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의 개념의 현재성 비판을 위해[썩은 뿌리 자르기]

강성국(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는 한국사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권위주의라는 개념이 수사적 표현으로 한국처럼 폭넓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곳도 없을 것 같다. 권위주의라는 묵직한 개념을 학계뿐만 아니라 언론과 대중들도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한국의 특수한 역사에 기인한다. 한국은 독립과 함께 현대적 정치체제(보다 정확하게는 대통령제)를 구성 하게 되었는데, 그 시기는 2차 대전 직후 전지구적 격변기였으며 한국은 체제간 대립의 최전방에 위치한 국가였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부터 시작해서 정적들을 숙청하는 폭력적인 정권 찬탈이 이루어 졌으며 박정희와 전두환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획득했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은 이러한 정치과정들을 통해 약 30년간 독재의 실재를 경험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재의 종식. 민주화. 이와 같은 일련의 역사를 거친 후 권위주의라는 개념은 한국사회에서 널리 쓰이는 개념이 되었다. 물론 그 쓰임의 목적은 비판적이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권위주의라는 표현의 대상이다. 우리는 독재정권에서 경험했던 이미지들, 또는 효율성 위주의 정치과정을 경험할 때 정권을 향해 권위주의적이라고 말한다. 독재의 어렴풋한 기시감(旣視感)에 대한 일종의 강박증적 반응으로 말이다.

김대중과 노무현, 지난 두 정권의 시기에 권위주의라는 말은 정부나 대통령을 향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헌데 2008년 이후 우리는 이명박 정부를 권위주의적 정부라고 한다. 이명박은 유권자들의 투표를 통한 정당한 절차를 거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독재로 규정할 수 있는 어떠한 정치적 행위도 보인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럼 도대체 이명박이 권위주의적이란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수백만 국민이 참여한 촛불정국을 거스른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때문에? 집회 및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 때문에? 밀실적인 협상과정을 거친 FTA(free trade agreement)들 때문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의 물고를 튼 것은 한미 FTA의 추진과정이었고, 한미 FTA가 체결된 것은 노무현 정권 시기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에는 집회와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이 없었던가? 2001년 대우자동차 사태는 경찰의 폭력이 심각했고 따라서 수많은 중상자가 나왔다. 2005년 농민대회에서 역시 폭력적인 진압으로 농민 2명이 사망했다. 그런데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탈권위주의적 정권으로 평가 받으며, 이명박 정권은 권위주의적으로 평가 받는다. 하나의 비극적 아이러니.

오늘 날 민주주의 제도들은 선출된 대표자와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에게 일종의 제한된 독재적 지위를 부여한다. 이 독재적 지위는 다른 말로 민주적 정당성(legitimacy)에 기반 하는 권력, 즉 권위(authority)라고 할 수 있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모든 정권은 이런 권위를 부여받는다. 노무현도 마찬가지였고 이명박도 그렇다. 그리고 위에서 간략하게 예를 든 것과 같이 정책을 추진하며 반대자들에 대한 관리수단으로서 동일하게 폭력을 동원하거나 관료주의적으로 정보를 통제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이 권위주의적이라고 평가 받는 것은 모순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의 근원은 무엇인가? 권위주의란 개념의 비판적 사용을 80년대 후반 한국의 민주화를 경험한 특정 세대와 그 세대에 기반 하는 정치집단들이 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권위주의적 정권은 단순히 정적(政敵)을 가리킨다. 그들은 정적들을 너무 쉽게 그렇게 호명하는데, 그럼으로써 그 정적에게는 너무 쉽게 권위주의의 온갖 폭력적, 또는 비민주주의적 이미지들이 덧 씌워진다. 또한 그럼으로써 자신들에게는 너무도 쉽게 반권위주의(anti-authoritarianism)의 투사적 이미지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들이 “권위주의적인” 그들의 적을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하기에는, 위에서 드러나다시피 그들의 적과 자신들의 공통점이 너무 많다.

권위주의는 정치적 권위의 소유주체를 평이하게 비판하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다. 권위주의는 권위의 발생과 그 권위를 몰이성적으로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인식하는 태도, 그리고 그에 기반 하는 사회적 행위에 대한 비판적 개념이다. 즉 비판적 개념으로서 권위주의의 대상은 권력 주체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 대중 현상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오히려 무게 중심이 쏠리는 것은 권력 주체가 아닌 사회 현상으로서 권위주의 일 것이다.

과거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와 아도르노(T. W. Adorno)가 분석한 권위주의의 전형은 파시즘(fascism)으로 귀결되는 권위와 카리스마에 대한 대중들이 보였던 사회심리적 일체화 경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을 따른다면 한국에서 권위주의 개념을 전용하는 소위 민주화 세대라는 특정 세대와 정치집단은 오히려 권위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들은 김대중과 노무현이라는 민주화의 상징에게 상식 이상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개념이 그들에게 전유되는 이상 권위주의 개념의 그 비판적 본질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비판적 개념으로서 권위주의 개념을 부활시키는 것은 권위주의의 현재성을 재설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권위주의는 과거의 전형을 보이지 않는다. 또한 권위주의 현상을 경험한 사회에서는 그것이 또 다시 재현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만무하다. 그렇다면 권위주의는 경험으로서 극복되는, 통과 의례적 성격을 지닌 어떤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이제 권위주의는 보다 은폐된 현상으로 존재하며 개인 내면에 내재된다. 부르주아 국가와 법체계는 항상 역사 속에서 경험된 가시적 폐해를 은폐시키고 내재화하는 방식으로 기만적인 자기정화(self purification)과정을 반복해 왔다. 역사적으로 권위주의는 항상 자본주의 사회, 또한 각각의 해당 사회의 특수한 욕망에 기생했다. 권위주의의 현재성을 재설정 하는 것의 시작은 이 사회의 욕망, 즉 우리의 욕망을 보다 깊게 관찰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혜화, 동』-‘여성적’인 영화에 대한 단상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김 수 현(서울시립대학교 박사과정)

몇 년 전에 나는 하이메 로살레스(Jaime Rosales) 감독의 <고독의 편린>과 훌리오 메뎀(Julio Medem) 감독의 <혼란스런 아나>를 약간의 시간간격을 두고 보게 되었는데, 이 두 영화가 여성을 다루는 서로 다른 방식이 흥미로웠다.

두 영화는 다루는 소재나 주제에서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에서도 차이가 났다. 특히, 나는 두 영화 중 어떤 것이 좀더 ‘여성적인’ 감수성에 맞는 표현형식일까에 대해 생각했었다. <혼란스런 아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어떤 불편함이 남았다. 반면, <고독의 편린>은 영화 속 그녀들의 삶에 공감하게 되면서 나의 마음 속에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듯했다. 거칠게 말하면 영화의 진행 과정에서 <혼란스런 아나>는 관객을 몰입하게 하고 <고독의 편린>은 관조적인 시선으로 인물들의 삶을 지켜보게 만든다. <혼란스런 아나>가 ‘역사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조금은 추상적인 여성성을 보여준다면 <고독의 편린>은 ‘지금 여기’에서의 여성의 삶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혼란스런 아나>에서 여성은 ‘신비로운 존재’이거나 ‘성적 대상’이다. <고독의 편린>에서 여성은 힘겹게 삶을 꾸려가지만, 정작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잘 찾지 못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여성이다.

<고독의 편린>에서 여성들은 서로 소통하지도 못하며 서로를 위로하지도 않는다. 인물들의 대화는 허공을 맴돌며 그들 각자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이야기한다. 인물들의 표정 변화도 극적이거나 급격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덤덤하거나 편안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그녀들의 고독에 공감하게 된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텅 빈 공간과 사물들이 인물들의 고독을 더 차갑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현란함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인물들의 고독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일견 딱딱해 보이고 덤덤해 보이며 때론 무표정하기까지 한 인물들의 표정 이면의 감정을 관객이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다.

<혼란스런 아나>에서 여성은 무의식의 깊은 심연과도 같은 존재이다. 또한 죽음의 고통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존재다. 주인공인 아나는 모든 여성을 대신해 ‘고통으로서의 여성의 역사’와 만난다. 그런데 <혼란스런 아나>와 함께 한 심연으로의 여행은 사실 감독의 여성에 대한 사고를 따라가는 것과도 같다. 아나의 무의식 여행에 동참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 다음에 감독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여성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여성이 처한 억압에 대한 비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혼란스런 아나>는 감독을 비롯한 남성이 생각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반복하는 듯 보였다.

이 두 영화가 특별히 여성 영화의 표현방식에 대해 나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영화를 볼 때, 감독들이 어떤 방식으로 여성이나 성을 묘사하는지에 대해 눈길이 가게 된다. 그렇지만 약간의 불편함을 뒤로 한 채 영화전체의 구조나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중점에 두고 영화를 보게 된다. 또한 영화의 이미지나 그 이미지들의 배치 및 표현방식이 얼나마 ‘영화적’인가를 두고 더 많은 생각을 하곤 한다. 여성인 감독이 여성을 소재나 주제로 다루면서 여성문제의 현실을 잘 진단하고 보여준다면 ‘좋은’ 여성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어 보인다. 오히려 나는 영화의 표현방식과 감독이 인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여성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여성적’이라 생각하는 영화에서는 여성을 대하는 담담하고 관조적인 시선 가운데 어떤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영화 속 그녀들이 삶에서 마주하는 이러저러한 사건을 겪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조금씩 치유하고 극복해가는 모습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혜화, 동>이 보여주는 ‘여성적인 것’

여성영화에 대한 이런 개인적인 고민이 있던 차에, 지난 3월에 본 민용근 감독의 <혜화, 동>은 다루는 소재와 주제, 그리고 표현방식이 내가 평소에 생각해 왔던 ‘여성적’인 영화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아 반가웠다. 영화는 한 여성의 마음 속 상처를 관조적이고 담담한 시선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감정의 변화들을 보여준다. 또한 그 과정은 인물에게는 상처와 마주하여 치유하는 과정인데, 관객에게는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혜화, 동>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영화는 혜화와 그녀의 마음 속의 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주목하게 된 문제의식은 아이의 죽음과 그것을 둘러싼 보살핌으로서의 ‘모성성’이다. 가족을 둘러싼 해체와 파괴의 문제, 가족을 구성하는 일에 대한 문제의식도 암시적으로 드러나 있다. 몇몇 평자들은 이 영화에 대해 영화의 소재나 주제가 진부한 데 비해 영화의 화법이 흥미롭다고도 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도 한 여성의 삶과 그녀의 내면의 감정의 변화들을 영화가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1> 영화의 표현형식과 관찰하는 시선

혜화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버려짐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우리의 주변에서 살고 있을 법한 여성이다. 유기견을 돌보며 사는 애견미용사인 스물 세 살의 혜화에게 5년 전에 자신을 떠났던 한수가 찾아와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다. 이 때부터 그녀는 5년전 과거와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고등학생이던 혜화와 한수는 서로 사귀었고 혜화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혜화는 학교를 그만두고 네일아트를 배우면서 둘이 함께 하는 미래를 준비한다. 혜화의 어머니는 혜화를 잘 보살피려 하고 그녀를 데리고 한수의 집을 방문한다. 그런데, 한수의 어머니는 한수의 장래를 걱정하며 혜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혜화는 혼자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는 몸이 약해서 태어나자마자 죽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한수는 그 당시 혜화의 어머니와 자신의 어머니가 함께 작성했던 입양통지서를 들고 와서 혜화에게 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후 영화는 이 아이를 둘러싸고 미스테리한 플롯으로 전개된다. 혜화의 현재 삶에 과거의 기억들이 침투해 들어오면서 묻혀진 상처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혜화를 향한 한수의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 보여진다. 묻혔던 상처를 꺼내보는 혜화는 마치 고였던 감정이 흐르듯 혼란스런 감정의 변화들을 겪게 된다.

영화의 미스테리한 플롯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탈장된 개와 그들의 아이인데, 탈장된 개와 아이는 혜화의 ‘마음 속의 아이’를 상징한다. 이들이 과거 속 혜화의 집에서 사라진 그 강아지인지, 진짜 혜화의 아이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감독은 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실제로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혜화의 마음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사실, 혜화와 한수의 아이를 둘러싼 미스테리는 한수의 건강하지 못한 마음 상태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그는 혜화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를 통해 다가가고자 한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혜화와 한수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입양통지서에 적힌 주소에서 한수가 본 아이는 다른 아이였음이 밝혀진다. 한수는 자신이 찾아갔던 집에서 그 아이의 부모들에게 사실을 전해들었어도 믿지 않는다. 결국은 혜화가 임신했던 당시에 태어난 자신의 조카(나연)가 자신들의 아이인 것처럼 혜화를 속이게 된다. 한수가 의도치 않게 꾸민 조금은 엉뚱한 일로 인해 혜화는 그 아이를 진짜 자신의 아이라 믿게 된다. 그리고 혜화의 집에서 세 사람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혜화는 아이를 부모들에게 보내기 전에 씻겨주고 대화를 하면서 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아이에게 하듯 아이와 작별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영화 속에서 아이와 탈장된 개와 함께 중요한 이미지는 폐허가 된 집터이다. 영화 초반에 혜화는 탈장된 한 유기견을 따라 폐허가 된 집터로 가게 된다. 영화 속에서 이 집터는 혜화와 한수가 자주 마주치게 되는 공간이며, 마치 잃어버린 그들의 아이와도 같은 유기견의 흔적을 끝없이 찾게 되는 곳이다. 폐허가 된 집터는 두 사람의 단절된 관계와 해체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또 한 편으로는 두 사람의 상처받은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소재이거나 주제일 법한 이 영화의 이야기가 갖는 가장 큰 미덕은 감독이 신적인 화자가 되어 혜화의 마음 속을 설명하고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섣불리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은 주변에서 보게 되는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고 궁금증을 품게 될 때,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게 된다고 말했다. 영화의 미스테리적인 구성이나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들의 연결 방식은 이런 식으로 혜화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가 말을 아끼고 담담하면서도 건강한 캐릭터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그녀의 아픔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2> 아이, 모성성 그리고 관계를 맺어가는 법

영화를 보다보면 특별히 혜화라는 인물의 건강하고 강인한 면모가 돋보인다.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지닌 실제 여배우만큼이나 혜화라는 인물도 맑고 깨끗해 보인다. 어떤 관객은 혜화라는 인물이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관용하는 어떻게 보면 성인과도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분명 그런 측면이 있지만, 나는 혜화의 강인한 면모는 그녀가 특별히 타자에 대한 감수성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녀의 강인함은 처음부터 영화에서 설정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상처를 마주하고 그것을 치유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 생각한다.

혜화는 자신이 일하는 동물병원 원장의 아들(현웅)을 거의 3년 동안 돌봐왔다. 여섯 살인 이 아이를 향한 혜화의 시선은 흡사 자신의 잃어버린 아이라도 돌보듯 사랑스런 눈길이다. 혜화는 현웅이 잠들때까지 기다리다가 자신의 집으로 간다. 현웅은 시시때때로 혜화의 가슴을 만지기도 하며, 때로 혜화는 잠든 현웅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도록 놔두기도 한다. 또한 현웅이 ‘엄마’라고 불러도 되냐고 할 때,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한편, 혜화는 유기견을 구조하는 일을 하는데, 입양되지 못한 유기견을 그녀의 집으로 데려와 키우고 있다. 그녀의 집에는 조금은 병이 든 것도 같은 유기견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혜화가 이렇듯 버려짐에 대한 감정에 민감하고 그만큼 또 보살핌에 대해 민감한 까닭은 그녀가 한 번 버려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지금의 어머니에 의해 길러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혜화를 냉대하지 않고 따뜻하게 잘 길러줬다. 혜화가 아이를 가졌을 때도 어머니는 혜화를 탓하지 않고 자신이 잘 도와주겠다고 말하였다.

