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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강해(69)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9)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

 

[514a-517c]

* 이제 우리의 논의는 제7권에 들어섰다. 소크라테스는 선분의 비유에 이어 동굴의 비유를 꺼내 들면서 우선 그것의 기본 성격이  ‘교육받음παιδεία과 교육받지 못함ἀπαιδευσία과 관련해서 본 우리 본성φύσις의 상태πάθος와 비슷한 것’임을 밝힌다. 그런 연후 아래와 같이 상상해 보자ἀπείκασον는 말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한다. 동굴의 비유가 갖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그 내용을 최대한 살려 요약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C1> 결박되어 동굴 벽면 그림자들만 바라보는 상태

 

a) 지하에 있는 동굴σπήλαιον 형태의 거처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거처는 동굴의 폭만큼 넓은 입구εἴσοδος가 빛φάος 쪽으로 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려서부터ἐκ παίδων 다리σκέλος와 목αὐχήν이 묶여 있어ὄντας ἐν δεσμοῖς 머리κεφαλή를 돌릴 수 없는 채 앞πρόσθεν만 보게 되어있다.(514a).

b) 그들 뒤쪽으로는 위쪽으로ἄνωθεν 멀리 불빛φάος이 타오르고 있고, 그 불πῦρ과 수감자δεσμώτης들 사이에는 수감자들 위에 가로로 길ὁδός이 나 있고 길을 따라 담장τειχίον이 세워져 있다. 담장은 인형극 하는θαυματοποιός 사람들이 인형들θαῦμα만 보이게 사람들 앞에 쳐 놓은 가림막παράφραγμα같은 것이다.(514b-c)

c) 이 담장을 따라서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물건들과 돌이나 나무나 온갖 재료로 만들어진 인물상ἀνδριάς이나 다른 동물 모형ζῷα λίθινά을 담장 위로 쳐들고 다닌다.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면서 어떤 이들은 조용히 이것들을 들고 다닌다.(515a)

* 글라우콘이 ‘이상한ἄτοπος 비유εἰκών와 이상한 수감자들’이고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ὅμοιος 자들’이라고 말하고 아래와 같이 비유를 이어간다.(515a)

d) 그들은 저 불로 인해 자기들 맞은편 동굴 벽에 생긴 그림자σκιά들을 보는 것 외에 자신들의 모습이나 서로의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들 뒤에서 운반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만약 그들이 서로 대화διαλέγεσθαι를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들을 ‘있는 것들’τὰ ὄντα이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515a-b)

e) 그들의 맞은편에서 울리는 메아리ἠχώ도, 담장을 따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내는 중에 누군가가τις 소리를 내면φθέγξαιτο, 그들은 그 소리를 벽 위를 지나다니는 그림자가 내는 소리라고 생각한다.(515b) 그래서 그들은 인공물σκευαστής들의 그림자들만을 오로지 참된 것τὸ ἀληθὲς이라고 믿는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본성에 맞게φύσει 일어났을 때 즉 그들이 결박으로부터 풀려났을 때 그들의 어리석음ἀφροσύνη이 치유ἴασις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자고 말한다.(515c)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f) 누군가가 풀려나서는λυθείη 일어서서ἀνίστασθαι 고개를 돌리고περιάγειν τὸν αὐχένα 걸어가 빛φάος을 보도록ἀναβλέπειν 갑자기ἐξαίφνης 강제된다고ἀναγκάζοιτο 해보자. 그리고 그가 이 모든 것을 하면서 고통을 느끼고ἀλγοῖ, 전에 그 그림자들만을 보았던 원본들ἐκεῖνα을 눈부심μαρμαρυγή 때문에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보자.(515c-d)

g) 누군가가 그에게 전에는 그가 엉터리φλυαρία를 보았는데 이제는 ‘있는ὄντος 것’에 더 가까이 왔고 ‘더 있는μᾶλλον ὄντα 것’들을 향해 있어서 더 제대로ὀρθός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게다가 담장을 따라 지나다니는 것들 각각을 그에게 지목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대답을 강요한다면, 그는 당혹해하며 전에 보았던 것들을 지금 지목되는 것들보다 더 참된ἀληθέστερα 것으로 여길 것이다.(515d)

h) 그리고 또 빛 자체 αὐτὸ τὸ φῶς를 보도록 그를 강제한다면ἀναγκάζοι, 그는 눈ὄμμα이 아파서ἀλγεῖν 자신이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들 쪽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φεύγειν 하고 그것들이 지금 제시되는 것들보다 실제로 더 명확한σαφέστερα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515e)

 

<C3> 누군가에 이끌려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동굴 바깥에 도달한 상태

 

i) 거기서부터 누군가가 거칠고τραχύς 가파른ἀνάντης 오르막길ἀνάβασις을 통해 그를 억지로βίᾳ 끌고 가면서 태양의 빛τὸ τοῦ ἡλίου φῶς까지 완전히 다 끌고 가기ἐξελκύσειεν 전에는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면서ὀδυνᾶσθαι 끌려온ἑλκόμενον 것에 대해 화를 낼 것이다.ἀγανακτεῖν(515e-516a)

j) 그럼에도 그 누군가가 그를 태양의 빛까지 완전히 다 끌고 가서 빛에 도달하면 햇빛이 눈에 가득 차서μεστός 우리가 지금 참되다ἀληθής고 이야기하는 것들을 단 하나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가 위에 있는 것들을 보려면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에는 동굴 밖 실물들의 그림자들을 제일 쉽게ῥᾷστα 볼 것이고, 다음에는 인간들이나 다른 것들의 물에 비친 영상 εἴδωλα을 볼 것이다.(516a)

 

<C4> 동굴 밖 빛에 점차 익숙해져 실물들 자체를 보고 하늘도 본 후 마침내 태양을 보게 된 상태

 

k) 동굴 밖 실물들의 그림자들과 인간 및 다른 것들의 영상을 본 후에 차츰 익숙해지면 마침내 그것들 자체 αὐτά를 볼 것이다. 이것들을 보고 나서는 하늘οὐρανός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구경할 텐데, 낮에 태양과 태양의 빛을 볼 때보다 밤에 별빛과 달빛을 볼 때 더 쉽게 구경할θεάσαιτο 수 있을 것이다.(516a)

l)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태양ἥλιος을 보게 될 것이다. 태양 자신의 자리ἕδρα가 아닌 물이나 다른 데에 비친 영상들φαντάσματα이 아니라 태양 자신의 장소χώρᾳ에 있는 태양 그것 자체αὐτὸν καθ᾽ αὑτὸν를 보고 그것이 어떠한지 구경할 수 있을 것θεάσασθαι이다.(516b)

m) 그러고 나면 그는 비로소 태양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하게 될συλλογίζοιτο 것이다. 즉 태양은 계절과 해를 가져다주고 눈에 보이는 영역의ἐν τῷ ὁρωμένῳ τόπῳ 모든 것을 관장하는ἐπιτροπεύων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는 그들이 보았던 저 모든 것들의 원인αἴτια이다. (516b-c) 글라우콘 역시 그러고 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사람의 경우 아래와 같이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n) 그는 처음에 있던 거처οἴκησις와 그곳에서의 지혜σοφία, 그리고 그때의 동료 수감자συνδεσμώτης들을 상기하고서, 자신은 자신의 변화μεταβολή 때문에 행복한데εὐδαιμονίζειν 그들은 불쌍하다ἐλεεῖν고 여길 것이다.(516c)

