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다’ – 故 이현구 선생을 기리며 [한철연 소식]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다’ – 故 이현구 선생을 기리며
전호근(한철연 회원, 경희대)
이 글은 2025년 7월 21일 <경인일보> [전호근 칼럼]에 실린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다’를 필자의 동의를 거쳐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원글 출처: https://www.kyeongin.com/article/1746816
지난 7월 14일, 동양철학 연구자 이현구 선생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저명한 학자는 아니었다 하겠으나 동양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선생의 책을 읽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선생이 30여 년 전에 펴낸 ‘동양철학 에세이(김교빈·이현구 공저, 동녘)’는 그야말로 해당 분야의 베스트셀러였고 지금까지 명저로 손꼽히는 책으로 이 책을 읽고 동양철학에 입문한 이가 심심치 않게 있는 걸 보면 선생이 학계에 기여한 공이 적지 않다 하겠다.
선생은 기철학 연구에 평생 매진한 탁월한 연구자였다. 특히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혜강 최한기에 관한 연구는 선생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 경지를 개척했다고 할 만하다. 일찍이 최한기의 기학을 두고 “동과 서를 융합하고, 지구를 하나의 단위로 놓은 인류사의 관점에서 보편학을 추구한 학문”이라 규정한 것이라든지, “인간학과 자연학을 포괄하는 종합적 체계를 갖추었지만 새로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연학의 입지를 적극적으로 마련한 데에 의의가 있다”고 평가한 대목은 지금 보아도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철학분과에서 선생과 함께 명말청초의 학자 방이지의 ‘약지포장’과 ‘물리소지’를 읽었다. 당시 선생의 학문적 열정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치열한 것이어서 아무리 난해한 대목이 나와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그런 자세는 동학과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선생은 형형한 눈빛과 느리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후배들을 지도하곤 했는데 논리가 정확하고 전고에 틀림이 없었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보아도 선생의 열정에 감화되어 공부에 더욱 매진한 바가 없지 않다. 아마 남은 인생에 선생과 함께 공부할 때만큼의 학문적 열정이 다시 찾아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생은 강의를 할 때면 언제나 넥타이까지 갖춘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학생들과 만났다. 한번은 내가 넥타이까지 매는 건 좀 번거롭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선생이 말하길, 언젠가 넥타이를 매지 않고 편한 차림으로 강의한 적이 있는데, 그날 밤 꿈에 맹자가 나타나 무례하다는 꾸지람을 들었노라고 답했다. 내가 선생의 빈소를 찾기 앞서 평소 매지 않던 넥타이를 꺼낸 까닭은 그런 선생의 범절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형식은 다소 달랐지만 전통 학자의 풍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선생은 세상에 나가 이익을 구하는 일이 없었고, 남들과 경쟁하지도 않고 가만히 알아주는 이를 기다릴 뿐이었다. 선생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일찍부터 그의 학문적 재능과 통찰의 깊이를 높이 평가했지만 세상은 선생의 인품과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는지 끝내 대학에서 안정적으로 연구할 만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선생의 성품은 소탈하기 그지없어 요즘 세상의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시공간 감각도 남달라 미처 국경일인 줄 모르고 평소처럼 강의하러 나섰다가 뒤늦게 깨닫고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든지 남의 강의실에 잘못 들어가서 강의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선생은 어찌 보면 민망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을 무덤덤하게 들려주곤 했는데 돌이켜보면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털어놓았지만 나는 그러하지 못했던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생전 선생은 ‘맹자’에 나오는 좌이대단(坐以待旦·앉아서 아침을 기다림)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이 말은 주나라의 주공이 왕도를 생각하느라 밤새며 고심하다가, 가만히 앉아서 아침을 기다린다는 희망을 담은 글귀이다. 역사 속의 주공은 기다리던 아침을 맞이했지만 선생의 아침은 끝내 오지 않았던 것 같다.
싹을 틔우고서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뜻을 지니고 있어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뜻은 내가 지니는 것이지만 쓰이고 쓰이지 않고는 세상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점이 내가 선생을 위해 슬퍼하는 까닭이다.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빈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철학분과에서 함께 공부하던 시절의 故 이현구 선생(가운데)|ⓒ 전호근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3]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3]
- 프랑크푸르트, 새로운 세계 그리고 옛 하이델베르크 – ① –
□ 하버마스 선생님 본(Bonn)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그러니까 아도르노 선생님이 계셨던 ‘사회연구소(Institut für Sozialforschung)’로 옮겨가신 일은 선생님의 생애에서 하나의 분기점이었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 그 시기를 어떻게 회고하고 계신가요?
■ 제가 아무런 준비 없이 프랑크푸르트로 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로 간 것은 본 시절의 저와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준비란 『계몽의 변증법』을 읽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 책은 본에 있을 때 암스테르담의 망명 출판사 쿠에리도(Querido)에서 나온 초판으로 구입하긴 했지만, 저로선 그 암울한 문체의 글쓰기에 큰 공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서독의 사회 구조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은 제 정치적 신념과는 거리가 있었던 셈이지요.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를 되돌아보면, 호르크하이머가 「줄리엣」에 대해 쓴 장(章)은 당혹스러웠고, 아도르노가 미국에서 경험한 문화산업 이론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나 『프랑크푸르터 헤프테』에 진지한 연극평론을 기고하던 학생 시절의 제 입장에선 좀처럼 와닿지 않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데 있어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 배경은 고등학교 시절 굼머스바흐에 있던 공산주의 서점에 자주 드나들며 쌓았던 지적 자취들이었습니다. 박사학위 취득 이후 앞서 언급했던 이데올로기 개념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본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들이 무엇보다도 결정적이었습니다. 저는 2년이 넘도록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20세기 초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했던 이들. 신칸트주의와 마르크스 주의의 결합을 시도. 오토 바우어, 막스 아들러 등이 대표자]의 경제 이론 및 민주주의 이론, 신칸트주의 문헌들,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의 잡지들 그리고 칼 코르쉬와 게오르크 루카치 같은 저자들의 저작들을 읽으며 공부했습니다. 특히 루카치나 코르쉬의 글을 읽으며 “안타깝게도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사고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바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우연히 아도르노의 『프리즘 Prismen』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아도르노는 마르크스의 개념어들을 더 이상 1910~20년대의 빛바랜 언어로 다루지 않고 완전히 현대적인 언어로, 동시대의 현상들의 체계를 거리낌 없이 분석하는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반공주의가 극에 달하던 아데나워 시기의 암흑 속에서 말이지요! 그 관성적 개념어들을 더 이상 역사의 유물을 답습하는 방식으로 읽지 않고, 동시대적 현실 속에서 새롭게 ‘재부호화’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 그 순간의 독서 경험은 저에게 하나의 결정적 전환점이자 문학적으로도 찬란한 충격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뒷 바람에 힘 입어 저는 프랑크푸르트로 항해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프랑크푸르트로로 간 것은 단지 학문적 수련의 연장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상적] 내용을 담고 있는 동기가 작용한 것이었습니다.
□ 그렇다면 본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옮긴 일은 사상적으로도 깊은 전환점을 의미했던 건가요?