혜화가 지닌 이런 면모를 보면서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과 ‘모성성’이란 말을 떠올렸다. 레비나스는 주체에 대한 책임을 넘어서 고통받는 타자, 헐벗고 굶주리는 타자를 위해 나를 내어주고 책임을 다하는 타자의 윤리학을 강조한다. 고아나 과부, 굶주린 사람 등 비참한 타인의 얼굴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상처’를 받고 타인의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그런데 이러한 타인의 얼굴과의 마주침에 의한 고통의 경험이 나를 새로운 존재로 만든다고 한다. 그는 주체 안에 있는 이러한 타자성을 ‘내 안에 있는 타자’ 혹은 ‘동일자 안의 타자’ ‘내재 속의 초월’이라고 말한다. 내 안에 들어온 타자가 타자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나를 키워내는 것을 일컬어 ‘모성성’이라 불렀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타자와 모성성 개념이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함의들을 제쳐놓고 생각해 본다면 영화에서 혜화가 보여주는 유기견과 아이, 그리고 한수에 대한 태도를 ‘모성성’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모성성은 타자에 대해 민감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삶이 만들어낸 것이다.

혜화에게서 그녀의 모성성을 길러냈던 타자는 무엇보다도 죽은 아이이다. 덧붙이자면 그녀의 첫 번째 버려짐의 경험과 그런 그녀를 거두고 돌봐준 지금의 어머니가 있다. 또한 그녀가 어머니가 살던 집에서 함께 기르던 개가 낳은 강아지들과의 이별의 경험이다. 한수의 가족에게 외면당한 혜화는 오랫동안 기르던 개 혜수와 혜수가 낳은 강아지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한다. 기어코 가려 하지 않던 혜수를 억지로 새로운 주인에게 넘긴다. 그 때 아빠가 달랐던 꼬리가 노란 강아지는 어딘가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한수의 집에서 거부를 당하고 절망감에 손목을 그으려던 순간에 그 어린 강아지가 집구석에서 나와 그녀의 품에 안긴 일이 있었다.

한편, 영화의 결말에서 혜화와 한수는 폐허가 된 집터에서 갓 태어난 강아지들을 구조하는 일로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아직도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한수에게 혜화는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또 그 때 혜화가 찾아 헤매던 탈장된 그 개가 다시 나타나게 된다. 혜화는 어린 강아지들을 데리고 혼자 집으로 가다가 다시 후진하여 한수를 향해 가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이런 결론을 두고 관객들의 반응이 엇갈렸다고 감독이 전해주었다. 감독은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거나 회복되는 것과 상관없이 아이를 매개로 하지 않고 두 사람이 직접 마주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혜화가 보여준 ‘모성성’은 한수에게도 예외가 아닐 수 없다. 한수는 영화에서 계속해서 비겁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한수는 어머니, 누나와 함께 조금은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아마도 어머니와 누나의 보살핌을 받고, 그만큼 그녀들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면서 자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수는 혜화에게는 유학을 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집에는 가끔 들어오는 등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지난 5년의 시간을 보냈다. 군대를 갔던 것도 가족들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을 정도이다. 다리를 다쳐서 약간 절룩거리는 상태만큼이나 한수는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탈장된 개와 아이를 둘러싼 미스테리가 해결되면서 혜화의 감정도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다. 혜화의 타자에 대한 보살핌의 ‘모성성’을 드러내고 또 한편 키워냈던 이 두 타자와의 만남 이후에 한수라는 또 다른 타자와의 관계를 물음으로 남기고 영화가 끝을 맺는다. 영화는 인물의 삶을 하나하나 지켜보게 하면서 나에게도 그녀의 마음 속에 차근차근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모성성의 문제가 어머니로서의 희생 이전에, 한 사람의 상처와 내면에 관한 것, 즉 삶의 일부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존버거의 『본다는 것의 의미』[청춘의 서재]

신 정 순(홍익대학교 입학사정관)

새로운 날개짓을 위해

청춘의 서재에 어떤 흔적을 남길까 고민하다 문득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라는 옛노래가 떠올라 흥얼거려보았다. 청춘을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노라니 청춘은 정말로 꿈같은 봄날이기만 할까, 아니 오히려 이때가 풋사과마냥 풋풋하고 기운행동하는 시기라 역설적이게도 더 크게 흔들리고 방황하며 아파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아픈 만큼 성숙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이전에는 없었던 어떤 참신한 열매를 창조해낼 수 있기에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청춘을 예찬하며 부러워하는 게 아닐까, 이 노래의 지은이 역시 그래서 청춘을 뭐든지 실현가능한 꿈나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어떨까!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기를 살아가며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할 순 있지만, 대부분의 청춘들은 방황하고 아파할 그래서 이전과 다른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그들만의 특권을 뒤로한 채 무한경쟁 속에서 더 큰 자유와 물질들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한 처절한 날개짓에 몰두하고 있다. 청춘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시기인데도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언젠가 대학에서 <시각의 의미>라는 주제강의를 하며 교재로 활용했던 존버거의 <본다는 것의 의미>를 소개해야겠다고 맘이 들었다. 어쩌면 익숙한 시선(관점)을 전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고민할 수 있는, 그리하여 목적중심의 또는 자본 중심적 인간관계망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기에.

청춘의 의미가 그렇듯 세상만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낳을 수 있다. 본다는 것은 결국 세계를 이해하고 관계 맺는 또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주어진 대로 수동적으로 보지 말고 그것의 제작 의도 및 사회적 의미까지도 간파해내길 원했던 존버거의 <본다는 것의 의미>를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그 결과로 새로운 사고방식(또는 행동방식)을 취할 수 있는 새로운 ‘나’로 거듭나 새로운 의미(문화)까지도 창조해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상호 관계회복을 위한 새로운 응시

미학에 입문한 뒤, 이성적 지혜를 발휘하여 거대문명을 발전시켜온 서구의 역사에 관해 다음과 같은 비판적 시선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시선은 서구 역사가 ‘나(인간, 이성)’ 이외의 다른 모든 것, 이른바 ‘타자(자연, 비이성적인 것 등)’를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대상(사물)화시켜 지배함으로써 가능했다고 비판한다.

존버거 역시 <본다는 것의 의미>에서 이미지를 바라보는 시각의 재검토 과정을 통해 그러한 입장에 동의를 표한다. 그에게 대상(이미지 또는 사태)을 본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빛이 망막을 통해 시신경으로 전달되는 물리?화학적 의미로서의 시각이 아니라, 본다는 행위에 깃들인 사회적 의미를 파헤치는 ‘시각의 재검토’로써 이성 중심의 근대적인 또는 자본주의적인 삶(역사, 문화, 사회)의 의미를 묻고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다. 이 책은 I. 왜 동물을 구경하는가, II. 사진술의 이용, III. 체험된 순간들이라는 세 가지 큰 제목 아래,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이미지를 제작?감상하는 사람의 시선 이면에 깊숙이 감추어진 사회적 의미를 파헤친 총 18편의 글을 담아 낸다. 이로써 <본다는 것의 의미>는 미학에 관한 훌륭한 교양서이자 미디어와 영상론을 다루는 기초 교재로써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평을 받게 된다.

그 중 I. 왜 동물을 구경하는가의 내용은 아무런 생각 없이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게 어린 아들 둘의 손을 잡고 동물원을 찾아 부모 역할을 다했노라 자부했던 또 언젠가는 내 어머니가 내게 해주었듯 내 아이들에게도 애완동물을 사주어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겠노라 생각했던 내게 인간과 동물(자연)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존버거에 따르면, 동물원에서의 동물구경, 애완동물, 동물장난감 등은 우리가 생각하듯 동물을 반려자로 생각하는 인간의 친자연적인 태도 또는 동물에 대한 사랑의 의미라기보다 동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구체적으로 인간의 언어능력(상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근거로 동물을 단지 객체(대상 또는 기계)로만 바라보게 되었음을 뜻한다.

“동물은 이제 애완동물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에 흡수되거나, 구경거리에 흡수되어 언제나 관찰되는 대상에 머물고 만다.”

그는 말한다. 동물원은 박물관처럼 지식을 넓히고 일반인들을 계도하기 위해 만든 전형적인 소비자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근대 이전까지 동물과 인간이 인근에서 서로 독립된 삶을 유지해오며 평행자적 관계를 이루어오던 상황(만남)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일반인들을 위한 동물원은 일상생활에서 동물들이 사라져버리는 시기가 시작되면서 존재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동물을 만나고, 관찰하고, 구경하기 위해 찾아가는 동물원은, 사실 그러한 만남의 불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경계가 되는 표시이다. 오늘날의 동물원들은 인간이 존재해온 것만큼이나 오래된 하나의 관계에 대한 묘비명인 것이다.”

이런 설명에 동심을 위한 때로는 끈끈한 가족애를 확인하는 동물원으로의 즐거운 가족 나들이를 뭐 그렇게까지 삐딱하게 바라봐야 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동물구경의 사회적 의미를 파헤치는 것이 단순히 인간과 동물(자연)의 관계 규명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간의 관계까지도 예시해주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존버거는 동물에 대한 접근방식이 곧 인간에 대한 접근방식을 예시한다는 우려를 나타내며 따라서 특히 산업?정보사회에서 제작된(특히 폭력성을 배가시키는 전쟁 관련된) 사진을 볼 때는 더더욱 단순 관찰자적 시각에서 벗어나 그 이미지(사진)에 들어간 인간의 욕망까지도 읽어내 새로운 맥락(의미)을 재창조해낼 수 있어야한다고 II. 사진술의 이용 장에서 역설한다.

한편 근(현)대사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근대사회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많은 현대적인 사상가들 역시 동의하는 바인데, 그런 점에서 존버거를 따라 수행한 시각의 재검토(새로운 응시)는 곧 인간(이성) 중심의 근(현)대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이자, 인간과 동물(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상호간의 관계회복을 위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주체와 객체의 전복 체험 & 새로운 의미(문화) 창조

굳이 현학적인 고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두 번 쯤은 지나치게 이성 중심적인(목적지향적인) 삶을 살다 또는 과도한 자본시장의 논리에 치여 그로부터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많은 현대 사상가들 역시 그 점을 고민해왔고 그 결과로 일종의 ‘되기’를,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몸을, ‘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로 분열된 주체를, ‘음악하는 소크라테스’를 그리고 경악과 놀람을 주는 예술 체험 및 실존적 체험 등을 강조해왔으며, 존버거 역시 <세케르 아흐메드와 숲>라는 글에서 주체와 객체의 전복이 일어나는 실존적(미적) 체험의 순간을 통해 그 단초를 마련한다.

III. 체험된 순간들에 소개된 티벳 화가 세케르 아흐메드의 그림 <숲속의 나무꾼>에는 세 그루의 나무가 있다. 이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이 그림의 원경에 자리잡은 너도밤나무가 뒤로 멀어지면서 동시에 앞에 있는 나무들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왜 그럴까? 화가가 너도밤나무의 잎들을 앞의 나뭇잎만큼이나 크게 그리고, 너도밤나무 줄기에 빛줄기를 쏟아 부어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숲 가장자리와 오른쪽 덤불숲의 기괴한 사선이 만나는 지점에 삼차원 공간을 만들어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이 여전히 2차원인 그림 표면에 머무름으로써 공간적인 모호성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덤불숲을 살짝 가리면(없애면) 너도밤나무가 원경으로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그림은 원근법을 잘못 이해한 화가의, 이른바 일종의 학문적 실수 탓일까 아니면 설득력을 결여한 화가의 미숙함의 결과 탓일까?

존버거는 파리에서 작업하며 쿠르베와 바르비종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가 원근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다고 말하며, 숲속을 걸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해봤을 실제의 실존적 경험과 조화를 이루도록 그리고자 했던 화가의 남다른 세계관 덕이라고 설명한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말한다. 숲은 우리에게 단지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실존의 삶에서 하나의 사건(만남)으로 체험하는 그리고 감상자에게까지 확장되어 주체와 객체의 전복을 체험하게 한다고.

“세케르 아흐메드는 숲을,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하고 있는 사물로, 그리고 그가 파리에서 배웠던 것처럼 그것으로부터의 거리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하나의 존재로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 움직이고 있는 것은 숲이다. 자신의 현재 존재를 가지고 있는 숲은 나무꾼과 반대 방향으로, 즉 우리쪽을 향해 앞으로, 그리고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에게 접근하고, 그에게 도달하며, 그에게까지 확장하는 지속적인 머물기이다.”

글을 마무리하려는 지금, 이젠 굳이 글쓴이가 왜 모호한(양가적인) 세케르 아흐메드의 그림을 원근법에 위배되는 비논리적(비문법적)인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실존주의적인 방식으로 읽어냈는지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다만 창작자의 세계관에 따라 회화의 표현이 달라지듯, 이제 회화를 감상할 때도 새로운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의미(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는 아주 작은 날개짓이라도 시도해보기를 권하며, 아울러 존버거의 말대로 프리미티브 화가들이 서툴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기의 존재 체험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에게 살아있는 감동을 주었듯이, 자신만의 눈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새로운 뭔가를 창조해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나에게도 청춘에게도.

영화로 사유하기 (3) : 쇼트(shot)

글: 이지영(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모든 문제는 언제나 사람들이 쇼트 혹은 쇼트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아는데에 있다”는 파스칼 보니체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번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일단 이 문장의 의미는, 영화에서 모든 중요한 물음은 언제나 쇼트와 관련되며 그렇기 때문에 쇼트(들)을 이해하는 것이 영화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쇼트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카메라의 움직임, 쇼트의 크기, 길이 등을 파악한다는 것인가? 만일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건 누구든 측정하고 관찰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카메라 움직임, 쇼트의 크기와 길이 그리고 앵글 등을 파악하는 것은 영화 이해에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안다고 영화가 쇼트를 다루는 방식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 특정한 움직임과 크기, 길이, 앵글을 가진 쇼트가 특정 영화의 특정 부분에 등장해야 했는지 이유를 알아야 쇼트를 다루는 방식을 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체 ‘쇼트를 다룬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또한 그것이 영화에서 어떤 중요성과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쇼트’가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하고자 한다. 쇼트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당한 개념 규정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쇼트를 다룬다는 말의 의미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쇼트’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우리는 대체로 그것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화와 관련된 모든 곳에서 너무나도 익숙하게 사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개념에 대해 정말 우리는 익숙한만큼 잘 알고 있을까? 영화 이론가, 영화사가, 영화 편집인, 영화 감독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영화학의 기본 단위를 쇼트로 정하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쇼트는 같은 개념도 아니며, 따라서 같은 기본 단위도 아니다. 프랑크 베버의 <영화미학용어사전>에 의하면, 쇼트란 카메라가 작동되는 순간부터 멈추는 순간까지 한 장면이나 사물을 연속적으로 촬영한 것이다. 이 정의는 연속적으로 촬영된 필름의 시간적 길이인 ‘테이크(take)’ 개념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렇게 정의내릴 경우 ‘미디엄 쇼트’, ‘롱 쇼트’, ‘클로즈 쇼트’ 등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 된다. 이런 구분은 ‘하나의 쇼트는 주요한 등장인물들이 같은 프레임화와 각도하에서 카메라와의 거리에 따라 기록된 짧은 장면’이라는 <라루스 영화사전>에 제시된 공간적 정의로서의 쇼트 개념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일단 두 개의 개념 정의만 비교해 봐도 쇼트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정의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 두 가지 정의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적용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두 가지 개념 정의를 잘 결합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대답부터 하자면 ‘아니다’이다. 두 가지 개념 정의를 결합하면, ‘등장인물들이 같은 프레임화와 각도, 그리고 동일한 카메라와의 거리를 유지한 채 연속적으로 촬영된 필름 단편’ 정도가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쇼트인가? 물론 이 정의에 부합되는 쇼트들도 있다. 하지만 이에 부합되지 않는 수많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보자. 대체로 사람의 얼굴만 화면에 포착되었을 경우 클로즈 쇼트라고 부른다. 하지만 고다르의 영화 <그녀의 삶을 살다 Vivre sa Vie>의 한 장면처럼 얼굴이 아주 작게 화면의 하단에만 등장하고 화면의 다른 부분은 텅 비어 있다면 이 쇼트를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혹은 책상 위의 유리잔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하여 카메라가 끊김없이 이동을 하여 미디엄 쇼트, 롱 쇼트 크기로 각기 다른 대상들을 포착할 경우, 이를 무슨 쇼트라고 부를 것인가. 이런 사태에 대해 영화 이론가 앙드레 바쟁은 ‘쁠랑세깡스(plan-sequence, sequence shot)’라고 불렀고, 이에 대해 장 미트리는 시간적 개념과 공간적 개념을 뒤섞은 말도 안되는 개념이라며 비판했던 사례 역시 쇼트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수많은 사례들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몇몇 사례들만으로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오던 쇼트에 대한 개념 규정들이 타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쇼트에 대한 시공간적 개념 규정들을 조합하는 것 역시 충분한 개념 규정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영화에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명명하기 곤란한 쇼트들이 빈번히 나타난다. 또한 새로운 방식의 쇼트의 등장이 새로운 영화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이러한 사건들이 영화의 역사에서 비정상적 상황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대체 쇼트 개념은 무어란 말인가. 어쩌면 고정된 의미로 쇼트를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임무 mission impossible’는 아니었을까. 혹은 쇼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잘못 제기된 물음은 아니었을까.