o) 그런데 거기에서는 그들 사이에서 벽 위를 지나다니는 것들을 가장 예리하게 보고,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이 먼저 가고 어떤 것들이 나중에 가며 또 어떤 것들이 동시에 가곤 하는지를 가장 잘 기억하며,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그다음에 다가올 것을 가장 잘 예견할 수 있는 사람에게 명예τιμή와 칭찬ἔπαινος과 명예의 선물γέρας 등이 주어진다.(516c-d)

p)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와 칭찬 등을 탐내고 그들 사이에서 존경받고τιμωμένους 권세 부리는ἐνδυναστεύοντας 자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그곳에 있는 것들을 믿으며 그곳 사람들처럼 사느니, 호메로스 말대로 ‘제 땅도 없는 다른 사람 밑에서 머슴으로 밭일을 하는’ 처지가 되거나 또 다른 어떤 일을 겪더라도πεπονθέναι 차라리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516d-e)

q) 그리하여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시 동굴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다시 동굴로 내려가 예전의 그 자리에 다시 앉을 경우 그는 태양으로부터 갑자기ἐξαίφνης 왔기 때문에 눈ὀφθαλμός이 어둠σκότος으로 가득 차게 되어 눈이 익숙συνήθεια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516e)

r) 만약 그의 눈이 적응되기 전 침침한 상태에서 계속 수감 돼 있던 자들과 다시 그 그림자들을 분간하는γνωματεύοντα 시합을 벌인다면διαμιλλᾶσθαι 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위에 올라가더니 눈을 망쳐가지고 돌아왔으며, 올라가는 일은 시도해볼 가치조차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을 풀어주고λύειν 위로 데려가려는ἀνάγειν 사람은 어떻게든 손으로 붙잡아 죽일 수 있다면 죽일 것이다.ἀποκτεινύναι(517a)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동굴의 비유를 들어 그곳에 갇혀 사는 사람들과 그곳에서 풀려나와 태양을 보고 다시 내려간 사람의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마친 후에 이제 이 비유εἰκών 전체를 앞에서 이야기된 것들에 적용해야προσαπτέον 한다고 말한다.(517a) 즉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을’δι᾽ ὄψεως φαινομένην ἕδραν ‘감옥의 거처에’τῇ τοῦ δεσμωτηρίου οἰκήσει 대응시키고ἀφομοιοῦντα, ‘감옥에 있는 불빛을’τὸ δὲ τοῦ πυρὸς ἐν αὐτῇ φῶς ‘태양의 힘에’τῇ τοῦ ἡλίου δυνάμει 대응시켜야 한다. 그리고 ‘위로ἄνω 올라가는 것’ἀνάβασις과 ‘위에 있는 것들을 구경하는 것’θέαν τῶν ἄνω을 영혼이 가지적인 영역νοητὸν τόπον으로 등정ἄνοδος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517a)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하는 경우 내가 추측(기대)하는 바ἐλπίς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추측하는 것이 실제로 참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며 그렇게 참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다름 아닌 ‘알 수 있는 것의 영역에서 가장 마지막에 겨우 볼 수 있는 것’ἐν τῷ γνωστῷ τελευταία 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 καὶ μόγις ὁρᾶσθαι으로서 좋음의 형상‘이다.(517b)

* 좋음의 형상을 보고 나면, ‘모든 경우에 그것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의 원인’πᾶσι πάντων αὕτη ὀρθῶν τε καὶ καλῶν αἰτία이며, 가시적 영역에서 빛과 빛의 주인κύριος을 낳고 가지적 영역에서는 자신이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ἀλήθειαν καὶ νοῦν 제공하며, 또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ἢ ἰδίᾳ ἢ δημοσίᾳ. ‘지각 있게 행동할’ἐμφρόνως πράξειν 사람은 그것을 보아야만 한다.ἰδεῖν’(517c)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517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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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의 비유에서 묘사되는 지하 동굴은 위 쪽(입구 쪽)으로 거칠고 가파른 경사길 형태이지만 설명에 따라 횡으로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 위 정리 글에 나오는 다섯 단계(C1, C2, C3, C4, C5)는 플라톤이 구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동굴의 비유에서 거론되는 대상들을 보면 아래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앞서 살핀 선분의 비유에서 거론되는 대상들에 국한해서 보면 거의 상응하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플라톤의 비유들을 종합적으로 논의하고 이해하기 위해 그것들 간의 상응 관계를 단계별로 구분해 연구해 왔고 우리 논의 또한 설명의 편의상 그간 대체로 합의된 구분에 따른 것이다. 다만 C5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동굴의 비유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각별하게 언급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따로 구분해 표시한 것이다.

선분의 비유 L1 L2 L3 L4
영상 실물 도형들 형상들
동굴의 비유 C1 C2 C3 C4
모형들 그림자 모형들(인형들) 실물의 그림자 실물들

* 그러나 그 상응관계에 대한 이해가 비유들 전체 또는 플라톤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그 비유들에 나타난 요소들 전부를 어떻게든 상응시켜 통일적으로 이해해보려고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다. 말 그대로 비유는 다만 비유인데다 플라톤이 세 가지 비유를 든 것 자체가 이미 각 비유 나름의 취지와 목적이 따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을 고려하면 제시된 비유들 간의 모든 표현들을 마치 암호해독하듯 서로 연관지어 보려거나 특정 비유적 표현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려는 시도 자체가 오히려 비유의 진의를 왜곡시킬 수 있다. 게다가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인식의 대상들뿐만 아니라 그 외에 수감자들과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풀려난 수감자를 이끌고 가는 사람과 그 등정 과정에서 겪는 심리적 갈등까지 포함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실제로 동굴의 비유는 인식 상태를 기준으로 다소 도식적인 방식으로 기술된 선분의 비유에 비해 좀 더 다각적이고도 풍부한 요소들을 두루 포함하면서 기술 또한 매우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이러한 요소들을 어떻게든 다른 비유들의 표현들과 서로 비교해가며 무리해서 짜맞추려할 경우 플라톤의 진의는 당연히 왜곡될 수밖에 없다. 나중 또 거론되겠지만 미리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이를테면 선분의 비유에서 L2가 L1의 상위 인식 단계이듯이 동굴의 위 방향이 진리 인식에 가까운 쪽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C2에서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까지 모형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C1에 나오는 수감자들보다 인식의 위계 상 상위의 사람들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동굴의 비유에서 수감자와 모형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선분의 비유에서처럼 명백성을 기준으로 한 인식 능력상의 차이가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계급적 신분적 차이라 할 것이다. 차츰 드러나겠지만 온갖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이 이른바 정보를 왜곡하고 선동하는 정치 권력자들과 그들에 부역하는 지식인들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들은 풀려난 수감자들이 다다라야 할 인식 상 상위 단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로 반드시 피해가야 할 사람들이다. 설사 앎을 기준으로 본다고 해도 그들은 플라톤의 관점에서 결코 지자(智者)가 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선분의 비유 상 L1과 L2와 동굴의 비유 C1과 C2의 상응 관계는 인식의 대상들 즉 그림자와 모형들의 인식론적 차별성에만 한정해야지 그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확대해서 추정할 것까지는 없다. 굳이 동굴의 비유에서 사람과 관련하여 선분의 비유와 상응하는 단계가 있다면 오직 오름길의 과정에서 인식 상태가 변화 발전하는 수감자들의 경우 정도일 것이다. 또 동굴의 비유에서 모형을 들고 가는 사람들에 비교되는 사람을 들자면 수감자를 바깥 세계로 이끌고 가는 그 누군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동굴 속에 머물러 있거나 그것을 정당화하는 선동 정치가들이나 소피스트들이고 후자는 어떻게든 그것을 거부하고 진리에 다가서려는 자들 즉 철학자들이다.

