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핌과 모성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보살핌과 모성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조주영(서울시립대학교 박사과정)
“빗나간” 모성?
몇 년 전으로 기억된다. 지방의 어느 도시에서 청소년 남학생들이 또래 여학생을 집단으로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수사 과정에서 있었던 문제점들뿐만 아니라, 언론이 사건을 다루는 방식과 관련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 정도가 너무 가벼운 것은 아닌지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수사를 진행하여 피해자의 인권이 무시된 점(피해자에게 진술을 반복하게 하거나 상황을 재연하게 함으로써 제 2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는 과정에서 관련 당사자들의 신원이 공개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 점 등도 논란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사한 사건들이 너무나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최근 보도된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가해 학생의 부모들 가운데 일부는 불법 탐정업체에 의뢰하여 피해 학생 부모의 연락처를 알아내려 했다고 한다. “피해 부모들과의 합의를 통해 처벌수위를 낮추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그 이유다. 어느 부모가 자녀가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까?
자녀가 받을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이해는 해 보지만, 과연 그 행위가 자녀를 위한 올바른 행위였을지 의문이 든다. 자녀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녀가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할까, 아니면 처벌을 줄이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노력해야 할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바로 가해자의 부모가 겪는 고통과 갈등을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인 미자는 중학생인 외손자를 돌보며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금과 일주일에 두 번 간병인 일을 해서 받은 돈으로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언뜻 보기엔 팍팍해 보이는 삶이지만, 미자는 문화센터에서 하는 시 강좌에도 나가고, 아름다운 것들, 특히 꽃을 좋아하는, 소녀 같은 면모를 지닌 그런 인물이다. 그리고 미자가 가장 행복할 때는 “욱이(손자)의 입에 밥이 들어갈 때”이다.
팔이 아파 병원에 갔던 미자는 돌아오는 길에 병원 응급실 쪽에서 거의 정신을 놓다시피 울고 있는 어떤 여자를 목격한다. 들리는 말이, 중학생인 딸이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집에 돌아온 미자는 손자에게 자살한 아이가 학교도 같고 학년도 같은데 혹시 아는 아이인지 묻는다. 손자는 모른다고 하지만, 며칠 뒤, 그 여학생의 자살 동기가 같은 학교 남학생들에게 장기간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이었고, 그 남학생들 중에 자신의 손자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해 학생들의 부모들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모이는데, 미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들이라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다.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어떻게든 “불미스러운 사건”을 덮어 보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지금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면서도 “여자 아이도 처음에는 좋아했다더라.”는 둥, “사진을 보니 키도 작고 얼굴도 못생겼던데 (내 아들이) 왜 그런 애랑 했는지 모르겠다.”는 둥의 이야기를 한다. 그 아버지들에게는 그 사건이 “사내아이들이 (충분히) 저지를 수도 있는 일인데, 괜히 여자아이가 자살을 해서 일이 크게 불거진 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미자는 뜬금없이 밖으로 나가 화단에 핀 꽃들을 구경한다. 꽃들이 너무 아름답지 않느냐면서.
손자가 저지른 죄를 알게 되었을 때도,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도, 미자의 시선은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쫓고,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 언뜻 보면 그러한 미자의 모습은 현실을 너무 받아들이기 힘든 나머지 시 쓰는 일로 도피해 버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소녀를 추모하는 미사에 참석한 사람도, 소녀가 뛰어내린 장소에 찾아간 사람도, 왜 그런 일을 저질렀냐면서 다그치는 사람도, 오직 미자일 뿐이다.
어쩌면 미자가 그토록 시 쓰기에 매달린 것도, 아름다운 것만을 보려 했던 것도,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 그 자체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소녀가 받았을 고통과 그 어머니가 느꼈을 아픔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가해 학생의 아버지들은 자살한 소녀의 어머니와 합의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일이 “잘 마무리 되게” 되었다. 그러나 미자는 묻는다. “정말 이제는 다 끝난 건가요? 이제 이 일은 없었던 일이 되는 건가요?” 그리고 결국 미자는 경찰에 자신의 손자를 고발하고, 죽은 여학생을 위한 시 한편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보살핌: 삶의 여러 관계들에 대한 자각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으면서, 미자는 왜 결국 손자를 고발할 수밖에 없었을까? 미자가 처한 상황은 “보살핌의 윤리”와 “정의의 윤리”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이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관계들이 약해지거나 깨지지 않도록 돌보아야 한다.”는 보살핌 윤리와 “옳고 그름의 기준, 가치들의 서열에 따라 행위 해야 한다.”는 정의의 윤리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손자를 고발한 미자의 행동은 보살핌의 윤리에 따른 행동이기 보다는 정의의 윤리에 따른 행동인 것처럼 보인다. 손자를 보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손자가 저지른 행위가 도덕적으로 그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생명을 버리게 만든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손자를 고발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인터뷰에서,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각 개인의 일상적인 삶과 남들의 고통이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의 일상이 누군가의 고통과 연결돼 있다고 봐요.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발밑에 안 보이는 물줄기가 연결돼 있듯 모두 서로 관련이 있어요. ‘시’는 개인의 이야기이면서도 집단과 공동체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미자의 선택은 어쩌면 자신의 삶이 타인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내린 윤리적 결단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손자를 보살펴야 한다는 보살핌의 윤리와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를 해야 한다는 정의의 윤리 가운데 하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놓여 있는 관계망 가운데 하나가 깨졌을 때 그것이 다른 관계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피고, 나머지 관계망들을 보살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보살핌과 정의는 어느 하나로 다른 하나를 대체해야 하는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보살핌의 대상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국한될 때, 공동체 안에서 인간관계의 평형 상태는 깨지게 된다. 다른 아버지들은 자신의 아들만을 보살피고자 했기 때문에, 죽은 아이가 겪었을 고통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고 그 어머니는 단순히 “순순히 합의를 해 주어야만 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미자는 손자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다시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다른 아버지들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관계가 상호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윤리적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에 처했을 때, 정의와 보살핌이 모두 요구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했던 최근의 성폭력 사건에서, 일부 가해자들의 부모의 행위에 대해 기사에서는 “빗나간 모성”이라고 평가했다. 흔히 모성은 사랑, 헌신, 보살핌 등과 연관된다. “빗나간 모성”이라는 표현이 함축하는 바는 아마도 자녀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행위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보살핌과 정의가 서로 대립한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보살핌과 정의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보살핌은 “자녀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그 사건에서 가해자들의 부모들이 한 행위나, 영화에서 가해자들의 아버지들의 행동 방식을 “보살핌”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보살핌의 윤리” 자체가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행위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모성이라는 것도 현대 사회에서는 사랑, 헌신, 보살핌 등의 개념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현대 사회는 보살핌 노동, 감정노동 자체가 글로벌화되는 지구지역시대이다. 그리고 우리는 특히 출산 정책과 관련하여 국가가 모성 담론을 어떻게 진행시키고 변화시켜 왔는지를 목도해왔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조건과 관련하여 모성을 새롭게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여러 측면들, 관계들, 그리고 상황이 발생하는 구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잊으려 해도, 외면하려 해도 끝끝내 따라다니는 어떤 아픔이 있다. 미자가 보여준 것은 그 아픔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