쇼트 개념 정의에 대해 이렇게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쇼트를 촬영상의 기술적인 요소들만을 가지고 정의하고자 했기 때문일 수 있다. 물론 쇼트란 카메라가 그 앞에 있는 대상들을 촬영한 필름 단편임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쇼트는 단순히 카메라를 통해 만들어진 특정한 크기와 길이를 가진 필름 단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제시되는 영화 전체의 부분들로서의 쇼트이다. 영화를 촬영된 단편들의 집합의 측면에서 접근할 것인지 아니면 영화를 어떤 흐름을 가지는 하나의 전체로 접근할 것인지에 따라, 쇼트 개념의 이해에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들뢰즈는 움직이는 이미지들로 관객에게 주어진 영화 전체라는 관점에서 쇼트에 접근한다. 아무리 정적인 영화라 하더라도 움직이지 않는 영화는 없다. 대상의 커다란 움직임이나 카메라의 움직임이 없다 하더라도 아주 미세한 눈빛의 떨림이나 미묘한 빛의 움직임이라도 있다. 다시 말해 영화는 관객에게 운동으로서의 이미지, 즉 ‘운동-이미지’를 준다. 이 ‘운동-이미지’라는 개념은 베르그손의 철학을 바탕으로 들뢰즈가 제안한 개념이다. 운동-이미지 개념 자체를 모두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에서 쇼트를 정의하기 위해 사용된 맥락에서의 이 개념의 의미는 베르그손과 들뢰즈의 철학에 대한 선지식이 없더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무엇인가가 운동한다는 것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 정도의 지속을 함축하는 것이다. 즉 운동한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고, 모두가 알다시피 영화는 특정한 길이의 시간을 전제하고 있다. 그것이 런닝타임이든 아니면 디제시스적 이야기의 시간이든 혹은 그것과 함께 호흡하는 관객의 시간이든 아니면 시간 자체에 대한 사유이든간에 말이다. 그래서 운동은 이러한 시간의 한 부분이지만, 이 부분은 시간의 흐름에서 무 자르듯 잘라내어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인위적으로는 나누어질 수도 없고 굳이 나눈다면 그 본성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성격을 가진 부분이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음악의 제일 좋아하는 부분을 컷팅하여 핸드폰 벨소리로 지정했던 경험을 떠올려보자. 처음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좋아하는 음악이 울리니까 좋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지겨워지고 듣기 싫어졌던 경험은 아마 누구나 해봤을 것 같다. 분명 좋아했던 음악인데 왜일까. 우리가 어떤 음악의 어떤 부분을 좋아했던 이유는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앞뒤 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부분이 마음에 충격과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운동과 지속하는 전체와의 관계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음악에서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의 차이와 변화를 표현함으로써 의미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운동-이미지란 지속하는 전체의 어떤 변화를 표현하며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지속하는 전체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쇼트를 운동-이미지라고 말한다. 운동-이미지로서의 쇼트는 데쿠파주(d?coupage: ‘오려내기’라는 의미의 용어로서, 시나리오를 분석하여 촬영대본으로 옮기는 과정을 의미한다. 영화 전체의 시나리오가 전제된 상태에서 쇼트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를지시하는 것으로서,, 프레이밍뿐만 아니라 한 쇼트의 지속 시간, 미장센 등이 포함된 개념이다. 그러므로 데쿠파주에 따라 각 쇼트가 구성되고 촬영된다. 이런 맥락에서 데쿠파주는 단순한 커팅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에 의해 한정된 것으로서, ‘닫힌 체계에서 집합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 사이에서 세워지는 운동 규정’이다. 운동은 대상들 사이의 상대적인 이동 운동이지만 동시에 이 운동은 지속하는 전체의 절대적 변화를 표현한다. 이 두 측면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쇼트는 지속하는 ‘전체의 움직이는 단면(coupe mobile d’un tout)’으로서 전체의 변화를 표현하는데, 이 변화는 집합의 부분들 사이의 위치변경과 같은 상대적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쇼트 안에서의 대상들의 위치변화를 통해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운동은 영화 전체의 질적 변화의 흐름을 드러내어 표현해 주어야 한다. 만일 어떤 쇼트가 이러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 만들어진 쓸데없는 쇼트이고, 편집에서 삭제되어야 할 쇼트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쇼트는 프레임(닫힌 집합)과 몽타주(열린 전체)를 매개하는 것이라는 정의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쇼트는 이러한 추상적 정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측면을 끊임없이 오가는 운동을 통해서 자신의 구체적인 의미를 발견한다. 쇼트는 집합을 구성하는 대상들에 따라 지속을 하부 지속으로 나누면서 동시에 이러한 하부 지속들을 하나의 지속 안으로 재통합한다.

그런데 집합의 차원과 전체 지속의 차원을 끊임없이 오가면서 부분들을 전체의 지속에로 결합시키는 운동의 역할을 하는 것은 ‘의식(conscience)’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의식은 우리가 이미지들 중 일부분을 지각할 때 개입되고 또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곁에 수없이 펼쳐진 이미지들 중 우리는 부분만을 지각한다. 지각에서 작동되고 있는 선택과 배제는 나의 필요나 관심 혹은 기억 등 주관적인 요소의 개입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관적 요소의 개입은 단순히 부과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미지들 중 일부분을 선택할 때 나의 지각에 의해 형성된 어떤 절단면이 형성되며, 그렇게 선택되어 베어내어지는 지각된 물질의 면이 물질적 우주 전체에서 분리되는 바로 그 순간 지각하는 의식도 발생한다.(여기에서 절단면이 쁠랑plan, 즉 쇼트이다. 프랑스어에서 쁠랑은 영어의 shot, plan, plain 등으로 번역되며, 그림에서 전경, 중경, 후경을 구분해서 말할 때의 경(景)에 해당된다.) 물질에 내재적으로 함축되어 있던 의식은 지각의 순간에 현실화되어 나타나며, 그 의식은 나의 몸을 꼭지점으로 둥글게 말려 들어가며 우리 의식의 내면을 형성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물질 역시 우주 전체의 지속에 약하게나마 참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물질에는 의식이 내재적으로 함축되어 있는데, 특정한 방식으로 지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물질의 흐름 중 일부를 나의 몸을 중심으로 하는 범위로 한정하며 나를 중심으로 휘말려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나의 지속과 대상의 지속이 만나 특정한 지속의 흐름이 형성되며, 특정한 리듬을 가진 지각된 물질 세계의 부분이 바로 쁠랑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쁠랑이란 나의 의식의 지속과 대상의 지속의 만남에서 생성되는 특정한 지속의 리듬이고 그로부터 의식이 출현하는 것이다. 이 의식은 전체의 지속과 부분으로서의 쁠랑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나눔과 통합의 역할을 한다. 이 부분, 즉 의식으로서의 쁠랑(쇼트)의 의미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나와 세계가 만나는 지점으로 말이다.

들뢰즈는 영화에서 이러한 나눔과 통합의 운동을 하는 의식이란 감독도 주인공도 아닌 카메라라고 말한다. 감독이 아닌 카메라가 영화적 의식이라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사람이 카메라를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지각과 카메라의 지각은 다르다. 들뢰즈에 의하면, 인간의 자연적 지각에서는 시선의 정지, 정박, 고정된 점 또는 분리된 시점 등이 개입하지만, 카메라를 통한 영화의 지각은 정지들마저도 통합하는 오로지 즉자적인 진동일 뿐인 단 하나의 운동으로 연속적으로 작동한다. 인간의 지각이 나의 몸을 중심으로 만곡된 거의 순간적인 쁠랑들의 집합인데 비해, 영화의 지각은 지속적인 중심점의 재설정으로 인하여 연속적인 재중심화가 이루어지며 이는 탈중심화에 이르게 된다. 결국 감독이 미리 계산하여 쇼트를 구성한다 하더라도, 인간과 카메라의 지각 중심의 차이로 인해 카메라를 통해 포착된 쇼트는 주관적 구성물의 범위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시각적 무의식’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보다 쉬울 것이다. 인간의 시각에서는 마치 무의식의 영역처럼 신체적 한계, 감정,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 억압되어 보이지 않던 시각적 무의식의 영역이 카메라를 통해서는 드러난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들뢰즈의 영화적 지각이 인간의 지각과 다르다는 점이 좀 더 이해될 것이다.

카메라를 중심으로 데쿠파주된 움직이는 쇼트는 마치 의식처럼 영화 전체의 지속을 하부 지속으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영화 전체로 재통합시키는 운동을 통해 영화 전체의 변화를 부분 속에서 표현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들은 영화 전체와 공명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이해는 쇼트가 무엇인지의 문제 제기에 대한 대답을 가능하게 해준다. 영화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대상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개별 영화들마다 다른 방식의 쇼트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전체와 공명하며 대상들의 리듬을 포착해내는 쇼트가 영화의 분석단위로 등장할 때, 우리는 어떤 기준에 따라 쇼트를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인가. 들뢰즈는 ‘운동의 통일성’이 바로 쇼트를 규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말한다. 쇼트의 통일성은 자신이 포함하고 있는 다양체에 의거하여 변이하지만, 동시에 그 상관적 다양체의 통일성이기도 하다. 결국 물리적으로 커트된 필름 단편 혹은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 등과 같은 기술적인 기준들은 더 이상 유효한 것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들뢰즈에 의하면 쇼트에 대한 기술적 개념 규정을 벗어나는 모든 쇼트들까지도 우리가 쇼트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운동의 통일성 때문이며, 그는 운동의 통일성을 갖추고 있는 네 가지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첫째, 각도나 시점의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카메라가 하나의 연속적 운동을 하는 경우이다. 여기에서는 카메라의 연속적 운동이 쇼트의 통일성을 보장해주는 경우를 의미한다. 둘째, 물리적으로는 구분된다 하더라도 쇼트들의 연결이 갖는 속성에 의해 쇼트들이 완벽한 통일성을 가질 수 있다. 물리적으로는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통일적인 운동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 경우 여러 개의 쇼트로 나누어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유명한 예로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에서 카메라가 집의 담을 넘어 지붕의 천창으로 진행하다가 마치 창문을 뚫고 실내의 여자에게 다가가는 경우 두 개의 필름 단편은 하나의 완벽히 통일된 운동을 보여준다. 셋째, 시야심도(profondeur de champ)를 가진 쁠랑-세캉스의 경우이다. 이 경우는 그저 하나의 쇼트로 여겨질 경우도 있으나, 들뢰즈와 보니체르는 물리적인 쇼트들의 연결만이 몽타주가 아니라 한 화면 내에서 면들의 중첩이 깊이로 포개어져 있는 경우 역시 쇼트들의 연결로 이해하고 있다. 잘라 붙인 쇼트들의 수평적인 연결이 아니라, 한 화면 내에 수직적으로 쇼트들이 중첩되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공간의 깊이감이 깊게 나타나 있다고 이 중첩된 면들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속의 가느다란 실에 의해 전경-중경-후경이 운동의 통일성으로 연결되었을 경우 하나의 쇼트로 파악할 수 있다. <시민 케인>에 많이 등장하는 심도 깊은 쇼트들이 그 예이다. ‘화면영역의 깊이는 세계로 열려진 지평선이 아니라 쇼트들의 배열’이라는 보니체르의 언급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넷째, 평면적인 쁠랑-세캉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는 모든 공간적인 쇼트들이 여러 프레이밍을 통과하는 재화면잡기를 통해 구성되는 다양체로서, 이 경우 쇼트의 통일성은 완전한 평면성으로 나타난다. 마치 흐르는 듯 매끄러운 유형의 운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들뢰즈는 이렇게 네 가지 유형의 ‘운동의 통일성’을 제시하고 있으나, 이 목록은 결코 완결된 목록이 아니다. 운동의 통일성만 제시해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유형의 쇼트들을 추가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경우에서 쇼트란 운동의 통일성의 차원에서 고찰되고 있다는 점이다. 쇼트의 통일성은 단지 물리적으로 커트되지 않았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물리적으로 나누어진 쇼트들의 연결로 이루어진 경우도 운동의 통일성이 있을 경우에는 하나의 쇼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몽타주는 쇼트들을 잘라서 이어붙인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시야심도에 대한 설명에서 언급했듯이 수직적으로 화면 영역 안에 중첩되어 제시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쇼트와 몽타주는 실천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면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개념으로서 이러한 쇼트와 몽타주에는 이미 프레임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레임-쇼트-몽타주는 모두 지속하는 전체의 변화를 표현하는 운동 이미지의 두 경향성과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이 세 개념을 기술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그저 추상적인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 구체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구분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쇼트가 구체적인 의미를 가진 영화 미학적 단위로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다양체로서의 운동 이미지가 부분 및 전체와 맺는 관계 그리고 이 다양체가 가지는 운동의 통일성이라 할 수 있다.

