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운동 24-근거와 조건 그리고 악무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 24-근거와 조건 그리고 악무한
1)
지금까지 헤겔은 근거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 근거 관계는 아직은 다만 형식을 통한 관계이며, 여기서 근거인 형식은 종적 개체의 종차 즉 그 기능이며 근거지워진 것, 토대(기체)는 종적 개체라는 내용을 말한다.
이 형식 관계는 생물체의 분류에서 나타나는 관계에 불과하며 아직 생물체의 실질적인 상호작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형식은 아직 주관적인 것에 머무르며, 이런 분류는 여전히 주관적인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종적 개체는 여러 형식의 통일이며 이에 따라 그것의 기체가 되는 내용도 유기적으로 조직된 체계다. 그런데 하나의 종적 개체는 이처럼 지각적 일반성에 속하는 형식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기에 고유한 개별적 성질을 가지니, 이는 종적 개체가 지는 질적이거나 양적인 것 즉 현존[Dasein]에 속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꽃나무는 일반적으로 유기체적으로는 잎과 꽃과 줄기의 통일체이며, 기능적으로는 광합성 기능, 양분 유통 기능, 재생산 기능을 통일적으로 지닌다. 그러나 각 개체는 개별적인 여러 질적, 양적 특징을 지닌다. 예를 들어 어떤 꽃나무는 붉은 꽃을 피우고 어떤 꽃나무는 노란 꽃을 피운다.
이제 헤겔은 지금까지 꽃나무에서 이런 형식과 내용, 근거과 근거지워진 것의 관계를 살펴본 끝에 그것을 넘어서 이런 근거인 형식이 개별적 현존과 관계하는 방식에 관해 서술하기 시작하는데, 이 문제를 헤겔은 ‘조건’이라는 범주를 통해 제시한다.
2)
종적 개체를 하나의 동심원을 통해 그려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은 근거인 형식에 토대가 되는 것이 내용이지만, 이 내용은 이제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현존의 측면을 가지게 된다. 내용은 유기적인 조직체이며 개별적 현존은 이 유기체적 조직을 이루는 개별 요소들이다.
여기서 유기체적 조직을 관계의 측면과 요소의 측면을 구별해 보면, 개별적 요소가 바뀌더라도 그 관계가 유지된다면, 종적 개체의 내용은 동일하게 머무른다. 이 동일한 내용은 종적 개체의 근거인 형식의 토대가 되니, 여기서 개별적 요소가 지닌 직접적 현존의 측면과 근거인 형식의 측면이 이런 유기체적 조직인 내용을 매개로 서로 연관을 맺게 된다.
“그러므로 조건은 첫 번째로 직접적이고 다양한 현존이다. 두 번째로 현존은 다른 것에 즉 근거에 관계된다. 이 근거인 것은 이 개별적 현존의 근거가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근거인 것이다. 왜냐하면, 현존 자체는 직접적으로 존재하며 근거 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15)
이 관계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① 하나의 관점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즉 개별적 현존의 유기체적 관계를 통해 내용이 출현하고 이를 매개로 해서(부정의 부정을 통해) 그 본질로서 형식이 출현한다. 이런 점에서 이 개별적 현존은 형식의 전제가 된다.
“현존이 조건으로 정립되면서 두 번째 계기에 따라서 무차별한 직접성을 상실하고 다른 것의 계기가 되는 규정을 얻는다. 현존은 이런 직접성을 통해서 그런 관계에 무차별하다. 그러나 현존은 이런 관계에 들어가는 한 근거의 그 자체 존재를 이루며 동시에 그런 근거에 대해서 무제약자가 된다.”(논리학, GW11, 315)
② 다른 관점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즉 일반적 형식이 자기의 고유한 내용을 정립하고 이 내용은 다시 개별적 현존 속에서 자기를 유지하니, 이 점에서 형식은 이 현존을 규정하고 현존을 정립한다.
