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39-괴테의 색채론과 헤겔의 색채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9-괴테의 색채론과 헤겔의 색채론

 

1)

회화의 질료란 무엇인가? 공간적 평면인가 아니면 색채인가? 헤겔은 회화의 질료가 일단 공간의 평면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평면화로부터 예술은 조각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던 구체적 물체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가 색채로 넘어가면서 색채를 본질적 질료로 삼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회화가 사용하는 물리적 요소가 어떤 종류인지 묻는다면 대상성 일반을 보편적으로 가시화하는 빛이 그것이다.”

“더욱 추상관념적인 이러한 측면의 성질로 인해 빛은 회화의 물리적 원칙이 된다.“[1]

 

역사적으로 볼 때-예를 들어 알타미라 동굴 벽화 등에서 보듯이- 회화는 처음에 아마도 사물의 외적 형태 즉 평면적 형상을 따오는 방식으로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평면 형상은 조각과 달리 실재 물질을 통해 표현되지 않았다. 그것은 벽면이라는 공간에 다만 외적인 형태만 닮은 선으로 표현되었다. 물론 이때에도 색채가 그 외적 형태를 채우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색채는 아무래도 종속적이었다.

사물의 형태는 선이 아니라 색채로 만들어진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화가 세잔느는 평면적 외적 형태가 확고하게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면서, 사물의 형태를 새롭게 창조하려 했다. 그는 수없이 다양한 색채의 중첩을 통해 하나의 외적 형태를 창조해 냈다. 세잔느의 이런 시도를 통해 회화의 본질이 평면적 형태가 아니라 색채에 있다는 사실이 확립되었었다. 그 후 모더니즘은 아예 형태 자체를 제거한 추상화로 나가면서 색채를 회화의 본질적 질료로 삼았다.

색채가 본질이라는 생각이 세잔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색채가 회화의 본질적 질료라는 헤겔의 생각은 얼마나 시대를 앞선 통찰이었는가? 놀랍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2)

헤겔은 왜 색채가 평면적 형태보다 더 본질적이라고 보았는가? 색채(즉 빛)가 회화의 본질적 질료더라도 회화가 공간적 평면 없이 가능할까? 헤겔 역시 회화의 출발점으로서 공간적 평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에게서 회화에서 색채와 공간적 평면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먼저 색채라는 개념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헤겔은 색채라는 개념에 괴테의 색채론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괴테의 색채에 대한 개념과 헤겔의 색채에 대한 개념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색채에 대해 괴테는 <색채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선 빛으로부터 노랑색이라는 색이 생겨나며, 또 다른 색은 암흑으로부터 생겨나는데, 그것은 파란색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된다.”[2]

 

우선 괴테가 빛뿐만 아니라 어둠도 나름대로 빛을 내는 광원이라고 본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어둠이 내는 빛은 밝은 빛이 아닌 어둠이라는 빛이지만 그것도 역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빛에서 색채가 나온다. 빛에서는 노랑색이 나오며, 어둠에서는 파란색이 나온다.

그러면 빛(빛과 어둠)으로부터 색채(노랑색과 파란색)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색채론 4장, 색채의 속성에 대한 일반적 견해에서 찾을 수 있다. 괴테는 프리즘 현상을 알았지만, 빛이 분화되면서 색채가 된다는 생각은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괴테는 빛이 색채로 변화하는 조건으로 굴절이나 반사라는 과정을 들고 있으며, 이런 과정이 흐린 매체를 통해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즉 물체의 어떤 성질 즉 ‘흐림’이 빛이 색채로 나타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3].

여기서 매체의 ‘흐림’이란 어떤 의미일까? 괴테도 물체가 지닌 어떤 성질이 빛에 일정한 영향을 주면서 빛이 색채로 나타난다고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괴테는 자신의 짐작을 확대하여 물체의 압력, 회전, 열기, 입김 그리고 물체의 움직임과 변화, 물체의 구성성분조차 색채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4]

괴테는 일단 빛이 색채로 변화하면, 색채는 서로 대립된 것의 상호 작용을 통해 다양한 색채가 출현하는 것으로 본다. 빛에서 두 대립된 색채인 노란색과 파란색이 출현하면, 나머지 색채는 이 두 색채의 조합에 의해 출현한다. 이 두 색채의 작용이 중화되면 즉 “서로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면”, 녹색이 출현하며, 두 색채가 조화로우면 즉 “두 색채의 순도를 높이거나 짙게 하면” 빨강색이 나온다[5].

 

“만일 그것들이 아주 순수한 상태에서 혼합되어 서로 완벽하게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면, 제3의 색을 낳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녹색이라 이름 붙인다. 그러나 앞의 두 색은 순도를 높이거나 짙게 하면 그 각각의 색으로부터 새로운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말하자면 그것은 붉은 색을 띠게 된다.”

 

괴테는 색채 현상의 기본 원리로 세 가지 원리를 들었다. 양극성의 원리와, 상승의 원리, 총체성의 원리이다[6]. 이 세 가지 원리는 서로 대립하는 것 사이의 대립과 조화라는 관계라는 개념을 낳았다. 그의 색채론은 오늘날 보기에는 상당한 오류가 존재하지만, 철학적으로는 자연을 대립물의 통일을 통해서 설명하면서 뉴톤적인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립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헤겔의 변증법도 괴테의 색채론의 영향권 아래 놓여질 수 있을 것이다.

 

4)

이제 헤겔의 색채론으로 넘어가 보자. 헤겔에 따르면 빛은 “가볍고”, “저항이 없으며”, “자기와 순수하게 통일되어 있어서” “최초의 관념적 존재”이며 “최초의 자아” [7]이다. 헤겔은 그 특성을 탈자성[脫自;Aussersichsein]에 두었다.

 

“물질의 추상적 자아로서 빛은 절대적으로 가벼운 것이며 물질로서는 무한한 탈자적 존재이다. 그러나 순수한 현현이고 물질적 관념성인 한에서 불가분적인 단순한 탈자적 존재이다.”[8]

 

상당히 관념적 언어로 서술되어 있지만 이런 표현은 빛이 질량[무게]을 지닌 물체와 대립하는 것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에너지라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빛은 물체적인 것을 넘어선 관념적인 것이다. 빛은 여전히 물질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므로 최초로 관념화된 것 즉 물질의 자아가 된다. 즉 관념화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직 개인의 정신적 주관에 내재하는 관념은 아니라는 뜻이다.

 

“자연은 빛에서 처음 주관적으로 되기 시작하며 … 아직은 특칭성으로 나아간 것 개체성 및 점과 같은 내적 완결성으로 수렴된 것이 아니다.[9]

 

괴테와 비교해 볼 때 우선 헤겔은 괴테가 말한 어둠이라는 독자적 광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명시작용을 하는 것은 오직 빛뿐이다.

그렇다면 색채는 어디서 나오는가? 색채는 빛의 명시작용 즉 가시화 작용으로부터 나온다.

 

“빛은 명시작용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명시작용은 여기 자연에서는 가시화됨 일반으로서만 나타날 뿐이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의 특수한 내용을 자신의 외부에서 대상성으로 가진다. 이 대상성은 빛이 아닌 빛의 타자이며 이로써 어두움 속에 존재한다.”[10]

 

“어두운 것은 빛과 상이하면서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한, 빛은 다만 이 일단 불가침투적인 것의 표면에 관계한다. 그와 같은 표면은 빛이 관계하면서 현현하며, 마찬가지로 불가분적으로 자기를 현현하면서 즉 타자에서 빛나게 된다.”[11]

 

빛은 자신의 타자 어둠과 만나서 색채를 만들어낸다. 언뜻 보면, 여기서 괴테도 헤겔도 어둠을 빛에 대립하는 독자적 광원으로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겔이 말한 어둠이라는 광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어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빛을 어둡게 하는 것 즉 물체이다.

헤겔은 사물의 표면이 빛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는 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물의 표면이 빛에 대해 어떤 작용을 한다고 보았고, 그것을 어둡게 하는 작용이라 보았던 것이다. 빛이 이렇게 물체에 의해 어둡게 되면서, 색채가 나온다. 그러므로 빛의 명시작용은 “빛에 의해 드러나는 것의 특수한 내용[즉 색채]을 대상성으로서 갖는다.”[12]

헤겔은 색채를 빛과 물체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려 했으므로, 괴테가 색채 사이에 설정한 양극성의 원리나 상승의 원리, 전체성의 원리를 거론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빛은 색채로 변화하면서 다양한 색채로 분화된다고 본다. 이처럼 색채가 분화되면서, 색채는 서로 결합될 수 있다.

 

5)

헤겔은 빛이라는 광원만 인정했으니 어둠이라는 광원을 독자적 설정한 괴테에 비하면 현대 물리학에 좀 더 가깝다. 그가 역시 빛을 물질적인 것이지만 물체적인 것은 넘어선 것이라고 본 점도 장차 등장하는 빛 에너지 개념을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그는 빛 자체가 여러 파장의 빛으로 구성된다는 빛의 분화라는 사실을 이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회화와 연관하여 중요한 것은 우선 헤겔에서 빛이 불투명한 물체의 표면에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회화의 질료가 색채라고 하더라도 이 색채가 표면적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잘 설명해 준다. 마치 조각의 질료는 물질적, 형상이지만 그 형상은 그것과 대립하는 물질의 덩어리를 떠날 수 없듯이 회화 역시 색채가 그 질료이지만 이 질료는 평면이라는 공간을 떠날 수 없다. 그러나 마치 조각에서 공간이 형상의 이면일 뿐 그 자체가 질료가 아닌 것처럼, 회화에서 색채가 본질적 질료이며 공간적 평면은 이런 색채가 현존할 수 있는 조건에 불과하다.

또 하나 회화의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색채가 분화된다는 사실이다. 색채가 분화되면서, 그 자체가 가상화된다. 색채는 그 자체로서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직 상호 관계를 통해 어떤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상호 관계 속에서 어떤 색채는 다른 색채에 대해서 자기를 규정하면서 자기 부정적인 존재 즉 가상적 존재일 뿐이다. 색채가 지닌 이런 가상성은 회화가 색채의 마법, 색채의 음악을 통해 특칭적 주관성을 그려낼 수 있는 토대가 된다.


[1] 미학강의 3권, 35, 36쪽

[2] 괴테, 색채론, 장희창 역, 민음사, 2003, 43쪽

[3] 괴테는 구체적으로 밝은 빛이 불투명한 대기 속에서는 노랑색으로 보이며, 어둠은 불투명한 대기 속에서 파란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색채론, 앞의 책, 88쪽 §150 참조

[4] 이 부분에 관해서는 색채론, 앞의 책, 226쪽 §691 참조. 괴테는 오늘날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매체가 빛의 일부를 흡수하거나(반사) 속도에 영향을 주면서(굴절) 색을 나타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매체가 지닌 물체의 성격이 빛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고 빛의 색으로의 변화는 일종의 변용으로 보았다.

[5] 그렇다면 청색에서 황색에 이르기까지 중간 색은 두 색의 혼합 비율에 따라 서로 달라지며, 노랑색에서 파란색에 이르는 다른 색은 순도를 조절하면 나오게 될 것이다. 괴테는 색채의 현상을 생리색(지각적인 색)이나 물리색(반사나 굴절에 의한 색), 화학색(물체 자체의 가열에서 생기는 색) 등으로 구분했다. 빛에서 색이 나오는 과정은 주로 물리색에서 다루어진다.

[6] 양극성의 원리란 색채에 노랑색과 파란색이라는 두 가지 대립된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상승의 원리는 노랑색과 파란색이 더욱 짙어지면서 둘 다 빨강색을 향해 상승한다는 뜻이다. 총체성의 원리는 어떤 색의 지각은 그것과 대립되는 색의 지각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빨강색의 지각은 그에 대립하는 녹색을 동시에 지각하게 만든다.

[7] 미학강의 3권, 36쪽

[8] 헤겔, 철학강요, §276

[9] 미학강의 3권, 36쪽

[10] 미학강의 3권, 36쪽

[11] 헤겔, 철학강요, §277

[12] 미학강의 3권, 36쪽

인민이 최종심급 [천 하룻밤 이야기]

총선: 인민이 최종심급

..2024 03 20. – 춘분(春分): 올해 윤년이라 춘분이 3월 20일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보는 역사적 흐름은 사뭇 다르다. 들뢰즈 이야기하기 이전에, 서양에서 역사를 이야기한 이들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도 있었지만 이들은 역사의 긴 과정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당대와 연관에서 교훈 또는 의미를 찾고자 했었다. 그리고 서양의 사상사에 아직도 난점으로 남아있는 크리스토스(메시아)란 용어의 유입은 사유의 역사를 뒤집어 놓았다. 인간의 사유가 유한하다는 것은 어떤 현자나 지식인들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영원의 역사는 예언자(점쟁이)의 것으로 여겼다. 45억 년의 역사를 지닌 지구가 45억 년 이후에도 영원할 거라는 말은 불경스러운가? 그래서, 백성을 자기들이 가르쳐 놓고는 백성의 편을 든다는 명목으로, 멍청하게도 성직자들은 역사가 신의 뜻에 있다고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했다.

역사가 자연의 흐름과 같은 방향에서 전개된다고 여기는 것은 드물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신화를 배격하면서 또는 어린이 교육과 같은 훈육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있어왔다. 상식을 벗어나 양식으로, 양식의 한 길과 다른 길이 있다는 다음 측정의 길도 제시되었다. 자연의 이법(la raison)과 흐름에 신의 통일성과 영원성과는 다른 길이 있다고 여긴 것은 오래되었지만, 과학과 실험을 통해 증거를 제시한 것은 “빛의 세기(les lumières 18세기)” 이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파라노이아에 갇힌 완고한 성직자는 – 세계는 6천4백 년 전에 신이 창조했다고 믿지는 않더라도 – 자기의 이익과 지위를 위해 신도들에게 온갖 등록된 문자의 이야기를 끌어다가 증거하면서 설교하고 있다. 신천지도 그렇고 전광훈은 또 어떤가?

자연의 이법조차 신의 의지인 것으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버린 그 종교의 성직자들의 완고함 때문에, 과거의 현자들도 상식(오관을 통한 인식)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서 오래 살아온 농민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경우에 떠돌이 현자(유목인)는 무엇을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대부들과 논쟁한들, 그 사대부 또는 지배층은 백성이 믿는 대로 따라야지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고, 지배와 사적 이익 유지에 골몰한다. 그런 가운데 몇몇 현자들과 지자들은 변증법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야기했지만 19세기 중반의 생물학과 열역학 이전에는 선방에서 선문답을 하듯이, 그저 유머나 풍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변모한다. 변화하고 움직인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사유는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혁명적으로 솟아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양사상사를 생각해보면, 하늘이 열리고(부르노의 무한), 또한 바다의 길이 열리면서(갈릴레이의 동시성과 진자), 가장 흥미로운 대상은 “빛”이었다. 빛이라는 광원은 경험적으로 분명히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면서 멀어지면 어두워지는데, 어째서 태양에서 오는 빛은 지구 전체에 평행으로 올까? 그리고 거리와 관계없이 동일한(동등한) 방식으로 비출까? 신의 의지가 보편이고 전지전능이라고 하면서 빛도 신의 것이라고 하고 싶겠지만, 이미 자연의 이법은 신과 별개라는 것이 알려졌다. 그 신은 실재로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겁주기 위한 수사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진실로 빛은 생명을 살리는 원인에 속한다. 왜냐하면 빛이 없으면 식물도 죽고, 동물도 병들다가 간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빛이 만물의 근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빛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누구의 신앙의 주장으로 자기의 것(전유)으로 전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인에게 평등하게 모든 지역에 골고루 비춘다(물론 북극과 적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수학적 증명이 아니라 증거에서 밝혀야 한다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널리 알려졌다. 신의 존재가 아니라 현존은, 수학적 증명이 아니라 경험적 증거여야 한다. 그 증거의 가장 큰 난점이 성령의 육신화였다(부활이니, 재림은 육신화가 가능해야 나올 수 있다).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 기적과 은총으로, 그런 사례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럴 때 현자가 그러면 너가 한번 해보라고 한다.

마치 화두를 지닌 선승이 선문답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해보라고 하듯이, 그리스 철학에서, ‘그래 여기 지금 뛰어보라’고 하듯이, ‘다음 섬에 가는지를 보자’ 이런 이야기에 대해 현실과 세상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움직이는 과정이 필요한데도, 과정을 제거하고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하나라고 하는 것은 여섯 살 꼬마에게 달나라의 토끼와 계수나무를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현자가 기적과 은총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 기적과 은총을 한번 맛본 자가 경험적으로 다시 구현하는 사례를 본 적이 없다는 것, 죽어서 기적처럼 살았다는 것을 긍정하는 현자가 성직자에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보라고 하면 아무도 실행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그 성직자의 증거는 본인의 증거인지는 몰라도 세상사의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예를 들어 당나라 6조 선사 혜능 주변과 그 이후로도 너무나 많다. 서양에서도 보나벤투라와 아퀴나스의 변증법적 논쟁과 중국 선종들의 그 많은 논쟁들과 맞대응 시켜서 생각해보시라. 우리 시대에 공부가 적어서 그렇다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박홍규(1919~1994) 선생의 말씀처럼 이 나라가 이렇게 흘러가는 것은 학자들이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난점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이를 핑계 삼아 자기를 제외하고 그 약점을 꼬집는 이들이 황제와 그 주구들이다. 이미 12세기에 생긴 대학에서 교수들은, 이런 등록된 문자를 근거로 하는 학설들이 자연이 지구상에 새겨 놓은 이야기에 비하면 하찮은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미니크파에 반대하는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들(불교의 이판 선사들 비슷한데)은 학설이 문자와 그 철학자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경험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인간이 스스로 역사를 만들면서 과정을 거쳐온다고 생각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인간은 여전히 신의 역사 속에 있었다.

