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축구를 보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타인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지.”
십여 년 전에 구보씨가 들었던 말이다.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자주 떠오른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씨익 웃으면서 동의를 구하듯 구보씨를 쳐다보았는데, 그 표정 역시 잊히지 않는다. 구보씨가 취직 때문에 여기저기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니던 때였다. 한 학교에서 다른 사람을 쓰기로 거의 결정이 되었다가, 무슨 사정 때문인지 취소가 되고 다시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가 났다. 사라졌던 기회가 다시 나타났으니 반길 이유가 있긴 했지만,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가.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가. 구보씨는 석연찮은 심정으로 눈을 내리깔며 그 말을 되짚어 보았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살아가면서 이 말을 떠올릴 만한 상황을 만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다. 최근에는 월드컵 축구 탓에 그런 경험을 했다. 우리 팀이 16강에 올라가기 전, 조별 리그를 치를 때였다. 그리스에 2-0으로 이긴 기쁨도 잠시, 아르헨티나에 참패를 당하고 난 직후였다. 우리와 마지막 경기를 벌일 나이지리아가 그리스에 2:1로 졌다. 구보씨도 그 경기를 보았는데, 나이지리아는 먼저 골을 넣어놓고도 쓸데없는 반칙을 해서 한 명이 퇴장당하는 바람에 경기를 망쳤다. 케이타라는 그 선수는 다음 경기에, 그러니까 우리 팀과의 경기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다른 선수들도 두 명이나 부상을 당하여 교체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당장, 이런 사태가 우리 팀에 호재라는 얘기가 나왔다. TV에서도, 인터넷에서도 그랬다. 나이지리아의 불행은 우리의 행복이었다.
나이지리아는 이번 대회에 운이 없었다. 아르헨티나와 벌인 첫 경기에서는 오심 때문에 억울한 패배를 당했다. 심판이 아르헨티나 공격수의 반칙을 보지 못하고 골을 인정해버린 것이다. 우리와 벌인 경기에서도 거의 점수와 다름없는 결정적인 골 찬스를 몇 번이나 놓쳤다. 사실, 내용 면에서 보면 한국 팀이 힘겨웠던 경기였다. 구보씨는 경기가 끝나고 나이지리아 감독이 한 말이 여러 면으로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이번 월드컵 자체가 나이지리아에는 어려운 대회였다. 한국에 축하의 말을 전해주고 싶다. 마지막 순간 득점 기회가 많았는데 살리지 못했다. 우리 선수들이 정말 열심히 해줬는데 운이 안 따랐다. 우리에게 운이 따랐다면 이길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축구가 이번 대회에서 약세인데 나이지리아에 온 지 4~5개월 밖에 안됐기 때문에 아프리카 전체를 말하기는 어렵다. 요보가 부상을 당해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16강 탈락은 선수를 선발하고, 전략을 세우고, 훈련을 시킨 내 책임이다.”
대회를 불과 4~5개월 남겨두고 감독을 교체해서 준비에 허점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나이지리아의 불찰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나이지리아는 승리하지 못했고, 그 덕택에 우리는 16강에 진출했다. 누가 보더라도 실력으로 압도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이지리아의 불운은 우리의 행운이었다. 구보씨는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에 주저앉은 나이지리아 선수들의 망연한 표정과 운동장으로 자랑스럽게 걸어 나오는 허정무 감독의 대비되는 모습을 그냥 흘려버릴 수 없었다. 정녕 그런가. 저들의 불행은 우리의 행복인 것인가.
“구보야, 이건 그냥 축구 경기야.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경기라구. 누군가는 지고 떨어져야 하는 거잖아.”
맞다. 이건 축구 경기일 뿐이다. 그러나 누구에겐 축구가 삶이고 일이다. 우리도 이렇게 밤잠을 설치고 지켜보지 않는가.
“나도 우리가 16강전에 나가게 되어서 기뻐. 무엇보다 박주영의 멋진 골이 마음에 들고 말이야. 우리 선수들이 잘 했다구. 다만, 나이지리아도 실력 있고 열심히 했는데 안됐다는 거지. 게다가 Y야, 내가 찜찜한 건 상대방 팀의 안 좋은 상황을 반기고 기꺼워하는 태도야. 어떤 께름칙함도 없이 말이지. 그건 사실 페어플레이 정신에도 어긋나는 거잖아.”
페어플레이라… 구보씨는 막상 이런 말을 하면서도 뒷골이 땅기는 것을 느낀다. 페어플레이란 스포츠가 스포츠일 때, 그러니까 아마추어리즘에 충실할 때나 빛을 발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오늘날처럼 각광받는 스포츠는 모두 돈과 결부되어 있는 판국에, 그런 말이 과연 힘이 있을까.
월드컵의 경우, 개최국이 거두는 경제효과가 순익만 10억 달러 이상이며, 후원사인 현대와 기아가 거둘 광고효과가 10조원이 넘고, SBS가 사들인 한국 독점중계권료가 1억 4천만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어떤 나라가 16강에 진출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엄청난 액수의 돈이 왔다 갔다 한다. 당장 각국 선수단에 지급되는 배당금만 해도 16강 진출 시 900만 달러, 8강 진출 시에는 1800만 달러에 이른다. 사정이 이럴진대, 승부보다 페어플레이가 중요하다는 말이 먹힐 수 있겠는가.
