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지영(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영화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단 영화적 메커니즘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좀 더 예민하게 생각해 주어야 할 부분이 바로 ‘의미’이다. 영화의 경우 ‘의미’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하는 바는 ‘언어로 전달될 수 있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물론 이 이야기(서사)도 의미에 포함된다. 하지만 동일한 서사를 다루고 있는 너무나도 많은 판본들이 서로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바이다. 영화의 의미가 이야기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다음 후보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주제이다. 주제를 파악할 때에는 당연히 여러가지 인문학적 이해가 동반된 해석이 중요하지만, 영화 텍스트의 문제로 한정하여 생각해 보자면 이야기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텍스트 이해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자. 살인죄를 지은 여자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이 경우 여자 주인공이 그런 죄를 저지르게 되는 상황을 누구의 시점에서 보여주느냐에 따라 관객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연민을 느낄 수도 있고,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시점(point of view)과 초점화(focalisation)의 문제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1인칭 시점이냐, 3인칭 시점이냐, 또한 그 시점이 관찰자인지, 전지적 작가인지에 따라 상황에 대한 이해와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달라진다. 하지만 시점과 초점화는 영화적인 방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에서 발달된 방식이다.(물론 영화에서의 시점은 문학의 경우와 유사성과 차이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 문제는 이후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이를 영화적 사유라고 부르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야기나 주제의 측면에서 영화를 접근하게 되면 문학보다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경우 영화는 대략 2시간의 런닝타임 동안 모든 것을 보여주고 말해야 한다. 분량이 더 길다고 더 수준 높은 예술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야기나 주제에 대한 보다 더 치밀하고 체계적인 탐구는 영화보다는 장편 문학 작품에 보다 더 적합하게 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문학과는 다른, 혹은 문학에는 없는 영화적인 측면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답하자면 ‘보여주기’, 즉 ‘시각적인 이미지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는가에 따라,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의미를 포함하여 언어로 표현해내기 힘든 의미까지도 제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초원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카메라로 보여줄 때를 생각해 보자. 초원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고정 카메라에 익스트림 롱 쇼트로 보여주는 경우(20초)와 빠른 편집으로 넓은 초원을 카메라가 빙 둘러가며 빠른 속도로 보여주고 그 후 그 나무를 풀쇼트로 보여주고 이어 클로즈업으로 나뭇잎들을 보여주는 경우(4초), 언어화시킬 수 있는 의미는 두 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 ‘넓은 초원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이야기는 두 경우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을 포함한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처음 장면은 정적이고, 두번째 장면은 동적이라는 것 외에 어떤 점을 통해 의미의 변별성을 언어화시킬 수 있겠는가. 영화의 경우 서사나 이야기 혹은 대사 등을 통해 구체적인 의미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혹은 의미로 구체화되지 않을 때에도, 이미 감각이나 지각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비언어적 의미의 중요한 요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그에 해당되는 이미지가 영화적 사유의 핵심적인 부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예를 통해서 그러한 감각을 생산하는 것은 프레임, 쇼트, 몽타주와 같은 영화의 기본 메커니즘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임부터 생각해보자. 우리가 영상을 접하는 경우 언제든 마주하게 되는 것이 바로 프레임이다. 일상적으로는 창문틀이나 문틀을 비롯해서 그림의 액자와 같은 틀(frame, cadre)을 의미한다. 영상의 경우 TV나 모니터의 틀 같은 물리적인 틀거리를 의미할 수도 있고, 그런 틀이 없는 경우 이미지의 한계지점을 말하기도 한다. 혹은 틀거리 안에 포함되어 등장하는 이미지의 내용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이론가 자크 오몽이 행한 프레임에 대한 세가지 구분이 바로 이것이다. 대상-프레임(cadre-objet), 한계-프레임(cadre-limite), 창문-프레임(cadre-fenetre)이 각각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이렇게 프레임을 구분지었지만, 사실 한계-프레임과 창문-프레임은 모든 경우 동시에 작동된다. 프레임은 이미지의 한계를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한계가 어디인가에 따라 프레임 안에 담기는 이미지의 내용물이 달라져 의미작용이 달라진다. 강의실 장면을 프레임 안에 담는 경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 위주로 프레이밍하는지 혹은 뒤에서 자거나 딴 짓 하는 학생들까지 프레임에 모두 담을지에 따라 이미지가 함축하는 내용은 명백히 달라지게 된다. 그보다 좀 더 까다로운 경우는 이미지의 내용물은 동일한데 이미지의 구성(composition)의 측면에서 다른 경우를 들 수 있다. 화면의 각도와 배치 등에 따라 언어로 명백하게 의미를 분절해내기 힘든 차이들이 나타난다.
