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26- 감각적 성질과 대타 존재[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6- 감각적 성질과 대타 존재
1)
지난 글에서 헤겔이 존재론 2장에서 전개한 현존 개념을 살펴보았다. 현존은 가장 직접적으로 인식된 감각적 확신의 세계다. 이 세계는 가장 직접적이기에 가장 완전한 진리의 세계이며 가장 풍요로운 세계로 간주되어 왔다. 비트겐슈타인이 원초적 명제로 보여주려는 세계, 아도르노가 미메시스를 통해 그려낸 세계가 바로 이 세계다.
그러나 반성적 사유를 무기로 삼고 있는 헤겔이 보기에 이 세계는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 존재의 세계다. 즉 플라톤이 말한 토 헤테론의 세계다. 여기서 어떤 규정은 잠시도 멈춤 없이 다른 규정으로 전환하니, 간단히 말해 명멸하는 세계다. 이 세계는 아마도 우리가 악몽 속에서 만나는 세계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가장 아름다운 직접 진리의 세계가 다른 한편으로 악몽과 같은 명멸하는 세계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헤겔의 반성적 사유가 지닌 특징이다. 어떤 것은 항상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2)
이제 본격적으로 이 현존의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전개해 나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데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것이 있다. 1권 존재론 2장 현존 장은 헤겔이 재판에서 초판의 내용을 엄청나게 수정해, 언뜻 보면 헤겔이 초판과 재판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간단하게 초판과 재판의 목차를 비교해 보자.
초판 현존 |
재판 현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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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현존 그 자체 |
현존 그 자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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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현존 일반 |
현존 일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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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실재성 |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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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타자 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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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대타 존재와 즉자 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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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실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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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어떤 것 |
어떤 것 |
|
B |
규정성 |
유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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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한계 |
어떤 것과 다른 것 |
|
2 |
규정성 |
특정성 상태 한계 |
|
a |
규정 |
||
b |
상태 |
||
c |
질 |
||
3 |
변화 |
유한성 |
|
a |
상태의 변화 |
직접적 유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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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당위와 한계 |
한계와 당위 |
|
c |
부정 |
유한의 무한으로 이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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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무한성 |
무한성 |
|
1 |
유한성과 무한성 |
유한성과 무한성 |
|
2 |
유한과 무한의 상호작용 |
유한과 무한의 상호작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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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무한의 자기 내 복귀 |
긍정적 직접성 |
위의 표면 보면 도저히 초판과 재판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초판과 재판 사이의 상응하는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초판에서 A절에서 다룬 ‘현존과 타자 존재’, ‘대타 존재와 그 자체[즉자] 존재’가 재판에서는 B절 1항에서 ‘어떤 것과 다른 것’이라는 제목 속에 함께 다루어진다.
초판에서 B절에서 다룬 ‘규정과 상태’, ‘내재 존재와 한계’는 재판에서도 B절 2항에서 다루어진다. 제목은 ‘규정, 상태, 한계’다. B절 3항은 초판이나 재판에서 모두 ‘당위와 한계[제한]’을 다루고 있어서 공통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헤겔은 초판에서 산만하게 전개한 내용을 재판에서 한 데로 집중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초판에서는 B절에서 ‘내재 존재와 한계’가 ‘규정과 상태’보다 앞에 나온다. 반면 재판에서는 ‘내재 존재와 한계’가 ‘규정과 상태’ 다음에 나온다.
아마 헤겔이 재판에서 결정적으로 수정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우리가 헤겔이 수정한 것이 옳다고 받아들인다면, 재판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서 현존 장을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헤겔이 논리학에서 각 개념은 추상적이고 단순한 것에서 점차 구체적이고 복잡한 것으로 나가니, 그리고 실제로 ‘규정’이라는 개념보다는 ‘내재 존재’라는 개념이 더 복잡하니, 재판의 순서가 헤겔 논리학의 개념에 비추어서도 정당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재판의 순서에 따라서 헤겔의 현존 장을 설명해 나가고자 한다.
3)
재판의 전개 방식에 따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A 절 |
a. 현존[질]과 타자 존재, 양자의 통일로서 대타 존재 |
b.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 양자의 통일로서 실재성[Realitaet: 어떤 것etwas] 또는 규정성[Bestimmthe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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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절 |
c. 규정[Bestimmung]과 상태[Beschaffenheit], 양자의 통일로서 한계[Grenze] |
d. 내재 존재[In Sich Sein]와 한계, 양자의 통일로서 제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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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당위와 제한[Schranke], 양자의 통일로서 유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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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절 |
f. 무한성과 유한성, 양자의 통일로서 대자 존재 |
이상과 같이 정리하면, 어떤 리듬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대립하는 X항과 -X항이 나타나서 양자가 통일되면, 그 통일된 Y항이 새로운 대립에서 -Y가 되고 그것에 대립하는 X항이 다시 출현하는 식이다.
과연 이런 전개 방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런 식의 리듬만 보면 마치 신비한 변증법을 보는 듯하니, 마치 신이 자기를 전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이라면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다양한 단계를 거쳐나갈 필요가 있었을까? 그저 단순하게 최종적인 결과인 종적 물질을 산출하면 되지 않았을까?
더구나 당혹스러운 것은 헤겔이 현존 장을 전개하면서 구별한 개념들 즉 질, 실재성, 규정성, 규정, 내재 존재, 당위, 유한성 등 어떻게 보면 유사한 개념들이 어떤 구별이 있는지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더구나 재판의 경우 헤겔은 이 개념들을 순서에 따라 사용하지만, 초판의 경우 이 개념들이 마구 뒤섞여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목차에서 보듯 초판에서 질이라는 개념은 세 번이나 반복된다.
더구나 ‘타자 존재’나 ‘대타 존재’, ‘규정성’과 ‘규정’은 단어도 유사하고 ‘실재성’, ‘규정성’, ‘유한성’이나 ‘한계’와 ‘제한’은 모두 유사한 개념이고 ‘그 자체 존재’나 ‘내재 존재’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런 혼란을 뚫고 헤겔의 현존 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필요하다. 이미 앞에서 필자는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의 전개 과정과 논리학에서 개념의 전개 과정이 평행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앞의 글에서 헤겔이 논리학에서 현존이라는 개념을 전개하면서 정신현상학의 감각적 확신에 나오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이 전개되는 과정은 우리의 인식 경험이 축적되면서 개별자에서 일반자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존 장에서 위와 같은 논리적 개념이 전개되는 것도 그런 경험의 발전에 비추어 본다면, 이해되지 않을까? 즉 논리적 개념이 위와 같이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무슨 신비한 조화가 아니라, 경험의 발전 정도에 따라서 일어나는 전환이라는 것이다.
4)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 장을 보면, 최초의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규정[질: Qualitaet]은 곧 이런저런 대상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것이라는 사실 밝혀진다. 예를 들어 감각적 규정인 빨강은 처음에는 가장 개별적인 규정이었으나, 사과 양귀비 입술 등에 공통으로 속한다. 이 경우 이제 질이라고 하기보다는 성질[Eigenschaft]이라고 말해진다.
마찬가지로 논리학에서 현존, 즉 단 일 회만, 한순간 나타나는 개별적인 질은 나타났다가는 곧 사라지니, 붙잡을 도리가 없다. 명멸하는 이 세계가 앞에서 말한 현존과 타자 존재의 세계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 경험이 조금 발전하면, 이제 일반적 성질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빨강’이나 ‘단맛’ 등의 감각적 성질이다.
이 감각적 성질은 반성적 사유에서 볼 때 이미 다른 감각적 성질과 구별된다. 현존의 질 역시 타자와 구별되지만, 여기서는 모든 것이 일회적이니, 대체 서로 구별되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일회적 현존 세계는 무차별하다고 한다.
“일회적이니 구별될 수 없다”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구별이란 항상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적 사유를 통해서만 일어난다. 오직 차이만 있다면 그 차이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현존의 세계가 무차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감각적 성질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이미 일정한 사유의 틀을 전제로 한다. 빨강은 파랑과 구별되는 차이를 지닌다. 여기서 빨강이나 파랑은 색깔이라는 틀 안에서 차이이고, 빨강은 파랑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빨강이고 그것은 파랑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점은 이미 구조주의를 통해 널리 확산한 주장이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처럼 다른 것과 구별된 것으로서 어떤 것 즉 반성적인 방식으로 규정된 것이 헤겔이 말하는 대타 존재다.