* 이 점을 기본적으로 고려하면서 동굴의 비유에 대한 전체적인 고찰에 앞서 각 단계별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플라톤 스스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할 때 밝혔듯이 동굴의 비유가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 사항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과 교육받은 사람들의 본성과 관련한 상태의 변화라는 점이다.

 

<C1> 다리와 목이 결박되어 동굴 벽면 그림자들만 바라보는 상태

a) 이곳 수감자들의 상태는 말 그대로 결박되어 갇힌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수감자들을 ‘우리와 비슷한 자들’(515a)이라고 말한다. 죄를 지은 소수의 사람들이나 겪는 특수한 수감 상태를 플라톤은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혹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비유는 비유자의 생각을 좀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비유와 관련한 전체 상황 가운데 필요한 부분에만 한정하여 말 그대로 비유로 표현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플라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비유가 기본적으로 교육받지 못한 본성의 상태와 교육받은 본성의 상태를 그리고 있음을 고려하면 비유 상 수감의 상태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컨대 이곳에서 말하는 수감 또는 결박의 상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릇된 정보와 편견에 사로잡힌 채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본성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 일상의 표현에서도 우리는 잘못된 생각이나 편견에 빠져 있는 경우들을 표현할 때 ‘사로잡혀 있다’, ‘갇혀 있다’는 말을 쓰곤 한다. 종교적으로도 불교의 경우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기독교의 경우 ‘우리 모두 죄인이다’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b) 514b ‘위쪽으로’ἄνωθεν : 이 표현은 플라톤이 교육의 방향을 표현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이다. 특히 <테아이테토스>에서 ‘철학자가 누군가를 위쪽으로 이끄는 모습’(175b)은 <국가>에서 자신이 그렸던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동굴 바깥쪽으로 끌고 나가는 모습’(<국가> 515e)을 연상하며 쓰기라도 한 듯 내용이 아주 똑같다.(<소피스트> 216c, <파이드로스> 109a ff, 키케로 <신들의 본성>de nat. deor. II 95,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447—453도 참고) 그러나 앞서도 살폈듯이 불빛과 수감자들 사이 가로로 난 길을 모형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은 수감자들 위쪽에 있으나 그들이 수감자들보다 인식의 위계 상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 그리고 앞서 비유들 사이의 상응 관계를 논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을 거론한 바 있지만, 이곳에서도 어떤 연구자들은 C1의 수감자들이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말과 그 사람들이 ‘벽면의 그림자를 참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지나치게 연관시켜 C1과 L1의 상응관계가 갖는 한계와 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분의 비유에서 우리 일상의 사람들은 그림자가 아닌 실물들을 참인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은 동굴의 비유상 C1의 세계가 아니라 그림자의 원본 즉 모형들이 있는 C2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이란 말에서 ‘우리들’은 사실 차원에서 바로 우리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벽면의 그림자를 참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유 차원에서  우리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라는 점에서 등치해서  비교할 수는  없다.   L1과 C1을 같은 단계로 상응시킨 것은 앞서도 살폈듯이 인식 대상의 명백성을 기준으로 가장 낮은 단계인 L1 영상에 상응하여 모형의 그림자가 있는 C1을 상응시킨 것뿐이다. 그러한 비판은 두 비유들 나름의 취지와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사람이란 요소를 기계적으로 등치시킨 데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선분의 비유에서는 어느 단계에서도  사람이 논의의 직접적인 요소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비유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낮은 인식 단계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플라톤이 우리 일상인들 모두가 그림자들만 보고 산다고 여겼을 리도 만무하다. 이 모두 어떻게든 두 비유 간의 상응관계를 모든 요소나 모든 정황에 다 꿰맞추어 보려는 무리한 시도때문에 생긴 논의들이다.  동굴의 비유 상 C1에서 C2로 고개를 돌려 불빛을 보고 눈부셔하는 것과 달리 선분의 비유 상 L1 영상에서 L2 실물을 볼 때 누구도 눈부셔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 상 L1과 L2와 동굴의 비유 C1과 C2의 상응 관계는 인식의 대상들 즉 그림자와 모형들의 인식론적 차별성에 주목하여 적용한 것이지 굳이 무리해서 적용 범위에 사람이나 정황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크게 보면 C1이건 C2이건 간에 그것들 모두 인식의 대상의 측면에서 차별을 가질 뿐 그곳의 정황 모두는 선분의 비유 상 가시적인 세계 즉 믿음(doxa)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에서 인식과 진리의 위계상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 어쨌거나 각 비유들은 나름의 각기 다른 비유 목적을 갖고 말 그대로 비유로 표현된 것들을 어떻게든 일일이 다  연결 상응시키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상응관계의 통일성을 밝히는데 지나치게 집착하는 일부 전통 해석가들이나 또는 그것을 비판 또는 옹호하기 위해 비유 속 모든 표현들을 지나치게 논리적 요소로 환원시켜 분석적으로 살펴 보려는 현대 비평가들이나  그들 모두  플라톤이 각 비유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그 모든 논의에 중심에 놓지 않으면 배가 산으로 오르듯 플라톤 철학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다.  21세기 들어오면서 호메로스 시가에 대한 오랜 동안의 분석적 미시적 접근이 초래한 폐해를 반성하여 <Who killed Homer>(V. D. Hanson, J Heath, 2001)란 책이 출간되었는데 어쩌면 머지않아 비슷한 취지에서 <Who killed Plato>란 책이 출간될지도 모른다.

c) 인형극에서처럼 가림막 담장 위로 모형을 들고 소리 내며 오가는 사람들은 왜곡된 정보와 사실을 생산하고 그것을 수감자들에게 전달하는 사람들, 즉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당대 기득권자들과 선동 정치가들 그리고 그들에 영합하고 부역하는 소피스트들 내지 가짜 철학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수감자들은 이들의 선동에 사로잡혀 사물과 사태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된 정보로 서로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일삼는 대다수의 사람들, 플라톤의 표현대로 ‘우리와 비슷한 자들’을 가리킨다.

d) 이곳에 그려진 수감자들의 모습은 서로에 대한 배타적 의심이 증폭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일방적으로 지배층이 만들어 유포한 정보만을 마치 자신이 직접 보고 확인한 사실로 믿고 살아가는 당대 아테네 대중들을 표현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대중들은 대중의 집단 심리를 이용한 권력자들의 현란한 수사술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과 합리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 내지 의욕 자체를 상실한 채, 거짓과 편견, 독단과 아집으로 분열과 혐오의 언어들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나라와 서로를 파괴하는 이기적 송사와 분열에 매몰되어 있었다.

