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파라노이아): 외디푸스 = 크리스토스 [천 하룻밤 이야기]

광기(파라노이아): 외디푸스 = 크리스토스

2024 01 20 대한(大寒)

푸꼬가 근대사상의 역사를 광기의 역사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뭐 학자가 그런 소리 할 수도 있지 정도로 생각했다. 자연의 피폐, 즉 본성의 피폐는 광기의 역사이다. 들뢰즈가 이를 이어받아서, 그 광기의 주축인 변증법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한다. 신화 같은 참주(황제, 자본)에 이르는 변증법 사고(思考)가 광기이고, 그리고 2천 년이 지나도 오지 않은 크리스토스를 온 것으로 만든 그 사고가 파라노이아 이라는 것이다. 참주의 억압을 외디푸스(Οἰδίπους)의 억제로 바꾼 것은 프로이트이지만, 참주에 의해 인민의 원한과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에 의해 원죄를 심은 것을 비판한 철학자가 니체라고 한다. 이런 어마어마하게 길고도 풍부한 이야기를 공시태에서 보면 간단히 상승의 명령과 지시에 못 이르는 원한과 원죄가 있다. 그 터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민이 있고,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는 공포를 심었다. 이에 비해, 통시태에서는 인민이 기본심금으로 쭉 흐름이고, 그리고 분출하여 용출선을 만들어 전복하는 최종심급이다.

동서양의 사상을 공시태로가 아니라 통시태로 읽으면, 상식 시대, 양식의 시대, 그리고 고등양식의 시대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곳에서나 인간이 도구들, 즉 자연의 돌들 속에서 주워다 쓰는 시대(구석기 시대)에서, 도구를 만들어 쓰는 시대(신석기 시대)를 거쳤었다. 그리고 돌덩이 속에서 구리, 금, 은, 철이 자연적으로 있지만, 열을 가해 녹여서, 인간의 몸의 도구와 유사하게 도구를 만들면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안다. 이런 정도는 5관(상식)을 통해서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체를 지닌 인간이 몸과 달리 소통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도 안다. 이 소통은 자연에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만들었는지를 5관을 통해서 하나로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에는 누구나 공부, 즉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하면서, 5관을 통일을 조성하는(composer) 것을 식(識)이라 하고, 이 여섯 가지를 함께(하나로가 아닐 것인데) 지닌 인간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이 무엇인가? 이뭣꼬의 새로운 단위 설정하기에 이르는 것도 변증법이다. 이런 사유에 이르게 되면서, 원본이 없기에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달리하는 자들이 나온다. 이들 사이에 서로가 지 잘났다고 하는 경우들과 더 많이 더 높이 안다고 하는 경우들이 생긴다. 그럼에도 각자는 하나의 조성하는 단위를 인정하는 점에서 중요한 변증법을 체득하고 있다. 서로 다른 이유는 다음 차원일 것이다.

깊이에서 표면으로 생성하는 쪽에서도 상식을 통하여 이런 과정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 있으나, 규칙과 법칙을 잘 찾기 어려워서 함께 어우르는 방식을 변증법이라는 용어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뭣꼬는 거의 전체 또는 전부에서부터 규명의 노력을 하여 부분들을 설명하려는 방식이라 여긴다. 이에 비해 생활에서 또는 터전에서 도구의 공용화와 전승에서 원형 또는 원본에 준하여 도구 생산을 하기에, 잘 만들어진 또는 견고한 원본이 있어야 한다(필요하다는 것이다)고 한다. 이 원본을 만드는 과정은 여러 재료들과 도구들을 사용했음에도 원본이 만들어지고 또는 제시되면서, 만드는 데에 따른 순서와 규칙, 공동체에서 사용하는데 규율과 기준 등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전수와 전달에서 그 도구가 없더라도 대화 또는 거래의 소통에서 그 무엇을 먼저 규정해야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 잣대가 먼저 있다고 여긴다. 그 때 그게 뭣꼬의 뭣꼬를 묻는다. 여러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원본을 이르는 과정도 방법 또는 기술이라 하지만, 입말로서 이리하면 안 되고 저리해야 하고, 이것을 섞으면 안되고(폭발하고) 저것을 섞으면 조성(합성)이 된다고 하는 방법이 있듯이, 삶에서 진선미를 추구함에서 합성하는 이뭣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원본은 합성이 아니라,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전제로서 오류일 것인데, 그대로 순수한 원본이 있다고들 한다. 말하자면 원본으로 순수소나무가 있다고 해보자, 소나무의 뿌리, 줄기, 가지, 바늘잎들이 어디 순수한 것이 있겠느냐마는 원본 비슷한 소나무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일반화의 덕분이다. 소나무가 없는 곳에서도 소나무를 말하면서 이런 저전 이야기를 소통할 때, 그 말의 소나무는 일반화의 개념을 넘어서 추상화로서 관념이라고 부른다. 이런 공통감관의 재료에서 일반화를 거쳐서 추상화의 과정도 변증법이라 부른다. 서로 같은 원본인 것 같지만 실재성에서 다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대의 상식시대에, 일반화가 잘 안 되는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아마도 용어는 나중에 만들어졌겠지만 공간과 시간이다. 어디까지 경계를 지어야 공간이며, 아무 것도 없는 허공만이 있는 것을 공간이라고 또는 빈 것이라고 할까? 빈 것이라고? 고대인들은 속이 빈 갈대 줄기를 잘라서 앞뒤를 자르고 막아서 물에 넣고서 양쪽을 떼면, 방울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아 공간이란 것이 물과 다른 무엇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갈대가 없는 빈 허공은 어디까지 공간인지를 오관을 통해서는 불가능하지만, 일반화와 추상화의 과정처럼 공간이라는 어떤 것을 설정한다. 그것이 뭣꼬라고 물으면 어떤 기준점이든 대상을 통해서 응답해야 하는데, 신체를 지닌 자체가 이미 너비(공간)을 지니고 있기에 인정하는 방식이 소통과 다른 방식으로 담는 그릇이 없이도 이미 담겨져 있는 신체라는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이 없으면 무엇이라고 설명할 것인가?

다른 한편 과거와 현재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어떤 지속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죽어서 세상을 뜨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과거는 현재에 없다고 하지만, 한사람이 살면서 없어진 과거의 어린 시절의 추억은 노인이 되어서도 문득 떠올릴 때 마치 어제처럼 또는 조금 전처럼 느껴지는 실재성은 새로 만들어진 것인가 또는 잔존하는가? 한사람의 과거도 60여년의 과거가 어제 같은데, 인류사에서 6백년, 6천년, 6만년이 어제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당연히 부정하겠지만, 고등양식의 시대에 DNA를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 속에 기나긴 과거가 있다는 것은 화석과 지질학을 배워서 아는 것 이상으로 기나긴 과정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6백년전 고려 불교 불상과 고려 대장경은 어제의 것인지 먼 과거의 것인지, 심하게 이야기하여 바로 전의 찰나의 것인지 라고 물으면, 거짓이라고 하는 이들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을 이야기할 때, 마치 조금 전의 사실들처럼 알고 읽으면서 진리에는 시간이 없고 공간도 없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간은 마치 공간처럼 있기는 한데, 오관과 식(識)이라는 6식을 통해서는 설명이 안 된다. 더군다나 고려나 남한이나 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처럼 대화도하고 소통한다.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이란 통째로 덩어리가 전부가 있고 부분으로 고조선이니 고려니 조선이니 나눈 것이 아닌가. 공시태가 한꺼번에 전체에서 부분을 보여준다는 거처럼 여기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하는 방식이다. 이런 공간화를 공시태 속에서는 논리적으로 타파할 수 없다고 한 이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이며 그의 논법도 변증법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합리한 논리보다 실재적 삶에서 대화와 소통의 방식으로 공간과 시간이 먼저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 속에서 서로가 무엇을 이루고자 하였는지를 공부하는 방식으로 대화법도 있다. 통일성을 찾았거나 말거나 어정쩡한 상태를 두고서 서로 소통하는 대화법도 또한 변증법이라고도 한다.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과정, 무엇인가를 합의 보려하는 과정, 무엇인가 서로 다른 점을 좁혀보려는 과정, 아무리 그래도 다양한 방식들이 통일된 방식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이정도로 약속하고 합의를 보는 것은 사회적 삶이다. 이것은 변증법이 아니라고 하는데, 아니 이런 과정을 걷고 있는 거이 변증법이다. 자연에서, 논리에서, 불가인식적인 것에서만 변증법의 소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제도에서도 변증법이 있다. 단지 그 방법이 다른 방법보다 우월하다는 정도는 이해하지만, 절대적이다거나 완벽하다는 것에서, 주장자의 오만과 치기가 개입하는 것이 아닌가? 그 개입을 어떤이는 변증법이라고 착각하는데, 개입은 상태와 흐름을 자르는 것이지, 다발의 형식으로 종합과 통합과 다르다.

하나의 답이 있고,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변증법은 변증법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가만히 정지해 있을 경우에 적용 가능한 것이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에 적용은 자신이라도 움직이지 않아야 적용과 개입이 가능할 것인데, 자신도 움직이면서 적용은 마치 나는 맞고 너희들은 틀렸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이면, 그것은 무엇‘이다’이지, 활동하는 현존이 아니다. 무엇에 쓰임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다루어보아 한다. 그 무엇을 다루면 되는 경우와 잘 안되는 경우가 있는데, 잘 안되는 경우가 기존과 잘 되는 것과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잘 되는 경우와 달리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문제는 다른 것이다. 이런 다른 과정과 방향이 현실에서 수없이 많음에도 하나의 방향이라 여기는 것은, 다른 것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경우일 것이다. 시간의 경과에서 달리 생겨나는 것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한 방식이 다른 방식을 모르거나 적용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 방식이 세상을 잘 만들어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저 다른 방식보다 어쩔 수 없이 또는 한시적으로 우연히 선정하여 행할 뿐이다. 사람들은 한시적 선정을 통일된 합의라고 하지만, 그저 부분적인 합의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의 무제한성과 달리 시간의 흐름은 지나온 과정은 마치 통합된 방식으로 흘러온 것으로 착각하다. 미리 말했지만 근대 300여 년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비합리적이었고, 정상이라고 거쳐왔고 거쳐가고 있는 상태가 비정상이며 광기라고 하는 것은 생태계의 시계를 측정하는 방식에 보고 있다. 같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무슨 일이라도…

메시아의 번역어로서 크리스토스는 미륵불과 같은 미래에 올 무엇의 모습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이다가 아닌 무엇인가, 하나의 방향이 아닌 무엇에 쓰이냐는 방식으로 다루면서 통시태 과정에서, 온갖 이야기와 논설과 담론이 전개되었다. 전개의 방식이 너무나 다양한데 하나의 방식이 맞다 하는 것도 변증법이고, 다양하게 전개되는 이법이 풀어가는 방식도 변증법인데, 서로 마주 견주어서 통합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변증법이고, 아니 하나의 방식을 있다고 강요하면서 만들어가고 구축해나가는 것도 변증법이라고 한다.

역사는 하나의 방식이 다른 방식을 거세하고 배제하여 성립한다고 믿는 자들이 이끌어 온 것처럼 서술되었으나, 언제 하나의 방식의 변증법 이외에 다른 변증법도 여럿이라는 것은 신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환, 상제, 천신, 하나님, 제우스, 데우스, 고도, 디외, 갓, 야훼, 알라, 마나 등등 터전을 달리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는 것은 잘 알려졌다. 서로의 터전을 유지한 체 다른 터전을 존중하는 관용이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에서는 어느 이름이 맞고 어느 이름은 틀리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신은 선(善)하고 타의 신은 악마처럼 여기는 풍토가 왜 생겼을까? 그나마 서양철학사에 사색(speculation, 서로 비쳐보는 대조하는)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서 13-14세기에 서로 다른 길을 비추어보자고 했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하나가 맞다는 상식의 놀이가 지배하면서 다른 쪽을 마남사냥으로 못된 짓을 하였고 사실상 아직도 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한 종교를 믿는 신앙자들이 어느 곳에서나 마이크로 떠들어도 아무도 그만 하라고 말하지 않는데, 무속은 산속에서 불교는 절집에서 다른 몇몇은 그들이 뒷방에 모이듯이 구석진 곳에서 모여서 숨죽이며 노래하고 전수하고 전파하다.

어느 시대에나 이런 상반된 또는 다양한 것이 있었지만 하나로 나가는 변증법적 통일의 길이 맞고, 진리이고, 선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 지배방식은 다른 터전과 영토에서도 적용하고, 그 적용에 들어오지 않는 자들을 악, 악의 축으로 모는 것은 여전하다. 사색한다가 서로 비추어본다고 하면서, 아마도 서양철학사에 두 개의 실체의 인정에 이르는 이원론이 등장했을 것이다. 이런 비추어봄은 동양에서 감(鑑)이라 할 것인데, 비춰봄에는 다른 방향들이 여럿 있다는 것이고, 그 시대 그 제도에서 합의와 계약의 방향을 잡는 것이 감일 것이다. 물론 요즘 감(感)잡았다는 감화작용의 일반화를 알아챘다는 것이며, 사변적인 감(鑑)과는 다르다. 이런 여러 갈래를 비추어보는 작업으로 64갈래를 사유하는 주역이 흥미롭다. 여러 갈래들 중에서 우리의 관심이 두 갈래라고 한 것은 스피노자였지만, 갈래를 둘로 사유했던 이는 데카르트였다. 다른 실체는 둘이 서로 다른 것이지만, 사회 도덕적 사변에서는 종속 또는 예속이 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야 정신이 물질을 지배한다. 나아가 신은 자연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방식이 21세기에 와서 지구를 황폐하게 하는 사상이며, 이기심에 의한, 파라노이아 또는 외디푸스적 사고일 것이다. 이런 한 방향의 인식과 지배방식이 소위 말해서 양식(bon sens) 시대인데, 좋은 방향을 하나의 방향으로 삼아서 절대자로 국가로 변형된 추리를 만든 것도 변증법이었다. 이런 변증법이 악의 축을 만드는 변증법이며, 전쟁을 조장하는 변증법이며, 자본과 제국에 예속하는 변증법이었는데도 거의 3세기 동안에 지배적 사고였다는 것이다. 반성과 성찰이 없지 않았지만, 그 변증법의 위세에 눌려서 말도 못하고 의식은 5관을 보탠 6식으로 다른 길로 가려고 또는 용출선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시대마다 논의의 줄기들 또는 구조들에 따라 변증법이라는 이름이 다양하게 불렸다. 이상하게도 이런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자신들은 자유롭다고 하였는데, 변증법에서 일반화를 거쳐 추상의 지위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그들이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되어도, 그 제도와 체제 속에서 쌓아온 부와 지위를 버리지 못하여, 외디푸스(참주)와 크리스토스(미래불)의 추종자가 되었다. 불교에서 미래불은 저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지금 행하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라도 뒤처지지 않게 같이 가자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천 년의 불교, 오백 년의 유학이 있었다. 그리고 근대화에서 실학 등을 거치는 과정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만난 것이 굴절이었고, 또한 미국의 자본 제국을 만난 것이 또한 더욱 굴절하여, 자연에서 나온 다발이 뭣인지를 알기에 어렵게 되었고, 공부와 노력은 두 배 세 배를 더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중에 상식과 양식의 시대를 넘어 고등양식으로 가는 시기에, 일제로부터 배제와 배척의 사고가 들어와 보이지 않게 외디푸스가 장악하였다. 참주의 지배였다. 거기에 보안법이 역할을 했다. 그 다음에 외디푸스 그 위에 크리스토스가 덥혀졌고 인민을 원죄의식으로 굴종시키듯이 헌법과 법률로 다스린단다. 입법은 인민의 것이지 외디푸스도 크리스토스의 것도 아니다. 참주과 제국 속에 연구하는 이들이 그 이중굴절에 자기의 위상조차 잃어버렸다. 국가보안법이 굴절을, 크리스토스의 계율같은 헌법이 재굴절에 더하여, 이뭣꼬도 모르는 변증법적 사고의 방향이 자연에서 드러나는 생성과 창발을 휩쓸어 가버렸다.

환(桓, 밝다, 영원)에서 단(旦)으로 그리고 고조선의 전승은 이야기 곧 신화이다. 환을 중국인들은 영원이라고 한다. 왜 영원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는 어느 영토와 어느 시기에는 한 번씩 거쳐가는 것이다. 꼬마 애가 나는 어디서 나왔냐고 묻듯이, 세상을 신이 만들었다고 하면, 신은 누가 만들었는 데라고 묻듯이 말이다. 모르는 사실을 지속의 과정에서 풀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누구의 것이 맞다는 이야기(파라독사) 만큼이나 다른 이름들로 출발하는 것도 이야기(파라독사)에 속한다.