“현존을 비존재를 자체 내에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면 본질적으로 규정된 존재, 부정된 존재 즉 타자이다. 그러나 현존은 부정당하는 가운데서도 동시에 자기를 유지하니, 이런 것을 다만 대타 존재라 한다.”(논리학, 1판, GW12, 62)
다만 부정당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타자 존재다. 그러나 부정당하면서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기에 대타 존재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별되는 가운데서도 일반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5)
이 감각적 성질은 일반적이므로 헤겔은 이것이 ‘그 자체 존재’를 갖는다고 한다. 즉 그것은 “타자에 의해 부정당하는 가운데서도 자기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부정당하는 측면만 보면 대타 존재다. 그러나 대타 존재는 그 속에서도 자기를 유지하는 일반성을 갖는데, 이 일반성이 곧 대타 존재의 이면인 그 자체 존재다.
“현존은 그 자신의 비현존 속에서조차 자기를 유지하니, 곧 존재다. 그러나 현존은 존재 일반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의 비현존과 대립한 상태에 있으니 타자에 대한 자기의 관계와는 대립하는 자기 관계로서 존재이며 자기의 부등성에 대립하는 자기 동등성으로서의 존재이다.”(논리학, 1판, GW21, 62)
동등성과 부등성, 타자와 대립하는 관계와 자기와 동일한 관계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적일 때 그것이 바로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다.
여기서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가 서로 구별되는 성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성질이 그 자체 존재이면서 동시에 대타 존재다. 대타 존재가 없으면 그 자체 존재가 될 수도 없고, 그 자체 존재가 없으면 대타 존재가 될 수도 없다.
헤겔에 따르면 그 자체 존재는 타자 존재에 대립한다. 그러나 그 자체 존재는 “비존재마저도 그 자체에서 간직하니 왜냐하면 그 자체 존재 자체는 곧 대타 존재의 비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또한 대타 존재는 타자 존재에 대해 있는 것이며, 이 대타 존재는 “오직 그 자체 존재를 지시하는 비현존이니 이것은 마치 역으로 그 자체 존재가 대타 존재를 지시하는 것과 같다.”(논리학, 1판, GW21, 62)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가 동일한 것의 양면이라는 주장은 재판에서도 여전히 반복된다.
“두 계기는 동일한 것 즉 어떤 것의 규정이다. 어떤 것은 대타 존재로부터 벗어나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한에서 그 자체적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하나의 규정 또는 상황을 그 자체에서 가지니 이 상황이 그 자체에서 외적인 것 즉 대타 존재인 한에서 그렇다.”(논리학, 2판, GW21, 108)
“어떤 것은 그 자체 존재인 것과 동일한 것을 또한 자신의 표면에서 가지며 거꾸로 대타적인 것 역시 그 자체에서 가진다. 어떤 것은 두 계기의 동일성이며 양자는 그 속에서 불가분리적이라는 규정에 따라서 볼 때 이것이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의 동일성이다.”(논리학, 2판, GW21, 108)
6)
헤겔은 양자의 통일을 실재성이다. 이런 것이 감각적 성질이다. 이런 감각적 성질 즉 대타 존재와 그 자체 존재의 통일인 실재성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사유와 언어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이전 현존의 세계는 사유할 수도 언어화할 수도 없는 세계였다. 그러나 감각적 성질은 일반적인 것이니 언어로 규정되고, 사유될 수 있다. 이것은 언어적으로 표현된다면, 질적 개별 명제로 표현된다. 즉 ‘이것은 빨강이다’라는 명제다.
하나의 실재성이 있다는 것은 반성적 사유에서는 그와 다른 실재성이 있다는 말이 되고, 그러면 둘 이상의 실재성이 서로 관계하면서 어떤 것이 된다. 어떤 것[etwas]이 등장하면서 논리적 개념은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라는 개념 쌍은 ‘규정과 상태’라는 개념 쌍으로 변화한다. 이런 변화가 있으려면 우리의 인식 경험이 감각을 넘어 지각으로 발전해야 한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3회|5. 인문학 수업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3회
5. 인문학 수업 (1)
암자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방학도 끝나가기 때문에 나는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랫동안 수염을 깍지 않아서 턱수염이 많이 자랐다. 산에서 있다 보니 다소 거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간에서 다소 달라진 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로 복귀하자마자 2학기 등록을 마치고 수강 신청할 때 나는 법대 과목 보다는 주로 문과대와 신과대 과목으로 수강표를 짰다. 이제 심적으로도 법대와는 완전히 결별했다. 문과대에서는 영문과의 O 교수의 햄릿 강의를 신청했고, 사학과의 K 교수의 농업 경제사 강의도 신청을 했다. 사회학과에는 당시 새로 부임한 J 교수 수업을 신청했다. J 교수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했고, 종교 사회학자로서 미국 대학 내 지명도가 높았다. 철학과 과목도 하나 신청했다. 철학과에서는 P 교수가 안식년이기 때문에 이화여대의 J 교수가 대신 강의하는 인식론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신과대의 유명한 H 교수 강의는 그 이후로도 한 3학기 정도 들을 정도로 열심히 수강했다. 외부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H 교수는 Y대가 자랑하는 천재였다. H 교수는 원래 교회사 전공이지만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사고와 복잡한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도식화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항상 만면에 웃음기가 돌면서 거침없는 입담으로 강의하던 H 교수의 수업을 제대로 이해는 못했어도 지적으로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아했다.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을 때는 참으로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정법대 4년을 다니면서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유일하게 정치학과의 L 교수 강의를 들을 때 한 번 경험했을 뿐이다. 긴 머리를 뒤로 넘기는 오드리 햅번 흉내를 내면서 “권력은 도취적이다.”(Power is intoxical, Acton경)이라고 외치던 L 교수의 정치학 강의가 그나마 나의 지적 욕구를 채워 주었을 뿐이다. 그 당시 법대 교수들은 각기 그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던 교수들이었지만 내가 워낙 법대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반면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행정관으로 바뀐 낡은 문과대 건물은 대부분 소강의실로 이루어져 있다. 기껏해야 열 댓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덕분에 선생과 학생들 간의 공간적 거리가 가깝고, 학생들 상호 간에도 유대가 적지 않았다. 그 공간에는 대학의 낭만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좋은 인문적 공간을 행정 공간으로 바꾸어 버린 인간들이 지금 대학을 운영하고 있으니 대학이 기업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문과대의 유명 교수들의 강의를 들었다. 앞서 언급한 사학과의 K 교수는 선비풍의 조용한 용모와 다르게 강의는 대단히 열정적으로 했다. 조선에도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유물사관에 입각해 설명하던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나에게는 K 교수가 학생들의 수많은 질문에 대해 일일이 답변해주는 친절한 면모도 인상적이었다. 국문과에서는 당시 강사로 출강하던 『오발탄』의 작가 이범선이 ‘창작론’을 강의했다. 당시 나는 창작에 내가 전혀 소질이 없다고 생각해서 중도에 포기했는데 두고두고 후회했다. 사회학과에 새로 부임한 J 교수의 수업도 열심히 들었다. 그는 1973년에 출간된 미국 사회학자 다니엘 벨의 The Coming of Post-Industrial Society 1973 을 교재로 삼아 강의했다. 지금은 다니엘 벨의 이론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지지만 당시 한국은 산업화 단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단계에서 벌어지는 독재와 자유, 인권과 같은 가치들을 둘러싸고 갈등이 첨예한 사회였다. 특히 1980년도에 일어난 광주사태는 많은 대학생들에게 트라우마처럼 작용했다. 반면 테크놀로지의 환상을 자극하는 후기 산업 사회 이론은 우리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아서 수업 시간 내내 그 선생하고 설전을 많이 벌였다. 돌이켜 보면 미국에서도 지명도가 높은 대학자에게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까불었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그 당시 나를 위시한 학부생들의 문제의식은 대단했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은 산업 사회에서 후기 산업 사회로 넘어가는 사회 발전론을 설명하고, 지식과 기술이 후기 산업 사회의 계급 구조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기술했다. 더 나아가서 이런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사회학적 개념과 사회 계획에 관심을 가지고, 궁극에는 누가 후기 산업 사회를 지배할 것인가라는, 지금 보면 대단히 상식적일 만큼 당시 상황을 기술하고 도래할 미래를 전망한 책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그 책은 버터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양키들 이론 정도로 뿐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그 책이 한국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은 아닐까요? 왜 우리가 이책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하는 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남이 차려 놓은 상에 앉아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당돌한 형국이다. 이런 도전적인 자세를 보고 J교수는 혀를 끌끌 찬다. 이건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쇼비니스트의 행태가 아닌가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의 내용은 선진국 미국에서 대단히 호평을 받고 있어요. 산업 사회의 현실과 도래할 탈 산업 사회에 대한 전망에서 이 책만한 분석이 없지요. 지금 있는 현실만이 아니라 사회 발전의 전망에서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 대해 연구하는 이론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선생님 말씀과 달리 현실 적합성이 없다고 한다면 한낱 공염불이 아닐까요? 한국의 현실을 보세요. 한국은 1960년대 세계 최빈국의 상황을 벗어나 수출 입국에 돌입하면서 저임금 과노동으로 엄청 시달리고 있지요. 가까운 구로 공단에 한 번 가보세요. 후기 산업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뜬구름 잡는 환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한국은 유신 독재를 거치면서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했고, 80년대에 들어오자마자 광주에서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한 경험도 안고 있습니다. 이런 한국적 현실에서 명색이 사회학을 한다고 하면서 선진이론이라는 명목으로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과연 그게 설득력이 있을까요?”
