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25-근대 모험 소설[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25-근대 모험 소설

 

1)

헤겔이 근대 리얼리즘 문학의 두 번째 유형으로 소개하는 것은 근대 모험 소설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다. 그 초기 형태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런 형태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나, 타소의 <해방된 예루살렘>과 같은 서사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마지막으로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같은 작품까지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성격 예술이 내면적인 성격의 탐구를 지향했다면, 지금 거론된 작품은 사건이 중심이 된다. 사건은 끝없이 전전반측하니, 한마디로 우연성의 유희라고나 할 것이다. 사건이나 현실은 상징주의 시대나 고전주의 시대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신성을 상실하고 탈신격화되니, 그것은 우연적이며, 그 자체로서는 개별적인 사건에 불과하게 된다. 이런 사건과 현실은 상호 복잡하게 얽혀서 상호작용하면서 전체의 유희를 이루어낸다.

 

성격 예술에서 탐구되는 성격이 한편으로 무한성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성을 지니면서 근대 리얼리즘 문학의 두 측면을 잘 보여주었다면, 모험을 다루는 작품 역시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런 작품들은 한편으로 사건의 우연적 개별성을 남김없이 그려내는 가운데 리얼리즘적 측면을 보여주지만, 그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작품에서 우연성의 유희를 통해 그 배후에서 이를 지배하고 있는 힘이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현실의 유희가 배후의 힘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은 낭만적 성격을 지닌다.

 

2)

성격 예술이 기사도 문학과 비교되었듯이, 모험 소설(또는 서사시) 은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그리는 종교 예술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모험 소설이나 그리스도 수난사는 모두 사건이 운동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본질인 정신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았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 차이를 무시할 수 없으니, 우선 그리스도 수난사의 경우에 그리스도는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면서 신을 드러낸다. 하지만 모험소설의 경우는 부정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으로 일어난다. 즉 사건이 서로 충돌하면서 상호 부정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런 부정적 운동 과정을 통해 드러내는 것에서도 차이가 있다. 종교 예술의 경우는 곧 전능한 창조주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우연적 사건의 충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세속적인 사회적 힘일 뿐이다. 그 힘은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의미할 것이다.

 

3)

헤겔은 이런 모험 소설을 세 가지 부류로 구분한다. 첫 번째 부류는 특정한 목적을 지닌 운동을 전개하지만 이런 목적은 현실 앞에서 좌절되고 만다. 예를 들어 십자군 원정을 다루거나, 성배를 찾거나, 사랑과 명예나 정의를 추구하는 행동이다.

 

이런 행동은 정신의 필연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어떤 개인의 우연적 심정에서 맹목적으로 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우연적인 현실에 부딪혀,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결과를 자아내고 만다. 여기서 작가는 주인공의 모험을 진지한 심정으로 응원하며 그 허망함에 관해서 자각하지 못한다.

 

두 번째 부류는 이와 같은 우연성의 충돌을 작가가 높은 곳에서 초연하게 바라보면서 그 희극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작품이니, 대표적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들 수 있다. 돈키호테 자신은 자신의 기사도적 사명을 진정으로 믿으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돈키호테의 모험을 소설해 나가는 작가는 그의 주인공을 초연하게 바라보면서 한편으로는 애정을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롱하면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풍자적 작품에서도 현실을 지배하는 진정한 힘을 발견할 능력은 작자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다.

세 번째 부류로 헤겔은 ‘소설적인 것[Romanhafte]’을 드는데, 개인은 현실 속에서 자신의 세속적 이상(예를 들어 자유로운 국가나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지만 이런 이상은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 자체가 하나의 우연적인 것이니 마찬가지로 우연적인 현실과 충돌하면서 난파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소설적인 것은 성배를 찾거나 사랑을 찾는 첫 번째 모험 소설과 유사하다.

 

하지만 첫 번째 모험 소설에서 작가를 대변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목표를 진지하게 믿음으로써 현실 앞에서 좌절되었을 때, 이를 비극적으로 파악할 뿐이다. 반면 세 번째 모험 소설에서 주인공은 우연적 유희 속에서 현실과 충돌하면서 난파하지만 이런 난파 속에서 마침내 그의 시대를 지배하는 진정한 정신적 힘에 대해 자각에 이르니,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삶은 일종의 수업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헤겔미학산책 24-근대 성격 예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 24-근대 성격 예술

 

1)

헤겔은 낭만주의적 예술의 세 번째 권역을 리얼리즘적 예술로 규정하면서, 여기에서 등장한 첫 번째 유형을 성격, 정확하게는 ‘자립적인 개인의 성격’을 다루는 예술로 규정한다. 성격 예술은 개인의 성격을 다루는데, 그 성격은 내용상 특수하다. 여기서 한 개인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개인과 성격은 직접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다. 

 

그 때문에 개인의 성격은 불변하며, 굳건하며, 현실에 구애되지 않고 확고하게 실행되니, 헤겔은 이를 ‘자립적’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자립적 성격을 헤겔은 ‘생동적 개성’, 또는 ‘주관적 무한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자립적이고 확고한 즉 무한한 성격이 우연적 개인과 그가 처한 우연적 현실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곧 성격 예술의 비극성을 결정하게 된다.

 

이런 성격 예술이 기사도 문학에서 바로 이어진다는 것은 성격 예술의 효시라고 할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가 지옥에 들어가 만나는 첫 번째 인물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들이 바로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인데 그들은 형수와 시동생의 관계이면서 불륜을 저질러 지옥에 들어왔다. 단테가 그들에게 어찌하여 사랑을 허락하게 되었는가를 묻자 프란체스카는 대표적인 기사도 문학에 속하는 랜슬롯과 기네비에르의 이야기를 읽다가 그들이 입맞춤하는 장면에서 서로 입맞추게 되면서 그런 결과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2)

성격 예술이 기사도 문학과 유사성을 지닌다는 사실은 위의 사실이 아니더라도 명확하다. 왜냐하면 둘 다 인간의 내면성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무한한 내면성이 개별적인 것과 직접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기사도 문학에서 무한한 사랑이 어떤 우연적 개인을 향하고 있듯이 성격 예술에서도 자립적인 성격이 어떤 우연적 한 개인과 결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기사도 문학과 성격 예술은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기사도 문학에서 다루어지는 내면성은 명예와 사랑, 충성과 같은 도덕적 내면성에 한정되고 있으며, 그런 내면성이 지향하는 대상은 아직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서술되지 않고 상당히 추상적으로 서술되어서 누구라도 대체될 수 있을 정도이어서, 그저 귀부인고 그저 고귀한 기사일 뿐이다.

 

그러나 성격 예술의 경우는 우선 다루어지는 성격이 이제 도덕적 내면성을 벗어나서 현실화된다. 예를 들어 오델로의 질투와 맥베스의 야심, 리어 왕의 어리석음이 다루어지니, 이제 성격은 아주 풍부하고 매우 다양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성격을 지닌 인물과 그가 처한 현실은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과 현실을 닮은 모습을 지니게 되면서 리얼리즘적인 서술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성격이라는 표현을 예컨대 이탈리아인들이 가면을 쓰고 표현했던 그러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가면들도 특정 성격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관적 개성이 빠진 이러한 규정성의 추상과 일반성을 보여 줄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현 단계의 성격들은 각각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고유한 성격, 하나의 독자적인 전체, 하나의 개별적 주관이다.”[1]

 

기사도 문학에서 무한한 내면성과 우연적 개별성 사이에 충돌 역시 불가피하지만, 여기서 그 충돌은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고 모호하게 그려지고 결국 도덕성의 승리라는 상투적 귀결에 이르고 만다. 그에 반해 성격 예술에서도 자립적이고 확고한 성격이 그것과 직접 결합되어 있는 우연한 개인과 현실적 처지와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으니 충돌은 명확하게 인식되고 그것의 결과는 도덕성의 승리가 아닌 현실을 지배하는 필연적 힘의 승리일 뿐이다.

 

“그러한 성격의 세계가 한편으로는 제한적이며 이로써 추상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우연한 것으로 현상한다는 사실과 관계할 뿐이다.”[2]

 

3)

헤겔은 근대 성격 예술이 그려내는 성격에 세 가지 성격이 있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특칭적 성격이다. 구체적으로는 특수한 성격인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오델로의 질투와 맥베스의 야심, 리어 왕의 어리석음이다. 이런 성격은 특칭적인 것이기에 현실 속에서 이런 성격이 관철될 경우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으니, 여기서 비극적 운명이 출현한다.

 

이런 비극적 운명은 그리스 고전 비극에서처럼 자신에 대립하는 실체적인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고전적 영웅은 자신의 실체적 힘을 위해 자기에 대립하는 실체적 힘에 기꺼이 대항하다가 몰락한다. 반면 근대적 인물에서 운명은 무한한 주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니, 자기 자신의 내면 자체에서 비롯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그를 덮치는 운명은 그 자신이 초래한 것이지만 그 자신은 아직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니 헤겔은 이런 자각되지 못한 운명을 ‘팍툼[Factum]’이라고 규정한다.

 

4)

성격 예술에서 헤겔이 두 번째로 다루는 성격은 아직 무규정적인 총체적인 성격이다. 구체적으로는 햄릿이나 줄리엣과 같은 성격인데, 그들은 아직 어떤 특수한 성격으로 규정되기 이전의 상태 즉 무규정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후일 특수한 성격으로 발전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행위가 이리 불쑥 저리 불쑥 솟구치면서 이런 다양한 성격의 가능성 속에서 모호한 채로 흔들리고 있다.

 

마침내 어떤 순간, 그들의 총체적 성격은 어떤 특수한 성격으로 굳어지면서 그 성격은 단호하고 불꽃같은 방식으로 폭발하니, 그 순간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들의 단호한 행위는 그때까지 유동적인 상황을 단적으로 결정지으면서 기존의 상태를 완전하게 몰락시키고 만다. 헤겔은 총체적 성격의 두 측면을 예를 들어 햄릿과 줄리엣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그는 때를 기다리며 아름답고 올곧은 심정으로 객관적인 확실성을 찾지만 그러한 확실성을 얻은 뒤에도 그는 굳은 결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정황들에 끌려다닌다.”[3]

 

“이 일체의 것은 겹겹의 꽃잎들이 단숨에 펼쳐지는 장미의 온전한 첫 개화인 듯 내적으로 지극히 건실한 영혼 근거의 무한 유출인 듯 현상한다.”[4]

 

5)

헤겔이 성격 예술의 마지막 유형으로 들고 있는 것은 헤겔의 말대로 하면 ‘실체적 관심을 지닌’ 성격이니, 이는 예를 들어 실러의 희극에 나오는 시민적 덕성을 지닌 인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사도적 덕성과 마찬가지로 시민적 덕성조차도 비록 일반적 덕성에 속하더라도 하나의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인 한에서 또 하나의 특수한 성격에 불과하니, 이런 점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비애극에서 지고지상의 인물이 알고 보면 아주 흔히 자신을 궤변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생각밖에 없는 사악한 떠버리 야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5]

 

헤겔의 비판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곧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에서 나오는 포사 후작이다. 포사 후작은 왕세자 돈 카를로스와 영원한 우정을 맺은 친구이다. 포사 후작은 네델란드의 자유를 위해 위해 투쟁하는 시민적 덕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갑자기 포악한 왕인 펠레페 2세의 총신이 되며, 처음에는 오해에서 카를로스를 체포하며, 나중에는 카를로스를 구하기 위해 펠레페에게 거짓말하면서 덕분에 왕에 의해 살해된다.

 

포사 후작의 변덕은 결국 카를로스와 왕비까지 몰락시킨다. 포사의 죽음이 과연 숭고한 비극일까? 시민적 덕성을 지닌 인물이 현실 속에서 범하는 변덕은 시민적 덕성이 또 하나의 특수한 성격이라는 헤겔의 말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6)

일반적 덕성을 지녔지만 특수한 성격에 반해서 헤겔은 근대 성격 문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으로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인물을 모범으로 들고 있다. 헤겔은 특수한 성격을 지닌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심지어 폴스태프와 같은 비속한 인물조차도 내적으로 보편성을 지닌다고 한다.