■ 저에게 이 시기는 일종의 두 번째 학문적 수련기와도 같은 정신 형성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로 가겠다는 제 결심은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도르노 선생님께서 아돌프 프리제(Adolf Frisé) 편으로 보낸 초청장에 제가 응하여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매우 호의적이었지만, 저는 당시 독일연구재단의 장학금을 받고 있었을 뿐 연구소에서는 고정된 자리를 약속받지 못한 상태로 갔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도르노 선생님은 호르크하이머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호르크하이머 선생님께서 아도르노 선생님만의 ‘첫’ 조수 자리를 승인해 줌으로써 제가 갈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상치 못하게 크게 놀랐던 것은 전혀 다른 점이었습니다. 그 연구소는 당시 서독에서 유일무이한 공간이자 독특한 세계였습니다.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적 과거나 좌파, 심지어 급진적 개혁을 지향한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매일 ‘테디’ 및 그레텔 아도르노(Teddie und Gretel Adorno)와 접촉하면서 문학적 인물과 지적 연대, 과거의 역사적 인물 간의 정신적 관계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중요하지만 사실은 먼 과거처럼 느껴졌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미 잊힌, 나치 시대 때문에 저희와 단절되었던 바이마르 시대의 지적 전통이 중요 망명자들과 함께 오늘의 일상으로 되살아난 셈이었습니다. 그 당시 서독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우주에 있었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토마스만과 에리카 만(Thomas und Erika Mann) 등의 [성이 아니라]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르며 그들을 오늘의 일상으로 소환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당시에 대체로 생존하고 있었음에도 서독에서는 먼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아도르노 선생의 삶과 역사에 비추어 보면, 이런 지적 분위기를 갖고 있는 존재들은 전혀 놀라운 이들이 아니었을 테지만, 저는 그 이전에는 그들과 적어도 문학적인 관계밖에는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56년 서독에서 발터 벤야민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의 저작은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갓 나온 갈색 표지의 두 권짜리 책을 제 아내 우테(Ute)가 아들 틸만(Tilmann)을 유모차에 태우고 사왔을 때 비로소 접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레텔 아도르노는 저에게 벤야민의 첫 사후 출간 작품에 대한 서평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이 글들은 매혹적이고 빛나는 이미지와 종교적 함의가 가득한 역사철학 개념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몇 년 후에서야 철학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공개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연구소에서의 일상은 제가 알던 어떤 것과도 달랐습니다. 망명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났던 정치적·사회적 고립감, 저희의 정치적 감각으로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보였던 호르크하이머 선생의 신중한 처신, 주지사 진(Georg-August Zinn) 그리고 문화부 장관과 그가 맺은 특권적 관계가 대학 내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는 사실 등 여러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도르노 선생님께서 풍기는 천재적 정신의 체취—그의 명료한 언어, 뛰어난 지능, 생각을 멈추지 않는 정신력—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이 연구소와 그 안의 환경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 그리고 우리 젊은 연구자들에게 그곳의 분위기가 얼마나 특별하고 독특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연구소 특유의 독특한 매너리즘과 때때로 낯설고 권위적인 행위 기대 그리고 미처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감지하고 있기는 했던 지적 보물들 말입니다. [이 대화의 흐름 상] 저는 적어도 호르크하이머라는 인물이 종종 양면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여줬던 이러한 배경적 상황에 대해 언급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때 당시 제가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그분의 학설뿐 아니라, 서독 사회에서는 낯설었던 이 지적·정치적 인물 자체 [및 연구소의 분위기]와 제 자신을 동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 당시 대학 그리고 이 도시 전체에는 어떤 지적 분위기가 있었나요?
■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사회학 학위 과정이 처음 도입되면서 이 연구소는 제가 강의를 시작할 무렵에야 비로소 대학에 개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 생활과 깊은 연을 맺지 못했어요. 더 이상 수업을 듣지 않았고 가끔 아도르노의 사회학 세미나에서 조수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철학부뿐만 아니라 경제·사회학부에서도 국내에 잔류했던 교수들과 망명에서 돌아온 교수들 사이에 정치적 배경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시의 지적 분위기에 관한 질문은 매우 흥미롭네요. 프랑크푸르트는 여전히 미군의 중심지였고 은행, 경제, 공항 그리고 서독을 남북으로 잇는 중요한 위치 덕분에 경제와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아내와 하버마스]는 본 대학 학생 시절에도 하리 부크비츠(Harry Buckwitz)가 반공주의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올린 브레히트 극을 보러 가곤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막 태어난 아들과 함께 펠트베르크 거리와 리빅 거리 모퉁이에 있는 37제곱미터 크기의 다락방으로 이사했습니다. 우테와 저는 그 당시 안타깝게 파괴된 이 도시가 곧 ‘구’ 서독 연방공화국의 일종의 지적 수도로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베스텐트 구역과 파울 교회 사이에는 극장, 출판사, 대학, 신문사 편집국이 거리에서나 사회적으로나 가깝게 있었으며 주요 신문사와 출판사가 모여 있었고 1960~70년대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도서 박람회도 열렸습니다. 1950년대 동안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정신은 이런 도시의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도르노 부부를 통해 알게 된 알렉산더 클루게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전이었고, 아도르노 선생님 역시 그 시기에야 비로소 자신의 지적 존재감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이름을 이 도시와 연결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저는 1980~90년대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지막으로 지낼 때까지 그 영향력을 계속 누릴 수 있었습니다.
□ 오늘날 선생님께서는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초창기 경험과 아도르노 선생과의 관계 그리고 그분께서 추구한 비판 이론의 한 갈래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1956년 연구소에 오셨을 때와 1964년 하이델베르크에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오셨을 때, 그분의 철학적 근본 의도 중 선생님의 이론적 포부와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부분이 있었나요?
■ 이에 관해 답하려면 [전 후 시작된 비판이론이 아니라] ‘옛’ 비판 사회이론이 호르크하이머 선생이 아니라 오로지 아도르노 선생에 의해 설득력 있게 대표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도르노 선생은 1956년부터 1969년 사이에는 사후에 [총서로 출간된] 두 권의 위대한 후기 저작으로 얻은 명성에 걸맞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친 철학자는 아직 아니었습니다. 귀국 이후 처음에는 음악과 문학 이론 작업으로 인해 대중의 주목받았고, 키에르케고르와 후설에 관한 책들을 출판했으며, 이후에는 주로 미학 작업과 라디오에서 문화 비평가로 활동했습니다. 반면 교육 분야에서는 마르쿠제의 저작들과 함께 1937년 『사회연구지』에 실린, 당시 저는 아직 몰랐던 중요한 논문들을 통해 공식적으로 시작된 [이 학파] 전통의 유일한 진정한 계승자이자 확신에 찬 대표자였습니다. 요컨대 그는 아직 『부정 변증법』의 저자는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발터 뵐리히(Walter Boehlich. Suhrkamp 출판사의 수석 편집자이자 문학평론가)는 제게 “당신은 당신이 존경하는 아도르노보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호르크하이머의 작품에 더 가깝습니다”라고 말했는데요, 이런 사정을 고려한다면 이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 고전적 사회이론의 기본 골격에 저는 바로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통해 동참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그 책에서 여전히 권위적인 사회에서 민주 제도가 뿌리내리지 못한 점에 주목하여 [철학적이기보다는 역사‧사회학적인] 상이한 어조로 동참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또한 저는 1970년대에 클라우스 오페와의 논의를 바탕으로 『후기자본주의의 정당성 문제』에서 이 고전적 사회이론의 기본 골격을 다시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사회이론적 배경은 의사소통 행위 이론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제 사고를 지배하고 있으며, 또한 탈형이상학적 사유 계보학의 사회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아도르노는 제가 조교로 일하던 1950년대 후반 직접 가까이에서 접했던 그 시기의 아도르노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부정 변증법』의 저자로서의 아도르노는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당시에는 제가 그분을 그렇게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조교로 있던 시절인 1956/57년 겨울학기에는 그분의 강의를 몇 시간밖에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부정 변증법』이 집필되던 시기에는 저는 이미 젊은 동료로서 저만의 과제들에 더 많이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1950년대 후반에도 저는 —특히 발터 벤야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아도르노 특유의 독창적인 사유 방식이 고전적인 비판 이론의 형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아도르노의 독특한 사유를 미리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1930년대 초의 논문이나 강연들, 예컨대 「자연사 개념 Die Idee der Naturgeschichte」이나 「철학의 시의성 Die Aktualität der Philosophie」 같은 글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렇기에 나중에 그가 쓴 두 편의 후기 저작[『부정 변증법』, 『미학이론』]에서 다시 등장하는 사유의 동기들이 저에게 전혀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그 밖에도 저는 1950년대에 아도르노의 헤겔 세미나에 몇 번 참석한 것이 전부였고, 그것도 그레텔의 권유로 참석했던 것이었습니다. 