이야기 과거가 현재하지 않는 점에서 현존이 아니지만, 역사가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억은 통시적으로 거의 무한하다. 이렇게 말하면 생명역사 35억년이라고 한계가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이 양식의 변증법을 사용하면서 정신은 무한하다고 하면서도, 35억년은 유한다고 하여 진리의 축에 들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그 변증법이 외디푸스에게 예속이다. 몽테뉴가 인간의 예속에 대해 말하면서 다른 길(방향)과 견주어 의심해보고, 자기의 완전성과 무한성이 없는 만큼이나 타인의 방향과 추론을 존중하는 관용을 갖추라고 한 것이다. 이런 타와의 사색이 감(鑑)일 것이다. 여럿을 비추어보지 못하는 사변도 감도 없는 사회가 예속과 굴종의 사회이다. 그 사회에는 보안법이 존속하고 있다 게다가 미군 점령지로서 이땅의 기준 언어가 영어라는 점에서 외디푸스에서 크리스토스 지배를 받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식민지 종속의 외디푸스와 달리, 식민지에서 외디푸스를 넘어서는 길이 무엇인가를 말해준 것은 들뢰즈이다. 용출선(탈주선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을 만들어라, 기존의 각질에 균열을 내고 리좀을 연결하라. 즉 달리 말하라, 달리 사유하라고, 여기에 전복 즉 혁명이 있다고 한다.

일제 외디푸스 사고의 영향 60여년, 미제의 크리스토스 사고의 영향 60여년을 지나면서, 기나긴 과거를 무시하고 또는 배제하면서, 120여 년의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것으로 착각한 이들이 현 정부다. 외디푸스와 크리스토스의 카르텔에 학문하는 이들이 그 예속에 있지 않는가. 미국의 하부인 일본에게 그 하부로 들어가자는 정책을 펴는 이들이 윤석열 정부와 그 관계자들이다. 이름 하여 숭미자이며 부일자들이다. 우리는 우리 입말로 소통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래로 분류상, 이런 극우들이 설치는 터전에서 뭣을 다루어야 하고 뭣을 할 것인지를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 토지에서 알게 모르게 유일신앙을 믿는 자들은 제국의 체계와 체제에 복속되지 않으면 그 시대 그 국가에서 살수 없을 정도이고, 더하여 지탄받아서 그들의 터전과 영토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기왕 이 터전과 영토에 살고자 한다면, 여기서 체계와 체제를 순서대로 익혀서 살아가는 것이 편안하지 않는가? 라고 한다. 이런 순서대로 익히고 사는 것은 사회제도 속에서 휩쓸려가면서 보고 듣고 말하면서 움직이면 된다. 이런 활동이 종속적이고 예속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대와 제도 속에서 출세하며 또는 지식이 높다고 칭송받고 살아가는 길이라 여긴다. 그렇다 그 속에서 사는 편안하고 세상을 향유한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이 좁은 한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좁은 자아와 그 자아의 추구방식이 좁지, 예속이든 종속이든 사회라는 테두리 또는 남한이라는 영토가 자아에 비해 매우 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에서는 평생을 두고 남한 90만 평방 킬로미터의 너비 속에 안 살아본 곳이 살아본 곳보다 더 많다는 것도 이런 사고하는 자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제도와 체계 속의 이 영토에는 자기가 하나의 질서 속에 예속되어 있듯이 하나의 질서와 체제 속에 종속되어 있어서 다 가볼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즉 바닷물을 다 먹어보고서 짜다고 하지 않고, 약지 손가락을 찍어서 맛보고 짜다고 하듯이, 한 영토의 삶의 양태들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그 질서의 논리 속에 안정과 편안을 누릴 정도만 활동하고 움직인다. 그게 인류의 습관인지, 기나긴 역사의 전승인, 불교식으로 인연연기인지를 물을 필요 없다. 왜냐하면 작은 자기가 큰 기존 사회에 동의하고 합의하여 세상을 향유하며 살아가는 것이 좋다, 선하다, 정의롭다 고 규정하고, 타를 부정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기 긍정과 자기 동일성이 근사한 학문처럼 보이지만, 긍정의 바깥을 무시하는 부정적 사고이며, 오만과 치졸함에 빠진 사고이다. 자기 이외를 불손으로 불량으로 불의로 더 나아가 악마로 악의 축으로 보는 것은 중세의 마남사냥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일신앙의 기원과 크리스토스를 유일 신성으로 받는 종교 시노드(함께 가는 길)에서 나온 것이라고 니체는 그 기나긴 책들 속에서 시들로 써 놓았다. 그 시들을 읽는 이들 중에서 흐트러진 다른 길들을 가는 이들이 악마화 된 길을 가는 허무주의로 간주하고, 니체의 시를 “함께 가는 길”이라고 읽는 이도 있다는 점에 “함께 가는 길”이란 참 좋은 말이다.

이 지구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영토와 삶의 양식을 지니고 살아간다. 지구와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 “함께 살아간다.”는 이들 중에 참으로 이상한 이들이 2천년 정도의 역사에서 있어왔다. 세상 또는 크게 보아 우주라는 말이 그리스에서는 코스모스, 라틴에서는 유니버스로 번역되어 쓰인다. 이 두 단어가 차이가 사유과 사고만큼의 차이이며, 이런 차이는 조화와 분배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유니버스(하나의 길로, 로마로)의 사고에 빠진 철학에서 벗어나 코스모스(자연)속에서 코스코폴리탄(사해동포주의)로, 일 방향을 따라갔던 인문주의자(humaniste)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인성을 공부하는 인도주의자(humanitaire)로, 제국의 지배 하에서 예속과 패거리의 주구(走狗)로서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는 상품자유주의자(liberaliste)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유가 뭣꼬라고 물으면서도 이법에 따라 사는 인성자유주의자(libertaire)로 살아가는 노력의 방향이 진솔한 자연이법, 즉 자연 변증법일 것이다. (4:41, 57LLJ) (6:20, 57LLJ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움베르또 R.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J. 바렐라 지음, 정현주 옮김, 『자기생성과 인지』(갈무리, 2023. 11.) 서평 – 이수영 [철학자의 서재]

관찰자들의 다중우주

서평 | 자기생성과 인지: 살아있음의 실현

움베르또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정현주 옮김, 갈무리, 2023

 

이수영(미술작가) 2024.1.31.

 

뉴런과 시냅스에 대한 설명이 전체주의와 아나키즘으로 연결된다. 북방산개구리의 시신경이 기계와 연결되고, 객관적인 앎의 불가능성이 윤리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런 낯선 연결들로 궁구하는 것은 ‘살아있는 체계란 무엇인가’, ‘생명체는 어떻게 인지하는가’이다. 생물학 책에 ‘인식, 객관적 진리, 전체주의, 윤리’가 등장한다. 서문을 쓴 스태포드 비어의 말처럼 이 책은 학제 간 연구가 아니라 여러 학문을 초월하는 것으로 “새로운 도서관에 속하는 것이다(172).”

『자기생성과 인지: 살아있음의 실현』에는 「인지생물학」(마뚜라나, 1970)과 「자기생성과 인지」(마뚜라나, 바렐라, 1973)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인지생물학」은 마뚜라나 전 생애의 모든 연구와 저작의 기원이자 전주곡이다. 그 다음의 저서들은 전개와 변주이다.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사유를 이해하기에는 『앎의 나무』(마뚜라나, 바렐라, 최호영 옮김, 갈무리, 2007), 『있음에서 함으로』(마뚜라나,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06) 등이 더 편하다. 하지만 마뚜라나 초기 글에는 낯설어서 기이한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는) 문장들을 탐험하는 재미가 있다.

가장 낯설고 기이한 개념은 ‘관찰자’였다. 마뚜라나는 살아있는 체계를 ‘관찰자’라고 부른다. 관찰자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내부이다. 고양이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새를 바라보지 못한다. 새에 부딪치는 광자로 활성화된 자신의 시신경들의 상호작용을 바라볼 뿐이다. 마치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뉴런들의 상호작용 체계가 독립된 실체이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관찰자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새를 바라본다. 마치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자신과 상관없이 저 바깥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이기라도 한 듯이. 고양이의 뉴런과 나뭇가지 위의 새,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가 마뚜라나·바렐라에게는 구별되지 않는다. 이 ‘안과 바깥’이라는 개념이 역설로 느껴진다면, 주체와 객체로 세상을 가르고 저 바깥 객체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알고자 몸부림치는 이원론에 너무 오래 익숙했기 때문이다.

마뚜라나는 말한다. “말해진 것은 모두 관찰자가 말한 것이다(62).” 객관적 실체는 없다. 객관적 앎은 없다. 주체와 객체는 구별되지 않는다. 대화는 객관적 정보의 공유가 아니다. “언어를 통해서는 전달되는 정보가 없다…듣는 사람이 자기 인지영역에서 정보를 창출하는 사람이다(112).”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가 투명한 심부름꾼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인 것처럼, 브루노 라뚜르의 행위자들이 서로를 번역하듯이 말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외부를 번역하는 능력이다. 외부가 투명하게 내부로 드리우고 내 앎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이미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마뚜라나의 관찰자 개념은 인간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혹은 신경계를 가진 생명체에게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자기 고유의 재귀적 상호작용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체계이다. 즉 마뚜라나의 가장 유명한 업적인 ‘자기생성(Autopoiesis) 체계’를 갖추고 있는 존재자라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재규어도 아메바도 꿀벌집단도 어떤 도시나 국가도 관찰자이다. 아메바, 재규어, 마을 공동체, 도시와 국가 모두가 동등한 관찰자라는 말은 평평한 존재자들의 민주주의를 이끈 브루노 라투르, 그레이엄 하먼과 레비 브라이언트를 떠올리게 한다. 신체가 다르면 인지가 다르다는 마뚜라나·바렐라의 말은 에두아르두 까스뜨루의 관점주의적 다(多)자연주의도 떠올리게 한다. 까스뚜르의 관점주의를 마뚜라나와 연결시켜 본다면, 모든 살아있는 존재자는 자신의 고유한 자기생성 체계에 따라 세계를 사유한다. 재규어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다르다. 폭력에 시달려 온 인간과 폭력을 일삼아 온 인간의 자기생성 체계와 우주는 다르다. 같은 하늘 아래 생각만 다른 것이 아니라 아예 이고 있는 하늘이 다르고 신체가 다르다. 자기생성 체계의 차이들만큼 수많은 자연이 존재한다.

계통적이고 개체적인 반복적 경험으로 자기생성 체계의 구조와 구성은 변하지만, 자신을 자신이게끔 생산해내는 체계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마뚜라나·바렐라는 이 자기생성 단위체를 ‘기계’라고 부른다. “우리는 살아있는 체계가 ‘기계’라고 주장한다(193).” 살아있음은 어떤 정신이나 정령이 깃든 것이 아니라 물리적 동력을 가진 단위체이다. 이 ‘기계’ 개념은 펠릭스 과타리의 기계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기계는 과타리의 기계처럼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하고 연결하며 “자기 자신을 상수로 유지하며 변주한다(197).” 기계는 기계의 구성요소의 속성과는 독립적이다.

살아있는 체계는 환경과의 상호소통으로 자신을 생산한다. 마뚜라나가 인간의 사회체계를 윤리와 연결시키는 대목은 니클라스 루만을 떠올리게 한다. 루만은 마뚜라나의 자기생성 체계 이론에 영향을 받아 사회체계이론을 만들었다. 자신이 속한 더 큰 자기생성 체계인 국가가 자신의 자기생성과 상호체계를 배제하거나 제약한다면 전체주의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관찰자는 메타인지가 가능하다. 마치 자신이 어떤 외부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메타인지 능력이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다. “관찰자를 위해 그리고 관찰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53)”를 마뚜라나는 아나키스트 사회라 부른다.

새로운 도서관에 꽂힌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책은 분류보다는 연결과 종합을 따르고 있다. 페루난두 페소아에게 수많은 이명(異名)의 페소아들이 있듯이, 이 글에도 마뚜라나와 바렐라를 ‘적소(適所)’로 삼은 많은 이명들이 함께 나타났다. 내게는 마셜 맥루언, 브루노 라투르, 그레이엄 하먼, 레비 브라이언트, 에두아르두 까스뜨루, 펠릭스 과타리, 니클라스 루만이 그들이었다. “살아있는 체계는 주위환경의 일부, 즉 적소와 상호작용하는 것이므로 적소와 독립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64).”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관찰자들이 마뚜라나·바렐라와를 적소로 삼기를 바란다.

 


 

헤겔미학산책34-고딕 건축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4-고딕 건축

 

1)

낭만주의 예술 형식 시대에 건축 역시 낭만적 건축으로 변화된다. 낭만적 건축 가운데 특히 헤겔이 주목하고 그가 다룬 주요 내용은 고딕 성당에 관한 것이다.

이 시대 아라비아 건축은 제쳐놓는다고 하더라도 중세 말에는 고딕을 대체하여 르네상스식, 바로크 식, 로코코 식 건축이 출현했으며, 헤겔 당시에는 신고전주의가 대두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헤겔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함이 없이 건축 장의 마지막 3절인 낭만 건축 절을 마치고 만다. 그만큼 고딕 건축에 대한 헤겔의 관심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한다.

고딕 건축에 대한 헤겔은 지극한 관심은 괴테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미학강의에서 고딕건축이 괴테의 연구 때문에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고 말한다[1]. 괴테는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는 신고전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일견 추악한 외면적 형태 때문에 비난 받던 고딕 건축을 찬미했다. 괴테는 1772년 <독일 건축술에 관해>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딕 건축은] “영원한 자연의 작품처럼 … 형태를 이루고 모든 것이 전체를 지향하면서 수많은 작은 부분들로 살아나는 거대하고 조화로운 덩어리”이다.[2]

 

괴테의 평가는 언뜻 생각하면 조화와 균형이라는 고전적 아름다움을 고딕 건축에서 다시 발견했다는 말로 들리는데, 이 평가는 고전적 조화와 균형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괴테가 강조한 것은 “전체를 지향하면서 수많은 부분들로 살아나는 것”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지극한 다양성과 동시에 지극한 통일성 즉 수많은 작은 부분과 전체, 다시 말하자면 서로 모순적인 것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헤겔이 말하는 낭만주의 예술 형식의 원리 또한 동일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낭만주의 예술 형식은 정신이 개별성이라는 가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고전적 이상화와 구별되는 개별적인 다양성이 강조된다. 그럼에도 이 개별적 다양성은 가상에 불과하니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면서 정신적 통일성으로 복귀한다. 여기서 개별적 다양성과 정신적 통일성 사이에 대립의 통일이 출현하니, 이런 관계를 헤겔은 고딕 건축에서 괴테 덕분에 다시 발견하였던 것이다. 아래 헤겔 자신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비로소 최고의 특수화, 분화 그리고 다양성이 고도의 유희 공간을 얻는데, 그렇다고 총체성이 단순한 특수성이나 우연적 개별성으로 분열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예술의 위대성은 여기서 이러한 갈라짐과 분열됨을 철저히 예의 단순성으로 다시 돌려 놓는다.”[3]

 

괴테와 함께 헤겔은 고딕 건축의 어떤 측면을 돌아보면서 이와 같은 평가를 내렸는지 이제 살펴보기로 하자.

 

2)

고딕 성당은 단순한 신전이 아니다. 그것은 곧 교회이다. 신전이 신이 현전하는 공간이라면 성당은 성령이 현전하는 공간이다.

성령은 추상적 신과 개별화된 그리스도의 합일을 통해 나온다. 성령은 개인과 개인의 사이에서 불의 혀처럼[4] 펼쳐지는 것이다. 이 성령에 기초하여 교회[Gemeinde]가 이루어진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교회 공동체이며, 그들을 통일하는 정신[Geist]이 곧 성령[Geist]이다[5]. 성당이란 교회란 현전하는 터전이다.

그러므로 성당은 단순히 신을 경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건물이다. 실제로 성당 속에서는 다양한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한쪽에서는 기도를 드리며 다른 쪽에서는 장례를 치르며 또 다른 쪽에서는 제의가 행해진다. 그런 다양한 일들은 다시 신에 대한 경배라는 하나의 목적을 통해 통일된다.