쇼트를 운동의 통일성의 관점에서 파악하게 되면, 서명과도 같은 특정한 운동의 스타일을 통해 작품이나 작가를 분석해야 한다는 들뢰즈의 주장이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쇼트의 운동은 전체와 부분 사이를 오가며 분할과 통합을 행하는 영화적 의식이므로 쇼트를 분석하게 되면 전체가 부분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영화를 그러한 방식으로 분석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단위로서의 쇼트는 단순히 기술적인 것일 수 없다. 영화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미학적 단위로서의 쇼트는 전체의 변화를 표현하는 운동의 관점에서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운동의 통일성에 따라 쇼트를 규정하는 것은 영화 분석을 위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운동의 통일성이라는 구체적인 기준을 통해 재정의된 쇼트 개념은 영화 분석의 중요한 기본 단위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쇼트란 영화가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대상을 어떠한 흐름을 가진 것으로 파악했는지를 포착한 방식이기도 하다. 결국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사유하고 있는지, 그 사유의 궤적을 이해하게 해 준다. 특히나 다른 시각 예술들이 성취해 낼 수 없었던 운동의 흐름과 운동의 단편들을 통해, 카메라-의식이 그것이 속해있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쇼트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은 쇼트야말로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면서 동시에 영화적 특수성을 통한 사유방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가끔 영화를 보다가 마주치는 마음에 드는 장면들을 핸드폰이나 노트북 바탕화면에 깔기 위해, 장면을 정지화면으로 캡춰하는 경우가 있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말 그토록 아름답던 장면의 느낌이 확 죽어버리는 경우들이 있다. 처음엔 내가 잘못된 지점을 캡춰해서 그런걸까 의심하면서 여기저기 다시 캡춰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유가 뭘까.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영화의 경우 당연히 움직임과 정지는 너무 다르니까 그렇겠지라고 이해가 되지만, 실은 내가 캡춰하려 했던 영화들은 빠른 속도감은 커녕 나뭇잎만 흔들리거나 움직이는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 상당히 정적인 영화들이었다. 영화를 보다가 어떤 장면이 너무 좋다고 느낀 것은 단순히 훌륭한 미장센 때문만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어떤 대상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그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총체적으로 감동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영화를 통해 특정한 시간 속에서 어떤 대상과 같이 호흡하고, 움직이고,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쇼트는 바로 그러한 대상의 흐름을 절단해서 우리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정지화면으로는 그 움직임과 시간의 느낌들을 결코 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옆의 사진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단편 영화 <엉클분미께 보내는 편지 A Letter to Uncle Boonmee>의 한 장면이다. 너무나도 멋진 장면이었는데, 정지화면으로 캡춰한 순간 그 호흡, 빛, 공기가 다 사라져버렸다. 이 장면의 호흡은 영화를 직접 봐야지만 알 수 있다. (온라인 상영관 주소 : http://www.animateprojects.org/films/by_date/2009/a_letter_to)

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면 알 수 있듯,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라고 할 수 있는 쇼트는 기술적인 규정들로 한정될 수 없는 변화무쌍한 생명력을 지니며 나타나곤 했다. 새로운 쇼트의 등장에 뒤늦게 이론가들은 쇼트 개념을 무엇이라고 규정해야 할지를 놓고 논쟁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논쟁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쇼트들은 계속해서 출현했다. 이제 보니체르의 “모든 문제는 언제나 사람들이 쇼트 혹은 쇼트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아는데에 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윤곽이 그려진다. 결국 영화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영화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사유했는지를 쇼트들이 다루어진 방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영화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쇼트가 무엇이며 각 영화마다 쇼트가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파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화적 사유의 궤적을 파악하는 것이리라.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한흥수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가슴에서 여전히 펄떡이는 유년의 기억들

두 아이의 아빠로 힘든 사회생활 속에서도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리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흐릅니다. 내가 살던 마을은 작은 농촌 마을 이었습니다. 집 뒤에는 나지막한 청산이 있고, 마을 넘어 드넓은 논이 있고, 논을 지나면 역내라는 맑은 샛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마을에는 7명의 또래 친구들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틈만 나면 놀 것을 찾아 온 마을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여름이면 우리의 즐거움은 단연 물고기 잡이였습니다. 수로에 얼망을 놓고 친구들이 물고기를 몰면 그 조그만 얼망 가득 붕어, 매기, 미꾸라지가 펄떡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물고기를 산에 가지고 가서 어죽을 끓여 먹었습니다. 한 친구는 집에서 몰래 양은솥을 가져오고, 한 친구는 고추장을 가져오고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는 친구는 삭정을 모아 불을 피웠습니다. 아무런 양념을 하지 않아도 어찌나 맛있던지 30년이 훌쩍 넘은 지 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입속에 군침이 흐릅니다.

 

하얀 솜 같은 매 새끼 네 마리를 애완동물로 키우다

나는 유독 동물 키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애완동물을 키우지만 옛날에는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산짐승을 잡아다 집에서 키웠습니다. 기억에 남는 애완동물은 새매였습니다. 지금은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에 포획 및 사육이 금지 되었지만 그때는 그런 법도 없었고, 나 또한 죄가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새매는 높은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있었기 때문에 새끼를 얻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대로 둥지를 한번 쑤시고 어미매가 날아오면 도망가고 또 쑤시기를 반복했더니 하얀 솜 같은 매 새끼 네 마리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나는 네 마리를 집에 가져가 개구리를 잡아다 먹이를 주며 지극정성으로 키웠습니다. 그래서인지 네 마리는 모두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어느 날 학교 갔다 왔는데 두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어머니께 따져 물었더니 동네 아저씨가 참새를 쫓는다고 두 마리를 가져갔다고 했습니다. 급히 매를 찾아 논으로 갔더니 매의 날개는 잘려있고 끈에 묶이어 허수아비 마냥 참새를 쫓고 있었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두 마리를 하늘로 날려 보냈습니다. 새매는 하루는 집으로 돌아오더니 다음 날부터는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마을은 어른들의 보살핌과 교육이 살아있는 공동체였습니다.

이런 유년시절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자연생태계를 몸으로 배우고, 친구들과 싸우면서 사회생활을 배우고, 마을에서 서리하다가 걸려 도둑질의 나쁨을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책에서 말했듯이 지나고 보니 마을은 공동체였습니다. 아이들 끼리 어울려 놀았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어른들의 보살핌과 교육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물놀이 하다 물에 빠지면 주변에 있던 어른들이 구조했고, 서로 싸우면 지나가던 어른들이 꾸중을 했으며 예의범절 또한 마을 어른들의 몫 이었습니다. 이런 마을에서 자란 어린이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발전 시켰습니다.

 

아이들이 무섭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어릴 적 가난했던 시절만 기억하고 모든 가치를 부와 명예로만 생각하고 소중한 아이들에게서 추억을 빼앗고 학원으로만 몰고 있습니다.
저도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아이들이 무섭습니다. 승강기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하지 않고 계단에는 아이들이 피운 양담배가 수북이 쌓여 있고 아파트 뒤편 구석진 곳에는 깨진 술병과 먹다 남은 안주가 너저분하게 놓여 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지친 마음을 손쉽게 풀 수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 삼매경에 빠져 듭니다. 게임 속에서도 여전히 경쟁은 시작됩니다. 지친 마음을 쉬려고 시작했던 게임은 어느새 더욱 심신을 피로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란 똑똑한 아이들이 다스리는 미래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사회일까요, 무한 경쟁 속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사회일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우리아이들에게 이제는 우리 부모에게 선물 받은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돌려주어야 합니다.

 

날개를 잃고 참새를 쫓던 요즘 아이들 같은 매에게

박원순 작가는 마을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사라져 가는 마을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저절로 느껴지는 경남 남해 다랭이 마을, 전북 임실의 치즈마을, 환경 농업공동체를 실현시킨 경북의성의 쌍호공동체마을 등 책에서 소개된 모든 마을들은 의식 있는 몇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고, 모든 마을 사람들의 참여로 인해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마을이 사라지면 우리의 풍요롭고 아름다운 미래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소중한 마을을 지키기 위해 정부에서는 농어촌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되고,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도 마을공동체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강구해야 됩니다. 어른들이 힘을 모아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만들고 아파트 주민끼리 서로 인사하고 나누는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다시 한 번 마을 공동체로 만들어 우리가 잊고 지내던 품앗이 문화를 되살려 서로 돕고 나누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마을을 만들기 위해서는 부모부터 변해야 합니다. 너무 자녀들을 경쟁에 밀어 넣지 말고, 아이들이 마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마을공동체 문화가 정착 되어야 아이들의 범죄도 사라지고 국민들의 행복지수도 높아지는 진정한 선진국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아름답던 유년시절을 추억하며 날개를 잃고 아무런 생각 없이 참새를 쫓던, 요즘 아이들 같은 매에게 다시 한 번 사죄합니다.

????????????????????????????????????????????

*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다섯째 글로서 박원순의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검둥소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3)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3)

이정호(방송대)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2. 아프로디테(1)

우리는 지금까지 에로스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이제 사랑과 관련한 두 번째 위대한 신 아프로디테(Aphrodite)에 대해 살펴보자. 이 여신의 영역은 「일리아스」제5권에(428행 이하)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제우스는 분수도 모르고 지상의 전투에 간여했다가 손에 상처를 입은 귀여운 딸 아프로디테를 위로하며 이렇게 상냥하게 말을 건넨다.

내 딸아 전쟁에 관한 일은 네 소관이 아니란다. 너는

욕정 가득한(himeroenta) erga gamoio나 맡아 보아라, 전쟁에 관한

모든 일은 아레스와 아테네가 염려할 테니.

 

1.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아프로디테가 케스토스 히마스를 걸치고 있다. 폼페이 벽화 AD 1세기경. 나폴리 고고학박물관 소장

여기서 erga gamoio를 “혼사(婚事)”라고 번역할 경우 그것은 본래의 의미를 곡해하는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결혼의 신이 아니다. 보통 gamos(gamoio는 gamos의 소유격)는 ‘결혼’의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전적으로 아프로디테 여신의 영역 즉 “성적 결합(die geschlechtiche Vereinigung)”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딧세이아」의 한 구절은 그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2. 444 이하). 오뒷세우스는 그 부분에서 구혼자(mn?st?r 오뒷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강요한 이타케의 불한당들)들과 음란한 짓을 저지른 부정한 하녀들을 끌고 가 죽음으로 죄값을 치루게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날이 긴 칼로 한 명도 남김없이 그들을 찔러 죽여라. 구혼자들이 하자는 대로 은밀하게 몸을 섞으면서 느꼈던 ‘아프로디테’를 그들이 잊을 때까지” 여기에서 여신의 이름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단적으로 성적인 쾌락이고 그것이야말로 사실 이 여신의 고유한 관심 영역이다. 그리고 “아프로티데의 일”의 의미를 갖는 아프로디시아(aphrodisia)라는 말 역시 오직 양성간의 성적인 결합에 한정하여 쓰이는 말이다.

여신의 세력범위가 매우 명료하게 드러나는 예는 「일리아스」의 또 다른 한 장면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14. 214 이하) 헤라(Hera)는 제우스를 잠자리로 끌어들여 트로이아 성벽 아래에서 벌어지는 전투로부터 제우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으려 하지만 이 결혼의 여신은 사랑을 유혹하는 데는 별로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아프로디테에게 남성을 욕정에 빠트리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를 청하고 아프로디테는 그것을 받아들여 이른바 “아프로디테의 띠”라고 불리우는 케스토스 히마스(kestos himas)를 헤라에게 건네준다. 이러한 끈을 걸친 예로서는, 바빌로니아의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의 도시 키슈(Kish)와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Susa)에서 출토된 기원전 3000년경의 풍요의 여신의 나체상과, 폼페이의 벽화에 정부 아레스(Ares)와 함께 그려진 유명한 아프로디테의 그림이 있다. 이 끈에는 영험이 확실한 마법의 무늬가 자수(刺繡)되어 있었다(kestos라는 형용사는 그것을 가리킨다). “그 안에는 애정(philot?s)과 욕정(himeros) 그리고 아무리 사려 깊은 자일지라도 그 마음을 호리는 사랑의 밀어(oaristus)와 유혹(parphasis)이 깃들어 있었다”(14. 216-7) 헤시오도스도 아프로디테의 몫으로 정해진 명예로 처녀의 밀어(partheniou oaros), 미소(meid?ma), 속임수(exapat?), 달콤한 희열(glykeros terpsis), 애정, 상냥함(meilichios)을 들고 있다.(「신들의 계보」205)

이처럼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비록 중첩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에로스가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침투된 갈망이라면, 아프로디테는 그 갈망의 한 구현으로서 욕정에 불타는 erga gamoio 즉 ‘성적 결합’을 의미한다. 에로스는 플라톤의 「향연(symposion)」에서처럼 정신적인 것에로의 상승을 이끄는 힘으로 승화되기도 하지만, 아프로디테를 사랑의 정신화와 연계 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곧 살펴보겠지만 이 두 개의 신격이 가리키는 영역은 상당부분 실질적으로 중첩이 되어 나타난다. 아프로디테 역시 활동하는 영역으로 보자면 따로 제한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2. 아프로디테(비너스)의 탄생, 퀴프로스섬에 닿은 아프로디테. 보티첼리 1485년, 피렌체 우피치 박물관 소장

많은 신들이 그렇듯이 아프로디테도 처음부터 그리스의 신은 아니었다. 그녀는 소아시아 남쪽 퀴프로스섬의 신으로서 퀴프리스(Kypris)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그녀는 퀴프리스 신앙의 중심지였던 파포스(Paphos)에서 우상으로서 숭배되고 있었고 원추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역사(Historiae)」2·12) 이와 비슷한 예는 페니키아의 화폐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 화폐에 원추형의 모습으로 새겨진 뷔블로스의 아스타르테(Astarte)신 역시 고대 셈족의 풍요와 생식의 여신이었다. 이것 또한 아프로디테가 오리엔트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여겨지는 주된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물론 그리스 원주민들이 대모신(Große Mutter)으로 섬기던 여신들 중 한 명이 아프로디테의 원형이라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그것 또한 아프로디테의 숭배에 오리엔트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의 주요 신들이 여명기 지중해를 둘러싼 여러 지역의 문화들이 융합해서 생긴 결과라는 사실에 충분히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아무튼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개념상 서로 매우 가깝고 중첩되는 부분도 많아서 양자는 차츰 밀접하게 관계를 갖게 되었다. 호메로스는 아프로디테를 제우스와 디오네(Dione)의 딸로 그리고 있지만 헤시오도스는 「신들의 계보」에서 그녀의 탄생을 크로노스가 우라노스를 거세하는 왕위 계승 신화와 연결 짓고 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분리라는 측면에서 그와 유사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힛타이트 신화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신들의 계보」에서 아프로디테는 크로노스에 의해 낫으로 잘려진 우라노스의 생식기가 오랫동안 바다를 떠다니다 불사의 살점 때문에 생긴 거품으로부터 태어났다고 그려지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이 부분에서 아프로디테가 남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를 들어 아프로티테를 ‘남근을 좋아하는 신'(philommedea)이라고도 불렀다. 탄생 후 아프로디테는 퀴프로스섬에 닿아 아리따운 여신의 모습으로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그녀가 땅에 발을 딛자마자 모든 것들의 생식욕구를 지배하는 여신답게 여신의 날씬한 발밑에는 사방으로 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그녀가 태어나서부터 신들의 종족에게 갈 때까지 그녀와 동행하고 있는 신들이 곧 에로스와 애욕의 신 히메로스(Himeros)이다. (「신들의 계보」187-202).

에로스와 아프로디테는 제사에서도 종종 일체화되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북쪽에서 기원전 5세기 때의 신전이 발굴되었는데 신전에 새겨진 증언에 의하면 이 신전은 그들 두 신에게 바쳐진 것이다. 에로스와 아프로디테의 동행은 파르테논 신전의 동쪽 프리즈(Ostfries)에 조각된 신들의 모임에서도 나타난다. 그곳에서는 발랄한 아름다움에 빛나는 알몸 소년의 모습을 한 에로스가 아프로디테의 무릎위에 앉아 있다.

시인들이 뮈케나이의 여러 가지 호사스런 궁정 생활의 특색을 도입하여 올륌포스 신들을 시가로 그려냈을 때, 아프로디테 역시 확고한 지위를 갖는 신으로 그려졌다. 이 여신을 포함해서 올륌포스신들은 인간들처럼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면모도 풍기면서 제멋대로 행동하곤 하지만 그 신들 모두는 자주 상궤를 넘어서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항상 위대하다. 아프로디테는 이다(Ida)산상에서 벌어진 미모경연(Sch?nheitswettstreit)에서 파리스(Paris)가 자신에게 황금 사과를 건네 준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아프로디테는 그 보답으로 파리스에게 헬레네(Hel?ne)를 안겨 주고 그 후로도 줄곧 파리스를 돌봐 주고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제3권에서는 연적사이인 메넬라오스(Menelaos)와 파리스의 결투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만약 아프로디테가 수세에 몰린 파리스를 노골적으로 가로채 짙은 안개로 감싸 향기로 가득 찬 그의 방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면, 그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프로디테의 호의는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양모를 빗질 하는 노파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마치 중매쟁이처럼 향기로운 옷자락을 흔들며 헬레네를 파리스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도록 유혹한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에 담겨진 이 장면은 고뇌에 찬 한 여인의 정신적 깊이를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다. 헬레네는 이미 자신이 남편 메넬라오스와 조국에 저지른 잘못을 알고 그것을 오랫동안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유혹하는 노파가 다름 아닌 아프로디테인 것을 알아차리자 이내 정부인 파리스의 잠자리로 이끌고 가려는 그녀의 제의를 야멸차게 거절한다.

