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0-계사[kopula]와 존재[Sein][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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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0- 계사[kopula]와 존재[Sein]

1)

앞에서 헤겔이 판단을 주어, 술어의 관계라고 규정하지 않고, 두 가지 개념 계기(즉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이라는 개념 규정성)의 관계로 규정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았다. 이런 판단을 이루는 개념 규정성은 무엇보다도 총체적이다.

즉 판단을 이루는 개념 계기는 각자 속에 이미 다른 계기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내적으로는 이미 통일되어 있다. 판단이란 이 내적 계기들이 자립적인 것으로 독립해서 다시 서로 관계하는 것이다.

판단의 운동은 한편으로 통일된 개념이 자기를 분리하는 운동이며, 이런 분리 속에 이미 통일이 내재하며 판단의 운동이란 내재하는 주관적 통일이 밖으로 드러나 객관적 통일로 나가는 운동이다.

이런 판단을 이루는 개념 계기들은 판단 속에서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 헤겔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 술어라는 용어를 지양하고 개념의 계기로서 규정성 즉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제 판단의 양 측면은 개념 규정성으로 대체된다. 과거 주어나 술어는 어느 것이든 개별성이나 특수성, 일반성을 모두 취할 수 있다. 이런 개념 규정성이 판단에서 계사를 통해 연결된다. 그러므로 판단은 예를 들어 ‘개별성은 일반성이다(질적 긍정 판단)’이라든가 ‘일반성은 특수성이다(선언 판단)’과 같은 형태로 등장한다.

헤겔은 판단에서 두 개념 규정성이 계사의 앞과 뒤라는 자리를 차지하는데 이 두 자리는 계사로 묶어져 있다. 앞과 뒤의 관계는 시간적 선후라기보다 오히려 판단 자체에 내적 관계 즉 논리적 선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주어나 술어 개념을 취소하고 이와 같은 선, 후의 개념 규정성의 계사를 통한 결합으로 설명하지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주어, 술어라는 규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주어, 술어의 규정은 판단이 지닌 하나의 관계만을 말할 뿐이며, 앞으로 논의에서 주어, 술어라는 용어는 이런 판단에서 선, 후의 위치를 표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2)

헤겔은 이 선, 후의 관계를 개념의 내포와 외연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우선 두 개념의 계기들은 내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즉 판단에서 후의 개념 규정이 전의 개념 규정에 속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개념 규정의 내포적인 측면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런 내포적인 관점에서 선, 후는 전통적인 주어, 술어의 규정과 일치한다. 선 개념 규정은 후 개념 규정이 속하는 기체[hypokeimenon] 즉 밑에 놓여 있는 것이므로 주어이다. 반면, 후 개념 규정은 기체에 속하는 것[Attribute: attríbŭo 맡기다]이므로 술어라 한다. 여기서 속한다는 것은 내포가 속한다는 의미이니, 헤겔은 이 관계를 내재[inhaerieren]의 관계라 한다.

“그러나 이제 주어는 자립적인 것인 한에서 그와 같은 동일성이 의미하는 관계는 술어가 독자적으로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술어는 주어 속에서만 존립한다는 것이다. 즉 술어는 주어에 내재한다. 이에 따라서 술어가 주어로부터 구별되는 한에서 술어는 다만 주어가 개별화된 규정성이며 다만 그 속성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주어 자체는 구체적인 것이고 다양한 규정성의 총체성이니 이는 술어가 하나의 규정성을 포함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주어는 일반자이다.”(논리학, GW12, 58)

다른 한편, 판단의 선, 후 개념 규정성은 외연적으로도 관계한다. 이런 외연상의 관계에서 보면, 선 개념 규정성은 후 개념 규정성에 속하는 하나의 원소가 된다. 여기서 후의 개념 규정성은 선 개념 규정성을 외연상 포섭[Subsumieren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술어는 또한 자립적인 일반성이고 주어는 거꾸로 다만 술어의 한 규정이다. 그런한 술어는 주어를 포섭하며 개별성과 특수성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 본질과 실체를 일반자에서 갖는다. 술어는 주어의 개념을 표현한다. 개별자와 특수자는 우연적인 규정이며 술어는 절대적 가능성이다.”(논리학, GW12, 58)