표면의 밑에서는 자연의 이법과 인간의 인식이 같은 방향으로 간다고 감지하고 있으나, 만약 발설하면, 마남 사냥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수도사들은 그들 속에서만 문헌에서 문헌으로 연구를 하였다. 이쯤에 ‘역사’는 신의 역사든, 신화의 역사든, 문자로 등록된 서사의 역사 등과는 다른 기나긴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깊이 과거로 들어갈 수 있는 역량이 없기도 했지만, 감히 신의 역사를 벗어나 자연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브루노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겁을 먹고 있었다. 18세기 빛의 시기에, 대학이 아니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여러 가지 자연의 이법을 생각하고 기록한다. 백과전서파들이 대학교수가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장소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한다. 즉 같은 해에 태어난 린네와 뷔퐁은 과거에 벗어나서 자연의 모습을 달리 기록했다. 린네는 오랜 관습대로 형상(꽃모양과 열매)을 중요시 했고, 뷔퐁은 생명체가 자라는 과정을 중요시 했다. 이는 자연을 서술하는 다른 방식이었다. 자연은 어쩌면 빛처럼 여러 갈래로 생명체와 삶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는지, 그러나 쥐시외에서 뷔퐁으로 이어지는 자연에서 생명의 생성과 형성 과정의 이야기도 신의 말씀(명령)에 어긋나면 표면 밑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19세기의 생물학과 진화론이 표면 위 자리를 차지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 생물학의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도 지구도 자연 속에 등록된 기나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층이든 유전자든. 어느 성직자가 인류 역사 6,400년이라고 기록된(문자로 등기 된 경전) 것으로 증거 했다고 한들 –

서구에서는 지구가 둥글다고 바다로 나간 자들이 중국의 문화를 알면서 놀랐다고 한다. 공자라는 인물이 있다는 기록을 보고서 놀라, 독일의 볼프나 이탈리아의 비코는 달리 사유를 했다. 신이 없는 지역에서 신을 믿는 유럽보다 더 나은 도덕성을 보았던 것이다. 유럽은 같은 크리스토스를 믿는데도 엄청난 전쟁과 혼란을 겪는데 비해, 중국은 신 없이도 매우 높은 도덕과 제도를 만들고 살아간다는 데 충격을 입었다고 한다. 비코가 물론 크리스트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흘러간 역사의 큰 줄기들이 있다고 달리 생각했다. 신들의 시대, 영웅들의 시대, 인간들의 시대, 즉 신정체, 귀족정체, 인간적 정부가 있다고 생각했다. 후대의 사학자들 중에서 미슐레 같은 사학자는 비코(Vico, 1668-1744)를 역사학의 창시자로 꼽는다. 비코의 활동 시기도 자연의 이법(la raison)인 빛의 시기였다. 그리고 이런 사유의 확장은 프랑스 사회학의 창시자인 꽁트(Comte, 1798-1857)에게도 나타난다. 그는 인간의 진보에서 있어서 우선 신학적 단계에서 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서 실증적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이런 진보의 사유는 신의 명령(계율)과는 다른 시대에서 달리 사유하기에 여기에 들어섰음을 알린 것이다. 이 계보에는 맑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며 프랑스 사상가들은 인류가 스스로 평등과 자유를 실현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를 현실적으로 실천해 봤다. 이런 노력의 일부가 미시시피강 유역에서도, 소련의 콜호스, 이스라엘 초기의 기부츠에도 있었고 쿠바의 자생적 경제에도 있다. 농본 사회인 프랑스와 달리 산업사회의 산업가가 주도세력인 영국에서는 식민지 지배를 통하여 산업과 상업이 국가의 부와 인민의 안녕과 편리(유용성)를 가져다준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런 상층의 사고논리의 허구를 뚫어본 맑스는 과학적 공산사회를 주장하면서, 역사의 발전은 원시공산사회, 고대 황제(참주)제의 노예제, 중세 영주의 봉건제, 근대 산업사회의 부르주아 자본주의, 그리고 플롤레타리아(인민)가 산업도구를 지배하는 공산사회로 나갈 것으로 보았다.

이런 발전적 역사관은, 역사는 흐른다는 관점을 통해 어떤 진보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발설하고 정리해 나간 비코의 『새로운 과학』(1725)으로부터 우리 시대에 까지 겨우 300여 년이 지났다. 맑스로부터 150년 정도이다. 들뢰즈/가타리가 인간의 역사를 신석기 시대가 시작이라 치더라도 만년의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비해, 길게 잡아도 300여 년 사이에 인간의 역사에 대한 통시적 관점이 생겨났다. 서양사상사에서 달리 생각하기란, 어찌 되었건 문자의 등록, 청동기든 철기든 간에, 도구의 활용과 전유, 통치의 체제, 정치제도 등에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왜 들뢰즈/가타리인가? 바로 인류 삶의 과정은 자연의 입법(la raison)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흥미롭게도 만년 전부터 하나의 사물이 도구와 무기라는 양면성을 지녔다고 보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모든 생성체는 양면성(다양체)이상 일 것이다, 파라노이아가 아니라 스키조가 기원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도구 사용이든 무기 사용이든, 자연(지구 위에서)에서 토지와 토지 위에 식물과 동물, 즉 재배와 사냥에 연관된 것을 먼저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류에게서 도구/무기라는 과정은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고, 그리고 도구/무기를 통한 생산력의 발달은 제도 또는 체제를 갖추어 집단을 형성하였을 것이고, 그리고 그 집단에 우두머리 또는 참주의 등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두머리든 참주(황제)든 어떻게 있어 온 것인지는 역사 이전에는 유적이 말할 것이나, 도구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철기문화가 인민들에까지 통용되기 전까지는 참주의 시대가 지배적이라고들 한다. 참주제에서도 인간이 토지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으며, 이런 감성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토지와 물(강)을 통한 생산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토지 생산에서 철기는 생산력을 높여주었고, 참주는 무기의 사용으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참주에 맞는 제도를 만들었다. 들뢰즈는 참주가 – 아마도 무기 생산을 쥐고 있는 대장장이와 우두머리의 결탁이라 여긴다 – 갑자기 도래했다고 한다. 그 참주(황제)의 시대에 인민은 제도와 관습을 몸에 각인하고 살아야 했다. 문자가 지배적이 되면서 상층은 각인된 문자에 의해, 모르는 인민을 제도하고 명령하면서 터전에 묶어 두었다. 그러나 (움직이는 또는 욕망하는 존재자들인) 인민은 삶에서 토지의 능력과 배려(기후이지만)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제도로서 참주제는 성의 높이와 넓이로서 지배력을 강화하였고, 인민은 그 지배력의 바깥에서 삶과 활동을 이어갔다. 토지의 시대에서 참주는 자연의 변화와 인민의 흐름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단지 강압적으로 몰살하는 것을 규준(코드)으로 삼았다(얼마나 많은 참주가 도시를 불 싸지르고 멸망시켰던가?). 참주제가 세습을 한다고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참주제는 제도의 확장과 균형을 맞추어, 상부층(행정력)을 구성하는 군주제로 변환하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이런 군주제에서, 18세기 절대 왕정에 이르기까지 또는 19세기 짜르(또는 영국의 빅토리아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에 이르기까지 전제정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토지의 지배력 때문일 것이다.

토지의 산물과 교환의 한계를 넘어서, 기술의 발전으로 산업의 생산물들은 노동력의 투여 이상의 것을 생산하였다. 이것을 잉여라고 부른다. 잉여생산을 소비하는 대상을 찾는 것이 식민지 개척이기도 하다. 19세기 유럽에서 산업사회의 100여 년은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며, 참주제의 변형으로 국가의 등장 시기이며, 국가의 군대를 통하여 식민지를 수탈하였던 것이다. 토지의 기나긴 시대를 지나, 군주제(참주제가 아니라)의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제도 시대로 전환하였다. 서양 사상가들 중 일부는 인간의 행복과 자유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선전하였지만, 그것은 상층부의 상업과 수탈의 자유이며, 식민지 인민에 대한 억압이었다. 참주의 폭력과 달리 국가의 억압은 산업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과 의료, 군대와 감옥이라는 훈육제도를 체계화 하였다. 이로부터 인민에게 억제를 심었다. (니체는 긴 종교사의 분석에서, 참주시대의 원한을, 크리스트교의 지배력 강화를 위하여서는 신자들에게 원죄를 심었다. 전기의 억압에서 후기의 억제로 바꾸었다. 국가는 억압에서 억제로 바꿀 것이고, 억제에서 프로이트가 등장할 것이다).

서유럽은 이런 과정을 여러 세대를 거쳐서 조금씩 변화하였고, 두 차례 대전쟁 과정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세계의 재패로서 “제국”을 형성한다. 달러라는 제국을. 양차 대전이 이후 질서의 재편에서 과거의 생산도구의 장악(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금융의 지배(제국의 탈코드화)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들뢰즈의 설명을 간단히 보면, 토지의 시대, 국가의 시대, 제국의 시대로 요약된다. 서양이야 이런 시대를 오랜 역사, 몇 세기, 몇 세대를 거치면서, 과정의 과거와 현재라는 단계들이 있는 편이지만, 우리나라는 묘하게도 토지의 시대에서 중국의 참주제와 연관 속에서 군주제를 유지하다가, 19세기 말에 갑자기 산업사회가 일제로부터 들이닥쳤다. 마치 토지 제도 위에 참주가 침입하듯이, 제국주의가 지배하였다. 이런 역사적 비극이, 특히 남녘의 120년 굴곡의 역사 속에 있다. 일제 참주제의 식민지 총독이 나가고, 미국이란 제국이 들이닥쳤다. 인민이 스스로 흐르는 과정 안에서 세대를 거쳐서 삶의 터전을 각인하고 제도로서 등록하기도 이전에, 참주와 같은 식민지를 지배하는 군대가 상부에 자리를 차지하고 명령과 억압을 한 것이다. 인민이 일제의 각인에서 제도 방식을 우리 입말로 등록할 수 없었지만, 이 다음에 우리 입말을 세우기도 전에 상층에서 영어가 지배하고 명령하는 제도가 들어선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인민이 스스로 등록할 방법을 찾기도 전에, 미군정은 일제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의 입말과 등록을 허용해 주는 척하면서, 그들의 영어 규준과 코드에 맞게 정리하고 적용하게 만들었고, 자본의 전유처럼 사고에서도 전유하게 되었다. 즉 우리 입말은 영어의 하부로서 토지에 사는 인민의 보조물일 뿐이었고, 요상하게도 외래 종교의 경전이 이런 지배방식의 중심을 이루었다.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보다 더 많이 교회를 세웠다.

들뢰즈가 말한다. 참주는 하나(지배방식)가 오고 그리고 갑자기 모든 분야에서 참주파들이 들어와서 장악한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골짜기에도 교회가 생기는 것으로 보아 우후죽순 생겨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제국은 보다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토지체에서 산업화로 전향시켰는데, 산업화의 방식이 일제의 잔재와 같은 방식일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참주는 일제 제국주의 시대에 인민을 전쟁물자 생산의 도구에서, 미제 제국의 산업화의 도구로 전환시켰다. 토지의 인구를 산업화의 도시로 몰아가면서 제국의 식민체제는 제도상으로 확장되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관점이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저 곤륜산맥에서 환시대로부터 단군세기라는 고조선의 시대는 토지의 시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 좋은 토지를 찾아 온 종족들은 동쪽의 땅이 살만하다는 것을 느꼈으리라. 적어도 삼국의 시대에는 철기를 잘 다루는 쪽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을 것이고, 산맥들로 분리되어 있는 토지에서 황제제가 아니라 서양의 영주들과 군주제에 맞닿아 있는 고려시대의 군주제에서, 유학의 제도와 상층의 사대부 무리들이 형성되면서 조선시대의 군주제를 이끌어 나갔을 것이다. 이런 군주제는 토지를 토대로 하였기에 인민의 소중함도 그나마 느꼈을 것인데, 말기에 상층의 주도세력(majeur)이 인민의 흐름에서 벗어나 일제에 협력하거나 또는 그들에게 부역하기에 이르면서, 우리 스스로 근대화와 부르주아 형성의 길을 놓쳤다고들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가슴 아픈 역사라 한다. 그래도 상층의 일부와 인민들도 일제에 부역하지 않아서 입말과 삶의 등록방식이 그나마도 남아있었고 해방되었다.

미제에 부역하는 자들이 입말을 영어로 바꾸기 위해 우리 입말을 살려두는 척하면서 제도를 제국의 하부제도로 변형하였다. 일제와 미제의 방식을 우리 스스로 수용하거나 또는 우리 방식으로 변형할 시간과 노력을 갖기도 전에, 이미 일제에서 익숙했던 상층의 부역자들이 미제로 사고방식으로 갈아탔다. 이 갈아타기는 기독교를 이용했다. 영어란 곧 크리스트교 경전의 영어가 언어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우리말도 그 번역어가 주인이 되었다. 지식인들은 우리식(?)으로 진리와 학문의 발전을 위한다고 일본에서 서양으로 갈아탔지만, 자기 터전 없는 지식은 독일식에서 미국식으로 바꾸었다고들 한다. 그런데 미국은 독일지식인을 수용하여 만든 도구주의 입장을 미국의 것이라고 여기지만, 독일식에다가 영국 공리주의를 보탠 미국식 철학을 만들었다. 이런 것을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다. 서울대가 렘프레이트의 “철학사”를 번역한 것도 같은 일방향(bon sens, 양식)이다. 이런 제국으로서 미국은 로마제국의 식민지 지배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제3세계를 지배하려 하였다. 일제와 미제를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우리는 자연의 이법 속에서, 그리고 우리 역사 속에서 “뭣”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환과 단의 나라, 고조선의 이야기기를 지층을 통하여 창안하고, 불교 천 년과 유교 오백 년의 이야기도 우리 토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을 이어가면서, 새로이 전개되었던 20세기의 근대화를 넘어서 21세기 규소의 시대에 맞는 입말과 문화, 여러 학문들을 흥미진진하게 혼성(조성, la composition))해야 할 것이다. 그 노력의 과정에서 행복도 찾을 것이고,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훌륭한 인물들과 호걸과 군자들도 만날 수 있으며, 현자와 선인도 배출할 수 있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 것이다. 그런 시기가 도래했다. 과거의 한문으로 된 우리 이야기를 더 많이 번역하고 이야기를 만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또 생산하고 창조하여, 흐름들을 연결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무능하고 사적 이익만 챙기고, 강압적인 윤석열이라는 인간이 얼치기 참주 짓을 하고 있다. 뭐, 세상에 회자되는 이야기로 윤석열은 박근혜의 무지하고 무능함, 이명박의 이기적이고 사악함, 전두환의 기괴함과 요사함을 겹쳐 놓은 인물이라 한다. 이를 퇴진시켜야 한다. 선거라는 소환권을 가지고 끌어낼 수 있는 기회이지 않는가? 인민은 언제나 토대이며 최종심급이다. 항상 소환권이 있어야, 참주가 아닌 착한 위정자를 만들 수 있는데, 그런데 소환권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력인가? 그래도 지금까지 120여 년 동안에 우리에게 각인된 것과 등록된 것을 많이도 메꾸었다. 이것들을 엮어서 혼성하면서(composer), 우리 스스로 제도 상 필요한 인물을 선출해야 할 것이다.

인민은 토지와 같은 토대이기도 하고, 인민이 산업과 기술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기도 하고, 산업사회와 제도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야 국가든 공산사회든 이루어질 것이며, 이런 노력으로 만든 체제에서, 프랑스 혁명가인 루이 블랑이 말했듯이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서, “필요에 따라” 필수품을 받는 즐겁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학습 수준과 노력하는 활동은 이런 나라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된다.

누가 이 나라에 눈 먼 돈이 많다고 했는가? 그 말하는 자가 도둑이며 악마이다. 우리 전통에는 청백리가 있고, 서양에서 귀족의 의무(노블레스 노블리제)가 있다는 것은 신의 세계 또는 신앙과 무관하다. 제국의 원리가 있다고 가르치는 크리스토스 신앙은 서양에서도 서서히 물러나고, 세계사의 부분으로서 역사와 사회, 정치 경제가 바뀌고 있듯이, 규소의 시대에 걸 맞는 삶의 터전과 체제를 새로이 혼성(다양한 분야의 조화로운 협약과 연대)해서 만들 능력과 재원이 인민들에게 충분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권능으로 상층의 억압 된 표면을 뚫고 솟아나는 용출선, 곧 저항이다. 이런 저항들이 용출선을 변곡점으로 만드는 것도 인민이다. 인민이 스스로 변곡점의 마루를 만드는 것이 혁명이며 최종심급이다. 혁명의 미래를 성취한다고 말하는 자는 사기꾼에 가깝고, 들뢰즈가 보듯이, 혁명은 과정이며 변화이다. 어쩌면 조국혁신당이 이 시대의 용출선처럼 표면 위로 솟아났다. 문화에서도 삶의 터전에서도 용출선이 도처에서 솟아나고, 윤석열을 탄핵하려는 변곡점을 거치는 과정이 변혁(變革)이며, 이 변역(變易)에 수적으로 다수이나 권력 상으로는 소수자가 인민이 있다. 벩송은 자유가 간헐적으로 솟아난다고 했는데, 들뢰즈 식으로 보면 혁명은 간헐적으로 솟아나 표면을 매끄럽게 흐른다.