3. 아프로디테와 아레스(비너스와 마르스) 보티첼리 1483, 런던국립미술관 소장

“아프로디테님! 당신이나 그를 위하여 애태우며 지켜주세요. 그러시면 언젠가는 그가 당신을 아내나 노예로 삼을 날이 올 거에요. 아무튼 나는 그리 가서 그의 시중을 들지 않겠어요. 그랬다간 모든 트로이아 여인들이 나를 욕할 거에요. 그렇잖아도 나는 마음이 한없이 괴로워요” 그러자 아프로디테는 크게 격분하여 그녀를 거칠게 몰아 부친다. “나를 자극하지 마라, 무모한 여인이여! 내가 성내는 날에는 너를 버릴 것이며, 지금 내가 너를 격렬하게 사랑하고 있는 그 만큼 너를 미워하게 될 것이고, 너는 트로이아인들과 아카이오이족 양쪽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비참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일리아스」408-417) 올륌포스신들의 전횡은 요컨대 협박(Drohung)에 있다. 이 무서운 협박에 헬레네는 이내 겁을 먹고 어쩔 수 없이 하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트로이아 여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여신의 뒤를 따라 파리스에게 간다. 이 장면에서 만큼 협박이 극적이고도 효과적으로 표현된 예는 그리스 문학 전체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음울하고 무서운 장면 뒤에는 그로테스크하게 펼쳐지는 또 하나의 상황을 보며 환호하는 이오니아 정신이 가득 넘쳐난다. 방안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의도대로 파리스와 헬레네가 호사로운 침대에 누워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고, 밖에서는 메넬라오스가 불구대천의 적인 파리스의 빈 투구만을 손에 쥔 채, 파리스를 찾기 위해 야수처럼 무리들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 다니고 있는 것이다.

「오뒷세이아」 제4권에는 텔레마코스(Telemachos)가 아버지 오뒷세우스를 찾아 가는 길에 스파르타 궁정에 들렀다가 다시 메넬라오스에게 돌아와 그의 아내이자 정숙한 주부로서 살아가고 있는 헬레네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흥미롭게도 그리스 서사시의 등장인물들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것을 언제라도 신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헬레네도 그 장면에서 트로이아에 몰래 잠입한 오뒷세우스를 자기가 숨겨주고 뒷바라지까지 했노라고 변명조 섞인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뒷세우스 그분이 트로이아 사람들을 죽이자….나는 마음이 흐뭇했어요. 내 마음은 벌써 오래전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돌아서 있었고, 아프로디테님이 그 때 나에게 불어넣은 미혹(at?), 그러니까 내 딸과 우리 부부의 침실과 그리고 지혜로나 외모로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내 남편을 버리고, 사랑하는 조국을 뒤로 한 채 저 땅으로 달려가면서 가졌던 그 미혹들을 지금은 후회하고 있거든요”(260-264). 이에 메넬라오스는 언제 헬레네가 파리스와 놀아났던가 싶은 말투로 “부인, 그대가 한 말은 모두 도리에 맞는(kata moiran) 말이오”라고 말하면서 흐뭇해하고 있다.

아프로디테는 그녀 자신이 결코 결혼의 신이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오뒷세이아」의 제8권에서 음유시인 데모도코스(Demodokos)가 노래하고 있는 것은 이 여신의 부정한 행동이다. 그녀는 헤파이스토스(Hephaistos)와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인 헤파이스토스는 쇠를 다루는 기술에서는 따를 자가 없는 대가이지만 신체적으로는 절름발이 장애자였다. 그런데 그가 집을 떠나 있던 어느 날 당당한 체구의 전쟁의 신 아레스가 아프로디테를 찾아와 갖은 선물을 주며 그녀를 유혹하고 마침내 잠자리를 같이 한다. 헬리오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헤파이스토스는 화가 나서 침대 기둥 주위와 위로 도망칠 수 없는 올가미를 거미줄처럼 둘러쳐 놓았고 결국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몰래 잠자리를 같이 하려다 그 올가미에 걸려든다. 이 소식을 들은 헤파이스토스는 노여움으로 가득하여 집으로 돌아와 그 가소로운 광경을 보라고 신들을 모두 불러 모은다. 그러자 부끄러워 집에 남은 여신들을 빼고 많은 신들이 그곳에 몰려와 그 광경을 보고서는 모두 웃음을 금치 못한다. 이 기묘한 장면을 읽어가면서 어떤 독자들은 어떻게 하면 신들의 노래에서 그 추잡함을 거두어 내고 읽을 것인가를 고민할지도 모르지만 이어지는 신들의 대화를 듣고 나면 고민 자체가 금새 무색해진다. 우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아폴론(Apollon)은 남동생인 헤르메스(Hermes)에게 너는 이와 같이 강력한 사슬에 묶여 꼼짝 못한다 하더라도 침대위에서 황금의 아프로디테와 함께 자고 싶으냐고 묻는다. 그러자 헤르메스는 지체 없이 “그랬으면 오죽 좋겠소!”라고 말하면서 “설사 이 보다 3배 이상의 많은 사슬들이 나를 감고있다 해도 그리고 신들과 모든 여신들이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나는 황금의 아프로디테 옆에 눕고 싶소이다”라고 대답한다. (266-342). 그러자 많은 신들이 다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그러한 광경 앞에서 유독 포세이돈만은 웃지 않고 헤파이스토스에게 아레스가 신들 앞에서 합당한 벌금을 낼 것이고 자기가 그것을 보증할테니 아레스를 풀어주도록 간청한다. 결국 헤파이스토스는 포세이돈의 간청을 받아 들여 그들을 풀어주고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는 군말 없이 반대방향으로 헤어져 자기들이 살던 곳, 즉 아레스는 트라키아로, 아프로디테는 그녀의 성역인 퀴프로스섬 파포스로 돌아간다. 퀴프로스섬의 우아의 여신들인 카리테스(Charites)들은 돌아온 아프로디테를 정성껏 목욕 시키고 영생하는 신들의 살갗을 뒤덮고 있는 불멸의 기름(elaion)을 발라주고 휘황찬란하고 사랑스런 옷을 입힌다. 이와 같이 데모도코스의 노래는 신들의 속내는 물론 관능의 신 아프로디테 여신 또한 그 황홀한 광채를 털끝만큼이라도 손상하지 않은 채 온전히 그 자리에 있음을 다시금 드러내면서 끝이 난다.

신화 속에 나타난 신들과 인간들의 이러한 모습들 모두 고대인들의 삶의 반영으로서 신화가 표상하고 있는 뿌리 깊은 인간 본성의 중층적 층위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2. 아프로티데(2) 다음에 계속)

세상과 다른 꿈, 조선 선비 9인의 사상을 읽다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안세환 (보령 책 익는 마을 회원)

 
인터넷 서점 새 책 코너에서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나는 불온한 선비다’라는 제목을 볼 때 당시 사회가 인정해 주지 않았던 다른 길을 걸어갔을 그들을 생각했다. 자기가 좋아서 선택을 했든, 타의에 의해서 선택을 했든 그 누가 뭐라고 하든지 그 길을 걸어갔을 꼿꼿한 선비의 모습을 제목을 통해서 읽을 수 있었다.

5권의 새 책이 택배로 배달이 되는 시간에 마침 우리 ‘보령 책 익는 마을’ 박종택 촌장과 다른 몇 분이 오셔서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었다. 새 책들을 펼쳐 가면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에 마을 분들은 이 책이 마음에 든다고 독후감을 쓰라고 한다. 여러 분들이 이 책을 추천하는 것으로 볼 때 제목에 마음이 들었나 보다.

『나는 불온한 선비다』를 살펴보니 ‘세상과 다른 꿈을 꾼 조선의 사상가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렇다. 이 책에는 세상과는 다른 사상가들의 삶이 녹아져 있다. 그들의 생각이 이 책에 녹아 있다. 이 책에는 모두 아홉 명이나 되는 인물들을 아홉 장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김시습, 서경덕, 박세당, 정제두, 이익, 유수원, 홍대용, 이벽, 최한기가 그들이다. 깊이 있는 내용을 알기 보다는 대강의 삶의 언저리를 살펴보는 수준에서 읽어 볼만한 책이다. 나는 여기에 나오는 아홉 명을 다 설명할 수는 없고 김시습, 이익, 최한기 세 사람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

매월당은 공명과 지조 사이에서 고뇌한 ‘광인’으로 제목을 삼고 있을 만큼 지조의 사람이다. 그에게는 두 평가가 있다. ‘신세 망친 인간’과 ‘지조를 지킨 사람’이라는 평가이다. 전자가 주로 일상적인 삶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후자는 지식을 담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평가이다. 그는 21살 때(1455년)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왕위찬탈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노와 슬픔에 찬 통곡으로 3일간 지내다가 공부하던 책과 원고들을 모두 불태워버린다.

그리고는 유랑의 길로 들어서는데 어떤 때는 분뇨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했다. 그 후 설악산에 있는 오세암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기인의 삶을 산다. 경주 남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를 쓰고, 호를 매월당으로 한다. 마지막 2년은 부여의 무량사에서 지내다가 생을 마쳤다.

그의 기행을 살펴보면 어느 날 한강변을 지나다가 보니 한명회가 압구정 근처 한강변에 정자를 한 채 지어 시 한 수를 걸어 놓은 것을 보게 된다. 그 시구는 이렇다.

靑春扶社稷 청춘부사직 젊어서는 나라를 붙들었고

白首臥江湖 백수와강호늙어서는 강호에 누워있구나

이 시의 작자가 한명회임을 알게 된 김시습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붓을 들어 표현하는데, 扶를 危로, 臥를 汚로 살짝 바꾸어 놓았다.

靑春危社稷 청춘위사직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白首汚江湖 백수오강호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는구나

정말 촌철살인의 위트가 번뜩인다. 당대의 최고의 권력자인 노년의 한명회를 향하여 이처럼 온 세상에 시원함을 줄 수 있는 인물이 김시습이다. 오늘날 이런 기개로 세상을 향하여 화두를 던질 수 있는 이가 누구인가? 권력에 붙어 온갖 영화를 누린 한명회를 보는 김시습의 눈에는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 강호를 더럽히는 인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후에 한명회가 알고는 펄펄 뛰었지만 광인처럼 지내는 김시습을 어쩌지는 못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한명회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세상에서 돌아가는 소리를 듣기는 들었나보다.

매월당은 제법 많은 분량의 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특히 도연명을 좋아해 그에 답하는 화도시(和陶詩)를 66편이나 남겼다. 또한 그의 소설 『금오신화』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여겨지고 있다. 단편소설 정도지만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이라는 5편이 실려 있는데, 앞의 세 편은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이고, 뒤의 두 편은 지옥과 용궁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그 외에도 신유학이라고 하며 주자에 이르러 완성을 본 성리학을 더욱 완성시켰는데, 그의 이기론을 보면 개개의 현상만을 인정하는 이기일원론자 같기도 하고, 보편과 현상을 다 함께 보는 이기이원론자 같기도 하다. 오늘날 학자들 간에 그의 이기론을 두고 아직도 논쟁이 분분하다.

성호 이익(1681-1763)

먼저 영풍(獰風)이란 시를 보자.

野老竅窓疑不出 야로규창의불출 시골 늙은이 밖을 엿볼 뿐 나갈 엄두 못 내고

書生推沈?無言 서생추침묵무언서생들은 자다 일어나 아무런 말이 없다

이 시는 제목 그대로 엄청나게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한밤중에 지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한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하늘에서는 뇌성벽력이 일어 땅을 흔들 정도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하여 염려는 되지만 밖에 나가지 못하고 가만히 방에 있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이익은 관직에 나가는 청운의 꿈이 있었다. 그러나 첫 시험에서 주어진 형식대로 쓰지 않은 것 때문에 2차 시험에 나가지 못했고, 또 친형이자 스승인 이잠이 사형당한 일이다.

그 아픔을 뒤로 하고 재야에 묻혀 농사와 교육에 종사하면서 학문연구에 몸을 바치기로 한다. 시골 초가의 방안에 앉아 그가 접할 수 있는 넓은 세계로 문을 열어 놓고 학문을 한다. 철학, 정치, 사회, 역사, 자연과학 등 모든 학문 분야가 그의 관심에 들어와 있다. 부친이 청나라 사행길에 구입한 많은 서구 관련 책들을 읽고 서구에 열려진 진보적인 유학자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의 주장 중에 6두(?)라는 것이 있다. 여섯 개의 좀이 있다는 말이다. 노비제도, 과거, 문벌중시, 잡기와 무당, (일부의) 승려(승적으로 인해 병역기피가 많았기에), 게으름 등을 말하는데 없어져야 할 사회의 악으로 보고 있다. 성호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입장에서 정책을 펴도록 주장을 한다. 이런 주장들은 대부분 성호사설에 들어 있다. 그에게 늘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있다. 절대적인 존경의 마음을 가진 인재들을 제자로 둘 수 있었던 것이 그것이다. 조선 후기 이름을 떨친 윤동규, 안정복, 신후담, 권철신 등이 그의 제자였고,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게다가 여든셋까지 살았으니 그 시대에 장수한 셈이다.

성호사설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옛 글과 자신의 글을 뒤섞어 책을 만들었기에 후대의 정약용은 올바른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런 중립적 사유가 있기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내용이 실천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익이 제기한 부정부패, 빈부의 문제와 개선책은 오늘날에도 여전한 과제로 남아 있다.

혜강 최한기(1803-1877)

혜강 최한기는 1980년대 이후에 관심과 연구가 부쩍 늘었다. 혜강의 학문은 넓고 깊다. 그가 남긴 1천여 권의 저서는 최남선이 탄복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편이다.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니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그는 개성 출신인데 ‘개성상인’과는 거리가 먼 저술가로 평생을 바쳤다. 그는 비싼 돈을 들여 북경에서 들어온 책들을 샀다.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책을 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을 한다.

‘가령 이 책 중의 사람이 나와 같이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천리라도 불구하고 찾아가야만 할 텐데 지금 나는 아무 수고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그를 만날 수 있다. 책을 구입하는 것이 돈이 많이 들기는 한다지만 식량을 싸가지고 먼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야 훨씬 난 것이 아니겠나.’

성리학자들에게 주공이나 공자는 성역의 존재다. 그들을 비평하는 것은 금기다. 그런데 혜강은 주공이나 공자에 대해서도 반대의 입장에 설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기측체의 서’에서 오직 두 성인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려는 맹점을 지적한다. 나라의 풍속이 다르고 시대가 다른데도 그들 두 사람이 남긴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며 변통할 줄 모른다면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했다. 하기는 최근인 1999년에 김경일 교수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내었다가 유학자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지탄을 받았는가? 하물며 19세기의 사람임에랴!

그의 책 『신기통』과 『추측록』 두 권을 묶어서『기측체의(氣測體義)』라는 이름으로 중국 북경의 서점가인 유리창에서 발간이 되었는데, 이것은 수입일변도인 조선에서 중국으로 수출이 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혜강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한다면 ‘미래에 대해 열려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문호가 닫혀 있었던 시대에 많은 책들을 통하여 배우고, 수많은 책을 저술하면서 시대를 앞서 나갔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자주 쓰는 용어 중에 ‘운화’란 말이 있다. 운화는 운동, 운행, 운영 정도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는 상업에 있어서 나와 타인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상업을 운영하는 것이 곧 이익을 보는 최상의 길이니 그 길을 따르라고 한다. 이런 시각은 비단 상업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 이익이 되어야 하고, 사회에서도 서로 이익이 되는 보편적인 방법이 최상임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무리 하며

저자는 독특한 사상의 길을 걸어갔던 아홉 명을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작은 책에 담다 보니 가볍게 그 분들의 정신보다는 삶을 이해하는 선에서 정리가 되었고, 나 또한 다 다룰 수 없어 세 분만 들어 그야말로 간단하게 정리를 해 보았다. 특히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e시대와 철학> 사이트에 글을 싣는다는데, 철학 쪽보다는 우리 선조들의 삶에 조명을 하게 된 셈이어서 의도에 상충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다. 그럴 줄 알았다면 ‘철학책 중에서 선정할 걸’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번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위안을 삼는다.