헤겔은 성당에 두 측면이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다양성이 고도의 유희 공간을 얻는다”. 다른 한편으로 성당 내부 공간의 “장엄함과 숭고한 고요” 속에서 개인은 “무한한 내면 자체로 고양된다.” 성당은 “이러한 갈라짐과 분열됨을 철저히 예의 단순성으로 다시 돌려 놓는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성당은 개신교의 교회와 다르다고 한다. 개신교 교회는 오직 기도만이 일어날 뿐인 단순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개신교 교회는 “신도석만 제외하면 마구간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장 같은 형태”라고 말한다.

반면 성당 속에서 그 어떤 개별적 활동도 ‟전체를 채우지 못하며” ‟점들처럼 분산되며 일순간의 활동은 그 스침 속에서만 보일 뿐이니”, 따라서 성당은 ‟거대하고 무한한 공간들의 견고하고 한결같은 형식과 구조를 지니며” “일체의 특정 목적을 초월하여” “자립적으로 현존한다.” 여기에서는 “합목적성이 아무리 현존하더라도 그럼에도 그것은 다시 사라지고 전체에는 자립적 실존의 모습이 남는다.”[6]

형식적으로 본다면 성당의 목적인 교회 공동체는 성당이란 내적 공간에 대해 외적으로 관계하며, 성당은 이런 목적에 대해 가장 합목적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당의 그 무한한 공간 속에는 이미 그 모든 교회 공동체적 활동이 잠재적으로 열려 있으니 이미 교회라는 목적이 성당에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당은 외적인 목적을 갖는 건축으로서 의미를 벗어나서, 스스로 독자적으로 실존하는 조각으로 발전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성당의 자립적 실존을 강조한 것이다.

 

3)

고딕 성당에서 내적 공간은 자신의 봉사하는 목적을 자기 내에 가지는데, 내부 공간이 다양한 활동을 통일하는 가능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외적 형태 역시 이에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 때문에 외부 형태는 고유한 독자적 형태를 가지게 된다.

헤겔은 고딕 성당의 외적 형태를 서술하면서 그 대표적 특징이 곧 첨두 아치[리브 볼트]에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첨두 아치는 한편으로 기둥이면서 그 수많은 갈래는 서로 만나 궁륭을 이룬다. 이 궁륭은 마침내 중앙의 궁륭에서 첨탑으로 올라간다. 다른 한편으로 첨두 아치는 기둥이면서 동시에 벽이 되니, 아치가 천장까지 이어지면서 하나의 완전한 원구를 이룬다. .

 

[고딕 성당은] “궁륭을 이루는 숲, 즉 늘어선 나무 가지들이 서로에게 기울어 하나로 모이는 숲”[7]과 같다.

헤겔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스트라스부르크 대성당

그 결과 고딕 성당은 한편으로는 벽으로 에워쌈을 원리로 하는 고대 건축과 다른 한편으로 기둥으로 되어 지탱을 원리로 삼으며 고전 건축의 종합이라고 말한다. 고딕 성당은 양자의 종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다. 우선 고딕 성당은 고전 건축에서 출현한 지탱의 원리를 더 발전시켜, 천상으로 자유롭게 상승하는 치솟음으로 나아간다. 다른 한편 그것은 고대 건축에서 출현한 에워쌈을 더 발전시킨다. 고딕 성당에서 만들어지는 폐쇄적 공간은 원환을 이루어 무한한 내면성의 공간이 된다.

 

“그리스 사원의 명랑한 개방성과 달리 한편으로는 외적 자연과 세속적 일반으로부터 떨어져 내면으로 집중하는 고유한 심정의 인상을 다른 한편으로는 오성적으로 제한된 것을 넘어가려 치솟는 엄숙한 숭고함의 인상을 산출해야 한다.”[8]

 

그것은 한편으로 ‟세속 일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내면으로 집중하면서 심정의 고요함이라는 인상을 산출하며 다른 한편으로 지성적으로 제한된 것을 넘어가려 치솟는 엄숙한 숭고함의 인상을 산출한다.”[9]

 

닫혀있으면서 안으로 열려 있고 지탱하면서도 초월하는 첨두 아치의 기본 형식은 곧 낭만주의의 대립하는 것의 상호 통일이라는 원리를 가장 전형적으로 표현한다.

 

4)

고딕 성당은 외적인 형태를 통해 다양한 낭만적 원리를 보여준다. 낭만적 원리는 곧 무한한 주관성의 원리, 정신의 자기 내 복귀의 원리인데 “내적인 것은 외적인 것 속에 반영하고 또한 그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되돌려야 한다”[10].

대표적인 원리는 평면의 분할이다. 성당 내부의 공간은 다양하게 분할되어 있다. 남북과 좌우가 구분되며, 측랑 가운데 신랑이 있으며, 앱스와 네이브, 격실, 지하 교회, 합창석 등 다양한 공간이 분할되어 있다. 그런 가운데 각 개별 공간은 좌우와 남북이 만나는 중앙의 거대한 공간에서 만나게 된다.

 

“종교적 예배가 각인의 심정과 삶의 관계들이 갖는 형형색색의 독특함을 관류하여 가슴 속에서 보편적이며 확고한 표상들을 흔들림이 없이 심어주듯이, 단순한 건축학적 기본 전형들 역시 극히 다양한 격실, 격벽, 치장들을 언제나 앞의 주 윤곽선들 속으로 다시 흡수하여, 이 선들과 대비할 때 가뭇없도록 만들어야 한다.”[11]

 

서로 대립적인 다양성과 통일의 상호관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첨두 아치의 각 기둥을 이루는 것도 수많은 작은 돌로 나누어져 있으면서 하나로 합일하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기둥 자체가 서로 교차하면서 다시 통일된다.

 

“[낭만] 건축은 …지극한 내면성 자체를 가능한 한 가시화한다. 그러한 질료의 경우에는 덩어리 자재의 질료성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것을 전면적으로 깨고 조각내어 거기에서 그 직접적 응집력과 독립성의 가상을 빼앗아야만 비로소 표현이 가능해 진다. ..이토록 거대하고 무거운 돌덩어리를 견고하게 맞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쾌하고 장식적인 전형을 이토록 완전하게 보존한 건축은 없었다.”[12]

 

다양성의 통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형상이 곧 현관 바로 위에 있는 장미창이라 하겠다. 이 장미창은 원들로 이루어진 원이며 다름 아닌 낭만주의의 원리인 내적 무한성을 상징한다.

 

5)

이처럼 고딕 성당의 모습은 내적 공간뿐만 아니라 외적 형태에서 이미 낭만성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고딕 성당은 그 의미조차 다양성의 통일이니, 고딕성당은 전면적으로 낭만적 원리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물론 내적 공간은 잠재적으로만 의미를 내포할 뿐 여전히 그 의미에 대해 외적 합목적적으로 관계하니, 상징적 건축은 틀림없다. 하지만 외적 형태와 내적 공간, 그리고 그 의미는 모두 낭만성의 원리를 따르고 있으니 서로 공명하는 듯하다.


[1] 이 부분은 미학강의 2, 353쪽인데, 낭만 건축에 대해 서술에 들어가는 도입부이다.

[2] 괴테, 독일 건축술에 관해, Goethes Werke Bd. 12, C. H Beck, 1982, S. 7 서정혁. 헤겔의 미학과 예술론, 소명출판, 2023, 35 쪽에서 재인용.

[3] 미학강의 2, 354쪽

[4] 사도행전 22장 3절: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5] 독일어 Geist는 정신을 의미하는 동시에 성령을 의미한다. 헤겔은 그러므로 성령을 거꾸로 정신으로 즉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정신으로 규정한다. 복음이 사랑을 선포하는 이유는 성령의 정신이 공동체 정신이고 그런 공동체 정신의 출발점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6] 이상 인용문은 모두 미학 강의 2, 354쪽을 참조하라.

[7] 미학강의 2, 359쪽

[8] 미학강의 2, 355쪽

[9] 미학강의 2, 365쪽

[10] 미학강의 2, 369쪽

[11] 미학강의 2, 368쪽

[12] 미학강의 2, 369쪽

헤겔미학산책33-고대 건축과 고전 건축[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3-고대 건축과 고전 건축

 

1)

앞에서 설명했듯이 건축의 질료는 공간적이거나 연장적인 것, 비어 있거나 충만한 덩어리[Mass]이다. 이 질료는 무규정적이고 연속적인 것이다. 건축은 어떤 외면적 형태를 갖든 간에 그 본질은 무규정적 연속적인 덩어리 즉 공간[또는 연장]에 있다. 내적 공간은 무규정적이니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외부에서 의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헤겔은 그 때문에 건축은 본래 상징적인 예술이라 한다.

 

그것은 “육중하고 물질적인 것 즉 특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본래 구체적이거나 진정으로 정신적인 형상이 가능하지 않은 것”[1]이다.

 

내적 공간은 삶의 터전으로 사용되니, 건축의 목적은 이런 삶에 있으며, 건축의 의미는 삶을 위한 봉사에 있다. 예를 들어 건축은 주거이거나 신전 또는 광장이거나 시장 그 외 일상적 생활을 위한 공간이다. 삶 자체가 시대적으로 변화한다. 고대 신과 고전적 신은 다른 정신을 표현하니, 그에 따라 신전은 다른 형태의 내적 공간을 요구할 것이다. 고대 도시는 정치 중심지였다. 중세부터 시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가 출현했다. 그에 따라 도시는 다른 형태의 공간이 될 것이다.

삶의 목적은 그에 적합한 수단으로서 공간을 요구하니 양자 사이에는 합목적성이라는 관계가 존재한다. 이런 합목적성의 관계는 동일한 공간이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고전 시대의 광장이었던 곳이 근대에 시장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고대 신전이 개조 되어 근대 신전으로 변한 경우도 많다.

 

2)

건축의 외면적 형태는 건축을 축조하는 방식을 통해 나타난다. 공간의 외면적 형태는 내적인 공간과 느슨하게 나마 상호 연관을 갖는다. 그것은 병과 그 내용처럼 거의 무관한 것은 아니며 옷과 신체처럼 느슨하게 서로 들어맞는다. 건축의 외적 형태는 “독자적으로 형상화된 의미의 단순한 덮개나 환경은 아니”더라도 “자신을 통해 하나의 의미 내용을 내비치는 형식”[2]을 갖는다.

외적 형태는 이런 내적 공간을 매개로 그 공간이 봉사하는 목적과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공간의 목적이 공간의 내적 형태를 합목적적으로 제약하고 이 공간의 내적 형태는 그것을 축조하는 외적 형태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인 형태는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그 시대 정신이나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적 형식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헤겔에 따르면 건축의 외적 형태는 “자기 자신을 통해서 사유하는 것을 제공하며 보편적 표상들을 일깨워야 한다.”[3] 건축은 “소리가 없을지언정 그 자체로 인해 현전하는 언어로서 정신에 대해 존재한다.[4]

건축은 다양한 외적인 형태를 가지게 된다. 이 형태는 위에 말한 것처럼 간접적으로 느슨하게 나마 그 시대 삶을 표현하는 예술 형식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건축적 질료는 육중하고 거대하기에, 무게와 균형의 법칙과 같은 자연의 법칙을 지배 받아 마음대로 형상화될 수가 없으며 대체로 직선과 직각, 수평면의 요소를 기본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한계 내에서는 부분적으로 자유롭게 그 시대 예술 형식을 닮은 요소를 받아들인다. 곡선이 들어오고 열주가 늘어서고 궁륭과 돔이 만들어진다.

건축의 질료인 내적 공간은 그 의미에 대해 상징적인 연관을 갖지만, 이런 외적 형태는 부분적 형태를 통해서 그 시대 예술형식과 정신을 드러낸다. 정신을 표현하는 예술 형식이 상징적, 고전적, 낭만적 형식으로 전개됨에 따라 건축 역시 상징적 건축, 고전적 건축, 낭만적 건축으로 발전한다.

 

2)

최초 고대 국가의 건축은 거의 무차별적인 덩어리이어서 외면적 형태도 없다. 예를 들면 바벨탑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저 흙덩어리를 몇 개 단에 걸쳐 쌓아 올린 것이며, 내부에 빈 공간도 없는 충만한 흙덩어리 자체이다[5]. 외적 형태에는 예를 들어 7개의 기단과 같이 추상적인 수가 할당되어, 간신히 사유의 흔적을 남겼다. 헤겔에 따르면 최초 건축은 민족이 공동으로 만들어 낸 것이어서 민족적 통일을 상징할 뿐이라 한다.

좀더 발전하면 다음 단계에서 오벨리스크처럼 거대하지만 추상적 형식을 갖거나, 남근상이나 스핑크스, 멤논 상처럼 자연형상을 부분적으로 모방한 형태를 갖는다. 이런 건축물은 조각과 닮았는데, 조각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외적인 형태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세워져 있거나 쌓여 있어서 하나의 거대하고 육중한 덩어리가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덩어리로서 의미를 자기 밖에 지닌다. 이 축조된 돌 덩어리가 무엇을 상징하는가는 지금은 알지 못하며, 남근이라든가 스핑크스와 같은 외적 형태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의미를 짐작할 뿐이다.

조각품적인 건축의 경향은 이집트 사원 건축에 이르면 상당히 발전하는데, 이는 스핑크스의 회랑, 기둥 숲, 상형 문자의 벽, 멤논 상, 성소, 사각형의 돌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여기서는 상징적 수수께끼가 흩어져 있으니 헤겔은 이집트 사원 건축은 자연 속에서 어떤 본질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이집트 룩소르 신전 정면, 스핑크스, 오벨리스크, 멤논상, 기둥 숲  등의 모습이 보인다.

“자의식은 아직 영글거나 자체로서는 완성되지 않았으니, 그것은 전진하고 탐색하고 예감하고 끝없이 생산적이었으나 절대적 만족을 찾지 못했으며 또한 그런 까닭에 안녕이 없었다.”[6]

 

다음 단계에서 건축은 드디어 충만한 덩어리를 넘어 빈 공간을 만들어낸다. 벽으로 에워싸고 기둥으로 지탱하면서 만들어진 건축적 공간은 삶에 관련된 의미를 가진다. 헤겔은 이런 건축의 예로서 지하동굴이나 피라미드(무덤)[7], 왕궁을 거론한다. 이제 건축은 삶의 터전이 되니 전 단계 조각을 닮은 자립적인 건축에서 삶의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적 건축으로 이행한다.

여기서 외적 형태는 여전히 거대하고 육중한 형태를 보여준다. 특히 장엄한 스핑크스의 대열이나 기둥 숲의 열주는 이 시대 상징주의 예술에서 나타나는 환상성이나 숭고함을 닮았다. 건축물은 아직 직선이나 직각, 수평면과 같은 단순성과 추상성, 균일한 크기, 간격 똑바른 열 등의 규칙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전적인 비례, 조화와 같은 유기적인 아름다움에 이르지는 못한다.

헤겔은 고대 건축에서 나타나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보이더라도 이는 추상적 규칙성에서 유기적 아름다움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중간적 형태라고 말한다. 이것은 중세 이슬람 사원에서 나타나는 무한성을 보여주는 아라베스크 문양과 달리 “식물 형태가 건축학적으로 변형되어, 원통형 오성적인 것 규칙성 직선형에 근접하여” “아라베스크라 불리는 것과 비슷하게 보일”[8] 뿐이다.

이런 추상적 규칙성의 요소는 일반적으로 상징주의적 예술 형식을 닮았다. 여기서 직선이나 수평면이 그 자체로 상징적인 기호라는 뜻이 아니다. 즉 직선은 숲의 나무를 상징하고 수평면은 바다를 상징한다는 것이 아니다. 직선이나 수평면이란 마치 무규정적인 공간이 그렇듯이 무차별적이고 ‘탈자적인’ 요소이므로 상징적으로 된다.

 

4)

그리스 시대 고전 건축에 이르면[9] 이제 건축의 목적은 분명하게 자각된다. 그 목적은 곧 삶의 터전이니, 건축은 주택이거나 신전, 광장이나 도로 등이 된다. 건축적 공간은 삶에 봉사하며, 그런 한에서 자신의 봉사하는 삶에 대해 가장 합목적적인 수단이 되어야 한다. 아름다움이나 외적 형태가 아니라 이런 합목적적 수단으로서 공간이 건축을 지배하는 기본적 원리가 된다.

파르테논 신전, 조화로운 비례가 중요하다.

“목적이 작품의 전체를 지배하는 규제적인 원리이며, 작품의 근본 형태와 골격구조를 동시에 규정하는 원리가 된다.”[10]

 

신은 민족의 삶을 통일하는 종교적 상징이므로, 개인적 삶을 위한 주택보다는 신의 거처인 신전이 이시대 건축의 최고 형태가 된다. 여기서도 목적이 지배자이며, 형태의 아름다움은 부차적일 뿐이다.

