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와 광화문[천하무적 맹자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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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와 패도의 사이

무력(武力)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문력(文力)?
아니다. 문력은 형용모순이다. 문은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답은 문덕(文德)이다. 무력은 패자(覇者)의 수단이고 문덕은 왕자(王者)의 수단이다. 이 둘의 차이에 대해 맹자만큼 분명하게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맹자왈

“힘으로 인(仁)을 가장하는 것이 패도이고, 덕으로 인(仁)을 실천하는 것이 왕도이다. 패도는 반드시 나라가 강대해야 할 수 있지만 왕도는 강대함이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맹자는 온 천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도 ‘오직 인의가 있을 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맹자의 왕도는 공자의 덕치와 다르지 않다. 덕치는 결국 무력에 의존하지 않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노나라의 계씨가 부용국이었던 작은 나라를 공격하려 했을 때 공자는 “멀리 있는 사람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文德)을 닦아서 스스로 찾아오게 해야지 나라 안에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가?”하고 비판했다. 맹자의 왕도는 공자의 덕치를 이은 것이다. 맹자왈,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심복하지 않는다.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억지로 복종하는 것일 뿐.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진심으로 따른다. 마치 칠십 명의 제자가 공자를 따르던 것처럼.”

물론 공자도 맹자도 무력보다 문덕이 앞서는 정치가 베풀어지는 세상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들의 소망과는 달리 현실에서 군왕의 자리는 자주 물리적인 힘이 강한 자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력만으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군왕들도 간간이 있었다.

유방, 말에서 내려오다

한나라 고조 유계(劉季)는 본래 ‘먹물’들을 싫어해서 유학자를 만나면 관을 벗겨 오줌을 갈겼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라이벌이었던 항우가 초나라 명문가 출신이었던 것과는 달리 유계는 시정에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던 무뢰배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가장 친한 친구였던 번쾌는 바로 개를 잡는 개백정이었을 정도다.

아무튼 먹물을 그렇게 싫어하던 유계는 천하를 차지하고 난 뒤 이름을 방(邦)으로 바꾸고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름 바꾸고 황제가 되어도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유방은 신하들과 한 방에서 같이 자기도 했고 그러다 보면 잠결에 신하의 발이 유방의 입에 들어가기도 했다. 또 어쩌다 연회를 베풀기라도 하면 공신들이 저마다 자신의 공을 자랑하다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 칼부림을 하기가 일쑤였다.

그런 그에게 만나기만 하면 늘 유가의 시서(詩書)를 이야기한 자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육가였다. 얼마나 자주 시서를 들먹였던지 한번은 유방이 짜증을 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사람인데, 시서 따위를 어디에 쓴단 말이냐?”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옛날 탕왕과 무왕은 신하로서 자기 임금을 죽이고 새로 천자가 되었지만, 천하를 얻은 뒤에는 문(文)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포악한 진나라는 무력에 의지했기 때문에 쉽게 망한 것입니다. 만약 진나라가 인의(仁義)로 천하를 다스렸던들 폐하께서 어떻게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

시변(時變)을 따른 굽은 유자, 황제의 권위를 세우다

생각을 바꾼 유방은 그 때부터 말에서 내려와 유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부하들의 무질서한 모습을 볼 때마다 무력(武力)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런 유방의 마음을 파고 든 사람 중에는 숙손통도 있었다. 숙손통은 본래 진나라의 박사로, 2세 황제 호해를 섬기다가 도망쳐 항량의 신하가 되었다가 다시 초나라 회왕을 섬겼다가 회왕이 세력을 잃자 다시 항우를 섬겼다가 항우가 패하자 유방에게 항복한 자다. 그가 유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릇 유학자란 함께 진취하기는 어렵지만 이룬 것을 지키는 데는 제법 쓸모가 있습니다. 원컨대 신은 노나라의 유생들을 불러 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예법을 제정할까 합니다.”
“좋소. 하지만 나같이 글을 잘 모르는 사람도 따라할 수 있도록 쉽게 제정해 보시오.”
이렇게 해서 숙손통은 노나라로 가서 유생 30여명을 조정으로 가게 했다.

그런데 노나라의 유학자 중 두 사람만은 이렇게 말하면서 숙손통을 따르지 않았다.
“당신이 섬긴 군주는 열 명이 넘더군요. 게다가 모두 아첨으로 그들과 가까이했더군요. 지금 천하가 전쟁이 막 끝나서 아직 죽은 이를 장사 지내지도 못했는데 예악을 일으키려 하니 옳지 않소. 예악은 모름지기 백 년이 지난 뒤라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오. 그대는 가보시오. 나를 더럽히지 말고!”

