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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모리스 코헨 브란데스(Georg Morris Cohen Brandes)의『유일자와 그의 소유』에 대한 서문(Preface to The Ego and His Own)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Preface to The Ego and His Own

Georg Brandes[게오르그 모리스 코헨 브란데스 (Georg Morris Cohen Brandes, 1842년 2월 4일–1927년 2월 19일)는 덴마크의 비평가이자 학자로, 187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스칸디나비아와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2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 대한 서문

게오르그 모리스 코헨 브란데스/ 박종성 옮김

 

1845년 라이프치히에서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반항적 대담함으로 적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오늘날 개인주의의자 혹은 아나키스트anarchist 가르침을 제시하는 선례로 새롭게 제기되고 검토되었으며, 이제는 덴마크의 찬미자이자 번역가도 찾았다.

저자는 자신을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라고 불렀지만, 그의 실제 이름은 요한 카스파 슈미트(Johann Kaspar Schmidt)였다. 1806년 바이로이트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교사로 살다가, 책 출판 때문에 그 직업을 그만둬야 했다. 한동안 그는 작가와 번역가로서의 삶에 대한 유혹을 받기도 했다. 그는 1856년 베를린에서 잊혀진 인물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추종자들은 선구자를 찾고자 하는 광범위한 충동에 이끌려 막스 슈티르너에게 돌아왔고, 현대 아나키즘은 슈티르너가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바쿠닌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슈티르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막스 슈티르너는 그의 시대로부터 약 800년 전에 이미 자신이 유령(특히 “인간”과 “인류”)이라는 이름과 싸우는 것과 같은 보편은 그 자체의 실재가 없고 단지 단어와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중세 초기의 유명론자 계통을 잇고 있다. 그들의 싸움은 14세기와 15세기 내내 계속되었고, 나중에 슈티르너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신념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슈티르너는 당시 진보적 사상의 마지막 책으로 여겨졌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The Essence of Christianity)(1841)의 출판을 계기로 행동에 나섰던 것 같다. 이 책에서 당대의 가장 급진적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 책은 “하나님(인간의 신성)은 사랑이고, 하나님은 선하다”를 “사랑은 신성하고 선함은 신성하다”로 대체하고 인간의 모든 것을 찬양함으로써 진리가 드러났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신학을 뒤집어 놓았다. 그러니까 인간(Man)은 신성했고 우정과 결혼도 신성했다.

막스 슈티르너에게 이렇게 신학을 뒤집는 것은 신학의 기본적 사고방식이 보존되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는 이에 정당하게 반항했다. 정신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의 그는 문체에 있어서 포이어바흐보다 열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이어바흐를 뛰어넘는 사상가로서 그는 포이어바흐보다 발전했다.

[헬베티우스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에서 시간을 보낸 여러 프랑스 철학자 중 한 명이었다. ]

포이어바흐가 남긴 인간다움이란 종교에서는 자기부정이 기독교 못지않게 칭찬을 받았다. 자기사랑는 비인간적인 것으로 여겨져 희생되어야 했다. 막스 슈티르너는 헬베티우스(Helvétius)의 연구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았을 수도 있고, 니체보다 앞선 열정으로 종교적 영향을 받아 자기사랑을 악의 원리로 보는 관점에 맞서 싸웠다. 그에게 유일한 나(unique Self)는 유일한 실제 나이며, 따라서 권력과 권리의 유일한 원천이다. 인간, 인민, 교회, 국가, 이 비밀스러운 도덕적 또는 정치적 인물들은 잃어버린 개성들(personalities), 곧 슈티르너가 몰두하는 자기에 숨겨진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들이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반대자들의 관점에서 내가 감각적 나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와 달리 슈티르너는 나의 나(Self)가 나의 육욕성(sensuality) 때문에 고갈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기부정의 계율이 어떤 미신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보여 주고, 부자연스러운 금욕의 희생자들을 강조하여 묘사한다.

그는 자신의 반대자들의 대화에서 숨겨진, 고백하지 않은 자기사랑을 발견한다. 그 자신이 공공연히 자기사랑을 원칙으로 지지하고, 나를 둘러싼 것들을 나 자신의 최선의 이익에 맞게 사용해야만 나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신념을 주장하는 모든 사상가들처럼 그는 내가 내 친구나 애인에게 바치는 모든 희생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통 받거나 원하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도 내 사랑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랑은 계율이 아니라, 내가 나와 관계를 맺는 무료 봉사이다.

자기중심성 철학은(비관주의와 마찬가지로) 개념적 시도, 즉 유일한 나[유일자]를 통해 존재의 조명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는 시도이다. 사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슈티르너에게 있어서 나(Self)는 결코 결과나 산물로서 발생하지 않고, 항상 설명할 수 없는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으로서 발생한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발견자가 자신의 발견을 따르지도 않고, 저자도 자신의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는 근본적 생각을 따르지 않고, 마치 새가 ―노래하는 새이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처럼, 오로지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노래한다는 것을 그가 올바르게 보여줄 때, 그를 따르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는 거짓말과 기만을 하지 않기 위해 인류의 복지를 살펴볼 필요는 없지만, 순전히 자기중심적 이유로 완전히 인류의 복지를 삼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자기사랑의 원칙을 참되고 복된 것으로 정립하고, 일부러 서로를 물건으로 본다는 불쾌한 표현을 사용했을 때, 그는 아마도 아무도 쓸모없는 것에 돈이나 선의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북아메리카인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는 왕을 필요로 하는가?” 그리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왕과 왕의 일은 우리에게 땡전 한 푼의 가치도 없다.” 그리고 자기중심적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나눠주는 것(hand-outs)으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정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는다고 말할 때, ―그는 이 말을 피상적인 것들과 관련된 설익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아이는 자신의 미소, 자신의 놀이, 자신의 외침, 한마디로 말하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그의 현존으로 많은 능력을 소유하지 않는가! 그대는 아이의 요구에 저항할 수 있는가?”

그가 칭찬하는 자기사랑과 자기주장의 가장 완벽한 예를 예수에게서 발견하는데, 예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처럼)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만 국가를 전복하는 단순한 혁명가가 아니라, 정부와 정부의 반대자들에게 숭고해 보이는 모든 것 위로 자신을 높이고, 그들을 속박하는 모든 것에서 자신을 해방한 반란자(insurgent)였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특히 슈티르너는 확립된 질서를 전복하는 데 자신의 힘을 낭비하지 않고, 오히려 벽에 갇힌 사람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그리고 개의치 않게 확립된 질서 위에 자신의 성전 건축을 추진하면서 확립된 질서를 벽으로 둘러쌌다는 점 에 예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런 다음 그는 당연히 기독교 세계 질서도 이교도 세계 질서가 겪었던 것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암시한다.

그가 묘사한 자기의지는 국가가 타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동시대인들이 정치적 자유라는 이름으로 원했던 것은 국가와 그 법에 대한 속박이었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누구도 다른 사람에 신성한 것을 조롱해서는 안 된다. 혼외 성관계는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개인의 자유재량 대신 비인격적 통치자가 등장했을 때, 그들은 만족했고, 이른바 자유주의 헌법인 “자유” 권력으로부터 부여받기를 원했다. 슈티르너는 그들을 강력하게 공격한다. 당신은 자유를 동경하는가? 당신은 바보구나! 당신이 힘을 얻는다면, 자유는 자연히 올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확보한procure 만큼만 자유를 가질 수 있다. 그러니까 자유를 내가 획득한 것이 아니고, 나는 나 자신을 강탈당했다! 그리고 그는 권리가 힘 외에 다른 기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유가 주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조롱한다. 나를 공격하는 호랑이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호랑이를 찌르는 나도 권리가 있다.

훗날 헨리크 입센(Henrik Ibsen)과 니체(Nietzsche)에게도 그랬듯이, 그에게도 국가는 개인의 저주이다. 국가는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통치자이며, 교회가 “경건”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case을 내세운 것처럼 “도덕”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다. 국가는 처음부터 개인에게 국가 문화라는 가위를 들이대며, 국가에 반하는 모든 창조적 작업은 처벌을 받는다. 사람들이 더 자유로울수록 국가, 사회, 당에 대한 개인의 속박은 더 강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대중의 자유는 단순한 이상에 불과했고, 가장 비열한 법이라도 법으로 높이 평가했으며, 검열을 회피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부도덕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준법적이고 충실한 반대파, 즉 독일의 현대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슈티르너의 조롱은 결코 마르지 않았다. 국가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에 맞서 그는 사회가 공동선을 위한 활동만을 조직할 수 있기 때문에, 유일한 것을 생산하는 사람은 사회의 보호 대상이 될 수 없고, 오히려 불온한 요소로 간주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유사점을 그린다.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의 재판관이 아니라, 그의 적이었다.

1843년에 독일 제국은 건국 1000주년을 기념했다. 슈티르너는 그때 이미 책 집필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는 그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들어라,

바로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을 때조차,

우리의 존경하는(lieb) 독일이

천 년 동안 살아 있음을 기념하는 내일의 축제를 위해

딸랑딸랑 종소리를 울리기 시작한다.

울려라,

독일의 상엿소리를 울려라!

마치 시체를 호송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당신의 혀가 움직이는 것처럼, 너는 확실히 충분히 엄숙해 보인다.

—국민은 죽는다.—나는 만수무강하노라(Wohlauf Ich)!

내일 자식들이 그대를 무덤으로 끌고 가리라.

이어 그대의 자매들, 사람들도 그대의 뒤를 따를 것이다.

그들 모두가 그대 뒤를 따르고 나면—인류는 매장된다.

그러면 그 인류의 무덤 위에서 내 유일한 주인인 나,

인류의 상속자인 내가 소리 내어 웃으리라!

 

이로써 최초의 독일 아나키스트가 자신의 사상으로 구상한 승리가 끝났다. 그는 60년 후 독일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국가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했다.

그가 기다리는 위대한 혁명이 오면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내가 아이의 출생 시 별의 위치로 아이의 운명을 점쳐야 한다고 요구할 수도 있다는 문구로 답을 찾지 못한다. 다만 그가 상상하는 것은 국가 사회State society가 자유 연합free union으로 대체되고, 그 속에서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내 자유의 일부를 희생하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이다.

사상가로서 슈티르너의 형식과 행동 방침은 시대에 뒤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미래에 속하는 생각들로 가득하며, 그중 일부는 이미 실현되었고, 일부는 실현이 임박한 것처럼 보인다.