e) 맞은편에서 울리는 메아리, 벽면 그림자가 내는 소리는 모두 직접적인 정보가 아니라 2차적으로 전달된 간접적인 정보들이다. 사실 우리 현대인들이 보고 듣고 의존하는 정보 대부분은 간접 정보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정보들의 진실 여부를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같은 처지에 사람들이 서로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그 정보들을 합리적으로 함께 의심도 하고 대화도 해가며 서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쁘고 고된 일상 속에서 그러한 소통과 대화의 여유조차 갖기 힘든 대중들이 그러한 소통 능력을 함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정치 권력자들은 대중의 소통 능력을 그들 자신에 대한 비판 능력으로만 여겨 되레 그 능력의 신장을 방해하기 일쑤이다. 사실 대규모로 정보 생산 능력을 갖춘 일부 특정 집단이 자기 이익에 맞추어 정보를 가공하여 나라 전체가 울릴 정도로 대규모로 소리 내어 유포할 경우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그것을 비판적으로 의심하고 달리 생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최근 우리나라에서 대중들이 집단 지성의 힘을 발휘하여 주류 언론집단과 극우 유튜버들의 준동을 뚫고 무도하기 짝이 없는 권력자를 끌어내린 것은 가히 세계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515c ‘다음과 같은 일이 본성에 맞게 일어났을 때’ : 이곳에서 ‘본성에 맞게physei 일어났을 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실제로 결박으로부터 풀려났을 때’로 볼 수 있고(Ast, Stallbaum), 수감자가 언젠가는 풀려난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연스런 진행 과정에 따라 풀려났을 때’(J. Schneider, 박종현) 또는 ‘아무도 모르게’(J. Nettleship)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 가운데 어느 것이 플라톤의 의도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수감자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앞서 살폈듯이 독단과 편견에 사로잡힌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의 정신 상태라고 한다면 수감 상태에서 풀려난 것을 곧이곧대로 실제 죄수로 감옥 생활을 하다가 만기 등의 이유로 석방되는 상황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곧이곧대로 따지면 풀려났다 불을 보고 눈이 부셔 다시 돌아가려는 장면도 나오는데 감옥도 그렇게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하면서 플라톤이 그 비유가 ‘교육받지 못한 자와 교육받은 자의 본성physis의 상태를 닮은 것’이라고 한 말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수감 상태에서 풀려났다는 것은 만기출소같이 어떤 수동적인 처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감자 자신 어떤 일을 계기로 수감 상태가 본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그 미망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수감자가 맞이한 어떤 계기란 이를테면 플라톤 자신이 그랬듯이 우연히 길에서건 누구의 소개로건 소크라테스 같은 선생을 만나 철학을 접하고 무언가 자신의 상태가 무언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상황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어둠 속에서 빛과 진리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상태는 그 자체로 ‘본성에 거스르는’(para physin)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의 풀려남은 그들의 본성에 부합하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암학당 역본(2025년 말 출간 예정)은 ‘결박에서 해방된 상태가 그들의 본성에 맞는다’는 취지에서 physei를 ‘본성에 맞게’로 번역하고 있다. 이후 수감자는 이같이 수감 상태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강제되기에 이르는데 이 상태가 곧 철학 교육이 개시되는 상태 즉 이어지는 C2의 상태라 하겠다. 빛을 향한 오름길에서 교육적 당위를 처음에 강제로 느끼는 것이나 이내 그것을 감내하려 마음을 먹는 것 모두 가능성으로서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

* 놀랍게도 2,500년 전에 기술된 플라톤의 동굴 속 장면은 오늘날 누군가가 제작한 특정 내용이나 스토리를 담은 필름을 영사기로 돌려 스크린에 상연하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 관객들이 몰입해서 바라보는 현대 극장의 모습과 거의 그대로 닮아있다. 물론 우리는 극장을 나와 실제 일상의 생활을 보내지만, 일상에서조차 대부분 정보는 대자본을 토대로 세워진 정보 통신업체가 제작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기사 등 사이버 문화에 크게 의존해 있다. 그리고 유튜브나 SNS 매체 등 개인이 정보를 생산하는 장치가 크게 발전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들 대부분은 그곳을 통해 균형 있는 정보를 얻기보다는 어떤 형태로건 이미 형성된 신념을 배타적으로 더 강화하거나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일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도권도 별 차이는 없지만, 특정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음식점이든 공공장소든 불문하고 특정 종편 방송만을 하루종일 틀어 놓고 있고 사람들 모두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 일이 거의 일상화되어 있다. 이것은 플라톤 동굴의 비유에서 평생 발과 목이 묶인 채 벽면에 비친 모형들의 그림자와 그곳에서 반향된 소리들만을 보고 들으며 그것들을 진실로 믿고 살아가는 수감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수감자들이 이러한 상태를 정상으로 여기고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고 있는 한, 온갖 종류의 물건들과 재료들로 모형을 만들어 그림자들을 비추어내는 사람들의 행태 또한 결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수감자들의 그러한 상태를 보다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더 정교하고 그럴듯한 모형들을 좀 더 많은 공과 땀을 들여 제작하는 일에 더욱 몰두할 것이고 수감자들은 그것들에 사로잡힌 그만큼 더 많고 큰 규모로 왜곡된 현실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북한과 문화교류를 증진하는데 앞장섰던 우리나라 어느 문화인류학자조차 북한을 극장국가로 칭하고 있는 것도(『극장국가 북한』, 권헌익·정병호 공저, 창비, 2013) 그리고 우리 사회 주류 언론인 조중동과 그들의 기득권적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종편들 그리고 혐오와 분노만을 부추기는 극우 유투버들 모두가 가히 위험스럽기 그지없는 가짜 뉴스와 정보조작의 온상으로 전락한 것도 플라톤이 그토록 우려했던 동굴 속 정황과 하나같이 일치하고 있다. 실로 그것은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광기 어린 프로퍼갠더 정책은 물론 오늘날 고도로 발전된 사이버 문화와 정보 사회가 갖는 어두운 면들을 자연스레 연상케 한다. 게다가 그것들 모두 반지성과 대중의 집단 심리의 허점 위에서 성립한 것이라는 점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한 플라톤의 성찰은 오늘날 우리들 역시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매우 유효하고 적확한 비판이자 진심 어린 충고라 아니할 수 없다.

* 동굴의 비유를 선분의 비유와 연관해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인식론적 무지 상태에 대한 비판이 먼저 떠오르지만, 위와 같이 동굴 속 상태 일반을 정치적 사회적 나아가 종교적 지평에로까지 확장해서 음미해보면 동굴의 비유는 오늘날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은 물론 종교 철학과 문명 비판, 정신 분석학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당면하고 극복해야 할 철학적 난제들과 문제의식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앞으로 C2 단계에서 C5 단계에 이르기까지 나머지 동굴의 비유 내용을 살펴가며 그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어가기로 한다.    – 동굴의 비유 계속 –

 

다음 강해 : 4. 동굴의 비유(514a-521b) – (II)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헤겔 형이상학 산책27-실재성과 반성적 사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6-실재성과 반성적 사유

1)

앞에서 헤겔의 논리학 현존 장의 전개가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에서 지각으로 이행하는 과정과 평행한다고 말했다. 현존 일반은 질로 규정되는데, 이것은 직접적인 감각적 규정을 말한다. 이 감각적 규정은 존재하는 순간 사라지고 마는 타자 존재이기에 여기에 명멸하는 세계가 출현한다.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신의 결론은 감각적 규정이 일반적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각 장의 출발점이 되는 감각적 성질이다. 마찬가지로 논리학에서 헤겔은 감각적 규정은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라는 이중성을 지닌 것으로 발전하는데, 헤겔은 이것을 실재성이라고 규정한다.(1 절은 현존->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 실재성이라는 순서로 전개된다) 이 실재성은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성질에 대응한다.

