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번역자 : 김남우 (정암학당)

[연재를 시작하며 :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이 출간된 지 500년이 되었다. 이를 새롭게 번역하여,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현재 권위 있는 라틴어 원문은 1979년 암스테르담에서 편찬된 <에라스무스 전집 opera omnia Desiderii Erasmi Roterodami> 제 4편 제 3책이다. 지금 널리 읽히고 있는 <우신예찬>의 우리말 번역들은 우리 인문학의 서양고전 이해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계문학전집으로 시장을 장악하려는 거대 출판사들의 경쟁 때문에, 편집자들의 침묵 때문에 이런 안타까운 번역들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우신예찬>은 칭송 연설문이다. 연설자는 우신 (愚神)이며 따라서 어리석음의 신 스스로가 자신을 칭송하고 있다. 자화자찬은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그래서 더욱 우신에게 어울린다. <우신예찬>을 이해하는 주요개념어는 ‘어리석은 현명함’이다. 현명하다는 명성을 허울 쓴 어리석음은 허다하다. 이런 것들을 우신은 자신의 업적으로 나열하며 스스로를 칭송한다. 따라서 <우신예찬>은 풍자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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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에 우신이 등장하여 이제부터 자신이 연설을 하겠다고 말한다. 일인칭 ‘나’는 우신을 가리키며 우신은 여성 신이다.)

이제 본론으로 말머리를 돌리겠습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내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어떤 별칭을 덧붙여야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자들’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신이 신자들을 호명하는데 이보다 더 나은 별명이 있겠습니까? 각설하고 내가 어떤 핏줄에서 생겨났는지가 여러분에게나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이에 나는 무사이 여신들의 도움을 받아 이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나의 아비는 카오스도 아니요, 오르쿠스도 아니요1), 사투르누스도 아니요, 이아페토스도 아니요2), 그런 쉬어빠지고 늙수그레한 신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아닙니다. 내 아비는 풍요인데, 물론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가 반대하고, 더 나아가 유피테르도 분노하겠지만, 이분이야말로 바로 인간들과 신들의 아버지입니다. 내 아비가 고개를 끄떡이기만 하면, 예나 지금이나 신성한 것이나 세속적인 것이나 뒤죽박죽 모든 것들이 뒤엉키고 맙니다. 내 아비는 자신의 뜻에 따라 전쟁, 평화, 국가, 의회, 재판, 민회, 결혼, 계약, 동맹, 법률, 예술, 축제, 엄숙, 벌써 숨이 턱까지 차올라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만사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이나 모든 일을 주재합니다. 내 아비의 재물이 없었다면 시인들이 신성을 가졌다고 노래한 수많은 신국 (神國)의 백성들은 고사하고, 좀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선택받은 위대한 신들마저3)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혹은 존재한다손 결단코 찬밥이나 다름없는 형편없는 대접을 받아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누군가 내 아비를 성나게 만든다면, 설령 팔라스일지라도 그에게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내 아비에게 재가를 받은 사람이라면 번개를 던지는 위대한 유피테르의 목에 밧줄을 걸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가문과 혈통에서 태어났음을 자랑으로 여긴다.’4) 그런데 유피테르가 성깔 있고 험상궂은 팔라스를 낳을 때처럼 그렇게 내 아비는 나를 제 머리에서 끄집어내지는 않았는바, 실은 매력적인 만큼 모두들 가운데 제일 명랑한 요정인 ‘청춘’으로부터 나를 얻었습니다. 내 아비는 저 유명한 절름발이 대장장이가 태어날 때처럼 슬픔5) 가운데 그녀와 결합한 것이 아니며, 이보다는 훨씬 더 매력적인 일이었는바, 우리 호메로스의 말마따나 ‘사랑의 동침’ 가운데 결합하였습니다. 풍요가 나를 낳았으되, 여러분은 내 아비를 아리스토파네스의 풍요와 혼동하지 말기 바랍니다. 내 아비는 당시6) 아리스토파네스의 풍요처럼7) 이미 곧 관에 들어갈 만큼 기력은 쇠잔하고 앞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시력마저 미약해진 분이 아니었으며, 아직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건장한 청년으로 열정에 달아올랐답니다. 이는 내 어미 ‘청춘’ 때문이었으나, 물론 신들의 잔치에 참석하여 누구보다 많이 마셨고 어느 것보다 독하게 마신 신주 (神酒) 탓이기도 했습니다.8)

<중간생략 : 우신은 자신의 탄생장소에 관해 언급한다.>

나는 크로노스의 아드님이 염소를 유모로 두었던 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두 명의 아리따운 요정들이 젖 먹여 나를 키웠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바쿠스의 딸 ‘만취’와 판의 딸 ‘무지’였습니다. 이 둘을 여러분은 나를 수행하는 일행들과 하인들 가운데서 볼 수 있습니다. 아랫것들의 이름을 여러분이 알고자 하신다면, 하늘에 맹세코 여러분은 오로지 희랍어만을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쉽게 구분할 수 있는바, 눈썹을 치켜뜨고 있는 아이는 ‘자아도취’입니다. 여기 눈웃음을 지으며 연신 손뼉을 치고 있는 아이를 여러분은 보실 터인데, 이 아이의 이름은 ‘아부’입니다. 여기 꾸벅거리며 반쯤 졸고 있는 아이는 ‘망각’이라고 불립니다. 여기 깍지를 끼고 양쪽 팔꿈치를 괴고 있는 아이는 ‘태만’입니다. 여기 장미꽃으로 다발을 엮어 두르고 온몸 여기저기에 향수를 바른 아이가 ‘환락’입니다. 여기 불안하게 눈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 아이는 ‘경솔’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피부에 윤기가 흐르고 혈색 좋은 몸뚱이를 가진 아이는 ‘음란호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 계집몸종들과 더불어 여러분은 두 명의 머슴들을 보실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광란축제’라고 부르며, 다른 하나를 ‘인사불성’이라고 부릅니다.9) 나는 말하거니와, 이와 같은 하인들의 충실한 도움을 받아 나는 세상만사가 내 명령에 따르도록 만들고 있으며, 심지어 군주들 또한 내게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여러분들은 방금 나를 낳은 부모, 나를 키운 양육자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일행들에 관해 들었습니다. 이제 감히 여신이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것이 아니며 그럴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분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기 바라오니, 내가 얼마나 커다란 이익을 신들뿐만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가져다주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널리 내 신적 역량이 미치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혹자가 분명히 적어놓은 바, 죽을 운명의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야말로 신이라는 증거일진대, 포도주 혹은 식량 또는 유사한 어떤 유용한 것들을 인간들에게 가져다 준 이들을 신들의 의회에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만백성들에게 온갖 것들을 넉넉히 나누어주는 내가, 그런 내가 어찌 모든 신들 가운데 최고신이라는 이름을 얻고 또 그렇게 여김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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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하계의 신이다.

2)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의 아버지다.

3)올륌포스 신들을 의미한다.

4)호메로스, <일리아스> 제 6권 211행.

5)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와 헤라의 정당한 결혼관계로부터 태어난 자식이다. 이에 비해 ‘사랑의 동침’이라는 말은 흔히 정당한 결혼관계 이외의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슬픔’은 정실부인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6)우신의 어미인 ‘청춘 Iuventa’(희랍어로는 Neotes)은 키케로에 따르면 신들의 잔치에서 잔에 술을 따르는 신이다 (키케로, <투스쿨룸의 대화> 제 1권 26, 65). 하여 ‘풍요’와 ‘청춘’은 신들의 잔치에서 서로 만났으며, 여신은 ‘풍요’를 위해 넘치도록 술을 따라 주었을 것이다.

7)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작품 가운데 <부 (富)의 신 Plutos>이 있는데, 희랍어에 비추어 우신의 아비인 ‘풍요’와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

8)이 이야기는 플라톤 <향연>에서 소개된 ‘에로스’의 출생 신화와 닮아 있다. 에로스의 아버지는 ‘풍요의 신’이며, 어머니는 ‘빈곤의 여신’이다. ‘빈곤의 여신’은 신들의 잔치에 구걸하러 왔던 차, 신주 (神酒)에 취해 잠이 든 ‘풍요의 신’과 결합하여 에로스를 낳는다.