불합리하고 극단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많이 접하게 되고, 과거의 꿈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례도 있다. 하지만 현대의 독자들은 더욱 더 자주 슈티르너의 비상한 통찰력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Retrieved 2005-04-25 from tmh.floonet.net/articles/gbrandes_trans.html

[1902년 덴마크판 The Ego and His Own에 출판되었다. Brandes의 이 서문은 Svein Olav Nyberg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Georg Brandes, 스케치, 1900

Georg Brandes, 스케치, 1900|출처 https://yoda.wiki/wiki/Georg_Brandes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4]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4]

 

  1. 프랑크푸르트, 새로운 세계 그리고 옛 하이델베르크 – ② –

 

□ 이제 선생님의 첫 번째 주요 저작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연구 주제이자 교수자격 논문의 주제로 삼게 된 데에는 어떤 자극과 동기가 있었나요? 분명히 서독에서 여론조사 연구가 한창 주목받던 시기였고, 민주적으로 조직된 미디어 시스템의 문제도 명확히 드러나 있었죠. 하지만 ‘공론장’이라는 복합적 주제를 이론적으로 다루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건가요? 혹시 볼프강 아벤드로트(Wolfgang Abendroth)나 아도르노에게서 영향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폴리스 이론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인간의 조건 The Human Condition』이 그저 우연히 여러 영어권 저서들—예를 들어 당시 영미권에서 잘 알려졌던 C. W. 밀스나 존 듀이(C. ‌W. Mills und John Dewey)의 이론서들과 비슷하게 선생님 손에 들어온 책이었나요, 아니면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 이 주제는 제가 스스로 선택해서 발전시킨 겁니다. 그 배경에는 아데나워 시대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정치적 의견 형성 방식에 대해 제가 실망했기 때문이죠. 질문하신 여러 가지를 역순으로 답변해 보겠습니다. 듀이의 『공중과 그 문제들 The Public and Its Problems』은 1927년에 나왔지만 1996년에야 독일어로 번역됐죠.[1] 저는 그 책을 몰랐습니다. 미드(Mead)와 듀이는 1960년대 프랑크푸르트에서 강의할 때에야 비로소 제 연구에서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C. W. 밀스의 유명한 책[2]은 『공론장의 구조변동』 마지막 부분에서 잠깐 언급할 뿐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출간 당시 읽었고,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쓰기 시작할 때 폴리스에 대한 아렌트의 열정적인 묘사가 우연히 떠올랐어요. 사실 저는 그 책에서 다른 점에 더 주목했습니다. 바로 아렌트가 생생하게 묘사한 행위 유형의 구성 방식과 초기 허버트 마르쿠제가 후설의 생활세계와 하이데거의 존재분석에서 영감을 받아 1930년대 초 사회민주주의 잡지 『사회 Die Gesellschaft』에 발표했던 비슷한 고민들 사이의 친연성이었죠.

볼프강 아벤드로트는 제가 교수자격논문을 이미 완성한 뒤에야 알게 됐어요. 그때까지 저는 플레스너, 셸스키, 베르크슈트레서, 뮐만 등 여러 교수들에게 심사를 요청했다가 모두 거절당했고 마지막으로 아벤드로트에게 전화를 했죠. 제 친구 스피로스 시미티스가 권해서 한 거였어요. 아벤드로트가 보여준 열린 태도와 호의 덕분에 제 학문적 경력이 실제로 구제될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아도르노에게는 1959년 여름에 처음 교수자격논문 의사를 밝혔을 때 1장 초고를 보여줬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결국 호르크하이머에게 거절당했고, 아도르노와는 논문의 내용에 대해 깊이 논의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조교를] 사직한 뒤에는 가다머의 도움을 받아 아도르노가 독일연구재단에 교수자격논문 장학금을 신청해주기도 했죠.

말씀하셨다시피 그때까지 사회학에서 ‘공론장’이라는 개념은 주로 여론 연구와 관련해서만 다뤄졌습니다. 그런데 제 프로젝트는 훨씬 더 야심찼죠.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는 그동안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던 공론장 개념을 ‘부르주아사회의 범주’ 속에서 새롭게 발전시키고자 했습니다. ‘공론장’은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 형성을 위한 미디어들의 인프라인 동시에 사회적 기반을 이룹니다. 그리고 의회의 의원들이 공식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핵심을 형성하죠. 즉, 사회학적으로 볼 때 ‘주권적’으로 간주되는 ‘인민의 의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규범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요약하면, 제 연구 주제는 가족이나 경제 체계와는 구별되는 시민사회의 기반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발전했고, 이로부터 대중매체를 통해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정치적 여론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잊혀졌지만, 듀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정치적 공론장에 대한 사회이론적으로 정교하게 발전된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이 루흐터한트 출판사의 사회학 시리즈가 아니라 정치학 시리즈로 출간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역사적 관점을 통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지닌 규범적 내용은 자본주의적으로 발전한 산업사회 조건에서는 오직 사회국가적 민주주의의 형태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는 이 책이 출간되기 몇 년 전 독일 헌법학자협회에서 에른스트 포르스트호프와 볼프강 아벤드로트 사이에 치열하게 논의된 바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1959년에 쓴 『학생과 정치 Student und Politik』 서문의 참고문헌을 펼쳐보면, 제가 교수자격논문에서 근거로 삼은 정치학 및 법이론 문헌의 상당 부분이 이미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 서문에서 ‘정치 참여 개념’에 대해 고민한 부분을 보면, 아데나워 시대의 억압적인 분위기, 특히 연구소에서 더 강하게 느껴졌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하면 공론장의 이성적 잠재력을 동원해 권위주의적이고 탈나치적인 사회를 진정한 민주주의의 지적 수준, 즉 승전국들에 의해 부과된 민주 제도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지에 대한 저의 문제의식이 일관되게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비판적 사회이론의 관점에서 발전된 이런 주제에서는 당연히 칸트, 헤겔, 마르크스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제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학문적 동기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이것이 바로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진짜 동기입니다. 스피로스 시미티스는 저에게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국가법 논쟁들과 그 여파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문제점들을 익히게 해주었습니다. 또 다른 한 축은 폴 라자스펠트(Paul Lazarsfeld)의 라디오 리서치[1930~40년대 미국에서 라자스펠드가 주도한 라디오 청취자 연구 프로젝트]에서 시작된, 대중 커뮤니케이션 연구라는 넓은 분야와 이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국에 망명한 독일 출신 학자들은 자신들에게 낯선 미국의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는데—이 점은 아도르노만의 특이한 사례가 아닙니다—, 이들의 폭넓은 문화비평은 대중매체가 지배하는 공론장에서 여론 형성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을 비춰주었습니다. 저는 책의 참고문헌에서 이처럼 처음에는 분리되어 있던 다양한 연구 분야들을 각각 따로 제시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개념을 새로 만들고 정립한 힘(begriffsbildenden Kraft)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까지 사회학에서 통합적으로 정의된 적 없던 ‘공론장 구조’의 여러 복합적 기능들을 역사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해냈다는 점이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최근에 당신께서는 6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이 주제, 더 구체적으로는 상당 부분 탈규제적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 환경 아래 전개된 정치적 공론장의 또 다른 구조적 변화를 다루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이러한 새로운 매체 공론장에 많은 정보를 가지고 참여하면서 정치적 공론장의 새로운 전개를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젊은 동료 연구자들과 세대 간의 간극을 넘어서 학문적 교류를 함으로써 영감을 받고 배울 준비가 된 대담자라는 점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작은 책자[3]에서 저는 젊은 동료들의 연구에 기생하듯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저는 『사실성과 타당성』에서 처음 전개했던 법치국가와 민주주의에 관한 담론 이론의 규범적 함의를 다시 한 번 자세히 풀어보고자 했습니다. 사실 이 글은 출판사의 제안으로 묶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수십 년에 걸쳐 발전시켜온 정치 이론의 관점에서 새로운 미디어의 확산과 함께 나타난 정치적 공론장의 변화와 그 위협에 대해 저 스스로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제 나이를 고려해 볼 때 저보다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훨씬 더 정확한 이해를 갖고 있으리라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학문 여정에서 아마도 가장 오래된 주제 중 하나일 이 문제를 다시금 깊이 파고들게 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떤 우려가 선생님을 그렇게 이끄셨는지요?

 

■ 저는 미국의 공론장이 디지털화와는 무관하게 이미 한동안 붕괴 조짐을 드러내 왔다고 보았습니다. 그 중 하나는, 공적 의사소통이 모든 시민들을 포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런 의사소통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져서, 정당 간의 경쟁과 그들이 공적으로 제시하는 정책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알아보고 이를 명확히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점을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반쯤 실패한 건강보험 개혁을 계기로 몇 달간 미국에 머무르면서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대안적 사실들(alternative Fakten)’에 의한 공론장의 체계적인 오염 문제는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충분할 겁니다. 이미 저는 2006년에 의사소통학적 맥락에서 민주적 의지형성이 과연 여전히 인식론적 차원을 갖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룬 바 있습니다.[4] 이러한 흐름은 미국에서 특히 더 심화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미디어 시스템이 다른 곳에 비해 전면적으로 사유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독일 미디어 환경을 오랜 시간 관찰해온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만약 제 인상이 틀리지 않다면, 독일의 일간지와 주간지 역시 지난 10년에서 20년 사이 디지털화의 흐름 속에서 분명히 변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문사들은 자신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주목받기를 원하면서 소셜 미디어에 오히려 종속되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전국 단위의 주요 일간지와 주간지조차도 ‘일요판 신문’ 스타일을 따르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신문의 지적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정치면과 교양면이 점점 더 흐릿해지고 개성이 사라지는 현상은 잘 알려진 경제적 요인—즉 디지털 경쟁에 따른 광고 수입 급감—에서 주로 기인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문제는 그러한 경제적 압박이 없어도 언론 편집 작업 자체가 선제적으로 비전문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미디어 소비자들이 충분한 정보 없이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주관적으로 보이는 반응에 맞추려는 언론의 태도는 기이한 획일성을 만들어냅니다. 정치적 공론장의 붕괴는 트럼프 집권기 미국에서 특히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유럽에서도 계속되고 있으며, 독일, 스페인, 프랑스와 같이 공영 방송 시스템 덕분에 정치적 의사소통은 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그나마 어느 정도 기능하는 나라들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 다시 선생님의 사유 여정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61년부터 1964년까지 하이델베르크에서 보낸 약 3년의 시간이 철학적으로 특히 자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매우 행복하고 결실이 있는 만남들이 있었던 시기였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 시절을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 전혀 예상치 못했던 교수 임용 —저는 이 소식에 폐렴으로 반응했습니다만—은 저를 철학으로 다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테와 저에게 교수 임용은 경제적 불안정성과 직업적 종속 상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상황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교직 자격 시험 합격자(Assessorin)였던 우테는 새로운 상황 덕분에 교사 일을 잠시 미루고 먼저 두 어린 자식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기이하게도 신분 의식이 강하고, 저희 부부가 금방 알게 되었던 것처럼 매우 부르주아적으로 안온한 삶이 이 오래된 대학 도시에 남아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네카르 강변에 위치한 게르트 칼로(Gert Kalow)의 탑에서 열린 격식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학문적이거나 지역적 한계에 국한되지 않았던 사교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웃한 한트슈스하임에서는 마리 막스(Marie Marcks)와 헬무트 크라우흐(Helmut Krauch) 부부와 가족 같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미처리히 부부와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고, 뢰비트(Löwith) 교수와 가다머(Gadamer) 교수 부부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특히 부인이신 케테 가다머(Käte Gadamer) 여사는 『철학 동향 Philosophische Rundschau』에 실린 제 글들 때문에 이미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그분도 우리에게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물론 프랑크푸르트 연구소 출신인 저의 학문적 배경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우리가 젊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대학 환경에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진 것은 무엇보다도 우테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떠났다고 생각했던 전공으로 다시 강의를 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사회학이나 철학을 가지고 직접 강의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1961년 겨울 학기 가다머의 조언에 따라 마르부르크에서 교수 자격 논문을 마친 후 늦게 시작하게 되었는데, 저는 박사논문 시절에 공부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셸링에 관한 강의와 사회적 유토피아에 관한 세미나를 개설한다고 공지했습니다. 첫 세미나에서는 참가자 수가 많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알브레히트 벨머를 알게 되었고, 나중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제 지도하에 졸업 시험을 치른 두 명의 학생도 만났습니다. 얼마 후에는 만하임에 있던 울리히 외버만(Ulrich Oevermann)도 리케르트(Rickert) 세미나를 위해 건너왔습니다. 하지만 제게 강의는 늘 부담스러웠습니다. 이건 하이델베르크에서 처음 시작할 때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강의를 자유롭게 진행하는 데 익숙해지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저는 콜로키움[소양이 높은 학생들과 하는 토론식 수업] 형식이 가장 편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콜로키움에서는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반응할 수 있어서 저에게 잘 맞았습니다.

