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
1)
헤겔은 칸트의 선험철학의 원리를 받아들이면서 칸트가 선험적 범주가 대상을 구성하는 것은 직관의 다양이 선험적 범주에 할당되는 것이며 따라서 개념은 공허한 형식이고 그 내용은 직관에서 주어지는 다양이라고 했던 것을 비판한다.
헤겔은 선험적 범주는 공허한 형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기의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범주는 일반적 개념이지만, 동시에 자기 규정성을 지닌 구체적인 개념이다. 실재성은 범주 자신에서 나오므로 범주와 실재성, 개념과 대상은 합일하면서 객관적인 진리로 된다.
“또한, 여기[칸트적 심리적 관념론]에 속하는 것은 개념이 다시 직관의 다양이 없으면 내용이 없고 공허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개념이 선천적[apriori] 종합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개념이 그와 같이 선천적 종합이므로, 개념은 정말로 말해 규정성과 자기 내 구별을 지닌다. 규정성은 개념의 규정성이고 따라서 절대적 규정성, 개별성이므로 개념은 모든 유한한 규정성과 다양성의 근거이자 원천이다.”(논리학 2부, GW12, 23)
헤겔은 ‘선천적 종합’, 즉 개념에서 그 규정성이 나온다는 주장을 자기의 철학의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어떻게 보면, 마치 나르시시즘적 원리처럼 보인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이니 그 속에 자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은 주관적인 산물이며 그 너머에 대상 자체, 물 자체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2)
헤겔이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온다고 했을 때 이 규정성이 자기 넘어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개념이 의식과 대상으로 분화되고 즉 그 자체 존재[an sich]가 대자 존재[fuer sich]와 대타 존재[Sein fuer andres]로 구별된다고 했을 때, 여기서 의식, 대자 존재란 곧 개념에서 나온 실재성, 규정성을 의미하며, 대상 곧 대타 존재는 이런 실재성과 규정성 너머에 등장하는 물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런 분화와 구별이 의미하는 것은 곧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오는 순간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물 자체를 헤겔은 어떻게 극복하는 것일까? 헤겔을 비롯한 모든 당대 철학자들의 근본적 아포리아였던 이 문제를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서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방법을 통해 풀어나간다.
즉 하나의 의식은 일정한 범주를 통해 대상을 규정한다. 의식은 이 규정성을 자기의 범주에서 끌어내지만, 이 규정성은 그 너머 물 자체에 부딪힌다. 그런데 이때 물 자체란 자기의 전제가 되는 의식 때문에 생겨난 것이니, 본래의 물 자체가 아니라 ‘그 의식에 대해 그 자체적인 존재[Fuer es an sich Sein]’가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범주와 물 자체는 서로 모순 속에서 빠지고 이로부터 의식은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새로운 범주로 이행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시 새로운 규정성이 출현하며 이 속에는 그 이전 범주에서 물 자체였던 것이 이 범주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 결과 이 새로운 범주에 대해 또 새로운 물 자체가 출현하게 되면서 운동이 계속된다.
이런 과정은 의식의 범주가 개별적인 것에서 포괄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며 대상이 점차 더 구체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이 맞물려 나가는 것이 곧 의식 경험의 길이다.
3)
정신현상학에서 서술된 이 의식 경험의 길은 역사적으로 의식의 형태들이 겪어나갔던 발전을 의미한다. 이 발전을 매개하는 것은 의식과 물 자체와의 모순인데, 이런 역사적인 의식 형태가 현재 의식의 평면에 투영되면서 논리적인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에서도 범주는 그 자신에서 규정성과 실재성을 끌어내지만, 이는 곧 그 실재성을 넘어선 것 즉 물 자체와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그 결과 새로운 범주가 출현하면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마침내 최종적으로 범주가 모든 실재성을 포괄하면서 더는 모순이 나오지 않는다면, 바로 이 범주가 최종적인 절대적 범주이며 곧 진리인 개념 즉 이념이다.
헤겔은 이런 논리적 발전을 통해서 칸트가 좌표축에 할당했던 범주를 논리적 순서에 따라서 전개한다. 헤겔은 칸트의 12개 판단 형식과 그 범주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다만 칸트와 달리 이를 논리적인 발전에 따라서 배치했다. 헤겔은 의식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논리적 계기의 발전을 통해 개념으로부터 규정성이 나온다는 선천적 종합 개념이 단순히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을 가능성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하나의 범주와 다른 범주로 이행하는 과정, 즉 범주의 자기 내 반성 과정이 중요하게 된다. 그것을 매개하는 것은 물 자체와의 모순이지만, 이 자기 내 반성이 일어나는 과정은 사유의 과정이다. 바로 이 사유의 과정이 추론적 이성이 하는 일이며 이 추론적 이성이 사용하는 범주가 곧 반성 개념이 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가 무시했던 반성 개념의 역할을 사유 속에 제대로 위치시킬 수 있었다.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헤겔에서 선험적 통각의 개념을 차이 나게 만든다. 칸트에서 통각과 범주는 서로 구별된다. 통각은 범주를 직관의 다양과 결합하는 기능을 지니지만, 그 자체는 독립적인 것으로서 범주 밖에 있다. 마치 그것은 플라톤에서 데미우르고스가 이데아와 아페이론을 결합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헤겔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구별하여 출현한 하나의 규정성이며, 통각은 이 규정성이 부딪히는 모순을 통해 다시 새로운 범주를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의 본래 그대로를 드러내게 되면서 마침내 선험적 통각은 범주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게 된다.