나의 당돌한 이야기에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J 교수도 이 상황을 숙지하고 있었고, 이런 나를 꺽어 놓지 않으면 수업 시간 내내 시달릴지 모른다고 예감을 했을 것이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2회|4. 선택과 탐색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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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탐색 (4)
“그러나 당신이 갈구하는 사랑이 무엇이오? 나의 가슴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당신이 찾고 있는 그 사랑의 샘의 내용물이오. 당신은 정녕 진실한 사랑을 찾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순수한 사랑이 아니오. 내 눈에 비치는 것은 감각적이며 말초적인 언어의 유희에 당신의 순수한 혼을 흥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소. 왜 사랑을 세속적인 가치에 팔아 버리려고 하오? 보다 나은 대상, 보다 나은 사랑, 내가 당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걸고서 이야기하되 결코 사랑에는 보다 나은 것이라고는 없다고 맹세하오. 사랑은 그 자체이오. 거기에는 조건이 붙을 수가 없소. 대가를 바랄 수도 없는 것이오. 더욱이 경제적인 가치에 사랑을 결부시키려고 한다면 정말 잘못 생각한 것이오. 황금의 신과의 교제는 정말이지 사랑의 탈을 가장한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짓거리요. 사정이 이러할진대 왜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그러한 것들과 결부시키려고 하오. 안타깝소.”
사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그녀와 나는 어울리기 쉽지 않은 배경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회사에 들어갔다. 워낙 성격이 쾌활하고 사교성이 많아서 회사에서도 바로 인정을 받았다. 그녀는 70-80년대 한국의 건설 붐을 주도하던 건설 회사에 다녔다.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있으니 그녀가 나에게 눈을 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빨리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편지는 단순히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고통은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이런 고통으로 인해 실존의 위기를 느끼면 더욱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당신으로 인하여 나는 지금 커다란 정신적인 진통을 겪고 있소. 내가 지녀 왔던 철학의 근본마저 뒤흔들리고 있소. ‘전체는 진리이다’는 헤겔의 말과 시민 사회의 주축 가치는 화폐의 신이 지배하는 물신주의임을 역설한 마르크스의 말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나의 머리를 혼돈의 나락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소. 일찍이 내가 헤겔에 접하기 전에 나는 어떤 계기로 인하여 인간 -개인-의 삶은 전체적 삶 속에서 비로소 조화와 생명을 얻는 것이라 확신했소. 해서 이러한 전체적 삶을 통한 인간 해방의 실현을 위하여 기꺼이 나의 작은 몸을 바치리라 결심했소. 불교에서 말하는 소신성불(燒燼成佛),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삶이며 인생관이라고 확신했소. 그러기에 나는 헤겔 철학에 접하는 순간 지적 안식처를 발견했다고 느낀 것이고 곧 마르크스의 실천 철학에 매혹 당한 것이오.”
초보적일지 몰라도 당시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생각을 굳혔고, 새로 공부를 시작한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지난 1년 동안 유치장 동기들과 해온 세미나를 통해 상당 부분 강화되었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내가 본격적으로 철학을 하기 시작하면서 수행자의 화두처럼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생각의 알파이자 오메가 역할을 했다. 나의 철학적 캐리어는 바로 헤겔과 마르크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철학과 감성적으로 느끼는 철학 간에는 차이가 없을 수 없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편지글에서 사랑에 좌절한 젊은 청년의 감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요소는 개인 대 전체, 고난과 행복, 육체와 영혼, 차안과 피안, 투쟁과 승리등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열된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소. 예컨대 일 개인을 들추어 본다 할지라도 그에게 작용하는 변수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환경적, 심리적 등의 수다한 것이 있소. 전체를 사상하고 단지 심리적 측면을 고찰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그 오묘하고 미묘한 움직임이란 우리를 매번 당혹스럽게 만드오. 더욱이 개인의 활동 및 사상의 흐름이 경제적으로 규정 받는 영역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전체와 관련이 커지고 동시에 그 역으로 고립을 자초하고 미분화된 심리적 고독이 증대되어 가는 것 등은 단순히 헤겔적 사유 양식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것이오. ‘전체는 진리이다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은 영원히 개인일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인 절대 고립의 오뇌가 현대인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오. 한 인간의 사회 경제적인 규정 조건을 파악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이상의 심리적 정신적 소외감의 해결을 위한 진지한 노력도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현재의 나의 생각으로는 전체와 관련시킨 인간의 유적 본질의 실현이라는 마르크스적 접근 방식으로는 어려운 것이라 믿어지오. 정말이지 실존 상황에서 느끼는 개인의 자기의식의 분열은 법증법적 운동에서 보여지는 자기의식의 지양이라는 언어의 유희로서 위안 받을 수 없는 괴로운 것이오. 더욱이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느끼는 괴로움도 아니기에 그것이 더욱더 가중되는 것인가 보오. 케어케고르가 말하는 신 앞에서 선 단독자의 처절한 사투라고나 할까,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메카니즘의 차가운 환경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이 물신주의를 헤어나지 못하고 좌절하는 아픈 경험의 진상이오. 이러할진대 우리가 어찌 절대, 전체라는 거대한 언어를 들먹이면서 유토피아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것이오.”
“전체는 진리이다.”는 헤겔이 그의 주저인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사용한 유명한 명제이다. 반면 이와 완전히 대조되는 ‘신 앞에서 선 단독자’라는 명제는 키어케고르의 잘 알려진 명제이다. 그 둘은 전체와 개인을 각각 대변하는 사상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소나기가 밤새 내리던 산속의 암자에서 신앙 고백을 하듯 머리는 헤겔을 따르지만 마음은 키어케고어를 따른다고 한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 구절은 이런 감성을 전도서의 구절을 끌어들여 더욱 확인시켜 준다.
“하물며 당신의 사랑도 그러하니 나의 마음은 심히 안타깝소.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랑도 헛되고 진리도 헛된 것이니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이러다가 허무주의의 나락에 빠지지 않을까 두렵소. 당신이여, 이제 나를 잡아 주오.”
한참 그녀를 향한 장문의 편지를 쓰다 보니 어느새 비도 그치고 하얗게 날이 새고 있었다. 우거진 숲에서는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들리고 있었다. 내 머리도 점점 더 맑아지고 있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25-현존과 ‘to heteron’[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5-현존과 ‘to heteron’
1)
논리학 1부 1권은 존재론은 3편으로 나누어진다. 그 가운데 1편은 1장 존재, 2장 현존, 3장 대자 존재로 이루어진다. 1편 전체는 질을 다루고 2편으로 넘어가면서 양으로 이행한다.
앞에서 서술한 1장 존재론은 생성이라는 운동을 다룬다. 이 운동은 발생과 소멸의 끊임없는 상호 이행이며, 그런 이행이 일시적으로 균형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이 곧 현존이다. 필자는 이런 존재의 운동을 헤라클레이토스가 들었던 촛불의 비유로 설명한 바 있다.