철학 교수로 임용된 것은 저에게 전공의 재정립을 의미했습니다. 저는 이미 정치학 교수자격 논문을 마친 사회학자였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서구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이론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에서는 본 대학에서 로타커와 베커 교수님 밑에서 공부했던 철학적 지식과 관심사를 다시 일깨워야 했습니다. 그 연결고리로 가다머 교수의 대표작이 막 출간되어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특히 『진리와 방법 Wahrheit und Methode』 2부, 즉 이해를 통한 전통의 습득에 대한 독창적이고 세심한 분석에 집중했으며 일부러 비판적으로 읽었습니다. 가다머 교수는 ‘해석학적 이해’가 정신과학[독일 학문 전통에서 정신과학 Geisteswissenschaf는 인간의 정신, 문화, 역사, 언어 등을 연구하는 학문군을 뜻한다. 우리식으로는 인문학이 여기에 가깝다]의 한 방법론이라는 오해에 대항하여 이 책을 썼지만, 저는 사회과학자의 방법론적 관점에서 독해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책의 3부에 나오는 존재론적 사변은 제외하고, 해석학의 통찰을 법학과 신학의 고전적 해석을 실천하는 한계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사회과학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사회과학의 논리(die Logik der Sozialwissenschaften)라는 철학적 주제를 발견했고, 그 작업을 하면서 그동안 쌓아온 사회학적 지식과 경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 하이델베르크 시절 이러한 방향 설정에 관련된 이론적 결정들과 철학적 영향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철학적 해석학은 제가 하이델베르크에서 강의하면서 따랐던 적어도 세 가지 흐름 중 하나였습니다. 이 세 가지 흐름이 결국에는 제가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헌 보고서로 이어졌습니다.[5] 이 보고서는 실제로는 1967년에야 『철학 동향 Philosophische Rundschau』 별책부록으로 출간됐습니다. 1960년에는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뿐만 아니라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저작집 1권이 출간되었는데, 이는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철학적 탐구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로 이어지는 전체 저작의 구조를 이미 암시하는 대담한 흐름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어니스트 네이글(Ernest Nagel)의 『과학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ce』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카르납과 빈 학파로부터 유래한 논리실증주의를 사회과학에 적용한 저작으로서 신실증주의적 과학 이론을 전개한 것입니다. 당시 서독에서는 한스 알베르트(Hans Albert)가 1934년에 출간된 칼 포퍼(Karl Popper)의 주저 『탐구의 논리 Logik der Forschung』를 수용함으로써 이에 대응하고 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리처드 헤어(Richard Hare), 피터 스트로슨(Peter Strawson), 윌리엄 올스턴(William Alston), 게오르크 폰 브리히트(Georg von Wright) 등과 함께 영국에서 꽃피운 분석적 언어철학을 아펠과 나는 대륙의 해석학과 분석적 과학이론 사이를 잇는 가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다머의 해석학은 이해의 작업 혹은 해석 작업을 기호로 기록되고 전해지던 것의 해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해석 작업을 통한 이해란 이 기호들을 통해 생각과 느낌을 기록했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고 그들의 존재 방식을 경험하면서 과거의 전통과 대화를 나누며 존재론적 만남으로서의 지평 융합을 스스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분석적 과학이론에서 이해 작업이란 인간 행동이나 사회 현상까지도 자연 과학처럼 엄격한 경험주의적 방법으로 해독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분석적 과학이론은 ‘이해 작용’을 헴펠-오펜하임 모델에 기초하여 경험주의적으로 설명했던 것이죠. 이 간략한 개요가 제가 철학으로 돌아온 길을 스케치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칼-오토(아펠)가 두 분석 철학 전통을 습득하는 데, 특히 프래그머티즘의 뿌리로서 퍼스(Peirce)를 ‘발견’하는 데 저보다 앞섰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배경에서 아펠과 저의 논의가 진행되었고, 1960년대 전반기에 우리의 ‘인식 관심(Erkenntnisinteressen)’ 이론이 발전했습니다.

 

□ 교수의 시각에서 대학을 접하신 건 하이델베르크에서 처음 시작하셨는데요, 이런 경험을 하시면서 학문적 연구 조직에 대해서 어떤 점을 배우셨습니까?

 

■ 돌이켜보면 양면적인(ambivalentes) 그림이 그려집니다. 당시 하이델베르크는 1960년대 학생 운동을 견뎌내지 못했을 ‘옛 독일’ 대학의 모습을 여전히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학장이 제 가족이 이사왔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전체 교수진 앞에서 제게 통상적인 인사 방문을 하라고 권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때 명함을 미리 만들어두는 센스가 없어서, 결과적으로는 일일이 직접 방문하는 수고를 해야 했죠. 덕분에 1962년 봄과 여름 동안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선배 교수 댁을 방문하면서, 석탄난로를 때는, 책과 원고로 가득한 검소하면서도 품격 있는 옛 독일 교수들의 일상 세계를 아주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교수 부인들 역시 조용히 그 삶에 동참하고 계셨고요. 유명한 이집트학자나 미술사가 분들과 마주하게 되면, 저희의 ‘현대적인’ 생활 방식이 그분들보다 조금 더 넉넉했던 탓에 약간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가다머 선생님은 조금 더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하셨고, 그분께서 저에게 이 전통 깊은 대학의 관행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박사논문 심사에 대한 동료 교수들의 평가가 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여도 괜히 들여다보지 않는 게 좋다는 식으로요. 총장 선거에는 여전히 학사 가운을 입고 갔고, 누가 후보로 나왔느냐는 제 질문에 교수들은 [그런 건 생각하지 말고] 누가 당선되기로 정해졌는지 옆 사람에게 물어보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제게는 시간제 비서 한 명이 배정되었는데, 오래된 철학 세미나실이 너무 좁아서 그녀가 저희 집으로 왔습니다. 강당에서 열린 저의 취임 강의[6]는 만원이었습니다만 일본인 관광객들-당시 이미 상당히 많이 독일을 찾아오고 있었죠-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 계속 살면서 짧게 남편을 방문하던 슈테른베르거(Sternberger) 부인은 당시에도 이미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중심가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요컨대, 하이델베르크라는 도시 처럼 이 대학 역시 내부적으로는 정돈된 분위기, 좋은 예절 그리고 약간은 박물관 같은 고풍스러운 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저는 그때 가다머와 뢰비트(Löwith)라는 두 원로 교수님의 보호 아래 은 비정년 교수로 활동하던 처지였기 때문에 대학 내 정치에는 깊이 관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 나중에 프랑크푸르트에 갔을 때는 분위기가 훨씬 거칠었고, 갈등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이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두 곳의 경험을 종합해서, 이후 저는 프리데부르크(Friedeburg), 데닝거(Denninger), 비트휠터(Wiethölter)와 함께 당시 헤센 주 문화부 장관에게 대학 헌법의 ‘민주화’를 위한 개혁안을 제안하게 되었던 거죠. 그런데 이 개혁안은 상당하면서도 양면적인 결과를 낳았을 테지만 새로운 대학법 도입 직후 제가 슈타른베르크(Starnberg)로 옮겼기 때문에 고백하건대 그 결과에 대해서는 부끄럽게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7]

 

□ 가다머, 뢰비트, 미처리히 세 분과 관련해서는 어떤 기억들이 있으신가요?

 

■ 크라우흐(Krauch)와 칼로(Kalow) 부부 외에도 이 세 분과의 인연이 제게 정말로 중요한 개인적 관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뢰비트 부부와 맺은 우호적이고 사적인 관계는 오직 하이델베르크에서만 유지되었습니다. 가다머 선생님은 제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막 시작할 무렵 조교직을 제안해 주시면서 이미 알게 되었고요, 평생에 걸친 서신 왕래가 그 관계가 지속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미처리히 부부와는 세대 차이가 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마지막까지 깊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학문적인 관심보다도 우정이 먼저였고, 그 속에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곤 했습니다. 마르가레테는 제 아내 우테가 정신분석전문가 교육을 받기를 간절히 바라며 애써 주셨지만 안타깝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저희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슈타른베르크로 이사했을 때, 알렉산더와 마르가레테 두 분 모두 저희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났다고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로 인해 만남의 빈도는 줄었지만, 우정 자체가 훼손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친밀감에 비해, 뢰비트나 가다머 선생님과의 관계는 여전히 스승이자 저에게 큰 영향을 준 책의 저자분들이라는, 일정한 거리감이 남아 있었습니다.

칼 뢰비트 교수님의 책들을 탐독하며 영향을 받은 건 본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에서 뵈었던 뢰비트 교수님은 이미 젊은 시절의 역사-사회학적이면서 좌파 하이데거주의적 사유에서 거의 벗어나 계셨죠. 고전적 자연 철학으로 돌아가셨기에 이론적으로는 저와는 다소 멀어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분이 제 학문적 관심사와 얼마나 가까웠는지는 사실 제가 하이델베르크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가기 직전 막스 베버 학술회의[8]를 준비하면서 뢰비트 교수님의 마르부르크 시절 1920년대 논문들을 처음 읽었을 때 깨달았습니다. 그분의 교수자격논문[9]에서는 제 자신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논문에서 교수님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해 포이어바흐의 독해를 바탕으로 비판하였습니다. 특히 그 저작에 담긴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언어 이해와 ‘속인(Man)’에 대한 분석을 비판하셨더군요. 1인칭과 2인칭 사이의 상호주관적 관계에 대한 이러한 초기 규명은 제가 가장 최근에 쓴 책에서도 다시 다루었죠.[10] 하지만 마르부르크 시절 뢰비트 교수님에게 제가 배웠던 것에 관해서는 하이델베르크의 뢰비트 교수님과는 더 이상 논의할 수 없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주제에 대해 저희가 건드린 것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예를 들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니체는 이 시대에 더 이상 ‘해로운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라는 –곧 틀린 것으로 드러나버린– 확신에 찬 주장을 펼치면, 그분은 그저 미소만 지으셨을 뿐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다머 교수님과는 당시에도 논쟁을 벌였습니다. 저는 가다머 교수님의 해석학이 전통을 계승하는 역할에 대해 보수적이고 궁극적으로 하이데거주의적인 ‘형이상학적’ 해석을 한다는 점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가다머 교수님이 제 사회 과학의 논리에 대한 문헌 보고서를 읽으셨을 때에야 비로소 그분 이론에 대한 저의 해석을 알아차리신 것 같습니다. 그 보고서가 미국에서의 가다머 수용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교수님도 알고 계셨죠. 가다머 교수님과 저의 논쟁에는 아펠 교수도 참여했는데 이는 책으로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11] 이러한 논쟁이 가다며 교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부담스럽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깊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5회에서 계속~


[1] J. Dewey, The Public and Its Problems, New York 1927; dt. Ausgabe: Die Öffentlichkeit und ihre Probleme, aus dem Amerikanischen von W.-D. Junghanns, herausgegeben mit einem Nachwort von H.-P. Krüger, Bodenheim 1996.

