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73)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3)
- 철인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수와 계산 기술, 지성적 이해(521c-526c)
이제 논의 주제는 동굴의 비유에서 제시된 구제의 임무들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만한 훌륭한 철학자들이 이 나라에 어떤 방식으로 생겨날 것인가의 문제 즉 철학자의 교육과정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521c-527c]
* 소크라테스가 밝히고 있는 그러한 교육과정은 ‘밤과 같은νυκτερινός 낮으로부터 진정한 낮을 향한 영혼의 전환ψυχῆς περιαγωγὴ’ 즉 ‘참된 철학’φιλοσοφία ἀληθῆ을 가능케 하는 배울 거리들μάθημα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한 배울 거리들이 생성하는 것το γιγνομένον으로부터 ‘있는 것’τὸ ὄν으로 영혼을 이끌어낸다.(521c-d) 물론 앞에서 다룬 신체단련γυμναστικῇ과 시가μουσικῇ도 배울 거리들이지만 신체단련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 몸의 성장과 쇠퇴를 관장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지금 찾고 있는 배울 거리가 아니다.(521d-e)
* 그리고 시가 또한 습관ἔθος을 통해 화음ἁρμονία과 장단ῥυθμός을 전수해주는 것이지 앎ἐπιστήμη은 아니다. 기술들도 모두 손을 쓰는 일로 보여 그러한 배울 거리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가와 신체단련과 기술들τέχναι을 빼고 어떤 배울 거리가 남아있을까?(522a-b)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첫 번째 배울 거리로 모든 기술τέχναι과 사고διάνοια와 앎ἐπιστήμη이 사용하는 공통의 것이면서, 누구나 제일 처음에 배울 수밖에 없는 것으로 수ἀριθμός와 계산λογισμός을 제시한다.(522c) 특히 계산하고 셈할 줄 아는 것은 전사πολεμικός에게 필수적인 배울 거리이다. 이것이 곧 우리가 찾고 있는 것들, 즉 ‘본성상 지성적 이해로 인도하는’τῶν πρὸς τὴν νόησιν ἀγόντων φύσει 배울 거리들에 속하는 것이다.(522d-523a)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전적으로 ‘있음’οὐσία을 향해 이끌어주는 것임에도 아무도 이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감각αἰσθήσεσις에 속한 것들에서 지성적 이해νόησις가 불러지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살핀다. 우선 감각에 속한 것들τὰ ἐν ταῖς αἰσθήσεσιν 중에서 어떤 것들은 감각에 의해 충분히 분간되기κρινόμενα 때문에 탐구ἐπίσκεψις를 위해 지성적 이해νόησις를 불러내지 않는οὐ παρακαλοῦντα 것들이고, 어떤 것들은 감각으로는 어떤 건전한ὑγιὲς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지성적 이해가 탐구하도록 요청하는 것들이다.(523a-b) 다시 말해 지성적 이해를 불러내지 않는 것들은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는 것’ὅσα μὴ ἐκβαίνει εἰς ἐναντίαν αἴσθησιν ἅμα들이고, 반면에 지성적 이해를 불러내는 것은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멀리서 보든 가까이에서 보든, 감각이 그것을 특별히 더 그것이라고도 그와 반대되는 것이라고도 분명히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명확히 구분해 주기 위해 지성적 이해가 요구되는 것이다.(523c)
*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은 설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손가락δάκτυλος의 비유를 끌어들인다. 만약 우리가 새끼손가락ὅ σμικρότατος, 약손가락ὁ δεύτερος, 가운뎃손가락ὁ μέσος 이 셋을 가까이에서 보는 경우 가운데에서 보이든 끝에서 보이든, 하얗든 검든, 굵든 가늘든, 그리고 그런 어떤 경우든 이것들 각각은 똑같이 손가락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그 손가락들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래서 대중들의 영혼은 손가락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지성적 이해에게 묻도록 강제되지 않는다. 그 경우에는 시각ἡ ὄψις이 영혼에게 손가락과 그것에 반대되는 것τοὐναντίον을 동시에ἅμα 제시하지ἐσήμηνεν 않기 때문이다. 앞서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는다’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그 경우 지성적 이해를 불러내거나παρακλητικὸν 일깨우는ἐγερτικὸν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523c-d)
* 한편 시각ἡ ὄψις은 손가락들의 큼τὸ μέγεθος과 작음σμικρότητα을, 촉각ἡ ἁφή은 손가락들의 굵음과 가늚, 부드러움ἢ μαλακότητα과 딱딱함σκληρότητα을 지각하기도 한다. 이 경우 시각은 그것들 중 어떤 것이 가운데에 있든 끝에 있든 과연 큼과 작음, 굵음과 가늚, 부드러움과 딱딱함을 충분히 구분할까? 다른 감각도 그럴까? 아니면 감각들 각각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냥 딱딱함에 적용되는 감각을 부드러움에도 적용할 수밖에 없어서 ‘이 감각은 동일한 것을 딱딱한 것이면서 부드러운 것으로 감각한다.’고 영혼에 보고할까?(523e-524a) 답은 후자이다. 감각은 동일한 것을 딱딱한 것으로도 부드러운 것으로도 보고하고, 가벼운 것의 감각과 무거운 것의 감각이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가벼운 것을 무거운 것으로 영혼에 제시한다.(524a) 감각이 영혼에게 이처럼 보고할ἑρμηνεί 경우 영혼은 자신에게 제시된 그 내용에 당혹해할ἀπορεῖν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혼은 그러한 보고 내용을 이상스러운ἄτοπος 것으로 여기고 탐구ἐπίσκεψις가 필요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에 따라 영혼은 이러한 상황에서 우선 계산λογισμός과 지성적 이해νόησις를 불러내서 보고된 것들 각각이 하나ἓν인지 둘δύο인지를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각각이 하나이고 함께해서 둘이라면, 영혼은 그 둘을 분리된κεχωρισμένα 것으로 생각할 것이고 ‘분리되지 않은’ἀχώριστος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524b-c)
* 앞의 상황에서 시각은 큼과 작음을(촉각의 경우는 딱딱함과 부드러움을) 보지만, 그것을 분리된κεχωρισμένον 것이 아니라 뒤섞여 있는συγκεχυμένον 것으로 본다. 그러나 영혼은 그것을 구분해서 이해하기 위해 시각과 반대로, 그것들에서 큼과 작음을 보도록 강제된다.ἠναγκάσθη(524c) 그래서 영혼은 여기 어디쯤에서 처음으로, 큰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또한 작은 것은 무엇인지τί ἐστὶ를 묻게 된다. 우리가 한쪽을 가지적인 것τὸ νοητόν이라고 부르고 다른 쪽을 가시적인 것τὸ ὁρατὸν이라고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524c) 그리고 그것들이 바로 조금 전에 어떤 것들은 사고를 불러일으키는παρακαλοῦντα 것이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내가 말했던 것들이다. 요컨대 자신과 반대되는 것과 함께 감각에 들어오는 것들은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지성적 이해를 일깨우지 않는 것이다.(524d)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사고와 지성적 이해가 영혼에서 발생하는 일이 어떤 경우에 생겨나는지를 설명한 다음, 지성적 이해가 수행하는 계산과 탐구의 근간에 수ἀριθμός와 하나τὸ ἓν가 자리하고 있음을 밝힌다.(524d) 만약 하나가 그 자체로 충분히 눈에 보이거나 다른 어떤 감각으로 파악된다면, 굳이 하나가 ‘있음’으로 이끌어주는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것에 대립하는 어떤 것이 항상 그것과 동시에 눈에 보이나 그렇다고 특별히 하나οὐσία로 드러날 정도가 아니라면 그때에는 판정 내려줄ἐπικρινοῦντος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은 영혼으로 하여금 혼란스러움을 일으키는ἀπορεῖν 경우이기 때문에 영혼은 자기 자신 안에서 사유ἔννοια를 발동시켜 탐구ζητεῖν와 동시에 하나 자체αὐτὸ τὸ ἕν가 도대체 무엇인지τί ποτέ ἐστιν를 묻도록 강제되는ἀναγκάζοιτ᾽ 것이다.(524e) 그렇게 해서 ‘하나에 대한 배움’ἡ περὶ τὸ ἓν μάθησις은 영혼을 ‘있는 것을 구경하는 쪽으로’ἐπὶ τὴν τοῦ ὄντος θέαν 인도하며ἀγωγῶν 그쪽으로 방향을 바꾸게μεταστρεπτικῶν 하는 힘을 갖게 된다.(525a)
* 그러나 시각은 동일한 것을 하나인 것으로 보면서 동시에 수적으로 무한한ἄπειρος 것으로 본다.(525a) 그런데 하나 내지 모든 수가 시각 때문에 동일한 그런 일을 겪을 수는 없다. 그래서 계산 기술λογιστική과 산수ἀριθμητικὴ가 필요하다. 그것들은 시각과 달리 가시계를 벗어나 동일한 것을 진리로πρὸς ἀλήθειαν 인도ἀγωγός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찾고 있는 배울 거리들에 속하는 것이다.(525b) 전사에게는 군대의 대오τάξις 정비를 위해서, 그리고 철학자에게는 생성γένεσις으로부터 벗어나서 ‘있음’을 접해야하므로 이것들을 필수적으로 배워야 한다. 수호자φύλαξ가 전사πολεμικός이자 철학자φιλόσοφος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배울 거리를 법으로 정하고 나라에서 가장 큰 일들에 참여할 사람들로 하여금 지성적 이해 자체를 통해서 수들의 본성을 구경하는 데에 이를 때까지 – 무역상이나 행상들처럼 사고팔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그리고 영혼 자체가 생성으로부터 진리와 ‘있음’οὐσία 쪽으로 방향 바꾸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서 – 계산 기술을 연마하게 해야 한다.(525b-c)
* 특히 이 배울 거리는 기묘해서κομψός – ‘행상 일을 하기’καπηλεύειν 위해서가 아니라 – ‘앎을 얻기’γνωρίζειν 위해서 수행할 경우 우리가 원하는 것과 관련해서 여러모로 쓸모χρήσιμος가 있다. 그것은 영혼을 위쪽으로 강하게 이끌고 ‘수들 자체에 대해서 대화하도록’περὶ αὐτῶν τῶν ἀριθμῶν διαλέγεσθαι 강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군가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체를 가진 수들을 영혼에 제시하면서 대화를 한다면, 영혼은 그런 대화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525d).