인민이 스스로 일어나는 저항, 항거, 봉기, 혁명은 인민의 미덕이다. 이를 혼란, 소요, 사태, 반역이라고 강압하고 억압하는 체제는 사악한 체제이다. 현대에서 이런 못된 말을 하는 자들은 마남사냥의 시대에서 교황청보다 사악하고 기괴한 악마들이다. (5:25, 57NLIJ: 6:36NLJ)

***덧글 ***

# 달리 사유하기.

오늘 점심시간에 언론을 보니, 도주 이종섭의 귀국과 회칼 황상무의 사퇴를 건의한 것이 한동훈이라 한다. 그리고 한동훈은 민심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아직도 인민이 최종결제권자임을 무시하고는 민심을 반영했다고 한다. 인민은 토대(심층)이자, 최종심급이면서도, 심급의 과정에서 범위를 확대해가는 결재권자이다.

윤석열은 참주행세를 한다. 참주도 아니면서 말이다. 참주(황제)는 제국을 가진 쪽에서 참주이지, 결제 받고 지배 받는 나라에 참주란 없다. 그는 참주의 지시에 따른 식민지 지배의 총독 역할을 할 따름이다. 이 총독이 자기 나라를 제국에 맡기려는 점에서 부역자이고, 이 나라를 제국에 넘겨주는 자들은 매국노들이다. 윤석열은 부역자 또는 매국노의 길을 갈 것인가? 인민이 이를 소환하고 심판하는 최종심급에서 그의 지위를 박탈할 것인가? 박탈과 더불어 친인척의 부정 취득의 재산을 환수하는 것은 인민의 손에 달려 있다. 극우들은 미국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을 제국의 부역자이기에, 심판대 위에 세워야 한다.

반영이란 중국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뜻으로 물 그릇을 들여다보는 것을 감(監)이라 하고, 역사를 통시태로서 흐름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거울을 보는 감(鑑)이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이 관리 등용의 과목으로 나중에 들어왔다고 한다. 유럽의 중세에서 비추어 보는 것을 스뻭뀔라시옹(speculation)이라 하는데, 사변(思辨)이라 번역했다. 스뻭뀔라시옹은 라틴어 스펙쿨라시오(speculatio)에서 온 (크리스트교 지배하의) 중세의 용어이며, 관찰하다 또는 거울에 비추어보다는 의미라 한다. 상층(재배층)이 심층(인민)을 내려다보는 것이 관찰과 거울 비추어보기인 셈이다. 한동훈도 그 용어를 썼다는 의미에서 서양 중세의 크리스트교 지배 하의 방식을 드러낸 것이다. 인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겸허히 그에 따르겠다고 해야지. 조선시대 용어로 이종섭을 압송하고 황상무 파직해야지.

인민이란 용어는 로마시대 네 구역 중의 하나에서 생긴 용어라고 하는데, 다수의 인민(권력의 소수자)은 황제(참주)제에 묻히어 표면 밑으로 침잠하여 흘렀다. 성직자들이 인민을 졸로 보고 십자군을 독려하던 시대에, 프랑스에서 알비파의 거센 저항에서 있었으나 도시 자체가 몰살당했다(19세기의 중국에서 마치 태평천국의 항쟁처럼). 표면으로 저항과 항거는 르네상스의 지식인들, 브르노와 갈릴레이에게도 있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인민이 표면 위로 오른 것은 “빛의 시대(Les Lumières)”(계몽으로 번역한 것은 인민을 교화의 또는 훈육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이다. 즉 빛이 신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연의 보편편재라는 실재성을 깨닫는 시대에서야 가능했다. 사회에서 또는 제도에서 보편편재는 인민에서부터라는 자각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인민이 수적으로 다수이지만 폴리스(성내에서)의 사대부 또는 부르주와에 비해 힘이 없었기에 소수자(mineur)라 불렸다. 통시적으로 인민이 인구 수에서 소수인 적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역사적으로 그 인민이 빛의 보편편재의 실재성을 드러낸 것은, 지식분자들이 제3신분임을 자처하였고, 프랑스대혁명을 일으키면서 가능했다. 이 혁명의 4년을 지속하고, 다수자(majeur, 귀족층)에 의해 역전 당하고 난 뒤, 인민은 또 다시 표면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4년 이후 표면의 균열을 내고 나온 용출선이 있었으니, 바뵈프(Babeuf, 1760-1797) 등이 결성한 “평등당”이었다. 이들도 혁명파들처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이후로 소위 말하는 저항운동의 조직체(여러 계절사)들이 있어왔고, 우리나라에서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극우는 이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지만). 인민(소수자, 인구의 다수)의 흐름은 계속해서 흘러, 프랑스 19세기는 “혁명의 세기”가 되었다. 이 과정들은 인민의 ‘반영’이 아니라, 인민의 저항, 분출, 항쟁, 발산, 혁명이었다. 프랑스에서 누가 감히 소요니 사태니, 반역이라 말하겠는가?

여전히 구체제 또는 참주제의 잔당에게는 인민의 발산이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정지된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인민은 빛처럼 움직이며 펼치고 퍼져간다. 그 인민은 심급의 과정이기도 하고, 결국에는 최종심급이다. 이번 총선에서 인민의 결제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인민의 역사적 과정은 계속 중일 것이기에, 5년의 권력 윤석열과 그 하수인들이 겁을 먹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도 안다. 인민의 결제가 대선, 총선, 지선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재권뿐만 아니라 소환권, 헌법 제정의 발의권까지 인민이 언젠가는 가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인민은 언제 어디에나 있으며, 빛의 보편편재처럼 인민의 권능 발현은 인간이 각성해 감에 따라 이루어지리라. 그 각성 속에 자유가 있다. (8:09, 57NL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미학산책38-낭만적 예술 장르가 가능한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8-낭만적 예술 장르가 가능한가?

1) 낭만적 예술 장르

헤겔은 예술의 역사적 형식을 예술이 표현하려는 정신과 예술 작품 사이의 기호적 연관관계를 통해서 규정했다. 세 가지 기호의 형식 즉 상징, 현상, 가상에 따라 세 가지 예술 형식이 출현했다. 그것이 곧 상징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이었다.

 

헤겔은 심지어 예술 장르조차 세 가지로 나누어, 상징적 장르, 고전적 장르, 낭만적 장르로 구분했다. 그것은 작품과 정신의 관계와 유사하게 질료가 의미에 대해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에 따른 것이다. 앞에서 건축의 질료인 무규정적 매스는 그 의미를 자기 밖에 지니므로, 상징적 장르다. 조각은 구체적 물질성이 질료이니, 그 자체에서 정신적 형상을 표현할 수 있다. 조각은 고전적 장르이다.

 

그렇다면 낭만적 예술장르에서 질료는 무엇이며, 그것은 의미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그것은 낭만적 예술 형식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 것일까?

 

낭만적 예술 장르로 헤겔이 포괄하는 장르는 회화, 음악, 그리고 시문학이다.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예술 장르가 낭만적인 장르에 속하게 된다. 이런 다양한 장르는 언뜻 보기에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어떤 하나의 공통적인 질료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조차 든다.

 

2)

헤겔에서 회화의 질료는 색채이고, 음악의 질료는 음이다. 시문학의 질료는 음소나 문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언어적 관념[표상]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색채나 음은 물질적인 것이다. 반면 언어적 관념은 물질적인 것에 대립하는 관념이니, 그 사이에 어떤 공통성이 전혀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헤겔의 자연철학적 관점에서는 생각이 달라진다. 헤겔에서 색채나 음은 언어적 관념은 아니지만 일종의 관념적인 것이다. 우선 색채를 보자. 색채는 빛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표면에 반사되면서 색채가 된다.[1] 색채의 원천이 되는 빛이 물체의 질량에 대립하는 순수한 에너지라는 점에서 헤겔이 색채가 이미 관념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음도 마찬가지다. 음은 사물 자체의 울림[Klang]이며, 그것은 마치 빛과 같은 것인데, 사물에 외적으로 존재하는 빛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서 나오는 빛 즉 진동[Erzittern]이다. 사물은 진동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지만 다시 자기를 회복하니, 헤겔은 이런 진동을 물질의 관념적 운동이라 규정한다[2].  

 

헤겔은 색채와 음을 언어적 관념과 마찬가지로 관념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것들 사이에 일정한 단계적 구분이 존재한다. 색채는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이 물체의 표면에 반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색채는 물체의 표면 공간을 떠날 수 없으며, 색채는 표면 공간에 의존하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3]

 

반면 물체의 진동인 음은 스스로 소멸하면서도 자기를 보존해 나가는 시간적 존재이며[4] 따라서 색채보다 더 발전된 의미에서 관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물질은 외재성{Aussereinandersein:  병존성}을 벗어나서 탈자적[Aussersichsein: 소멸성] 존재가 된다. 이런 탈자적, 시간적 존재조차 여전히 물질의 진동인 한에서, 물질성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언어적 관념에 이르러 음소나 문자와 같은 언어의 물질성은 관념을 지시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지시하는 관념은 물질성으로 완전히 벗어나 자유롭게 된 순수한 관념적 존재가 된다. 이런 관념성은 공간성뿐만 아니라 시간성마저 상실하고, 관념과 관념은 오직 논리적[언어적] 관계만 갖는다.

 

3)

낭만적 질료라 규정한 색채와 음, 언어적 관념이 관념적인 것이라는 공통성을 지닌다고 해서 단순히 그런 공통성이 그런 질료를 낭만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근거는 아닐 것이다. 관념적인 것이 낭만적인 것이 되어야 할 이유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낭만주의 예술형식의 경우 그 기호는 가상이라고 규정되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가상이라는 것은 현상과 같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면서, 의미를 지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자기 부정성은 달리 말하자면 자기 내 복귀를 말한다. 이를 통해 무한한 주관성으로서의 정신이 자기를 드러낸다.

 

구체적으로 말해 낭만주의 예술 형식에서 개별적 사건이나 특칭적인 주관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리얼하게 제시되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서 부정되는 가운데 정신 드러낸다. 개별적 사건이나 특칭적 주관성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운동성 속에 제시되기에 가상이라 규정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보카시오의 데카메론과 같은 모험 소설이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같은 성격 희곡일 것이다.  

 

낭만주의의 말기 즉 근대 자본주의 시대에 개별적 사건이나 특칭적 주관성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제시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런 긍정성은 무한성, 즉 자기복귀라는 자기 부정적 운동을 잠재적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대체로 외적 자연, 즉 이런 자연의 개별화되고 특칭적인 것으로 된 대상들이 표현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 이것들은 아무리 충실하게 취급되더라도 이 경우 이런 대상들에게는 자기 자신에서 정신적인 것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그런 대상은 이미 그 예술적 실현 방식을 통하여 정신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또 대상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생동적이고, 외면성의 최종적 극단에조차 심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함, 한마디로 내적 관념적 요소를 가시화한다.” [5]

 

이런 가상 개념을 생각해 볼 때, 헤겔이 색채와 음, 언어적 관념과 같은 관념적 질료를 낭만적 질료라고 규정했다면 그 이유는 그런 관념적 질료가 자기 부정적이거나 자기 복귀라는 가상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낭만적 질료에 대해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주관적인 것이 … 이 질료 속에 이입된다면, 내면은 내면으로서 비치기 위해 이 질료에서 한편으로는 공간적 총체성을 제거하고 또한 공간의 직접적 현존재를 그와 반대되는 것으로 즉 정신에서 야기된 가상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형상 및 그 외적 감각적 가시성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내용이 요구하는 갖가지 특칭화하는 현상방식들을 추가로 도입해야 할 것이다”[6]

 

여기서 헤겔은 낭만적 정신이 무한한 주관성이라는 전제 아래서 이런 무한한 주관성을 예술적 질료가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질료에서 공간성을 제거하고 ‘정신에서 야기된 가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가상성 외에도 갖가지 특칭화하는 현상방식 즉 특수 기법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역시 전체의 핵심은 가상 개념에 있다. 낭만적 질료가 되려면 가상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4)

하지만 관념적인 질료가 가상적인 근거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관념적인 것이 가상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가상성이란 자기 부정성, 자기 내 복귀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관념적인 것은 이런 개념과 필연적 연관성을 지니는 것일까?

 

여기서 헤겔의 관념성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헤겔이 물질은 외재적[Aussereinandersein]인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여 상호 내재적이 되면 관념적으로 된다. 즉 어떤 것이 자기에 대립하는 타자에 의해 규정되면, 이 경우 타자는 자기의 부정이며 자기는 이 타자의 부정, 즉 이중 부정이 되면서 관념적인 것으로 된다.

“여기에 정립되는 관념성은 이중적인 부정으로서 변화를 의미한다. 물질적 부분이 상호 외부적으로 존립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부정되니, 그것의 상호 외부적 존재와 그 응집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관념성은 서로를 지양하는 규정성의 교체로서의 관념성, 물체의 자기 내부에서의 진동 곧 음이다.” [7]

 

이처럼 자기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 이제 의미는 개별적인 것 그 자체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관념적인 것은 오직 상호 관계를 통해 타자를 통해서 자기가 규정되니, 이것이 관념적인 것에서부터 가상적인 것이 출현하는 근거가 된다. 관념적인 것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축이나 조각에서 물적 질료는 그 의미가 상징적이든 고전적이든 간에 개별적 질료가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 개별적 질료는 서로 독자적인 것이며, 비록 외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하더라도 그 관계는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념적 질료인 색이나 음, 그리고 언어는 그 자체로서 고립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항상 타자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이런 질료는 개별자 자체로서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항상 서로 대립하는 질료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예를 들어 빨강색은 파란색이나 노랑색에 대해서 규정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빨강색은 이런 파란색이나 노랑색과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헤겔은 회화의 근본적 성격을 설명하면서 색채의 마법을 서술한다. 이 색채의 마법이란 곧 여러 가지 색채가 상호 대립과 조화를 통해 전체적으로 정신적 형상을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음악의 음도 마찬가지다. 도미솔은 각자 고유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도미솔은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규정되며 따라서 각자의 의미는 이런 음들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헤겔은 건축을 얼어붙은 음악이라 했듯이 음악은 음들로 이루어진 건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개별적 질료 사이의 반성적 관계는 언어적 관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개별 단어는 항상 다른 단어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단어가 그런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등장 이래로 일반 상식이 된 것으로 보인다.

 

5)

물론 색채와 음, 언어적 관념 사이에서 각각이 갖는 상호 관계는 다르다. 색채는 다른 색채와 공간적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음과 다른 음은 시간적 관계 속에 있다. 색채나 음에서 그 관계는 마치 역학적인 인력과 척력의 관계처럼 대립과 조화, 또는 비례라는 단순한 수적인 관계에 머무른다. 이런 관계는 감각적 감정을 건드릴 수는 있지만, 이것을 통해 구체적 사태를 그것도 생성 소멸하는 운동 속에서 그려낼 수는 없다.  

 

반면 언어적 관념에서는 이제 주어와 술어라는 고유한 언어적 논리적 방식이 출현하게 된다. 이런 관계는 가장 관념적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사태를 그려낼 수 있고 그 사태를 운동하는 것 속에서 그려낼 수 있으니, 예술 가운데 가장 풍부한 질료가 될 수 있다.  

 

이처럼 관념적 질료는 반성적 상호 관계 속에 있다. 그것은 이제 그 자체로서 규정되지 못하며 타자에 대해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관념적 질료는 자기 부정성이나 자기 내 복귀라는 성격을 지니게 되니, 헤겔은 이런 관념적 질료를 가상적 질료라 하면서, 낭만적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1] 이 빛은 물질적인 것이지만 이미 물질적인 것이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니, 헤겔에 따라면 빛은 “물질적 관념성”, “불가분적이고 단순한 탈자태[Aussersichsein]”, “물질의 자아[Selbst der Materialitaet]”이다. (헤겔, 철학강요, S. 280)

[2] 이 진동은 “물체에서 나타나는 물체의 관념성[am Materiellen als dessen Idealitaet]” 또는 “역학적인 영혼성[mechanische Seelenhaftigkeit]”이다. (헤겔, 철학강요, S. 297)

[3] 아래 구절을 참조하라. “동시에 빛과 상이한 어두운 것[물체]은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한, 빛은 이런 일단 불투명한 것의 표면에 관계한다.” (헤겔, 철학강요, S. 280)

[4] 아래 구절을 참조하라. “규정성의 특수한 단순성, 이 우선 내적인 형식은 물질적인 외재성[Aussereinandersein] 속에 잠겨 있던 것을 뚫고 지나가면서 그의 외재성이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 자유롭게 된다. 이것을 통해 물질적 공간성이 물질적 시간성으로 이행한다.” (헤겔, 철학강요, S. 297)

[5] 미학강의 3, 18쪽

[6] 미학강의 3, 18쪽

[7] 헤겔, 철학강요, S. 297

헤겔미학산책37-조각의 회화화[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7-조각의 회화화

 

1) 고전 이전

헤겔은 조각의 발전 과정을 건축처럼 예술형식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 로마 시대 고전적 조각을 기준으로 그 전과 그 후로 나누었다. 고전조각의 특징은 이상성과 생동성, 그리고 자족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전과 그 후의 조각이 지닌 특징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헤겔은 고전 이전의 조각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집트 조각을 들고 있다. 이집트 조각은 아직 정신이 자각되지 않은 상태이어서 정신은 동물적 형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적 형상이 출현하더라도, 머리는 여전히 동물적인 형상을 지닌 이집트 신이나 몸은 동물의 형상이지만 머리는 인간의 형상인 스핑크스에서 그런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형상은 경직되었으며, 양식적인 것에 머물렀으니, 구체적 생동성을 결여했다. 진지했으나 생동성을 결여했다. 그 결과 조각 작품과 그 의미 즉 정신과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었고 그 의미는 비밀스러운 것으로 남아 수수께끼적인 상징에 머물러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가의 능력이 서투른 것 때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다른 부분에서는 고도로 사실적인 모습도 출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경직성과 양식성은 그 시대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보인다.

