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V,2천년 역사의 한(漢)을 풀다[청춘의 서재]

『김태권의 한(漢)나라 이야기』(비아북)를 청년들에게 소개합니다.(편집자)/

?씬 레드라인? vs.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의 한 장면

1 vs. 100,000 즉 10만 대 1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숫자일까? 정확한 사실인지 아닌지 잘은 모르겠지만, 옛날 어느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다. 옛날 한국내전 즉 6.25 전쟁 때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 가운데 실제로 인명을 살상하거나 상해를 입힌 총탄의 숫자가 10만발 당 ‘하나’ 라고 한다. 처음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숫자였다. 아마 허공에 대고 기관총을 난사했을 때 지나가던 참새 한 마리가 적중하여 떨어질 확률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도대체 전쟁 중에 어떻게 사격을 하였기에 이런 숫자가 가능할까? 하지만 전쟁의 실상을 알고 난 지금 오히려 나는 이 숫자도 과장이 아닐까 싶다. 과연 누가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정확한 조준을 하고 사격을 할 수 있을까? 조금만 생각해도 뻔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인데, 왜 10만대 1이라는 숫자가 그렇게도 이해할 수 없는 비율의 숫자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준 영화가 있다. 바로 ?씬 레드라인?이란 영화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전쟁’이란, 빗발치는 포탄과 귓가를 스치듯이 지나가는 총탄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돌격하는 영웅들로 가득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병사들은 먼지 속을 군화발로 누비며 용감하게 진격해 들어간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적진 속에 남겨진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병사들은 용감하게 돌진한다.

영화 [씬 레드라인](1999)의 한 장면

그런데 미국의 영화철학자라 불리는 테렌스 맬릭 감독의 ?씬 레드라인?의 병사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본군이 점령한 고지를 계속 탈환하라는 대령의 명령에 불복하는 대위, 게다가 지휘관의 돌격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들은 엄폐물 뒤에 찰싹 누워서 고개조차 들지 않는다. 과연 어느 누가 감히 고개를 들고 죽음이 보이는 고지로 용감하게 진격해 나갈 수 있을까?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그렇게도 흔히 보았던 장면들이 실제로 얼마나 현실과 거리가 먼 것인가를 아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현실’이란 아직도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어서 그런 것일까? ‘현실’을 보기 위해 다시 영화를 보아야만 하는 우리들의 ‘감각’이란 것이 참으로 우습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전쟁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공자님은 볼 일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나는 동양 고전, 그것도 2,000년이 넘는 아주 먼 옛날의 책을 읽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읽는 책들은 대개가 다 고매하다. ?논어?도 그렇고, ?맹자?도 그렇고 하나같이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상하게 행동하고 고상하게 말한다. 그래서 난 가끔 이런 상상을 하며 공자(孔子)나 맹자(孟子), 노자(老子)나 장자(莊子)를 속으로 조롱하곤 했다.

제후를 만나러 가서 연회 중에 화장실에 갔다가 휴지가 없어서 황당한 경우에 처한 공자, 기다랗게 늘어진 하이얀 수염이 국그릇에 빠져 꺼내어 말리느라 고생하는 노자. 이런 상상을 하다보면 결국 그들도 나와 같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사람이고, 우리가 늘 하는 고민을 똑같이 하며 살다간 사람이 아닐까 상상한다. 결혼한 후엔 소크라테스처럼 공자님도 부인에게 바가지 꽤나 긁히며 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상상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런 순진한 상상도 사실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자 당시에는 우리가 흔히 먹는 품종을 개량한 쌀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의 ‘쌀’(米)이 오늘날의 기장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나서는 ‘상상’을 위해서도 상당한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도대체 그네들은 뭘 입고, 뭘 먹고, 어떻게 살았을까?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님은 ‘볼 일’을 어떻게 해결하며 살았을까?

사실 알고 보면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이 다, 이런 자질구레한 것처럼 보이는 그네들의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공자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모른 채 ?논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까? 거꾸로 과거 선인(先人)들의 실제 삶의 모습을 이해할 때 ?논어?든, ?노자?든 더욱 살갑고 친근하게 이해되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날아라 태권 V?에서 ?한(漢)나라 이야기?까지

어릴 적부터 만화를 즐겨 읽어 온 내게 우스꽝스런 일이 있었다. 어느 때엔 오전에, 또 어느 때엔 저녁 무렵에, 또 어느 때엔 밤늦은 시각에, 그것도 어떤 때는 체육복 차림으로, 또 어떤 때는 양복 차림으로 만화방에 들어서는 내게 어느 날 만화방 주인 아주머니가 물었다. “도대체 뭐 하는 분이세요?”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뭐 하는 사람 같아요? 저, 대학에서 강의합니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비아북

고교 시절에는 만화방에서 생물선생님과 만난 적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 모른 척하며 페이지를 넘기는 일에 몰두했다. 이현세와 황미나는 가장 즐겨보던 만화가였다. 그렇게 만화는 살아가는 재미였고, 일상이었다. 만화를 좋아하게 된 건 어릴 적에 본 최초의 한국애니메이션 영화 ?날아라 태권 V?를 본 이후였다. 난 아직도 가끔씩 ?전자인간 337?의 삽입곡 “아람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그러던 차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만화를 다시 새롭게 보게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단순한 만화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과거를 새롭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하나의 창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옛날 중국의 삶의 모습, 2천 년 전의 모습도 이렇게 눈으로 볼 수는 없을까? 대만 출신의 만화가 채지충의 만화는 왠지 억지로 꾸민 듯한 외모 때문에 상당한 이질감을 느꼈다. 비록 수준 있는 작품들이었지만 내게는 2% 부족한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김태권의 ?한(漢)나라 이야기?를 펴든 순간 그간의 기다림은 단순에 풀리고 말았다. 책을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책을 읽는 내내 눈과 손과 입술이 함께 움직였다. 넘기는 페이지마다 어느 그림 하나, 어느 대사 하나도 놓칠 수 없는 흥분과 쾌감을 주었다. 처음엔 감탄으로 읽다가 나중엔 화가 나기까지 했다. 한 젊은 만화가의 손끝에서 ‘살아 움직이는 한(漢) 나라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것을 보며, 부러움과 질투가 났기 때문이다.

김태권, 2천 년 ‘한’(漢)의 역사를 풀다

?한나라 이야기?는 기원전 238년 진시황(秦始皇)이 스무 살이 되던 해로부터 시작한다. 고대 중국의 역사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는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현대 역사학의 성과까지 동원하면서 김태권은 ‘권력 앞에서 개인의 고독’이라는 주제를 추적해 간다. ?진시황과 이사?를 다룬 1권에서부터 ?항우와 유방?을 다룬 2권, 그리고 ?조조와 유비?(10권)까지 다룰 예정이라 한다.

그런데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의 매력은 이런 역사를 재미있는 만화로 소개한 데에 있지 않다. “독자 여러분은 한니발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만일 영화나 그림에서 튜더 시대의 판금 갑옷을 입은 한니발이 포병부대를 지휘한다면, 여러분은 짜증을 낼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 때의 복장을 한 항우나 유방을 보아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전국시대 말의 유물을 토대로 복식을 고증하면, 그게 더 낯설어 보일 것이다.” 고 하며 그 낯설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태권은 진시황을 비롯하여 이사, 한비자, 항우, 유방 등등 출연하는 모든 인물들의 복식과 장식, 전쟁의 상황 묘사나 무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비아북

기 등 우리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한 나라 때의 화상석에서부터 후대의 자료까지 최대한 실증과 고증된 자료를 통해 현실감있게 보여준다. 단지 보여주는 것뿐만이 아니다. 각종 역사서와 역사 연구서를 통해 중요한 사건, 대화의 의미와 해석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렇게 볼 때 ?한나라 이야기?는 재미로 보는 만화를 넘어서 새로운 ‘사기’, 새로운 ‘한서’, 더 나아가 새로운 ‘삼국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만화라는 장르는 이제 어린이들이나 보는 장남감이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같이 애니메이션 영화를 통해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예술인이 있는 것처럼, 김태권은 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고대의 역사, 살과 피로 이루어져 부대끼고 싸우며 우정을 나누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건조한 문자로 이루어진 역사가 아니라, 살아 숨쉬듯이 꿈틀거리는 형상들을 통해서.

?제자백가?와 갖가지 중국 고전을 만화화한 채지충의 고전만화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조선의 역사를 비주얼로 창조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제 일본인이면서 로마를 노래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있듯이, 한국인이지만 ?사기?, ?한서?, ?삼국지?의 세계를 새롭게 역사화하는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를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재미는 기본이다. 아마도 소장하여 물려줄 만한 책은 이런 것이 아닐까? 특히 학업에 지친 젊은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김시천(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

구보씨 소통을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비가 온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세상이 안개 속처럼 뿌옇다. 이제 봄이 오려는가. 촉촉하게 땅이 젖고 마음도 따라 젖는다. 구보씨는 비를 맞으며 잠시 걸어본다. 참 좋구나, 혼잣말을 되뇌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구보씨의 얼굴에 작은 빗방울들이 싱그럽게 와 닿는다.

 

비오는 걸 유난히 좋아하던 친구가 생각난다. 비만 오면 마냥 나가 뛰어다녔다. 장가가서 아이들을 낳은 뒤론 애들과 함께 빗속을 누볐다. 아이들도 아빠를 닮아 비를 좋아했다. 어지간한 날씨면 웃통을 벗어던지고 아이들과 빗속에서 물총싸움을 했다. 그는 오랫동안 강사생활을 하다가 몇 년 전 처가 식구들을 따라 캐다나로 이민을 가 버렸다. 하긴, 그 친구에겐 그곳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비가 왜 그렇게 좋은데?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느닷없는 질문에 그 친구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듯이 닦다 말고 구보씨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냥. 비 맞으면 좋잖아?

구보씨가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 그 친구의 표정 때문이었을 거다. 거기에는 더 이상의 추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이야 다르다지만 예전의 구보씨에겐 비 맞는 것도 비 오는 것도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질척질척한 골목길과 스산하고 축축한 날씨가 뭐 그리 좋단 말인가. 구보씨는 빗속으로 뛰어나가려는 충동을 느껴본 적도, 그러한 충동을 느끼는 심정을 진정 이해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구보씨는 그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수긍했던 셈이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수긍을 한다? 언뜻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살다 보면 그런 때가 적지 않은 법이다.

물론 이유를 따져 보지 못할 까닭은 없다. 이 경우엔 아마 진정성의 전달이 큰 역할을 했을 거다. 구보씨는 비 맞기를 좋아하는 심정을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그 친구가 정말 비 맞기를 좋아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앎도 일종의 이해가 아닐까? 그리고 그렇다면 이해하지 못하면서 수긍한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따지자면 대부분의 강제에도 이해가 수반된다고 해야 한다. 가령, 총을 들이대고 돈을 빼앗는 강도를 생각해 보라. 이런 상황에서 지갑을 털리는 사람은 강도짓을 하는 이가 내게 총을 쏠 수도 있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그 처지를 받아들이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이 상황을 수긍한다고 할 수 있는가?

강도짓이 성립하기 위해서도 이해는 필요하다. 상대방이 강도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강도 노릇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강도를 당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강도짓을 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게다가 그 사람을 이해하면서도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수긍하는 경우도 있다.

“구보야, 네 말은 앞뒤가 안 맞아. 강도의 경우에도 진정성이 있을 수 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 강도짓을 수긍할 수 있는 건 아니라구. 근데 넌 좀 전에 네 친구에겐 진정성이 있어서 수긍할 수 있다고 했거든.”

Y였다면, 이런 식으로 끼어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Y는 오늘 나타나지 않는다. 곁에 없어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니, 그녀는 정녕 무서운 존재다 싶다.

그러나 구보씨가 보기에 Y와 같은 생각은 다분히 직선적이다. 진정성이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진정성이라는 말에는, 뭐랄까, 스스로가 어떤 사태의 참된 원천이 된다는 뜻, 그런 의미에서의 진짜라는 뜻이 들어 있다.

