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파라노이아): 외디푸스 = 크리스토스 [천 하룻밤 이야기]
광기(파라노이아): 외디푸스 = 크리스토스
2024 01 20 대한(大寒)
푸꼬가 근대사상의 역사를 광기의 역사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뭐 학자가 그런 소리 할 수도 있지 정도로 생각했다. 자연의 피폐, 즉 본성의 피폐는 광기의 역사이다. 들뢰즈가 이를 이어받아서, 그 광기의 주축인 변증법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한다. 신화 같은 참주(황제, 자본)에 이르는 변증법 사고(思考)가 광기이고, 그리고 2천 년이 지나도 오지 않은 크리스토스를 온 것으로 만든 그 사고가 파라노이아 이라는 것이다. 참주의 억압을 외디푸스(Οἰδίπους)의 억제로 바꾼 것은 프로이트이지만, 참주에 의해 인민의 원한과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에 의해 원죄를 심은 것을 비판한 철학자가 니체라고 한다. 이런 어마어마하게 길고도 풍부한 이야기를 공시태에서 보면 간단히 상승의 명령과 지시에 못 이르는 원한과 원죄가 있다. 그 터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민이 있고,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는 공포를 심었다. 이에 비해, 통시태에서는 인민이 기본심금으로 쭉 흐름이고, 그리고 분출하여 용출선을 만들어 전복하는 최종심급이다.
동서양의 사상을 공시태로가 아니라 통시태로 읽으면, 상식 시대, 양식의 시대, 그리고 고등양식의 시대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곳에서나 인간이 도구들, 즉 자연의 돌들 속에서 주워다 쓰는 시대(구석기 시대)에서, 도구를 만들어 쓰는 시대(신석기 시대)를 거쳤었다. 그리고 돌덩이 속에서 구리, 금, 은, 철이 자연적으로 있지만, 열을 가해 녹여서, 인간의 몸의 도구와 유사하게 도구를 만들면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안다. 이런 정도는 5관(상식)을 통해서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체를 지닌 인간이 몸과 달리 소통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도 안다. 이 소통은 자연에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만들었는지를 5관을 통해서 하나로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에는 누구나 공부, 즉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하면서, 5관을 통일을 조성하는(composer) 것을 식(識)이라 하고, 이 여섯 가지를 함께(하나로가 아닐 것인데) 지닌 인간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이 무엇인가? 이뭣꼬의 새로운 단위 설정하기에 이르는 것도 변증법이다. 이런 사유에 이르게 되면서, 원본이 없기에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달리하는 자들이 나온다. 이들 사이에 서로가 지 잘났다고 하는 경우들과 더 많이 더 높이 안다고 하는 경우들이 생긴다. 그럼에도 각자는 하나의 조성하는 단위를 인정하는 점에서 중요한 변증법을 체득하고 있다. 서로 다른 이유는 다음 차원일 것이다.