이집트 시대 정신은 아직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므로 예술은 상징적 형식에 빠졌고 그 결과 경직성과 양식성이 출현했다. 즉 이집트 조각은 “신상과 그 비밀스러운 고요함에 관한 근원적 직관”을 반영하는 것이니 그런 작품에서 나타나는 부동성 즉 “상황이나 행위의 결여는 이런 [정신적] 부동성과 불가분으로 결부되어 있다.”[1]

헤겔은 이집트 사회와 유사한 그리스 로마 이전의 민족 즉 에기나인이나 에트루리아인의 조각에서도 똑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2) 조각의 쇠퇴

조각은 구체적 질료를 사용하므로, 아무리 구체적이고 생동적이라고 하더라도 정신 자체의 특수한 주관적 본질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개인의 “고통과 고뇌, 가책과 참회, 죽음과 부활, 정신적이며 주관적 인격, 깊은 감정, 사랑, 가슴과 심정 등”[2]을 표현하는 조각은 발견하기 어렵다. 조각의 질료를 가장 잘 다루었던 고전 조각조차도 일반적 정신을 정지 상태의 형상 속에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니, 움직임을 표현하는 일이나 또는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해는 것은 쉽지 않다.

 

조각은 “다만 개별성이 지닌 일반적인 것만을 표현할 수 있으며, 즉 그것이 겉의 육체에 표현될 수 있는 한에서 비연속적인 특정한 한 순간 속에서만 표현할 수 있으며, 그것도 생생하게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행위가 아닌 부동자세로만 표현 할 수 있다”[3]

 

조각의 이런 한계 때문에 조각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쇠퇴하기에 이른다. 낭만주의 시대 예술은 개인적 주관성의 특수성을 생성하는 운동 속에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조각은 예술의 주도적인 역할을 상실하고 점차 다른 낭만주의적 예술 장르가 지배적으로 된다.

 

“이러한 [낭만적] 주관성은 비록 외적인 것 속에서 현상하지만 그것을 그 특칭성에 따라서 독자적인 것으로 둘 뿐, 조각의 이상이 요구하는 것처럼 그것과 내적 정신적 요소의 융합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4]

 

낭만주의 시대에도 남아 있는 조각은 그 시대 정신은 낭만적임에도 불구하고 형상화의 방식은 여전히 고전적인 방식을 답습했다. 과거의 신과 영웅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와 성인이나 시민적 영웅의 형상이 등장하는데, 그 표현 방식은 그리스도와 시민적 영웅을 이상화한다.

그와 같은 시도는 르네상스 시대에서나 신고전주의처럼 그리스적 양식을 예술의 이상으로 삼았던 시대에 특히 유행했다. 성당을 장식한 성인 상이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나, 헤겔 자신이 찬탄을 금하지 않았던 라우흐의 괴테상 등에서 그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미학강의에서 헤겔 자신이 자기를 미혹했다고도 표현했던 미켈란젤로의 ‘나소 백장 능묘’도 이런 경향을 표현한다. 헤겔은 이 작품이 “고대인의 조형 예술의 원칙과 낭만적 예술의 영활 방식이 생산적 독창성으로 결합한다”[5]라고 한다.

 

3) 고전 이후의 조각

자체 내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각 역시 낭만주의 시대 리얼리즘적 경향을 따라 운동성과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헤겔은 그런 발전 경향을 명시적으로 서술한 바는 없으나 그의 서술 가운데 그런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런 발전은 청동과 같은 가소성이 풍부한 질료를 다루는 기술의 발전에 의해 가능해졌다. 청동은 이미 고대에서부터 조각의 질료로 다루어졌으나, “각종 표현에 쓰일 수 있으며, 또한 대단히 다양한 그 색조와 무한한 조형 가능성 및 유동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능성은 근대에 들어와서 고도로 발전했다고 한다[6].

이어서 헤겔은 조각 표현방식의 발전을 설명하면서, 군상과 부조를 거론한다. 조각은 운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의 개별 입상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조각품이 함께 어우러진 군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고전 시대의 말기에 등장한 라오쿤 군상 등에서도 그런 경향이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아무래도 낭만주의 시대 이후다. 특히 고딕 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조각상은 여러 성인의 집단적 인물군이다.

조각 작품은 부조를 통해 평면 위에 표현되기 시작하면서 연속된 평면 위에 드라마틱한 역사적 이야기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같은 사건이 서술한다. 헤겔은 이런 부조는 조각이 “회화의 원칙을 향해 의미 있는 발걸음을 뗀 것”[7]이라고 평가한다.

고전 조각은 하나의 독립적 작품이었다. 그것은 고유한 공간에 자립적으로 서 있다. 그러나 군상과 부조는 이제 그 자체 자립적인 작품이 되지 못하고, ‘건축의 장식물’로 전락한다. “성자들은 대개 탑과 내력 벽의 벽감 속이나 현관문에 서 있는 반면, …[성서 속의] 위대한 광경은 그 내적 다양성으로 인해 즉시 교회 정문이나 교회의 벽, 성수반 합창대석 등등에서 부조로 표현되었다”[8].

낭만적 조각의 또 하나의 경향은 주관적 특수성을 표현하려는 시도이다. 헤겔은 조각 장 마지막 부분에 서술된 기독교 조각에 대한 서술에서 이를 설명한다. 그 결과 역사상 실제 인물을 닮은 초상화적인 조각상이 곳곳에 세워졌으니, 이런 작품은 인물이 지닌 특수한 주관적 정신을 표현한다. 헤겔은 그 예로서 뉘른베르크 시장의 거위상인이나 그 외 성 제발트 교회에서 발견되는 조각을 들고 있다.

조각은 채색되고 과장, 왜곡되면서 회화를 닮아간다

“고전적 조각에서는 객관적 실체적 개별성이 중심점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여기서 ..묘사된 인간은 온전한 인간 즉 모든 것이 구비된 구체적 인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개성이, 주관의 전 영역이 현실의 무한한 권역에서 내용과 표현방식의 원칙으로 현상하려면, 그는 ..객관적 보편성으로서의 인간성뿐만 아니라….주관적 개체성, 인간적 약점, 특수성, 우연성, 자의 직접적 개별성, 열정 등등의 계기 역시 구비해야 하기 …때문이다.”[9]

 

이런 초상화적인 조각은 회화를 닮아가면서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하기 위해 과장이나 왜곡이 들어가게 되며, 무엇보다도 지금껏 배제되었던 색채와 눈의 시선이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주관화의 경향은 조각의 질료상 한계에 부딪히면서 예술적 표현의 또 다른 감각적 질료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곧 회화이다.


[1] 미학강의 2, 486쪽

[2] 미학강의 2, 494쪽

[3] 미학강의 2, 382쪽

[4] 미학강의 2, 495쪽

[5] 미학강의 2, 497쪽

[6] 헤겔은 구체적으로 프러시아에서 그런 기술이 발전했다고 말하면서 그네센의 청동교회문, 베를린과 블레슬라우에 있는 블뤼허 상, 비텐부르크의 루터 상, 쾨니스베르크와 뒤셀도르프에 있는 청동상 등을 들고 있다.

[7] 미학강의 2, 472쪽

[8] 미학강의 2, 496쪽

[9] 미학강의 2, 498쪽

헤겔미학산책36-조각의 형상화[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6-조각의 형상화

 

1)

앞에서 조각의 질료는 구체적 물질성이며, 그것의 형상화는 현상 즉 닮은 꼴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조각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앞에서 말한 건축의 발전 과정과 상이하다.

건축의 경우 그 의미가 내적 공간에 상징적으로 주어질 뿐이었다. 이때 내적 공간은 그 의미에 대해 수단적인 적합성을 지닌다. 내적 공간이 축조되면서 만들어지는 외면적 형태가 그 시대 정신에 의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데 건축은 이를 통해 상징적 건축, 고전적 건축, 낭만적 건축으로 구분된다.

반면 조각의 경우 그 질료인 물질성 자체가 정신을 직접 현상한다. 따라서 조각의 발전은 이런 현상 즉 닮은 꼴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는가에 따라서 구분된다. 헤겔은 이때 고전적인 표현방식 즉 이상화된 표현방식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할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조각에서 고전적 형상화의 방식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조각에서 고전적 형상화는 그리스 로마 조각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기준으로 한다. 고전적 형상화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아름다움 즉 조화와 균형에 있다.

고전적 형상화는 그리스 조각에서 잘 보이듯이, 부분적으로는 실제 대상을 구체적으로 모사한다. 그 구체적 모습은 창을 던지거나 뱀에 물린 것과 같은 운동하는 모습이며 그런 운동이 정점에 이른 한 순간을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 형상화는 매우 구체적인 생동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런 구체적 모습 때문에 고전적 조각은 자주 리얼리즘적 예술의 모범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고전적 형상화는 리얼리즘적 경향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리얼리즘은 있는 그대로의 실제 대상을 보여주려는 낭만적 예술 형식이 지닌 특징이다. 반면 고전적 형상화는 부분적으로 구체적인 사실적 모습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이런 이상적 관계는 조화와 균형에 따른 이성적인 비율이니 대표적인 것이 황금분할의 비율이다. 이런 비율 때문에 고전적 형상화는 미의 이상에 도달했으며, 그 형상화된 모습은 인간의 모습 가운데 가장 탁월한 모습을 보여준다.[1]

하지만 이런 탁월한 모습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이성을 통해 이상화하여 구현한 모습일 뿐이다. 그것은 아름답지만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플라톤적 이데아이다.

 

‟생명의 향기, 전체 부분들의 부드러움과 이상성, 합일의 정신은 영혼을 부여하는 정신적 숨결로서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2]

 

여기서 실체적 정신과 감각적 형상 사이에는 완전한 합일이 출현한다. 외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어느 것이나 내면이 스며들어 있으므로, 외적인 것은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헤겔은 이렇게 개체 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는 형상을 본격적인 조각이라고 규정한다.

 

“지엽 말단의 것도 합목적적으로 존재하며 일체의 것은 자신의 차별성, 고유성 그리고 탁월성을 소유한다. 그러하되 그것은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전체 속에서만 타당하게 살 뿐이니 편린들에서도 전체가 인식되며, 또 그렇듯 고립적인 부분이 온전한 총체성의 관조와 향유를 보장한다.”[3]

 

고전적 형상화가 그 부분의 관계를 이상화하는 까닭은 바로 이것이 고전 문화를 이끈 민족을 대표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개인이 아닌 통일된 민족의 정신, 실천적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표상을 통해서는 그리스 민족신으로 등장하며 예술적으로는 아름다운 이상화된 모습으로 현상한다.

 

3)

그러므로 고전적 형상화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이상화된 모습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 모습이다. 고전적 형상화는 두 가지 측면을 통해 한편으로 실체적 정신을 다른 한편으로 생동적인 모습 가운데서 표현한다.

실체적 정신이 어떤 구체적 모습으로 출현하는가? 그 생동적 모습은 예술가 자신의 개성을 통해 포착된 것이므로 여기서 예술가 자신의 탁월성이 드러나지만, 이 현상 자신은 정신이 자신의 내면성을 가장 완전하게 표현되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그 내용은 본래 대체로 신화나 전설 속에서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완전하게 표현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예술가의 개별적 독창성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동일한 내용이라도 예술가마다 독특한 표현이 출현하게 된다. 마땅히 예술가는 이런 극적인 순간을 형상화하기 위해 신체의 운동하는 모습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추고 이를 형상화하는 솜씨를 지녀야 할 것이다.

이런 생동적 구체적 모습은 예술가 자신의 독특한 관점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 속에 표현된 일반적 정신은 어느 경우에나 동일하니, 이런 점에서 일반적 정신은 구체적 모습에 대해 냉담하며 무차별하게 보이며 그 스스로 고요하고 단순하게 머무르는 것과 같다. 헤겔은 이런 특징 때문에 그리스 조각 작품은 대체로 명료하고, 명랑하고, 자족적인(자유로운] 느낌을 주게 된다고 말한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

“조각은 … 객관적 정신성 속에서, 독립적 고요 속에서,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벗어나서 포착하고 형상화한다.” “언제나 실체적인 것이 본질적 기초를 이루며,…신들과 인간성들의 영원성이 자의와 우연적 이기심을 벗은 채 그 맑은 명료성에 따라 표상되어야 한다.”[4]

 

생동성과 자족성은 어쩌면 서로 대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실체성이 강조되면 자족적인 느낌이 강화되며 반면 구체성이 강조되면 생동성이 강화된다. 같은 그리스 고전 조각이라도 초기에 실체성이 강조된 경우 자족적인 것을 넘어 엄숙하게 느껴지며, 그리스 말기에 이르면 조각 작품은 구체성이 더 강화되면서 심지어 매력적인 것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4)

그리스의 조각이 인간을 나체로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스 조각이 모두 나체는 아니다. 때로는 의복을 통해 단순히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부분을 가리면서 오히려 정신적인 것을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체는 “정신이 스민 인간의 신체성을 그 자체로 발전시키고”, “단순 감각적 욕구에 대한 냉담함으로 인해”, 명료하며 명랑하고 자족적인 느낌을 살리는 데 적합하다.

나체인 조각은 다루어진 소재에 그 순수한 이상적 모습을 표현하니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 경우에는 나체는 솔직함과 천진난만함을 표현하며, 영웅의 경우에는 용기와 강함, 인내를 표현하며 마지막으로 운동선수의 경우에는 유연성과 자유 자재한 신체의 놀림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조각이 색채를 거부하는 것도 이런 실체적 일반성과 관련된다. 회화에서 색채는 색채의 마법을 통해 주관적으로 특수한 정신의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다. 색채는 슬픔과 기쁨, 고통과 열정 등을 외부적 자극에 의해 변동하는 정신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조각의 경우 표현되는 일반적 정신은 고요하며 명랑하며 자족하다. 조각에서 만일 색채를 가미하게 된다면 일반적 정신의 고요와 자족을 해치면서 특수한 주관적 정신이 개입하게 된다. 그러므로 조각은 색채를 지운 순수한 색 즉 흰색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1] 미학강의에서 헤겔은 그리스 조각상의 얼굴 모습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코와 귀를 잇는 선과 이마와 코를 잇는 선이 직각으로 교차해야 하며, 이마에서 턱밑으로 이어지는 선은 두개골 천정과 직각으로 교차해야 한다. 등등.

[2] 미학강의 2, 411쪽

[3] 미학강의 2, 411쪽

[4] 미학강의 2, 394쪽

헤겔미학산책35-조각과 미술의 차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5-조각과 미술의 차이

 

1)

헤겔은 예술 장르를 질료의 특성으로부터 도출한다. 조각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조각의 질료에 관해서 앞에서 건축과 비교하면서 간단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건축의 질료는 공간적이고 연장적인 덩어리[Mass]이며 무규정적이고 연속적이었다.

반면 조각의 질료는 질적이고 규정적인 물질성[Materialitaet]이다. 조각은 덩어리가 지닌 물질적 특성을 이용해 정신을 형상화한다. 예를 들어 돌과 나무와 같은 사물이 지닌 자연적 특성 자체가 그 형상화의 수단이 되고 있으니, 헤겔은 조각의 질료를 ‘직접적인 것’이라 한다.

 

“[조각] 예술은 질료 속에서, 그것도 그야말로 직접적인 질료 속에서 정신적 개별성의 현상을 형상화하도록 요구 받는다.”[1]

 

물질성과 덩어리는 동전의 이면이다. 양자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떼어낼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건축적 질료가 외적인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듯이 조각적 형상은 일정한 연장성과 공간성 안에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건축적 공간이 그 외면적 형태에 상응하듯이, 조각 작품은 그것의 질료인 공간에 영향을 받는다. 이 공간은 주변의 환경 즉 조각이 세워져 있는 주변 공간으로까지 확장되며, 주변 환경에 의해서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관해 헤겔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조각은 그 환경에 본질적으로 관계한다. 조각상이나 군상은 특히 부조는 작품이 위치해야할 장소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작될 수 없다.”(미학강의 2, 380쪽)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원래(1546년경) 피렌체 대성당에 세워지는 12개 성서 인물상 중의 하나로 아고스티노에 의해 제작되었으나 완성되지 못했다. 그 후(1501-1504) 미켈란젤로가 이를 다시 다듬어 완성했다. 완성 후 세워질 장소에 관해 원래 장소로 가는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가 피렌체 시청 앞에 세워지게 되었다. 이것은 이 시기 피렌체 도시 내 벌어진 메디치 가문과 공화파 시민 사이의 갈등에서 민주파의 승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민주파는 다비드 상을 시청 앞에 세움으로써 독재에 대항하는 시민 정신을 상징하게 만들었다. 만일 다비드 상이 원래 인물군 속에 포함되었더라면, 아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2]

 

2)

조각의 질료가 지닌 성격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조각의 질료를 다시 회화적 질료와 비교해 보자. 조각의 질료가 구체적 물질성이고 이 물질성은 입체적 공간 속에 들어 있다면 회화의 질료는 단적으로 평면 위에 출현하는 색채이다.