제 관심은 사회 이론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스스로를 사회학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도르노의 사회학 세미나에서 조교 역할도 맡고 있었습니다. 『부정 변증법』은 아도르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 그 책을 연구하시면서 얻으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 이 저작은 바로 다음과 같은 근본 사유에서 생명력을 얻고 있습니다. 즉, 헤겔의 중심 개념인 ‘전체성’ 안에서 하나의 모순이 묵살된 채로 넘어갔다는 것이며, 그 모순이란 바로 고유하며 대체 불가능한 개별성의 항의입니다. 아도르노는 오직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 즉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개별자(Einzelnen)가 제기하는 항의에 목소리를 부여합니다. 헤겔에게 있어 그러한 항의는 구체적 보편자 속의 하나의 특수성으로 동화되는 대가를 치러야만 ‘지양(aufgehoben)’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유는 제가 이미 아도르노의 부고문에서 강조한 바 있었습니다만, 그 사유의 흔적을 제 나름대로 따라간 것은 제 마지막 저서의 헤겔 장(章)에서였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헤겔 변증법이] 개별자와 추상적 보편자 사이의 대립을 화해시키며 구체적 보편자로의 변증법적 전개가 이루어지는 이 구조[개별자와 보편자의 화해로서의 구체적 보편자로 전개되는 헤겔 변증법적 지양 구조]가 도덕적 전체성의 해체 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사회 이론적 모델로서 나름의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런 모델[헤겔 변증법의 ‘화해’ 개념을 사회적·정치적 의미로 확장시킨 하버마스적 헤겔 해석 모델]은 자본주의 위기의 분석 속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이런 식의 모델[헤겔 변증법을 사회 현실에 적용한 모델]은 자본주의적 위기들을 감안하면서 발전된 모델인데, 그것은 서로 충돌하는 당사자들 사이의 갈등을 명제들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는 논리적 작용으로 단순화하여 그 속에 ‘화해’라는 함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모순 자체도 화해되지 않으면서 고통이 드러나게 된다는 함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아도르노는 특수자와 추상적 보편자 간의 대립이 구체적 보편자 안에서 ‘지양(Aufhebung)’될 때, 이것이 실제로는 ‘강요된 화해’이며 허위라는 점, 곧 헤겔이 말한 전체성 개념이 지니고 있는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측면을 간파했습니다. 『부정 변증법』은 헤겔이 말하는 ‘지양’ 개념 속에서 결국 남게 되는, 절대로 환원될 수 없는 개별성의 잔여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상처받기 쉬운 인간 존재들은 자신을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양된 전체성의 시선에서는 그저 그것에 속한 특수자로만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되돌아보는 관점에서는 그것들은 특수한 존재로는 인식되고 고려되지만,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Einzelheit)이라는 관점-오직 그들이 어떻게 고유한 행위를 수행하는가에서만, 그리고 그것이 자기 이외의 다른 것을 지향하면서 의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직접적으로 의식되는 바로 그 개별성 속에서만-에서는 더 이상 인식되고 고려되지 않습니다. 아도르노는 한편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생애사 속에서 직접 경험한 자기만의 것(Unverwechselbarkeit)과 대체 불가능성 사이의 차이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일종의 위로부터 또는 외부로부터 바라보였을 때의 특수성 사이의 차이를 고집스럽게 주장합니다. 『부정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화해된 전체 속에서 고유성(Einzelheit) 또는 개별성(Individualität)의 온전함이 손상되지 않은 채 ‘지양’되기 위해서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그는 이 제3의 관점[변증법적으로 지양된 전체성의 관점]에서 볼 때 [개별성에 대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고, 또 결코 이행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렇게 [아도르노적인] 변증법적으로 전개된 통찰—즉, 궁극적으로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개별적인 것에 대한 [헤겔 변증법적] 논리적으로 불가피한 훼손에 대한 통찰—을 나는 [부정] 변증법적으로 드러낸 전체성 개념에 대한 통찰을 상호주관성이론의 형식화용론적 개념으로 번역함으로써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아도르노가 가했던 개인적인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피하게 훼손된다는 점에 대한 비판을 헤겔의 ―형이상학적― 의미에서의 인격에만 한정하지 않고, 모든 개별 존재자(alle einzelnen Entitäten)로 일반화하면서 『부정변증법』에서 『미학이론』으로 나아간 다음 단계에는 더 이상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유일무이함의 핵심은 예술 작품이나 자연미의 현상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고, 그걸 언어적이든 이미지적이든 음악적이든 간접적으로나마 포착할 수 있는 건 결국 미학적 비판일 뿐이라고 봤던 거죠.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아도르노와 이론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아도르노의 작업 중 미학이 역사철학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남긴 개별 미학적 통찰들 —그 현상학적인 풍부함— 에서 제가 배운 게 다른 어떤 미학보다도 많았다는 사실까지 변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아도르노가 예술의 현대성, 즉 현대 예술이 어디서 어떤 충동을 받았는지에 대해 해석한 부분은 제 개인적인 경험들과도 깊이 맞닿아 있었어요. 비록 저 자신은 그에 대해 가끔 서평이나 짧은 논평으로만 말했을 뿐이지만 말입니다.
□ 사회연구소에서는 경험적 사회학으로서 비판적 사회연구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나요?
■ 음, 제 생각엔 이론과 경험적 연구 사이에 분명한 간극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1956년 2월에 도착한 직후 아도르노에게서 처음 받은 ‘업무들’도 그 간극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이미 끝나버린 경험적 연구들에 대해서 뒤늦게 이론적인 ‘서론’을 덧붙이는 식이었거든요. 처음엔 사회정책에 관한 조사를 하였고, 그 다음은 주로 크리스토프 욀러(Christoph Oehler)가 작업했던 이른바 ‘대학 연구’였어요. 전 솔직히 그게 좀 사기치는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아도르노가 만족할 만큼은 잘 해냈던 것 같아요. 다행히 그 연구들이 출판됐다는 얘긴 아직까지 못 들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프리더 벨츠(Frieder Weltz)가 전문적으로 설계하고 수행했던 학생들의 ‘정치적 의식’에 대한 연구에서는 피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좋지 않은 일들이 우연히 겹치면서 제가 그 책 표지에 주저자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사실 연구 설계보다는 결과를 정리하는 데 더 많이 관여하긴 했어요. 이런 개인적인 얘기를 넘어서, 사회 이론이라는 게 원래 추상 수준이 높기 때문에 이론적인 전제들이 개별 경험적 결과와 직접 연결되기는 어렵다는 일반적인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루만과 했던 대화가 기억나네요. 그 사람도 자기 이론이 [경험적 사례에 의한 실증에서가 아니라] 개념사적인 연구로만 뒷받침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쉬워했죠. 하지만 저는 다른 데 더 관심이 있었어요.
제가 고전적인 형태의 비판이론에 대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수정 사항들은 이론 구성의 결함뿐 아니라 역사적 전개가 [과거와] 분명히 달라졌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건 이론이 발전할 때 흔히 있는 과정이죠. ‘의사소통 행위 이론’은 슈타른베르크에서 썼습니다. 1980년대 초 프랑크푸르트 철학 세미나에 다시 복직한 이후로는, 정치이론이나 법이론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면서 [규범적] 사회이론 쪽에는 간헐적으로만 관여했습니다. [규범적 사회이론을 바탕으로 한 현실 문제에 대한 해명은] 대부분 『정치 소논문집 Kleine politische Schriften』 같은 맥락에서 했던 개입들이었고, 전문 학술지에 기고한 일은 드물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레비아탄 Leviathan』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 그리고 『공론장의 신 구조변동』에 실린 제 글이 있죠.
□ 아도르노에 대한 전기적인 질문 하나 더 드릴게요. 그의 책 『미니마 모랄리아』는 장기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각성의 경험을 주면서 비판이론에 대해 더욱 깊이 탐구하게 만들곤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미니마 모랄리아』를 언제 처음 읽으셨고, 그 책이 선생님께 어떤 인상을 주었나요?
■ 확인해 보니 1951년에 나온 초판본으로 이 책을 가지고 있군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깨달음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미니마 모랄리아』는 한 번 읽고 끝낼 책이 아니에요. 자주 다시 꺼내 보게 되는 그런 책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건 마지막 수필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가장 크게 감동을 주었고, 그것이 제가 최근에 쓴 책에서 다룬 철학이 종교로부터 물려받은 관계(Erbschaftsverhältnis zwischen Philosophie und Religion)를 계속 떠올리게 한다는 점입니다.