9)하인들의 이름에 붙어 있는 희랍어 이름들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자아도취 philautia’, ‘아부 kolakia’, ‘망각 lethe’, ‘태만 misoponia’, ‘환락 hedone’, ‘경솔 anoia’, ‘음란호색 tryphe’, ‘광란축제 komos’, ‘인사불성 negretos hypnos’.

내 마음 속의 ‘아Q’를 보내며 [책 익는 마을 책 읽는 소리]

<보령 책익는 마을> ‘책 읽는 소리’ 연재를 시작하며

박종택 (보령 책익는 마을 촌장)

아큐(阿Q)형!

오늘 날짜로 형에게 이별을 고하고자 편지를 씁니다.

형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던가는 기억이 또렷하지 않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중국 루쉰(魯迅) 선생님의 소개로 정식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은 명확합니다. 그 후로 형과의 우정 어린 만남은 친밀성을 넘어 동반자적 관계를 가지며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다 형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된 것은 ‘책익는 마을’에 이주하게 된 때부터였습니다.

아Q형,

오랜 동반자적 우정을 나누던 내가 갑자기 이별을 고하니, 분하고 괴이함을 넘어서 나의 속내와 ‘보령 책익는 마을’이 어떤 곳인지 궁금할 것입니다. 저도 우리 지역에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발적인 독서 모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들이 모여서 책을 읽다니 별일이다’ 놀랍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습니다.

‘책익는 마을’에 가입하기 전부터 매달 ‘독서토론회’에서 선정된 책을 한 권 더 사서 내미는 보령소방서 강윤규 계장의 권유가 부담스러울 즈음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의 저자 이권우님을 모시고 열린 ‘저자초청토론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회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원진호 내과원장이 시민 누구나 참석가능하다기에 저도 참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독서량이 많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올바른 책읽기가 아니었음을 알고 깜짝 놀랐으며 독서토론이 편견을 타파할 수 있는 시선형성에 좋다는 말씀을 듣고서, 가끔씩 욱하는 성격과 보수적 성향, 술에 취하면 극우로 돌변하는 특이 체질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저자초청토론회’를 참관 했었지만 ‘책익는마을’에 가입을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대학 시절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수업을 빼먹는 장기를 갖고, 단 한 번도 세미나에 참석한 사례가 없었던 역사적 사유로 토론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영업을 하다 보니 사업설명회나 브리핑, 워크숍, 심포지엄, 포럼 등은 나와는 아무런 연관성을 찾지 못하며 살아온 관계로 독서토론에 대하여 막연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자초청토론회’로 잘못 인지하고 참석했던 ‘독서토론회’에서 큰 재미를 찾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성인들의 책읽기는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만 집중하게 되고 기존에 형성된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책 내용을 재단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습니까? 형님의 ‘정신승리법’도 그렇지 않습니까?

‘책익는 마을’에서는 특정 분야에 치우친 개별적 독서를 넘어 서기 위하여 각 모둠 별로 정회원의 순서를 정하고 다음 달 발제자가 자신이 선정한 책을 정회원 모두에게 선물하고 한 달 후에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설정한 의제로 독서토론회를 진행하는 방식이 무척이나 신선했습니다.

즈음하여 제 심신상에도 변화가 왔습니다. 신문구독을 끊고 TV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 어언 15년에, 책을 구매 해 본 것이 10년을 넘어선 나에게 동화책을 읽어 달라는 아이가 생긴 것입니다. 혼자 사는 阿Q형님 생각에 결혼을 미루었는지 나의 처지나 능력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었는지 마흔세 살의 늦은 나이로 2006년 초에 결혼하여 그해 12월에 얻은 아들입니다.

아들에게 나도 하기 싫었던 것을 시키는 아버지가 되지 말고, 독서를 통하여 나 스스로 자아존중감을 갖고 아들을 존중하며 아들과 함께 걷는 아빠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궁벽한 지방 소도시에 살면서 대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공부를 계속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도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을 볼 때 덮어 둘 수 없는 위기감과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내가 지향해야 할 진실한 삶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하여, 또 내가 칠팔십의 나이에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책익는마을’에 전입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익는마을’에 전입해서도 3개월간의 준회원 기간은 물론 정회원이 되고나서도 ‘책익는마을’ 카페에 글 한 번 못 올렸던 것이 나의 타고난 성격이었겠지만 阿Q형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형님과 저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을 겪게 되었고 저에게 첫 발제의 기회가 주어진 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형님과의 전투에 나서기 위하여 10년 만에 책을 주문하였습니다. 토론의 그 날을 기다리며 저는 제가 지니고 있던 무기를 갈고 다듬고 신식 무기 구입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날의 전장에서 멀리 서구에서 저를 도우러 달려온 마키아벨리의 도움으로 소규모의 승전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 전투 이후 저는 희망에 들뜬 마음으로 미숙하기 그지없지만 카페에 글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두 번째 발제의 기회가 주어진 달, 최후 결전을 위하여 형님의 일대기를 다룬 『아Q정전』과 『삼성을 생각한다』 두 권의 책을 연관 지어 각자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저마다의 아Q와 맹렬한 전투를 벌였습니다만 형님을 내 마음의 영지 밖으로 몰아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형님 측의 세력이 확연히 약화 된 것은 형님도 인정할 것입니다. 지난 8월 대천한화콘도에서 펼쳐진 ‘보령인문학페스티벌’에서 강사로 모신 12분의 교수님과 방명록에 성함 남겨 주신 180명의 우군 덕택에 1박 2일의 전투에서 아Q형님의 힘은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물론 형님의 힘이 많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 힘이 강성하다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힘에 강력히 저항하고 형님을 극복하기 위하여 작년 12월 ‘보령 책익는 마을’ 촌장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카페에 글을 남기기 시작한지 불과 1년 밖에 되지 않았고 운영위원도 아닌 저에게 촌장의 자리를 마련해준 속사정이야 지금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내 마음속에 웅크린 악마들과 비루한 노예들, 패배감에 물든 전사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취임을 하였습니다. 지난 7년 동안 ‘보령 책익는 마을’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열성을 다해 온 황선만 전 촌장, 운영위원을 비롯한 마을 선배님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심히 마을 일을 살필까 합니다.

무능한 저의 능력을 향상시켜 주기 위하여 각 모둠별로 도움장이 신설되었습니다. 토론문화를 성숙시키기 위하여 운영위원회에서 계획한 사업을 실무적으로 진행할 분들이 모인 것입니다. 식상해 질 수도 있는 독서토론회에 활기를 불어 넣기 위하여 다양한 방식을 도입하고, 초청 저자분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내일을 함께 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제부터 마을 분들은 <e시대와 철학>이라는 웹진에, 선별된 한 편의 글을 송고해야 하고, 출판사로부터 책을 전해 받은 후 서평을 쓰는 기회도 갖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유월이 오면 2박3일의 일정으로 대천해수욕장에서 이진남 교수님이 이끄는 ‘철학온’과의 연합MT가 계획되어 있습니다. 연합MT는 ‘철학온’ 회원들과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들이 섞여서 저자초청토론회와 독서토론회를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철학온’에 철학을 전공하신분이 많다는 이야기에 긴장하는 회원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논리의 철학은 부족할지라도 부딪히며 살아온 삶의 철학이 있다”, “좋은 문학작품은 변화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현재의 고통을 극복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결국 ‘나’라는 사람에 대하여 믿음을 준다.”고 하셨던 이권우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도전해 보기로 했습니다.