색채는 빛에서 나오는데, 헤겔에서 빛은 물질이면서도 자기 내로 복귀한 물질적 중심, 자아이다. 이런 빛이 물체의 표면에 반사되어 나온 것이 색채이다. 색채가 존재하는 평면은 입체적 공간을 추상화한 공간이며, 조각에서 공간과 물질성은 상호 무차별한 것이지만 색채는 그 평면과 내적으로 합일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조각이 구체적 물질성을 질료로 하므로 더 구체적 형상화가 가능하니, 정신을 더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헤겔은 이런 생각에 반대한다. 조각의 질료는 구체적 사물인 한 그만큼 다루기 힘들며 실체적 정신의 일반적 측면을 표현하는 정도만 가능하다. 따라서 조각의 질료는 구체적 주관적 정신, 개인마다 특칭적인 정신을 표현하기 힘들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는 회화가 조각보다 더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조각의 질료는 색채이고 이 색채는 자기 내로 복귀한 빛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내적으로 다양한 색으로 분화되고 다시 하나의 빛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색은 분화와 통합을 통해 다양한 조합을 형성하면서 형상화를 이루니 여기서 색채의 마법이 출현한다. 이런 색채의 마법은 개인의 주관적이며 구체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헤겔은 조각의 질료와 회화의 질료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각의 대상은 형상이지만 이 형상은 사실상 구체적 인간 신체의 추상적 측면에 불과하다. 그 형식들은 특칭화된 색채와 행동들의 다양성을 갖지 못한다.” “조각은 이 점에서 회화에 뒤쳐진다. 왜냐하면 회화에서는 정신의 표현이 안색과 그 명암을 통해 한층 규정된 압도적인 정확성과 생동성을 얻기 때문이다.”[3]

 

3)

눈의 시선과 색채

조각의 질료가 건축적 질료와 회화적 질료가 구분되는 구체적 물질성[Materialitaet]에 있으므로, 이런 질료적 특성으로부터 조각적 형상화의 독특한 가능성이 제시된다.

조각적 질료는 그 자체 구체성을 지닌 것이므로 건축과 달리 간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인 방식으로 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 건축이 그 의미를 자기 밖에 지니는 것과 달리 그 의미를 자기 속에 지니게 되며 조각적 형상은 정신의 현상 즉 닮은 꼴이다. 그 때문에 헤겔은 건축은 상징적 예술이라면 조각은 고전적 예술이라고 한다.

조각적 형상화는 회화에서 나타나는 형상화와 구분된다. 회화적 형상화에서 형상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로 복귀하는 가운데 주관적 정신을 표현한다. 반면 조각적 형상화는 형상은 정신의 닮은 꼴 즉 현상이므로 그 자체가 정신을 가시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조각적 표현은 외면적이라고 말한다. 즉 “정신에 속하고 동시에 정신을 표현하는 신체 속에 정신이 고유하게 현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상자는 조각 작품 속에서 정신의 외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지, 조각 작품을 통해 정신 자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반면 회화의 경우 감상자는 작품을 넘어서 그 정신 속으로 직접 뛰어들게 된다.

 

[조각에서] “정신은 그 속[외면성]에 주입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외면성에서 자기 안으로 철수하여 내면으로 현상하는 것은 아니다.”[4]

 

이런 차이점 때문에 헤겔은 조각에는 눈의 시선이 결여된다고 말한다. 조각에서 눈은 영웅의 눈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뿐이니 굳이 눈동자를 그릴 필요는 없다. 눈동자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통로이며 내면이 그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각의 눈은 닫혀 있고 시선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회화에 이르게 되면 눈동자는 모든 나머지 신체가 자기를 넘어 복귀하는 지점이며, 그것을 통해 정신이 쏟아져 나오므로 눈동자는 열려 있고 시선이 빛을 뿜는다.

 

“조각의 형상에는 … 눈의 시선이 결여되어 있는데, 이유인즉 조각 형상이 가시화하는 정신은 신체에 잠긴, 그리하여 전체 형상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정신이기 때문이다.”[5]

 

조각에 시선이 없다 할 때 그런 조각은 대체로 고전적인 조각에 한정된다. 근대에 들어와 조각은 주관적 특수한 정신을 표현하려 시도한다. 이런 경우 조각은 다시 회화에 가까워지면서 눈동자가 등장하게 되니,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에는 눈동자가 따로 그려져 있다. 그럼에도 다비드 상의 눈동자를 통해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그의 눈동자는 눈동자이지만 그저 영웅의 눈동자를 닮은 외면적 가시적 눈동자이다. 그런 점에서 조각에서 눈동자와 시선이 없다는 헤겔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 미학강의 2, 379쪽

[2] 참고로 지금은 보존을 위해 원본은 우피치 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으며, 사본이 시청 앞에 놓여 있다. 피렌체 외의 지역에도 복사품이 다수 존재한다.

[3] 미학강의 2, 382쪽

[4] 미학강의 2, 384쪽

[5] 미학강의 2, 385쪽

달리 말하기 [천 하룻밤 이야기]

달리 말하기

–셋 또는 아홉으로 갈라지는 선들 중의 하나의 선을 만들며

2024 02 19 우수(雨水) 대동강 물도 녹는다는 절후이다.

옛날에 나 어디서 태어났냐고 꼬마가 물으면 아저씨들과 할배들은 놀리느라 농담 같은 이야기로 ‘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다리 밑에 거지들이 너의 아버지야’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네 엄마를 비하’하는 내용 의식이 숨어있다. 이런 이야기를 심리학 또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여성의 지위를 거지처럼 여기는 의도도 있지만 사실 여성의 다리 밑에서 태어났다는 비유도 함축하고 있다. 예전에 가까운 어떤이를 두고 내가 알기로는 괜찮은 사람이라 여겼는데, 왜? “그의 할배가 만주에서 개장사를 했지?”라고 나의 속 이야기를 물었을 때, ‘그래 개장사 한거야, 아직도 저러고 있지’라는 대답에 일제의 어려운 시기에 먹고살기 위해 만주로 피난 갔다가 돌아와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고로… 정도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청년 기를 지나 과거 역사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할 때였다. 사람들은 왜 ‘만주에서 독립운동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개장수를 했다고 했을까? 더욱 나이가 들어 일본으로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만주로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마치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는 농담조의 비유처럼, 왜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을 호명할 때 개장수라는 비하의 방식만이 남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재의식(무의식)이 궁금해 프로이트를 읽으면서도 ‘개장수를 하면 했지, 일본에 그리고 미국에 빌붙지는 않았다는, 그들에게 예속된 삶을 살지 않으려 했을 진대…’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다른 사상을 가졌다는 것을 일상적으로 말할 수 없는 시대와 터전에서, 그들은 엿장수나 하면서 살거나 또는 각설이로 나섰다는 풍자로_막걸리 타령으로 시름을 달래는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일흔이 가까워서야 풍자도, 아이러니도, 유머도 진솔한 사유를 하는 길이 아니라고 말했다. 들뢰즈는 “의미논리”를 쓰면서 정신분석학적 소설을 쓴다고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할 것인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달리 말하기를 대하 소설처럼 쓴 것이 “앙띠 외디푸스”라고 한다. 그렇다면 개장수라 말하지(부르지) 아니하면, 공산주의 운동했지라고 말해야 할 것인데, 말 못하는 사정은 무엇인가? ‘그 놈의 참주 외디푸스 때문이야’라고 두 철학자는 말한다. 달리 말하기, 그리고 그에 맞게 진솔하게 사유하는 길은 무엇일까? 토지와 자연, 그 위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대하를 넘어서 대양의 소설을 쓴 것이 “천개의 고원”이다. 달리 말하기, 달리 사유하기, 달리 살기, 혁명하기이다. 그래 빨강이다 왜, 파랭이 자식이….

   풍자를 하면서 자기를 빼고서 말하는 자조적 이야기가 파라독사라고 엘리스의 이야기를 비추어 누누이 말한다. 하늘나라에 환인과 환웅이 있다는 이야기도 파라독사이고, 극락에 미륵보살, 관세음 보살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도 파라독사이고, 천당에 베드로와 요한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도 파라독사라고 캐럴이 “훌륭한 나라 엘리스”에서 말한 것이다. 자기를 빼면, 또는 단 하나의 예외를 두면, 김건희든 윤석열이든 하나의 예외를 두면, 호롱 속에 지구를 담을 수 있고, 아라비아 이야기처럼 램프 속에 마왕도 담을 수 있는 것도 파라독사이다. 삶은 하나의 예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증거가 있으며, 그 증거를 수학적 증명이 아니다. 그 증거는 한번 있었는데, 또다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가? 어느 생명체도 죽고 난 뒤에 다시 산 증거는 없다. 수학의 증명은 다시 할 수 있다. 이 증명과 증거가 다르다. 신의 현존은 증명(demonstration)이 아니라 증거(prouver)라고 되어 있은데 요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 신의 존재 증명이라고 한다. 그게 거짓말쟁이들의 장난이다. 그 장난을 알아차리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은 온유하고 인내하며 등으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이지 아무르가 아니다. 아가페처럼 가진 것을 다 내어 주면, 어디에 교회라는 그런 건물과 재산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저네들의 사기꾼 같은 이야기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현존과 증거를 입말로 하자는 것이다.

   현실의 고달픈 삶에서 제도에 복속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고, 그렇다고 전쟁을 겪으면서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삶을 만든다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게다가 현실적인 삶에 동의하며 합류하기에도 마땅찮았을 것이다. 구속의 동네를 떠나서 사는 것이 개장수가 아니라 엿장수이고,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여 각설이로 나섰다는 이야기는 과거를 회복할 수도 없고,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도 없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자조일 것이다. 그나마도 민중신앙이나, 무당이나, 불교 같은 공동체 의식이 남아있는 것조차, 엿장수처럼 되었던 것은 토지체의 삶이 아니라, 기계 체계(기계체)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산업 체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인민이 일제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제도화되고 연쇄적 고리들로 연결된 기계조립 과정의 부속이 되지 않으면, 낙후되거나 게임에서 진 패배의 그늘 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근대화 과정이 있었다. 그럼에도 기개와 의리가 남아서 전국의 호걸과 현자인 척하며 거지로 나섰다는 인물들 사이에 연결이 있었으리라. 이런 이들의 저항과 항거가 역사에서 있어왔다. 이들이 입말을 하지 않으니 개발싸게같은 파랭이 자식들이 빨갱이니 친일파니 이승만이니 박정희 같잖은 소리를 한다.

    유일신앙의 종교들이 시골 골짜기 구석구석에까지도 스며들어 대종교, 무당(몸주가 단군), 불교 등을 마치 악마들처럼 몰아내고 토지와 터전을 차지했다. 백성들에게 새 학문을 배우게 하면서 지역과 사회를 서양근대화로 만들려고 하면서(게다가 악마화하면서), 불교 천년과 유교 오백년을 무시하고 잡 사상을 버리게 하기에 6,400년 역사를 달달외게 하고 졸개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면 취직도 하여 산업사회의 장점과 변화를 따라가 근대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근대화에는 우리가 스스로 일어나기 전에 일제가 참주(외디푸스)처럼 들어와서 4,500여 년 역사를 깡그리 다리 밑 거지처럼 만들고 산업과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루저들로 취급했으며, 미제는 한 수 더 떠서 우리 역사 자체를 없애는 것으로 인디언을 몰아내듯이 하고 있다. 일제의 부일파와 미제의 숭미파 속에서 개장수나 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부일자들과 숭미자들은 해방 공간의 우선 일제의 잔재들(부일파와 종일파)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전쟁 후에 산업화에서 일제의 구식 산업화를 미제에 맞게 신식으로 바꾸어 놓았다(숭미파와 모미파). 이런 부류들이 21세기에는 이명박근해와 윤석열 정권에서 이어지고 있다. 달리 말하기에 입말은 제국의 언어가 아니다. 이미 훈민정음에서 말했다. 나라 입말(말씀)이 중국과 다르다라고 말이다. 입말은 대상화가 먼저가 아니라, 삶에서 일반화가 먼저이다. 삶에서 훌륭타와 탁월하다는 역사에서 영웅과 천재라는 대상과 다르다. 증명이 아니라 증거는 삶에서 일반화이다. 이런 의미를 도덕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제와 미제를 거치면서 도덕성이 밥먹여주냐고 한다. 이런 이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무엇을 부역하고 있는가 숭배하고 있는가. 고교생들의 수능에서 사유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대상으로 지적하게 한다. 이렇게 식민지 지배에 노예처럼 살게 하는 것이 논리학의 체계이고, 그 논리학에 맞는 지배방식이 제국의 황제의 체제이다. 이에 굴종이 살길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그 단어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론이다. 의미가 포장의 기술이 아닌가, 삶에서 기호가 발현되는 것과 전혀 다른 길이다.

   포장의 기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있었지만, 당대의 스토아 학자들이 삼단 논법의 항들은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비판 했을 때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도 상위 류의 개념이 상징 또는 사고 추리의 극한에서 성립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일반화의 개념을 소쉬르가 기표라고 했을 때, 이미 상징, 개념, 용어, 항목은 현실의 경험에서 있는 실재하는 나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실재가 아닌 용어나 항목이 현실적 대상인 것처럼 속이고 있는 것이, 천국이니 천사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이 현실에서 “있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사유가 아니라 상상이며, 추상의 항들은 공상에 가깝다. 그 망상을 진실인 것처럼 은폐하기 위해 쓰는 용어가 초월이라는 단어이다. 초월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초월적 현존이 없다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음으로 만드는 재주는 자기를 제외한 황제(외디푸스)의 것이며, 오로지 예외적인 신이란 용어에만 속한다. 상상을 넘어서 추리하는 극한은 망상이다. 누군가가 우주의 넓이가 25억 년 광년의 거리라고 하면서 실재인 것처럼 말하는데, 그게 상상의 극한이고, 그 극한을 넘어서는 “뭣”이 있는데 라고 물을 때, 그 언어와 과학의 논리가 추리를 넘어서 망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해 보라.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는 도구와 상상 때문이고, 과학적 도구의 한계라면 수긍이나 가지만, 상상의 한계는 그보다 훨씬 넓고 멀고 깊다.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추리하는 사고는 망상으로 치닫는다. 망상이 망상인 줄 한계 지우면 상상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런 망상을 실재하는 세계의 일부로 또는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논리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상징 또는 기표로 불렀고, 그 기표에서 가장 크고 넓고 높은 것이 신이야. 이게 망상이야. 들뢰즈가 좋게 말하여 파라독사라고 해서 그런 소리 그만하자는 정도로서, 그런 정도 소설은 나도 쓸 수 있어 나도 신(부처)이야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추리를 넘어서 초월하든, 초월의 10에 무량대수만큼 하든 그 망상은 파라독사야.신을 꿇게 하거나 신에게 배웠다는 이들은 모두 공상을 넘어 망상에 그리고 착란에 빠진 것이다. 루신이 말하듯이 그런 자를 패야한다고 한다. 그나마도 들어 줄 수 있는 상상은 아폴로가 갔건 말건, 여섯 살 꼬마에게 보름달을 보면서 저기에 계수나무가 있고, 그 밑에서 토끼 두 마리가 방아를 찢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엘리스는 이해한다는 것이다. 입말에는 삶의 진실이 있지만, 언어에는 삶을 떠나 즉 실재성을 떠나 기표로서 상징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말하고 살고, 말에 맞게 문자를 남긴다. 우리 문자(한들) 이렇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절이 인류의 역사에 있기나 있었던가? 언즉시야라는 문자의 대리 표상이 아니라, ‘그래’ 또는 “뭣꼬”라는 말과 같은 입말을 인민들 사이에, 입말과 문자의 대응을 맞추어가면서 말하는 것이 해방 후 겨우 79년 정도이다. 3-4천년의 유사 언어(인도유럽)를 쓴 자들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에 맞추면서 입말도 문자도 해보자는 것이다. 달리 말하기 달리 쓰기는 터전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다. 상상은 상징에 맞게(제국주의 똘만이)가 아니라 실재성에 맞게(자치와 자주로) 살아보자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서양 고대 철학사에서 이미 실재성이라고 하는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들도 현실이 공상(상징, 신들의 세계)에 사로잡혀서 사는 것인가 실재(자연, 휠레 물질)에 맞게 사는 것인가를 고민했었다. 그 당시의 오관(상식)을 통한 설명에서 보여줄 수는 없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을 규정하여 실재성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에게서 이데아는 실재성이었다. 규정할 수 없는 것은, 스토아학자들이 말하듯이, 시간과 공간이다. 이데아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학파 간에 실재성은 다른 용어 또는 대상이었다. 왜 철학사에서 플라톤주의가 스토아학자들을 이겼느냐는, 지금의 기독교가 가난하지 않고 부자편인 것과 같다. 그 원죄는 살았던 예수를 하늘나라에 살고 있고 게다가 다시 온다고 거짓말한 바울 아류들 일 것이다. 예수가 다시 내려와 지금의 목사와 신부들을 단죄한다면 이렇게 실재적으로 살아갈 이는 아무도 없다고들 한다.