필자는 논리학과 인식론은 서로 평행을 이룬다고 본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인식의 이행은 시간상에서 일어나며, 이런 이행이 내면화(Erinnerung: 기억)되어 논리가 전개된다고 했다. 전자는 형태의 운동이며 후자는 계기의 운동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것은 감각적 확신이다. 논리학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논리 규정을 찾자면 1편 2장에서 다루어지는 ‘현존’에 해당한다. 만일 논리학과 인식론이 평행을 이룬다는 가정을 유지한다면, 1장에서 다루는 존재의 운동은 인식론에서 어떤 인식에 해당하는 것일까를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평행이라는 가정이 무너지는 것일까? 필자는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필자는 1권 존재론의 1편 1장에서 다루는 존재의 생성 운동은 존재론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운동 즉 상호 이행의 운동을 서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은 2권의 1편 1장(가상)과 3권의 1편 1장(개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가상은 2권 본질의 운동 즉 반성 운동을 일반적으로 서술하며 개념은 3권 개념의 운동 즉 발전을 일반적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각 권이 1편 1장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대체로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서술한 인식의 전개 과정과 평행을 이룬다. 이점은 앞으로 논리학 산책을 통해 논리학의 각 규정이 인식론의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를 밝히면 대체로 인정될 수 있는 가정으로 본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는 인식론이나 논리학의 전개 과정 밑바닥에는 헤겔이 칸트로부터 받아들인 범주표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12개의 판단형식으로 이루어진 범주표가 인식론이나 논리학의 기본 설계도라고 볼 수 있다.
2)
이미 설명했지만, 존재의 운동은 이행 운동이다. 이런 이행의 운동은 존재자가 전개하는 운동 가운데 즉 본질의 반성 운동이나 개념의 발전 운동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추상적인 운동이며, 그러기에 가장 일반적으로 즉 모든 존재자에 적용되는 운동이다. 여기서 운동은 매개 과정도 없으며 발전적 연관도 없다. 다만 하나의 규정에 다른 규정으로 직접 이행하니, 그 모습이 곧 존재가 무로, 무가 존재로 단적으로 이행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화합물이나 생명체와 같은 것도 이런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즉 하나의 역학적 물체로 보는 가운데서는 마찬가지로 이런 존재의 이행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거꾸로 추상적 존재자에 적용되는 이런 운동을 화합물의 화학적 작용 과정이나 생명체의 생명 운동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서는 더 구체적인 운동 방식이 즉 반성이나 발전과 같은 운동 방식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존재와 무의 생성 운동 즉 발생과 소멸이 일시적 균형을 이루면서, 헤겔은 현존이 출현한다고 한다. 이 주장은 앞의 1장 끝에 헤겔이 제시한 내용이며 2장 현존을 시작하면서 다시 되풀이된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현존은 존재와 무가 단순하게 하나로 되는 것이다. 현존은 이러한 단순성 때문에 직접적인 것의 형식을 지닌다.”(논리학, 2판, GW 21, 97)
이런 서술을 보면 마치 순수 존재나 순수 무가 있어서 그것의 상호 운동을 통해서 현존이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순수 존재나 순수 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처음 가장 직접 발견하는 것은 사실 현존이다. 현존은 그냥 독립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 속에서 나타난다.
이 현존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주관이 설정한 개념 틀이 곧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이다. 여기서 개념 틀은 순수 존재라든가 순수 무와 같이 따로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관계 즉 생성하는 관계이다.
사유 속에서 보자면, 순수 존재와 순수 무가 통일되어 현존이 생성한다. 그러나 인식의 과정에서 본다면 최초의 인식 즉 감각적 확신에서 나타나는 현존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한 틀이 곧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이행 운동이다.
그것은 마치 공리와 정리 사이의 관계와 같다. 사실 우리가 인식 상 먼저 발견한 것은 정리이다. 이 정리들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공리가 추출되며, 이 공리를 구성하면서 정리가 서술된다. 이 점은 후일 마르크스가 연구 과정과 서술 과정을 대비한 것과 같다. 연구 과정에서는 구체적인 현실이 먼저다. 연구를 통해 이로부터 추상적인 원리가 발견된다. 서술에서는 추상적 원리가 먼저이고 이것을 구성하면서 구체적 현실이 설명된다.
헤겔도 이 점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체[존재와 무의 통일로서 현존]는 우리의 반성 속에서 그렇게 규정되며 아직 자기 자신에서 그렇게 정립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존 자체의 규정성이 정립된 것이라는 사실은 현존이라는 표현이 말해준다.”(논리학, 2판, GW 21, 97)
‘반성 속에서 그렇게 규정된 것’이라는 말은 현존이 존재와 무의 통일로서 규정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규정은 ‘반성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헤겔은 이제 현존의 모습 속에서 그런 운동이 즉 존재와 무의 통일이 입증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에서’ 그렇게 ‘정립될’ 것이다.
3)
그렇다면 현존의 모습이 어떠하길래 헤겔이 이를 ‘존재와 무의 통일’로 규정하게 된 것일까? 현존이란 우리의 의식에 처음 가장 직접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정신현상학에서는 감각적 확신의 대상이다.
헤겔은 이 현존의 모습을 ‘질[Qualitae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분석철학에서는 이 질을 더 확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감각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의식이 우리 밖의 외계와 가장 직접 부딪힐 때 나타나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처음에는 이 감각질이 가장 풍요하고 가장 진리인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의 의식이 외부의 대상과 직접 부딪히는 순간, 그 순간은 인식과 대상은 합일에 이르며, 그 순간은 어떤 비교할 수 없는 순간 즉 개별적 순간이며 그런 순간순간의 전체는 대상의 가장 풍요한 모습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된다.
그러므로 인식론에서는 항상 모든 인식의 토대를 이런 감각질에서 찾으려 했다. 대표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원초적 명제 속에서 이런 감각질의 인식을 찾으려 했으며, 아도르노가 양화하고 일반화하는 계몽적 인식을 거부하면서 미메시스를 통해 얻어지는 인식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도 이런 기대가 감추어져 있었다.
4)
그러나 헤겔은 이런 현존이 지닌 질은 의식이 대상과 순간적인 부딪힘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런 부딪힘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한, 매 순간 그 질은 사라지고 새로운 다른 질이 출현한다. 소위 ‘명멸[明滅]’한다는 표현이 있는데, 현존의 모습이야말로 이런 명멸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현존을 규정하면서 현존은 동시에 ‘타자 존재[Anderssein]’라고 말한다. 이 타자 존재란 현존 옆에 있는 또 하나의 현존이라는 의미라기보다 그 자신이 이미 자기와 다른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 타자 존재를 ‘자기 자신의 타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즉 질이 명멸하는 모습을 헤겔이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현존 자체는 본질적으로 타자 존재이며 이 타자 존재 속으로 이행한 것이다. 타자는 그와 같이 직접적이며 그의 외부에서 발견되는 것과 관계하지 않고 다만 본래적으로나 현상적으로 타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하여 타자는 곧 자기 자신의 타자이다.”(논리학, 1판, GW 12, 61))
“왜냐하면, 현존은 이에 못지 않게 비현존이고 즉 비현존으로서 현존이기 때문이다.이것은 자기 자신의 무로서의 현존이므로 이와 같은 자기 자신의 무는 마찬가지로 현존이기도 하다.”(논리학, 1판, GW 12, 60)
여기서 현존과 비현존의 상호 이행이 등장하는데, 이 기초 전제가 된 것이 곧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통일이다. 즉 현존의 명멸하는 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헤겔은 존재와 무라는 두 개념 틀을 사용한다. 이 명멸하는 모습이 곧 생성 운동 즉 발생과 소멸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런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생성을 통해서 현존을 보자면, 현존은 양자의 통일을 존재의 측면에서 본 것 즉 “존재로서의 통일”이며 타자 존재는 양자의 통일을 무의 측면에서 본 통일 즉 “비존재로서의 통일”이다.
