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3년 10월 제8차 정기세미나 “『한국현대철학사론』에 관하여” 2023.10.13. (발표:이병태)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한철연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2013년에 이규성 선생의 『한국현대철학사론』(2012)을 함께 읽었고, 『시대와 철학』 24권 4호에 서평이 실렸습니다.
2023년 10월 세미나는 지난 서평을 중심으로 서평자 이병태 선생님의 발표로 진행합니다.

◎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계간 학술지 『시대와 철학』 24권 4호에 실린 이병태의 글 「서평 : 우리 철학사의 창으로 본 미래 철학의 풍경 -『한국현대철학사론』 (이규성 지음,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12)-」(2013)을 참고하길 바랍니다. 아래 자료실 주소를 참조하세요.

‘시대와 철학’ – ‘2013’ – ’24권 4호’를 검색하여 텍스트를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   http://www.hanphil.or.kr/html/sub02_01.asp

-주제: ‘『한국현대철학사론』에 관하여’
-발표: 이병태(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일시: 2023년 10월 13일(금) 오후 4시
-장소: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로 45 SK리쳄블 1305호 진보 정치학교 교실
-진행: 줌(Zoom)온라인 회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zjmMA_ZiTMw?si=r68PzeCzNtWJ3dIS

[신간안내]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김성민·김성우 지음|이음출판컨텐츠|(2024년 5월 20일) [한철연 소식]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김성민·김성우 지음)

 

김성민, 김성우 회원이 같이 쓴 신간을 소개합니다.  이 책의 원 제목은 좀 깁니다. [욕망의 희생자, 환상의 피해자, 죄의식에 갇힌 나 증상을 즐겨라! 슬럼프를 환영하라! – 스무 살, 그리고 우리 모두, 나를 위해 미리 읽는 슬라보예 지젝] “어렵고 난해한 슬로보예 지젝의 이론을 대중문화와 일상의 에피소드로 간결하고 쉽게 정리한 흥미로운 철학서”입니다. 저자들은 우리의 욕망이 과연 내가 원하는 욕망인지 ‘삐딱하게 생각’하는 연습을 해보기를 권합니다. 이 책은 지젝의 입으로 위로를 전하지 않습니다. 지젝과 더불어 나와 세상을 달리 보며 사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슬럼프에 빠질 때 그것을 부정하기보다는 그 증상 위 감정을 횡단하여 타인에 의지 말고 나만의 다른 시각으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아래 출판사의 서평을 읽어보면 이 책에서 말하는 바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책소개

출판사 서평

1. 이 책을 실험적으로 쓴 이유

핸드폰과 컴퓨터로 다양한 정보와 문화 콘텐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책이라는 존재의 위상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철학은 어찌 보면 책 시대의 산물이다.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가 전한 말을 기록한 데서 시작했기에.

그 찬란한 철학적 전통과 현란한 개념들을 어떻게 대중과 소통시킬 수 있을까? 철학의 대중화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철학자라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화두다. 이론의 두께를 덜어내지 않으면 일반 시민에게 철학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입장이 허가되지 않은 궁정 도서관과 같으리다. 정답을 제시하는 식이라면 독자들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화를 내지 않을까? ‘꼰대 같은 작가’가 던져준 떡에 체한 듯이.

독자의 삶과 연결되는 질문을 구체적인 에피소드로 연결해서 던져본다면 혹시라도 마음에 가닿지 않을까를 고민했다. 지젝은 철학적 방대함과 현대 사회와 문화에 대해 해박하지만 절묘한 유머와 조크로 대중과 소통하는 데 성공한 현대 철학자다. 이 책은 그 방대함을 덜어내고 그 해박함을 줄여 지젝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를 간결하고 구체적으로 정리하려고 애쓴 결과이다. 그렇다고 해서 질문의 수준을 낮춘 것은 아니며 전체의 연결 관계가 느슨한 것도 아니다. 약간은 반복을 이용해서 독자에게 앞선 내용을 환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금 더 심층적인 분석을 하도록 의도했다. 지젝의 말들을 읽으며 독자들이 자기 삶과 욕망을 스스로 분석하기를 원했다.

우리의 현실과 환상이 분리되지 않으며 현실을 바꾸려면 그 기본 틀인 환상을 먼저 횡단해야 함을 말한다. 그 방법으로 ‘삐딱하게 보기’라는 다소 소심한 전략을 소개한다. 그 소심함이 분리와 횡단을 거쳐 욕망의 좌표계를 재설정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기에. 실패해 슬럼프에 빠질 때가 오히려 이렇게 삐딱하게 보기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은 서론 첫 부분에 잘 정리되어 있다. 성공주의와 능력주의가 판치는 우리 사회에서 능력 없는 게, 노력 안 하는 게, 스펙이 부족한 게 죄가 된다는 현실을 환기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청년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슬럼프에 빠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 시기에는 소중한 사람들의 충고도 무섭게 느껴지고 점점 위축되는 자신에 절망하기도 한다. 이때 지젝이 던지는 위로의 말은 사회적 평가와 가족의 충고가 알고 보면 환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 평가에 못 미친 나 자신이야말로 죄인이 아니라, 그 환상의 희생자임이 드러난다. 사회적 낙인은 영화 〈에일리언〉의 에일리언처럼 나의 죄의식을 숙주 삼아 나의 배를 뚫고 나온다.

우리의 문제는 환상의 희생자가 될 때 욕망하는 존재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욕망은 가짜이다. 사회의 상징 체계라는 큰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 셈이다. 라디오 피디에게는 청취율, 회사 대표이사에게는 영업이익률, 수험생에게는 점수 등이 큰 타자에 해당한다. 큰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늘 문제였다. 물론 성공은 좋은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정 받으면 당연히 행복하다. 하지만 성공 신화를 삐딱하게 보면, 인정 윤리에 딴지를 걸어보면 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우리 존재 자체는 환상에 지배받지 않는 진짜이므로 성공 못 해도, 인정 못 받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서 삐딱하게 보는 태도는 용서받지 못할 죄로 낙인찍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회라는 큰 타자가 원하는 욕망을 무시하거나 다른 욕망을 꿈꾸는 자는 악마보다 더 미움받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미움받는 것에 떨지 않아도 된다. 사회의 욕망이라는 감옥에 자기 스스로 가두는 게 더 큰 비극임을 깨달아야 한다.

