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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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2)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2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2. 30인 참주정 전후의 아테네의 정치·사회상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는 재정을 있는 대로 다 쏟아 부었지만, 단지 자금만이 아니라 유능하고 헌신적인 그리고 용감한 사람들까지 다 소진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두말할 나위 없이 개개의 사람들 모두 자신들의 정열을 아낌없이 내던져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열을 다해 싸운 다음, 아테네는 자신들의 지배자로 선동 정치가(d?mag?gos)들을 선출하고 만다. 예를 들어 클레온(Kleon 기원전 ? -420년)이 그렇다. 클레온은 법정 수당을 세배로까지 증액하여 궁핍한 민중이 그것으로 생활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도 극심한 채무로부터 벗어낫고 나아가 50탈란톤(talanton)을 축재하기까지 했다. 아테네는 뛰어난 심미안을 가졌지만 이제 이런 자들의 벼락출세를 분별해내는 것조차 힘들게 돼 버렸다. 이 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니키아스 평화조약(기원전 421년)으로 일시 멎었던 시절, 책략과 사리(私利)에 능란했던 시대의 풍운아 알키비아데스에게 아테네가 매료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테네인 민족 내부에 잠복해있던 열망이 섬광처럼 떠오른 알키비아데스와 그가 주장한 시칠리아 원정(기원전 417년)을 통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긴 하지만, 아테네인들의 그러한 태도는 병리학상(pathologisch) 세계사 전체에서 눈여겨볼 만한 구경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 후 재개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끝내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배하여 기원전 404년 크리티아스(Kritias)를 비롯한 30인의 참주들의 가혹한 공포정치에 직면하게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개개의 여러 폴리스들의 움직임을 보면 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기존의 권세가들(dynatoi) 즉 귀족내지는 부자들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아테네에서도 그 최종적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기원전 528-462?) 시대 이래 모든 당파에는 물론 모든 우두머리들 주변에 일종의 정치 클럽 즉 헤타이레이아(hetaireia)가 결성되어 있었다. 페리클레스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시대에는 이러한 클럽은 소멸한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 그것들은 다시 소생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불사하였다. 이윽고 이른바 과두정(oligarchia)파의 형태로 나타난 그러한 결사에는 무엇보다도 빈곤과 착취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었던 사람들과, 권세를 상실하여 지금은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결집해 있었다. 그 일부는 이전에 귀족이었던 자들이었고 일부는 그저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조금은 더 태생적으로 능력이나 소질이 있었던 사람들은 원초적인 혈통에 대한 믿음은 물론 국가에 다시 중용 되고 싶어 하는 열망에 불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에 함께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소피스트의 사상은 고작해야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들에 어떤 형식적 명분을 제공한 것에 불과했다. 실제로 한 명의 소피스트도 스파르타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던 스파르타 권세가들의 태도는, 그들에 대해 극히 악의적인 아테네 시민들 이상으로 박대했다.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민중들의 친구인 양 처신했던 것도, 자신들의 신상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고 나아가 민중들로 하여금 과격한 제안을 하게 하여 민주정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반민주정 클럽의 전체 연합은 이미 기원전 411년에 몹시 난폭한 수단을 사용해서, 본질적 성격상 과두정적인 체제를 실시하는 것에 성공하긴 했지만, 이것은 고작 수개월밖에 존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후 몇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아테네의 과두정 지지자들이 완전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극단적인 결의와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클레이스테네스 이래 민주정은 아테네에서 자명한 것인 양 받아들여져 모든 것이 그의 구상대로 개혁되고 있었을 때조차, 그것의 반대자들 역시 그리스인이었다고 하는 것, 즉 반대자들도 이와 같이 아무런 거침없이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민주정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테네를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은 그들 국외 이주를 바라는 사람들에 대해서, 프랑스 혁명 당시 정치 망명자에 대해 그랬던 것과도 같은 공분(公憤)을 안고 있었다. 