작년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올해도 변함없이 8월이 오면 1박2일간 대천해수욕장에서 한여름의 ‘인문학페스티벌’을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도움장들의 행사진행과 운영위원들의 후원과 열기가 넘치는 마을 분들의 열정으로 보령시의 열린 시민들과 함께 또 멀리서 찾아주시는 분들을 모시고 책, 정, 술을 함께 하겠지요.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서평/특별기고]

강신익(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이 책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는, 현대 정신의학이 다양한 문화의 자생적 문제해결능력을 무시하고 미국문화의 잣대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재단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태들에 대한 보고서이다. 저자는 거식증, 외상후장애증후군(PTSD), 정신분열병, 우울증 등 서구에서 발견되고 분류되고 관리되어 온 대표적 정신질환이 홍콩, 스리랑카, 아프리카의 잔지바르, 일본에서 퍼져나가는 양상을 세심히 관찰해 보여준다. 그리고 서양의학은 토착문화의 자생력을 파괴하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중 홍콩과 일본은 우리와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이어서 특히 관심이 간다.

아마 현대의학이 인류를 참혹한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준 은인이라고 믿는 독자라면 무척 당혹스러울 것이다. <질병 판매학>, <더러운 손의 의사들>, <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의 주머니를 털었나> 등 현대의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많은 책들이 출판되기는 했어도 의학이 인류구원의 보루라는 믿음은 우리 사회에 아직 굳건하다. 이 책들은 제약회사가 처방권을 가진 의사를 합법적으로 또는 탈법적으로 매수해 불요불급한 처방을 남발하도록 조장한다고 폭로한다. 실제로 약을 처방하는 대가로 제약회사가 의사나 의료기관에 지불하는 리베이트의 문제가 여러 차례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에 있었던 의사들의 파업은 의약분업을 통해 약품의 유통마진을 줄이려는 정부와 의사집단의 이해가 충돌한 사건이었다. 문제를 이렇게만 보면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조정과 합의가 해결책이다. 실제로 의사파업은 힘에 따라 이해관계를 재분배하는 걸로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문제를 좀 더 근원적인 곳에서 찾아낸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축적해 가는 삶의 지혜, 즉 공동체마다의 문화다. 그런데 미국의 의사들이 중심이 돼서 만들어낸 정신질환분류(DSM)에는 서양과 다른 세계관과 삶을 담을 공간이 없다. 따라서 서양의 정신의학은 서양인의 삶에서 형성된 정서와 문제를 기준으로 다른 문화권의 삶을 재단할 수밖에 없다. 홍콩의 거식증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날씬한 외모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이 이 병의 원인이라는 서양식 설명은 실제 사례와 거의 들어맞지 않는데도 말이다. DSM은 특정 문화권에서만 발견되는 증상을 포함하기도 한다. 한국인에게만 있는 ‘화병’이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서양의 교향악에 국악 가락 한 소절을 집어넣는다고 그 음악이 국악이 되지는 않는다. 이 책은 그런 문화적 불협화음에 관한 것이다.

문제를 이해관계보다 더 큰 문화의 틀 속에서 찾아낸 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이로써 우리는 의료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다. 이것은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의학을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대두된 여러 학문 중 하나인 의료인류학의 접근법이기도 하다.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버드 대학의 아서 클라인만은 대만에서의 정신병 연구를 통해 정신질환에 대한 문화적 연구의 길을 열었다.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서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문화적 폭력일 뿐 아니라 현지민을 새로운 의료상품의 소비자로 만들어 사회경제적으로 수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거식증과 정신분열병의 사례가 주로 문화적 폭력에 대한 것이라면 외상후증후군과 우울증의 사례는 주로 문화적 폭력이 경제적 수탈의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외상후증후군과 우울증은 각각 서구식 훈련을 받은 심리상담사와 거대 다국적 제약기업의 큰 시장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현지인들을 서양인처럼 앓게(미쳐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계가 미국처럼 미쳐가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현지 문화에 대한 무지와 무시라면 다른 하나는 미국인들의 몸과 마음이 되어버린 그들 자신의 문화에 대한 반성의 부재다. 이 책의 초점은 전자에 있지만 후자에 대해서도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이것은 의료인류학이 갔던 경로이기도 하다. 최초의 의료인류학자들은 과학에 바탕을 둔 서양의학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식민지와 후진국에서는 건강에 관한 각종 미신과 토착신앙 때문에 서양의학이 잘 수용되지 않았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위해서는 그들의 신앙과 문화를 연구해야만 했다. 그런데 후진국의 신앙과 거기에 바탕을 둔 토착의학을 연구하다보니 비교분석을 위해 같은 방법으로 서양의학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문화적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서양의학의 전제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양의학의 보급을 위해 시작된 연구가 이제는 오히려 서양의학의 문제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된 것이다. “다른 문화의 믿음들을 깊이 탐구하면 우리 자신의 문화적 편향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 책은 서양의 정신의학이 다른 문화권에서 만들어내는 문제들에 관한 것이지만, 거꾸로 다른 문화의 시선으로 서양의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일상에 대한 과도한 의료화가 다양한 맥락 속에서 자동적으로 습득된 문제해결 능력을 무력화하여 오히려 병을 만든다고 주장하는 이반 일리히의 <병원이 병을 만든다>, 그리고 프랑스의 정신의학이 식민지 알제리인의 정신을 파괴하고 지배하는 양상을 비판한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에서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진단명을 쓰지 않지만 50대 이상 세대라면 히스테리와 신경쇠약이라는 서양에서 발명되고 수입된 증세에 익숙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증상을 앓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유명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은 우울증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고 아마 그 발병을 더 촉진시켰을지도 모른다. 천안함 사건에서 생존한 승조원에 대해 실시했다는 외상후장애증후군 치료는 과연 어떤 문화적 전제에서 출발한 것인지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혹시 치료를 빌미로 틀에 박힌 가치를 주입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책은 이러한 현실적 반성 외에 우리들 자신의 본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가 생물학적 존재인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문화에 길들여진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이 책은 이 점을 상기시켜 준다. 대중은 문화적 권위의 지지를 받는 틀 속에서 질병을 이해하고 경험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그 문화적 권위가 교회였지만 근대 이후 급속히 과학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에는 자본과 소비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19세기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히스테리 환자들은 이 분야의 문화적 권위였던 의사 샤르코가 진단하고 분류하고 기술한 그대로의 증상을 겪었다. 오늘날의 소년소녀들은 TV에 등장하는 연예인의 외모와 행동과 소비패턴을 규범으로 삼고 닮으려 한다. 그래서 성형과 미용과 다이어트의 열풍이 분다. 이것은 “무의식이 감정의 고통을 당대에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시도”의 결과다. 이렇게 문화적 기대와 개인적 경험이 상호 작용하고 우리의 생물학적 몸은 문화적 경험과 기대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다. 몸과 문화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생물-문화적(Bio-Cultural) 현실이다.

21세기의 문화적 권위인 자본은 바로 그 생물-문화적 현실을 파고들어 자신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생물-문화적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자율적 문제해결 노력이 아닌 약품의 소비가 규범인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확대되면 모든 사람이 그 새로운 생물-문화적 현실의 구성요소가 된다. 책 속에 인용된 애플바움의 말처럼 “완벽한 건강이라는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부지중에 기업의 마케팅 담당자들에게 우리가 가진 자유의 도구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고삐를 넘겨주고 말았다. 과학의 객관성, 의료의 윤리와 공정성, 환자의 이익을 위해 일하겠다는 맹세를 스스로 지키는 한에서 의학에 자율성을 부여할 특권은 이제 그들 손에 있다.”

의료인의 전문가로서의 자율성과 대중의 의료인에 대한 신뢰를 되찾고 환자가 의약품의 소비자가 아닌 자기 건강의 주체로 바로 설 수 있을지의 여부는 바로 이와 같은 사회문화적 메커니즘을 바꿀 수 있을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 책이 의료와 관련된 모든 논쟁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자거라투스트라, 삼성 미술관 리움에 가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MEGA 공동대표)

니체 아부지, 삼성 미술관 리움에 가보셨어요?

나야, 독일 촌구석에 사는데, 어찌 그런 데를 다 가보겠냐? 니는 천방지축으로 쏘다니니 그런 데를 다 갔다 온 모양이구나.

예, 아부지. 이번이 두 번째예요.

자거라투스트라야, 니도 삼성 국물을 좀 마시려고? 아서라, 니 차례까지 오겠냐?