   1,600여 년이 지나 오관을 종합하여 사유하는 방식에서 실재성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 데카르트가 수학을 통해서 무한을 실재하는 것으로 상정하듯이, 무한이 있다고 해야, 그 무한보다 더 적은 수많은 수학적 부분들이 성립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 추론에서 무한이 실재성이 된다. 그렇다고 신이라는 용어가 실재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신은 수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모든 곳에 있다고 규정하는 자들이 있어서 그렇다면 그것을 증거 해보라고 하면, 신이 삶의 현장에 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를 댈 수 있는 것은, 이런 종교인들의 사악한 돈 벌레 속에서, 거의 기적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인간은 실재하는 자연 속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지,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신이 무한하다는 것은 수학의 추리 전개에서 증명하는 것이지, 삶에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철학에서 파르메니데스 같은 이들은 제우스를 상식의 측면에서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데, 이는 현존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잘 안다는 의미에서이다. 데카르트에게서 신의 “존재”가 아니라 “현존”이라고 말하는 것은, 스콜라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신의 보편 편재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현존에 대한 것이었고, 게다가 현존은 추리에서 무한 소급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도 논리적 증명이 아니라 현실적 증거를 보편적으로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제수이트들이 증거할 수 없는 신을 말하는 데카르트를 무신론이라고 단죄 하려 들었지만, 이미 망원경의 시대라 마남(魔男)사냥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제수이트들도 보편적 까지는 거의 할 수 없고, 일반적으로도 증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증거는 마치 기적처럼 그것을 독실하게 믿는 자에게도 그의 생애에 한 두 번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 증거를 일상으로 보편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번의 기적같은 신의 증거를 삶을 통해서 다시 증거되기를 바라면서 착하게 순수하게 산다는 것을 누가 나무라겠는가? 불교에서 돈오로서 부다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이들이 삶의 내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돈오를 할 수 없어서 봄 가을로 그 경지를 맛보려고 안거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 안거가 부다의 경지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 매번 알면서도 또 다시 안거에 들어가 반성, 성찰, 명상, 집중, 홀림을 맛보려 하는 것이다. 서양도 철학자들도 집중(recueillement)과 홀림(possession, 신들림)을 말한다. 플로티노스가 생애에 다섯 번 환희의 일체를 이루었다는 것도 홀림의 일종이다(무당의 신내림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홀림이 그나마도 이런 길을 따라가는 것의 한 방법이라고, 그는 “엔네아데스”를 쓴 것이다. (4:30, 57MLI) – <이어지는 글>

    열여덟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열여덟 해 동안에, 매일 해가 뜨듯이 자고 먹고 싸고 동일반복 같지만 매일 매우 조금씩 자라고 또한 달리 생각하며 얼마나 많은 이질적 반복을 했던가를 생각해 보시라. 그 긴 과정이 하루의 순간처럼 느껴지는 것이 실재성이다. 이 실재성이 고대철학자들이 말한 두 실재성 – 시간과 공간 – 중의 하나이다. 실재성이 과거 추억들의 조각들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그 나이에서야 진솔한 사유(도학, 철학)을 시작한다. 인간이 오랜 경험을 거쳐서 이런 정도의 과정은 일반화와 보편화해야 만이 공동체(공산사회) 또는 자연(세계)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종교집단에서도 즉 스님이든 수도사든 목사든 신부이든 간에 이 나이가 되어야 입문식을 한다. 왜 그 나이이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19세기 말에서 시작한 심리학이 얼마나 많이, 항목, 용어, 개념, 상징, 기호, 기표 등을 가지고 논의하면서, 개체발생은 종 발생의 이질반복이라는 점을 넘어서려고 했으나, 역시나 인간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열여덟에서야 추상적 사유를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가 시대의 고비[마루]마다 일반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고중세에서 플라톤 이래 이데아가 실재성이라 여겼고, 근대에 데카르트 이래로 자연의 이법(raison)을 실재성이라 여겼다. 근대에서야 추론하는 청년이면 무한과 정해지지 않은 수(부정수)의 실재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수는 없는 수(부정수)가 아니다. 정해지지 않은 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법도 정해진 원리가 아니지만 실재한다. 추리의 극한으로서 무한도 신도 실재해야 한다고 한다.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무한(정해지지 않은 수들 중의 하나)도 있다고 해야만 학문이 성립하듯이 소위 말하는 좌표도 성립한다. 신의 경우에,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지만 있다고 해야 도덕과 감정 등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신은 이론적 신, 즉 이신론이라고 부른다. 이런 이신론의 등장은 예수를 크리스토스로 동격화 시키는 것이 논리의 추리의 하나이지, 현실적 현존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크리스토스는 미래에 올 메시아인데, 이미 만들어져 1,600년 전에 있었다는 것이고, 논리적 추론에서 증명되는 것도 도덕적으로 증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말 심리학의(프쉬케학) 성립은, 이 시기에서야 인간이 실재성과 현실성을 개념으로 정립하려 하니, 묘하게 뒤바뀐다는 것을 알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헤겔을 뒤집어 사유하는 맑스의 이야기도, 이런 소설 같은 사유의 이야기들의 한 부분에 속한다(자본론은 1867년에 나왔지만, 1859년에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냈다) 여기서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소설처럼 읽어보라는 것이다. 열여덟이 넘어서 장편 소설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초등과 중등 시절에 위인전 과학들에 대해 요약본을 읽소서 자란다. 이때서야 10권 짜리 장길산을 읽고 나서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그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지만 그 속에 “뭣”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공자의 논어든, 플라톤의 향연이든, 싯달다의 법구경이든, 벩송의 물질과 기억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한 항목의 연속이라 여기고 읽어보시라. – 한가지 다 읽은 경우에도, 50여 년이 지나도 읽기는 읽은 것인데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되지만, 그거 읽다가 말아서 몰라 라고 하지는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추억처럼 장면이 없다는 것이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열여덟의 나이에 초등학교 선생님 또는 고등학교 선생님 이름과 행동이 눈에 선하듯이 기억하면서 동창들이 모이면 추억들의 장면들을 이야기한다. 각각의 추억들 중에서 서로 서로 모르는 것이 많지만, 그래 맞다고 하며 서로의 이야기(소설같이)들을 즐긴다. 그래 삶은 추억들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산다. 기억의 일반화는 “뭣”이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있다는 것을 안다. 이 부정(정할 수 없음)이 실재성이라고 벩송이 말한다. 이 실재론은 플라톤주의자들의 이데아의 실재론을 완전히 뒤집어 엎은 것이다. 이런 혁명적 사유는 벩송에서 유래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사유의 발달에서 학문들의 발달에서 온 것이다. 이런 발달 때쯤에서야 실재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대의 상식, 근대의 양식과 달리 현대에는 고등양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열여덟의 이질 반복의 과정에서 고등양식의 성찰과 집중에 들어서는 것이다. 맑스 뿐만이 아니다.

     신 존재가 아니라 신 현존으로 사유하는 것도 또 다른 변화이다. 그런데 그 현존이 이론적 신인 이신론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십자군 이후에 수많은 인민 대중이 신은 우리 속에 있지 하늘나라는 사기 또는 거짓이라고 여기다가, 마남 사냥으로 불 속에서 물 속에서 이름 없이 순교했다. 이들이 실재로서 순교자이다. 그 분들에게 나무아미 안녕을! 프란체스코학파의 그 많은 순교와 끈질긴 싸움에서 오캄과 같은 과학적 사유 등이 나왔고, 브루노의 살신성인의 등장하였다 그러고 난 뒤에야 데카르트가 나온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의 인류의 기억 속에서 누구하나 소중하지 않은 이가 없다. 종교를 믿는 자 또는 선택받은 자들이 기쁨과 환희가 실재한다는 것은 사기, 기만, 망상, 착란이라고 말하는 심리학의 발달도 몇 가지 인간과학들이 성립하면서였다. 기나긴 과정에서 새로운 변화는 간헐적으로 또는 갑자기 솟아난다.

   19세기 초엽에서 보면 칸트가 말한 인간이 계몽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은 14세 정도일 것이다. 칸트(1724-1804) 시기까지도 추상이 실재성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던 시기이라, 헤겔까지 가는 것이다. 우선 꽁트(1798-1857)가 현실의 세상이 실재성이라고 여기고 신학과 형이상학에 벗어나야 한다고 실증철학을 주장했다. 꽁뜨의 실증은 독일법학의 실정법과 같은 것이 아니다. 검사집단은 실재성에 대한 이해 없이 실정과 실증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는 앞에서 말한 언어의 일반화의 개념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증적(positif)이란 용어가 긍정적이라는 용어와 같은 단어이다. 그러면 대구(對句)에서 긍정적의 대립은 부정적인데, 실증의 대구는 허구일 것이다. 허구와 부정은 같은 의미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우리의 입말에서 아직 사유의 깊이로 들어가기 어렵게 한다. 부정은 없다(아니다)라는 쪽도 있지만, 잘 모르지만 그래도 뭔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있지만 아직 미지수로 있는 어떤 것으로서 부정신학은 데카르트의 이신론으로 보면, 착하고 솔직한 사고이다. 신이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뭣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긍정이라는 것은 부정의 성립 위에 있다. 없는 것 위에가 아니라, 다른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제외하고 있는 것이라는 긍정을 다룬다. 현실적으로 “있다”는 주위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 위에 성립한다.

    사유의 총체로서 “긍정”은 현재에 없는 다른 것도 합해서 사유할 때이다. 이에 비해 속 좁은 지성에서, 긍정적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긍정적이라기보다, 자기 이외에 배타적이고, 자기고집적이고, 자기 완결적으로 외골로 사유이라는 것이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그 긍정이란 용어가 절대자, 유일신앙에 붙어 다니는 경우에, 그 신앙이 거꾸로 가장 많은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정성을 내포한 긍정성이 제국주의 사고이다. 또한 부정성을 제외하면서 긍정적이라는 유일신앙이 자기가 모르는 부정성을 악마 취급하는데, 그것은 자기 속의 오류, 착오, 허위 등의 부정성(잠재적으로 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중세의 마남(魔男)사냥과 그 많은 선량한 인민들을 이단이라고 죽여 놓고 반성 없는 자들이, – 주기철에 대해 한경직도 마찬가지 – 자기편의 죽은 자들은 대대손손 순교자라고 떠받들고 숭상하는 것이야 말로 기만, 사기이라고 한다. 그들은 저 많은 인민들뿐만 아니라, 단지 사유가 다르다고 종교재판으로 죽은 자들에게 참회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그렇게 죽은 이들이 악당, 악마인가를 다시 묻는 것도 19세기말의 실재론 등장의 일부이다. 이를 감추기 위해, 그들은 타 문화에 전도한다는 이름으로 관심을 바깥으로 쏟았던가. 게다가 학문적으로는 반성하기도 한다. 긍정의 논리적 사고가 착오와 오류가 있다는 것은 논리학자인 러셀이 “모든 사람은 죽는다”를, 그리스가 일찍이 난제로 삼았던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 장이”를 다시 사유하면서, 전칭긍정명제가 파라독사라고 했다. 러셀은 나중에 왜 기독교인 아닌가라는 글도 썼다. 뭐, 들뢰즈가 보면 수많은 소설같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인 것을 논리학자들은 진리라고 하고, 나아가 심리학의 실재론을 거짓과 착오로 몰기 위해 상징의 가능성과 실재성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했지만, 그 상징은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이 소쉬르 언어학에서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러면 뭣을 왜, 철학하니.

     실재성에 대한 고대 상식의 사고와 근세의 양식의 추리를 뒤엎는 것은 철학자 꽁트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며, 여 우리나라에는 수운 최제우의 득도(1860년)의 이야기도 있다. 다시 서양 사유의 발달사를 들여다보면, 비유클리트 기하학이 전복적 사유를 했다. 유클리트 기하학이 절대공간의 사고이며, 뉴턴과 칸트의 사고체계는 절대공간의 성립과 전개이라는 것이다. 실재성에서 공간은 오목공간도 볼록공간도 있다는 것이고, 이런 사유를 다양체 사유라고 들뢰즈 이후에 유행하고 있다. 절대공간의 실재성들은 상징성이며 논리적 추상의 항목들이다. 이런 절대공간의 개념을 뉴턴에 이어, 천문학에서 아인슈타인이 실재성을 증명했다고 하지만 아인슈타인도 데카르트와는 조금 다르지만 여전히 우주의 통일성을 믿는 이신론에 가깝지만, 평생을 통일성을 주장하는 측면에서 그 또한 유일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생물학 쪽의 발달은 더욱 흥미진진한 대하소설을 넘어서 난바다(대양)의 소설이다. 18세기 생물학의 분류학의 논쟁에서 시작하여, 19세기 초 화석의 논쟁은 생명체의 생장과 변형에 대한 것이었다. 현미경의 발달로 미생물의 발견은 자연계가 통일성을 갖는 실재성이란 사고방식이 깨어지는 것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했을 때는 이미 생명체의 다양성과 변형론에는 내재적 힘(벩송에서 엘랑)이란 것이 있어서 무작위로 다변화한다는 것이 널려 알려졌다. 그럼에서 다윈류들이 하나의 통일적 방향으로, 그 중에서 인간의 방향이 가장 발달된 또는 선별된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스며들어, 이 방향이 맞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외부의 신)를 끌어들였던 것도 유일신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들 한다. 그 사고는 실재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유전과 유전자의 발견으로 이어지면서, 생명체는 자연의 산물이고, 자연의 이법(raison)은 신앙의 통일성과는 별개이라는 것이다. 자연의 실재성은 유물론자들을 자극할 것이다. 통속적 유물론자는 공간(볼 수 없는 공간)에서 원자들의 움직이고 구성하고 구축하는 놀이에 빠져, 레고 장난 같은 결합과 조합을 유물론으로 또는 실재론으로 설명했었다.

   그러다가 공간이 “뭣”인가라고 다시 물으면서, 실재성에서는 “뭣”이라는 토대와 같고 알 수 없는 영역이 오관(상식)과 추리(양식)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뭣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물과 물체를 놀게 또는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무엇(기저, 깊이)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유하면서, 실재하는 것은 “뭣”이며 그 속에서 또는 그 위에서 사고하는 것은 인간의 속 좁은 이성의 상상과 공상이었구나 하는 것이 바슐라르의 과학적 사고였다. 그는 자기 사유를 스스로 물의 철학이라 불렀다. 실재성은 부정성(아직 모르는 것)의 실재성이며, 그것을 철학사에서는 오래 전에 “휠레”라고 불렸고 중세에서 물질로 번역된 것이며,

    이 휠레라는 실재성은 이오니아학파의 학문적 토대였다. 이 학문적 관심을 우주발생론이라 한다. 이에 비해 엘레아학파가 뭣의 기초가 존재[상징에 가깝다]라 여기고, 이를 실재성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이 존재의 실재성이라는 주장이 유일신앙자들에게 요상하게 꼬여들어 변형되면서 신학이라는 항목 속에 들어갔다. 그 변형에서 이 항목의 주장자들이 이 항목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얼마나 착하고 순진한 이들을 추방하겨 죽였던 것인가. 이런 오류와 과오를 감추기 위해 억압과 강제로, 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굴종과 예속을 따랐던가. 이들은 선량한 사람들의 죽음을 악마의 죽음으로 만들었던 논법을 브루노 화형에까지 1600년을 공공연하게 실행했고, 현 남한 땅에서 빨갱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들이 악마의 화법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인디언을 거의 몰살한 그 유일신앙이 악마의 화법인데, 이 화법에서 대항하기 위해 달리말하기는 중요하다. 일제에 협력자를 친일파라니 부일파이지, 미국의 딸랑이 친미파라니 숭미파지. 실재성에 맞는 용어를 쓰는 것이 그들과 달리말하기이다. 들뢰즈가 제국주의자의 예속의 학문을 정신분석학이라고 하면서, 이들과 달리말하기를 넘어서 달리 학문하기로서 분열분석학을 제시한다. 게다가 맑스가 달리 살기를 말하면서 포이에르바하 명제 11에서 혁명을 말했듯이, 달리 실천하기를 들뢰즈는 다양체로서 리좀 흐르기라 한다.

     19세기의 1859년을 기점으로 신에서 벗어난 인간이 “뭣”이냐는 문제제기는 비유클리드 기하학, 언어학회, 진화론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학회를 만들면서 인류학의 성립에서도 있다. 뭣이라고? 지금까지 남은 기록들 모든 것을 인정한다 해도 유대 경전에 인류 역사가 6,400년 정도라고 한다. 뻥을, 상상을 좀 더 하지 한 만년 정도로 그런데 그들에게 아마도 만년을 생각할 수 없었던 시기일 것이다. 요즘에는 만석꾼, 만에 하나라는 용어가 통용하지 않으니, 억 년 전으로 잡았어야지. 그래야 엄청나게 기나긴 대하소설들이 되었으리라.

    화석과 지층의 도움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구석기와 신석기를 다루면서, 추억들의 장면 같은 조각들이 발견하듯이, 인간의 과거의 역사들의 파편을 찾기도 하고, 생명체들 중의 추억들에서 거대한 뼈다귀로 남은 멸종된 생명체들도 알게 된다. 인간에게 추억들에서 망각은 무엇인가? 잊고 싶어 하는 것이 망각일까? 황제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반대파들의 기록을 없애는 것이 망각일까? 요즘 윤석열 정권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한 홍범도를 지워버리고 이승만을 불러낸다고 하면서 무슨 영화를 보게 한단다. 망각에서 자기에 맞는 것을 불러들이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트라우마 논의가 아닌지를 생각해 보시라. 러시아의 미하일 솔로호프 소설 “고요한 돈강”에서 자본주의자들의 트라우마로서 적군에 죽은 귀족인가, 인민의 트라우자로서 백군에 죽은 적군의 가담자들인가? 두 전쟁에서 피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유일신앙의 역사에서 그들의 종교에서 순교의 피와 이교도 사냥과 마남(魔男) 사냥에서 죽인 피의 무게를 달아보는 것이, 어쩌면 역사에 대한 망각에 대한 논리와 실재성에 대한 논의의 차이일 것이다. 왜 프랑스 아닐학파들이 맑스의 역사적 관점을 받아들였으며, 미슐레는 왕조사를 읽기를 그만두고, 먼지 속에 쌓여있었던 프랑스 대혁명과 인민의 청원서를 읽었겠는가. 역사의 실재성은 상층의 트라우마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서 살아간 실재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풀어내는 것이라 한다. 실재성은 트라우마를 시간의 간격을 넘어서 현실에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데카르트는 그런 사고는 백 배로 빨리 돌려도 같은 값이라고 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과정의 실재성을 소설처럼 읽으시라, 자신이 그 과정을 겪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렇게 거쳐가는 과정이 누구에게나 기억으로 흐르고 있다. 생명체의 역사에서도. 개인의 삶에서도. 실재성에 대해 진솔하게 대하면, 이 뭣꼬를 테스형까지는 아니라도 “뭣”에 대한 진솔한 문제제기를 할 때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그렇다고 아무나는 아닌 것 같다) 실재적으로 열여덟에서부터, 부모와 가족이란 관습적 틀을 벗어나, 진솔하게 시작한다는 것은 거의 비슷하다.