민주정은 이 체제가 자기 쪽 당파의 유능한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당파의 유능한 사람들까지 절대적인 내적 자주성(absoluten inneren Unabh?ngigkeit)을 갖도록 길러냈다는 것을 아테네를 배반한 알키비아데스를 보고서야 비로소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사실 주의해서 보면, 아주 많은 수의 과두정 지지자들이 뤼산드로스에 대한 최후의 저항을 진압하는데 손을 빌려 줌으로써 전력을 다해 자신들의 조국인 아테네가 패배하는 것을 앞당기는데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05년) 그것은 그 저항군들이 이기면 결국 시민(d?mos)이 이기게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과두정 지지자들은 아테네를 비산업적이고, 동산(動産)에 의존하지 않는, 바다에 등을 돌린 사회로 만들려는 과제에 매우 정통해 있었다. 그들은 아테네 성곽 문을 연 후, 뤼산드로스의 후견 하에 정권을 빼앗아 이른바 30명 참주들이 주도하는 공포정치를 시작했다.(기원전 404년) 30인 참주들은 1500명을 처형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재산 이동도 감행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자들 아래에서 금방 기강이 세워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미 앞 시대에서 각자의 성질들을 서로가 다 너무나 정통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이제 와서 완전하게 하나가 된 듯 행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테라메네스(Th?ramen?s)는 한걸음 양보하여 그 타개책을 강구했다. 그러나 그는 말 그대로 완전한 의미에서 막무가내인 자를(den Unbedingten) 만나게 된다. 그 자가 곧 그를 실각시킨 후 살해까지 한 크리티아스이다.

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연설을 통해 우리는 다시한번 그들이 그리스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지배권력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목적을 바라는 사람은 수단 또한 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크리티아스에게 이 수단이 무엇이었는지는 이미 오싹하리만큼 분명한 것이었다. 언젠가 참주들 휘하의 중장보병들에게 행한 그의 연설 즉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것을 바라고 또 같은 것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은 그리스의 모든 당파가 새겨들어야 할 모토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정치는 결국 트라쉬불로스(Thrasyboulos 기원전 440-388년) 등 민주정파에 의해 얼마가지 않아 타도되고 만다.(기원전 403년) 과두정이 무너지고 민주정이 부활한 후에도, 아테네에는 분명 여전히 과두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과두정파로서 대두될 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주정 이후 시민들의 공격은 본질상 그러한 세력으로 여겨진 부유층들에게 향해졌던 것이다.

아테네 국가에 있어서의 외관상의 생활은, 이 위기 이후에도 대부분의 측면에서 이전과 같은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생활상을 관찰한다한들 그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큰 차이점은 오히려 이 시기의 전과 나중에 위치시킬 수 있는 아테네 사람들의 내면적 성질과 외면적 위상에 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완전하게 패배했다고 하는 것은, 이 전쟁이 초래한 시민들 간의 커다란 균열을 막는데 동원된 기본 방책들이 대단히 조잡한 것이었던 것에 비하면 아직 사소한 재앙인 것처럼 생각된다. 말하자면 전적인 헤게모니를 가지고 지배권을 행사하던 이전의 시민들에게 딱 맞았던 왕자의 외투를, 살이 빠져 말라깽이가 된 지금의 시민들도 여전히 헐렁한 채로 걸쳐 입고 있었던 것이다. 패전 후 동맹국의 소송 사건들에 대한 재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돼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재판을 하던 습관이 붙어 있었던 데다 패배자의 일상으로서 의심 또한 몹시 많아져서 시민들은 지금도 그 때 못지않게 아주 많은 아테네인들을 재판에 붙였다. 그 최초의 희생자 중 한 명이 소크라테스(S?krat?s 기원전 469-399년)였던 것이다.

