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변화, 일파만파의 교육혁명이 된다 1-③ [4人4色 책읽기]

김세연 (인천도림초등학교 교사)
왜 세계 사람들은 핀란드에 주목하는가?

대한민국의 교육에 만족하는 학생, 학부모, 교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 계속 쏟아지는 교육관련 책들과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학교가 가고 싶은 곳, 즐거운 곳, 행복한 곳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교사인 나도 점점 힘들어지니 학생들은 어떤 마음일지 상상이 된다. 한동안 교육계에는 핀란드 바람이 불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국제학생성취도평가(PISA)에서 핀란드 학생들이 2000년, 2003년, 2006년 모두 다른 나라의 학생들보다 우수한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나도 교육복지의 나라, 교육개혁이 성공한 나라로 불리는 핀란드가 궁금했다. 물론 한국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세계 사람들이 핀란드에 주목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 결과에만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핀란드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북유럽 교육탐방의 기회가 있어 2010년 1월에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학교를 직접 방문했다. 먼저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교육현실을 볼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건물 하나를 짓더라도 아이들을 생각하고, 교육철학을 녹여 토론을 하며 교사들이 설계안을 낸다. 국가에서는 교육과정의 큰 틀만 제시하고 모든 권한은 학교와 교사에게 준다. 단 한명의 학생도 소중히 여기고 대학입학 시험 전에는 특별한 평가를 하지 않는다. 복지국가이다 보니 교육비 걱정도 없다. 누구라도 배울 수 있는 평등한 기회가 보장이 된다. 정권은 바뀌어도 국가교육청장이 20년간 바뀌지 않은 나라가 핀란드다.

 

Commentary – 핀란드 vs. 대한민국

우리의 교육현실을 돌아보면 절로 한숨이 나고 걱정이 된다. 사회적 합의도 없이 교육정책이나 제도를 만들고, 몇 십 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모양의 교실에서 똑같은 교과서로 아직도 일제식 수업을 하고 있다. 핀란드를 부러워만 할 수도 없고 핀란드 제도를 갖고 온다고 해도 사회적, 문화적 차이가 있는 이 나라에 잘 정착할 수도 없다. 우리식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핀란드 교실 혁명>은 저자 후쿠타 세이지가 수십여 차례 핀란드를 방문하고 쓴 책이다. 핀란드 교육제도와 여러 가지 특징들이 설명되어 있고 학교 3곳을 탐방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학교탐방은 하루 종일 수업을 세심히 관찰하고 기록하여 핀란드 교육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책이 단순히 번역만 해서 출판했다면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우리식’으로 교육을 펴기 위해서는 ‘우리 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꼭지마다 한국과 핀란드를 비교한 번역자의 해설이 달려 있어 좋았다. 난 이 해설부분에 크게 공감했다. 국가 정책이나 예산 문제처럼 거창한 문제는 일단 제쳐두자. 핀란드 교육의 좋은 점 중에서 반드시 우리가 교실에서 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내용이다.

 

교육혁명의 시작 – 교실

그 내용을 곱씹으며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 펴냄)이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관점을 살펴보자.

첫째, 지식관과 학력관의 변화이다. 지금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암기하고 있는가를 두고 평가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 두뇌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가 진짜 필요한 지식일지는 의문이다. 사회구성주의적인 학습관은 지식이 고착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스스로 편성해가는 것이라 본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을 구성하는 주체의 목적, 가치관, 알고 싶다는 욕구 등이 중요하고 교사는 학습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PISA2009에서는 디지털을 이용한 읽기, 쓰기 능력이 처음으로 측정되었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개발하여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교육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둘째, 학생들에게 동기부여하기이다. 핀란드는 학생 뿐 아니라 학부모, 교사 모두가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공부는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만 강요한다. 교사들은 학생의 관심과 흥미보다 내가 잘 가르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아이들이 무엇에 관심과 흥미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배움이 즐겁다고 느끼게 해줘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자기주도적 학습은 다른 게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이다. 핀란드에서는 아이들이 일주일간의 학습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평가하는 시간이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데 교과학습과 그 외 하고 싶은 내용을 스스로 계획한다.

셋째, 협동학습을 통한 교육활동이다.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속에서 더욱 큰 배움이 일어난다. 경쟁은 사고력을 약화시키고 깊이 생각할 시간과 협동의 기회도 빼앗고 심각한 스트레스와 공부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낳는다. 반대로 협동학습은 학생들의 사회성도 키우고 학습의 효과도 높다. 교실의 분위기와 학생들의 공부 태도에도 영향을 미쳐 서로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방송에서 많이 나왔던 아키타 현의 기적과 사토 마나부 교수의 배움의 공동체를 실천하고 있는 학교들을 보면 협동학습의 효과를 실감할 수 있다. 어느 학년을 가르치더라도 수업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넷째, 학생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다양한 수업 모형을 개발하는 것이다. 특히 교수법 보다는 학습법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진보적 교육감이 당선된 지역에서 추진하는 혁신학교에서는 주제통합 학습, 블록제 수업, 테마 학습 등의 다양한 수업이 이뤄지고 있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할 수 있는 수업은 집중력도 높고 학생들이 즐거워한다. 단순한 암기, 지식 전달만을 하는 수업을 벗어나 보자. 기존의 수업 모형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다수 학생들은 낙오자가 되고 만다. 그 아이들을 수업에 참여시켜야 한다.

다섯째, 여유를 두자. 우리는 수업을 시작하고 아이들이 집중하지 않으면 바로 통제가 들어간다. “여기를 봐라”, “책을 펴라”, “떠들지 마라” 등의 말을 하거나 심지어는 체벌을 하는 교사도 있다. 하지만 핀란드 교사들은 다르다. 학생들의 개인차를 인정하고 여유 있게 기다릴 줄 안다. 신기하게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천천히 수업에 참여한다. 15분~20분 정도가 되면 모두 함께하는 수업이 된다. 우리의 조급함이 더 산만한 수업을 만드는 게 아닐까 한다.

물론 평가와 입시가 있는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면 교육의 새로운 변화는 오지 않는다. 바꾸려는 작은 노력과 실천이 있어야 큰 변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들의 변화이다. 협동학습을 이야기했지만 실제 교사들은 협동, 협력하고 있지 못하다. 교사들의 교육철학, 실천 노력, 배움에 대한 가치가 변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교육주체끼리 서로 상대의 변화만 요구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일파만파라 했다. 교사의 변화라는 물결이 교육혁명이라는 파도를 몰고 오리라. <핀란드 교실 혁명>은 큰 변화를 향한 첫 걸음에 용기와 격려를 보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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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첫번째 책은 후쿠다 세이지 지음,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으로, 윤영돈(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윤희(서울 상도중학교 교사), 김세연(인천 도림초등학교 교사), 박재원(기획 및 번역자)의 글을 게재합니다.

핀란드 교육이 아닌 ‘교실’을 이야기 1-④ [4人4色 책읽기]

박재원 (기획 및 번역자 / 비상교육연구소 소장)

우리나라에서 교육 이야기만큼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최근 복지 논쟁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지만 교육 문제만큼 꼬여 있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이 책은 이미 많이 읽혔다. 그래서 지금 시점에서 의미 있는 서평은 새로운 서평이 아니라 이전 서평에 대한 정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 일반 독자가 아니라 번역과 해설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간의 서평을 평가해보고 싶었다. 전반적으로 낮은 평점을 준 독자들에게 서운함과 미안함이 교차한다. 소모적인 논쟁의 역사로 점철된 교육 분야의 책이어서 일까? ‘혹평(별 2개)’과 ‘호평(별 5개)’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혹평과 호평 사이에서

우선 해설자에 대한 평가에서 크게 엇갈린다. ‘학교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주변부에’, ‘구체적인 현실경험이 없는 이론학자’, ‘등수와 만점에 집착하는 인간’ 등의 혹평을 볼 수 있다. 반면 ‘진보적 교육운동가가 아니라 사교육의 첨병에 서 있는 사람’의 문제제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서평도 있다. 다음으로 이 책의 특징인 원작 뒤에 붙인 해설 자체에 대한 혹평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척하는 논평에 짜증이’, ‘이건 완전 이 책에 대한 테러다.’, ‘저 해설 때문에 완전 망쳤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새롭고 신선한 시도다.’ ‘우리에게 뼈아픈 반성의 시간을 제공한다.’는 호평도 보인다. 마지막으로 해설 내용에 대한 평가에서도 분명하게 갈린다.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교실에 대한 비판’, ‘공론적인 담론하는 변이 참으로 역겹다고 느낀다.’ 가볍게 볼 수 없는 혹평이지만 아래와 같은 극찬의 호평도 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우리나라 교육과 비교하여 대안을 생각해보는 내용’, ‘우리나라도 교육현장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변명과 옹호

핀란드를 선택한 것은 다분히 선정적인 동기였음을 인정한다. 핀란드가, 특히 핀란드 교육이 워낙 잘 팔리는 인기 주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이 순수하지 않았다고 해서 전부를 매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작은 속물이었지만 나중은 교육적 열정으로 채워졌다고 생각한다. 핀란드 교육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활용하여 우리 교육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정말 진지하게 했다고 생각한다.(물론 심각한 혹평들을 보면서 반성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핀란드 교육 읽기는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따라야 할 모범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따라할 수 없는 이상으로 보기도 한다. 추구해야 할 가치로 보기도 하지만 참고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생각도 보인다. 하지만 어렵게 구한 이 책의 원작을 보면서 우리에게 절실한 ‘핀란드 교육 새롭게 읽기 방식’이 떠올랐다. 바로 핀란드 교육이 아니라 교실을 진지하고 자세하게 관찰하는 방식이다.(이 책에는 실제로 핀란드 교실을 촬영한 사진이 많다.)

핀란드 교육과 우리 교육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교육을 정치와 경제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정말 다르다. 1972년부터 91년까지 국가교육청장을 지낸 에르키 아호의 사례가 상징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교육은 계속 되었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 책에 소개된 내용만으로도 핀란드 교육의 다른 점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잡무에 시달리는 우리 교사들에 비해 핀란드 교사들은 ‘학부모나 행정기관도 교사를 지원’(60쪽)하고 있다. 온갖 규제에 시달리는 우리 현실과는 달리 핀란드는 ‘거의 모든 권한은 일선 학교로 위임, 관리나 감시에 소요되던 불필요한 인력이 없어졌고 결과적으로 학급당 학생 수를 줄일 수 있었다. 게다가 지식(교육과정)은 국가 관리에서 해방되어 학습 주체가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 되었다.’(23쪽) 또한 ‘아이의 능력에 맞는 수업이 가능하도록 커리큘럼과 교재가 짜여 있다.’(95쪽) 공부 못하는 학생들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편견이 난무하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핀란드는 ‘뒤떨어졌다든지 특수하다든지 하는 구별은 하지 않아요.’(159쪽)

하지만 핀란드 교실과 우리나라 교실을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기도, 의미 있기도 하다.(물론 학급당, 교사당 학생 수의 차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를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육이 핀란드 교실 관찰하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소득은 참으로 많다고 생각한다. 정권이 바뀌고 국민들의 불만과 원성이 터져 나올 때마다 시도되었던 교육 개혁이 계속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 바로 총론만 있고 각론은 없는, 방향과 원칙만 제시하고 교실 현장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외면한 결과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결국 교실을 개혁하지 않으면, 수업을 혁신하지 못하면 그 어떤 제도적 개혁도 공염불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핀란드 교실이다. 먼발치에서나마 핀란드 교실을 관찰할 수 있기에 막연하기만 한 수업 혁신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상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실제로 핀란드 교실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적용하여 개발한 교재 시스템을 활용하여 수업 혁신에 성공한 국내 사례가 있기도 하다.)