깊이에서 표면으로 생성하는 쪽에서도 상식을 통하여 이런 과정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 있으나, 규칙과 법칙을 잘 찾기 어려워서 함께 어우르는 방식을 변증법이라는 용어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뭣꼬는 거의 전체 또는 전부에서부터 규명의 노력을 하여 부분들을 설명하려는 방식이라 여긴다. 이에 비해 생활에서 또는 터전에서 도구의 공용화와 전승에서 원형 또는 원본에 준하여 도구 생산을 하기에, 잘 만들어진 또는 견고한 원본이 있어야 한다(필요하다는 것이다)고 한다. 이 원본을 만드는 과정은 여러 재료들과 도구들을 사용했음에도 원본이 만들어지고 또는 제시되면서, 만드는 데에 따른 순서와 규칙, 공동체에서 사용하는데 규율과 기준 등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전수와 전달에서 그 도구가 없더라도 대화 또는 거래의 소통에서 그 무엇을 먼저 규정해야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 잣대가 먼저 있다고 여긴다. 그 때 그게 뭣꼬의 뭣꼬를 묻는다. 여러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원본을 이르는 과정도 방법 또는 기술이라 하지만, 입말로서 이리하면 안 되고 저리해야 하고, 이것을 섞으면 안되고(폭발하고) 저것을 섞으면 조성(합성)이 된다고 하는 방법이 있듯이, 삶에서 진선미를 추구함에서 합성하는 이뭣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원본은 합성이 아니라,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전제로서 오류일 것인데, 그대로 순수한 원본이 있다고들 한다. 말하자면 원본으로 순수소나무가 있다고 해보자, 소나무의 뿌리, 줄기, 가지, 바늘잎들이 어디 순수한 것이 있겠느냐마는 원본 비슷한 소나무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일반화의 덕분이다. 소나무가 없는 곳에서도 소나무를 말하면서 이런 저전 이야기를 소통할 때, 그 말의 소나무는 일반화의 개념을 넘어서 추상화로서 관념이라고 부른다. 이런 공통감관의 재료에서 일반화를 거쳐서 추상화의 과정도 변증법이라 부른다. 서로 같은 원본인 것 같지만 실재성에서 다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대의 상식시대에, 일반화가 잘 안 되는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아마도 용어는 나중에 만들어졌겠지만 공간과 시간이다. 어디까지 경계를 지어야 공간이며, 아무 것도 없는 허공만이 있는 것을 공간이라고 또는 빈 것이라고 할까? 빈 것이라고? 고대인들은 속이 빈 갈대 줄기를 잘라서 앞뒤를 자르고 막아서 물에 넣고서 양쪽을 떼면, 방울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아 공간이란 것이 물과 다른 무엇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갈대가 없는 빈 허공은 어디까지 공간인지를 오관을 통해서는 불가능하지만, 일반화와 추상화의 과정처럼 공간이라는 어떤 것을 설정한다. 그것이 뭣꼬라고 물으면 어떤 기준점이든 대상을 통해서 응답해야 하는데, 신체를 지닌 자체가 이미 너비(공간)을 지니고 있기에 인정하는 방식이 소통과 다른 방식으로 담는 그릇이 없이도 이미 담겨져 있는 신체라는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이 없으면 무엇이라고 설명할 것인가?
다른 한편 과거와 현재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어떤 지속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죽어서 세상을 뜨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과거는 현재에 없다고 하지만, 한사람이 살면서 없어진 과거의 어린 시절의 추억은 노인이 되어서도 문득 떠올릴 때 마치 어제처럼 또는 조금 전처럼 느껴지는 실재성은 새로 만들어진 것인가 또는 잔존하는가? 한사람의 과거도 60여년의 과거가 어제 같은데, 인류사에서 6백년, 6천년, 6만년이 어제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당연히 부정하겠지만, 고등양식의 시대에 DNA를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 속에 기나긴 과거가 있다는 것은 화석과 지질학을 배워서 아는 것 이상으로 기나긴 과정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6백년전 고려 불교 불상과 고려 대장경은 어제의 것인지 먼 과거의 것인지, 심하게 이야기하여 바로 전의 찰나의 것인지 라고 물으면, 거짓이라고 하는 이들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을 이야기할 때, 마치 조금 전의 사실들처럼 알고 읽으면서 진리에는 시간이 없고 공간도 없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간은 마치 공간처럼 있기는 한데, 오관과 식(識)이라는 6식을 통해서는 설명이 안 된다. 