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ead the love

헤겔 형이상학 산책33-진무한(眞無限)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33-진무한(眞無限)

1)

앞에서 무한성에 관한 두 가지 개념을 살펴보았다. 즉 악무한(惡無限)과 무한진행이다. 무한진행이 무한을 이행하는 운동 중에서 파악한 것이라면, 악무한은 이런 운동의 끝에 도달하는 결과로서 무한자를 말한다.

이런 악무한과 무한진행은 형식적으로 보면 동일하다. 그것을 판단 형식으로 표현하면, 소위 부정적 무한 판단이다. 즉 “이것은 -p & -q & -r … 등”이다. 여기서 p, q, r… 은 어떤 것의 속성을 표현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이런 부정적 무한 판단 형식은 단순한 성질을 가지고도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것은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니고 노랑도 아니며 … 등” 그러나 헤겔에서 악무한과 무한진행은 어디까지나 어떤 것의 속성과 관계해서만 이루어진다. 즉 “소금은 짠맛도 아니고 입방체도 아니고 … 등이다”와 같은 판단이다.

성질로 이루어진 무한 판단에서는 어떤 성질이 그 자체에서 자기를 넘어가는 무한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흰색이라는 색깔은 사물 즉 소금에 대해 외적인 성질이기 때문이다. 외적인 성질의 부정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으로 일어난다. 소금이 흰색에서 자색으로 변하더라도, 이런 변화는 소금의 규정과 전혀 무관하다.

그러나 속성의 경우에서는 다르다. 하나의 속성은 다른 속성과 그 자체에서 관계한다. 왜나하면, 한 사물에 두 속성은 그 사물에 필연적으로 속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속성이 하나의 사물에 필연적으로 속하려면 그것은 서로 교차하고 있어야 하며, 그러므로 어떤 속성은 이미 그 자체에서 자기의 부정성을 지니고 있으며 유한한 것으로 규정되고 그 자체에서 자기를 넘어서는 무한성을 지니면서 무한진행과 악무한이 발생한다.

2)

악무한, 무한진행을 넘어서 헤겔은 긍정적 무한성 즉 진무한(眞無限)으로 발전한다. 헤겔은 진 무한의 개념을 무한진행의 개념에서 끌어내고 있다. 무한진행은 사실 이미 유한성과 무한성의 통일이다. 즉 유한성은 이미 자기 부정성을 지니고 있어 자기를 넘어가니 무한성을 내포한다. 거꾸로 무한성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니 자기 관계하는 것 즉 하나의 유한자다.

그러나 무한진행에서 이런 통일은 동시에 유한자와 무한자의 직접적인 대립 속에 들어있다. 유한자는 직접 존재하는 것이며 무한자는 직접 존재하는 것과 구별된 또 하나의 직접 존재하는 것이니 서로 대립한다. 서로 내적으로 통일된 것이 외적으로 서로 대립하므로 여기서 통일과 대립이 서로 관계하는 방식이 곧 미끄러지는 방식이다. 즉 “어떤 것은 p이었다가 p가 아니게 되며, (-p는 q므로) q이었다고 다시 q가 아니게 되고 (-q는 곧 r이므로) r이었다가 다시 r이 아니게 된다… 등이다.”

헤겔은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이 이렇게 미끄러지는 방식으로 또는 교체하는 방식으로 실현될 때 이것을 개념의 외적 실현이라 한다. 무한진행은 통일이 이렇게 왜곡된 방식으로 출현하는 것이지만, 이미 이런 무한진행 속에서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마침내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이 왜곡된 모습을 제치고 자기의 모습을 진정하게 드러내게 되면 그것이 곧 진정한 무한성이 된다.

“무한진행 속에서 처음에 양자 즉 무한자나 유한자는 부정된다. 양자는 동일한 방식으로 자기를 넘어간다. 두 번째로 양자는 또한 구별된 것으로서 차례로 각자 구별된 것으로 독자적으로 그정적인 것으로서 정립된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규정을 비교하면서 파악하니, 이 비교 속에서 즉 외적인 비교 속에서 두 가지 고찰방식을 분리한 채로 파악한다. 즉 유한자와 무한자를 양자의 관계 속에서 받아들이는 동시에 양자를 각자 독자적으로 받아들인다.”(논리학 재판, GW 21, 134)

“유한자와 무한자의 부정은 무한진행 속에 정립되는 한 단순하며 따라서 서로 분리되어 다만 차례로 뒤따르는 것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런 이중적인 지양은 부분적으로는 다만 외적인 사건이며 계기의 교체로서만 존재하며 부분적으로는 통일로서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논리학 재판, GW 21, 134)

3)

그렇다면,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이 무한진행에서와 달리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헤겔은 무한진행이 ‘계기의 교체’라면 이 진정한 통일성은 ‘자기 완결적 운동’이라고 한다. 헤겔은 자기 완결적 운동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완전한 자기 완결적 운동이다. 즉 출발점이었던 것에 도착하는 운동이다. 출발점이었던 것과 동일한 것이 발생하니, 유한자가 반복된다. 그와 같은 것은 자기 자신과 합일한 것이며 다만 자기를 자기의 피안을 통해서 다시 발견한다.”(논리학 재판, GW 21, 134)

“양자는 즉 유한자와 무한자는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로 되돌아오는 운동이다. 양자는 다만 자기 내에서 매개로서 존재하며 양자의 긍정은 양자의 부정을 포함하니 부정의 부정이다.”(논리학 재판, GW 21, 135)

“양자는 다만 자기의 대립물과의 매개를 통해서 그러나 본질적으로 동시에 자기의 대립물의 지양을 매개로 해서 출현한다는 사실이다.”(논리학 재판, GW 21, 135)

형식상으로 보면 이 운동은 유한자가 무한자를 매개로 해서 다시 유한자로 돌아오는 것이다. 사실 무한진행에서도 유한자는 무한자를 매개로 해서 다시 유한자로 돌아오니, 이미 무한진행도 진무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진무한을 이런 무한진행과 구별한다. 무한진행은 진정한 통일이 왜곡된 표현이고 진무한만이 진정한 모습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라는 말이다.헤겔은 이 차이를 설명하면서 무한진행이 직선으로 표상할 수 있다면 진무한은 원으로 표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

4)

지금까지 미끄러지는 직선 운동이 갑자기 자기로 되돌아오는 원운동으로 전환한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서 다시 처음에 제시했던 무한 판단의 형식을 상기해 보자. 무한 판단 형식은 다음과 같다.

① 부정적 무한 판단: S=-p & -q & -r

② 모순 판단: S=-p & -(-p) = -p & p

③ 긍정적 무한 판단: S가 p or -p라면, S=비x

이 세 가지 무한 판단 가운데 ①이 무한진행을 표현한다면, ②가 곧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으로서 무한성을 의미한다. 소금은 짠 것도 아니고 짠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여기서 ‘짠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는 표현은 헤겔이 말한 자기의 부정(대립물)을 매개로 자기로 돌아온 것이니, 자기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무한 판단 형식이 ①에서 ②로 바뀌는 것은 단순히 형식인 변환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q,r …등’이 ‘-p’로 총괄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한정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적어도 경험을 통해 새로운 발전이 일어났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떤 사물은 무한히 많은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대립적인 속성이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험이다. 전자가 속성의 상이성에 관한 경험이라면 후자는 속성 모순에 관한 경험이다.

사물의 모순에 관한 경험은 정신현상학에서 하나의 인식 범주가 다른 인식 범주로 이행하는 매개가 된다. 그 점에 관해서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서 의식에 대한 그 자체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어떤 의식은 이미 하나의 범주를 지니면서 대상을 선험적으로 구성한다. 그런 구성에서 의식은 불가피하게 물 자체에 부딪히게 되는데, 헤겔은 이런 물 자체를 의식에 대한 물 자체라 하였다. 그것은 기존의 인식 범주로는 더 이상 규정되지 않는 것이며 그러므로 인식에서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모순적 경험에 부딪힘으로써 인식은 자기 내로 반성하여 새로운 인식 범주를 제시하게 된다.

그것은 논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논리학에서 하나의 범주는 마침내 모순적인 경험에 부딪히면서 자기 내로 반성하여 새로운 범주가 등장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경험의 발전을 통해 인식 범주가 변화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마침내 질적 범주에서 모순에 부딪히면서 새로운 범주로 나가는데, 그 범주가 무엇인가?