또한 왜 학부모들은 학교를 불신하는가, 왜 학생들은 학교 수업에 열심이지 않은가, 굳이 자기 돈을 내고 사교육을 받으려는 이유는 정말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충분히 고민하고 나름대로 진단한 문제들에 대한 인식에도 편향과 왜곡이 있었음을 깨닫게 만든다. 바로 학교 교실의 낮은 생산성으로 인한 악순환 구조의 재생산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만든다. 공교육으로 얻은 세계 최고 학력과 사교육으로 얻은 비슷한 학력에 대해 깊은 우리 교육이 천착하여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도 다른 교실의 분위기를 통해 우리나라 학교에서 여전한 권위주의적인 모습들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교권이 붕괴되었다고들 하는데 정말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어떤 모습으로 달라져야 하는지, 그 이상향을 핀란드 교실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흐르는 학부모와 학생 중심의 관점에 대해서도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 사회에서 사교육이 공교육에 완승하는 근본적인 요인 중 하나는 바로 학부모와 학생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공교육이 학부모와 학생을 위에서 바라본다면, 사교육은 옆에서 아니면 밑에서 바라본다. 일본에서 시작된 배움의 공동체 운동이 우리나라에도 착근에 성공하면 정말 많이 달라지겠지만 핀란드 교실에서 볼 수 있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대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비록 사교육이기는 하지만 정말 많은 학부모, 학생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만난 경험을 통해 우리 교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학부모들의 이기심을 비난하고 입시준비에만 매달리는 학생들을 탓하지만 과연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만큼 당당할 수 있는지 늘 묻고 싶었다.

학교 교실에서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학교 밖에서라도, 개인적으로 비용을 지불하면서라도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학교에 가면 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옆에서, 밑에서 바라봐주는 사교육 현장을 찾게 되는 사정을 보듬어줄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접한 핀란드 교실을 통해 정말 우리의 학부모와 학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학교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교육학자나 관료 또는 교사들의 시선이 아니라 정말 너무도 간절한 학부모와 학생의 입장에서 핀란드 교실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 학부모가 진정으로 원하고 학생들이 환호할 수 있는 교실의 모습을 통해 더 이상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핀란드 교실을 따라하면서 우리 교실도 조금씩 바꿔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긴 해설을 달게 된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정말 핀란드와 한국 교육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육 생산성 측면에서도 더욱 그렇다. ‘시험을 위해 한 공부는 대개 낭비된다.’는 말을 떠올리면 평가제도와 경쟁풍토의 개선 없이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드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핀란드 교육이 아니라 교실 관찰하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거시적인 관점이 아니라 미세한 관찰을 통해 배울 것이 있다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냥 한 번 해보자. 이것저것 사정을 너무 많이 알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단순해야 용감해질 수 있고 그래야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런 맹목성에라도 희망을 걸어야 할 만큼 우리 교육에서 신음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문제는 심각하다. 교실마다 자살 대기자들이 한 두명씩 있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하는가?

 

엄연한 경쟁현실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대안은 바로 교실부터 바꿔서 사교육으로 쭉 이어지는 초장시간 공부노동으로부터 조금은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핀란드 교실혁명’이 우리 교실 바꾸기의 교본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소박한 문제제기에 대한 반응

본격적인 핀란드 교육 평론서를 기대했던 독자들은 주로 별 2개를 준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해설자의 소박하지만 간절한 문제제기에 반응한 독자들은 별 5개를 주지 않았을까. 하지만 혹평을 보면서 예비 독자들에 대한 의무감을 느낀다. 더 이상 실망하는 독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혹시라도 이 책을 보고 싶다고 느끼는 독자들 중에 아래와 같은 사람은 책을 구입하지 말고 도서관에서 빌려 해설을 빼고 원작자 부분만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현직 교사가 아님에도 학교 교실을 이야기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

-핀란드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핀란드 교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원작보다 많은 해설로 인해 원작의 의도가 훼손되었을 것이라고 염려하는 사람

원작자 후쿠다 세이지의 핀란드 교실 지면중계는 정말 가치 있는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육이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는 수월성과 평등성의 갈등을 해소시킨, 두 마리 토끼를 멋지게 잡아낸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교육이 그동안 놓쳤던 교육 개혁의 또 다른 핵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족 같은 해설자의 개입으로 인해 원작자의 기여가 축소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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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첫번째 책은 후쿠다 세이지 지음,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으로, 윤영돈(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윤희(서울 상도중학교 교사), 김세연(인천 도림초등학교 교사), 박재원(기획 및 번역자)의 글을 게재합니다.

 

5천년 최고의 문장, 박지원, 『연암집』[연암읽기]

전호근(경희대)

『연암집』은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문집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일상적인 글쓰기 주제인 서(序)·발(跋)과 시(詩)·서(書)는 물론이고, 임금에게 올린 장계(狀啓)나 대책(對策), 소(疏)뿐만 아니라 「방경각외전(放?閣外傳)」 같은 소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장편 기행문으로 평가받는 「열하일기(熱河日記)」와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과농소초(課農小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일찍이 구한말의 창강 김택영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학자들은 연암이 우리 고전문학의 최고봉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만큼 연암의 문장은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연암집』을 읽는다는 것은 고전 애호가들은 물론이고 연구자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도전이다. 지극히 아름답지만 또 지극히 난해하다. 또 하나, 당대 조선인들의 삶을 구구절절하면서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연암집은 참으로 귀한 책이다. 예를 들어 「열녀함양박씨전 병서」에서 연암은 과부의 심정을 이렇게 읊는다.

“가물거리는 등잔불 제 그림자 위로할 제 홀로 지키는 밤은 지새기가 어렵더라. 게다가 처마 끝에서 빗물이 방울져 떨어지거나 창가에 달빛이 하얗게 흐르며, 낙엽이 뜰에 뒹굴고 외기러기 하늘에서 울며, 멀리 닭 울음도 끊어지고 어린 종년은 세상모르고 코를 골면 가물가물 잠 못 이루노니 이 괴로움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가만히 읽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은 당시 사대부뿐만 아니라 여인과 중인들에게까지 필사되어 읽혔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군왕이던 정조(正祖)조차도 연암을 글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파급력이 컸다는 뜻이다. 사실 연암은 혈연이나 정치적 계보로 치면 당시 신분사회의 최상층부에 있었던 주류였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조금도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암은 당시 양반지배층의 고루하고 위선적인 관념을 선뜻 뛰어넘었던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 등 서얼 출신들과 마음을 터놓고 진실하게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인들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고 참외 파는 사람, 돼지 치는 사람도 서슴없이 자기 친구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떠돌이 거지나 이름 없는 농부, 땔나무 하는 사람, 시정의 왈패 등 하층민이 자주 등장한다. 상하의 위계가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감히 시도하기 어려운 글을 쓴 셈이다. 그런 점에서 연암은 진정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연암의 빛나는 문장은 바로 그런 자유로운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암의 글은 호탕함에서는 『맹자』와 견줄 만하고 신랄한 풍자와 날렵한 비유에서는 『장자』를 넘나든다. 예컨대 맹자의 논리로 성리학적 사고에 갇혀 있는 당시의 지식인들을 매섭게 비판하고, 장자의 다채로운 표현을 빌어 시골 사람의 코고는 소리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중국의 고문을 모방하는 글쓰기에 얽매어 있었던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연암의 글을 잡글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시대를 꿰뚫어 보는 예리한 감각으로 양반지배층의 위선과 가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게다가 읽는 이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해박한 지식, 불한당도 여지없이 설복시키는 명쾌한 논리, 마치 눈앞에서 대상을 보는 듯 착각하게 하는 사실적인 표현, 읽고 있으면 절로 무릎을 치게 하는 절묘한 비유 등으로 많은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그의 글은 읽는 사람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며 머리털이 쭈뼛 서게 하거나 목이 메이게 하는가 하면 무릎 치며 탄복하다가 종내 가슴이 아려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는 마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우쳐주기까지 한다. 오늘날 우리가 연암의 글을 읽어야 할 이유다.

[월례발표회 참관기] 박지용 선생의『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하여

?[2011년 4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
발표자: 신승철 (동국대)

 

박지용 선생의『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하여

후기: 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

 

1.

철학자들에게는 야릇한 흥분을 주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철학토론이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런 결론도 없이 끝나고, 생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철학적 토론에 저렇게 흥분하는 사람들을 정말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에게 결론이 없다거나, 생산성이 없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철학자들에게 철학적인 토론은 그 자체로서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준다. 그것은 마치 투우장에 나간 투우사의 야릇한 흥분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야 그런 투우를 직접 본 적은 없고 그저 영화에서나 보고 짐작하는 것이지만, 뒷다리로 버티고서 커다란 눈으로 노려보는 소 앞에서 칼을 빼들고 미동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투우사의 긴장된 몸에는 리비도가 파릇파릇하게 돋아난다. 그런 리비도가 철학토론에 나선 철학자들의 몸에서 느껴진다 해서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철학자라는 인종은 독특한 유전자를 타고 난 것이 아닐까 한다. 무슨 철학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크로포트킨은 우애 협력의 유전자가 따로 있다고 하고 더구나 요즈음은 별별 유전자가 다 신문지상을 장식한다. 일본인에게는 가미가제 유전자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번 원전 사건을 보면 그들은 모든 대안들을 굳이 다 물리치고 가미가제식 특공대를 조직해서 스파르타 300인 전사의 흉내를 낸다. 그건 가미가제 식의 행동이 그들의 유전적 본성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철학자 유전자가 따로 있다고 해서 뭐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을까? 나 역시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수많은 다른 길이 있었는데, 실제로 상당히 오래 그쪽으로 걸어가 본 적도 있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그저 철학토론회나 심포지엄에 참여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하니, 철학 유전자의 힘이 아니라 할 수 없다.

 

2.