□ 사회연구소에 계실 때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들과 처음 만났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에 대한 논의가 선생님의 사유와 작업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 어릴 적에 《Psyche》라는 잡지를 처음 읽으면서 프로이트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대학 시절에는 발달심리학과 임상심리학 연구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프로이트에 대해 언급이 거의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1956년 여름 프랑크푸르트에서 알렉산더 미처리히(Alexander Mitscherlich)와 호르크하이머가 주최한 프로이트 강연들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고, 저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FAZ)에 열심히 그 강연에 대해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정신분석학은 국제적으로 전성기를 맞고 있었고, 주요 인물들 대부분은 미국과 스위스에서 왔으며 프랑크푸르트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는 막 『에로스와 문명』을 출간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였는데, 저는 그와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델베르크에서 강의하던 알렉산더 미처리히가 저를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62년에 저희가 하이델베르크로 이사한 후 미처리히 가족과 제 가족 간에는 깊은 우정이 생겼습니다. 우테와 저는 알렉산더와 마가레테 부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들을 매우 아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미리우스 가에 지그문트 프로이트 연구소가 설립된 후 외버만, 오페 그리고 저를 위해 마련되었던 사회학 세미나에 참여-저는 사회연구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하면서 [이들과] 협력하였습니다. 저는 미처리히의 심인성 질환에 대한 기본 가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나중에는 정신분석학에 바탕을 둔 여러 시대 진단서들에 대한 서평을 썼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시절 초기에 저는 프로이트의 대형 판본을 구입하였습니다. 이 공부의 결과는 『인식과 관심』의 프로이트 장에서 다루었습니다. 저는 정신분석의와 환자 간에 이루어지는 분석적 대화 경험들을 의사소통 이론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자아(Ich=Ego), 원초아(Es=Id), 초자아(Über-Ich=Super Ego)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확신합니다. 아마도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이 제 언어 이론에도 길을 열어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식과 관심』에서는 인식론적 문제의식이 중심이었고, 정신분석학은 비판 사회이론이의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할 인식관심(Erkenntnisinteresse)의 모델로 기능[정신분석학이 비판 사회이론의 인식론적 모델로 기능]하였습니다. 그러나 알프레드 로렌처(Alfred Lorenzer)의 연구들이 중요시했던 프로이트의 심층 해석학에 대한 체계적 관심이 저를 이성 개념에 대한 의사소통 이론적 해명이라는 길로 이끌었습니다. 정신분석적 ‘대화’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것은 의사가 환자의 무의식적 동기를 환자 스스로 인식하고 진단이 잘 이루어질 정도로 풍부한 의사소통을 하도록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성 지향적 심층 해석학적 언어 사용의 이런 양식은 단어(Wort)로서의 로고스(logos)와 이성(Vernunft)이라는 의미의 로고스 사이의 내적 연관성에 대한 해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였습니다. 저는 신경증적 병리 해소라는 정신분석적 실천에서 언어적 의사소통의 이성적 구조가 드러나야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정신분석학과 해석학에 대한 초기 관심이 후에 언어행위 이론의 경로에 따라 발전시킨 형식적 언어화용론의 길을 열어 주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후 당신의 새 책에서는 프로이트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만.
■ 제가 더 이상 프로이트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보신 것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에요. 사실 제 아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알렉산더 미처리히가 세운 전통을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는 교수이기도 해서 그가 이런 부분을 저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도 제게 프로이트는 여전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얼마 전, 『365×프로이트 365 × Freud』라는 서평집에 짧고 인상적인 글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프로이트가 얼마나 제게 가까운지 새삼 놀랐어요. 저는 그 유명한 문장, ‘칸트의 정언명령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직접적인 상속자다’라는 말을 언급하면서, 프로이트에게서 늘 나타나는 성가신 애매함을 좀 풀어보려고 했어요. 프로이트에게서 자아와는 거리가 먼 초자아(das ich-ferne Über-Ich)는 억압적인 사회 규범의 내면적 대리인으로 등장하죠. 반면에 자아에 가까운 초자아(das ich-nahe Über-Ich)는, 자아가 자기 이익을 주장하려고 할 때, 이성적으로 습득한 도덕적 양심의 목소리로 자아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역할을 해요
이 억압적인 초자아와 비판적 혹은 이성적으로 자율적인 양심의 주체로서의 초자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은 결국 부모의 권위가 내면화되는 과정에서는,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에서는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어린아이의 자아 역시 다른 사람들의 모범적인 행동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힘을 얻는 거죠. 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아이는 처음에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던 부모의 모범성에서 점점 거리를 두게 되면서, 억압하는 아버지(übermächtiger Vater)와 모범적인 아버지(vorbildlicher Vater)를 구분하는 법을 배워요. 이건 나중에 한편으로는 기존 사회의 사실적 권위(faktische Autorität)와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된 권위(moralisch gerechtfertigte Autorität)를 구별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래서 이 둘이 초자아가 하는 ‘말’ 속에서 더 이상 뒤섞이지 않게 되는 거예요. 청소년은 성장 과정에서 사회의 권위와 자기 자신의 도덕적 판단의 권위를 구분하는 법을 배우게 돼요. 이익이 갈등하는 상황이 주어질 경우, 자신의 선택의지(Willkür)를 다른 모든 이들의 이익과 동등하게 놓으면서 갈등을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이죠. 이 규범을 보편화하는 행위가 바로 칸트의 정언명령의 핵심이고, 성인이 된 개인이 스스로 해내야 하는 과제예요. 이런 방식으로 보면 프로이트와 칸트 사이에 일관된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고, 이는 프로이트가 자연주의적 단순화에 빠지지 않도록 해줍니다. 왜냐하면 이성적으로 자율적인 자아의 힘(Ichstärke)이나 이성에 따라 의식화하는 것이 자아 기관(Ich- Instanz: 상황에 맞게 욕망을 조절하고, 도덕적 규범과 욕망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심리적 기관) 기능을 강화하는 치료적 길이라는 점을 철학적으로 해명하지 않는다면, 프로이트의 자아 구조 이론이나 무의식적 동기에 대한 해명 그리고 이를 치료의 목표로 삼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런 개념들의 규범적 의미가 문화마다 다른 가치나 규범에 근거해서도 안 돼요. 프로이트에게서도 이성은 결코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이성이란 근거 있는 통찰력을 의미하고, 이 통찰력은 자아의 힘(Ichstärke)이라는 형태로 동기를 부여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또 성공적인 분석의 결과로 자기 동기를 바꾸는 자기 성찰을 이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5년 6월 제18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 5장. ‘체용불이’와 ‘흡벽’ 생성론: 웅십력(熊十力)-발제: 김제란│2025.06.20.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 주제: 『중국현대철학사론』 5장. ‘체용불이’와 ‘흡벽’ 생성론: 웅십력(熊十力)
– 발제: 김제란 선생님
– 일시: 2025년 6월 20일(금) 오후 4시
– 장소: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세미나실 & ZOOM 온라인 회의실
벌써 연구모임이 18차에 해당하는군요. 2개월마다 한 번씩 했으니 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이규성 선생의 저작 중 마지막으로 『중국현대철학사론』(2020)을 읽고 있는데, 총 8장 가운데 이번이 5장에 해당합니다. 5장에서는 웅십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웅십력은 이규성 선생의 소개에 의하면, 신해혁명에 가담했으나 군부의 타락과 부패를 보고 실망하여 이후 철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불교의 유식학을 연구하면서 우주의 본체를 증득하려 했으나 불교의 탈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양명학의 성현지학과 연결해서 우주를 관통하는 내적 생명을 통해 본체와 생멸의 세계를 하나로 결합하려 시도했다고 합니다. 아래 인용문은 그의 고민을 잘 표현하는군요. “그러한 참된 것이 없다면 환상이라고 깨닫는 자는 누구일 것인가? 이러한 깨달음이라는 현상이 사라지는 것이라면 환상은 또 왜 있는가?” “과연 환상이 쓸모없는 것이라면 어찌해서 참된 것에 의지해서 환상이 일어나는가/ 참된 것에 의지해서 환상이 일어나는 데 왜 환상을 끊고 참된 것을 찾는가?” 1949년 중국 사회주의 시대, 그는 비타협적 정신 속에서 고립 속에 살아갔고 1967년 문화대혁명에서 비판받았으며, 1968년 병원에서 쓸쓸하게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의 시대 사람들은 그를 ‘광철(狂哲)’이라 불렀는데, 철학자의 고독을 잘 보여줍니다. |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Sepe2ydYln4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 –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 최종덕 (중천학당 강좌 영상 소개) [한철연 소식]
원주시 소재 중천철학도서관의 유튜브 계정 중천학당에 한철연 최종덕 회원이 故 이규성 선생님의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2016)를 소개하는 2022년 12월 1일 게시된 강좌 영상입니다.