“실재성과 관념성의 관계에서 유한자와 무한자의 대립이 파악되는 방식을 보자면 유한자는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무한자는 관념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논리학 재판, GW 21, 137)

“관념성은 무한성의 질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관념성은 본질적으로 생성의 과정이며 따라서 현존으로의 생성과 같은 이행이다.” (논리학 재판, GW 21, 137)

헤겔은 이런 진무한의 판단 형식에 대응하는 범주를 우선 관념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생성 그리고 대자 존재라는 개념으로 전개한다. 그러면 모순의 경험을 통해 마침내 출현한 진 무한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이 진 무한을 관념적인 것, 생성, 대자 존재로 규정하는지를 살펴보자. 헤겔이 말하는 대자 존재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개념과 일치하는데, 헤겔이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영에 서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

나의 소설로 한국의 철학을 말한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나의 소설로 한국의 철학을 말한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이종철 지음|대양미디어|(2025년 4월 8일)

 

나의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대양미디어, 2025)을 개인의 사적 체험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때문에 이런 사적 체험의 보편적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간단하나마 리뷰 쓰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명백히 나의 소설을 오독한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은 법학도인 내가 철학에 눈을 뜨면서 1980년대를 배경으로 철학 공부를 하는 것에서 시작을 한다. 그런 점에서는 내가 다녔던 대학의 철학과 분위기가 배경으로 나오고, 그 당시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 이야기들도 많이 나온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 소설은 개인의 사적 체험을 넘어서기 힘들고 그만큼 보편적 의미를 찾기가 힘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나의 공부가 개인적 공부가 아니라 1980년 광주항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던 시대와의 연관 속에서 이루어졌고, 때문에 그 시대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또 그 시대의 갈등 해결에 철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철학 공부는 결코 책상 위에서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현실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고, 이러한 연관 속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들을 실천적으로 해결하려는 진지한 노력과 연결된 것이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에는 한국의 지적 르네상스라고 할 1980년대에 등장한 다양한 이론들을 교통정리하면서 그 한계를 지적하는 이론적 쟁투의 흔적들이 다수 담겨 있다. 지금 보아도 이 시대 이론가들을 포함한 철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은 대단히 치열했고, 고민의 내용도 깊이가 있었다. ‘한국헤겔학회’라는 연구 단체의 탄생은 이런 시대 연관 속에서 이루어진 필연적 산물이었다.

1980년대 후반들어 시대 변혁에 철학 연구자들이 좀 더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한국헤겔학회’와 서울대 ‘사회철학연구실’이 통합을 위해 노력하면서 마침내 1989년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탄생했던 것이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탄생은 한국철학사에 두고두고 남을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학회에 참여하지 않은 많은 제도권 철학자들의 관심과 주시를 받았고 지원도 적지 않았다. 지금은 경향 각지로 철학회들이 무수히 많이 있지만, 그들 단체들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간에는 상당한 의미 차이가 있다. 과연 한국의 어떤 철학이 이렇게 깊은 시대 연관 속에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위해 고민했단 말인가? 그런데 이런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소설을 저자 개인의 사적인 의미로 제한하고, 시대적으로 의미 있는 철학 소설에 대해 아무런 리뷰도 하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시대에 비해 지금의 철학자들은 철학을 사적 이해의 한계에 가두어 놓는 것은 아닐까?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 철학은 단군 이래 최대의 활황을 이루고 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 경향 각지로 수십 개의 철학회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찍어내는 철학 잡지들도 적지 않고, 한 해 생산되는 철학 논문들도 수없이 많다. 이런 현상을 인문학으로까지 확대한다면 그 규모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활황 국면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위기’와 ‘인문학의 위기’가 음울하게 확산되고, 대학의 철학과가 폐지되고 공동화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나는 한국의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시대와 사회를 주제화하지 못하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철학자들 자신이 자신들의 삶과 시대 문제를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허구한 날 바깥의 철학을 수입하고 해석하는 일에만 골몰하는 한 결코 이런 상황은 달라질 수가 없다. 동료 학자가 쓴 책을 읽지 않고, 읽어도 모른체하고, 더더구나 리뷰 하나 쓰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자기 철학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저 원숭이 철학과 앵무새 철학만 난무하고, 오퍼상 철학과 고물상 철학으로 자기 비하를 일삼는다면 어떻게 한국 철학 한다고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겠는가?


저자 이종철 프로필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원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등에서 강의했고, 몽골 후레 정보통신대학 한국어과 교수와 한국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한남대 초빙교수를 마지막으로 대학에서 은퇴를 했고,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브레이크뉴스>와 <저널인뉴스>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에세이철학’ 분야를 새로 개척하고 있고, NGO 환경단체인 <푸른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철학과 비판 – 에세이철학의 부활을 위하여》와 《일상이 철학이다》가 있고, 공저로 《철학자의 서재》, 《삐뚤빼뚤 철학하기》, 《우리와 헤겔철학》, 《문명의 위기를 넘어》, 《사북항쟁 44주년》등이 있으며, J. 이폴리뜨의 《헤겔의 정신현상학》(1/공역, 2), A. 아인슈타인의 《나의 노년의 기록들》, S. 홀게이트의 《정신현상학 입문》, G. 루카치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Ⅰ,Ⅱ》(2, 3, 4/공역), 《무엇이 법을 만드는가》(공역) 등 다수의 책들을 옮겼다.

헤겔 형이상학산책32-악 무한과 무한 진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형이상학산책32-악 무한과 무한 진행

1)

앞에서 헤겔의 질적 무한성 개념에 관해 설명했다. 그것은 부정 판단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판단 즉 부정적 무한 판단의 형식을 취한다. 헤겔은 부정적 무한 판단의 형식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 번째가 악 무한이고 두 번째가 무한 진행이다. 이 부정적 무한 판단을 극복하여 긍정적 무한 판단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 곧 진 무한이다. 우선 부정적 무한 판단의 두 형식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어떤 것[etwas]는 여러 성질을 지닐 뿐 아니라 그 가운데 어떤 성질은 소금의 일반적 속성이다. 그런 속성은 그 어떤 것을 그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 이를 헤겔은 규정[Bestimmung]이라 한다. 이 규정은 그것을 넘어서면 어떤 것 자신이 부정되는 한계[Grenze]가 된다.

그런데 경험이 발전하여 하나의 속성은 다른 속성과 교차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어떤 것의 규정은 어떤 것의 고유한 규정이 되지 못하니, 어떤 것은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부정하며, 이렇게 그 자체에서 부정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어떤 것은 유한한 존재다. 헤겔은 어떤 규정이 그 자체에서 부정성을 지닌다는 것을 제한성[Schranke]라는 범주로 규정한다.

예를 들어 짠맛은 흔히 소금의 규정으로 여겨지지만, 짠맛을 지닌 소금은 그 자체에서 부정된다. 즉 짠맛을 지니더라도 소금이 아닌 것도 있기 때문이다. 나트륨이 아니면서 짠맛을 내는 대체재를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짠맛은 소금의 고유한 규정이 아니며, 주관적 규정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짠맛으로서 소금은 유한한 존재다.

어떤 것에 여러 속성은 있다. 예를 들어 소금에는 짠맛 외에도 입방체(나트륨 분자의 형태)라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입방체도 짠맛과 마찬가지로 소금의 고유한 속성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어떤 것이 지닌 속성 가운데 어느 속성도 고유한 규정이 되지 못한다면 어떤 것은 고유한 규정이 없는 것 즉 질적으로 무한한 존재가 된다. 이 경우 어떤 것의 규정은 하나의 규정에서 다른 규정으로 끊임없이 교체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한적[schranke]인 유한자에 단적으로 대립하여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을 헤겔은 악 무한이라 한다.

“무한한 것은 이성의 개념이며 우리는 이성을 통해 시간적인 것을 넘어서 고양한다고 말할 때와 같이 사람들은 이런 일이 유한한 것과 전적으로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면서 그것을 고양하는 것은 그런 유한한 것에 외면적으로 머무르며 그것과 무관하다고 본다.”(논리학 재판, GW21, 125)

이 구절에서 말하듯이 사람들이 말하는 무한자는(헤겔로서는 이것이 악 무한인데) ‘유한한 것에 외면적인 것’, ‘그것과 무관한 것’을 말한다.

2)

여기서 헤겔이 말하는 악 무한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사한 개념을 구별해 보아야 한다. 가장 뒤섞이기 쉬운 개념이 현존과 짝을 이루었던 ‘타자 존재’라는 개념이다. 현존은 개별적 성질을 지닌 존재이며 이 현존에 대립하는 타자 존재는 개별적 성질이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것이다.

반면 이제 유한자에 대립하는 무한자는 하나의 규정이 다른 규정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말하니 타자 존재와 유사하다. 그러나 타자 존재에서는 하나의 성질이 다른 성질로 교체되면서 명멸하는 것이라면, 악 무한은 하나의 규정이 다른 규정으로 교체되면서 명멸하는 것을 말한다.