그래도 구보씨는 못내 안타깝다. 축구는 전세계가 즐기는 스포츠라고 하지 않는가. 구보씨도 어릴 적 비좁은 골목에서나마 온종일 친구들과 축구공을 차고 놀았던 기억이 새롭다. 누구나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운동 경기가 축구다. 그런 축구가 승부와 돈의 무게에 짓눌려 일종의 전쟁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다. 상대편과 함께 즐기는 놀이라기보다는 배타적인 전과(戰果)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터가, 내 편과 네 편의 희비가 확실하게 갈리는 승부의 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보면 허정무 감독이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를 앞두고 파부침주(破釜沈舟)라는 전쟁과 관련된 고사성어를 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또 이렇듯 결사항전을 외치는 마당에, 상대방의 불운한 처지를 반기는 태도가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나느니 어쩌느니 하고 구보씨처럼 떠들다간, 곧바로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우(愚)를 범하는 것이라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잠깐, 구보야. 축구 얘기를 하다가 웬 고사성어냐. 너 같이 그런 꼴을 보고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하는 거야. 쉽게 말하면 될 걸 괜히 문자나 쓰고 싶어 하고… 어쨌든 말을 했으니 무슨 뜻인지는 설명을 해 줘야잖아.”
“하, 미안. 그런데 이런 건 요즘 인터넷 찾아보면 금방 나와. 따로 설명할 것도 없다구. 파부침주는 초(楚)나라 항우(項羽)가 진(秦)나라와의 싸움을 앞두고 자기 군사들에게 밥 짓는 솥을 깨뜨리고(破釜) 타고온 배를 물에 가라앉히게(沈舟) 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죽기 살기로 싸우게 해서 크게 이겼다는 거지. 또 송양지인(宋襄之仁)이란 그보다 앞선 전국(戰國) 시대 얘긴데, 송(宋)나라의 양공(襄公)이 이웃 초나라와 싸울 때 괜히 실속 없이 인(仁)을 내세우다 망하고 만 일을 두고 생겨난 말이야. 적이 강을 다 건너기 전에 공격하자는 말을 듣고도 군자는 남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북을 울리지 않는 법이라는 둥 폼 잡고 머뭇대다가 결국 싸움에 지고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는 거지.”
“아, 그 얘긴 나도 들은 적이 있어. 하긴, 구보 너 같이 철학합네 하는 치들은 그 양공이라는 작자랑 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호호… 현실감 없이 구는 게 꼭 닮았잖아.”
“어라, 그렇담, Y 너도 축구가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이거냐? 타인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 되어야 하고?”
“얘 좀 봐. 그렇게 갖다 붙일 일은 아니야. 내가 언제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 그랬니? 축구는 전쟁은 아니지만 어차피 승부를 가려야 하는 게임이잖아. 지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목표인 거고. 지는 사람 처지가 안쓰러우면 아예 그런 게임을 하질 말아야지.”
“Y야, 내 말은 승부에 집착하는 정도가 지나치다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게임 외적인 원인이 있다는 거고. 게임이라면 서로 이겼다 졌다 해야 재미가 있고, 또 그래야 서로 기술이나 재주도 향상되고 그런 거잖아. 그런데 월드컵 축구는 진짜 국가 대항 싸움처럼 되어 버렸어. 그러다 보니 막상 게임의 재미보다는 승부가 우선이 됐다는 거야. 네 말대로 이게 그냥 축구 경기에 그치질 않고 때로는 여러 사람이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니까. 프랑스 같은 경우를 좀 봐. 축구 지고 그 후유증이 사회 갈등으로까지 번진다잖아.”
“그건 거꾸로 보면 축구 같은 스포츠가 사회 통합의 역할을 한다는 뜻 아닐까.”
“그렇긴 하지만, Y야, 너도 알다시피 그런 통합은 미봉적이고 조작적인 게 되기 쉽다구. 축구가 대한민국을 하나 되게 하는 것 같지만, 그게 정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묻어버리기도 하잖아. 이명박이나 정몽준은 우리가 억지로라도 다시 4강까지 올라가서 지난 지방 선거의 패배 같은 걸 덮어버리길 원할 거야. 광고나 이벤트로 한 몫 챙기는 작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23일 새벽 나이지리아전을 응원하는 서울의 인파)
“구보야, 그렇게 말하면서 넌 왜 축구중계는 꼬박꼬박 챙겨 보냐? 너 같이 생각할라치면 우리 팀이 일치감치 탈락하길 바라야 맞는 거 아냐?”
“글쎄 말이야. 사실, 나도 우리가 계속 이겼으면 좋겠어. 비록 실력으론 어렵겠지만, 운이라도 따라 주면 좋겠어. 왜냐구? 그거야 나도 우리 사회의 일원이라서 그렇겠지. 스포츠라는 게 공동체를 직접적으로 표현해 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 특히 축구는 말이야. 축구공과 공동체, 이 둘 사이엔 어떤 연관이 있는 모양이야. 그러고 보면 공동체라는 게 같은 방향에서 공을 쫓는 어떤 경계의 내부를 뜻하는 것일지도 몰라. 그 경계 안에서는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사태를 벗어나게 되는 그런 내부 말이지. 축구 경기에서 이기면 다들 기뻐하잖아. 그런데 문제는 그 경계에는 언제나 밖이 있다는 거야. 그래서 그 밖과의 관계에서는 타인의 불행과 나의 행복이라는 대립쌍이 여전히 작동한다는 거지.”
“얘, 옛말에 걱정이 반찬이면 상발이 무너진다고 했어. 구보야, 지금 네가 꼭 그 꼴 같애. 축구라는 게 이기면 좋고, 지면 그만이고, 뭐 그런 것 아니니.”
Y의 표정을 보니 더 이상 이야기한다는 건 어려운 일 같았다. 구보씨는 아쉽지만 그만 입을 닫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우리에겐 경쟁과 승부는 숙명과 같은 것인가. 이 세상에서 경계 없는 송무백열(松茂柏悅)*의 꿈을 꾼다는 건 정녕 부질없는 짓인가.
*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측백나무가 기뻐한다는 뜻.
문성원(부산대, 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