그런데 자칭 한국 최대의 철학자 조직인 한철연의 월례 발표회에 참가했는데 도무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발표자와 사회자 그리고 회장, 딸랑 세 명이 나와서 이젠 아예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참여하니 이 사람들이 오히려 당황해 하니, 내가 오히려 민망할 정도이다. 혹이나 이 사람들이 내가 정말로 할 일이 없어서 여기에 참가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도 사실은 바쁜 일이 있지만 오늘 발표 주제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억지로 시간 내서 참가할 것이라는 분위기를 그것도 은근하게 풍기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하지만 우리들 철학자들은 서로 말은 안 해도 아니 서로의 변명을 짐짓 이해하는 철하면서도 다 알고 있다. 즉 우리들은 유전적 본성에 이끌리거나 아니면 강박증에 끌려서 철학토론회에 참가한 것을 말이다. 그러니 이미 세 명이라면 충분히 많은 수인데, 나까지 참가했으니, 철학토론은 봄을 맞아 푸른 리비도처럼 생기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이 금방 퍼진다. 철학토론의 장이 섰다는 소문 때문인지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정말 창피하게도 당구를 치러갔던 일단의 철학자들이 부끄러운 듯 당구대를 던지고 몰려들어 갑자기 좁은 월례발표회 장은 꽉 찬 느낌을 주었다.

 

3.

드디어 박지용 선생이 논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속으로 옛날에는 굳이 논문을 다 읽지 않아도 누가 논평을 통해 정리해 주었는데, 토론을 하기에 정말 모자라는 이 아까운 시간을 논문 낭독으로 다 보내다니 하고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눈으로 따라 읽기 시작한다. 그런데 『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이라는 논문 제목이 알려 주듯이 아무리 당대의 뛰어난 철학자라도 이런 철학논문을 한 번 읽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칸트라면 나도 약간 공부했고 더구나 숭고라는 개념은 여간 흥미로운 개념이 아니어서 여러 번 그 개념에 부딪힌 적이 있었기에 간신히 따라가기는 했지만 솔직히 중간에 맥을 놓치고 갑자기 졸음이 닥쳐와 꼬박 졸기도 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칸트나 숭고의 개념에 무관심했다면 읽는 도중 내내 졸았을 게 틀림없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내 앞에 앉아있던 서유석 선생도 졸았다고 고백한다. 여하튼 읽기를 마친 다음 드디어 토론의 시간이 다가왔다.

 

4.

논문의 요지는 칸트의 숭고의 개념과 관련된다. 철학자들에게는 상식이지만, 칸트는 숭고의 개념을 미감 판단과 구분했다. 그런데 칸트는 미감 판단은 예술을 대상으로 하지만, 숭고의 개념은 주로 자연에서 발견된다. 논자의 주장은 칸트의 숭고 개념을 예술적인 대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논자는 여기서 칸트의 숭고 개념이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 하나는 이것이 자연의 몰형식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런 자연의 ‘몰형식’은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키는데, 이런 마비가 숭고라는 감정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단순한 판단 마비가 아니라 판단 마비가 주관에게 일으킨 심정이 곧 숭고이다. 논자는 이런 측면에서 칸트에서 숭고의 대상이 객관적인 어떤 성질이라는 해석도 비판하면서 또한 숭고가 객관적인 전제 없이 일어나는 주관의 어떤 감정이라는 해석도 비판한다.

이어서 논자는 이 두 가지 전제가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에 대해 주목한다. 논자는 칸트가 사용한 치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 두 전제 즉 자연의 몰형식과 주관의 감정 사이의 관련을 찾아보려 한다.

논자는 이 지점에서 료타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특히 바넷 뉴먼의 색면추상)을 이런 숭고한 예술로 규정했다는 데 도움을 얻는다. 논자는 여기서 바넷 뉴먼의 색면추상 속에 시간의 발생이 표현되며, 이것이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이런 시간의 발생은 칸트의 몰형식 개념과 연결되므로, 그렇다면 이를 통해 숭고가 예술적 대상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칸트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5.

논자가 발표를 마친 이후 다들 한숨을 쉰다. 그 한숨은 승리자의 한숨이다. 그것은 졸린 것을 간신히 참고 견디었다는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이 아닐까? 드디어 투우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졸린 것을 참고 견딘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토론에 임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것은 웬 일인가? 아차, 투우장에 들어가기 위해 칼과 망토와 소를 홀리는 베일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필자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칸트의 숭고라는 개념이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말하자면 선무당이 칼바람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그 뒤 끔찍한 학살극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자. 필자를 포함하여 참여했던 철학자들의 인격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니 양해를 바란다.

토론을 통해 논자의 논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려고 애썼으나 다들 숭고라는 개념 앞에서 판단 마비가 생겨난 듯 했다. 토론 도중 송석현 선생이 숭고 예술의 예가 된다고 하는 바넷 뉴먼의 그림과 제리코의 그림 메두사의 뗏목을 프린트 해 와서 토론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토론이 어떤 결실을 얻기에는 다들 숭고 개념에 대한 가방끈이 짧은 것 같아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집에서 초연하게 앉아서 정리해본 의문을 이 자리에서 박지용 선생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논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6.

우선 논자의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얼까? 아무래도 숭고의 전제가 되는 자연의 몰형식이라는 개념이 아닐까? 그런데 자연에 몰형식이 존재하는가?

여기서 자연의 몰형식이란 무엇인가?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선험적 인식형식에 기초한다. 이런 선험적 인식 형식을 넘어선 세계가 곧 물자체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불가능하며 만일 판단한다면 이율배반이 생긴다. 이런 물자체의 세계가 곧 자연의 몰형식이다.

우리가 자연세계 속에 이런 물자체의 세계는 직접 출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일 자연 속에 몰형식이 출현한다면 이것은 논리적인 차원이 아니고 현실적인 차원이다. 예를 들어 우리 소시민은 돈을 셀 때 일억까지는 계산이 가능하지만 일조가 되면 계산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이런 일조의 세계는 논리적으로 사유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사유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사유불가능이 논리적 사유불가능성을 대신하는 경우가 칸트에게서 숭고의 전제가 되는 몰형식의 의미이다.

논자는 이런 대신의 관계를 치환(subreption)이라고 이름 붙였다. 논자는 이 관계를 설명하면서 ‘부정적인 현시’라고 규정한다. 즉 물자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으나 부정적으로 표시해 줄 수는 있다는 것이다. 논자는 칸트가 이런 치환의 구체적인 예로서 우상숭배 금지의 규칙과 이시스 신전의 비명에서 발견한다고 본다.

 

7.

몰형식에 관한 논자의 주장의 핵심이 제대로 정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것을 전제하고 박지용 선생에게 몇 가지 물어보자. 기회가 되면 한철연 웹진을 이용해서 답변해 주기를 기대한다.

우선 바넷 뉴먼의 색면추상이 왜 숭고하다는 것인지? 토론자 중에 이 그림을 보고 숭고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나뿐일까? 다행히 송석현 선생이 프린트 해온 데에는 박영욱 선생의 설명이 붙어 있었다. 즉 이 그림에는 어떤 형식이 없는 그래서 자기 지시적인 질료만이 존재하므로 숭고하다는 것이다. 몰형식이라는 측면이 숭고와 연관된다는 것은 짐작가능하다. 하지만 그런데 왜 바넷 뉴먼의 그림에 있는 붉음이나, 사각형, 그리고 중간의 노란 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형식이 아닌가? 의문이다. 뭐 이런 의문에 대해서 내가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논자는 이왕 료타르를 끌어 들였으니,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둘째로 이런 의문이 든다. 칸트의 숭고 개념이 바넷 뉴먼의 숭고 개념과 연결시키는 수단은 소위 시간의 발생이라는 개념이다. 그것이 논자에 따르면 료타르가 그 그림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개념이 칸트의 역학적 숭고 개념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바넷 뉴먼의 그림에서 시간의 발생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의문의 초점을 이제 논자의 핵심 주장으로 옮겨가 보자. 사유불가능하다는 것은 대상과 개념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마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칸트에게서 미감 판단은 상상력을 강화하면서 생겨나는 쾌감이다. 그것은 인식의 쾌감이나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쾌감과 구분되는 미적인 쾌감이다. 그런데 만일 상상력이 마비된다면, 거기서는 오히려 불쾌감이 발생한다. 그것은 현기증, 구토, 역겨움, 고통에 가까운 심정이다.

그런데 숭고의 감정은 단순한 구토나 고통과는 구분된다. 거기에는 어떤 쾌감이 흐른다. 그런 쾌감은 어떤 속성을 지니는 것인가? 이 쾌감은 단순한 구토나 역겨움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8.

숭고의 개념은 자주 자유의지의 실현을 통해 얻는 쾌감과 연결된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욕망의 만족이 만족감(pleasure)을 야기한다면 자유의지의 실현은 리비도적인 쾌감을 준다. (칸트에게서 자유의지의 이런 리비도적 성격 때문에 칸트와 사드의 비교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숭고의 경우가 물자체가 출현하는 부정적인 현상이라면 자유의지는 물자체(이 경우는 이념이라 한다)가 실현되는 긍정적인 경우이다.

물자체의 직접적인 출현은 칸트에게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칸트에게서 자유의지는 요청에 불과하다. 그렇게 본다면 숭고는 칸트에서 부정적인 현상으로 그친다. 그것은 역겨움과 고통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숭고의 감정에 들어있는 어떤 쾌감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헤겔이나 그 이후 프로이트 라캉 등에 이르면 물자체(또는 실재계)의 부정적인 출현은 곧 긍정적인 출현인 이념(이드)의 실현과 동전의 이면이다. 그러므로 숭고에서의 역겨움은 이념의 리비도와 결합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숭고의 심정이 더 적절하게 규정되는 것이 아닐까? 숭고 개념과 관련하여 헤겔이나 프로이트와의 연관성을 논자가 좀 더 설명해 줄 수는 없을까?

 

9.

필자가 너무 많은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닐까? 굳이 박지용 선생이 아니더라도 필자의 이런 의문에 대하여 누군가 한 수 가르쳐 주기를 바란다.

토론이 끝난 후 오랜 만에 중국집에서 군만두와 배갈을 먹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물 밀려오듯 다가온다. 오래 전에 사라진 세계여, 이제 늙은이가 되어 밤이면 기억나지 않는 꿈에 사로 잡혀 아침이 되면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소년은 이미 늙었고,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기억밖에 없다. 그러나 부끄러움의 감정 속에서 마시는 배갈은 정말 달다.