이런 합목적성은 삶 자체에 봉사하는 것이므로, 삶이 실행되는 자연적 환경 즉 기후나 입지 경관 등에도 적합해야 하니, 이로부터 고유한 민족적 건축물이 세워지게 된다. 그리스적 건축물과 게르만적 건축물 동아시아적 건축물은 각기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이라는 과제를 가장 충실하게 수행했다[11].

건축은 축조되면서 외적 형태를 지니게 된다. 고전적 건축은 내적 공간적 형태가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하게 형성될 뿐만 아니라 외적 형태 역시 그 시대 예술적 형식에 영향을 받는다. 고전적 예술 형식은 정신을 현현하는 이상적인 형태이니, 고전적 건축 형식 역시 이상적 형태를 닮으려 한다. 하지만 건축은 기본적으로 자연법칙에 따라 축조되는 한계가 있으니, 이상성은 이제 건축의 부분적 요소 사이의 균형과 조화, 비례라는 방식으로 출현한다.

헤겔은 고전적 건축의 외적 형태가 지닌 몇 가지 원리를 소개하는데, 직사각형이 정사각형보다 우세하다거나, 너비는 길이의 반이라는 등 원리이다. 헤겔은 이런 특징을 ‛음악적 관계’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는 슐레겔의 말을 빌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한다.

고전 시대 건축의 형태적 특징 가운데 핵심은 기둥이다. 기둥은 내리누르는 무게를 들어올리면서 정신의 비상을 암시한다. 헤겔은 특히 그리스 신전의 기둥을 주목하는데, 이 기둥은 지붕을 떠받치는 비상의 힘을 상징한다. 헤겔은 이런 신전 건축의 기둥을 지배하는 원리를 지탱이라 한다. 그것은 이제 에워싸는 담이나 벽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세워지며”[12], ‟하중과 유희하듯, 너무 약하지도 너무 강하지도 않으며 억눌려서도 안되며, 공중으로 너무 높고 가볍게 솟아서도 안 된다”[13]고 평하였다.[14]

아래는 그리스 고전적 신전에 대한 헤겔의 평가이다. 외적 형태에서 한마디로 다양성을 하나로 통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 건축은 곧 고전주의적 예술형식에 속한다.

 

“그들의 완성된 아름다운 작품들은 단순한 덩어리로 바닥에 눌려 있거나 그 너비에 대비해 과도하게 높이 솟거나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점에서 아름다운 중용을 유지하며 또한 동시에 그 단순성 속에서도 적절한 다양성을 위해 필요한 유희공간을 제공한다.”[15]

 

“이는 고전적 이상에서 보편적 실체가 자신의 생동성을 담지 하는 우연자와 특수자를 지배하면서도 그것들을 자신과 조화시킬 만큼 힘 있는 것으로 머무르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16]

 

이런 그리스 신전은 이제 에워싸는 동굴과 같은 이집트 신전과 달리 개방적인 형태를 갖는다. 사람들은 그 신전의 열주 사이로 ‟둘러서거나 이리저리 배회하거나 오락가락하면서” ‟진지하지 않고 명랑하며 한가롭고 떠들썩한 머무름의 표상을 얻는다.”[17] 이런 형태는 그리스 건축이 자신의 목적인 그리스적인 삶 특히 도시 폴리스의 정치적 역할에 적합한 형태로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헤겔은 이와 같이 간접적이지만, 목적을 자각하고 이를 건축 속에서 구현하려 하는 건축을 봉사적 건축이라 이름 붙인다.


[1] 미학강의 2, 292쪽 참조. 공간은 내적으로 텅 비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규정성 아래 있다. 이 규정성 때문에 그것은 동시에 충만한 연장성을 지니는데, 이 규정성에 따라서 다양한 공간이 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규정되어 있지만 본래 구체적이지 않다”라고 한다.

[2] 미학강의 2, 292쪽

[3] 미학강의 2, 292쪽

[4] 미학강의 2, 292쪽

[5] 헤겔은 후일 헤로도토스가 전한 벨로스 탑에는 정상에 신전이 만들어졌으나 초기의 바벨탑에는 이런 신전조차 없고 그저 몇 개의 단에 걸쳐 흙덩어리가 쌓였다고 한다.

[6] 미학강의 2, 307쪽

[7] 피라미드에는 미이라가 안치되어 있다. 헤겔은 미이라는 신체를 불멸하게 만드는데, 영혼이 개별적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개별적 영혼은 불멸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체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체는 자연적 개체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 미학강의 2, 321쪽

[9] 헤겔에 따르면, 고대 건축의 에워싸는 벽을 기본 원리로 한다. 이를 위해 석조가 유리하며 상징적 건축이나 낭만적 건축은 대개 석조다. 반면 고전 건축은 지탱하는 기둥을 기본 원리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목조가 유리하다. 그리스 건축은 후일 석조로 바뀌지만, 여전히 목조의 형태를 보존한다.

[10] 미학강의 2, 326-327쪽

[11] 그리스 건축에서 에워싸는 벽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은 지붕과 기둥으로 이루어질 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반면 한국의 건축물은 겨울의 추운 기후와 여름의 무더운 기후를 반영하며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과 열린 넓은 마루, 두터운 지붕으로 이루어진다.

[12] 헤겔은 이점과 연관하여 괴테의 말을 인용한다. ‟기둥의 본성은 자유자재이다”. ‟벽들은 어떤 기둥을 갖는다기보다는 일체의 기둥을 배척한다.” (헤겔 미학강의2, 339에서 재인용)

[13] 미학강의 2, 332

[14] 헤겔은 괴테가 “기둥의 본성은 자유 자재이며” “주택은 네 기둥에서 성립하지 않으며, 사방의 네 벽에서 성립하며 이 벽은 … 일체의 기둥을 배척한다”고 말했다 한다. (헤겔 미학강의 2, 339쪽)

[15] 미학강의 2, 342쪽

[16] 미학강의 2, 342쪽

[17] 미학강의 2, 343쪽

 

헤겔미학산책 32- 이것은 건축인가 조각인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 32- 이것은 건축인가 조각인가?

 

1) 건축의 질료

건축의 질료는 ‛역학적으로 무거운 물질[즉 Mass], 또는 무게의 법칙에 따라서 형상화될 수 있는 물질’[1]이다. 예를 들어 돌멩이나 나무와 같은 것이니, 그것은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적 물질이거나 아주 간단하게 다듬어진 물질이다.

건축의 질료는 직접적인 자연 물질이지만 다른 예술로 갈수록 그 질료가 추상화되고 점차 관념화된다. 조각의 경우 이미 형상화가 가능한 물질로 제한되며, 회화나 음악에 이르면 물질이더라도 이미 관념화된 빛이나 소리가 질료로 사용된다. 시문학의 질료는 표상이니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건축이 예술 장르 가운데 가장 단순한 계기를 이루며, 역사적으로 가장 빨리 등장한 예술 장르가 되었다고 한다.[2]

그 가운데 건축과 조각은 사용하는 질료를 놓고 보면 동일하게 보여서, 양자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성채이나 부처상은 둘 다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소나무가 장승이 되면 조각이고 기둥이 되면 집이 된다. 헤겔은 정신이나 형상이 아니라 질료를 통해 건축과 조각을 구분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물체[Matter] 예를 들어 돌멩이나 나무 토막은 이중적 측면을 지닌다. 한편으로 그것은 공간적 연장적 양적인 특성을 지니니, 이런 점에서 하나의 덩어리[Mass]이다. 다른 한편 이런 물체는 그것에 대립하는 규정성, 질적 특성을 지니니, 이런 측면을 물질성[material]이라 할 수 있다. 덩어리의 측면은 물체의 부정적, 무의 측면이라 한다면, 물질성의 측면은 긍정적, 존재의 측면이다.

물체는 공간적 연장적 측면에서 축조되면서 특정한 덩어리의 결합체를 만들어내니, 덩어리는 주변과 분리되면서 독자적인 것이 된다. 이런 덩어리 결합체가 곧 건축이다. 반면 물체의 규정적 질적 특성은 조각의 질료가 된다. 물체의 규정성과 질적 특성은 서로 결합하면서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2)

물체의 전면 즉 긍정적[positive] 측면과 부정적 측면, 물질성과 덩어리는 서로 대립하지만 떼어낼 수 없다. 규정성이 없는 연장성은 없고, 공간성 없는 형상도 없다.  양자는 서로의 이면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공간 자체를 구축하는 건축 예술과 물질성을 조형하는 조각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 일정한 형상화 없이는 건축도 없으며 일정한 연장성 없이는 조각도 있을 수 없다. 건축을 거꾸로 보면 조각이 되고, 조각을 거꾸로 뒤집으면 건축이 된다. 건축과 조각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의 이면이 된다.

그러면서도 건축과 조각이 서로 구분되는 것은 그 의미가 부여되는 방식 때문이다. 건축의 경우는 규정적 형상적 측면은 공간적, 연장성의 측면을 다른 것과 구분하는 데 기여할 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곧 공간성과 연장성이다. 이런 공간성과 연장성은 무규정적이고 연속적인 측면이니 그 자체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자기 밖에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질료의 특성상 그것의 의미를 자기 밖에 가지기 때문에 건축이 된다.

반면 조각에서 공간적이고 연장적인 측면은 질적이고 규정적인 측면이 존재하기 위한 토대, 장소가 될 뿐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적이고 규정적인 측면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형상이 된다. 이런 고유한 형상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처럼 자기 내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으므로 그것은 조각이 된다.

헤겔은 건축과 조각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면에서 보면 조각에 감각적인 것 자체를, 즉 질료를 질료적 공간적 형식으로 형상화하는 , 그것은 아직 건축과 같은 단계에 있다. 하지만 조각은 건축으로부터 구분되기도 하는바, 까닭인 즉 조각은 정신의 타자인 비유기적 물체를 정신에 의해 제작된 하나의 합목적적 환경으로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목적을 자신의 외부에 두는 형식들로 변형하지 않고 정신성 자체를 … 신체적 형상에 투입하여 신체와 정신을 불가분으로 통일된 전체로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건축이 단순 외적인 자연과 환경으로서 정신에 봉사한다는 규정을 갖는다면, 조각의 형상은 여기서 탈피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현존한다. 이러한 탈피에도 불구하고 조각상은 그 환경에 본질적으로 관계한다. 즉 조각상이나 군상은 특히 부조는 작품이 위치하는 장소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작될 수 없다. ”

 

여기서 헤겔은 건축은 “질료를 질료적 공간적 형식으로 형상화”하며, “그 목적을 자신의 외부에 둔다고” 규정한다. 반면 조각은 “물체를 정신에 의해 제작된 하나의 합목적적 환경”으로 만들며, 정신의 형상이 “자기 자신을 위해 현존하는” 것이라 한다.

 

3)

이런 구분은 많은 의문을 자아낸다. 무엇보다도 헤겔 자신이 고대 건축의 출발점으로 들고 있는 것이 남근상이라든가 스핑크스, 멤논 상 등인데,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구체적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조각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헤겔은 이들을 건축 속에 집어넣어 다루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혼란은 건축의 질료인 덩어리[mass]가 지닌 이중적 측면 때문이다. 즉 공간적이고 연장적인 측면이다. 공간적 측면은 비어 있는 것인 반면 연장적 측면은 오히려 충만한 측면이다. 이렇게 대립하면서 둘 다 내적으로 무규정적이며 연속적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모든 공간은 한편으로 충만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충만한 것은 다른 편으로 비어있는 공간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화강암 덩어리를 보자. 화강암 덩어리는 화강암적 물질로 충만한 것이며 너무나도 충만해 있어서 그 속에 차별도 없고 연속되어 있다. 이런 무규정성과 연속성의 측면만 보면 그것은 비어있는 것이다. 거꾸로 우리 눈에는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을 보자. 그것은 무규정적이고 연속적 공간이다. 그러나 사실 이 공간은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다. 공기가 가득 채우는 있으니 그것은 공기의 덩어리라 할 수 있다.

이런 공간성과 연장성, 비어 있음과 충만함이 같은 것임을 이해한다면, 이제 남근상이나 스핑크스, 멤논상을 헤겔이 왜 조각이 아니라 건축이라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비록 부분적으로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축조된 것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형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지닌 거대함과 육중함이다. 그것은 육중한 돌 덩어리와 거대 나무 토막을 세우거나 쌓아놓은 것이다. 이런 거대하고 육중한 것은 비록 비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충만한 것으로서 연장적인 것이며 곧 건축의 질료가 된다.

이런 점은 오벨리스크나 카바석 등을 살펴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이런 것들도 수직적이거나 정육면체라는 일정한 형태를 지니지만, 이것이 건축물인 이유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그 형태가 아니고 그것이 지닌 거대하고 육중한 질료적 측면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워지거나 누여져 일정한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에 이르면 모더니즘 건축이 지녔던 단순성, 기하학적 형태가 사라지고 다시 구체적 형상성이 되돌아 온다. 개미집과 닮은 음식점이나 프랑크 게리의 춤추는 건물을 보라. 그럼에도 이런 건물이 조각이 아니라 건축이 되는 것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형태가 아니라 그런 형태를 축조하면서 만들어낸 공간성 또는 연장성 때문이다.

프랑크 게리의 춤추는 빌딩, 이것은 건축인가 조각인가

4)

조각도 축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대의 많은 조각 작품은 그 사이에 빈 공간을 담고 있고, 어쩌면 그런 공간 자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공간이 비어있는 것만이 아니라 충만한 연장성을 지니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거대한 덩어리를 깎고 다듬은 조각 작품은 차라리 건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많은 조각 작품은 마치 사탑처럼 다양한 형태를 지닌 물질 덩어리를 쌓아놓았으니, 더욱 그런 의문이 든다.

이런 작품들 역시 건축이 아니라 여전히 조각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조각 사이의 빈 공간은 어디까지나 조각의 형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바탕으로서 역할을 할 뿐이며 깎고 다듬어진 거대한 덩어리에서 작가가 드러내려는 것은 덩어리가 아니라 그것이 지닌 고유한 물질성이니 그런 물질성이 지닌 양감이나 촉감 시각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탑처럼 축조한 조각 작품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작가는 이렇게 축조된 덩어리가 아니라 그런 덩어리가 지닌 규정성을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경우에도 그 의미는 작품의 형상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 만일 작가가 그런 작품에서 공간성, 또는 연장성 다시 말해 그 덩어리로서 물체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 그런 덩어리는 그 자체로 무규정성이나 연속성을 지니는 것이기에 고유한 의미를 자기 밖에 지닐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에 비로소 그런 작품은 건축이 된다.

예를 들어 조각가 문신이 올림픽 공원 입구에 세워놓은 작품이 사찰 앞에 서 있어서 사찰의 경계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목적을 지닌 것이라 한다면, 이제 그 작품은 조각이 아니라 건축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그것이 지닌 덩어리가 경계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천사지 탑처럼 국립박물관 안에 옮겨지면 그것은 건축이라기보다 오히려 조각작품이 되면서 그것이 지닌 형상성, 질적 규정성, 감각적 느낌 등이 문제가 된다.

문신 1988올림픽, 이것은 건축인가 조각인가?

5)

건축은 축조를 통해 특정한 덩어리를 만들어 낸다. 이 덩어리는 비어 있거나 충만한 것이다. 덩어리는 어느 방식이든 무규정적 연속적이기에 그 자체로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 의미는 자기밖에 가질 수밖에 없으니 건축적 공간은 외적인 의미에 대해 합목적적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건축은 근본적으로 상징적이다.

건축은 축조하는 가운데 외적인 형태를 가지는데, 그 외면적인 형태와 내적인 공간은 서로 동전의 이면이다. 두 측면은 서로 대립하면서 서로 관계한다. 여기서 외적 형태는 내적 공간과 엄밀하게 관계하기보다 느슨하게 관계할 뿐이다.

건축이 상징적으로 지니는 의미와 그것의 축조된 외적 형태 사이에서도 내적인 공간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 관계를 갖는다. 축조된 외적 형태는 자신의 이면인 내적 덩어리를 느슨하게나마 규정하고 이는 다시 그것과 상징적으로 연관된 의미와 합목적적으로 관계하니, 외적 형태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제약하는 관계를 지니게 된다.