숙손통은 그들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비루한 유학자야. 시변(時變)을 모르는구만.”
숙손통을 따라가지 않은 두 명의 유학자가 누구인지 전해지지 않는다. 모름지기 권력자가 부를 때 따라가지 않으면 이름이 전해지기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저들 덕분에 노나라의 유학자 중 30분의 2, 곧 15명 중에서 적어도 한 명은 숙손통 같은 자를 따라가지 않고 자신을 뜻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의 지식인들 중 저 두 사람 같은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한 숙손통을 두고 사마천은 “때에 맞추어 자신을 바꿈으로써 마침내 한나라의 유종(儒宗)이 되었다[與時變化 卒爲漢家儒宗]. 큰 정직은 굽은 것처럼 보이고, 길은 본래 구불구불한 법[大直若? 道固委蛇]”이라고 칭찬했다. 뒷말은 그대로 두더라도 공안국이나 원고생, 또 동중서나 복생을 놔두고 숙손통을 한나라의 유종이라 했으니 이른 바 유종이라는 자들이 늘 아첨이나 하는 자들임을 사마천은 알았던 걸까?

아무튼 유방은 숙손통을 등용해서 노나라에 전해지던 유가의 예법으로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이후 한나라는 고전 텍스트를 적대시했던 진나라와는 달리 고전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지배를 공고히 한다. 이른바 문치를 내세운 것이다.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는 춘추가 한나라의 천하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서로 둔갑한 것이나 고대 제왕의 치도를 기록한 상서를 국가통치의 전범으로 삼기 위해 제남의 복생으로 하여금 상서를 복원케 한 것도 모두 그런 시도의 일환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시도는 한나라의 정통성을 강화하여 온갖 내외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한과 후한왕조를 각각 200년씩 존속시키는 대성공을 가져왔다. 한나라를 이어 천하를 차지했던 위(魏)나라, 그리고 위나라를 이은 진(晉)나라, 그리고 동시에 발호했던 수많은 왕조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졌는지를 상기한다면 한나라의 정통성이 얼마나 단단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아침에 황제가 되었다가 저녁에 폐위당했다고 말할 정도니 말이다.

이후 중국의 역대왕들은 한나라처럼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저마다 유가문헌의 권위를 빈 문치를 내세웠다. 이를 테면 아버지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킨 다음 형과 동생을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거쳐 황제가 된 당나라 태종은 유가문헌의 통일적인 해석을 위해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역시 쿠데타로 집권한 송태조 조광윤도 문치를 내세워 송나라를 다스렸고, 심지어 이민족으로 중국을 지배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도 문치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말만 그랬지 실제로 문치에 성공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무력을 통하지 않고 통치에 성공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문인이 쓴 글을 빌미로 사람을 죽인 역대의 숱한 문자옥들은 문치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드물게나마 문치에 성공한 나라가 있는데 그 중의 대표를 들라면 조선왕조라 할 수 있다.

문자의 나라, 조선

조선이 문치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우선 방대한 기록의 생산, 곧 문자의 생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글자수가 5천만 자에 달한다. 5천만자가 어느 정도 분량이냐 하면, 전설의 시대인 황제(黃帝) 때부터 근세에 이르는 청나라 때까지의 역사를 각 왕조별로 기록한 중국의 역사서를 모두 합친 25사보다 1,000만자가 더 많은 양이다. 게다가 실록의 자료가 되었던 승정원일기는 무려 2억 5천만자에 달하니 단일 기록물로서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실로 엄청난 양의 기록물이다. 게다가 이런 기록의 생산을 담당했던 사관들에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 있도록 독립적 지위와 익명성을 보장하였으며 수장된 기록은 임금을 포함한 누구도 열람할 수 없게 하여 기록의 공정성을 확보하였다.