[2] C. ‌W. Mills, The Power Elite, New York 1956; dt. Ausgaben: Die amerikanische Elite. Gesellschaft und Macht in den Vereinigten Staaten, aus dem Amerikanischen von H. Stern, H. Neunes und B. Engelmann, Hamburg 1962; Die Machtelite, neu übersetzt von S. Lübeck, herausgegeben von B. Wendt, M. Walter und M. ‌B. Klöckner, Frankfurt/M. 2019.

[3] Vgl. Habermas (2022).

[4] J. Habermas, »Hat die Demokratie noch eine epistemische Dimension? Empirische Forschung und normative Theorie«, in: ders., Ach Europa. Kleine Politische Schriften XI, Frankfurt/M. 2008, 138-191. Philosophische Texte. Studienausgabe in fünf Bänden, Frankfurt/M. 2009, Bd. 4: Politische Theorie, 87-139에 재수록.

[5] J. Habermas, Zur Logik der Sozialwissenschaften, in: Philosophische Rundschau, 별책부록 5, Tübingen 1967. Zur Logik der Sozialwissenschaften (확장판), Frankfurt/M. 1982, 89-330에 재수록.

[6] J. Habermas, »Hegels Kritik der Französischen Revolution« (Heidelberg대 취임 강의), in: ders., Theorie und Praxis. Sozialphilosophische Studien, Neuwied, Berlin 1963, 89-107. Wieder abgedruckt in: ders., Theorie und Praxis. Sozialphilosophische Studien, Frankfurt/M. 1971, 128-147 확장 신판에 재수록.

[7] Vgl. dazu E. Denninger u. ‌a., »Grundsätze für ein neues Hochschulrecht«; dies., »Ein Beitrag zur Diskussion des Hessischen Hochschulgesetzentwurfs«, in: J. Habermas, Protestbewegung und Hochschulreform, Frankfurt/M. 1969, 202-216; 223-234. Hessischer Kultusminister war von 1959 bis 1969 Ernst Schütte.

[8] Vgl. dazu J. Habermas, »Wertfreiheit und Objektivität. Eine Diskussionsbemerkung« (zum Referat von Talcott Parsons), in: O. Stammer (Hg.), Max Weber und die Soziologie heute (= Kongressband zum Deutschen Soziologentag 1964), Tübingen 1965, 74-81. Habermas (1982), 77-85에 재수록.

[9] K. Löwith, Das Individuum in der Rolle des Mitmenschen. Ein Beitrag zur anthropologischen Grundlegung der ethischen Probleme (Habilitationsschrift von 1928), in: ders., Sämtliche Schriften, herausgegeben von K. Stichweh, Stuttgart 1981.

[10] Vgl. Habermas (2019), Bd. 2, 603-623, hier 613.

[11] Vgl. K.-O. Apel u. ‌a., Hermeneutik und Ideologiekritik, Frankfurt/M. 1971.


지난 회차 글

막스 슈티르너: 에고이즘의 위대한 철학자-6(최종) <슈티르너 이후>, <역사적 결론>,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슈티르너 이후>, <역사적 결론>,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박종성(한철연 회원)

 

 – 차 례 –

  • 서론
  • 헤겔 좌파
  • 헤겔 좌파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 정치적 슈티르너
  •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 슈티르너 이후
  • 역사적 결론
  •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Svein Olav Nyberg [노르웨이 아그데르 대학교(노르웨이어: Universitetet i Agder) 부교수]의 글, Max Stirner: The Great Philosopher Of Egoism(2021)을 번역한 글입니다.

 

<슈티르너 이후>

스코틀랜드계 독일 시인 존헨리 맥케이(John-Henry Mackay)는 오늘날 슈티르너에 관해 알려진 대부분의 내용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맥케이는 슈티르너에 대한 정보와 그가 쓴 내용을 추적하는 데 몇 년과 막대한 재산을 사용했습니다맥케이 자신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였으며슈티르너 역시 그렇게 해석했습니다나는 이것이 슈티르너의 경우에 해당되는지 의심스럽습니다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논의를 위한 것입니다슈티르너는 어떤 경우에 아나키스트특히 맥케이와 같은 개인주의 아나키스트에게 영감을 주었지만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 같은 사회적아나키스트(social-anarchist)도 막스 슈티르너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슈티르너는 세기가 바뀌면서 두 번째 명성을 얻었습니다게오르그 브라데스(Georg Brandes)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를 발견하고 홍보했습니다니체의 팬들은 니체의 선구자를 찾고 있었고이를 슈티르너에게서 발견했습니다따라서 브라데스는 1902년에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덴마크 판의 서문을 출판하고 썼을 때 시장을 확보했습니다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은 브라데스와 자주 서신을 교환했기 때문에입센이 슈티르너의 영향을 받았다고 가정할 이유가 있습니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로서의 슈티르너의 명성은 금세기 초 미국의 대표적 자유주의자를 이끄는 벤저민 터커(Benjamin Tucker)가 1907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첫 번째 영어판을 출판했을 때 이를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겼을 때 더욱 강화되었습니다나중에슈티르너는 대부분 아나키스트 정치 철학자로 여겨졌습니다그러나 비평가 허버트 리드(Herbert Read)에 따르면에리히 프롬(Erich Fromm), (Jung),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및 몇몇 20세기 실존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슈티르너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저는 이러한 다양성이 슈티르너를 기쁘게 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역사적 결론>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출판된 후 막스 슈티르너가 상상했던 방식대로 상황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이 작품은 무겁고즉각적 영향을 미쳤으나, 1848년 정치적 불안과 혁명으로 인해 그와 동시대의 청년 헤겔주의자들의 관심이 사라졌습니다슈티르너를 포함한 대부분의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나 다른 면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슈티르너 자신도 실패한 투자로 곧 전 부인의 전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1856년에 죽기 전에슈티르너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최초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했고스미스를 대중화한 프랑스인 장 바티스트 세이(Jean-Baptiste Say)의 일부 책도 번역했습니다슈티르너는 죽을 때까지 여러 휴게실과 회의실에서 급진적이고 충격적 사상을 언급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1856년 6월 25일 슈티르너는 곤충에 쏘인 후 감염으로 사망했습니다그와 함께 유일한 세계가 죽습니다.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인간의 본질”(the essence of Man)에 대한 슈티르너의 공격은 페미니스트와 가부장제주의자 모두가 가정하는 성 역할(gender roles) 비판에 깔끔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양쪽 모두 여성” 무엇인지에 대한 규범적 견해를 유지합니다예를 들어여성은 근육질일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여성이 강하면 가장들은 그녀에게 여성적이지 않다”, 심지어 “남자같”unwomanly고 꼬리표를 붙입니다이 모든 과정에서 간단한 건강 검진을 통해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80년대의 비슷한 추악한 예는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가 총리였을 때입니다페미니스트들은 그녀가 그들 중 하나인 여성이 아니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녀는 남자였다.” “인간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경향을 따라가면우리는 젠더 본질주의(gender essentialism)와 미리 부여된 젠더 역할(pre-assigned gender)이 단순히 자기 모순적(self-contradictory)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그녀가 여성의 본질과 역할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여성이기를 중단하는 것은 일탈적 여성이 아닙니다더 이상 사실이 아닌 것은 여성의 본질과 역할입니다.

페미니즘은 아마도 세기 전환기 영국의 저명한 개인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였던 도라 마스든(Dora Marsden)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끌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수사법과 생각은 슈티르너와 매우 유사하며 그녀는 이 연관성을 명시적으로 확인했습니다.

이 놀라운 여성에 대해 더 잘 알고 싶다면 다음 웹페이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http://pierce.ee.washington.edu/~davisd/egoist/marsden/

하지만 조심하세요. 마스든과 그녀의 수사법에 비하면 오늘날의 페미니스트들은 지루한 관료처럼 보일 것입니다!

 

– 끝 –


옮긴이 박종성: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공역)이 있다. 논문으로는 「유일한 사람의 사랑」,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고 건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75)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5)

 

C. 철인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천문학(528e-530c), 화성학(530d-531d)

 

[528e-530c] 천문학

* 소크라테스는 세 번째 배울 거리로서 입체기하학을 건너 뛰어 천문학에 대한 논의로 다시 돌아와 그것을 네 번째 배울 거리로 제시한다. 그러자 글라우콘은 조금 전 천문학을 천박하게φορτικῶς 예찬했던 것을 반성하고 소크라테스가 접근하는 방식으로 천문학을 예찬하겠다며 천문학이 ‘영혼을 강제해서 위쪽τὸ ἄνω을 보게 하고 그쪽으로 인도해간다’ἄγει는 것은 모두에게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 또한 소크라테스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남들을 철학으로 인도하는ἀνάγοντες 이들처럼 천문학을 다룰 경우 반대로 그것은 완전히 아래κάτω를 보도록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528e-529a) 이에 글라우콘이 당혹해하자 소크라테스는 위쪽의 것들에 대한 배움μάθησις과 관련하여 누군가가 고개를 젖혀서 천장ὀροφή의 장식ποίκιλμα들을 구경하고서 뭔가를 배운다면 그는 지성적 이해νόησις를 통해 구경하는 것θεωρεῖν이지 눈으로 구경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있는 것’τὸ ὄν과 ‘보이지 않는 것’τὸ ἀόρατον에 관한 배울 거리만이 영혼을 위를 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앎ἐπιστήμη이란 그런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529a-b) 이에 글라우콘은 천문학을 배움에 있어 오늘날과 상반되는 방식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묻는다.(529c) 이에 소크라테스는 하늘에 있는 장식들ποικίλματα은 비록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확한 것들ἀκριβέστατα이라고 여겨지긴 하지만, 참된ἀληθινός 것들에 비하면, 즉 참된 수ἀριθμός와 모든 참된 도형σχῆμα들의 영역에서 ‘있는 것’으로서의 빠름과 ‘있는 것’으로서의 느림이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πρὸς ἄλληλα 움직이기도 하고 그 안의 것들을 움직이게 만들기도 하는 그런 운동φορά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는 것ἐνδεῖν으로 그것들은 이성λόγος과 사고διανοίᾳ에 의해서 파악되지ληπτά 시각ὄψις으론 파악되지 않는다고 말한다.(529c-d)

* 하늘에 있는 장식은 마치 누군가가 다이달로스나 다른 어떤 장인δημιουργός 혹은 화가γραφεύς가 아주 뛰어난 솜씨로 그렸거나 공을 들여 만든 도식διάγραμμα들을 만났을 때 하듯이 그런 참된 것들에 관한 배움을 위한 표본παραδείγμα으로 이용해야 한다.(529d) 그러나 기하학에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화가나 장인들이 만든 도식들을 보고서 아주 아름답게 만들어졌다고는 생각하겠지만 그것들을 가지고 같음, 두 배, 혹은 다른 어떤 비례관계συμμετρία 등에 대한 진리ἀλήθεια를 파악하겠다고 그 도식들에 매달려 진지하게 고찰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529e)

* 진정으로τῷ ὄντι 천문학에 밝은 사람ἀστρονομικός은 별들ἄστρον의 운동들φορὰς을 보고서 동일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는 그러한 것들이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답게 구성되도록 하늘의 제작자δημιουργός가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구성했다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밤과 낮 사이의 비례συμμετρία, 이것들과 한 달 사이의 비례, 한 달과 일 년 사이의 비례, 이것들과 다른 별들 사이의, 그리고 별들 사이의 비례와 관련해서 어떤 사람이, 이것들이 몸체σῶμά를 가지고 있고 눈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ταῦτα ἀεὶ ὡσαύτως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결코 이탈παραλλάττειν하지 않는다고 믿고서, 이것들에 관한 진리ἀλήθειαν를 얻고자 모든 방식으로 탐구ζητεῖν한다면, 그것은 이상한ἄτοπος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530a-b)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천문학도 기하학처럼 문제πρόβλημα들을 사용하면서 접근해야 하고, 지금 쓸모없는 상태에 있는 영혼 안의 본성상 현명한φρόνιμος 부분을 쓸모 있는χρήσιμος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하늘에 있는 것들은 내버려 두어야 한다ἐάσομεν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가 오늘날의 천문학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보다 몇 배나 되는 일을 지시하고 있다고 말한다.(530b-c)