여러 사람들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면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대답을 한다. 맞는 말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해의 정도가 문제이다. 저자의 생각과 글 속에 나타나는 의미를 내가 얼마만큼 아느냐가 관건이다.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읽을 때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해의 정도를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리라 여기며 글을 접는다.

????????????????????????????????????????????

*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넷째 글로서 이종호 님의 <나는 불온한 선비다>(위즈덤하우스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시(詩), 삶을 치유하다[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시를 만나다

 

봄바람이라고 하지만 올 봄은 유난히 바람이 많다. 봄바람 속에서 나는 연일 기침을 하고 있다. 쉰 살, 천명을 아는 나이다. 윤동주는 ‘시를 쓰는 것은 슬픈 천명’이라고 노래했다. 나의 천명은 무엇인가? 천명을 알지 못하기에 나는 언제나 희망한다. 지금 내가 희망을 가지고 몰입하고 있는 분야는 시 치유이다.

문학치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 전이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 의술로도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가족과 떨어져 병원에서 매일 울고만 있을 때 외국인 간호사가 가져다 준 책이 <백설공주>였다. 글을 읽을 줄 몰라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그림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지속되는 입원 생활에 지쳐 생기를 잃고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과 갑자기 닥친 몸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기술적인 치료 외의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시 치유를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이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6년 전이다. 석사 과정에서 비평을 공부하고 박사 과정에서 시를 전공하게 되면서 시에는 마음 치유의 힘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고요함속에서 나를 마주 보면 나 자신이 가여워져서 스스로를 어루만지는 체험을 통해 마음속의 슬픔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 마음 한 쪽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시를 통해 누군가와 고통의 경험들을 나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러한 것처럼 그 누군가도 시를 읽거나 쓰면서 고통의 기억들을 마주 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고통을 나누는 그 길에 내가 동행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 공부는 험난했다. 시치유의 뜻을 밝혔을 때, 나의 지도교수는 시는커녕 문학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이 무슨 시치유냐 하며 시를 먼저 공부하든지 정녕 시치유를 공부하고 싶으면 다른 선생을 찾아가라고 했다. 그 날 이후 6년 동안 거의 매일 아침에 출근해서 아무도 없는 어두운 교정을 걸어 내려오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어두운 교정에서 나무를 보며 묻는다. ‘너는 아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걸까?’ 아직까지 나무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밤보다 더 어두운 불확실성만 나를 속박해오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시를 공부한 지 이제 겨우 6년째다. 시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공부를 하며 확실하게 느낀 것은 인문학은 삶과 관련된 학문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은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와 녹아들 때 생명력을 지닌다. 시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여기서 나왔다.

 

몸은 마음이다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동반한다. 삶 속에서 욕망은 서로 충돌하며 갈등하는데, 여기에는 고통이 뒤따른다. 우리는 영원히 살고 싶어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죽음이 예정되어 있으며,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병듦을 피할 수 없고, 영원토록 젊고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지만 늙어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인간의 고통을 보편사적인 관점에서 보고 인간의 의식과 심리가 훼손되었을 때, 즉 살아 있는 경험이 상실되었을 때 고통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몸은 곧 마음이며 신체의 건강이 마음의 건강인 것이다.

몸에도 감정이 있다는 것은 스트레스로 인해 생기는 신체적인 이상 증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의료사의 관점에서 보면, 16, 17세기의 서구에서는 정신 질환을 신체나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한 독소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에서는 심리적인 기능과 생리적인 기능을 구별하지 않고 과도한 감정이 질병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붓다는 집착과 욕망을 버릴 때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룬다고 설파했다. 붓다는 마음이 지닌 치유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몸의 질병을 주술사의 주문에 의지해 극복하고자 했다. 한국 고대 사회의 제의를 살펴보면, 시와 노래를 통하여 삶의 고통을 치유하고자 했다. ‘제주도 영감놀이’나 ‘처용가’에서 놀이를 통하여 희극적으로 병을 치유하고자 한 고대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시가 마음과 몸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의학은 병을 치료한다. 의학에서 고통은 하나의 증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치료가 끝났다고 고통이 끝나는 것은 아니며, 의학이 모든 고통을 치료하지도 못한다. 치료과정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하는 몸의 변형이나 치료의 흔적은 한 사람의 삶을 고통 속으로 끌고 간다.

따라서 이때의 고통은 치료보다 치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치료는 진단하고 의학의 기술로 병을 낫게 하는 것이지만, 치유는 돌보는 것, 안아주는 것에 가까운 개념이다. 즉 의학은 기술로 병을 낫게 하지만 문학은 상처받은 내면을 돌보고 안아줌으로써 상실감과 절망감에서 벗어나게 한다.

고통의 경험은 분명히 개인적이며 다른 어떤 경험으로 대체하여 설명할 수 없으며 타자와 공유할 수 없다. 그래서 같은 고통의 경험일지라도 개인에 따라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 고통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므로 즐거움과 달리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며 세계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준다.

고통도 느끼고 아는 것이므로 의식에 주어진 것이지만 고통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고통에 의해 성찰의 기회를 가지게 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일반적이거나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때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시는 치유 의례이다

 

시의 언어는 관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사유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시를 읽으면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감정의 변화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기억이 작용하여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체험을 떠 올리게 된다. 이 체험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봄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수용하게 되고, 조화로운 자아를 획득할 수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생성해 내고, 일상적인 삶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축적된 기억과 경험을 쓰기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므로 시는 주관성과 내면성의 표현인 것이다. 시를 쓰면서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을 획득할 수 있다. 시를 읽거나 쓰는 행위에서 현재 나의 모습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낸다면, 그것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비추는 빛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를 읽고 쓰는 행위가 자기만의 치유 의례가 되는 것이다.

예술은 고통받는 개인의 모습을 어릿광대로 나타낸다. 루오는 삶의 고통을 어릿광대로 묘사했고, 시인 김춘수는 “내가 비칠할 때 여러분은 날 붙잡아야 해요. 비칠하는 건 언제나 여러분이니까요” “너무 우스워서 한 가지도 우습지가 않아요” 라는 어릿광대의 말을 통해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함에서 오는 고통을 노래했다.

여기에서 어릿광대는 고통 받는 개인의 은유이다. 시는 은유를 통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이미지는 개인의 체험에 의해 다양한 감정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은 억압된 감정은 고통이 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해온 것이다.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계 안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의해 세계와 단절되고 고립되어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인간은 언제나 전체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쪽의 ‘나’와 저쪽의 ‘그’가 ‘있다’라는 것이다. ‘나’와 ‘그’ 사이에는 어떤 거리가 있겠지만, 좀더 용기 있는 사람이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 손의 역할을 시가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닫힌 마음이 세상을 향해 열릴 때 시는 창이 될 것이다.

시치유에 대한 확신을 얻기까지 많은 시간과 용기,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한센인들의 집단촌을 찾아갈 때,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분들을 찾아가고 있는가’라는 데에 생각이 멈추자 고요한 침묵이 나를 엄습했다. 그때 나에게 용기를 준 것이 나의 기억과 경험이었다.

어린 시절 그림으로만 보았던 백설공주는 나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가져다주었고, 상상력은 내가 삶의 어려움을 헤쳐 나올 때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았다. 어른이 되어 만난 시는 내 안에 잠재해 있던 슬픔의 모습들을 비추어주며 홀로 설 수 있게 해 주었다.

희망을 찾아서

 

정기 검진을 나온 보건소와 병원의 관계자들과 함께 마을 회관에 들어섰을 때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는 철저하게 외부인일 뿐이었다. 거의 한 나절을 기다려 진료가 끝났을 때 어렵게 그들 앞에 섰다. 그리고 나의 체면, 자존심 심지어 부끄러움까지 다 버렸다. 모두 무심했다. 잔뜩 경계하고 의심하는 분위기뿐이었다.

‘이미 다른 마을에서 한 번 실패했지 않았는가. 이 마을에서도 나의 진심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들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눈만 보였다.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건만 아무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손으로 적는 대신 기억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발걸음을 돌려 할머니를 만났다. 지금부터 7개월 동안 있었던 할머니와의 만남을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는 매주 2시간씩 얼굴을 맞대거나, 한 이불 밑에 앉아서 할머니는 60년 동안의 삶을 이야기 하고 나는 들었다. 한 사람은 이야기로 다 하지 못하는 마음의 고통을 시로 구술했고, 한 사람은 옆에서 받아 적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있다. 이 분은 무척 절박했지만, 내가 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실패한 이 만남도 이야기 할 것이다. 실패를 통하여 시가 모든 사람들, 모든 고통을 다 나누어 가질 수 없음을 배웠다. 실패의 경험은 시치유 외의 다른 인문학적 치유가 필요함을 알게 해 주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열고 그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나는 시로써 누군가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어루만져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꽃잎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바람에 실려 간다. 내일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렇다면 천명을 알아서 천명에 순응하겠다는 나의 희망 자체가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고 죽는 삶의 과정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고, 내가 경험한 것들을 쌓아 두는 마음과 몸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몸과 마음이 있어 희망이 있고 희망에 의해 삶은 변화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이 고통이고 불완전하다면 어찌 해야 할까.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내적인 성찰을 통해 희망의 씨앗을 품어야 한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항상 의미를 추구하는 지향을 지니는데, 희망의 씨앗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별빛과 같기 때문이다.

 

 

찌질하거나 어리석음에 관한 수고로운 보고서 3-① [4人4色 책읽기]

김종옥 (작가)

지구보다 훨씬 더 큰 행성에서 인간보다 훨씬 더 큰 몸집을 한, 문명을 가진 지적생명체가 있다고 치자. 그들이 지구를 보았을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보일까. 꼬물꼬물 모여 살면서 집도 지었다 허물었다 하고, 먹을 걸 만들어 먹기도 하고, 무기로 서로를 죽이기도 하며 난리일 게다. 그 사는 모습이, 제 집을 짓고 먹이를 모으고 새끼를 낳고 물어뜯고 싸우는 다른 짐승들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일 수도 있겠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제 터전을 열심히 망쳐가면서 살기도 한다는 것이겠다.

 

 

지구에 생명이 탄생한 이래 38억년이 지나오면서 가장 고약한 종은 인간이다. 인간은 그 자신 지구생태계의 일원이면서도 아닌 척 고개를 외로 꼬고 스스로 꼭대기에 선 듯 행동한다. 살아온 역사가 각종의 전쟁과 정복의 저열한 역사였으니 다른 생명체들과의 공생은 둘째치고 제 무리들하고의 공생과 조화조차 못 이루고 살아왔다고 보인다. 그래도 지구상에 나타났던 어떤 특정한 종이 존재하는 평균 기간이 대략 4백만년 정도라고 하니, 그에 비추면 우리 인간종들은 무척이나 성공적으로 살아 온 것이다. 그러니 네 깜냥대로 계속 그렇게 거칠게 살아라, 라고 말하는 외계인이 있다면 그는 이 밉쌀스런 인간 무리를 몰아내고 지구에 이주할 생각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다.

서론이 길어졌다. 반복되는 어리석음에 하릴없이 농을 풀어본 것이다. 물론 정색을 하는 것보다는 농을 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농과 풍자는 적어도 나는 그 속에 속해 있지 않다는 거리감이 담보될 때 나오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반복되는 비극에 일말의 책임도 없는가. 스스로 삶의 터전을 제 손으로 더럽히고 허물어뜨리는 어리석은 일에 눈꼽만큼도 책임이 없는가. 자연이 스스로의 상처를 스스로의 손길과 숨결로 간신히 꿰매어 나가고 있을, 그걸 보면서 감탄하고 박수치고, 그러다 끝내는 그걸 느긋하게 누릴 자격이 내게 있는가. 우리에게 있는가. 태안에 가서 기름묻은 자갈 한 번 닦았으면 그런 자격이 주어지는가. 찜찜한 마음을 숨기며 바닷가 가서 몸을 담가주면, 서해안산 조개 구어 먹었으면 그런 자격이 주어지는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한 이 책 <태안은 살아있다>(동녘 펴냄)를 보면 누구라도 쉽사리 난 가해자가 아니오, 라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우리 모두는 당연하게도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자연은, 고맙게도 피해자인 동시에 스스로 치료사이고.

태안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바닷가로 밀려오던 무겁고 시커먼 기름띠와, 물새떼들마냥 무리지어 앉아서 기름묻은 자갈을 닦아내던 자원봉사자들의 감동 어린 장면만을 기억한다면 제2의 재앙, 제3의 재앙이 이어질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태안은 살아있다>라는 제목의 책

물론 태안은 살아있다. 물론 과거에도 죽은 적이 없으니 지금도 살아있으며 미래에도 살아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2007년에는 한 때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 때는 인간이 태안 앞바다를, 갯벌을 죽인 것처럼 보였다. 시화호가 썩은 내가 진동하는 고인물로 죽어있었듯이 태안도 그렇게 죽어서 더 이상 생명이 깃든 자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3년여가 지난 지금 태안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걸 보면서 자연은 결코 죽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깊어서 죽은 듯이 보일 뿐이며 다만 상처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오히려 죽은 듯 보이는 자연 안에서 정작 죽어버리는 건 사람의 삶이다.

자연이 생명을 품지 않는다면 그 어떤 영악한 생명도 그 안에서 살아낼 수 없다. 태안이 지금도 살아있는 건 사람이 기름을 걷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복구가 그만큼 놀랍도록 성실했기 때문이다. 기름을 걷어낸 수고가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자연은 그 수고보다 훨씬 더 많은 응답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태안은 우리가 ‘살려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처가 아물고 속속들이 완전히 새살이 돋아나려면, 그래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가려면 앞으로도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야 한다니, 그때까지 태안의 바다는 묵묵히 제 살을 치유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태안이 어떻게해서 살아나고 있는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먼 훗날 태안의 자연이 스스로 제 몸으로 보일테니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스스로의 손으로 어떻게 자기 환경을 더럽혔고, 그 바람에 자기 공동체사회가 어떻게 망가졌는가 하는 점이다. 그 과정을 꼼꼼히 복기해보면 어느 시점에서 어느 바둑돌이 잘못 놓였었는지 알 수 있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게 바다도 갯벌도 자기 색을 되찾았다고 하지만, 그 바다와 갯벌이 품고 사는 사람 사회는 깊은 신음을 토해내고 있다. 일종의 자기진술서라고 할 수 있는 이 보고서는 사고의 원인과 진행과정을 치밀하게 짚어가면서, 태안의 일을 ‘태안의 기적’이니 ‘태안을 살려냈다’니 하는 무용담으로 포장하는 게 얼마나 참람한 짓인지 보여준다. 비록 바닷물빛이 돌아오고 갯벌에 윤기가 흐른다고 해도 한 번 튕겨져 나갔던 인간들이 그 생태계의 구성원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는 아직도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 공동체 사회를 회복하기까지는 아직 계산해야 할 복잡한 목록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해서 태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사건으로 살아있기도 한 것이다. 박원순 이사가 ‘희망을 향한 미완의 기록’이라고 소제목을 붙인 이유도 그것이다.

태안의 죽음

2007년 12월 6일 서해바다의 기상악화가 예보된 상황에서 삼성중공업의 해상크레인과 이를 이끄는 2척의 예인선단이 인천에서 경남 거제로 출발했다. 12월 7일 새벽 서해에는 강풍과 파도가 일었고 풍랑주의보도 내려져 있었다. 운항을 강행하던 삼성크레인선단은 새벽 5시경부터 예인력을 잃고 풍랑에 밀리기 시작했다. 근처 대산 지방해양수산청 관제실은 예인선단이 정박 중인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에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고 긴급 호출했으나 예인선단은 응답이 없었다. 드디어 새벽 7시 6분경 삼성크레인은 현대오일뱅크의 기름을 실은 허베이 스피리트호와 충돌했다.