죄의식과 체념은 다르다. 죄의식은 현실에 갇혀 있지만, 체념은 현실에서 빠져나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체념할 때 사회적 낙인은 내가 무시할 수 있는 소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강철로 만들어진 현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체념은 일종의 딴죽걸기이다. 현실에 균열을 내면 현실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지젝과 함께, 사회가 강요하는 가짜 환상, 왜곡된 욕망에 딴지를 걸어보고 삐딱하게 생각해보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그래서 증상을 즐기고 슬럼프를 환영하자. 다르게 살기의 출발점이 되니까!

2. 지젝은 누구인가?

슬라보예 지젝(1949년 3월 21일)은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붕괴로 구 유고연방에서 갈라져 나온 슬로베니아 출신이다. 철학적으로 변방이었지만 자국 철학계의 다양한 철학 사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 마르크스주의, 하이데거주의, 분석철학 등. 그의 말처럼 “그래서 나는 운이 좋게도 모든 주요한 (철학적) 경향에 노출되었다.” 하이데거를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쓴 후, 데리다의 해체론을 통해 하이데거를 넘어서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 철학을 공부한 다음, 자국에 라캉 정신분석학회를 결성하고 라캉 사위인 자크 알렝 밀레의 초대를 받아 파리 제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다시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영어로 출간한 많은 책과 정력적인 강연들로 라캉 정신분석학의 소개자이자 독일관념론의 재해석의 선두 주자, 급진적인 정치철학의 주도자이자 ‘삐딱한’ 문화비평가로 ‘지젝 신드롬’을 일으켰다.

출처: 교보문고

 

목차

남의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살고 싶은 이들을 위해: 머리글을 대신하여

I. 현실, 환상, 욕망
1. 현실은 생각처럼 단단하지 않다
2. 삐딱하게 보면 다르게 살 기회가 생기는 게 아닐까
3. 객관적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4. 중립은 대개 강자의 편이다
5. 슬럼프야말로 가짜 욕망을 버릴 기회다
6. 나는 텅 비어 있기에 욕망한다
7. 환상은 제거되지 않는다
8. 무의식, 참을 수 없는 진실이 있어 펼쳐보기 싫은 책
9. 매트릭스라는 큰 타자의 배터리가 된 현대인
10. 언어는 끊임없이 우리 욕망을 채찍질하며 우리를 고문한다
11. 욕망의 수수께끼, 나는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12. 욕망은 해방되지 않는다II. 증상, 정신병, 도착증, 신경증

II. 증상, 정신병, 도착증, 신경증
1. 증상, 불편한 진실의 암호로 된 편지
2. 무의식의 저항 방식: 뭉개기, 생까기, 횡설수설
3. 우리가 인정에 목매는 이유
4. ‘아버지의 이름’을 결여하면 정신병자가 된다
5. 소외, 자신의 존재를 잃고 사회적 이름을 얻는 과정
6. 분리, 큰 타자가 붙여준 이름을 거부하는 과정
7. 작은 대상 a, 내가 나쁜 애인을 자꾸 사귀는 원인
8. 도덕주의자는 도덕의 도구가 된 도착증자다
9. 극우주의자나 근본주의자도 도착증자다
10.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11. 히스테리적인 의심, 환상 횡단의 출발점
12. 치유의 최종 단계: 해석, 거세, 횡단

III. 충동, 주이상스, 프레임, 혁명
1. 충동, 환상의 근본 프레임을 바꾸는 힘
2. 빨간 약도 아닌, 파란 약도 아닌, 제3의 약
3. 죽음충동, 증상이 해석되어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
4. 충동, 일상을 해체하는 힘: 삶의 의미를 상실할 때 세상이 달리 보인다
5. 상실을 메우려 하지 않을 때 환상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6. 빨간 구두는 끝없이 춤추라는, 소녀의 죽음충동이다
7. 주체의 포기, 자기 희생을 인정받으려는 욕망마저 버린 태도
8. 충동 윤리, 부정적인 것을 감내하기
9. 상처는 오로지 그를 찌른 창에 의해서만 아물 수 있다
10. 틀을 다시 짜는 충동,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힘

독자에게 추천하는 지젝 저서 한국어판 목록


저자 김성민: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정치/사회철학, 역사철학, 문화철학, 미디어 철학 등의 과목을 주로 강의했고, 현재 명예교수이다. 그동안 문과대학 학장과 인문학연구원 원장을 지냈고, (사)한국철학회 회장과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통일인문학’이라는 아젠다를 제시하고, 인문학적 패러다임을 통해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론을 연구했다.

저자 김성우: 현재 올인고전학당 연구소장이고, 상지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를 지냈다.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사업부장을 맡아 영화, 미술, 음악, 문학을 철학적인 시각에서 읽는 <청춘의 고전> 강연 시리즈와 <다시 쓰는 철학사> 강연 시리즈를 기획하였다. 정독도서관과 도봉도서관 등의 공공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고, 광진정보도서관에서는 <공주 인문학> 강좌 시리즈를 진행하는 등 철학 고전과 인문학의 대중화에 노력했다.


 

일상언어와 분석철학의 전통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일상언어와 분석철학의 전통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내가 철학을 처음 배우던 시절에는 한국 사회의 80년 대 분위기 때문에 주로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이 주도했다. 처음에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이 들어왔고, 다음에는 시대와 현실을 담은 헤겔 철학이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변혁 철학의 심장과 브레인 역할을 하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철학이 한 시대를 휘어 잡았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영미권의 분석 철학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반 시대적이어서 특별히 관심 있는 학생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외면 당했다. 비판적 합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K. 포퍼의 철학 조차도 완전히 무시당했다.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가서 내가 배운 철학은 프레게와 러셀과 논리실증주의자 그리고 전후기 비트겐슈타인 등이었다. 이들 철학은 일단 분석적이고 명쾌해서 접근하기가 쉬웠다. 덕분에 나도 석사 3학기 때 까지는 비트겐슈타인 후기 철학을 가지고 논문을 쓸까 고민을 했었다.