만일 가정해서 우리가 우리 밖의 세계에 일정한 순간에 동시에 부딪힐 수 있다면 또는 이전의 것을 기억해서 새로운 것과 함께 떠올린다면(아직 우리는 이런 단계까지도 넘어가지 않았으나), 이 경우 우리는 하나의 현존 옆에 또 하나의 현존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의 현존과 그 옆에 있는 다른 현존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하나의 현존도 타자 존재로 이행하고, 다른 현존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타자 존재로 이행하니, 어떤 현존도 머무름이 없이 타자 존재로 변화하는 마당에 여기에 어떤 비교도 가능하지 않으니,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세계는 무차별적 세계로 표현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그러므로 양자는 어떤 것으로 규정될 뿐만 아니라 타자로서 규정된다. 따라서 양자는 동일한 것이며 양자 사이에 어떤 구별도 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의 규정의 동일성은 다만 외적 반성 즉 양자의 비교에 속한다. 그러나 타자는 일단 정립된 것이듯이 마찬가지로 이 동일한 타자는 자기 나름대로 사실 어떤 것과 관계 속에 있으나 또한 자기 나름대로 그 어떤 것 밖에 있다.”(논리학, 2판, GW 21, 106)
5)
헤겔은 플라톤이 그려낸 ‘토 헤테론[to heteron]’은 바로 이런 ‘자기 자신의 타자’로서 현존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자신의 타자로 되는 명멸하는 세계를 (또는 좀 더 발전하면 서로 무차별적인 세계를)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데, 아이가 어머니 자궁을 나와서 처음 보게 되는 세상이 있다면 다름 아닌 이런 세상이 아닐까? 또는 악몽 속에서 어떤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불쑥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모습과 닮았다고 할 수있을까?
언젠가 가을날 어느 산 정상에서 약간 기울어져 가는 햇빛에 반사된 억새꽃이 빛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뒤로 수없이 산에 가고 또 억새를 보았으나 결코 다시 그 억새꽃의 빛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 세상에 단 일회만 존재하고 곧 사라져 버린 그 모습은 심지어 기억 속에서도 남아 있지 않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판단할 수 있지만,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기억해 낼 수는 없다. 헤겔이 말하는 현존의 세계가 바로 그런 세계이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이런 질로 이루어진 현존의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이것’이라는(또는 ‘여기’, ‘지금’과 같은) 지시 대명사를 이용한다. 그러나 이것이 지시하는 어떤 것은 그 순간 이미 자기와 다른 타자 존재가 되니(예를 들어 지금은 낮인데, 바로 밤이 되고 등), 이것으로 포착하려고 의도했던 것은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무엇이나 지시하는 것 즉 어떤 ‘일반적인 이것’에 이를 뿐이다.
같은 이야기를 헤겔은 논리학에서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라는 말로 어떤 완전히 규정된 것을 표현한다 한다. 여기서 언어 즉 지성의 작품이 다만 일반적인 것을 표현한다는 사실 즉 이는 어떤 개별적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과 다르다는 사실이 간과된다. 그러나 개별적 이름은 일반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 없는 것이다.”(논리학, 2판, GW 21, 105)
플라톤의 <국가> 강해(68)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8)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3. 선분의 비유(509c-513c) – (II)
* 앞의 강해에서 우리는 다른 비유들과 비교하여 선분의 비유가 갖는 고유성에 주안점을 두고 그 기본 개요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선분의 비유가 보여주고 있는 인식론 내지 존재론적 위계가 제5권에서 플라톤이 피력하고 있는 앎과 믿음(의견)의 위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에 주목하였다. 선분의 비유에 관한 두 번째 강해는 미리 말한 것처럼 선분의 비유의 고유성과 관련하여 그 차이가 갖는 중대성과 그 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기로 한다.
* 그것을 위해 우선 플라톤이 앎과 믿음(의견)과 관련하여 제5권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과 이곳 선분의 비유가 담고 있는 내용들을 간략히 도표로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 제5권에서(474c-480a) 플라톤은 <표1>에서 보듯이 인식의 상태를 ‘무지’agnoia와 ‘앎’gnōmē, epistēmē으로 크게 구분하고 그 무지와 앎 사이에 ‘중간적인 것’(metaxy ti)으로서 ‘믿음(의견)’doxa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때 앎은 ‘있는 것’, ‘자체적인 것’을 대상으로 갖고 있고 믿음(의견)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대상으로 갖고 있다. 그런데 선분의 비유에 와서는 <표2>에서 보듯이 무지의 경우가 빠지고 인식의 상태로서 두 단계 즉 ‘앎’과 ‘믿음(의견)’은 전체 4단계 즉 ‘상상’eikasia, ‘확신’pistis, ‘사고’dianoia, ‘지성적 앎’noēsis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그러면 제5권의 앎과 믿음은 선분의 비유에서 세분화된 그 4단계들과 비교하여 어떻게 서로 상응·연관 관계를 갖는 것일까? 우선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noēsis과 ‘사고’dianoia가 ‘가지적 영역’noētos topos으로 묶여있음에 주목하면 언뜻 그 두 단계가 제5권의 ‘앎’epistēmē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두 단계 중 ‘사고’ 단계는 가정들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무가정의 원리(archē anypothetos)로서 ‘자체적인 것’ 즉 ‘있는 것’(to on)만을 대상으로 하는 제5권의 ‘앎’이 될 수 없다. 그에 비해 ‘지성적 앎’noēsis은 아무 가정들 없이 형상들만을 사용해서 그것을 통해 형상들 자체에 이르는 앎(510b)이라는 점에서 제5권의 ‘앎’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것은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과 ‘사고’ 둘 다 ‘가지적 영역’으로 묶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지성적인 앎’noēsis의 단계만이 제5권의 ‘앎’epistēmē에 상응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선분의 비유 4단계 중 오직 ‘지성적 앎’(L4)만이 제5권의 ‘앎’과 일치하는 것이고, 나머지 단계들(L1, L2, L3) 즉 ‘사고’, ‘확신’, ‘상상’의 상태들은 원천적으로 그 ‘앎’과 배타적으로 차별되는 것인 한, 모두 ‘믿음’(의견)doxa에 속하는 것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표3> 참고) 그러나 플라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고’를 ‘지성적 앎’과 묶어 ‘가지적 영역’으로 설정하고 있고 나중 534a에 가서도 그것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성적 앎’과 ‘사고’가 원천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임에도 플라톤은 왜 선분의 비유에서 그것 둘을 함께 묶어 ‘가지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앎과 믿음과 관련한 제5권의 입장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기존 입장에 변화를 가하는 것일까 아니면 추가적인 보완을 의미하는 것일까?
* 이것은 이제 선분의 비유에서 가지적 영역의 것으로 제시된 ‘사고’dianoia가 어떤 철학적 성격과 위상을 갖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요구한다. 우선 앞에서도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의 단계들 중 ‘지성적 앎’만이 제5권의 ‘앎’과 동일하게 ‘형상적 앎’인 한, 나머지 단계들은 모두 제5권 기준으로 ‘믿음’에 속하는 것이라고 밖에 달리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은 글라우콘이 선분의 비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정리하면서 ‘사고’를 ‘믿음doxa과 지성nous 사이에 있는 것’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도 그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511d)과 부딪친다. ‘믿음’과 ‘믿음과 지성 사이’는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분의 비유 자체가 기본적으로 doxa를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데다가 그 세분화 단계에서 사고가 앎일 수 없다면 사고가 치울 칠 방향은 doxa쪽 밖에 없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점에서 ‘믿음’doxa이란 말이 선분의 비유 중간에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다가(중간에 나오는 그에 준한 표현 ‘to doxaston’(믿음의 대상)이란 말도(510a) 다만, 선분의 비유 상 가시계와 가지계의 관계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to doxaston과 to gnōston의 관계처럼 모사와 원본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는 차원에서 나온 말이다.) 비유 마무리 단계에 가서야 그것도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라는 것도 눈에 띤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선분의 비유를 마무리 하면서 제5권의 doxa와 비교하여 그 범위를 ‘사고dianoia’ 아래 단계 즉 확신pistis과 상상eikasia으로 좁혀 설정했음을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나중 변증술을 설명할 때 선분의 비유를 꺼내 들어 ‘지성적 앎과 사고’는 noesis로 부르고 ‘확신과 상상’은 스스로도 직접 doxa라고 말하고 있다.(534a) 어쨌거나 논쟁의 소지는 있어 보이지만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이라는 글라우콘의 말을 아래와 같이 존재론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해 보면,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왜 처음에 doxa란 말을 쓰지 않다가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그 말을 쓰게 한 후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확신과 상상에 국한하여 그 말을 쓰고 있는지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일정 부분 있어 보인다.