이 충돌로 원유는 사상 최대인 1만 2500여 킬로리터가 바다로 쏟아졌고, 49일간의 해상방제로 회수된 양은 그 3분의 1인 4175킬로리터였다. 시커먼 기름띠는 인근 해안선을 오염시키기 시작하여, 충남 6개 시 군의 11개 읍 면과, 59개 도서지역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부안 군산 영광 무안 신안 등 전라남북도의 연안 해안과 42개 도서를 오염시켰다. 또 김 굴 미역 양식장 820여 곳과, 조피볼락 넙치 등 종묘시설 81곳, 해수욕장 15곳이 황폐화되었다. 양식장과 어장, 숙박업소, 음식점, 유통과 운송 등 주민들의 피해 신고는 10만 건에 달한다.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 IOPC’의 엄격한 보상 기준에 따른 추정액만도 피해액이 6천억 원을 넘어선다.(국내 전문가들은 실제 피해규모를 3조원대로 추정한다.) 태안 일대가 실로 ‘6천억 원짜리 환경 쓰나미에 휩쓸린’(노진철) 것이다.

이 참담한 현실에 맞서 자원봉사자와 태안주민 등 군 관 민이 모두 팔을 걷어부치고 기름을 걷어내고 닦아내기 시작해서 사고 일주일만에 기름띠 오염 해안선의 79%가 응급방제되었다. 겨울을 지나 7개월여 이어진 방제에 자원봉사자 123만 명을 포함해 200여만 명의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참여해 2008년 여름에는 깨끗해진 해수욕장을 볼 수 있게 되는 기적같은 일도 일어났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의 개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사건의 제목만 알고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사건의 시작도, 진행과정도, 결말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는 게 너무 없다. 가해자는 누구이며 피해자는 누구인지, 무엇이 망가졌으며 무엇이 복구되었는지 아는 게 없다. 2010년까지 보상된 것이 고작 54건에 그나마 기대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160억 정도라는 것도,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완전한 회복은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모른다는 것도 잘 모른다.

왜 삼성은 무리한 운항으로 엄청난 사고를 쳐놓고도 법원 판결 뒤로 슬그머니 빠져 있는지, 왜 현대오일뱅크는 이중선체에 들어가는 수십억의 비용을 아끼려고 기름 유출에 취약한 단일선체구조의 선박을 쓰다가 기름을 쏟아놓고도 그 책임에 대해선 왜 아무 말이 없는지, 재난처리를 관장해야 할 정부는 왜 책임 소재 규명과 배상 및 보상에 그토록 소극적이고 무능하며, 왜 제대로 된 재난관리 매뉴얼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지, 그보다 앞서 초동 대응에는 왜 그렇게 허점이 많았는지, 왜 자원봉사자의 활동은 감격에 겨워 열정적으로 보도하던 매스컴이 정작 3명의 주민이 목숨을 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공동체 붕괴의 현실과 그 복구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지, 그 어느 것도 우리는 별로 아는 게 없다. 사고 후 3년도 지난 2010년 2월에 또 한 명의 주민이 자살을 택했을 때도, 그를 쓰러뜨린 절망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게 없다. 아는 게 없다면 당연히 얻어야 할 교훈도 얻지 못할 것이고,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잘못은 언제건 다시 반복될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자연재난에 이어 현재 진행형인 고통스런 사회재난도 모두 일단 잘 기억해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재난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이고자 하는 이 책에는 재난의 원인과 경과, 진단이 모두 여러 각도에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환경의 측면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사회공동체는 어떤 식으로 파열되었는지, 공적 재난관리 체계는 어떻게 허술했는지를 꼼꼼히 살피는 한편, 잘못된 보도로 말미암아 쇼가 되고만 자원봉사자 활동의 명암도 짚어본다. 또 재난관리의 매뉴얼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갈등 상황에는 어떤 해법이 있을지, 어떻게 공동체를 복원 할 지 등이 언급되어 있다. 글을 읽다 보면 허베이 스피리트호가 쏟아낸 것은 1만 2천여 킬로리터의 원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그 양이 증폭되어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총체적 재앙이었음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갈등, 갈등, 갈등

사고 발생부터 태안에는 숱한 갈등이 생겨났다. 모든 단체간, 모든 개인간에 온갖 종류의 갈등이 서로 얽혀서 만들어졌으므로 실로 허베이 스피리트호 사고의 본질은 이 수많은 갈등구조를 파악하는 데서부터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태순 씨와 이재은 씨, 노진철 씨의 보고서는 이 복잡다단한 갈등 양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고원인자이자 가해자인 삼성 등과 법적 공방, 정부의 책임문제, 배상문제 등을 놓고 태안 주민과 삼성, 유조선회사, 중앙정부, 태안군, 아이오피시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으며, 태안 재건 방향을 놓고도 군민들과 태안군, 충남도, 정부 간에 이견이 표출되었다. 또 생계비 배분을 둘러싼 마을과 마을 간의 갈등, 통합 대책위 구성을 둘러싼 수산과 비수산 간의 갈등, 삼성과의 자매결연을 둘러산 갈등 등이 발생했다. 이쯤되면 태안 사람들이 수많은 집단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처럼 들린다.”(박태순)

“방제 방식에 대한 갈등, 사고 원인에 대한 견해 차이, 중대과실 책임, 삼성중공업의 책임 범위에 대한 갈등, 생계비의 지역별 배분을 둘러싼 지방자치단체 간 갈등, 주민 간의 생계비 배분의 형평성을 둘러싼 갈등….. 이밖에도 사고 원인 규명과 관련한 갈등, 피해 조사와 관련한 갈등, 배상액 산정과 관련된 갈등, 피해 주민 간 갈등, 지방자치단체 간의 갈등, 중앙정부와 삼성과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갈등, 지역개발 방식을 둘러싼 갈등, 생태계 복원 방식을 둘러싼 갈등 등이 있다. 또 함께 살아온 주민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깨져나갔고, 이것 때문에 이 지역사회를 뒷받침해오던 공동체 사회의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잃어버린 것이다.”(이재은)

이러한 갈등의 본질은 결국 ‘돈’ 문제였고, 이것을 조정할 능력이 정부에게도, 주민에게도, 물론 사고당사자에게도 없었다는 것이 공동체 붕괴의 위기를 맞은 원인이 되었다. 복잡하고 지난한 심사와 재판과정을 거쳐야 하는 피해보상금 문제도 그렇지만, 정부에서 나오는 생계지원비도 서로 자기 몫을 더 많이 챙기려는 진흙탕 싸움이 되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어차피 국고에서 지원되는 ‘눈먼 돈’인 바에야 내가 못 챙기면 남이 챙길 것이므로 양보고 염치고 차릴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치열한 내 몫 챙기기 싸움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바닥을 보아버린 주민들은 공동체 사회가 무너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이 비극은 ‘주민들 스스로 만든 갈등도 아니었고, 기름 유출 사고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으니’(박태순) 겪지 않아도 될 고통, 보이지 않아도 될 바닥을 보이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허베이 스피리트 사고가 가져온 가장 큰 비극은 아마도 이것인 듯 싶다.

연구자들이 주목하는 곳도 이 대목이다.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그에 기대어 살고 있던 사람의 공동체에도 균열이 갔다. 생태계의 파괴가 사회적 재난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태계의 파괴도, 사회공동체의 균열도 책임은 모두 인간에게 있지만, 길게 보아서 생태계가 복원되면 그에 기댄 인간 공동체도 결국에는 예전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걸 기다리기에는 지금 당장의 상처가 너무 크고 당장의 삶이 너무 절박하다. 보상과 배상 문제, 복구 방향 등이 아직도 명확히 제시되지 않은 상황이라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오히려 앞으로 더 증폭될 우려도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위기에 놓인 마을공동체의 분열을 막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결국 지역을 살려낼 사람은 지역주민들이기 때문이다.’(노진철)

그렇지만 상황이 암담하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태안에서 이미 싹트고 있는 희망을 본 연구자도 있다. 박태순 씨는 ‘다행스러운 것은 갈등의 주체들이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대립과 갈등을 통해 자신과 이웃을 재발견하고, 협력과 상생의 중요성을 스스로 터득해가는 과정을 지켜보기 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태안을 되돌릴 원동력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본 희망대로 태안 사고의 ‘완결판’을 만들 때쯤이면 ‘싹트고 있는 희망’이 결실을 맺을 수도 있을 것인가, 자못 궁금하다.

 

4대강, 구제역, 반복되는 악몽

몇 년 사이에 몇 조에서 몇십 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단위의 돈을 입에 자주 올린다. 허베이 스피리트 재앙이 크게는 5조대에 이르는 피해라고 하더니만, 4대강을 콘크리트로 감싸는 공사비가 십몇 조, 이십몇 조라고 하였다. 작년 겨울부터는 구제역에 들어가는 처리 비용이 몇 조란다. ‘억’도 억 소리 나게 큰 돈인데, ‘조’라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문제는 이 엄청난 돈들이 결국 헛돈이라는 데 있다. 들이지 않아도 되었을 돈이고, 들이지 말아야 할 돈이다. 구제역과 허베이 스피리트 재난에 들어가는 돈은 환경을 망친 대가로 치러야 하는 비용이고, 4대강 사업비는 어이없게도 환경을 망치는 비용이다. 세 경우 다 지금까지 들어간 비용보다 얼마나 더 큰 비용이 단지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던 시점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이 헛돈을 메꾸기 위해 국민들은 얼마나 아까운 땀을 공연한 곳에다 흘려야 하는가.

앞장서서, 혹은 제 책무를 방기해서 크게 망쳐놓고 국민들의 땀을, 성금과 봉사를 요구하는 국가는 대체 어떤 수준의 국가라고 할까. 태안 재난에 관련한 이 중간 보고서는 약 4백여 쪽이다. 이 기막힌 수준의 국가는 4대강과 구제역으로는 또 얼마나 어마어마한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게 될 것인가.

????????????????????????????????????????????

*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세번째 책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안 노진철 외 지음, <태안은 살아있다>(도서출판 동녘 펴냄)으로 김종옥(작가), 김한규(생태해설가), 정한(대학생), 이정미(동녘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아울러 글 사이에 게재된 사진들은 출판사의 협조로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기름유출 사고 이후 3년, 다시 쓰는 태안 리포트 3-② [4人4色 책읽기]

정한 (인천대 윤리교육과 졸업생)

 

2010년 12월 말부터 발생한 구제역 파동 11년 2월 말이 되어서야 잠잠해져 갔다. 그러나, 구제역이 퍼져나가는 건 멎어들었다 해도 구제역을 처리하는 과정에 대한 문제, 재산피해, 피해보상, 앞으로 국민들이 겪어야 할 문제들이 과제로 남았다. 국내에 네발달린 동물들은 죄다 살처분 당했고 남아난 가축들은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으며 그로인해 치솟는 물가와 철철 흘러내리는 세금, 울부짖는 농가, 썩은 내 진동하는 피맺힌 매립지, 현장은 지옥과 같은 살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상황을 과거에도 본 적이 있다. 재난의 발생, 정부의 미적지근한 대응, 대규모의 재난으로 확산, 군까지 동원하여 대응하였으나 대응방침에 대한 문제, 보상에 대한 문제, 언론의 편중된 보도.

과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유사한 사고들 중 가장 큰 충격으로 남았던 것은 07년도에 발생한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고, 태안 기름유출사고가 그것이다. 규모의 문제도 있었으나 200만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몰려간 그 사고는 우리 국민들 속에 잊을 수 없는 사고 중 하나로 기억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태안의 사고는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사고 자체는 잊지 못할 지라도 그것이 아직도 진행형이며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사건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한다.
그러한 의도에 걸맞게 출판된 저서가 있다. ‘태안은 살아있다.’가 바로 그것이다. 희망제작소가 기획하여 출판된 저서는 노진철, 박진섭, 위평량 등 총 11명의 저자들이 쓴 글을 묶어 낸 것으로 태안의 문제를 다각도로 바라보고 있으며, 다양한 사진과 인터뷰 내용으로 현장의 모습을 전달한다. 총 400쪽이 넘어가는 분량으로 책은 다소 두껍지만 그 만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바라본 태안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으며 책의 구성 역시 하나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글을 앞에 두고 환경, 경제, 행정, 언론의 문제 및 태안 군민의 갈등, 삶의 질에 대한 분석까지 세세하게 살펴 태안의 모습을 빠짐없이 전달해 주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저서에도 밝혔듯이 태안 사고와 관련된 언론의 편중된 취향은 많은 국민들이 알고 싶었던 부분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러한 부분들에 대한 의혹과 알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점이 사실이다. 삼성과 현대, 태안 주민들의 실질적인 보상과, 그 규모, 태안은 복구가 된 건지 등 상당히 많은 부분을 언론에서 놓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무관심으로 외면하기 쉽고 안타까운 오해까지 생긴다. 그리고 지금처럼 사람들의 뇌리에는 하나의 해결된 사고로만 기억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3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의 출판은 특별한 의미와 목적을 담는다. 그렇다면 ‘태안은 살아있다.’ 저서는 사람들 기억 속에 침전된 사건을 다시 수면위로 부상시킬 수 있을까.

앞서 말했듯 ‘태안은 살아있다’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쓴 글을 엮어 만든 책이다. 이렇게 각자의 글을 모아 만든다는 것은 혼자서 다 집필하는 것 보다 기간을 줄일 수 있고 또 깊고 확실한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점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문제없이 한 책으로 잘 묶여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무리 뜻 깊고 유익한 책이라도 자신이 꼭 필요한 정보가 아니라면 억지로 책을 읽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책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면 약간이라도 흥미를 느끼게 하거나, 적어도 지루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저서는 유사한 내용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독자를 지치게 한다. 물론 각자 글을 쓰는데 있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고자 하는 전개부분은 사실 유사할 수밖에 없다. 즉, 태안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으며 본론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면 들어가야 한다. 뜬금없는 내용이 튀어나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하나 놓고 봤을 때는 흥미와 집중력을 끌 수 있을지 몰라도 뭉쳐놓고 보니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자의 글을 온전히 싣는 것에 중점을 둔 모양인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두지 않아 아쉽다.

각자의 글을 엮어낸다는 것은 사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저서의 분위기와도 맞지 않은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주제를 각자 전문가의 분야에 맞게 잘 분배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서로 달라서 많은 시간동안 조율되지 않으면 전체적인 흐름을 해칠 수 있다. 특히 같은 분
야를 연구한 이들이 모여서 쓴 글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문제점이 저서 곳곳에서 눈에 띄며 그것이 책을 읽는데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서의 매력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바라본 태안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경제학자는 태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행정학을 연구한 이는 태안 사고에서 무엇을 중점으로 보는지 각 분야의 보고서는 말 그대로 태안의 현 실태를 상세하게 알려줌과 동시에 태안이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방향을 그려낸다. 저서를 다 읽은 독자는 마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앞에 두고 보고를 들으면서 회의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물론 글들 간의 소통은 정말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문제이며 그렇게까지 자세하고 세부적인 내용까지도 독자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도 걸려 마치 각자 자신들이 생각하는 독자들을 따로 상정해 둔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런 자잘한 것들은 제쳐두고 크게 보자면 그러한 구조를 띄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저서 나름의 개성이며 장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고 본다.

