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안내] 최종덕 저,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 무료 자유배포 전자책(PDF) 안내 [한철연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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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발간한 『한의학의 자연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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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감사의 글 —– 2발문(추천서문) —– 10 발문1: 박석준(한의학), 나는 왜 과학과 철학을 공부하는가 발문2: 구태환(철학), 탈근대 시선으로 읽는 한의학 발문3: 이정수(철학), 몸(정기신)과 함께 펼치는 자연스러운 철학적 사유 발문4: 전방욱(생물학), 생태학적 의학을 바라며 발문5: 오재근(한의학), 철학자가 살펴본 한의학 그리고 제언 발문6: 김교빈(철학),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 서문 —– 39 1장 기氣와 도道의 자연철학 —– 45 2장 관계망과 위상공간의 한의학 —– 90 3장 동형성의 자연관, 회절 자연주의 —– 129 4장 이제마의 인간의학 —– 168 5장 생로병사의 자연철학 —– 200 부록 : 자연지리와 삶, 한국 고대 재앙사 분석 —– 225 참고문헌 —– 252 색인(인명/주제) —– 263 |
♦ 책 속으로~
<저자소개>
저자 최종덕은 물리학과 수학 그리고 철학과 생물학을 공부해오면서, 현대자연철학의 지식을 삶의 수행성으로 변화시키려는 작업을 시도 중인 독립학자이다. 『공백의 실재』, 『생물철학』, 『의학의 철학』, 『비판적 생명철학』, 『이분법을 넘어서』,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 등 현대자연철학 관련 책을 다수 출간했다. 최종덕의 전문연구와 삶의 글쓰기 자료 모두를 저자의 홈페이지 philonatu.com에서 볼 수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4회|5. 인문학 수업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4회
6. 인문학 수업 (2)
E 여대 철학과 교수인 J 교수의 인식론 강의는 대단히 흥미로웠다. J 교수는 인식 이론에 관한 일반 강의를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매시간 간단한 명제를 제시하고 그것에 관해 A4 용지 한 장 정도로 학생들이 답변서를 써오도록 했다. 그리고 학생들 답변서를 읽으면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으로 수업 시간을 채웠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완전히 토론식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J 교수가 첫 시간에 내준 숙제는 “자살로서 복수를 할 수 있는가?”였다. 이에 관해서 찬반으로 답변을 쓰면 된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복수는 그것을 지켜볼 주체가 있어야 하는 데 자살한 이후에는 전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논지를 적은 것이다. 그런데 정교수는 이것을 보고 ‘Excellent!’라고 점수를 주었다. 내가 이 떡밥을 물고서 생각한 바가 있다. “아, 나는 정말 철학이 맞는 거 같아.” 나중에 학위를 받고 우연히 학회에서 J 교수를 만나 이 이야기를 했더니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거진 30년 전의 일이라 기억을 못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J 교수가 이끈 수업은 내가 철학의 문제의식을 탐구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인문학에 관심갖는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문사철과 같은 학문들이 나의 관심과 체질에도 맞는 느낌이다. 문과대를 드나들면서 문과대의 전형적인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기도 했다. 그들과 술도 많이 마시고 토론도 많이 하면서 분과대 분위기에 서서히 적응해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진로와 관련해 결정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계속 공부하려면 대학원에 진학을 해야 한다. 일단 전공과 관련해서도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가, 아니면 점점 흥미를 갖게 된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내가 집에서 대학원 학비를 보조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런 상태에서 대학원 입학 시험에 합격한다하더라도 어떻게 입학금과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을까가 걱정이었다.
1982년에 접어들자 대학가는 연일 데모가 일어났고, 대학가나 그 주변은 매캐한 체루 가스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등교를 할 때는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호신용 무기를 들고 교문에서 짭새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대학은 이제 매일같이 전투를 치르는 전장(戰場)과도 같았다. 학생들의 마음도 점점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장한 짭새들이 최루탄을 터트리면서 학교로 밀고 들어오고, 그것을 막기 위해 돌팔매질을 할 때는 전쟁이 따로 없었다. 매일 그런 전투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심리 상태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강의는 수시로 휴강이 이루어져서 한 학기 제대로 수업을 한 기억이 요원할 정도다. 그 와중에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스타디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 세미나는 학생들의 일상적인 공부 방식이었다. 70년대에는 주로 학내 이념 서클에서 진행되었던 세미나가 80년 대는 대부분의 학생들의 일상적인 공부 방식이었다. 80년대의 의식화 작업은 이렇게 선후배 동료 간에 이루어지는 세미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끊임없이 전투에 임할 전사를 배출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한국의 70-80년대의 학습 방식은 세계의 투쟁사에서도 귀감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학생들의 학습에 대한 욕구는 대단했다. 워낙 책이 없었던 시대라 책에 대한 욕구도 컸다. 어쩌다 용돈이라도 생기면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구입하곤 했다. 집의 책장에 책이 한 권 두 권 쌓이는 것을 보는 것도 낙이었고 자부심도 컸다. 그 당시는 단순히 욕구가 아니라 문제의식도 컸다.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권리인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가, 왜 한국 사회는 이 모양 이 꼴인가,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대학생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등으로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의식들이다. 물론 이런 시대 현실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노는 데 열중하는 낭만파나 아니면 출세가 보장된 고시 공부에 몰두하는 고시파들도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학생들은 회색분자로 치부되곤 했지만, 그들 역시 시대 문제로 인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 당시 치열한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경우도 많았다. 한 마디로 요즘 학생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공감하기도 힘든 대학 생활이었다. 단순 비교가 쉽지 않겠지만,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 비하면 요즘 학생들은 너무 나약하고 무책임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26- 감각적 성질과 대타 존재[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6- 감각적 성질과 대타 존재
1)
지난 글에서 헤겔이 존재론 2장에서 전개한 현존 개념을 살펴보았다. 현존은 가장 직접적으로 인식된 감각적 확신의 세계다. 이 세계는 가장 직접적이기에 가장 완전한 진리의 세계이며 가장 풍요로운 세계로 간주되어 왔다. 비트겐슈타인이 원초적 명제로 보여주려는 세계, 아도르노가 미메시스를 통해 그려낸 세계가 바로 이 세계다.