* 이런 문제에서 대단한δεινός 사람들은 누가 하나 자체αὐτὸ τὸ ἓν를 말로 나누려고 시도할 경우, 결코 하나가 여러 부분μόρια으로 드러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525e) 만약 누군가가 그들에게 ‘어떤 수들에 관해 대화하고διαλέγεσθε 있는지’ 즉 ‘그것들이 어떤 수들이기에 당신들이 그래야 한다고 요구하는 대로 각각 모두가 모두와 같고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으며 자신 안에 어떤 부분도 갖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수는 사고하는 것만διανοηθῆναι μόνον이 허용되고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영혼이 진리 자체αὐτὴ τὴ ἀλήθεια에 이르기 위해 지성적 이해 자체를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임이 밝혀진 한, 이 배울 거리는 우리에게 정말 필수적이고 대단히 효과적이기까지 하다.(526a)
* 그리고 선천적으로 계산에 능한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어떤 배울 거리도 대체로 빨리 익힌다. 또한, 더딘 사람들도 계산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면, 다른 이득은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 이전의 자신보다 빨라진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진전을 보인다.(526b) 더구나 배우고 연마하는 데 이보다 더 힘이 드는 배울 거리는 쉽게 찾을 수도 없고 많이 찾을 수도 없다. 이 모든 이유로 이 배울 거리는 빼놓지 말아야 하며 최고의 자연적 성향을 지닌 자들은 이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52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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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1c-523a : 앞으로 논의될 교육 과정이 앞서 동굴의 비유에서 언급된 영혼의 전환(518d-e)을 가능케 하는 배울 거리이고 그것이야말로 생성하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to on으로 영혼을 이끄는 것이라는 말은 장차 변증술을 목표로 하는 철학자를 위한 교육 과정이 다름 아니라 앞서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를 공히 관통하고 있는 것 즉 인식과 실천의 상승과정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곳의 논의 또한 앞서 논의의 동일 구도 즉 가시계로부터 가지계로의 상승적 전환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청년기의 신체단련과 시가라는 배울 거리를 지나 그러한 상승의 최고 목표로서 변증술에 이르는 철학자를 위한 첫 단계로서 감각으로부터 지성적 이해로의 상승 내지 전환으로서 수와 계산 즉 수학 교육이 제시되고 있다. 요컨대 배울 거리의 첫 단계는 가시계의 감각적 지각의 단계로부터 가지계의 사고 단계로 전환 상승하는 것이다.
* 522a ‘시가는 .. 앎epistēmē이 아니다’ : 앎의 원어 epistēmē는 일반 기술적 앎에서부터 최상의 형상적 앎에 이르기까지 사용 범위가 넓다. 참고로 다양한 기술들이 앎으로 규정되는 사례는 아래와 같이 플라톤 대화편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테아이테토스> 146c-147c, 198a-c, <소피스트> 232a, 257d, <정치가> 258b-d, 297b, 300e, 305a, <필레보스> 55d-e, 57a-b, 58b-c, <알키비아데스 1> 125d-e, <카르미데스> 165c, 166a, 170b, 170c, 173c, <에우튀데모스> 289b, 291b, 292c-d 등. 이 점에서 보면 시가나 신체단련도 기술적 배울 거리의 하나로서 넓은 의미에서 앎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말의 의미를 선분의 비유를 기준으로 사고 단계 이상의 의미로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 523a 지성적 이해noēsis : 그러나 지성적 이해의 원어 noēsis는 최상의 형상적 앎의 단계에 한정하지 않고 그 아래 단계인 사고dianoia 단계를 두루 포함하는 말 즉 가지계ta noēta 일반의 앎으로 넓게 사용되고 있다. 앞서 선분의 비유(509d-511e)에서도 noēsis는 때로는 ‘형상적 앎’epistēmē에 국한해서 때로는 수학적 앎까지 포함한 가지적인 것(ta noēt)에 대한 앎 모두에 두루 사용되고 있다.
*523a – 524c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 맞이하는 두 부류의 지각을 구별한다. 하나는 지성적 이해를 불러내거나 자극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성적 이해를 불러내거나 자극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소크라테스는 손가락에 대한 지각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예를 들어 여기 세 개의 손가락이 있다면 우선 시각은 각각이 모두 손가락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단순 지각 상태에서는 손가락들 간의 차이까지 지각되지는 않아 지성적 이해에 자극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시각이 단순 지각을 너머 크기와 작음, 두께와 얇음, 딱딱함과 부드러움 등 동일한 대상에서 반대적인 속성들까지 동시에 지각하면서도 아무 구분 없이 그것들 모두를 동시에 영혼에 제시할 경우 영혼은 당황aporein할 수밖에 없다. 동일한 대상이 동시에 그 반대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은 급기야 지성적 이해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지성적 이해는 즉각적으로 그것에 반응하여 ‘그것은 무엇인가? ti esti’라는 소크라테스적 물음을 통해 그 보고 내용들에서 ‘큼’과 ‘작음’을 서로 구별되는 각기 자기동일적 하나로 분간해 낸다. 이로써 시각 대상to horaton 내지 감각대상to aisthēton은 사고 대상to noēton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크기나 무게 등 수적 계산이 가능한 단위들과 결합해 감각적 대상들에 대한 산술적 파악 내지 구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혼은 당혹스런 난문aporia을 통과하여 참된 배움으로서 감각적인 가시계를 떠나 가지계로 진입한다.
* 523c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는 것’ : 이 문장은 동사 ekbainei와 전치사 eis의 의미를 살려 ‘반대되는 감각으로 동시에 넘어가지 않는 것’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아직 단순 지각 상태에 머물러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포함하는 뒤섞인 감각으로까지 넘어가지 않은 것들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아직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으므로 지성적 이해를 자극하지 않는다.
* 524c-d : 물론 시각에도 큼과 작음은(촉각의 경우는 딱딱함과 부드러움) 들어오지만, 문제는 그것들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뒤섞여 있는 상태로 감각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영혼은 명확한 인식을 위해 지성적 이해로서 뒤섞여 있는 것에서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분해 보도록 강제한다. 그래서 영혼은 그려진 삼각형에서 삼각형 자체를 보듯 큰 것과 작은 것에서 큼과 작음을 보고 그것을 분리해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들은 추가적인 사고 과정을 통해 각기 고유한 내포적 의미는 갖되 비교 관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것임이 드러나고 그에 따라 그것들과 관련한 영혼의 당혹감은 해소된다. 사실 오늘날 누군가 약한 손가락이 동시에 크기도 하고 작기도 말한다면 여기의 영혼처럼 당황스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소한 상식을 가진 현대인이라면 큼과 작음은 비교 대상에 따라 크기도 하고 동시에 작기도 한 상대적인 것임을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반적인 관점에서 ‘가시계의 동일한 것으로 지각되는 대상이 왜 다른 것들 내지 반대적인 것들을 동시에 갖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이 경우 사고 작용은 그 동일 대상에서 다른 것들 내지 반대적인 것들이 사실은 고정치가 아니라 관계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나타날 수 있는 계기적 측면들 내지 우연적 속성들임을 알아차린다. 아마도 플라톤이 당혹감을 주는 사례로 여기에서와 같은 것들을 끌어들인 까닭은 당대 소피스트들이 측면이나 계기, 속성 등 우연적인 것들을 파르메니데스를 끌고 와 마치 배타적 일자성을 갖는 것인 양 내세워 상대를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궤변적 쟁론술을 자주 구사했기 때문일 것이다.(<에우튀데모스> 277d-282c 등 참고)
* 이곳에서 영혼의 당혹감 또는 난문aporia은 감각적 가시계에서 반대적인 것들이 동시에 함께 주어짐으로써 촉발되지만, 영혼의 당혹감은 물질적 가시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쾌락과 고통, 선과 악과 같은 윤리적 문제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플라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참과 거짓,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 경건과 불경건, 쾌락과 고통 등과 관련한 일상의 주장들을 하나같이 난문에 빠트리는 장면들은 허다할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소크라테스적 난문들은 진정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 탐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철학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부추기고 자극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곳에서도 영혼이 마주하는 당혹감은 최상의 배움을 향한 상승과 전환의 첫 발을 내딛게 하는 발판이자 기폭제가 된다. 말 그대로 철학은 당혹과 놀라워 함thaumazein에서 시작된다.
* 524d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사고와 지성적 이해가 영혼에서 발생하는 일이 어떤 경우에 생겨나는지를 설명한 다음, 지성적 이해가 수행하는 계산과 탐구의 근간에 수arithmos와 하나to en가 자리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런데 그러한 구분에 ‘수와 하나’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우선 구분과 분간이 된다는 것은 대상들 각각이 어떤 단일한 일자적 규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일자적 규정성으로서 자기동일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타자와 분명한 구별이 불가능하다. A는 A로서 일자성이 확보되고 B는 B로서 일자성이 확보될 때 비로소 A라는 ‘하나’ B라는 ‘하나’가 성립하고 그것들 모두 각기 나름의 일자성을 갖는 서로 다른 ‘여럿’(多)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여럿이 성립해야 비로소 그것들 간의 비교, 차이가 드러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도 드러나 이른바 그것에 대한 객관적 탐구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가시계의 물질적 감각적인 것들은 늘 생성 변화하고 그 안에 반대적인 속성들마저 뒤섞여 있어 자기동일성의 확보가 어렵고 그에 따라 동일한 것을 ‘하나’en인 것으로 보면서 동시에 수적으로 무한한apeiron 것으로 본다. 이렇듯 감각은 더 이상 대상들을 제대로 적확하게 지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혼은 사고 작용을 통해 그것들에서 물질적 감각적 변화의 요소들로부터 이를테면 큼 자체, 작음 자체라는 자기동일자를 분리해낸다. 예를 들어 A, B라는 속성들이 가시계에서 뒤섞여 있다고 하자. 이 경우 사고는 그곳에서 감각적 시간성을 제거하여 ‘A는 A’로 ‘A는 A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 B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것으로 – 추상해 낸다. 이를 통해 비로소 그것들은 구별과 분간이 가능한 각기 ‘하나’이면서 동시에 서로 구분되는 ‘여럿’이 되는 것이다. 논리학에서 동일률과 모순률, 배중률을 사고의 기본 원리로 삼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수 공간적 사고를 통해 자기동일성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자가 다름 아닌 ‘수’arithmos이다. 사고 단계를 구성하는 핵심에 수학이 자리하고 배울 거리의 첫 단계가 수학이 되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누군가 단일성의 개념을 형성해보려 시도하지 않았다면 산수라는 과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플라톤이 보기에 사고를 불러일으키고 자극하는데 수학만큼 적합한 것은 없다.
