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타령만 하지 말고, 나만의 정치 시작하자![철학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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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 사회>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휠체어 한 대 열 변호사 부럽지 않다

 

빌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선거 구호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현대 정치의 핵심 문제가 무엇이며, 대중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날카롭게 지적한 사례로 많이 인용되곤 한다. 얼핏 보면 클린턴의 구호는 정치보다 경제가 더 중요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사실 시장은 이미 삶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있다. 시장의 논리를 바탕으로 서술되는 모든 주장들은 가치 판단의 가장 중요한 기준처럼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시장은 마치 블랙홀처럼 작용한다. 복지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보건의료 정책이 시장의 잣대에 의해 고려 대상이 되는가 하면 교육 문제가 시장의 논리에 파묻히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물론 의식의 물신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며, 의식의 물신화는 오히려 결과에 가깝다. 의식의 물신화는 우리 삶의 문제를 시장의 결정에 맡겨 버리고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별로 낯설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기현상이 하나 있다. 비중 있는 재계 인사가 범법 행위와 연관된 피의자로 법정에 서게 되면 휠체어에 의존한 모습을 보이거나 입원을 핑계로 사법 처리 일정을 미루는 모습이다. 형사 사건에 연루될 경우 변호사보다 의사를 먼저 찾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연해 있는 방법이다. 설명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무서울 것 없던 사람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으니 정신적 충격이 엄청났을 것이고, 풀려나게 되면 모든 병이 순식간에 완치되는 기적을 너무 기뻐서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최근에는 몇몇 재벌이 재산 헌납이라고 하는 조금 더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에 재력가인 대통령 후보까지도 대선 후 재산 헌납을 약속하기도 했다. 재산 헌납 약속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를 보고 초등학생들에게 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당선되면 자기 용돈을 털어 피자 사주겠다는 공약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 하는 상투적인 푸념의 대상이 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근본적인 좌절감을 안겨 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현재의 삶만이 아니라 미래의 삶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경제적 가치의 독점이 삶의 전 영역에 대한 독점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지 않는 한 이러한 비관적인 전망이 현실화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돈 잘 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국민들 모두 돈 잘 벌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그래서 오히려 절망스럽다. 우리 사회의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희망은 삶의 불안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찰스 테일러 지음, 송영배 옮김, 이학사 펴냄). ⓒ이학사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자신의 책 <불안한 현대 사회>(송영배 옮김, 이학사 펴냄)에서 현대의 불안 요인을 세 가지로 꼽고 있다. 첫째는 삶의 의미의 상실, 즉 도덕적 지평들의 실종이다. 그는 현대 사회가 탈주술화(탈종교)의 경향과 더불어 도덕적 기반을 상실했다고 보고 있다. 둘째는 만연하는 도구적 이성 앞에서 삶의 목표들이 소멸하는 것이라고 한다. 셋째는 자유·자결권의 상실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관한 결정이 시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경제적 가치가 삶의 모든 의미를 대체하고 있으며, 도구적 이성의 만연 역시 시장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결국 시장에서의 자유라고 하는 것 역시 시장의 구조적인 메커니즘 안에서의 자유일 뿐 시장을 벗어나는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바야흐로 시장은 종교를 대체하고 이성의 기준이 되고 정치를 사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현대 사회가 다시 종교적인 도덕적 지평의 회복을 통해 이러한 경향성에 저항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현대 사회의 다원성 혹은 다양성을 아우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배타적 가치를 고수하는 종교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테일러 역시 종교의 역할에로 논의를 집중하지는 않는다. 테일러는 진정성이 도덕적 이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현대의 불안을 도덕성의 회복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진부한 도덕 만능주의로 경도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경제 논리의 가치 독점적 전횡과 시장의 신화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가장 적절한 대안으로 정치의 복원 혹은 복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정치는 다양한 가치를 다룰 수 있는 영역이며,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욕망과 요구를 삶에 반영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대의제 정치의 논리 하에 정부와 의회는 노동자들에게는 선택지를 주지도 않으면서 기업에게만 두 개의 칼자루를 쥐어주곤 한다. 사용자에게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하면 해고도 자유롭게 하고 비용도 늘어나지 않게 한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는 일반적으로 해고도 자유로우며 고용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도 저렴한 비정규직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계약의 두 주체인 사용자와 노동자는 전혀 평등하지 않은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문제는 부당 노동 행위가 적발되어도 노동자는 기업을 상대로 개인별로 소송을 벌이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루한 법적 분쟁이 이루어지는 사이 아내는 돈 벌러 나가고 아이들은 부모님 집에 맡겨진다. 이미 국가의 법이 이런 지경에서 노동자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생존을 위한 연대마저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내 삶을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가?