아니 아부지, 그래도 제가 아부지 얼굴에 먹칠하겠어요. 처음에는 건축 공부하러 갔었어요. 그때 한참 건축 공부하고 있을 때인데, 글쎄 삼성 미술관에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작품이 집결되어 있다 하더 라고요. 이게 웬 떡인가 싶어서 직접 가보기로 했죠. 그런데 그때에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어요. 미리 예약하고 와야 한 대요. 그래서 아이고, 내 팔자에 재벌 미술관에 들어가 보겠냐 하고선 돌아섰지요.

그럼 이번에는 안으로 들어갔더냐?

예, 신통하게도 이젠 예약 없이 들어갈 수 있대요. 김용철 변호사가 무언가를 폭로한 이후 삼성한테 유일하게 변한 게 그거라고 하더 라고요. 재벌 미술관이 서민에게 개방된 거죠. 정말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갔어요. 솔직히 좀 떨렸어요. 제가 입성이 형편없으니, 혹 그 때문에 입장을 거부당할까 봐서 말이요. 다행히 집어넣어 주더 라고요.

그래? 그 안이 어떻더니?

정말 깜짝 놀랐어요. 밖에서 보면 세 개 건축이 있거든요. 그게 안으로는 이어져 있어요. 아부지도 들어서 아시겠지만 전부 세계적인 건축가예요. 이런 사람들을 이어놓은 것은 삼성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하겠죠. 우선 이태리의 포스트모던 건축가 마리오 보타, 들어보셨어요?

야, 인마, 자거라투스트라야, 아비는 건축에 관심이 없다. 아비는 음악을 좋아하지. 그런데 음악에 비하면 건축이 어디 예술이냐? 그건 그저 물질 덩어리에 불과해. 그래서 헤겔도 건축을 예술 중에 제일 천박한 예술로 꼽지 않았니?

역시 아부지는 아직 19세기이군요. 요즈음 건축이 얼마나 찬란한데요? 건축을 영화에 비교하는 글도 있어요?

예끼, 이 놈, 지가 써놓고 슬쩍 자랑하다니. 그런데 포스트모던 건축이라는 게 무어냐?

니체 아버지, 그건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마리오보타만 가지고 말한다면, 주변이나 역사, 문화의 맥락을 고려한 건축이라는 거죠. 모더니즘은 이런 것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든요. 모더니즘 건축은 자기완결성을 추구했었지요.

그러면 마리오 보타가 삼성 미술관에서 고려한 맥락은 무어지?

글쎄요. 아부지, 그게 아리송해요. 좀 억지로 연결시키자면 미술관이 위치한 남산의 성곽의 형태를 건물의 지붕 선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실제로 보이는 것은 성곽이 아니라 거대한 하이야트 건물이죠. 시꺼먼, 흉측한, 남산을 파괴하는, 박정희 시대 특혜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건물이죠. 더구나 미술관 지붕 선에서 발견하는 것은 꼭 한국적인 성곽이라 할 수는 없고, 로마적인 성곽처럼 보여서, 전체적으로 마리오 보타가 이태리에서 지은 건축을 그대로 하나 수입한 것처럼 보입니다.

쯧쯧, 뭐 이렇게 생각하려무나. 차용을 통해 패러디한 거라고.

뭐, 어쨌거나, 겉모습은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니, 한 가운데 로톤다라고 있어요. 뒤집어진 원추형 로톤다인데, 그 주위로 계단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창문으로 아래쪽이나 위쪽을 쳐다보는데 그런 체험이 운동감을 주었어요. 건축이 시각이 아닌 감각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증거지요.

원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하여튼 아부지, 그 외에도 해체주의 건축가 렘 쿨하스의 건축도 있어요. 그는 네덜란드 사람이죠. 삼성 미술관에서 가장 앞에 있는 건축물이 그가 지은 거죠. 밖에서만 보면 저건 나도 짓겠다 싶었는데, 그래서 별 감동을 못 받었죠. 그런데 이번에 안에 들어가 보니 아, 역시 해체주의자구나 하고 감탄했어요.

궁금하구나, 그게 뭐지?

건물 안에 또 건물이 있는데, 그 속에 있는 건물은 잘 보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부양하는 돌덩어리, 어때요? 멋있죠? 물론 착각을 이용한 거죠.

거 참 재미있구나.

그래요. 건축이란 게 원래 무게의 예술인데, 그걸 전복시킨 거죠. 하지만 솔직히 기분 나쁜 게 렘 쿨하스가 지은 서울대 미술관 건축(관악 캠퍼스)하고 이 건축이 너무 닮았거든요. 두 건축이 연대도 비슷하게 지어졌어요. 건축의 다양성과 깊이는 서울대 미술관 건물이 더 탁월하죠. 그래서 서울대 미술관 짓다 남은 아이디어로 삼성 리움 건축을 지은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렘 쿨하스나 삼성 미술관 관계자가 들으면 팔짝 뛸 이야기죠.

얘야, 자거라투스트라야, 확인할 수 없는 비난은 삼가 거라.

예, 죄송해요. 실제로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다만 그런 인상을 받는다는 거죠.

하여튼 조심하래도.

예, 알겠어요. 그리고 니체 아부지, 장 누벨의 작품도 있어요. 장 누벨의 이름이 나오면 건축을 아는 사람들의 가슴이 황홀해지죠.

장 누벨이라? 그는 어떤 스타일로 짓는데?

그의 건물은 전체적으로는 모더니즘의 본래적인 입장으로 돌아간 듯해요. 원래 모더니즘 건축이 처음 출발할 때(1920년대)는 과학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인상적인 표현을 추구했거든요. 나중에(1940년대) 모더니즘은 기능주의로 타락하고 말았죠. 특히 장 누벨은 건축물의 입면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운동성을 추구했어요. 그런 점에서 초기 모더니스트들이 운동성을 추구했던 것과 비슷해요. 그래서 예를 들어 파리에 있는 아랍 문화원 건물의 입면에는 수많은 카메라 조리개가 모여서 한편으로는 아랍식 전통 건물의 타일의 형태를 만들죠. 또 다른 한편에는 이 카메라 조리개가 빛의 양에 따라서 조였다가 풀어지면서 건물 안에 찬란한 빛의 예술을 전개하죠.

그러면 삼성 미술관 건물에는 장 누벨이라는 사람이 어떤 건물을 지었지?

마리오보타의 건물 옆에 있는 철판이 녹슨 건물처럼 보이는 건축을 그가 지었어요. 밖의 모습은 기둥을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사각형 입방체로 만들어 인상적이기는 하죠. 그런데 이 비슷한 건축을 그는 어디 딴 데 또 한 번 지어 놓았더 라고요. 어느 게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외면적인 모습은 너무 비슷해요.

음, 좀 실망스러운데..

세월이 지나면 녹슨 것이 진행되니까 입면이 바뀌죠. 그런 점에서 운동성을 추구한다는 장 누벨의 태도가 잘 표현되었다고도 하겠어요.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 놀라운 정경이 하나 있어요. 건축의 모서리가 유리 창문으로 되어 있어서 다가가 보았죠. 그랬더니 놀랍게도 맞은 편 옹벽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더 라고요. 녹슨 철근으로 상자를 만들어 옹벽을 따라 축조해 놓았어요. 거칠고 황량한 느낌을 주죠. 그런데 그 앞에 살아있는 대나무를 심어 놓았어요. 그 대비가 동양의 선적인 경지를 보여주는 듯해요.

오호, 자거라투스트라, 니는 행복했겠네? 그런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체험했으니 말이야.

그런데 말이에요. 아부지, 개별 건물들은 틀림없이 세계적인 작가의 탁월한 작품인데, 문제는 그것들이 모여 있으니 뭔가 답답한 거죠.

자거라투스트라야, 무슨 말이니?