더군다나 고려나 남한이나 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처럼 대화도하고 소통한다.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이란 통째로 덩어리가 전부가 있고 부분으로 고조선이니 고려니 조선이니 나눈 것이 아닌가. 공시태가 한꺼번에 전체에서 부분을 보여준다는 거처럼 여기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하는 방식이다. 이런 공간화를 공시태 속에서는 논리적으로 타파할 수 없다고 한 이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이며 그의 논법도 변증법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합리한 논리보다 실재적 삶에서 대화와 소통의 방식으로 공간과 시간이 먼저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 속에서 서로가 무엇을 이루고자 하였는지를 공부하는 방식으로 대화법도 있다. 통일성을 찾았거나 말거나 어정쩡한 상태를 두고서 서로 소통하는 대화법도 또한 변증법이라고도 한다.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과정, 무엇인가를 합의 보려하는 과정, 무엇인가 서로 다른 점을 좁혀보려는 과정, 아무리 그래도 다양한 방식들이 통일된 방식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이정도로 약속하고 합의를 보는 것은 사회적 삶이다. 이것은 변증법이 아니라고 하는데, 아니 이런 과정을 걷고 있는 거이 변증법이다. 자연에서, 논리에서, 불가인식적인 것에서만 변증법의 소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제도에서도 변증법이 있다. 단지 그 방법이 다른 방법보다 우월하다는 정도는 이해하지만, 절대적이다거나 완벽하다는 것에서, 주장자의 오만과 치기가 개입하는 것이 아닌가? 그 개입을 어떤이는 변증법이라고 착각하는데, 개입은 상태와 흐름을 자르는 것이지, 다발의 형식으로 종합과 통합과 다르다.
하나의 답이 있고,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변증법은 변증법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가만히 정지해 있을 경우에 적용 가능한 것이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에 적용은 자신이라도 움직이지 않아야 적용과 개입이 가능할 것인데, 자신도 움직이면서 적용은 마치 나는 맞고 너희들은 틀렸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이면, 그것은 무엇‘이다’이지, 활동하는 현존이 아니다. 무엇에 쓰임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다루어보아 한다. 그 무엇을 다루면 되는 경우와 잘 안되는 경우가 있는데, 잘 안되는 경우가 기존과 잘 되는 것과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잘 되는 경우와 달리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문제는 다른 것이다. 이런 다른 과정과 방향이 현실에서 수없이 많음에도 하나의 방향이라 여기는 것은, 다른 것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경우일 것이다. 시간의 경과에서 달리 생겨나는 것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한 방식이 다른 방식을 모르거나 적용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 방식이 세상을 잘 만들어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저 다른 방식보다 어쩔 수 없이 또는 한시적으로 우연히 선정하여 행할 뿐이다. 사람들은 한시적 선정을 통일된 합의라고 하지만, 그저 부분적인 합의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의 무제한성과 달리 시간의 흐름은 지나온 과정은 마치 통합된 방식으로 흘러온 것으로 착각하다. 미리 말했지만 근대 300여 년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비합리적이었고, 정상이라고 거쳐왔고 거쳐가고 있는 상태가 비정상이며 광기라고 하는 것은 생태계의 시계를 측정하는 방식에 보고 있다. 같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무슨 일이라도…
메시아의 번역어로서 크리스토스는 미륵불과 같은 미래에 올 무엇의 모습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이다가 아닌 무엇인가, 하나의 방향이 아닌 무엇에 쓰이냐는 방식으로 다루면서 통시태 과정에서, 온갖 이야기와 논설과 담론이 전개되었다. 전개의 방식이 너무나 다양한데 하나의 방식이 맞다 하는 것도 변증법이고, 다양하게 전개되는 이법이 풀어가는 방식도 변증법인데, 서로 마주 견주어서 통합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변증법이고, 아니 하나의 방식을 있다고 강요하면서 만들어가고 구축해나가는 것도 변증법이라고 한다.