 

[530c-531d] 화성학

* 천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 후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적합한 배울 거리로 추가로 제안할 만한 것이 있는가를 묻고 그가 당장에 그럴 만한 것이 없다고 답을 하자(530c) 예비적인 배울 거리의 끝으로 아래와 같이 화성학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운동’φορά에는 하나ἕν가 아니라 여러πλείων 종류가 있는데 피타고라스 사람들이 주장하고 우리도 동의하듯이 눈ὄμμα이 천문학에 맞춰져 있듯이 귀οὖς는 화음이 있는ἐναρμόνιος 운동φορά에 맞춰져 있으며, 이것들은 서로 ‘일종의 자매 학문’ἀδελφαί τινες αἱ ἐπιστῆμαι이라고 말한다.(530d) 그리고 이제 화성학 또한 큰 일거리πολὺ τὸ ἔργον로 다루되 아까 일부 천문학자들이 그랬듯이 화음ἁρμονία에 관해서도 사람들이 귀에 들리는 화성συμφωνία과 소리φθόγγος들을 서로 비교하고 재는 일 같은 쓸데없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530e) 그러자 글라우콘은 조밀음정’πύκνωμα이니 최소음정ἠχὴ σμικρότατον이니 뭐니 하는 이름을 붙이고 서로들 논쟁을 벌이며(531a) 지성νόος보다 귀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라 말한다.

*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화음에 관해서 묻겠다고 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천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531b) 그들은 화성을 이루는 것으로 들리는 이 소리들 안에 있는 수들을 탐구하긴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것들이 화성을 이루는 수이고 어떤 것들이 그렇지 않으며 각각의 이유는 무엇인지를 고찰하기 위해 문제들προβλήματα의 차원으로 올라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에 글라우콘이 신령스러운δαιμόνιος 일을 말씀하신다고 반응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래도 그것은 아름다운καλός 것과 좋은ἀγαθός 것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는 쓸모 있는χρήσιμος 것이라 말한다.(531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우리가 설명한 배울거리들에 대한 연구가 배울거리들 서로 간의 공통성κοινωνία과 친족관계συγγένεια를 밝히는 데까지 도달해서 그것들이 어떤 점에서 서로 동족적인οἰκεῖος지를 추론해내야 한다συλλογισθῇ고 말한다. 그래야 그런 작업이 우리가 바라는 바를 이루는 데 기여할 것이고 헛수고가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글라우콘은 어마어마한 일πάμπολυ ἔργον을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모두가 본곡νόμος의 서곡προοίμιον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것들에서 대단한 사람들δεινοὶ이라고 해서 아직 변증술에 능한 자들διαλεκτικοὶ은 아니라고 말한다.(531d)

* 이로써 예배적인 배울 거리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되고 본 곡에 해당하는 변증술에 관한 논의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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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8e ‘천문학이 영혼을 강제해서 위쪽을 보게 하고’ : 글라우콘은 ‘위쪽’을 지성의 영역으로서 위쪽이 아닌 눈에 보이는 위쪽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위쪽을 보고 있는 사람에 대한 예로서 이곳에서는 ‘위쪽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과 ‘뭍에서든 바다에서든 드러누워 둥둥 떠다니면서 위쪽을 보고 있는’ 사람이 나온다.(529b-c) 그런데 이 모두 아리스토파네스가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풍자할 때 나오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구름> 170-3에는 소크라테스가 입을 벌리고서 달의 운행을 관찰하는 장면이 나오고 또 219-26에는 공중에 매달린 바구니에 누워 천체를 바라보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만약 <구름>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이곳에서 위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그린 것이라면 우리로선 이해하기 힘든 혼란스러운 국면에 직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사람들은 ‘위쪽을 보지만 사실은 아래를 보는 낮은 수준의 사람들’로 폄하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플라톤 또한 아리스토파네스처럼 스승 소크라테스를 폄하하는 것이 돼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그 사람들은 <구름> 속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냥 묘사 과정에서 우연히 비슷하게 그려진 것일까? 그러나 플라톤이 <구름>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소크라테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아리스토파네스를 포함해서 그와 똑같은 수준에서 위쪽을 말하고 글라우콘 모두에게 아리스토파네스의 풍자를 그대로 되돌려 주려한 것은 아닐까? 실제로 글라우콘은 수학과 기하학을 거쳐 세 번째 배울 거리로서 천문학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바라보는 방식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천문학을 잘못 인지하고 있다. 아무려나 확실한 것은 플라톤은 이곳에서 글라우콘의 대답을 방편 삼아 ‘위쪽을 보지만 사실은 아래를 바라보는 사람들’ 즉 천문학을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 529a ‘오늘날 남들을 철학으로 인도하는 이들’ : 당시 자칭 철학자라고 하면서 순수 수학보다는 수사학 등 실용적인 분야를 중시했던 이소크라테스를 비롯해 히피아스 등 소피스트들을 가리킨다.(<프로타고라스> 318e, Isocrates, <Panergyricus> 26-28 참고) 그들은 천문학과 관련해서도 시각을 통한 관찰에 의지할 뿐 관찰 결과들을 추론적 사고를 통해 수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능력까지는 갖추지 못했다.

* 529c-d ‘참된 수와 모든 참된 도형들의 영역에서 ‘있는 것’으로서의 빠름과 ‘있는 것’으로서의 느림이 ‘상호간 관계 속에서’ 움직이기도 하고 그 안의 것들을 움직이게 만들기도 하는 그런 운동’ : 이 문장은 예비학으로서 천문학 또한 앞서 교과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수학적 사고에 의해 파악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천체에 대한 육안적 관찰의 한계와 더불어 훗날 <티마이오스>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플라톤 우주론의 내용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38c-39c)에 따르면 천체들 모두는 철두철미 시종일관 수학적 비례와 기하학적 도형에 기초한 입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운동 또한 수학과 기하학적 비례에 따라 정해진 기준에 따라 규칙을 갖고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육안으로 보면 불규칙한 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다. 이를테면 수성과 금성의 경우 해가 뜨기 전에는 육안상 태양에 앞서고 해가 진 후에는 태양에 따라 잡히기도 하고 또 별들 상호 간에도 느림과 빠름 현상이 관찰된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는 별들이 동일성의 궤도와 비스듬히 교차해 있는 타자성의 궤도를 따라 운동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필경 <국가> 이 부분에서 ‘빠름과 느림이 상호 관계 속에서 움직인다’는 언급은 <티마이오스>의 위와 같은 내용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에 따르면 그러한 현상 역시 육안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는 그것들 역시 – 물론 플라톤이 말하는 우주론의 실제는 오늘날 천문학적 지식과 큰 괴리가 있지만 – 일정한 수학적 규칙과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대 천문학자들은 그러한 행성들의 불규칙한 운동을 관찰할 수 있었지만 그 이유에 대한 설명 즉 이성에 기초한 추론적 파악 내지 수학적인 해명은 엄두조차 내지 못 했다.

* 529d ‘참된 것들에 관한 배움을 위한 표본으로 이용해야 한다.’ : 기하학에 경험이 많은 사람과 화가나 장인들은 표본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표본paradeigma 자체는 서로 큰 차이가 있다. 기하학에 경험이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표본은 수학적인 대상 자체이지만 화가나 장인들은 기하학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표본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것들 즉 한 단계 아래의 것들을 표본으로 이용하여 뭔가 도식들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도식들에는 수학적 비례 관계 등에 대한 진리가 들어 있지 않다. 천문학에 밝은 사람들 역시 이처럼 이차적인 산물들 즉 별들에 대한 감각적 사실들을 가지고 뭔가 진리를 포착하려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길 것이다. 하늘에 있는 별들은 그것대로 그냥 내버려 두고 기하학적 문제들을 다룰 때처럼 수학적인 방식으로 그것들의 참된 실재 즉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

* 530b ‘지금 쓸모없는 상태에 있는 영혼 안의 본성상 현명한 부분을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 이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은 수학 교육보다는 당장 이익이 되는 실용 교육을 강조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의 영혼이야말로 곧 쓸모없는 상태의 영혼이라 말한다. 순수 이론으로서 수학이나 기하학, 천문학 같은 교과가 쓸모와 거리가 멀다는 생각은 그들이 말하는 쓸모의 관점에서도 그릇된 것이다. 오히려 수학 같은 순수 일반 이론들이 쓸모의 영역에서 특수한 영역에 한정하여 응용되는 응용 학문 보다 더욱 확장성을 갖고 있다. 흔히들 기초과학의 발전 없이는 어떠한 응용과학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듣고 당대 실용 천문학에서 행해지는 것보다 몇 배나 되는 일을 지시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진정 쓸모 있기를 원한다면 순수 이론 분야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쓸모는 이성과 사고를 통한 순수 이론 자체에 대한 보다 깊은 탐구를 통해 담보된다. 그러한 순수 이론들이야말로 마치 큰 저수지와 같아서 비로소 수많은 지류들 즉 부산물(527c)을 낳는 원천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 서곡으로서 수학과 기하학의 진정한 쓸모는 본곡으로서 최상의 순수 이론 즉 변증술을 위한 쓸모이다.

* 530d ‘눈이 천문학에 맞춰져 있듯이 귀는 화음이 있는 운동phora에 맞춰져 있으며, 이것들은 서로 일종의 자매 학문’ : 천문학의 자매학문으로서 ‘화성학’(和聲學)ta harmonika은 이곳에서 직접적인 명칭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천문학과 화성학은 예비교과로서 앞서 다룬 수학과 기하학과 달리 배울 거리에 ‘운동’phora이 추가되어 있다. 실재 세계가 단순히 공간 속에서 정지stasis해 있는 세계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늘 생성 변화하고 운동하는 세계라면 이제 ‘실재 세계의 운동’에 대한 지성적 이해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는 운동 즉 phora는 그러한 생성과 변화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운동 즉 kinēsis로서 운동 일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천체들의 운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천문학과 화성학이 다룰 운동은 플라톤의 우주론을 빌어 표현하자면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영원하고aidios 한결같은 존재를 본paradeigma으로 삼아 우주의 근본 원인 중 하나인 원시 생성to ginomenon 내지 원시 물질성chora을 설득하여 최대한 ‘가장 아름답고kallistos 가장 훌륭한aristos 것’으로 제작한 우주의 운동이다. 이 과정을 몇 줄로 축약하면 아래와 같다. 데미우르고스는 가장 먼저 철두철미 시종일관 수학적 비례에 기초하여 있음(존재)ousia과 같음(동일성)tauton, 다름thateron(타자성)이 결합된 영혼을 만든 다음, 그것을 길게 둘로 잘라 마치 X자처럼 교차하는 동일성과 타자성 두 개의 둥근 띠들을 만들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 운동을 하되 동일성의 띠를 바깥쪽에서 감싸게 하여 타자성을 지배하게 만든다. 그런 다음 데미우르고스는 타자성의 궤도를 7개로 나누어 행성들을 그 궤도에 배치함으로써 우주로 하여금 영속적이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되 궁극의 좋음을 보전하는 말 그대로 ‘가장 좋은 것’으로서 영원한 코스모스를 만들어 낸다 .(29a-37a) 그러므로 철학의 궁극 목표가 가장 좋은 것으로서 이 우주의 진상을 온전히 밝히는 것에 있는 한, 가장 질서 있는 운동체로서 이 우주에 깃들어 있는 수학적 기하학적 비례를 포착하고 이해하는 것은 철학자들에게 필수적인 배울거리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플라톤 말기의 위대한 저작 <티마이오스>는 <국가>의 이상국가론을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해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게다가 중기의 저작인 이곳 <국가>에서도 비록 단편적이지만 <티마이오스>에서 전개될 우주론적 논의의 일부가 내용 그대로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은 <티마이오스>와 <국가>가 저술 시기상 큰 차이가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플라톤 자신 이미 일찍부터 수학과 기하학에 기초한 우주론과 국가론의 총체적 통일적 연관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을 고려하면 <국가>에서 철학자 왕이 되기 위해 배워야 할 교과로서 본 교과에 들어서기 전에 우주의 운동, 즉 천체의 운동에 관한 천문학이 필수적인 예비 교과로서 요구되는 것은 플라톤의 우주론, 정치론 전체의 관점에서도 너무도 자연스럽고 또 그런 만큼 너무도 필수적인 일이다.