그래서 제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답답함의 정체를 풀기 위해 고민해 보았죠. 그리고 이런 결론에 이르렀어요. 이건 너무 교과서적이잖아. 자 보자, 모더니스트 장 누벨, 포스트모더니스트 마리오 보타, 해체주의자 렘 쿨하스. 그러면 교과서에 나오는 순서 그대로이네. 한 가지가 빠졌는데 그게 뭐지? 아, 초현실주의가 빠졌군. 이렇게 생각하면서 밖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초현실주의적인 조각 작품이 하나 거기 버티고 있더 라고요.

그게 뭐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 ‘마망(엄마)’인데, 거대한 거미이죠. 이건 설명 안 해도 정신분석학적인 차원에서 성적인 상징이라는 것을 잘 알겠죠. 그러니 완벽하죠. 삼성미술관이란 건축사의 교과서예요. 아주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이 좋아하는 교과서 그대로이죠. 니체 아부지, 단정하고 바르게 살아가지만 답답하고 고루한 모범생들 말이에요. 삼성 리움 미술관은 그런 학생이예요. 그런 학생들은 모든 것을 잘 알지만 다만 느낌은 없죠.

자거라투스트라야, 그걸 ‘삼성’이라 한단다. 너도 KS마크라면서, 그러니 ‘삼성’ 아니냐?

 

구보씨 계속 소통을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자연은 정녕 불인(不仁)한가. 천지불인(天地不仁)의 글귀를 되새겨보게 하는 요즘이다. 하기야 인(仁)이건 불인(不仁)이건, 인간사의 문제고 인간의 생각이지, 자연이야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렇더라도 우리는 알아서 자연을 섬겨야 할 처지다. 그 품에 깃들여 사는 건 우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방적 소통관계라 할 만하다. 어쩌면 소통이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소통이란 서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주체가 있을 때라야 성립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그런 의도적 주체로 여길 수 없다면, 자연과의 소통이란 소통이라는 말의 비유적 확장에 불과할 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추구(芻狗)로도 여기지 않는다. 지푸라기 개 운운하는 것 역시 우리를 보살피지 않는 자연에 대한 섭섭함이 배인 인간의 반응일 뿐이다. 물론 이런 반응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존 그레이(John Gray)라는 유럽의 학자는 Straw Dogs라는 책을 지어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비판했다(이 책은『하찮은 인간, 호모라피엔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지푸라기 개, 추구(芻狗)의 함의는 무엇보다 이렇게 인간의 겸손함을 깨우치는 데 있는 것 같다.

(일본 대지진의 참상)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연과의 소통을 자연을 매개로 한 인간의 소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법하다. 자연을 통한 인간들 사이의 소통이거나 인간 자신과의 소통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자연이 인간에 대해 무관심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자연을 염두에 두고 삶의 태도를 다져야 한다. 우리의 하찮음을 자각한 위에서 문명의 위세를 뽐내더라도 뽐내야 하지 않겠는가. 지진은 막을 길이 없더라도, 지진의 위험을 염두에 두고 건물도 짓고 산업시설도 만들어야 한다. 예상을 뛰어넘는 위험이 발생했다면, 거기에 맞추어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런 대책마저 뛰어넘는 재앙이 닥쳐온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거야 할 수 없는 일이다. 페름기에 있었다는 엄청난 기후변화나 백악기말에 있었다는 유성 충돌과 같은 사태가 닥쳐온다면, 현재의 인간 능력으로서는 속수무책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태를 지레 우려하여 미리 손을 묶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겸손을 넘어서는 짓이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다시 짚어볼 만한 것은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라는 식의 발상이 갖는 한계다. 맑스가 젊은 시절부터 내세웠던 이 명제는, 윤구병 선생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만드는 문명’의 소산이다. 워낙 만든다는 것은 일단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활동이기에, 이런 모델에 따르는 사고방식은 자칫 폐쇄성과 전체성을 띠기 쉽다.

‘자연의 인간화’가 만듦의 능동성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자연화’는 자연에 의한 인간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이고 열린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연이란 인간에 의해 변형된 자연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교호작용은 결국 인간이 주도권을 쥔 활동과 환경의 상호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한 한, ‘인간의 자연화’는 인간이 환경을 매개로 스스로의 본성을 변화시켜 나간다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크게 보면, 인간이 세계를 만들고 그렇게 만든 세계를 스스로 의식한다는 서양 근대 문명의 틀, 이른바 자기제작과 자기의식의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구보씨는 아직도 맑스의 『경제학 철학수고』며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을 처음 읽었을 때의 흥분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 나이에 그 내용은 충격이고 매혹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이제 막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맑스의 테제들은 우리가 이르지 못한 합리적 사회의 이상(理想)과 거기에 이르는 과정을 가리키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렇다고 구보씨가 이제 와서 보니 맑스가 틀렸다거나 과거 맑스를 받아들인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사상이 있는 법이며, 그런 점에서 맑스의 사상은 나름의 역할을 한 셈이다. 어떠한 사상도 자기 시대를 넘어설 수 없다면, 맑스의 사상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만드는 문명’이 한창이지만, 그 한계에 대한 지적은 이미 진부해졌다. 현대 철학의 주요한 흐름이 이 만드는 문명의 자기폐쇄성을 공격해온 지도 오래다. 목적을 설정하고 설계도를 만들고 수단을 마련하고 공정을 시작하여 제품을 완성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큰 성과를 낳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 모델을 일반화하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근본적인 면에서 자연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더 따지고 보면, 사회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그러나 제작 또는 생산이 모델로 자리 잡은 상황에선,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이 모델에 따라 해석되고 처리된다.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나 이데올로기, 지식도 생산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재료에 생산수단을 가해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구체적 과정은 각 영역마다 다르겠지만, 그 기본 형식은 비슷하다. 사람도 교육을 통해, 훈련을 통해, 일정한 형태로 생산되는 생산물로 취급된다.

물론 모두가 균일하지는 않다. 공산품에도 여러 규격과 품질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여러 종류와 등급이 있기 마련이다. 때로 불량품이 나오는 것처럼 일탈적인 사람들도 나타난다. 그런 불량품을 처리하는 곳도 있다. 감옥이나 병원 따위가 그런 곳이다. 여기에도 나름의 생산과정이 작동한다.

이런 식의 ‘만드는 문명’에서는 역사도 인간의 생산물로 취급된다. 그 생산을 계획하는 것이 꼭 인간의 개별적 의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개개의 인간이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손’이나 ‘일반의지’일 수도 있고, ‘시대정신’이나 ‘이념’일 수도 있으며, ‘역사법칙’일 수도 있다. 어떻든 이 생산의 틀이 작동하는 것은 인간 집단에 의해서다. 그러니, 이 구조를 잘 파악만 한다면, 결과를 예상할 수도 있고 그 과정을 앞당길 수도 있다. 역사가 정말 일종의 만들기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사실, 근대 이후의 세계에는 이런 모델이 실제로 적용되어 온 셈이다. ‘만드는 문명’은 ‘기르는 문명’을 압도하고 잡아먹었다. 이제는 농작물도 가축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 되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통은 이 생산 과정에 종속되어, 그 수단의 일부로 취급받는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이런 모델을 잘 따르는 모범적인 사례다. 만드는 공정, 그것도 급속한 만들기의 훈련 속에서 만들어진 CEO 대통령을 내세워, 만들기로 온 땅과 물을 덮는 데 여념이 없다. 소통은 이런 만들기의 효율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유의미한 것으로 대접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생산이 놓이는 곳에는 언제나 그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그 생산을 조건 짓는 바깥이 있다는 데 있다. 우리가 아무리 이 바깥을 차단하거나 무시하고 싶어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생산의 모델이 설정한 폐쇄성은 결국 깨지기 마련이다.

현대 철학은 이런 생산의 모델이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모든 폐쇄적 체계는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애를 써왔다. 물론, 그 실질적 동기는 현실에서 드러난 생산 모델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환경 문제가 그렇고, 공장식 사회주의의 실패가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환경 문제를 단순히 관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잘못일 것이다. 그런 생각은 결국 자연을 우리의 통제 안에 놓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환경 문제가 생산의 단위를 좁게 설정하고 그 생산과정이 환경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못한 탓에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럴 경우, 이제는 그 단위의 범위를 넓혀 하나의 공장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더 나아가 하나의 지구에 이르기까지 생산이 작용하는 영역을 확장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맞는 생각일까?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지반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다시 고려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네 말은 우리가 ‘기르는 문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야?”