고유한 규정이 없다는 것은 규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 규정이 교차하면서 이렇게도 규정될 수 있고 저렇게도 규정될 수 있다는 말이며 그 어느 규정도 그 어떤 것을 고유하게 규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철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비본질주의는 사물의 고유한 규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사물의 규정은 구조에 따라 달라지며 하나의 사물을 지배하는 구조는 유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구조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사물은 이렇게도 규정되고 저렇게도 규정되니, 이런 것이 헤겔이 말한 악 무한의 개념의 예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당근은 약일 수도 있고 독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약이면서 동시에 독이고 그런 약이라 해도 안 되며 독이라 해도 안 된다. 바로 당근과 같은 것이 곧 헤겔의 무한자가 될 것이다. 데리다가 이런 당근과 같은 개념을 차연이라고 규정했는데, 헤겔의 악 무한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차연이 아닐까 한다.

무한자는 고유한 규정이 없는 것일 뿐 사실 이미 여러 규정을 지닌 한에서 그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재 세계 안에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든 실재는 고유한 규정을 지니고 있고 고유한 규정이 없는 무한자는 이 실재 세계 속에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무한자는 실재 세계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실재가 차안의 현존이라면 무한자는 “모호한, 도달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피안”(논리학 재판, GW21, 127)으로 여긴다. 이렇게 무한자가 실재 세계 밖에 현존한다고 보므로 그것이 곧 악 무한이라 불린다.

3)

그러나 헤겔은 실재 세계 밖에 존재하는 악 무한 개념을 곧바로 부정하고 만다. 왜냐하면, 이미 암시됐듯이 유한자와 무한자는 그렇게 단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어떤 것은 여러 속성이 교차하고 있어서 그 중의 어떤 속성을 고유한 규정으로 삼았을 때 곧바로 이 규정은 그 자신에서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이런 유한적인 것을 넘어가면 이는 어떤 공허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에는 이미 이 규정과 다른 규정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규정 역시 유한성을 드러내면서 자기를 넘어간다.

헤겔은 유한자가 그 자체에서 부정성을 지닌 것이라면 이런 유한자가 실제로 자기를 부정하게 되면, 이런 부정성 뒤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부정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유한성을 넘어가는 것 즉 무한성이다. 이런 무한자는 부정의 부정이니 즉 자기를 긍정하는 것 또는 자기 관계하는 것이다.

“무한성의 개념에서 처음 밝혀지는 것은 현존은 그 자체 존재를 통해 자신을 유한한 것으로 규정하며 제한을 넘어선다는 사실이다. 유한한 것의 본성은 자기를 넘어서 나가는 것이며 그의 부정을 부정하는 것이고 무한하게 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125)

이처럼 이 이행의 과정을 곧 무한성이라고 할 때, 이 무한성은 유한자의 진정한 그 자체적인 본성을 이루는 것이며, 이렇게 유한자가 그 자체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가니 이렇게 넘어가는 것은 낯선 폭력이 아니며 자기 자신이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운동 과정으로서 무한성을 ‘무한 진행’으로서의 무한성이라 한다.

“그러나 유한한 것은 스스로 무한성으로 고양하는 한에서 유한한 것에 이런 일을 가하는 것은 낯선 폭력이 아니며 제한으로서 자기 즉 제한 자체일 뿐만 아니라 당위기도 한 제한으로서 자기에 관계하며 이를 넘어 나가거나 자기 관계하는 것으로서 이 제한을 부정하고 그 제한을 넘어 나가는 것은 그 자신의 본성이다.”(논리학 재판, GW21, 125)

어떤 것이 지닌 하나의 규정이 그 자체에서 부정된다는 점에서 그 규정은 헤겔은 제한[schranke]이라 했다. 어떤 것은 스스로 그런 제한을 넘어서므로 이렇게 스스로 넘어선다는 점에서 어떤 것은 그 자체 존재 또는 당위(Sollen)이다. 이 당위는 유한자 내부에 있는 넘어서려는 것을 말한다. 이 당위가 곧 유한자 내부에 있는 무한성이다.

당위는 유한성을 넘어서는 것이며 모든 유한성을 이미 넘어선 것 그 결과가 곧 무한자니 헤겔은 무한자는 ‘수행된 당위’ 또는 ‘자기 내로 반성한 그 자체 존재 또는 당위’(논리학 재판, GW21, 126)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수행된 당위는 다시 자기를 넘어서가야 하는 당위이니 헤겔은 이를 ‘영속적인 당위’(논리학 재판, GW21, 129)라고 말한다.

“무한성 속에서는 만족스럽게도 모든 규정성, 변화, 모든 제한과 더불어 당위 자체도 사라지고 지양된 것으로서 유한성의 무로 정립된다. 그 자체 존재는 유한성의 부정으로서 정립되며 그러므로 부정의 부정으로서 자체 내 긍정적으로 된다. 그러나 이 긍정은 질적으로 직접 자기 관계하는 것 즉 존재다.”(논리학 재판, GW21, 126)

4)

이제 무한 진행의 구체적 모습을 살펴보자. 우선 무한 진행에서 유한자와 무한자 서로 동전의 이면이다. 유한자는 어떤 것이 자신의 규정을 넘어가는 것을 말하며, 무한자는 이렇게 넘어간 후 다시 새로운 규정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유한자는 무한자에 관계해서만 유한자며, 무한자는 유한자에 관계해서만 무한적이다. 각자는 자기의 타자를 그 자신에서 갖는다. 각자는 자신과 자기의 타자의 통일이다.

“유한자로부터 무한자로 이행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유한자의 규정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유한자는 자기의 그 자체 존재로서 무한자로까지 고양된다는 사실은 쉽게 인정된다. 왜냐하면, 유한자는 사실 존립하는 현존으로서 규정되지만, 동시에 그 자신에서 무적인 거승로서 따라서 자신의 규정에 따라서 자신을 해소하는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반면 무한자는 부정과 한계를 동반하는 것으로 규정되지만, 동시에 또한 그 자체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되니, 이 추상적으로 자기 관계하는 긍정이 무한자의 규정을 이루며 이 규정에 따르면 유한한 현존은 그 규정 속에 들어 있지 않을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128)

유한성과 무한성을 이렇게 이행의 양 측면으로 보면, 양자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이미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렇게 통일과 대립이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직접 결합하니 이런 결합은 무한히 미끄러지는 운동 즉 무한 진행이라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곧 유한자와 무한자의 상호 전환하는 모습이다.

“각자는 그 자체에서 자신의 규정으로부터 타자를 정립하니 양자는 불가분적이다. 그러나 이런 통일은 양자의 질적 타재성 때문에 은닉되니 이 통일은 내적이며 다만 근저에 놓여 있는 통일이 된다.”(논리학 재판, GW21, 128)

유한자의 이행이 또 하나의 유한자가 되는 것은 사실 내적 필연성이지만, 그 결합이 외면적인 것이므로 마치 외적인 발생으로 보인다. 즉 유한자가 부정되면, 새로이 출현하는 유한자는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된다.

“유한자가 등장하는 것은 무한자에 외적인 발생으로서 나타난다. 새로운 한계 자체는 무한자로부터 발생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미리 발견된다.”(논리학 재판, GW21, 128-9)

이 무한 진행은 유한자 속에서 무한자가 불러내어 지고 무한자 속에서 유한자가 다시 불러내 지는 운동이다. 즉 “영속적으로 반복하는 동일한 교체”(논리학 재판, GW21, 130)다. 이런 무한 진행은 결코 이전의 유한자가 자기로 다시 복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한자에서 어떤 새로운 유한자로 나가는 것이다. 무한히 미끄러지는 운동이기에 헤겔은 이런 무한 진행은 “넘어감 자체를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논리학 재판, GW21, 129)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무한자는 아직 진정한 무한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무한자는 악 무한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유한자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무한자이기 때문이다.

“유한자는 그 부정에서 다시 그 부정의 타자로서 출현하니 왜냐하면 무한자는 다만 자신의 타자인 유한자에 관계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한 진행은 다만 자기를 단조롭게 반복하며 유한자와 무한자의 동일하게 일어나는 지루한 교체다.”(논리학 재판, GW21, 129)

“공허한 불안 속에서 한계를 넘어서 무한성에 이르고 이런 무한자 속에서 새로운 한계를 발견하면서 무한성을 고수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한계에 정착하지도 못하는 운동이다.””(논리학 재판, GW21, 129)

5)

앞에서 악 무한은 모든 규정이 부정된 다음 고유한 규정은 하나도 없다는 결과를 말한다. 그런 결과는 흔히 실재 세계 너머 피안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 등장하는 무한성은 유한자가 자기를 넘어서 새로운 규정에 도달하는 과정을 말하며, 그것은 유한자 내부에 있는 무한성이며, 이런 이행의 운동 과정으로서 무한성이다.

무한 진행과 악 무한도 서로의 이면이다. 무한 진행은 이행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고 악 무한은 이렇게 이행하여 도달하는 최종 결과를 말한다. 다만 어떤 것의 악 무한 즉 어떤 고유한 규정도 없다는 것에 도달하는 것은 모든 규정을 거쳐 나가봐야 하며, 그런 규정은 끝없으므로, 무한 진행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그 무한 진행의 끝에 도달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악 무한이다.