미술사학자 다니엘 아라스는 프레임이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이야기를 명상할 수 있는 틀’이라고 말한다. 사각형의 틀을 설정함으로써 모든 원근법이 결정되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와 의미가 시작되는 곳이 프레임이다. 다니엘 아라스가 분석하는 르네상스 회화에 등장하는 원근법적 구성은 치밀한 계산을 통해 이루어지며, 관객 역시 한참 동안을 들여다보며 사유해야 의미를 파악해 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경우와는 사뭇 차이가 난다. 회화는 움직이지 않는 화폭 위에 그려진 고정된 이미지이고, 영화는 움직이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경우 이미지가 움직이기 때문에 관조와 침잠을 통한 사유는 쉽지 않다. 하지만 원근법이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생성해내고, 우리의 시선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회화의 방법론을 참고하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아라스가 행한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1433~1434)에 대한 분석을 참고해 보자. 이 그림은 수태고지라고 하는 성육화의 신비를 원근법적 구성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맨 처음 관람객의 시선을 끄는 것은 전경에 위치해 있는, 기둥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천사와 성모 마리아이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말들이 기둥 근처에 금빛 글씨로 쓰여 있다. 천사의 말 전부와 마리아의 거의 대부분의 말은 다 알아볼 수 있게 쓰여 있으나, 마리아의 말 중 성육화의 바로 그 순간을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 ‘fiat mihi secundum(제게 이루어지도록 하소서)’만 쓰여 있지 않다. 기둥 뒤에 가려져 있는 것도, 기둥 색이랑 글씨 색이 비슷해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말은 이미 예수를 상징하는 도상학적 기호인 기둥으로 화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그림 전체의 중심 부분으로 우리의 눈이 이끌려간다. 그림의 정중앙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문 안 쪽으로는 어두운 방에 있는 붉은 커튼과 침대 모서리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침대가 놓인 바닥면을 건물과 비교해 보면 침대는 구도상 그렇게 높게 놓일 수가 없다. 이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동정녀의 몸의 신비는 원근법으로 측정가능한 모든 기준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원근법적 측정을 일부러 벗어나게 묘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둥에 이어 두번째로 성육화의 신비가 묘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세번째로 관객의 시선이 이끌리는 곳은 기둥들로 이루어진 건물들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소실점이다. 이 소실점은 마리아와 천사가 있는 공간 바깥의 어두운 잔디밭과 맨 위쪽에 작게 묘사된 아담과 이브의 동산의 경계 지점쯤에 위치한다. 우리의 시선을 모아주는 원근법적 중심점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환기시키고 있고, 성육화의 신비를 통한 예수의 탄생은 구약에서의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대속한다는 의미와 동시에 에덴 동산에 쫓겨나는 사건과 신약의 수태고지라는 사건이 성서적으로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화가의 해석까지도 파악하게 만든다.