* 우선 <표1>에서 보듯 믿음은 앎(있는 것)과 무지(없는 것) 사이에서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을 대상으로 성립하는 인식 상태이다. 그리고 앎과 믿음(의견) 사이에는 엄밀히 말해 경계만 있을 뿐 어떤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 것은 없다. 글라우콘의 말에서 지성을 ‘있는 것’으로 보고 믿음을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볼 경우 설사 그 둘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결국은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 즉 본질적으로 ‘믿음’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믿음(의견)이라는 당구공과 앎이라는 당구공이 닿아 있을 때 접점은 하나이고 그 당구공들 ‘사이에 있는 것’이지만 존재론적으로 그 점은 위치만 있을 뿐 독립적인 존재론적 지위는 갖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당구공의 비유를 들어 다시 설명하자면 추론적 사고 자체는 원천적으로 앎이라는 당구공에 속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믿음(의견)이라는 당구공에 속해 있되. 다만 믿음(의견)이라는 당구공의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앎의 방향 쪽 극단 표면에 위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사고는 비물질적 자기 동일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형상적 앎에 닿아 있지만 기하학적 사유 공간의 연장성을 포함하고 있고 그 연장성은 무규정성의 근본 특징인 한, 기본적으로는 믿음(의견)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비물질성 뿐만 아니라 공간적 연장성까지도 탈각해야 비로소 앎의 영역에 들어간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것은 믿음의 영역에서 무규정성을 가장 적게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형상적 앎에 가까운 것이라 할 것이다. 아무려나 존재론적 관점에서건 인식론적 관점에서건 믿음의 위상과 관련하여 논란은 여전히 불가피해 보이긴 하지만 믿음(의견)을 어떤 관점에서 어디에 위치시키건 간에 플라톤 자신 선분의 비유를 통해 가지적 영역의 범위를 형상적 앎에만 국한하지 않고 최소한 수학과 기하학 같은 전문 기술들의 영역에까지 확대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 소은(素隱) 박홍규 선생은 앎과 믿음, 무지의 존재론적 위상과 관련하여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서 그것의 존재론적 특성을 ‘무규정성’apeiron으로 규정한다. 무규정성은 양상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으로 형상(to on) 쪽 극단에 이르면 ‘자기동일성’tauton으로까지 나타날 수도 있고 반대로 무(無mē on)쪽 극단에 이르면 관계맺음의 원리로서 타자성heteron의 극치로 나타날 수도 있다. 추론적 사고 대상으로서 수학적 기하학적인 것들은 모두 사유 공간에서 공간적 연장성을 구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무규정성apeiron을 갖는 것이되, 다만 형상 쪽을 향한 최상위 극단에서 물질적 무규정성을 탈각해 있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보전한다. 기하학적 공간 또는 사유 공간에서 길이가 동일한 여러 삼각형들이 하나의 삼각형으로 합동하여 하나의 삼각형 자체로 인식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즉 그것은 이데아의 자체성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는 점에서 무규정성을 갖는 믿음의 영역에 위치하지만, 이데아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으면서 이데아적인 ‘자체성’kath’ hauto에 버금가는 ‘자기 동일성’tauton을 보전함으로써 말로 할 수 있는 학문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갖는 수학과 기하학의 토대가 된다. 철학의 목적은 영혼의 고양을 통해 무규정성의 본질로서 타자성에 역행하여 자기동일성에 이르고 그것을 토대로 변증술적 지성을 통해 형상적 앎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철학의 수행은 영혼의 능력에 따라 그 목적을 이룰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고 사랑의 완성이 늘 사랑을 지속하는 것인 한, 살아 있는 인간에게 철학의 완성은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분투’, ‘위대한 영혼에로의 자기 확장’ 그 자체라 할 것이다.
* 요컨대 제5권의 엄격한 이분법적 기준에서 보면 분명 사고는 <표3>이 보여주듯 앎과 차별되어 믿음(의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선분의 비유를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비록 가시적 모상을 가정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가시적 영역과도 관계있지만, 결론은 비가시적 도형 자체로 마무리하고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앎에로의 상승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가지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고를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글라우콘과 사고를 가지적 영역에 포함케 하는 소크라테스가 양립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지성nous과 공통의 어원을 갖는 noēsis와 noētos란 말을 사용할 때 아무 사전 설명 없이 어떤 때는 앎과 사고 모두를 묶어 noētos<표2>나 noēsis(534a)이란 말을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noēsis를 ‘앎’epistēmē에만 한정하여 쓰기도 한다.(<표>2, 제5권) 이것은 플라톤 자신 선분의 비유에 와서 noētos와 noēsis란 표현을 의도를 갖고 다소 유연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플라톤은 앎epistēmē이 갖는 존재론적 위상은 엄격하게 유지하면서도 선분의 비유를 통해 제5권의 믿음의 영역을 세분화하여 ‘사고’의 단계를 분리해내고 나머지 단계들을 앞서 글라우콘이 말한 대로 좁은 의미의 doxa로 재정립하는 방식으로 ‘가지적 영역’noētos topos의 범위를 일정 부분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변증술을 통한 형상적 앎뿐만 아니라 ‘사고’ 단계의 앎 즉 수학과 기하학 등 추론을 기반으로 한 전문 기술적 앎 또한 학문적 기초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기하학적 대상들과 관련하여 이성 자체가 수행하는 역할을 살폈듯이 이성은 오름의 과정에서건 내림의 과정에서건 사고 단계와 앎의 단계 그 모두에 걸쳐 있다. 철학은 종국적으로 형상적 앎을 획득하는 것이지만 철학의 수행은 변증법적 문답 능력을 통해 오름의 과정에서건 내림의 과정에서건 말과 논리로 이루어진다. 지성에 의한 형상적 앎만이 아니라 사고에 기초한 수학과 기하학 등 전문 기술들technai의 대상 또한 그 자체로 일정 부분 의미 있는 철학적·학문적 탐구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학술들을 변증술이 형상적 앎에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용하는 협조자이자 동조자로 표현하고 있다.(533d) 요컨대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는 현상 구제 차원에서 형상적 앎 아래 단계의 인식 상태들 즉 현상계에 대한 학적 탐문의 길을 확립하는데 크게 비중이 실려 있던 것이다.