폴스태프는 셰익스피어의 <윈저 성의 명랑한 부인들>(1602년)이라는 소극의 주인공이다. 간단하게 그 줄거리를 소개한다. 전쟁이 끝나고 윈저로 돌아온 존 폴스태프 경은 배 나오고 뚱뚱하고 비겁하고 변명 잘하고 떠벌리기 좋아하고 낭비벽 심하고 무일푼인 술주정꾼이다. 그는 남편 있고 재력 있는 두 여자, 포드 부인과 페이지 부인을 유혹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오히려 두 부인과 그들의 남편의 계략에 빠져 모욕당하고 만다. 그는 광주리에 실려 더러운 강물에 던져지기도 하고, 하녀의 모습으로 변장해 간신히 빠져나가기도 하며, 숲에서는 장난꾸러기 요정들의 습격을 받는다. 폴스태프는 자신의 사악한 성격을 따라서 좌충우돌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거리를 취하고 스스로 자신을 우스꽝스럽고 가련한 존재로 여기는 인물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윈저성의 짓궂은 아낙네의 주인공인 팔스파프

셰익스피어의 인물은 현실적 처지가 촉발하는 대로 자신의 특수한 성격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내적으로 자기를 반성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면서 ”그들을 그들 자신 안에서 고양하여” 자신의 특수성에 대해 초연하게 있으니, 이런 점에서 진정으로 자유롭고 고결한 성격을 지닌 존재라고 말한다. 결국 그는 스스로 필연적 운명을 긍정하면서 그 운명의 관점에 서서 “그 자신이 침몰하는 것을 마치 그 외부에서 바라보는 듯 바라본다”[6].  

[1] 미학강의 2, 213쪽

[2] 미학강의 2, 213쪽

[3] 미학강의 2, 222쪽

[4] 미학강의 2, 220쪽

[5] 미학강의 2, 225쪽

[6] 미학강의 2, 225쪽

헤겔미학산책 23-리얼리즘에 대해: 개체적 특수성[리얼리즘]의 미학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 23-리얼리즘에 대해ㅣ 개체적 특수성[리얼리즘]의 미학

 

1)

낭만적 미학형식의 세 번째 형식을 헤겔은 ‘형식적으로 자립적인 개체적 특수성’이라는 이름으로 묶었다. 헤겔은 이 세 번째 형식을 추가로 설명하면서 “현실 자체에 대한 갈증, 현존하는 것에서 얻는 자족[Sichbegnuegen], … 유한한 것, 특칭적인 것, 초상화적인 일반에 만족하는 것[Zufriedenheit]” 이라고 했다.[1]

 

또 헤겔은 여기에 “현재에서 현재적인 것 자체”를 “눈 앞의 생동성 속에서 … 재창조”[2]하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니,  ‘개체적 특수성’은 곧 ‘현재적인 것’으로, ‘형식적으로 자립적인 것’은 ‘눈 앞의 생동성’이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설명은 낭만주의의 세 번째 권역이 리얼리즘적인 예술 형식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첫 번째 종교적 예술의 권역, 두 번째 기사도 문학의 권역에 이어 낭만주의 예술 형식의 세 번째 권역으로 소개되는 것이 흔히 낭만주의 예술과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리얼리즘적인 예술 형식이라니, 좀 의아한 생각을 갖게 된다.

 

헤겔이 이 세 번째 권역에 속하는 예술로 들고 있는 구체적 예들은 르네상스 시기 이후 바로크를 거쳐서 근대 초기 시민 예술과 고전주의, 그리고 자기 시대의 낭만주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괄하는 광범위한 작품들이다. 흔히 이 작품들은 근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중세 예술과 구분해서 독자적으로 다루어지며 그런 가운데 리얼리즘적인 예술에 속하는 것(르네상스 예술이나 시민 예술)과 낭만적 예술에 속하는 것(바로크 예술과 낭만주의 예술)으로 구별되어 다루어진다.

 

그런데도 헤겔은 이 작품들을 중세부터 시작된 낭만주의 예술형식 속에 그것도 마지막 최후의 형식으로 포괄하면서 낭만주의(넓은 의미에서)의 마지막 권역에 흔히 구별되는 리얼리즘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18세기 낭만주의 즉 좁은 의미에서 낭만주의)을 구별하지 않은 채 리얼리즘적인 예술로 규정하는 그 까닭은 무엇일까?

 

2)

근대 예술, 그 가운데서도 리얼리즘적인 예술을 리얼리즘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것이 다루는 소재나 방법에 따른 것이다. 헤겔 말 대로 ‘현재적인 것’을 ‘눈 앞에 생동적인 대로’ 서술하는 것인데, 이런 리얼리즘적 예술은 어떤 의미나 목표를 가지는 것일까?

 

미리 말하자면 여기서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현실적인 것을 눈앞에 나타나는 생동성 속에서 다룬다는 뜻이 현실 자체를 그대로 모방하는 예술이라는 말은 아니다. 현실적인 것을 모더니즘적으로 생산할 수도 즉 ‘재창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리얼리즘적인 것은 독자에게 예술이 창조한 실제 사건이 수반하는 동일한 감정이나 행동을 환기하는 심리적 효과(연상, 또는 감정 이입의 효과)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비참한 현실을 그린 예술 작품을 통해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이에 저항하는 행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예술보다는 저널이나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아주 사실적인 기록이나 영상이 더 강하고 풍부한 효과를 불러일으키지 굳이 예술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리얼리즘적 경향을 지닌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는 리얼리즘적 예술은 피지배 계층의 생동하는 저항 정신을 표현하며, 반면 지배 계층은 양식적인 예술을 지향하는데 이를 통해 억압을 정당화한다고 한다. 이런 설명은 지배와 예술이 어느 시대나 반복되므로, 그때 마다 리얼리즘적 예술과 양식적 예술이 교차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그 시대적 차이를 간과하고 만다. 즉 아놀드 하우저에게서 고전적 리얼리즘 예술과 근대 리얼리즘적 예술의 차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리얼리즘 예술을 옹호하는 많은 이론가는 결국 주술적 효과에 기대고 있다. 곧 현실과 닮은 것은 현실이 일으키는 결과와 동일한 결과를 일으킬 것이라는 믿음이 예술을 낳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대표적으로 루카치나 아도르노와 같은 미학자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 일리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을 지극히 편협한 영역으로 제한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이런 주장은 근대 이전의 예술이나 근대 예술 가운데 리얼리즘적 예술에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인 낭만주의 예술을 예술로부터 배제하고 만다.     

 

이런 생각을 통해서 볼 때, 헤겔이 근대의 독특한 예술 현상인 리얼리즘 예술을 중세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낭만주의 예술 형식에 집어넣었다는 사실은 미학적으로 무척이나 흥미로운 문제가 된다.  여기서 근대 예술의 역사를 보는 헤겔의 독특한 관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다시 한 번 묻게 되지만, 헤겔은 왜 낭만주의 세 번째 권역을 이런 리얼리즘적인 예술로 규정하고 심지어 낭만주의 예술조차 이런 리얼리즘적 권역 속에 포함한 것일까?

 

3)

앞에서 설명했듯이 헤겔에서 중세와 근대는 역사적으로 연속되며, 이 시대는 시장 관계가 점차 일반화되는 과정이다. 이런 시장 관계를 토대로 새로운 정신이 출현했으니, 헤겔은 이를 절대적 주관성 또는 내재적 초월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이런 시대, 정신은 종교에서는 내재적 신이라는 개신교적 신의 개념으로 출현했으며, 예술에서는 가상이라는 형식으로 출현했다. 그 가상은 곧 예술적 형상이 자기 부정이라는 운동을 통해 그 본질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이 가상은 구체적 첫 번째 종교적 권역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수난의 역사를 통해 즉 시간적 운동을 통해 제시되며, 두 번째 기사도 문학의 권역에서는 기사도적 정신이 지니는 이중적 측면 즉 우연한 현실적인 것에 부여되는 무한한 정신이라는 모순으로 출현했다. 

 

이미 살펴본 두 가지 낭만주의 예술 형식에서 가상이라는 개념에서 이미 현실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고 있다. 물론 이런 현실적인 것은 단순히 현실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정신적인 것이 드러나는 가상이지만, 이런 가상은 결코 환상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는 아니 되며, 오직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한에서만 가상으로서 자격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 낭만주의 예술 형식은 처음부터 현실적인 것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낭만주의 예술 형식은 이런 현실적인 것이 가상으로서 그 본질적 의미를 드러내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니, 여기서 종교적 권역에서는 수난의 역사가, 그리고 기사도 문학은 자기 모순이 문제되는 것이다.

 

근대 예술이 그 이전 종교적 예술이나 기사도 예술과 마찬가지로 시장 관계를 토대로 하는 정신에서 나온 것인 한, 근대 예술 역시 이중성이 불가피할 것이다. 시장 속에서 개인은 자신에게 주관적 가치를 부여하면서 이것이 마치 절대성을 지닌 것처럼 오만하지만, 이 시장 속에서 개인에 되돌아오는 현실은 곧 시장의 힘에 의해 결정된 객관적 가치이니, 이를 알지 못하는 개인에게 이런 객관적 가치는 자기에게 가해지는 운명이며, 보이지 않는 힘의 지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시장적 사회 관계 속에서 개인은 주관적 오만과 운명의 지배 아래 개인의 삶은 찢겨져 있으니, 근대 예술은 한편으로 자신에 대한 오만 속에서 자신의 무한한 내면(욕망과 목적)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지니며, 다른 한편 그를 엄습하는 운명을 파악하려는 가운데 있는 그대로 현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 두 가지 측면 한편으로 자기 내면에 대한 관심 즉 내재하는 것과 또 다른 한편으로 보이지 않는 운명의 힘 즉 초월하는 것은 종교 예술이나 기사도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니, 여기서 근대 예술은 이중적으로 분화하면서도 상호 뒤얽혀 있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겔은 근대 예술이 지닌 이중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가 기독교에서 발견하는 것은 현상의 익숙한 세속적 고유성이 본래부터 관념적인 것의 한 계기로서 즉각 취택된다는 사실이며, 심정은 미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고 일상적이며 우연적인 외적인 것에서 만족을 구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다만 가능성의 면에서 즉 일단 즉자적으로는 신과 화해되어 있을 뿐이다. 만인은 비록 지복을 향한 소명을 받았으되, 선택된 자는 극히 드누니, 하늘나라뿐만 아니라 현세의 나라마저도 하나의 저편으로 남아 있는 심정에는 세속성과 자기 위주의 현재성을 정신성 속에서 포기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3]

무리요의 거지 소년이라는 작품이다. 리얼하게 그려져 있지만, 헤겔은 이 소년이 지닌 정신적 맑음과 자유로움에 주목하고 있다.

4)

헤겔은 근대 예술이 지닌 이런 이중성 때문에 근대 예술의 근본적 경향성을 리얼리즘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도 이 속에 근대 리얼리즘 예술과 근대 낭만주의 예술을 포괄적으로 다루게 된다.

 

헤겔은 근대 예술을 이미 설명한 대로 두 단계로 구분하여 서술한다. 근대예술의 첫 번째 단계는 ‘자립적인 개인적 성격’을 다루는 예술이니, 이는 이미 단테의 신곡에서부터 시작하여 특히 셰익스피어의 성격문학, 심지어 괴테와 실러의 시민 문학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런 첫 번째 단계는 성격 예술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겠는데, 그 핵심은 개인이 지닌 주관적 내면 즉 그 욕망과 목적, 성격 등에 대해 관심을 지닌 예술을 말한다. 성격 예술은 단순히 그의 내면을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내면적 성격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파국에 이르는지 파악하려 한다.

 

근대 예술의 두 번째 단계에서 등장하는 예술을 헤겔은 모험 예술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에 속하는 예술의 효시는 곧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며, 이후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소설적인 것[Romanhafte] 로 발전한다.  

 

여기서 예술은 전전 반측하는 현실 자체를 사실적으로 파악해 나가는데, 단순히 이런 우연의 유희를 그려나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런 모험적 예술은 궁극적으로 우연적 현실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자각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자 즉 성격 예술이 내면적 성격을 다룬다는 점에서 기사도 정신을 다루는 기사도 문학을 닮았다고 한다면, 후자 즉 모험 예술은 현실의 운동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다루는 종교 예술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격 예술과 기사도 문학, 종교적 예술과 모험 소설은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니고 있으니 이런 차이점은 앞으로 근대 예술의 구체적 형태를 다루는 경우에 상술하기로 하자.

 

미리부터 말하자면, 낭만주의 예술의 세 번째 마지막 권역이 리얼리즘 예술이며, 리얼리즘 예술의 두 단계가 곧 성격 예술과 모험 예술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 파국과 자각이라는 운동성이 사라지고, 현실이 그 자체로서 긍정되는 단계에 이른다.

 

이런 단계에 이른 예술로서 헤겔이 드는 예가 곧 디드로의 소설이나 독일 낭만주의의 아이러니 예술이다. 이 단계를 지나면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기를 그치고 예술을 넘어서게 되니, 여기서 예술은 해체되고 종언을 고하게 된다.

