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야 고마워, 삶의 얼룩을 응시하며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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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야 고마워, 삶의 얼룩을 응시하며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8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한길석(중부대 학생성장교양학부)

 

개강을 맞아 울적한 기분으로 수업 준비 겸 책장을 뒤지다가 못 보던 찻잔 하나를 발견했다. 개강을 피하고 싶은 건 학생들만이 아니다. 사과 한 알 크기의 포동한 녀석으로, 달항아리 같은 살결에 알록달록한 점과 별을 붙이고 새초롬하게 앉아 있었다. ‘고놈 참 이쁘네’ 하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뭔가 수상쩍어서 살짝 돌려 보니 고양이는 사라지고 정체불명의 커다란 갈색 얼룩이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뒷면은 페인트 총에 맞은 우윳빛 벽화처럼 흉측한 얼룩으로 가득했다. 세상에는 돌려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아내 말로는 조카가 준 거라 했다. 친구와 함께 도자기 공방에 놀러 갔다가 처음 빚어보고 선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얼룩은 어찌된 거냐 물으니 “원래 고양이였는데 망친 거래”라며 피식 웃었다.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해 봤다. 흙을 빚어 무늬를 넣고, 유약을 발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마 앞에서 기다리는 조카. 그런데, 백사장을 총총 걷던 고양이는 간데 없고, 정체불명의 갈색 얼룩이 떡하니 박혀 있는 것이다. 가마의 열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조카는 끔찍한 사고 현장이 담긴 이 오브제를 이모에게 넘기고 재빨리 사라졌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이 찻잔은 두 개의 얼굴을 한 녀석이다. 한 쪽은 귀엽고 상큼하지만, 다른 한 쪽은 예기치 못한 불행으로 일그러져 있다. 인생도 비슷하다. 온갖 정성을 기울여 자기를 빚어내 제 나름의 무늬와 빛깔을 뽐내며 세상에 나오지만, 터져버린 고양이 신세를 면치 못할 때가 적지 않다. 머리를 쥐어짜고 갖은 애를 써서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봤자, 생각대로 착착 진행되는 일은 별로 없다. 마이크 타이슨은 말했다. ‘누구나 계획은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 타이슨은 탁월한 철학자임이 틀림없다. 다만 그 밑에서 배우는 건 조금 겁난다.

조카는 이십대 청춘이다.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밤길을 조마조마해 하며,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텨낸다. 맵고 신 나날을 살다가 도자기를 빚으며 모처럼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열에 터진 고양이와 만났다. 가히 ‘미지와 근접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라 할 수 있다. 인생은 잠깐의 위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생의 유머다. 웃기진 않지만. 그 나이에 나는 어땠나 생각해 봤다. 딱히 나을 것도 없었다. 다만 도자기 공방은 없었다.

우리는 보통 얼룩을 감춰 놓는다. 눈에 띄지 않게 치워두면 삶은 다시 쾌적하고 매끄러워진다. 실패한 기억은 장 속 깊숙이 넣어두거나, 잘 안 보이는 곳에 쳐 박아 놓는다. 그러나 그렇게 얼룩을 감추다 보면 고양이를 빚던 그 오후도, 가마 앞에서 느꼈던 설렘도 함께 지워진다. 결과만 기억하고 과정은 잊는 것. 실패의 흔적을 지우면서 그 안에 담긴 노력과 애정까지 지워버리는 것. 우리가 너무 자주 저지르는 잘못이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갈색 얼룩이 보이도록 찻잔을 비스듬히 놓아두었다. 귀엽기보다는 아름다운 찻잔이 되었다. 얼룩과 점들이 찻잔을 완성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삶이란 영광과 얼룩을 함께 응시하는 것일 테다. 잘 구워진 면만 드러내려 하지 않고, 터져버린 면도 슬쩍 내보이는 것. 그렇게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 적어도 이 찻잔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삶의 얼룩이 늘어날 때마다 이 찻잔을 쳐다봐야겠다. 조카야 선물 고맙다.

출처 :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8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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