* 선분의 비유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단순히 인식론적 명백성의 순차적 단계와 특징 보다는 그 배면에 깔린 존재론적 위상 특히 사고 단계의 위상에 주안점을 두고 그것이 학적 인식의 확장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살펴 보았다. 존재론을 끌어들여 각 단계가 갖는 인식론적 의미를 살핀 셈이다. 이제 끝으로 이상의 논의를 전체적으로 종합하면서 필자 나름의 관점에서 그 철학적 의미를 음미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제5권에서 앎과 믿음의 구분과 선분의 비유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로 나누건 넷으로 나누건 ‘지성적 앎’으로서 앎의 단계가 갖는 존재론적 위상은 변함이 없다. 즉 선분의 비유에서 앎의 존재론적 위상 변경에 대한 언급은 없다. 특히 태양의 비유와 비교하여 선분의 비유에서 좋음의 이데아에 상응하는 앎의 단계가 별도의 지위를 갖고 따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다른 이데아들보다 철학적 위계상 우월한 것일지라도 최소한 존재론적으로는 모두 하나같이 자체적인 존재이자 인식론적으로도 동일한 앎의 지위를 갖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2) 이것은 결국 선분의 비유의 주요 목적이 ‘형상적 앎’을 보완하고 해명하는 것보다는 그 하위 단계로서 믿음의 단계를 보다 세부적인 단계들로 나누어 그 단계들 각각이 갖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선분의 비유는 형상적 앎에 이르기까지의 인식 과정 전체를 연속해서 상승하는 것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그 중간적인 것을 보다 세분화하여 ‘믿음’doxa의 스펙트럼이 최하 ‘상상’의 단계에서 ‘확신’을 거쳐 ‘사고’로까지 분화되면서 각기의 고유한 역할을 가지고 앎에로 상승해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3) 특히 플라톤이 ‘사고’를 존재론적으로 앎과 분명하게 구분하면서도 가지적 영역에 포함케 하고 있다는 것은 지고의 앎으로서 형상적 앎의 위상을 이전의 입장 그대로 보전 유지함과 동시에 하위 대상으로서 수학 또는 기하학적 대상들이 갖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위상을 재정립하여 그 자신 가지적 학문 영역의 범위를 확장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기하학을 비롯한 전문 학술들 역시 변증술의 수준에까지는 미치지 못하나 형상적 자체성에 버금가는 ‘자기 동일성’tauton을 가질 수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4) 그뿐만 아니라 플라톤은 가시적 영역도 다시 ‘상상’eikasia과 ‘확신’pistis으로 세분화하고 있는데 그것 또한 의술, 건축술, 제화술. 조타술 등 실물을 다루는 일반 기술들과 시가술, 수사술, 미술 등 모방과 꾸밈, 허구와 과장 등을 기반으로 한 기술들을 구분함과 동시에 그러한 기술들이 갖는 나름의 위상도 의미 있게 함께 재정립하려는 의도 또한 담고 있다. 이점에서 ‘상상’eikasia과 ‘확신’pistis, ‘사고’dianoia가 서로를 고리로 모상eikōn과 원본의 관계를 갖고 상승한다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있게 주목해야 한다. 특히 최하위 인식 단계로서 ‘상상’eikasia의 경우는 환상과 억측, 불분명하고 부정확한 감성의 개입 등 명확성을 기준으로 가장 낮게 평가되는 단계이다. 그에 따라 그것은 결코 학적인 보편성과 객관성을 가질 수는 없지만, 다른 한편 인간의 정신적 발달 과정에서든 일상인의 심리상태에서든 늘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상상’은 정서가 발달하기 시작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와 청소년기 단계에서는 장차 맞이할 성년기 영혼 형성에 가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플라톤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인간 삶에서 결코 무시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 플라톤이 제3권에서 시가(詩歌)mousikē 교육을 강조한 것도, 특히 어린이와 청년기 교육 과정에서 다른 그 무엇보다 시가 교육에 상당한 정도의 비중을 할애한 것도 그 때문이다.(376e-403c) 사실 시가는 말과 언어의 형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감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선법과 리듬에 허구와 과장까지 포함하고 있어 일부 시인들과 권력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욕망을 성취하는데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플라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러한 시인들과 그들이 지은 신화나 시가들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교육의 대상에서 배제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플라톤은 인간의 심적 상태에 시가가 차지하는 영향력의 크기가 얼마나 심대한 것인지 특히 이성적 사고가 채 발달하기 이전의 어린이나 청소년기에는 얼마나 심각할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전통적인 신화나 시가들을 비판하되 신화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건국신화가 보여주듯이 이상 국가에 걸맞은 새로운 시가들을 만들어 그것을 어린 시절부터는 물론이고 성인 이후에도 시민이라면 누구도 배우고 마음에 새겨야 할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상상’은 선분의 비유에서 최하위의 인식단계에 속하지만, 삶에 미치는 비중과 중요성에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것이 갖는 양면적 영향의 크기만큼 교육의 대상으로서도 매우 중대한 위상을 지니는 것이다. 제3권에서 시가교육의 목적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밝히고 있는 아래와 같은 언급은 그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시가(詩歌) 즉 리듬과 화음은 영혼의 내면으로 가장 깊숙이 젖어 들며 우아함을 대동함으로써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으므로 … 시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이는 훌륭하지 못한 것을 가장 민감하게 알아보고 싫어하는 대신 아름다운 것들은 칭찬하며 기뻐하며 영혼 속에 받아들여 … 나중에 이성적 논거를 접하게 되면 그 친근성 덕에 그걸 알아보고 제일 반길 것이다”(401d-402a)
5)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말의 꾸밈과 과장을 마다않는 수사술rethorikē은 물론 실재의 모사에 대한 모사 즉 이차 모방을 주된 기술로 삼고 있는 회화를 비롯한 모방술(mimetikē)도 시가술이 갖는 양면성 차원에서 함께 비판된다. 그것 또한 앞서 말한 상상의 특징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사술은 소피스트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민주정 치하에서 설득적 언사 대신 말의 꾸밈과 과장의 방식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기술로 변질되어 종국에는 아테네를 멸망으로 이끄는 큰 원인이 되었다. 대화편 제목들의 상당수에 소피스트의 이름이 내걸려 있고 내용에서 상당 부분 그들이 구사하는 수사술에 대한 냉혹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 자신 진실 왜곡과 정치적 선동의 기술로 수사술을 철저히 비판하기도 했지만, 시가에 대한 양면적 태도가 보여주듯이 설득력을 강화하는 말의 기술로서 수사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대화편 <메넥세노스>의 경우를 보면 플라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록 역설적인 방식으로나마 수사술을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핵심 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대화편들 자체가 이미 상황 설정이나 인물 설정, 대화의 구성 전개 등에서 말의 문학적 꾸밈과 허구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의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를 비롯해 그가 사용하고 있는 수많은 은유들 또한 하나같이 모두 말로 이루어지는 문학적 시가적 표현 기법이다. 그리고 회화 내지 미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술은 기본적으로 실재에 대한 이차적인 모방을 주된 기술로 삼음에 따라 결과적으로 불분명함과 왜곡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학적 정확성과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미술과 조각은 신들과 신들의 거처를 아름답게 또는 웅장하게 꾸미고 그것을 통해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감성을 풍성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음 또한 분명하다. 즉 미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과 폄하는 학적 인식의 차원에서 정확성과 객관성을 기준으로 제기된 것이지 그것이 삶에서 갖는 가치까지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철학과 병행하여 마치 죽은 돌에서 생명을 끌어내듯이 조각을 생업으로 삼아 평생을 살았다. 선분의 비유에서 ‘상상’, ‘영상(影像)’(image)이란 표현은 오늘날에도 그렇게 받아들여 지듯이 말 그대로 ‘상상에 불과하다’는 폄하의 용어로도 쓰일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 ‘위대한 상상력(imagination)’이라는 치하의 용어로도 쓰일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비유 자체가 내용상 이미 위대한 철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럼에도 형식에서 문학적 허구임 또한 분명하다. 플라톤이 학적 정확성에 치중한 나머지 그것을 기준으로 예술의 위상을 낮게 평가했다는 말은 진실이어도 플라톤이 삶에서 예술이 갖는 가치까지 폄하하고 부정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예술과 모방mimēsis에 관한 플라톤의 논의는 제3권(392c-398b)에도 나오지만 나중 제10권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어진다.