[1] 미학강의 2, 210쪽

[2] 미학강의 2, 210쪽

[3] 미학강의 2권, 210쪽

헤겔미학산책22-중세 기사도 문학[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22-중세 기사도 문학

 

1)기사도 문학

헤겔은 낭만주의 예술형식을 다루면서, 우선 종교적 예술을 다룬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와 마리아, 사도 및 신도의 종교적 체험이 주요 주제가 된다. 이어서 그가 다루는 것은 기사도 예술인데, 여기서 주로 논의되는 것은 기사 계급의 명예와 사랑, 충성이라는 심정을 다루는 문학이다.

기사도 문학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는 모호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11세기 말 작품 롤랑의 노래와 같은 무훈시에서도 명예가 다루어지고, 내려가면 14세기 초 작품인 단테의 신곡에서도 사랑이 다루어지니, 헤겔의 기사도 예술 개념에 따르면 모두 기사도 예술에 포괄할 만하다. 헤겔은 기사도 문학을 주제별로 구분하지, 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이 기사도 문학의 핵으로 보고 있는 명예, 사랑, 충성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흔히 궁정 연애시라고 불리는 기사도 예술이 아닐까 한다. 궁정 연애시로서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은 크레티앵 드 트루아[1]의 작품 <죄수 마차를 탄 기사>(181년)이다.

 

2) 트루바두르

궁정 연애시가 등장하는 12-13세기는 앞에서 언급한 고딕 시대와 겹친다. 고딕 시대를 설명할 때 이미 언급했지만 이 시대는 유럽 사회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교역이 발전하고, 도시가 발흥했다. 바로 이 시기 건축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점차 고딕 양식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문학에서는 기사도 문학이 성행하게 되었다.

기사도 문학의 토대가 된 기사 계급은 왕권이나 대 영주의 권력이 신장하면서 출현한다. 과거 왕과 대 영주의 종신이 말과 무구를 하사 받아 기사가 되고 전투에 나서며 대가로 봉토를 받는다. 이들은 받은 봉토를 세습하면서, 그 이전 귀족적 영주 계급과 분화된 새로운 영주 계급이 되니, 이들이 기사 계급이다.

이 시대 왕권의 발달에 못지 않게 교회도 발전했다. 교황권이 확립되고, 교회는 세속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황제와도 대결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교회의 발전은 학문적으로 대학을 성장하게 했으며 정신적으로는 기독교적 정신이 삶 자체에 깊숙이 침투하게 되었다. 신흥 귀족인 기사 계급의 정신을 지배한 것이 기독교 도덕이다.

기사도 문학을 전개한 시인은 흔히 음유시인(반주에 맞추어 노래 불렀다)이라 불리는데 또는 트루두바르(이야기를 ‘지어내다[trobar]’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라고 하기도 한다.[2]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에 따르면 이들은 원래 궁정 시인이 고대 미무스의 전통을 흡수하면서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는 음유시인의 형성이 기사를 중심으로 하는 궁정 문화[3]의 형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트루바두르는 음유시인처럼 단순히 노래한 것은 아니며 낭송용 작품을 직접 만들고 나가서 낭송이 아닌 독서를 위한 책을 쓰기도 했다. 이들의 시는 영웅적 서사시 전통에서 벗어나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 가공적인 이야기를 지어냈으며 이 이야기를 기사 계급의 특성에 맞게 라틴어가 아닌 토착어로 작성했다. 그 성격은 심정을 표현하는 서정적인 것이었으니, 여기서 다루어진 대표적인 심정이 기사 계급의 도덕과 관련된 명예, 사랑, 충성이라는 심정이 된다. 이런 심정을 노래함으로써 트루바두르는 관대한 선물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궁정 기사 계급의 교사로 자임했다[4].

 

3) 궁정 연애

기사도 문학은 앞에서 다루었던 종교 예술과는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다. 종교 예술이 역사적 체험 즉 수난의 실제 역사가 주로 다루어졌다. 종교 예술은 수난의 역사를 통해 신이 현현하는 것을 표현한다. 반면 기사도 문학은 기사의 심정이 주로 다루어진다. 그 심정이 출현하는 사건은 지어낸 가공적 사건이고 심지어 비현실적인 환상에 속한다.

기사도 문학에서 다루어지는 주요 심정은 연애이지만, 이 속에는 기사도 정신의 다른 요소인 명예와 충성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일반적으로 아놀드 하우저가 서술한 것처럼[5] 기사도 문학 속에 기사도 정신 전체보다는 궁정 연애의 형식만 발견한다. 그러면서 연애의 대상이 주군의 부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사랑은 주군에 대한 봉사의 변형을 의미하든가, 아니면 궁정에 살아가는 중세 기사의 억눌린 성욕에서 나오는 환상으로 설명한다. 아놀드 하우저는 그 근거를 사랑의 대상이 되는 귀부인에 대한 묘사가 도식적이고, 그 감정의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서 발견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 전체에 기사도 정신이 곳곳에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기사도 정신이 기독교 덕목에서 나온다는 사실에서 본다면, 위와 같은 해석은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기사도 예술을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이해하려는 헤겔적 해석이 오히려 돋보인다.

 

4) 기독교 문학

기독교 정신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절대적 주관성이다. 이런 절대적 주관성은 초월적으로 내재하는 신의 모습으로 출현하는데 이는 낭만주의 예술 형식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그리스도나 신도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출현했다.

헤겔에 따르면 기독교의 절대적 주관성의 정신은 두 번째 단계에서 기사들의 정신적 덕목으로 출현한다. 기독교의 정신적 덕목은 기사도[6] 속에 포함된 명예나, 사랑, 충성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기본적 특징은 무한한 심정과 개별적 대상 사이의 직접적인 결합이다. 이때 외적인 현존은 내재하는 심정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나 기호가 된다.

무한한 심정과 개별적 현존 사이의 직접적 결합은 기독교의 절대적 주관성 즉 내재적 초월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며, 앞에서 신적인 표현에서는 그리스도나 사도의 개별적 역사적 현존은 자기 부정성을 통해 절대적 주관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기사도의 문학에서 절대적 주관성은 개별적 현존을 긍정하며 다만 이것을 무한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오직 종교적 심정이 지녔던 인간적인 것 자체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사라지고 정신은 자신을 확산하며, 자신의 현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현실적인 세속적인 심정을 확장한다.”[7]

 

이제 개별자는 자기를 긍정하는 자유로운 주관성으로 된다. 명예나 사랑, 충성과 같은 심정은 그 속에 절대적 주관성이 내재하므로,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 무한성을 지니게 된다. 즉 명예나, 사랑 그리고 충성의 심정은 끝을 모르는 충만성을 간직한다. 그는 자기를 무한하게 긍정할 뿐만 아니라 타인조차도 이를 무한하게 긍정하기를 요구하는데, 왜냐하면 그의 개별적 현존 속에는 무한한 주관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사도 문학에서 한편으로 심정은 무한성을 지니며 다른 한편 이 심정이 퍼부어지는 대상은 개별적인 현존이다. 그것은 개별적 현존이니만큼 그 자체로서는 가치 없는 것일 수도 있으니, 이 점은 궁정 연애시를 대표하는 <죄수 마차를 탄 기사>를 보면 잘 드러난다.[8] 예를 들어 왕비 기네비에르는 랜슬롯이 죄수 마차를 탔다고 하여, 랜슬롯의 명예를 해치고 이는 동시에 자신의 명예를 해치는 일이라 보면서 냉담하게 대한다.

기사도 문학에서 다루어지는 심정이 개별적 현존과 관련되면서 기사도 문학은 심리 소설에서처럼 리얼리티에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 대표적 장면이 왕비 기네비에르가 기사 랜슬롯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이 냉담하게 대했던 것을 후회하는 장면이다. 그 때문에 왕비는 자살하려 하는데, 랜슬롯은 왕비가 죽었다는 소문 때문에 정신을 잃는다. 이 장면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비극적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 자신에게 무한한 주관성이 내재하는 개별적 현존은 타인의 눈에 단순한 개별적인 현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거기에 무한한 주관성은 오직 초월적으로만 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의 요구와 타자의 인정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충돌의 결과 기사도 문학은 몰락하게 된다.

 

5) 명예

기사도 문학에 대한 헤겔의 설명은 명예에서 사랑으로 마지막으로 충성으로 전개되는데, 그 가운데 명예는 어떤 개별적 대상을 자신의 자아의 무한한 자유를 입증하는 대상으로 간주할 때 나타나는 심정이다.

이 경우 예를 들어 아내의 정조가 의심받는다는 소문 자체와 같이 아주 조그마한 또는 불확실한 것조차 자신의 인격적 자유를 입증하는 대상으로 간주되면서 그것이 해쳐지는 경우 그의 명예가 훼손당한다고 느낀다. 이런 개별적 대상은 내가 자의적으로 선택한 대상이지만, 타인은 마땅히 이를 인정해야 하므로 여기서 타인과 충돌이 벌어질 것은 필연적이다.

이런 충돌은 타인이 내가 선택한 개별적 대상을 침해하기 때문에 벌어지는데, 침해 당한 자는 이런 침해가 자신이 소유한 어떤 대상이 해쳐지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바로 그 자신의 자아의 자유가 침해된 것으로 생각하므로 그는 자신의 침해를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헤겔은 “명예의 빛을 받아 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모든 특수한 것은 이 빛[Schein] 자체로 인해 이미 무한한 가치로 격상된다”[9]고 말한다.

앞에서 예로든 이야기에서, 왕비를 구하기 위해 죄수가 탄 마차에 올라탄 까닭에 기사는 그의 명예를 더럽힌다. 그 때문에 그는 그가 구해준 왕비로부터 냉담한 대접을 받게 된다. 랜슬롯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사랑이 명령한 것이라면 설령 죄수 마차를 타는 일일지라도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내겐 영광이었으니까, 그녀는 거기서 사랑의 완벽한 증표를 봤어야만 해.”[10]

 

그러면서도 그는 괴로워한다.

 

“그녀의 애인은 그녀한테 두고두고 모욕과 비난을 받을 만한 짓을 했어. 내가 사람들한테 비난 받아도 싼 도박을 한 거야”[11]

 

그는 그 자신은 사랑 때문에 한 일이지만 타인은 그 행위를 명예를 해친 일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명예의 이런 충돌은 명예를 규정하는 행위가 그저 관습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기에 생기는 일이다.

 

6) 사랑

헤겔은 명예의 심정과 사랑의 심정은 서로 얽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의 명예를 인정하는 것은 나에 대한 타인의 사랑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 그의 명예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을 존중하려면 무의미한 것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마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명예는 타인의 사랑을 전제로 해서 성립할 수 있으므로, 그 결과 명예의 심정은 이제 사랑의 심정으로 발전한다.

명예가 자아의 절대적 자유를 주장한다면 사랑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타자에 헌신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이런 헌신은 타자가 지닌 어떤 개별적 대상(즉 좋아하게 된 근거) 때문인데, 이런 개별적 대상에 대한 선택은 자의적일 뿐이다. 그에 반해서 타자에 대한 사랑의 헌신은 무한하게 되면서 마치 명예가 불가피하게 내적으로 충돌하듯이 사랑 역시 불가피하게 내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이런 사랑의 대상은 한 개인이며, 따라서 중세 낭만주의 문학에서 사랑은 고대적 사랑과 구별된다. 고대적 사랑은 인륜적인 것의 틀 안에서 일어나며, 그것을 벗어나는 사랑 예를 들어 파리스와 헬레나의 사랑은 인륜을 파괴하는 것으로 범법적인 것으로 된다. 또 기사도에서 사랑은 육체적인 것에 기초한 사랑과도 구분되는 것이니, 그것은 욕망이 끝나면서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기사도의 사랑은 비록 육체적인 것을 포함하더라도 어떤 개별적 현존에 대한 무한한 영원히 불변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사도적 사랑은 명예만큼이나 그 자체로 모순적인 것이다. 사랑은 타자를 위해 전적으로 자신을 버리는 헌신이다. 심지어 목숨조차도 버리며, 오직 일편단심으로 그를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바치는 대상은 아주 사소한 존재이다. 만일 상대방이 가진 탁월한 가치 때문에 그것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무한한 기독교적 사랑이 아니다. 상대방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일 때 그것을 사랑하는 경우 비로소 무한한 기독교적 사랑이 된다.

그런데 사랑히 무한하려면 사랑하는 대상의 가치가 무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려면 아주 사소한 것에 대한 사랑이어야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으니, 여기서 궁정 연애시가 가진 딜레마가 출현한다.