한철연에서 이규성 철학 연구회의 연구가 가열차게 기획되고 있는 요즈음 여러 분들께 도움 될 수 있는 영상인 것 같아 소개합니다.
많은 시청을 바랍니다~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d0ot8w3UQSA?si=bp3j5ZMZm-8mF7dh
헤겔 형이상학 산책40-견인력과 반발력의 동일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0-견인력과 반발력의 동일성
1)
견인력과 반발력은 일자들의 관계를 매개하는 힘이다. 이 힘은 대자 존재로서 일자와 그 일자가 관계 맺는 공허를 전제로 한다. 이 힘은 근대 초기 질량을 지닌 물체에 작용하는 힘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견인력은 중력을 통해 이해됐지만, 반발력은 쉽게 찾아내기 힘들었고, 결과적으로 근대 물리학에서 하나의 아포리아가 됐다. 라이프니츠가 활력(에너지) 개념을 제시하고 맥스웰이 에너지 보존 법칙을 수립하면서 견인력과 반발력의 균형이라는 변증법적 테제가 확립됐다. 만일 우주에 하나의 힘만이 존재한다면, 우주에서 운동은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견인력만 있으면 우주는 한 점으로 수축하고 말 것이며, 반발력만 있으면 우주는 무한히 확산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리학적으로 이 테제가 과연 맞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우주 전체의 에너지를 완벽하게 계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물리학자가 우주에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를 설정하는 것도 그런 테제를 전제로 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일단 헤겔은 대자 존재 즉 내적인 통일성을 지닌 일자라는 개념으로부터 개념적으로 견인력과 반발력의 통일이라는 원리를 끌어내니, 이제 헤겔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견인력과 반발력의 통일이라는 원리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보자.
2)
견인력과 반발력의 통일에 관한 헤겔의 테제는 대자 존재를 다루는 1권 2장 3절의 마지막 C-c 항에서 다루어지며(초판에서는 C-2항), 헤겔은 양자의 통일을 통해 양적인 것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현존을 다루는 2장을 마치고 양을 다루는 3장으로 넘어간다.
C-c 항에서 헤겔은 ‘견인력과 반발력의 관계’(초판에서는 제목이 ‘견인력과 반발력의 균형’이다)에서 양자를 자립적인 힘으로 보는 칸트의 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앞에서 소개했지만, 칸트는 물체의 침투 불가능성이라는 표상으로부터 반발력을 끌어내고 물체의 연장성(충만성)이라는 표상으로부터 견인력을 끌어냈다.
칸트는 양자를 물체를 이루는 두 표상으로부터 끌어내면서도 양자 사이에 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즉 “견인력이 없이 반발력만으로는 어떤 물체도 존재할 수 없으므로 견인력을 요구했다.”(칸트, 자연과학의 최초근거, 53쪽, 헤겔 논리학에서 재인용) 간단히 말해 반발력은 확산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므로 반발력만 있다면 물체는 확산해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 반발력은 견인력을 전제로 삼는다는 것이다.
칸트 자신은 반발력을 견인력의 전제로 삼았으나, 견인력을 반발력의 전제로 삼지 않았기에 일방적이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의 논리로부터 곧바로 견인력도 반발력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끌어냈다. 즉 견인력이 존재하려면 반발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헤겔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만일 견인력만 있다면, 견인력은 수축하는 방향을 작용하므로 우주는 하나의 점으로 수축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 자신은 이 두 가지 힘은 서로 타자를 전제하고 타자를 요구하지만, 자립적이고 서로의 관계는 외면적이라 보았다. 그러나 헤겔은 서로 전제하고 요구되는 것들의 관계는 내적이고 각자는 타자를 매개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3)
헤겔에서 견인력과 반발력은 이처럼 타자를 매개로 존재하지만, 헤겔은 결국 이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매개라고 한다.
“견인력은 반발력을 매개로 견인력이 되며, 반발력은 견인력을 매개로 반발력이 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타자를 통한 자기와 매개는 사실상 부정되며 이런 규정의 각자는 자기 자신과 그 자신의 매개가 된다.”(논리학 2판, GW21, S. 164)
여기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매개”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말을 설명하면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각자는 자기 자신을 전제로 하는데, 즉 그 자신이 전제하는 것[타자]에서 다만 자기에 관계한다.”(논리학 2판, GW21, S. 164)
그것은 타자 속에 이미 자기 자신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두 가지 규정이 각자 독자적이면서 이처럼 자기를 자기가 전제한다는 것은 각자가 타자를 자기 안에 계기로서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리학 2판, GW21, S. 164)
따라서 “자신이 전제하는 것[타자]에서 다만 자기 자신과 관계하게”(논리학 2판, GW21, S. 164) 된다. 즉 타자와 매개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매개하는 것이다.
핵심은 곧 타자 속에 자기가 들어 있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반발력 속에 이미 견인력이 들어 있고, 견인력 속에 반발력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4)
여기서 일자와 다수의 일자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일자가 가능하다면, 다수의 일자도 가능하다. 어떤 일자는 그 자체가 우연적인 대자 존재니, 다른 우연적 대자 존재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뭇잎이 대자 존재적인 일자인 한에서는 여러 나뭇잎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거꾸로 다수의 일자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다수가 일자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만일 그것이 현존이라면 현존은 다른 현존으로 이행하는 것이지 공허 속에 공존하지 못하므로, 다수 일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일자인 경우에만 다수 일자가 생겨날 수 있다. 만일 다수의 동전이 있다면 이 동전은 단순히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 존재의 산물인 일자이어야 한다.
일자가 견인력에 의해 생겨나고 다수 일자가 반발력의 산물이라면, 일자와 다수 일자가 순환하니, 마찬가지로 견인력과 반발력도 순환한다. 반발력은 견인력을 통해, 견인력은 다시 반발력을 통해 생겨나니 견인력이 타자인 반발력에 의해 매개된다면, 더 나가서 자기 자신인 반발력에 의해 매개된다고 할 수 있다.
“반발력을 통해서 다수의 일자가 일자로서 자기를 드러내고 유지하며, 반발력을 통해서 다수의 일자 자신이 존재한다. 다수 일자가 존재하는 것이 반발력 자체다[반발력을 가능하게 한다]. 반발력은 다른 현존에 대립하는 상대적 현존이 아니라[현존과 현존의 관계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만 자기 자신에 관계한다.” (논리학 2판, GW21, S. 164)
다수의 일자를 정립하는 것이 반발력인데, 다수의 일자가 있어야 반발력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견인력은 반발력을 통해 이 반발력은 견인력을 통해 생겨나니, 견인력은 타자인 반발력에 의해 매개된다고 할 수 있고 더 나가서 자기 자신 즉 견인력 자신에 의해 매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견인력은 자신을 전제해서 다른 일자들의 규정 속에 관념적으로 존재한다. … 다수 일자는 관념성[일자라는 것]을 반발력 규정에 대립해서 견인력에 관계해서 비로소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견인력은 전제되고 있고, 다수 일자에서 본래 존재하는 관념성이다. 왜냐하면, 다수 일자는 일자인 한-견인력을 가진 것으로서 표상된 것이 함께 포함되어 있으므로-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논리학 2판, GW21, S. 164)
즉 일자를 정립하는 것은 견인력인데, 일자가 있어야 견인력 자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5)
이제 각자가 타자와 대립한다는 점에서 보면, 각자가 타자를 매개로 하고 또는 자기 안에 타자를 포함하고 있어서 타자에 대립하는 것은 곧 자기에 대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각자는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타자로 이행하며 그 자체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자신의 타자로 정립하는 것이다.”(논리학 2판, GW21, S. 164)
“여기서 ‘자기를 전제하는 것’(견인력)이 ‘자기를 자기의 부정태로서 정립하는 것이며’ 즉 반발력 즉 ‘그런 것 속에 전제된 것은 전제하는 것 즉 견인력과 동일한 것이다.”(논리학 2판, GW21, S. 164)
이제 헤겔은 견인력은 곧 반발력이 되고 반발력은 곧 견인력으로 되니, 양자는 서로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견인력과 반발력은 서로 불가 분리적이며 서로 동일하다. 이런 견인력과 반발력의 동일성을 헤겔은 이렇게 설명한다.