 

사이트 오픈 관련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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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4.7

‘e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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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1)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1)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고대 그리스 문화는 서구 지성사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제반 삶의 문제에 대한 근원적 탐문과 조회의 토대이자 학문적 통찰 및 창조적 상상력의 보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는 고대 그리스에 대한 정보는 그 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기대수준에는 못미친다. 앞으로 수년간에 걸쳐 연재될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은 인류지성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 문화와 관련한 총괄적인 정보 인프라의 구축을 목표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역사는 물론 정치, 사회, 경제, 예술 전 영역을 다루게 될 것이다. (당연히 원전 텍스트 전체가 하루라도 빨리 우리말로 소개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해 가장 걸출하고 가장 방대한 분량의 정보를 담고 있는 Jacob Burckhardt의 「그리스 문화사(Griechische Kulturgeschichte)」가 전체적으로 거의 다 소개될 예정이고 그에 덧붙여 다루어지는 주제와 관련하여 그때그때 필요한 관련 논의들이 추가로 포함될 것이다.

Jacob Burckhardt

 

그러나 위와 같은 계획이 워낙 장기간의 프로젝트인데다 주제 영역도 방대한 것이어서, 우선 그 실험적인 시도이자 서두적인 주제로서 “고대 그리스인의 사랑”을 몇 번에 걸쳐 다루고자 한다. 인류의 영원불멸의 주제인 에로스를 다루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서 너무도 중요하고 흥미로운 일이지만, 독자와 함께 떠나는 긴 여정을 에로스신의 힘을 빌려 처음부터 끝까지 열정어린 파토스로 이어가려는 필자 자신의 다짐이기도 하다.

이 논의를 위한 기본 텍스트는 Albin Lesky의 「Vom Eros der Hellenen」 (Vandenhoeck & Ruprecht in G?ttingen 1976)이고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우주론적 에로스 2. 아프로디테 3. 소년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 5. 헬레니즘기의 에로스 6.헤타이라 7. 외설로서의 에로스 8. 낭만적 열정으로서의 에로스 9. 결혼과 에로스

주제1 : 고대 그리스인의 사랑(Eros)

 

1. 우주론적 에로스(1)

기원전 2세기 중반에 「그리스 여행안내기(Peri?g?sis t?s Hellados)」를 쓴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보이오티아 지방의 조그마한 도시 테스피아이(Thespiai)에서 잘려져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은 돌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그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에로스 상(agalma)으로 숭배되고 있었다. 보이오티아는 이전부터 아주 오래된 전승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그런 점에서 테스피아이에서 발견된 에로스상도 결코 전승들과 무관할 수 없었다. 파우사니아스는 또한 그가 살던 시대에도 오르코메노스 성역에 있는 카리스 여신들의 신전에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여신들의 입상이 바쳐졌다고 전하면서 그러한 일이 테스피아이의 에로스 신전에서도 행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테스피아이 신전에서도 자연석뿐만이 아니라 두 개의 아주 아름다운 에로스상들도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펜텔리콘산의 대리석을 사용한 프락시텔레스(Praxiteles)의 에로스상과 뤼시포스(Lysipos)의 청동 에로스상이었다.

아주 오래 전 고대시대에 우상으로서 받들어지던 돌의 이미지를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은 후세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때 갈리아 지방의 남부에 있는 안티폴리스에서 타원형의 돌이 발견된 적이 있었는데. 그 돌에는 “나는 아프로디테의 시종 테르폰(Terpon:즐거움을 주는 자), 여신께서 나를 바친 남자들에게 상을 내려주시기를 원한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 경우 남자들이 바친 돌들은 남근(Phallos)의 상징이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이 경우에 비추어서 테스피아이의 에로스 상들도 그와 같은 것이었을 것이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고대인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제사의식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제사에서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주술적인 힘이 에로스라는 신격의 이름으로 그 돌에 묶여져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에게 에로스에 관한 최초의 정보를 전하고 있는 그 유명한 헤시오도스(Hesiodos)가 살았던 곳이 바로 이 테스피아이로부터 얼마 멀지 않은 아스크라(Askra)라고 하는 마을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헤시오도스는 농부이자 음유시인으로서 서구 문학사에서 명료한 윤곽을 가지고 파악되는 최초의 인물이다. 그의 서사시는 오늘까지 2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태초의 신들 생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신들의 계보(Theogonia)」이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에로스는 강력한 신격을 가지고 가장 이른 단계에서 발생하는 신들의 하나로 등장한다.

“진실로 맨 처음 카오스가 생겼네. 그 다음으로

넓은 가슴의 가이아, 곧 모든 것들의 영원하고 굳건한 터전이 생겼으며

또 안개 짙은 타르타로스가 생겼으니, 넓은 길이 난 땅(가이아)의 구석에 있도다.

또한, 에로스, 불멸하는 신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신이 생겼는데,

사지를 풀어지게 하는 이 신은 모든 신들과 모든 인간들의 생각과 의도들을

그들의 가슴 속에서 굴복시킨다” (116 이하)

우선 우리는 흔히들 카오스를 무질서와 혼잡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그것은 고대 개념에 대한 오해들 중 대표적인 것들 중의 하나이다. 카오스가 가지고 있는 가장 태초의 의미는 오리엔트의 세계상에도 찾아지는 이미지이지만, 만물의 근원으로서 크게 입을 연 심연, 즉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질료적 모태이다. 이 카오스로부터 모든 것의 원천인 가이아가 생겨나고 이어서 타르타로스라고 하는 나락이 열린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에로스가 태어난다. 그런데 헤시오도스가 이와 같이 에로스를 최초의 신들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옛날 어떤 이들은 헤시오도스가 테스피아이에서 살았다는 점에 착안하여 헤시오도스 자신 테스피아이 지방의 에로스 숭배를 이미 잘 숙지하고 있어서, 세계와 신들의 생성을 노래하는 시 가운데에서 에로스에게 이와 같은 특권적인 지위를 주었다고 해석한다. 일종의 향토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너무 단선적이어서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헤시오도스가 「신들의 계보」첫머리에서 에로스에게 부여했던 지위와 역할만 가지고 판단하더라도 헤시오도스는 에로스를 생식의 원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고 끊임없이 새롭게 다시 생명을 탄생시키는 힘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신들의 계보」에는 오리엔트지방에 산재하고 있었던 오래된 관념들과 아주 유사한 여러 가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러한 관념들 또한 에로스에 대한 그러한 이해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뷔블로스(베이루트 부근에 있던 항구도시) 출신 헤레니우스 필론(Herennius Philon : 기원전 1-2세기)이 지은 「페니키아의 역사(Historia Phoenicia)」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 실려 있는 우주 생성에 관한 정보는 시리아 북서부지방에서 기원전 1400-1200년경의 제사 내용을 그린 신화 텍스트가 출토된 이래 오늘날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필론은 자신의 책에서 우주의 생성 초기에 생식에 대한 욕망으로서 포토스(pothos)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헤시오도스가 그리고 있는 에로스에 상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헤시오도의 에로스를 ‘생명을 낳아 유지하는 힘’으로서 우주 가운데 기능하는 가장 위대한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본 일종의 추상적 이해이긴 하지만, 자연세계를 관통해서 작동하는 여러가지 힘들 가운데에 신적인 힘으로 직감된 것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그것이 고대인들에 의해 신화적인 표현으로 나타난 것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에로스 또한 그리스인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갖고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신을 신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그 활동 영역의 폭에서 볼 때 말 그대로 “우주론적 에로스”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앞에서 인용했던 헤시오도스의 싯귀가 담고 있는 의미가 결코 이 정도로 다 드러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곳에서 에로스는 “사지를 풀어지게 하는(lysimel?s)” 신으로 묘사되고 있고 또 모든 신들과 인간을 굴복 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우주론적 에로스”라기 보다는 개개의 인간 속에서 작용하여, 신들은 물론 인간 역시 자신의 의지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이른바 “사로잡는 힘”으로서의 에로스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나중에 에로스의 의미로 가장 크고도 깊게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에로스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제시되는 두 개의 모티브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이곳으로 귀결된다. 두 개의 모티브란 인간에게 생식의 힘은 물론 열망과 충족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축복으로서의 에로스와 그 반대로 인간 개개인을 꼼짝없이 사로잡는 정복자로서 고뇌를 가져오는 위험한 에로스이다.

헤시오도스의 서사시는 그러한 점에서 후대 그리스인의 사고방식과 감정을 예고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선 그 우주론적인 에로스와 관련하여 헤시오도스 이후의 작가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탄생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더듬어 보자.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산문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것은 기원전 6세기 중반 쉬로스 사람 페레퀴데스(Perekydes)가 쓴 「신학」(Theologia)이다. 남겨진 단편들만 보더라도 이미 그의 작품 속에는 고대적 전승들과 당시 새롭게 배태되고 있는 사변들이 기묘하게 서로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헤시오도스에서는 카오스조차 생성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자스(Zeus), 크로노스, 그리고 크토니에가 근원적인 힘으로서 늘 존재해왔던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것에 이어 세계가 탄생하는 계기가 언급되고 있지만, 특이하게도 자스 즉 제우스가 에로스로 그 모습을 바꾸어 이후의 여러 것들을 태어나게 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제우스가 모습을 바꾸는 이 기묘한 관념은 달리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인데, 아마 최고의 신인 제우스조차 생성에 작용하는 힘으로서 에로스를 함께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페레퀴데스의 제우스는 이처럼 에로스로 변하여 여러가지 대립적인 것들로부터 세계(kosmos)를 만든 후, 그 세계를 일치와 우애로 이끈다(DK7B3).

기원전 6세기 아르고스의 아쿠실라오스(Akusilaos)는 이른바 역사를 기술한 최초의 시기의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물론 그가 살던 무렵에는 신화와 역사가 아직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아쿠실라오스는 신화적 전승에 모종의 질서를 부여하면서 헤시오도스를 많이 의지하고 있다. 그의 기술에서도 카오스가 최초의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곧이어 남성 원리로서 에레보스(Erebos 땅 속 어두운 곳)를, 여성 원리로서 뉙스(Nyx 밤)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성적인 구분은 생성이 단순히 순서에 따른 발생이 아닌 생식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이 다른 쌍의 결합에서 아이테르(Aither 대기)가 생겨나고 이어서 근원적인 힘의 하나인 에로스와 그 가운데에 정신의 힘이 응축되어 있는 메티스(Metis 지혜)가 태어난다.

파르메니데스는 고대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상가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플라톤에게 있어서 어떠한 의의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요즈음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그는 사유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절대 불변의 존재와 우리가 살고 있는 가상의 세계를 구별하고 있다. 하지만 서사시 운율인 헥사메트로스 운율로 이루어진 그의 단편에 나타난 그의 우주론에 따르면 세계를 지배하는 여신이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먼저 고안해낸 것이 다름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섞이게 하는 힘으로서 에로스”였고(DK28B 12, 13) 플라톤 역시 「향연」에서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178B).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이상학」(2,7.1072b)에서 이와 관련하여 “부동의 운동자”의 운동 원리(arch?)를 에로스로 언급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에로스를 아르케로 상정하여 그것으로부터 실재 세계에 있어서의 활동을 이끌어낸 대표적인 사람들로 헤시오도스와 파르메니데스를 거론하고 있다.(984 b23) 그리고 파르메니데스 보다 한 세대 뒤의 사람인 엠페도클레스 또한 모든 생성과 소멸, 혼합과 분리의 원리로서 사랑(Philotes)과 불화(Neikos)를 끌어들이고 있는데 (DK31B17), 풀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책「에로스에 대하여(Erotikos)」에서 이 엠페도클레스의 필로테스가 바로 에로스임을 밝히고 있다.(756D).