한편으로 연애는 정신적 아름다움 때문에 일어난다. 궁정연애시에서 남자는 항상 뛰어난 기사이고 여자는 항상 아름다운 여인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가치는 육체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앞의 소설에서 랜슬롯의 왕비에 대한 사랑은 그가 벌이는 목숨을 건 결투에서보다는 오히려 다른 여인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그의 일편단심에서 입증된다. 그러나 궁중 연애시는 기독교적 사랑을 다루기 때문에 이 사랑은 사소한 대상에 쏟아질 수밖에 없고 그 결론은 항상 단순한 육체적 사랑으로 나가게 된다. 아래와 같은 왕비 기네비에르의 한탄을 들어보라.

 

“아아, 그가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껴안아 주었더라면 내가 덜 서운하고 미안할 텐데! 그랬으면 어쨌다고? 아니, 둘 다 발가벗고 알몸을 맞대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마당에 내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은 비굴할 뿐이야!”[12]

 

궁중 연애시에서 베르베르와 크레티엥이 벌인 논쟁도 이런 기사도적 사랑이 지닌 모순을 잘 보여주며, 죄수 마차를 탄 기사에서는 손가락이 다쳐서 침대에 피가 묻었다는 주장으로 모호하게 처리하고 만다.

 

7) 충성

사랑이 타인의 인격에 대한 헌신이지만 이 경우 개별적 개인에 한정된 것이라 한다면, 충성은 좀더 발전된 낭만적 심정이다. 왜냐하면 충성의 대상이 되는 것도 역시 타인의 인격이지만, 이런 타인은 주인이나 귀부인에 대한 것으로서 이들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실체를 대변하는 일반적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충성의 대상이 되는 주인이나 귀부인은 자의적으로 선택된 대상이므로 그가 명예라는 대가를 받는 한에서 충성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그는 주관적으로 자신의 명예가 해쳐진다고 판단하면 충성을 멈출 수도 있고, 충성의 대상을 바꿀 수도 있다. 더구나 중세 충성의 대상이 되는 주인과 귀부인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일반적 개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전히 우연적인 힘의 강제에 따른 것이므로 이런 충성은 아직 제한적이다.

<죄수 마차를 탄 기사>라는 소설에서 이런 이중성이 잘 나타난다. 한편으로 왕비를 구하는 랜슬롯의 결정은 주군인 왕, 또는 그 주군의 부인에 대한 충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 크레티엥은 그것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기에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 조국의 백성들이 적국에 사로잡혀 있고 왕비를 구하는 것과 동시에 자기 백성을 구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더구나 왕비를 둘러싼 랜슬롯과 멜리아건트의 대립은 두 나라 백성의 대립으로 전개된다.

크레티엥은 왕에 대한 충성이 단순히 개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조국에 대한 충성임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이야기 전체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랜슬롯은 아더 왕와 왕비에 대한 충성으로 간주된다.


[1] 크레티앵 드 트루아(1135-1190) 그는 성당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173년 하급 사제가 되었으며, 마리 드 상파뉴의 궁정에서 활동한 음유시인이며, 궁정 연애시에 해당하는 여러 작품을 작성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에레크와 에니드>(1169), <마크왕과 이졸데>(1170), <죄수 마차를 탄 기사>(1176), <그라알의 이야기>(1181) 등을 작성했다.

[2] 이들은 사랑을 주로 노래한다 해서 민네쟁어[Minnesänger]라고 말하기도 하며, 또 궁중에 전속된다고 해서 메내스트렐[ménestrel]이라고도 불리운다.

[3] 트루바두르의 주 활동무대가 되었던 곳은 타키텐의 수도 프와티에에 있는 엘레노어의 궁정이다. 엘레노어는 다키텐의 상속녀로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결혼했다가 이혼하면서 자신의 궁정으로 돌아왔는데, 이 시기 (1150-1173)그녀의 궁정에서 여러 트루바두르가 활동했다. 대표적인 트루바두르는 베르나르 드 방타두르와 베누아 드 생트모르이다. 그녀가 1173이후 노르망디 출신인 정복왕 윌리엄스의 아들 헨리 2세의 왕비로서 영국으로 떠난 후에는, 그녀의 딸인 마리 드 상파뉴가 거주하던 상파뉴 백작의 상파뉴 궁정이 트루바두르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여기서 활동했던 대표적 트루바두르가 크레티앵 드 트루아이다. <죄수 마차를 탄 기사>의 국내 번역자 유희수에 따르면, 1170-1174년 사이에 베르나르 드 방타두르와 크레티엥 드 트루아 사이에 연인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논쟁했다고 한다. 베르나르는 육체적 환희에 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보았으나 크레티엥은 정신적인 환희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레티엥, 죄수 마차를 탄 기사, 유희수 역, 문학과 지성사, 2016, 172쪽

[4] 트루바두르에 관한 이런 사실은 아놀드 하우저,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 1권, 365-372쪽 서술을 참조하라.

[5]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권, 351-369쪽 참조

[6] 역사가 Léon Gautier는 그의 책  La Chevalerie (1884)에서, 기사도의 덕목을 아래와 같이 10개 정도로 요약한다. 크게 보자면, 신앙과 봉건적 의무를 제외하면, 약자 보호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덕목만으로는 궁정연애시에 담긴 명예, 충성, 사랑의 정신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대는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믿고, 그 지침을 준수해야 한다.

-그대는 교회를 옹호해야 한다.

-그대는 모든 약자를 존중해야 하고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그대는 태어난 조국을 사랑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의 적 앞에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

-그대는 불경한 자에 대해 그침 없이 자비 없이 전쟁을 벌여야 한다.

-그대는 봉건적 의무를 그것이 신의 법에 반대되지 않는 한 신중하게 수행해야 한다.

-그대는 거짓말 해서는 안되며, 맹세에 충실해야 한다.

-그대는 관대해야 하며 누구에게나 후하게 베풀어야 한다.

-그대는 어디서나 항상 부정의와 악에 대립하여 정의와 선을 쟁취해야 한다.

[7] 미학강의 2권, 182쪽 번역은 필자가 수정

[8]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기사인 주인공 랜슬롯은 아더 왕의 기사이다. 그는 아더 왕의 부인인 왕비 귀네비에르를 사랑한다. 적국인 고르 왕국의 왕자 멜리아건트는 아더왕의 궁정을 찾아와 결투를 통해 왕비를 얻어 자기 나라로 데리고 간다.

랜슬롯은 왕비를 구하기 위해 한편으로 기사로서 명예를 버리고 죄수마차를 타며, 기꺼이 목숨을 걸고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칼 다리를 건너간다. 흥미로운 것은 그 가운데 어떤 고귀한 아가씨가 랜슬롯을 유혹하지만 랜슬롯의 왕비에 대한 사랑을 보고 그를 떠난다는 에피소드이다. 랜슬롯은 마침내 적국에 이르러, 멜리아컨트와 결투를 벌여 승리하면서, 왕비를 구하게 된다. 동시에 랜슬롯은 적국에 포로가 되어 있는 조국의 백성을 함께 구한다. 결투의 마지막 순간 고르 왕의 중재로 왕비를 풀어주는 대신 1년 뒤 아더왕의 궁정에서 다시 결투하기로 한다.

왕비 기네비에르는 랜슬롯이 죄수 마차를 타면서 기사로서 명예를 저버린 것 때문에 처음에 냉담하다. 하지만 포로를 빼앗긴 고르 왕국 백성이 랜슬롯을 포로로 사로잡는다. 그러자 랜슬롯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왕비는 자신의 냉담한 것을 후회하면서 사랑의 마음을 회복한다. 마침내 고르 왕의 도움으로 풀려난 랜슬롯은 왕비를 만나 마음을 통한 사랑의 합일에 이르게 된다. 이때 왕비의 침실에 들어가는 중 랜슬롯은 손가락을 다치며, 그 피가 침대의 이불에 묻어 왕비가 불륜을 범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랜슬롯은 다시 한번 결투를 통해 왕비의 결백을 입증한다.

왕비와 백성을 데리고 고국으로 떠나기 전 랜슬롯은 멜리아건트의 흉계에 빠져 아무도 알지 못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탑에 갇힌다. 1년 뒤 멜리아건트는 랜슬롯과의 약속대로 아더 왕의 궁정에 다시 나타나, 랜슬롯과 대결을 요구하며, 이기면 왕비를 데리고 가겠다고 한다. 1년 동안 갇혀 있던 랜슬롯은 모험의 도중에서 구해준 어느 아가씨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여 조국으로 돌아와 이미 돌아와 있는 왕비가 보는 앞에서 멜리아건트와 두 번째 결투를 벌여 그를 죽여 승리를 차지한다.

[9] 미학 강의 2, 189쪽

[10] 크레티엥 드 트루아, 죄수 마차를 탄 기사, 유희수 역, 문학과 지성사, 2016. 110쪽

[11] 위의 책, 110쪽

[12] 위의 책, 107쪽

헤겔미학산책21-낭만적 종교 예술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21-낭만적 종교 예술

 

1)

낭만주의 미학은 중세 종교적 구원에서 출발하여 기사도 정신을 거쳐, 근대 세속적 성격 예술로 나간다. 이런 분류는 예술 작품이 다루는 주제를 중심으로 분류한 것인데, 이는 헤겔이 이 시대 시간적 흐름을 고려한 것이기는 하지만, 시간적 흐름과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흔히 이 시대 예술을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계몽주의 등과 같이 시간적으로 분류하는 것과 대비된다.

헤겔은 그 출발점에 해당하는 종교 구원을 다루는 예술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첫 번째가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에 관한 형상화이며, 두 번째가 기독교적 정신인 종교적 사랑을 표현하는 작품이다. 세 번째는 교회의 정신을 다룬다.

종교 예술에 관한 헤겔의 설명은 여러모로 고딕 예술을 중점을 다룬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헤겔은 종교 예술은 고딕 이전 로마네스크나 그 이후 르네상스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예술을 포함하고 있다. 헤겔은 종교 예술이 각 시대마다 보여주는 양식상 차이에 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으며 오히려 여러 시대에 걸쳐 등장하는 기독교 종교 예술이 지닌 공통성에 주목한다.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종교 예술을 주로 고딕 예술과 관련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2)

흔히 고딕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는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시대를 말한다. 이 시대 유럽 사회는 전반적으로 변화했는데, 새로운 경작 기술을 바탕으로, 부역 노동은 생산물 지대로 전환했다. 잉여가 축적되면서 수공업이 분리되며 상업적 교역이 발전하고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귀족의 사치품을 매개하는 원격지 무역이 부활했다. 영주권이 집중되면서 그 가운데 왕과 대영주의 권리가 신장되었다.

왕은 웅장한 교회를 세우는 등 교회를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교회는 왕과 대 영주를 위해 이데올로기적인 지원과 관료층을 제공했다. 이를 위해 수도원 학교와 대학이 세워졌다. 이 시기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과의 접촉을 통해 그리스 고전 학문이 유럽으로 들어와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켰다. 이런 역사적 정신적 변화를 바탕으로 여러 예술작품이 형성되었는데 이 시대 예술 작품을 통칭하여 고딕 예술이라 일컫는다.

이 시기 등장한 고딕 예술은 종교적 내용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 예술형식이나 고전적 예술형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하지만 헤겔은 여기서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하는데, 그 이전 시대 예술은 영원하며 부동하는 신 자신의 모습을 정지된 상태에서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고딕 예술은 신이 일으키는 역사를 그 운동하는 과정 가운데서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사도, 신도들이 겪는 수난과 참회 그리고 영광의 삶이 펼쳐진다.

 

3)

기독교적 종교 예술 대표적으로 고딕 예술이 보여주는 가장 근본적 특징을 헤겔은 특칭성[Partikularitaet]이라는 개념에서 찾고 있다. 즉 그 모습이 과거 신의 모습에서 보여졌던 숭고하거나 이상화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그리스도를 그리던 신도를 그리던 간에 그 모습이 우연하며 개별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 어느 작품이나 사실성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연하고 개별적인 모습 자체가 신의 모습은 아니다. 특칭적인 모습 가운데서 신적인 면모가 출현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겪는 삶 속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 삶은 곧 수난과 참회, 영광을 보여주는 것인데, 대체로 긍정적인 최종 결과보다는 그 과정에 등장하는 부정적 요소가 강조된다.