분석 철학은 영미 철학의 전통에서 성장한 철학이다. 영국의 경험론은 대체로 반 형이상학적이고 반목적론적이었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이 실체가 무엇이고, 그것이 하나인지 둘인지 아니면 라이프니츠 처럼 수도 없이 많다고 하는 지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 로크는 적어도 우리 정신 밖의 실체인 X를 인정했지만, 그것이 무엇인 지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했다. 버클리는 그것을 지각적 표상으로 환원했다. 그의 유명한 “존재는 지각이다”는 명제가 그것을 말해준다. 데이비드 흄에 오면 이런 실체는 단순히 인상들의 다발로 간주된다. 불멸의 영혼이라는 실체는 감각의 다발이고, 뉴턴의 기계론적 인과법칙도 반복적 습관에서 이루어지는 연상의 법칙으로 주관화된다. 이런 면에서 데이비드 흄은 근대 경험론이 갈 수 있는 막다른 골목까지 간 셈이다. 20 세기의 ‘논리 실증주의’는 흄의 20세기 버젼이나 다름 없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역할을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애매하고 모호한 말들로 인해 철학의 문제들이 생긴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추방한다면 철학의 전통적인 문제들도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그의 정신을 추종한 비엔나 써클은 세상에는 단 두 가지의 명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의미있는 명제’와 ‘의미없는 명제’가 그렇다. 수학과 논리학의 명제들, 그리고 경험적 검증이 가능한 명제들이 전자에 속하고, 가치 명제나 형이상학적 명제는 논리적인 명제도 아니고 경험적으로 검증이 되는 명제도 아니기 때문에 후자에 속한다. 비엔나 써클의 철학자들은 검증이론(verification theory)의 이러한 분석을 통해 철학의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러한 도발적인 주장들이 철학적 문제들을 다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끼친 공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엔나 써클의 일원인 루돌프 카르납은 그 당시 대단히 떠 받들어졌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모호하고 애매한 명제들을 하나 하나 까 뒤집으면서 분석 비판을 시도한 적이 있다. 철학을 형이상학의 모호한 구름 위에서 지상의 밝은 빛 한 가운데로 끌고 내려오려 한 것이다. 물론 형이상학의 전 체계를 낱낱의 명제들로 해체해서 명제 단위로 비판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하지만 카르납의 작업은 적어도 비판적 언어 철학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준 셈이다. 이런 전통이 미국으로 건너가 분석 철학의 초석을 만들었다.

<트락타투스>(Logico-Tractatus)에 나타난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은 언어와 세계의 대응을 통해 명제의 의미를 단순화 시켰다. 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서 일상 언어의 문맥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의 쓰임을 통해 언어의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저항이 없으면 더 빨리 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진공 상태를 가정했는데, 오히려 더 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들은 대륙의 철학자들처럼 사변의 전체로 얽혀 있지 않고, 일상 속에 살아 있는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만큼 이해하기 쉽고 철학적 작업이 무엇인 지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삶과 현실에서 유리된 추상 개념들을 현란하게 구사해야지만 철학을 하는 거라는 전통 철학의 모호한 환상을 확실하게 깨버린 것이다.

내가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을 할 때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차원에서 영미권의 분석 철학을 무조건 백안시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일상 언어에 기초한 에세이 철학을 하면서 분석 철학의 정신, 그들이 사용하는 일상 언어, 삶에 기초한 철학 등과 같은 분석 철학의 정신이 에세이 철학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철학의 정신을 살려서 삶과 시대의 문제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굳이 대륙권 인가 영미권 인가의 구분도 무색해질 수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미권의 철학에서 헤겔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헤겔 철학에 대한 논문과 연구서들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분석 철학의 한계를 대륙 철학의 정신을 받아들여 돌파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가 있다. 독일 철학 역시 하버마스 이래로 어중쩡한 포지션 때문에 새로운 철학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영미권의 철학에 대해 적극 관심을 보이는 철학자들도 적지 않다.

우리가 고정된 하나의 길만 고집하려는 것은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한 한계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형이상학자들이 믿는 전통적인 명제 하나가 있다. 화엄의 인드라 망처럼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는 하나이지만, 그것에 이르는 길은 여럿이다.”라는 명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본다면 진리는 그것을 어떤 길로 어떻게 접근하느 냐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한계를 인정한다면 동과 서, 그리고 고금의 벽을 얼마든지 벗어 던지고 철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와 장자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부활하고, 화엄과 주역의 존재론이 양자역학과 대화하고, 분석적 정신과 종합적 정신이 동양의 음양의 관계처럼 대대 관계를 이루어 하나의 방법론을 구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이 종철의 에세이 철학]에 실린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소개합니다.

나는 이른바 선사들이 토굴 속에서 수년 동안 참선을 하면서 마침내 무언가 깨달았다고 할 때 그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오랜 수행 끝에 그들이 우주 만물의 통일적 원리인지 혹은 삶의 궁극의 원리인지를 발견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들이 치열한 수행 끝에 강렬한 확신이나 체험을 얻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생각일 뿐 그것 자체가 보편화되고 객관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하면 사적 체험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깨달음을 판정해 주는 구루(Guru)가 있다고 해도, 그 구루가 깨달은 자(Buddha)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구루가 깨달은 자라는 것을 다른 구루가 판정해 준다고 하자. 하지만 이런 물음을 제기하다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나타나는 ‘제3자 논변의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근거 지우는 것을 새롭게 근거 짓는 것의 무한 퇴행 문제이다. 결국 유한자들에서 무한자이자 궁극적 해결사인 신에 이를 때는 일종의 근거 지움이 아니라 점핑(jumping)이 일어난다.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도 비슷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자기 만이 상자 속의 딱정벌레를 보았다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딱정벌레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각각이 보았다는 말을 최종적으로 근거지울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사실 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은 빼어난 저서들이나 과학적 발견들을 통해 자신들의 궁극의 연구 결과를 보여줄 수 있고, 예술가들도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그리고 기술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생산한 기술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깨침을 상징하는 상자 속의 딱정벌레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백분 양보를 해서 그런 깨달음의 존재에 대해 인정도 하지 않고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그런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치열한 수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만은 엄연한 ‘팩트’로 인정을 한다. 그런데 이런 팩트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똑같이 한다. 이를테면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운동선수들도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노력을 하는 것이다.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예술가도 그렇고, 문자를 통해 최고의 작품을 쓰고자 하는 학자의 경우들도 마찬가지다.