이처럼 에로스가 가장 오래된 신이거나 그러한 신들로부터 태어났다는 관념은 철학자들은 물론 시인들의 저작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삽포(Sapph?)는 에로스를 우라노스와 게(G?) 사이에서 또 다른 곳에서는 우라노스와 아프로디테의 자식으로 기술하고 있고 알카이오스(Alkaios)는 에로스가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Iris)와 서풍의 신 제퓌로스(Zephyros)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풍과 사랑의 결합은 흥미롭게도 오리엔트 지방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하물며 셈족에서는 그 두 가지가 ruah라는 하나의 말로 쓰여지고 있다. 그리고 시모니데스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를 에로스의 부모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딧세이아」에 있는 이 두 신들의 정사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Antigone)」의 세번째 합창곡(stasimon)에 나오는 아래의 노래는 고전기의 전성기에도 “세계를 지배하는 에로스”라는 관념이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에로스, 싸움에서 질 줄을 모르는 이여

에로스, 재물을 결딴내는 이여

처녀의 볼 보드라운 살결 위에서

밤샘을 하고

바다 위를 떠돌거나

들판의 인가들을 찾아드는

불사의 신도 하루살이 인생을 사는 사람조차도

당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직 그대에게 사로잡혀 미쳐 날뛸 뿐 (781-790)

 

<다음에 계속>

누구나 불안한 시대의 단상 [썩은 뿌리 자르기]

김정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그야말로 불안의 시대이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모두 열심히 일만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삼키며 덩치를 키워왔다. 신자유주의는 그 결정판이라 할 만 하다. 서점에 널린 자기개발서에는 저마다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장밋빛 미래가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런데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그들이 말하는 승리의 방정식 뒤에는 ‘경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다른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현실은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속에, 패배자들을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다. 목표를 이루더라도 당장 승리한 현실을 지키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는다. 당연히 승리자도 불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한 편에는 패배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성공을 위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는 만큼 실패자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간다. 경쟁률 증가를 멈출 줄 모르는 공무원 입시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불안’의 시대에 ‘안정’은 점점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꿈을 좇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완전히 빠져서 당장의 생활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악을 열심히 만들고 좋아하는 글을 써도 힘겨운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은 왜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들은 분명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꿈’ 역시 ‘돈’에 따라 줄을 세운다. 사람들은 꿈을 좇는 그들이 얼마나 행복할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돈 안 되는 일에 미쳐 있는 철없는 사람들로 취급할 뿐이다.

이는 TV의 드라마만 봐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상위 몇%에 해당하는 재벌과 그들의 가족은 이미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된지 오래이다. 행복의 열쇠를 ‘돈’이 쥐고 있는 한, 드라마 속의 재벌가 주인공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생활수준의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눈앞의 불안을 단숨에 제거할 사람은 재벌가의 사람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보통사람들이 재벌을 만날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

– 불안의 원인

불안은 불확실한 요인에서 비롯된다. 알랭 드 보통은 이 불확실한 요인들을 변덕스런 재능과 운, 고용주와 그들의 이익, 세계경제 등으로 나누어 말한다. 재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운도 마찬가지다. 운은 찾아올 수도 있고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개인의 생계는 고용주가 지급하는 소득에 달려 있다. 그러나 고용주는 이익을 추구하려 하고, 이익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개인의 생계는 불안해진다. 고용주도 불안하기는 똑같다. 세계 경제의 불안이 주요 원인이다. 그러니 불안의 공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산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조차 자신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불안의 해결은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시장 기능에 의존하여 복지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무모한 발상이다. 이미 사회는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며, 가정은 구성원을 보살피는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무조건적인 경제 성장의 추구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줄 거라는 믿음은 이미 깨진지 오래다. 현 정권의 대선 홍보문구였던 747 공약은 이미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되어버렸다. 상당수 사람들의 희생으로 일군 가파른 성장이 영원할 수는 없다. 이제는 무엇이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인지 고민할 때가 온 것이다. 세계 경제 위기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최근의 복지국가 담론의 열풍은 이렇게 불안이 팽배한 사회에서 보편적인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담겨있다.

– 사회복지의 개념과 고대 동아시아 세계

복지란 무엇일까? 글자만 살펴보면 그냥 ‘행복’이고, 사전에서도 ‘행복한 삶’이라고 정의한다. 복지제도의 대상은 누구일까? 당연히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다. 행복이란 주관적인 가치이지만,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들이 있다. 이것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바로 ‘사회복지’이다. 위켄덴(E.Wickenden)의 정의를 보면 더 명확하다. “사회복지는 주민들의 안녕에 기본적이라고 생각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사회질서가 더 잘 기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보조 조치들을 확실하게 해주거나 강화시켜주는 법들, 제도들, 혜택들과 서비스를 포괄한다.”

정치의 근본이 백성의 기본적인 삶의 충족이라는 견해는 고대 동아시아 세계에도 존재했다. 제나라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창고가 가득차면 예절을 알게 되고, 입고 먹는 것이 족하면 영욕을 알게 된다. 백성들이란 근심과 고생을 싫어하니, 나는(군주는) 그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백성들이란 가난과 비천함을 싫어하니, 나는 그들을 부유하고 귀하게 해주어야 한다. 백성들이란 위험에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니, 나는 그들을 안전하게 보존해야 한다. 백성들이란 자신이 죽고 후대가 끊기는 것을 싫어하니, 나는 그들이 수명을 누리고 후대를 잇도록 화육해야 한다.”(“倉?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 民惡憂勞, 我佚樂之. 民惡貧賤, 我富貴之. 民惡危墜, 我存安之. 民惡滅絶, 我生育之.” 『管子』 「牧民」) 정치의 주체가 군주로 한정되어 있던 춘추 시대 인물의 말이지만 현대의 복지국가론에 비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예절이나 명예도 우선 기본적인 삶을 충족되고 나서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주관적이고 추상적이지만,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최소 조건은 먹고 사는 문제의 충족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예기』에서 공자는 유학의 이상향을 이렇게 표현했다. “큰 도(道)가 행해지는 세상에서는 천하를 공(公)으로 여긴다. 현인을 뽑고 능력자에게 일을 주어, 믿음을 키우고 화목을 닦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만을 부모로 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은 말년을 잘 마칠 수 있게 하고 젊은이는 잘 쓰일 수 있게 하며, 어린이는 잘 자랄 수 있게 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무자식 노인과 장애인은 모두 부양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남자는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시집갈 곳이 있게 한다… 이것을 대동이라고 한다.” (“大道之行也, 與三代之英, 丘未之逮也, 而有志焉. 大道之行也, 天下爲公. 選賢與能, 講信修睦,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男有分, 女有歸… 是謂大同.” 『禮記』「禮運」) 큰 도가 행해지는 세상이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떠한 차별이나 소외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학의 이상향은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관이나 또 다른 세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행복도 이 세상에 있고, 불행도 이 세상에 있다. 대동의 세계는 바로 우리가 서 있는 땅 위에서 이루어진다.

맹자의 말은 한결 더 구체적이다. 그는 백성들에 대해 “일정한 수입(恒産)이 없으면 평상심(恒心)도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관중의 말과도 유사하다. 선비는 학문과 수양을 통해 일정한 수입이 없어도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지만, 평범한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 기본적인 삶이 충족되지 않으면 평상시의 마음을 잃게 된다는 말이다. 맹자는 누구나 같은 넓이의 농지를 분배받아 경작을 하고 세금을 내는 형식의 정전론(井田論)를 내세워 기본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균등 분배와 조세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맹자가 제시한 이상향은 모든 법도가 잘 이행되었던 주(周)나라를 내세워 한 말이다. 그러나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임무는 오늘날 복지국가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의 담당자가 군주에서 의회 정치로 바뀌었을 뿐이다.

최근 복지의 선별과 보편 논쟁은 가치보다는 재원 확보의 측면에 더 중심이 쏠려 있다. 선별과 보편은 다른 말로 풀어보면 차별과 평등 문제이다. ‘선별’이라는 말은 결국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잘 만든 제도라도 사각지대는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기준에 의한 ‘자격미달’은 상황에 따라 커다란 박탈감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복지의 뜻이 행복이라면 행복을 누려야할 권리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 서구의 복지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서구에서 ‘복지국가’라는 용어는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나치 독일의 ‘전쟁국가’ 또는 ‘권력국가’와 대비하여 연합국 측의 전후 재건 목표로 ‘복지국가’를 내세우면서 등장했다. 그러나 시장 경제에서 발생하는 빈곤문제 해결에 관한 논의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16세기 영국에서는 구빈법을 제정했고, 19세기 말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을 막고 중상층 노동자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결국 복지제도의 시작은 기존 자본주의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보수언론들은 이 사실을 들어 복지의 원조가 보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지제도가 시작되는 시점만을 살폈을 뿐, 현대적인 의미의 복지국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현대 복지국가는 정치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이하 사민주의)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사민주의는 독일사회민주당에서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수정주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뒤 그 틀을 갖추었고, 1951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결성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이념적 좌표를 세웠다. 선거와 민주 등 기존 장치들을 사회주의 실현의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혁명을 앞세우는 사회주의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사민주의는 노동운동의 확대?발전과 더불어 발전했으며,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이 적지 않다.

– 한국의 복지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국의 복지 상황은 어떠한 특징을 갖는가? 앞서 말한 서구의 사례와는 전혀 다르다. 한국의 복지정책은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는 경제성장을 우선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노동정치의 영향을 받았다. 그 뒤 IMF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분배와 관련된 복지정책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OECD 가입국 가운데 GDP 대비 복지예산 비율은 여전히 최하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복지는 장기적으로 보편복지 시스템을 지향할 필요가 있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노동운동의 기반이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크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지 논쟁에서 어떤 정책이 옳은가에 대한 판단은 그들 각각의 지향과 방법을 살펴야 가능하다. 첫째 재정 확보 방법을 명확하게 살펴야 한다. 물론 현재 국가재정 구조를 개혁하는 것만으로도 복지 수준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일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장기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보편 복지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증세에 대한 부분이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똑같은 공약인데, 재정확보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지 않다면, 현재 보편 복지론을 공격하는 주요 근거인 일본과 남미의 복지병 사례를 극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우리는 겉으로는 ‘친서민’을 외치면서 실상은 전혀 다른 정권을 경험하고 있다. 진정한 포퓰리즘은 허울뿐인 복지다.

