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환 지음, 『빛의 혁명 183』(갈무리, 2025) 서평|글: 손보미(비정규직 강사) [철학자의 서재]
『빛의 혁명 183』 서평
손보미 (비정규직 강사)
2024년 12월 3일 22시 23분. 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정부 취임 약 30달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밤 중, 갑작스럽게 일어난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기민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국회 앞으로 달려와 온몸으로 계엄령 실행을 막았다. 그리고 국가권력에 동원되었지만, 자신과 또 자신이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한 보다 적합한 인식에 도달한 계엄군들은 위로부터 하달된 명령에 태업으로 응했다. 이로써 다행히 계엄은 (직접적으로는)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선포 6시간 만에 해제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비상계엄선포의 실질적 목표였던 권력장악을 위한 내란 시도는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꾸며 계속되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다시 광장에 모였다. 광장에서 다시,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다.
8년 전, 촛불혁명의 신호탄이었던 “다시 만난 세계”가 이번에는 다중의 메인테마곡이 되어 광장의 구석구석에서 울려 퍼졌다. 다시 울린 다시 만난 세계와 함께 광장을 수놓은 건 이번에는 촛불 대신 케이팝 아이돌 응원봉이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색색의 엘이디 불빛이 반짝이는 응원봉을 테마곡의 경쾌한 리듬에 맞춰 흔들었다. 간절한 염원을 저마다의 목소리로 외쳐 부르며 우리 사회를 흔들고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 역사적 사건에는 “빛의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빛의 혁명 183』은 이 혁명적 사건에 관한 183일간의 기록이다.
○ 광장의 가르침
저자는 이 책을 “현장 참여관찰의 기록이자 주체성의 새로운 구성에 대한 분석”(7)이라고 밝히고 이러한 글쓰기 방식을 “보고문학”이라 칭한다. “보고문학”은 전작들인 『제국의 석양, 촛불의 시간』(2002), 『미네르바의 촛불』(2009), 『절대민주주의』(2017)로 쭉 이어져 온 저자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이기도 하다. 긴 시간 보고문학 창작을 이어온 저자는 각 시기에 펼쳐졌던 역사적 사건들이 자신의 사색과 글쓰기를 강제로 추동했다고 말한다.
『빛의 혁명 183』을 구성하는 145편의 글 중 많은 글이 광장에서, 그리고 광장의 체험으로 쓰여졌다. ‘역사적 사건’이 현실에서 펼쳐질 때 가장 극적으로 변모하는 곳이 광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적인 힘이 강해지면 광장은 전과는 다른 빛깔과 소리와 온기들로 넘쳐흐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광장은 전혀 새로운 배움터가 된다.
광장에서의 배움은 전문 교육기관에서 배움과는 다르다. 전문 교육기관인 학교가 축적된 지식을 한 방향으로 전달하는 곳이라면, 광장은 다양한 앎들이 미리 정해지지 않은 경로를 따라 흐르며 새로운 지식을 탄생시키는 곳이다. 저자는 전작인 『절대민주주의』에서 이러한 새로운 배움을 공통적 배움으로, 광장을 공통의 배움터로 불렀다.
공통의 배움터인 광장에서는 학교와는 다른 강사들이 등장한다. 우선 학교의 강사와 광장의 강사는 자격 조건이 다르다. 학교에서 강사 자격을 얻으려면 별도의 전문 분야에서 쌓은 지식과 경력을 각 학교의 인사 담당자에게 평가받아야 한다. 일정한 테스트를 통과한 강사는 교실의 단상에 올라 학생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광장에도 단상이 있다. 하지만 광장의 단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아닌 다른 것이 필요하다. 삶 속에서 알게 된 진실을 많은 사람 앞에서 증언할 수 있는 용기, 지금까지 자신을 입다물게 했던 두려움들에 맞서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광장에도 평가관들이 있다. 광장에 모인 다중이 바로 학생이자 평가관들이다. 단상을 둘러싼 이들이 용기 있게 말하는 이의 증언 속에 깃든 진실의 무게를 측정한다. 광장의 학생들은 강사의 발언에 박수와 환호 혹은 야유와 질책, 또 격려와 위로를 보내며 그 가르침을 평가한다. 이처럼 떠들썩한 광장의 소란 속에서 공통의 지식이 탄생한다.
책의 2장, 「내란을 혁명으로_빛의 시민의 등장과 탄핵광장」의 마지막 글인 <편견과 망상에 관해 어느 “술집 여자”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에 대한 주석>은 빛의혁명의 주무대인 공통의 배움터에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단상에 오른 한 강사에 관한 글이다. 그런데 이 공통의 강사는 자신을 “술집 여자”라고 소개했다.