그러나 반성적 사유를 무기로 삼고 있는 헤겔이 보기에 이 세계는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 존재의 세계다. 즉 플라톤이 말한 토 헤테론의 세계다. 여기서 어떤 규정은 잠시도 멈춤 없이 다른 규정으로 전환하니, 간단히 말해 명멸하는 세계다. 이 세계는 아마도 우리가 악몽 속에서 만나는 세계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가장 아름다운 직접 진리의 세계가 다른 한편으로 악몽과 같은 명멸하는 세계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헤겔의 반성적 사유가 지닌 특징이다. 어떤 것은 항상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2)
이제 본격적으로 이 현존의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전개해 나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데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것이 있다. 1권 존재론 2장 현존 장은 헤겔이 재판에서 초판의 내용을 엄청나게 수정해, 언뜻 보면 헤겔이 초판과 재판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간단하게 초판과 재판의 목차를 비교해 보자.
초판 현존 |
재판 현존 |
||
A |
현존 그 자체 |
현존 그 자체 |
|
1 |
현존 일반 |
현존 일반 |
|
2 |
실재성 |
질 |
|
a |
타자 존재 |
||
b |
대타 존재와 즉자 존재 |
||
c |
실재성 |
||
3 |
어떤 것 |
어떤 것 |
|
B |
규정성 |
유한성 |
|
1 |
한계 |
어떤 것과 다른 것 |
|
2 |
규정성 |
특정성 상태 한계 |
|
a |
규정 |
||
b |
상태 |
||
c |
질 |
||
3 |
변화 |
유한성 |
|
a |
상태의 변화 |
직접적 유한성 |
|
b |
당위와 한계 |
한계와 당위 |
|
c |
부정 |
유한의 무한으로 이행 |
|
c |
무한성 |
무한성 |
|
1 |
유한성과 무한성 |
유한성과 무한성 |
|
2 |
유한과 무한의 상호작용 |
유한과 무한의 상호작용 |
|
3 |
무한의 자기 내 복귀 |
긍정적 직접성 |
위의 표면 보면 도저히 초판과 재판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초판과 재판 사이의 상응하는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초판에서 A절에서 다룬 ‘현존과 타자 존재’, ‘대타 존재와 그 자체[즉자] 존재’가 재판에서는 B절 1항에서 ‘어떤 것과 다른 것’이라는 제목 속에 함께 다루어진다.
초판에서 B절에서 다룬 ‘규정과 상태’, ‘내재 존재와 한계’는 재판에서도 B절 2항에서 다루어진다. 제목은 ‘규정, 상태, 한계’다. B절 3항은 초판이나 재판에서 모두 ‘당위와 한계[제한]’을 다루고 있어서 공통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헤겔은 초판에서 산만하게 전개한 내용을 재판에서 한 데로 집중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초판에서는 B절에서 ‘내재 존재와 한계’가 ‘규정과 상태’보다 앞에 나온다. 반면 재판에서는 ‘내재 존재와 한계’가 ‘규정과 상태’ 다음에 나온다.
아마 헤겔이 재판에서 결정적으로 수정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우리가 헤겔이 수정한 것이 옳다고 받아들인다면, 재판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서 현존 장을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헤겔이 논리학에서 각 개념은 추상적이고 단순한 것에서 점차 구체적이고 복잡한 것으로 나가니, 그리고 실제로 ‘규정’이라는 개념보다는 ‘내재 존재’라는 개념이 더 복잡하니, 재판의 순서가 헤겔 논리학의 개념에 비추어서도 정당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재판의 순서에 따라서 헤겔의 현존 장을 설명해 나가고자 한다.
3)
재판의 전개 방식에 따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A 절 |
a. 현존[질]과 타자 존재, 양자의 통일로서 대타 존재 |
b.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 양자의 통일로서 실재성[Realitaet: 어떤 것etwas] 또는 규정성[Bestimmtheit] |
|
B 절 |
c. 규정[Bestimmung]과 상태[Beschaffenheit], 양자의 통일로서 한계[Grenze] |
d. 내재 존재[In Sich Sein]와 한계, 양자의 통일로서 제한 |
|
e. 당위와 제한[Schranke], 양자의 통일로서 유한성 |
|
C 절 |
f. 무한성과 유한성, 양자의 통일로서 대자 존재 |
이상과 같이 정리하면, 어떤 리듬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대립하는 X항과 -X항이 나타나서 양자가 통일되면, 그 통일된 Y항이 새로운 대립에서 -Y가 되고 그것에 대립하는 X항이 다시 출현하는 식이다.