* 물론 플라톤에서 사고가 가시적인 것들에서 각각의 자기동일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배경에는 그 각각의 것들에 자체적 존재로서 형상(eidos)이 자리하고 있다. 가시적인 것들은 그 형상들을 마치 그림자처럼 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수학적 자기동일성과 자체적 존재로서 형상이 갖는 자체성은 다르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수학적 자기동일성이 형상이라는 자체적 존재에 연원해 있다는 데 근거하여 수학에 기반한 사고 단계의 개별 학술들 즉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의 학문성을 확보한다.
* 그러나 오늘날 비합리주의 계열의 주장처럼 형상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플라톤이 말하는 사고 내지 지성적 이해는 실제 시공간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에서 시간을 제거하고 공간적 존재로서만 그것들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재하는 현실의 실상을 배반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노자(老子)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 설파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플라톤 철학은 어떻게든 현실을 말로 설명해내려는 현실 구제의 이념을 지향한다. 틀리면 그 이유를 대고 바로잡는 것 또한 말이다.
* 525a ‘시각은 동일한 것을 하나인 것으로 보면서 동시에 수적으로 무한한apeiros 것으로 본다.; 이 말은 시각의 대상인 가시적 물질적인 것들이 반대적인 것들을 포함하여 변화무쌍하게 수많은 측면들과 계기들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음을 함께 보여준다. 가시적 물질계는 존재론적으로 이미 그 자체로 무규정적apeiron인 것이다. 영혼은 형상 인식을 토대로 이러한 무규정성에 분유된 규정성(peras)을 간취하여 지성적 이해로 하여금 대상에 대한 지적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무규정성에 방치된 이른바 소피스트들의 허무주의가 극복된다.
* 525d ‘누군가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체를 가진 수들을 영혼에 제시하면서 대화를 한다면’ : ‘몸체를 가진 수들’이란 감각적 대상을 단위로 두고 세어진 수들 이를테면 사과 두 개, 말 세 마리, 물 세 컵 등으로 표현된 수들이다. 물 한 컵에 두 컵을 더해도 한 컵이 되는 것을 근거로 ‘1+2도 1이 될 수 있다’는 궤변도 몸체를 가진 수와 순수한 수를 구분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것이다. 수학자들이 감각적 몸체를 가진 수들이 아니라 오로지 사고의 대상으로서 수만을 승인하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 525d ‘배울 거리가 여러모로 쓸모chrēsmos가 있다’ : 플라톤에게 앎은 그 자체로 좋음 즉 실천적 유용성을 수반하는 것이다. 일부 플라톤 연구자들이 그를 철저한 공리주의자로 해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소개되는 계산 기술과 산수 또한 영혼으로 하여금 생성으로부터 있음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질서와 대오를 중시하는 군대 즉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특히나 그 배울 거리는 기묘해서 무엇보다도 ‘영혼을 위쪽으로 강하게 이끌고 ‘수들 자체에 대해서 대화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에서 쓸모가 있다. 여기서 ‘대화하도록’의 원어 dialegesthai가 ‘변증술적 대화 능력’의 의미로도 함께 쓰이고 있음을 고려하면 수학 교육의 가장 큰 쓸모는 무엇보다도 바로 가장 위쪽 즉 좋음의 극치로서 형상적 앎에 이르는 변증술의 토대가 된다는 데 있다.
* 525d ‘배울 거리가 행상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수학 교육이라는 배울 거리가 무역상이나 행상들처럼 사고팔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오늘날 경제학에서 수학을 강조하는 관점과 괴리가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수학이 장사와 무관하다는 말이 아니라 수학 교육을 진리로 다가가기 위한 배울 거리로 여기지 않고 순전히 상업적 부를 획득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중시했던 당대 사회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상업적 부는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삶의 목적은 크건 작건, 나라 차원에서건 개인 차원에서건 우주적 선과 진실에 부합하는 영혼이 되도록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는 것이다.
* 526a ‘그것들이 어떤 수들이기에 당신들이 그래야 한다고 요구하는 대로 각각 모두가 모두와 같고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으며 자신 안에 어떤 부분도 갖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다면 : 여기에서 ‘당신들’이 가리키는 것은 당대의 기하학자, 천문학자, 화음 이론가들이다. 소크라테스는 나중 그들 이론의 한계를 분명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일단 수학을 강조하는 이 단계에서는 일단 당대의 수 이론을 승인하고 있다. 수는 감각적 대상처럼 자신 안에 어떤 부분도 몸체도 갖고 있지 않고 오직 사고로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형상(이데아)으로서의 수도 아니다. 앞서 선분의 비유에서 사각형 자체가 그려진 도형으로서 사각형도 아니지만 형상으로서 사각형 자체가 아닌 것과 같다.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에서 사고의 대상을 수학적인 것으로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나 이곳의 내용은 사고dianoia의 대상이 수학적인 것임을 충분히 알아차리게 해준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이상학> 1.6.987b에서 플라톤이 감각물과 이데아 사이에 수학적인 것들이 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만큼 플라톤에게 수학은 앞으로 다루게 될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과 더불어 변증술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ㅇ예비 교과이자 개별 학술로서 최상의 지위를 공유한다.
* 525b : 본성에 따른 천부적 능력이 우선시 되고 있지만 누구라도 교육과 훈련을 통해 진전을 이룰 수 있음 또한 강조되고 있다.
* 526c 배우고 연마하는 데 이보다 더 힘이 드는 배울 거리 : 플라톤은 앞서 제6권(503e-504d)에서 가장 큰 배움(to megiston mathēma)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길고 힘든 단련의 과정이 필요한지를 언급하고 있다. 말 그대로 ‘아름다운 것은 힘든 것’(ta kala chalepa)이다.
———————————
* 그러나 플라톤이 이곳에서 제기하는 가시적인 것에 대한 지각에서 가지적인 것에 대한 인식에로의 전환은 어떤 인식론적 입장을 갖느냐에 따라 수많은 이견과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손가락에 대한 감각적 지각은 손가락이 아닌 지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는 단순 지각으로서 지성적 이해를 자극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칸트 인식론의 관점에서 보면
감각 대상이 손가락으로 인지되었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감각소여data에 손가락이라는 오성적 개념지 즉 범주의 개입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감각에 속하는 것들 가운데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는 감각도 있고 그것이 지성적 이해를 자극한다(523a)는 언급도 마찬가지의 문제를 낳는다. 왜냐하면 그 감각이 지각한 내용은 거울처럼 순수하게 대상을 수동적으로 모사한 감각소여가 아니라 이미 반대적이라는 오성적 판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론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의 감각 대상은 오로지 감각소여로 주어질 뿐이어서 그 지각 내용들에 그 어떤 지성적 이해도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다만 지각된 잡다한 관념들의 내적 연합의 법칙에 의해 개연적인 집합성만을 갖는 것으로 구별 인식될 뿐이다.
* 아무려나 이곳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철학자를 위한 이곳의 교육 과정 또한 구도상 앞서 살핀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인식과 실천의 상승과정과 그대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이곳에서 제시된 수학 교육은 선분의 비유 상 의견doxa이 지배하는 가시적인 것들에 대한 믿음pistis의 단계로부터 추론적 사고dianoia와 지성nous가 지배하는 가지적인 것들(ta noēta)에 대한 지성적 이해noēsis의 단계로의 전환periagōgē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것은 장차 제시될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 등과 함께 본 곡으로서 변증술적 앎을 준비하는 서곡을 구성한다. 앞으로 다루게 되겠지만 이 개별학술들technai은 본 곡으로서 변증술에 이르는 토대가 된다. 변증술이 지적 직관에 크게 바탕을 두고 있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개별 학술들이야말로 설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학문의 실질적인 정점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별학술들을 바라보는 플라톤의 시선을 고려하면 그가 오로지 형상에 대한 인식에만 매달렸다는 통상적 이해는 결코 진실이 아니다. 아무리 그것이 자체성을 갖는 최상의 앎이라고 해도 자기동일성에 기반한 개별 학술들에 대한 앎을 획득하지 않으면 결코 그곳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개별학술들은 이미 그 자체로 중차대한 학문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칸트 인식론의 ‘감성’(Sinnlichkeit)과 ‘오성’(Verstand) 그리고 ‘이성’(Vernuft)(좁은 의미)의 지배 영역을 큰 틀에서 플라톤이 인식 단계와 비교해보면, 비록 칸트의 인식론이 실재론자 플라톤과 달리 인식을 구성하는 주관에 치중되어 있다할지라도 그것들 각각은 가시계의 감각aisthēsis과 가지계의 추론적 사고dianoia 그리고 형상계의 지성nous에 대응한다고 볼 수도 있다. 오성 차원에서 물자체는 불가지이지만 이성 차원에서는 최소한 그 존재가 알려진다는 것도 사고 차원의 개별 학술적 앎과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변증술 차원의 직관적·총체적 앎과의 간극에 대한 플라톤적 상념과 일정부분 닿아 있다.
* 이제 논의는 사고 단계의 첫 출발로서 수학 교과를 거쳐 나머지 예비교과로서 평면기하학, 입체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으로 이어진다. – 끝 –
다음 강해 :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기하학(526c-527c), 입체 기하학(528a-d)
헤겔 형이상학 산책37-일자와 공허[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37-일자와 공허
1)
지금까지 현존에 속하는 다양한 범주를 설명하면서 늘 소금을 예로 들었다. 이 소금은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지각을 설명하는 가운데 예로 들었던 것인데, 논리학 존재론 현존 장의 정신현상학 지각 장에 상응하니, 여기서도 소금을 예로 들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소금과 소금의 관계에 이르게 됐다. 하나의 소금은 서로 대립하는 속성이 서로 관계하는 것을 통해 산출된다. 이 대립적 속성의 관계 곧 미분적 차이가 헤겔에서 대자 존재다. 어떤 소금은 이 대자 존재가 산출한 것 가운데 하나이니 소금이 일종이다.