깨친 자의 깨달음에 심오한 형이상학적 원리에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한 자들이 갖는 신비감이고 그릇된 신앙일 뿐이다. 때문에 깨달음을 가장한 자들이 몽매한 대중들을 데리고 사기 치는 경우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이런 오류나 그릇된 믿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 혹은 궁극의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깨달음이 진정 무엇인가?”라는 절박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이를테면 “도道가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등 특정한 문제를 가지고 싸울 수도 있고, 만공 스님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처럼 오직 하나(一)를 잡을 수도 있고, 아예 그도 저도 아닌 ‘이 모꼬?’와 같이 무자화두(無字話頭)를 가지고도 수행 정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물음들이 도달하는 것이 무엇일까? 무나 도가 실체가 없듯, 깨달음의 실체도 없고 내용도 따로 없다. 칸트가 현상을 초월한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를 말했지만, 도대체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본질이 어디에 있고, 본질을 담지 않은 현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장막 뒤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들추어 보지만 그저 어둠뿐이 없는 것이다. 현상과 본질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과 일상도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불교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 /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0240000,37&pageNo=1_1_1_0

부처가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은 것이 무얼까? 나는 아주 단순하다고 본다. 부처는 생(生) 속에 담긴 고(苦)를 본 것이고,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해탈)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통찰과 깨달음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다. 이 단순한 통찰과 단순한 해법을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부처는 입적을 할 때 자신이 평생 설법한 8만 법문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던졌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일까?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단순하다. 예수의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저 ‘사랑’이란 말이다. 구약이 ‘정의’를 세우고자 했다면 예수로부터 시작하는 신약은 ‘사랑’이 알파요 오메가이다. 사랑만이 우리가 삶을 지속할 이유이고,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 사랑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의 공자의 정신도 그리 복잡할 것 없다. 공자가 말한 인(仁)은 부처가 말한 자비와 예수의 사랑과 표현 언어는 달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베풂과 보살핌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고, 우주 만물에까지 확장을 한다고 하면 생육의 도와 다르지가 않다. 남송의 주자는 리(理) 가 우주 만물의 원리라고 하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끌고 들어와 공자의 말씀을 형이상학의 차원으로 체계화해서 성리학을 세웠다. 조선의 선비들은 오로지 그것만이 공자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지만 그들은 공자의 말을 너무 번쇄하게 만들고 너무 추상화시켰을 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공자의 사상은 너무나 단순 명확한 인(仁)에 다 들어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남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 나를 남들 속에서 보려고 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교양인이라면 누구든지 알 수 있고, 선한 마음을 갖는 자라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지극히 단순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대접 받고자 하는 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과 같다. 세분 성인의 말씀이 이처럼 단순 명확한 것은 그들 모두가 삶에서 진실을 끌어 올렸었고, 삶에 깊숙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석가나 예수, 그리고 공자와 같은 성인들이 말씀한 이 단순한 원리가 후대로 갈수록 복잡한 교리로 체계화되고 형이상학적 원리로 추상화되고, 신비한 언설로 간주돼 삶과 유리되고 만 것이다. 그런 필연적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참으로 본질을 볼 수 있어야지 똥폼이나 잡고 허접데기 껍데기만 붙잡고 있으면 되겠는가?

출처: https://contents.premium.naver.com/leejongcheol/knowledge/contents/230121203900063sv

눈치(Noonchi)의 해석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눈치(Noonchi)의 해석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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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Noonchi)는 사태를 이해하는 한국인들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눈치가 없다’ 거나 ‘눈치가 빠르다’라는 말들은 거의 일상적으로 한국인들의 이해 방식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런 눈치가 과거에는 자기 검열의 방식이거나 처세술의 의미로서 부정적으로만 이해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상황 전체에 대한 빠른 인식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이 ‘눈치’의 개념을 생각하다 보면 다양한 해석의 소지가 있다. 이 눈치를 한국적 해석학의 차원에서 해석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눈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속도’이다. ‘눈치가 빠르다’라는 말이 그렇다. ‘눈치가 빠르면 절간에서도 고기 맛을 본다’라는 말이 있다. 절(寺)은 채식을 하기 때문에 고기와는 거리가 먼 곳인데, 그런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이 눈치다. 그런데 여기서 ‘빠르다’라고 할 때의 ‘속도’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눈치가 빠르면 그만큼 상황을 빨리 인식하고 그에 따른 후속적 대처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이 말하는 ‘빨리빨리’는 이제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말이 되었지만, 한국인들은 이 특유의 ‘빨리빨리’의 정신에 의해 식민지와 전쟁 폐허의 상황을 겪고서도 이렇게 빨리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차이가 크다. ‘빨리빨리’의 문화를 반성하자는 말도 많지만, 이것은 디지털 시대에 더 잘 어울리는 정신이다.

뉴턴의 제2 운동 법칙인 f=ma에서 보듯, 가속도가 힘을 결정하는 주요 원인이다. 속도가 빠르면 일 처리도 빠르고 영향력도 클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그곳에서 인터넷 라인이 문제가 생겼거나 잘 달리던 차가 고장이 나서 A/S를 한 번 받으려면 얼마나 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한지 말이다. 한국의 배달 서비스는 분초를 다툰다. 물론 이것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는 의미다. 과거 칭기즈칸의 군대가 빠른 시간에 전 세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빠른 기동력에 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을 오가는 그의 파발마는 하루 352km라는 상상 불가의 속도로 전달했고, 그의 군대의 이동 속도는 하루에 130km를 이동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현대의 군대들도 따라 잡지 못할 속도이다. 몽골의 기마병의 이동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유럽의 기사들이 미처 대비책도 세우기 전에 순식간에 몰아쳐 헝가리 평원에서 유럽의 연합 기사단들을 전멸시켰다. 이로 인해 몽골 군대에 대해 유럽인들이 가졌던 공포나 트라우마는 대단했다. 그런데 내가 몽골에서 지내보며 알게 되었지만 이런 빠른 유전자들은 더는 몽골인들에게서가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남아 있는 것 같다. ‘빨리빨리’의 정신은 무엇보다 빠른 상황 판단, 즉 눈치가 빠를 때 가능하다. 그 점에서 눈치에서 속도가 갖는 긍정성의 의미가 더 크다.