* 그런데 천문학과 자매 학문으로서 화성학은 어떤 측면에서 운동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일까? 플라톤은 이곳에서 그것을 ‘화음이 있는enarmonios 운동phora’으로 규정하면서 눈에 상응하여 천문학이 있듯이 귀에 상응하여 화성학이 있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우주에는 눈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천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귀로 전달되는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눈에 보이는 감각적 천체의 참된 존재가 수학적 원리에 기초해 있듯이 귀에 들리는 감각적 소리의 참된 원인 또한 수학적 원리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현악기의 화음은 하나같이 현들의 길이와 그것들 서로 간의 수학적 비례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화성학이라고 해서 단순히 귀에 들리는 감각적 소리들을 감각적으로 비교해가며 화성을 만들어가는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현악기의 줄을 괴롭히고 줄 감개를 조여서 고문하는 사람들은 그저 감각적 관찰에만 매달려 천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같이 헛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화성학은 들리는 협화음symphōnia과 소리를 대비적으로 측정하는(531a-b) 단순 화성 작업을 넘어 그 안에 있는 수학적 기하학적 문제 즉 어떤 수 어떤 비례 관계가 아름답고 좋은 것인지를 감각이 아닌 사고를 통해 고찰하는 학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화성학은 원어 ta harmonika의 토대가 되는 말 harmonia의 뜻 그대로 소리의 조화보다는 ‘조화 일반’에 방점을 두어 수학적 비례와 조화, 균형을 다루는 ‘조화학’으로 부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화성학은 조화와 균형, 적도(適度)를 탐구하는 측정술metretikē과도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겠다.

* 예비교과 가운데 마지막 배울 거리로 다루어지는 과목이 화성학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국가>의 주제인 정의로운 국가, 정의로운 개인이란 다름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회계층 간의 내적 조화 내지 개인 영혼의 내적 조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내적 조화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궁극의 목표 즉 공동체와 나라에 가장 좋은 것 또한 다름 아닌 공동체의 안녕과 행복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살피게 되겠지만 예비 교과에 이어 본 교과의 목표는 이른바 변증술의 숙달을 통해 ‘좋음의 형상(Idea)’에 이르는 것이다. 좋음의 형상이 다름 아니라 우주적 좋음의 기본 원리일 뿐만 아니라 인간 공동체와 개인의 행복을 담보하는 만유의 총체적 궁극적 원리라는 점도 마지막 예비 교과로서 화성학이 갖는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 531a ‘조밀음정’ : ‘조밀음정’의 원어 ‘pyknōma’로 원래 두껍고 촘촘하게 짜인 옷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조밀음정은 제일 높은음과 제일 낮은음 사이가 대략 완전 4도가 되며 4개의 음으로 구성된 음계에서, 제일 높은음과 그다음 높은음 사이의 음정 격차가 나머지 두 음정 격차를 합친 것보다 더 클 때, 그 나머지 두 음정 격차 각각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음계에 따라서 반음이나 4반음 정도의 음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531c ‘문제들의 차원으로’ : 여기서 ‘문제들’problēmata이란 530b에도 나왔듯이 수학과 기하학에서 다루는 문제들 즉 수학적 기하학적 원리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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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와 네 번째 예비 교과로서 천문학과 화성학과 관련한 이곳의 논의는 각각 운동과 조화가 추가적인 논의 요소로 더해져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앞에서의 교과와 마찬가지로 탐구 방식에서 감각적 관찰이 배제된 수학과 기하학적 탐구가 시종일관 철두철미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감각적 관찰이나 경험이 아닌 수학과 기하학등 사고 내지 지성의 이해가 강조된다고 해서 플라톤이 감각적 관찰을 무시하거나 배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플라톤은 다만 감각적 관찰이나 경험이 탐구 방식에서 사고 내지 지성의 이해에 앞서거나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주 전체, 만유를 다루는 <티마이오스>(46c-48b)에는 그와 관련하여 플라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아주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그 내용의 요체를 다소 길게 정리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지성을 겸비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제작하는 원인들과 필연에 의해 매번 무질서하고 우연적인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들을 모두 추구하고 탐구해야 한다. 다만 그것들 중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보조 원인인지를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지성만이 아니라 보조 원인을 구성하는 시각 등 감각들 모두가 유익함의 원인이다. 태양도 하늘도 눈이 볼 수 없었다면 우주에 관한 어떠한 설명이나 논의도 가능하지 않으며, 낮과 밤, 달과 해의 주기, 사계를 관찰할 수 없으면 수를 고안할 수도 시간의 관념과 우주의 본성도 탐구할 수 없다. 그것들로부터 철학에 속하는 것을 얻게 되었으니 그것은 신들이 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사유의 회전을 사용하기 위해 하늘에 있는 지성의 회전들을 관찰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본성에 맞는 바른 계산법을 얻어 우리 안의 방황하는 회전들도 바로 세울 수 있다. 소리와 청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도 같은 의도와 목적으로 신들이 선물해 준 것이다. 청각과 관련된 조화는 혼의 회전들과 동류의 조화를 가지니 그것들을 원군으로 삼아 우리는 적도와 우아함을 보전할 수 있다. 세계의 생성은 필연과 지성의 결합으로부터 혼합된 것이므로 그것들 모두가 설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성은 생겨나는 것들의 대부분을 가장 훌륭한 것으로 이끌도록 필연을 설득하여 지배하였으니 그런 방식과 조건에 따라 필연이 지혜로운 설득에 굴복함으로써 그렇게 처음부터 이 우주가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그러한 우주를 이야기하려 한다면 방황하는 원인의 종류도 함께 다뤄야 하며 그것이 본래 어떤 식으로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는지도 이야기해야 한다.”

* 요컨대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상의 모든 지각 및 인식, 단계별 태도와 지향은 진리와 현실 구제를 향한 발전과 상승을 담보하는 것으로서 각 나름의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과학이론의 기본 구도와 발전을 설명하는데도 매우 유의미한 관점을 제공한다. 오늘날 과학 분야에서 감각적 관찰과 경험은 사고를 통해 이론화되고 그 이론은 보다 발전되고 확장된 관찰과 경험을 가능케 하고 그것은 다시 보다 발전되고 확장된 이론과 가설을 낳는 일을 반복하면서 사물과 사태에 대한 보다 발전되고 확장된 과학적 성과를 이룩해 간다. 그리고 그 발전의 단계마다 개별 과학적 성과들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직관은 보다 진일보한 가설들을 창조해내는 과학적 상상력으로 작동한다. 실제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룩된 오늘날의 과학적 성과 중 이를테면 천문학의 경우만 살펴봐도 플라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을 수억 광년 떨어진 은하들까지 관찰할 수 있게 되었고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 등 그러한 천체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나 가설들 또한 플라톤 당시의 수준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 그런데 현대 과학의 발전과정에서 플라톤조차 예상치 못했을 과학 바깥의 변수가  생겨났다. 그것은 오늘날 순수 기초과학을 포함한 과학의 발전이 옛날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엄청난 자본력을 기반으로 성취된 것이라는 점이다.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등 순수 기초 과학의 현대적 성과 또한 엄청난 규모의 실험과 관찰 기구, 고도의 전산처리 능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자본력은 기업이나 권력이 필요로 하는 응용과학 분야에  선택적으로 집중 투자되고 있다. 이에 따라 오늘날에는 순수 이론과학이건 응용과학이건 간에 그 성과들 모두 그 분야에 대한 과학자들의 관심과 무관하게 인간 삶의 가치와 문명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정치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기초과학의 발전에 비례하여 크게 발전한 응용과학 내지 첨단 산업 과학 분야일수록 이를테면 AI 분야와 무기 관련 연구 분야일수록 국가 또는 기업의 이익 차원에서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투여되고 있다. 후진국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실제로 초국적 자본을 갖춘 기업 집단 또는 강대국들이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과학을 운용하느냐에 따라 인류와 지구환경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과학적 성과는 내용 자체로는 비록 가치중립적일지라도 이익집단의 목적에 종속하여 그 성과가 작동하고 이용되는 현실은 과학의 가치 관련성 내지 정책으로서 과학에 대한 관심을 크게  증폭시켰다. 과학과 정치는 결코 별개 문제가 아니다. 물론 플라톤 당대에도 과학의 성과와 쓸모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오늘날 첨단의 과학들 특히 응용과학 내지 첨단산업 분야일수록 그 의도와 성과들에 대한 비판적 논의와 연구는 물론 그것의 제도적 반영을 위한  국제적 연대와 실천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수반되지 않으면 인류의 행복과 미래를 위한 과학으로서의 본래의 의미와 가치는 언제라도 약해지거나 상실될 수 있는 처지에 놓일 수 있고, 자칫 잘못하면 거꾸로 그 발전에 크게 반비례할 정도의 비극적인 재앙마저 초래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도 우주 및 자연세계에 대한 과학적 성취와 관련하여 그 성취가 클수록 이곳 동굴의 비유에서 최종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이른바 철학적 인식의 극치로서 ‘좋음의 형상’에 대한 성찰이 반드시 자리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이든 정치든 어떤 영역에서든 비판적 지성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 반지성의 크기만큼 인류는 되돌리기 힘들 정도로 불행하고도 치명적인 대가를 치를 수 있다.

* 소크라테스는 예비 교과들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그간의 배울 거리들 서로 간에 어떤 점에서 서로 동족적인지를 추론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 살폈듯이 그것들의 공통성 내지 친족관계란 두말할 나위 없이 수학과 기하학에 기초한 것으로서 그것들 모두 장차 ‘좋음의 형상’을 보다 쉽게 획득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그만큼 수학과 기하학은 예비 교과들의 핵심을 이룬다. 오죽하면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앞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ageōmetrētos mēdeis eisitō’는 문구가 적혀 있었겠는가? 그러나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이 염두에 두었던 형상적 진리를 획득하기 위한 방편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와 목적과 관련한 전면적 현실의 관점에서도 그것 모두는 비록 중차대하지만 앞으로 다룰 본 곡을 위한 서곡에 불과하다. 수학과 기하학에 능한 사람들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하고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아직 변증술에 능한 사람들은 아니다.

