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와 가을[천하무적 맹자왈]
공자의 낙, 장자의 낙
햇살 좋은 가을이다. 지난 여름, 유난히 비가 많았던 탓인지 가을 햇살이 새삼 좋다. 얼마간 만나는 사람한테마다 가을볕을 즐기라는 인사가 절로 나왔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이렇게 좋은 가을날이면 맹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맹자와 가을이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맹자에는 가을의 낭만을 떠올릴 만한 구절이 없다.
공자야 한번 재미에 빠지면 밥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어 늙는 줄도 모른다고 스스로 말한 적이 있으니 가을 꽤나 탓을 법하다. 실제로 공자의 학당에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공자의 개인적 취향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제나라에서 순임금이 작곡했다는 소악을 듣고 석 달 동안 고기맛을 알지 못했다고 했으니 정말 대단한 마니아가 아닌가.
사실 가을의 낭만이라면 아무래도 장자가 제격이다. 송나라 왕안중이 “책을 펼치면 바람소리가 난다.”고 감탄했던 장자 제물론 ‘대지의 노래 천풍부(天風賦)’는 깊어가는 가을밤에 읽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하고 소름이 돋는다.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낭만 중의 으뜸이라 할 맹랑한 이야기〔孟浪之言〕, 황당한 이야기〔荒唐之辭〕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이가 바로 장자다.
그런데 맹자에게는 눈을 씻고 다시 봐도 그런 낭만이 없다. 그러니 맹자가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비난도 나름 일리가 있다. 이쯤 되면 맹자를 읽은 사람으로서 뭔가 변명이라도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하긴 맹자야 “임금의 푸줏간에 살찐 고기가 가득하고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가득한데 백성들의 얼굴에는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들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 있다.”고 말했으니 가을의 낭만 따윈 애초에 말도 꺼내기 어렵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는데 가을에 빠져 정신 못 차린다면 필경 맹자의 죄인이 될 터.
여민락(與民樂)
곰곰이 생각해보니 공자만큼은 아니지만 맹자도 음악을 좋아했다.
제나라 선왕의 신하 장포가 맹자를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왕께서 저에게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정치에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면 제나라는 왕도에 그만큼 가까워졌다 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선왕을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다.
“들으니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고요?”
선왕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아, 아니. 제가 무슨 클래식을 좋아한다는 게 아니고 그저 요즘 유행하는 세속의 음악을 좋아할 뿐입니다.”
선왕은 맹자한테 또 뭐라 한소리라도 들을까 전전긍긍했다. 맹자는 클래식 음악의 전문가 아니던가.
그런데 맹자의 대답은 의외였다.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면 그만큼 제나라는 왕도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옛 음악이나 지금의 음악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선왕은 솔깃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맹자가 되묻는다.
“음악을 혼자서 즐기는 것과 여럿이 함께 즐기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즐겁습니까?”
“그야 여럿이 즐기는 게 더 즐겁지요.”
맹자가 또 묻는다.
“그럼 적은 수의 사람과 음악을 즐기는 것과 많은 수의 사람과 음악을 즐기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즐겁습니까?”
“많은 수의 사람과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비로소 맹자왈
“잘 아시는군요. 이제 제가 왕을 위해 음악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왕께서 여기서 음악을 연주한다 칩시다. 그런데 백성들이 왕의 음악 소리를 듣고 모두 이맛살을 찌푸리며 ‘우리 임금, 음악 참 좋아하시는구만. 그런데 대체 어찌하여 우리들을 이 지경에 빠뜨렸단 말인가. 부모와 자식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식이 흩어지지 않았는가?’하고 말한다면 이는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즐기지 않고 임금 홀로 음악을 즐겼기 때문입니다.”
선왕의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맹자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지금 왕께서 여기서 음악을 연주하시는데 백성들이 왕의 음악 소리를 듣고 모두 기뻐하며 ‘참 다행히도 우리 임금님께선 건강하신가 보다. 어쩌면 저렇게도 음악을 잘 연주하실까?’하고 말한다면 이는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즐겼기 때문입니다.”
“…”
선왕은 대답이 없었다. 물론 선왕뿐만 아니라 맹자가 살던 시대, 그 누구도 ‘백성과 함께 즐기라’는 맹자의 이 말에 호응하지 못했다. 그 대답을 듣기 위해 맹자는 천 년을 기다려야 했다.