그래서, 강도의 진정성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좀 어색하게 들린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강도짓의 참된 원천이 된다는 건 어째 좀 이상하지 않은가. 강도짓을 하는 사람은 보통 이러저러한 외적 이유 때문에 강도짓을 한다. 정말 그 사람의 내면에서, 그 사람의 본래 모습에서 우러나 강도짓을 하는 것이라면 그땐 강도의 진정성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있을 법한 일일까?

구보씨가 친구의 표정에서 받았던 것은, 아, 이건 진짜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건 어떻게든 전달되는 법이다. 무릇 소통의 기본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얼마 전에 구보씨는 소통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학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이런 주제가 요즘 자주 거론되는 건 ‘소통 부재’라는 지적이 잔소리가 되어버리다시피 한 작금의 현실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학회에서도 이명박 정부의 일방통행을 질타하는 소리가 높았다.

정치나 정권의 차원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소통이 어렵다는 불평은 이 사회에 차고 넘친다. 아마 말이 부족한 탓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제각기 자기 말만 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면서 모두들 듣는 미덕을 상찬(賞讚)하고 들어줄 귀를 요구하기만 한다.

각자의 처지와 됨됨이가 다른 만큼, 거기에서 서로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소리들이 공명(共鳴)에 이르지 못하고 불협(不協)을 깔아뭉개는 불도저 소리로 커가거나 체념의 침묵으로 잦아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모든 일이 진정성이 없거나 부족해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진정성이라는 게 결국은 공명을 일으키기 마련인 어떤 내면과 연결되는 것이라면 말이다. 수많은 미사여구보다 단 한 마디의 진정성 어린 외침이 더 큰 울림을 낳곤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런 진정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공명하기 위해서는 같은 구조나 얼개가 필요하다. 소리굽쇠가 서로 공명하고 현악기의 줄이 서로 공명하듯이 말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진정성은 여럿이 공유하는 그 무엇에 바탕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나만의 것이란 사실 진정한 것이 될 수 없을지 모른다. 독특하고 다른 것이 진정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공통의 지반 위에 서 있을 때만이 아닐까. 그렇다면 구보씨가 친구에게서 느꼈던 그 진정성의 기반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인간성이라는 그 막연한 것이었을까?

―빠빵~

갑자기 뒤에서 크락션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구보씨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얘, 구보야! 웬일이니? 이렇게 비를 맞고… 어서 타.”

Y다. 차창 밖으로 내민 얼굴에서 터져 나오는 쨍하는 목소리. 이번엔 진짜다.
“어머, 이 머리 좀 봐. 다 젖었네. 또 웬 청승이니?”

“Y야, 넌 꼭 내가 무슨 중요한 생각을 할라치면 나타나서 훼방을 놓더라.”

“중요한 생각? 그게 뭔데?”

“지금 막 공통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어. 사람들이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공통의 그 무엇…”

“공통적인 것? 중요한 것?”

“응, 사람 사이의 소통에서 중요한 것…”

“뭘 말하는 거야, 돈?”

“뭐야?”

“아니야? 그럼, 사랑?”

“이그, 내가 말을 말아야지. 운전이나 잘 해.”

“걱정 말고 그 손이나 좀 내려. 그렇게 팔을 창에 괴고 있으면 그쪽 백밀러가 안 보인다구. 그리구 소통에서 중요한 거라면서 돈이나 사랑을 생각하지 않으면 대체 뭘 생각한다는 거야? 니들은 그래서 안 된다니까. 정작 중요한 건 빼놓고 고상한 척 하면 누가 알아준대? 그래서 소통에 실패하는 거라구.”

“내가 말하는 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해 주는 공통적인 걸 얘기하는 거야. 설사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서로 수긍하고 용인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무엇…”

“글쎄, 누가 뭐래? 돈이나 사랑이 그런 거야. 서로 다른 물건으로 바꿀 수 있는 공통적인 게 돈이잖아. 서로 이해는 못해도 거래는 되거든. 사랑도 그래. 서로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순 있거든. 그리고 사랑만큼 소통에 핵심적인 게 어딨어?”

“그렇지만…”

“거 봐. 할 말 없지? 니들 철학자들은 일상적인 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돼. 그래야 소통이 된다구.”

“잠깐, Y야, 정말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는 건가? 그렇담 그건 왜 그렇지?”

“쯔쯧, 구보야, 전에 너도 나한테 얘기한 적 있잖아.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끝 장면. 젊은 브래드 피트가 매력적으로 나왔던 그 영화 말이야. 말썽을 피우던 둘째 아들이 죽고 나서 아버지인 목사가 설교 때 말하던 거. 우리는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하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냐? 우리가 잘 모르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우리를 이어주고 엮어주는 것…”

구보씨는 ‘그래. Y, 너와 나처럼 말이지?’라고 습관처럼 대꾸하려다가, 멋쩍게 그냥 웃었다.

하긴, Y말이 맞는지도 몰라. 돈과 사랑이라…소통과 공통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려면 이걸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지. 돈이나 사랑이 소통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또 어떤 돈과 어떤 사랑이 소통을 가로막기도 하는지…그건 그렇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 친구와 나와의 관계는 뭐였지?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었을까?

구보씨는 다시 차창에 손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창 밖에는 아직도 뿌연 안개비가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문성원(부산대) /

구보씨 웹진을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새해다. 그리고 새달이다. 물론 새날이기도 하다. 다가오는 시간은 언제나 새롭다. 흐르는 시간은 우리에게 새 것을, 새로움을 준다. 구보씨는 새해를 맞아 새삼스레 눈을 껌벅대면서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낡음이란 무엇인가? 낡음 또는 늙음은 어디서 오는가? 낡음이란 가두어진 시간이다. 새로움이 밖에서 온다면, 낡음은 안에서 쌓여간다.

정말 그런가? 정말 그렇다. 생각해 보라.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어떤 경계를 가진 유한한 것이 자신의 밖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아닌가. 안과 밖의 구분이 없다면 시간도 없다. 무한한 존재에겐 엄밀히 말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한계를 가진 포착에서, 불완전한 포착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무한한 시간이라는 발상은 불가피하게 역설을 수반한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무엇을 원하든 상관없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죽으면 그뿐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금과 똑같이 다시 살아 우리가 원하는 바가 성취되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어차피 무한한 시간 아닌가. 그런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면 된다. 무한 속에 담을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무한과 시간은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 시간은 유한함의 소산이다.

어떻든 새로움과 낡음은 안과 밖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존재는 자기 안에 시간을 가두며 그래서 낡아간다. 안에서부터 새록새록 솟아나오는 새로움이라는 것도 있지 않느냐고? 아니, 없다. 엄밀히 말해, 그런 것은 없다.

생각해 보라. 안에서 비롯하는 새로움이라면 이미 안에 있던 것이고, 따라서 진정 새로운 것일 순 없지 않겠는가.

물론 자기동일성의 어떤 원리가 순차적이고 계기적으로 전개될 수 있고, 그래서 그 하나하나의 단계가 새로워 보일 수 있다. 이를테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는 변화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마저 외부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일어난다. 또 그 변화가 새로워 보이는 것은 자기동일성의 원리 전체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각 단계에 국한된 입장에서이다. 나뭇잎이 돋는 것은 헐벗은 나무의 견지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이지, 나무 자체의 자기동일성이라는 견지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새해 벽두부터 이렇게 따분한 얘기를 하다니, 구보씨가 시나브로 이상해진 걸까?

“꼭 그렇진 않아. 넌 원래 좀 이상했다구.”

Y도 달라지진 않았다. 사람이 새로워지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난 니네 철학자들이 추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무한이라는 말도 그래. 세상이 무한이 어딨니? 그건 그냥 추상일 뿐야. 그냥 생각에 불과한 거라구. 그런 걸 시간에 견줘서 이러쿵저러쿵 하면 뭘하니? 그럴 시간에 뭔가 생산적인 걸 해 봐. 아님, 차라리 잠을 자든지.”

“허, Y야, 너도 추상이 얼마나 중요한진 잘 알잖아. 0을 생각해 봐. 세상에 0이라는 건 없어. 무(無)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그렇지만 0이나 무라는 개념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문명은 불가능했을 거라구. 무한도 그래. 무한이라는 개념이 없이 미적분이 가능했겠어?”

“난 그런 수학적 개념을 말하는 게 아냐. 니들이 쓸데없이 우리 삶에 끌어들여 고생시키는 추상적 개념들을 얘기하는 거라구.”

“그게 뭐가 달라. 수학도 얼핏 보면 이상해 보여. 현대수학은 더 그래. 집합론 같은 걸 보라구. 너도 괴델이니 칸토르니 하는 수학자 얘기는 들어 봤잖아. 무한은 현대 집합론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야. 알랭 바디우 같은 철학자는 현대 집합론에서 주요 개념들을 빌려와. 안과 밖, 시간 따위의 얘기도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다구.”

“그렇지만 철학은 수학이 아니잖아. 그렇게 엄밀하지도 않고 말이야. 내가 보기에 니들은 여기저기서 개념을 가져다 제멋대로 이용하는 것 같아.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대지만 실제로는 괜한 문제를 만들어내거나 오히려 더 엉키게 하고.”

“후.. 그런 건 철학자들도 흔히 하는 얘기야. 철학의 논란거리고 반성거리지. 하지만 Y야, 새해 초부터 그런 걸루 골치 썩이진 말자. 내 얘기의 요지는 새로움이란 항상 밖에서 온다는 거야. 그러니까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거지.”

“거봐. 니들 얘기는 결론이 먼저 나 있잖아. 철학이 이데올로기라는 건 구보 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구. 미리 답을 정해 놓고 거기 맞는 얘기들을 꿰맞추는 거잖아.”

“크, Y야, 그런 면이 있겠지.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야. 내 말의 취지는 바로 그런 폐쇄성을 넘어서자는 거거든.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자고 하는데, 거기다 대놓고 그건 결론이 먼저 나 있는 폐쇄적인 거라고 공격하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잖아.”

“개방성을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도 얼마든지 있어. 개방적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야. 한미 FTA를 생각해 봐. 개방성을 내세우는 건 대체로 약한 측을 잡아먹으려는 힘센 놈들의 수법인 거야.”

“하하… 그것두 그렇지. 하지만 Y야, 폐쇄적인 태도로는 힘센 놈들을 이겨낼 수가 없어. 그놈들이 원하는 대로 개방해서는 안 되지만, 밖으로 향한 문을 걸어 닫아서는 안 되는 거야. 사실은 걸어 닫는다는 것이 불가능해. 걸어 닫는다고 생각할 뿐이지. 수학의 불완전성 정리가 보여주는 것도, 그걸 원용한 바디우의 철학이 내세우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점이야. 이렇게 바깥과의 관계가 불가피한 이상, 끝까지 안과 자기만을 고집할 순 없다구. 그런 안과 자기동일성은 낡은 것이 되고 결국 사멸하게 되지. 사멸이라는 방식으로 변화를 겪게 되는 거야. 어차피 밖과 관계하는 이상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 문제는 어떻게 변화하느냐일 뿐이야. 고집스럽게 죽어갈 것이냐, 개방적으로 새로워질 것이냐 그것이 문제라구.”

“대체 뭘 얘기하고 싶은 거야? 소련? 북한?”

“뭐, 그렇게 거창한 데까지 갈 필요도 없어. 매사가 그렇다구. 이를테면 너와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야.”

“구보야, 착각하지 마. 난 너랑 아무 관계도 아니거든.”

“그런 게 바로 무관계, 즉 규정되지 않은 무한한 관계라는 거야. 이루지 못할 게 아무것도 없는 관계지, 후훗…”

“얘 좀 봐, 진짜 웃겨…”

“실은 내가 어제 문용식이라는 친구가 쓴 책을 읽었거든. 왜, 나우콤과 아프리카 방송 사장 있지? 촛불시위 때 구속되는 바람에 화제가 되기도 했고, 얼마 전 대기업이 소매업에 뛰어드는 문제로 정용진인가 하는 재벌2세와 트위터에서 논란을 벌였던 그 사람 말이야.