이렇게 보면, 판단의 선, 후의 개념 규정성은 이중적이다. 내포적으로 보면, 후 개념 규정성이 선 개념 규정성에 내포된다. 외연적으로 보면, 선 개념 규정성이 후 개념 규정성에 포섭된다. 판단은 단순한 하나의 관계가 아니라 이렇게 이중적인 관계이다. 더구나 이 두 관계 즉 내재와 포섭은 서로 반대되는 관계이다. 하나는 포괄에서 단순성으로 나가며, 다른 하나는 개별에서 일반으로 나간다.

하나의 판단은 선, 후의 개념 규정성이 분리될 뿐만 아니라, 그 관계 역시 이렇게 서로 대립하면서, 이 관계의 변동에 따라서 선, 후 개념의 구별이 통일을 향해 나간다.

3)

판단이 지닌 이 두 가지 관계는 헤겔이 처음 내놓은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유에서 분석과 추상이 대립한다. 분석은 사물이 지닌 내포를 구별해 내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내포가 이미 그 사물에 ‘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연역적 과정이다. 반면, 추상은 사물을 포괄하는 일반자를을 찾아내는 과정이니, 이는 곧 귀납적인 과정이며 여기서 일반자는 개별자를 자신의 원소로 ‘포섭’한다.

헤겔이 내재와 포섭이라고 말한 관계는 전통적으로 사유가 지닌 두 과정 즉 분석과 추상, 연역과 귀납이라는 두 과정에 대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전통적으로 분석과 추상이라는 사유 과정은 서로 대립하는 사유 과정이기에 따로 떨어져서 작동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헤겔에서 내재와 포섭은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판단이 지닌 두 가지 관계이다. 판단은 이 두 서로 대립한 관계가 동시에 통일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분석과 추상이라는 사유의 두 대립하는 과정이 통일적으로 파악되는 데 매개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칸트다. 칸트 자신은 판단이 지닌 이 두 가지 관계를 판단의 두 가지 종류로 구분했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판단은 선험적 연역의 과정이다. 즉 여기서는 범주를 구체적 대상에 적용하는데, 이 과정은 선험적 통각 속에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범주 가운데 하나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구체적 경험과 결합하는 것이니 칸트는 이를 구성 판단이라 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곧 분석적이고 연역적 사유이며 헤겔로 말하자면 곧 내재의 관계다.

반면,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구성 판단과 구별되는 반성 판단을 제시한다. 이 반성 판단은 어떤 개별자에서 그것이 귀속하는 일반적 범주를 찾아내는 것이니, 즉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추상과 귀납의 과정이며 헤겔로 말하자면 곧 포섭의 관계다.

칸트는 두 종류의 판단이 각기 다른 능력에 속하는 것이라 보았다. 구성 판단은 지성의 작용이며 반면, 반성 판단은 상상력의 작용이다. 칸트는 두 가지 판단을 종류로 구별했으며 심지어 서로 다른 능력에 속한 것이라 보았으나, 이미 이 두 가지 판단과 두 가지 능력이 서로 매개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선험적 구성 판단은 도식을 매개로 하는데, 이 도식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거꾸로 반성 판단은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이 상상력이 지성의 작용에 제약되어 이 반성 판단은 일반성을 지니게 된다. 그 때문에 칸트에서 이미 두 가지 판단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으며 그러므로 칸트 뒤에 헤겔이 양자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4)

이런 대립하는 관계가 하나의 판단 속에 동시에 들어 있으므로, 판단에서 운동이 생겨난다. 하나의 판단은 두 개념 규정성의 동일성이지만, 이 개념 규정성이 자립적인 한 양자가 분리되어 있다.

