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이야기〔카메라 옵스큐라〕
지난번에는 빛이 보여주는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그림자 이야기를 해 보자. 그렇다, 2005년 꽤 늦은 가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림자가 건네는 이야기에 붙들려 이 사진을 찍었다.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는지? 웬 사내와 여자가 마주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정도? 마주 선 여인이 꽃이라도 들고 있는 듯 보이니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은 아닐까? 그런데 사내는 손에 틀림없이 휴대 전화로 보이는 걸 들고 있다. ‘작업’을 거는 중일지도 모른다. 작업의 진도가 무난하게 흘러가 이제 막 여자 전화번호라도 얻게 된 건 아닐까.
그러나 사실 그림자의 주인은 두 사람 모두 여자였다. 게다가 둘은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저 제 할 일 하며 제 갈 길을 가던 낯선 타인들이었다. 서로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거의 나란히 걸어가다가 우연히 한 프레임 속에 들어왔을 뿐이다.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긴장이나 여러 가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상은 비스듬히 비치는 오후 햇살이 그린 그림자를 핑계로 우리가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사진이 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의 반영일 뿐이다. 심지어 그 반영조차도 왜곡되고 굴절되기 십상이다. 때로는 빛이 굴절하고 때로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감상자의 주관적 소망이나 편견에 의해 제멋대로 곡해되기도 한다. 사진을 재현으로만 보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사진이 보여주는 반영은 때로 허망한 것이니까.
일찍이 장자는 그림자 이야기로 우리가 집착하는 현실의 삶 또한 허망한 것일지 모른다고 암시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아까는 걸어가다가 지금은 멈추고, 아까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서는군요. 어쩌면 그렇게도 지조가 없소?”
그림자가 대답했다.
“난들 그러고 싶어서 그럴까? 내가 의지하는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림자는 허망한 존재다. 실체가 아니기 떄문이다. 그런데 그림자의 그림자인 망양(罔兩)은 허망〔罔〕이 두 번〔兩〕 겹쳐 있는 존재니, ‘허망하고 또 허망한〔罔而又罔〕’ 존재다. 그림자가 실체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망양은 그림자가 움직이면 따라 움직이는 존재일 뿐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지 못한다. 망양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림자는 실체이다. 그런데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림자도 더 이상 실체가 아니라 허망한 존재다. 장자는 그림자의 그림자를 통해서 그림자는 물론이고 실체 또한 허망한 것임을 밝힌다. 꿈속의 꿈을 통해 꿈의 허망함을 각성시키고 다시 대각(大覺)을 통해 현실조차도 사실은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태연히 한 장자였으니.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왜 사진을 찍는 걸까?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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