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논리학 반성 운동9- 지젝과 반성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반성 운동9- 지젝과 반성 개념
1)
라캉 해석자이면서 문화나 이데올로기 비평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지젝은 헤겔이나 칸트와 같은 고전 철학에 해박하다. 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헤겔의 개념을 이용해서 소개하기도 하는데,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 곧 헤겔 반성 개념에 대한 지젝의 설명이다.
그는 1989년 지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국내 번역은 이수련 역, 인간사랑, 2002년 5월)이라는 책의 마지막 6장에서 정립, 전제, 외적 반성, 규정하는 반성 개념을 설명한다. 그의 설명을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실재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이는 헤겔의 논리학에 나오는 반성 개념과 연관되어 있어 보인다. 그의 설명은 헤겔의 맥락과는 다른 맥락에서 하지만, 그 자체로 흥미롭고 거꾸로 헤겔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이 자리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2)
지젝에서 루소의 순수한 자연, 칸트의 물 자체와 포이어바흐의 소외된 신, 라캉의 증상 너머의 실재, 국가의 의지로서 군주, 텍스트의 원초적 의미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된다. 이야기를 단순화하기 위해 여기서는 물 자체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고 설명하기로 하자. 동일한 논리가 자연이나 신이나 실재, 의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알다시피 칸트는 물 자체라는 개념을 설정 즉 정립했다. 이 물 자체는 현상 너머에 있으면서 현상의 근거가 되는 것인데, 이 개념이 설정되는 논리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지젝은 헤겔의 반성 개념을 끌어들인다.
그는 헤겔이 본질론 1편 1장에서 전개한 반성 운동 즉 정립하는 반성과 외적 반성, 그리고 규정하는 반성을 끌어들이는데 이를 단순화해서 ‘전제를 정립하기’와 ‘정립을 전제하기’라는 두 과정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 두 개념은 헤겔에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때 그는 헤겔의 외적 반성을 ‘전제를 정립하기’로 규정하고 규정하는 반성을 ‘정립을 전제하기’로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헤겔의 정립하는 반성이나, 외적 반성, 규정하는 반성에 부여하는 의미는 헤겔 자신의 것과는 구별되는데, 우선 그의 개념을 설명한 다음, 그 차이를 밝혀 보기로 하자.
3)
그 가운데 첫 번째 정립하는 반성은 어떤 현상을 그 자체로 물 자체로 보는 소박한 또는 순진한 관점을 말한다. 즉 현상적으로 주어진 것을 그대로 믿는 태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취하는 태도가 주어진 현상의 규정을 그대로 믿는 태도이니, 이것을 지젝은 정립하는 반성이라 부른다.
두 번째, 외적 반성은 현상 너머에 현상의 근거가 되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물 자체로 설정하는 태도이다. 이 초월적 실재는 현상을 출발점으로 해서 소급적인 방식으로 설정되며, 일단 설정된 이후에는 오히려 이 현상을 설명하는 근거로 여겨진다. 물 자체가 설정된 이후에 물 자체는 현상과 괴리되며, 진리인 물 자체에 비추어 본다면, 현상은 제약된 것, 왜곡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외적 반성을 그는 ‘전제를 정립하기’로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정립이란 곧 현상을 말하며 전제하기란 이 현상의 근거를 찾아 들어가는 운동을 말한다. 일단 그 근거가 확립된 다음엔 현상은 이제 그 근거로부터 설정된 것으로 규정된다.
사실 이 근거란 현상으로부터 소급된 것이니 현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이 현상의 근거로 설정되면서 현상이 오히려 근거에 의존하는 일종의 소외 또는 전도가 여기서 출현하게 된다. 이런 전도는 종교적으로 신에 매달리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또 다른 흥미로운 예로서는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개념이다. 아름다운 영혼은 자신을 현실로부터 학대받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이 학대받는 현실을 설정하는 것은 그 자신이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신이 희생당한 존재가 되도록 자기를 희생하게 하는 가족을 설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학대하고 희생하는 현실은 자기도 모른 채 자기가 전제한 것이다.