* 이로써 예비적인 배울 거리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되고 궁극의 배울 거리로서 본 곡에 해당하는 변증술 즉 ‘좋음의 형상을 획득하는 기술’에 관한 논의가 이어진다. -끝-

 

다음 강해 주제 : C. 철인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2) 본 교과목 : 철학적 문답법 – 변증술(531c-535a)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다’ – 故 이현구 선생을 기리며 [한철연 소식]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다’ – 故 이현구 선생을 기리며

 

전호근(한철연 회원, 경희대)

 

이 글은 2025년 7월 21일 <경인일보> [전호근 칼럼]에 실린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다’를 필자의 동의를 거쳐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원글 출처: https://www.kyeongin.com/article/1746816

 

지난 7월 14일, 동양철학 연구자 이현구 선생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저명한 학자는 아니었다 하겠으나 동양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선생의 책을 읽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선생이 30여 년 전에 펴낸 ‘동양철학 에세이(김교빈·이현구 공저, 동녘)’는 그야말로 해당 분야의 베스트셀러였고 지금까지 명저로 손꼽히는 책으로 이 책을 읽고 동양철학에 입문한 이가 심심치 않게 있는 걸 보면 선생이 학계에 기여한 공이 적지 않다 하겠다.

선생은 기철학 연구에 평생 매진한 탁월한 연구자였다. 특히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혜강 최한기에 관한 연구는 선생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 경지를 개척했다고 할 만하다. 일찍이 최한기의 기학을 두고 “동과 서를 융합하고, 지구를 하나의 단위로 놓은 인류사의 관점에서 보편학을 추구한 학문”이라 규정한 것이라든지, “인간학과 자연학을 포괄하는 종합적 체계를 갖추었지만 새로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연학의 입지를 적극적으로 마련한 데에 의의가 있다”고 평가한 대목은 지금 보아도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철학분과에서 선생과 함께 명말청초의 학자 방이지의 ‘약지포장’과 ‘물리소지’를 읽었다. 당시 선생의 학문적 열정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치열한 것이어서 아무리 난해한 대목이 나와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그런 자세는 동학과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선생은 형형한 눈빛과 느리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후배들을 지도하곤 했는데 논리가 정확하고 전고에 틀림이 없었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보아도 선생의 열정에 감화되어 공부에 더욱 매진한 바가 없지 않다. 아마 남은 인생에 선생과 함께 공부할 때만큼의 학문적 열정이 다시 찾아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생은 강의를 할 때면 언제나 넥타이까지 갖춘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학생들과 만났다. 한번은 내가 넥타이까지 매는 건 좀 번거롭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선생이 말하길, 언젠가 넥타이를 매지 않고 편한 차림으로 강의한 적이 있는데, 그날 밤 꿈에 맹자가 나타나 무례하다는 꾸지람을 들었노라고 답했다. 내가 선생의 빈소를 찾기 앞서 평소 매지 않던 넥타이를 꺼낸 까닭은 그런 선생의 범절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형식은 다소 달랐지만 전통 학자의 풍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선생은 세상에 나가 이익을 구하는 일이 없었고, 남들과 경쟁하지도 않고 가만히 알아주는 이를 기다릴 뿐이었다. 선생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일찍부터 그의 학문적 재능과 통찰의 깊이를 높이 평가했지만 세상은 선생의 인품과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는지 끝내 대학에서 안정적으로 연구할 만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선생의 성품은 소탈하기 그지없어 요즘 세상의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시공간 감각도 남달라 미처 국경일인 줄 모르고 평소처럼 강의하러 나섰다가 뒤늦게 깨닫고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든지 남의 강의실에 잘못 들어가서 강의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선생은 어찌 보면 민망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을 무덤덤하게 들려주곤 했는데 돌이켜보면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털어놓았지만 나는 그러하지 못했던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생전 선생은 ‘맹자’에 나오는 좌이대단(坐以待旦·앉아서 아침을 기다림)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이 말은 주나라의 주공이 왕도를 생각하느라 밤새며 고심하다가, 가만히 앉아서 아침을 기다린다는 희망을 담은 글귀이다. 역사 속의 주공은 기다리던 아침을 맞이했지만 선생의 아침은 끝내 오지 않았던 것 같다.

싹을 틔우고서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뜻을 지니고 있어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뜻은 내가 지니는 것이지만 쓰이고 쓰이지 않고는 세상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점이 내가 선생을 위해 슬퍼하는 까닭이다.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빈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철학분과에서 함께 공부하던 시절의 故 이현구 선생(가운데)|ⓒ 전호근

이항 대립의 세뇌와 자연에서 교육 [천 하룻밤 이야기]

이항 대립의 세뇌와 자연에서 교육

2025 07 22 대서(大暑) – 소서에 무척 더웠으니 대서에는 좀 덜하려나…

 

류종렬(한철연 회원)

 

한 나라에서 상반된 견해들과 여러 견해들을 통합하여 일정한 방향을 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정당은 자기의 방향을 가지고 나간다는 것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선언한 무리들의 모임이다. 한 모임 안에서 공통적 담론을 가지고 있듯이, 다른 모임(정당, 시민단체)에서는 다른 공통적 담론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19세기 후반 이래로 상업자유주의자(약탈과 수탈을 일삼는 liberaliste)와 사회자유주의자(프롤레타리아 지도, 인민주권, libertaire) 사이에 대립은 서로 담을 쌓아 놓듯이 배제하고 배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민자유주의자들(리베르떼르)은 스스로 공적인 일들을 중히 여기고, 인민들의 삶의 터전(인프라)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고 하면서, 잉여노동을 착취하여 상품을 팔아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타문화를 짓밟는 상품자유주의자들을 경멸한다. 이러한 대비는 마치 인도주의자(l‘humanitaire)가 인문주의자(l‘humaniste)를 경멸하는 것과 같다. 인도주의자들은 자연 속에서 인간이 활동하고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루소주의자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비해, 인문주의자들은 오랜 유일신앙에 세뇌되어 인간의 영혼은 하늘나라(소천)로 간다고 믿는다.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나 평등하게 돌아간다고 할 때, 신 없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 돌아간다고 말하기 이전에 삶의 터전에서 공공을 우선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껏 일하고, 어릴 때나 늙어서나 노동력이 없을 때는 필요에 따라 인도주의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런 인도주의자의 구호, “각자는 역량에 따라 각각은 필요에 따라”라는 구호가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로 퍼져나가서 맑스가 말년에 이 구호를 중히 여겼다.

사회에서 상반된 담론을 전개한다는 것은 정치 경제적 사건들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본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저항과 항쟁에서 기득권의 반동은 거세었고, 두 번의 세계 대전에서 반동들은 인민의 발현과 자유를 억압하고 새로운 제국주의를 형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세계사를 읽는 방식이다. 철학사에서 보면, 참주제(또는 황제제)에 대한 인민의 저항은 수천년 동안 있어왔다. 아마도 신석기 이래로 이런 저항에서 어쩌다가 간신히 아테네에서 민주제라는 것을 실험했다고 본다. 이런 데모스(인민)의 저항, 또는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인민의 저항은 끊임없이 있어왔다.

벩송도 기득권의 저항(반동)에 대한 저항이 도덕감의 발현이라 보았다. 기득권은 이익에 눈이 멀어 도덕감이 없다. 그 도덕감이란 연민이며, 인간이 인간과 함께 산다는 데 공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도덕감이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부터라고 말하는 것은, 서양사에서 단지 “빛들세기(les Lumiere)”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있었다. 그럼에도 인민의 저항에 대한 반동은 거세었다. 혁명에 대한 반혁명은 담론의 상층(주류)을 형성하며, 형식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진리를 구하는 지식, 사회의 제도를 공고히 하여 반동의 지위를 구축하는 국가주의, 그리고 철학적 전통에서 자연의 배후를 가르쳐주는 형이상학(자연배후학)을 하나의 통합으로 구축하려 하였다.

이런 세 패거리로부터 사라져가는 듯했던 종교와 도덕의 배후학으로 도덕형이상학(도덕 배후학)을 논리 체계방식으로 새로이 구성하고 구축하였다. 자연배후학이 유일신앙(국가주의)과 황제제(참주제)의 배경이 되었듯이, 이런 도덕배후학은 제국주의와 제국의 형성의 토대로서 자임하였다. 이런 상반된 담론이 같은 평면위에 놓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다. 그럼에도 유일신항의 변증법은 하나의 평면위에 세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1848년 공산주의 선언문 이래도 두 담론은 같은 평면위에 놓고서 다루는 것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항목 대 항목의 대립은 지구상을 어지럽게 하였다. 냉전시대를 거쳐서 제국의 시대인 지금도.

적어도 19세기 후반에는 항목 대 항목이라는 이항 대립을 다루는 방식은 구시대의 산물로 밀려나는 듯하였다. 왜냐하면 수학과 미시물리학은 이원적 대립이 무의미(파라독사)임을 알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사도 다항들의 관계이며, 그 상황과 사건들 속의 개인도 다양체와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자연을 대상으로 바라본 자연배후학(메타피직)이 아니라 자연이 자기 생성과 자기 전개를 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생성론(자연 되기론, 우주발생론)이 담론으로 퍼져가는 듯하였다. 그럼에도 제국은 악의축과 배제의 담론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추가령지구대 이남에서 다른 담론을 전개하는 이들을 마치 개돼지취급하거나, 또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이를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계엄을 하겠다고 하니, 인민의 저항에 대한 저항은 거세고도 지칠 줄을 모른다. 왜 그럴까?

학문을 제대로 해야 하는 이가 없는 나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탄하면서, “자네들 열심히 공부하게”라는 박홍규 선생님은 여전하게 아직도 멀었어 ‘열심히 공부하게’ 하실 것같다.

서양학문사에서 논리학이 중요 지위를 차지하는 한에서 자연은 대상이었다. 인간의 인식과 지식 체계가 대상에서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일부에서부터도, 타문화에서 공자도, 노자도, 싯달다도 자연은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의 일부이며 또는 우리를 낳은 진솔한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도구로 삼는 학문들이 상위를 차지한 것은, 인간의 도덕감과 신앙심보다 이기심과 탐욕을 상위에 올려놓은 유일신앙자와 참주제 옹호자들이었다.

자연을 대상화하는 방식을 학문적으로 틀을 세우려고 한 이는 그 자신의 의도와 달리 플라톤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플라톤은 대립된 두 항목 사이를 다루려고 한 것이라기보다 두 항목 사이에 상호 연대성과 상호연관을 주목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럼에도 이 두 항들 사이의 경계가 분명해야 학문들이 성립한다고 여긴 것은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였고, 그리고 세월이 지나 이를 과도하게 한쪽을 경계 밖으로 몰아, 무 또는 악 또는 악마로 취급하는 방식으로 담론을 전개한 것이 유일신앙자들이었다. 플라톤의 진솔한 의도와 달리, 상층의 주류세력이 인민을 지배하려는 방식으로 담론을 분할하여 지배체계로 만든 것은, 플라톤을 곡해한 플라톤주의자들이라 한다.