둘째 기존 경제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개혁에 대한 의지를 살펴야 한다. 현행 복지제도만 바꾼다고 해서 바로 복지 전체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반드시 조세 개혁과 다른 구조적인 문제의 개선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증세도 기존 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강행하게 되면 당장의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의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비정규직 일자리가 넘쳐나고 당장의 처지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늘어난 세금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제도의 개혁은 기존 시스템이 가진 맹점을 보완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맹자는 노인을 위해 나뭇가지를 꺾는 일과 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해를 넘는 일에 빗대어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경우(不爲者)와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경우(不能者)를 구분했다. 한국 정치는 해방 이후 줄곧 일부 편중된 정치세력의 주도 아래 역사를 거듭해왔고, 그래서 다른 형태의 정치 경험은 매우 부족하다. 게다가 당장 먹고살기 급급하기에, 정치판을 연예계 가십거리만도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일도 적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맹자의 말은 당시 통치권자인 군주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 그의 말은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허망하게 앉아만 있는 한국 국민들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할 수 있는데 그동안의 경험만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현실에 체념하면서 오히려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 결국 정치 주도 세력의 변화도 우리에게 달려 있고, 연대로 힘을 실어주는 일 역시 우리에게 달려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단정할 이유가 없다. 북유럽 복지국가 건설의 원동력이 노동 운동의 결집과 세력화였다는 점을 우리는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문화복지 실현이 가능한가? [썩은 뿌리 자르기]

박선정(한신대학교 대학원 노동정책 및 사회정책(협) )

2011년 상반기 우리나라는 예술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로 술렁였다. 첫 번째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석 달 사이에 일어난 인디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럼’의 이진원씨와 시나리오작가 최고은씨, 이 두명의 젊은 예술 작가에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이 두명의 예술가는 21세기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는 믿지 못 할 생활고로 인해 세상을 마감했다. 이러한 사건은 ‘예술은 배고프다’, ‘배고파야 예술한다’, ‘예술이 노동이냐?’ 등 아직 예술을 직업이나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적 인식과 문화산업은 고도로 발전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부를 창출하지만, 그것의 기회나 분배가 결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두 번째 사건은 유명한 성악가이자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김인혜교수의 제자 폭행사건이다. 처음에는 수업과정에서의 과도한 폭력행사로 시작하였지만, 그동안 공공연한 비밀들이 인터넷을 통해 드어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예술계 내의 만연한 비리와 권력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두가지 사건으로 만 봐도 우리사회에서 문화?예술의 현실이 얼마나 상업적이며 비민주적인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문제와 달리, 문화의 향유를 권리로 보는 시각이 보편화 되면서 문화복지라는 큰 틀에서의 지원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1년 업무보고를 통해 ‘희망대한민국’ 프로젝트(157개사업)로 1,600만명에게 공연관람 등 문화예술 프로그램 지원, 국립박물관 무료관람, 문화?관광?체육바우처로 3년간 소외계층 78만여명에게 혜택 (문화바우처 74만명, 여행바우처 2만여명, 체육바우처 2만3천여명), 문화취약계층 대상 공연관람 지원, 5,436개 초?중?고교에 예술강사 4,156명, 1,200개 사회복지시설에 예술강사 850명 지원으로 393만명 교육 혜택 등의 문화복지 정책들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정책들이 실제로 문화소외계층에게 문화권을 얼마나 실현 시킬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실질적인 효과성을 제외하고도, 우리 사회 안에서 예술가들이 경제적 이유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권력적 구조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현실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한 문화권의 실현이 과연 어떠한 의미인지 좀 더 고민해 봐야한다.

2009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발표한 ‘문화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문화예술인의 창작활동 관련 월평균 수입이 ‘없음’(37.4%), ‘201만원이상’(20.2%), ‘101~200만원’(13.8), ‘51~100만원’(10.8%), ‘21~50만원’(6.9%), ‘10만원이하’(5.1%), ‘11~20만원’(2.6%)의 순서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다른 직업군과 비교하지 않고 사회일반적인 시각으로만 보더라도 평균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이다. 이는 예술과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의 노동권이 보장되고 있지 않다는 것과 그로인해 여러 가지 사회적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화상품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08년 발표된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최종소비지출에서 오락문화에 지출하는 비용은 2000년 약23조에서 2007년 33조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상품과 그에 따른 소비는 늘고 있는데, 문화예술을 만들어내는 주체인 예술관련 노동자는 기본적인 소득조차 보장 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매우 비상식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 향유의 질은 누가 얼마나 좋은 문화상품을 어떠한 비용으로 소비했는가와 등가 한다. 이는 상품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화?예술은 살아남기 어려우며, 비용을 치룰 수 없는 사람은 문화를 일상적으로 향유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상품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화를 생산하는 예술가는 당연히 생활고에 시달리고 문화를 상품으로만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상품으로 개발되지 않는 문화는 접근조차 어렵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상품을 재화로 생산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통시키기 위해 권력구조에 굴복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문화?예술을 둘러싼 사회의 문제들은 문화상품의 생산과 유통, 소비라는 사회시스템과 모두 연결되어있다. 이것은 문화?예술 분야의 시장화가 예술가들의 사회보장과 사회구성원들의 문화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다.

하지만 정부는 이러한 사회문제를 매우 단순한 정책논리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 문화를 자체적을 생산하지 못하거나 구매를 통해서도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상품을 지원해 주면 되는 것이고, 시장에서 낙오된 예술가들은 그 대상자가 시장안에서 경쟁력을 갖추도록 단기적으로 지원하면 되는 것이다(하지만 지원을 거치고도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여쩔 수 없는 일이다.). 문화예술의 시장화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나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사회가 진정한 문화권을 실현하게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문화는 근본적으로 다양해야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다른 취향을 갖고,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니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이 좋은것이라고 강요되어서도 안되며, 일방적으로 선택된 것이 주어주는 것도 옳지 않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사회에서 다양한 문화가 건강하게 생성되고 유통되어야 한다. 이는 예술노동자들에 노동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 사회안에 예술 노동자들이 기본권을 보장받고, 즐겁게 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다양한 문화가 만들어 질 수 있다. 다양한 문화가 생성되었다면 그것을 우리사회의 구성원이 균등하게 접근할 수 있게 유통시켜야 한다. 이는 시장을 문화?예술의 시장화의 문제에서 오는 불평등과 양극화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정책을 통해 진정으로 우리사회의 문화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와같은 문제를 반드시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것 이다.

문화는 인간이 진화하여 공동체를 이룸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탄생했고 발전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삶에서 단지 본능적으로 요구되는 욕구이외에 의미를 찾는 존재이며 문화는 이러한 의미추구를 하도록 하는 핵심적 기능을 갖고 있는 만큼 삶에서 불가분의 존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화를 통해서 정체성과 사회적 귀속감을 갖게 되고, 삶의 가치나 윤리적 규범을 익히며, 창조적 자기 표현의 기회를 갖는다. 따라서 문화는 반드시 사회적 성격을 가지며, 사람들이 공유하고 함께 누리는 삶의 터전으로 역할을 한다. 다양한 형태의 문화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독점하기 보다는 공유하고 향유 할 때 문화는 더욱 풍요로워 질 것이다.

슈퍼우먼(Super Women)을 바라는 그대들에게 [썩은 뿌리 자르기]

나래(한신대학교 대학원 노동정책및사회정책(협) 대학원생)

올해도 어김없이 참아온 ‘그 날’

개나리가 먼저 꽃을 피우기 전에 봄이 왔음을 알리는 날이 찾아왔다. 그 날은 바로 올 해 3월 8일에 103주년을 맞이하는 ‘3.8 세계여성의 날’이다. “임금을 인상하라!”, “10시간만 일하자!”,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 등의 요구로 시작된 세계여성의 날은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1908년 3월 8일, 미국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1만 5천 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무장한 군대와 경찰에 맞서 싸운 투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여성들의 봉기는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라 유럽대륙까지 번졌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물가가 오르자 ’주부들의 봉기‘는 점점 빈번해졌고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로 퍼져나갔다. 여성노동자들은 시장의 상품 진열대를 부수거나 사악한 상인들을 위협하는 것으로 생계비용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행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여성의 참정권이 필수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여성노동자들의 저항을 기억하고, 나아가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여성노동자회의에서는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을 정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세계여성의 날은 여성들의 집단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으며 이 날 이후 더 많은 여성들이 사회주의당과 노동조합에 가입을 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날은 노동자들의 국제연대를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즉 여성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싸움에 있어서 여성의 날은 필수적인 날로 자리매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성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1908년에 시작된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 여성 선거권 부여 등의 요구는 현재 전부 보장되고 있는가? 103번째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현실을 둘러봐야 한다. 목숨을 건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이 진정한 여성해방을 맞이하였는지, 아니면 더 어두운 오늘을 맞이하였는지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슈퍼우먼일 수밖에 없다?

2009년에 방영된 모 기업의 주유소 광고는 현재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여성 정책의 목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광고의 내용은 간단하다. ‘이 세상의 모든 엄마는 가정 일도 잘하고, 아이들 교육도 잘 시키고, 나이가 들수록 늘어지는 살과 늘어나는 주름을 열심히 가꾸고, 남편 내조도 잘하고, 직장에서 일도 열심히 하는 슈퍼 우먼(Super Women)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한 명의 여성이 책임져야하는 역할이 이렇게 많을 수 있을까? 그리고 문제는 그냥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잘’ 해야 한다. 그래야 슈퍼 우먼(Super Women)의 칭호를 받을 수 있다. 또한 드라마나 영화, 소설과 같은 매체에서도 남편과 자식들밖에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구태의연해보이고 한물 간 등장인물 캐릭터 같지만 여전히 많은 시청자들과 독자를 감동하게 하는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여성의 상은 비단 이 광고에만 국한 되는 내용일까? 그렇지 않다. 얼마 전 모 방송국의 유명한 예능 프로그램에 페미니즘 여성작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공지영 작가가 출연을 했다. 어떻게 작가가 되었고 그동안 숱하게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보다 세 번의 이혼경력과 성이 다른 세 명의 아이를 키운다는 사실이 한국 사회에 밝혀지며 본인이 원하던, 원치 않던 여성들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여성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에서 공지영 작가는 이야기한다. 자신이 긴 공백 기간을 접고 다시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하는 세 명의 아이를 둔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고 말이다. 경제적인 문제에서 그녀 역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작품보다 이혼경력으로 더 유명해졌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다시 펜을 잡아야했던 그녀 역시도 이 시대에서 슈퍼 우먼(Super Women)임을 스스로 자처해야했던 여성인 것이다.