역사는 하나의 방식이 다른 방식을 거세하고 배제하여 성립한다고 믿는 자들이 이끌어 온 것처럼 서술되었으나, 언제 하나의 방식의 변증법 이외에 다른 변증법도 여럿이라는 것은 신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환, 상제, 천신, 하나님, 제우스, 데우스, 고도, 디외, 갓, 야훼, 알라, 마나 등등 터전을 달리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는 것은 잘 알려졌다. 서로의 터전을 유지한 체 다른 터전을 존중하는 관용이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에서는 어느 이름이 맞고 어느 이름은 틀리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신은 선(善)하고 타의 신은 악마처럼 여기는 풍토가 왜 생겼을까? 그나마 서양철학사에 사색(speculation, 서로 비쳐보는 대조하는)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서 13-14세기에 서로 다른 길을 비추어보자고 했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하나가 맞다는 상식의 놀이가 지배하면서 다른 쪽을 마남사냥으로 못된 짓을 하였고 사실상 아직도 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한 종교를 믿는 신앙자들이 어느 곳에서나 마이크로 떠들어도 아무도 그만 하라고 말하지 않는데, 무속은 산속에서 불교는 절집에서 다른 몇몇은 그들이 뒷방에 모이듯이 구석진 곳에서 모여서 숨죽이며 노래하고 전수하고 전파하다.
어느 시대에나 이런 상반된 또는 다양한 것이 있었지만 하나로 나가는 변증법적 통일의 길이 맞고, 진리이고, 선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 지배방식은 다른 터전과 영토에서도 적용하고, 그 적용에 들어오지 않는 자들을 악, 악의 축으로 모는 것은 여전하다. 사색한다가 서로 비추어본다고 하면서, 아마도 서양철학사에 두 개의 실체의 인정에 이르는 이원론이 등장했을 것이다. 이런 비추어봄은 동양에서 감(鑑)이라 할 것인데, 비춰봄에는 다른 방향들이 여럿 있다는 것이고, 그 시대 그 제도에서 합의와 계약의 방향을 잡는 것이 감일 것이다. 물론 요즘 감(感)잡았다는 감화작용의 일반화를 알아챘다는 것이며, 사변적인 감(鑑)과는 다르다. 이런 여러 갈래를 비추어보는 작업으로 64갈래를 사유하는 주역이 흥미롭다. 여러 갈래들 중에서 우리의 관심이 두 갈래라고 한 것은 스피노자였지만, 갈래를 둘로 사유했던 이는 데카르트였다. 다른 실체는 둘이 서로 다른 것이지만, 사회 도덕적 사변에서는 종속 또는 예속이 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야 정신이 물질을 지배한다. 나아가 신은 자연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방식이 21세기에 와서 지구를 황폐하게 하는 사상이며, 이기심에 의한, 파라노이아 또는 외디푸스적 사고일 것이다. 이런 한 방향의 인식과 지배방식이 소위 말해서 양식(bon sens) 시대인데, 좋은 방향을 하나의 방향으로 삼아서 절대자로 국가로 변형된 추리를 만든 것도 변증법이었다. 이런 변증법이 악의 축을 만드는 변증법이며, 전쟁을 조장하는 변증법이며, 자본과 제국에 예속하는 변증법이었는데도 거의 3세기 동안에 지배적 사고였다는 것이다. 반성과 성찰이 없지 않았지만, 그 변증법의 위세에 눌려서 말도 못하고 의식은 5관을 보탠 6식으로 다른 길로 가려고 또는 용출선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시대마다 논의의 줄기들 또는 구조들에 따라 변증법이라는 이름이 다양하게 불렸다. 이상하게도 이런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자신들은 자유롭다고 하였는데, 변증법에서 일반화를 거쳐 추상의 지위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그들이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되어도, 그 제도와 체제 속에서 쌓아온 부와 지위를 버리지 못하여, 외디푸스(참주)와 크리스토스(미래불)의 추종자가 되었다. 불교에서 미래불은 저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지금 행하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라도 뒤처지지 않게 같이 가자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천 년의 불교, 오백 년의 유학이 있었다. 그리고 근대화에서 실학 등을 거치는 과정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만난 것이 굴절이었고, 또한 미국의 자본 제국을 만난 것이 또한 더욱 굴절하여, 자연에서 나온 다발이 뭣인지를 알기에 어렵게 되었고, 공부와 노력은 두 배 세 배를 더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중에 상식과 양식의 시대를 넘어 고등양식으로 가는 시기에, 일제로부터 배제와 배척의 사고가 들어와 보이지 않게 외디푸스가 장악하였다. 참주의 지배였다. 거기에 보안법이 역할을 했다. 그 다음에 외디푸스 그 위에 크리스토스가 덥혀졌고 인민을 원죄의식으로 굴종시키듯이 헌법과 법률로 다스린단다. 입법은 인민의 것이지 외디푸스도 크리스토스의 것도 아니다. 참주과 제국 속에 연구하는 이들이 그 이중굴절에 자기의 위상조차 잃어버렸다. 국가보안법이 굴절을, 크리스토스의 계율같은 헌법이 재굴절에 더하여, 이뭣꼬도 모르는 변증법적 사고의 방향이 자연에서 드러나는 생성과 창발을 휩쓸어 가버렸다.