그런데 헤겔은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초판에서는 사용하지만, 재판에서는 제거해 버렸다. 재판에서는 규정성([Bestimmtheit] 뒤에 나올 규정[Bestimmung]과 구별된 의미를 지닌다)이라는 범주로 대체되다. 초판과 재판의 차이점 가운데 용어만 가지고 본다면,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진다.¹

주1: 질이라는 표현도 차이가 있는데, 초판에서는 목차만 보더라도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재판에서는 1절 감각 규정에 한정해 사용한다.

왜, 재판에서 헤겔은 이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지워버렸을까? 실재성은 긍정성을 의미하며, 이는 부정성에 대립한다. 실재성 즉 긍정성과 부정성은 반성 개념에 속하며, 이는 반성 규정을 다루는 본질론에서 다시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초판에서는 이런 점을 헤겔이 스스로 간과하고 앞에서 다루었던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의 통일성으로서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이용했는데, 재판에서 이를 깨닫고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실재성이라는 표현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주석에서 이미 실재성에 관해 많은 설명을 했는데, 재판에서도 이걸 지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은 이런 점에서 독자를 의아하게 한다. 왜 현존을 다루는 주석에서 실재성에 관하여 이토록 장황하게 설명하는지 말이다. 사실은 초판에서 실재성 범주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헤겔이 초판에서 규정성 대신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사용하고 재판에서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것은 흔히 철학에서 그렇게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헤겔은 이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소개한 다음 상당히 긴 주석을 달아 철학사에서 실재성이 다루어지는 맥락을 소개한다. 이 맥락은 헤겔 철학과 여타 철학과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므로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2)

우선 헤겔이 실재성을 어떻게 규정했는가 보자.

“현존은 오직 그 자신을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로 규정하는 한에서 또한 현존의 계기를 이루는 두 존재의 통일인 한에서 현존이다. 반성적 현존이라는 점에서 현존은 실재성이 된다.”(논리학, 1판, GW12, 63)

감각적 성질 예를 들어서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대타 존재를 지닌다. 이 빨간색은 사과, 양귀비 등에 공통된 성질이므로, 그 점에서 그 자체 존재다. 그런데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되므로, ‘파란색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빨간색이 ‘파란색이 아닌 것’으로 규정되면, 이것이 곧 실재성이다.

‘파란색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빨간색과 파란색 사이의 반성 관계를 전제로 한다. 즉 빨간색은 자신의 타자를 통해서 또는 자신의 타자에 비추어서 규정된 것이다. 그 때문에 헤겔은 이를 ‘반성적 현존’이라고 말한다.

실재성 개념에 반성 관계가 전제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부정성은 실재성에 직접 대립한다. 반성 규정의 본래 영역에서 부정성은 긍정적인 것에 대립한다. 긍정적인 것은 부정에 부딪혀[AUC] 반성한 실재성이다. 이 실재성에서 부정적인 것이 비추어지지만[scheint], 이 부정적인 것은 실재성 속에서는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논리학, 2판, GW21, 101)

이 구절에서는 더 분명하게 실재성이 자신의 타자인 부정성에 대해 반성적으로 규정된 것이라는 사실이 언급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그런데 앞에서 감각적 성질은 대타 존재를 통해 타자와 구별되었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되며, 단맛이나 3도 음과 같은 다른 모든 감각적 성질과도 구별된다. 그런데 실재성에 이르게 되면,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되는 데로 한정된다.

이를 매개하는 것이 감각적 성질의 그 자체 존재 즉 일반성인데, 빨간색이 사과, 양귀비 등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면서 동시에 빨간색은 파란색과 대립하는 차원에서 한정되어서 논의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빨간색은 파란색과 대립되는 한에서 실재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빨간색이 파란색과 대립하는 것이기에 이 빨간색은 감각적으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으로 된다. 즉 구체적으로 본다면 개별자가 지닌 불그스레 한 색, 짙붉은 색, 연분홍 색 등이 모두 파란색과 대립하면서 빨간색으로 포괄되는 것이다.

3)

빨간색이 ‘파란색이 아닌 것’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은 철학사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철학자 가운데 대표적으로 들뢰즈와 아도르노는 이런 주장을 반대한다. 실재하는 세계의 어디에도 부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디에서 부정성은 없으며, 어떤 것의 부정성은 다만 우리의 사유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자주 우리는 어떤 것을 다른 것의 부정성으로 즉 결여태로 파악한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의 결여태며, 여자는 남자의 결여태다. 등등.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듯이 왼손잡이는 그 나름대로 긍정적인 실재이며, 여자 역시 그 나름대로 긍정적 실재가 아닌가? 왼손잡이나 여자를 결여태로 보는 것은 사유가 개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결여태라는 개념은 결국 이데올로기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대표적으로 스피노자는 실재성을 부정성으로 파악하려 했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유명한 명제가 나온다. 즉 “Ommnis determination est negation”(모든 규정성은 부정성이다) 헤겔도 마찬가지로 실재성을 부정성으로 파악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의 인식이 구조적이라는 사실로부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빨간색은 항상 다른 색깔들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순수하게 빨간색만을 알 수는 없다. 빨간색은 무지개색의 구조나나 삼원색의 구조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빨간색은 이미 그것과 구조 속에 있는 다른 색을 부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구조적 연관은 주관적일 수도 있고 객관적일 수도 있다. 주관적 구조와 객관적 구조를 가려내는 일은 논리학에서나 인식론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을 다루는 것은 나중에 반성 규정을 다루는 본질론에서 등장하니, 뒤로 미루기로 하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실재성은 이처럼 구조적 연관 속에서 다른 실재성을 부정하는 부정성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4)

스피노자나 헤겔처럼 실재성을 이처럼 부정성으로 파악하는 것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와 연관된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하나 즉 일자라고 말했다. 즉 데카르트에서처럼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사유 실체나 연장 실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실재성이라고 본다면, 세계는 “자체 내 아무 모순을 포함하지 않으며 하나의 실재는 다른 실재를 지양하지 않는” 세계가 된다. 여기서 사유나 연장도 각기 하나의 실재성이니, 독립적 실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재성이 곧 부정성이라면, 실재성의 총합인 신은 위와 같은 무차별한 실재성의 세계가 아니다. 여기서는 실재성의 총합은 서로 대립하는 것의 통일이므로, 더는 규정성이 없는 무규정적 일자가 된다. 그러니 사유와 연장의 통일체로서 실체는 사유도 아니고 연장도 아닌 일자인 것이다.

실재성에 관한 주석을 끝내면서 헤겔은 독일어 ‘(in)Qualierung’이라는 표현에 주목한다. 사실 사전에 이 표현은 없고, ‘quaelen’이라는 표현은 있는데, 그 뜻은 ‘고통을 가하다’라는 뜻이다. 헤겔은 신비주의 철학자 야콥 뵈메가 이 표현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질[qualitaet]의 운동’을 의미한다고 한다.