자기소개를 할 때 울렁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물론 나도 그렇다. ‘나’를 구성하는 여러 정체성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늘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요동치는 가슴을 달래며 당면한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정체성을 고르려 노력한다. 2024년 12월 11일 (그날은 내란 사건이 터진 지 8일째 되던 날이고 내란의 주범인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기 4일전 이었다.) 부산 서면에 세워진 단상에 올랐던 한 공통의 강사도 나와 같은 울렁증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도 당연히 여러 정체성들로 구성된 존재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강사가 마음의 동요 속에서 마침내 선택한 정체성은 “술집 여자”였다. 왜 그랬을까? 앞서 말한 공통의 강사가 될 자격 조건에서 우리는 이 선택을 이해할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사회의 온갖 편견이 응축된 “술집 여자”라는 정체성은 ‘용기’라는 공통의 강사의 자격 조건을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민주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하고자 단상에 오른 술집여자-강사를 공통의 평가관들은 박수와 환호로 맞이했고, 이를 통해 공통의 강사 자격을 부여받은 그는 용기있게 강의를 펼쳤다.
공통의 배움터에서는 우리를 기존의 정체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새로운 지식을 탄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가 이전에 번역한 책, 『폭풍 다음의 불』에 등장하는 표현에 따르면 우리를 가두는 울타리(즉, 정체성)를 넘쳐흐르는 풍요의 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또 그렇기때문에 동시에 어떤 정체성에서 출발해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된다. 정체성은 목표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출발점이 될 수는 있다. 특히 어떤 정체성들은 공통의 배움의 좋은 출발점, 따라서 공통의 강사의 좋은 자격 조건이 되기도 한다. 빛의 혁명 속에서 선택된 이 “술집 여자”라는 정체성은 권력의 단상 위에서는 반듯이 감춰야 할 오명이지만, 광장의 단상에서는 새로운 앎을 탄생시킬 수 있는 좋은 초석이 된다. 저자는 온갖 편견의 응축물인 “술집 여자”로 자신을 소개한 강사의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에 박수와 환호로 응한 공통의 학생이자 평가관들을 기억하고 그 가르침을 복습하고 점검하며 새로운 지식과 개념을 탄생시킨다.
○ 광장에서 탄생한 개념
12.3 내란은 여러 문제가 응축되어 벌어진 위험한 사건이었다. 내란 사건의 핵심적인 원인으로 작동한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우리 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정치체제인 대의민주주의의 문제다. 저자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헌법은 제1조에서 국민을 주권자로 호명하면서도 그것을 권력의 원천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다중은 자신의 주권을 대표자에게 위임함으로써 주권을 대리적으로 행사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9)
이어 저자는 현재의 정치체제를 “자유 위임 제도”라 칭하며 여기서 발생하는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이를 “구속적(혹은 기속적) 위임 제도”로 대체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 위임 제도인 현 대의제를 구속적 위임 제도인 새로운 대의제로 대체하는 것. 이것이 저자가 여러 저작들을 통해 꾸준히 연구해 온 “다중 섭정 개혁”의 길이다. 그리고 오랜 기간 다중 섭정 개혁의 길을 모색해 온 저자는 이 책 『빛의혁명 183』에서 그 길을 좀 더 선명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개념을 창조한다.
저자는 지금까지 대의권력 공간으로만 한정되어 파악되어 온 정치 공간을 확장해 대의권력 공간과 대립하는 또 다른 독립적인 정치의 공간을 설정한다. 그리고 대의권력 공간에서 작동하는 좌-우 스펙트럼을 가로지르는 평형-예외의 또 다른 스펙트럼을 그려낸다. 저자 스스로가 이 책을 쓰며 거둔 개념적 혁신이고도 자평하는 이러한 개념의 창출은 지금까지 대의민주주의 권력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직접민주주의의 활력을 우리의 시야에 드러낸다.
“나는 오랫동안 ‘정치적 좌파’로 환원될 수 없는 다중 자율주의의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왔고 때로 그것을 ‘사회적 좌파’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이번 내란 과정은 나로 하여금 좌파적 문제의식을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평형의 문제의식과 결합시킬 필요를 느끼게 만들었다.” (11)
평형파와 예외파라는 새로운 개념은 활동하는 여러 정치 세력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좌파와 우파의 구분만으로는 잘 파악되지 않았던 정치 공간의 이중성을 선명히 드러내고 이로써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개념의 탄생은 공통의 배움터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 책은 183일간 펼쳐진 광장, 달리 말해 직접 민주주의의 활력으로 넘쳐흘렀던 다중의 정치 공간에서 저자의 신체를 통과한 물민物民들의 가르침과 배움의 기록이다. 새로운 개념 지도를 통해 물민다중의 앞을 밝혀주는 빛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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