과연 이런 전개 방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런 식의 리듬만 보면 마치 신비한 변증법을 보는 듯하니, 마치 신이 자기를 전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이라면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다양한 단계를 거쳐나갈 필요가 있었을까? 그저 단순하게 최종적인 결과인 종적 물질을 산출하면 되지 않았을까?
더구나 당혹스러운 것은 헤겔이 현존 장을 전개하면서 구별한 개념들 즉 질, 실재성, 규정성, 규정, 내재 존재, 당위, 유한성 등 어떻게 보면 유사한 개념들이 어떤 구별이 있는지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더구나 재판의 경우 헤겔은 이 개념들을 순서에 따라 사용하지만, 초판의 경우 이 개념들이 마구 뒤섞여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목차에서 보듯 초판에서 질이라는 개념은 세 번이나 반복된다.
더구나 ‘타자 존재’나 ‘대타 존재’, ‘규정성’과 ‘규정’은 단어도 유사하고 ‘실재성’, ‘규정성’, ‘유한성’이나 ‘한계’와 ‘제한’은 모두 유사한 개념이고 ‘그 자체 존재’나 ‘내재 존재’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런 혼란을 뚫고 헤겔의 현존 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필요하다. 이미 앞에서 필자는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의 전개 과정과 논리학에서 개념의 전개 과정이 평행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앞의 글에서 헤겔이 논리학에서 현존이라는 개념을 전개하면서 정신현상학의 감각적 확신에 나오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이 전개되는 과정은 우리의 인식 경험이 축적되면서 개별자에서 일반자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존 장에서 위와 같은 논리적 개념이 전개되는 것도 그런 경험의 발전에 비추어 본다면, 이해되지 않을까? 즉 논리적 개념이 위와 같이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무슨 신비한 조화가 아니라, 경험의 발전 정도에 따라서 일어나는 전환이라는 것이다.
4)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 장을 보면, 최초의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규정[질: Qualitaet]은 곧 이런저런 대상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것이라는 사실 밝혀진다. 예를 들어 감각적 규정인 빨강은 처음에는 가장 개별적인 규정이었으나, 사과 양귀비 입술 등에 공통으로 속한다. 이 경우 이제 질이라고 하기보다는 성질[Eigenschaft]이라고 말해진다.
마찬가지로 논리학에서 현존, 즉 단 일 회만, 한순간 나타나는 개별적인 질은 나타났다가는 곧 사라지니, 붙잡을 도리가 없다. 명멸하는 이 세계가 앞에서 말한 현존과 타자 존재의 세계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 경험이 조금 발전하면, 이제 일반적 성질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빨강’이나 ‘단맛’ 등의 감각적 성질이다.
이 감각적 성질은 반성적 사유에서 볼 때 이미 다른 감각적 성질과 구별된다. 현존의 질 역시 타자와 구별되지만, 여기서는 모든 것이 일회적이니, 대체 서로 구별되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일회적 현존 세계는 무차별하다고 한다.
“일회적이니 구별될 수 없다”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구별이란 항상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적 사유를 통해서만 일어난다. 오직 차이만 있다면 그 차이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현존의 세계가 무차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감각적 성질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이미 일정한 사유의 틀을 전제로 한다. 빨강은 파랑과 구별되는 차이를 지닌다. 여기서 빨강이나 파랑은 색깔이라는 틀 안에서 차이이고, 빨강은 파랑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빨강이고 그것은 파랑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점은 이미 구조주의를 통해 널리 확산한 주장이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처럼 다른 것과 구별된 것으로서 어떤 것 즉 반성적인 방식으로 규정된 것이 헤겔이 말하는 대타 존재다.
“현존을 비존재를 자체 내에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면 본질적으로 규정된 존재, 부정된 존재 즉 타자이다. 그러나 현존은 부정당하는 가운데서도 동시에 자기를 유지하니, 이런 것을 다만 대타 존재라 한다.”(논리학, 1판, GW12, 62)
다만 부정당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타자 존재다. 그러나 부정당하면서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기에 대타 존재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별되는 가운데서도 일반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5)
이 감각적 성질은 일반적이므로 헤겔은 이것이 ‘그 자체 존재’를 갖는다고 한다. 즉 그것은 “타자에 의해 부정당하는 가운데서도 자기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부정당하는 측면만 보면 대타 존재다. 그러나 대타 존재는 그 속에서도 자기를 유지하는 일반성을 갖는데, 이 일반성이 곧 대타 존재의 이면인 그 자체 존재다.
“현존은 그 자신의 비현존 속에서조차 자기를 유지하니, 곧 존재다. 그러나 현존은 존재 일반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의 비현존과 대립한 상태에 있으니 타자에 대한 자기의 관계와는 대립하는 자기 관계로서 존재이며 자기의 부등성에 대립하는 자기 동등성으로서의 존재이다.”(논리학, 1판, GW21, 62)
동등성과 부등성, 타자와 대립하는 관계와 자기와 동일한 관계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적일 때 그것이 바로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다.