Y가 못 참고 마침내 끼어든다. 그만하면 오래 참았다. 구보씨는 이런 상황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지 않는가.

“아니, 꼭 그런 뜻은 아니야. 다만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지. 사실 그건 기르는 문명의 장점이기도 해. 사람들이 곡식을 재배하는 데 힘을 쏟으면서도, 그 곡식을 내가 만든 것이라고 여기진 않았잖아. 자연의 생장에 조금 힘을 보태고 이용할 뿐이라고, 그래서 결국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자연이라고 보았거든. 생각해 보면, 그게 옳은 태도 아닐까?”

“하지만, 구보야, 먹여 살리는 것만이 아니라 죽이기도 하는 게 자연이었지.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굶어죽고 휩쓸려 죽고 했던 것 아냐? 거기에 비하면 지금 형편이 훨씬 낫다는 건 분명해. 지진과 같은 재앙이야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거구. 아니, 어떻게든 지진 피해를 줄이고 있다는 면에서도 오늘이 낫잖아.”

“근데, Y야, 당장 원자력 발전소 문제를 생각해 봐. 나는 이게 단순한 관리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고 보는 거야. 사람들은 흔히 원전 사고가 관리나 설비의 문제라고들 하지. 이를테면 미국의 드리마일 원전은 사고로 핵연료봉이 녹아내렸는데도 격납장치 덕택에 방사능 피해가 없었지만, 소련의 체르노빌은 그렇지 못했다는 거야. 그러나 지금 일본의 상황을 봐. 우리가 예상하고 대비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거든. 그러니까 어떤 장치도 관리만 잘 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이 위험하다는 거지. 이건 결국 철학의 문제고, 현실적으로는, 원전과 같은 생산물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라구.”

“나도 원전은 너 못지않게 반대해. 그런데, 그건 위험한 면이 있는 줄 알면서도 경제적 이유 때문에, 그것도 일부 사람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건설하니까 반대하는 거야. 정말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면 원자력 발전소건 핵융합 발전소건 그런 걸 만드는 게 왜 문제가 되겠어? 근데, 구보 네 얘기는 좀 다른 것 같아. 그건 마치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자연을 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처럼 들려.”

“섬긴다구? 글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 또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라는 거야.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연에 의존해 산다는 점을 잊지 말자는 거지. 말하자면, 자연과 우리 문명의 비대칭성을, 자연의 우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거야. 그게 자연과 소통하는 방식이고, 정확히 말하면 자연에 대하여 우리가 우리의 태도를 가다듬는 소통방식이라는 얘기지.”

“자연의 우위? 겸손? 그런 게 과연 문제를 해결해 줄까? 그거 사실은 일종의 도피거나 무책임한 태도 아냐? 차라리 더 안전한 발전장치를 개발하려고 노력하거나 지진을 예측할 수 있는 연구에 진력하는 게 현실적이고 제대로 된 태도일 것 같은데… 구보야, 미안한 말이지만, 내겐 여전히 너네들 철학자 얘기가 좀 공허하게 들려. 이것도 소통 부족이나 소통의 잘못 탓이니?”

“…..”

“엥, 구보야, 또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일단은 내 얘기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지. 그게 네가 곧잘 말하는 대로 타자를 대하는 기본적 태도가 아니겠어? ㅎㅎ…”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삼우반, 2003[청춘의 서재]

윤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오웰이 이 책을 쓰기까지

영국인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03.6.25~1950.1.21)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한겨레, 2010. 이하 『위건 부두』)에서 자신이 ‘상류 중산층 가운데 하급’, ‘특권 계급 출신이지만 돈은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론상으로는 상류층의 에티켓과 관습, 문화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삶을 영위할 경제적 능력이 없는 부류로서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살아야 하는’ ‘피곤한 신분’이었다. 또 자신을 ‘부르주아의 완충재 같은 계급’이라고도 표현했다.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스쿨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서 입학했다.

에릭이 이튼스쿨을 다니던 때는 1917년부터 1921년까지이다.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에릭에 따르면 영국에서도 유례없이 혁명적인 분위기가 만연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위험한 진보 작가의 책이라 분류되었던 것들을 모두 읽고 자신을 막연히 사회주의자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정말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했고 노동계급이 인간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며 책을 통해서나 그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할 뿐이었지 실제로 그들 가까이 갈 때는 여전히 그들을 혐오하고 경멸했다고 고백한다. “돌이켜보건대 그 시절 나는 시간의 절반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하는 데 쓰고 그 나머지는 버스 차장의 무례함에 분을 터뜨리느라 허비한 것 같다”(『위건 부두』, 191쪽)

이튼을 졸업했지만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할 성적이 되지 않았던 그는 1922년 미얀마(구(舊) 버마)로 건너가 5년 동안 ‘인도 제국 경찰의 일원’으로 일했다. 스무 살이 채 안 된 나이였다. 이튼 시절, 젊은이들에게 1차 대전 참여를 부추기기만 한 기성세대의 비겁함과 또 전쟁을 무능하게 지휘했던 노년층에 코웃음을 치며 기성세대가 내세우는 정통성과 권위에 반항을 했다지만 이튼에서 전수받은 대영제국의 국민이라는 교육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진 못했나 보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도 식민지의 관료였다. 그러나 에릭은 – 수입이 많고 안정된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권층 노릇하기 쉬운 – 식민지의 경찰직을 선택하고 나서야 제국주의의 실상과 마주친다.

1927년, 휴가를 받고 영국에 도착한 에릭은 제국의 경찰 노릇을 그만하겠다고 결정한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찰직을 떨쳐낸 에릭은 희망했던 작가가 되기 위해 1928년 친척이 살고 있는 파리로 옮겨와 습작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미얀마에서 보냈던 시간들로 인해 괴로웠다.

“나는 5년 동안 압제의 일원으로 복무했고 그만큼 양심의 가책이 컸다. 잊히지 않는 숱한 얼굴들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법정에 선 피고들, 사형수 감방에서 최후를 기다리는 죄수들, 나에게 윽박질당하던 부하와 냉대당하던 늙은 농부들……내가 느낀 죄책감은 너무 엄청나서 속죄를 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장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을 5년 동안이나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번민 끝에 결국 얻은 결론은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었다.”(『위건 부두』, 200쪽)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압제에 맞서고 싶어졌다……당시에는 실패만이 유일한 미덕처럼 보였다.”(『위건 부두』, 201쪽)

“그렇지만 나는 노동 계급의 처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실업에 관한 통계를 본 적은 있었으나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부끄러울 것 없는’ 빈곤도 최악의 수모를 당한다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위건 부두』, 202쪽)

“그들은 ‘하류 중에서도 최하류’였으며 그런 그들이야말로 내가 접촉하고 싶었던 부류였다. 그때 내가 진심으로 원한 것은 번듯한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길을 찾는 것이었다…… 일단 그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나는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일 테고 그러면 죄책감을 얼마간 떨쳐버릴 수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이 불합리한 생각인 줄은 당시에도 알았다.”(『위건 부두』, 203쪽)

파리의 접시닦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하 『밑바닥 생활』)은 바로 그 속죄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는 파리와 런던에서 경험했던 밑바닥 생활을 가족과 친지들이 알고 당황할까봐 필명을 만들어 1933년 1월 9일 책으로 엮어낸다. 전체주의를 철저히 거부했던 ‘조지 오웰’이란 이름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옮긴이에 따르면 “유럽의 두 도시의 하층민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르포르타주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작품의 전반부는 1929년 늦가을의 파리 생활을 주로 반영했고 후반부 영국생활은 1928년 겨울에서 1931년 여름 사이에 그가 직접 체험하거나 간접적으로 취재한 내용을 재구성했다.”(『밑바닥 생활』, 286쪽)고 한다. 오웰도 이렇게 말한다. “거기 적은 일들은 재구성되긴 했어도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위건 부두』, 205쪽)

1929년 10월 뉴욕 증권 시장의 폭락 여파가 유럽에도 번져나갔다. 1931년, 영국에서도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4명 중 1명이 실직자로 전락한다. 약 300만 명 정도가 실직했으며 실업수당으로 겨우 기아와 노숙을 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더불어 기아와 노숙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빈곤은 이웃의 일로 번져갔다. 암울하고 불안정한 시기였다.