 

노동 쟁의 시 적용되는 ‘3자 개입 금지 조항’은 연대를 제한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제한은 재개발과 관련된 쟁의의 경우에도 적용되고 있다. 정부의 공권력은 항상 인정된 소유권만 보호하는 현실에서 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여하의 노력도 인정받을 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의 재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입자와 지주들 간의 분쟁에서 지주들은 용역을 고용하는 것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지만 세입자들의 경우 자발적인 연대 세력의 도움도 금지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당연히 소유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자유주의적 정책들과 무관할 수 없다. 토지건물이라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지주들은 자신의 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는 조치들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지만, 세입자들의 생존권은 무형적인 것이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태는 노사 갈등이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졌던 사업장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재산권에 대한 보호라는 명분으로 기업이 노조에 대해 파업으로 인한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등의 행위는 정당한 노동 기본권조차도 행사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경우 정치적 연대조차도 제한을 받는다면 사회적 약자의 생존은 재산권 행사자들의 관대한 처분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동안에 대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유용한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흔히 복지를 거론한다.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것이 낫다. 하지만 가난한 독거 노인들이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악용해 싼 값에 파스사고 그것을 팔아 돈을 챙겼다는 사실이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인 양 보도되는 현실에서 복지의 수혜자들은 언제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

급기야는 2008년 2월부터는 파스 유가 국민건강보험에서 비급여 약물 보조제로 지정되었다. 복지 정책이 마치 부유층의 자비를 강제하고 그 덕에 사회적 약자들만 혜택을 누리는 것인 양 호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약자는 당연히 사회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의 지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복지는 시장주의자들의 도덕적 자부심만 충족시켜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고 복지 비용을 더 많이 책임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을 비굴하게 만들어야 하는 근거일 수는 없다. 공항이나 고속도로와 항만 등과 같이 공적인 예산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사회 간접 자본을 많이 이용하는 것은 당연히 기업과 부유층이다. 복지는 엄연히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동점심의 윤리나 이타심과 같은 원리로 설명되는 도덕적인 태도 역시 문제를 해결해 줄 유효한 수단을 마련하는 단서가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러한 도덕적 관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상류층의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강화하고 부자들의 자선이나 기업 이익의 사회적 환원 등을 촉구하는 긍정적 힘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접근은 그것을 실천하는 개인을 칭찬할 만한 근거일 뿐 시장이 지배하는 시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의사 결정에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사회 지도층들에 의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선을 통해서 그들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될지는 몰라도, 내일 다시 그들의 자선을 기다려야 하는 사정은 변하지 않게 될 것이다.

테일러는 진정성이 결코 자기 결정의 자유와 끝까지 갈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진정성에 호소하는 태도가 자칫하면 시민 사회의 요구나 연대 활동의 의무, 자연 환경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등의 태도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시민 사회의 요구나 연대 활동의 의무, 자연 환경의 필요성은 모두 정치적 행위의 영역이다. 또한 그것은 직업적 정치인들의 정치가 아닌 자기 결정의 자유에 따른 시민들의 정치를 의미한다.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정치보다 경제가 더 중요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듯 보이는 빌 클린턴의 선거 구호는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 혹은 시장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시장에서의 삶은 인간의 정치적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각자 자신을 위한 최선의 삶을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는 듯하지만 시장 안에는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적 시장주의에서 다원주의는 허구다. 시장 안에서는 모든 가치가 가격으로 환산된다는 점에서 다원화된 기준들이 가격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만 다원주의일 수 있다.