여기서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가 서로 구별되는 성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성질이 그 자체 존재이면서 동시에 대타 존재다. 대타 존재가 없으면 그 자체 존재가 될 수도 없고, 그 자체 존재가 없으면 대타 존재가 될 수도 없다.
헤겔에 따르면 그 자체 존재는 타자 존재에 대립한다. 그러나 그 자체 존재는 “비존재마저도 그 자체에서 간직하니 왜냐하면 그 자체 존재 자체는 곧 대타 존재의 비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또한 대타 존재는 타자 존재에 대해 있는 것이며, 이 대타 존재는 “오직 그 자체 존재를 지시하는 비현존이니 이것은 마치 역으로 그 자체 존재가 대타 존재를 지시하는 것과 같다.”(논리학, 1판, GW21, 62)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가 동일한 것의 양면이라는 주장은 재판에서도 여전히 반복된다.
“두 계기는 동일한 것 즉 어떤 것의 규정이다. 어떤 것은 대타 존재로부터 벗어나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한에서 그 자체적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하나의 규정 또는 상황을 그 자체에서 가지니 이 상황이 그 자체에서 외적인 것 즉 대타 존재인 한에서 그렇다.”(논리학, 2판, GW21, 108)
“어떤 것은 그 자체 존재인 것과 동일한 것을 또한 자신의 표면에서 가지며 거꾸로 대타적인 것 역시 그 자체에서 가진다. 어떤 것은 두 계기의 동일성이며 양자는 그 속에서 불가분리적이라는 규정에 따라서 볼 때 이것이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의 동일성이다.”(논리학, 2판, GW21, 108)
6)
헤겔에게 양자의 통일은 실재성이다. 이런 것이 감각적 성질이다. 이런 감각적 성질 즉 대타 존재와 그 자체 존재의 통일인 실재성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사유와 언어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이전 현존의 세계는 사유할 수도 언어화할 수도 없는 세계였다. 그러나 감각적 성질은 일반적인 것이니 언어로 규정되고, 사유될 수 있다. 이것은 언어적으로 표현된다면, 질적 개별 명제로 표현된다. 즉 ‘이것은 빨강이다’라는 명제다.
하나의 실재성이 있다는 것은 반성적 사유에서는 그와 다른 실재성이 있다는 말이 되고, 그러면 둘 이상의 실재성이 서로 관계하면서 어떤 것이 된다. 어떤 것[etwas]이 등장하면서 논리적 개념은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라는 개념 쌍은 ‘규정과 상태’라는 개념 쌍으로 변화한다. 이런 변화가 있으려면 우리의 인식 경험이 감각을 넘어 지각으로 발전해야 한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3회|5. 인문학 수업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3회
5. 인문학 수업 (1)
암자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방학도 끝나가기 때문에 나는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랫동안 수염을 깍지 않아서 턱수염이 많이 자랐다. 산에서 있다 보니 다소 거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간에서 다소 달라진 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로 복귀하자마자 2학기 등록을 마치고 수강 신청할 때 나는 법대 과목 보다는 주로 문과대와 신과대 과목으로 수강표를 짰다. 이제 심적으로도 법대와는 완전히 결별했다. 문과대에서는 영문과의 O 교수의 햄릿 강의를 신청했고, 사학과의 K 교수의 농업 경제사 강의도 신청을 했다. 사회학과에는 당시 새로 부임한 J 교수 수업을 신청했다. J 교수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했고, 종교 사회학자로서 미국 대학 내 지명도가 높았다. 철학과 과목도 하나 신청했다. 철학과에서는 P 교수가 안식년이기 때문에 이화여대의 J 교수가 대신 강의하는 인식론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신과대의 유명한 H 교수 강의는 그 이후로도 한 3학기 정도 들을 정도로 열심히 수강했다. 외부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H 교수는 Y대가 자랑하는 천재였다. H 교수는 원래 교회사 전공이지만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사고와 복잡한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도식화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항상 만면에 웃음기가 돌면서 거침없는 입담으로 강의하던 H 교수의 수업을 제대로 이해는 못했어도 지적으로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아했다.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을 때는 참으로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정법대 4년을 다니면서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유일하게 정치학과의 L 교수 강의를 들을 때 한 번 경험했을 뿐이다. 긴 머리를 뒤로 넘기는 오드리 햅번 흉내를 내면서 “권력은 도취적이다.”(Power is intoxical, Acton경)이라고 외치던 L 교수의 정치학 강의가 그나마 나의 지적 욕구를 채워 주었을 뿐이다. 그 당시 법대 교수들은 각기 그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던 교수들이었지만 내가 워낙 법대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반면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행정관으로 바뀐 낡은 문과대 건물은 대부분 소강의실로 이루어져 있다. 기껏해야 열 댓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덕분에 선생과 학생들 간의 공간적 거리가 가깝고, 학생들 상호 간에도 유대가 적지 않았다. 그 공간에는 대학의 낭만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좋은 인문적 공간을 행정 공간으로 바꾸어 버린 인간들이 지금 대학을 운영하고 있으니 대학이 기업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문과대의 유명 교수들의 강의를 들었다. 앞서 언급한 사학과의 K 교수는 선비풍의 조용한 용모와 다르게 강의는 대단히 열정적으로 했다. 조선에도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유물사관에 입각해 설명하던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나에게는 K 교수가 학생들의 수많은 질문에 대해 일일이 답변해주는 친절한 면모도 인상적이었다. 국문과에서는 당시 강사로 출강하던 『오발탄』의 작가 이범선이 ‘창작론’을 강의했다. 당시 나는 창작에 내가 전혀 소질이 없다고 생각해서 중도에 포기했는데 두고두고 후회했다. 사회학과에 새로 부임한 J 교수의 수업도 열심히 들었다. 그는 1973년에 출간된 미국 사회학자 다니엘 벨의 The Coming of Post-Industrial Society 1973 을 교재로 삼아 강의했다. 지금은 다니엘 벨의 이론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지지만 당시 한국은 산업화 단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단계에서 벌어지는 독재와 자유, 인권과 같은 가치들을 둘러싸고 갈등이 첨예한 사회였다. 