“일자 자체는 탈자화이며 자기를 타자로서 즉 다수 일자로 정립하며, 다수 일자는 동시에 자체 내로 함몰하여 자기를 타자로서 즉 일자로 정립한다.”(논리학 2판, GW21, S. 164)
그러므로 일자가 있다면(견인력), 동시에 그것과 구분되는 다른 일자도 있게 되며(반발력) 여러 일자가 있다면(반발력) 각 일자가 자기를 일자로 유지한다(견인력).
“다수 현존하는 일자를 견인력하는 것은 그 다수 일자의 관념성이며 일자를 정립한다. 그렇게 일자가 정립하는 가운데 다수 일자는 부정하면서 일자를 산출하는 것이 되어서 자기 자신을 지양하며, 일자를 정립하는 것으로서는 그 자신에서 자기를 부정해서 반발력이 된다.”(논리학 2판, GW21, S. 164)
“따라서 탈자(반발)과 자신을 일자로 정립하는 것(견인)은 불가 분리적이다.”(논리학 2판, GW21, S. 164)
6)
이상 헤겔에서는 견인력과 반발력을 세 단계로 설명했다. 우선 ‘양자를 자립적인 힘으로 가정’하는 칸트의 주장에서 출발하여 ‘각자는 타자를 매개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서 ‘다시 자기 매개를 통해 존재하는 것’으로, 마지막으로는 ‘양자의 동일성으로’ 설명했다. 헤겔의 논리 전개는 일반적으로 견인력과 반발력에 관한 표상을 통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에 대해 외부적으로 반발력하는 것은 그 물체의 내부에서 견인력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만일 견인력이 없다면 반발력 자체가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단단하지 못하면 외부 충격에 깨어지고 말지 반발력하지는 못할 것이다. 반면 우리는 표면의 반발력만을 생각하지 그 내면의 견인력을 보지 못한다. 헤겔은 그 내면의 견인력이 없이는 표면의 반발력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거꾸로 하나의 물체가 외부적으로 다른 물체를 견인력하는 것은 거꾸로 그 물체 내부에서 반발력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주 끌어들이는 힘만을 보지만, 사실 자기 내부에서 반발력이 없다면, 외부의 물체를 끌어들이지도 못한다. 만일 타자를 끌어들이려 한다면, 자기 자신만을 고집하며 고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견인력과 반발력이 사실 서로 대립하는 것이지만, 양자는 동일하다는 것으로부터 이제 질적인 존재는 자기를 넘어서 양적인 존재로 이행한다. 양적인 존재란 곧 여러 일자가 견인력과 반발력의 이중적 관계 속에서 결합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자들의 관계는 공허 속에서 일어나는 관계다. 즉 양을 이루는 개념은 두 가지 축에 의존한다. 즉 일자와 공허, 그리고 견인력과 반발력이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2]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2]
1. 학문적 생애의 시작 – ② –
□ ‘68’ 이전의 시기를 우선 살펴본다면, 선생님의 세대에 속한 독일 철학자 동료들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무엇입니까?
■ 돌이켜보면, 전후 독일연방공화국에서 나와 동료 철학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우정 어린 친밀감이나 일정한 거리감을 결정짓는 데, 전문적‧개인적 자질 외에도 하나의 요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철학적 성향에 내재한 정치성이었습니다. 내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세대에는 하나의 정치적 분열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보다 급진적인 돌파구, 새로운 시작을 바랐던 사람들과—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헤르만 륍베(Hermann Lübbe)인데—지배적인 반공주의에 전적으로 기대어 나 같은 사람을 ‘건전한’ 혹은 ‘방어 가능한’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간주했던 사람들 사이의 분열이었습니다. 뮌스터에서는 일종의 마지못한 모더니즘[민주주의를 대놓고 거부하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수용하면서 내심으로는 권위주의적 사상을 추수하는 상태]의 정신 속에서 칼 슈미트(Carl Schmitt)와 접촉하는 일이 재빨리 재개되었습니다. 냉전이라는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68혁명 운동의 양극적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헌법은 좌우 모두 동의했지만 그렇다고해서 보수 진영이 좌파 동료들을 내부의 적으로 의심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우파를 반박할 때 부드러운 말투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치 시절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에서 비롯된 이 공개적인 논쟁은 사실 학생운동이 전개되면서 격화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과 그 편집장 요아힘 페스트(Joachim Fest)에 의해서도 부추겨졌으며,1 철학뿐 아니라 많은 인문학 분야에서도 우리 세대 사람들 사이에서, 즉 우리 선생들이 아니라 우리 또래들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사회학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회학계는 귀국한 망명자들과 옛 나치들이 서로 맞서는 양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회학계의 모임은 이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다. 루트비히 폰 프리데부르크(Ludwig von Friedeburg)의 주도로 1950년대 후반부터 매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남을 가졌던 산업사회학 중심의 ‘젊은 사회학자들’도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뮌스터, 쾰른, 프랑크푸르트와 같이 정치적‧학문 정책적 입장을 뚜렷하게 드러내면서 대립하던 학계 진영들과는 달리, 자신들을 하나의 협력적이고 연대 의식이 있는 세대로 인식하였습니다. 이처럼 ‘학파들’ 간의 대립을 지나치게 극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태도는, 각 진영의 입장 차이가 다양한 정치적 삶의 궤적들과 관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반드시 정치적인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수월하게 가능했습니다. 저는 학문적 경력 속에서 하인리히 포피츠(Heinrich Popitz), 랄프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 레나테 마인츠(Renate Mayntz), 라이너 렙시우스(Rainer Lepsius)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크리스티안 폰 페르버(Christian von Ferber), 크리스티안 폰 크로코우(Christian von Krockow) 같은 플레스너 학파 제자들과도 교류하였습니다. 물론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과도 관계를 맺었는데, 이 분은 좀 더 독립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 울리 베러(Uli Wehler)를 통해 저와 제 아내 우테(Ute)는—그 당시 학문적 친분은 부부 간에도 자연스럽게 형성되곤 했습니다—정치사나 사회사 등 동시대의 역사 주제를 다루었던 역사학자들의 친밀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는 한스 몸젠과 볼프강 몸젠(Hans und Wolfgang Mommsen), 위르겐 코카(Jürgen Kocka),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빈클러(Heinrich August Winkler) 등이 있었습니다.
우리 또래의 모든 동료들은 학문 분야와 무관하게, 성장기 동안 하나의 역사적 단절을 경험했다는 사실에서 공통된 흔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공통의 경험은 하나의 세대를 구성하지만, 동시에 그 경험에 대해 각자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서로 달랐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시대사 연구자들에 의해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주제입니다. 예를 들어,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출간된 저작들을 보면 그 점이 드러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의 역사학 및 역사이론에 대한 혁신적인 기여로부터 아무런 배움을 얻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독일의 전통을 더 이상 여과 없이 계승할 수 없다는 비판적 인식과, 새로운 시작이 불가피하다는 절박한 자각은 주로 자유주의적이거나 좌파 성향의 진영에서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 하지만 전후 시절 젊은 철학자들이 처했던 상황은 이후 몇십 년, 특히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에서 달랐던 것일까요?