예전에 알던 친군데, 자기가 책을 냈다고 이-메일을 보냈더군. 아니, 사장님이라면서 책도 한 권 보내주면 안 되나,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사 봤지. 그간 어떻게 지냈나 궁금해서 말이야. 이전에 학생운동하다가 감옥살이도 여러 번 했어. 컴퓨터하곤 전혀 무관했던 그런 사람이 인터넷 회사의 사장을 한다는 것도 신기하잖아.

어떻든 난 흥미롭게 읽었어. 고생도 많이 하고, 또 노력도 많이 했더군. 나 같은 먹물하고는 전혀 다른 삶이라고 할까… 20대의 절반을 감옥살이로 보내곤 선배의 간청과 밥벌이 때문에 이런 쪽에 발을 디디게 됐다는데, 처음엔 전문지식이 부족하고 문화적 배경도 달라 따돌림도 꽤 받았나 봐.

그렇지만 꾸준히 노력해서 결국 인정을 받게 되었대. 그러나 IMF를 겪은 데다 인터넷 때문에 pc통신 사업이 위기에 빠지는 바람에, 지금부터 10년쯤 전엔 나우콤이라는 회사의 한 해 적자가 50억쯤이었다는군. 그때 이 친구가 사장이 되어 처음 한 일이 밖으로 눈을 돌려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 거야.

우선 조직의 ‘순혈주의’를 깨서 외부에서 경력을 쌓고 들어온 직원을 30%까지 늘려가고, 직원들이 다른 회사 사람들을 만나 외부와 경험을 교환하도록 했다고 해. 물론 이렇게 밖으로 눈을 돌린다고 자기를 완전히 다 내준 건 아니지. pc통신 때부터 쌓아온 기본 기술력을 인터넷에 맞는 새로운 방식으로 변환시켜 인터넷 개인방송인 ‘아프리카’(afreeca)를 시작한 거야. 그리고 이게 성공한 거지.

물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문용식과 나우콤에 있는 건 아니야. 바깥과 새로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지. 밖의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부는 낡고 쇠퇴하기 마련이야. 그걸 우린 보통 늙는다고 하지. 전에도 말했지만, 늙음이란 새로움에 대처하고 반응하는 능력이 줄어들어가는 걸 가리킨다구.”

“구보야, 잠깐.”

“아, 미안. 내 말이 너무 길었지? 그렇지만 한 마디만 더 할께.”

“꼭 그래야 돼? 나랑 별 상관없는 얘기 같은데…”

“Y야, 이건 너하고도 깊은 관계가 있는 거야. 왜냐구? 이 구보랑 관련된 일이니까. 넌 나랑 무한한 관계 속에 있잖아, ㅎㅎ…

실은 이 웹진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어서 그래. 뭐, 너도 봤으니까 잘 알 거야. 이 웹진은 우리로선 새로운 시도야. 적어도 철학 쪽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지.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 새로움이 충분치 못하다 싶어.

그래서 얘긴데, 여기서도 필자를 30% 정도는 외부에서 끌어오는 것이 어떨까. 동호회면 몰라도 웹진에 필자를 한 단체 소속으로 국한시킨다는 것은 정말 잘 어울리지 않는 일 같아.”

“글쎄, 하지만 지금 상태면 누가 여기에 기꺼이 글 쓰려 할까?”

“그래도 어떻게든 해 봐야지. 난 그 성공 여부가 이 웹진이 지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봐. 조로(早老)해서 화석화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그렇지만 그거 새로움이나 개방성에 대한 맹신 아냐? 얄팍한 새로움보다는 지조 있는 충실함이 더 중요한 거잖아.”

“물론 그래. 하지만 그것보단 지조 있는 새로움이 더 좋잖아. 나와 너의 관계처럼 말이야. 어, Y야, 그런데 너 표정이 왜 그래?”

“못 보던 표정이지? 거 봐, 구보야. 새로운 게 다 좋은 건 아니라구.”

문성원(부산대) /

구보씨 겨울을 맞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아뿔싸, 벌써 11월이다. 세월은 나이만큼의 속도로 간다더니, 구보씨도 제법 나이를 먹었는가 보다. 심장의 박동이 늦어지고 몸이 느려지면 상대적으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 마련이라 한다.

포유동물의 평생에 걸친 심장 박동 수는 생쥐건 코끼리건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고 들었다. 코끼리가 생쥐보다 오래 살지만, 생쥐의 생체 리듬이 코끼리에 비해 빠르고, 그런 만큼 생쥐의 하루는 코끼리의 하루에 비해 길다는 얘기다.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려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루 종일 골목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았어도 해는 뉘엿뉘엿 한참이나 서쪽 산에 걸려 있지 않았던가.

물론 그것보다는 기억할 만한 새로움이 별로 없는 것이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여겨지는 더 큰 이유겠다. 큰 변화가 없는 무미건조한 시간은 지낼 때에는 지루하지만, 막상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어디 기억이 멈출 이정표나 매듭도 없이 초라하게 접혀 버린다. 반면에, 낯선 곳에서 긴장하여 지낸 나날은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평탄한 삶과 충일(充溢)한 삶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어떻든 새로움과 낯섦에 대한 감수성과 호기심을 잃어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늙음이란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무언가 새로운 것에, 또는 누군가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가 보려 하다가도, 에이, 뭐 다 마찬가지겠지, 별 다른 게 있겠어, 하고 돌아서버리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 그게 늙는다는 징표가 아닐까. 그것은 내부의 힘이 쇠잔(衰殘)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얘, 구보야. 너 또 혼자 청승이구나. 웬 일이니, 이 좋은 곳에까지 와서.”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걷고 있던 구보씨의 어깨를 Y가 탁 친다. 그러고 보니 Y는 확실히 젊다. 무엇보다 에너지가 넘치지 않는가.

“너는 내가 무슨 생각 좀 할라치면 꼭 방해더라. 이래서야 어떻게 괜찮은 생각이 나오겠니. Y, 넌 한국의 철학을 훼방 놓고 있는 거야.”

“풋, 그런 철학은 백번 훼방 놔도 괜찮아. 철학이 무슨 사진틀 같은 거니? 폼 잡고 인상 쓰고 있으면 나오게?”

“그래도 Y야, 궁리하고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거야. 여기 운문사(雲門寺)의 마당도 봐.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 뜨락도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거든. 단풍 한 잎사귀, 낙엽 한 장에도 한 해의 햇살과 나무의 공력(功力)이 깃들어 있으니까 말이야.”

“구보야, 그러니까 하는 얘기라구. 이렇게 멋진 가을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거야. 그렇지 않을 바엔 한 해의 햇살이 다 무슨 소용이니?”

 

“누가 아니래? 나두 충분히 즐기고 있다구. 다만 그 즐기는 방식이 좀 다를 뿐이야. 넌 사색의 즐거움이라는 것두 모르냐? 주변의 정경(情景)에 어우러지는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리듬, 여기에 스스로를 맡기는 거야. 그게 바로 사유(思遊), 곧 사유(思惟)의 즐김이라구.”

“후훗, 그러시구나. 그럼, 어디 그 즐김에 나도 좀 동참시켜 줘 봐. 왜 그런 말도 있잖아. 혼자만 즐기면 무슨 재민겨.”

“헤… 막상 그렇게 나오니까 좀 당황스럽군. 사실은 별 생각 안 했어. 늙음과 벌거벗음에 대해 막 생각하려던 참이었거든.”

“윽, 또 벌거벗음이야? 넌 질리지도 않니? 여름에야 더워서 그랬다 쳐. 하지만 이제 쌀쌀한 바람이 분 지도 한참인데, 아직도 벌거벗는 타령이니? 쯔쯧…”

“Y야,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요즘이야말로 벌거벗음의 계절이거든. 저 떨어지는 낙엽들을 좀 봐. 저게 벌거벗는 게 아니면 또 무엇이겠어? 저 벌거벗음은 말이야, 이를테면 미련 없는 털어냄이고 버림이야. 그것을 통한 일종의 초월이지. 다른 단계로, 다른 국면으로 건너간다는 뜻에서 말이야. 그래서 이제 빛이 바래고 색이 변한 잎들의 모습이 저토록 아름다운 걸 거야. 그건 이제 다가올 벌거벗음이라는 겉보기의 부정성(否定性)에 바쳐진 자연의 경의(敬意)가 아닐까 해.”

 

“하여튼 너네는 참 갖다 붙이긴 잘 한다. 거기 초월이 왜 나오니?”

“사실, 그 초월이란 게 중요한 거야. 벌거벗음과 초월은 직결되니까 말이야. 옷을 입거나 감싸는 건 현재의 차원을 지키고 확충하는 거잖아. 반면에 벌거벗음은 현존의 한계를 보여주고 그 한계 너머의 무엇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그건 단순한 결핍 이상의 것이 되는 거야. 벌거벗음은 단지 옷이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잎사귀들을 다 떨어낸 나목(裸木)을 생각해 봐. 그 벌거벗음이 잎사귀의 결핍에 불과한 걸까?”

“봄이 되면 잎사귀가 또 나잖아. 옷을 벗은 사람들은 옷을 또 입을 거고. 대체 거기 무슨 초월이 있다는 거야?”

“Y야, 그게 똑 같은 잎사귀는 아니잖아. 단순히 옷을 벗은 게 아닌 벌거벗음을 당한 사람들이나 벌거벗음을 택한 사람들이 이후에 똑 같은 방식으로 옷을 입는 것도 아닐 테고. 내 말은, 벌거벗음이 나름의 역할과 의미를 갖는다는 거야. 그건 현재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한계 밖을 지시한다는 거지. 잎을 떨궈낸 나무의 처지를 생각해 봐. 그 나무는 이제 나이테의 단단한 부분에 자리 잡은 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거야.”

“피이, 그게 무슨 초월이야. 그냥 다음 단계지.”

“음냐, Y야, 초월은 뭐 그렇게 거창한 것만 뜻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현재의 테두리로 관장(管掌)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면 그게 초월이지. 초월이란 말이 원래 그런 거잖아. 초월(超越), 넘어서 건너가는 것.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것. 벌거벗음은 그런 걸 준비한다는 얘기지. 그래서 벌거벗음은 생명의 견지에서 보면 에로틱한 거야.”

“에로틱? 초월에다 에로틱까지? 에구, 구보야, 드디어 네가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어, 뭐가 이상해? 원래 벌거벗음은 에로틱한 거잖아. 중요한 건 에로틱에 초월의 의미가 담긴다는 점이야. 근데 이것도 좀 살펴보면 진부한 얘기거든. 플라톤 시절부터 에로스는 현실을 넘어감을 뜻했잖아. 게다가 바타이유를 생각해 봐. 바타이유에게서 에로스는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걸 가리켜. 애당초 성(性)이라는 게 개체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개체를 창출하는 행위와 관련되는 거 아냐? 그럴려면 벌거벗어야 한다구. 옷 입은 채, 즉 자기를 단단하게 감싸고 고수한 채 새로움을 창출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얼씨구, 점점…”

“그리구 말이야, Y야, 에로틱이 매혹적인 이유는 바로 이 새로움에 있는 거야. 새로움이란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또 위험하고 낯선 것이기도 하거든. 매혹은 그 위험의 반대급부야. 우리가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건 사랑이 매혹이기 때문이지만, 거꾸로 매혹적이지 않으면 위험을 감내하지 않을 것이기에 사랑에는 매혹의 향기가 있는 것이란 말이지. 벌거벗음도 마찬가지야. 벌거벗는 것은 위험을 수반하거든.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피부를 외부에 노출시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그것은 또한 매혹적일 수 있는 거야.”

“아서라, 구보야. 네가 벗는 건 전혀 매력적이지 않거든.”

“실은 바로 그게 문제야. 그게 늙음의 문제거든. 늙음은 이제 위험의 감내와 어울리지 않게 되었음을 뜻한다구. 벌거벗음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벌거벗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은 새로움을 향한 지향을 접게 된다는 뜻이야. 늙음이 보수(保守)와 또는 수구(守舊)와 연결되는 것은 그 때문이지.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정도의 문제야. 정말로 새로움과의 관계가 고갈된다면 그건 생명이 다함을, 즉 죽음을 뜻하는 것일 테니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 전까지는 새로움의 추구를, 벌거벗음과 마주함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어. 내가 나이 들어서 새삼스럽게 누드모델을 하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이런 면에 대한 자기 강제의 고려가 있었던 거라구.”