이처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교묘하게 결합한 한국 사회는 한없이 희생적인 어머니의 상과 노동자로서도 충실하게 기능하는 유능한 노동자의 상을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다. 결국 국가와 정부가 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하는 교육 문제와 보육의 문제, 여성의 노동권 등에 대한 부분을 가족에게, 특히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자본주의 사회와 이명박 정부는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스스로 슈퍼우먼(Super Women)임을 자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여성 노동자의 투쟁은 10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현장에서의 여성들은 어떤 상황일까? 한국에서 노동시간이 10시간에서 8시간으로 단축되었고, 민주노조가 창설되었고,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부여된 오늘날이지만 노동현장에서의 여성들은 저임금, 불안정한 노동조건, 성희롱 등에 무방비로 노출된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2009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금양물류에서 벌어진 성희롱 사건은 1908년 여성 노동자들이 외쳤던 요구가 정책적인 변화만을 가져왔을 뿐 여전히 노동현장에서는 그 형식적인 정책들 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회사명만 수차례 바뀐 회사에서 14년동안 일을 했던 여성피해자는 금양물류의 남성 조장과 소장에게 수차례에 이르는 문자, 전화통화 성희롱부터 피해자의 엉덩이를 무릎으로 치고, 어깨와 팔을 주물럭거리는 등의 육체적 성희롱을 당해왔다. 결국 성희롱 사실을 알린 피해자는 사측으로부터 징계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이혼 후 세 명의 아이를 양육해야했던 피해자는 그동안 회사에서 당했던 성희롱 사실을 사내하청지회에 가입하여 제보하였고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내는 등 자신이 당한 부당한 처사를 알리고 징계해고를 철회하기 위해 싸움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원청회사인 현대자동차에서는 이 사건을 외면하고 있다.

이 외에도 2007년부터 시작해 투쟁 1,000일을 훌쩍 넘긴 재능투쟁부터 진보교육감인 김상곤 교육감이 당선되었다고 숱한 화제를 뿌렸지만 실제론 임시강사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고 있는 경기도임시강사투쟁, 하루 10시간 동안 열심히 일해도 한 달 75만원이라는 저임금과 임시직 또는 간접고용 형태로 불안정한 조건에 시달리며 일을 해야 했던 홍대청소용역노동자들의 투쟁은 103주년을 맞이한 3.8 세계여성의 날에도 여전히 계속 되고 있다.

성장과 고용, 복지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2020 국가고용전략

작년 10월 이명박 정부는 ‘성장·고용·복지의 선순환을 위한 2020 국가고용전략’을 내놓았다. 경제위기와 함께 저출산, 고령화 등에 따른 인구구조 위기에서 벗어나 성장과 고용이 동행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는 추진배경 아래 일자리 희망 5대 과제에 따른 고용 정책이 제시되었다. 그 가운데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 정책은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일자리를 확대한다는 목표로 다양한 추진방안이 계획되어 있다. 주된 내용은 공공부문 영역을 시작으로 민간부문까지 시간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계획과 육아휴직과 연계한 시간제 일자리 창출 확대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이러한 정책은 여성들의 해방을 앞당겨 주는 정책들인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국가고용전략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동안 수없이 문제가 되었던 저임금, 비정규직, 간접고용 형태 등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 없이 여성들의 가정에 대한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져야하는 부담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그리고 국가고용전략에서 핵심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저임금과 단시간, 불안정한 노동정책은 여성 노동자들 뿐만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또 다른 피해자인 남성노동자들에게까지 확대되어 모든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물가와 자녀들에게 들어가는 막대한 교육비 등을 부담하기 위해 집안 일만 잘하면 된다라는 과거의 여성과 어머니들에 대한 상은 이제 구태의연한 이미지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가정에 도움이 된다면 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은 물론이고 성희롱을 참아가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에게 지금의 이명박 정부는 진정한 대안이 아닌 자본의 배를 더욱 불려줄 자본의 대안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노동과 삶의 권리를 위해 여성, 이제는 행동이다!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요구, 여성 참정권 요구 등을 내세우며 시작된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은 소름끼치도록 한국 사회에서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 그것은 비단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돈과 권력이 중심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1914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여성노동자의 날에는 여성노동자들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짜르의 독재 권력을 몰아내자는 요구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103주년 3.8 세계의 날을 맞이하는 우리들 역시 이명박 정부의 반여성적 노동 정책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 자본주의 사회에 전면적으로 투쟁을 벌일 수 있는 가치와 철학을 담은 요구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3.8 세계여성의 날을 150년째 맞이하더라도, 200년째 맞이하더라도 여전히 여성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 폭력에 노출 될 것이다.

103주년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외친다! “노동과 삶의 권리를 위해 여성, 이제는 행동이다!”

영화로 사유하기 (2) : 프레임

글: 이지영(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영화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단 영화적 메커니즘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좀 더 예민하게 생각해 주어야 할 부분이 바로 ‘의미’이다. 영화의 경우 ‘의미’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하는 바는 ‘언어로 전달될 수 있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물론 이 이야기(서사)도 의미에 포함된다. 하지만 동일한 서사를 다루고 있는 너무나도 많은 판본들이 서로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바이다. 영화의 의미가 이야기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다음 후보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주제이다. 주제를 파악할 때에는 당연히 여러가지 인문학적 이해가 동반된 해석이 중요하지만, 영화 텍스트의 문제로 한정하여 생각해 보자면 이야기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텍스트 이해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자. 살인죄를 지은 여자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이 경우 여자 주인공이 그런 죄를 저지르게 되는 상황을 누구의 시점에서 보여주느냐에 따라 관객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연민을 느낄 수도 있고,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시점(point of view)과 초점화(focalisation)의 문제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1인칭 시점이냐, 3인칭 시점이냐, 또한 그 시점이 관찰자인지, 전지적 작가인지에 따라 상황에 대한 이해와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달라진다. 하지만 시점과 초점화는 영화적인 방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에서 발달된 방식이다.(물론 영화에서의 시점은 문학의 경우와 유사성과 차이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 문제는 이후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이를 영화적 사유라고 부르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야기나 주제의 측면에서 영화를 접근하게 되면 문학보다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경우 영화는 대략 2시간의 런닝타임 동안 모든 것을 보여주고 말해야 한다. 분량이 더 길다고 더 수준 높은 예술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야기나 주제에 대한 보다 더 치밀하고 체계적인 탐구는 영화보다는 장편 문학 작품에 보다 더 적합하게 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문학과는 다른, 혹은 문학에는 없는 영화적인 측면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답하자면 ‘보여주기’, 즉 ‘시각적인 이미지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는가에 따라,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의미를 포함하여 언어로 표현해내기 힘든 의미까지도 제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초원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카메라로 보여줄 때를 생각해 보자. 초원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고정 카메라에 익스트림 롱 쇼트로 보여주는 경우(20초)와 빠른 편집으로 넓은 초원을 카메라가 빙 둘러가며 빠른 속도로 보여주고 그 후 그 나무를 풀쇼트로 보여주고 이어 클로즈업으로 나뭇잎들을 보여주는 경우(4초), 언어화시킬 수 있는 의미는 두 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 ‘넓은 초원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이야기는 두 경우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을 포함한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처음 장면은 정적이고, 두번째 장면은 동적이라는 것 외에 어떤 점을 통해 의미의 변별성을 언어화시킬 수 있겠는가. 영화의 경우 서사나 이야기 혹은 대사 등을 통해 구체적인 의미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혹은 의미로 구체화되지 않을 때에도, 이미 감각이나 지각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비언어적 의미의 중요한 요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그에 해당되는 이미지가 영화적 사유의 핵심적인 부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예를 통해서 그러한 감각을 생산하는 것은 프레임, 쇼트, 몽타주와 같은 영화의 기본 메커니즘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임부터 생각해보자. 우리가 영상을 접하는 경우 언제든 마주하게 되는 것이 바로 프레임이다. 일상적으로는 창문틀이나 문틀을 비롯해서 그림의 액자와 같은 틀(frame, cadre)을 의미한다. 영상의 경우 TV나 모니터의 틀 같은 물리적인 틀거리를 의미할 수도 있고, 그런 틀이 없는 경우 이미지의 한계지점을 말하기도 한다. 혹은 틀거리 안에 포함되어 등장하는 이미지의 내용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이론가 자크 오몽이 행한 프레임에 대한 세가지 구분이 바로 이것이다. 대상-프레임(cadre-objet), 한계-프레임(cadre-limite), 창문-프레임(cadre-fenetre)이 각각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이렇게 프레임을 구분지었지만, 사실 한계-프레임과 창문-프레임은 모든 경우 동시에 작동된다. 프레임은 이미지의 한계를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한계가 어디인가에 따라 프레임 안에 담기는 이미지의 내용물이 달라져 의미작용이 달라진다. 강의실 장면을 프레임 안에 담는 경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 위주로 프레이밍하는지 혹은 뒤에서 자거나 딴 짓 하는 학생들까지 프레임에 모두 담을지에 따라 이미지가 함축하는 내용은 명백히 달라지게 된다. 그보다 좀 더 까다로운 경우는 이미지의 내용물은 동일한데 이미지의 구성(composition)의 측면에서 다른 경우를 들 수 있다. 화면의 각도와 배치 등에 따라 언어로 명백하게 의미를 분절해내기 힘든 차이들이 나타난다.

미술사학자 다니엘 아라스는 프레임이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이야기를 명상할 수 있는 틀’이라고 말한다. 사각형의 틀을 설정함으로써 모든 원근법이 결정되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와 의미가 시작되는 곳이 프레임이다. 다니엘 아라스가 분석하는 르네상스 회화에 등장하는 원근법적 구성은 치밀한 계산을 통해 이루어지며, 관객 역시 한참 동안을 들여다보며 사유해야 의미를 파악해 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경우와는 사뭇 차이가 난다. 회화는 움직이지 않는 화폭 위에 그려진 고정된 이미지이고, 영화는 움직이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경우 이미지가 움직이기 때문에 관조와 침잠을 통한 사유는 쉽지 않다. 하지만 원근법이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생성해내고, 우리의 시선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회화의 방법론을 참고하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아라스가 행한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1433~1434)에 대한 분석을 참고해 보자. 이 그림은 수태고지라고 하는 성육화의 신비를 원근법적 구성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맨 처음 관람객의 시선을 끄는 것은 전경에 위치해 있는, 기둥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천사와 성모 마리아이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말들이 기둥 근처에 금빛 글씨로 쓰여 있다. 천사의 말 전부와 마리아의 거의 대부분의 말은 다 알아볼 수 있게 쓰여 있으나, 마리아의 말 중 성육화의 바로 그 순간을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 ‘fiat mihi secundum(제게 이루어지도록 하소서)’만 쓰여 있지 않다. 기둥 뒤에 가려져 있는 것도, 기둥 색이랑 글씨 색이 비슷해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말은 이미 예수를 상징하는 도상학적 기호인 기둥으로 화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그림 전체의 중심 부분으로 우리의 눈이 이끌려간다. 그림의 정중앙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문 안 쪽으로는 어두운 방에 있는 붉은 커튼과 침대 모서리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침대가 놓인 바닥면을 건물과 비교해 보면 침대는 구도상 그렇게 높게 놓일 수가 없다. 이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동정녀의 몸의 신비는 원근법으로 측정가능한 모든 기준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원근법적 측정을 일부러 벗어나게 묘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둥에 이어 두번째로 성육화의 신비가 묘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세번째로 관객의 시선이 이끌리는 곳은 기둥들로 이루어진 건물들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소실점이다. 이 소실점은 마리아와 천사가 있는 공간 바깥의 어두운 잔디밭과 맨 위쪽에 작게 묘사된 아담과 이브의 동산의 경계 지점쯤에 위치한다. 우리의 시선을 모아주는 원근법적 중심점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환기시키고 있고, 성육화의 신비를 통한 예수의 탄생은 구약에서의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대속한다는 의미와 동시에 에덴 동산에 쫓겨나는 사건과 신약의 수태고지라는 사건이 성서적으로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화가의 해석까지도 파악하게 만든다.