민주정 하에서의 앗티카 지방의 개개의 시설이나 관공서에 대해서는 여기에서는 생략해도 괜찮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가로움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임시 직무이든 영속적인 직무이든, 직원이든 위원회 위원이든 일을 맡기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인이나 포이니케 사람들이 이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잘 그리고 정확하게 직무를 수행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이 모든 결정을 한도 없이 독점함에 따라 업무가 엄청나게 늘어나 혼란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관공서의 끊임없는 교체 또는 추첨에 의해 근무부서를 임명받은 직원들 이외에, 늘 상임으로 근무하는 한명의 숙련된 직원, 즉 서기(grammateus, hypogrammateus)가 실무상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서기는 신분상 국유 노예에 지나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다. 지난 날 베네치아에서조차 이 정도로까지 자신의 서기에 의존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물론 아테네인은 잘못 시작한 일일지라도 나중에 수정을 잘 할 수 있도록 많은 훈련을 쌓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일과 관련해서 하나의 금지령을 공표했다. 즉, 앞으로는 동일한 개인이 2년간 계속해서 동일한 관공서 내에 서기로 근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에는 어떤 법률이 실제로 어떻게 실행에 옮겨졌는지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것은 특정 감독관이 운영하지 않는 업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고, 하물며 음모와 책략을 일삼는 자들에 의해서 업무 일체가 지연되는 등, 업무 전반에 걸쳐 믿기 어려울 정도의 방만함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법률에 대해서는 그 효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솔론의 법률을 비롯해 그 이후에 공포된 엄청난 분량의 법률 편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보람 있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5세기경 고대 그리스 화폐. 1탈란톤은 6000 드라크마. 당시 일꾼의 하루 품삯이 1드라크마 정도였다고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테네에는 찬탄을 자아내며 인용되고 있는 현명한 고래의 옛법률(nomos: 관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법률 가운데 다름 아닌 다음의 두 개의 법률들은 아테네의 역사에서 종종 위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어떠한 법률도 만약 그것이 동시에 모든 아테네인에 대해서 유효하지 않은 경우 한 개인에 대해서 공포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지 결의로만 표명된 것은 평의회의 것이건 민회의 것이건 하나의 법률보다 우위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률들은 제정 순으로 차례차례 신전 기둥 가운데에 혹은 돌기둥에 새겨지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법률에 대해 종종 그것들이 새겨진 소재를 핑계로 별로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페이스테타이로스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새」(Ornithes :기원전 414년) 가운데에서(1054행) 이러한 돌기둥에다 매우 괘씸한 일을 저질렀다고 하여 근대의 어떤 편집자는, “하층민은 자주 이런 짓을 했다“라고 덧붙이고 있지만, 이것은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페이스테타이로스는 훌륭한 아테네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법률은 신들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것도 계속 입버릇처럼 말해지고 있었다. 확실히 기원적으로는 법규 내지 법률은 종교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결부되어 있었다. 게다가 개개의 법 원리도 분명 태고 시대로부터 유래하고 있었다. 또한 법률은 신적인 기원을 가지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불변의 것이라고 여겨지기 조차 했다. 안티폰(Antiphon)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법률은 극히 오래 되었고, 동일한 일에 대해서는 항상 동일한 법률이 있다. 이것이 탁월한 상태의 법률이 지니고 있는 주요 표징이다. 왜냐하면 보통 시간과 경험(Zeit und Erfahrung)은 무엇이 부적당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관습의 형태로 전해진 법률들은 폐지되지 않은 채 재래의 법률에 새로운 법률들이 하나 둘 덧붙여지면서 이 후 아테네 법률들은 서로 모순을 안은 채로 방치되어 왔다. 그리하여 법정에서는 완전히 모순되는 법률들이 판을 쳐 마침내 그 폐해가 심해져 결국 성문법적인 법전의 편찬이 아무래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이 매우 중요한 일이 위원회를 차례차례로 돌다가 결국 그 숙련된 실무자 한 사람 즉 노예 출신이었던 니코마코스(Nikomachos)에게 맡겨졌다.(기원전 411년). 이 남자는 이 일을 그저 한해두해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효한 법률까지 삭제하여 법률을 허위로 날조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은 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책임을 추궁도 하기도 전에 아에고스 포타모이(Aegos Potamoi) 해전(기원전 405년 스파르타에게 대패했다)과 함께 아테네에 불운이 닥쳤다. 그리하여 해전이 끝난 후 폴리스를 재건하면서 다시 이전보다도 더 큰 합의 기관과 위원회가 법전 편찬을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니코마코스의 강력한 보호자들에 의해서 다시 또 모든 일이 근본적으로 그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는 또다시 4년간 이 사안을 진척시키지 않은 채 만지작거리다, 그의 전문 분야인 제사 안건으로 새로운 사치스런 희생 제물에 관한 법률을 생각해 내서 그것으로 인기를 얻으려 했다. 그 결과 나중에는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반대로 니코마코스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쓰지 않을까 크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발자는 다음과 같이 고발장을 마무리 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절도를 기획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 소송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 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누구도 적이 될 수 없는 매우 대담한 자들이 될 것이다.” 