■ 전후 세대 철학자들의 세대적 특징에 대해 고집스럽게 묻고 계시는군요. 저는 사실 그 세대가 우리 다음 세대, 이를테면 저희의 ‘제자 세대’와 그렇게까지 뚜렷하게 구별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희 세대는 좀 더 동질적인 교육 과정을 겪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문 분야의 세분화가 아직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 같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당시 우리에게 중요했던 고전들은 공통적으로 동일했지요. 왜냐하면 저희는 1920년대의 철학적 거장들을 ‘스승’ 삼아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현상학, 해석학, 철학적 인간학은 독일 관념론의 전통과 더불어 반드시 공부해야 할 분야였고, 칸트와 헤겔에서부터 딜타이, 후설, 하이데거, 그리고 쉘러, 플레스너, 겔렌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요한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학문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한 시대의 정신, 다시 말해 독일 철학이 마지막으로 ‘세계철학’의 지위를 가졌던 그 시기의 사상과 자연스럽게 접속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희는 그러한 ‘세계철학’이라는 이상과의 연을 끊은 첫 세대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스승들의 고양된 관념론적 이상, 혹은 철학만이 [현실과 세계의 본질을 해명할 수 있는 고유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는 태도에서 이탈하였습니다. 단지 좀 더 소박한 작업을 했다는 것뿐 아니라, 철학에 임하는 자세 자체가 비판적 자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대적 태도는 심지어 아도르노나 가다머처럼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스승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물론 누구에게는 약하고 누구에게는 더 강하게 드러났지만요. 게다가 저희는 독일의 전통적인 철학 커리큘럼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영미 철학에서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이를테면 분석적인 논증 스타일, 오류 가능성에 대한 자각, 경험적 사실의 중요성에 대한 민감성, 사회과학에 대한 개방성 등입니다. 저희가 어느 정도 자기 주도적으로 수행했던 학습 과정의 이정표가 되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카르납과 빈 학파의 수용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수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중 몇몇에게는 퍼스와 프래그머티즘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치와 정치철학뿐만 아니라, 철학의 핵심 영역들에서도 서구[영미권]로의 개방이 일어나고 있었던 셈이지요.
□ 두 학기는 괴팅겐에서 그리고 한 학기는 취리히에서 공부한 후 본에서는 박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 머물렀다는 점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본에서 철학 공부를 할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점이 있었나요?
■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는 많은 우연한 일들과 몇 가지 의식적인 중요한 선택들로 이루어집니다. 괴팅겐에서는 니콜라이 하르트만에게 지루함을 느꼈고, 그곳에서는 인간 관계도 얻지 못했습니다. 차가운 북부 지역보다는 라인강 인근의 본이 더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본에서 친구가 된 굼머스바흐 출신의 만프레드 함비처한테 본의 극장 그룹에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들었을 때 매력을 느꼈죠. 이번에는 공부할 장소를 개인적인 이유로 선택한 셈이었어요. 그래도 에리히 로타커(Erich Rothacker)는 적어도 이름난 철학자긴 했고, 그의 저서들에 대해서도 막연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인상은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치 초창기 멤버였다는 사실은 나중에 차츰 알게 되었지만 이런 우연한 선택이 행운을 만나게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곳에서 우테를 만나 이후 제 삶을 결정지었고, 로타커의 수요일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학문적으로도 매우 자극적이고 배울 점이 많은 토론 환경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타커만의 고유한 철학 이론을 배우지 못했지만, 그의 강의에서는 독일 역사학파의 광범위한 전통을 접할 수 있었고, 심리학 세미나에서는 1920년대 이래 철학적 인간학 논의의 기반이 되어온 풍부한 실증적 연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철학 세미나에서는 ‘사유 그 자체’가 마치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토론이 이루어졌으며, 이때의 경험 덕분에 언어철학에 대한 관심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사회학은 아직 관심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 그곳에서 오랫동안 함께 연구하셨던 동료 칼-오토 아펠을 만나셨죠. 두 분께서는 이론적으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슷한 독서 경험과 체계적 문제 의식을 가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셨습니다.
■ 그는 이미 박사 학위를 마친 연장자로서 전쟁 동안 병사로 복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와의 관계가 완전히 비대칭적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개인적으로 가까워졌는데, 저는 박사 과정 때 그의 옆방에 배정받았습니다. 그는 저에게 멘토와 같았고, 저는 그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그는 『존재와 시간』을 실존주의적 색채가 가미된 칸트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저에게 매우 잘 맞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 책을 이미 괴팅겐에서 읽었죠. 아펠은 결코 특별히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를 통해 저는 철학이 현재의 세계관과 자아 인식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살아있는 본보기로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은 삶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펠의 시대 진단은 제가 아침 마다 비판적으로 읽던 FAZ(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부비에 서점에서 구입한 학생용 정기 구독권으로 읽었는데요—에서 자주 접했던 도발적인 시사 문제들과는 아직 꽤나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가 1953년 여름 어느 주말에 아펠이 내 손에 쥐여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을 읽은 것이, 철학 공부와 불타는 정치적 시사 — 하이네만 대 아데나워! — 사이를 가로막던 벽을 단번에 허물어 버렸습니다.2
□ 아펠과 맺으신 우정 어린 관계는 일찍 시작되어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특히 1980년대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두 분이 각각 담론윤리를 발전시키던 시기에 다시 아주 긴밀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 우리 사이의 참으로 길고도 복잡한 관계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 속에 아펠과 칸트의 영향이 지나치게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당신의 추측에 답하기 위해서도, 본 시절 학생과 멘토로서의 관계[0단계]는 이후 진정한 의미의 동료이자 우정 어린 관계로 발전한 세 개의 단계[1~3단계]와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1954년 박사학위를 마친 뒤, 나는 아펠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나는 프랑크푸르트로 갔고, 아펠은 건강상 중단하곤 했던 그의 교수 자격 논문을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그 끊어진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것은 거의 우연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철학 강연에 초청받았으나 그 당시 이미 나 자신을 사회학자라고 여기고 있었기에 이를 수락하지 않았고, 대신 아펠에게 초청을 넘겼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다시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리가 나중에 동료가 된 이후 —1960년대에는 각각 하이델베르크와 킬에서— 철학적 작업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교류로 이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손편지들 중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이 편지들이 남았더라면 우리가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를 따로따로 추구하던 시기에 서로에게 끼친 영향을 —저에게는 상호적인 것으로 보이는— 보여줄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 시기 동안 아펠과 나는 철학 작업의 의도에 있어서 가장 가까웠습니다. 한편으로는 ‘인식 관심 이론’이 그러한데, 이 이론은 일종의 반성(reflection) 양식을 지향하며, 우리는 이때 정신분석학적 대화를 그 모델로 삼았습니다. 아펠은 실제로 정신분석을 받은 적이 있었던 듯하며, 나의 경우에는 학생 시절 『Psyche』 지를 읽으면서 지니게 된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프로이트 강의3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60년대 후반부터 담론 윤리(diskursethik)에 대한 고찰이 전개되었고, 저는 그 기본 사상을 『정당화 문제 Legitimationsprobleme』 제3부에서 “실천적 질문의 진리능력(Wahrheitsfähigkeit praktischer Fragen)”이라는 제목 아래 처음으로 발표했습니다.4 이러한 점에서 에를랑겐(Erlangen) 학파와의 논의도 중요했습니다. 아펠과의 관계에 있어 하나 고려할 점은, 제가 언제나 아펠보다 더 빨리 글을 출판했다는 점입니다. 너무 성급하게도요. 예를 들어 저는 아펠에게 『철학의 변형 Transformation der Philosophie』이라는 그의 두 권짜리 대작을 수년 동안 출판하라고 독촉해야 했습니다. 이런 비대칭적인 출판 속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긴밀한 사유 교류에서 그 결과물에 대해 단 한 번도 ‘선점권’ 문제는 불거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초 제가 하이델베르크에서 교수직을 막 시작하던 시기에 아펠은 저보다 훨씬 더 깊이 분석적 언어철학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저작들이 중요하다는 점을 제게 처음 일깨워 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저는 하이데거의 존재사 개념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유물론적 사례와 경험적 고찰로 그를 몰아붙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실천적 칸트 해석과 담론 이성 개념을 향해 서로 접근해갔습니다.