악양루에 올라 답하다
악양루에서 바라본 동정호, ⓒ전호근
때는 1045년 봄, 그러니까 맹자가 세상을 떠난 지 1,300년도 더 지난 뒤다. 송나라 인종 때의 재상 범중엄은 절친한 친구이자 파릉군 태수였던 등자경(?子京)의 초청을 받고 파릉 최고의 명승지인 동정호 악양루에 올랐다. 동정호는 먼 산을 머금고 긴 강을 삼켜 호호탕탕 끝이 없어 북쪽으로는 무협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소상강에 닿아 있다. 자고로 귀양 가는 나그네와 근심을 품은 시인들이 이곳에 모였으니 아득한 동정호를 바라보는 심정이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장맛비가 끊이지 않아 여러 달 동안 비가 내리며, 사나운 바람이 울부짖고 흐린 물결이 공중을 치며, 해와 별이 빛을 숨기고 산악의 모습이 잠기며, 장사꾼과 여행객들의 자취가 끊어지고 돛이 꺾이고 노가 부러지며, 초저녁부터 날이 캄캄해져 범이 으르렁거리고 원숭이가 운다. 이런 때에 이 누대에 오르면 서울을 떠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헐뜯는 말과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눈에 가득한 온갖 것이 쓸쓸하여 감정이 극에 달해 슬퍼할 것이다.
범중엄은 악양루에 올라 먼저 이곳에서 근심에 지쳐 눈물 흘린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이렇게 이야기했다. 반면 화창한 날 악양루에 올라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는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헤아린다.
봄기운이 화창하여 경치가 밝고 물결이 고요하며, 위아래의 하늘빛이 오직 푸른색으로 아득하고 모래사장의 흰 새들은 날갯짓하며 내려앉고, 비단 비늘의 물고기가 이리저리 헤엄치고 강둑에 향기로운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며, 혹 긴 연기가 허공에 날리고 밝은 달이 천리를 비춘다. 떠도는 빛은 황금이 뛰는 듯하고 고요한 그림자는 구슬이 잠긴 듯한데, 고기 잡는 이들이 뱃노래를 주고받으니 이 즐거움이 언제 끝날까?
범중엄은 시간을 거슬러 이렇게 악양루에 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다가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을 두루 어루만지던 옛 어진 사람의 자취를 찾아보려 한다.
아! 내 일찍이 옛 어진 사람의 마음을 찾아보니 아무래도 이 두 부류와는 다른 듯하다. 어째서인가? 옛사람은 외물 때문에 기뻐하지 않고 자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으니〔不以物喜 不以己悲〕 뜻을 얻어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늘 백성들을 근심하고 멀리 떨어져 강호에 머물더라도 나라를 근심한다. 그저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뿐이다〔進亦憂 退亦憂〕.
범중엄과 등자경 ⓒ전호근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옛 사람에게 물을 것이다. 당신은 도대체 언제 즐기냐고?
범중엄도 그것이 궁금했다. 그런데 그는 궁금한 동시에 이미 대답도 알고 있었다. 범중엄이 들려주는 옛사람의 대답,
천하 사람들의 근심에 앞서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다 즐거워 한 뒤에 즐거워 할 것이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범중엄이 말한 옛 어진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맹자다.
맹자의 낙
그러고 보니 제나라 선왕이 맹자를 아름다운 별궁으로 초대한 다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신 같은 현자도 이런 정취를 즐기나요?”
맹자왈
“임금이 백성들의 즐거움을 자기 즐거움으로 여기면 백성들 또한 그 임금의 즐거움을 자신들의 즐거움으로 여기며, 임금이 백성들의 근심을 자기 근심으로 여기면 백성들 또한 그 임금의 즐거움을 자신들의 즐거움으로 여깁니다. 천하로써 즐기고 천하로써 근심하는〔樂以天下 憂以天下〕 이가 바로 왕자(王者)입니다.”
홀로 즐기지 말고 천하의 백성들과 함께 즐기라는 뜻이다. 맹자한테는 아름다운 음악이나 풍경이 주는 즐거움보다도 그 모든 걸 백성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 더 소중했던 모양이다. 이 가을, 맹자가 여기 오면 낭만을 즐길 길이 없으리라. 맹자는 이상한 낭만주의자다.
전호근(철학, 민족의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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