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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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재유 (건국대 강사)
대학 시간 강사 제도 발생과 재생산의 구조적 원인
?대한민국 건국 초에 대학강사와 교수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1949년의「교육법」제73조에(서) 교원은 ‘학생을 직접 지도?교육하는 자’였고, 제75조에(서) ‘대학 교원으로 총?학장, 교수, 부교수, 강사, 조교를 둔다’고 되어 있어 강사는 교원이자 교육공무원에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통성 없이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이 비판적 지식인의 언로를 통제할 수 있는 ‘절대반지’를 손에 쥐자 대학강사의 지위는 급락하였다.
1962년, 박정희 정권은 「국?공립대학및전문대학강사료지급규정」을 만들어 그 제3조2항에서 ‘시간강사료는 시간강의를 담당한 자에게 실지로 강의한 시간 수에 의하여 지급한다’는 시간당 강의료 지급 근거를 설치하였다. 1963년에는 「교육공무원법」제27조를 손질하여 교육공무원에 드는 강사의 범위는 예전대로 두었지만 총?학장이 임면하는 강사를 전임강사로 국한시켰다. 10월 유신이 단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2년 12월 16일에는 「교육공무원법」의 교육공무원 정의에 전임강사란 단서를 달아버렸다.
마침내 1977년 12월 31일, 「교육법」 제75조에서 ‘교원에 포함되었던 강사를 전임강사로 바꾸어 버려 강사들의 교원지위를 박탈’하였다(홍영경, 2003). 지식인을 통제하려는 최고 권력자의 야욕이 오늘날의 시간강사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다. 1980년대에 집권했던 전두환?노태우 군부 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고자 대학과 대학생의 수를 대폭 늘렸다. 이 과정에서 전임교원을 별로 충원하지 않아도 대학을 운영할 수 있게 해 주어 오늘날 부실 대학의 초석을 확고히 다져 주었다.
**이상은 2007년 8월 23일 국회 정책 토론회 자료집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문민 정부와 국민의 정부 기간 동안 대학 교육 개혁이 화두로 제기되며 무수한 개혁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새로 들어온 참여 정부 또한 또 다른 대학 교육 개혁을 시행했다. 그러나 겉모양만 바꾸면서 기존의 방식 그대로 시행되거나 근본적인 사항을 고치지 않은 채, 대학 개혁 정책이 시행될 때 그것은 또 다른 교육 ‘개악’이 될 뿐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대학 부문에서는 대학 강사 및 비정규 교수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교육 개혁은 고사하고, 대학 교육의 정상화도 가능하지 않다.
오늘날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는 크게 몇 가지 문제로 이야기될 수 있다. 먼저, 대학 강사와 비정규직 교수들이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담당한 지가 오래되었지만, 강의 여건이 거의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가 비정규직 교수의 임금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도 힘들만큼 열악하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교수의 한 달 임금은 평균 80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규직 교수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정도의 차이가 나는 수준이다.
사실상, 정규직 교수와 강사와 비정규직 교수는 동일한 자격을 가지고 동일한 노동을 하지만, 사회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교수 사이의 차이는 극심하다. 예를 들면, 정규직 교수(전임 교수)는 금융 기관의 신용도가 A등급이며, 온갖 사회 보장이 되어 있고, 안정적인 연구와 교육이 가능하다.
그러나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비전임 교수)는 금융기관의 신용은 無이며, 온갖 사회 보장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으며(기본적인 4대 보험만이라도 적용해 달라는 것이 비정규직 교수들의 바람이다), 안정적인 연구와 교육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비정규직 교수들이 전임 교수를 지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무리를 해서라도 교수가 되고자 하고, 채용 비리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비리와 같은 부당함이 당연시되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도 사회의 부당함과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이 정의가 숨쉬는 곳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세 번째는 비정규직 교수의 신분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비정규직 교수는 ‘교원 노동자로서의 법적 신분’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 7조에 따르면 시간 강사를 단지 “교육 과정의 운영상 필요한 자”로서 일용 잡급직의 한 형태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4대 사회 보장 보험 적용 대상에서도 빠져 있다.
헌법에서 교원들의 지위에 대해 법률로 정하도록 한 것은 교원들의 신분이 안정되어야 보다 좋은 교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지위를 전혀 부여하지 않는 것은 대학 교육을 방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대학 교수들에게 ‘교원 근로자로서의 법적 지위’를 하루 빨리 부여해야 한다.