“….”

“Y야, 너 드디어 내 말에 감복했구나. 이제 토를 달지 않는 것을 보니…”

“응? 뭐라구? 아, 미안, 잠시 딴 데 정신이 팔려서 네 말을 못 들었어. 걷다 보니 어느새 소나무 길이네. 맞아, 여기가 유명한 운문사의 소나무 길이구나. 예전에 유홍준이 아낙네의 늘씬한 벗은 다리랑 견주었던 그 소나무 길이지, 아마. 그러나저러나 어쩌냐, 구보야. 이 소나무들은 잎을 떨구지 않으니 말이야. 벌거벗질 않으니 초월하군 무관한 나무겠네. 그런데, 왜 유홍준은 이 나무들을 에로틱하다고 하면서 그 작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을까. 하여튼 오징어는 말려도 사내들은 못 말린다니까.”

 

문성원(부산대, 철학) /

구보씨 여전히 누드를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아뿔싸, 벌써 11월이다. 세월은 나이만큼의 속도로 간다더니, 구보씨도 제법 나이를 먹었는가 보다. 심장의 박동이 늦어지고 몸이 느려지면 상대적으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 마련이라 한다.

포유동물의 평생에 걸친 심장 박동 수는 생쥐건 코끼리건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고 들었다. 코끼리가 생쥐보다 오래 살지만, 생쥐의 생체 리듬이 코끼리에 비해 빠르고, 그런 만큼 생쥐의 하루는 코끼리의 하루에 비해 길다는 얘기다.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려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루 종일 골목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았어도 해는 뉘엿뉘엿 한참이나 서쪽 산에 걸려 있지 않았던가.

물론 그것보다는 기억할 만한 새로움이 별로 없는 것이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여겨지는 더 큰 이유겠다. 큰 변화가 없는 무미건조한 시간은 지낼 때에는 지루하지만, 막상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어디 기억이 멈출 이정표나 매듭도 없이 초라하게 접혀 버린다. 반면에, 낯선 곳에서 긴장하여 지낸 나날은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평탄한 삶과 충일(充溢)한 삶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어떻든 새로움과 낯섦에 대한 감수성과 호기심을 잃어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늙음이란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무언가 새로운 것에, 또는 누군가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가 보려 하다가도, 에이, 뭐 다 마찬가지겠지, 별 다른 게 있겠어, 하고 돌아서버리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 그게 늙는다는 징표가 아닐까. 그것은 내부의 힘이 쇠잔(衰殘)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얘, 구보야. 너 또 혼자 청승이구나. 웬 일이니, 이 좋은 곳에까지 와서.”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걷고 있던 구보씨의 어깨를 Y가 탁 친다. 그러고 보니 Y는 확실히 젊다. 무엇보다 에너지가 넘치지 않는가.

“너는 내가 무슨 생각 좀 할라치면 꼭 방해더라. 이래서야 어떻게 괜찮은 생각이 나오겠니. Y, 넌 한국의 철학을 훼방 놓고 있는 거야.”

“풋, 그런 철학은 백번 훼방 놔도 괜찮아. 철학이 무슨 사진틀 같은 거니? 폼 잡고 인상 쓰고 있으면 나오게?”

“그래도 Y야, 궁리하고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거야. 여기 운문사(雲門寺)의 마당도 봐.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 뜨락도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거든. 단풍 한 잎사귀, 낙엽 한 장에도 한 해의 햇살과 나무의 공력(功力)이 깃들어 있으니까 말이야.”

“구보야, 그러니까 하는 얘기라구. 이렇게 멋진 가을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거야. 그렇지 않을 바엔 한 해의 햇살이 다 무슨 소용이니?”

 

“누가 아니래? 나두 충분히 즐기고 있다구. 다만 그 즐기는 방식이 좀 다를 뿐이야. 넌 사색의 즐거움이라는 것두 모르냐? 주변의 정경(情景)에 어우러지는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리듬, 여기에 스스로를 맡기는 거야. 그게 바로 사유(思遊), 곧 사유(思惟)의 즐김이라구.”

“후훗, 그러시구나. 그럼, 어디 그 즐김에 나도 좀 동참시켜 줘 봐. 왜 그런 말도 있잖아. 혼자만 즐기면 무슨 재민겨.”

“헤… 막상 그렇게 나오니까 좀 당황스럽군. 사실은 별 생각 안 했어. 늙음과 벌거벗음에 대해 막 생각하려던 참이었거든.”

“윽, 또 벌거벗음이야? 넌 질리지도 않니? 여름에야 더워서 그랬다 쳐. 하지만 이제 쌀쌀한 바람이 분 지도 한참인데, 아직도 벌거벗는 타령이니? 쯔쯧…”

“Y야,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요즘이야말로 벌거벗음의 계절이거든. 저 떨어지는 낙엽들을 좀 봐. 저게 벌거벗는 게 아니면 또 무엇이겠어? 저 벌거벗음은 말이야, 이를테면 미련 없는 털어냄이고 버림이야. 그것을 통한 일종의 초월이지. 다른 단계로, 다른 국면으로 건너간다는 뜻에서 말이야. 그래서 이제 빛이 바래고 색이 변한 잎들의 모습이 저토록 아름다운 걸 거야. 그건 이제 다가올 벌거벗음이라는 겉보기의 부정성(否定性)에 바쳐진 자연의 경의(敬意)가 아닐까 해.”

 

“하여튼 너네는 참 갖다 붙이긴 잘 한다. 거기 초월이 왜 나오니?”

“사실, 그 초월이란 게 중요한 거야. 벌거벗음과 초월은 직결되니까 말이야. 옷을 입거나 감싸는 건 현재의 차원을 지키고 확충하는 거잖아. 반면에 벌거벗음은 현존의 한계를 보여주고 그 한계 너머의 무엇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그건 단순한 결핍 이상의 것이 되는 거야. 벌거벗음은 단지 옷이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잎사귀들을 다 떨어낸 나목(裸木)을 생각해 봐. 그 벌거벗음이 잎사귀의 결핍에 불과한 걸까?”

“봄이 되면 잎사귀가 또 나잖아. 옷을 벗은 사람들은 옷을 또 입을 거고. 대체 거기 무슨 초월이 있다는 거야?”

“Y야, 그게 똑 같은 잎사귀는 아니잖아. 단순히 옷을 벗은 게 아닌 벌거벗음을 당한 사람들이나 벌거벗음을 택한 사람들이 이후에 똑 같은 방식으로 옷을 입는 것도 아닐 테고. 내 말은, 벌거벗음이 나름의 역할과 의미를 갖는다는 거야. 그건 현재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한계 밖을 지시한다는 거지. 잎을 떨궈낸 나무의 처지를 생각해 봐. 그 나무는 이제 나이테의 단단한 부분에 자리 잡은 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거야.”

“피이, 그게 무슨 초월이야. 그냥 다음 단계지.”

“음냐, Y야, 초월은 뭐 그렇게 거창한 것만 뜻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현재의 테두리로 관장(管掌)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면 그게 초월이지. 초월이란 말이 원래 그런 거잖아. 초월(超越), 넘어서 건너가는 것.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것. 벌거벗음은 그런 걸 준비한다는 얘기지. 그래서 벌거벗음은 생명의 견지에서 보면 에로틱한 거야.”

“에로틱? 초월에다 에로틱까지? 에구, 구보야, 드디어 네가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어, 뭐가 이상해? 원래 벌거벗음은 에로틱한 거잖아. 중요한 건 에로틱에 초월의 의미가 담긴다는 점이야. 근데 이것도 좀 살펴보면 진부한 얘기거든. 플라톤 시절부터 에로스는 현실을 넘어감을 뜻했잖아. 게다가 바타이유를 생각해 봐. 바타이유에게서 에로스는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걸 가리켜. 애당초 성(性)이라는 게 개체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개체를 창출하는 행위와 관련되는 거 아냐? 그럴려면 벌거벗어야 한다구. 옷 입은 채, 즉 자기를 단단하게 감싸고 고수한 채 새로움을 창출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얼씨구, 점점…”

“그리구 말이야, Y야, 에로틱이 매혹적인 이유는 바로 이 새로움에 있는 거야. 새로움이란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또 위험하고 낯선 것이기도 하거든. 매혹은 그 위험의 반대급부야. 우리가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건 사랑이 매혹이기 때문이지만, 거꾸로 매혹적이지 않으면 위험을 감내하지 않을 것이기에 사랑에는 매혹의 향기가 있는 것이란 말이지. 벌거벗음도 마찬가지야. 벌거벗는 것은 위험을 수반하거든.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피부를 외부에 노출시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그것은 또한 매혹적일 수 있는 거야.”

“아서라, 구보야. 네가 벗는 건 전혀 매력적이지 않거든.”

“실은 바로 그게 문제야. 그게 늙음의 문제거든. 늙음은 이제 위험의 감내와 어울리지 않게 되었음을 뜻한다구. 벌거벗음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벌거벗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은 새로움을 향한 지향을 접게 된다는 뜻이야. 늙음이 보수(保守)와 또는 수구(守舊)와 연결되는 것은 그 때문이지.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정도의 문제야. 정말로 새로움과의 관계가 고갈된다면 그건 생명이 다함을, 즉 죽음을 뜻하는 것일 테니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 전까지는 새로움의 추구를, 벌거벗음과 마주함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어. 내가 나이 들어서 새삼스럽게 누드모델을 하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이런 면에 대한 자기 강제의 고려가 있었던 거라구.”

“….”

“Y야, 너 드디어 내 말에 감복했구나. 이제 토를 달지 않는 것을 보니…”

“응? 뭐라구? 아, 미안, 잠시 딴 데 정신이 팔려서 네 말을 못 들었어. 걷다 보니 어느새 소나무 길이네. 맞아, 여기가 유명한 운문사의 소나무 길이구나. 예전에 유홍준이 아낙네의 늘씬한 벗은 다리랑 견주었던 그 소나무 길이지, 아마. 그러나저러나 어쩌냐, 구보야. 이 소나무들은 잎을 떨구지 않으니 말이야. 벌거벗질 않으니 초월하군 무관한 나무겠네. 그런데, 왜 유홍준은 이 나무들을 에로틱하다고 하면서 그 작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을까. 하여튼 오징어는 말려도 사내들은 못 말린다니까.”

 

문성원(부산대, 철학) /

구보씨, 계속 누드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는 검소한 편이다. 눈에 띄는 사치(奢侈)라고 할 만한 건 평생 해 본 적이 없다. 그럴 형편도 못 되지만, 그럴 마음이 생겼던 때도 거의 없지 싶다. 그거야 철학자라면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더구나 구보씨처럼 근검절약이 강조되었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말이다. 사치란 일종의 염치없음을 범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그리고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염치없음. 레비나스 식으로 말한다면 뻔뻔한 찬탈(簒奪)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근래에는 구보씨에게 자그만 사치라고 할 만한 습관이 생겼다. 한 호텔 목욕탕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다. 요금이야 만원이 채 안 되고 그것도 이러저런 할인을 받으면 5000원 남짓이니까 별 것 아니지만, 어떻든 시설이나 분위기로 보면 일반 목욕탕과 격이 다르다. 무엇보다 천장이 높고 돔 형식의 유리로 되어 있어, 실내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적다. 채광이 자연스레 잘 되고 목욕탕 안에 김이 서리지 않는다. 더구나 노천탕도 있어 그렇게 춥지 않은 날이면 발가벗고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다.

 

구보씨는 발가벗고 활보할 수 있다는 즐거움에 한동안 이곳에 자주 들락거렸다. 무언가를 걸치는 게 아니라 벗어던지고 누릴 수 있는 사치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최고의 사치란 이렇게 발가벗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물과 공기와 햇볕 아래 자유로운 몸과 감각. 구보씨는 긴 의자에 발가벗은 몸을 누이고 눈을 감는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온 몸의 피부가 한 장의 눈꺼풀 같다.