이제 이 소금을 다른 소금과 관계해서 보자. 다른 소금과 관계의 평면에서 하나의 소금을 헤겔은 일자라 했다. 그것은 소금 대자 존재의 자기 관계를 통해 산출된 것이지만, 이제 그것을 통해 출현한 여러 소금이 관계하는 평면에서 그 하나의 소금을 보기 때문에, 직접적인 것으로 되돌아온 것이고 그래서 일자다.
지금까지 헤겔은 대자 존재에서 일종의 존재를 거처 일자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것이 존재론 3절 대자 존재의 1소절 주요 내용이었다. 이제 2소절에 들어가게 되면, 일자와 일자의 관계 예를 들어 소금과 소금의 관계가 다루어지는데,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은 곧 공허[Das Leeres]다.
2)
계속 소금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하나의 소금과 다른 소금은 사실 내부 구성이 동일하다. 양자는 짠맛과 입방체라는 두 대립하는 속성의 관계를 통해 산출된 것이다. 유명한 라이프니츠의 동일율에 따르면, 속성이 같은 것은 동일자이니, 속성이 같은 소금이 따로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명백하게 서로 분리된 채 존재하는 두 개의 소금을 만나게 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이 지닌 모호성을 비판하는 가운데, 속성이 같은 사물이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두 개의 나뭇잎이나 두 개의 물방울, 두 개의 소금 등등. 칸트는 여기서 감각적 규정인 시, 공간을 지성의 범주인 개념과 구분하면서 속성이 같더라도 시공간적 위치가 다르면 서로 다른 사물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칸트는 일자가 시공간 속에서 차이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이런 시공간성은 사물과 무관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인식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식의 형식이 인식의 형식이 되려면 이미 사물 그 자체에 그런 형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전혀 무관한 어떤 것을 통해 어떤 것이 받아들여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공간을 사물이 지닌 다른 성질과 같은 차원에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사물 속에 그런 공간성이나 시간성을 감각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칸트는 시공간을 사유의 형식에 집어넣었으나, 그것도 문제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다.
여기서 헤겔의 시공간 개념이 출현하니, 헤겔에서 시공간은 곧 사물들이 서로 만나는 평면 즉 관계다. 그것은 사물의 성질도 아니고 주관의 형식도 아니다. 사물의 관계 평면이니, 하나의 사물은 아무리 속성이 같더라도 시공간적 평면에서 다른 위치를 차지한다면, 서로 다른 사물이 될 수 있다.
3)
사물이 만나는 방식에 따라서 서로 다른 다양한 시공간 형식이 출현할 수 있다. 다양한 시공간적 형식 가운데 헤겔은 일자와 일자가 만나는 시공간의 평면을 곧 공허라고 한다.
그러나 이 공허라는 개념은 철학자를 늘 괴롭혀온 개념 중의 하나다. 공허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어떤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통해 구별된다면, 사실 구별이 없다는 말이 아닐까? 그런데도 공허는 없는 것은 아니니, 그것이 어떤 현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것이므로 현존은 이 공허를 통해 구별될 것이다. 공허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니, 이런 양면성을 지닌 것을 인정하기가 합리적 철학으로서는 쉽지 않았다.
이 인정하기도 곤란하고 부정하기도 곤란한 공허를 헤겔은 일자와 일자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다. 즉 일자와 일자의 관계는 공허를 통해 관계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미 여러 관계의 평면을 다루어 왔다.
최초의 현존은 생성과 무의 통일이었다. 여기서 하나의 규정은 곧바로 다른 규정으로 변화하면서 명멸하는 세계가 출현했다. 감각적 규정이 명멸하는 세계는 마치 하나의 공간처럼 보이지만,이 공간은 아직 공허로서의 공간은 아니다.
이어서 어떤 것은 자기 자신에서 타자에 관계한다. 그러면서 하나의 규정을 지닌 것은 다른 규정을 지닌 것으로 변화하니, 이것이 곧 어떤 것(실재)들이 이루는 관계다. 이런 변하는 곧 덧없이 흐르는 시간과 닮았지만, 이 역시 공허로서 시간은 아니다.
공허는 곧 자기 관계하는 대자성을 토대로 산출된 일자가 출현하면서 비로소 출현한다. 일자는 자기 관계하는 대자 존재가 직접성을 지닌 것이라 한다. 그것이 어떤 규정성을 지닌 일자 즉 예를 들어 소금이다. 이런 일자들이 관계하는 평면이 곧 공허다.
4)
헤겔은 이 허공을 이렇게 규정한다.
“일자는 부정의 자기에 대한 추상적 관계로서 보면 공허다. 이 공허는 무로서 단순한 직접성 즉 일자라는 또한 긍정적 존재와 단적으로 구별된다. 양자는 관계 즉 일자들의 관계 속에 있으므로 그 상이성은 정립되지만, 공허로서 무는 존재하는 일자 밖에 놓여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구별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153)
여기서 핵심어는 곧 ‘부정의 자기에 대한 추상적 관계’라는 말이다. 대자 존재는 자기 관계하는 매개 운동이다. 그 매개가 다시 직접적 존재로 되돌아오니, 그것이 일자다. 이런 일자들이 맺는 관계가 즉 하나의 일자가 다른 일자에 대한 관계를 헤겔은 ‘부정의 자기에 대한 관계’라 한다.
현존에서 자기를 부정하면 타자가 된다. 예를 들어 흰 소금은 자색 소금으로 변한다. 그러나 소금은 자기 바깥에 소금과 만나므로, 자기를 부정하면 자기 자신이 된다. 이렇게 자기를 부정해도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이 곧 부정의 자기에 대한 관계다. 일자라는 개념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여기서 공허라는 특별한 시공간의 평면이 출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공허라는 개념은 일자라는 개념과 쌍생아이며, 양자는 서로 대립하지만, 동일한 대자 존재로부터 도출된 개념이다.
바로 이런 공허가 우리가 흔히 물리학에서 다루는 시공간이다. 물리학은 모든 물체를 질량이라는 일자로 환원하기에 이를 통해 공허라는 물리학적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5)
그런데 자기 관계하는 대자 존재 일자는 다시 구체적인 사물이다. 즉 다양한 우연성을 지니고 있다. 일자들은 서로 공허 속에서 만난다. 그런 공허 속에서 각 일자는 자신이 지닌 우연성에 따라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소금은 상당히 추상화된 것이다. 즉 그것은 소금이라는 구체적 사물이 지닌 성질 가운데 우선 감각적 규정을 제외하고 그것이 지닌 속성을 넘어서 속성의 관계 즉 대자 존재에 이른 것이다. 이제 속성의 관계 즉 대자 존재에 의해 다시 소금이 산출되면 그것으로 다시 구체화된다. 이제 소금은 단순한 일자가 아니라 흰 소금이나 자색 소금이 된다. 소금이 다른 소금과 만나는 평면이 곧 공허인데, 사실 이 공허는 이런 우연성으로 채워져 있다. 각각의 일자로서 소금은 각자가 지닌 우연성에 따라 그 공허에 자리잡는다.
그러므로 공허라고 할 때 그 특성은 일자들의 만남에서 규정된다. 일자들은 서로 같은 대자 존재를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각 일자는 각자 우연성을 지니면서 이 공허 속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대자 존재는 이런 방식으로 일자와 공허고 규정되면서 다시 현존에 도달한다. … 일자와 공허라는 대자 존재의 두 계기는 대자 존재라는 통일로부터 나오면서 서로 외면적으로 된다. 두 계기의 통일로부터 존재의 규정[일자]이 회복되므로, 이 존재의 규정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측면으로 즉 현존으로 격하한다. 그런 현존 속에서 그 존재의 규정과 다른 규정 즉 부정 일반은 마찬가지로 무의 현존으로서 즉 공허로서 대립하여 설정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153)
여기서 일자의 규정이 다시 현존으로 격하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현존의 규정은 곧 우연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소금의 흰색이나 자색을 말한다. 일자는 우연성을 가지면서 공허 속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우연적이라는 것이 핵심적이다. 그러므로 일자의 만남을 이루는 허공은 한편으로는 똑같은 일자가 만나는 평면이므로 그 공허는 등질적이고 모두에게 내재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여기서 차이는 우연성의 차이이므로 이 공허는 외면적 차이를 지닌다.
이 등질적이며 우연성의 차이만 지닌 특별한 시공간이 곧 공허다. 일자들은 사실 일자라는 점에서 한편으로 차이를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 차이를 지니지 않는다. 마치 공간적 점이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있는 것으로 보면 그것이 점이며 없는 것으로 보면 그것은 공허다.
6)
헤겔은 여기서 공허를 발견한 원자론자들을 높이 평가한다. 원자 즉 일자라는 개념이 출현했으므로 비로소 공허라는 특별한 시공간이 마련될 수 있었다. 이 특별한 시공간이 있기에 물리학이 성립할 수 있다.
처음 원자론자들은 원자들이 공간적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이 공허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나의 원자가 빈 순간 다른 원자가 그 자리를 채움으로써 공간의 이합집산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곧바로 반론에 부딪힌다. 원자의 형태와 크기가 다르니, 하나의 원자가 자리를 비워두더라도 크기나 형태가 다른 원자가 그리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가서 원자론자들이 최초에 가정했던 공허는 원자와 따로 떨어진 것이며, 그것은 원자의 운동이 일어나는 곳일 뿐, 그 자신은 원자의 운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자론자가 데모크리투스에 이르면 공허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 공허는 곧 운동의 원인이나 근거가 된다.