또한 이런 삶의 운동하는 장면은 제단화에서 보듯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거나 하나의 장면 속에 응축되거나 몽타쥬되어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런 특성은 고딕 시대 대표적 화가 시모네 마르티니의 작품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1]

부정적 장면 그리고 응축 등 기법이 사용되는 가운데 처음에 사실적인 모습은 파괴되면서 기이하게 일그러지고 심지어 조악하며 야만적으로 보이니 그 때문에 이 시대 예술은 고딕적이라고 불리어지게 된다. 하지만 세부적으로만 본다면, 그런 가운데서도 사실성을 잃지 않으니, 이 두 가지 대립된 속성 때문에 자주 이 시대 종교 예술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실성에 주목한 사람들은 이런 종교 예술 속에 그리스 고전 문화의 영향을 찾게 되며, 로마네스크니 르네상스니 하는 이름이 붙여진다. 반면 왜곡된 형상의 측면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 예술을 고딕[또는 게르만적]이니 바로크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2]

 

4)

실제로 로마네스크 조각과 고딕 조각을 비교해 보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부조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변하는 스페인 산티아고 폼포스텔라 성당의 현관 부조이다. 후자는 고딕을 대표하는 프랑스 파리의 사르트르 성당의 현관 부조이다.

건축적으로 본다면, 로마네스크와 고딕은 판연하게 구분된다. 하지만 조각을 놓고 보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데, 양자 모두 한편으로는 사실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양식화되어 있어, 약간의 정도 차이만 보여줄 뿐이다.

이런 이중성을 헤겔이 어떻게 지적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현재 우리의 국면에서는 형상이 일상적인 것이자 주지의 것으로 머물며, 그 형식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무차별적인 특징적인 것, 즉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그리고 이 면에서 대단히 자유롭게 취급될 수 있는 것이다.”[3]

 

“왜냐하면 개체적 주관성과 신의 화해는 직접 등장하는 조화가 아니라, 무한한 고통, 헌신, 희생으로부터 그리고 유한하며 감각적이며 주관적인 것의 절멸로부터 비로소 등장하는 조화이기 때문이다.”[4]

 

3)

이런 수난과 참회를 통해 다시 복귀한 신성이 곧 성령이니, 신이 전개하는 역사로서 예술은 마침내 성령의 표현으로서 예술로 발전하게 된다. 기독교적 성령의 본성은 무한한 사랑의 감정이다. 헤겔은 이 사랑을 개념적으로 규정하면서 “타자의 자기 속에 자기를 망각하는 동시에 이런 망각 속에서 비로서 자신을 소유하는 것”[5]이라고 규정한다.

기독교적 사랑은 한 개인의 다른 개인에 대한 인간적 사랑은 아니다. 이 사랑은 곧 절대자 즉 신 자신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내면적으로 집약된 무한한 심정 즉 “그 무궁무진함을 직접 심정의 단순한 심연으로 끌어 모으는” 내밀한 사랑이다. 또한 이 사랑은 모든 개인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 즉 “그 내용의 일반성에 의해 고양되고 담지되는” 사랑[6]이다.

헤겔은 무한한 일반적 사랑을 표현하는 예술의 어려움을 말한다. 고전적 예술이라면 이런 심정을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신성은 우연하고 개별적인 인간 속에 머무르니, 특칭적인 인간의 모습 속에 무한한 사랑, 순수한 심정을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인류에 대한 사랑보다는 성모 마리아의 아기 예수나 죽은 예수에 대한 사랑이 더 자주 표현되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아기 예수나 죽은 아들에 대한 사랑은 모성애라는 자연적인 감각적 형상을 갖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성애의 자연적인 내밀성은 철저히 정신화되어 신적인 것을 본래의 내용으로 삼지만, 그 정신적 내용은 그윽하면서도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는다.”[7]

라파엘의 마돈나 상이다. 마돈나의 눈은 헤겔이 말하는 그윽하고 무한한 모성애를 잘 표현한다.

 

4)

종교 예술은 그리스도의 수난사나 내밀한 사랑의 정신의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종교 예술은 사도나 신도의 삶으로까지 확장된다. 순교의 고통, 참회와 개종, 신도에게 펼쳐진 기적 등이 예술적 표현 대상이 되는데, 헤겔은 이런 유형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유형 대상 중의 하나가 곧 마리아 막달레나[8]라고 말한다.

페르지노의 십자가 1480, 예수의 발 아래 기도하는 사람이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1] 시모네 마르티니(1284-1344)는 고딕 후기에 이탈리아 시에나에 살았던 대표적 고딕 화가이다. 그의 작품 십자가에서 내림(1315)은 성경의 이야기를 파노라마 식으로 전개하면서 하나의 그림 속에 중첩해서 표현하고 있어 운동감이 느껴진다.

[2] 예를 들어 아놀드 하우저의 주장을 들어보자.

[3] 미학강의 2권, 181쪽

[4] 미학강의 2권, 182쪽

[5] 미학강의 2권, 165쪽

[6] 미학강의 2권, 164쪽

[7] 미학강의 2권, 168쪽

[8] 헤겔은 그 중 가장 탁월한 것은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이라 하는데 어떤 그림을 지칭하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헤겔 당시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름다움의 이미지와 죄의 이미지가 겹쳐 있었다. 그 때문에 헤겔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아름다운 죄인’이라 말한다. 헤겔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육체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정신적인 아름다움 즉 무한히 사랑하는 마음을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그녀의 음란의 죄가 그녀의 육체적 아름다움 때문에 나오는 것으로 본다. 그 죄는 자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일 뿐이다. 오히려 그녀는 머리칼로 예수를 씻는 정신적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으니 그 마음에 비추어 볼 때 그녀의 죄는 진정한 죄가 아니며, 그녀는 죄를 짓는 가운데서도 양심을 지키고 있으며 그나마 지은 죄조차 이미 고해하고 예수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그녀에 내재하는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용서를 받은 것이다. “감동적인 것은 사랑하는 가운데서도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며, 영혼의 감각적으로 풍부한 아름다움 속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그녀의 잘못은 그녀가 수많이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믿었는데 이 사실이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오류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감각적으로 풍부한 아름다움 자체를 본다면 그녀가 사랑 속에서도 고상하며 깊은 심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밖에는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미학강의 2권, 178쪽)

헤겔미학산책20-낭만주의적 예술 형상으로서 가상[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20-낭만주의적 예술 형상으로서 가상

 

1) 가상

앞에서 근대가 시장 관계가 일반화된 사회라 했다. 이 시대 정신을 절대적 주관성의 정신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것을 표현하는 종교적 형식 즉 내재하면서 초월하는 신과 이 시대 인간의 파토스와 죽음에 관한 생각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 시대 정신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형식인 낭만주의 예술 형식을 살펴보기로 하자. 

 

근대에 들어와 소외된 정신이 등장하면서 예술 형식도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헤겔에서 예술은 정신을 표현하는 기호이다. 상징주의 시대 예술 기호는 그 의미를 수수께끼처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고전주의 시대 예술 기호는 그 의미를 이중화하여 보여주는 기호 즉 닮은 꼴, 현상이었다. 헤겔에 따르면 이제 소외된 정신의 시대 등장하는 예술 기호는 가상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가상[Schein]은 본질이 자기를 비추는 거울에 비추어진 그림자, 영상을 말한다. 그 거울 속에 본질의 영상이 맺히지만, 그것은 이제 자신이 다른 것의 영상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못한다. 그 점에서 가상은 현상과 구분된다. 현상 역시 본질이 비친 영상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마치 자립적인 실재처럼 또는 진실된 것처럼 나타난다.

 

현상은 사실 거짓 영상이면서도 자신이 진실된 실재라고 믿는 것이며 반면 가상은 자신이 거짓 영상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면서, 오히려 진실된 실재 본질 자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현상과 가상의 이런 관계는 자신을 실재처럼 보이게 만드는 무대 장면과 다양한 소원화 장치를 통해 그런 환상을 깨는 무대 장면의 관계에 비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눈동자

낭만적 예술 형상인 가상은 그것이 어떤 형상인 한에서 구체적인 자연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지만, 어떤 형상이 이미 자기 부정성을 지닌다는 것은 구체적인 형상이 더 이상 자연 그대로 머무르지 못하고 이미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정신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현존재는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적인 것을 비감각적인 것으로, 즉 정신적인 주관성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진리는 단순히 상상에 의해 산출된 이상이 아니라, 스스로 유한한 즉 외면적이고 우연한 현존재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을 신성한 주관성으로 자각한다. 즉 자신 안에 무한히 머물며 또한 이런 무한한 자신을 자기에 대해 존재하게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다.”[1]

 

절대적 주관성 즉 신은 예술적 형상 속에 내밀하게 존재하므로 이런 내밀성은 자주 영혼을 들여다보는 눈으로 표현된다. 고전적 신상은 눈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신은 자기를 외부로 전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안으로 들여다 보일 내면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적 신상에서는 눈을 가지지만 그 눈은 신의 눈으로 세계를 조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낭만적 신상에서 그 신은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으면서 그 눈을 통해 그 속에 감추어진 내밀한 신적 존재를 암시한다. 여기서 눈은 내면을 들여다 보는 통로다. 라파엘로 시스티나 마돈나 상에서 표현된 성 모자의 눈동자를 보라.

3) 시간성

고전주의 예술 형식인 현상에서 내용(의미)은 그 형상(기호)과 닮은 꼴로 합치한다. 내용은 형상 속에 남김없이 드러나며, 형상은 내용을 드러내면서 자기를 이상화한다. 반면 낭만주의적 가상에서 내용과 그 형상 사이에 다시 분리가 일어나니, 이때 형상은 더 이상 이상화된 형상이 아니고 다만 실제 그대로 유한한 형상에 불과하다. 반면 내용은 이런 유한한 형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 무한성이다.

 

여기서 표면적으로 보면 내용과 형상이 분리되는 상징적 예술 형식이 다시 부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상징과 가상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상징은 그것을 지시하는 내용에 대해 다만 외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의 관계는 수수께끼적인 관계이다.

 

반면 낭만적 가상은 형상에 속에 이미 자기 부정성이 들어 있으니 이를 통해 내용이 자기를 비추어준다. 이런 자기 부정성은 개별적 현상으로 충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자기 부정성은 개별적 현상의 연속적인 운동을 통해 드러날 뿐이다. 낭만적 가상은 내용이 자기를 타자화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 과정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낭만적 예술의 근본적 특징인 시간성이 드러난다. 상징적 예술이나 고전적 예술은 시간성을 결여한다. 그것은 정신이 드러나는 영원한 한 순간일 뿐이다. 그러나 낭만적 예술은 고정된 순간이 아니라 시간적 운동 속에 자기를 표현한다. 미술이 음악을 지향하고 음악이 문학적 서술을 지향하는 것도 낭만적 예술에 필수적인 시간성 때문이다.

 

4) 일상성

헤겔에 따르면 낭만적 예술 형식은 더 이상 신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 과거 상징주의 예술이나 고전주의 예술은 시대 정신은 신을 직접인 주제로 삼는다. 이런 예술 형식에서 예술은 신을 상징하거나 신을 드러내는데 목표를 둔다.

 

그러나 낭만주의 예술 형식에서는 신은 항상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출현할 뿐이며, 여기서 예술이 소재로 삼는 것은 유한하고 우연한 세속적인 현상일 뿐이다. 신은 이런 유한하고 우연한 현상에 내재하거나 이런 현상이 부정되는 운동을 통해서만 드러날 뿐이다.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의 죽음이거나, 인간이 세계 속에서 겪는 세속적 운명이 예술의 주제로 될 뿐, 신은 그 어디에서도 직접 드러나는 법은 없다. 

 

상징적 예술형식에서나 고전적 예술형식에서, 신을 표현하는 감각적 형상은 지극히 제한되었고 예술적 소재는 한정적이다. 반면 낭만적 예술 형식에서는 현실의 모든 것이 예술적 소재로 다루어진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이나 자기 부정성을 통해 신적인 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정신은 근대에 들어와 그 이전 시대에 비해 비할 바 없이 깊어졌고 거꾸로 이런 정신을 표현하는 감각적 형상의 범위는 무한정 넓어졌다고 한다.