물론 이 판결은 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든 지금까지 말해 온 니코마코스의 사례만 가지고도 아테네에서 법률적 사안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플라톤이 왜 법률편찬자의 양성을 아카데메이아의 주요 교육목표로 삼았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런 사정에 처해 있었던 만큼 민주정 아테네에서는 특정의 시민, 즉 부유층 혹은 부유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요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개인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가지면서, 단단하게 결성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적 폴리스의 이념에 대해서는 결코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을 비난한다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또 그리스인의 본성에 대해서 너무 심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될 것이다. 적어도 이 인간 종족은 야만 상태로부터 벗어나자마자 국가 기구와 공적 생활 외에 한층 더 특별한 생존방식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가정생활 그리고 특정 사상이나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영역을 구축해왔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지배자 계층에 속하는 인간들만을 정치적인 존재로 위상지우는 일에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스파르타 이외의 다른 곳, 특히 아테네 사람들은 반대로 폴리스가 개인들을 고무하고 동시에 개성적인 것의 발전을 아주 강렬하게 촉구하며, 사유재산의 획득과 그에 따라 야기된 사고방식을 모든 방법을 통해 촉진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실로 다양한 종류의 공적 기부제(leitourgia : 부유층이 자비로 일반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아테네의 공동체적 성격을 드러내는 독특한 제도)를 통해 폴리스로부터 주어진 부의 은혜에 적극 보답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무렵까지는 이 공적 기부제는 한편으로는 폴리스에 대한 실제적인 헌신의 문제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씀씀이가 크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야심의 문제였다. 키몬(Kimon)은 자신의 부를 모든 방법을 동원해 모두 내놓았다. 알키비아데스의 아버지인 클레이니아스(Kleinias)는 아르테미시온 해전 당시 자신의 배에 자비를 들여 200명의 병사를 탑승시켜 싸웠다. 그러나 시대가 점점 더 나쁜 방향으로 흐르게 되면서 부는 문자 그대로 먹이감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많은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아테네 부유층 사이에서도 바야흐로 공적 기부제가 부의 수탈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부를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폴리스를 떠날 수는 없었고 게다가 설사 도망간다고 해도 외지에서도 같은 위험, 아니 더 큰 위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적 기부제가 단지 국가의 요구뿐이었다고 하면 고대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특별하게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는 문제였다. 사실 아주 고액 수준의 세금을 제외하면 국가가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공적 기부제 내지 봉사는 트리에라르키아(trierarchia) 뿐이었다.(이것은 시대에 따라 매우 차이가 나는 전투함정(3단노 군선 tri?r?s)의 장비 장착에 관한 의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이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공적 기부제로서는 전시에 비교적 궁핍한 시민들의 무장을 도와준다거나 그들의 딸들의 결혼 비용을 부담한다거나, 매장비용 등을 부담하는 자선 행위 또는 완전히 민중들의 오락을 위해 기부하는 행위 같은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특히 코레기아(choregia : 합창대 비용부담), 즉 연극 합창대 및 제사와 축제를 위한 서정시 합창대의 무용가나 피리 부는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부담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른바 김나시아르키아(gymnasirchia : 체육행사부담)와 그러한 것들 중에서 가장 비용이 드는 종류인 람파다르키아(Lampadarchia : 일종의 경주행사 부담)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경쟁을 수반하는 경기(ag?n)를 위해서도 돈을 내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신전에서 제전이 벌어질 때 사절을 파견하는 비용도 부담하였다. 마지막으로 부족(phyle) 혹은 그것과 관련된 지역(d?mos)의 여러 동년배들을 위한 향응도 떠맡았다. 이 경우 누가 부담할지는 자발성이나 추첨에 의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10개 부족이 그것을 떠맡을 동료 시민을 선출하여 그 사람들이 정해진 순서대로 매년 반복되는 공적 기부제는 물론 가끔 임시로 열리는 봉사활동을 떠맡았던 것이다. 분명 이런 관습을 중지시키는 것은 사람들에게 유리한 계책은 아니었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일부 부유층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이 봉 취급당하는 것을 거절했을 때 자기 신상에 불어 닥칠 증오를 지레 두려워해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니키아스(Nikias)가 시칠리아 원정 계획에 반대했을 때, 그는 결국 찬동자를 얻지 못했고 찬동자 중에는 유력한 사람들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동조할 경우 자신들이 공적 기부제와 3단노 군선의 장착비용을 면하려는 것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들의 신념에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소한 3탈란톤의 자산을 가지는 사람들만이 이것을 부담하게 되어 있었다. 또 자산은 연평균 12퍼센트의 이자를 낳았기 때문에 1탈란톤의 자산이 있으면 어떻게든 생활은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합창대 비용 부담은 부유한 남자 한 명에게 매년 1200 드라크마 정도를 부담지우는 정도여서 대체로 15탈란톤의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로 여겨졌다.