헤겔에서 범주의 생성 운동을 통해 출현한 ‘개념’이라는 범주에서 마침내 통각은 자기를 본래 모습대로 드러내니, 그런 점에서 앞에서 개념이 곧 선험적 통각 또는 자기의식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범주의 전개 운동 자체는 결국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드러내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칸트는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에 이르렀으나, 범주를 여전히 형식적인 좌표축으로 보면서, 다시 형식 논리학에서의 추상적 일반적 개념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헤겔은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를 지키면서 이를 범주의 발전과 결합하면서, 물 자체의 문제를 극복하게 되었다. 그 결과 헤겔은 형식 논리학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논리학을 형성할 수 있었다.
논리학의 핵심은 곧 판단이다. 논리적 범주란 곧 판단의 형식 즉 주어와 술어의 관계인 계사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판단의 형식은 12개가 있는데, 이 12개의 범주는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다. 이 범주가 지닌 내용은 이 판단 형식이 구체적인 판단으로 나타날 때 지니는 내용과 구별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은 예를 들어 ‘이것은 빨갛다’와 같은 판단의 형식을 말한다. ‘이것의 빨강임’이라는 특정한 사태는 긍정판단의 구체적 내용이지만, 긍정판단의 판단 형식은 개별자인 주어와 일반적인 성질인 술어 사이의 관계이다. 이 판단형식 자체의 내용은 개별자와 일반자의 관계이다.
이런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정언판단 형식과 구분된다. 이 정언판단의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진달래는 봄꽃이다’와 같은 판단이다. 문법적 형식으로만 보면 질적 긍정판단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어와 술어의 논리적 관계를 보면 후자의 경우 주어는 개별자가 아니라 일반자(즉 ‘진달래’)이다. 그리고 술어는 유적 일반자(‘봄꽃’)이다.
이처럼 구체적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판단 형식 자체가 즉 범주가 다른 범주와 지닌 차이가 곧 판단 형식의 내용이다. 이런 판단 형식은 직접적으로 보면 진리이지만, 이미 자체 내 모순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개별자와 일반자가 대립하니, 이 양자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미 그 자체 모순이다. 그러므로 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런 모순에 부딪혀서 다른 범주 즉 다른 판단 형식으로 이행한다.
“이 절대적 형식은 자기 자신에서 자신의 내용을 갖거나 실재성을 갖는다. 개념은 진부한 공허한 동일성이 아니므로 자신의 부정성이나 절대적 규정이라는 계기 속에 구별하는 규정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말해 논리학의 내용은 절대적 형식의 그런 규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내용은 절대적 형식을 통해 스스로 정립한 것이며 따라서 또한 그 자신에 적합한 내용이다.”(논리학 2부, GW12, 25)
어떤 판단 형식 속에 내재하는 모순은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에 아직 경험이 제한되어 있을 때 판단 형식은 통일성을 지니고 그 모순은 감추어지지만, 경험의 발전에 따라서 이 판단 형식의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은 경험의 발전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런 경험의 발전을 통해서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발전이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달리 논리적 발전은 이런 경험의 발전을 의식 내에서 즉 현재 의식의 평면 위에 투영된 방식으로 겪을 뿐이다.
5)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판단 형식 그 자체의 내용이 판단 형식과 부딪히는 모순이 논리적 범주, 판단 형식의 발전을 이끄는 힘이다. 헤겔은 이점을 진리의 이념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진리는 알다시피 대상과 개념의 일치이다. 논리적 범주는 구체적 내용이 없는 일반적 형식이므로 이 일반적 형식에 관해 진리를 따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 자체가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면, 판단 형식과 그 내용 사이의 모순이 성립하고 거꾸로 양자의 일치인 진리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논리적 범주도 형식과 내용, 개념과 실재성의 일치인 진리를 향해 나간다. 논리적 범주 역시 진리를 향해 생동적인 운동을 전개한다. 이 생동적 운동은 모순을 겪어나가는 운동이다.
“논리학은 절대적 형식의 학문이므로 이런 형식성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서 자기의 형식에 적합한 하나의 내용을 가져야 한다. 그런 요구는 논리적으로 형식적인 것이 순수한 형식이어야 하고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참된 것은 순수한 진리 자체이어야 하면 할수록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형식적인 것은 자체 내 규정이나 내용에서 훨씬 풍부한 것으로 사유되어야 하며 또한 구체적인 것에 대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무한히 더 큰 작용력을 지닌 것으로서 사유되어야 한다.”(논리학 2부, GW12, 27)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