헤겔은 공허가 운동의 원인이라는 원자론자의 생각을 높이 평가하는데, 이런 생각은 곧 공허가 원자에 단순히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원자들이 관계 맺는다는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관계가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5년 4월 제17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발제: 송인재│2025.04.11.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주제: 『중국현대철학사론』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
-발제자: 송인재(한림대)
-일시: 2025년 4월 11일(금) 오후 4시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실 & 줌 온라인
이번에 살펴볼 양수명은 이규성 선생의 소개에 따르자면 대체로 유교를 중심에 두고 서구 사상을 흡수함으로써 현대에 되살리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유교는 양명학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유교의 인 개념을 서구 현상학자 오이켄의 직각 개념과 연결하여 정의적 공감을 나가고, 도 개념을 베르그송의 생명 개념과 연결하여 우주의 대 생명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생명과 정의적 공감에 기초하여 공동체(향촌)를 건설하려는 사회운동을 전개했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양수명을 연구하는 학자가 많군요. 강중기 선생이 책으로 발간한 바 있고 이철승 선생도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규성 선생도 거의 한 권의 책에 가까운 분량을 통해 양수명의 사상을 연구했군요. 아마도 전체적으로 보아 이규성 선생의 사상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에 남달리 애정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번 발표는 중국현대철학사상 연구자로 알려진 송인재 선생(한림대)이 맡아서 해 주시겠습니다.
발제문: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20250411
영상 출처: https://youtu.be/yMWvWZfSjFM?si=b8RAwnYEmdJA4wO_
헤겔 형이상학산책36-모나드와 일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산책36-모나드와 일자
1)
앞에서 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 사이의 관계가 설명됐다. 대자 존재는 속성의 관계인 미분적 힘이며 이 힘을 통해 동일한 존재가 반복적으로 출현한다. 그것이 곧 일종의 존재다. 여기서 일종의 존재가 실재하는 것이라면, 대자 존재는 실재에 내재하는 존재[Insichsein] 즉 관념적인 것[Idealitaet]이 된다.
헤겔은 양자의 관계를 논의한 다음, 양자의 통일체로서 일자라는 개념을 끌어낸다.
“대자 존재의 계기들(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이 몰락하여 구별 없는 것으로 되면서, 직접적인 것 또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 직접성은 부정에 근거하고 이 부정이 그 직접성의 규정[Bestimmung: 본분]으로 정립된다. 대자 존재는 이렇게 해서 대자 존재자가 되며, 그 직접성 속에 그 의미가 사라지면서, 자기의 한계가 전적으로 추상적으로 된 것 즉 일자[Eins]다.”(논리학 재판, GW21, 150-151)
‘일종의 존재[Sein fuer Eines]’0가 다시 ‘일자[Eins]’로 변화하는데, 그 개념이 유사하기에 약간 어리둥절해진다. 위의 인용구에서도 헤겔은 일자를 규정하면서 이 일자는 직접적인 것이지만, “부정에 근거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즉 대자 존재 즉 부정의 부정을 통해 산출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헤겔은 일종의 존재를 규정하면서도 유사하게 말한다. 그는 일종의 존재를 “자기를 지양된 타자로서 간주하면서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는데, 즉 대자 존재에 의해 지양된 직접적 존재라는 말이다.
2)
이처럼 ‘일종의 존재’와 ‘일자’를 규정하는 말이 유사해서 혼란스러운데, 헤겔의 문장을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같은 것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말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양자에 공통적 요소 즉 ‘대자 존재에 의해 정립된 직접적 존재’를 대자 존재가 정립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일종의 존재’며, 반면 직접적인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곧 ‘일자’다. 일자가 이런 직접성의 차원에 있으므로 이 일자는 다른 일자에 대해 외면적인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앞에서 계속 들어온 소금의 예를 들자면, 소금의 고유한 대자 존재는 대립하는 두 속성의 관계 즉 미분적 힘이다. 이 힘에 의해 소금이 만들어지면, 이 소금은 일종의 소금이 된다. 그런데 이 소금을 직접적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다른 소금과 구별되는데 이 측면에서 보면 이 소금은 일자라고 하겠다.
일종의 존재는 대자 존재와의 관계에서 논의되었다. 그 관계는 일자의 내적인 관계다. 이제 그것이 일자로 규정되면서 다른 일자와의 외면적 관계가 논의되기 시작한다. 즉 일자와 다자의 관계다.
3)
일자와 다자 사이의 관계가 논의되기 전에, 헤겔은 주석에서 관념론적 사유에 주목한다. 그 가운데 헤겔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이다. 헤겔은 이 주석에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여기에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 논란이 깔렸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원자론자가 문제 된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는 존재하고 무는 없으니, 존재는 일자이며, 부동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운동과 다의 존재를 부정하기 어려우니, 이를 설명하기 위해 원자론자는 다수의 일자로서 원자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원자는 질적인 차이는 없고 다만 양적인 차이 즉 크기와 형태의 차이만 가질 뿐이다. 원자에서 이 차이는 외면적이고 우연적인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원자론자가 다수의 원자를 도입한 이유는 이해된다. 운동과 다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에서 일자는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처럼 일자일 뿐이니, 여기서 다를 끌어내는 필연성이 없다. 결국, 원자론자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사유의 필연성을 희생했는데, 사유의 필연성 쪽에서 보면 참으로 찜찜한 타협이었다고 보겠다.
일자가 어떤 외적인 차이가 아니라 내적인 차이를 지녀야 한다는 생각이 부상하면서, 원자는 크기와 형태의 차이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게를 가지게 되고 이 무게가 운동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데도 원자론자에게 무게라는 개념은 크기나 형태의 차이와 동렬에 놓이면서 우연적이고 외면적인 차이로 간주하면서 그 의미가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다.
4)
원자론자의 고민을 이어받은 것이 시대를 뛰어넘어 라이프니츠가 아닌가 한다. 라이프니츠의 모다드 즉 단자(일자) 또는 단순 실체는 자주 원자에 비교된다. 그러나 양자에 결정적 차이가 있다. 원자는 그 자신 내적인 차이 즉 질적인 차이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서 단자는 질적인 차이를 지니는데, 그 차이는 곧 표상의 차이이며, 이는 내적 원리에 기초한다.
표상이란 관념인데, 이 관념과 주관 사이에는 자기 관계가 성립한다. 이 자기 관계가 곧 관념성[Idealitaet]을 의미한다. 관념화하기 위해서는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산출하는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이 곧 욕망이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에서 표상의 차이를 결정하는 내적 원리는 욕망이 된다.
“변화(즉 하나의 표상에서 다른 표상으로 이행)를 불러일으키는 내적 원리의 행위가 욕망이라 불린다.”(모나돌로기, 명제 15)
원자론자에게서 원자는 일자이지만, 자기를 규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자라면, 자기를 통일하는 것이니, 자기 통일성을 통해 자기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라이프니츠는 단자는 표상의 차이를 지니며, 그 힘은 곧 내재하는 힘인 욕망에서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욕망이 곧 표상하는 능력이고 그 산물이 표상이다.
5)
헤겔은 주석에서 라이프니츠가 말한 욕망 즉 표상 능력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간파한다. 헤겔은 라이프니츠의 표상 능력(욕망)을 ‘대자 존재’로, 표상을 그것에 의해 정립된 ‘일종의 존재’로 규정한다.
“표상하는 작용이 대자 존재다. 그 속에서 규정성은 한계가 아니므로 하나의 현존이 아니며, 다만 계기다.” “이 체계 속에서 타자 존재가 지양된다.” “다양성은 다만 관념적인 것이며 내적인 것이다.” “단자는 그런 다양성 속에서 다만 자기 관계하며 변화는 단자 내부에서 스스로 전개되고 하나의 단자가 다른 단자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논리학 재판, GW21, 149)
라이프니츠에서 단자는 질적 차이를 가지지만, 자기 규정한다는 생각은 곧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아마 이런 혼란이 없었다면, 헤겔은 라이프니츠를 높이 평가했을 텐데, 이 혼란 때문에 헤겔은 심지어 철학사 강의에서 라이프니츠에게 독자적 자리조차 마련해 주지 않았다. 헤겔이 스피노자에게 할당한 높은 지위를 생각해 볼 때 라이프니츠에 대한 이런 푸대접은 우리가 보기에는 이상한데, 이어지는 주석에서 헤겔의 라이프니츠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면, 헤겔의 심정이 이해될 만하다.
사실 라이프니츠는 욕망과 표상의 개념에서 두 가지 대립하는 길을 간다. 한편으로 단자는 자기 규정하는 것이니 단자는 자기 관계하는 일자이고, 따라서 타자와 관계하는 어떤 통로도 없다. 무수한 단자들은 고립적이며 타자와 관계하는 창을 가지지 않는다.
단자가 자기 규정하는 것이라면, 단자의 자기규정은 우연히 규정된 것이니, 각자 고립적이고 분산적인 세계, 맹목적인 세계일 것이다. 그러면 이 세계가 조화에 이르려면 신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게 라이프니츠가 갔던 예정 조화론이다. 이 세계의 우연한 것들은 신의 최선 선택에 의해 충분하게 존재하도록 이유가 주어진 존재다.
“그러나 충분한 이유가 우연한 진리 또는 사실의 진리에 발견되어야 한다.”(모나돌로기 36), “그러므로 충분하거나 궁극적 이유는 이런 더욱더 우연한 사물의 일렬 또는 계열 밖에 아무리 그런 사물이 무한하더라도 그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모나돌로기, 명제 37)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까? 그런 비난을 의식한 듯 라이프니츠는 자기의 주장을 완화한다. 그는 신이 우연적 사물의 충분한 원인이므로, 그것들은 서로 충분하게 얽혀 있다고 한다.
“이 실체가 이 모든 세부적인 것들의 충분한 원인이므로,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고 이 신은 충분한 원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세부적인 것은 완전하게 얽혀 있다.”(모나돌로기, 명제 39)
여기서 “완전하게 얽혀 있다”는 말은 상호 조화를 이룬다는 뜻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실제 상호 관계를 가진다’라는 의미로 전의한다.
“이제 모든 창조적 사물의 이런 상호 그리고 나머지 전체와의 얽힘 또는 적응은 이 단순한 실체가 그것이 표현하는 모든 다른 것들에 대해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우주의 영원히 살아 있는 거울이다.”(모나돌로기, 명제 56)
그래서 다시 단자들의 관계를 설정하고 그것을 표상하는 능력에 한계를 둔다. 한편으로 단자는 다른 단자와 관계한다. 이런 관계에서 어떤 자극이 단자에 주어지며 단자는 자신이 지닌 욕망의 힘을 통해 이 주어진 자극을 표상화한다. 즉 관념으로 변화시킨다.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능동적이며 따라서 더 완전한 단자가 된다. 즉 능동적 단자일수록 세계에 대한 표상은 더 분명해진다.