 

“건축은 공간에 경계를 설정하고 이를 에워싼다…. 왜냐하면 이런 건축 예술은 독자적으로 현존하는 형태를 쌓더라도 정신이 자신에 적합한 신체적 형상 속에서 현상하는 자유로운 아름다움의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대체로 본래 하나의 표상을 암시하고 표현하는 상징적 형식을 제시할 뿐이다.”[3]

 

“왜냐하면 건축의 소명은 독자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정신에게… 외적 자연을 울타리로 세우는 것인데 … 그러므로 그 의미를 더 이상 자신 안에 지니지 않고, 그것을 제3의 것에서 … 발견하면서 자립성을 포기하고 만다.”[4]

 

건축의 질료인 덩어리를 축조하는 법칙은 주로 무게의 법칙이며 건축은 지성에 의해 계산된 안정과 균형의 관계에 따라 정돈된다. 이런 법칙의 결과 축조에서 나타나는 형태는 주로 직선이나 직각, 수평면과 같은 비유기체적인 형태에 머무른다.

건축적 질료를 통해 그 의미 즉 정신과 간접적으로라도 관련되기 위해서는 무게의 법칙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기울어져야 한다. 무게의 법칙이 밑으로 하강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라면, 건축에 담긴 정신성은 내리 누르는 힘에 대해 지탱하거나 들어 올리는 힘 즉 상승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런 상승은 유기적인 형태 즉 곡선이나 사선, 수직면을 통해 도입된다.

비유기체적 형태와 유기적인 형태가 어우러지면서 건축 자체가 일정한 고유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정의 형태나, 고딕 건축물의 형태가 그와 같다. 이와 같이 형태가 축조되는 가운데 건축은 조화, 대립과 같은 관계 방식이 사용되니, 마치 음악에서 음이 조화와 대립을 이루며 발전하는 것과 같다. 음악에서 이런 발전은 시간적으로 일어나지만 건축에서 그런 관계는 공간적으로 공존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슐레겔의 표현을 빌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말한다.


[1] 미학강의 2, 275쪽

[2] 과연 건축이 역사적으로 최초의 예술인가? 아놀드 하우저는 선인류의 동굴벽화에서 예술사를 시작하니, 그런 관점에서 헤겔의 주장은 옳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헤겔은 이렇게 반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굴벽화가 있기 전에 먼저 동굴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최초 인간이 살고 있는 동굴도 자연동굴을 거칠게나마 다듬은 것이니 이미 건축에 속하지 않을까?

[3] 미학강의 2, 288쪽

[4] 미학강의 2, 289쪽

헤겔미학산책31-예술 장르와 예술의 형식의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1-예술 장르와 예술의 형식의 관계

 

1) 예술 장르와 예술 형식

예술의 각 장르가 이처럼 정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감각적 질료(질료의 속성, 예술가의 솜씨, 현실 재창조의 기법)와 연관해서 구분되므로, 헤겔 미학강의 3부에서 다루어지는 장르를 규정하는 원리는 앞의 2부에서 다루어진 예술 형식을 규정하는 감각적 형상과 상관 관계를 지닌다.

형상과 질료, 즉 예술 형식과 예술 장르 사이의 관계에 관해, 우선 헤겔은 각 예술 형식은 자기에게 적합한 예술 장르를 지닌다고 말한다. 상징주의 예술은 건축을 통해 주로 자기를 표현한다. 고전주의 예술은 조각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출현하며, 낭만주의 예술 형식은 시문학과 같이 관념적 질료를 사용하는 예술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런 상관 관계에도 불구하고, 형식과 장르는 독자성인 총체성을 지닌다. 각 시대의 예술 형식은 다른 모든 장르를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전주의 시대에도 고전적 건축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음악과 미술, 시문학이 등장한다. 그것은 낭만주의 시대에 독자적인 건축과 미술, 음악, 시문학이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각 장르 역시 다양한 예술 형식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건축은 상징적 예술 형식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더라도 고전적 건축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런 고전적 건축은 고전적 예술 형식에 가장 적합한 형식인 조각에 비해서 본다면, 아무래도 뒤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건축이 고전적 예술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측면은 낭만적 건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예술 장르 역시 예술 형식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총체성을 지닌다.   

 

2)

예술 형식과 예술 장르의 관계는 헤겔이 설명하는 형태와 계기의 관계와 유사하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이나 <법철학> 등 곳곳에서 형태와 계기의 관계에 대해 서술했는데, 형태는 계기의 체계적인 관계로 이루어진다. 계기는 전체적 형태를 이루는 논리적 계기에 해당하며, 총체적인 형태 가운데 역사적으로 어떤 한 계기가 전체를 지배하면서, 그 시대 형태를 고유하게 만든다.

형태와 계기의 관계를 법철학에서 설명하는 대로 소개하자면, 가족과 사회, 국가는 형태의 발전과정을 이룬다. 국가를 이루는 계기는 법과 도덕이고 국가는 양자의 결합체로서 구성된다. 가족과 사회도 마찬가지로 두 계기의 결합체이지만 가족[국가] 즉 그리스적 인륜적 국가에서는 도덕의 계기가 지배하고, 사회[국가] 즉 법적 상태[로마 황제 시대]에서는 법의 계기가 지배한다.

헤겔의 형태와 계기의 관계는 예술에서 예술 형식과 장르 사이의 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예술 형식은 형태에 해당하고 장르는 계기에 해당한다. 양자의 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도식화하자면 다음과 같은 도식이 만들어질 것이다.

(위의 도식에서 예술 형식은 역사적으로 발전하며, 장르는 예술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수평선은 각 장르의 역사적 발전을 다루고 수직선은 각 예술 형식의 구성 계기를 다룬다. 단순화를 위해 각 예술 형식의 구성 계기와 각 장르의 발전 계기는 일부만 표현했다)

 

3)

헤겔은 예술의 주요 장르를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그것은 곧 건축과 조각, 음악과 미술, 마지막으로 시문학이다. 시문학은 다시 서사시, 서정시, 극시로 구분된다. 이 다섯 가지는 정신이 출현하는 계기에 따라 필연적으로 출현한 것이지만, 헤겔은 이런 다섯 가지 예술 장르 사이에 일종의 종간 예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런 종간 예술은 일정한 장르가 해체되는 시기에 주로 출현한다. 예를 들어 건축이 해체되면서 등장하는 정원술이나, 조각이 해체되면서 등장하는 채색조각, 회화와 시문학이 어우러진 서화와 같은 것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음악이 문학과 결합하면서 전개된 오페라도 여기에 속한다.

이런 종간 장르에 대해 일부의 예술이론가는 천재적 작품으로 찬양하지만 헤겔은 이를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적 정신의 개념에 기초한 차이를 혼란스럽게 함으로써 오히려 예술의 본질적 표현능력을 저하시키는 경향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중간 계술의 문제는 자연에서 등장하는 종간 잡종 예를 들어 양서류라든가 오리너구리와 같은 예에서와 마찬가지다. 종간 잡종은  ‟자연의 탁월성과 자유를 공표하기는커녕 사태 자체에 정초된 본질적 차별성을 견지하지 못하며 이런 본질적 차별성을 외적 조건이나 영향에 의해 위축하게 만드는 자연의 무기력만을 공표한다”[1]고 본다.

헤겔이 종간 예술을 무시하는 것과 무관하게 우리로서는 헤겔이 제시한 종간 예술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을 통해 현대에 등장하는 다양한 예술 장르에 대한 장르론적 분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흔히 종합 예술로 간주되는 영화와 같은 예술 장르를 그런 종간 예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낭만주의 예술이 지닌 경향으로서 리얼리즘적 경향이 영화에 이르러 완전하게 출현했다고 할 수 있을까? 고민스러운 문제다.   


[1] 미학강의 2, 279쪽

헤겔미학산책30- 모더니즘 미학의 선구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0- 모더니즘 미학의 선구자

 

1)

앞에서 낭만주의 예술형식은 필연적으로 리얼리즘적인 형상을 요구한다고 했다. 상징적 예술형식은 추상적 형태가 사용되고 고전적 예술형식에서는 형상은 이상화된다. 하지만 낭만주의 예술형식에서 정신은 자기를 구체적 현실을 통해서 그것도 경험적 실재의 자기 부정적 운동 속에서 표현한다. 그러므로 상징주의나 고전주의는 실제 현실에 대한 관심은 없으며 낭만주의에 와서야 비로소 경험적으로 실재하는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출현한다.

경험적 실재에 대한 관심은 낭만주의 해체기인 근대 부르주아 시대에 이르면, 구체적 현실 자체가 긍정적으로 파악된다. 낭만주의 시대 정신과 그 현실 사이는 무한한 괴리가 존재하는데, 이 시대 사회적 관계가 발전하면 할수록 정신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좁혀지며, 현실은 이제 그 자체로 긍정적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격적인 리얼리즘 예술의 발전한다.

그 결과 네델란드 풍속화에서 보듯이 여관에서 술에 취해 희롱하는 남녀 등이 생동적인 정신을 보여주며 독일 낭만주의 문학에서 보듯이 개인적 주관성 자체가 기이하고 부정적이라도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이제 그 부정성이 아니라 그 자체의 긍정성[Positivitaet]이 흥미의 대상이 된다. 이제 순간적이며 찰나적인 현상조차도 예술가가 주목하는 대상이 된다. 아래는 네델란드 풍속화를 거론하면서 헤겔이 서술한 대상이다. 

 

“금속의 반짝거림, 불빛에 비친 포도의 미광, 희미해져 가는 해와 달의 모습, 웃음, 흘깃 스쳐가는 심정 상태의 표현, 우스꽝스러운 움직임, 자세, 표정-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이러한 것을 잡아내고 그 충만한 생명성을 지속적으로 가시화하는 일”[1]

 

”여기서 우리에게 고정되고 가시화되었던 것은 변화하는 자연의 무상한 표현들, 개울의 흐름, 폭포, 물거품 이는 파도, 유리잔과 접시 등의 우연한 광채를 담은 정물, 아주 특수한 상황에 처한 정신적 현실의 외적 형상, 불빛 아래서 바늘귀를 꿰는 여인, 우연히 행동하는 강도들의 한 장면, 금방 다시 바뀌는 일순의 한 동작, 농부의 웃음과 야유 등이다”[2]

 

2)

예술형식에서 리얼리즘적인 예술과 예술 기법에서 리얼리즘 기법은 구분되어야 한다. 리얼리즘적 예술이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이라 한다면, 리얼리즘적인 기법이란 현실을 모방하는 기술을 말한다. 여기서 모방은 현실의 일부를 예술적 질료 속에 옮겨놓는다(또는 이중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방은 감각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데서 결여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어떤 형상을 예술적 형상으로 만드는 결정적이거나 유일한 기법은 아니다.

우선 상징주의 예술에서나 고전주의 예술에서는 구체적 현실을 형상화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다. 여기서 사용되는 감각적 형상의 일부가 구체적 현실을 모방했다고 하더라도, 그 형상화의 핵심은 모방과는 무관하다.

인도의 춤추는 시바 여신상을 보라. 그 형상은 여인의 모습을 닮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수천의 팔로 춤춘다는 환상적 사실에 있다. 이 사실이 이 형상을 상징적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 또 그리스 아테네 여신상을 보라. 마찬가지로 여인을 닮은 모습이지만 여기서 이 여인을 아테네 여신상으로 만드는 것은 그녀의 얼굴과 신체를 이루는 부분들 사이의 비율이다. 그 비율이 이상적인 비율, 황금 분할의 비율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 형상이 고전적 예술이 된다.[3]

낭만주의나 근대 예술은 앞에서 말했듯이 그 형상화는 리얼리즘적이어야 한다. 즉 감각적 형상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실제 현실을 닮도록 모방하는 기법이 중요해지고 자주 사용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서조차 리얼리즘적 형상화가 반드시 모방의 기법만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쩌면 현실과 인간의 모방이란 상징주의나 고전주의에서처럼 부분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 자체가 부딪혀서 일으키는 현상을 물감이나 소리와 같은 추상적인 물질이나 문학의 재료인 표상을 가지고 그대로 모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3)

헤겔은 이런 점에서 네델란드 풍속화의 기법에 찬탄을 금하지 못하는데, 여기서 찰나적이며 변화무쌍한 현상이 “충실하고 참되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헤겔은 이런 충실한 참된 묘사가 모방에 의해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헤겔은 여기서 ‘주관적 재창조’라는 개념을 끌어들인다.

 

“정신이 사유와 개념 파악의 활동을 통해 세계를 표상과 사상들로 재생산하듯, 이제는 외면성을 대상 자체와 무관하게 색채와 조명이라는 감각적 요소 속에서 주관적으로 재창조한다.”[4]

 

이런 주관적 재창조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처럼 언어는 사태에 대한 그림(즉 모방)이라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이어지는 헤겔의 설명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음악에서 개개의 음향이 독립적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다른 음향과의 관계 속에서 그 대립, 조화, 이행 그리고 융합 속에서 효과를 야기한다면, 여기서는 색채가 그런 것이다. 금처럼 광채가 나거나 불빛을 받은 금식 직물처럼 반짝이는 색채의 가상을 우리가 가까이 관찰한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희거나 노란 획, 점, 채색된 평면들 따위뿐이다. 개개의 색채는 그것이 야기하는 이러한 광채를 가지지 않는다. 조합이 비로소 이러한 반짝임과 빛남을 만든다.”

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색채 대비를 통한 효과가 중요하다

즉 마치 음악이 추상적인 음의 대립과 조화를 통해 슬픔과 기쁨을 생산하듯이 미술에서도 추상적인 색의 대립과 조화를 통해 반짝임과 빛남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런 음악적 기법을 다시 사유의 활동과 비교된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설명하듯이 사유는 개념을 체계화함으로써 대상의 진리에 도달한다. 물론 단숨에 진리에 도달하기 않고 처음에 주관적인 개념 체계가 대상과 모순에 부딪혀 재구성하면서 마침내 대상의 진리에 도달한다. 이때 사유는 객관적 개념 체계가 된다. 이런 개념의 체계화는 곧 음악에서 음들의 대립과 조화와 같으므로 헤겔은 사유가 대상을 재생산하듯이 예술은 감각적 형상을 주관적으로 재창조한다고 말한 것이다.   

 

4)

헤겔이 말하는 이런 음악적 기법은 20세기 초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주목했던 기법이었다. 음악이 지닌 이런 기법은 현대 예술가를 통해 회화나 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퍼져 나갔으니, 간딘스키의 추상화, 피카소의 몽타주, 아상블라주 등이 모두 이런 기법의 발전이었다.

이런 기법은 다양한 변형을 만들어냈다. 예술은 이런 음악적 기법을 통해 개별 예술 장르를 넘어섰으니 회화는 언어, 회화와 음악, 회화와 조각 건축이 뒤엉켜서 통합적인 예술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미학적으로 본다면 헤겔이 모더니즘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1] 미학강의 2, 242쪽

[2] 미학강의 2, 242쪽

[3] 자주 인도의 조각상은 비사실적이고 반면 그리스 조각상은 모방적이라고 말해진다. 하지만 시바의 여신상과 아테네 여신상을 비교해 볼 때, 과연 어느 것이 더 모방적인가를 판단하기 어렵다. 차라리 시바 여신상이 여인의 풍만한 모습을 더 사실적으로 모방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도의 시바상과 그리스의 아테네 여신상의 차이는 사실성이나 모방성의 정도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헤겔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상징적 표현과 고전적 표현의 차이 즉 천 개의 팔과 이상적 비율의 차이에 있다고 하겠다.

[4] 미학강의 2, 243쪽

헤겔미학산책29-예술 장르론(2) 예술가의 솜씨[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29-예술 장르론(2) 예술가의 솜씨

 

1)

앞에서 정신과 형상 그리고 질료라는 예술의 삼각형에서, 질료가 그 고유한 속성에 따라 예술 장르를 규정한다고 했다. 그런데 질료의 고유한 속성만이 예술 장르의 규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못지 않게 질료를 다루는 예술가의 장인적 솜씨도 중요하다.

물론 장인적 솜씨가 질료의 고유한 속성이 지니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어렵다. 장인적 솜씨는 주로 개별 예술 장르의 한계 내에서 기법의 발전을 좌우하기는 하지만, 그 솜씨가 극대화되는 경우 장르의 한계를 넘어서기도 한다.

장르를 뛰어넘는 장인적 솜씨는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개의 경우 장인의 솜씨는 개별 예술의 발전을 결정하게 된다. 이점과 연관하여 헤겔은 개별적 예술의 발전단계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단계로 규정한다. 헤겔은 주로 조각을 발전과정을 모델로 이런 단계를 설정하는데, 조각이 아닌 다른 예술의 경우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발전 단계라고 생각된다.