위의 예에서 보듯, 프레임과 그로부터 규정되는 원근법적 구성은 관객의 시선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며, 그에 따라 특정한 의미작용들을 생산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용의 대표적인 사례는 푸코의 분석으로 더 유명한 그림인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간단히 시선의 작용만 이야기하자면, 그림을 맨 처음 볼 때 우리의 시선은 화면의 전경에 위치해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대각선의 중심에 위치하는 화려한 옷을 입은 공주에게 이끌린다. 그리고 그 주변의 인물들로 시선은 옮겨 다니게 된다. 먼저 공주의 시선과 화가의 시선이 관람객인 나와 부딪히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며, 이 자리의 주인공이 누구일지를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화가의 손에 들려 있는 파레트와 캔버스의 비가시적인 뒷면 덕분에 우리는 더욱 증폭된 궁금증을 안고, 그림 내의 원근법적 중심점 근처로 시선을 이동시키게 된다. 결국 소실점 근처에 위치한 거울 속에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왕과 왕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림 바깥 관람자의 자리에 원래 왕과 왕비가 있었고, 희미하게만 처리된 그들의 존재가 이 그림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시선의 교환과 유희의 시작점임을 알게 된다. <시녀들>에 대한 푸코의 시선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저 유명한 논의는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프레임이 원근법적 구성의 출발점이며, 원근법적 중심화 작용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림을 특정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게끔 조직화하는 기본 원리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의 이미지는 회화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회화의 경우와 동일하지 않다. 회화의 경우 비교적 오랜 시간 그림의 구성을 살펴보고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을 이끄는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오랜 시간 들여다 본다고 이미지가 제시하는 모든 의미가 명시적으로 사유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해석되지 않는 감각이 그림에 존재하고, 어쩌면 그런 부분들이 그림을 더 매력적인 것으로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영화의 경우는 그림보다 더 모호할 수밖에 없다. 관객은 영화 속 이미지를 영화에서 제시해주는 만큼의 시간 동안만 볼 수 있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장면도 지나가버리면 더 이상은 못 본다.(물론 비디오, DVD, 파일 등으로 영화를 개별 관람할 경우는 사정이 다르지만, 극장에서 보는 영화의 경우 관객은 수동적으로 보여주는 만큼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관객은 나의 시선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화면 전체에서 무엇을 위주로 이미지를 선별해서 보았는지를 의식화하거나 기억해내기 어렵다. 이러한 영화 이미지의 운동성은 움직이는 매 순간 화면의 중심을 변경시키기 때문에 중심성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서사 영화의 경우 이미지들 역시 주인공이나 중심 사건을 시선의 중심부에 배치함으로써 중심화된 방식을 유지한다. 또한 내러티브 장치를 통해 중심성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측면이 이미지의 운동성으로 인한 탈중심화 경향을 상쇄시킨다. 내러티브라는 명시적으로 중심화된 의미망이 개별 이미지들을 연쇄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영화 속 사건이나 인물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미지들은 내러티브처럼 명시적으로 중심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시선이 어떤 방향으로 조직화되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한 채 관객은 감각적인 인상 혹은 의미만을 수용하게 된다. (서사가 분명한 영화의 경우 이미지는 서사의 중심화에 호응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서사를 강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대로 서사가 약하거나 깨어져 있는 경우 이미지들은 더욱 탈중심화된 경향성을 보이는 방식으로 서사에 호응하며 서사를 더욱 약화시킨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서사와 이미지의 차원이 불일치 혹은 균열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서사의 중심성을 이미지가 약화시키기도 한다.)
다시 말해, 영화의 경우 서사적 층위와는 별개의 차원에서 감각적 의미가 구성되어 있고, 이는 관객의 사유에 명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언어로 분절화될 수 있는 수준으로 명시적이지 않지만, 분명 이미지의 차원에도 관객의 시선을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화하는 감각적 구성이 존재한다는 점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영화 관객에게는 명시적인 의미 대신 ‘충격’과도 같은 감각의 덩어리들이 전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의 프레임은 관객에게 영화의 감각적인 의미와 사유를 전달하는 틀로서 기능하게 되고, 관객의 내부에서는 그 감각의 충격에 의해 사유가 일깨워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화의 경우에도 감각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회화적인 구성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영화의 이미지가 화면 바깥 관객의 뇌세포 이미지들에게 충격을 전달하고, 그것이 관객 내에서 자동기계적으로 사유를 촉발한다고 들뢰즈는 주장하였다. 영화 이미지가 전달되는 가장 기본적인 통로로 프레임을 들 수 있는데, 들뢰즈는 프레임을 포화/희박의 경향성, 화면틀의 기하학적/역학적 구성, 이미지들의 기하학적/역학적 결합, 중심이탈 프레임, 외화면의 문제 등으로 구분지어 이야기한다. 포화/희박은 프레임 안에 정보를 주는 구성 요소들이 얼마만큼 담겨 있느냐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인데, 중요한 점은 내용물이 많이 담겨 있느냐 혹은 적게 담겨 있느냐가 아니다. 포화이든 희박이든 정상성의 정도를 벗어나는 경향성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적당히 담겨 있을 경우 관객은 그로부터 정보를 파악하여 언어적으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너무 적거나 너무 많아서 거의 아무런 정보도 읽어낼 수 없는 경우(화면이 유리잔 속 우유의 하얀색만을 보여주거나 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이 화면 가득 등장할 경우 화면 속에서 결국 까만 점들 이외에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게 된다),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독해하게 된다.