단자와 단자 사이에 이 관계가 있으므로 모나드는 각자 자기의 표상 능력에 따라 우주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 세계는 주관성의 세계다. 그 결과 유명한 정원의 비유가 나온다.
“단자의 본성은 사물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어떤 것도 단자가 사물의 선택된 일부의 모습만을 반영하도록 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이 모든 반영은 우주의 세부적인 사물들이 전체로서 관련되는 한 혼란스러운 반영일 뿐이다. … 단자는 지식의 대상에 관해 한계를 지니지 않으나 지식의 양상에 관해서는 한계를 지닌다.”(모나도로기, 명제 60)
“사물의 모든 부분은 식물로 가득 찬 정원과 같은 것으로 또는 고기로 가득 찬 연못과 같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모나도로기, 명제 67)
결정적으로 라이프니츠는 단자의 자기 관계와 단자의 타자 관계 사이의 대립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는 신이 조화롭게 만들었다는 데서 곧바로 모나드가 상호 관계를 지니고 서로 반영한다는 데로 나갔다. 라이프니츠에서 두 가지 길은 충돌한다. 단자가 고유한 질을 갖는다면, 이 세계는 신이 조화롭게 만든 세계다. 반면 단자가 서로 관계한다면, 그 세계는 주관적 세계니 서로 충돌하고 갈등할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주석에서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자에서 관념성은 다수성에 외면적으로 머무르는 형식이다. 관념성은 단자들에 내재하고 단자들의 본성을 표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단자의 태도는 한편으로 그 현존에 속하지 않는 조화이다. 즉 이 조화는 예정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단자의 현존은 타자 존재로 파악되지도 않고 관념성으로 파악되지도 않으며 다만 추상적[주관적] 다수성으로 규정된다.”(논리학 재판, GW21, 150)
6)
헤겔이 일자의 개념에서 고민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규정성이 있다는 것은 타자와 관계한다는 것과 무관할 수 없다. 단순히 자기 규정성이라면 완전히 자의적일 수밖에 없으니 규정성은 타자와 관계를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규정성이란 부정성이며 즉 타자에 대립해서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관계하는 일자에서 어떻게 타자와의 관계가 나올 수 있을까?
라이프니츠는 유감스럽게도 자기 규정성과 타자 관계라는 두 요소가 규정성을 위해 동시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업적이다. 하지만, 그는 그 연관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라이프니츠 덕분에 헤겔은 다행스럽게도 그 연관성만 밝히면 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곧 ‘일종의 존재’에서 ‘일자’로의 이행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종의 존재’나 ‘일자’는 동일한 것을 말한다. 다만 전자는 그것이 대자 존재의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말하며 이런 점에서 그것은 모나드처럼 단자이며 자기 관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동일한 것이 곧 일자다. 이 일자는 직접적인 것이며 그런 점에서 어떤 규정성을 지니고 있고 그런 한 타자에 대립하니, 타자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대립이 곧 그들의 관계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 일자로부터 곧바로 일자와 다자[多者]와의 관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런 이행을 위해서 헤겔이 만든 장치가 매개가 직접성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사실 앞에서도 계속 매개가 직접성으로 복귀했다. 생성이라는 매개를 거쳐 현존으로 복귀했으며, 현존과 타자의 대립이라는 매개를 거쳐 유한성, 즉 어떤 것으로 복귀했으며, 유한성과 무한성의 대립을 통해 즉 대자 존재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제 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 사이의 대립을 매개해서 일자로 복귀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지만, ‘매개가 직접성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사실 헤겔 논리학 전체를 지배하는 핵심 장치가 된다. 문제는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매개의 직접성으로의 복귀는 매개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직접성을 전제로 하여 출발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매개가 개념이 타자화하는 운동 정립하는 운동이라면, 매개의 복귀는 곧 ‘자기 내로의 복귀’이며 ‘근거로의 복귀’라는 말이다. 결과가 출발점이 되고 출발점은 그 결과라는 순환적 논리가 헤겔의 논리적 사유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비로소 이 매개가 직접성으로 복귀한다는 말이 이해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자 존재(예를 들어 소금의 미분적 힘)를 통해 일종의 존재가 생성하면서 동시에 본래 출발점인 일자(소금)로 되돌아온다. 본래 그 일자는 특정한 규정성을 지닌 것(예를 들어 소금)이니, 이를 통해 규정성이 출현한 것이다. 본래 출발점인 일자들의 관계를 일자의 공간(예를 들어 소금들이 관계하는 공간)이라 한다면, 대자 존재는 이 일자의 공간 내에서 활동하는 매개자인 셈이다.
7)
매개가 직접성으로 복귀한다는 것의 두 번째 의미는 생성하는 과정이다. 일자에서 대자 존재로 나가는 길은 분석과 추상의 길이다. 반면 이런 생성하는 길은 구체화의 길이며, 자기를 이원화하는 타자화의 길이다.
이런 타자화, 이원화의 길에서 일종의 존재에서 일자로의 이행을 생각해 보자. 이런 대자 존재 즉 자기 관계하는 것으로부터 다수의 소금이 나오는데, 이 생성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일자가 규정성을 갖는다면, 바로 그 때문에 일자는 다수의 일자와 관계하게 된다. 즉 하나의 일자가 나온다면,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다수의 일자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고유한 규정성을 가진 일자가 순수하게 이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규정성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금의 미분적 힘이 있다면 거기서 다수의 소금이 나오는 것은 불가피하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하나의 소금이 나올 수도 있고 아예 아무런 소금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분적 힘은 자기를 다수로 산출하는 힘을 가진 존재이니, 하나의 소금이 아니라 다수의 소금이 나오는 것은 항상 잠재적인 가능성이다.
‘존버’ 대 ‘난가’ [천 하룻밤 이야기]
‘존버’ 대 ‘난가’
2025년 5월 21일 소만(小滿):
비가 오고 모내기를 하는 절후 소만인데, 예전에는 논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생산도구의 발달로 논길에는 뛰엄뛰엄 모심기 기계들이 있다. 새참은 택배로 하는가? 잘 네모진 논들을 가로 세로 지르는 논길에는 오토바이가 지나가기도 한다.
*
까마득한 옛 이야기 속에는 신선(神仙)이 살았다고 하고, 그 하늘에서부터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는 환인(桓因)에서부터 맑고 상쾌한 아침의 햇살을 받는 나무들이 잘 자라는 곳에 터전을 잡은 단군(檀君)도 있었다. 이런 선도(仙道) 또는 샤먼의 이야기는 오래 즐겁고 평온하게 살아가려는 욕망(탐욕이 아니다)을 표현하였으리라. 그러다가 마을 공동체가 모여서 도시를 형성하고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체계화하면서, 제도를 전승하는 방식에서 입말의 소통을 넘어서 문자를 필요로 해서 중국의 문자를 받아들였고, 그러다가 불교라는 문화가 들어와 천년을 지내면서, 이 땅을 안양정토 또는 불국토를 만든다고 하면서, 불교는 백성들의 고통과 불안에 치유와 위로를 하는 방식으로 삼았다. 세계는 언제나 변전하였다. 토지 소유의 불평등을 해소하려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왔다고 여기는 변역(變易)은 삶의 태도를 바꾸었다. 차(茶)를 마시는 문화에서 누룽지의 숭늉을 마시는 문화로 이행으로는 불교에서 유교로 전향을 설명해 주지 못하지만, 학문의 변화와 삶의 양식의 변화가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맑스라면 생산도구의 변화와 이 도구를 전유(소유)하는 방식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토지를 절(사 寺)의 소유에서 왕조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선후(先後)든 중경(重輕)이든 유학을 토대로 하는 지배층의 담론으로 넘어갔다고 할 것이다.
유교의 전래에서 주자학 또는 신유학은 불교에서 공과 색의 선문답(변증법적 논변)에 대항하여, 선진유학에다가 태극이 무극이라는 담론으로부터, 음양(陰陽)과는 다르지만 이기(理氣)를 중심 논의로 전개하였다. 이런 이원론은 서양의 근세에서 영혼과 신체(정신과 물질)와 유비적으로 닮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담론을 생산하였다. 이런 담론의 대조 또는 유비는 하늘과 땅의 이원화를 대상화하여 다루는 방식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며, 둥글고 자전하는 지구 위에서 인간들이 산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그리고 인간은 지구상에서 자연에서 여러 종들 중의 하나의 종임을 알게 되었다. 점점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물자의 소통이 늘어나고, 서양의 선교사들이나 동양의 군자들 사이에서 소통으로 세계가 하나임이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런 소통의 초기, 17세기에 서양의 학자들이 놀란 것이 있다. 유일신 또는 신학이 없이도, 높은 도덕심과 국가체제를 형성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중국은 유일신이 없음에도 백성들이 훌륭한 덕성을 지신 도덕적 삶을 살아가며, 지식인들이 체제 유지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신학적 사유에서 타종교와 문화를 알지도 못하면서 비하시키는 경향은 오만과 치졸함이 섞여있었다. 동양에서는 자연에 대해 격물치지(格物致知)한다는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신 앞에서 평등과 달리, 동양에서 하늘아래 평천하를 이루기 위해 군자들과 학식 있는 선비들은 사적 탐욕을 벗어나 공화(화이부동)를 실행하려 한다는 점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서양은 기술발달과 도구의 무기화로, 타 지역의 지배를 통한 부의 축적을 신의 착한 부름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들의 탐욕과 오만은 지구상에서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며 식민지를 확장하였다. 수탈과 약탈이 신의 부름일까? 지금도 그들이 행한 전쟁은 그들만의 신의 축복이겠는가? 동양의 도덕과 지식의 습득시기에 서양이 자연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탐욕(욕망이 아니다)의 서양인들은 식민지지배를 보다 확장하고 견고하게 하기 위해 교묘한 조합을 시도하였다. 이런 패거리의 내밀한 결탁(음모)은 19세기 말에 종교의 교리, 국가의 폭력, 지식의 독단, 이 셋을 결합하여 세 패거리(카르텔)의 야합을 이루었다. 이들이 행한 야합 또는 음모에는 벩송이 말하는 선전제미해결(악순환)의 오류를 감추고 있었다. 이 은폐에는 절대자 또는 완전성에 이르는 변증법이 있다고 선전했었다. 이 변증법에는 백성과 인민이 없다. 이런 전도된 사상을 뒤엎어서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독재)를 변증법으로 설명한 이는 맑스였다.