 

2)

그 가운데 첫 번째 단계는 거칠고 조야한 상태에 머물러, 아직 예술 이전의 단계에 머무르는 수준이다. 예술가의 솜씨가 서투른 단계인데, 헤겔은 이런 경우 “종종 부수적인 것을 상세하게 다루고 겉치레와 같은 주변적인 것에 대해 세세한 작업에 공을 들이는 인위적이며 난삽한 것으로 나타난다”[1]고 한다.

 

“외적인 것이 복잡하고 잡다할수록, 본래 표현해야 것은 그만큼 미미하며, 곧 정신을 진정으로 자유롭고 생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형식이나 운동에서 볼 때 그만큼 빈약하게 남는다.”[2]

 

이런 서투름은 다른 종류의 서투름과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는 예술적 표현 형식 자체에서 나타나는 서투름이다. 예를 들어 상징적 예술 형식은 고전적 예술 형식에 비해 볼 때 경직되고 비생동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자주 상징적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서투름 때문이라고 설명되기도 하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경직성은 그 표현 형식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그 시대의 정신에 의해 규정되는 표현 형식이다.

또 서투름은 자주 고도로 능숙한 예술가에게서 나타나는 아이와 같은 고졸(古拙)성과 혼동된다. 추사 김정희 작품에 나타나는 고절성은 널리 알려진 예가 될 것이다. 헤겔은 이미 그런 고절성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단순한 아름다움으로서 단순성은 즉 이상적인 비례는 다각적인 매개 뒤에나 도달할 수 있는 결과다. … 모든 준비작업과 예비작업이 감추어지고 자유로운 아름다움이 전적으로 방해 받음이 없이 마치 단번의 주조로 산출된 것처럼 보인다.”[3]

 

3)

거칠고 조야한 단계를 넘어서 질료를 다루는 예술가의 솜씨가 어느 정도 발전하게 되면, 예술적 단계에 진입한다. 그 첫 번째 단계에서 예술가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신을 예술적으로 형상화면서 정신적 내용을 우선적으로 표현하려 한다. 헤겔은 이처럼 “사태의 실체적 표현과 만족감을 위해 전적으로 빠져드는” 경우, 예술적 형상은 엄격함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그리스 초기의 조각 신상에서 나타나는 엄격함이다.

엄격함은 세부적인 또는 형식적인 손질을 생략하고 정신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려 하기 때문인데, 그 결과 예술 작품의 형상이 이상화된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엄격함을 ‘고요함과 단순성’으로 규정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아름답고 고요한 위대함 속에서 최고의 생동성을 가지니, 그 속에는 무의미하거나 표현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활동적이고 효과적이니, 자유로운 삶의 흥분과 맥박을 보여준다.”[4]

 

이런 예술에서 정신적 내용은 형상의 세부적 형식적 아름다움에 대해 일견 무차별하게 보이니, 마치 예술적 현존[형상]은 “사태[정신]가 베푸는 호의”이며, “사태는 독자적으로는 이런 현존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우리[독자]를 위해 현존으로서 자기를 쏟아 붓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형상은 정신에 대해 잉여일 뿐, 헤겔은 이런 점에서 예술 형상 속에서 들어 있는 ‘내면 그 자체의 고요’는 ‘아름다운 냉담함’, ‘무관심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정신적 내용은 외적 형상의 개별적 세부나 순간적인 운동 속에 사로잡히지 않고, ‘걱정 없이[sorglos]’ ‘자족적[selbststaendig]’으로 머물러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예술은 ‘명랑하며’ ‘생기 넘치는 우미함’, ‘우미[5]의 숨결’을 보여준다.

 

“각 지절은 독자적으로 현상하며, 자신의 고유한 실존을 즐기며 그럼에도 동시에 스스로 겸양하며 오로지 전체의 계기로서 존재한다. 오로지 이것이 개성과 성격의 깊이와 규정성에 넘치는 우미함을 부여한다.” [6]

미의 세 여신-폼페이 유적

 

4)

예술가의 장인적 솜씨가 더 발전하게 되면, 오히려 예술은 퇴보하게 된다. 예술가는 세분적이거나 형식적인 아름다움에 치중하게 되면서 정신적 내용을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술을 감상하는 자의 만족감에 우선을 두게 된다.

 

“사람들은 특수성들이 장식, 의도적 삽화로서 추가, 삽입되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태에 대해 우연성들로 머물며, 또한 그 본질적 규정을 관조자나 독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지니,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그것들은 작품을 감상하는 주관성에 아첨한다.”[7]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작품이 미치는 효용성이 강조되면서, “고요하고 자족적이며 명랑하게 표현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며” “관조자를 자신에게 오도록 부르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이제 만족감이 아닌 그 반대되는 것도 관심거리가 된다. 즉 “불쾌한 것, 긴장된 것, 거대한 것, 과격한 대비”를 통해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8]

전체적으로 헤겔은 예술작품의 자족성과 효과, 사태 자체와 특수성. “내면의 순수성과 구경꾼에 대한 호소” 사이의 균형을 요구한다.

 

“만일 엄격한 양식의 예술작품이 관조자에게 말을 건넬 뜻이 없이 완전히 자신 안에만 갇혀 있다면 그것은 차갑게 된다. 만일 그것이 지나치게 자신을 벗어나 관조자를 향한다면 그것은 기쁨을 주되 견실함이 없거나, 아니면 그 기쁨은 내용의 견실함, 그 단순한 이해 및 표현에 의한 것이 아니다.”[9]

 

효용성이 강조된 작품에서는 예술가의 솜씨와 감상자의 효과만이 문제가 되고, 예술작품의 바탕이 되는 사태나 정신적 내용은 무의미하게 된다. 여기서 예술가와 감상자 사이에 주관적 공동체가 형성되니, 감상자는 예술작품의 심판자가 되어, 자신의 허영심이 충족될 뿐이다.

반면 엄격하여 사태만 강조된 경우, 작품은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없으니, 작가가 “예술 작품에 깊이 있는 의미를 집어넣더라도”, 그것을 “자유롭게 경쾌하고 밝게 표출하지 못하니”, 이는 예술가의 “단순한 우울증”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1] 미학강의 2, 264쪽

[2] 미학강의 2, 264쪽

[3] 미학강의 2, 264쪽

[4] 미학강의 2, 266쪽

[5] 헤겔은 여기서 ‘Gratia[독어: Grazie이태리어]’와 ‘Zierlichkeit[독일어]’를 구분한다. 두 단어는 우리 말로 ‘우아’로 번역할 수 있어서 혼란을 준다. Gratia(일상적으로 사용되면 감사라는 의미도 지닌다)는 미의 여신 Charites의 로마적 표현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는 “만족을 주려는 각종 시도와는 철저히 자유로운 것”이며 반면 Zierlich는 만족을 주는 것이며 ‘애교적 즉 귀엽고,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에 가깝다. 그 차이 때문에 Gratia는 ‘우미’로 번역되고, Zierlichkeit는 ‘우아’로 번역되었다. 참고로 Charites는 그리스 민족 이주 전 그리스 반도 거주민들이 지닌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설명되며, 강이나 샘물과 연관된 풍요로운 정령이라는 뜻을 지닌다. 참고로 미의 여신은 그리스 신화에 의해 세 여신으로 분화되는데, 환희를 의미하는 에우프로쉬네[Euphrosyne]와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탈리아[Talia], 광휘를 의미하는 아글라이아[Aglaia]이며, 세 여신의 모습은 미술사에서 자주 형상화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보티첼리의 미의 여신이다.

[6] 미학강의 2, 267쪽

[7] 미학강의 2, 267-268쪽

[8] 미학강의 2, 269쪽

[9] 미학강의 2, 269쪽

헤겔미학산책 28- 예술 장르론(1) 질료의 속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 28- 예술 장르론(1) 질료의 속성

 

1)

헤겔의 미학 강의는 미학(미학강의 1권)과 예술사(미학강의 2권) 그리고 장르론(미학강의 3권)를 포괄하는 저서다. 헤겔 미학강의에서 가장 이채로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장르론을 다룬 3권일 것이다.

미학에 관한 저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술사에 관련된 책도 여럿 있다. 하지만 예술 장르론에 관한 저서는 필자가 알기로 헤겔의 미학강의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 같다. 물론 개별 예술에 관한 일반론은 많다. 문학과 음악, 또는 시나 희극에 관한 개론 말이다. 하지만 개별 예술들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포괄적 장르론은 없다. 아마도 유일한 게 있다면 바로 헤겔의 미학강의이다.

솔직히 그런 장르론이 가능할까도 극히 의심스럽다. 개별 예술에 대해서조차 아는 게 힘든 데 모든 예술장를 다루다니, 좀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실정에 비추어 본다면 모든 예술 장르를 아우르는 일반적 장르론을 전개한 헤겔의 능력에 경탄이 아니라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그의 장르론이 한계는 얼핏 보기만 해도 쉽게 드러난다. 그가 미학강의 3권 장르론(헤겔은 ‘개별 예술의 체계’라는 이름으로 장르를 다룬다)에서 다룬 것은 건축, 조각, 회화, 음악, 문학(서사시, 서정시, 극시)뿐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예술 장르인 영화는 헤겔 당시에는 없었으니 다루지 않았다고 비난하기는 어렵지만, 고대부터 현재까지 예술의 한 장르로서 빼놓을 수 없던 무용은 왜 빠진 걸까? 농담이지만 한국의 많은 대학에서 그렇듯이 무용은 체육에 속하는 걸로 간주하는 걸까?

문학 아래에도 오늘날 대표적인 문학 장르인 소설이 빠졌다. 헤겔 당시 이미 소설이 있었고, 헤겔도 낭만주의 예술 형식이 해체되는 마지막 시기에서 ‘소설 같은 것[romanhafte]’을 조금 다루기는 하지만 독립된 장르로서는 다루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 내용으로 들어가면 더욱 많은 반발이 등장할 것이다. 다른 개별 예술론은 말할 것도 없고 처음 등장하는 건축을 보자. 헤겔은 건축을 돌과 같은 거대 물체[Mass]를 재료로 한다고 하면서, 그로부터 건축은 간접적으로 정신을 암시하는 상징적 예술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이런 결론은 건축의 외면적 형태를 통해 정신을 표현하려 하는 현대의 많은 건축가들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주장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지중해를 닮은 수평 창문의 건축가 르꼬르뷔지에와 같은 작가나 환영이 눈앞에 날아다니는 듯한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을 만든 프랑크 게리와 같은 작가에게 한 번 물어 보라.

2)

한편으로 경악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개별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예술과 특성을 비교하고 서로 어떤 장단점을 갖는지 이해하는 것은 불가결한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요즈음 미술관 전시회에 가 보면, 미술은 전통적인 미술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미술이 아니라 조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거나 미술이 아니라 영화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차라리 조각이나 영화이라 하지, 왜 저걸 꼭 미술이라 한 것일까? 혼합 장르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미술이 조각이나 영화를 넘보는 것은 미술에 어떤 한계가 있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술에 어떤 한계가 있고 조각이나 영화가 그것을 어떻게 도움을 주고 거꾸로 방해하는지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 장르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져야 하는데, 과연 누가 예술의 전체 장르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헤겔이 모든 예술에 걸친 포괄적인 장르론을 전개했다는 것 자체가 경탄에 경탄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엉성하기에 헤겔의 장르론을 절대화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장차 장르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데 그 출발점이나 또는 어느 정도 시금석을 제공해 줄 수는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필자만 느끼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의 장르론은 예술론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장르론은 그 후 전개되는 많은 장르론의 긍정적이거나 비판적인 초석이 되어 왔고 새로운 장르론을 전개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3)

필자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두 철학자의 작업이 당장 떠오른다. 그 하나는 벤야민의 작업이다.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라는 저서(박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되었으나 승인 받지 못했던 작품으로 그 후 많은 박사 학위 논문 심사에서 논문 제출자를 변호하는 구실(?)이 되었다)에서 그 동안 대표적인 비극 이론으로 간주된 니체 비극론을 비판했다. 그는 고전 비극[Tragoedie]을 니체와 달리 역사적으로 해석했는데, 이때 기초가 된 것이 바로 헤겔의 장르론 가운데 극시에 관한 분석에 속하는 고전 비극 개념이다. 그는 이어서 17세기 바로크 시대 등장한 비극을 ‘비애극[TrauerSpiel]으로 명명하면서 그 특징을 역시 헤겔의 근대 비극의 개념에 기초하여 전개했다.

또 하나가 루카치의 소설론이다. 루카치는 <소설이론>에서 헤겔에게서 결여된 소설이라는 장르론을 전개했다. 헤겔은 소설론을 독자적으로 전개하지 않았으며 근대의 서사시라는 개념이나 또는 소설적인 것[Romannhafte]이라는 개념으로 간단하게 언급하면서 낭만주의 예술 형식의 해체기에(시기적으로는 근대 부르주아 세계의 등장 이후를 다룬다) 등장하는 예술로 다루었다.

헤겔에서 소설적인 것은 개인적인 주관을 포함한 개별적인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산만한 예술에 그친다. 헤겔은 소설이 다룬 개별적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생동적인 정신의 총체성이 이 속에 표현된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개별적 현실 속에 정신의 총체성이 내재적으로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1]

루카치 역시 소설은 개별적인 현실을 다루므로, 유기적 형식이 결여되어 산만하게 전개된다고 본다는 점은 헤겔과 동일하다. 다만 루카치는 이를 평가하는 지점에서 헤겔과 달리 한다. 루카치는 소설이 다루는 개별적 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왜냐하면 이 현실은 총체성이 상실된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분열을 반영하고 상실된 총체성을 찾으려 하는 동경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평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형식을 개별적 현실, 산만한 형식으로 보는 관점에서 루카치의 소설이론에는 헤겔 미학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여하튼 한편으로 경탄과 다른 한편으로 경악을 불러 일으키는 헤겔의 장르론을 다루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렵다. 적어도 헤겔이 다룬 개별 예술에 대해 상당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런 능력도 없으면서 그저 헤겔의 장르론을 소개한다는 일념으로 지금부터 미학강의 3권에서 다루어진 헤겔의 장르론을 설명하려 한다. 그의 이론이 옳은가 그른가는 독자의 몫에 맡기기로 하자.

4)

철학이나 종교와 달리 예술은 이념을 감각적 형상을 통해 드러낸다. 구체적인 감각적 형상과 그 시대의 정신 즉 이념 사이의 관계 방식이 예술 형식을 규정한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헤겔은 세 가지 기호적 관계 즉 상징, 현상, 가상을 소개하며, 이에 따라 역사적으로 세 가지 예술 형식을 구분했으니 즉 상징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예술 형식이다.

헤겔에서 예술적 형식은 예술가 자신이 주관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각 시대의 예술적 이념 속에 이미 자기를 감각적 형상으로 표현하는 고유한 방식이 내재하고 있으니, 예술가는 이런 시대의 예술적 표현 방식에 무의식적으로 종속한다.  

그렇다면 예술의 장르[Gattung] 즉 개별 예술을 개별 예술로 만드는 그 종적 본질[Gattung]은 무엇을 기초로 규정되는가? 이 종적 본질의 토대는 개별 예술 사이에 공통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각 개별 예술에 고유한 것이어야 할 것인데, 과연 어디서 그런 토대를 찾을 수 있을까?

헤겔은 여기서 우선 개별 예술이 감각과 관련된다는 것에 착안하여 감각의 다양한 종류에서 개별 예술의 차이를 발견하려는 시도를 살펴본다. 이런 시도는 감각 방식의 종류에 따라서 예술의 차이가 출현한다고 주장한다.

흔히 인간에게 오감이 존재한다고 보는데, 그 가운데 후각, 미각, 촉각과 관련해서 예술은 성립할 수 없다. 후각, 미각, 촉각은 감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의 물질적 질료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기초한 요리, 향수 등은 예술이 될 수 없다. 반면 시각과 청각은 대상을 거리를 두고 파악하는 이론적 감각이므로, 여기서 예술이 출현한다. 시각은 회화와 조각 그리고 청각은 음악이나 문학과 관련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론은 한계가 있다. 너무나도 단순한 구분이기 때문이다. 시각과 관련해서 볼 때 건축과 조각 그리고 회화는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건축과 조각의 차이가 규정될 수 없다. 더구나 음악과 문학은 소리와 연관되지만, 음악과 문학을 같은 예술 장르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개별 예술의 차이는 감각의 종류에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이런 감각적 질료의 차이를 통해 예술을 분류하는  예술론에 대해 비판적이다.