이것이 사치인 이유는, 이러한 누림에는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건이 많건 적건 간에 배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 이 같은 발가벗음은 가짜일 수 있다. 목욕탕 안에서의 발가벗음은 진정 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욕탕이라는 시설과 장소를 입는 것이다. 그래서 목욕탕 안의 사람들은 발가벗은 채 당당할 수 있다. 이때의 발가벗음은 벗겨냄이 아니라 덧붙임이다. 목욕탕에서 사람들은 때를 벗겨내지만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에, 박탈의 느낌을 수반하는 벌거벗음이 있다. 옷 입은 자들 앞에서, 옷 입은 자들의 장소와 그들의 시선 앞에서 벗고 있을 때가 그렇다. ‘벌거벗은 생명’. 근자에 유행하는 조르조 아감벤의 용어가 여기에 적절하다. 이런 벌거벗음은 갖추어야 할 것이 박탈되었음을 보여주는 부(負)의 표시다. 한 사회의 규칙, 제도, 권리 따위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지시하는 게 이런 벌거벗음이다. 옷 입은 자들은 이렇게 벌거벗은 자들과 자신들을 구별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상성(正常性)을 확보해낸다.

이때의 벌거벗음은 무방비의 취약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털을 깎고 이빨을 뽑아버린 짐승의 모습과도 같다. 그 벌거벗음은 위험에 대해 직접 노출되어 있음을 뜻한다. 털 없는 피부 말고는 외부의 시선과 공격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벌거벗은 자는 움츠리고 두려워하며, 무엇보다 수치심을 느낀다.

벌거벗음과 수치심 사이에는 벌거벗음을 감싸는 관념들의 피륙이 있다. 이 관념들은 맨 몸뚱이의 취약함을 감추고 가리는 장치들과 관계하여 짜인다. 그러니까 수치심은 우리의 취약함을 헤집는 시선과 관련이 있다. 수치를 모르는 자는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 지경에 놓여 있는지 모르는 자다. 도덕이란 우리의 취약함을 보완하여 덮는 속옷과 같은 것이므로, 이것이 찢기거나 헤졌을 때 우리가 강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수치심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돌아보는 눈에 희망을 걸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치심을 통해 취약함이 완전히 극복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물론 아니다. 우리 스스로를 진정으로 돌아본다면 그런 생각이야말로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수치란 아마도 인간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옷 입은 이들은 벌거벗은 자들을 놓고 그들이 마땅히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벌거벗겨 놓은 경우라 해도 말이다. 그들은 옷을 입고 싶어 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수치심을 없애고자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옷 입은 자들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한다. 고문을 할 때 대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벌거벗기기인 것은, 고문을 당하는 이가 스스로 무력하며 박탈당했음을 절감하게 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사실상 노예의 처지에 있음을 확인시키고 저항의 의지를 꺾어버리기 위해서다.

그러니 스스로 옷을 벗어던지는 자들이 나타나면 옷 입은 이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옷이 그저 짜인 피륙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벗겨질 수 있는 것임을 보게 되는 까닭이다. 옷을 벗어던지며 벌이는 시위가 때로 위력적인 것은 그래서이다. 실제로 박탈당하고 있고 실제로 벌거벗기고 있는 자들이 겉치레에 불과한 옷을 벗어던진다는 것은 사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그런 걸 발본적(radical) 파르헤지아라고 해요.”

“파르헤지아라면 진실한 말하기라는 뜻인가요?“

“그렇죠. 알다시피 푸코가 말년에 자주 썼던 용어지요. 나는 그걸 ‘노출’과 관련해서 쓰고 있어요. 스스로를 과감히 드러내는 것, 자신의 박탈당한 처지를 보여주는 건, 단순히 취약함에 노정되는 수동적인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형성하는 능동적 계기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아감벤처럼 벌거벗음을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는 건 옳지 않아요.”

사진: Dina Al-Kassim

“그런데 디나, 당신이 예로 든 요하네스버그 부근의 나체 시위는 결국 실패로 끝난 것 아닌가요? 잠시 동안만 불도저가 집을 허물지 못하게 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고, 결국 그 여자들은 다시 옷을 입고 새로 지어준 집으로 들어가게 되지 않았나요? 그건 당신 말대로 일종의 스캔들이었을 뿐 아닌가요?”

“그렇지만은 않아요. 비록 당장의 저항은 잦아들었지만, 그 스캔들의 의미는 계속 남거든요. 그들은 대중 앞에서 수치를 범한 셈이고, 그건 그들과 그들의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에요. 그 여자들은 힘들고 고통스런 나날들을 겪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경험은 사회의 통념화한 이야기 질서 속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구성해 나갈 바탕이 될 수 있어요. 적어도 그녀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체험했잖아요. 그 적나라한 노출은 자기 성찰의 조건이 될 거예요. 생각으로만 하는 성찰이 아닌 삶으로 꾸려지는 성찰 말이지요.”

“그런 얘긴 얼핏 헤겔의 주인과 노예 변증법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죽음의 위협을 체험한 노예가 그 위협 앞에 전율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삶을 뚜렷이 의식하게 된다는 이야기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노출과 수치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거죠?”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말하자면, 대상화와 거리두기를 통한 자기의식의 계기가 마련된다는 건데, 그렇다고 죽음의 위협을 체험한 모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수치의 경험이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이죠.”

“그렇담, 당신이 말하는 노출에 의미부여를 하는 데 큰 제한이 있을 법해요. 헤겔의 경우 노예에서 더 중요하고 적극적인 계기는 노동이잖아요. 그런 거에 해당하는 무엇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내가 말하는 노출의 특성은 적극성에 있어요. 헤겔에서의 위협처럼 그렇게 주어지는 게 아니죠. 그래서 노출은 말하기와, 파르헤지아와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문제도 이런 말하기의 주체적인 면을 놓치고 있다는 거구요. 버틀러는 이 노출을 응답이나 책임과 관련지어요.”

“버틀러라면, 주디스 버틀러 말이죠?”

“예, 주디스는 제 선생님이었어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응답이나 책임이라면 레비나스 용언데…하긴 버틀러는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 같은 말도 차용해서 씁디다만…”

“네. 노출은 상처입기 쉬움을 무릅쓰는 행위죠.”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상처입기 쉬움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죠. 옷을 입고 있더라도 말예요. 그건 단지 일시적으로나 미봉적으로 우리의 피부를 가리고 있을 뿐이고, 그래도 상처입기 쉬움은 항존하죠. 그러니까 옷은 우리의 피부를 가리면서 우리가 상처입기 쉽다는 사태를 가리고 있는 거구요. 레비나스라면 ‘노출’이 이러한 사태를 깨우쳐주고 거기에 응답하게 한다는 데 동의할 거예요.”

“그래요. 저도 레비나스가 노출과 벌거벗음에 대해서 많이 논의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어요. 언제 그런 얘길 좀 나누죠.”

“예. 근데, 이번엔 부산에 어떤 일로 오셨나요? 지난번에 다녀가신 지 몇 달이 채 안 되었는데…”

“아, 이번엔 부산국제영화제 구경 왔어요. 캘리포니아 대학의 학생들 몇 명 하구 같이요. 저랑 공부하는 한국학생들도 좀 있거든요. 영화제 오시면 혹 극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렇군요. 전 부산에 살면서도 가기가 쉽지 않던데… 역시 제3세계 영화를 주로 보시겠죠? 그런데, 참, 이 목욕탕엔…?”

“네, 여기가 좋다는 얘기 듣고 잠시 쉬러 왔어요.”

“어, 그런데, 여긴 남탕인데, 어떻게 들어오셨죠? 어라, 그러고 보니 다 벗고 계시네. 음마, 나두…어, 저기 Y도 있네. 그럼, 여기가 여탕이야?”

구보씨는 흠찟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목욕탕 의자에 누운 채 잠시 졸았나 보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십여 분 잔 듯했다. 에이, 그런 꿈은 조금 더 꾸어도 괜찮은데… 구보씨는 못내 아쉬워하며 나른한 몸을 일으켰다.

문성원(부산대,철학) /

구보씨,다시 누드를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구보씨가 벗는 걸 좋아하긴 해도 아무 때나 벗고 다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옷에 크게 신경을 쓰지도 못하는데, 그건 구보씨가 구(舊)세대라서 그런지 모른다. 구보씨가 자랄 때만 해도 단정함 이상으로 옷차림에 관심을 갖는 건 그리 칭찬 받을 일이 못 되었다. 옷을 잘 차려 입고 다닌다는 말은 겉치레를 앞세운다는 뜻, 내면이 실(實)하지 못하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다 못살던 때의 얘기다, 라고 하면 분명 고개를 끄덕일 이유가 있다. 근검절약의 강조야 물자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항상 있기 마련인 도덕의 기본메뉴다. 내면의 가치 운운하는 것은 그 이면(裏面)의 보완물 격이다. 그런 가치가 실제로 있느냐 하는 건 천당이 실제로 있느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선 중요한 사항이 아닐 수 있다. 겉으로 차려 입지 못하는 형편이라면 내면의 옷이라도 입혀야 하지 않겠는가.

구보씨가 옷차림에 짐짓 무관심한 것에는 그런 ‘문명’의 세례 탓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의 옷차림 때문에 그 사람에게 끌린다는 건 일종의 현혹(眩惑)일 뿐이다. 우리는 겉모습에 놀아나서는 안 되고, 화려한 치장 밑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구보씨가 자꾸 누드를 내세우는 데에는 이런 구시대의 교육이, 다시 말해 산업화 이전의 낡은 이데올로기가 한 몫을 하는 것은 아닐까.

겉은 가짜고 속이 진짜다, 라는 건 본질주의의 구태(舊態)다, 라고 해도 거기엔 고개를 끄덕일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겉과 속을 나누고 현상과 본질을 나누어 생각하는 데에는 사태를 정리하여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그건 본질이 그 이름에 걸맞은 것일 때의 얘기다. 그 본질이라는 게 실재(實在)가 아니라 누군가의 편익(便益)에 봉사하는 것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본질이라고 내세운 것에 이미 이해관계가 묻어 있다면 어찌 하겠는가. 삶의 의미, 역사의 의미, 의미의 의미 따위가 바로 그런 것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당신네 철학자들이 제시해 줘야 하는 게 그런 삶의 의미 같은 것 아냐?”

학교의 구내식당에서 만난 한 선생님이 반쯤은 힐난이 섞인 듯, 또 반쯤은 도움을 바라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들어 머리가 부쩍 더 세버린 그 선생님은 이제는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도 잘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밥을 떠올리는 숟가락에도 별 의욕이 없어 보였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다 양파 껍질 같은 거지.”

구보씨는 요령 있게 발을 빼고 싶었다. 사람들은 과연 삶의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아 실망하거나 좌절하는가. 그렇기보다는, 일상의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애꿎게 그 탓을 ‘삶의 의미’에 돌리는 것이 아닌가. 마음먹은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든지, 경제적으로 쪼들린다든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든지 하는 따위가 대부분 실제 원인이지 않은가.

구보씨는 짐 자무쉬의 최근 영화 ?리미츠 어브 컨트롤?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그 영화에선 거의 말이 없는 한 흑인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킬러다. 그 남자는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길에 여러 경로를 거치고 여러 사람을 만난다. 영화 속에서 비행기도 타고 기차도 타며 트럭도 탄다. 그런데 그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작은 트럭의 뒷면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 있다.

“LA VIDA NO VALE NADA”(인생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영화 [리미츠 어브 컨트롤]의 한 장면

“그 영화 첫머리엔 랭보의 시구가 나와요. ?취한 배?의 앞부분. ‘유유한 강들로 접어들자 이젠 선원들 없이도 될 것 같았어…’ 암튼 재미있어요.”

“구보 선생이 추천하는 영화는 대개 졸리더라구. 이 영화도 그렇겠지?”

“뭐, 보기에 따라선… 어떻든 영화니까요.”

“야한 장면도 있어?”

“누드 씬이 있긴 한데, 야하진 않아요.”

“그래?”

“요새야 누드라는 게 별 거 없잖아요. 그래선지 이 영화에선 투명한 비닐 옷만 걸친 여자가 나와요. 그 여자가 다 벗기도 하죠. 그게 그거니까… 차이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건지도 몰라요.”

