들은 자본이 규정한 그들의 생활양식을 스스로 부정하고 가장 정치적인 행위를 보장하는 자율성을 획득했음을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낮-노동과 밤-휴식의 반복이라는 ‘시간’의 분할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통제하고 존재양식을 규정하려 했던 자본의 규율에 저항하여,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고, 토론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생산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 자기 자신과 싸우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힘과 가치에 대해 자각했다. 이러한 정치적 주체화와 그 역량에 관한 질문과 답변에서 박 교수는, “정치적 무대에 오르기 전에 각성과 훈련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대 위에서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힘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랑시에르에 따르면 “한 시대의 획을 그었던 맑스주의의 전통은 (현실 맑스주의 체제의 붕괴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가속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이제 실패로서 체험되고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맑스주의의 실패는 한 사상적 조류의 패배를 넘어서 “역사의 진보와 혁명에 대한 믿음의 붕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이 붕괴로부터 상반되는 두 가지 현상,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보았다. 그것은 먼저 “정치에로의 회귀”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의 종말”이다.
즉, 경제적인 힘(생산력)과 사회적인 힘(계급 실천)과 그것의 결합에 의한 혁명이라는 맑스주의의 정식화된 “믿음의 붕괴는 자연스럽게 고유하게 정치적인 것, 사회 및 경제적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치의 고유성으로의 회귀를 추동”했지만, 실상 이러한 흐름은 현실 속에서 정치의 고유한 공간을 “공장이나 거리가 아니라 의회, 정부기관, 사법기관”으로 한정해버렸다는 것이다. 즉, “정치는 사회를 구성하는 상이한 이익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전문가들의 업무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탈정치화에 맞서 랑시에르는 정치를 재사유하려고 한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그 재사유의 출발점은 젊은 시절의 지독한 스승이었던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지점이었다.
다르게 사유하기의 어려움
강의와 질의응답은 세 시간이나 이어졌지만, 이 시간 동안 대표적인 포스트 알튀세리안들로 불리는 걸출한 현대 철학자들의 저마다 다른 생각들을 (축약으로 인한 오해의 덫을 감수하며) 일반인 수강생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수강생들은 프랑스 철학자들을 통해 방금 익힌 새로운 개념과 입장들을 곧바로 현실과 역사 문제에 적용하여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개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근거로 그 개념의 적합성을 따지는 것은 손쉬운 일이지만, ‘다르게 사유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보는 과정은 더 오랜 시간과 열정을 요구한다.
초코파이로 저녁의 허기를 달래가며 강사 선생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는 이 강좌의 모든 수강생들과 더불어 필자도 생각의 지도를 넓혀 나갈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오늘날 ‘진보 정치’를 표방하는 정당이 지향하고 있던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들이 어떻게 편협한 파벌주의나 전체주의적 문화와 한 몸이 될 수 있는지를 목도하면서, 나의 언어로 그것을 분석하고, 이해하여, 되풀이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사유 과제이기 때문이다. 자기성찰에 대한 불감증과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의심의 부족, 곧 소크라테스가 죽어가며 질타했던 ‘반성하지 못하는 삶’은 저 숱한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민중의 고난을 낳고 파렴치한 악덕을 쌓아 왔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