5)

그렇다면, 개별 예술 장르가 구분되는 토대는 무엇일까? 헤겔이 여기서 제시하는 토대는 예술의 매체[Mittel] 곧 질료이다. 예술은 정신을 감각적 형상으로 표현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질료[Materie]가 있다. 이 질료는 정신의 감각적 형상을 산출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여기서 감각적 형상과 질료를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회화에서 다빈치의 모나리자 형상을 보자. 이 형상은 실제의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한다. 이런 모사에서 사용된 질료는 곧 색채이니, 이 색체는 삼원색이든 무지개 색이든 이미 추상화된 질료이다. 정신과 형상, 질료는 예술의 삼각형을 이룬다.

정신과 형상, 질료의 이런 차이에 주목할 때, 헤겔이 장르를 구별하는 토대를 질료에서 찾았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지닌다. 단순한 질료 자체가 장르를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질료가 일정한 감각적 형상을 표현할 때, 질료에는 고유한 속성이 있으므로, 그런 형상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형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질료의 속성이 곧 장르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만일 질료가 다르더라도, 그 특성이 유사하여 감각적 형상화에서 차이가 없다면, 새로운 장르를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음악을 보자. 현대 들어와서 전자 악기가 등장하여 그 이전 물체적 악기에서 나는 소리와 구분되는 질료를 제공하지만, 음파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고 그 음악적 형상화의 방식은 유사하니, 전자 악기가 새로운 장르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돌이나 목재와 같은 질료를 보자. 이런 질료는 일정한 덩어리[mass]를 지니고 있으니 일정한 양적 연장[延長]성을 지닌다. 또한 이런 질료는 물질[material]로서 특성 즉 질적 특성도 가진다. 덩어리와 물질, 연장과 질은 동일하게 무게나 크기, 단단함 등의 속성을 지칭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이용되는 속성이다. 이 두 가지는 마치 빈 공간과 그것을 채우는 공기처럼 또는 존재와 무처럼 대립하는 것이다. 덩어리가 부정적인 것이라면 물질은 긍정적인 것이다.

긍정적인 물질은 조각적 형상화를 가능하게 하니 조각은 물질의 예술이다. 반면 부정적인 덩어리는 건축의 형상화를 가능하게 한다. 건축은 덩어리의 예술이다. 감각적 형상화와 관련되어 같은 질료의 다른 특성이 이용되고 있으니, 장르의 차이는 질료의 일반적 특성이 아니라 감각적 형상화와 관련된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6)

형상을 표현하는 수단인 질료[Materie]가 반드시 물질적인 것[Matter]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물질적인 질료인 건축 재료조차 자연 그대로의 물질적인 것[Matter]이 아니라 이미 상당히 추상화된 덩어리[Mass]다. 그것은 나무이거나 바위가 아니라 깎은 나무 토막이거나 잘라내 다듬어진 돌덩이다.

미술이나 음악에 이르면, 빛이나 소리가 질료로 사용된다. 이때 헤겔은 빛이나 소리를 물질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관념화된 물질[Matter]이라고 규정한다. 빛은 무게를 잃어버린 것이라는 점에서 관념적 물질(또는 물질의 영혼)이며, 소리는 더 이상 공간성을 지니지 않고 시간성 속에서 흘러간다는 점에서 자기 부정적인 물질이라고 규정된다.

회화나 음악의 질료가 관념성을 지니더라도 여전히 물질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문학의 질료인 표상 즉 이미지나 감각적인 관념의 경우 추상적인 관념과 구분되어 물질성에 가까운 속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이미 물질성의 단계를 벗어난 관념의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다.


[1] 즉 그전에는 집안의 집기나 기르는 가축이 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그것 자체가 어떤 긍정적 가치를 지닌다. 그 이전에는 부정적으로만 묘사되었던 탐욕과 질투, 열정 등의 감정은 이제 그 자체로 흥미로운 대상이 되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59)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9)

 

B.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 제5권 끝 480a)

(2) 형상적 앎과 믿음

 

[476e-480a]

*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전자의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아는 것γιγνώσκειν이 아니고 그저 믿는 것δοξάζειν일 뿐”이라고 우리가 말했을 때 그 사람이 우리의 말이 참τὸ ἀληθές이 아니라고 대드는 경우 어떻게 그 사람을 설득할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μὴ ὄν은 누구도 알 수는 없으므로 그 사람 역시 ‘무엇인가를 아는γιγνώσκει τὶ 사람’이라는 동의를 받은 다음, 그 사람에게 그가 알고 있는 그 뭔가가 ‘있는 것’ὄν인지 ‘있지 않은 것’μὴ ὄν인지를 묻는 방식으로 ‘그가 아는 그 뭔가’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자 한다.(477a)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아래와 같이 ‘그가 아는 그 뭔가’가 다름 아니라 ‘있는 것’ὄν도 ‘있지 않은 것’μὴ ὄν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것’임을 밝힌 후 그 사람의 사고 대상이 그것인 한 그의 사고는 믿음δόξα일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1) ‘완전하게 있는 것’τὸ παντελῶς ὂν은 ‘완전하게 알 수 있지만’παντελῶς γνωστόν ‘어떻게도 있지 않은 것’μὴ ὂν μηδαμῇ 은 ‘어떤 방법으로도 알 수 없다’πάντῃ ἄγνωστον.

2) 그런데 ‘어떤 것이 있기도 하고 있지 않기도 한 상태’τι οὕτως ἔχει ὡς εἶναί τε καὶ μὴ εἶναι라면, 그것은 ‘순수하게 있는 것’εἰλικρινῶς ὄντος과 ‘어떻게도 있지 않은 것’μηδαμῇ ὄντος ‘사이’μεταξὺ에 놓여 있는 것이다.(477a)

3) ‘앎’γνῶσις은 ‘있는 것’을 대상으로ἐπ᾽ 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무지’ἀγνωσία는 ‘있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의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앎ἐπιστήμη과 무지ἀγνοία 사이의 것이다. 그것이 곧 ‘믿음’δόξα이며 그것은 앎과 다른 ‘능력’δύναμις이다. 요컨대 믿음δόξα과 앎ἐπιστήμη은 각각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한다. (477a-b)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앎과 무지와 믿음을 그것들 각각이 갖는 대상을 기준으로 구분하고 앎과 믿음 모두가 왜 능력이고 그 능력이 어떻게 별개의 대상에 관계하는지를 아래와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1) 능력이란 있는 것들의 한 부류γένος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다른 모든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2) 능력들은 ‘같은 것을 대상으로 같은 일을 해내는 것’을 같은 능력이라고 부르고 다른 것을 대상으로 다른 일을 해내는 것을 다른 능력이라고 부른다. 즉 능력은 대상으로 하는 것과 ‘해내는 일’ὃ ἀπεργάζεται이 능력마다 각기 다르다. 예를 들어 시각ὄψις과 청각ἀκοή은 모두 능력에 속하지만, 시각은 색깔χροάζω이나 모양σχῆμα이나 그 비슷한 것들을 구별하는 능력이고 청각은 그와 달리 들리는 것들을 구별하는 능력이다.(477c)

3) 앎ἐπιστήμη은 일종의 능력으로서 모든 능력 중 가장 강력한ἐρρωμενεστάτην 것이다. 믿음도 능력이다. 그러나 앎은 오류 불가능한 것τό ἀναμάρτητον 이고 믿음은 오류 불가능하지 않은 것τό μὴ ἀναμάρτητον이다. (477d)

4) 앎과 믿음 각각은 본디 서로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어서, 서로 다른 것ἕτερον을 대상으로 한다. 앎은 본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믿음은 믿는 일을 할 수 있고 믿음이 믿는 것은 앎이 아는 것과 다른 것이다.(477e-478a) 요컨대 앎과 믿음이 둘 다 능력이되 서로 다른 능력인 한, 앎의 대상과 믿음의 대상이 같은 것일 수 없다.(478b)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앎과 믿음이 별개의 대상에 관계하는 별개의 능력임을 분명히 한 후에 위의 논의들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그 앎의 대상이 ‘있는 것’임에 비교하여 믿음의 대상이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 사이에 있는 것이며 그에 따라 믿음은 앎도 아니고 무지도 아닌 중간의 것임을 아래와 같이 다시 한번 재확인한다.

1) 앎의 대상γνωστόν은 있는 것τὸ ὂν이고 믿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해서 믿음을 가지는 한, 믿음의 대상δοξαστὸν은 ‘어떤 하나의 것ἕν τι’이다. 그런데 ‘어떤 하나의 것’은 ‘어떤 것도 아닌 것’μηδὲν 즉 ‘있지 않은 것’τὸ μὴ ὄν이 아니다.

2) ‘있지 않은 것’에는 믿음이 아니라 ‘무지’ἄγνοια가 할당되고 ‘있는 것’에는 ‘앎’γνῶσις이 할당된다.ἀποδίδωμι(478c) 그런데 믿음은 ‘있는 것’을 믿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을 믿는 것도 아니므로 믿음은 무지도 앎도 아니다.

3) 그것은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들 바깥, 즉 명확함σαφήνεια에서 앎을 넘어서거나 불명확함ἀσαφείᾳ에서 무지를 넘어서는ὑπερβαίνουσα 그 양쪽 어느 것도 아니다. 믿음은 앎보다는 더 어둡고σκοτωδέστερον 무지보다는 더 밝은 φανότερον 것 즉 그 둘 사이μεταξὺ에 놓여 있는 것이다.(478c)

4) 믿음이 앎도 무지도 아닌, 그 사이의 것이듯이 믿음의 대상 또한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있지 않은 그런 종류의 것τι οἷον ἅμα ὄν τε καὶ μὴ ὄν으로서 ‘순수하게 있는 것’과 ‘전적으로 있지 않은 것’ 사이의 것이다.(478d) 양 끝에 있는 것들에게는 양 끝에 있는 것들을 할당하고, 사이에 있는 것들에는 사이에 있는 것들을 할당해야 한다.(478e)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언급한 후 처음에 제기되었던 물음으로 돌아가 결론적으로 ‘진리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떤 차이를 갖는지 그리고 왜 진리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진정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φιλόσοφος 즉 철학자인지를 아래와 같이 밝힌다.

1)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움 자체,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ἀεὶ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 상태로 있는 아름다움 자체의 형상ἰδέα이란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 많은 정의로운 것들을 믿는다. 그러나 이들이 믿는 아름다운 것들은 어느 면에서 아름다운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어느 면에서 추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 필연적이다.(479a) 큰 것들과 작은 것들, 가벼운 것들과 무거운 것들이라고 우리가 이야기할 것들은 모두 항상 반대적인 것ἢ τἀναντία으로 불리면서 양쪽 모두에 관계한다.(479b)

2) 이 많은 것들(ta polla) 각각은 잔치 자리ἑστίασις에서 이야기하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애매해서, 이것 중 어느 것도 확실하게 있다거나 있지 않다고, 또 둘 다이거나 둘 다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이것들을 놓아둘 자리는 있음과 있지 않음의 중간이다. 이것들은 더 있지 않음과 관련해서 있지 않은 것보다 더 어두운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며, 더 있음과 관련해서 있는 것보다 더 밝은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479c) 요컨대 아름다움이나 그 밖의 것들에 대해 많은 사람이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것들’πολλὰ νόμιμα은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다κυλινδεῖται. 그것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고 중간에서 떠도는 것으로서 중간의 능력으로 포착되는 것이다.(479d)

3)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구경하면서 아름다움 자체는 보지도 못하고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그런 사람들은, 온갖 것들을 믿으면서δοξάζειν 그들이 믿는 것들 중 어떤 것도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각각 그 자체의 것들’이며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ἀεὶ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ς ὄντα 것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한다.γιγνώσκειν 이들은 앎이 대상으로 하는 것들을 반기고 사랑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믿음이 대상으로 하는 것을 반기고 사랑하며 아름다운 소리나 색깔이나 그런 것들을 사랑하고 구경하지만 아름다움 자체를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지는 않는다.(479e-480a)

4) 그러므로 각각의 있는 것 자체αὐτὸ ἕκαστον τὸ ὂν를 반기는ἀσπαζομένους 사람들은 믿음을 사랑하는 사람φιλόδοξος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φιλόσοφος라고 불러야 한다.(48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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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논의에 따라 철학자와 감각으로 구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차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 앞의 강해에서 살폈듯이 철학자가 사랑하는 진리는 곧 형상(形相)에 대한 앎이다. 요컨대 진정한 앎의 대상은 형상이고 형상은 곧 ‘있는 것’, ‘(완전하게) 순수하게 있는 것’, ‘완전하게 알 수 있는 것’, ‘오류 불가능한 것’,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감각으로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고 상태는 진리로서 앎(epistēmē)이 아니라 ‘믿음’에 불과하다. 사실 믿음의 그리스 원어 doxa는 기본적으로 ‘(옳건 그르건) 일상인들이 수행하는 모든 생각과 의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텍스트 곳곳에서 doxa를 존재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인식 차원에서 진정한 앎과 철저히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 말은 종종 ‘억견’이나 ‘상상’ 등의 말로 옮겨지기도 한다. 플라톤이 사용하고 있는 앎과 믿음이라는 말의 이러한 용례만 보더라도 철학사에서 왜 그를 두고 이른바 예지계와 현상계를 철저히 구분하는 두 세계 이론 즉 이원론적 세계관의 선구라고 평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선 강해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이 그와 같은 세계관을 내 세운 근본적인 동기가 현실 세계의 다(多)와 운동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현실 구제론에 있음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말들의 용례와 세계관에 대한 이해 또한 근본적으로 그에 상응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보다 더 바람직하고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 다시 말해 플라톤의 세계관에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주목해야 할 핵심은 예지계와 현상계, 앎과 믿음을 구분했다는 것 이전에 왜 플라톤은 그 예지계를 구성하는 형상들을 하나가 아닌 여럿으로 상정했을까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도 누차 언급했듯이 엘레아주의자들에 의해 부정된 다의 세계로서 자연세계와 현실 세계의 존재성을 철학적으로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형상들의 존재는 그것의 모상(模像)으로서 다의 세계의 존재성을 뒷받침 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변화무쌍한 다의 세계의 운동성까지 해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현실 세계의 다의 운동성을 해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물질적 운동성도 부동의 형상과 더불어 우주 발생의 시원적 원인들의 하나로 상정하게 된 것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의 배경에는 이처럼 다의 세계이자 운동하는 세계로서 자연 및 현실 세계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동기가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다와 운동을 자연세계의 시원적 토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리스의 전통적 세계관을 일정 부분 계승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세계관은 종축에서 보면 위와 아래 예지계와 현상계를 가르는 이원론이지만 횡축에서 보면 마치 그리스의 신화가 그러하듯이 여럿들이 상호 공존하고 있는 다원론적 세계관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세계관을 두고 이원론인가 다원론인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플라톤의 가장 최종적이고 원숙한 세계관을 표방하고 있는 <티마이오스>를 보면 우주 생성의 세 가지 근본 원인(aitia)들로서 형상인 원상(paradeigma)과 수용자이자 보조원인(synaitia)인 질료적 공간(chora), 그리고 제작자 데미우르고스(Demiourgos)가 제시되고 있는데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 점에 주목하여 플라톤의 세계관을 3원론으로 규정짓기도 한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플라톤에게서 ‘좋음의 이데아’가 최상이자 유일의 유적 형상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주의자나 교부철학자들은 플라톤의 철학을 아예 일원론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 그런데 플라톤의 현실구제론이 단순히 자연 세계의 존재성과 운동성만 해명하는 것이라면 원자론이 이룩한 철학적 의의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원자론은 원자들과 그것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으로서 허공의 존재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존재성과 운동성을 함께 해명하였지만, 영원히 운동하면서도 조화와 질서라는 합목적적 가치를 함께 보전하고 있는 그리스적 우주, 즉 코스모스를 온전히 뒷받침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형상계와 운동하는 현상계를 따로 구분하되 그 현상계가 형상계와 완전히 분리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이른바 분유(分有, metechein)와 모방의 방식으로 밀접하게 상호 연관된 것으로 파악한다. 즉 물질적 현상계는 형상들의 세계인 예지계의 모상으로서 예지계가 지니는 존재성을 일정 부분 분유함으로써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모방의 방식으로나마 조화와 질서를 갖춘 코스모스의 한 축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현상계는 형상계와 비교하여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면서 존재성이나 앎의 근거가 크게 부족한 세계이지만,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형상의 분유치로서 일정한 존재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현상계의 물질적 운동성에 역행하는 영혼의 설득(peithos)(<티마이오스> 48a, c, 51e, 70b)을 받아들여 최대한 형상 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토대 즉 형상과 닮을 가능성도 함께 갖춘 세계인 것이다.