“일종의 허무야?”

“글쎄요, 허무도 여러 종류니까요. 게다가 순수한 허무란 건 없잖아요. 이 영화에서도 킬러가 결국 목표를 달성하거든요. 좀 황당한 방식으로긴 하지만…”

“황당한 방식?”

“예. 상식적인 인과성을 뛰어넘어서요. 무장한 부하들이 밖에서 지키고 있는 건물 안의 보스를 죽여야 하는데, 어느 순간 킬러가 그냥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어떻게 들어 왔냐고 물으니까, ‘상상력’을 통해서라고 대답하죠. 뭐, 어차피 영화니까요. 어떤 걸 바라느냐는 게, 그 바라는 걸 표현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런 점에서 이 영환 허무주의적인 건 아니에요. 오히려 원하는 바가 있다는 걸 강력하게 보여 주죠.”

“그럼 말이야, 구보 선생. 원하는 게 이뤄질 수 없는 경우는 어떤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면 말이지. 그건 허무 아니야?”

“영화에서 말예요?”

“아니, 영화에서건 현실에서건.”

“글쎄요, 바라는 데 이뤄질 수 없는 건 허무라기보다 슬픔이겠죠.”

“슬픔? 슬픔이라…”

그 선생님은 좀 어두워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해서 꼭 슬픔으로 귀착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때로 분노하고 미워하기도 하니까. 그런 게 힘에 부치고 아무 소용없다고 여겨질 때 찾아오는 게 슬픔일 거다. 장애를 물리치려는 반응의 표출이 분노라면,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에 부딪혀 나타나는 위축의 느낌이 슬픔인 셈이다. 물론 순수한 슬픔은 찾기 어렵다. 많은 경우 슬픔은 분노와 섞여 저주나 원망 따위를 낳는다.

슬픔이 진해지고 무거워지면 이루고자 했던 목표마저 삼켜버린다. 그래서 그것은 자칫, 있지도 않은 허무와 만날 수 있다. 그럴 때 그것은 치명적인 병,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그러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대부분의 병이 상한 몸의 회복을 위해 휴식과 안정을 강요하는 것이듯이, 과도하지 않은 대부분의 슬픔도 장애와 손실에서 물러서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게 한다.

반면에 허무주의에는 여전히 분노가 묻어 있다. 허무주의는 파괴적 공격의 일환이다. 문제는 그 공격이 전방위적(全方位的)이라는 데 있다. 허무주의는 세상에 만연한 가식(假飾)과 위장(僞裝)을 들춰내지만, 수명이 다한 가치와 의미들뿐 아니라 때로 이제 막 자라나는 싹마저 짓밟는다. 허무주의자는 황량한 폐허가 이루어낸 평등의 지평에서 위안을 찾고자 한다. 세상이 허무(虛無)하다면 더 이상 억울해 할 필요도, 더 이상 구차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그래, 우리 구보 선생은 어떤가. 요즘 즐겁게 잘 지내지?”

마주 앉은 선생님이 수저를 내려놓고 입 주위를 닦으며 묻는다. 어느새 이 양반도 이제 예순이 가까운 나이다.

“웬걸요. 저야 늘 슬프죠.”

구보씨는 멋쩍게 웃는다.

“그게 뭔 말이야? 요새 뭐하고 사는데?”

“그냥 책이나 읽고 있죠. 가끔 누드에 대해서 생각하고…”

“허허, 웬 누드? 누드라는 게 별 거 없다면서…”

“그러게 말예요. 혹시 그래도 아직 별 거 있는 누드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저기, ?누드모델?이라는 영화가 있거든요. 벌써 한 20년쯤 전 영환데, 그거 4시간짜리 DVD를 다시 봤어요. 늙수그레한 화가가 젊은 여자 모델을 벗겨놓고 계속 그리죠. 이렇게도 그리고, 저렇게도 그리고, 그러다 포기하고, 또 다시 그리고… 그런 과정이 4시간 동안 이어져요. 그런데 그렇게 지루하진 않아요.”

“그래서 그림은 완성하고?”

“그렇죠. 영화에선 완성하는 것으로 나와요. 물론 완성된 그림을 보여주진 않죠. 화가는 그 그림을 벽 속에 넣고 발라버려요. 그리고 새로 그림을 그려 그걸 공개하죠. 진짜 그림은 영원히 숨겨진다는 얘긴데, 이런 아이디어는 사실 낡은 거죠. 발자크의 단편에서 따온 거라고 해요.”

“그게 다야?”

“그러니까요. 그게 다란 생각을 안 하게 하는 게 문제인 거죠. 겉치레를 다 벗겨내고 벌거벗은 몸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거예요. 영화하고 별개로 말이죠.”

“허허… 그래서 구보 선생은 뭘 좀 찾아냈어?”

“아직요. 찾아내면 말씀 드릴게요.”

“구보 선생도 진짜는 벽 속에 숨겨놓고 가짜만 말해 주려고?”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숨길 게 없으면서 숨기는 척 하는 것은 사기겠지만, 이미 숨겨진 것을 끝없이 찾아다녀야 하는 수밖에 없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역시 사기일까. 구보씨는 그 선생님과 헤어져 혼자 걸으면서 생각했다. Y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렇다고 하겠지. 하지만 언젠가 그녀도 생각이 바뀔 날이 있을 거야.

실재(實在)와 우리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과 어쩔 수 없는 어긋남이 있지만 그걸 향한 추구를 포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반복되는 진부함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달리 어떻게 하겠어? 문명의 확장 사이클이 요즘처럼 문제를 키워갈 때 내파(內破)의 싹이 눈에 띄게 자라지 못했다면, 반성의 수단으로 들이댈 수 있는 건 아마 이런 사고방식들일 거야. 그게 비루하게 현실을 쫓는 구차함이나 무책임하게 외면하는 허무함보다는 낫지 않겠어?

벌거벗은 몸은 이런 모색의 메타포, 적어도 그 일부일 거야. 그렇더라도 오늘날의 누드에는 어떤 슬픔이 깔려 있어. 상업성에 물든 누드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지. 일종의 비타협적인 슬픔 같은 것, 그게 누드의 정체처럼 여겨지는 거야. 그건 왜일까. 구보씨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차오르기 시작한 달이 벌거벗은 하얀 몸뚱이를 반쯤 드러내고 있었다.

문성원(부산대, 철학) /

구보씨 누드모델을 꿈꾸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더운 날씨다. 무덥고 갑갑하다. 훌훌 벗어던지고 싶은 때다. 구보씨가 딱히 여름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벗는 건 좋아한다. 아니, 그보다는 걸치고 입는 것을 그닥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겠다. 그렇다 보니, 이런 날씨에 집에 있을 때면 거의 벌거벗고 있을 때가 많다.

원래 인간은 열대 동물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퍼져가기 시작한 것은 대략 4, 5만 년 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정도 기간은 생물학적 변이가 일어나기에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오늘날도 지구상에서 인간이 옷가지나 보온 장치 없이 살 수 있는 지역은 그리 넓지 않다.

그러니까, 온대(溫帶)인 우리네 환경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맞는 계절은 여름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생물학적 본성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 여름인 셈이다. 자연스러움으로 잘 지낼 수 있는데 거기에 굳이 인위(人爲)를 덧붙일 필요는 없어, 라고 구보씨는 벗은 몸으로 생각해 본다.

인위는 과잉(過剩)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특정한 목적에만 딱 들어맞는 것은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잉은 대부분 예기치 않은 문제들을 야기한다. 물론 인간의 문화는 그런 과잉의 자극으로 말미암아 발전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옷은 열대의 ‘털 없는 원숭이’ 출신인 인간이 그 활동 범위를 한대(寒帶) 지역으로까지 넓혀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막상 더운 계절에는 거추장스러워지는 것이 옷이다.

어찌 옷뿐이겠는가.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장치와 제도들이 그렇다. 거추장스러워지기만 하면 다행이다. 쉽게 억압적이 되어버린다. 인위의 질서가 자연스러움을 덮고 순응을 강요한다. 그렇게 하여 인위의 본성이 마련된다. 이제 자연은 낯선 것이 되고 만다. 아마존의 조에 족을 생각해 보라. TV 화면에 비친 그들의 벌거벗은 자연스러움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다. 인위의 문명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신체 부위를 가리는 모자이크 속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옷에 배어있는 인위의 질서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복식(服飾)에서다. 하지만 복식은 사극(史劇)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보씨는 옷차림새 때문에 대우가 달라지는 일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다. 요즘도 옷이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옷에 대한 태도는 사회 질서에 대한 태도를 함축한다. 히피들이 괜히 옷을 찢고 벗어던졌겠는가. 그들의 벗은 몸은 인위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표시다.

그런데 이 인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것은 쉽게 찢어지지도 벗겨지지도 않으며, 도리어 벗은 몸에 파고든다. 오늘의 실태를 보라. 몸짱 열풍을 거쳐 신체 부위 하나하나를 지배하는 촘촘한 시선. 꿀벅지니 빨래판 복근이니 하는 따위의 웃지 못 할 규정들이 판을 친다. 은희경의 표현대로, 인위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고 주눅 들게 하며, 알몸까지 스며든 징글맞은 소비의 질서에 매달리고 아부하게 한다. 오늘날 전시된 벗은 몸은 또 하나의 값비싼 옷이다.

이런 세상에서 구보씨는 누드모델을 꿈꾼다. 물론 구보씨가 몸짱일 리는 없다. 빨래판 복근? 그의 배는 전통의 중년남자가 지닌 봉긋한 여유를 보여줄 뿐이다. 그런 구보씨가 엉뚱한 꿈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 본 영화 한 편 때문이었다.

?캐쉬백?이라는 제목의 영국 영화였다. 주인공 청년이 여자 친구에게 차이고 그 실연의 상처 가운데 새로운 연인을 만나게 되는 과정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졌던 것 같다. 세상이 정지된 속에서 자신만 움직일 수 있다고 상상하는 장면들이 재미있었다. 멈춰진 시간, 그 속에서 홀로 누리는 자유로움 ― 이것이 힘든 상황을 잠시나마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프로이트가 말하듯, 유머는 현실에 대한 이런 종류의 거리두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상상의 특권적 거리가 당장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비틀어보게 하고 그 틈에서 숨 쉴 수 있게 한다.

정작 구보씨에게 필이 꽂힌 것은 영화의 전개에 핵심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한 장면에서였다. 주인공 청년은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난한 미술학도였는데, 실연을 당하고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처지에서 미술실기 수업에 들어왔다. 누드 데생 실습 시간이다. 당연히 누드모델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누드모델이 머리가 백발인 할아버지였다. 몸매는 물론 몸짱과 거리가 한참 멀다. 그래도 당당하고 거리낌이 없다. 모델을 서면서 ‘뿌우윙’하고 방귀까지 뀐다.

“익스큐즈 미.”

영화 ‘캐쉬백’의 한 장면.

구보씨는 ‘익스큐즈 미’라는 표현이 그토록 적절하고도 미묘한 톤으로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색함과 미안함, 뭐 그래도 생리현상인데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약간의 뻔뻔함까지 적절하게 담겨 있다. ‘뿌윙’. 그 시퀀스가 끝나기 전에 할아버지 모델은 다시 방귀 한 방을 날린다.

“익스큐즈 미.”

그래, 바로 저거야, 하고 구보씨는 생각했다. 누드모델이라고 꼭 잘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거든. 오히려 필요한 것은 감춰져 있고 억압되어 있는 것을 드러내는 용기야.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움을 드러내는 약간의 용기 말이지. 그런 것만 있으면 누구나 모델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저렇게 할아버지도 모델을 설 수 있다면, 철학자에게 적절한 노후의 부업은 바로 누드모델이 아닐까. 모름지기 철학자란 은폐된 것을 파헤치고 드러낼 줄 알아야 하니까 말이야.

사람들이 쉽게 벌거벗지 못하는 까닭은 추워서가 아니다. 옷의 질서가 주는 안정을 벗어나는 게 두려워서다. Y도 예외가 아닌 것일까. 그만하면 멋진 몸매인데도 그녀는 노출을 싫어했다. 밝은 곳에서는 좀처럼 맨몸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구보씨가 갑자기 불을 켰을 때 알몸이었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 시트를 끌어당겼다.