이런 빠른 눈치가 때로는 자기검열과 차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눈치가 보인다’거나 ‘눈치를 준다’라는 의미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일종의 단절감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상대의 행동을 제어하는 차별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이런 눈치를 남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조심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눈치는 간주관적(intersubjective) 인식 방식의 하나인데, 눈치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눈치에서 ‘속도’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상호 간 혹은 다자 간의 관계에서 아주 미묘한 차이와 기미, 이를테면 눈빛 혹은 얼굴 표정, 미세한 손동작이나 발동작 혹은 헛기침같이 모든 행동거지들이 하나의 해석을 위한 메시지로 작동할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남들이 알아채기 힘든 것들 속에서 의미 있는 해석의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는 해석학자이고 기호학자이다. 반대로 그런 메시지를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사람들 역시 상당한 고수라고 할 수 있다. SNS의 단추를 보면 그냥 ‘좋아요’라는 버튼 말고도 ‘웃겨요’ ‘멋져요’ 슬퍼요’ ‘화나요’ 같은 감정 신호를 보여주는 버튼이 있고, 최근에는 ‘힘내요’라는 버튼까지 추가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감정 신호를 담은 버튼을 많이 누르는데 어떤 이들은 절대 그것을 보여주지 않고 무조건 ‘좋아요’만 누르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싫어도 싫다고 하지 않는다. 일종의 포커페이스 같은 이들의 행동을 보면서 상당한 고수라는 생각도 든다. 아예 잠행조차 하는 그런 보이지 않는 고수들이 SNS에는 의외로 많다.

그런데 마음을 감추고 눈치를 주지 않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모든 이를 무심코 평정하게 대하려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평정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초연'(Gelassenheit)이란 개념이 이런 경지를 말할 수도 있다. 사물이나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특별히 어떤 마음을 내지 않고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개념은 ‘들어가기(Sicheinlassen)’와 ‘나가기(Sichlosslassen)’의 양면성을 띠고 있다. 전자를 ‘몰입’이라 하고, 후자를 ‘거리 두기’라고도 한다. 이 두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생각을 더 해 보자. 사물이건 인간이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해와 관심이 요구된다. 이러한 이해와 관심은 사랑과 증오, 거래와 배려 등 모든 관계에서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런 관심이 지나치다 보면 중독처럼 빠질 수도 있고, 집착처럼 상대에 부담을 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도하게 들어가는 것 혹은 몰입은 양자의 정상적 관계를 해칠 수도 있다. 스토커는 이런 거리 두기를 조절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장애라 할 수 있다.

나가기나 거리 두기는 이로부터 역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거리를 두다 보면 상대를 더 정확하게 볼 수도 있고 더 잘 이해를 할 수도 있다. 바둑에서도 훈수 두는 사람이 더 잘 보는 경우가 그렇다. 예를 들어 자식의 미래를 걱정한 엄마가 아이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할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종종 부모 자식 간의 관계 혹은 무촌이라고 할 부부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지나치게 상대에 몰입할 때 나타난다. 이럴 때 상대와 반성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거리는 심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공간적 거리도 포함될 수 있다. 아무래도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 보면 덜 집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SNS가 발달해서 이런 공간적 거리 유지가 잘 안되는 데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들어가기와 나가기는 인간관계의 밸런스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개념이고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한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해당한다. 

금강경에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곳 없는 곳에서 마음을 내다. 내 마음이 어떤 것에 머물다 보면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이 솟구친다. 그런 마음이 가라앉는 곳, 무심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마음이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을 하거나 놀이에 빠지거나 음악을 듣거나 할 때 내가 빠져 있는 그런 상태가 내 마음이 머물지 않은 곳이고 무심의 경지이다. 이런 마음에 희로애락이나 재물욕이나 권세욕이 개입되니까 집착도 생기고 고통도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마음을 키울 수 있을까? 한국인들의 눈치가 결코 간단한 개념이 아니다. 눈치가 빨라야 알 수 있다.

출처: https://contents.premium.naver.com/leejongcheol/knowledge/contents/220602123804205zd

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다!

 

이종철(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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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여성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학살자인 아이히만의 법정을 참관하고 내놓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본인이 유태인으로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아렌트 입장에서는 도대체 나치 전범들은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들이기에 그런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는가가 궁금했다. 아렌트는 이 법정을 참관하기 위해 한 학기 강의를 반납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나서 내놓은 진단은 너무나 평범했다. 아렌트는 유태인 학살과 같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아이히만이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이웃집에서 평범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아저씨 같다고 했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대단히 가정적이고, 딸아이들 한 테는 좋은 아빠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여기서 아렌트가 내놓은 진단이 저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괴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들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행동하다 보니 저런 범죄에 휩쓸리고,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은 것이다. 사고의 부재가 저런 엄청난 범죄를 야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전혀 사고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렌트는 여기서 제대로 사고하지 않았다고, 말하자면 반성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를 하지 않다 보니 저런 행동을 했다고 덧붙인다. 아렌트가 여기서 도출한 ‘악의 평범성’은 나치의 행태에 대한 거의 고전적인 해석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젊은 시절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밑에서 철학을 공부한 명민한 학생이 보기에 나치에 부역한 그녀의 스승 하이데거가 별생각 없이 행동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철학자의 나라 독일, 유럽에서도 가장 지성적이라고 자부했던 독일의 국민이 과연 아무런 생각 없이, 비판적이거나 반성적인 사고를 하지 않아서 나치에 열광하고, 유태인 학살과 같은 인종 청소에 동조를 했단 말인가? 나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진단이 틀렸다고 본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 없이 행동해서 저런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을 할 때도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말이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생각과 이성적 사고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하는 종적인 차이(종차)이기도 하다. 그런 인간이 생각이 없이 행동했다는 말은 그 말의 의미를 백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적확한 진단이 아니다. 인간은 생각이 없이 행동하다가 범죄를 저지르고 악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에 휩쓸리고 도덕적인 판단과 행동을 이끌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도덕은 오래전 플라톤이 이야기했듯 인간을 구성하는 이성이나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사(military man) 들의 용기의 원천인 의지(will)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이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능적인 감성과 욕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싸움에 임하는 전사들의 용기와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길래 플라톤은 이성의 덕이 지혜이고, 절제가 욕구의 덕이라고 한 반면 의지의 덕은 전사들에게 요구되는 용기라고 말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 초판(1963) / 출처: 위키피디아