마누엘 데란다·그레이엄 하먼 대담, 김효진 옮김, 『실재론의 부상』(갈무리, 2025) 서평|글: 김진환(단국대학교 외국어대학 조교수)

『실재론의 부상』 서평

 

김진환 (단국대학교 외국어대학 조교수)

 

실재론이 부상했다. 2007년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열린 한 워크숍의 제목으로 사용된 일을 기점으로 ‘사변적 실재론’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관련 서적과 연구의 숫자뿐만 아니라, ‘After Speculative Realism’이라는 상징적인 제목의 저서를 통해 논의의 활발함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최초의 시작’ 이후, 딱 10년 만인 2017년에 해당 저서의 영어판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다시 8년 뒤, 비상 중인 실재론에 관한 이야기가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된다.

이 책의 대담자 중 한 명이자 한국어판 서평을 쓴 ‘객체’인 그레이엄 하먼은 자신이 ‘새로운 철학’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한 이후, 매우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책을 출간하고 있다. 하먼의 이런 모습은 일견 슬라보예 지젝을 닮아 있기도 하다. 학문의 활동 기반은 상이하겠으나, 어디에선가 하먼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지젝의 학문적 생산력은 그의 이론에 대한 왈가왈부와는 별도로 일정 정도의 존중을 받을 만하다. 그래서인지 하먼도 지젝의 ‘뒤를 따라’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책상에 앉으면 책 한 권 정도는 뚝딱인 지젝에게 ‘동어반복’이라는 비판이 있듯, 하먼도 유사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아마도 그래서, 이 책은 그토록 하먼이 ‘많은 말’을 함으로써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히 정리하기에 알맞은 책이라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책이 되어준다.

『실재론의 부상』은 ‘그레이엄 하먼’이라는 객체와 ‘마누엘 데란다’라는 객체의 만남에 관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일차적 이점은 하먼과 데란다 각각의 이론 체계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은 하먼이든 데란다든 둘 중 한 명에게만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분명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며, 하먼과 데란다 각자가 말하려는 바를 보다 명료히 정리할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목차를 보면 쉬이 다가가기 어려워지는 측면도 있다. ‘실재론’, ‘유물론’, ‘반실재론’, ‘존재론’, ‘인지’, ‘시간’, ‘공간’, ‘과학’, ‘경험’ 등 그 자체로 책 한 권은 충분히 나올 주제들이 병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책 한 권에서 다룬다는 것이, 그것도 그다지 길지 않은 책에서 다룬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이 굳이 회의적일 필요는 없다.

이 지점에 이 책이 갖는 보다 근본적인 이점이 있다.

 

하먼이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는 것처럼 “지금까지 지성사에서는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서로의 노력을 알지 못한 채로 어떤 유사한 관념을 동시에 품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본문 5쪽). 이는 당연히 자신과 데란다를 말한다. 하먼은 『사변적 실재론 입문』(갈무리, 2023)이라는 저서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는 ‘뛰어난 동료들’로 레비 브라이언트, 이언 보고스트, 티머시 모턴을 언급한 바 있기도 하다(15쪽). 이 이야기는, 하먼이든 데란다든 결국 다른 여러 철학자/이론가들과 학문적 결을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재론의 부상』은 하먼과 데란다의 대담이지만, 결국은 현재와 과거의 대담이다. 현재의 대표는 하먼-데란다-브라이언트-보고스트-모턴(이 연쇄는 계속될 수 있다)으로 이어지는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객체이고, 과거의 대표는 이곳에서 세세히 다룰 수는 없는 (왜냐하면 위에 언급된 인물들이 모두 동일한 과거의 철학자를 참조점 삼아 자신의 학문을 전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철학자-객체들이다.

과거가 우리에게 반드시 의미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럴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꼭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와 역사를 떠나 존재할 수는 없다. 시간을 초월한 인간은 없다. 그렇다면 남는 선택지는 하나, 과거와 유의미한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 대화의 주제는 이제 주체중심적 세계관, 즉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로 구성된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책에 접근한다면, 독자는 하먼에 더 동의하거나 데란다에 더 동의하거나 할 필요성을 잠시 내려둘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먼이 이야기한 것처럼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들이 공유하고 있을 수 있는 오늘날의 사유는 무엇인지에 집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론을 대상화해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그것을 ‘잘’ 이해하면 또한 그것을 ‘잘’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독법이 읽지 못하는 것은 대상화할 수 없는 것을 (왜냐하면 모든 이론은 또한 언제나 ‘역사적’ 이론체계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대상화해 읽는 자신이 처한 위치다. 하먼도 데란다도 (사변적) 실재론도 역사의 특정 시점에 등장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수용될 유한한 객체일 뿐이다. 그것을 읽는 독자는,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가.

토마스 렘케(독일의 사회학자)는 사변적 실재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들[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인간의 접근과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는 실재론적 확신을 공유하지만, 현존하는 것에 관한 사변을, 존재를 (인간의) 사유와 지식의 범주들에 한정하지 않은 채로 실행할 것을 권함으로써 전통적인 실재론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한다.”(『사물의 통치』, 갈무리, 2024, 44쪽)

사변적 실재론은 실천적 개입이지 체계적 설명이 아니다. 여기에서 ‘체계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체계를 구성하지 못한다는 뜻이 당연히 아니다. 단지, 세상에 대한 하나의 정답을 제공하는 데 (사변적) 실재론의 의의가 있지 않다는 뜻이다. 『실재론의 부상』은 실재론이 ‘실제로’ 부상했음을 이야기하려는 자기 변론이 아니다. 실재론이 부상했다고 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유일하게 우리가 처한 21세기의 문제의식의 지평 위에 이 책이 위치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서로의 의견에 반대하면서도, 각자 자신의 이론을 방어하면서도 그들이 공통으로 경계하는 것은 과거로의 ‘단순한’ 회귀다. 오늘날은 문제의식의 지평 자체가 달라졌기에 문제에 대한 담론 자체도 바뀌어야 한다. 실재론은 ‘실재론’을 밀어내고 스스로 ‘새로운’ 실재론으로 부상 중이다.

 

☞ 실재론의부상-보도자료-fin

 


플라톤의 <국가> 강해(71)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1)

 

  1.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 동굴의 비유(514a-521b) – (III)

 

* 이제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가 논의의 편의상 구분한 단계들 중 마지막 단계 <C5>가 남았다. <C5> 단계는 동굴 바깥 세계와 태양을 본 사람이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를 그리고 있다.(516c-517a) 그런데 정작 소크라테스가 그리고 있는 비유의 마지막 부분은 당혹스럽게도 동굴 바깥 세계에 이르기까지 온갖 역경을 이겨낸 보람이나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동굴 속으로 내려가면서 맞이하는 고난의 과정을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다. 동굴의 비유는 이렇게 일단 마무리된다. 그러나 비유 자체로는 그렇게 끝나지만 철학자가 맞이하는 난관과 관련한 플라톤 나름의 추가적인 해명이 제법 짧지 않은 분량(517a-521b)으로 덧붙여 있다. 그 해명을 위해 플라톤은 우선 앞서 살핀 난관의 내용(516e-517a)을 다시 끌어들이고 있다.(517d-518b) 그런 연후 그러한 난관들을 극복하는데 좋음의 형상이 갖는 중대성을 언급하고 그런 만큼 그것에 이르기 위한 획기적인 교육 방식에 대한 논의를 수행한 후 마지막으로 그것을 토대로 철학자가 왜 동굴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지에 관한 논거를 제시한다. 이 추가적인 논의 내용을 단락으로 소구분하면 아래와 같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영혼의 전환을 위한 교육의 기본 방향은 자연스럽게 다음 주제 즉 철학자를 기르기 위한 구체적인 교과들에 관한 논의의 마중물이자 바탕이 된다.

1) 우선 플라톤은 철학자가 동굴 바깥에서 종국적으로 맞이하는 것이 좋음의 형상임을 재차 확인한 후 왜 그것이 그를 동굴로 이끄는 근거가 되고 또 왜 그것이 장차 그가 동굴 속에서 겪게 될 난관들을 이겨내고 그 소임을 완수케 하는 힘의 원천이 되는지를 해명한다.(517a-518b)

2) 그리고 좋음의 형상이 갖는 그러한 중대성 그만큼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 그리고 그것에 상응할 만큼의 태도의 전환을 위해 어떠한 교육적 방책이 필요한지를 논구한다(518c-519c)

3) 끝으로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내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왜 온갖 난관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논구한다.(519c-521c)

 

이에 따라 동굴의 비유에 관한 세 번째 강해는 <C4>를 다룰 때 그랬듯이 <C5> 단계의 비유 내용을 작게 잘라 차례로 살핀 다음 추가적인 해명으로서 위의 1), 2), 3)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 내용을 음미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려 한다.