조선이 문치의 나라였다는 또 다른 근거로 임금이 매일 참여했던 경연(經筵)을 들 수 있다. 경연은 3정승과 6승지를 비롯한 조정의 주요 대신들이 모두 참여하는 행사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경연청에 모여 사서오경과 통감강목, 성리학 관련 문헌을 읽었는데 특히 사서오경은 주석까지 빠짐없이 통독하였으며 통감강목 등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경연은 제왕을 상대로 한 교육제도의 백미이면서 동시에 정책협의기구 역할도 했는데 임금과 조정의 대신들이 함께 고전을 읽고 난 뒤에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모습은 세계사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로, 상상만 해도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이다. 동시대 다른 지역의 최고 권력자들이 주로 어떤 일로 하루를 보냈는지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조선이 문치를 표방한 것은 태조 이성계의 즉위교서에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왕이 되고 난 뒤에 이름을 단(旦)으로 고친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홀아비, 과부, 고아, 의지할 곳 없는 노인은 왕도정치를 베풀 때 가장 먼저 보살펴야 할 사람들이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 돌보아야 할 것이다. 해당 지역의 관청에서는 굶주리고 궁핍한 사람을 구휼하고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鰥寡孤獨 王政所先 宜加存恤 所在官司 賑其飢乏 復其賦役]”
명백하게 왕도(王道)를 천명한 것이다. 이 교서는 정도전이 작성한 것인데 그는 조선왕조를 개창하면서 때에 따라 혁명론과 왕도론을 적절하게 아울러 수용했다는 점에서 맹자의 후예라고 해도 크게 손색이 없다.

사람의 빛, 광화문

조선이 문치의 나라였다는 근거는 또 있다. 조선의 궁궐은 모두 문덕(文德)으로 다스린다는 의미를 정문에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궁궐은 경복궁이다. 규모가 크다 하지만 사다리만 걸치면 누구든지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어 군사적인 방어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건축물이다.

일본의 오사카성이나 니조조성이 군사적 침공에 대비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오사카성, ⓒ전호근

게다가 경복궁의 ‘경복(景福)’은 큰 복이라는 뜻으로 시경에 나오는 말인데 덕으로 배부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미 술에 취하고 또 덕으로 배부르니
군자여! 영원토록 너에게 큰 복이 있기를 바라노라.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이 경복궁의 정문이 광화문인데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세종 8년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종 8년에 집현전 수찬에게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했다고 했고, 근정전(勤政殿) 앞 둘째 문을 홍례(弘禮), 세째 문을 광화(光化)라 했다고 한 기록이 있다.

光化의 ‘光’자는 ‘빛’이란 뜻으로 새기지만 사실은 ‘사람의 빛’이다. ‘光’자의 갑골문은 사람을 뜻하는 ‘人’자의 윗부분이 ‘별 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별 모양은 빛을 묘사한 것으로 光자가 사람에게서 나오는 빛임을 말해준다. 또 고문의 光자는 위에 불을 뜻하는 ‘火’자가 있고 아래에 ‘人’자가 있는 光자가 많이 나오는데 역시 사람의 빛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따라서 광화란 사람의 빛, 곧 덕으로 다스린다는 뜻이다.

경복궁뿐 아니라 창덕궁은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은 홍화문(弘化門), 덕수궁은 인화문(仁化門)이다. 돈화(敦化)는 중용에 나오는 말로 대덕(大德)을 형용한 것이고, 홍화(弘化)는 서경에 나오는 말로 역시 큰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인화(仁化)’의 ‘仁’은 말할 것도 없이 덕의 으뜸이다. 결국 조선 궁궐의 문들은 모두 큰 덕으로 백성들을 감화시킨다는 뜻을 새겨둔 셈이다.

광화문의 현판 글씨를 쓴 사람이 누군지 찾아 봤더니 훈련대장 아무개가 썼고,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문화재청에서 디지털로 복원해서 다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애초에 대원군이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사대문의 현판글씨를 모두 무인에게 맡겨 쓰게 했다. 아마도 나라가 외침에 시달려 위태로운 마당에 무인의 힘찬 필치를 빌려 왕실을 위엄을 세우려 했을 것이다.

그런 광화문 현판에 금이 갔다. 그것도 하필 사람의 빛, 곧 문덕을 나타내는 ‘光’자에 금이 간 것이다. 오직 강경 일변도의 대북 정책으로 일관해 오다 결국 무력을 앞세운 분쟁을 초래한 이 정부의 어리석음을 광화문은 알았던 걸까?

 

갈라진 광화문 현판, ⓒ전호근

맹자왈

“어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고운 마음을 아직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미루어 가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미운 마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루어 간다.[仁者 以其所愛 及其所不愛 不仁者 以其所不愛 及其所愛]”

그리고 또 맹자왈

“다른 사람을 사랑했는데 그 사람과 친해지지 않으면 내가 정말 그를 사랑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고 다른 사람을 다스렸는데 다스려지지 않으면 내가 슬기로웠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愛人不親 反其仁 治人不治 反其智]”

전호근(철학, 민족의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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