오웰은 ‘하류 중에서도 최하류’의 생활을 파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아침부터 욕설이 들리는 여관에 거처하면서 밑바닥 사람들의 언어와 일상들을 빠짐없이 체험한다. 겨우 연명할 일거리인 영어 교습이 끊기고 난 뒤부터는 그야말로 진짜 밑바닥이 되었다. 그러던 중 그곳에서 사귄 친구(보리스)의 도움으로 호텔의 접시닦이가 된다. ‘노예의 노예’라는 접시닦이 일은 부르주아의 완충재 역할을 하는 ‘하급 상류중산층’ 오웰의 계급적 이중성을 무너뜨렸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끊임없이 서두르고, 장시간 노동과 탁한 공기를 견디는 것이다. 그들은 이 생활을 탈출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급료로는 한 푼도 모을 수 없고, 일주일에 60시간에서 100시간의 노동이 다른 일에 훈련할 시간을 남겨주지 않기 때문이다.”(『밑바닥 생활』, 102쪽) “그들의 생활이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놓는다.”(『밑바닥 생활』, 152쪽)

오웰은 밑바닥 현실과 밀착되어 있는 살아있는 글들로 20세기 초반의 빈민층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하급 상류층으로 살았던 그가 최하류층을 겪으며 쏟아내는 빈민층의 생활과 노동 강도에 대한 비유들도 당시 노동 현장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그런데 오웰의 글은 무겁게 흐르다가도 번뜩이는 재치를 보인다. 오웰의 묘사에 흠뻑 빠져들어 마치 내가 호텔 지하 일터에 있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껄껄 웃게 하는 풍자와 해학들을 만나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그것들이 과장스럽거나 요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해학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다가도 어느새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이것이 오웰 글의 묘미인 것 같다. 노동자들의 고단한 생활과 환경이 곧 나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그 진실들을 외면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썰’>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와 같은 수준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내 이웃에 있기 때문이다. 생계를 꾸려가야 할 노동자이든,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 대학생이든 아직도 궂은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 ‘건너기 힘든 계급의 강’을 넘어서기 위해 첫차를 타고 막차를 기다린다. ‘언젠가는 나도 돈을 모으면……’

런던의 부랑인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런던에 있는 친구에게 직장을 부탁했던 오웰은 선천성 정신박약자를 돌보는 일이 생겼다는 친구의 편지를 받고 프랑스를 떠나지만 런던에 도착해서야 그 일이 어그러진 것을 알게 된다. 만일 지금처럼 그때도 휴대폰이 있었다면 부랑인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위건 부두』에 따르면 오웰은 이미 부랑인 생활에 뛰어들기 위한 준비 기간을 거쳤다.

오웰은 부랑인들과 일상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방치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기에 앞서 부랑인들과 섞이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묘사한다. 오웰은 자신의 상류층 언어 습관에 신경을 쓰면서 첫눈에 신분이 들통이 나 염탐자로 오해 받고 부랑인들에게 거부당할까봐 긴장했지만 그저 그들과 같은 차림새 하나만으로도 부랑인의 무리에 낄 수 있었다고 한다. “옷은 즉시 나를 새로운 세상에 들여놓았다.”(『밑바닥 생활』, 168쪽)

그렇게 즉시 부랑인이 된 오웰은 그들을 따라 구세군 구호소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최악의 구호소는 있지만 완전한 구호소는 어느 곳에도 없을 뿐더러 최소한을 갖춘 구호소도 없다는 사실을 영국민에게 알린다. 외부와 단절된 구호소 안의 참담한 환경들이, 일다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부랑인들의 허기진 현실이, 그에 따른 무기력함이 오웰의 ‘기록’을 통해 밝혀진다.

부랑인들은 부랑하도록 법률로 강제되어 있다. 구호소에는 하루밖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부랑인은 당시의 법률 상황에서는 부랑하든지 굶어죽든지 해야 하므로 부랑인이 된다. 오웰은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악폐들뿐만 아니라 해결책도 제시한다. 런던에서 사용하는 속어와 욕설들을 따로 정리한 장도 있다. 또한 당시 파리와 런던의 물가까지도 잘 기록해 놓았다.

영국 사회의 한 면을 기록한 오웰의 이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구호소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에도 일조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오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웰의 선택

지금 우리 사회는 창의성을 강조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창의성을 발휘해야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과 현실의 상황을 직시하지 않은 채 떠올린 상상력과 창의력은 허술할 뿐이다. 편견과 획일성이라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만일 오웰이 밑바닥 생활에 관해 글을 쓸 때 귀동냥에만 의지했다면 그렇게 생동감 있는 표현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현장 체험은 상상력과 글재주를 더욱 빛나게 했다. 호텔 작업장과 구호소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 이유도 오웰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리스’를 친구로 사귀지 못했다면 속죄 행위의 하나로 여긴 접시닦이 일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오웰이 속죄만 하고 그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허울뿐인 공리주의(최대다수의 최대행복)를 낳은 나라의 극빈자 상황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 혹은 보고 문학이라고 하는 ‘르포르타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과 진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통로이다. 오웰은 ‘하류 중에서도 최하류’란 주제를 선택하였고 노동환경과 노동자 의식의 관계, 상류층과 하류층의 의식 등을 관찰하고 비교하면서 당시의 사건과 사실들을 충실히 묘사한다. 오웰의 밑바닥 생활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자신의 빈곤한 상황에만 집중하지 않고 최하류층의 열악한 상황과 그들의 환경에서 비롯되는 비열함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를 견디게 하는 최소한의 경비들도 꼼꼼히 적고 있다.

르포계에서는 ‘취재력이 곧 표현력’이란 말을 한다. 이것은 현실의 모습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심층적으로 포착해야 한다는 것으로, 상상력만으로는 창의성을 키울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열정이다. 언제나 그릇된 압제자에 저항하고, 언제나 옳은 피압제자와 연대하려는 열정. 그 열정은 르포를 완성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마치 그것은 열정이 준비한 선물과도 같다.

오웰은‘실패만이 미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성공과는 거리가 먼 밑바닥으로 간다. 그러나 끼니를 며칠씩 거르고, 접시를 닦고, 부랑인과 함께 떠돌면서도 상류층의 징표인 ‘h’발음을 없애지는 못한다. 하지만 노동계급과 최하층민에 대한 편견은 오웰에게서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하류층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열심히 일하지만 늘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삶의 질곡을 이해하게 된다.

진정한 르포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를 변화하게 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두 번 다시 모든 부랑인이 불량배 주정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고, 내가 1페니를 주면 걸인이 고마워하리라 기대하지 않겠으며, 실직한 사람들이 기력이 없다고 해도 놀라지 않겠고, 구세군에는 기부하지 않을 것이며, 옷가지를 전당 잡히지도 않겠으며, 광고 전단지를 거절하지도 않겠고, 고급 음식점의 식사를 즐기지도 않으련다. 이것이 시작이다.”(『밑바닥 생활』, 284쪽)