제 기억에 두 번째 단계는 1970년대 초에 종결되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아펠은 내 책 『인식과 관심 Erkenntnis und Interesse』의 한 지점에 대해 아주 정확하고 결정적인 비판을 했습니다. 즉 저는 반성(reflection)의 두 개념을 충분히 구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은 구분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생애사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된 자기반성으로서의 ‘반성’,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하고 행위하며 말하는 방법에 대한 보편적이지만 수행적으로만 현전하는 ‘방법지(Wissen-wie)’에 대한 이성적 재구성으로서의 ‘반성’5. 이 구분을 불충분하게 하는 바람에 저는 세 번째 인식 관심, 즉 ‘해방적(emanzipatorisch)’ 인식 관심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설명하는 체계적 난점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비판을 『인식과 관심』의 다음 판 후기에 즉각 반영했습니다.6
우리의 두 번째 관계 단계는 제가 공부를 마친 후 시작되었는데, 이 두 번째 단계는 다시 또 두 협력의 시기로 나뉩니다. 칼-오토 아펠의 프랑크푸르트 임용과 동시에 저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습니다. 두 협력 시기 중 첫번째는 제가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집필하던 슈타른베르크 시절이었습니다. 아펠이 슈타른베르크를 처음 방문했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 반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서로를 안 지 20년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그 당시엔 다들 그렇게 했습니다.
1970년대 우리의 서신들에는 아마도 촘스키-그의 중요성을 나는 1965년 첫 미국 여행에서 깨달았습니다-, 오스틴과 설의 발화 행위 이론 그리고 그에 기반해 전개된 보편 혹은 형식 화용론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제 입장에서는 사실상 ‘피할 수 없는’ 이성적 담론과 의사소통 행위의 화용론적 전제를 아펠은 언제나 초월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 점에서 우리 사이의 견해차가 분명해졌습니다. 여기서 이미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문제와 관련된 더 깊은 수준의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것이 일종의 ‘약한’ 자연주의(ein schwacher Naturalismus: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기는 하지만 인간의 행위를 뇌과학 등과 같은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환원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의 자율적 규범 구조를 고려하는 자연주의적 입장7에 속하는 것이라 본 반면, 아펠은 언어적 전회 이후에도 여전히 ‘제1철학’8의 개념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그의 입장은 칸트적 지성계의 진지한 탈초월화(detranszendentalisierung)와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탈초월화란 이성이나 도덕을 형이상학적·초월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현실 세계 안에서 해명하려는 시도. 하버마스가 보기에 아펠은 논증의 최종 정당화(Letztbegründung)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탈초월화를 지향하는 아펠의 본래 의도와 충돌한다고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펠은 제가 『또 다른 철학사』에서 이끌어낸 결론들을 매우 불만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슈타른베르크 시기를 지나 프랑크푸르트 세미나에서 함께 강의하던 네 번째 단계, 곧 1980년대의 논의 시기를 규정하던 우리 둘의 입장 차이와 유사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도 존 설, 찰스 테일러, 딕 번스타인 등과 함께 진행한 세미나들에서도 자주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이 논의들은 기존의 입장 차이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 데 그쳤고, 진리 개념, 궁극적 정당화 문제 그리고 아펠이 담론윤리에 추가하고자 했던 ‘B부분’과 관련해도 그 차이가 구체화되었습니다.9
저는 제 박사논문 서론에서 청년 헤겔학파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사유의 흐름을-당시에는 그렇게 불리지 않았던- ‘탈초월화’라는 주제로 진지하게 수용했습니다. 반면 아펠은 이를 ‘제3의 패러다임 속 제1철학’이라고 부르며 끝까지 고수했습니다.10 이제 당신의 질문 속에서 제가 감지한 의심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즉 해석학과 담론윤리, 곧 ‘헤겔보다는 칸트’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과 잘 어울리지 않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를 ‘다른 진영’으로 분류하려 한다는 것이죠. 저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을 이어갈 것이냐, 갱신할 것이냐, -혹은 단절할 것이냐- 하는 논의에 결코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은 새로운 역사적 맥락과 새로운 인식 아래에서 적절히 수정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이어지는’ 것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1937년 『사회연구 저널 Zeitschrift für Sozialforschung』에 실린 호르크하이머와 마르쿠제의 선언적 논문들이 설득력 있게 전개했던 이성 개념과 합리적 자유의 개념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습니다. 아도르노 역시 벤야민적 동기를 특유의 방식으로 해석하면서도 이 개념에 충실했습니다. 저의 사회 이론 역시 –바뀌어야 할 것들은 바꾼다는 생각에서 mutatis mutandis– 이 본래의 개념 틀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 탈형이상학적 사유라는 개념에 대한 언급은, 다시 본 시절로 돌아가 귀하의 셸링 독일 관념론의 문제 지형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한 선생님의 박사 논문으로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이것이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옹호하게 된 일종의 전제였다고 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일까요? 다시 말해, 청년 헤겔파로부터 자극받은 사유의 충동이 셸링과 이론적으로 대결하면서 비롯된 것이고, 특히 역사 속에서 절대자를 찾으려 했던 셸링의 시도를 선생님께서는 실패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선생님께서 당시 셸링 사유의 양면성을 지적하셨던 만큼, 그의 사상 안에는 당신으로 하여금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계속해 나가게 만든 어떤 계기나 자극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 이 질문은 놀랍지만 흥미롭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코 터무니없지 않은 질문입니다. 학업을 마쳤을 때, 저는 어떤 결정적인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철학은 우리의 상황에 대해 더 깊이 해명하고자 하는 제 관심을 만족시키는 알맞은 길이 아닌 것 같아서 저는 철학을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당시 저는 현 상황을 정치적 관점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춰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이고 경험적인 해명을 기대할 수 있는 관점에서는 사회학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사회학을 정식으로 공부하려는 생각은 없었고, 당시 몇몇 대학에서만 교육이 재개되었던 사회학 분야에 옆문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학창 시절에 익히 알고 있던 마르크스주의 문헌들은 칸트와 헤르더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길, 즉 철학에서 사회이론으로 이어지는 길이 얼마나 짧은지 보여주었습니다. 하인리히 포피츠와 랄프 다렌도르프 역시 마르크스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그와 같은 시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또한 헬무트 셸스키는 한때 독일 나치당원이었지만 빠르게 태도를 바꾸고 후학을 구하던 인물로 제가 본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지 몇 주 만에 점심 식사에 초대하여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후 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연구 조교로 일하며, 사회학 공부를 놓친 부분을 마치 현장에서 보충하는 듯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1960년대 교수 시절에도 당시 조교였던 클라우스 오페와 울리히 외버만과 함께 공동 세미나를 하면서 많은 사회학 지식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제가 로타커의 지원을 받아 시작했으나 프랑크푸르트에 두고 온 ‘이데올로기 개념’에 관한 독일연구재단(Deutsche Forschungsgemeinschaft) 연구 과제를 통해 탐구하기 시작한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제가 사회학이라는 방향을 택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의 근본 문제들로부터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셸링의 문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셸링에게 제기된 문제인 ‘역사 과정 속에 고정된 절대자’에 관한 문제를 계속해서 다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쩌면 우회로를 통해서라도 오늘날까지도 제가 끊임없이 씨름하고 있는 문제로 볼 때 같은 주제로 다시 돌아왔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성의 역사적·언어적·사회적 구체화를 숙고하는 탈형이상학적 사유에서도 이성의 보편적 타당성 요구에 위배되지 않도록 개념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자라는 핵심은 진리의 절대성을 절차적으로 유동화한 [탈형이상학적] 보편성 요구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저의 철학사 연구 역시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의사소통 실천은 진리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국 역사적 존재 방식의 내적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논지, 즉 “내적 초월(transzendenz von innen)”이라는 개념으로 귀결됩니다. 이 용어를 제가 처음 쓴 것은 제 기억이 맞다면 1980년대 말 시카고에서 신학자들과 함께 한 학회였습니다.11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