헤겔에 따르면 질은 (규정성, 실재성으로 본다면) 부정성을 지니며 그런 한 ‘자기 자신에서 자기 자신의 불안[Unruhe ihrer an ihr selbst]’을 내포하고 “자기를 투쟁 속에서 출현하게 하니”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었다고 한다. 무엇이든 어떤 규정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규정성을 지니면서 실재하며 실재한다는 것은 곧 고통에 빠진다. 즉 인생은 고[苦]다, 세계는 고라는 부처님의 말씀과 통한다.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 소개 글 :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김교빈)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

 

김교빈(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철학)

 

이 글은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의 여섯 번째 발문(추천서문, 35~38쪽)으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웹진에 게재합니다.

 

2009년 7월 31일 한국 전통의학을 대표하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그리고 뒤늦은 감이 있지만 2015년 6월 국보 319호로 지정되었다. 『동의보감』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유네스코의 선정 과정을 거쳐 인류 모두가 보편적으로 기억해야 할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문학을 기반으로 전통의학 이론의 핵심 개념인 정기신의 초점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서술한 책이라는 데 있다. 인류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오랜 인문학의 전통을 지녀왔다.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학문을 천문(天文), 지문(地文), 인문(人文)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인문이 나머지 둘을 포괄한다고 생각했다. 인문이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면 천문과 지문은 자연에 대한 관심이었다. 사람을 중심으로 자연을 이해한다는 생각이 인본주의와 인문의식의 출발이었다. 이 같은 생각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인문학을 의미하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인 ‘리버럴 아츠(Liveral Arts)’는 민주주의의 출발이라고 하는 그리스에서 노예 교육과 달리 자유민인 그리스 시민의 소양을 가르치는 교육을 의미했다. 그래서 ‘리버럴 아츠’는 오늘날에도 인문학을 뜻하는 동시에 교양 교육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으며, 인간의 사유만이 아니라 그 사유를 밖으로 표현해 낸 예술까지를 인문의 범주에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문학을 뜻하는 또 다른 용어인 휴머니티스(humanities)는 신 중심에서 벗어난 인간 중심 사고를 뜻하며 르네상스 이후 화려하게 불타오른 인문정신을 의미한다.

『동의보감』에 담긴 인문정신은 책의 구성에 잘 드러나 있다. 『동의보감』의 첫 편은 「내경(內景)」이고 두 번째 편은 「외형(外形)」이다. 그리고 그 뒤로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편이 붙어있다. 만약 『동의보감』이 병증의 원인과 증세를 설명하고 그에 대한 치료법을 제시하는 뒤의 세 편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면 전근대시기의 그렇고 그런 의학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며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동의보감』은 구체적인 질병과 처방을 말하기에 앞서 사람 몸의 겉과 속, 그리고 사람과 사람 밖의 자연을 얘기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인체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명이 깃든 사람의 몸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몸 안의 장부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몸 안의 구조와 몸 밖의 신체 부위들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사람의 몸과 자연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건강은 무엇이고 질병은 무엇인지, 생명을 지키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양생법이 필요한지, 생리(生理)와 병리(病理)를 설명하는 정(精)·기(氣)·신(神)이 무엇인지.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면서 당시의 의학이 도달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담은 패러다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동의보감』은 보편성만 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의’라는 말은 『동의보감』 서문에 있는 것처럼 당시 중국에 있던 남의(南醫)와 북의(北醫)에 대한 우리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동의보감』 출간 284년 뒤에 나온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도 ‘동의’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독자적인 의학의 계보를 잇고 있다. 더구나 『동의보감』은 약재와 처방 모두에서 그 이전 몇 백 년 동안 쌓아온 우리의 의료역량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히 『향약집성방』에 수록된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약재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맞는 처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전제를 두고 본 『한의학의 자연철학』은 어떤 책인가? 『한의학의 자연철학』은 인문학의 토대 위에서 『동의보감』과 『동의수세보원』을 중심으로 우리의 전통의학을 풀어낸 책이다. 특히 저자 최종덕은 전통의학과 그 사유의 기반인 기철학을 자연철학의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최종덕은 기를 사유하는 자신의 기본 입장을 ‘자연주의적 유물론’이라고 하였고, ‘자연주의적 유물론이란 물질적 유물론이 아닌 역사 존재론으로서의 유물론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역사적 존재’란 ‘생명의 탄생부터 시작하는 진화론적 시간 속에서 선택된 존재의 변이과정 및 인간사회 속에서 관계성의 다양한 힘들이 농축하거나 분산하는 존재의 시간적 과정 그 자체’라고 부연하였다.

최종덕은 매우 폭 넓은 공부를 해 왔다. 학부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대학원에서 과학철학을 전공하였으며 독일 기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그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처음 만났고, 얼마 안 가 ‘기(氣)철학분과’에서 보게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다른 학회들과 달리 분과 모임들로 나뉘어 있고, 분과들은 매 주 정기적으로 모여 세미나를 진행한다. 1989년 학회 창립과 동시에 내 제안으로 시작된 ‘기철학분과’는 동양철학 연구자 세 명의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점점 인원이 늘면서 동양철학 연구자만이 아니라 한의학 연구자와 과학철학 연구자인 최종덕 교수도 함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구 대상 텍스트도 대표적인 기철학자 장횡거의 『정몽(正蒙)』이나 방이지의 『물리소지(物理小識)』 뿐만 아니라 『황제내경』, 『동의보감』, 『격치고(格致藁)』 같은 전통의학 서적도 보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최종덕은 전통의학과 기철학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갔고, 동양철학 연구자들 또한 전통의학과 자연철학으로 논의를 깊여갔다.

최종덕은 기에 대한 관심을 높여가면서 ‘개인의 건강이나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신비적인 영역의 기가 아니라 공동체의 건강과 사회적 비판기능 내지는 바람직한 사회로의 변화를 추동하는 생산 역량을 지닌 기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관점은 ‘과학적 접근방식과 철학적 접근방식이라는 두 가지 관점을 종합’한 것이다. 특히 최종덕은 전통의학을 ‘자연주의 의학’이자 ‘유기체 의학’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한 생각을 잘 담아 『한의학의 자연철학』을 써 낸 것이다. 최종덕이 전통의학, 기철학, 물리학, 자연철학 등의 여러 분야를 날줄과 씨줄 삼아 자유자재로 엮은 『한의학의 자연철학』을 만난 독자들은 전통철학과 현대철학, 기철학과 자연철학을 동시에 보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아울러 이 책이 동(東)과 서(西), 고(古)와 금(今)을 융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눈뜸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교빈 씀)


필자 김교빈: (재)민족의학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호서대학교 문화기획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지은 책으로 《한국철학 에세이》, 《하곡 정제두》등이 있고, 함께 지은 책으로 《화담집》, 《강좌 한국철학》, 《기학의 모험》, 《동양철학과 한의학》 등이 있으며, 함께 옮긴 책으로 《중국의 고대 논리》, 《중국 고대철학의 세계》, 《중국 의학과 철학》, 《기의 철학》 등이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5회|5. 인문학 수업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5회

5. 인문학 수업 (3)

이제 나에게 남은 학기는 마지막 한 학기다. 하지만 졸업하기 위해서는 2학년 때 F를 받은 형법 총론 수업을 재수강해야 했다.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는 내가 그 수업을 듣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었다. 당시 형법 강의는 독일에서 학위를 받고 K 대에 있다가 Y 대로 옮긴 L 교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관심을 많이 갖고 강의도 열심히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방학 때는 독일어 특강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제대로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는 것은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나에게는 힘든 문제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필이 꽂히면 만사를 제쳐 놓고 깊이 빠지지만, 관심이 떠나면 거의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중간고사는 우여곡절 끝에 보았다. 그런데 마지막 기말고사는 시험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광복관을 향해 올라가는 도중에 고시 공부하던 후배를 만났다. 그래서 그에게 대리 시험을 부탁했다. 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그가 대신 시험장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그날 밤 후배에게서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형, 큰일 났어요.” 전화기 너머로 들여오는 후배 목소리가 많이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이야?”