————————————–

<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

 

* 소크라테스는 태양이야말로 바깥 세계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사람은 아래와 같이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n) 그는 처음에 있던 거처οἴκησις와 그곳에서의 지혜σοφία, 그리고 그때의 동료수감자συνδεσμώτης들을 상기하고서, 자신은 자신의 변화μεταβολή 때문에 행복한데εὐδαιμονίζειν 그들은 불쌍하다ἐλεεῖν고 여길 것이다.(516c)

o) 그런데 거기에서는 벽면 위 그림자들의 움직임을 가장 예리하게 보고 가장 잘 기억하며 그것을 그다음에 다가올 것을 가장 잘 예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칭찬ἔπαινος과 명예τιμή의 선물γέρας 등이 주어진다.(516c-d)

p)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와 칭찬, 존경과 권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느니 그는 호메로스 말대로 ‘제 땅도 없는 다른 사람 밑에서 머슴으로 밭일을 하는’ 처지가 되거나 또 다른 어떤 일을 겪더라도πεπονθέναι 차라리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516d-e)

q) 그리하여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시 동굴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다시 동굴로 내려가 예전의 그 자리에 다시 앉는 경우 그는 태양으로부터 갑자기ἐξαίφνης 왔기 때문에 눈ὀφθαλμός이 어둠σκότος으로 가득 차게 되어 눈이 익숙συνήθεια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516e)

r) 만약 그의 눈이 적응되기 전에 계속 수감 돼 있던 자들과 그 그림자들을 분간하는γνωματεύοντα 시합을 벌인다면διαμιλλᾶσθαι 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위에 올라가더니 눈을 망쳐가지고 돌아왔으며, 올라가는 일은 시도해볼 가치조차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을 풀어주고λύειν 위로 데려가려는ἀνάγειν 사람은 어떻게든 손으로 붙잡아 죽일 수 있다면 죽일 것이다.ἀποκτεινύναι(517a)

—————————-

* 철학자가 동료 수감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다시 내려가는 동기가 이곳에서는 그들에 대한 ‘불쌍함’eleein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것은 철학자의 현실 참여의 동기가 일단 그 본성적 자발성에 기초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자가 현실 참여를 원하지 않을 경우 벌로 그것을 강제해야 한다(347c)는 제1권의 주장과 일단 어긋나 보인다. 철학자가 동굴 속으로 돌아가는 이유 내지 철학자의 현실 참여, 정치 참여와 관련한 논의는 동굴의 비유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로서 앞서 제시한 동굴의 비유의 추가적인 논의 부분 3)에서(519c-521c) 다시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 동굴의 비유는 철학자들이 이러한 위험을 이겨내고 수감자들을 동굴 바깥으로 끌어내는 과정을 담고 있지만 동굴 속 상황에 대한 이러한 기술은 철학자의 수감자 구출 과정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힘든 것인지 플라톤 또한 이미 절감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갑작스런 빛과 어둠이 주는 혼란과 그것이 갖는 의미 또한 동굴의 비유의 추가적인 논의 부분 1)에서(517a-518b) 재론되므로 그곳에서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 사람에게 인정 욕구는 본능이라 할 정도로 가장 강력한 욕구 중 하나이다. 특히 동굴 속 사람들 즉 세속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명예, 존경과 권세에 대한 욕구는 그 인정 욕구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그들에게는 동굴 속 그림자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인 한, 인정 욕구의 대상과 기준 또한 그림자들로부터 주어진다. 그림자들에 대한 경험이 크고 예리할수록 그곳 세계의 일에 밝고 그만큼 더 큰 명예와 칭찬을 누린다. 이들에게 바깥 세계에 대한 진실은 오히려 인정 욕구를 방해하는 거짓으로 여겨질 뿐이다. 플라톤이 동굴 속 사람들로 그리고 있는 대상이 당대 아테네 지식인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아테네 대중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아주 예민하여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험이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어 그러한 경험에서 그들의 영악함을 능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기는 길은 그들보다 많은 경험을 쌓는 것에 있지 않고 그 경험들이 갖는 한계와 무지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무엇보다도 철학자는 이미 그들이 갖고 있는 경험이 그들의 확신과 달리 거짓임을 이미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들의 무지를 폭로하고 시민들은 물론 플라톤과 같은 젊은이들을 일깨우는데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일이었다. 플라톤이 비유의 마지막 문장을 쓰면서 스승 소크라테스를 떠올렸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동굴의 비유에 덧붙여진 추가적인 해명>(517a-521b)

1) 철학자가 동굴 바깥에서 종국적으로 맞이하는 것이 좋음의 형상임을 재차 확인한 후 왜 그것이 그를 동굴로 이끄는 근거가 되고 또 왜 그것이 장차 그가 동굴 속에서 겪게 될 난관들을 이겨내고 그 소임을 완수케 하는 힘의 원천이 되는지를 해명한다.(517a-518b)

[517a-518b]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동굴의 비유를 마친 후에 이제 이 비유εἰκών 전체를 앞에서 이야기된 것들에 적용해야προσαπτέον 한다고 말한다. 즉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을’δι᾽ ὄψεως φαινομένην ἕδραν ‘감옥의 거처에’τῇ τοῦ δεσμωτηρίου οἰκήσει 대응시키고ἀφομοιοῦντα, ‘감옥에 있는 불빛을’τὸ δὲ τοῦ πυρὸς ἐν αὐτῇ φῶς ‘태양의 힘에’τῇ τοῦ ἡλίου δυνάμει 대응시켜야 한다. 그리고 ‘위로ἄνω 올라가는 것’ἀνάβασις과 ‘위에 있는 것들을 구경하는 것’θέαν τῶν ἄνω을 영혼이 ‘가지적인 영역’νοητὸν τόπον으로 등정ἄνοδος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τίθημι(517b)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하는 경우 내가 추측(기대)하는 바ἐλπίς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추측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알 수 있는 것의 영역에서 가장 마지막에 겨우 볼 수 있는 것’ἐν τῷ γνωστῷ τελευταία 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 καὶ μόγις ὁρᾶσθαι으로서 ‘좋음의 형상‘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517b)

* 좋음의 형상을 보고 나면, ‘모든 경우에 그것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의 원인’πᾶσι πάντων αὕτη ὀρθῶν τε καὶ καλῶν αἰτία이며, 가시적 영역에서 빛과 빛의 주인κύριος을 낳고τεκοῦσα 가지적 영역에서는 자신이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ἀλήθειαν καὶ νοῦν 제공하며, 또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ἢ ἰδίᾳ ἢ δημοσίᾳ. ‘지각 있게 행동할’ἐμφρόνως πράξειν 사람은 그것을 보아야만 한다.ἰδεῖν’(517c)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517b-c)

* 그리고 좋음의 형상에 이른 자들은 인간사τὰ τῶν ἀνθρώπων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고 그들의 영혼이 그 위에서 지내기διατρίβειν를 항상 열망한다.ἐπείγονται(517c) 그런데 누군가 신적인 것들을 관조θεωρία하다가 인간적인 나쁜 것들 옆으로 와서 주위의 어둠에 충분히 익숙해지기 전 눈이 아직 침침한ἀμβλυώττων 동안에, 정의의 그림자τοῦ δικαίου σκιά들이나 그 그림자들을 생기게 한 조각상ἄγαλμα들과 관련해 법정δικαστήριον이나 다른 어떤 곳에서 경합을 벌이도록ἀγωνίζεσθαι 강제되는 경우, 즉 정의 자체를 αὐ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 본ἰδόντων 적이 없는 자들이 이것들을 어떻게 이해하고ὑπολαμβάνεται 있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도록διαμιλλᾶσθαι 강제되는 경우, 그는 볼품없고 아주 우스워 보인다.(518d,e)

* 그런데 지각νόος이 있는 사람이라면 두 가지 경우에서 비롯되는 두 가지의 눈의 혼란ἐπιτάραξις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빛φάος에서부터 어둠σκότος으로 옮겨온 경우와 어둠에서부터 빛으로 옮겨온 경우인데 그런 사람은 영혼과 관련해서도 그런 동일한 일들이 발생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영혼이 혼란에 빠져 뭔가를 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보면, 무턱대고 웃지 않고 그 영혼이 더 밝은φανός 삶βίος으로부터 와서 익숙하지 않아 어두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더 큰 무지ἀηθεία로부터 더 밝은 곳으로 와서 더 밝은 빛 때문에 눈부셔하는μαρμαρυγῆς 것인지를 살필 것이다.(518a) 그렇게 해서 앞의 경우는 그 영혼의 상태πάθος와 삶을 행복하다고εὐδαιμονίσειεν 여길 것이며, 뒤의 경우는 불쌍하다ἐλεήσειεν고 여길 것이다. 설사 뒤의 경우를 두고 웃으려 한다고 하더라도, 이때의 웃음은 위에 있는 빛으로부터 내려온 경우에 대한 웃음보다는 비웃음καταγέλαστος을 덜 살 만한 웃음일 것이다.(518b)