 

일체의 유한하고 규정된 것이 낭만주의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으므로, 그런 소재는 일상적인 현실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과거에 간과된 소재도 이제는 훌륭한 예술적 소재가 될 수 있으니 예술가는 어떤 일상적 현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정신의 원칙이 내적으로 깊어질수록 그만큼 더 관심, 목적, 그리고 감각의 범위는 무진장한 것이 되며 그리하여 정신은 무한히 증가된 내용을 갖는 내적, 외적 충돌과 분열들, 여러 단계의 열정들, 그리고 극히 다양한 국면의 만족들로 전개된다.”[2]

 

낭만주의 예술은 가장 철저한 리얼리즘 예술이다. 낭만적 예술은 현실의 자기 부정성을 추구한다. 이런 부정성은 외적인 부정성이 아니라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부정성이니, 그런 점에서 자기 부정성이다. 작가가 자기 마음대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성이 현실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것이려면, 작가는 현실에 대해 철저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 세부에서까지 찾아 들어가고 그 유한성과 규정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현실을 파악해야만 그 속에서 부정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낭만주의 예술은 ‘초상화적인 것[Portrartig]’이라고 한다. 또는 ‘일상적인 것 속에서 고향을 두고 있다[Heimatlichkeit im Gewoehnlichkeit]’고 말한다. 헤겔은 낭만주의 예술이 리얼리즘적인 경향성을 지니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낭만적 예술의 무한한 주관성, 절대성은 그 현상 속으로 침잠하지 않고 자신 안에 머물며 바로 이로 인해 그 외면성을 고립적으로[fuer sich] 갖지 않고 타자에 대해 관계하는 것으로서[fuer Andres] 즉 자유롭게 방임되어서 어떤 것에 희생되기도 하는 외면으로서 갖는다. 나아가서 이런 외적 요소는 일상성과 경험적 인간의 형상을 반드시 띠어야 하는바 까닭인즉 여기서는 … 신 자신이 유한한 시간적 현존재로 내려오기 때문이다.”[3]

 

5) 비미적인 것과 숭고

낭만주의 예술에서 예술의 소재가 되는 외적인 현존은 자립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자기 부정성을 지닌 것이니, 그것은 유한성과 규정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고전주의에서 예술적 현존은 이상화되면서 자립성을 지닌 것이 된다. 그것은 균형과 조화를 지니고 고요하게 머무른다. 반면 낭만주의에서 예술은 이런 유한성과 규정성 때문에 고전주의적 미학에 비추어 본다면 균형과 조화를 결여한 비-미적인 것[Unschoen], 즉 추한 것을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낭만주의 예술에서 이런 비-미적인 소재는 진정한 낭만적 예술의 이념을 드러내는 계기에 불과하다. 이런 비미적인 것은 곧 이행하고 마는 우연한 것이니, 이러한 비-미적 예술 소재는 절대적 주관성의 정신을 드러내려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고전주의 예술은 외적 형상에서 미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균형과 조화를 지니면서 이상화된 형상이다. 그러나 낭만적 예술은 외적 형상에서는 비미적인 것이지만, 절대적 주관성을 드러내면서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여기서 정신적 아름다움이란 정신이 조화와 균형을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신적 아름다움은 곧 자신이 절대적 주관성인 신적 존재라는 의미이니, 이 아름다움은 숭고한 아름다움에 속한다고 하겠다.

 

여기서 상징주의 시대 등장한 숭고성이 다시 출현하는데, 상징주의 시대 숭고성은 마법적인 방식으로 신과 합치에 이르는 것이라면, 낭만주의 시대 숭고는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는 데서 존재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숭고는 무상의 죽음을 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성과 같은 숭고이다.

 

6) 음악성

그러므로 헤겔은 낭만주의 예술은 두 세계를 갖는다고 한다.  그 하나는 절대적 주관성의 내적인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인 것의 영역이다. 헤겔은 이 두 세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낭만적 예술은 외면성이 이제 다시 독자적으로 활보하게 만들며, 이런 점에서 … 각양각색의 소재들이 자연적 우연성을 갖는 현존재 그대로 거침없이 표현되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동시에 단순히 외적인 소재로서는 무차별적이고 저급한 것이며, 오직 그 속에 심정이 집어넣어지고 … 내면의 내밀성[Innigkeit]을 언표할 때만 본래의 가치를 지닌다는 규정을 지닌다.”[4]

 

이처럼 외적인 현존의 부정을 통해 떠오르는 절대적 주관성을 헤겔은 마치 음악과 같은 것에 비교하고 있다.  

 

“이런 관계 속에서 내면은 정점에서 표출되면서 외면성 없이 외화된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채 흡사 자기만을 듣는 듯하며 대상성도 형상도 띠지 않은 음조 자체이고, 물위를 떠도는 것이며 세계 위에 울려 퍼지는 울림이니, 세계는 자신의 현상 속에서 그것도 이질적 현상 속에서 다만 영혼의 내적 존재를 비추는 그림자만을 받아들이고 또 이런 내적 존재를 반영할 뿐이다.”[5]

 

“그러므로 낭만적인 것의 기본 음조는 음악적이며 특정한 표상 내용을 갖는다는 점에서 서정적인 것이다.”[6]

 

헤겔은 이런 점에서 낭만적 예술은 한편으로 무한히 다양한 소재를 받아들이는 보편성과 다른 한편으로 모든 외적 현존이 지양되는 순수한 내적 심정의 심연이 공존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7) 낭만적 예술과 종교

 낭만주의에서 내용은 예술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고전적 예술 형식에서 예술은 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신은 자신을 외적으로 현현하므로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자각되며, 예술 없이는 자각되지 않는다. 예술이 부차적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 예술은 상징적 예술과 같은 위치에 있지만 그럼에도 양자에 차이가 있다. 

 

상징적 예술에서 신적 존재는 먼저 종교를 통해 표상[환상]으로 주어지지만, 이런 표상은 소수의 사제에게서나 가능한 것이며 대중에게서는 불가능하다. 대중은 상징적 예술을 통해 신적 존재에 접근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상징주의 시대에는 종교에 봉사하는 데 이런 봉사는 부차적이면서도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낭만적 예술에서 절대적 주관성의 정신은 자기 매개적인 존재이다. 이런 자기 매개 속에서 외적인 존재는 그 자체에서 자기 부정성을 지닌 것이기에, 우연하며 잠정적인 것으로 주어지므로, 이것은 예술의 소재가 되기는 하지만, 이런 예술을 통하지 않고서 절대적 주관성은 자기 매개를 통해 즉 사유를 통해 자기를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사유는 일반 대중에게도 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대중에게 예술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이로써 예술은 낭만주의 시대 말기 즉 근대에 이르러 일반 대중에게서도 잊혀지면서 예술의 종말이 다가온다.

 

[1] 미학강의 2, 140-141쪽

[2] 미학강의 2, 148쪽

[3] 미학강의 2, 156쪽

[4] 미학강의 2, 150쪽

[5] 미학강의 2, 150쪽

[6] 미학강의 2, 151쪽

헤겔미학산책19-근대인과 파토스[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9-근대인과 파토스

 

1) 근대인

근대는 시장 또는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를 받는다. 헤겔은 이런 관계를 ‘정신의 소외’라는 개념으로 서술했다.

소외된 정신 속에서 신과 인간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신은 개인들 사이의 상호 작용 즉 개인의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를 나타낸다. 앞에서 이를 내재적 초월이라는 기독교 신의 모습을 통해 설명하였다.

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반대로 반영하는 것이 곧 근대인의 모습이다. 한편으로 근대인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자기를 긍정하리라 믿는다. 그는 자기에 대한 오만에 빠지며, 무한정한 열정으로 자기를 추구한다. 이것이 근대인의 파토스다. 다른 한편으로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언제든지 그를 파멸시킬 수 있으니, 그는 운명에 대한 예감 가운데 죄의식을 느끼며 그 앞에서 불안하다.

헤겔은 무한한 파토스 속에서 오만하면서도 닥쳐오는 운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헤겔은 이런 점을 근대인의 파토스와 죽음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이 두 개념은 고대에서도 출현하는데, 헤겔은 고대적 개념과 근대적 개념의 차이를 정신적 토대의 차이에서 규정하려 한다.

 

2) 고대의 파토스

고대인의 파토스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라는 작품이다. 여기서 두 주인공 엘렉트라와 클레온은 파토스에 따라 행동한다. 역시 그들의 파토스는 그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실체적 힘 예를 들어 가족의 윤리나 국가의 윤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기 자신이 명백하게 정당하다고 믿고 이를 주저 없이 단호하게 행동으로 실천한다.  

그들은 행위의 결과 몰락하지만, 그의 몰락은 그가 자기의 실체와는 대립하는 다른 실체적 힘을 해치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 다른 실체적 힘에 의해 보복 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에 대립하는 실체적 힘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부당하게 보복 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안티고네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오빠를 장사 지내고 클레온 앞에서 끌려와서 자신이 택한 원리가 하늘의 법이라고 주장한다.

 

“전 글로 쓰인 것은 아니지만, 확고한 하늘의 법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임금님의 법령이 인간의 몸으로서 강한 힘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법은 어제오늘 생긴 것이 아니고 불멸의 것이며 그 시작은 아무도 모릅니다.”[1]

 

 반면 클레온[안테고네의 외삼촌이다]은 국가의 원리를 대변한다. 국가적으로 본다면 싸움을 벌인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조국을 방어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조국을 배반한 자다. 당연히 전자는 경배 되어야 하고 후자는 처벌되어야 했다. 클레온은 등장하자마자 코러스 앞에서 자신의 임무를 고백한다. 그는 국가를 최우선의 원리로 삼는다.

 

“시민에게 안전이 아니라 파멸이 닥쳐오는 것을 보고서는 나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작정이며, 또한 국가에 적대하는 인간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외다. 그것은 즉 우리나라가 우리의 안전을 지켜 주는 배이며, 그 배가 편히 항해할 때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

 

안티고네든 클레온이든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실체적 힘과 다른 실체적 힘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그는 무지에 의해 범법을 실행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티고네는 자신의 무죄를 끝까지 주장한다. 

 

“저는 이렇게 친구들의 버림을 받고 불행한 이 몸은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죽음의 동굴로 갑니다. 나는 하늘의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경건한 일을 하다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들었건만 어째서 불쌍한 이 몸은 신들께 의지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런 일로 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면 내 운명을 다 겪고 난 다음에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한 부당한 것과 똑같은 화를 그들도 겪게 되기를 바랍니다.”[3]

 

그럼에도 그들은 마침내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되는데, 그런 자각은 자신이 다른 실체적 힘으로부터 보복 당하면서 비로소 생겨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정당성이란 주관적이거나 추상적인 당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는 실체적 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파멸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된다. 아래 클레온의 고백을 들어보자.

 

아, 이 죄는 도저히 다른 사람한테 전가할 수 없는 것이구나! 내가, 그렇다, 내가 죽였다. 불쌍한 이 몸!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얘들아, 어서 나를 데려가거라.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나를 빨리 데려가거라!”[4]

 

3) 근대의 파토스

근대인의 파토스는 이런 실체적 힘과는 무관하다. 여기서 파토스란 자신의 목적을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추구하면서도 이런 추구가 단순히 자신의 주관적 선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적인 힘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그는 아직 신적인 강요를 명백하게 자각하지 못하며 그것은 다만 느낌으로 다가오기에 그는 자신의 목적을 자기를 넘어선 욕망 즉 무한한 욕망 즉 열정이라는 방식으로 느낀다. 

하지만 이런 자의적인 추구는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파멸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토스적 인간은 처음에 그에게 다가오는 파멸을 어떤 알 수 없는 외적인 힘에 의해 지배되는 운명으로 파악한다. 그는 이런 운명을 무의식적으로 예감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끝없는 죄의식과 불안 속에 있다.

근대인의 파토스는 예를 들어 절대주의 시대 대표적인 예술가인 라신느의 희곡 페드라[5]에서 나타나는 페드라의 모습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페드라는 자신이 이폴리투스를 고발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유모! 질투의 불길에 휩싸인 이 몸의 심정을 보살펴 주오. 아리시아를 그냥 둘 수는 없소. 그 가증스런 혈통에 항거하는 내 낭군의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하오! 그녀의 죄는 그의 오빠들의 죄에 능가하는 것이니 가벼운 벌로 그치지 않도록 내 질투에 겨운 분노에 힘입어 내 낭군 테세우스에게 간청하려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내 지각이 갈피를 잃고 질투에 눈이 멀어 테세우스왕에게 애원하는 것에 의지하다니. 내 낭군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 시련으로 몸을 불사르다니!” [6]

 

위의 글의 앞부분은 질투, 뒷부분은 죄의식을 드러낸다.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한없는 질투, 그것이 곧 근대인의 파토스이다. 그런데 이런 파토스 속에 이미 그는 자신의 잘못, 죄를 자각하고 있다. 그의 질투에는 죄의식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파멸을 예감하고 있다. 그에게 마침내 파멸이 다가온 순간 그는 그것이 그 자신에게 적절한 자신의 정의라는 것을 인정한다. 자신의 죄를 자각한 페드라는 모든 것을 고백하고 죽기로 결심한다.