환(桓, 밝다, 영원)에서 단(旦)으로 그리고 고조선의 전승은 이야기 곧 신화이다. 환을 중국인들은 영원이라고 한다. 왜 영원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는 어느 영토와 어느 시기에는 한 번씩 거쳐가는 것이다. 꼬마 애가 나는 어디서 나왔냐고 묻듯이, 세상을 신이 만들었다고 하면, 신은 누가 만들었는 데라고 묻듯이 말이다. 모르는 사실을 지속의 과정에서 풀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누구의 것이 맞다는 이야기(파라독사) 만큼이나 다른 이름들로 출발하는 것도 이야기(파라독사)에 속한다.
이야기 과거가 현재하지 않는 점에서 현존이 아니지만, 역사가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억은 통시적으로 거의 무한하다. 이렇게 말하면 생명역사 35억년이라고 한계가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이 양식의 변증법을 사용하면서 정신은 무한하다고 하면서도, 35억년은 유한다고 하여 진리의 축에 들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그 변증법이 외디푸스에게 예속이다. 몽테뉴가 인간의 예속에 대해 말하면서 다른 길(방향)과 견주어 의심해보고, 자기의 완전성과 무한성이 없는 만큼이나 타인의 방향과 추론을 존중하는 관용을 갖추라고 한 것이다. 이런 타와의 사색이 감(鑑)일 것이다. 여럿을 비추어보지 못하는 사변도 감도 없는 사회가 예속과 굴종의 사회이다. 그 사회에는 보안법이 존속하고 있다 게다가 미군 점령지로서 이땅의 기준 언어가 영어라는 점에서 외디푸스에서 크리스토스 지배를 받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식민지 종속의 외디푸스와 달리, 식민지에서 외디푸스를 넘어서는 길이 무엇인가를 말해준 것은 들뢰즈이다. 용출선(탈주선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을 만들어라, 기존의 각질에 균열을 내고 리좀을 연결하라. 즉 달리 말하라, 달리 사유하라고, 여기에 전복 즉 혁명이 있다고 한다.