6) 그리고 ‘확신’pistis 단계의 인식 상태와 그 대상으로서 실물 세계들 또한 ‘사고’dianoia의 모상으로 사고의 하위 단계이지만 인간 삶의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현실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중요성은 물론이고 관심사와 영향력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가장 중심에 있는 것들이 아닐 수 없다. 현실적 삶의 문제 해결 방식으로서 수많은 기술들 이를테면 의술, 건축술, 제화술. 조타술 등 일반 기술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플라톤 또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끊임없이 인용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현실의 기술들이다. ‘확신’의 대상이 ‘사고’ 대상의 모상이 된다는 것 역시 내림의 과정에서 보면 현실의 실물들이 ‘사고’를 통해 이론적으로 해명되어야 하고 해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러한 일반 기술 모두는 기본적으로 경험적 숙달과 관련되어 있지만 일정부분 수학과 기하학에 의존해 있어 개연적이나마 기술적 앎의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현상 구제의 일환으로 실물을 형상의 분여물로 설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7) 결국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를 통해 제5권에서 ‘믿음’(의견)으로만 구분되었던 인식 상태를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현실 구제 차원에서 실질적인 현실 문제의 방책으로서 수학과 기하학의 방법은 물론 제반 기술들 나름의 학적인 위상과 성격을 최대한 뒷받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고’ 단계를 ‘가지적 영역’에까지 확장한 것은 플라톤 철학이 형상적 앎만을 중시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인식 상태인 믿음의 영역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전통적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를 통해 믿음의 영역에서 형상적 앎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앎의 상태로 추론적 사고를 설정함으로써 전문 학술들의 학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고 나아가 추가적으로 확신과 상상도 따로 구분하여 그 차이가 갖는 고유한 의미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즉 플라톤은 태양의 비유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를 최정점으로 하는 존재 및 인식 세계의 기본 구도를 보여준 후, 선분의 비유를 통해 그러한 형상적 앎에 이르기 위해 어떠한 하위 단계의 인식들이 있는지 그리고 그 각 단계의 인식들이 현실의 기술들과 어떻게 연관되고 학적으로 어떤 위상을 갖는지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8) 이러한 해석의 연장선상에서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전문 기술들과 일반 기술들을 학문적 차원에서 근세 자연과학들을 비교해보자면 선분의 비유는 근세 자연과학적 인식론의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주요 개념들을 이미 선구적으로 두루 포함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성적 문답과 숙고를 거듭하여 영혼이 고양된 상태에서 마침내 첫 원리를 획득하고 다시 그 원리를 토대로 가정들에게 진리성을 부여해주는 플라톤적 앎의 구도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제일원리에 이른 후 그 제일원리를 토대로 연역의 방식으로 개별 지식들의 진리성을 부여해주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제일철학과 인식론적으로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선분의 비유에서 ‘확신’과 ‘상상’의 단계는 근대 경험론이 그랬듯이 그 상위 단계로서 최소한의 학적 분별력인 사고dianoia 작용을 배제하고 지식의 원천을 그저 감각적 경험에만 한정했을 경우 왜 회의론에 빠질 수 밖에 없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칸트(I. Kant)의 인식론도 관점과 해석만 다를 뿐 근본 틀에서 ‘선분의 비유’의 단계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칸트는 관조(觀照)theōria의 대상인 플라톤의 형상계를 물자체라는 불가지의 세계로 상정하여 학적 인식에서 배제하는 대신 사고의 단계에서 작동하는 이성의 역할에 주목하여 이성을 주관에 내재하는 인식의 보편적 구성 원리로 삼아 감각적 경험적 지각들을 인간 나름의 보편적 지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것 역시 단계만 하향되었을 뿐 칸트 역시 현상의 구제 즉 현상계의 경험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론적 기초를 마련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칸트가 인식론에서 배제하였던 물자체의 세계를 어쩔 수 없이 실천철학의 과제로 다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리고 이후의 철학사적 전통에서 특히 근현대 비합리주의자들에 의해 그 물자체의 세계가 오히려 철학적 탐문이 육박해 들어가야 할 참된 실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도, 비록 관점과 용어는 달라도 말과 논리 너머의 플라톤적인 예지계가 침묵의 형식으로건 형이상학적 이념의 형식으로건 철학의 근본 문제로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궁극의 관심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있다. 서구 역사에 나타난 ‘모든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이다’(All philosophy is a series of footnotes to Plato.)라고 말한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말이 결코 과장된 말로 들리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9) 요컨대 플라톤 철학은 철학적 위계에서 보면 분명 이데아가 지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플라톤이 지닌 관심의 중대성 차원에서 보면 형상적 앎의 내림 과정 즉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구제 차원에서 말과 논리로 성립되는 전문 기술들(오늘날의 개별과학들) 또한 그에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플라톤 철학을 그저 형상이라는 추상적 관념만 좇는 비현실적 사상으로 보는 것은 플라톤 텍스트에 대한 직접적인 독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후대 철학자들이 자기 철학을 내세우기 위해 아전인수적으로 가해졌던 그릇된 해석에 크게 의지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이 근본적으로 삶의 근원적 문제해결을 위한 공존과 조화, 지성과 균형의 원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문 기술들이 아무리 현실에서 필요할지라도 형상적 앎을 결여했을 경우 그것은 방향을 잃은 채 권력과 욕망에 부역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삶 모두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철학이 전문 기술들이 갖는 실질적인 유용성을 무시한 채 형상적 앎을 내세워 고답적인 이론에만 머무는 경우 그것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독선과 아집, 폭력에 부역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삶 모두를 무너뜨린다. 만약 플라톤 철학이 말과 논리를 넘어 형상적 앎에 대한 지적 직관만을 강조하고 그것에만 매달렸다면 플라톤 철학은 철학사에서 결코 철학적 사유의 모태로 평가받지 못하고 그저 신비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종교철학 또는 기독교 신학의 보완물 정도로 운위되었을지 모른다.
* 플라톤은 태양의 비유를 보완하는 일환으로 이상과 같이 선분의 비유를 살핀 후, 이제 제7권에 들어가 그 선분의 비유에 나타난 현실 구제의 구도와 세부 단계들을 동굴의 비유를 통해 좀 더 실천적이고도 역동적으로 그리고 더 종합적으로 실감 나게 그려내고 있다. 그에 따라 그곳에서는 좋음의 이데아도 당연히 다루어진다. <국가> 제6권은 이렇게 선분의 비유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국가> 제6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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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의 비유(514a-521b)
[서평] 강지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읽고 [철학자의 서재]
강지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읽고
함태원(건국대)
칸트 철학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칸트가 위대한 철학자이자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기야 어지럽고 머리 아픈 칸트의 철학을 하나하나 이해하는 것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굳이 필요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철학을 전공하는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칸트라고 한다면 고개부터 저을 정도로 칸트 철학은 난해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칸트가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일을 하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는 우리의 관심을 기울일만한 일이다. 이 책은 칸트의 위대한 업적의 비결을 ‘루틴’이라고 보여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루틴을 세우고 이 루틴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칸트야 주변 시민들이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추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시계’라 불리는 규칙적인 사람이었으니, 루틴을 지켜내는 일이야 어렵지 않을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칸트가 아침에 일어나 5분간은 침대에서 그 무엇보다 유혹적인 아침잠과 씨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또 하인이 커피를 타오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계속 커피를 달라고 보채던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은? 하지만 칸트가 자기 루틴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이런 면모 때문이기도 하다. 칸트는 자신이 아침잠에 약하고 커피를 너무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자기 루틴에 이를 포함했다. 칸트는 “나만의 루틴을 만들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나의 즐거움”(36쪽)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루틴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루틴을 어디서부터 시작 해야 할까? 우선은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지도에 목적지도 표시하지 않고 항해를 나갈 수는 없으니 어디로 갈지부터 체크해야 한다. 목적지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행히도 우리는 칸트 덕에 “진리는 대상에 있지 않고, 내가 구성하는 것”(61쪽)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이다.
그럼, 루틴은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우선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보자. 작은 일이라도 무엇이든 우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큰일이든 작은 일부터 시작해 나가는 것이 자신의 루틴을 완성하고 유지해나가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상관이 없을까? 내가 좋다고만 생각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 해도 괜찮은 걸까? 단순하게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해도 좋다고 했다면, 칸트가 이토록 이름나있는 인류의 스승은 아니었을 것이다.
칸트의 대답은 도덕법칙에 따라서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도덕법칙이라니! 이름만 들어도 현기증이 나는 어려운 법칙을 알아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햄버거를 참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햄버거를 정말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저기 옆에서 맛있게 햄버거를 먹는 조카의 햄버거를 빼앗아 먹으면 안 된다. 경찰이 아무리 몸이 괴롭고 피곤하다고 하더라도 옆에서 벌어지는 범죄 현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처럼 도덕법칙은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도덕법칙은 당연한 것을 지키면 될 뿐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 도덕법칙은 자율로서 자신이 세우는 것이라 말한다. 즉, 이 법칙이 무엇인지는 오롯이 나의 자유에 달려있다. 그러나 칸트의 요점은 이 법칙을 언제나 그리고 확고하게 고수하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몸이 힘들다고, 내가 지금 몹시 허기져 있다고 범죄 현장을 외면하거나 강도 행위를 벌이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세운 그 원칙을 공고하게 유지하면 도덕법칙을 지켜나갈 수 있다. “자율적으로 행하되 그 행위가 도덕법칙인 한에서 행동하자”.(111쪽) 자유는 언제나 책임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칸트처럼 하루하루 삶의 루틴을 만들어 살아가는 일은 분명히 고되고 힘든 일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가 위대한 인류의 스승인 이유는 엄격하게 우리를 괴롭히는 쓴소리를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선생님들의 말은 언제나 옳지만 듣기 싫은 소리로 되어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위대한 일은 언제나 고되고 힘든 법이다. 시작하는 25년 새해, 칸트처럼 하루하루 나의 루틴을 정해 지켜나가며 위대한 일을 이뤄내보자.
서평자 함태원: 건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석사수료. 칸트 철학을 공부하고, 주된 관심사는 칸트의 실천철학 및 윤리형이상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