“오늘 형법 총론 시험을 대신 보다가 감독관한테 걸렸어요.”

“아니, 그게 어떻게 걸리냐?”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감독관으로 들어온 사람이 제가 기숙사에서 잘 아는 대학원 선배예요. 이 선배가 왜 공부 잘하는 내가 형법총론 수업을 듣느냐고 물었던 거예요. 내가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이 선배가 중간고사 답안지와 필체 대조를 한 거예요. 꼼짝없이 걸린 거지요.”

다른 강의도 아니고 형법 수업을 들으면서 대리 시험을 보게 했으니 완전히 빼도 박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

“일단 L 교수님 연구실로 오라고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교 선배였던 또 다른 L 교수가 부정 사실을 알고서 당장 교수회의를 열자고 설쳤다. 하지만 과목 담당인 L 교수가 일단 당사자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했다고 한다.

다음 날 부리나케 후배와 함께 L 교수 방으로 찾아갔다. 어떻게 변명을 할 수도 없는 상태다. 나도 나지만 고시 공부를 열심히 하던 후배는 무슨 잘못인가? 미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이 교수가 말을 했다.

 

“거두절미하고 두 학생 모두 자신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 반성문을 제출하게.” 딱 그 한마디뿐이었다.

 

졸업 학기를 두고 반성문을 써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창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종의 확신 범의 신념인지 모른다. 나는 그때 나의 상황을 솔직하게 진술했다. 나의 관심은 이미 법학을 떠났다. 나는 앞으로 철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도저히 어쩔 수 없어 후배를 끌어들여 대리 시험을 보게 했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이런 식으로 장문의 반성문을 썼다. 이런 나의 솔직한 반성문이 주효했는지 L 교수는 더 이상 대리 시험을 문제 삼지 않았다. 만약 또 다른 L 교수처럼 교수 회의를 열었더라면 어쩔 수 없이 최소 정학을 맞았을 것이고, 졸업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훨씬 나중에 L 교수를 교내 화장실에서 한 번 뵌 적이 있다. 그때 L 교수는 “철학 공부 재밌어?”라고 관심을 보였다. 두고 두고 고마운 분이다. 나는 이 일을 경험하면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로운가를 배운 셈이다. L 교수는 당신이 구제한 학생이 먼 미래에 한국의 철학계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대리 시험까지 보게 했지만, 참으로 나의 대학 생활은 험난했다. 1학년 때 당구에 빠져서 성적 불량으로 한 학년 유급하고, 그 이후로도 쌍권총을 수도 없이 찼다. 내가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했는지 전혀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나의 행동은 너무나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그 당시 ‘경제원론’이 정법대 필수 과목이었는데, 내가 이 과목을 무려 3번이나 F를 받았다. 대학 1학년 1학기 때 정법대 학생 전체가 나중에 총장이 된 J 교수에게 ‘경제원론’ 수업을 들었다. 상대 대형 강의실에서 그 수업을 들었는데 처음에는 인상적인 J 교수의 수업을 열심히 듣긴 했다. 그런데 1교시 수업을 듣기도 힘들고, 그 수업이 끝나자마자 상경대 뒷편에 있는 종합관에서 법학통론 수업을 듣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언덕을 한 참 걸어 올라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종합관 5층에서 영어 수업을 들어야 했다. 몸이 불편한 내가 도저히 10분 안에 걸어서 이동하기 힘들어 수업을 자주 빼먹었다. 결국 J 교수에게 F를 받았고, 그다음 해에는 당시 유명한 경제 사학자인 C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이분이 그렇게 대단한 교수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C 교수는 수업 시간에 자신이 쓴 문고판 『한국경제사』를 가지고 리포트를 내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 리포트를 제출하지 않아서 F를 맞았다. 세 번 째는 노동 경제학을 하던 K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기말고사를 볼 때 내가 모르고 시험 시간이 끝날 때쯤 시험 장소로 들어간 것이다. 얼마나 시험 보기 싫었으면 시험 시간까지 잊었을까? 그것도 세 번 씩이나 재수강하는 수업을 말이다. 내가 원래 공간에 대한 지각 능력은 떨어져도 시간관념은 철저한 편이다. 그런데 한 시간 늦게 들어갔으니 변명하기도 힘들었다. 김 교수가 자기 연구실로 따라오라고 해서 그 연구실 안의 교수 옆에서 시험을 보았다. 당시 나는 시험공부보다는 컨닝 페이퍼만 잔뜩 준비해갔는데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수에게 리포트로 대신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지만 교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어, 그래? 그럼 F지. 시험지 두고 그냥 나가게.”

 

변명할 것도 없이 또 F를 받은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 과목을 세 번씩이나 F를 받을 수 있을까? 내가 경제학을 싫어한 사람도 아닌데 경제원론 한 과목에서 무려 세 번을 F 받았으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다.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아마도 이런 경우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경제학과의 세 교수한테 한 마디로 돌림 빵을 당한 셈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모두가 나의 책임이었다. 운 좋게 졸업 학기 때 경제원론이 선택으로 바뀌는 바람에 간신히 졸업할 수가 있었다. 내가 대학 생활을 이런 상태로 보낸 것은 한편으로 최악의 경우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당시 나에게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이 충만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그리고 어떤 규칙도 내가 원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겠다는 고집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성적표를 가지고 내가 법대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마냥 힘들었고, 나 자신을 부적응자로 낙인찍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철학과 대학원에 가보니까 나 못지않게 권총을 많이 찬 동기가 있었다. 그는 훨씬 뒤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다음 교수 임용 면접 시험에서 권총이 너무 많아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가 칸트 철학자로 유명한 김봉한이다. 타과에서는 흠집이 되는 것이 철학과에서는 인정될 수 있는 낭만적 시대였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신간안내] 최종덕 저,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 무료 자유배포 전자책(PDF) 안내 [한철연 소식]

최종덕 회원의 신간을 소개합니다.