도덕적 행동을 의지에서 찾는 플라톤의 전통은 근대의 도덕 철학을 종합하고자 한 칸트에게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칸트는 ” 이 세계 안에서, 아니 그 밖에서조차 우리가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Good will)뿐이다.”(도덕형이상학 원론)라고 말했다. 고대인들이 덕(virtue)이라고 간주했던 우수한 두뇌, 강인한 체력, 뛰어난 판단력 같은 것들도 그 밑에 선 의지가 깔려 있지 않다면 오히려 가장 큰 악덕이 될 수 있다. 빼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 가장 나쁜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예를 우리는 수도 없이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인들이 중시한 덕이 아니라 선한 의지만이 덕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그런데 이런 선 의지는 저절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보자. 밤에 산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부상을 당해 신음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보자. 산길을 갈 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산짐승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다. 그런데 밤중에 산길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대부분은 머리끝이 솟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자기도 똑같이 저런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설 것이다. 이 경우 감성적 판단은 끊임없이 두려움을 피하고 싶어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는 이성적인 판단에 따르더라도 이성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합리적 행동이라고 자위하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도덕적인 양심이 있는 사람은 두렵기도 하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을 내가 구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선한 마음이 앞서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덕적 행동은 감정적 두려움과 이성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부상당한 사람을 돕는 것이다.

도덕이란 이처럼 전사들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의무감에 따라 행동하듯, 감정과 이성을 넘어서 마땅히 선의지(양심)가 명령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적 욕망을 나치가 대변하고 있고, 그들이 반대할 경우 닥칠 수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나치에 동조하거나 적극적으로 부역 행위를 하는 데 있다. 그것은 결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욕구와 합리적인 이유에 따른 행동인 것이다. 이런 행동에 대해 아렌트처럼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이라고 딱지를 붙일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단순화시킨다면 그것은 본질을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많은 학자들이 앵무새처럼 아렌트의 말을 반복하고 있을까? 정작 생각이 없다는 말,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은 학자들의 그런 태도에 있지 않을까?

아렌트가 말한 것과 다르게 ‘생각 없는 행동’이나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악은 단순히 선의 부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훨씬 더 이기적이고 교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선과 악을 결단하는 삶의 매 순간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려는 선의지 와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전사의 용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의지와 전사의 용기야말로 플라톤과 칸트가 강조해 마지않았던 도덕의 본질이고 도덕적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출처: https://contents.premium.naver.com/leejongcheol/knowledge/contents/220527103113033qc

한철연 회원 신간소개 발표_좌담회 ‘이 책을 말하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영상 20230707 [월례발표회•세미나]

한철연 회원 신간소개 발표_좌담회 ‘이 책을 말하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영상 20230707

주제: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
저자 발표: 박종성
논평·토론: 이병창, 이병태
일시: 2023년 7월 7일(금) 오후 5시 30분
장소: 한철연 강의실

한철연 웹진 [이 시대와 철학]에서 진행
박종성 회원(건국대)이 번역한 슈티르너의 저서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는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된 슈티르너의 저작
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 웹진 [이 시대와 철학] 논평_토론문 링크
▶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1) – 이병창 [철학자의 서재]
http://ephilosophy.kr/han/55230/
▶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2): ‘나’의 개방과 해방에 관한 가장 지독한 사유 – 이병태 [철학자의 서재]
http://ephilosophy.kr/han/55235/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M4_T0zODMSU?si=vnE3ZqbNBxOLVwS-

신영복 선생의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의 해석에 대한 비판 2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신영복 선생의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의 해석에 대한 비판 2

 

이종철(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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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學은 배움이고 탐구라는 의미에서 개별적인 것과 관련됩니다. 논어의 맨 앞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구절에서도 학은 무수히 개별적인 것들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런 배움은 주로 외부 세계에 대한 경험이나 다른 저자들의 책에 대한 공부를 통해 얻는 것입니다. <논어>를 일관해서 학學은 배움의 과정이지 체계화된 학문(Wissenschaft)의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개별적인 배움의 의미를 이해 못 한다면 지식이나 경험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이고, 그런 수동적 경험은 최초의 경험에 대한 인상(impression)이나 지속에 대한 기억(memory)으로만 주어지지요. 근대의 경험론자들이 지식의 습득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백지상태'(tabla lassa)에서 경험을 통해 하나하나 쌓아 나가는 정도로 지식을 생각했지요. 이런 경험은 아무리 많이 쌓아도 그것이 보편적인 것에 대한 확실성을 부여하지는 못합니다.

반면 합리론자들은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a priori)으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틀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이런 틀을 형이상학적인 것이라 배격할 수도 있겠지만, 인식 과정에서 우리는 일정한 개념적 틀이 없을 경우 이해와 인식을 하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말하는 사思는 합리론자들이 말하는 인식의 틀이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칸트가 나중에 <순수이성비판>을 쓰면서 경험론자와 합리론자의 사유를 비판적으로 종합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이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여기서 개념은 지성의 활동이고, 직관은 감성의 활동입니다.

이런 직관이 인식의 재료인데, 공자식으로 표현하면 외부 세계에 대한 배움이지요. 이런 배움이 없으면 아무리 30년 면벽을 해도 사유의 추상성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지요. 공자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전에 하루 종일 먹지 않고, 밤새 자지도 않고 생각해 보지만 이득이 없었고 역시 배우는 것만 못했다.” (논어, 위령공 30). 주자도 그런 의미에서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해석할 때 격을 사물(대상)에 다가가 그 이치를 탐구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가 성즉리(性卽理)라 했을 때의 리는 세계의 객관적 질서를 함축하지요. 이러한 태도는 실재론 혹은 객관주의로 볼 수 있지요. 반면 왕양명은 격자를 마음 심자를 바로잡는 것으로 이해해서 심즉리(心卽理)라고 했는데, 이는 심학 혹은 관념론이나 주관주의로 발전했지요. 아무튼 사는 이러한 리를 깨우치는 생각의 활동입니다.