이항 대립의 담론이 아니라 다항연관의 담론이라고 여긴 플라톤은 다항들 사이에서는 어느 것이 더 맞다 틀리다는 것을 따지기보다, 서로들 간에 공감을 통한 공평한 조화를 바랐다. 그에게서 정의(la justice)는 계산이라기보다 조화이다. 그런데 그의 제자에 이르면 양적 계산에 의한 몫에 맞는 분할의 평균을 정의로 여긴다. 이런 평균적 정의는 편의와 유용성이 있다고 하는 근대에서 통용되었고, 제국주의 시대에 선진 국가와 식민지 영토 사이에 평균화 방식으로 쓰이기도 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리베랄리스트 지식분자는 이항 대립을 통일시킬 변증법이란 담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최고 수준에서 변증법이 세계의 평준화(통합화)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나아가 공상으로 날개를 펼쳤다. 제국이 지배하는 지구는 오지 않았다. 이제 그 날개에 인위적 정보체계의 디지털을 이용하여, 인공지능이 공상에서 망상으로 치닫게 하는 파라노이아의 길을 걷고 있는 형편이다. 제국이 세계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이항 대립에서 다른 편을 배제하고 무화시키고 있으면서도, 배제하는 편이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고함을 치고 담론장은 열려있다고 해도, 배제 된 쪽에서는 공감도 감흥도 없다. ‘나 이외’에는 이라는 배중율의 전제를 버리지 않은 유일신앙에 매여있는 한, 자기 동일성에 빠져있는 불변의 동일률을 신앙으로 삼는 파라노이아에 불과하다. 벩송이 말하기를 한 신부가 담론을 하는데 성당 안에서 웃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지역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학문에서 제시한 담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그 담론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사유하는 자이다. 이들 사이의 대립이 실재하는가?

*

고대 그리스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연결성이 있다고 믿고 해결하려하였다. 그것은 영원과 시간 사이의 해결방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원과 시간의 논리적 구별과 대응관계보다, 시간 속에서 살다가 죽어서 영원으로 갈 것이라는 것이 훨씬 더 분명하고 설득력 있다고 여긴다. 이는 마치 꼬마애가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을 믿고 지내는 것과 같다. 영원으로 간다는 것이 자연이 아니고, 유일신이 되면서 하늘과 땅 사이의 연관의 설명은 더욱 복잡해지고 더 많은 담론들로 증명하려 하였다. 신앙자는 단순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복잡한 것은 믿음이 없다고 하면서도, 뭐 그리 많은 담론을 만들었던가!

말하자면 얼마나 많은 죽은 자들이 또는 얼마나 다양한 천사들이 산자들에게 목소리와 말씀을 전해야 영원한 하늘의 이야기를 믿겠는가? 그 많은 이야기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 영원 속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떤 담론에도 없다는 것도 안다. 무려 천년이 지나서야, 영원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 영원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라고 물으면서 솔직하게 그게 말 뿐이지 라고 한다. 그 믿음은 인간이 말하는 목소리를 기호화하여 대상화하고 그 대상화를 실재성으로 믿는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단지 이름뿐인 천국과 천사와 악마를 믿고 자시고 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담론을 형성한 것이 유명론이다. 이 이후로 더 이상 보편자의 실재성을 다루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항 대립자들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보편”이라 용어를 쓰고 일반화가 넓어지면 보편이라 주장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보편은 상대성에 의해서 이미 우주가 하나이다. 자연은 자기 발생적이고 변화하는 하나이지만, 자연을 대상으로 여기고 조작가능하고, 지속가능하게 쓸모 있는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면서, 대상으로서 자연이 보편이라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그러나 천만에. 사회와 연관해서도 미국에서 보편화가 러시아에서도 중국에서도 보편인지 묻지 않듯이, 그리고 남녘에서 보편이 북녘에서도 보편인지도 묻지 않고, 남녘의 보편이 북녘의 보편이어야 한다고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세뇌된 자들에게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까? [그럼에도 착한 도덕형이상학론자들은 보편이 변증법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벩송은 네오스콜라주의라고 한다.]

이 부분의 일반화를 세계와 우주의 보편화로 환원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자를 벩송은 착각하는 자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보편화 주장자들은 망상에 사로 잡혀있다고 해야 한다. 학문에서 반역이란 생성의 변역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변역을 반역이라 부르는 자들에게 있다. 반역은 망상을 진리체계로 여기는 곳에는 어디에나 있다. 김건희-윤석열의 빨갱이 타령은 망상이듯이, 리박스쿨에서 이승만, 박정희의 정당성을 복원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로 이어지는 계열의 담론이 망상의 담론장이라고 하면, 이들을 믿는 신앙자들은 펄쩍 뛰면서 아스팔트로 나가서 성조기와 다윗기와 더불어 태극기를 흔들 것이다. 인민의 반역, 인민을 반역으로 몰려고 덤벼든다.며칠 전 인천공항에서 ‘윤어게인’을 주장하는 이들이 미국인 모스탄 교수의 입국에서 환호를 하는 장면은 아스팔트부대와 같았다. 담론의 장에서 대립된 두 항을 다룬다는 것이 배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음양처럼 서로 대립되지만 상호조보관계이며, 밤낮과 계절처럼 순환관계이고, 남녀처럼 서로 상보관계이며, 교류전기의 0과1처럼 교대관계로서 원활해야 빛(전기)도 정보(디지털)도 창조하는 것과 같다.

이항 대립으로 하나의 절대와 완성자를 주장하는 신앙이 세뇌시킨 오랜 역사에서, 프랑스철학은 18세기(빛들세기)에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앵글로색슨 철학은 상층이 이 대립을 즐기면서 부를 축적하며, 세계에 전쟁을 통해 공포를 심으며, 상위를 유지하고자 하는데 봉사하고 있다. 21세기에 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 미합중국이라는 제국일 것이다.

이런 공론의 장이 있다고 여기는 철학자들로서 롤즈와 샌델의 정의가 배타적인 논리위에 있는지를 알려면, 이들의 논리가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칸트가 자연형이상학을 뉴턴의 천문학과 갈릴레이 물리학 이후로 우주의 상대성 위에 세우는 선천적 종합판단은 가능하였지만, 자아, 세계, 이상의 인식을 상대성을 두게 되면 이분화에서 상층이 인민을 지배하는 데 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니 인간이 논리로 판단(심판)하는 생활에도 (도덕)형이상학을 자연형이상학처럼 세워야 했다. 도덕감과 신앙심도 자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앙의 규범과 정언명법아래에 세워야 한다. 이 도덕형이상학에서는 루소이래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없어지고, 지고지순의 하늘의 별로 돌아간다는 플라톤주의의 선의 이데아로, 그리고 경건한 신앙주의로 돌아갔다. 이런 맥락을 이어 앵글로색슨의 도덕론은 엄격한 명법주의에서 국가와 천륜을 동일시하는 논리로 윤리학의 전형을 이루고자 한다. 롤즈, 센델, 하버마스는 같은 담론장의 놀이터의 노는 것은 자기가 잘하는 운동 경기에서만 노는 어느 운동선수와 같다.

이항 대립에서 승자를 찾는 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이를 이용하여 배중률을 가장 잘 사용한 이들이 유일신앙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언제나 자기주장의 완전, 보편을 말하기 위해 전쟁을, 그리고 그 진리를 증거하기를 주장하면서 죽음을 불사하게 만들면서, 죽는 자에게 천국으로 유혹하는데, 이를 세뇌라고 부른다. 이런 사적이익 추구자들이 인민의 도덕감에 동의를 구하고자 자신을 기복신앙으로 포장하며 신앙심이 깊다고 한다. 그 신앙심이 세뇌된 것으로 탐만치에 빠진 것이다. 이를 표현과 이미지로 구출해주는 것도 불교 성직자, 카톨릭 성직자, 기독교 성직자들이다. 왜 이들이 피에 젖은 권력자들에게 기도를 해 주겠는가. 이들 성직자들의 움직임도 인민을 세뇌시키는 한 방식이며, 잠시 지나가는 방식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이런 세뇌를 깨닫게 하는 것이 지속적인 학습이 필요하다. 어떻게,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감옥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플라톤은 슬픔보다 더 큰 상실감이 있지 않았을까? 당대의 여러 담론들 여러 갈래였을 것이며, 용어상으로는 시대가 지나서 성립되었겠지만, 다양한 담론의 논의 방식들이 생겨났으리라 : 논쟁술(sophistique), 논박술(éristique), 대화술(dialogue)과 산파술(la maïeutique), 논리학의 변증술(dialectique, Τοπικά)과 해석론(l’interpretation, Ἑρμηνείας)」, (법정의) 변론술(apologique), 웅변술(rhétorique, 수사학), (종교의 옹호로서) 호교론자(apologiste, le apologétique), 연설가(l’orateur) 등이 있었을 것이고, 중세에는 정해진 원리와 교리의 일반화(보편화가 아니라)로서 설교가들(les prédicateurs)들과 평결론자들(les sententiaires)도 있었다.

플라톤은 교육의 필수성을 느꼈을 것이고, 폴리테이아편에서 국가 안에서 개인의 교육에 대해 쓰면서 어린이에게 음악과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그리고 우주와 터전의 연대에 대한 교육으로 티마이오스편에서 우주 발생론을 전개하였고, 그리고 시민으로서 도시국가에 살아야 하는 방식으로 법률편을 썼을 것이다. 이 거대한 체계의 기본은 어쩌면 아페이론으로부터 생성(함)과 발생(되기), 그리고 과정에서 노력과 강도를 실행한 이들에 있을 것이다. 이런 길을 모색한 이는 플라톤과 달리 퀴니코스-스토아의 계보였다. 교육도 이중화의 계열이 중요할 것 같다. “빛들세기(18세기)”에 대학에서 설교와 평결을 가르칠 때, 곧 등장하게 될 제3신분으로서 대학바깥의 인물들인 볼테르, 흄, 루소, 디드로, 엘베시우스 등은 인간과 제도가 자연(물질)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자연형이상학이란 말을 쓰지 않았지만 도덕감과 신앙심은 자연형이상학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루소가 에밀도 쓰고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도 썼다. 플라톤 이래로 새로운 교육은 종교 없는 교육의 필요성이었다.

“빛들세기” 자연에서 빛이 퍼져나가듯이 의식은 퍼져 나간다. 왜 이들이 계몽이라는 표현대신에 빛들이라고 했겠는가? 16세기부터 외방(중국)에서 전해온 문화에 충격을 받았던 프랑스에서 말브랑쉬(Malebranche, 1638-1715)[일흔일곱]는 유일신이 없어도 우수한 도덕감과 신앙심을 가진 거대한 나라(중국)가 있다는 데 놀랐고, 독일에서는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일흔다섯]도 놀랐다. 그럼에도 자기 나라에 사는 애국자들이라, 맑스와 레닌처럼 세계사로 편입되는 시기는 아니었기에 유일신앙 속에서 사유할 수 밖에 없었다. 21세기에는 교육이 전지구라는 일반성 위에 성립하고 활동하는 과정을 알려주는 방식이어야 할 것 같다. 프랑스가 1871년 프러시아에서 패하고 거대한 전쟁 패배 비용을 갚으면서도, 루소의 사유를 따라, 자연에서 인민의 성장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1883년에 모든 어린이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일반교육, 교육은 무상이어야 한다는 무상교육,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에서 종교의 탈피, 세속화 교육을 실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세뇌에서 벗어나는 여러 방식들 중에, 일반교육, 무상교육, 그리고 모든 교육제도에서 사적 재단 또는 종교 재단의 철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세뇌는 어린이에게서 부터이다. 윤구병이 그렇게 강조했던 어린이 철학 교육은 세뇌의 탈피와 자연 순환과 자연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만드는 것, 벩송이 말하듯이 자연(우주)이 보살(신)들을 만드는 기계라고 하듯이 자연으로부터 도덕감과 신앙심의 생성하고 창안하여, 자연형이상학의 진솔한 모습을 만드는 것이리라.

(5:28, 58RMB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