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2)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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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2)

 

건국대학교 철학과 학부 김종범

 

(이어서)

 

– 「옹야」18

아래 인용은 「옹야」13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質勝文則野文勝質則史文質彬彬然後君子。」(자왈:「질승문칙야문승질칙사문질빈빈연후군자。」)

재국: 선생이 이르길, “본질이 꾸밈을 이기면 너무 거칠고, 꾸밈이 본질을 이기면 너무 사치스럽다. 꾸밈과 본질을 겸하여 아름답게 빛나면, 그 후에 자연히 군자답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바탕이 색을 이기면 곧 야인이다. 색이 본질을 이기면 사관이다. 색과 본질이 겸비되고 겸비된 후에야 군자인 것이다.

서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바탕이 무늬를 이기면 촌스럽고 무늬가 바탕을 이기면 사치스럽다. 무늬와 바탕을 모두 겸비하여 빛나면 그러한 후에 군자라고 본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본질이 (먼저) 훌륭하면 곧 문장은 질박해지고(수수해지고), 문장이 (먼저) 뛰어나면 곧 본질이 화사해진다. 겉모양의 아름다움과 속내가 서로 잘 어울리는, 후자야말로 군자의 모습이다.

 

「옹야」18에서 크게 논할 수 있는 부분은 한 가지가 있었다. 이는 ‘야(野)’와 ‘사(史)’의 해석에 대한 것으로 ‘야’를 야인 혹은 촌놈으로 해석하고 ‘사’를 사관으로 해석할 것인지 혹은 ‘야’를 거칠다, 촌스럽다, 질박하다 등으로 해석하고 ‘사’를 사치스럽다, 화사해진다 등으로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전자로 해석하면 ‘야’와 ‘사’를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며 후자로 해석하면 ‘야’와 ‘사’를 용언으로 이해한 것이다. 아래에서는 『논어』 안에서 ‘야’와 ‘사’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야’의 사용이다. 『논어』 안에서 ‘야’가 직접적으로 사용된 부분은 「옹야」18 이외에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선진(先進)」1이다. 「선진」1에서 ‘야’는 전자의 해석인 인물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야’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고 ‘야인(野人)’으로 사용되며 『논어』 안에서 ‘야’가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음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하다. 다음으로 ‘야’가 사용된 부분은 「자로(子路)」3이다. 「자로」3에서 ‘야’는 후자의 해석인 용언으로 사용되었다. 『논어집주(論語集註)』의 내용을 따르면 ‘야’는 ‘비속(鄙俗)’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이다. ‘야’의 용법을 확인한 결과에서는 어느 한쪽이 더 확실한 해석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은 ‘사’의 사용이다. ‘사’ 또한 『논어』 안에서 직접적으로 사용된 부분은 「옹야」18 이외에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위령공(衛靈公)」7이다. 「위령공」7에 나온 ‘사’는 전자의 해석인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정확히는 『논어집주(論語集註)』의 내용을 따르면 ‘사’는 「위령공」7에서 ‘관명(官名)’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사’가 사용된 부분은 「위령공」26이다. 「위령공」26에서 ‘사’는 「위령공」7과 같이 전자의 해석인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의 용법을 확인한 결과에서는 ‘사’는 관명 혹은 사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는 전자의 해석에 근거가 될 수 있다.

‘야’의 용법에서는 두 해석 중 무엇이 더 정합적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사’의 용법에서는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 전자의 해석이 더 정합적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두 해석 가능성을 평가하자면 ‘야’와 ‘사’를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 전자의 해석이 더 정합적이고 뒤에 나오는 군자를 고려해보았을 때 문장의 통일성도 더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대로 ‘야’와 ‘사’를 용언으로 해석한 후자의 해석은 ‘야인’과 ‘사관’이라는 현대인은 『논어』 안에서 사용된 그 특징을 이해하기 까다로운 단어를 용언으로 풀어서 설명하면서 그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실제로 「옹야」18 ‘야’와 ‘사’에 대한 해석은 한국의 여러 『논어』 번역서에서도 그 해석의 방법이 갈리는 것으로 보인다.

 

 

 

– 「옹야」19

 

아래 인용은 「옹야」19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人之生也直罔之生也幸而免。」(자왈:「인지생야직망지생야행이면。」)

재국: 선생이 이르길, “사람이 직하게 살면, 불행한 삶이 아니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삶이 곧으니 바르지 않게 사는 것은 요행히 면한 것이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살아있는 자의 삶이란 곧게 하는 것(바르게 살도록 하는 것)이고, 망자의 삶이란 (살아있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며 용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논어』 한국어 번역본은 종범과 유사하게 번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장에서는 수진의 번역을 공유하고자 한다. 수진은 ‘망지생(罔之生)’을 망자의 삶, 즉 죽은 사람의 삶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앞선 ‘인지생(人之生)’과 대응 구조를 염두에 두고 해석한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른다면 공자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마땅히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서술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살아있는 사람은 바르게 살고, 죽은 사람은 (제사를 받음에 있어서) 은혜를 베풀면서 용서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번역이지만 몇몇 문제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이 번역이 『논어』 안의 다른 구절과 모순되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은 「선진」11과 「옹야」22이다. 「선진」11에서는 산 사람을 섬기지 못하고 삶을 모를 때 어찌 귀신을 섬기고 죽음에 대하여 알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말한다. 다음으로 「옹야」22에서는 사람의 ‘의’에 힘쓰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자는 귀신에 대하여 알 수 없는 것, 혹은 공경하되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 그리고 핵심적으로 실제 살아가는 삶에 비해 덜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논어』라는 텍스트 안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의무를 강조하는 부분은 많이 찾을 수 있지만 망자의 의무를 논하는 부분은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진의 번역이 의미를 지니는 부분은 「옹야」19의 문법적 구성을 보았을 때 앞과 뒤를 대응 구조로 해석할 수 있는 적어도 문법적으로는 편하게 도출할 수 있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논어』를 처음 번역하는 사람이 한 번은 고민해보아야 할, 다른 번역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 번역이 더 합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논어』 전반의 구성을 고민해볼 수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되기에 이렇게 그 번역을 공유하며, 그 정합성에 대하여 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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