 

“지금 이 몸은 촌각이 소중하오. 테세우스왕이시여! 제발 내 말에 귀를 기우려주오. 순결하고 존엄한 왕자에게 불륜의 추파를 던진 것은 이 몸이요 비너스신의 화살이 이 가슴에 정념의 불길을 타오르게 했으며, 그 밖에 모든 일들은 하녀 에노느가 서둘러 저질은 짓이옵니다. 그러나 이젠 그도 자기 죄를 깨닫고 바다 속에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이 몸은 당신 앞에 나아와 내 한 맺힌 탄식을 털어놓고 한발 늦게 죽음의 나라로 내려가려 합니다.”[7]

 

4) 죽음에 관해

헤겔에 따르면, 고대인과 근대인은 죽음에 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고대인에게 삶은 정당한 실체적 힘을 추구하는 것이니, 그에게 죽음이란 자연이 그에게 부과한 몫이 그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체적 힘을 추구하는 일은 이제 그의 사후에 새로운 인간에 의해 이어져가니, 그의 죽음은 우연적인 개인적 삶의 소멸에 불과할 뿐이며 그의 삶이 추구하는 본질은 계속적으로 이어 간다. 따라서 고대인은 이미 스스로 불멸하며, 불멸에 대해 진지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 앞에서 담담하며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래는 죽음 앞에 선 안티고네의 고백이다.

 

“(안티고네) 저는 이렇게 친구들의 버림을 받고 불행한 이 몸은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죽음의 동굴로 갑니다. 나는 하늘의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경건한 일을 하다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들었건만 어째서 불쌍한 이 몸은 신들께 의지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런 일로 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면 내 운명을 다 겪고 난 다음에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한 부당한 것과 똑같은 화를 그들도 겪게 되기를 바랍니다.” [8]

 

반면 근대인에게 죽음이란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거꾸로 근대인에게서 죽음이란 자신에게 아주 소중한 삶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인은 자신의 주관적 욕망이 무한히 중요한 것이므로, 죽음이 두려운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근대인은 불멸에 대한 진지하고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근대인에게서 죽음은 오히려 신적인 정의의 실현이 된다. 사실 무한한 욕망으로 추구되던 개인적인 목적은 자의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이런 자의적인 목적이 제거되는 것만이 진정으로 중요한 객관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니, 죽음은 신적 정의를 회복하여 신적인 것으로 복귀하는 과정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근개인에게서 죽음은 곧 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즉 개인의 죽음은 신이 자기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근대인의 죽음 개념의 앞에서 언급한 페드라에서도 나타난다. <페드라>에서 운명의 힘은 마지막 장면에서 폭로된다. 이 마지막 순간 페드라의 태도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라신느는 온몸에 독이 퍼져서 죽어가는 페드라의 고백을 통해서 이를 밝히고 있다.

 

“죽음은 내 눈에서 빛을 빼앗아 이 눈이 더럽힌 이 세상의 모든 빛을 정결케 하려는 것이요.”[9]

 

페드라는 자기의 죽음을 긍정한다. 그 때문에 페드라는 마지막 순간 더는 자책도 사라지고 고귀한 고요 속에서 죽음을 겪게 된다. 이런 몰락의 극을 통해 라신느가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세상을 영원히 지배하는 신의 힘, 신의 영광이다.


[1]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현암사, 1969. 이 가운데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조우현이 번역했다.

[2]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3]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4]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5] 라신느는 루이 14세 시절 즉 바로크 시대 궁정 작가이다. 그는 같은 비극작가 코르네이유와 희극 작가 몰리에르와 대결하면서 여러 비극을 작성했는데, <페드르와 이폴리투스>는 그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페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원래 에우리피데스가 만든 비극 <이폴리투스>가 있지만 작가 라신느가 이를 개작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비교적 단순한 비극이지만 라신느의 비극은 그의 시대 바로크 시대의 분위기에 맞는 화려한 비극이다. 라신느는 개신교의 예정조화론을 믿는 장세니즘의 신봉자였다.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적인 운명 개념 대신 근대 기독교적 운명 개념을 비극 <페드라>를 이끌고 가는 기본적인 동력으로 삼았다. 대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아내인 왕비 페드라는 전 왕비의 아들인 이폴리투스를 사랑하지만 감히 고백하지 못하고 야위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출정 중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이폴리투스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폴리투스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반면 이폴리투스는 테세우스가 무너뜨린 아테네 전 왕조의 딸 아리시아를 사랑한다. 테세우스가 죽었다는 소문에 이폴리투스는 아리시아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한다. 아리시아 역시 이폴리투스를 연모해왔던 터라,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맺어지게 된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살아서 돌아온다. 그러자 페드라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혹시 이폴리투스가 자신을 왕에게 고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페드라는 먼저 왕에게 무릎을 꿇고 이폴리투스를 고발한다. 이폴리투스가 오히려 왕이 없는 사이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면서 이폴리투스에게서 훔쳐온 그의 단검을 증거로 내보인다. 테세우스는 이폴리투스를 추방하고, 분노 때문에 바다의 신 넵튠(포세이돈)에게 추방당한 이폴리투스를 죽여 달라고 요청한다. 페드라는 이를 알자 후회하지만 이번에는 아리시아에 대한 질투감 때문에 자신의 거짓을 밀고 나간다. 이폴리투스는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사랑하는 아리시아에게 먼 나라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떠나지만 그가 타고 가던 마차를 넵툰이 보낸 괴물이 덮쳐 그는 죽게 된다. 그의 죽음을 알게 되자 죄의식으로 고통 받던 페드라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페드라는 스스로 독을 마신 채 왕에게 나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죽는다.

[6]  라신느, Phaedra, 이연자 역(극단 성좌 77년 공연 대본), 2막 5장

[7]  라신느, Phaedra, 위의 책

[8]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9]  라신느, Phaedra, 위의 책

헤겔미학산책18- 소외된 정신과 기독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8- 소외된 정신과 기독교

 

1) 전면적인 시장화

낭만적 예술 형식은 근대 정신을 반영하는 예술 형식이다. 헤겔은 근대 정신을 절대적 주관성으로 규정했는데, 어떤 의미일까? 거슬러 올라가 먼저 헤겔에서 근대 정신이 출현한 역사적 토대부터 이해해야 한다.

우선 통상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지만 헤겔에서 중세와 근대는 단절된 시대가 아니라 연속된 시대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헤겔에서는 인륜성의 시대이다]가 해체되면서 개인적 인격의 발전이 일어난다. 이제 인격 즉 형식적인 자유로운 결정권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부여된다. 여기서 추상적인 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등장한다.

인격은 아직 실질적 정의의 원리를 결여하므로 자유의 실질적 내용을 둘러싸고 인격 사이의 무한한 투쟁이 벌어진다. 이런 투쟁은 후일 홉스가 주장한 만인의 만인의 투쟁에서와 같이 끝내 황제가 자의적으로 법을 결정하는 세계[로마 제국 시기 이후]로 된다. 황제는 절대권을 지니지만 그 역시 하나의 인격이므로 그의 결정은 전적으로 자의적이니 이 시대는 모두가 형식적으로는 자유롭지만 내용적으로는 황제가 자의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다.

황제가 자의적으로 제정한 국가[로마 제국]가 만인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오성 국가로 발전하기까지가 헤겔에서 근대 정신이 출현하는 시기이다. 그 토대가 되는 것은 이 시대 사회적 상호관계의 발전인데[1] 이는 시장의 출현을 매개로 한다. [2]

이런 시장이 사회 전체에 일반적으로 펼쳐지게 되면서 마침내 근대 사회가 출현한다. 헤겔에서 근대사회란 곧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다.[3]

시장의 기본적 관계는 자유로운 인격 사이의 법적 계약관계이다. 이런 계약적 관계는 비단 경제적 시장에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계약적 관계는 그 동안 존재했던 모든 사회적 관계 속으로 침투하면서 전체 사회를 보편적 계약 관계로 전환시킨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단체는 물론이며, 국가조차도 마침내 계약 관계로 되며, 심지어 가족 관계조차 이런 시장적인 계약관계가 파고들어간다.

중세와 근대의 차이는 다만 시장 즉 사회적 상호관계가 발전하면서 사회 전체가 이런 시장 관계로 전환하는 정도에서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니, 헤겔은 통상적으로 구분되는 중세 사회와 근대 사회를 이런 시장의 계약관계가 발전하는 연속적 단계로 파악한다.

 

2)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

헤겔은 이 시기를 정신적으로 보면 근대 정신[그 산물이 곧 오성 국가이다]이 발전하는 시기라 규정하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 사회 전체에 일반화되는 시장 관계에서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분석해 보자. 시장 관계에 대한 헤겔의 설명을 보면, 그가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장 속에서 표면적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한다. 하지만 개인의 목적은 타인을 통해 실현되며, 거꾸로 타자의 목적은 개인 자신의 활동을 통해 실현된다. 여기서 개인은 타인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그 자신을 타자의 수단으로 만든다. 개인과 타인은 이제 보편적 상호 의존관계 속에 놓여지게 된다.

개인은 자신의 산물에 주관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 산물이 지닌 객관적 가치는 시장을 통해 실현된 가치이니, 그의 활동은 전적으로 시장의 지배를 받는다. 두 가치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부여한 주관적 가치는 시장에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의 산물은 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가치를 실현할 수도 있으니, 그의 자유란 오직 시장에 의해 제약된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은 생산하는 활동 중에서는 자기가 생산한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심지어 그 가치가 실현될 수 있을지조차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생산한다. 그는 생산을 마치고 시장에 나가 그 생산물을 교환 속에 집어넣는 때 비로소 뒤늦게야 자기가 생산한 것의 가치를 알게 된다.

사회 전체로 본다면 표면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은 항상 어긋난다. 그 때문에 단기적으로 시장 관계는 공황과 붐이라는 끝없는 요동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시장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은 조절된다. 사회는 이런 시장에 의한 조절을 통해 안정적으로 발전한다. 시장을 지배하는 이 힘은 현상 속에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현상 속에서 자기를 관철하니, 아담 스미스는 이런 시장의 힘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 하였다.

헤겔은 시장에서 일어나는 개인과 타인의 상호 작용 관계를 일반화한다. 사회 전반에 전개되는 법적 계약관계는 이런 시장 관계를 원형으로 삼는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사회적 상호 관계 속에서 개인은 주관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하지만 그의 활동은 맹목적일 뿐이다. 그 너머에 사회적 실체가 그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헤겔은 사회 전반에 일반화된 시장 관계를 통해 자기를 관철하는 객관적 가치를 사회적 정의[Sache Selbst] 또는 실체로 규정한다. 이런 실체의 힘 즉 보이지 않는 시장의 힘을 헤겔은 소외된 정신이라 규정했다. 이를 굳이 소외라고 규정한 까닭은 그 힘은 한편으로는 현상 너머에 초월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상 속에 자기를 관철하고 있으니, 내재하면서도 초월적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소외[4]라고 규정한 것이다.

황제의 국가에서 오성 국가 즉 근대 국가로 형태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신의 발전이다. 그 정신은 소외된 정신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이 소외된 정신을 자각하면서 자각된 정신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 시장 관계 속에 전개된 개인적이고 형식적인 자유의지가 마침내 개인이 실체적 목적을 자기 의지의 목적으로 삼는 루소적 일반적 자유의지가 출현하는 데로 발전한다.

물론 근대 국가인 오성 국가에서는 아직 정신의 발전은 완성되지 못했다. 헤겔은 루소의 일반의지 단계를 넘어서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자유의지로 발전하며 이 과정을 통해 이상적 국가의 형태가 출현한다. 하지만 이 마지막 과정은 헤겔이 상정한 미래의 역사이지 현실의 역사는 아니다.

 

3) 절대적 주관성과 무한한 내면성

중세부터 서서히 발전해 온 근대 사회의 정신은 곧 소외된 정신이니 이 소외된 정신은 근대 정신을 표현하는 종교와 예술, 철학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먼저 이런 시장 사회를 토대로 하는 종교의 모습부터 확인해 보자.

헤겔은 바로 이와 같은 소외된 정신을 통해 개신교의 근본적인 특징이 도출된다고 본다. 개신교의 신은 헤겔에서 마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개인에게 내재하면서도 초월해 있는 신이다.

신이 세계를 너머 초월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와 단절된 피안에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은 이 세계 속에서 개인의 상호 활동을 통해 자기를 관철하지만 다만 그 관철하는 활동이 개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초월적이다.

개인에게 내재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범신론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즉 개인 자체가 신의 현현은 아니다. 신은 시장 속에서처럼 개인들의 활동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있다는 의미이다. 이 상호 작용은 곧 개인이 서로를 부정하는 관계이니, 개인들의 상호 부정적인 관계 속에 신이 현현한다.