나는 오웰이 이후의 다른 작품 속에서도 파리와 런던에서 있었던 최하류의 생활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읽게 되면 속죄로 시작했던 그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런데 혹시 “왜 최하류층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 사회, 한 국가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의 의식주 상태를 보면 그 사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남장을 한 여자와 페미니즘적 주체[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황 주 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조선 후기에는 남장을 한 여자가 주인공인 여성 영웅소설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등의 소설은 당시의 답답한 가부장제적 현실을 벗어나려고 했던 여성들의 열망과 상상력을 보여준다. 21세기에도 남장 여자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커피프린스 1호점>(2007)을 시작으로, <바람의 화원>(2008), <선덕여왕>(2009), <미남이시네요> (2009), <성균관 스캔들>(2010) 등의 드라마는 남자 행세를 하는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여성 상위 시대, 알파 걸, 역차별 등의 단어들이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을 공격하는 시대에 쏟아져 나온 남장 여자를 다루는 드라마를 우리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라오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야기의 한 축인 러브스토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남장을 하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한다. 이런저런 사건 사고 끝에 서로 호감을 갖게 된 남녀 주인공. (<선덕여왕>을 제외하면)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여주인공에게 마음을 고백하면, 여주인공은 사실은 자신이 여자였노라고 털어놓고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많은 경우 영화나 드라마 속 여성들은 성녀와 창녀, 캔디같이 착한 여자와 이라이자 같은 나쁜 여자 중 하나였다. 최근 들어 다양해진 여성 캐릭터들도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를 조금씩 변주한 것에 그쳤다. 씩씩하거나 좀 남자 같은 데가 있는 여성은 꼭 한번 정도는 연약하고 순진한 면을 보이고, 혹은 진정한 사랑을 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이 그랬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고은찬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남자 행세를 한다. 그녀는 일부러 남장을 한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줄곧 소위 여성스러운 면보다는 남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던 터라 남자행세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자주인공과 서로의 애정을 확인 한 후, 본격적으로 바리스타 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로 떠난 고은찬은 달라진 모습으로 귀국한다. 변화의 폭이 크지는 않았지만 파마도 하고 화장도 해서 훨씬 더 여성스러워진 것이다. <미남이시네요>의 고미녀는 소위 4차원의 민폐형 캐릭터라서 전형적으로 얌전하고 착한 인물은 아니지만, 사고를 치면 뒷수습을 해줄 남자가 필요한 약하고 순진한 여자다.

두 여자 모두 결말에 이르러 남자 주인공의 품에 덥석 안기는 대신 각자의 삶의 계획에 따라 멀리 떠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에서 여성 영웅들이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내와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과 달리, 남장을 한 여성 캐릭터들은 사랑이나 결혼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고은찬과 고미녀가 기존의 여성 캐릭터를 뛰어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체현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거나, 이런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이 드라마들이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연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갔기 때문에 갖는 자연스러운 한계일 것이다. 현대를 사는 두 주인공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서 혹은 목숨처럼 소중한 꿈을 위해서 남장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달달하고 설레는 사랑 이야기에 무겁고 심각한 고민 따위는 안 어울리지 않는가.

진화하는 남장 여자

하지만 남장 여자가 살아가는 무대를 먼 과거로 옮기면 오히려 여성 캐릭터는 조금 더 진화한다.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다른 한 축은 여자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이다. 조선 후기 여성영웅 소설에서처럼 천부적인 재능과 능력으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역경 속에서 자신의 꿈과 욕망을 찾게 되거나 이루게 된다. 앞의 두 드라마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사극인 <바람의 화원>, <선덕여왕>, 그리고 <성균관 스캔들>은 여자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페미니즘적 여성 주체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은 소위 여성적인 리더십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남성적인 정치 질서에 대해서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바람의 화원>의 윤복도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만 역시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 윤희는 이 두 인물의 한계를 넘어, 가부장적 질서를 비판하고 그에 도전하는 인물이다.

윤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남동생은 병약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지금으로 치면 십대 여성 가장인 셈이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던 데다 스스로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쓰는 데 관심이 많았던 윤희는 남장을 하고 글을 팔아 돈을 벌었다. 과장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임금의 명을 받아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 윤희는 세 명의 꽃미남들과 동고동락 하게 된다. 물론 생계유지와 어명이라는 이유도 주요했지만, 윤희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이렇게 윤희가 생계와 꿈을 위해 남자의 모습으로 성균관에 들어간 상황은 여성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질서를 따라야만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윤희는 남성적 특성을 체현함으로써 남성적 질서를 수용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남성중심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비판하며 그 질서를 이겨내는 인물이다. 윤희는 여자도 남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성균관에서 벌어지는 체육활동에서도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려는 것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여자인 윤희가 남자와 똑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권위는 가부장제에 있으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개혁과 개방을 주장했던 정약용조차도 여자인 윤희가 학문을 탐하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윤희는 그런 스승에게 ‘남자와 동등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애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스승의 허를 찌르는 질문과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안 된다는 말로는 절 단념시키실 수 없습니다. 계집의 몸으로 글을 알고자 한 그날부터 지금껏 전 단 한 번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학문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계집은 백성이 아닙니까?”

“계집에겐 관원의 자격이 없다 하셨습니다. 헌데 스승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나라 조선은 왜 이 모양일까요? 관원의 자격을 지닌 사내들이 쭉 만들어왔는데 말입니다.”

윤희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공적인 영역에 참여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상황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다. 그녀는 사회 질서가 추구하는 보편성과 공명정대한 원칙이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모순을 예리하게 파악한다. 즉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과 별개로 남성중심의 질서를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는 것이다. 윤희는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면서도 남성과 똑같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는 성적 차이를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제시하는 여성 주체와 닮아있다.

남자의 탈을 쓴 여자들

조선 후기의 윤희와 이 천 년대의 여성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윤희에게는 없는 권리가 현대의 여성들에게는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제 여성들은 남성과 똑같이 교v b 육받을 수 있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적어도 법적으로는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활동을 할 기회를 동등하게 갖고 있다.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윤희가 갖지 못했던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만족했던 평등한 참정권, 교육, 동일임금은 사실상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것이다.

이 평등한 권리들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자와 똑같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여성들은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똑같이 야근을 할 수 있고, 결혼 후에도 아이를 낳아도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며, 부족함 없는 이성적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여성들은 남성이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특성들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들과 가치들, 그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는 의문에 부쳐지지 않았다. 여성철학자 뤼스 이리가레는 이러한 문제점을 간파하고, “누구에 대한 평등인가?”라고 묻는다. 이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아지는 것이 과연 진정한 여성해방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사회문화에서 남성이 수립한 언어를 사용하고 법과 질서를 따라야 하는 한, 남성의 타자일 뿐 진정한 여성 주체가 아니다. 남성과 인간이 동의어인 세계에서 여성은 남성처럼 되어야만 인간으로 또는 시민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뭔가 덜 가진 존재로 여겨진다. 또한 여성이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역시 여성 주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오히려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남성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리가레는 여성이 남성처럼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남성이 ‘인간’ 개념을 구성하는 기준이 되는 상황 자체를 문제 삼고, 여성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 가면서 진정한 여성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여자답게’ 변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고은찬(커피 프린스)은 겉모습만 변했을 뿐 여전히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 이미지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이는 한 발 나아가, 남성과 똑같은 힘과 권리를 가진 여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바랐던 여성의 모습이다. 이런 덕만은 성 주류화 정책에 힘입어 고위관직에 진출하고 기업의 CEO가 된 우리 시대의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이런 여성들이 가부장제적 관점을 철저히 내면화한 ‘명예남성’으로서 오히려 반여성적인 언행을 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그렇다면 윤희는 진정한 여성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여성 주체란 무엇일까?

페미니즘적 주체

이리가레와 같은 차이의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하는 진정한 여성 주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런 여성이 될 수 있는지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진정한 여성’의 내용을 못 박아 두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가부장제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체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계속해서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적 주체성을 구성해 가는 여성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희는 전통적인 여성성을 고수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명예남성이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과 장점을 권력을 가진 남성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남성 권력의 모순을 드러내고 도전한다. 즉 윤희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하면서도 그 중심 자체를 뒤흔드는 여성인 것이다. 그리고 윤희가 이렇게 할 수 있게 된 동력 중 하나는 그녀 자신의 욕망이다. 이런 모습은 이리가레가 말하는 여성 주체와 많이 닮아있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여성들의 일상적 모습과도 비슷하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은 모두 남자의 탈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은 이 질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특성을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어느 정도는 남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남자의 탈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한다.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여성에게 남성중심적 사회 질서에 적응하고 그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그 질서가 여성을 방해하고 괴롭힌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핵을 깨뜨리는 것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와 소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여성들이 처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은연중에 사회적으로 공유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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