이런 분리의 결과 주어와 술어 사이에는 내재와 포섭이라는 두 가지 관계가 출현한다. 내재와 포섭은 하나가 다른 것에 내포상이든, 외연상이든 귀속하는 관계이니 부등한 관계이다. 이런 부등성 때문에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즉 그 운동은 내재든 포섭이든 분리된 개념 규정성이 서로 같게 되려는 운동이다.

판단에서 운동은 이 두 관계의 운동은 동시에 일어나기보다 교차적으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질적 판단 범주에서는 내재를 전제로 분석의 운동이 전개되며 즉 여기서 술어가 주어에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 즉 본질로 된다. 양적 판단 범주에서는 포섭을 전제로 귀납의 운동이 벌어진다. 여기서 주어는 개별자에서 일반자로 됨으로써 술어에서 제시된 본질에 적합하게 된다.

다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관계 범주에서는 분석 운동이 일어나고 개념 운동에서는 귀납 운동이 일어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가장 처음의 판단형식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던 두 개념 규정성이 최종 판단형식에서는 통일을 이루면서, 이를 통해 판단이라는 운동 자체가 지양되고 추론으로 넘어가게 된다.

“주어와 술어[여기서 헤겔은 선, 후 개념 대신 편의상 주어, 술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의 동일성이 그와 같이 고찰된다면, 한번은 주어에 개념 규정의 하나가 속하며 술어에 다른 개념 규정이 속하지만, 다음에는 마찬가지로 거꾸로가 되었다면 그에 따라서 이 동일성은 항상 다시 겨우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동일성이어서 판단의 두 측면이 지닌 자립적인 상이성 때문에 그들의 정립된 관계는 또한 이 두 가지 측면을 처음에는 상이한 측면으로 갖는다. 그러나 이런 구별됨이 없는 동일성이 본래 주어의 술어에 대한 관계를 이룬다.”(논리학, GW12, 58)

5)

판단에서 선, 후의 개념(편의상 주어, 술어라 하자)을 연결하는 것을 계사[Kopula]라고 한다. 이 말은 라틴어 ‘연결시키다[cópŭlo]’는 말에서 나왔는데 영어로 copulation(짝 짓기)과 어원이 같다. 이 계사는 어느 나라에서나 일반적으로 ‘이다[Sein]’를 통해 표현된다.

하지만, 계사의 개념은 논리적 연결사로 확장할 수 있다. ‘아니다’라는 부정적 연결사, 선언적이거나 가언적 연결사도 계사에 속하는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 흔히 ‘존재[Sein]’를 ‘존재자[Dasein]’과 구별할 때, 존재는 곧 계사, 즉 논리적 연결사를 의미한다.

계사는 구별하자면, 여러 논리적 연결사로 나누어지지만, 사실 이 논리적 연결사는 두 가지 연결사로 환원될 수 있다. 가언이든 선언이든 환원하면, 결합[⦁]과 부정[-]이라는 두 연결사가 남으며, 이는 곧 ‘이다’와 ‘아니다’이다.

헤겔에서 심지어 이 두 계사 즉 ‘이다’와 ‘아니다’조차 서로 대립하면서도 이미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양자를 통일하는 원천이 곧 선험적 통각[헤겔에서는 곧 ‘개념’이다]인데, 그러므로 ‘이다’가 동일성을 표현하고 ‘아니다’가 구별을 표현한다면, 원래 계사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므로 한편으로 ‘이다’는 이미 자기 속에 ‘아니다’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아니다’ 속에 이미 ‘이다’가 포함된 것과 같다.

판단에서 계사는 운동 속에 있다. 판단의 첫 형식에서는 동일성은 구별과 서로 대립한다. 양자는 단적으로 서로 이행할 뿐이다. 그러나 판단의 최종적 형식에 이르면 이제 동일성과 구별이 다시 통일을 이룬다. 즉 여기서는 동일성이 구별과 통일된다.

즉 이 운동을 계사의 측면에서 보면, 계사 즉 존재가 자기를 비존재로 구별하며 다시 비존재로부터 자기로 되돌아오는 운동이다. 즉 헤겔이 개념이 자기를 정립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계사의 운동은 곧 존재의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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