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시대 [베를린에서 온 편지 8]
극단의 시대 [베를린에서 온 편지 8]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960년대 서구의 청년들은 체 게바라에 열광했다.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뒤 권력을 거부하고 다시 볼리비아의 정글로 돌아가 싸우다 전사한 게릴라의 영웅. 1968년의 학생운동 분출 이후 급진화된 일부 청년들은 70년대에 도시게릴라 운동을 벌인다. 독일과 일본 적군파, 이탈리아 붉은여단은 테러라는 수단에 의존해 세계를 변혁하려 했다. 그들의 방법은 틀렸지만, 적어도 그들의 이상은 원대했다. 평등한 세계.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슈피겔지 기자 출신으로 알렉산더 바더와 함께 적군파를 이끈 울리케 마인호프는 독일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잇는 좌파진영의 성녀와 같은 존경을 받는다.
오늘날 서구사회로 진출한 무슬림들의 자녀들은 높은 차별의 벽과 깊은 절망 앞에서 지하드 전사를 꿈꾼다. 턱수염을 기른 살라피스트와 근본주의 종교지도자들이 거리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슬람 국가건설의 당위, 그리고 지하드 성전의 참전을 호소하면 차별 속에 절망하던 무슬림 청년들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트위터, 유튜브 등에는 검은 두건을 걸치고 바주카포를 쏘는 지하드 전사의 영상이 뮤직비디오처럼 화려하게 편집되어 돌아다닌다. 영상 매체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더욱 큰 자극을 받는다. 그들은 터키 국경을 넘어 이라크와 시리아의 교전 지역에 진입해 지하드 전사가 된다. 지금 중동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슬람국가(IS) 전사들 중 상당수는 유럽, 미국, 호주 등에서 온, 아랍어를 하지 못하는 서구출신 이민자들의 자녀다. 그래서 영국의 잘나가는 힙합DJ가 어느날 유튜브 동영상에 출연해 미국인 기자의 목을 베는, 영화에서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현실이 되고 있다.
60년대에 청년들이 붉은 별이 그려진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담배를 문 에르네스토 게바라에게 열광했다면 21세기에 유럽 한복판에 사는 무슬림 청년들은 검은 두건을 두르고 검은 깃발을 펄럭이며 코란과 기관총을 양손에 든 지하드 전사에 열광한다. 70년대에 체 게바라의 후예들에게 적어도 평등한 세계에 대한 이상이 존재했다면, 오늘날 무슬림 청년들은 수니파 이슬람 신정국가를 만들어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광신적 근본주의를 꿈꾸고 있다. 시아파 무슬림, 소수파 기독교도, 쿠르드족 등에 대한 인종청소와 모든 종류의 광적 폭력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객관적 인정을 결여한 주관적 확신이 그 자체로 초월적, 절대적 정당성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순간, 그것은 종교적 광신주의가 된다. 이념이 아니라 종교적 광신을 위한 살상이 청년들을 마법처럼 휘감는다. 세계가 얼마나 퇴보했는가를 이처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지난 9월, 독일정부는 독일 내 IS의 불법화를 선언했다. 내무부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이제 거리집회에서 IS의 상징이나 깃발을 드는 것, 신문 등에 IS 지지광고를 내는 것, 거리 연설 모두 범죄로 형사처벌될 거라고 강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효력이 없어 보인다. IS가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 대규모 거주지역인 코바니를 맹공격하며 쿠르드족에 대한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가운데, 독일 전역에서는 10월 7일, 쿠르드족 이민자들이 거리시위를 통해 IS의 학살을 규탄했다. 그런데 함부르크에서는 IS의 지지자들이 쿠르드족 시위대를 습격해 양쪽 진영 사이에 칼과 쇠파이프가 동원된 격렬한 거리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불법화라는 방식으로는 IS 지지자들이 생겨나고 공공연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한계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유럽의 이슬람권 이민자 청년들이 종교적 근본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누적되어 온 차별과 박탈, 배제의 원한감정(Ressentiment)이 그들로 하여금 반사회적 폭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속국가의 법보다 신의 법(물론 정작 코란은 폭력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여러 종교학자들이 말하고 있지만)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에게 ‘불법’이라는 표식이 얼마만큼 효력이 있겠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독일 정부에게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테러단체 IS를 불법화한 독일정부는 그렇다면 노골적인 인종주의 네오나치 정당 NPD(독일국민당)를 그동안 어째서 불법화하지 않았는가. 동독 지역의 반실업 상태 독일 청년들이 극우 이데올로기에 감염돼 이주자들을 공격하고 NPD와 같은 극우정당들(최근에는 NPD보다는 온건하지만, 마찬가지로 외국인 혐오와 유럽연합 탈퇴 등 독일민족주의에 기댄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구동독 지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에 투표하는 것을 왜 방치해왔는가? 무슬림 청년들이 차별의 벽에 막혀 극단적인 대안을 찾고 있는 현상에는 이주민 정책을 실패로 이끈,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독일 청년들 사이에 인종주의가 뿌리내리는 것을 방조한 정부 자신의 책임은 없는가?
극단적인 불평등과 갇혀 있는 현실,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한 유럽의 청년들은 극우 인종주의에, 이주민들의 자녀들은 종교적 광신주의에 물들고 있다. 옆 나라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정당(프랑스 국민전선(FN)과 영국의 영국독립당(UKIP))이 1위를 차지했다. 한 편에서는 극우 인종주의적 선동에 현혹되어 외국인들에 대한 증오범죄를 저지르는 빈민층 독일 청년들이, 다른 한 편에선 이슬람 신정국가 수립을 위해 지하드 성전에 동참하려는 무슬림 청년들이 거리에서 유혈낭자한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이제 이러한 폭력은 쿠르드족과 IS 지지세력의 충돌에서 보듯, 같은 무슬림 청년들 사이의 대립으로도 번지고 있다. 극단의 시대다. 극단적인 불평등은 극단적인 분열과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여러 극우 청년 단체들이 이제 온라인을 벗어나 조직력과 자신감을 과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들이 들린다. 우경화와 약자에 대한 조롱, 국가에 대한 신화 속에 뭉친 이들의 활동은 IMF 이후 미래가 막혀버린 절망적인 세대의 극단적인 탈출구인 셈이다. 그들 역시 결국 이 극단의 시대가 만들어낸 피조물인 것이다. 극단의 시대, 이 극단의 쳇바퀴를 과연 멈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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