—————————

* 517b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논란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동굴의 비유를 앞서의 비유들에 적용해서 언급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감옥의 거처’에 대응하는 것은 선분의 비유에서 말하는 ‘가시적 영역’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감옥의 불빛’과 ‘태양의 힘’의 경우 동굴의 비유와 태양의 비유간의 대응이면서 가시계와 가지계의 대조적 대응인데 비해 ‘감옥의 거처’와 ‘가시적 영역’의 경우는 둘 다 가시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상응적 대응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앞의 경우도 대조적 대응으로 해석하여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을 ‘태양이 비추는 동굴 바깥 세계’ 즉 가지적 영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둘 다 동굴의 비유에만 국한된 해석이라는 점에서 동굴의 비유를 다른 비유에 적용해서 언급하겠다는 소크라테스의 전제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에서 ‘곳’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hedra가 일반적인 ‘곳’의 의미도 있지만 ‘앉는 자리’의 의미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을 결박된 채 앉아 있던 ‘감옥의 거처’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둘 다 같은 동굴의 비유이면서 동일 장소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apomoionta 즉 ‘대응이나 비교 또는 닮은’ 것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어떤 해석이건 동굴의 비유와 다른 비유들이 갖는 상호 대응적 연관성을 크게 해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비유를 이해하는데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517b ‘알 수 있는 것의 영역에서 가장 마지막에 겨우 볼 수 있는 것’이 ‘좋음의 형상’이다. : 좋음의 형상은 <C4> 단계에서 태양이라는 표현으로만 언급되고 있지만 태양의 비유에서 보듯이 그 태양이 ‘좋음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508e-509b) 이 점을 고려하면 ‘동굴 바깥에 나온 사람이 태양을 그 자체로 본다.’(516b)는 표현은 이미 <C4> 단계에서도 ‘좋음의 형상’이 언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형상을 ‘모든 경우에 그것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의 원인’이자 ‘진리와 지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 또한 태양의 비유에서 그것을 ‘앎과 진리의 원인’(508e)이자 ‘지성의 원천’(508d)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그 점에서 보면 좋음의 형상에 관한 이곳의 언급은 추가적인 정보 없이 앞서의 언급을 반복하고 재확인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곳에서 ‘좋음의 형상’을 다시 끌어들인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좋음의 형상이 기본적으로 철학자가 동굴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 원천적 근거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것은 그가 동굴로 내려갈 때 직면하는 온갖 역경에 맞서 싸우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이자 푯대가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이곳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지각 있게 행동할 사람은 좋음의 형상을 보아야한다’(517c)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사실 좋음의 형상에 이른 자들은 인간사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고 신적인 것을 관조하는 데만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동굴에 다시 내려갈 경우 그 만큼 더 앞이 캄캄해 보여 어둠에 익숙한 자들이 보는 것을 보지도 못할뿐더러 동굴 속 벽면 그림자들에 대한 경험 또한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이에 따라 동굴 바깥 정의 자체를 본적도 없이 오로지 동굴 속 정의의 그림자만을 경험하고 그것만을 정의의 기준으로 여기는 자들과 다툴 경우 당장은 그들을 이길 재간이 없고 설사 정의 자체를 그들에게 들려준 준다고 해도 애초부터 그것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거짓말로 들려 오히려 철학자들이 거짓을 일삼는 자로 웃음거리가 되기 일 쑤이다. 그럼에도 동굴 속에서도 잠간의 침침한 상태를 이겨내고 어둠에 적응한 뒤 진정으로 끝내 그들을 압도할 수 있음은 오히려 형상에 대한 앎을 통해 그들이 내세우는 경험이 그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만 아는 자는 그것의 원인이자 실체로서 실물을 알고 다시 그림자를 보는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리고 결국에 가면 이런 사람이 그림자들도 월등하게 더 잘 본다.(520c) 실로 그림자의 세계를 넘어 그것과 전혀 차원이 다른 지고의 형상적 앎으로서 좋음의 형상을 깨우쳤을 때에 비로소 그 앎의 진실성이 가져다주는 자부심의 크기만큼 그림자에 불과한 세속적 권세와 탐욕에 찰나의 눈길조차 주지 않는 무심함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굳건함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관적 진실에 대한 불퇴전의 확신이 온 영혼을 휘감고 있을 때에만 그림자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일상의 분노를 넘어서 비로소 불쌍함과 연민의 마음이 차오르고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의지 또한 샘솟듯 터져 나온다. 실로 좋음의 형상은 지각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유일한 토대인 것이다. 

* 518a ‘두 가지 눈의 혼란’ : 눈이 혼란을 겪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갑자기 빛에서부터 어둠으로 옮겨온 경우와 어둠에서부터 빛으로 옮겨온 경우가 그것이다. 그 때 눈이 부셔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은 보통 사람들에게 둘 다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다.  동굴의 비유가 보여주듯 영혼과 관련해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특히 자기 성향까지 거슬러가며 밝은 곳을 떠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서 혼란을 겪는 영혼의 모습은 사람들이 보기에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면서 겪는 영혼의 모습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자 더 많은 비웃음을 살 일이다. 그러나 이 두 영혼의 상태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다.  동굴로 내려가는 영혼은 이미 밝은 삶의 아름다움과 진리를 깨달은 상태의 행복eudaimonizein한 영혼이고 그에 비해 동굴에서 올라오는 영혼은 아직은 여전히 어둠 속 동굴 속에 있다는 점에서 불쌍eudaimonizein한 영혼이다.(516a) 지각있는 사람들이라면 두 경우를 살피면서 그 점을 알아차린다.(518b)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동굴을 들어갈 때건 나올 때건 영혼이 겪는 혼란을 보고 우스꽝스럽게 여기거나 비웃음을 던지지만 지각 있는 사람들은 그 두 경우들을 살펴 구분하고 무턱대고 웃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어떤 경우건 결코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다. 설사 만약 그들을 보고 비웃는 경우가 있다면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동굴로 내려가는 이유가 어처구니없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동굴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보다 다시 동굴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아무려나 보통 사람들은 물론 어떤 경우에는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철학자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놀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음의 형상에서 나오는 자부심 즉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흔들림없이 늘 행복하다.

* 517d ‘정의의 그림자들이나 그 그림자들을 생기게 한 조각상’ : 정의의 그림자들을 생기게 하는 조각상들(agalmata)이 정의의 위상과 관련하여 어떤 지위를 갖고 있는지가 논란거리이다. 다만 이것들은 결박된 사람들이 눈과 몸을 돌린 후 그리고 바깥에 나가기 전에 즉 정의 자체에 대한 앎을 향한 중간 단계에서 보게 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정의 자체의 모상으로서 ’법률‘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피스트> 234c, <정치가> 303c 참고(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 517e ‘논쟁을 벌이도록 강제되는 경우’ : 이 부분 역시 소크라테스가 법률의 해석을 둘러싸고 재판관들과 논쟁을 벌이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

2) 그리고 좋음의 형상이 갖는 그러한 중대성 그 만큼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 그리고 그것에 상응할 만큼의 태도의 전환을 위해 어떠한 교육적 방책이 필요한지를 논구한다(518c-519c)

 

[518c-519c]

* 이것이 진실이라면 교육παιδεία이란 어떤 이들이 공언하는 것처럼 ‘앎ἐπιστήμη이 없는 경우에 마치 보지 못하는 눈에 시각ὄψις을 넣어주듯이 자신들이 앎을 넣어주는 것ἐντιθέντες’이 아니라 ‘몸 전체를 함께 돌리지’σὺν ὅλῳ τῷ σώματι στρέφειν 않고서는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 쪽으로 눈을 돌릴 수 없듯이, 각자의 영혼 안에 있는 앎을 위한 능력δύναμις과 각자가 앎을 얻는 데 사용하는 기관ὄργανον 역시 ‘영혼 전체와 함께’σὺν ὅλῃ τῇ ψυχῇ 전환περιακτέον시키는 것이다. 즉 ‘있는 것’τὸ ὂν과 ‘있는 것에서 가장 밝은 것’τοῦ ὄντος τὸ φανότατον을 구경하고서도θεωμένη 견딜 수 있게 될 때까지(518c) 그 능력과 기관을 영혼 전체와 함께 생성되는 것으로부터ἐκ τοῦ γιγνομένου 전환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가장 밝은 것은 ‘좋음’이다.(518b-d)

* 이것은 전환περιαγωγή을 위한 기술τέχνη 즉 ‘어떤 방식τρόπος으로 하면 가장 쉽고 가장 효율적ἀνύσιμος으로 그 기관의 방향을 바꾸는 방식과 연관된 기술’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 기술은 그 기관에 시각을 넣어주는 기술이 아니라, 그 기관에게 바라보아야βλέποντι 할 쪽을 바라보도록 만들어주는 기술이다.(518d)