위의 예에서 보듯, 프레임과 그로부터 규정되는 원근법적 구성은 관객의 시선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며, 그에 따라 특정한 의미작용들을 생산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용의 대표적인 사례는 푸코의 분석으로 더 유명한 그림인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간단히 시선의 작용만 이야기하자면, 그림을 맨 처음 볼 때 우리의 시선은 화면의 전경에 위치해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대각선의 중심에 위치하는 화려한 옷을 입은 공주에게 이끌린다. 그리고 그 주변의 인물들로 시선은 옮겨 다니게 된다. 먼저 공주의 시선과 화가의 시선이 관람객인 나와 부딪히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며, 이 자리의 주인공이 누구일지를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화가의 손에 들려 있는 파레트와 캔버스의 비가시적인 뒷면 덕분에 우리는 더욱 증폭된 궁금증을 안고, 그림 내의 원근법적 중심점 근처로 시선을 이동시키게 된다. 결국 소실점 근처에 위치한 거울 속에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왕과 왕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림 바깥 관람자의 자리에 원래 왕과 왕비가 있었고, 희미하게만 처리된 그들의 존재가 이 그림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시선의 교환과 유희의 시작점임을 알게 된다. <시녀들>에 대한 푸코의 시선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저 유명한 논의는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프레임이 원근법적 구성의 출발점이며, 원근법적 중심화 작용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림을 특정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게끔 조직화하는 기본 원리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의 이미지는 회화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회화의 경우와 동일하지 않다. 회화의 경우 비교적 오랜 시간 그림의 구성을 살펴보고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을 이끄는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오랜 시간 들여다 본다고 이미지가 제시하는 모든 의미가 명시적으로 사유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해석되지 않는 감각이 그림에 존재하고, 어쩌면 그런 부분들이 그림을 더 매력적인 것으로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영화의 경우는 그림보다 더 모호할 수밖에 없다. 관객은 영화 속 이미지를 영화에서 제시해주는 만큼의 시간 동안만 볼 수 있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장면도 지나가버리면 더 이상은 못 본다.(물론 비디오, DVD, 파일 등으로 영화를 개별 관람할 경우는 사정이 다르지만, 극장에서 보는 영화의 경우 관객은 수동적으로 보여주는 만큼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관객은 나의 시선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화면 전체에서 무엇을 위주로 이미지를 선별해서 보았는지를 의식화하거나 기억해내기 어렵다. 이러한 영화 이미지의 운동성은 움직이는 매 순간 화면의 중심을 변경시키기 때문에 중심성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서사 영화의 경우 이미지들 역시 주인공이나 중심 사건을 시선의 중심부에 배치함으로써 중심화된 방식을 유지한다. 또한 내러티브 장치를 통해 중심성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측면이 이미지의 운동성으로 인한 탈중심화 경향을 상쇄시킨다. 내러티브라는 명시적으로 중심화된 의미망이 개별 이미지들을 연쇄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영화 속 사건이나 인물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미지들은 내러티브처럼 명시적으로 중심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시선이 어떤 방향으로 조직화되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한 채 관객은 감각적인 인상 혹은 의미만을 수용하게 된다. (서사가 분명한 영화의 경우 이미지는 서사의 중심화에 호응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서사를 강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대로 서사가 약하거나 깨어져 있는 경우 이미지들은 더욱 탈중심화된 경향성을 보이는 방식으로 서사에 호응하며 서사를 더욱 약화시킨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서사와 이미지의 차원이 불일치 혹은 균열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서사의 중심성을 이미지가 약화시키기도 한다.)

다시 말해, 영화의 경우 서사적 층위와는 별개의 차원에서 감각적 의미가 구성되어 있고, 이는 관객의 사유에 명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언어로 분절화될 수 있는 수준으로 명시적이지 않지만, 분명 이미지의 차원에도 관객의 시선을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화하는 감각적 구성이 존재한다는 점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영화 관객에게는 명시적인 의미 대신 ‘충격’과도 같은 감각의 덩어리들이 전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의 프레임은 관객에게 영화의 감각적인 의미와 사유를 전달하는 틀로서 기능하게 되고, 관객의 내부에서는 그 감각의 충격에 의해 사유가 일깨워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화의 경우에도 감각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회화적인 구성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영화의 이미지가 화면 바깥 관객의 뇌세포 이미지들에게 충격을 전달하고, 그것이 관객 내에서 자동기계적으로 사유를 촉발한다고 들뢰즈는 주장하였다. 영화 이미지가 전달되는 가장 기본적인 통로로 프레임을 들 수 있는데, 들뢰즈는 프레임을 포화/희박의 경향성, 화면틀의 기하학적/역학적 구성, 이미지들의 기하학적/역학적 결합, 중심이탈 프레임, 외화면의 문제 등으로 구분지어 이야기한다. 포화/희박은 프레임 안에 정보를 주는 구성 요소들이 얼마만큼 담겨 있느냐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인데, 중요한 점은 내용물이 많이 담겨 있느냐 혹은 적게 담겨 있느냐가 아니다. 포화이든 희박이든 정상성의 정도를 벗어나는 경향성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적당히 담겨 있을 경우 관객은 그로부터 정보를 파악하여 언어적으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너무 적거나 너무 많아서 거의 아무런 정보도 읽어낼 수 없는 경우(화면이 유리잔 속 우유의 하얀색만을 보여주거나 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이 화면 가득 등장할 경우 화면 속에서 결국 까만 점들 이외에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게 된다),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독해하게 된다.

화면틀의 기하학적/역학적 구성, 이미지들의 기하학적/역학적 결합, 중심이탈 프레임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들뢰즈가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목록에 다른 목록들을 계속 덧붙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계속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방식의 화면 구성이나 쇼트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분류하고 있는 프레임의 목록들은 원칙적으로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러한 구분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겠다. 앞에서 설명한 포화/희박의 프레임과 마찬가지로 다른 목록들에서도 역시 이미지들이 정상성을 벗어나는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 용어로 표현하여 정상성이라는 중심화의 범위를 벗어나 이미지의 탈영토화를 만들어내는 경우, 이미지는 그저 보거나 서술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기능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게 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 다른 방식이란 이미지가 프레임 안에 닫힌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화 전체, 혹은 전체로 열려있음을 의미한다. 프레이밍된 이미지를 닫힌 방식으로 읽는다는 것은 결국 그 내부에 주어진 구성 요소나 결합 방식에 따라 마치 언어로 기술하듯 의미나 서사를 유추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하지만 전체로 열려있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화작용을 벗어나 영화에서 보여지거나 말해지지 않은 그 너머의 것, 즉 지속하는 전체를 향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영화의 서사 너머에 존재하는 의미를 드러냄을 말한다. 바로 이 열린 전체의 존재가 이질적인 외화면의 존재이유가 되기도 한다. (열린 전체는 운동 그리고 지속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 설명되어야 하지만, 이번 호에서는 영화적인 방식으로만 한정하였고, 그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쇼트를 다루는 다음 호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완벽히 현전하고 있는 것이 외화면이다. 외화면은 프레임의 상-하-좌-우-앞-뒤 6군데에 있다고 말해진다.(노엘 버치의 구분)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등장인물의 출입이나 외화면 사운드에 의해 그 공간들의 존재를 알 수 있고, 언제든 화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다. 화면내 공간과 동질적인 3차원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이런 외화면을 동질적인 외화면이라고 부른다. 앙드레 바쟁이 영화적 외화면이라고 말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중요성이 있는 외화면은 이질적인 외화면이다. 이는 화면영역 바깥으로 동질적으로 펼쳐져 있는 3차원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정신적인 4차원, 5차원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에 빈번히 등장하는 클로즈업 같은 경우 주인공은 그저 현실적인 옆 공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향하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주인공의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사유가 향하는 다른 차원의 정신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외화면 공간의 경우 서사적 의미 내에서 납득될 수 있는 부분을 넘어서서 사유하는 전체를 향해 열려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나쁜 영화는 현재만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한다. 좋은 영화이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시간과 이후의 시간까지 관객이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액션 오락 영화를 보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들뢰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주인공과 더불어 그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듯 함께 긴장하고, 즐거워하고, 같이 몸을 움찔거리며 온통 정신을 집중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면 그 모든 것은 함께 끝난다. 영화에 대해 더 생각하거나 음미할 것도 없고, 런닝타임 이전이나 이후의 인물의 삶 따위는 더 이상 관객의 관심사가 아니다. 더 생각할 여지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저 스트레스 해소 잘했다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은 영화, 감동적인 영화를 보았을 때의 상황은 이와 다르다. 영화가 끝나도 그 여운이 오래 남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타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좋은 영화는 보이고 들리고 말해진 것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과 그에 연결된 관객의 사유와 삶, 그 모두를 포함한 거대한 삶 전체를 향해 열리게 되는 것이 바로 비정상적인 프레임의 다른 기능, 이미지의 다른 방식의 독해가 의미하는 바이다.

의미작용과 더불어 그를 넘어서는 감각적 사유까지 전달할 수 있게 하는 프레임은 쇼트로부터 따로 떼어낼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모든 이미지, 모든 쇼트에는 프레임이 전제되어 있고, 모든 프레임은 언제나 쇼트에 동반된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프레임만을 독립적으로 논의해 보았다. 하지만 프레임은 앞의 논의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영화 전체와의 관련성 하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쇼트, 몽타주와 상호 전제된 개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프레임이 제공하는 시각적 의미작용과 감각적 사유의 가능성은 영화가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하나의 기본적인 방식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