* 이곳 논의 부분에서 플라톤이 믿음의 대상을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것’,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것들’, ‘항상 반대적인 것으로 불리면서 양쪽 모두에 관계하는 것’,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는 것’ 등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위와 같은 근본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이른바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존재도 무도 아닌 제3의 것’으로서 물질적 타자성(heteron)에 의해 언제나 생성 변화하는 속성을 가진 ‘무한정자(apeiron)’인 것이다. 그러나 앞서도 여러 번 강조했듯이 플라톤에게 현상계로서 현실은 극단적 일원론자들에 의해 백안시될 수 없는, 그 자체로 수많은 여러 것들이 다양한 측면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공존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현상계의 구제를 위해 바로 그러한 무한정자에 분유의 형식으로 존재성도 함께 부여함으로써 현실세계가 자기동일성의 차원까지 상승할 수 있는 존재론적 근거를 함께 구축하기에 이른 것이다. 요컨대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엘레아주의의 극단적 이분법에 의해 촉발된 허무주의가 극복될 수 있는 가능적 토대가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우리나라 서양고대철학의 태두 박홍규(1919-1994)는 위와 같은 믿음의 대상으로서 존재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것 즉 무한정자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가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그의 전집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 사례들을 꼽자면 수도 없지만 하나의 예로서 그의 논문 <유티데모스편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지상세계에 대한 소피스트들의 엘레아주의에 기초한 이분법적 독단이 어떻게 현실 허무주의를 조장하는지를 그 자신의 무한정자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를 기초로 탁월하게 풀어내고 있다. 소피스트들은 엘레아의 논리를 토대로 모든 현실의 다와 운동을 무로 돌리지만 무한정자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조건적인 부정과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가능성의 영역에서 다양한 측면과 정도 차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배움을 통해 일정한 변화 즉 교정이 가능한 영역인 것이다. 즉 존재와 무 사이의 것으로서 무한정자는 타자성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플라톤에게 현실 허무주의의 타파를 위한 가능성의 토대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부분에서 제시된 믿음의 대상이 갖는 내적 무한정성을 단순히 부정적인 관점에서 그저 해체의 원인으로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부분의 논의는 현실의 삶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보전을 위해 사용하는 사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믿음과 그 대상을 고찰하되, 그것의 한계는 물론 그 반대로 최대한 형상적 앎에 근접할 수 있는 내적 가능성도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형상에 대한 진정한 앎에 대한 인식이 변증술을 익힌 소수 철학자들의 직관적 통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믿음의 영역은 현실의 삶의 보전을 위해 일상의 장인(demiourgos)들이 수행하는 일반 기술 내지 학술들(technai)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이 갖는 실제적 앎으로서 가치는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곳 논의에서는 인식과 관련하여 앎과 믿음이 아주 배타적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이어지는 선분의 비유를 함께 살펴보면 앎과 믿음 사이에 추론적 사고의 단계(dianoia)가 자리하는데 이 추론적 사고 단계마저 존재론적 측면에서 보면 형상적 앎 보다는 믿음 쪽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수학적 앎은 일단 자체성(kath’ hauto)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형상적 앎(epistēmē)이 아니고  이곳 논의에서 보듯이  형상적 앎이 아닌 그 모든 것은 예외없이 모두 믿음(doxa)으로 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선분의 비유에서 그것(dianoia)은 믿음과도 분명 구분되지만 최소한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구분의 정도에 있어 그것과 형상 사이의 거리는 그것과 개별 학술적 대상 사이의 거리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전자의 거리는 초월적이지만 후자는 최소한 근접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믿음은 지적 훈련을 통해  일반 기술 내지 학술지를 거쳐 점차 경험적 물질적 연장성을 줄여가는 그 만큼 자기동일성(tauton)을 담보하는 추론적 사고 상태(dianoia)에까지 최대한 근접할 수 있지만,  형상적 앎은 고도의 철학적 훈련을 통해 변증술을 갖춘 아주 소수의 철학자들 아닌 한 인식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믿음의 원어인 doxa를 우리말로 단순히 ‘억견’이나 ‘억측’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믿음은 아래로는 환상이나 상상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믿음을 인식 수준에서 점차 상승하는 쪽으로 보면 그것은 이른바 ‘올바른 믿음’(orthē doxa)과 ‘대중적 덕’의 토대가 되기도 하고 또  개별 기술지(technai)를 비롯해 수학적 기하학적 지식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수학이나 기하학은 비감각적 지식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형상적 앎의 측면도 갖고 있다. 그러나  공간적 연장성을 수반하는 도형들의 사용은 물론 별도의 증명 없이  수와 공리의 존재를  전제(hypothesis)하고 들어 간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떠한 연장성도 전제도 갖고 있지 않은 무전제의 원리(archē anypothtos)인 순전한 형상지로서 철학과는 원천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510b) 구상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수학적 대상은 형상적 앎의 대상에 닿아 있지만 마치 당구공들이 서로 닿아 있어도 서로가 분리되어 있듯이 형상적 앎의 대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 아무려나 이런 의미에서도 현상계의 믿음의 대상들과 믿음이 갖는 가치는 결코 폄하할 수 없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일반 기술 내지 학술들이 그렇듯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 최상의 수준에까지 고양될 경우 우리 모두가 추론과 정합을 통해 정립하고 있는 실질적인 개별과학의 진리성으로서 자기동일성까지 확립 가능한 일종의 일반 법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주장하고 있듯이 자기 동일성은 형상의 자체성까지는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기 동일성에 기초한 개별학술들 내지 개별 과학은 본질적으로 개연성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20세기가 낳은 걸출한 이론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 하이젠베르크(W. K. Heigenwerg)가 제기한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가 플라톤 철학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려나 앎과 추론적 사고, 믿음과 관련해서는 학자들 간 해석 상 많은 견해차와 논란을 안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나중 선분의 비유(509c-513e)를 다루면서 보다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  이렇듯 믿음은 위쪽으로 비록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추론과 정합적 사고를  포함하는 일반 기술지에서 시작하여  최상의 수준에서는 수학, 기하학의 추론적 사유에까지 다가갈 수 있지만, 그것을 제외한 상투적 믿음 수준에서는 그야말로 억측이나 환상에 불과한 상상에까지도 추락할 수 있다. 즉 믿음의 대상이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는 것’이라는 말은 그 믿음이 본질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양상의 측면을 갖는 가능성의 영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중 없는 것 쪽으로 해체될 가능성의 경우는 존재 쪽으로의 극복과 상승의 측면에서 보면 내용적으로 우연성이 증대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물질적 무한정자는 그 자체 맴돌면서 그 우연성을 어떻게든 증대하는 게 필연적 속성이라는 점에서 <티마이오스>에서는 그것을 ‘방황하는 원인(planōmenē aitia)’이라 칭하면서도 동시에 역설적으로 ‘필연(ananch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티마이오스> 48a) 이런 점에서 형성과 해체 양쪽으로 열려 있는 무한정자의 내적 가능성은 양상론적으로 능력(dynamis)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무한정자의 영역에서는 능력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이곳에서도 앎과 더불어 믿음을 능력으로 언급하고 그 능력이 적용되는 대상을 구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형상적 앎(epistēmē)은 한결 같이 그 자체적인 것으로 일자적으로 존재하지만, 믿음은 앎과 무지의 중간자로서 앎에는 비록 미치지 못하지만 능력과 양상에 따라 위로는 추론적 사고(dianoia)에 까지 상승할 수도 있고 반대로 억측이나 환상(eikasia)의 수준까지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짐작하겠지만 이러한 앎과 믿음이라는 능력의 주체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영혼(psychē)이다. 즉 앎과 믿음은 영혼의 능력이되 그것이 영혼의 능력 안에서 앎과 믿음으로 갈리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각자 갖고 있는 영혼의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영혼은 무한정자의 타자성이 비록 운동과 변화를 담보하지만, 그 힘을 설득하여 다를 해체하는 쪽이 아니라 보전하는 쪽으로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능동적 힘, 즉 포이운(poioūn)으로서 능력의 지향 방향 즉 해체를 거슬러 가장 완전하게 복구해야 할 보존의 근본 지향 내지 목표는 다름 아닌 형상(eidos)이다. 그러나 이것을 플라톤 형상론이 목적론적 성격을 갖는 근거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플라톤에게 목적은 능력에 따라 다다를 수도 있고 다다르지 못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이 결정론적이라면 플라톤의 목적은 비결정론적인 것으로서 다만 가능적인 것일 뿐이다. 그리고 믿음의 영역에서 확립 가능한 자기동일성 또한 영혼의 힘을 토대로 무한정성의 지배를 거슬러 올라 형상적 앎에 근접했을 경우 획득 가능한 최상 수준의 인식 값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물질적 타자성(heteron)도 포함되어 있다. 물질적 타자성은 영혼의 힘을 거부하고 무한정성 고유의 성질이 극도로 발현된 상태 즉 언제나 무로 향하는 해체의 원천이다. 그러나 자기동일성의 측면이 강화될수록 앎에로의 가능성이 증가하고 타자성의 측면이 강화될수록 우연성과 해체성이 증가한다. 이것들을 존재론적 위계로 구분해 본다면 일자적 자체성이 확보된 형상이 가장 우위에 있고 그다음이 능동자 포이운(poioun)으로서 영혼 그리고 가장 아래에 무한정자가 위치하지만, 가능성의 토대가 무한정자인 한, 믿음 영역 또한 상승과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한 분투 어린 삶의 영역으로서 결코 방기할 수 없는 철학함의 실질적인 현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 물론 그러한 분투를 통한 영혼의 내적 고양 단계에서 그야말로 철학적 변증술을 통해 형상에 대한 직관적 통찰의 수준까지 고양되지 않을 경우, 사고 상태는 그저 믿음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형상적 앎과 믿음은 모두 영혼 능력의 연속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그 형상적 앎은 그 영혼 능력의 고양을 통해 믿음의 영역을 초월해야 획득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형상적 앎에 이른 철학자가 믿음의 영역 즉 현실에서 떠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떠날 수도 없다. 다만 철학자는 믿음이 갖는 본질적 성격을 인지한 상태에서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고 그 믿음을 앎으로 여기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진리를 토대로 모두가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바라는 자신의 본성적 욕구에 따라 고통스러운 등에의 역할을 자임하게 되는 것이다.

* 변증술을 통해 형상적 앎을 획득한 철학자가 믿음이 지배하는 현실의 삶의 영역에 왜 실천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의 문제는 그것이 과연 철학자의 근본 욕망으로서 관조적 본성과 일치하는가의 문제와 함께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논의가 전개될수록 플라톤 철학의 실천철학적 성격은 갈수록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곳에서 제시된 진리를 관조하기를 좋아하는 철학자와 보통 사람들의 구별, 형상적 앎과 믿음의 구별 즉 형상이론의 근본 틀은 플라톤 존재론의 기본 원칙과 시작을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플라톤은 이것을 기점으로 이 이후에 제시되는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을 통해 이러한 기본적인 존재론적 원칙을 토대로 철학의 기본 구상들을 보다 다각적인 측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확대해간다. 다소 거칠게 그 내용들의 성격을 미리 요약하자면 태양의 비유는 좋음의 이데아를 통해 철학 통치자가 종국적으로 지향해야할 총체적인 가치와 합목적성을 보여주며, 선분의 비유는 이곳에서 논의한 앎과 믿음의 세분화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에 이르기까지의 인식론적 위계 내지 기본틀을 보여주고,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의 위계에 상응하는 인식과 실천의 단계들을 통해 현실 영역의 실상은 물론 철학자가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분투의 여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왜 형상적 앎을 이룩한 철학자가 왜 종국적으로 동굴 속 현실의 세계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비유들은 모두 플라톤 철학의 종착점이 왜 현실의 구제를 위한 실천의 철학인지를 하나같이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있는 것 자체를 반기는 사람들은 믿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philosophos)라고 불러야 한다’는 이곳 논의의 결론(480a)이자 제5권의 마지막 문구는 차후에 펼쳐질 논의를 통해 여전히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이상국가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는 자들을 향한 선전포고이자 차후의 구상을 예고하는 선제적 선언인 셈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어질 제6권에서 위와 같은 철학자들의 기본 성향과 자질들을 다시 한번 정리 제시한 다음, 승리의 요건으로서 지피지기가 중요하듯 그러한 철학자들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현실의 실태들과 그 이유들을 분석적으로 비판한다.

* 끝으로 이곳 논의에서 언급된 무지agnōsis에 상응하는 대상은 ‘있지 않은 것to mē on’이지만 실제 사람의 경우 전적으로 모든 면에서 무지한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설사 억측을 밥 먹듯 일삼고 있는 자일지라도 믿음의 영역에 있는 한, 무지한 사람은 아니다. 요컨대 현실에서 일정 부분 무지한 사람은 있어도 전 영역에서 전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적 앎을 획득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모두가 서로 일정 부분 옳고 그른 생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의 생각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포함된 한에서 일방적으로 매도되어선 안 된다. 소피스트들은 엘레아주의의 이분법을 토대로 그 다양한 측면들을 어느 한쪽으로 매도하는 방식으로 모든 현실 판단에 대한 회의를 부추겼다. 그러나 현실 판단 모두가 상대적이고 회의적인 것은 아니다. 믿음의 영역은 수많은 대립적인 것들과 측면들이 혼재하는 영역으로 영혼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보다 ‘앎’에 가까운 믿음도 있고 ‘무지’에 가까운 믿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분별하는 일이야말로 삶의 보전을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철학함의 중대하고도 실질적인 관건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을 분별하는 능력은 영혼을 고양하는 철학적 훈련을 통해 길러진다. 그러므로 철학 공부는 개인으로서건 시민으로서건 좋은 삶의 필수 조건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의 관점에서 굳이 현실에서 가장 많은 측면에서 가장 무지한 자를 꼽으라면 인간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통치 영역에서 자신의 무지조차 모른 채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 따라 반지성적 전횡을 일삼는 자라 할 것이다. 그러한 무지한 통치자야말로 인간 삶에 가장 위해를 가하는 자로서 철학자가 가장 비판하고 지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직업으로서 철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아니라 최소한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통치의 종식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책무가 아닐 수 없다. 2024년 2월 한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경우 가히 그 책무는 너무나 절실하고도 시급하게 요구된다. “윤석렬은 탄핵되어야 한다.”는 우리들의 외침과 저항 또한 그 당연한 책무의 하나이다.

* 이곳 논의는 형상론에 대한 원칙적인 논의로서 <국가>에서 처음 제시된 곳이기는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곳 논의 말고 형상론과 관련한 논의는 플라톤 대화편 전체에 두루 걸쳐 있다. 그러므로 일단 이곳에서는 형상론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보다는 그것에 접근하면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소개하고 앞으로 형상론 관련 논의가 나올 때마다 다른 대화편의 내용도 함께 연관해 가면서 추가로 논의 사항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로 플라톤 대화편 전체에서 형상론과 관련한 논의가 제시된 부분은 아래와 같다.

 

* 플라톤의 대화편 형상(이데아)론 관련 전거들

<라케스> 191e, 192a

<에우튀프론> 54d

<고르기아스> 467e, 506d

<대히피아스> 289d, 292a, 293e, 294a, 298b, 300a, 303a

<뤼시스> 217b, d

<에우튀데모스> 280b, 301a

<메논> 72c, 72d. 72e

<크라튈로스> 389b, 390a

<향연> 204c, 211b

<파이돈> 74d, 75b, 78d, 100b, 103e, 104b, d, e, 105a

<국가> 402c, 434d, e, 435a, b, c, 476a, d, 500e, 510b, d, e, 511a

<파이드로스> 237d, 250a, b, 265e

<파르메니데스> 149e, 150a, 159e, 158b, c, 160a

<테아이테토스> 203e

<소피스테스> 228c, 247a, 252b, 260e

<티마이오스> 28a, 29b, c, 29b, 39e, 48e, 49a, 50c, d, 51a, c, 52c,

<필레보스> 16d, 25b

* W. D. Ross, Plato’s theory of Ideas, Chp. 17th, Oxford 1951

(W. D. 로스, 김진성 역, 『플라톤의 이데아론』, 누멘 2011, 259쪽)

 

이상으로 제5권 끝

다음 주제: 2. 철학자의 자질(제6권 484a-487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