   여기에서 실재론은 관념론의 전복도 아니고 유물론의 변이도 아니다. 실재론에 들어서면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둘 중의 둘째 것으로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깊이 생각하며 성찰하는 시기는 누구에게 있다. 양식의 추리를 저 너머 또는 달리, 다시 추론하는 것이다. 추론은 다양한 과정들의 자료를 함께 놓고서 사유하는 것이다. 실증철학, 비유클리드 기하학, 생물학, 진화론, 언어학, 인류학, 유전학, 역사학, 기억론 등을 펼쳐 놓고 이것들의 과정을 함께 논의해 볼 때, 스스로를 확장하는 자기교육(책읽기, 벗과 동지 만나기), 자기 함양, 자기형성의 시작이다. 열여덟의 다음으로 삶의 과정을 평생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 이런 삶에서 배워야하는 실재성은 우선 눈으로 보거나, 말을 듣거나, 손(발)으로 노동하면서 그리고 생산하면서, 익히고, 자기 몸(내재의식)에다가 등록하면서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것이 이치(raison, 이법, 자연의 과정)를 탐구하면서, 더하여 타인과 공감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배운다. 유교에서 “선한 일이 사소하다고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勿以善小而不爲(물이선소이불위)]”라고 하듯이, 불교에서 이치를 구하라고 법구경이라 한다.

    고등 교육을 마친 이후에 대학의 교육이 필요한 경우는, 한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기에, 한 영역에서 삶을 정착하기 위한 것이다. 실재성은 한 부분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점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과 실천에 있으며, 완전성과 통일성이 먼저 있지 않기 때문에, 셋, 아홉, 여든하나가 모일 때의 실재성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 너비의 확장에는 입말과 글자를 포함하는 언어의 활용이 중요하다. 만남에서 입말도, 책에서 문자도, 자연에서 절후마다 달리 등장하며 또한 터전마다 다른 풍경을 읽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이 언어 전체는 기호(signe)로 표면에 또는 현실에 드러난다. 이런 언어를 배우고 읽히는 것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삶의 연속성만큼이나 이어지기에 좋은 길 또는 좋은 선(線)을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선을 따르거나 또는 살아가면서 점점 만들어 가는데, 그 선에서는 함께 논의하는 입말이 필요하다. 이런 입말에서는 보안법이 없어야 하며 또한 빨갱이라는 악마화 용어가 사라져야 한다. 아직도 이런 시대에서 달리 말하기를 실재성에 비추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1859년 언어학회가 생길 때 언어 기원은 논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지만, 이제는 언어가 기호의 등장 전체를 의미하고, 서로 소통에서 입말의 역할을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입말을 중심에서 구강의 역할이 호흡(생명), 노래(옹알이), 언어, 음식, 애정 등을 발현하는 다양체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런 삶의 터전에서 언어학은 논리학과 별개이다. 언어학에서 입말은, 논리적 명제의 개념들을 말하기보다 내면의식을 포함하는 삶의 일반화를 표출한다. 입말이 문자에 귀속되는 것은 들뢰즈 식으로 제도에 복속되는 것인데, 인류 역사상 기억 속에서 입말은 문자보다 먼저이다. 입말이 문자를 모방하는 것으로 여기면 입말을 하는 부류들이 제도와 체제에 예속되는 것이고, 입말이 자연의 순리에서 나온 것으로 여기면 삶의 여러 가지치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방식에서 내재의식(무의식)이 현실에서 출현하는 방식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의 두 실체와 스피노자의 두 속성에 맞물려 있다. 더 과거로 우주발생론과 우주론, 휠레와 이데아와도 맞물려 있다. 철학사가 중요한 의미이다. 정신이 물질을 다룬다고 여기는 것은 플라톤주의였다면, 볼 수 없는 것에 공감하며 내 뱉는 입말에는 (인간의) 자연의 발현이 있고 보는 쪽은 퀴니코스학파와 초기 스토아학자들이다.

    논리적 개념작업으로 개념들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논리학이라면, 입말을 통해 삶의 터전에서 일반화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언어학 또는 심리학의 방식이다. 전자에서는 앵글로 색슨에서 의미론이 주축이라면, 후자에서 언어학의 토대 또는 기원으로서 기호(signe)를 다루는 쪽은 기호학이 있다. 다음에 말하겠지만, 우리의 내재의식[무의식]의 발현으로 입말이 문자와 결합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1446년에 훈민정음을 발표했지만, 언어와 기호, 입말과 삶의 과정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실재적이고 현실적 활동은 해방이후 일 것이다. 인민이 자유롭게 입말을 하는 시기가 얼마되지 않는다.

     서양이 자국의 언어로서 문화적 양상을 바뀌는 것은 르네상스 1,600년경이었지만, 그들은 꾸준히 자기 문화의 창달을 했는데 비해, 우리는 갑자기 도래한 것처럼 1945년 이후에 활발해졌다. 아직도 우리 입말이 문자로도 삶의 현장에서 실재성을 드러내기에 어렵다. 열다섯에서 학문의 시작(자기 형성)을 세웠다고 하는 공자가 시편을 정리한 일흔 나이에 까지를 생각해보면, 한 인간에게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달리 말하기를 하며, 선들을 셋에서 아홉으로 만드는 과정을 겪으면서, 여든에 이루기까지, 지나갈 세월이 50여 년이나 된다. 고승이 50년 되어서 할! 한다고 하는데, 젊은이여, 열여덟에서 시작하여, 종속과 관례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면서, 달리 말하기와 선(線, la ligne)을 만들면서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팔천오백만이 입말을 공유한 지 75년이란 입말-문자의 역사에서 보면 비록 짧지만, 우리 한글과 입말이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데 매우 좋은 도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철학자 윤구병이 말한 것처럼 제2외국어를 꼭 하나 하시라. 가깝게는 러시아어와 중국어, 미국어와 일본어도 있지만 아랍어도 있고, 유럽어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도 있다. 젊은 시절 시작해서 50여 년을 매일 조금씩 행하는 이질적인 반복은, 당신을 달리 말하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할 것이다. 혁명은 여기에 있다. (7:09, 57MLH) (10:08, 57M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광기(파라노이아): 외디푸스 = 크리스토스 [천 하룻밤 이야기]

광기(파라노이아): 외디푸스 = 크리스토스

2024 01 20 대한(大寒)

푸꼬가 근대사상의 역사를 광기의 역사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뭐 학자가 그런 소리 할 수도 있지 정도로 생각했다. 자연의 피폐, 즉 본성의 피폐는 광기의 역사이다. 들뢰즈가 이를 이어받아서, 그 광기의 주축인 변증법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한다. 신화 같은 참주(황제, 자본)에 이르는 변증법 사고(思考)가 광기이고, 그리고 2천 년이 지나도 오지 않은 크리스토스를 온 것으로 만든 그 사고가 파라노이아 이라는 것이다. 참주의 억압을 외디푸스(Οἰδίπους)의 억제로 바꾼 것은 프로이트이지만, 참주에 의해 인민의 원한과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에 의해 원죄를 심은 것을 비판한 철학자가 니체라고 한다. 이런 어마어마하게 길고도 풍부한 이야기를 공시태에서 보면 간단히 상승의 명령과 지시에 못 이르는 원한과 원죄가 있다. 그 터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민이 있고,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는 공포를 심었다. 이에 비해, 통시태에서는 인민이 기본심금으로 쭉 흐름이고, 그리고 분출하여 용출선을 만들어 전복하는 최종심급이다.

동서양의 사상을 공시태로가 아니라 통시태로 읽으면, 상식 시대, 양식의 시대, 그리고 고등양식의 시대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곳에서나 인간이 도구들, 즉 자연의 돌들 속에서 주워다 쓰는 시대(구석기 시대)에서, 도구를 만들어 쓰는 시대(신석기 시대)를 거쳤었다. 그리고 돌덩이 속에서 구리, 금, 은, 철이 자연적으로 있지만, 열을 가해 녹여서, 인간의 몸의 도구와 유사하게 도구를 만들면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안다. 이런 정도는 5관(상식)을 통해서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체를 지닌 인간이 몸과 달리 소통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도 안다. 이 소통은 자연에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만들었는지를 5관을 통해서 하나로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에는 누구나 공부, 즉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하면서, 5관을 통일을 조성하는(composer) 것을 식(識)이라 하고, 이 여섯 가지를 함께(하나로가 아닐 것인데) 지닌 인간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이 무엇인가? 이뭣꼬의 새로운 단위 설정하기에 이르는 것도 변증법이다. 이런 사유에 이르게 되면서, 원본이 없기에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달리하는 자들이 나온다. 이들 사이에 서로가 지 잘났다고 하는 경우들과 더 많이 더 높이 안다고 하는 경우들이 생긴다. 그럼에도 각자는 하나의 조성하는 단위를 인정하는 점에서 중요한 변증법을 체득하고 있다. 서로 다른 이유는 다음 차원일 것이다.

깊이에서 표면으로 생성하는 쪽에서도 상식을 통하여 이런 과정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 있으나, 규칙과 법칙을 잘 찾기 어려워서 함께 어우르는 방식을 변증법이라는 용어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뭣꼬는 거의 전체 또는 전부에서부터 규명의 노력을 하여 부분들을 설명하려는 방식이라 여긴다. 이에 비해 생활에서 또는 터전에서 도구의 공용화와 전승에서 원형 또는 원본에 준하여 도구 생산을 하기에, 잘 만들어진 또는 견고한 원본이 있어야 한다(필요하다는 것이다)고 한다. 이 원본을 만드는 과정은 여러 재료들과 도구들을 사용했음에도 원본이 만들어지고 또는 제시되면서, 만드는 데에 따른 순서와 규칙, 공동체에서 사용하는데 규율과 기준 등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전수와 전달에서 그 도구가 없더라도 대화 또는 거래의 소통에서 그 무엇을 먼저 규정해야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 잣대가 먼저 있다고 여긴다. 그 때 그게 뭣꼬의 뭣꼬를 묻는다. 여러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원본을 이르는 과정도 방법 또는 기술이라 하지만, 입말로서 이리하면 안 되고 저리해야 하고, 이것을 섞으면 안되고(폭발하고) 저것을 섞으면 조성(합성)이 된다고 하는 방법이 있듯이, 삶에서 진선미를 추구함에서 합성하는 이뭣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원본은 합성이 아니라,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전제로서 오류일 것인데, 그대로 순수한 원본이 있다고들 한다. 말하자면 원본으로 순수소나무가 있다고 해보자, 소나무의 뿌리, 줄기, 가지, 바늘잎들이 어디 순수한 것이 있겠느냐마는 원본 비슷한 소나무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일반화의 덕분이다. 소나무가 없는 곳에서도 소나무를 말하면서 이런 저전 이야기를 소통할 때, 그 말의 소나무는 일반화의 개념을 넘어서 추상화로서 관념이라고 부른다. 이런 공통감관의 재료에서 일반화를 거쳐서 추상화의 과정도 변증법이라 부른다. 서로 같은 원본인 것 같지만 실재성에서 다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대의 상식시대에, 일반화가 잘 안 되는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아마도 용어는 나중에 만들어졌겠지만 공간과 시간이다. 어디까지 경계를 지어야 공간이며, 아무 것도 없는 허공만이 있는 것을 공간이라고 또는 빈 것이라고 할까? 빈 것이라고? 고대인들은 속이 빈 갈대 줄기를 잘라서 앞뒤를 자르고 막아서 물에 넣고서 양쪽을 떼면, 방울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아 공간이란 것이 물과 다른 무엇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갈대가 없는 빈 허공은 어디까지 공간인지를 오관을 통해서는 불가능하지만, 일반화와 추상화의 과정처럼 공간이라는 어떤 것을 설정한다. 그것이 뭣꼬라고 물으면 어떤 기준점이든 대상을 통해서 응답해야 하는데, 신체를 지닌 자체가 이미 너비(공간)을 지니고 있기에 인정하는 방식이 소통과 다른 방식으로 담는 그릇이 없이도 이미 담겨져 있는 신체라는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이 없으면 무엇이라고 설명할 것인가?

다른 한편 과거와 현재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어떤 지속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죽어서 세상을 뜨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과거는 현재에 없다고 하지만, 한사람이 살면서 없어진 과거의 어린 시절의 추억은 노인이 되어서도 문득 떠올릴 때 마치 어제처럼 또는 조금 전처럼 느껴지는 실재성은 새로 만들어진 것인가 또는 잔존하는가? 한사람의 과거도 60여년의 과거가 어제 같은데, 인류사에서 6백년, 6천년, 6만년이 어제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당연히 부정하겠지만, 고등양식의 시대에 DNA를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 속에 기나긴 과거가 있다는 것은 화석과 지질학을 배워서 아는 것 이상으로 기나긴 과정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6백년전 고려 불교 불상과 고려 대장경은 어제의 것인지 먼 과거의 것인지, 심하게 이야기하여 바로 전의 찰나의 것인지 라고 물으면, 거짓이라고 하는 이들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을 이야기할 때, 마치 조금 전의 사실들처럼 알고 읽으면서 진리에는 시간이 없고 공간도 없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간은 마치 공간처럼 있기는 한데, 오관과 식(識)이라는 6식을 통해서는 설명이 안 된다. 더군다나 고려나 남한이나 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처럼 대화도하고 소통한다.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이란 통째로 덩어리가 전부가 있고 부분으로 고조선이니 고려니 조선이니 나눈 것이 아닌가. 공시태가 한꺼번에 전체에서 부분을 보여준다는 거처럼 여기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하는 방식이다. 이런 공간화를 공시태 속에서는 논리적으로 타파할 수 없다고 한 이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이며 그의 논법도 변증법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합리한 논리보다 실재적 삶에서 대화와 소통의 방식으로 공간과 시간이 먼저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 속에서 서로가 무엇을 이루고자 하였는지를 공부하는 방식으로 대화법도 있다. 통일성을 찾았거나 말거나 어정쩡한 상태를 두고서 서로 소통하는 대화법도 또한 변증법이라고도 한다.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과정, 무엇인가를 합의 보려하는 과정, 무엇인가 서로 다른 점을 좁혀보려는 과정, 아무리 그래도 다양한 방식들이 통일된 방식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이정도로 약속하고 합의를 보는 것은 사회적 삶이다. 이것은 변증법이 아니라고 하는데, 아니 이런 과정을 걷고 있는 거이 변증법이다. 자연에서, 논리에서, 불가인식적인 것에서만 변증법의 소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제도에서도 변증법이 있다. 단지 그 방법이 다른 방법보다 우월하다는 정도는 이해하지만, 절대적이다거나 완벽하다는 것에서, 주장자의 오만과 치기가 개입하는 것이 아닌가? 그 개입을 어떤이는 변증법이라고 착각하는데, 개입은 상태와 흐름을 자르는 것이지, 다발의 형식으로 종합과 통합과 다르다.

하나의 답이 있고,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변증법은 변증법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가만히 정지해 있을 경우에 적용 가능한 것이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에 적용은 자신이라도 움직이지 않아야 적용과 개입이 가능할 것인데, 자신도 움직이면서 적용은 마치 나는 맞고 너희들은 틀렸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이면, 그것은 무엇‘이다’이지, 활동하는 현존이 아니다. 무엇에 쓰임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다루어보아 한다. 그 무엇을 다루면 되는 경우와 잘 안되는 경우가 있는데, 잘 안되는 경우가 기존과 잘 되는 것과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잘 되는 경우와 달리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문제는 다른 것이다. 이런 다른 과정과 방향이 현실에서 수없이 많음에도 하나의 방향이라 여기는 것은, 다른 것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경우일 것이다. 시간의 경과에서 달리 생겨나는 것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한 방식이 다른 방식을 모르거나 적용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 방식이 세상을 잘 만들어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저 다른 방식보다 어쩔 수 없이 또는 한시적으로 우연히 선정하여 행할 뿐이다. 사람들은 한시적 선정을 통일된 합의라고 하지만, 그저 부분적인 합의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의 무제한성과 달리 시간의 흐름은 지나온 과정은 마치 통합된 방식으로 흘러온 것으로 착각하다. 미리 말했지만 근대 300여 년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비합리적이었고, 정상이라고 거쳐왔고 거쳐가고 있는 상태가 비정상이며 광기라고 하는 것은 생태계의 시계를 측정하는 방식에 보고 있다. 같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무슨 일이라도…

메시아의 번역어로서 크리스토스는 미륵불과 같은 미래에 올 무엇의 모습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이다가 아닌 무엇인가, 하나의 방향이 아닌 무엇에 쓰이냐는 방식으로 다루면서 통시태 과정에서, 온갖 이야기와 논설과 담론이 전개되었다. 전개의 방식이 너무나 다양한데 하나의 방식이 맞다 하는 것도 변증법이고, 다양하게 전개되는 이법이 풀어가는 방식도 변증법인데, 서로 마주 견주어서 통합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변증법이고, 아니 하나의 방식을 있다고 강요하면서 만들어가고 구축해나가는 것도 변증법이라고 한다.