특히 1980년도에 일어난 광주사태는 많은 대학생들에게 트라우마처럼 작용했다. 반면 테크놀로지의 환상을 자극하는 후기 산업 사회 이론은 우리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아서 수업 시간 내내 그 선생하고 설전을 많이 벌였다. 돌이켜 보면 미국에서도 지명도가 높은 대학자에게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까불었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그 당시 나를 위시한 학부생들의 문제의식은 대단했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은 산업 사회에서 후기 산업 사회로 넘어가는 사회 발전론을 설명하고, 지식과 기술이 후기 산업 사회의 계급 구조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기술했다. 더 나아가서 이런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사회학적 개념과 사회 계획에 관심을 가지고, 궁극에는 누가 후기 산업 사회를 지배할 것인가라는, 지금 보면 대단히 상식적일 만큼 당시 상황을 기술하고 도래할 미래를 전망한 책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그 책은 버터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양키들 이론 정도로 뿐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그 책이 한국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은 아닐까요? 왜 우리가 이책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하는 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남이 차려 놓은 상에 앉아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당돌한 형국이다. 이런 도전적인 자세를 보고 J교수는 혀를 끌끌 찬다. 이건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쇼비니스트의 행태가 아닌가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의 내용은 선진국 미국에서 대단히 호평을 받고 있어요. 산업 사회의 현실과 도래할 탈 산업 사회에 대한 전망에서 이 책만한 분석이 없지요. 지금 있는 현실만이 아니라 사회 발전의 전망에서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 대해 연구하는 이론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선생님 말씀과 달리 현실 적합성이 없다고 한다면 한낱 공염불이 아닐까요? 한국의 현실을 보세요. 한국은 1960년대 세계 최빈국의 상황을 벗어나 수출 입국에 돌입하면서 저임금 과노동으로 엄청 시달리고 있지요. 가까운 구로 공단에 한 번 가보세요. 후기 산업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뜬구름 잡는 환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한국은 유신 독재를 거치면서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했고, 80년대에 들어오자마자 광주에서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한 경험도 안고 있습니다. 이런 한국적 현실에서 명색이 사회학을 한다고 하면서 선진이론이라는 명목으로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과연 그게 설득력이 있을까요?”
나의 당돌한 이야기에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J 교수도 이 상황을 숙지하고 있었고, 이런 나를 꺽어 놓지 않으면 수업 시간 내내 시달릴지 모른다고 예감을 했을 것이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2회|4. 선택과 탐색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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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탐색 (4)
“그러나 당신이 갈구하는 사랑이 무엇이오? 나의 가슴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당신이 찾고 있는 그 사랑의 샘의 내용물이오. 당신은 정녕 진실한 사랑을 찾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순수한 사랑이 아니오. 내 눈에 비치는 것은 감각적이며 말초적인 언어의 유희에 당신의 순수한 혼을 흥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소. 왜 사랑을 세속적인 가치에 팔아 버리려고 하오? 보다 나은 대상, 보다 나은 사랑, 내가 당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걸고서 이야기하되 결코 사랑에는 보다 나은 것이라고는 없다고 맹세하오. 사랑은 그 자체이오. 거기에는 조건이 붙을 수가 없소. 대가를 바랄 수도 없는 것이오. 더욱이 경제적인 가치에 사랑을 결부시키려고 한다면 정말 잘못 생각한 것이오. 황금의 신과의 교제는 정말이지 사랑의 탈을 가장한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짓거리요. 사정이 이러할진대 왜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그러한 것들과 결부시키려고 하오. 안타깝소.”
사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그녀와 나는 어울리기 쉽지 않은 배경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회사에 들어갔다. 워낙 성격이 쾌활하고 사교성이 많아서 회사에서도 바로 인정을 받았다. 그녀는 70-80년대 한국의 건설 붐을 주도하던 건설 회사에 다녔다.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있으니 그녀가 나에게 눈을 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빨리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편지는 단순히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고통은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이런 고통으로 인해 실존의 위기를 느끼면 더욱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당신으로 인하여 나는 지금 커다란 정신적인 진통을 겪고 있소. 내가 지녀 왔던 철학의 근본마저 뒤흔들리고 있소. ‘전체는 진리이다’는 헤겔의 말과 시민 사회의 주축 가치는 화폐의 신이 지배하는 물신주의임을 역설한 마르크스의 말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나의 머리를 혼돈의 나락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소. 일찍이 내가 헤겔에 접하기 전에 나는 어떤 계기로 인하여 인간 -개인-의 삶은 전체적 삶 속에서 비로소 조화와 생명을 얻는 것이라 확신했소. 해서 이러한 전체적 삶을 통한 인간 해방의 실현을 위하여 기꺼이 나의 작은 몸을 바치리라 결심했소. 불교에서 말하는 소신성불(燒燼成佛),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삶이며 인생관이라고 확신했소. 그러기에 나는 헤겔 철학에 접하는 순간 지적 안식처를 발견했다고 느낀 것이고 곧 마르크스의 실천 철학에 매혹 당한 것이오.”