개인은 이런 상호작용적 관계 속에 신이 출현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런 개인에게 신의 활동은 곧 외적인 강제, 맹목적 필연 즉 운명의 힘이다. 그러나 개인이 객관적으로 관철되는 실체의 힘을 알게 되면,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의 본질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니 자유로운 의지가 된다. 여기서 신과 나는 합일에 이른다.

이런 자각은 근대를 넘어서야[칸트 자유의지에서 비로소 이런 자각이 시작된다고 한다] 가능하며 개인은 아직 이런 자각에 이르지는 못한다. 하지만 개인은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이런 합일을 내적으로 느끼고 있으니, 신과 나의 합일이 이런 느낌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것이 곧 신에 대한 믿음이다.

개인의 측면에서 신과 나와의 합일은 스스로 자기를 넘어서 신에 이르는 고양의 과정이다. 이 고양의 과정은 개인의 자기 부정성 즉 무한한 규정성으로 규정된다. 신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합일은 신 자신이 나를 매개로 해서 자기 인식에 이르는 과정이니, 이 과정이 곧 절대적 주관성이다.

 

“낭만주의 예술에서 무한한 주관성은 그리스 신과 달리 홀로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와 타자와의 관계 속으로 발을 들이나 이 타자는 주관성 자신의 타자로서 그 안에서 주관성은 자신을 재발견하며 또한 자신에 머무르는 존재[Bei Sich Sein]로서 그것과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5] 

 

느낌을 통해 다가오는 믿음의 상태를 헤겔은 ‛내밀함[Innigkeit]’으로 규정한다. 이런 믿음의 단계에서 신은 한편으로 개인에게 알 수 없는 소원한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개인에게 그의 본질인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니, 개인은 이 신에 대해 두려움과 친밀함을 동시에 느낀다.[6]

여기서 기독교적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두 개념 즉 ‘절대적 주관성’과 ‘내밀함’ 사의의 연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개인이 주관 속에서 이미 내적으로 신과의 합일을 느끼고 있을 때 그것이 곧 내밀함이며, 이런 내적 합일은 자기 부정적인 행위를 통해서 마침내 실현되면서 절대적 주관성이 된다. 내적 내밀함 속에 절대적 주관성이 예감되며, 내밀함의 외적인 실현이 곧 절대적 주관성이다.

 

4) 역사 속의 신

이런 신은 한편으로 상징주의 시대 주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인 추상적 신과 구분되며 다른 한편으로 각 민족의 자연적 개별성을 담지 하는 그리스 시대 개별적인 정신과도 구분된다. 절대적 주관성으로서 신은 가장 추상적인 유일 신이 가장 구체적인 인간[그리스도]으로 출현하니 이 신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를 인간에게 직접 계시해 주는 신이다.

예수는 성령이 곧 사랑이라고 선포했다. 헤겔로 볼 때 이는 곧 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신이 소외된 정신이고 이 정신은 실체적 정의를 자발적으로 실현하는 의지이니 이는 공동체적 정신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신의 본질, 성령이 곧 사랑이므로 기독교 신은 인격신이다.

헤겔은 본래 기독교 정신은 신과 인간 사이의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믿음의 관계이지만, 이런 내밀한 믿음의 관계는 봉건제 시대에서 거룩한 빵과 성 유물 숭배 신앙[7]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이는 사물 속에 신이 강림한다는 신앙이니 곧 상징주의 단계의 신앙에 불과하다. 봉건제 말기에 이런 신앙은 다시 성상 신앙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고전주의 단계의 예술적 종교[8]이다. 마침내 종교 개혁을 통해 다시 원래의 내밀한 믿음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진정한 기독교의 관계가 출현했다.

따라서 기독교적 신의 모습은 고전적 신의 모습과 구분된다. 헤겔은 이 두 신의 모습은 모두 인간의 형태를 통해 나타나므로 어떻게 보면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나, 헤겔은 두 신의 모습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한다.

우선 고전적 신은 예술 즉 감각적 형상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며 이 감각적 형상은 영웅을 닮은 이상화된 모습이다. 그 감각적 형상은 불멸의 영원한 모습으로 시간을 초월해 존재한다.

반면 기독교 신은 감각적 형상이 아니라 시간적인 역사 속에서 자기를 드러낸다. 기독교 신은 살과 피를 지닌 구체적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모습 자체가 신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며, 그런 구체적 인간이 스스로 전개해나가는 역사적 운동 가운데서 자기를 드러낸다. 이 역사적 운동은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운동이다.

이런 개인의 상호작용 운동은 개인이 자신을 부정하는 운동이니 이를 통해 개인은 육체가 아닌 정신적 존재로 복귀한다. 이런 정신적 존재 속에서 신이 출현한다. 고전적 신은 아름다운 육체 속에 출현하지만 기독교 신은 육체가 아닌 자기 복귀적인 아름다운 정신 속에서 출현한다. 이 자기 복귀적인 정신이 곧 무한한 내면성이고 절대적 주관성이다.

기독교 신의 조각이 고전적 신상에 대해 지니는 차이의 핵심에 눈이 있다. 헤겔에 따르면 고전적 신의 형상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눈동자는 곧 영혼을 드러내는 것인데, 고전적 신은 무한한 내면성인 영혼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독교 신은 현상을 너머 자기 내로 복귀하는 무한한 존재이므로 기독교 신의 모습 속에는 영혼을 표현하기 위해 눈동자를 지닌다.

신상에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결함은 조각 형상들이 단순한 영혼의 표현 즉 눈빛을 갖지 않는 점에서 외적으로 드러난다. 아름다운 조각의 걸작들은 시선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들의 내면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정신적 집중을 갖는 –이것은 눈을 통해 알려진다-자기인식적 내면성으로서 비치지 않는다.”[9]

 

“그러나 낭만적 예술의 신은 시선을 지니는 것으로, 자신을 의식하는 것으로, 내면화된 주관성으로,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내면에 열어 보여주는 것으로 현상한다. 왜냐하면 무한한 부정성, 즉 정신적인 것의 내면으로의 회귀는 육체성으로 주조된 상태를 지양하며, 또한 주관성은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정신의 빛이기 때문이다.”[10]


[1] 헤겔은 국가 형태의 발전은 정신현상학 정신 장에서 다루고 이런 정신 발전의 토대가 되는 사회적 상호관계의 발전은 이성 장에서 다룬다.

[2]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이미 11세기에서 13세기에 시장이 발전하면서 중세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헤겔에 따르면 이 시기 도시는 해상무역을 매개하면서 여기서 상공업을 통해 사유재산이 발전했다. 도시는 이를 바탕으로 영주와 대결하면서 자치권을 획득해 나갔다. 도시는 이 과정에서 탑을 세우고, 시민 군을 결성하며, 시 자치체를 구성했고 마침내 재판권까지 획득하였다. 도시는 영주와 대결하는 가운데 왕의 보호를 받고 왕을 지지하면서 왕권 성장을 낳았다.

[3]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시장이 전면화되는 것은 노동력이 시장에서 판매되는 임금 노동이 출현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헤겔은 시장이 전면화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원인이 임금노동의 출현이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튼 전면적인 시장화가 근대 사회라고 보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와 일치한다.

[4]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런 소외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 정신을 규정한다. 후일 마르크스는 이런 소외를 자본주의 사회를 규정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5] 미학강의 2권, 156쪽

[6] 헤겔은 기독교적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신앙이란 일반적으로 눈 앞에 없는 과거의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신의 진리를 주체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루터 파에서 진리는 완성된 대상이 아니다. 주체는 흔들림 없는 진리 앞에 자아의 특수한 내용을 버리고 이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주체가 되는 것이다.”(역사철학강의, 400-401쪽)

[7] 헤겔은 중세 기독교의 타락이 이런 거룩한 빵, 성 유물 신앙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것이 기적이 나 그리스도의 친견, 그리스도의 무덤을 회복하려는 십자군 원정, 사제와 평신도의 계급적 구분, 눈에 보이는 행동을 통한 구원, 진리가 밖에서부터 주어진다는 생각, 사제 서품, 고해와 순례여행과 순결 빈곤 복종의 행동, 등의 타락된 모습 등의 원천이다.

[8]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거룩한 빵과 같은 물체…인가, 그렇지 않으면 혼과 혼, 정신과 정신이 교감하는 정기로 가득 찬 그림이나 아름다운 조각 작품인가는 결정적 차이이다….후자의 경우 감각적인 것이 아름답게 완성되어 정신의 형식 그 자체가 진실된 것으로서 감각적인 것에 혼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다만 진실된 것이 여기에서는 감각적 형태를 취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역사철학강의, 394쪽)

[9] 미학강의 2, 142쪽

[10] 미학강의 2, 142쪽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가을 제65회 정기학술대회 ‘포스트휴먼과 신유물론: 물질, 몸, 도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연합학술대회 영상 20231209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가을 제65회 정기학술대회 ‘포스트휴먼과 신유물론: 물질, 몸, 도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연합학술대회 20231209

◎ 주제: ‘포스트휴면과 신유물론: 물질, 몸, 도시’
●일시: 2023년 12월 9일(토) 11:00~18:00
●장소: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 308호(31308)
●주최: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숙명인문학연구소 HK+사업단,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주관: 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영상 목록(특정 발표 영상만 공개)
☞ 개회사 사회: 현남숙(성균관대)
☞ 개회사: 김종갑(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회장·건국대)
☞ 축사: 박정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성균관대)
1부 신유물론과 물질에 대한 논쟁 – 좌장: 김재희(을지대)
☞ 2발표(11:40): ‘신유물론의 물질 개념과 들뢰즈의 존재론’ – 박준영(수유너머 104)
2부 기조발제 – 사회: 하인혜(인천대)
☞ 1발표(13:30): ‘얽힘과 접촉’ – 최종덕(독립연구자)
☞ 2발표(14:10): ‘위기인가 기회인가: 포스트휴머니즘의 곤경과 신유물론 정치의 가능성’ – 박인찬(숙명여대)
3부 신유물론과 물질과 몸 – 좌장: 이승준(생태적지혜연구소)
☞ 1발표(15:00): ‘물질과 시간의 미결정성, 그리고 애도의 윤리’ – 서영화(서울대)
☞ 2발표(15:30): ‘몸의 물질화와 수행성’ – 정유진(서강대)
☞ 3부 질문 및 토론(16:00~16:20)
4부 신유물론과 디지털도시화 – 좌장: 이지영(이화여대)
☞ 2발표(17:00): ‘디지털 도시화와 탈/재물질화’ – 이현재(서울시립대)

전체 일정표 참고 링크
http://ephilosophy.kr/han/category/e-academy/e-academy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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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사, 1부 – 2발표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vA0Hp8-IHhk?si=004ZEyIC_Wv382Ny

2부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C54pkAUt-7E?si=JLqkWLaZwyrobw_M

3부 발표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TUdBTLFLPGc?si=4VkkM-JcRDZwxMYQ

4부 – 2발표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dlGdQU2quDc?si=lu3dIOLZ0HV9VZH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봄(8월) 제64회 정기 학술대회 ‘한국 사회의 길을 철학에 묻다’ -사회와철학연구회 /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합 심포지엄 [제1부] 영상 PART 1, 2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봄(8월) 제64회 정기 학술대회 영상
사회와철학연구회 /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합 심포지엄
◎ 주제: 한국 사회의 길을 철학에 묻다

● 일시: 2023년 8월 19일(토) 오후 1~6시
● 장소: 서울대학교 83동(인문사회계열멀티미디어 강의동) 305호

영상 (PART 1) 제1부: 발표 13:20∼15:20 / 사회: 조은평(건국대)

[1발표] 배기호(중원대) – ‘한국 사회는 진짜가 없는 사회다’
[2발표] 서민규(건양대) – ‘한국 사회는 없는 것이 없는 사회다: 21세기 철학적 실재론과 반인간주의’
[3발표] 유가연(서강대) – ‘한국 사회는 자신을 표현할 길이 없는 사회다’
[4발표] 박준웅(중앙대) – ‘한국 사회는 관용이 없는 사회다’

영상 (PART 2) 제1부: 발표 13:2015:20 / 사회: 조은평(건국대)

[5발표] 유민석(서울시립대) – ‘한국 사회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사회다’
[6발표] 정대훈(부산대) – ‘한국 사회는 매개가 없는 사회다’
[7발표] 김범수(청주대) – ‘한국 사회는 지리 철학이 없는 사회다: 한반도에 필요한 지리 철학’
[8발표] 이재복(한양대) – ‘한국 사회는 애도(哀悼)가 없는 사회다’

(PART 1)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ENHDtKldfyU?si=4MMT3Ph_KGJ0xDKv

(PART 2)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NDtAEAmxnsQ?si=V11BrxNyArNFnU1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