4)
현상의 근거가 되는 물 자체가 사실은 현상으로부터 주관에 의해 소급적으로 도출된 결과이니 곧 물 자체는 주체 자신이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외적 반성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 이 주체 자신의 설정 운동은 은폐되고 만다. 그 결과 마치 물 자체가 현상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규정하는 반성에 이르면, 이 물 자체가 사실은 주관 자신이 소급하여 설정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지젝은 이를 ‘정립을 전제하기’로 규정하는데, 여기서 정립이란 정립하는 주체를 의미하며, 이 정립하는 주체가 곧 물 자체의 전제가 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는 흥미로운 예로서 남근을 들고 있는데, 남근은 관념을 통해 발기되지만, 그 관념은 신체적인 것으로서 의식적 통제 너머에 있다. 의식적 통제 너머에 신체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남근은 물 자체로 전제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관념을 통해 발기된다는 점에서는 주관이 설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형식적 전환에 지나지 않는다. 즉 주관 밖에 물 자체가 주관이 정립한 물 자체라고 인식되었다고 하더라도, 현상의 근거가 되고 의식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지젝은 헤겔이 실체가 주체가 된다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이상과 같은 형식적 전환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런 전환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공허한 제스처”이다.
“어쨌든 일어나고 있는 무엇에 대해 책임지도록 하는 순수한 가장 행위이다. 이것이 ‘실체가 주체가 되는’ 방식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345)
5)
지젝은 이상과 같이 헤겔의 반성 개념을 자기 나름대로 설명한 다음, 헤겔적인 반성 개념의 한계를 지적한다. 헤겔에 대한 그의 비판은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참조한다. 마르크스는 어떤 것이 거짓된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며, 그런 이데올로기를 갖도록 하는 사회적 조건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젝 역시 마찬가지다.
첫째, 그에게서 외재적 반성은 단순히 주관이 현상의 근거로 물 자체를 설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외재적 반성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본질 자체가 자기를 타자화하여야 한다.
“외재적 반영의 결정적 특징은 본질이 사전에 객관적으로 주어진 외재성의 형태로 자기 자신의 타자로서 바로 자시 자신을 미리 전제한다는 것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351)
여기서 ‘본질의 타자화’란 곧 본질 속에서 주체가 현상의 근거를 초월적 물 자체에서 찾고자 하는 조건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즉 소외된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 소외될 수밖에 없으니, 그 때문에 외재적으로 반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마찬가지로 지젝은 헤겔이 말하는 규정하는 반성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물 자체가 주관이 설정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더라도, 주관이 그런 물 자체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 자체를 설정하는 주관 자신의 조건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조건이 변화되어야만 비로소 물 자체를 설정하는 일이 끝나게 될 것이다. 이를 지젝은 신 자체의 주체화라고 말한다.
“인간은 신의 진리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다시 말해 주체가 소외된 실체적 본체의 진리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체가 자신의 전도된 이미지 속에서처럼 이 본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정 반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핵심은 실체적 본체가 그 자체로 분열되어 주체를 산출해내야 한다.(즉 신 자신이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356-357)
5)
외적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에 관한 지젝의 설명은 헤겔의 설명과는 다르다. 헤겔은 외적 반성은 어떤 정립된 것의 본질이 그것 자체에 외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삼자인 주관이 자의적으로 설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규정하는 반성에서 찾아진 본질은 그 어떤 것 자체에 내재적인 것이며, 따라서 제삼자인 주관이 아니라 그것 자체에 본질적인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헤겔에서 외적 반성에서 규정하는 반성으로 이행하는 것은 인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즉 주관적 인식이 사물 자체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지젝에서 외적 반성은 주관이 물 자체를 설정한다는(물론 자각 없이) 의미에서 주관적이지만, 설정된 것은 주관 밖의 물 자체다. 이는 헤겔에서 단순히 주관적으로 본질을 설정하는 외적 반성 개념 이상의 것이다. 헤겔에서는 주관 밖의 물 자체를 설정하는 운동은 나중에 정신의 소외 운동에서 설명되는데, 이는 하나의 주관이 아니라 다수의 주관이 상호작용이라는 것을 매개로 한다.
또한, 규정하는 반성의 경우 지젝은 주관이 그런 물 자체를 설정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며, 이는 단순한 형식전환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헤겔에게서처럼 사물에 내재하는 객관적 본질이 인식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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