구조가 독특하여 장점과 단점을 끌어안고 출판된 저서는 노진철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의 ‘태안, 6천억 원짜리 환경 쓰나미에 흽쓸리다’라는 제목의 글로 시작한다. 글은 마을 주민들의 인터뷰 내용을 실어가며 현장감 있는 접근으로 편안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방식은 단지 첫 글에서만 들어난 것이 아니라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이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를 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마을 주민들의 고통과 분노, 고민과 절망의 감정을 손쉽게 전해 받을 수 있으며 글의 흥미를 끄는 요소로 작용된다. 또한 글은 전에 행복하고 평안했던 태안 주민의 모습과 사고 이후 절망에 휩싸인 마을의 모습을 비교해 보여주면서 태안의 고통을 독자에게 각인시켜 나간다. 그러한 과정은 단순히 근거 없는 추측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수치를 보여주어 좀 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여 객관성을 높힌다.

글은 전반적인 태안의 모습들을 객관성 있는 자료를 통해 여과 없이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어 섬마을 사람들의 고통이나, 태안주민의 자살문제, 피해보상과 관련된 문제 등 언론이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내용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데 독자가 알고자 했던, 혹은 알고 있었어야 하는 문제들을 다뤄 독자를 태
안의 문제로 인도한다. 글의 끝부분에 가서는 태안 곳곳에 달린 현수막을 통해 태안 마을 주민들의 심경변화를 대변하는데 그 현수막의 글귀들이 독자들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태안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이렇게 독특한 방법으로 접근한 시도는 그들의 분노와 억울함,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고마운 감정들까지 직접적으로 보여주어 독자들의 관심과 감정을 이끌어낸다.

글은 흠잡을 데 없는 짜임새로 태안의 전반적인 내용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소개한다. 태안의 사고과정부터 피해보상, 태안주민들의 심정까지, 이 글은 태안 문제에 대한 큰 밑그림을 그려 저서의 기둥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그러나 손댈 곳이 없는 듯한 완전함은 오히려 저서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분명 처음에 강렬한 인상으로 독자의 관심을 붙들고 소개하는데 무리가 없으나 덕분에 뒤에 실린 글들이 퇴색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 글 이후 다음에 이어지는 글들을 읽어나가면서 ‘읽었던 부분인 것 같은데…’, ‘이 내용 앞에서 본 것 같은데…’란 생각을 계속 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첫 글은 태안의 전반적인 밑그림을 그려내는 동시에 그 자체로 이미 책의 내용을 다 읽어버린 듯한 느낌을 들게 만든다. 차라리 이 글을 뒤에다 배치시켜 놨으면 그러한 감각이 덜 느끼게 만들 수는 있겠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글들은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대부분이라 글 자체만으로 질리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에 첫 글에 나오는 것이 또 무리이니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그러한 문제 외에도 독자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할 만한 부분 중 하나인 사고에 대한 법원판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 사고일지에서처럼 이해할 수 없는 선박들의 움직임이나 글에서도 밝혔듯이 왜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판결이 나온 건지, 또 그러한 부분에 대해 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다뤄주지 않고 간략하게 소개만 한 체 넘어간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나라의 사례를 소개해 이 판결이 불합리한 판결이라는 사실을 들어내는 측면은 불만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준다.

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푸른 바다, 검은 재앙 안에 갇히다’ 박진섭 생태지평연구소 부소장의 글이다. 생태지평연구소에 계신 분이신 만큼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태안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기름 유출에 의한 오염과 관련해서 단순히 우리는 ‘몸에 나쁘다’라는 인식만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에 대한 설명을 전문적인 지식과 과거 사례들을 이용해 소개한다. 그러나 이 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오염되지 않았던 태안의 해양생태계를 소개하는데 이것이 단지 거대한 생태계의 보고가 황폐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면 다소 글의 주제를 퇴색시킬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저자는 글을 더 확대시켜 해양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언급한다. 결국 저자는 단순히 태안 생태계 환경오염의 심각성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무너져가는 해안생태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글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뜻 깊고 유익하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태안과 관련된 문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어야지 느닷없는 확장은 독자를 당혹하게 만든다. 이러한 전개를 보이는 글은 이 글뿐만 아니라 저서에 담긴 몇몇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금빛바다를 잃어버린 사람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의 글이다. 저자는 경제학자답게 재산피해규모와 같은 여러 수치들을 다양한 표를 통해 보여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태안의 모습이다. 상당히 독특하게 관점에서 전개하는데 이러한 글들은 보기 드물다. 보통 태안과 같은 문제들은
사회학자나 환경단체에서 주로 글을 써냈기 때문인데 그렇게 때문에 특별한 이 글이 독자에게 참신하게 다가온다. 과연 태안의 경제발전은 가능한가? 앞으로 그들의 지역개발은? 무너져 버린 생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효율적인 피해보상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러한 내용 중 몇몇은 이미 첫 번째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라 겹친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의 글은 넘쳐나는 수치와 분석을 통해 풀어나가는 방식이 신선하다. 단지, 숫자에 질리지 않을 사람들 내에서 말이다. 너무나 많은 숫자와 표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또한 그렇게 세부적으로까지 알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대략적인 규모로 이야기 해도 저서의 의도를 해치지 않았을 것이라 보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각자가 생각한 독자층이 따로 있는 듯 하여 들어난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2장으로 넘어와서 재난관리에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는 주로 행정학을 연구한 이들이 쓴 글이 모여 있는데 2장의 시작은 ‘초기재난관리의 실패’ 이재은 충북대학교 행정학과 교수의 글이다. 경제학을 연구한 저자와 마찬가지로 행정학을 연구한 이의 글 또한 독특한 관점이다. 물론 행정을 중심으로 바라
봤으니 대부분은 재난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했는지가 주로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는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행정학을 연구하는 저자라 그런지 글 자체도 매뉴얼 형식이다. 소제목들이 일종의 체크리스트처럼 되어있는데 그것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대응은 적절한가?’, ‘방제물자, 비축과 관리는 적절했나?’, ‘현장 지휘, 혼란스럽지는 않았나?’, ‘2차 오염가능성은 예상했나?’, ‘자원봉사자 관리는 철저했나?’ 등 이렇게 하나하나 체크해 나가는 방식은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직접적으로 알려줘서 효율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빠짐없이 전달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독특한 이점이 있다. 글 자체도 무척이나 깔끔하고 간결하다.

그러나 행정학자가 쓴 글이라면 가장 관심 있는 부분은 ‘매뉴얼, 과연 현실상황에 적합했는가?’하는 점이겠다. 저자 역시 그러한 매뉴얼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매뉴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소개하는 것 보다 그렇게 매뉴얼이 있는데 왜 대응에서는 그렇게 많은 문제가 발생했는지의 내용이 더 중요하고 핵심이기 때문에 구지 매뉴얼 소개에 그렇게 많은 지면을 소모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잊혀진 씨프린스호’ 이야기가 나오는데 씨프린스호의 사례를 이용하는 것은 좋지만, 단순한 소개로 끝난다. 씨프린스호 사고는 국내에 영향을 준 사고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사례 소개로 마무리 된다면 해외에서 일어난 여러 기름유출 사고를 소개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씨프린스호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우리는 한번 겪은 사고에도 학습하지 못하고 또 큰 사고를 경험했다는 것이 초기 재난관리의 측면에서 구멍을 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곁들여 졌거나 좀 더 명확한 비교분석이 들어갔다면 사례소개가 이처럼 무의미해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뒤에 이어지는 글에서도 씨프린스호를 언급하는데 혹시 내용이 겹치기 때문에 편집자가 의도해서 그 부분만 빼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뜬금없다.

다음은 ‘재난은 있어도 재난보도는 없었다’ 박동균 대구한의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가 쓴 글이다. 경찰행정학을 연구하는 사람의 시각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중점이다. 분명 가해자가 존재하는 사고인데도 불구하고 조용히 묻혀져 의아했던 부분을 풀어준다. 글은 간략한 사고일지의 소개 이후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제일 먼저 ‘가해자’로 분류된 삼성과 현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얌체적인 행동들을 고발하고, 사법당국의 엉뚱했던 수사발표 역시 푹 찌른다. 또한 해경과 검찰의 침묵을 지탄하고 그들을 감시해야 할 언론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전반부의 중립적인 태도와는 조금 달라서 시원스러운 전개가 독특하다. 왜 언론은 미담만을 전했는가. 왜 언론은 그들의 제목에서 가해자를 숨겨버렸나. 왜 분신자살과 같은 사건들의 심층적인 보도는 없었나. 필자가 덧붙여 이야기 하자면, 11년 1월 7일자 기사에서 태안주민들은 인지세 730만원을 내지못해 자살어민 유족들의 소송이 재판에 오르지도 못한 채 끝났고 인지세를 지원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으나 이 요청 역시 기각되었다는 사실이 기사는 있어도 제대로 표면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 태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침전해 들어가고 있다.

다음은 ‘재난관리 매뉴얼’ 양기근 원광대학교 소방행정학과 교수의 글이다.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인 매뉴얼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간 글로, 2장 첫 글의 미비한 부분을 해소시켜 준다. 2장에서는 간단한 소개만 하고 넘어갔던 씨프린스호에 대해서도 제대로 짚고 넘어간다. 저자는 특히 기름유출사고와 관련된 모의훈련을 08년 8월 24일날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훈련이 아무런 소득이 없었는지, 매뉴얼에는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파고들어 가는데, 매뉴얼에 어떤 문제가 있었으며 왜 그러한 문제가 있는 매뉴얼이 유지되고 있었는지, 앞으로 매뉴얼을 수정하고 그에 맞는 훈련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언급한다. 누가 알았겠는가. 기름유출 사고 매뉴얼에 평온한 바다만을 상정하고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생존, 그 이상의 삶에서는 이제 태안주민들에 초점을 맞춘 글들이 이어진다. 그 첫 번째 글은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 소장의 ‘갈등관리 해법을 찾아서’인데 서로 불신의 담을 쌓아가고 있는 태안주민들에게 유익한 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 번째로, 글을 쓰는 목적을 밝힌다 하면서 ‘외부집단과 태안주민의 갈등을 중심으로 서술하지는 않겠다’거나, ‘태안의 상태를 알리는 것에만 있지는 않다’라고만 했지, 정작 무엇을 중점으로 쓰겠다는 지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하다. 희망을 발견 할 수 있기 위해 쓴다는 것만 밝혀서는 무슨 내용이 이어질지 짐작할 수 없다. ‘갈등관리 해법을 통해 희망을 발견 할 수 있기 위해..’라고 썼다면 아주 명확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제목 하나만 써두고 언급하지 않아도 될 부분이기도 했다.

이렇게 애매한 흐름을 보이는 것은 곳곳에서 들어나는데 특히 ‘갈등이 보다 합리적 문제해결의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라던가, ‘태안은 위기상황에서 공정성과 공평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갈등이 스승 역할을 한 것이다.’ 라는 문장은 마치 ‘갈등이 필요했다’라는 의미 같다. 물론 우리가
좀 더 앞으로 내걷는 과정에 있어 갈등은 분명 큰 스승이 되어줄 수 있다. 이러한 것과 유사한 것으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이 말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단, 태안사고는 단순한 갈등이 아니다. 손가락 절단이나 분신시도와 같은 것을 갈등이라 보면서 위와 같은 문장을 사용
하는 것은 그 의미가 순수하다 할지라도 오해할 소지가 있다.

또한, 글의 소제목을 ‘갈등개요-갈등전개-갈등해소-갈등특징’으로 나열했는데, 갈등해소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생계비 분배문제가 갈등해소가 되었거나 갈등해소 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나? 그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단순히 ‘불만이 없다’라는 문장만으로 주장하기에는 민감한 문제이며, 저서의 글들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견이기도 하다. 그 뿐 아니라 생계비 분배문제 이전에 생계비 지연문제 역시 갈등을 제공하여 자살자가 3명이나 나왔는데도 언급이 없다는 부분은 아쉽다. 뿐만 아니라 ‘통합조직구성을 둘러싼 갈등’에서는 분열된 조직이 다시 통합했기 때문에 ‘훨씬 체계적, 수평적, 민주적, 투명하게. 운영될 것이다’는 주장을 하는데 근거 없이 낙관적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태안은 스스로 갈등을 해소해 나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느닷없이 갈등해소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갈등을 해소해 나간다고 보면서도 갈등해소방법이 필요한가? 필요할 수는 있겠으나 다소 설득력이 부족한 구조는 아닌가. 사실 갈등 해소방법은 태안주민과 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글의 핵심이 된 이유는 저자가 꼭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태안의 갈등을 이야기의 시작으로 꺼내 놓은 후 자신이 말하고 싶은 부분, 바로 갈등의 해법을 이야기 하고, 갈등의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 하며 갈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고 이에 대해 적극적인 해결의 의지를 보이면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는 교훈적인 의미를 담고자 하는 바를 엿볼 수 있는데 처음부터 태안 주민들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법들을 이용해 갈등을 접근해 가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해야 설득력이 있지 태안 자체로도 해결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앞뒤가 안맞다.

다음은 ‘파괴된 삶을 복원하라’, 유현정 충북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의 글이다. 이 글은 저서의 부록을 제외한 모든 글을 통틀어서 가장 친근하게 접근한다. 필자가 연구하는 과정을 경험담 형식으로 풀어나가는데 저서의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인터뷰 내용도 이용한다. 저자는 태안주민들의 삶의 질과 만족, 행복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데 문제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다른 저서의 글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하기 때문이지, 역시나 다른 독자층을 대상으로 쓴 것인지, 주민들의 수입을 억대라 소개하는 부분이 있는데 앞의 글들에서 알려준 정보와는 틀리며 마치 태안 주민의 평균적인 소득을 말하는 것 같아 모호하다. 또한 공공근로 수입이 6만이란 이야기도 앞의 내용과는 틀리다. 세부적으로 나눠 설명하지 않고 방제비로 6만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앞의 글에서는 분명 공공근로는 방제작업의 위험성 때문에 배제된 노인들에게 할당된 일이며 3만5천의 적은 수입으로 불만이 가득하다는 글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이러한 모호한 사실전달에는 문제가 있으나 6만의 일당 덕분에 5만에 구했던 주방 도우미를 구할 수 없다는 하소연 등 생활일상의 소개는 놓치고 가기 쉬운 부분이며 태안 주민들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렇게 비록 명확한 사실전달에는 다소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태안주민들의 바로 옆에서 듣는 것과 같은 글의 흐름과 구성은 태안주민들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있어 큰 지표가 되어 준다.

저서의 글들은 각자 저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서로의 통일성을 해치며 글들 간의 소통이 없다는 점은 분명 문제가 있다. 편집자의 재량이 좀 넓어서 몇몇 군데만 수정을 가했더라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지만 그러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큰 줄기는 놓치지 않고 이어진다는 점, 저자의 개성이 잔뜩 살아나 마치 저자가 누군지 안보고도 저자의 분야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독특한 느낌은 이색적이다. 좀 더 아쉬운 부분은 의료적인 분야에도 글이 있어서 태안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부작용에 대한 전문적인 견해가 들어갔으면 하는 면이 있으나 그것은 단지 필자의 개인적인 사소한 바램이다. 이미 저서가 지닌 방대한 정보는 태안주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각하여 우리가 분명히 신경 써야 할 사회적 문제라는 사실을, 태안문제를 다시 사회의 표면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역량이 있다. 저서는 태안의 문제들과 관련해서 비난할 대상을 지목하거나 공격적으로 작성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객관적인 사실의 전달을 그 중점으로 두는데, 이러한 점은 저서의 신뢰도를 높이며 사회의 단결된 힘을 끌어내는 소중한 디딤돌이 되어 줄 것 같다. 이 저서를 시발점으로 앞으로 많은 칼럼이나 기사가 나와 사회적인 이슈가 되어 구제역 파동과 함께 국민이 뭉쳐 해결해 나갈 사회적 문제로 토론의 장에 올라섰으면 한다.

????????????????????????????????????????????

*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세번째 책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안 노진철 외 지음, <태안은 살아있다>(도서출판 동녘 펴냄)으로 김종옥(작가), 김한규(생태해설가), 정한(대학생), 이정미(동녘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아울러 글 사이에 게재된 사진들은 출판사의 협조로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