이들은 식민지 약탈과 강압은 기술 문명(문화가 아니다)을 전유하면서 도구를 무기화하였다. 패거리들이 무기를 가지고 식민지에 협박과 공포를 심으며, 패거리들의 재화의 획득을 혈안이 되어 욕망의 충족이라 가르치지만, 욕망이 아니나 탐욕과 도적질의 미화였다. 19세기말 제국주의와 20세기 후반의 제국은 국제질서라는 이름으로 전쟁의 위협으로 여전히 도적질을 실행했었다. 물론 이런 약탈에 대해 저항과 항쟁을 통한 세계사적 혁명은 20세기 전반에 소련과 중국을 낳았다.
그럼에도 패거리들은 지배의 논리를 버리지 않았고, 더욱 견고한 제국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자신들의 삿된(메샹, mechant) 생각을 은폐하고, – 미군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주둔하면서 신식민지에게 비용을 떠넘기는 수법은 여전하다 – 기술문명의 이식에 서투른(mauvais) 민중들에게 죄를 덮어씌우려는 방식으로, 식민지에 독재자를 심으며, 잉여 착취와 자원 수탈을 자행했다. 마치 중세의 마남 사냥을 하듯이, 그들은 식민지 민중을 억압하면서 이에 대해 저항과 항거를, 거꾸로 마치 항쟁자를 음모자처럼 말하는 것도 이 패거리들이었다. 이들은 반역이니 역적이니 하면서, 악순환의 잘못을 민중에게 넘겼다. 루소의 말대로 인민은 선량하게 태어났으나 사회와 제도의 감옥에서 살게 만들었다고 하듯이, 태어나면서 제국의 수탈을 당해야만 했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제국의 세계화는 두 가지 점에서 그들의 방식대로 이루어지 않았다. 하나는 생명계에서 유전자와 그 변이들은 과학의 발달로 질병 없고 고통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 같았지만 지구상에 질병과 비참은 여전하다. 다른 하나는 기술의 무기화를 통해 제국이 주도권을 가질 것만 같았지만 규소의 시대에 누리소통은 지배와 피지배의 방식을 바꾸어 문화의 다양성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과거가 현재를 살리거나, 죽은 자가 산자를 영향을 주는 것을 넘어서, 기나긴 자기 터전에서 생명과 영혼의 생성 과정을 잊는 자 또는 무시하는 자는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잃고서 세계와 합일하는 것이 유일신앙자들의 망상이다. 자기를 잃지 않고서 세계영혼 속에서 자아의 영혼을 ‘존버’하면서 함양하는 것이 루소가 말하는 자기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고 계약을 맺어 합의를 통한 일반의지로 실행하는 것이다. 일반의지 속에 개별의지는 자기를 잊지 않으면서 일반의지를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규소의 시대가 다양체의 흐름으로 이를 증거하고 있다.
*
광복 후에 독립운동가들의 집안은 피폐하고, 일제에 호의호식하던 일제 부역자(부일자)들이 미군이 들어오면서, 미국의 식민지를 자처하는 숭미자로 변하였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치와 자주를 실행하려는 개혁가들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를 만들었으나, 매국적이고 매판적으로 사적이익만을 챙기는 자들이 반민특위를 무산시켰다. 이번 계엄세력에게는 특별조사법을 만들어 꼭 신상필벌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런 자들이 80여년동안 상층을 구성하여 대중을 지배하였으나, 대중은 스스로 자치와 자주를 이루기에는 교육과 학습, 의식화의 과정이 거쳐왔다. 그 중에서도 우리 입말로 소통하고 우리 문자로 전승하는데 엄청난 노력과 내공을 쌓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저항과 항거, 항쟁과 광장시위를 하면서. 지금도 부일자와 숭미자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으리라.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로, “범이 없는 골에 여우들이 설친다”고 하는 할배들은 일제 잔재가 나라를 말아먹는다고 걱정했다. 할배들은 일제의 부역자들이 이 나라를 일본에게 넘겨주듯이 숭미자들이 미국으로 넘겨주는 것을 걱정했다. 그 과정에서 범들의 후예는 몰락하여 개장수와 각설이가 되고, 제국주의 좀비가 제국의 주구(走狗)가 되어, 범 없는 골이 여우가 왕질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이 ‘왕’자를 들고 나온 것은 그 패거리(음모자)들의 일부가 표면으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공화국을 만들려는 대중과 인민의 저항은 수면 아래로 잠시 감춰져 있다가도 이어지면서, 적들의 심장을 향한 항쟁은 불쑥불쑥 솟아나왔다. 이 요상한 세력들은, 인민의 저항을 반체제, 반민주로라고 지 멋대로 규정하고, 마남사냥과 반국가주의로 몰아붙이면서, 자신들의 상층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전승의 이야기에서 “곰과 범”의 이야기에서, 왜 우리의 민담과 설화 속에서 범이 남아있는데 비해, 곰을 이야기는 사라졌는가. 문화의 전승은 백성의 입말에서 이어져 왔을 것이고,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범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1894 동학혁명으로, 그리고 1895년부터 공공연하게 우리 입말이 문자로 등장하였다. 마치 범이 독립운동을 하려 만주로 떠나고 난 자리에 여우와 원숭이가 설치듯이, 일제에서 조선어조차 말할 수 없는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광복후 입말과 문자화는 그 당시에는 지식인의 것이었으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대중화를 이어지면서, 공화국의 헌법에서 지적하듯이 국민 주권자이며, 인민주권 사상은 점점 대중화를 되어갔다. 1987년 이래 입말의 문자화와 가로쓰기가 전개되었고, 인민은 스스로 자치와 자주의 길을 찾아가면서, 인민이 존나 버티면서 기본심급이면서 최종심금이라고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법원도 최종판단의 결재를 인민에게 받아야 한다. 인민의 권리로 이명박과 박근혜를 감옥에 보내었고, 탈옥 중인 윤석열도 곧 감옥으로 보낼 것이다.
“지구는 둥글다”에서, 원주를 구성하는 모든 점들은 그 점이 하나하나가 중심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21세기에는 그 점이 트래픽(접합)의 다양체이다. 한반도가 다른 어느 터전들과 마찬가지로 고유성이 있고, 자치와 자주를 넘어서 자율성과 자발성이 분출되었다. 입말과 그 문자의 독특성은 새로운 문화의 전승과 확산으로 이어졌다. 사회의 도덕성은 인민의 것이며, 사회의 제도화가 인민의 것이라는 것라고 문자화하면서 제헌 헌법이래로 공화정을 추구해 왔었다. 그럼에도 매국적이고 제국의 주구의 지배에서는 공화가 아니었다.
정당정치는 상층은 자기들의 잘못(mal) 또는 삿된(méchant) 것을 감추고자하였고, 이를 드러내고 저항하는 세력에게 반국가, 반체제 또는 빨갱이로 몰았다. 제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을 보며 나무라는 방식은, 세 패거리들으 좀비들이 실행했던 방식을 그대로 이 터전의 인민들에게 강제하고 위협하였다. 군비, 검비, 법비, 재비 등이 이참에 드러났다. 국민은 굴복하지 않았고 20세기 후반 내내 저항과 항쟁이 있었듯이, 21세기에 촛불시위와 응원봉 빛축제와 키세스 시위는 새로운 문화의 창달이었다. 이런 운동과 분출은 한류라는 문화의 세계화에서, 스포츠에서도, 대중음악에서도, 영화에서도, 게다가 문학에서도 전 세계 대중들에게 감응과 공감을 불러왔다. 범이 내려왔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터전에서 누리소통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순간을 열었다.
*
21세기에 첫 사반세기에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의 터전에서 삶의 양식과 문화가 갑자기 세계 속에 있은 것이 아니라, 별종, 덕후, 존버들이 스토아 표현으로 노력(포노스) 내공(토노스)을 거쳐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출이 된 것은 단지 5년 사이이다.
하나는 코로나로 전 세계가 우왕좌왕하던 시기에 우리 문제인 정부는 새로운 방식으로 역병에 대처하여 우리나라가 자연스럽게 세계사에서 주목을 받았다. 역병은 공간의 구별이 아니라, 지구가 공전하고 자전 하듯이, 공간자체가 운동하고 흐른다는 것을 알게 했다. 지구가 움직인다고 해도, 살아가는 보통사람은 이 터전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여기며 습관적으로 산다. 그 습관의 방식에 젖어서, 어쩌면 세 패거리들이 대중 의식을 포획하고 포로로 삼고서, 노예 상태로 만드는 세뇌의 방식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를 대중들도 깨닫기 시작했다. 혼밥, 혼술, 혼일, 혼발신과 혼소통 등은 산다는 것이, 한 리좀이 다른 리좀들과 여러 방식으로 접속하는 가운데, 덩어리(트래픽)를 만들고 살아간다는 것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 리좀의 덩어리가 운동하고 있고, 기나긴 과거의 노력을 통한 ‘존버’의 특성이다. .
다른 하나는 여러 번 말했지만 철의 시대를 지나 규소의 시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것도 코로나 2년에 혼밥 혼술, 혼일, 혼소통(일인 유투버) 들로 누리소통 공간은 각각이 지구상의 한 점이 되었다. 이 점들 각각은 다방향으로 확장되고, 또한 접속의 덩어리는 리좀 덩어리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이 도구로서 소통 방식에서, 방송과 신문과 다른 방식으로 쌍방이 정보와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와 제국은 정보 또는 명령의 전달이라는 일방통행을 넘어서, 선전제의 해결 없이 담론과 판단을 강제하면서 지배하려 하였다. 그 20세기가 지나가고 21세기에 다양체의 활동은 제국의 통제가 바랐던 대로 일방통행이 될 수 없었다. 일방통행인 양식이 광기라는 것을 알아챈 것도 한 몫을 하였다. 제국이 광기라는 것이다.