네 번째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이다. 즉 학생들의 학습권이 엄청나게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 교육의 절반 이상(평균치:53% 정도)을 담당하고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이 자신의 생존 문제에 얽매이게 될 때, 학생들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됨으로써 학생들의 의문을 제때 풀어주지 못하여,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상당히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대학 교육의 한 주체이면서도 능동적으로 대학 교육에 참여하지 못하고 강의만 할 뿐, 교육 과정을 설계하고 입안하는 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학생 지도와 상담을 사실상 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학 교육을 담당하는 한 사람으로서 상당히 가슴 아픈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섯 번째는 신분상의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이 연구와 교육에 집중하는 것을 힘들게 하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교육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대학 교육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회의 모토라고 할 수 있는 ‘경쟁력 강화’에 위배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교육 개방이 이루어지면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뜻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은 ‘한국비정규직교수 노동조합’을 만들어 힘을 모으고 있다. 한국비정규직대학교수노동조합(이하 비정규직교수노조)은 1인 시위 및 집회, 정규직 교수 단체와 연대투쟁, 국회 토론회 참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 언론매체와 인터뷰, 기고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7만 대학강사들이 대학교육의 절반 이상을 맡아 실질적으로 교원의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이를 인정받지 못한 채 온갖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실태를 적극적으로 알려 나갔다).
이와 함께 강사의 법적 교원 지위 부여 및 강사의 처우개선 대책을 해당 정부부처에 끈질기게 요구함으로써 40년 이상 방치된 대학강사의 문제를 그들이 이제는 더 이상 방관하거나 서로 책임을 전가할 수 없도록 여론을 조성하였다.
먼저 강사 문제의 1차적인 해결은 강사들이 자신의 역할과 능력에 걸맞게 법으로 교원근로자임을 보장받는 것이다. 이러한 법적인 보장을 통해서 다음 표와 같이 강사를 비롯한 비정규직 교수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비전임교원 제도 문제의 해결 수준]
다른 한편 학생들의 수업권 강화에 힘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수업권 강화는 강사들과 비정규직 교수들의 노동 조건 개선, 생존과 유기적이고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100명이 넘는 대형 강의실에서의 강의는 거의 일방적인 강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설사 토론식 수업이 이루어져도, 그 수업에 참여하는 인원은 소수의 학생들뿐이기 때문에, 나머지 학생들은 단순히 구경꾼으로만 전락하게 될 수밖에 없다.
수업은 모든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수업 인원 수가 줄어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학생들이 수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며,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수업 시간에 능동적으로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대학이 민주 시민을 양성해 낸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어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학문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대학 본연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곧 강사들과 비정규직의 노동 조건 개선과 생존의 보장을 위한 교원의 법적 지위 쟁취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될 수 있다.
하나의 수업 당 학생 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강좌 수가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이며, 늘어나는 강좌 수만큼의 임금이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임금의 증대는 곧 대학으로 하여금 정규직과 비슷한 임금을 주면서 법정 교원 수에 포함되지 않는 강사를 교원으로 인정하여 한 교수 당 학생 인원 수 비율을 낮춤으로써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원을 더 많이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한편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게끔 하여, 자신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교육자들의 임무이자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곧 대학의 학문의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따라서 연구자와 교육자의 연구 역량을 배가시킬 수 있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대학 본연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며, 이는 동시에 교육자들의 목적이자 권리를 쟁취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각 수강 과목이 어떤 관련성도 없이 개별화되어 있는 것을 각 수강 과목이 보다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게끔 수강 과목들 사이의 교류화(inter-discipline)를 꾀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학생들은 보다 폭넓은 안목을 가지게 되고, 그리하여 보다 많은 논의와 연대의 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대학교의 모든 공간이나 시설들은 학생들의 자치적인 학술 활동에 맞춰지게 될 것이며,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사람을 만나려고 하며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만들어가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그들은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학습의 목록을 만들고, 서로 의견을 교환한 후에 적정한 학습 커리큘럼을 짠다. 그리고 그 커리큘럼에 따라 서로가 서로에게 교육한다. 그리고 그 커리큘럼의 내용을 풍부하고 새롭게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들은 일정 기간 학습하고 교육한 성과물을 다른 사람에게 발표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 비판은 곧 자기 자신들의 삶에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삶의 시야를 넓혀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삶의 경이로움을 배운다.
그들의 학습, 교육의 장은 하나의 과나 단대를 넘어서서 대학 전체 차원으로 넓혀 간다. 그래서 그들은 일 주일 정도 학술 포럼 축제를 벌인다. 그 기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에서 먹고, 자고, 논쟁하고 토론하며 그들의 삶을 즐긴다. 매년마다 학술 포럼의 주제를 정해 모든 학회나 소모임, 동아리들은 그 주제에 맞게 학습하고 교육하여 학술 포럼 축제 때 자신들의 역량을 내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학술 포럼 축제의 실질적인 주체가 되어 연대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될 것이며,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임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학술 포럼 축제를 전국적인 차원으로, 그리고 세계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 나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계화일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비정규직의 권익 옹호와 대학 교육의 민주화,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역사는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쟁취하기 위한 어렵고 힘든 길을 가는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정규직 교수님들의 따뜻한 격려와 연대의 지지를 간곡하게 바란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대체로 정규직 교수님들의 후학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 여러분들의 따뜻한 격려와 힘찬 연대의 지지를 너무나도 간절히 바란다. 학생 여러분들은 대학 교육의 다른 한 주체이자, 앞으로 노동자가 될 소중한 동지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