2025년 1월 발간한 『한의학의 자연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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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을 첨부하오니 아래 링크를 눌러 다운로드 받아서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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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감사의 글 —– 2발문(추천서문) —– 10
발문1: 박석준(한의학), 나는 왜 과학과 철학을 공부하는가
발문2: 구태환(철학), 탈근대 시선으로 읽는 한의학
발문3: 이정수(철학), 몸(정기신)과 함께 펼치는 자연스러운 철학적 사유
발문4: 전방욱(생물학), 생태학적 의학을 바라며
발문5: 오재근(한의학), 철학자가 살펴본 한의학 그리고 제언
발문6: 김교빈(철학),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서문 —– 39

1장 기氣와 도道의 자연철학 —– 45
1. 기, 개념적 사고와 이미지 사고
2. 기의 원류와 자연 해석
3. 과학으로 접근하는 기
4. 존재-인식-행위의 삼각대, 경계없는 유한, 운동과 복잡계
5. 신비주의 위험에 빠진 기
6. 역사 존재로서 기
7. 물질론과 생기론의 얽힘으로 읽는 기
8. 화이트헤드와 신유물론으로 본 기
9. 노이마틱으로서 기
10. 정기신으로 본 기
11. 기에서 도로 포월하는 장자
12. 기에서 덕德을 거쳐 도로
13. 도의 자연지리학
14. 정지된 실체가 아니라 운동하는 동사형으로서 도

2장 관계망과 위상공간의 한의학 —– 90
1 서양의학의 철학적 기초- 실재와 실체
2. 서구과학의 기준과 동아시아 의학의 과학
3. 유기체 실재론으로서 동의학- 열린계의 관계장르
4. 한의학의 소산구조와 경험개념
5. 몸의 연결망과 옴살론 – 얽힘
6. 관계와 위상으로서 한의학 – 비국소적 위상공간
7. 治心의학으로서 한의학

3장 동형성의 자연관, 회절 자연주의 —– 129
1. 소유의 자연
2. 자기운동하는 자연
3. 인간과 자연의 일체 모델, 동형성과 합생
4. 수양론을 향한 합생concrescence
5. 기의 신실재론new realism
6. 자연-사회-인체-심리 동형성 구조
7. 동의보감에 영향을 준 조선의 탈인간 자연관
8. 동의학의 자연주의: 반영 자연주의에서 회절 자연주의로
9. 회절 자연주의 의학의 사례 : 면역학

4장 이제마의 인간의학 —– 168
1. 이제마의 등장과 사상 개념의 탄생
2. 기의 승강원리로 엮은 휴머니즘 의학
3. 수기치인의 생리학
4. 결정론이 아닌 현상학적 지향성으로서 사상의학
5. 존재결정론이 아닌 행위수행론
6. 서로에게 응답하는 사심신물事心身物의 열린 관계

5장 생로병사의 자연철학 —– 200
1. 생로병사의 진화론적 사유구조
2. 진화론적 사유구조로 본 몸 – 체질과 소질
3. 불교에서 말하는 생의 의미
4. 유교와 도가에서 본 몸과 ‘생’
5. 생명과 양생
6. 생물학적 양생과 문화적 양생
7. 제언 : 개인 양생에서 공동체 양생으로

부록 : 자연지리와 삶, 한국 고대 재앙사 분석 —– 225
가뭄, 홍수, 태풍, 특이기상, 황충,
기근, 역질, 지진, 괴현상

참고문헌 —– 252

색인(인명/주제) —– 263

 

♦ 책 속으로~


<저자소개>
저자 최종덕은 물리학과 수학 그리고 철학과 생물학을 공부해오면서, 현대자연철학의 지식을 삶의 수행성으로 변화시키려는 작업을 시도 중인 독립학자이다. 『공백의 실재』, 『생물철학』, 『의학의 철학』, 『비판적 생명철학』, 『이분법을 넘어서』,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 등 현대자연철학 관련 책을 다수 출간했다. 최종덕의 전문연구와 삶의 글쓰기 자료 모두를 저자의 홈페이지 philonatu.com에서 볼 수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4회|5. 인문학 수업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4회

5. 인문학 수업 (2)

 

E 여대 철학과 교수인 J 교수의 인식론 강의는 대단히 흥미로웠다. J 교수는 인식 이론에 관한 일반 강의를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매시간 간단한 명제를 제시하고 그것에 관해 A4 용지 한 장 정도로 학생들이 답변서를 써오도록 했다. 그리고 학생들 답변서를 읽으면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으로 수업 시간을 채웠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완전히 토론식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J 교수가 첫 시간에 내준 숙제는 “자살로서 복수를 할 수 있는가?”였다. 이에 관해서 찬반으로 답변을 쓰면 된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복수는 그것을 지켜볼 주체가 있어야 하는 데 자살한 이후에는 전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논지를 적은 것이다. 그런데 정교수는 이것을 보고 ‘Excellent!’라고 점수를 주었다. 내가 이 떡밥을 물고서 생각한 바가 있다. “아, 나는 정말 철학이 맞는 거 같아.” 나중에 학위를 받고 우연히 학회에서 J 교수를 만나 이 이야기를 했더니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거진 30년 전의 일이라 기억을 못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J 교수가 이끈 수업은 내가 철학의 문제의식을 탐구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인문학에 관심갖는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문사철과 같은 학문들이 나의 관심과 체질에도 맞는 느낌이다. 문과대를 드나들면서 문과대의 전형적인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기도 했다. 그들과 술도 많이 마시고 토론도 많이 하면서 분과대 분위기에 서서히 적응해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진로와 관련해 결정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계속 공부하려면 대학원에 진학을 해야 한다. 일단 전공과 관련해서도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가, 아니면 점점 흥미를 갖게 된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내가 집에서 대학원 학비를 보조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런 상태에서 대학원 입학 시험에 합격한다하더라도 어떻게 입학금과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을까가 걱정이었다.

1982년에 접어들자 대학가는 연일 데모가 일어났고, 대학가나 그 주변은 매캐한 체루 가스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등교를 할 때는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호신용 무기를 들고 교문에서 짭새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대학은 이제 매일같이 전투를 치르는 전장(戰場)과도 같았다. 학생들의 마음도 점점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장한 짭새들이 최루탄을 터트리면서 학교로 밀고 들어오고, 그것을 막기 위해 돌팔매질을 할 때는 전쟁이 따로 없었다. 매일 그런 전투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심리 상태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강의는 수시로 휴강이 이루어져서 한 학기 제대로 수업을 한 기억이 요원할 정도다. 그 와중에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스타디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 세미나는 학생들의 일상적인 공부 방식이었다. 70년대에는 주로 학내 이념 서클에서 진행되었던 세미나가 80년 대는 대부분의 학생들의 일상적인 공부 방식이었다. 80년대의 의식화 작업은 이렇게 선후배 동료 간에 이루어지는 세미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끊임없이 전투에 임할 전사를 배출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한국의 70-80년대의 학습 방식은 세계의 투쟁사에서도 귀감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학생들의 학습에 대한 욕구는 대단했다. 워낙 책이 없었던 시대라 책에 대한 욕구도 컸다. 어쩌다 용돈이라도 생기면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구입하곤 했다. 집의 책장에 책이 한 권 두 권 쌓이는 것을 보는 것도 낙이었고 자부심도 컸다. 그 당시는 단순히 욕구가 아니라 문제의식도 컸다.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권리인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가, 왜 한국 사회는 이 모양 이 꼴인가,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대학생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등으로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의식들이다. 물론 이런 시대 현실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노는 데 열중하는 낭만파나 아니면 출세가 보장된 고시 공부에 몰두하는 고시파들도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학생들은 회색분자로 치부되곤 했지만, 그들 역시 시대 문제로 인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 당시 치열한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경우도 많았다. 한 마디로 요즘 학생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공감하기도 힘든 대학 생활이었다. 단순 비교가 쉽지 않겠지만,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 비하면 요즘 학생들은 너무 나약하고 무책임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