일제 외디푸스 사고의 영향 60여년, 미제의 크리스토스 사고의 영향 60여년을 지나면서, 기나긴 과거를 무시하고 또는 배제하면서, 120여 년의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것으로 착각한 이들이 현 정부다. 외디푸스와 크리스토스의 카르텔에 학문하는 이들이 그 예속에 있지 않는가. 미국의 하부인 일본에게 그 하부로 들어가자는 정책을 펴는 이들이 윤석열 정부와 그 관계자들이다. 이름 하여 숭미자이며 부일자들이다. 우리는 우리 입말로 소통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래로 분류상, 이런 극우들이 설치는 터전에서 뭣을 다루어야 하고 뭣을 할 것인지를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 토지에서 알게 모르게 유일신앙을 믿는 자들은 제국의 체계와 체제에 복속되지 않으면 그 시대 그 국가에서 살수 없을 정도이고, 더하여 지탄받아서 그들의 터전과 영토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기왕 이 터전과 영토에 살고자 한다면, 여기서 체계와 체제를 순서대로 익혀서 살아가는 것이 편안하지 않는가? 라고 한다. 이런 순서대로 익히고 사는 것은 사회제도 속에서 휩쓸려가면서 보고 듣고 말하면서 움직이면 된다. 이런 활동이 종속적이고 예속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대와 제도 속에서 출세하며 또는 지식이 높다고 칭송받고 살아가는 길이라 여긴다. 그렇다 그 속에서 사는 편안하고 세상을 향유한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이 좁은 한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좁은 자아와 그 자아의 추구방식이 좁지, 예속이든 종속이든 사회라는 테두리 또는 남한이라는 영토가 자아에 비해 매우 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에서는 평생을 두고 남한 90만 평방 킬로미터의 너비 속에 안 살아본 곳이 살아본 곳보다 더 많다는 것도 이런 사고하는 자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제도와 체계 속의 이 영토에는 자기가 하나의 질서 속에 예속되어 있듯이 하나의 질서와 체제 속에 종속되어 있어서 다 가볼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즉 바닷물을 다 먹어보고서 짜다고 하지 않고, 약지 손가락을 찍어서 맛보고 짜다고 하듯이, 한 영토의 삶의 양태들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그 질서의 논리 속에 안정과 편안을 누릴 정도만 활동하고 움직인다. 그게 인류의 습관인지, 기나긴 역사의 전승인, 불교식으로 인연연기인지를 물을 필요 없다. 왜냐하면 작은 자기가 큰 기존 사회에 동의하고 합의하여 세상을 향유하며 살아가는 것이 좋다, 선하다, 정의롭다 고 규정하고, 타를 부정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기 긍정과 자기 동일성이 근사한 학문처럼 보이지만, 긍정의 바깥을 무시하는 부정적 사고이며, 오만과 치졸함에 빠진 사고이다. 자기 이외를 불손으로 불량으로 불의로 더 나아가 악마로 악의 축으로 보는 것은 중세의 마남사냥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일신앙의 기원과 크리스토스를 유일 신성으로 받는 종교 시노드(함께 가는 길)에서 나온 것이라고 니체는 그 기나긴 책들 속에서 시들로 써 놓았다. 그 시들을 읽는 이들 중에서 흐트러진 다른 길들을 가는 이들이 악마화 된 길을 가는 허무주의로 간주하고, 니체의 시를 “함께 가는 길”이라고 읽는 이도 있다는 점에 “함께 가는 길”이란 참 좋은 말이다.
이 지구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영토와 삶의 양식을 지니고 살아간다. 지구와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 “함께 살아간다.”는 이들 중에 참으로 이상한 이들이 2천년 정도의 역사에서 있어왔다. 세상 또는 크게 보아 우주라는 말이 그리스에서는 코스모스, 라틴에서는 유니버스로 번역되어 쓰인다. 이 두 단어가 차이가 사유과 사고만큼의 차이이며, 이런 차이는 조화와 분배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유니버스(하나의 길로, 로마로)의 사고에 빠진 철학에서 벗어나 코스모스(자연)속에서 코스코폴리탄(사해동포주의)로, 일 방향을 따라갔던 인문주의자(humaniste)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인성을 공부하는 인도주의자(humanitaire)로, 제국의 지배 하에서 예속과 패거리의 주구(走狗)로서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는 상품자유주의자(liberaliste)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유가 뭣꼬라고 물으면서도 이법에 따라 사는 인성자유주의자(libertaire)로 살아가는 노력의 방향이 진솔한 자연이법, 즉 자연 변증법일 것이다. (4:41, 57LLJ) (6:20, 57LLJ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