화면틀의 기하학적/역학적 구성, 이미지들의 기하학적/역학적 결합, 중심이탈 프레임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들뢰즈가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목록에 다른 목록들을 계속 덧붙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계속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방식의 화면 구성이나 쇼트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분류하고 있는 프레임의 목록들은 원칙적으로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러한 구분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겠다. 앞에서 설명한 포화/희박의 프레임과 마찬가지로 다른 목록들에서도 역시 이미지들이 정상성을 벗어나는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 용어로 표현하여 정상성이라는 중심화의 범위를 벗어나 이미지의 탈영토화를 만들어내는 경우, 이미지는 그저 보거나 서술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기능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게 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 다른 방식이란 이미지가 프레임 안에 닫힌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화 전체, 혹은 전체로 열려있음을 의미한다. 프레이밍된 이미지를 닫힌 방식으로 읽는다는 것은 결국 그 내부에 주어진 구성 요소나 결합 방식에 따라 마치 언어로 기술하듯 의미나 서사를 유추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하지만 전체로 열려있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화작용을 벗어나 영화에서 보여지거나 말해지지 않은 그 너머의 것, 즉 지속하는 전체를 향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영화의 서사 너머에 존재하는 의미를 드러냄을 말한다. 바로 이 열린 전체의 존재가 이질적인 외화면의 존재이유가 되기도 한다. (열린 전체는 운동 그리고 지속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 설명되어야 하지만, 이번 호에서는 영화적인 방식으로만 한정하였고, 그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쇼트를 다루는 다음 호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완벽히 현전하고 있는 것이 외화면이다. 외화면은 프레임의 상-하-좌-우-앞-뒤 6군데에 있다고 말해진다.(노엘 버치의 구분)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등장인물의 출입이나 외화면 사운드에 의해 그 공간들의 존재를 알 수 있고, 언제든 화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다. 화면내 공간과 동질적인 3차원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이런 외화면을 동질적인 외화면이라고 부른다. 앙드레 바쟁이 영화적 외화면이라고 말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중요성이 있는 외화면은 이질적인 외화면이다. 이는 화면영역 바깥으로 동질적으로 펼쳐져 있는 3차원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정신적인 4차원, 5차원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에 빈번히 등장하는 클로즈업 같은 경우 주인공은 그저 현실적인 옆 공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향하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주인공의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사유가 향하는 다른 차원의 정신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외화면 공간의 경우 서사적 의미 내에서 납득될 수 있는 부분을 넘어서서 사유하는 전체를 향해 열려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나쁜 영화는 현재만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한다. 좋은 영화이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시간과 이후의 시간까지 관객이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액션 오락 영화를 보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들뢰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주인공과 더불어 그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듯 함께 긴장하고, 즐거워하고, 같이 몸을 움찔거리며 온통 정신을 집중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면 그 모든 것은 함께 끝난다. 영화에 대해 더 생각하거나 음미할 것도 없고, 런닝타임 이전이나 이후의 인물의 삶 따위는 더 이상 관객의 관심사가 아니다. 더 생각할 여지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저 스트레스 해소 잘했다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은 영화, 감동적인 영화를 보았을 때의 상황은 이와 다르다. 영화가 끝나도 그 여운이 오래 남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타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좋은 영화는 보이고 들리고 말해진 것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과 그에 연결된 관객의 사유와 삶, 그 모두를 포함한 거대한 삶 전체를 향해 열리게 되는 것이 바로 비정상적인 프레임의 다른 기능, 이미지의 다른 방식의 독해가 의미하는 바이다.
의미작용과 더불어 그를 넘어서는 감각적 사유까지 전달할 수 있게 하는 프레임은 쇼트로부터 따로 떼어낼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모든 이미지, 모든 쇼트에는 프레임이 전제되어 있고, 모든 프레임은 언제나 쇼트에 동반된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프레임만을 독립적으로 논의해 보았다. 하지만 프레임은 앞의 논의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영화 전체와의 관련성 하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쇼트, 몽타주와 상호 전제된 개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프레임이 제공하는 시각적 의미작용과 감각적 사유의 가능성은 영화가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하나의 기본적인 방식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