초보적일지 몰라도 당시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생각을 굳혔고, 새로 공부를 시작한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지난 1년 동안 유치장 동기들과 해온 세미나를 통해 상당 부분 강화되었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내가 본격적으로 철학을 하기 시작하면서 수행자의 화두처럼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생각의 알파이자 오메가 역할을 했다. 나의 철학적 캐리어는 바로 헤겔과 마르크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철학과 감성적으로 느끼는 철학 간에는 차이가 없을 수 없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편지글에서 사랑에 좌절한 젊은 청년의 감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요소는 개인 대 전체, 고난과 행복, 육체와 영혼, 차안과 피안, 투쟁과 승리등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열된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소. 예컨대 일 개인을 들추어 본다 할지라도 그에게 작용하는 변수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환경적, 심리적 등의 수다한 것이 있소. 전체를 사상하고 단지 심리적 측면을 고찰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그 오묘하고 미묘한 움직임이란 우리를 매번 당혹스럽게 만드오. 더욱이 개인의 활동 및 사상의 흐름이 경제적으로 규정 받는 영역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전체와 관련이 커지고 동시에 그 역으로 고립을 자초하고 미분화된 심리적 고독이 증대되어 가는 것 등은 단순히 헤겔적 사유 양식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것이오. ‘전체는 진리이다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은 영원히 개인일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인 절대 고립의 오뇌가 현대인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오. 한 인간의 사회 경제적인 규정 조건을 파악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이상의 심리적 정신적 소외감의 해결을 위한 진지한 노력도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현재의 나의 생각으로는 전체와 관련시킨 인간의 유적 본질의 실현이라는 마르크스적 접근 방식으로는 어려운 것이라 믿어지오. 정말이지 실존 상황에서 느끼는 개인의 자기의식의 분열은 법증법적 운동에서 보여지는 자기의식의 지양이라는 언어의 유희로서 위안 받을 수 없는 괴로운 것이오. 더욱이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느끼는 괴로움도 아니기에 그것이 더욱더 가중되는 것인가 보오. 케어케고르가 말하는 신 앞에서 선 단독자의 처절한 사투라고나 할까,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메카니즘의 차가운 환경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이 물신주의를 헤어나지 못하고 좌절하는 아픈 경험의 진상이오. 이러할진대 우리가 어찌 절대, 전체라는 거대한 언어를 들먹이면서 유토피아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것이오.”
“전체는 진리이다.”는 헤겔이 그의 주저인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사용한 유명한 명제이다. 반면 이와 완전히 대조되는 ‘신 앞에서 선 단독자’라는 명제는 키어케고르의 잘 알려진 명제이다. 그 둘은 전체와 개인을 각각 대변하는 사상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소나기가 밤새 내리던 산속의 암자에서 신앙 고백을 하듯 머리는 헤겔을 따르지만 마음은 키어케고어를 따른다고 한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 구절은 이런 감성을 전도서의 구절을 끌어들여 더욱 확인시켜 준다.
“하물며 당신의 사랑도 그러하니 나의 마음은 심히 안타깝소.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랑도 헛되고 진리도 헛된 것이니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이러다가 허무주의의 나락에 빠지지 않을까 두렵소. 당신이여, 이제 나를 잡아 주오.”
한참 그녀를 향한 장문의 편지를 쓰다 보니 어느새 비도 그치고 하얗게 날이 새고 있었다. 우거진 숲에서는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들리고 있었다. 내 머리도 점점 더 맑아지고 있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25-현존과 ‘to heteron’[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5-현존과 ‘to heteron’
1)
논리학 1부 1권은 존재론은 3편으로 나누어진다. 그 가운데 1편은 1장 존재, 2장 현존, 3장 대자 존재로 이루어진다. 1편 전체는 질을 다루고 2편으로 넘어가면서 양으로 이행한다.
앞에서 서술한 1장 존재론은 생성이라는 운동을 다룬다. 이 운동은 발생과 소멸의 끊임없는 상호 이행이며, 그런 이행이 일시적으로 균형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이 곧 현존이다. 필자는 이런 존재의 운동을 헤라클레이토스가 들었던 촛불의 비유로 설명한 바 있다.