“아깝다, Y야. 너야 말로 누드모델로 딱인데…”

구보의 농담을 Y가 차가운 시선으로 받는 바람에, 구보씨는 황급히 다시 불을 끌 수밖에 없었다.

“넌 여전히 남성 위주의 시선으로 날 보는 거야. 난 그게 싫다구.”

“엉? 어차피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잖아.”

“그런 뜻이 아니거든. 대체 그게 철학자가 할 말이야? 니들은 항상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폭로니 탈은폐니 하고 떠든다구. 그러면서 실제로 이용당하고 유린당하는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아.”

“아니, 그건 오버센스야. 내 얘긴 때로 불필요하고 억압적인 틀이나 감싸개를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움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거야. 인위적인 것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그런 반성에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말한 여자, 남자는 자연스러움 속에서의 얘기일 뿐이라구.”

구보씨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이런 식의 어설픈 변명이 그대로 통할 리 만무했다. 성(性)의 사회적 성격이니 젠더(gender)니 하는 얘기는 차치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벌거벗음 앞에서 공평치 않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잘못하다간 버티기 어려운 논란에 말려든다. 차라리 처음부터 스스로가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수긍하느니만 못하다.

“자연스러운 남자와 여자는 없어.”

Y는 단호했다. 그렇다. 엄격히 말하면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벌거벗어도 진짜 자연스러움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니 더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만큼 우리는 더 더듬고 더 갈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하는 우리의 눈길과 손길이 그래서 더 절실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도 니들의 속임수고 도피처야. 포착할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 그렇지만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 ― 그 따위 말로 너네가 노리는 게 뭔지 생각해 봐. 결국은 눈에 보이는 문제를 덮고 회피하는 거야. 남자들이 여자의 몸이나 성을 노리개로 삼고 지배하는 현실, 그건 눈에 보이는 거잖아. 그런데, 왜 그런 문제를 놔두고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니들 철학자들이 자꾸 외면당하는 거라구.”

“하하, Y야. 그렇게 흥분하지 마. 그런 면이 있겠지. 하지만 우리도 나름 진지하다구. 그리고 내가 누드를 얘기하는 건 성(性)의 대상화나 상품화, 그런 것 하곤 상관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네 말대로 히피들이 옷을 벗는 데에는 아마 진정성이 있을 거야. 그런데 누드모델은 좀 아니잖아. 그런 게 우리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겠어? 옷을 벗어던지는 용기라구? 그런 건 차라리 동물보호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누드 시위에서 찾는 게 나을 거야.”

“그럼, 넌 나보구 누드모델의 꿈을 포기하라는 거야?”

“꿈? 그런 게 꿈이라도 돼? 그건 그냥 자족적인 냉소거나 유머야. 네가 그랬잖아, 유머라는 게 현실에 초연한 척해서 위안을 얻는 거라구.”

이크. 구보씨는 이쯤 되면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다 싶었다. 벌거벗음에 대해 아직 할 말은 많지만, 이럴 때는 굳이 열을 올려가며 대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옷을 벗어젖히는 것만으로는 자연스럽게 넘기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라고 구보씨는 여전히 벌거벗은 몸뚱이로 생각해 본다.

문성원(부산대,철학) /

구보씨, 축구를 보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타인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지.”

십여 년 전에 구보씨가 들었던 말이다.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자주 떠오른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씨익 웃으면서 동의를 구하듯 구보씨를 쳐다보았는데, 그 표정 역시 잊히지 않는다. 구보씨가 취직 때문에 여기저기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니던 때였다. 한 학교에서 다른 사람을 쓰기로 거의 결정이 되었다가, 무슨 사정 때문인지 취소가 되고 다시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가 났다. 사라졌던 기회가 다시 나타났으니 반길 이유가 있긴 했지만,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가.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가. 구보씨는 석연찮은 심정으로 눈을 내리깔며 그 말을 되짚어 보았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살아가면서 이 말을 떠올릴 만한 상황을 만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다. 최근에는 월드컵 축구 탓에 그런 경험을 했다. 우리 팀이 16강에 올라가기 전, 조별 리그를 치를 때였다. 그리스에 2-0으로 이긴 기쁨도 잠시, 아르헨티나에 참패를 당하고 난 직후였다. 우리와 마지막 경기를 벌일 나이지리아가 그리스에 2:1로 졌다. 구보씨도 그 경기를 보았는데, 나이지리아는 먼저 골을 넣어놓고도 쓸데없는 반칙을 해서 한 명이 퇴장당하는 바람에 경기를 망쳤다. 케이타라는 그 선수는 다음 경기에, 그러니까 우리 팀과의 경기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다른 선수들도 두 명이나 부상을 당하여 교체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당장, 이런 사태가 우리 팀에 호재라는 얘기가 나왔다. TV에서도, 인터넷에서도 그랬다. 나이지리아의 불행은 우리의 행복이었다.

나이지리아는 이번 대회에 운이 없었다. 아르헨티나와 벌인 첫 경기에서는 오심 때문에 억울한 패배를 당했다. 심판이 아르헨티나 공격수의 반칙을 보지 못하고 골을 인정해버린 것이다. 우리와 벌인 경기에서도 거의 점수와 다름없는 결정적인 골 찬스를 몇 번이나 놓쳤다. 사실, 내용 면에서 보면 한국 팀이 힘겨웠던 경기였다. 구보씨는 경기가 끝나고 나이지리아 감독이 한 말이 여러 면으로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이번 월드컵 자체가 나이지리아에는 어려운 대회였다. 한국에 축하의 말을 전해주고 싶다. 마지막 순간 득점 기회가 많았는데 살리지 못했다. 우리 선수들이 정말 열심히 해줬는데 운이 안 따랐다. 우리에게 운이 따랐다면 이길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축구가 이번 대회에서 약세인데 나이지리아에 온 지 4~5개월 밖에 안됐기 때문에 아프리카 전체를 말하기는 어렵다. 요보가 부상을 당해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16강 탈락은 선수를 선발하고, 전략을 세우고, 훈련을 시킨 내 책임이다.”

대회를 불과 4~5개월 남겨두고 감독을 교체해서 준비에 허점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나이지리아의 불찰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나이지리아는 승리하지 못했고, 그 덕택에 우리는 16강에 진출했다. 누가 보더라도 실력으로 압도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이지리아의 불운은 우리의 행운이었다. 구보씨는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에 주저앉은 나이지리아 선수들의 망연한 표정과 운동장으로 자랑스럽게 걸어 나오는 허정무 감독의 대비되는 모습을 그냥 흘려버릴 수 없었다. 정녕 그런가. 저들의 불행은 우리의 행복인 것인가.

“구보야, 이건 그냥 축구 경기야.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경기라구. 누군가는 지고 떨어져야 하는 거잖아.”

맞다. 이건 축구 경기일 뿐이다. 그러나 누구에겐 축구가 삶이고 일이다. 우리도 이렇게 밤잠을 설치고 지켜보지 않는가.

“나도 우리가 16강전에 나가게 되어서 기뻐. 무엇보다 박주영의 멋진 골이 마음에 들고 말이야. 우리 선수들이 잘 했다구. 다만, 나이지리아도 실력 있고 열심히 했는데 안됐다는 거지. 게다가 Y야, 내가 찜찜한 건 상대방 팀의 안 좋은 상황을 반기고 기꺼워하는 태도야. 어떤 께름칙함도 없이 말이지. 그건 사실 페어플레이 정신에도 어긋나는 거잖아.”

페어플레이라… 구보씨는 막상 이런 말을 하면서도 뒷골이 땅기는 것을 느낀다. 페어플레이란 스포츠가 스포츠일 때, 그러니까 아마추어리즘에 충실할 때나 빛을 발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오늘날처럼 각광받는 스포츠는 모두 돈과 결부되어 있는 판국에, 그런 말이 과연 힘이 있을까.

월드컵의 경우, 개최국이 거두는 경제효과가 순익만 10억 달러 이상이며, 후원사인 현대와 기아가 거둘 광고효과가 10조원이 넘고, SBS가 사들인 한국 독점중계권료가 1억 4천만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어떤 나라가 16강에 진출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엄청난 액수의 돈이 왔다 갔다 한다. 당장 각국 선수단에 지급되는 배당금만 해도 16강 진출 시 900만 달러, 8강 진출 시에는 1800만 달러에 이른다. 사정이 이럴진대, 승부보다 페어플레이가 중요하다는 말이 먹힐 수 있겠는가.

그래도 구보씨는 못내 안타깝다. 축구는 전세계가 즐기는 스포츠라고 하지 않는가. 구보씨도 어릴 적 비좁은 골목에서나마 온종일 친구들과 축구공을 차고 놀았던 기억이 새롭다. 누구나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운동 경기가 축구다. 그런 축구가 승부와 돈의 무게에 짓눌려 일종의 전쟁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다. 상대편과 함께 즐기는 놀이라기보다는 배타적인 전과(戰果)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터가, 내 편과 네 편의 희비가 확실하게 갈리는 승부의 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보면 허정무 감독이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를 앞두고 파부침주(破釜沈舟)라는 전쟁과 관련된 고사성어를 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또 이렇듯 결사항전을 외치는 마당에, 상대방의 불운한 처지를 반기는 태도가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나느니 어쩌느니 하고 구보씨처럼 떠들다간, 곧바로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우(愚)를 범하는 것이라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잠깐, 구보야. 축구 얘기를 하다가 웬 고사성어냐. 너 같이 그런 꼴을 보고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하는 거야. 쉽게 말하면 될 걸 괜히 문자나 쓰고 싶어 하고… 어쨌든 말을 했으니 무슨 뜻인지는 설명을 해 줘야잖아.”

“하, 미안. 그런데 이런 건 요즘 인터넷 찾아보면 금방 나와. 따로 설명할 것도 없다구. 파부침주는 초(楚)나라 항우(項羽)가 진(秦)나라와의 싸움을 앞두고 자기 군사들에게 밥 짓는 솥을 깨뜨리고(破釜) 타고온 배를 물에 가라앉히게(沈舟) 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죽기 살기로 싸우게 해서 크게 이겼다는 거지. 또 송양지인(宋襄之仁)이란 그보다 앞선 전국(戰國) 시대 얘긴데, 송(宋)나라의 양공(襄公)이 이웃 초나라와 싸울 때 괜히 실속 없이 인(仁)을 내세우다 망하고 만 일을 두고 생겨난 말이야. 적이 강을 다 건너기 전에 공격하자는 말을 듣고도 군자는 남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북을 울리지 않는 법이라는 둥 폼 잡고 머뭇대다가 결국 싸움에 지고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는 거지.”

“아, 그 얘긴 나도 들은 적이 있어. 하긴, 구보 너 같이 철학합네 하는 치들은 그 양공이라는 작자랑 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호호… 현실감 없이 구는 게 꼭 닮았잖아.”

“어라, 그렇담, Y 너도 축구가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이거냐? 타인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 되어야 하고?”

“얘 좀 봐. 그렇게 갖다 붙일 일은 아니야. 내가 언제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 그랬니? 축구는 전쟁은 아니지만 어차피 승부를 가려야 하는 게임이잖아. 지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목표인 거고. 지는 사람 처지가 안쓰러우면 아예 그런 게임을 하질 말아야지.”

“Y야, 내 말은 승부에 집착하는 정도가 지나치다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게임 외적인 원인이 있다는 거고. 게임이라면 서로 이겼다 졌다 해야 재미가 있고, 또 그래야 서로 기술이나 재주도 향상되고 그런 거잖아. 그런데 월드컵 축구는 진짜 국가 대항 싸움처럼 되어 버렸어. 그러다 보니 막상 게임의 재미보다는 승부가 우선이 됐다는 거야. 네 말대로 이게 그냥 축구 경기에 그치질 않고 때로는 여러 사람이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니까. 프랑스 같은 경우를 좀 봐. 축구 지고 그 후유증이 사회 갈등으로까지 번진다잖아.”