다시 칸트와 공자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지요. 칸트에 따르면, 경험적 자료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할 수 없으면 그것을 이해하기가 힘들고, 이러한 형식이나 개념도 인식의 개별적 소재들이나 배움이 없다면 그저 공허한 형식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말한 학과 사의 대비가 칸트에게서는 직관과 개념의 대비로 유추될 수 있지요. 그런데 신영복 선생은 이런 대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뜬금없이 실천 이야기를 끌어들이면서 반대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이론을 실천의 입장에서 일관되게 해석하려는 선생의 태도는 존경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맥락과 상황을 무시한 채 무조건 실천의 잣대를 들이 대미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선생은 여기서 자신의 이런 실천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끌어온 내용을 인용합니다.

“자기의 경험적 사실을 곧 보편적 진리로 믿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는 오히려 그 정수의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신의와 주체성의 일면을 발견합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여기서 경험주의적 실천의 신의와 주체성을 인텔리들의 가치 중립보다 위에 놓고 이런 경험 고집을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동력으로 생각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진실’로까지 신뢰합니다. 이러한 선생의 생각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경험주의의 완고한 고집은 마르크스나 엥겔스도 비판했듯 경험 추수주의에 빠질 수 있고, 공자식으로 말하면 ‘학이불사즉망’이고, 칸트식으로 말하면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blind)에 빠지”는 격이지요. 이들의 입장은 이론이나 생각이 없고 개념이 없을 경우에 빠지는 주관주의적 편견과 맹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선생은 오히려 정 반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선생이 이렇게까지 잘못 생각한 데는 사思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를 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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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공부를 할 때 혹은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컨셉이나 사유의 틀을 이해하지 못하면 한참을 공부하거나 책을 읽어도 그 의미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선생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 제대로 배웠으면서도 감옥의 경험 속에서 오히려 정 반대로 곡해를 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책을 덮고 아무리 생각하거나 사유를 해도 남는 것이 없는 까닭은 아이에게 보편화시키는 개념적 틀이나 사유의 컨셉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지, 그냥 생각만 해서는 남는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지요. 선생의 이런 오류는 감옥에서 생각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없는 한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선생의 이런 곡해는 일관되게 학이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고, 사물이나 현상 상호 간에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학을 특정한 문맥을 벗어나 사용할 때는 그런 의미를 띨 수가 있을지 몰라도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라는 말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지요.

거듭 지적하지만, 선생은 여기서 학을 학문의 체계, 체계적인 인식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학은 학이불사태망에서 처럼 공부를 해도 그것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적 사유의 틀이 없으면 어둡다(망)는 의미일 뿐입니다. 선생이 말하듯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은 단순히 공부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성과 사색을 통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사유의 형식이나 틀이 만들어져야만 가능한 것이지요. 사思는 개별적인 것에 대한 배움이 아니라 전체성과 통일성 혹은 맥락과 관계성에 대한 반성적이고 개념적인 이해이지요. 그런데 정 반대로 생각을 하다 보니 선생은 이론을 관념적으로만 생각하고 실천은 무조건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포이어바흐의 추상적 유물론에 대해 그것이 대상, 현실, 감성을 단순히 객체로만 파악한 것을 비판합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그것을 주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파악한 것은 관념론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이론이나 사思 혹은 개념이 없는 경험 추수주의는 독단, 선생이 말하는 완고한 고집에 빠지는 오류를 보일 수 있는 것이지요.

내가 지금까지 다소 장황하게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에 대한 선생의 해석을 비판해 봤습니다. 물론 나의 이러한 비판으로 인해 <강의>라는 중국 고전에 대한 선생의 빼어난 책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선생이 살아계셨다고 한다면 이런 형태의 비판을 반기셨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진리와 진실을 향해 가는 길동무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 길에서 서로 비판을 통해 배우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비판에 열린 사유, 끊임없이 타자에게 대화의 창을 열어 놓는 개방성 만이 진리와 진실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출처: https://contents.premium.naver.com/leejongcheol/knowledge/contents/220802074316324ot

[신간안내] 최종덕 저, 『공백의 실재』(2024) 무료 배포 자유 판본 내려받기 안내 [한철연 소식]

한철연 회원 최종덕 선생님이 이번에 무료 배포 자유 판본 책을 냈습니다.

제목은 『공백의 실재』입니다.

프랑스 행위자 연결망의 철학자 라투르의 『존재양식의 탐구』를 어느 정도 풀어 쓴 해제본입니다.

누ㅡ구나 다운로드 받아볼 수 있는 pdf 파일 전자책입니다.

저자 최종덕의 <움직이는 책> 시리즈로 발행하였습니다. 한철연 홈피에도 소개했습니다.

⇓ 지금 첨부한 책을 다운로드하세요~

 

내려받기⇒ 최종덕의라투르존재양식해제PDF

 

책 15쪽 내용 중 –

♦한철연 ‘홈페이지’ > ‘자유게시판’ > ‘2024/06/12일자 글’에서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phil.or.kr/main.asp

♦아래 주소는 저자 최종덕의 홈페이지입니다. 관련 정보 有
 최종덕의 연구아카이브(홈페이지) http://philonatu.com

 

막스 슈티르너: 에고이즘의 위대한 철학자-3 <헤겔 좌파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헤겔 좌파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박종성(한철연 회원)

 

                        – 차 례 –

  • 서론
  • 헤겔 좌파
  • 헤겔 좌파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 정치적 슈티르너
  •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 슈티르너 이후
  • 역사적 결론
  •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Svein Olav Nyberg [노르웨이 아그데르 대학교(노르웨이어: Universitetet i Agder) 부교수]의 글, Max Stirner: The Great Philosopher Of Egoism(2021)을 번역한 글입니다.