필자는 논리학과 인식론은 서로 평행을 이룬다고 본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인식의 이행은 시간상에서 일어나며, 이런 이행이 내면화(Erinnerung: 기억)되어 논리가 전개된다고 했다. 전자는 형태의 운동이며 후자는 계기의 운동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것은 감각적 확신이다. 논리학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논리 규정을 찾자면 1편 2장에서 다루어지는 ‘현존’에 해당한다. 만일 논리학과 인식론이 평행을 이룬다는 가정을 유지한다면, 1장에서 다루는 존재의 운동은 인식론에서 어떤 인식에 해당하는 것일까를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평행이라는 가정이 무너지는 것일까? 필자는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필자는 1권 존재론의 1편 1장에서 다루는 존재의 생성 운동은 존재론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운동 즉 상호 이행의 운동을 서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은 2권의 1편 1장(가상)과 3권의 1편 1장(개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가상은 2권 본질의 운동 즉 반성 운동을 일반적으로 서술하며 개념은 3권 개념의 운동 즉 발전을 일반적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각 권이 1편 1장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대체로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서술한 인식의 전개 과정과 평행을 이룬다. 이점은 앞으로 논리학 산책을 통해 논리학의 각 규정이 인식론의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를 밝히면 대체로 인정될 수 있는 가정으로 본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는 인식론이나 논리학의 전개 과정 밑바닥에는 헤겔이 칸트로부터 받아들인 범주표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12개의 판단형식으로 이루어진 범주표가 인식론이나 논리학의 기본 설계도라고 볼 수 있다.
2)
이미 설명했지만, 존재의 운동은 이행 운동이다. 이런 이행의 운동은 존재자가 전개하는 운동 가운데 즉 본질의 반성 운동이나 개념의 발전 운동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추상적인 운동이며, 그러기에 가장 일반적으로 즉 모든 존재자에 적용되는 운동이다. 여기서 운동은 매개 과정도 없으며 발전적 연관도 없다. 다만 하나의 규정에 다른 규정으로 직접 이행하니, 그 모습이 곧 존재가 무로, 무가 존재로 단적으로 이행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화합물이나 생명체와 같은 것도 이런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즉 하나의 역학적 물체로 보는 가운데서는 마찬가지로 이런 존재의 이행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거꾸로 추상적 존재자에 적용되는 이런 운동을 화합물의 화학적 작용 과정이나 생명체의 생명 운동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서는 더 구체적인 운동 방식이 즉 반성이나 발전과 같은 운동 방식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존재와 무의 생성 운동 즉 발생과 소멸이 일시적 균형을 이루면서, 헤겔은 현존이 출현한다고 한다. 이 주장은 앞의 1장 끝에 헤겔이 제시한 내용이며 2장 현존을 시작하면서 다시 되풀이된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현존은 존재와 무가 단순하게 하나로 되는 것이다. 현존은 이러한 단순성 때문에 직접적인 것의 형식을 지닌다.”(논리학, 2판, GW 21, 97)
이런 서술을 보면 마치 순수 존재나 순수 무가 있어서 그것의 상호 운동을 통해서 현존이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순수 존재나 순수 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처음 가장 직접 발견하는 것은 사실 현존이다. 현존은 그냥 독립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 속에서 나타난다.
이 현존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주관이 설정한 개념 틀이 곧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이다. 여기서 개념 틀은 순수 존재라든가 순수 무와 같이 따로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관계 즉 생성하는 관계이다.
사유 속에서 보자면, 순수 존재와 순수 무가 통일되어 현존이 생성한다. 그러나 인식의 과정에서 본다면 최초의 인식 즉 감각적 확신에서 나타나는 현존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한 틀이 곧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이행 운동이다.
그것은 마치 공리와 정리 사이의 관계와 같다. 사실 우리가 인식 상 먼저 발견한 것은 정리이다. 이 정리들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공리가 추출되며, 이 공리를 구성하면서 정리가 서술된다. 이 점은 후일 마르크스가 연구 과정과 서술 과정을 대비한 것과 같다. 연구 과정에서는 구체적인 현실이 먼저다. 연구를 통해 이로부터 추상적인 원리가 발견된다. 서술에서는 추상적 원리가 먼저이고 이것을 구성하면서 구체적 현실이 설명된다.
헤겔도 이 점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체[존재와 무의 통일로서 현존]는 우리의 반성 속에서 그렇게 규정되며 아직 자기 자신에서 그렇게 정립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존 자체의 규정성이 정립된 것이라는 사실은 현존이라는 표현이 말해준다.”(논리학, 2판, GW 21, 97)
‘반성 속에서 그렇게 규정된 것’이라는 말은 현존이 존재와 무의 통일로서 규정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규정은 ‘반성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헤겔은 이제 현존의 모습 속에서 그런 운동이 즉 존재와 무의 통일이 입증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에서’ 그렇게 ‘정립될’ 것이다.
3)
그렇다면 현존의 모습이 어떠하길래 헤겔이 이를 ‘존재와 무의 통일’로 규정하게 된 것일까? 현존이란 우리의 의식에 처음 가장 직접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정신현상학에서는 감각적 확신의 대상이다.
헤겔은 이 현존의 모습을 ‘질[Qualitae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분석철학에서는 이 질을 더 확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감각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의식이 우리 밖의 외계와 가장 직접 부딪힐 때 나타나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처음에는 이 감각질이 가장 풍요하고 가장 진리인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의 의식이 외부의 대상과 직접 부딪히는 순간, 그 순간은 인식과 대상은 합일에 이르며, 그 순간은 어떤 비교할 수 없는 순간 즉 개별적 순간이며 그런 순간순간의 전체는 대상의 가장 풍요한 모습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된다.