이에 비해 정치는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정책을 고려하면서도 다양한 삶의 가치를 고양해야만 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종교적 다양성을 보호하고, 학문의 다양성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이런 역할들은 정부 주도의 계몽이나 정책 결정을 따르도록 하는 홍보 등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조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좀 더 구체적이고 분명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결정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적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는 분명 개인들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의 실현 속에서 당당한 생존권의 향유에 궁극적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러한 목표는 결과로서의 목표일뿐만 아니라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실천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즉 자기 결정의 자유를 실천함으로써만 자기 결정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적 권리를 가지지 못하거나 아주 적게밖에는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자신들의 삶과 연관된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 민주주의가 일반적으로 보장하는 정치적 참여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물론 한국 사회는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의 투표권조차도 실질적으로는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루 일당을 포기하고 투표를 하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참정권 확대를 위한 투표 시간 연장 문제도 정치권의 셈법에 의해 뒤로 밀려나는 형국이다.

설령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몇 년에 한번 주어지는 투표권의 행사는 유효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삶의 문제가 정치적 일정에 조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 민주주의 하에서 선거와 선거 기간 사이는 대중들에게 근본적으로 정치적 실천의 휴지기에 불과하다. 정치가 정치 엘리트들의 직업적인 행위를 일컫는 것이라면 이러한 사태는 별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정치가 구성원 모두의 삶을 결정하고 조직화하는 과정이라면 정치적 실천이나 정치적 행위는 항상 보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의제 정치의 한계는 테일러가 주장하는 자기 결정의 자유에 기반을 둔 정치로 극복되어야 한다.

손톱만큼의 우월함으로 연대를 비웃지 마라?

자기 결정의 자유에 기반을 둔 정치가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차원에서의 사회적 연대가 보장을 받아야 한다. 정당 간의 정치 공방이 아닌 엘리트 정치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공세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정치적 공세’는 비난이나 비판의 대상이 아닌 권리로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연대는 기득권에 대항해서 정치적 공세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유일한 힘이자 수단이다. 미국의 백인들이 노예제를 200여 년간 유지할 수 있었던 요령 중에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노예들 간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면에서 예속적인 노예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의 가능성은 연대에서만 비롯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를 예방하는 유효한 수단 중 하나는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에 차별성을 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지주가 소작농을 관리할 때 마름을 두거나 소작농 간에 차별을 두어 연대를 예방했듯 노예주들은 노예들의 처지에 차등을 두어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이 영세 기업 노동자들의 처지를 외면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 서럽게 만드는 것은 모두 연대를 어렵게 하고 불신을 형성하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이런 것들이 우연적인 것일까? 아니다. 정부는 비정규직 제도의 운영을 도움으로써 결국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마저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는 의도적이다. 노동자의 권익이나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확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먹이지 않도록 하는 방식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 전반의 제반 문제는 외면한 채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들의 이해에만 매몰된 노동 운동은 연대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없으며 연대를 저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노동 운동이 노동 운동 이외의 정치적 행위 결사들로부터 불신받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의 노동 운동은 정치적 행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장적 질서에 대한 편승에 불과할 뿐이다.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등과 같은 대기업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문제를 파업의 머리끈 구호로만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노동조합 활동은 결국 집단 이기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노동조합의 도덕성 문제로 해결할 수는 없다.

연대는 연대 세력들 중 가장 열악한 처지의 세력들에게 가장 중요한 결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진정성을 보장 받아야 한다. 이는 결과물에 대한 분배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약자의 자기 결정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에게 해당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 아닌 가장 시급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 우선성을 두는 연대의 조건이 확립되어야 하며, 그 시급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 그 문제 해결의 결정권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이 관철될 때 소득 증가보다는 자연 갯벌에서의 삶을 유지하고픈 어민의 삶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며, 자기 집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거주권이 유지될 것이며, 실직자의 자녀들이 상급학교진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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