“그건 거꾸로 보면 축구 같은 스포츠가 사회 통합의 역할을 한다는 뜻 아닐까.”

“그렇긴 하지만, Y야, 너도 알다시피 그런 통합은 미봉적이고 조작적인 게 되기 쉽다구. 축구가 대한민국을 하나 되게 하는 것 같지만, 그게 정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묻어버리기도 하잖아. 이명박이나 정몽준은 우리가 억지로라도 다시 4강까지 올라가서 지난 지방 선거의 패배 같은 걸 덮어버리길 원할 거야. 광고나 이벤트로 한 몫 챙기는 작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23일 새벽 나이지리아전을 응원하는 서울의 인파)

“구보야, 그렇게 말하면서 넌 왜 축구중계는 꼬박꼬박 챙겨 보냐? 너 같이 생각할라치면 우리 팀이 일치감치 탈락하길 바라야 맞는 거 아냐?”

“글쎄 말이야. 사실, 나도 우리가 계속 이겼으면 좋겠어. 비록 실력으론 어렵겠지만, 운이라도 따라 주면 좋겠어. 왜냐구? 그거야 나도 우리 사회의 일원이라서 그렇겠지. 스포츠라는 게 공동체를 직접적으로 표현해 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 특히 축구는 말이야. 축구공과 공동체, 이 둘 사이엔 어떤 연관이 있는 모양이야. 그러고 보면 공동체라는 게 같은 방향에서 공을 쫓는 어떤 경계의 내부를 뜻하는 것일지도 몰라. 그 경계 안에서는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사태를 벗어나게 되는 그런 내부 말이지. 축구 경기에서 이기면 다들 기뻐하잖아. 그런데 문제는 그 경계에는 언제나 밖이 있다는 거야. 그래서 그 밖과의 관계에서는 타인의 불행과 나의 행복이라는 대립쌍이 여전히 작동한다는 거지.”

“얘, 옛말에 걱정이 반찬이면 상발이 무너진다고 했어. 구보야, 지금 네가 꼭 그 꼴 같애. 축구라는 게 이기면 좋고, 지면 그만이고, 뭐 그런 것 아니니.”

Y의 표정을 보니 더 이상 이야기한다는 건 어려운 일 같았다. 구보씨는 아쉽지만 그만 입을 닫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우리에겐 경쟁과 승부는 숙명과 같은 것인가. 이 세상에서 경계 없는 송무백열(松茂柏悅)*의 꿈을 꾼다는 건 정녕 부질없는 짓인가.

*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측백나무가 기뻐한다는 뜻.

문성원(부산대, 철학) /

구보씨, 장미 향기를 맡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구보씨는 오월의 태양 아래 막 피어난 붉은 장미 몇 송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건 구보씨가 본 적도 없는 오래 전의 연극 제목이었는데, 웬일인지 버릇처럼 입에 붙어 예기치 않은 순간에 튀어나오곤 했다.

장미의 향은 강하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코를 흠흠 거려야 간신히 약한 자극이 올 정도다. 요즘 꽃들은 냄새가 이전만 못하다. 보기 위한 꽃들로 개량한 탓일 거다. 그래도 이렇게 울타리에 심어진 꽃들은 나은 편이다. 대개는 아예 향이 없다시피 하다.

어떻든 장미가 피었다. 바야흐로 장미가 피는 계절이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장미를 큰 마당에 가득 심어놓은 곳을 일부러 찾아갔다. 구보씨가 사는 데서 멀지 않은 곳에 그런 공원이 있어서다. 각양각색의 장미들이 이제 막 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일을 쉬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와 공원은 한참 북적였다. 복잡하고 골치 아픈 세상, 하지만 잠시 짬을 내어 화창한 오월의 한때를 즐기던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호외가 날라들었다. 거기에는 굵고 큰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그게 벌써 일 년 전이다. 이제 다시 핀 장미를 보면서 구보씨는 그 때 일을 떠올린다. 뜬금없는 것 같기도 하다. 장미와 노무현 사이에 특별한 연관이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노란 장미라면 몰라도 붉은 장미라니… 하지만 구보씨에게 노무현과 함께 연상되는 장미는 붉은 색이다. 붉은 장미, 햇살을 받아 더 붉은, 동백꽃처럼 붉은 빛의 장미…
영화 ‘시’의 한 장면
이건 어쩌면 이미지의 간섭 현상일지도 모른다. 동백은 꽃 밑동까지 송이채 떨어진다. 미련을 남기지 않고 지는 꽃이 동백이다. 마치 목이 꺾이고 잘린 듯 툭툭 땅에 떨어진다.

우연일까. 이창동 감독의 최근 영화 ‘시’에도 장미가 나오고 동백이 나온다. 영화에서 윤정희가 분(扮)한 양미자는 장미의 꽃말이 고통이라고 말한다. 구보씨가 알기론 장미에 그런 꽃말은 없지만, 그래도 양미자의 말을 믿고 싶다.

영화 ‘시’에 나오는 동백은 목이 꺾이듯 떨어지지 않는다. 그 동백은 조화(造花)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동백꽃을 화면에 담기에는 계절이 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감독은 동백꽃을 등장시키고 양미자가 그 꽃을 너무 좋아한다고 말하게 한다.

영화에서 동백 대신 꺾여 떨어지는 것은 사람이다. 같은 학교 남학생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강물에 떨어져 죽은 여중생 희진이가 한 떨기 동백인 셈이다. 그 동백을 품고 강물은 흐른다. 영화는 꺾인 꽃망울에 무심한 세상을, 악할 것조차 없이 제 살기에 바쁜 뻔뻔한 사람들의 모습을 함께 비추고 다시 강물로 돌아와 끝을 맺는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죽은 희진이를 위해 미자가 쓴 시가 흐른다. ‘아네스의 노래’다. 미자는 뒤늦게 왜 시를 쓰고 싶어 했을까. ‘시가 죽어버린 시대’에, 꽃을 좋아할 뿐 세상살이에는 서툴고 말투마저 어색한 미자가, 삶의 아름다움으로 끝내 붙들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미자의 노래, 아네스의 노래, 이창동의 노래는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구보씨 시(詩)를 생각하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꽃을 한 동안 들여다보던 구보씨는 다시 중얼거렸다. “그럼, 물론이지.” Y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게 물어보는 이유는 말이야, 스스로도 변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걸 애써 부정하고 싶어서라구. 자신의 말을 반사물로 삼아서 그런 바람을 증폭시켜 보는 거지. 뭐, 나쁠 건 없어. 때로 효과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언젠가 구보씨가 혼잣말하는 걸 들었을 때, Y는 이렇게 이죽거리듯 참견을 했다.

하긴 사람이 안 변할 수는 없지, 라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날씨에 민감한 건 나쁜 게 아니야. 다만, 뭐가 어떻게 변하느냐는 거지. 그런데 시를 쓴다는 건 아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변하는 날씨와 변하는 세월을 바라보는 변하지 않는 심정 한 자리, 그런 게 있어야 시구(詩句)가 맺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기억은 그리움이 되고 또 기다림과 희망이 되는 걸 거야. 과거와 미래가 지금 이 순간에 한 몸이 되는 어떤 절절함 같은 것으로 말이지. 시(詩)라… 그래, 이 부박(浮薄)한 현실 속에서도 시가 영화의 소재가 되지 않는가. 그건 지금 이 시절에도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리고 그건 어쩌면 해마다 피어나는 이 꽃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정작 시를 쓰고 읽는 사람은 얼마나 되지? 이창동의 영화 ‘시’도 외국 영화제의 힘을 입어 간신히 관객 동원을 하고 있는 꼴이잖아. 구보씨는 하루에 단 한 번뿐이었던 그 영화의 상영 시간을 떠올렸다. 개봉 후 며칠 안 돼 영화관을 찾았는데도 그랬다. 이제 시는 꽃 자체가 아니라 점점 옅어져 가는 꽃향기와 같은 것일지도 몰라. 가까이 가서 맡으려고 애를 써야 간신히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것 말이야…

누가 그랬었지? 현대의 대표적인 시는 광고 카피라고… 한편으론 그게 맞는 말이겠지. 압축적이고 세련된 표현으로 범람하는 언어가 바로 광고 카피일 테니까 말이야. 또, 그걸 만들어내려고 쥐어짜는 노력의 양과 강도를 생각해 봐. 카피스트의 고생은 아마 시인들 못지않을 거야. 그렇더라도 그게 시야? 디자인된 언어, 향기 없이 흩날리는 꽃잎들처럼 사방에서 현란하게 명멸(明滅)하며 흩어지는 어구들…

시란 모름지기 살아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살아 있다는 게 뭘까. 죽음에 바치는 헌사(獻辭)에서도 살아 숨 쉬는 것,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나 움직이면서도 죽음 너머의 한 지점을 끝까지 겨누는 것, 그래서 죽음의 세력들과 죽음의 상인들이 몰고 오는 온갖 유혹과 치장을 이겨내는 것, 삶을 죽음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조차 삶을 찾아내고 움켜잡는 것, 그리하여 절망의 한 가운데서도 꿈꾸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기꺼이 매혹되는 것…

“구보야, 넌 너무 유약해. 사내애가 허구한 날 꽃이나 들여다보고 있으니 말이지. 그렇다고 꽃을 가꾸기라도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잖아. 그저 남이 가꾼 꽃에 코나 들이대고 있으면 거기서 철학이 나오니?”

Y의 질책이다. 그녀는 어디 있다가 또 이렇게 바람처럼 나타난 걸까.

“Y야, 나는 지금 꽃만 보고 있는 게 아니고, 꽃 너머를 보고 있는 거야. 향기만 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향기 너머를 더듬고 있는 거고… 말하자면, 장미가 품고 있는 시(詩)에 귀 기울이고 있는 중이라구.”

“얼씨구. 참 시시한 소리 하고 있다. 지금이 그럴 때냐?”

“왜, 무슨 일이 있어?”

“무슨 일? 너 참 속 편하다. 다들 신경 곤두서 있는 판에. 자칫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잖아. 막상 어렵다고는 하지만, 미국의 중국 관계 꿍꿍이만 정리되면 혹 모르는 일이라는 얘기도 있어. 그게 아니더라도, 전교조 교사들 130여명을 교과부가 해임하겠다고 결정하고 나선 건 알지? 오늘은 천안함 발표를 못 믿겠다고 한 김용옥씨를 우익단체들이 국보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다는 뉴스가 떴어. 김용옥은 니들과 같은 철학자 아니니?”

“허, 그런 일이…. 정말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모양이네. 하지만, Y야, 너무 걱정할 건 없어. 우린 박정희 시절도, 전두환 시절도 견디고 헤쳐 왔잖아. 때로 거꾸로 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건 잠시거든. 이렇게 얘기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시심(詩心)을 잃지 않는다면 괜찮을 거야.”

“시심? 그렇게 장미나 들여다보면서 말이지? 네가 해직 통보를 받는 심정을 알기나 해?”

“아, 미안해, Y야. 그렇게 화내지 마. 나도 답답하다구. 어떻게 안 그렇겠어? 실은 나도 장미를 보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하던 중이었어. 그러다 보니까 며칠 전에 본 영화 ‘시’가 떠오르고, 그래서 해 본 소리야. 꽃이나 시 같은 게 유약한 것 같지만, 어려울 때 우리의 마음을 받쳐 주는 건 의외로 그런 것 아닐까. 변하는 세태에도 믿고 기다리고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것, 이를테면 싸움터의 병사들이 품 안에 접어 간직하는 어머니의 편지 같은 것 말이지. 날씨에 따라 쉽게 변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굳게 잡아주는 어떤 닻줄 같은 것… 잠깐, Y야, 그렇게 가지 말고 내 말을 들어 봐.”

그러나 Y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구보씨는 멀어져가는 Y의 뒷모습를 향해 그녀에게 막 들려주려던 시구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시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밤, 우리가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던 그 밤,
그리고 그 날, 그 황혼녘, 두드려 맞은 누군가의 심장이
죽음을 준비하던 그 부서진 골목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파블로 네루다, ?로르카를 위한 송가? 중에서)

문성원(부산대학교, 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