* 그런데 영혼의 덕ἀρετή 중 다른 것들은 신체의 탁월함ἀρετή처럼 습관ἔθος과 훈련ἄσκησις을 통해 형성되지만 똑똑함το φρονῆσαι의 덕은 ‘더 신적인’θειοτέρου 것에 속하는 것으로 그 힘을 결코 잃는 법이 없고, 전환이 이루어지는 방향에 따라 쓸모 있고χρήσιμος 이롭게ὠφέλιμος 되기도 하고 또한 쓸모없고 해롭게βλαβερός 되기도 한다.(518e) 못됐지만πονηρός 지혜롭다σοφός고 하는 사람들의 허접한 영혼조차 자신이 향해 있는 쪽의 것들을 예리하게ὀξέως 분간하는데διορᾷ 매우 뛰어나다. 그들의 영혼이 악덕κακία에 봉사하도록 강제될 경우 더 예리하게 보며 그럴수록 그만큼 더 많은 나쁜 것들을 만들어낸다.(519a)

* 하지만 그들에게서 그러한 본성을 가진 이 부분을 아주 어려서부터 다듬어 생성γένεσις과 동족인συγγενής 것들을 쳐냈더라면, 그러니까 음식물이나 그러한 것들에 대한 즐거움ἡδονή과 식탐λιχνεία에 꽉 들러붙어서 납추처럼 영혼의 시선ὄψις을 아래로 돌려버리는 것들로부터 이 부분을 해방시켜 참된 것들τὰ ἀληθῆ을 향해 방향을 돌리게 했더라면, 동일한 사람들의 동일한 이 부분이 저 참된 것들을 또 가장 예리하게 보았을 것이다.(519b)

* 그렇게 보면 교육받지 못하고 진리를 경험하지 못한ἄπειρος 자들도, 또 죽을 때까지 교육 속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허용된 자들도, 나라를 다스리기에 충분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럴 법하고 필연적이다. 앞사람들은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그들이 행할 모든 일을 할 때 반드시 가늠해보아야 할 하나의 표적을 삶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뒷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이미 복 받은 자들의 섬들μακάρων νήσος로 이주했다고 생각해서 그런 일을 자발적으로 행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519c)

* 그렇다면 나라수립자οἰκιστής로서 우리가 할 일은 앞에서 가장 큰 배울 거리라고 이야기한 것에 도달하도록 ‘가장 훌륭한 자연적 성향들을’ τάς τε βελτίστας φύσεις 강제하는 것, 즉 저 오르막길을 오르고 ‘좋음을 보도록’ἰδεῖν τὸ ἀγαθὸν 강제하는ἀναγκάσαι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올라가서 충분히 보고 나면 지금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그런 것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즉 “거기에 머물며, 저 수감자들 곁으로 다시 내려가기καταβαίνειν를 원하지도 않고 변변치 않은 것이든 대단한 것이든 그들과 수고πόνος와 명예τιμή를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μηδὲ μετέχειν은 허용되어선 안 된다.(519c-d)

———————–

* 518b ‘각자의 영혼 안에 있는 앎을 위한 능력과 각자가 앎을 얻는 데 사용하는 기관’ : 이 기관은 몸에 눈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상응하여 영혼에 자리하고 있는 ‘지성’nous을 가리킨다.

* 518d ‘어떤 방식trpos으로 하면 가장 쉽고 가장 효율적anysimos으로 그 기관의 방향을 바꾸는 방식과 연관된 기술’ : 좋음의 형상에 대한 앎에 이르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어려운 그 만큼 학생들이 그것을 최대한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효율적인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최고의 교육 방식은 어려운 것을 쉽게 가르치는 일이다.

* 좋음의 형상은 지고의 참된 존재로서 앎과 지성의 근거이자 철학자를 동굴로 이끌고 또 그곳에서 온전히 소임을 완수하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좋음의 형상에 대한 앎이 철학자로 하여금 세속적 삶에 대한 환멸을 넘어서 비로소 불쌍함과 연민의 마음을 갖게 하고 오로지 그것만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실행을 담보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음의 형상에 이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몸 전체를 함께 돌리지’ 않고서는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 쪽으로 눈을 돌릴 수 없듯이, 각자의 영혼 안에 있는 앎을 위한 능력과 각자가 앎을 얻는 데 사용하는 기관, 즉 지성을 ‘영혼 전체와 함께’ 전환periagōgē시키는 것이다. 온갖 쾌락과 생성하는 것들에 꽉 들러붙어서 납추처럼 영혼의 시선을 아래로 돌려버리는 것들로부터 지성을 해방시켜 오로지 참된 것들을 향하도록 방향을 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것은 ‘앎을 넣어주는’ 기존의 교육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어떻게든 형상에 대한 앎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방책은 ‘가장 쉽고 가장 효율적으로 그 기관의 방향을 바꾸는 방식과 연관된 기술technē’이어야 한다. 이러한 기술이 무엇인가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좋음의 형상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인 교과들이 다음 주제로 다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전환을 위한 가장 쉽고 효율적인 방책이자 기술이란 다름 아닌 그 교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영혼 전체의 전환을 위한 그러한 기술들은 장차 살피게 되겠지만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을 거쳐 종국적으로 변증술로 완성된다. 요컨대 철학 교육의 요체는 영혼의 전환에 있는 것이다.(521c) 이 점에서 이 부분은 다음 주제에 대한 예고와 더불어 그 중요성과 관련한 서론의 성격을 갖고 있다.

* 518b ‘어떤 이들이 공언하는 것처럼’, 518c ‘앎을 넣어주는 것’: 여기서 어떤 이들이란 소피스트들과 이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프로타고라스> 319a, <고르기아스> 447c 참고) 플라톤이 여기서 공격하는 교육에 대한 지극히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견해는 좁게는 유모들의 교육방식 즉 ‘암기 위주의 주입식’을 포함하여 넓게는 일방향적 연설 기술에 매달리는 당대 소피스트들과 이소크라테스의 교육 방식을 암시한다.(345b 참고). <향연> 175d에서도 이러한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교육 방식을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곳에서 아가톤은 ‘소크라테스와 접촉함으로 해서 지혜를 누릴 수 있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마치 ‘잔속의 물이 털실을 타고 더 가득한 잔에서부터 더 빈 잔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J. Adam. 해당 노트 참고) 소피스트들 역시 ‘앎을 영혼에 넣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플라톤에 따르면 앎의 힘 또는 능력으로서 지성nous은 우리 안에 있는 모종의 신적인 것으로서 이미 영혼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른바 상기설과 산파술은 그러한 바탕위에 서 있다.(<메논> 81a, <파이돈> 72e-76d). 플라톤은 교육이 눈먼 눈에 시각을 넣는 것이라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영혼 안에는 몸에 이미 눈이 있듯이 지성을 갖추고 있고 그것을 토대로 스스로 앎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은 영혼 속에 존재하지만 생성되는 것에서 비롯되는 힘에 가려지고 약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늘 직면해 있다. 이를테면 ‘똑똑함’to phronēsai의 덕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모든 덕들이 영혼 속 그 지성을 굳건하게 하는데 하나같이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교육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오히려 지성을 약화시키고 방해하는 힘이 된다.

* 518e ‘똑똑함’to phronēsai의 덕 : 이 말은 ‘지혜 또는 현명함’phronēsis와 어원을 공유하고 있다. 플라톤은 phronēsis를 4권 428b, 433b 이후 6권, 7권에서 ‘지성적 현명함’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최소한 이곳에서만은 이 말을 to phronēsai(phroneō 동사의 아오리스트 부정형에 관사를 붙인 것)로 바꿔 표현하는 방식으로 phronēsis, sophia와 다소 의미가 다른, 즉 ‘현실적인 영리함’ 내지 ‘영악함’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 지성을 생성되는 것으로부터 지켜 내고 흐트러진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영혼의 덕들 가운데 대부분은 신체의 덕처럼 습관과 훈련을 통해 형성되지만 앞서 말한 ‘똑똑함’의 덕은 아무나 갖추고 있지 않고 또 훈련을 통해 가질 수도 없는 이른바 타고난 자질로서 갖고 있는 선천적인 덕이다. 그것은 뛰어난 영악함으로 자신을 향해 있는 것들을 예리하게 분간할 줄 하는 능력이자 결코 그 힘을 잃는 법도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본성적 탁월함은 태어나면서부터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아 그들의 영혼이 악덕에 봉사하도록 강제될 경우 그 만큼 더 많은 나쁜 것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이 똑똑함의 덕을 갖춘 자들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영혼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지 않고 참된 것들 향하도록 보다 각별한 수준의 교육이 필요하다.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똑똑함을 거론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물이 다름 아닌 알키비아데스(Alkibiades) 같은 자들일 것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알키비아데스만큼 본성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도 드물지만 또 알키비아데스만큼 그 명민함과 똑똑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귀영화는 물론 온갖 악덕을 저지른 경우도 드물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도 수많은 알키비아데스들이 그것도 제도 교육을 통해 공공연하게 선망의 대상으로 길러진다.