“따라서 조건이 근거 관계가 자기 동일성을 가지게 만드는 것인 한, 이 조건은 근거의 내용을 이룬다. 그러나 이 내용이 이런 형식에 무차별한 것이므로 내용은 다만 잠재적으로만 그 형식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즉 따라서 최초로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근거에 대해 소재를 이루는 것이다.”(논리학, GW11, 315)
3)
현존인 조건이 그 자체로 종적 개체의 근거는 아니다. 근거는 어디까지나 형식에 나오며, 현존은 그것이 구체화되는 조건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조건은 근거의 정립작용에서 전제로 요구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 조건은 ‘정립작용이 소외된 것 즉 지양된 것’이라 한다.
“이 매개작용은 정립하는 작용으로서 자기에 관계하는 가운데 이런 측면에서는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것이고 무제약적인 것이다. 매개작용은 자신을 사실 전제하지만, 정립작용은 외화되고 지양된다. 이 매개작용이 정립작용에 대립하여 자신의 규정상 지니는 모습은 곧 그 자체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다[an und fuer sich].”(논리학, GW11, 315-316)
근거인 형식의 토대가 되는 것이 내용인데, 이 내용은 한편으로는 형식을 갖춘 내용(관계)이며 다른 한편에는 조건에 속하는 직접적 내용(요소)이다. 이것은 그 내용의 관계를 구성하는 소재가 된다. 내용 즉 유기체적 조직은 이 양자의 결합체이다.
“근거 관계는 자기에 대한 자립적인 관계이고 반성의 동일성을 자기 자신에서 가지므로 근거 관계는 조건의 내용[직접적 현존]과 대립하는 본래적 내용을 갖는다. 이 본래적 내용은 근거의 내용이며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형식을 갖춘 것[formiert]이다. 그에 반해 조건의 내용은 다만 직접적인 소재[Material]이며 그것의 근거에 대한 관계는 이 소재가 근거에 대해 그 자체 존재를 이루는 만큼이나 외면적이다.”(논리학, GW11, 316)
4)
이처럼 근거인 형식의 전제가 되는 동시에 그 형식이 정립한 것을 헤겔은 조건이라 한다. 개별적 현존에서 출발한다면, 이 조건은 무제약적인 것이 된다. 반면 형식에서 출발한다면 근거가 무제약적인 것으로 된다.
“전체의 양 측면 즉 조건과 근거는 한편으로는 서로 무차별하고 서로 무제약적이다. 하나는 무관한 것[직접적 현존]이어서 그것이 조건으로 들어 있는 관계는 그런 무관한 것에 대해 외면적이다. 다른 하나는 관계나 형식[근거]이니 조건이 지닌 규정된 현존은 그런 관계나 형식에 대해 소재로서만 존재한다”(논리학, GW11, 316)
동시에 근거와 조건은 서로 매개되어 있다. 조건이 있으므로 근거가 규정할 수 있으며, 근거가 규정하므로 조건이 요구된다.
“나아가서 두 가지는 매개되어 있다. 조건은 근거의 그 자체 존재[소재]*다. 조건은 근거 관계의 본질적 계기이기조차 하므로 이 조건은 근거의 단순한 자기 동일성이다. 그러나 이 계기는 또한 지양되어 있다. 그 자체 존재는 다만 정립된 것이다. 그에 반해 직접적 현존은 조건이라는 것에 대해 무차별하다.”(논리학, GW11, 316)
주*) 여기서 ‘그 자체 존재’는 문맥상 소재라는 의미로 읽힌다. 헤겔이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그 자체 존재는 잠재적 가능성, 출발점이라는 의미에서 소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근거와 조건은 서로 모순적이다. 근거와 소재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서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또한 두 측면 각각은 무차별한 직접성과 본질적인 매개 사이의 모순이다. 즉 양자는 하나의 관계 속에서 통일되어 있다. 또는 자립적으로 존립한다는 것과 다만 계기라는 규정 사이의 모순이다.“(논리학, GW11,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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