역사는 하나의 방식이 다른 방식을 거세하고 배제하여 성립한다고 믿는 자들이 이끌어 온 것처럼 서술되었으나, 언제 하나의 방식의 변증법 이외에 다른 변증법도 여럿이라는 것은 신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환, 상제, 천신, 하나님, 제우스, 데우스, 고도, 디외, 갓, 야훼, 알라, 마나 등등 터전을 달리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는 것은 잘 알려졌다. 서로의 터전을 유지한 체 다른 터전을 존중하는 관용이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에서는 어느 이름이 맞고 어느 이름은 틀리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신은 선(善)하고 타의 신은 악마처럼 여기는 풍토가 왜 생겼을까? 그나마 서양철학사에 사색(speculation, 서로 비쳐보는 대조하는)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서 13-14세기에 서로 다른 길을 비추어보자고 했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하나가 맞다는 상식의 놀이가 지배하면서 다른 쪽을 마남사냥으로 못된 짓을 하였고 사실상 아직도 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한 종교를 믿는 신앙자들이 어느 곳에서나 마이크로 떠들어도 아무도 그만 하라고 말하지 않는데, 무속은 산속에서 불교는 절집에서 다른 몇몇은 그들이 뒷방에 모이듯이 구석진 곳에서 모여서 숨죽이며 노래하고 전수하고 전파하다.

어느 시대에나 이런 상반된 또는 다양한 것이 있었지만 하나로 나가는 변증법적 통일의 길이 맞고, 진리이고, 선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 지배방식은 다른 터전과 영토에서도 적용하고, 그 적용에 들어오지 않는 자들을 악, 악의 축으로 모는 것은 여전하다. 사색한다가 서로 비추어본다고 하면서, 아마도 서양철학사에 두 개의 실체의 인정에 이르는 이원론이 등장했을 것이다. 이런 비추어봄은 동양에서 감(鑑)이라 할 것인데, 비춰봄에는 다른 방향들이 여럿 있다는 것이고, 그 시대 그 제도에서 합의와 계약의 방향을 잡는 것이 감일 것이다. 물론 요즘 감(感)잡았다는 감화작용의 일반화를 알아챘다는 것이며, 사변적인 감(鑑)과는 다르다. 이런 여러 갈래를 비추어보는 작업으로 64갈래를 사유하는 주역이 흥미롭다. 여러 갈래들 중에서 우리의 관심이 두 갈래라고 한 것은 스피노자였지만, 갈래를 둘로 사유했던 이는 데카르트였다. 다른 실체는 둘이 서로 다른 것이지만, 사회 도덕적 사변에서는 종속 또는 예속이 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야 정신이 물질을 지배한다. 나아가 신은 자연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방식이 21세기에 와서 지구를 황폐하게 하는 사상이며, 이기심에 의한, 파라노이아 또는 외디푸스적 사고일 것이다. 이런 한 방향의 인식과 지배방식이 소위 말해서 양식(bon sens) 시대인데, 좋은 방향을 하나의 방향으로 삼아서 절대자로 국가로 변형된 추리를 만든 것도 변증법이었다. 이런 변증법이 악의 축을 만드는 변증법이며, 전쟁을 조장하는 변증법이며, 자본과 제국에 예속하는 변증법이었는데도 거의 3세기 동안에 지배적 사고였다는 것이다. 반성과 성찰이 없지 않았지만, 그 변증법의 위세에 눌려서 말도 못하고 의식은 5관을 보탠 6식으로 다른 길로 가려고 또는 용출선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시대마다 논의의 줄기들 또는 구조들에 따라 변증법이라는 이름이 다양하게 불렸다. 이상하게도 이런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자신들은 자유롭다고 하였는데, 변증법에서 일반화를 거쳐 추상의 지위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그들이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되어도, 그 제도와 체제 속에서 쌓아온 부와 지위를 버리지 못하여, 외디푸스(참주)와 크리스토스(미래불)의 추종자가 되었다. 불교에서 미래불은 저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지금 행하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라도 뒤처지지 않게 같이 가자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천 년의 불교, 오백 년의 유학이 있었다. 그리고 근대화에서 실학 등을 거치는 과정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만난 것이 굴절이었고, 또한 미국의 자본 제국을 만난 것이 또한 더욱 굴절하여, 자연에서 나온 다발이 뭣인지를 알기에 어렵게 되었고, 공부와 노력은 두 배 세 배를 더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중에 상식과 양식의 시대를 넘어 고등양식으로 가는 시기에, 일제로부터 배제와 배척의 사고가 들어와 보이지 않게 외디푸스가 장악하였다. 참주의 지배였다. 거기에 보안법이 역할을 했다. 그 다음에 외디푸스 그 위에 크리스토스가 덥혀졌고 인민을 원죄의식으로 굴종시키듯이 헌법과 법률로 다스린단다. 입법은 인민의 것이지 외디푸스도 크리스토스의 것도 아니다. 참주과 제국 속에 연구하는 이들이 그 이중굴절에 자기의 위상조차 잃어버렸다. 국가보안법이 굴절을, 크리스토스의 계율같은 헌법이 재굴절에 더하여, 이뭣꼬도 모르는 변증법적 사고의 방향이 자연에서 드러나는 생성과 창발을 휩쓸어 가버렸다.

환(桓, 밝다, 영원)에서 단(旦)으로 그리고 고조선의 전승은 이야기 곧 신화이다. 환을 중국인들은 영원이라고 한다. 왜 영원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는 어느 영토와 어느 시기에는 한 번씩 거쳐가는 것이다. 꼬마 애가 나는 어디서 나왔냐고 묻듯이, 세상을 신이 만들었다고 하면, 신은 누가 만들었는 데라고 묻듯이 말이다. 모르는 사실을 지속의 과정에서 풀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누구의 것이 맞다는 이야기(파라독사) 만큼이나 다른 이름들로 출발하는 것도 이야기(파라독사)에 속한다.

이야기 과거가 현재하지 않는 점에서 현존이 아니지만, 역사가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억은 통시적으로 거의 무한하다. 이렇게 말하면 생명역사 35억년이라고 한계가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이 양식의 변증법을 사용하면서 정신은 무한하다고 하면서도, 35억년은 유한다고 하여 진리의 축에 들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그 변증법이 외디푸스에게 예속이다. 몽테뉴가 인간의 예속에 대해 말하면서 다른 길(방향)과 견주어 의심해보고, 자기의 완전성과 무한성이 없는 만큼이나 타인의 방향과 추론을 존중하는 관용을 갖추라고 한 것이다. 이런 타와의 사색이 감(鑑)일 것이다. 여럿을 비추어보지 못하는 사변도 감도 없는 사회가 예속과 굴종의 사회이다. 그 사회에는 보안법이 존속하고 있다 게다가 미군 점령지로서 이땅의 기준 언어가 영어라는 점에서 외디푸스에서 크리스토스 지배를 받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식민지 종속의 외디푸스와 달리, 식민지에서 외디푸스를 넘어서는 길이 무엇인가를 말해준 것은 들뢰즈이다. 용출선(탈주선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을 만들어라, 기존의 각질에 균열을 내고 리좀을 연결하라. 즉 달리 말하라, 달리 사유하라고, 여기에 전복 즉 혁명이 있다고 한다.

일제 외디푸스 사고의 영향 60여년, 미제의 크리스토스 사고의 영향 60여년을 지나면서, 기나긴 과거를 무시하고 또는 배제하면서, 120여 년의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것으로 착각한 이들이 현 정부다. 외디푸스와 크리스토스의 카르텔에 학문하는 이들이 그 예속에 있지 않는가. 미국의 하부인 일본에게 그 하부로 들어가자는 정책을 펴는 이들이 윤석열 정부와 그 관계자들이다. 이름 하여 숭미자이며 부일자들이다. 우리는 우리 입말로 소통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래로 분류상, 이런 극우들이 설치는 터전에서 뭣을 다루어야 하고 뭣을 할 것인지를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 토지에서 알게 모르게 유일신앙을 믿는 자들은 제국의 체계와 체제에 복속되지 않으면 그 시대 그 국가에서 살수 없을 정도이고, 더하여 지탄받아서 그들의 터전과 영토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기왕 이 터전과 영토에 살고자 한다면, 여기서 체계와 체제를 순서대로 익혀서 살아가는 것이 편안하지 않는가? 라고 한다. 이런 순서대로 익히고 사는 것은 사회제도 속에서 휩쓸려가면서 보고 듣고 말하면서 움직이면 된다. 이런 활동이 종속적이고 예속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대와 제도 속에서 출세하며 또는 지식이 높다고 칭송받고 살아가는 길이라 여긴다. 그렇다 그 속에서 사는 편안하고 세상을 향유한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이 좁은 한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좁은 자아와 그 자아의 추구방식이 좁지, 예속이든 종속이든 사회라는 테두리 또는 남한이라는 영토가 자아에 비해 매우 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에서는 평생을 두고 남한 90만 평방 킬로미터의 너비 속에 안 살아본 곳이 살아본 곳보다 더 많다는 것도 이런 사고하는 자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제도와 체계 속의 이 영토에는 자기가 하나의 질서 속에 예속되어 있듯이 하나의 질서와 체제 속에 종속되어 있어서 다 가볼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즉 바닷물을 다 먹어보고서 짜다고 하지 않고, 약지 손가락을 찍어서 맛보고 짜다고 하듯이, 한 영토의 삶의 양태들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그 질서의 논리 속에 안정과 편안을 누릴 정도만 활동하고 움직인다. 그게 인류의 습관인지, 기나긴 역사의 전승인, 불교식으로 인연연기인지를 물을 필요 없다. 왜냐하면 작은 자기가 큰 기존 사회에 동의하고 합의하여 세상을 향유하며 살아가는 것이 좋다, 선하다, 정의롭다 고 규정하고, 타를 부정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기 긍정과 자기 동일성이 근사한 학문처럼 보이지만, 긍정의 바깥을 무시하는 부정적 사고이며, 오만과 치졸함에 빠진 사고이다. 자기 이외를 불손으로 불량으로 불의로 더 나아가 악마로 악의 축으로 보는 것은 중세의 마남사냥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일신앙의 기원과 크리스토스를 유일 신성으로 받는 종교 시노드(함께 가는 길)에서 나온 것이라고 니체는 그 기나긴 책들 속에서 시들로 써 놓았다. 그 시들을 읽는 이들 중에서 흐트러진 다른 길들을 가는 이들이 악마화 된 길을 가는 허무주의로 간주하고, 니체의 시를 “함께 가는 길”이라고 읽는 이도 있다는 점에 “함께 가는 길”이란 참 좋은 말이다.

이 지구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영토와 삶의 양식을 지니고 살아간다. 지구와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 “함께 살아간다.”는 이들 중에 참으로 이상한 이들이 2천년 정도의 역사에서 있어왔다. 세상 또는 크게 보아 우주라는 말이 그리스에서는 코스모스, 라틴에서는 유니버스로 번역되어 쓰인다. 이 두 단어가 차이가 사유과 사고만큼의 차이이며, 이런 차이는 조화와 분배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유니버스(하나의 길로, 로마로)의 사고에 빠진 철학에서 벗어나 코스모스(자연)속에서 코스코폴리탄(사해동포주의)로, 일 방향을 따라갔던 인문주의자(humaniste)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인성을 공부하는 인도주의자(humanitaire)로, 제국의 지배 하에서 예속과 패거리의 주구(走狗)로서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는 상품자유주의자(liberaliste)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유가 뭣꼬라고 물으면서도 이법에 따라 사는 인성자유주의자(libertaire)로 살아가는 노력의 방향이 진솔한 자연이법, 즉 자연 변증법일 것이다. (4:41, 57LLJ) (6:20, 57LLJ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움베르또 R.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J. 바렐라 지음, 정현주 옮김, 『자기생성과 인지』(갈무리, 2023. 11.) 서평 – 이수영 [철학자의 서재]

관찰자들의 다중우주

서평 | 자기생성과 인지: 살아있음의 실현

움베르또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정현주 옮김, 갈무리, 2023

 

이수영(미술작가) 2024.1.31.

 

뉴런과 시냅스에 대한 설명이 전체주의와 아나키즘으로 연결된다. 북방산개구리의 시신경이 기계와 연결되고, 객관적인 앎의 불가능성이 윤리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런 낯선 연결들로 궁구하는 것은 ‘살아있는 체계란 무엇인가’, ‘생명체는 어떻게 인지하는가’이다. 생물학 책에 ‘인식, 객관적 진리, 전체주의, 윤리’가 등장한다. 서문을 쓴 스태포드 비어의 말처럼 이 책은 학제 간 연구가 아니라 여러 학문을 초월하는 것으로 “새로운 도서관에 속하는 것이다(172).”

『자기생성과 인지: 살아있음의 실현』에는 「인지생물학」(마뚜라나, 1970)과 「자기생성과 인지」(마뚜라나, 바렐라, 1973)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인지생물학」은 마뚜라나 전 생애의 모든 연구와 저작의 기원이자 전주곡이다. 그 다음의 저서들은 전개와 변주이다.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사유를 이해하기에는 『앎의 나무』(마뚜라나, 바렐라, 최호영 옮김, 갈무리, 2007), 『있음에서 함으로』(마뚜라나,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06) 등이 더 편하다. 하지만 마뚜라나 초기 글에는 낯설어서 기이한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는) 문장들을 탐험하는 재미가 있다.

가장 낯설고 기이한 개념은 ‘관찰자’였다. 마뚜라나는 살아있는 체계를 ‘관찰자’라고 부른다. 관찰자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내부이다. 고양이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새를 바라보지 못한다. 새에 부딪치는 광자로 활성화된 자신의 시신경들의 상호작용을 바라볼 뿐이다. 마치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뉴런들의 상호작용 체계가 독립된 실체이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관찰자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새를 바라본다. 마치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자신과 상관없이 저 바깥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이기라도 한 듯이. 고양이의 뉴런과 나뭇가지 위의 새,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가 마뚜라나·바렐라에게는 구별되지 않는다. 이 ‘안과 바깥’이라는 개념이 역설로 느껴진다면, 주체와 객체로 세상을 가르고 저 바깥 객체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알고자 몸부림치는 이원론에 너무 오래 익숙했기 때문이다.

마뚜라나는 말한다. “말해진 것은 모두 관찰자가 말한 것이다(62).” 객관적 실체는 없다. 객관적 앎은 없다. 주체와 객체는 구별되지 않는다. 대화는 객관적 정보의 공유가 아니다. “언어를 통해서는 전달되는 정보가 없다…듣는 사람이 자기 인지영역에서 정보를 창출하는 사람이다(112).”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가 투명한 심부름꾼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인 것처럼, 브루노 라뚜르의 행위자들이 서로를 번역하듯이 말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외부를 번역하는 능력이다. 외부가 투명하게 내부로 드리우고 내 앎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이미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마뚜라나의 관찰자 개념은 인간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혹은 신경계를 가진 생명체에게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자기 고유의 재귀적 상호작용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체계이다. 즉 마뚜라나의 가장 유명한 업적인 ‘자기생성(Autopoiesis) 체계’를 갖추고 있는 존재자라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재규어도 아메바도 꿀벌집단도 어떤 도시나 국가도 관찰자이다. 아메바, 재규어, 마을 공동체, 도시와 국가 모두가 동등한 관찰자라는 말은 평평한 존재자들의 민주주의를 이끈 브루노 라투르, 그레이엄 하먼과 레비 브라이언트를 떠올리게 한다. 신체가 다르면 인지가 다르다는 마뚜라나·바렐라의 말은 에두아르두 까스뜨루의 관점주의적 다(多)자연주의도 떠올리게 한다. 까스뚜르의 관점주의를 마뚜라나와 연결시켜 본다면, 모든 살아있는 존재자는 자신의 고유한 자기생성 체계에 따라 세계를 사유한다. 재규어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다르다. 폭력에 시달려 온 인간과 폭력을 일삼아 온 인간의 자기생성 체계와 우주는 다르다. 같은 하늘 아래 생각만 다른 것이 아니라 아예 이고 있는 하늘이 다르고 신체가 다르다. 자기생성 체계의 차이들만큼 수많은 자연이 존재한다.

계통적이고 개체적인 반복적 경험으로 자기생성 체계의 구조와 구성은 변하지만, 자신을 자신이게끔 생산해내는 체계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마뚜라나·바렐라는 이 자기생성 단위체를 ‘기계’라고 부른다. “우리는 살아있는 체계가 ‘기계’라고 주장한다(193).” 살아있음은 어떤 정신이나 정령이 깃든 것이 아니라 물리적 동력을 가진 단위체이다. 이 ‘기계’ 개념은 펠릭스 과타리의 기계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기계는 과타리의 기계처럼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하고 연결하며 “자기 자신을 상수로 유지하며 변주한다(197).” 기계는 기계의 구성요소의 속성과는 독립적이다.

살아있는 체계는 환경과의 상호소통으로 자신을 생산한다. 마뚜라나가 인간의 사회체계를 윤리와 연결시키는 대목은 니클라스 루만을 떠올리게 한다. 루만은 마뚜라나의 자기생성 체계 이론에 영향을 받아 사회체계이론을 만들었다. 자신이 속한 더 큰 자기생성 체계인 국가가 자신의 자기생성과 상호체계를 배제하거나 제약한다면 전체주의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관찰자는 메타인지가 가능하다. 마치 자신이 어떤 외부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메타인지 능력이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다. “관찰자를 위해 그리고 관찰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53)”를 마뚜라나는 아나키스트 사회라 부른다.

새로운 도서관에 꽂힌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책은 분류보다는 연결과 종합을 따르고 있다. 페루난두 페소아에게 수많은 이명(異名)의 페소아들이 있듯이, 이 글에도 마뚜라나와 바렐라를 ‘적소(適所)’로 삼은 많은 이명들이 함께 나타났다. 내게는 마셜 맥루언, 브루노 라투르, 그레이엄 하먼, 레비 브라이언트, 에두아르두 까스뜨루, 펠릭스 과타리, 니클라스 루만이 그들이었다. “살아있는 체계는 주위환경의 일부, 즉 적소와 상호작용하는 것이므로 적소와 독립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64).”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관찰자들이 마뚜라나·바렐라와를 적소로 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