이것이 슈티르너의 출발점이며, 그는 거의 이보다 더 나은 출발점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슈티르너는 도덕성의 원칙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슈티르너의 비판은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적 사람”(egoist)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1] ―변증법적 지렛대로 사용된 그의 비판에서였습니다. 자기중심적 사람은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서문에 소개되어 있는데, 이번 기회에 나와 Hans Trygve Jensen가 “오직 나만을 위해서”(Kun for min egen skyld)[2]라고 노르웨이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서문에서 슈티르너는 실존적 선택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을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신, 인류, “선량한 것” ―혹은 자기 자신 중 누구를 섬길지 결정합니다. 슈티르너는 자기 자신를 선택하는 것이 항상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지적합니다.[3] 그러니까 당신은 “신”, “인간” 등과 같은 “더 높은” 것을 섬기라는 지시를 끊임없이 받고 있습니다.[4] 그러나 “더 높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슈티르너는 그러한 개념이 완전히 순환 논법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의 척도로 보면 신이 “더 높으시고”, 인간의 척도로 보면 “인간”이 “더 높은” 것입니다. 등등. 따라서 슈티르너는 자신을 자기 자신의 척도로 선택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 자기중심적 사람, 곧 단 한 명의 구체적 사람.

그 다음에 자기중심적 사람인 이 창조물은 힘을 이상, ―특히 포이어바흐의 이 추상적, 규범적 개념인 “인간”과 대결시키기 위해 철학적 논쟁의 장으로 보내집니다.

슈티르너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자기중심적 사람 ― 곧 단일한, 구체적 인간과 관련하여 ―포이어바흐의 “인간”은 모순됩니다. 포이어바흐는 자기중심적 사람이 어떤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 사람은 규범적 의미에서 “인간”(Man)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 사람은 포이어바흐가 그에게 부여한 “진리”, “사랑”과 같은 본질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규범적 이상과 관련하여 자기중심적 사람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비-인간(un-man)입니다. 이는 ―논리적 모순입니다.[5] 슈티르너의 주장은 포이어바흐 추종자들의 강력한 응답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의 사상을 재구성했습니다. 이들 추종자 중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젊은 ―칼 마르크스가 있었습니다.

자기중심적 사람에 대한 슈티르너 자신의 표현이나 그 문제에 대한 포이어바흐 자신의 표현에서 찾을 수 있는 세부사항 없이는 슈티르너를 포이어바흐 비판과 연관시키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슈티르너의 논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예로서, 나는 우리 시대에 더 가깝고, 더 유명한 철학자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경쟁하는 자기중심적 사람 ―아인 랜드(Ayn Rand).[6]

랜드에게 윤리는 하나의 “실존적 선택”, 즉 살 것인지 말 것인지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랜드에 따르면, 모든 것에는 정체성이 있으므로, 당신은 단순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무언가로, ―즉 “인간으로서”(as man), ―인간으로서(qua Man)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인간으로서”(qua Man)[7] 살기로 결정했다면, 당신은 특정한 윤리를 선택한 것입니다.[8]

랜드에 적용되는 슈티르너의 비판은 자신의 윤리에 맞지 않는 사람, 자신의 윤리에 맞지 않은 사람을 선택한 사람의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인간(this man)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가 살아 있지 않다고, ―즉 그는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거의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객관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선주의자들은 상당히 오래 삽니다. 하지만 그들은 랜드의 윤리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랜드와 랜드주의자는 그들의 윤리를 옹호하기 위해 이 사람들이 ―인간들(men)이 될 수 없다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랜드와 포이어바흐의 대문자 M의 “인간”(Man)은 주장되었던 경험적 일반화와는 다른 것으로 드러납니다. “인간”은 두 작가가 바라던 존재해야 하는 인간들의 이상과 환상의 집합체로 드러나며, 이는 두 작가의 객관성에 대한 주장과 정면으로 어긋납니다. 그들의 환상을 묘사하기 위해 “인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즉, 수사학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는 자의적인 것입니다.

나 자신은 포이어바흐에서 발표된 도덕성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아직까지 슈티르너의 방식을 사용하여 비판할 수 없는 도덕성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슈티르너는 “나는 어떤 인간(a man)이다. 그러므로 규범적 의미에서 나는 ‘인간’(Man)이여야만 한다”는 종류의 주장이 형편없는 말장난에 기초한 철학일 뿐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쁜 말장난은 오늘날 도덕 철학의 명령인 것 같습니다.


옮긴이 박종성: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공역)이 있다. 논문으로는 「유일한 사람의 사랑」,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고 건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1] “나 자신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만이 나의 일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사람에게 침을 뱉어라!”” 『유일자와 그의 소유』 9쪽.

[2] 『유일자와 그의 소유』, 서문의 제목은 “그 무엇도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결정하지 않는다.”이다. 

[3] 서문에서 이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자신이 충분히 자기중심적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315쪽.

[4] “따라서 우리는 ‘더 높은 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10쪽.

[5] “인간답지 않은 인간다움이 인간이라는 개념에 해당하지 않는 어떤 인간다움이듯이, 인간답지 않은 인간은 인간이라는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인간이다. 논리학은 이것을 ‘자기 모순적 판단’이라 부른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275쪽.

[6] 원주 2, 이러한 맥락에서, 랜드(Rand)의 철학이 계속해서 헤겔주의와 비교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크리스 시아바라(Chris Sciabarra)와 같은 비평가들이 그녀의 방법과 이전의 포이어바흐주의자인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방법 사이에 상당한 유사점을 지적한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크리스 시아바라Chris Sciabarra: Ayn Rand, the Russian Radical)

[7] 원주 3, Peikoff: Objectivism: The Philosophy of Ayn Rand, p. 119–120 이것이 바로 랜드가 오류를 범하는 부분입니다. 그녀는 나의 혹은 다른 사람의 구체적 정체성을 찾지 않습니다. 그녀는 인간의(Man’s) 정체성을 찾습니다. 그러나 인간(Man)은 개념이기 때문에, 인간의 정체성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은 합리성이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그 때에 그녀는 개념의 본질이 개인의 정체성인 것처럼, 이 본질을 구체적 개인에게 잘못 적용합니다. 아래에서 언급했듯이, 본질은 개념에 속하며, 나(I)는 개념이 아닙니다.

[8] 원주 4. 같은 책 257쪽: “생명 기준이라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산적 노력으로 자신의 활동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