서양 사상사에서 인간 류(인류)와 인간 종(인종)에 의한 구별은 논리학의 류와 종의 방식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 개인 또는 개체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뭔가 이탈하고 저항하고 반항하는 것으로 여겼고, 심지어는 이탈을 도착자로, 저항을 분열자(별종들)로, 항쟁을 악마 또는 빨갱이로 몰아가면, 세 패거리는 절대성과 완전성이라는 요상한 용어를 들먹이며 민중 또는 인민을 배제하거나, 포로를 만들지 못하면 제거하려 하고, 포섭되지 않은 자들을 개돼지 취급하기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패거리의 습관적 사고에는 탐만치가 가득 차 있으면서, 습관의 조건반사처럼 민중을 세뇌시켜 요상한 사건들을 만들었다. ‘국민의 힘’에서 서울의 강남구에 태영호를 내세우든 김정은을 내세우든 극우 꼴꽁들은 묻지마 투표를 하며 지지하였다. 이런 패거리 사고의 세뇌가 영남에서는 부지깽이를 내세우든 똥작대기를 꽂든 지지한다고 한다. 모든 사물이 ‘부타야!’라는 선승에게 부지깽이와 똥작대기도 부처이지라고 하듯이, 선거에서 우리 편에 투표하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또는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같은 단어 부지깽이라는 용어가 선승에게는 노력과 각성의 지표가 되는가 하면, 강남과 영남에서 하나님과 같은 신주가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개선하고 개혁하여 통일로 나가는 운동은 여전히 있다. 요즘은 영세중립국으로 나가자고 하기도 한다. 생명체의 소통 방식은 아직도 해결해야할 부분이, 코로나 해결보다 무한정하게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디지털의 세계는 누리소통의 확장이 기하급수적을 넘어서 불교의 숫자처럼 4제곱승으로 비약하고 있다. – 3제곱은 공간인데 4제곱승으로 확장은 무엇일까? 어쩌면 누리소통의 공간이 4제곱승일 것이다. – 이 비약의 미래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신선만이, 붓타만이, 신만이 안다고 하면, 그것은 부정형(4승의 형상은 아무도 모른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누리 소통의 확장과 다양체의 흐름을 아무도 모르는 차원의 무한의 다양체가 펼쳐지고 있다. 이런 세계와 문화의 창달에서 입말과 문자(이미지 포함)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살아가는 방식은 젊은이의 사유와 놀이(게임)에 달려있다. 이 젊은이는 “난가”라고 하며 기다는 것이 아니라, 노력(포노스)와 내공(토노스)의 과정을 겪으면서 잘못(mal)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투름(mauvais)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학습하면서 벗과 즐거이 유쾌하게 사는 방법을 찾는 존버(덕후, 별종)를 만날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언제나 삶이 먼저이고 그 다음 사유하는 것이다.
코로나와 같은 생명체의 변이와 확장 속에서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제국이 없는 세계 속에서 또는 세 패거리가 없는 터전에서 사유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젊은이는 오래 깊이 사유할 수 밖에 없다. 열여덟에서 서른여덞 정도까지. 우리의 기나긴 과정에서 서투르고 착오와 오류도 있었지만, 우리가 창안해낸 입말과 문자화가 있으며, 누리소통을 통하여 문화의 창달로 널리 인류뿐만이 아니라 생명계도 전지구도 사유할 수 있는 길을 넓혀간다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 일까. 이런 임무에서 또한 우리 터전으로부터 지작할 수 있는 우리 입말과 우리 문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상쾌하고 통쾌한 일을 이룰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라, 불평등 해소와 통일은 여러분의 덕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별종들이 제국주의와 제국에 저항하고 항쟁하였듯이, 존버와 덕후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통일은 도구의 무기화에서가 아니라, 도구를 널리 이롭게 사용하는 누리 소통에서 다양체의 발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 도구가 인민들 각각의 손바닥에 놓여있다, 쳇지피티의 문자화나 인공지능(AI)의 지식화와 달리 덕후들과 존버들의 창안과 생성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생명학과 디지털의 발전은 철의 시대의 2천5백년의 과정을 거의 한 세기만에 이룰 것이라 한다. 생명과학의 정보축적 만큼이나 디지털 사용의 확장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우리의 자발성에 의한 입말과 문자화, 남북의 소통은 곧 이어질 것이다.
(4:11, 58PMA) (5:24, 58P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들뢰즈에서 양자역학까지, 사변적 물리학을 위하여’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안호성 옮김, 『자연의 개념』(갈무리, 2025) 서평|글: 이수영(미술작가,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철학자의 서재]
들뢰즈에서 양자역학까지, 사변적 물리학을 위하여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안호성 옮김, 『자연의 개념』, 갈무리, 2025
이수영(미술작가,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해가 붉게 서산에 걸리면 태양의 광선이 대기권을 통과하는 경로가 길어지면서 파장의 길이가 길어지고 각도가 커진다. 태양광선의 파동 630~750nm은 물리적 객체이지만 노을의 붉은빛도 객체일까? 화이트헤드는 ‘붉은색’이라는 감각이야말로 우선하는 객체라고 말한다. 붉은색이라는 감각-객체가 아니라면 태양의 가시광선이라는 물리적 객체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객체 ‘붉은색’은 석양이 지는 복합적 관계들 속에서 우리의 감각 지각이 붙잡은 관계항이다. 그렇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붉은색’이 자연의 존재자이기 때문이지 색깔이라는 것이 단지 인간 정신 안의 표상이거나 태양광선의 특정 파동에 귀속된 특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사고가 아닌 감각이 자연과학의 기초여야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 정신에 대해 자립적인 닫힌 체계이다. 화이트헤드는 메이야수가 상관주의라고 부른, 즉 인간정신에 드리운 자연과 인간 바깥의 자연을 분리하는 이원론에 맞선다.
화이트헤드는 세계를 끊임없이 서로 관계하며 변화하는 사건들의 총합으로 보았다. ‘사건’이라면 교통사고 같은 것을 떠올리지만, 화이트헤드에게 광화문 사거리 이순신장군 동상 역시 사건이다. 이순신장군 동상은, 동상의 양자장이 요동치고 전자기장이 저항하는 등 여러 흐름들이 광화문 이순신동상이라는 상황으로 회집되어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광화문 이순신동상을 감각적으로 특정할 수 있다. 이렇게 화이트헤드의 세계는 존재자들이 세계를 경험하는 매순간 현실은 생성 소멸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 샤비로는 『사물들의 우주』에서 화이트헤드를 들뢰즈의 생성과 흐름의 철학과 연결시킨다. 또한 화이트헤드는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이나 캐런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 등의 신유물론의 계보학적 선행연구로 떠오르기도 한다. 들뢰즈, 신유물론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공통점이라면 세계를 자기동일성에 폐쇄된 정태적인 실체나 사물들이 아닌 역동하는 과정으로 본다는 점일 것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존재를 존재이게 만들어 주는 작용인인 보편자는 창조성, 생성이다. 그는 ‘임페투스’라는 장(field) 개념을 도입하는데, 특정된 사건을 회집된 것으로 보는 관점은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이론을 떠오르게도 한다.
화이트헤드가 세계를 사건들이 요동치며 생성하는 과정으로 바라보지만, 수학자이기도 한 화이트헤드는 추이하는 사건을 미분해 들어가는 추론으로 이상적 극한을 추상화한다. 그리고 그 추상적 개념들로 지각 속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자연을 인식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사건들의 관계를 추상하는 것은 상대적이다. 요동치는 사건들을 경험하는 입각점에 따라 사건은 다르게 특정될 수 있다. ‘지각하는 사건’이라는 그의 개념은 지각하는 현재를 입각점으로 사건을 어떤 고유한 방식으로 식별하는 것이다. 관할하는 현재의 상황이 특정한 구조로서 사건을 파악하는데 포함되는 것이다.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관찰 행위가 관측이라는 장에 포함되어 관측결과에 영향을 주는 비결정성이라는 관찰자효과를 떠올리게 한다. 화이트헤드는 ‘파악(prehension)’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사건은 실재적 계기(actual occasion)의 한 존재와 다른 존재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다른 객체로 파악될 수 있는데, 객체란 이렇게 흐르는 사건 속에서 특정하게 상황화된 회집체이다. 들뢰즈라면 욕망에 따라 접속하여 전혀 다른 기계를 만들어 낸다고 했을 것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에 아인슈타인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화이트헤드는 아인슈타인의 시공간개념과 빛의 절대속도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에게 시공간은 사물들 간의 질량에 의해 구성되는 중력장으로 물리적 실체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에게 시공간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의 상호관계를 추상하는 수학적 개념이었다. 아인슈타인에게 빛의 속도는 불변하는 절대속도이지만 화이트헤드에게는 빛의 속도 역시 사건들의 관계의 추상이어야 했다. 화이트헤드에게 존재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사건들이지 자기동일성을 가진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었다.
화이트헤드는 우리로부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곳-예를 들어본다면 수억 광년 저편의 천체-에서 사건들이 상황화 된다면 빅토리아 여왕의 탄생과도 공-현재하면서 2025년 우리와도 공-현재하는 사건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설명은 마치 끈이론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의 블록우주이론하고 같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른다는 선형적 시간이론과 달리 덩어리로 이미 존재하는 시간-실재에 어떻게 진입하느냐, 어떻게 상황화 되느냐에 따라 달리 현재화 된다는 이론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하는 화이트헤드의 열린 사건들의 세계와 이미 닫힌 우주블록이론의 시간은 많이 다르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개념』에서 과학의 목적은 “다양한 객체가 상황화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다양한 사건 속에서 그 객체들의 나타남을 지배하는 여러 법칙을 추적하는 것(245)”이라고 밝힌다. 들뢰즈에서 양자역학까지 화이트헤드의 책 『자연의 개념』이 주는 영감은 생생하고 매혹적이다. 물질이 뿜어내는 생기, 감각에 대한 신뢰와 집중, 이접(disjunctive)하는 다자(多子)들의 세계, 그리고 이 요동치는 카오스의 세계를 끈질기게 미분하여 극한으로 추상해내는 정합성. 기후위기와 디지털 시대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다양한 실천에 소환되고 있는 이유를 『자연의 개념』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