* 518d 신체의 덕 : 영혼의 덕에 관한 이곳의 언급이 신체의 덕들을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제시된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은 다만 영혼의 덕 가운데 똑똑함의 덕이 갖는 이중적 성격을 드러내 그것에 대한 각별한 교육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선천적이고 본성적인 성향일지라도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교육이 어떠한 가에 따라 그 성향이 초래하는 결과가 얼마나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자연적 성향이든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의 좋음은커녕 악덕이 발현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설사 영혼의 좋은 자연적 성향일지라도 그것의 탁월함 특히 윤리적 덕과 관련한 탁월함은 종국적으로는 형상적 앎을 통해 완성되지만 기본적으로는 끊임없는 교육과 훈련을 통한 습관 형성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03a 14-17 비교 참고) 그러므로 특히 장차 나라를 다스려갈 사람들을 길러 내기 위해서는 앞에서 가장 큰 배울 거리라고 이야기한 것, 즉 좋음의 형상에 도달하도록 ‘가장 훌륭한 자연적 성향들을’ 방치하지 말고 강제하는 것, 즉 저 오르막길을 오르고 ‘좋음을 보도록’ 끊임없이 교육하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 신적 요소라는 말 자체가 불멸성과 보편성을 함축하는 것임을 고려하면 지성을 정점으로 하는 플라톤의 교육론은 이미 어느 한 시대가 아니라 영원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생에서 뿐만 아니라 다시 태어나서 그것을 접할 때조차도 그들의 삶에 도움을 줄 정도의 것이어야 하고(498d)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것은 ‘누가 자신으로 하여금 유익한 삶과 무익한 삶을 구별하며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것들 중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할 수 있고 또한 그럴 줄 알도록 해 줄 것인지를 어떻게든 배우고 찾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학문’이어야 한다.(618c) 미켈란젤로는 모든 대리석 덩어리에 상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조각가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장애가 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잘라낸다. 플라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앎의 능력으로서 영혼 본래의 훌륭함과 순수함이 온전하게 드러날 때까지 영혼을 부자연스럽게 가리고 있는 것들을 잘라내고 거둬내는 것이 교육의 본령이자 선생이 해야 할 일로 여겼다. 사실 플라톤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 중 그의 교육이론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아마도 고대든 현대든 모든 교육 문헌에서 <국가>의 이 부분만큼 교육의 목적과 범위에 대한 광범위하고 심오한 견해를 취하거나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불굴의 용기와 꺼지지 않는 희망을 불어넣기에 잘 어울리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J. Adam 해당 부분 노트, 부록 II 참조) -끝-

 

다음 강해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동굴의 비유(514a-521b) (IV) – 마지막

3)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내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왜 온갖 난관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논의(519c-521c)

[신간안내]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이종철 지음|대양미디어|(2025년 4월 8일) [한철연 소식]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이종철 지음)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올해 1월 2일부터 3월 20일까지 총 23회 연재한 이종철 회원의 연재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현재 웹진에서는 단행본 출간으로 연재는 멈춘 상태입니다. 격동의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쓴 자전적 소설로 이번에 출간된 1부는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대학원과 교육계에 투신했던 한 철학자의 삶의 일부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현재 집필 중인 2부는 1990년대 후반부부터 2020년대 전반부를 다룹니다. 특히 한국헤겔학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태동과 관련한 경험적 정보들이 실려 있어 한철연 회원들에게는 좋은 자료가 될 것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아래는 책 소개 기사입니다.

☞ 김동연 경기도지사, 이종철 박사 자전소설 구입 ‘인증사진 올려’ 화제

 

● 책소개

“철학자가 소설을 썼다! 생소한 일은 아니지만 한국처럼 영역과 경계를 많이 따지는 곳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작가 이 종철은 서양 근대 철학, 특히 근대 독일철학을 전공한 철학자로 오랫동안 활동을 해왔다. 지난 몇 년 전부터 그는 에세이철학에 심취해서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다양한 형태의 글을 써왔다. 이 소설은 이런 실험적 글쓰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전공과 장르를 불문한 글쓰기가 드디어 소설 쓰기까지 발전한 셈이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흔하지 않다. 사르트르의 경우는 철학자로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는 소설도 꽤 썼다. 덕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철학자의 신념을 지키고자 그 상을 거부했다. 10여 년 전 영화로도 나온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의 본명은 피터 비에리(Peter Bieri)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 출신으로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한 철학교수이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은 총 2부작이다. 1부작은 197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에 걸쳐 있고, 2부작은 2010년대에서 2020년대 중반에 걸친 격동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개인의 자전적 경험을 쓴 소설이다. 이번에 나온 책은 2부작 중 그 1부이다. 잘 알려져 있듯 이 시기에 한국인들은 유신 독재와 광주 항쟁, 민주화 투쟁과 1987년의 민주주의의 쟁취 등으로 점철된 고통스럽고 의미 있는 역사적 경험을 겪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사회과학의 전성기이자 온갖 이론과 사상이 난무하던 지적 르네상스의 시기이기도 했다. 물론 특정한 세계관과 사상이 지배적 이기는 했지만, 이 시대는 그것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상으로 한국 사회의 변혁운동과 맞물려 상호 피드백 하면서 백가쟁명을 이루기도 했다. 저자는 이 시기를 프랑스의 6.8 혁명 못지않은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6.8 혁명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이론과 사상을 정립해서 세계인들에게 내 보였던 반면, 한국인들은 그런 귀중한 역사적 체험을 그저 그런 과거의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 저자는 우리가 겪은 이 시대의 체험을 철학적으로 반성하고 의미화하고 싶은 욕구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

저자는 이 소설의 형식을 통해 본업인 철학에 대해 반성하는 경험을 많이 했다. 철학자가 소설가들에게 배워야 것이 하나 있다. 철학자들은 허구한 날 남의 철학이나 사상을 끌어들여 해석하고 해설하는 일로 평생을 보내는 데 비해, 소설가들은 비록 3류라 해도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체험과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 철학자들이 개념화된 사유를 하기 때문에 주관적 언어를 쓰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한국의 철학자들은 그 정도가 심해서 남의 언어와 남의 철학을 가져오지 못하면 사유를 하지 못할 정도다. 그들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는 자신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철학을 구성하기보다는 여전히 바깥의 수입 철학에 의존하고 2천 년도 넘은 공맹과 노장사상을 주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있다. 이런 지적 식민성과 사대주의가 한국의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겪은 위대한 경험을 과거로 묻어 버린 채 그저 바깥에서 들어온 새로운 이론과 사상 혹은 오래된 사상에 목을 매달고 있을 뿐이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은 그저 과거를 기록한 한 권의 소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인문학이 처한 ‘문송의 시대’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문학은 끊임없이 주어지는 위기의 잿더미 속에서 부활하는 피닉스와 같다. 인문학의 현실이 당장은 꺼져갈 듯 어려워 보이지만, 인문학은 새로운 환경의 변화를 숙지하면서 부활의 날갯짓을 할 것이다.

목차

  • 작가의변ㆍ4다시 찾은길ㆍ13
    서울의봄ㆍ22
    광주항쟁ㆍ31
    선택과 탐색ㆍ48
    인문학 수업ㆍ63
    다시 강의실로ㆍ76
    철학과 대학원ㆍ91
    헤겔 철학과나ㆍ106
    현실과 철학ㆍ125
    한국헤겔학회ㆍ143
    한국철학사상연구회ㆍ162
    결혼ㆍ174
    외출ㆍ198

저자 이종철 프로필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원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등에서 강의했고, 몽골 후레 정보통신대학 한국어과 교수와 한국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한남대 초빙교수를 마지막으로 대학에서 은퇴를 했고,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브레이크뉴스>와 <저널인뉴스>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에세이철학’ 분야를 새로 개척하고 있고, NGO 환경단체인 <푸른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철학과 비판 – 에세이철학의 부활을 위하여》와 《일상이 철학이다》가 있고, 공저로 《철학자의 서재》, 《삐뚤빼뚤 철학하기》, 《우리와 헤겔철학》, 《문명의 위기를 넘어》, 《사북항쟁 44주년》등이 있으며, J. 이폴리뜨의 《헤겔의 정신현상학》(1/공역, 2), A. 아인슈타인의 《나의 노년의 기록들》, S. 홀게이트의 《정신현상학 입문》, G. 루카치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Ⅰ,Ⅱ》(2, 3, 4/공역), 《무엇이 법을 만드는가》(공역) 등 다수의 책들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