그러므로 인식론에서는 항상 모든 인식의 토대를 이런 감각질에서 찾으려 했다. 대표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원초적 명제 속에서 이런 감각질의 인식을 찾으려 했으며, 아도르노가 양화하고 일반화하는 계몽적 인식을 거부하면서 미메시스를 통해 얻어지는 인식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도 이런 기대가 감추어져 있었다.
4)
그러나 헤겔은 이런 현존이 지닌 질은 의식이 대상과 순간적인 부딪힘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런 부딪힘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한, 매 순간 그 질은 사라지고 새로운 다른 질이 출현한다. 소위 ‘명멸[明滅]’한다는 표현이 있는데, 현존의 모습이야말로 이런 명멸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현존을 규정하면서 현존은 동시에 ‘타자 존재[Anderssein]’라고 말한다. 이 타자 존재란 현존 옆에 있는 또 하나의 현존이라는 의미라기보다 그 자신이 이미 자기와 다른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 타자 존재를 ‘자기 자신의 타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즉 질이 명멸하는 모습을 헤겔이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현존 자체는 본질적으로 타자 존재이며 이 타자 존재 속으로 이행한 것이다. 타자는 그와 같이 직접적이며 그의 외부에서 발견되는 것과 관계하지 않고 다만 본래적으로나 현상적으로 타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하여 타자는 곧 자기 자신의 타자이다.”(논리학, 1판, GW 12, 61))
“왜냐하면, 현존은 이에 못지 않게 비현존이고 즉 비현존으로서 현존이기 때문이다.이것은 자기 자신의 무로서의 현존이므로 이와 같은 자기 자신의 무는 마찬가지로 현존이기도 하다.”(논리학, 1판, GW 12, 60)
여기서 현존과 비현존의 상호 이행이 등장하는데, 이 기초 전제가 된 것이 곧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통일이다. 즉 현존의 명멸하는 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헤겔은 존재와 무라는 두 개념 틀을 사용한다. 이 명멸하는 모습이 곧 생성 운동 즉 발생과 소멸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런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생성을 통해서 현존을 보자면, 현존은 양자의 통일을 존재의 측면에서 본 것 즉 “존재로서의 통일”이며 타자 존재는 양자의 통일을 무의 측면에서 본 통일 즉 “비존재로서의 통일”이다.
만일 가정해서 우리가 우리 밖의 세계에 일정한 순간에 동시에 부딪힐 수 있다면 또는 이전의 것을 기억해서 새로운 것과 함께 떠올린다면(아직 우리는 이런 단계까지도 넘어가지 않았으나), 이 경우 우리는 하나의 현존 옆에 또 하나의 현존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의 현존과 그 옆에 있는 다른 현존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하나의 현존도 타자 존재로 이행하고, 다른 현존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타자 존재로 이행하니, 어떤 현존도 머무름이 없이 타자 존재로 변화하는 마당에 여기에 어떤 비교도 가능하지 않으니,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세계는 무차별적 세계로 표현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그러므로 양자는 어떤 것으로 규정될 뿐만 아니라 타자로서 규정된다. 따라서 양자는 동일한 것이며 양자 사이에 어떤 구별도 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의 규정의 동일성은 다만 외적 반성 즉 양자의 비교에 속한다. 그러나 타자는 일단 정립된 것이듯이 마찬가지로 이 동일한 타자는 자기 나름대로 사실 어떤 것과 관계 속에 있으나 또한 자기 나름대로 그 어떤 것 밖에 있다.”(논리학, 2판, GW 21, 106)
5)
헤겔은 플라톤이 그려낸 ‘토 헤테론[to heteron]’은 바로 이런 ‘자기 자신의 타자’로서 현존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자신의 타자로 되는 명멸하는 세계를 (또는 좀 더 발전하면 서로 무차별적인 세계를)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데, 아이가 어머니 자궁을 나와서 처음 보게 되는 세상이 있다면 다름 아닌 이런 세상이 아닐까? 또는 악몽 속에서 어떤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불쑥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모습과 닮았다고 할 수있을까?
언젠가 가을날 어느 산 정상에서 약간 기울어져 가는 햇빛에 반사된 억새꽃이 빛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뒤로 수없이 산에 가고 또 억새를 보았으나 결코 다시 그 억새꽃의 빛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 세상에 단 일회만 존재하고 곧 사라져 버린 그 모습은 심지어 기억 속에서도 남아 있지 않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판단할 수 있지만,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기억해 낼 수는 없다. 헤겔이 말하는 현존의 세계가 바로 그런 세계이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이런 질로 이루어진 현존의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이것’이라는(또는 ‘여기’, ‘지금’과 같은) 지시 대명사를 이용한다. 그러나 이것이 지시하는 어떤 것은 그 순간 이미 자기와 다른 타자 존재가 되니(예를 들어 지금은 낮인데, 바로 밤이 되고 등), 이것으로 포착하려고 의도했던 것은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무엇이나 지시하는 것 즉 어떤 ‘일반적인 이것’에 이를 뿐이다.
같은 이야기를 헤겔은 논리학에서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라는 말로 어떤 완전히 규정된 것을 표현한다 한다. 여기서 언어 즉 지성의 작품이 다만 일반적인 것을 표현한다는 사실 즉 이는 어떤 개별적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과 다르다는 사실이 간과된다. 그러나 개별적 이름은 일반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 없는 것이다.”(논리학, 2판, GW 21,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