이렇게 해 보면, 이러한 부담은 몇 가지가 크게 중첩되는 일이 없으면 곧바로 재산상의 파탄을 초래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어떤 사람에게 부당한 방식으로 그것을 부담지울 경우 그 사람은 파탄을 면치 못하였다. 이와 함께 이러한 부담을 떠맡는 것은 명예로운 것이라는 전래의 생각 또한 아주 오랜 동안 계속 되었고, 이런 일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 또한 적어도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저 쓸데없는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능력 이상으로 자신의 씀씀이가 좋은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과 같이) 합창대 비용을 부담할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플라톤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부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을 면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유한 친구로부터 그것을 위한 자금을 조달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복하여 합창대 비용 부담을 떠맡은 사람은 상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세발달린 솥(tripodon)을 걸어두기 위해 훌륭한 신전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어떤 시대, 어떤 민족이건 간에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짜고짜로 희생을 지불하게 되는 처사들 중에는 고역스런 일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당사자들이 자기의 사적인 자금으로 이러한 공적 기부제를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 돈은 결국 스스로의 사적인 환락 생활을 위해서 낭비 되어 버렸을 텐데 그것이 대부분 민중 전체의 고상한 예술적 향유를 위해 지출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아테네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명예로운 것이라고. 그러나 강제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일로부터 존엄성을 빼앗아 버렸다. 아테네 국가는 개개의 부유층이나 생업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국가가 그 사람에게 부여한(어쨌든 극히 제약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안전과 교환한다는 명분으로 마음대로 과세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국가는 매우 변덕스럽고 또 탐욕스런 시민들의 수중에 떨어져 버려서, 시민은 이윽고 보다 높은 액수의 세금을 사정없이 요구했고, 그렇게 거둬들인 돈을 민중에게 직접 분배하는 것을 매우 민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 오락을 위한 낭비에 있어서는 어찌 되었든 국가가 선두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에우불로스(Euboulos) 시대에는(대체로 기원전 353년부터 기원전 339년까지) 축제비용이 모든 예산의 주요 항목이 되어, 누군가 이것을 전쟁 목적으로 전용할 것을 제안하는 경우, 그것을 처음 입에 담은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고 위협함으로써 그 항목 자체의 보존이 담보되고 있었다. 아테네에 있어서 조차 이 경우, 대중의 관심사는 이러한 고상한 예술 형식을 즐기는데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일정한 정도 호사를 누리는 것에 있었을 것이다.

“불쌍한 부자들”로 일컬어지고 있는 그들의 재난을 상세하게 알려면, 크리토불로스(Kritobulos)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짓궂은 동정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토불로스가 감내하고 있는 일들을 모두 열거한 후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공적 기부가 충분히 행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만으로도, 아테네의 사람들은 마치 네가 자기들의 재산을 도둑질이라도 한 것인 양 너를 처벌하려 들 거야.” 크세노폰의 「향연」(symposion : 제4권 29절 이하)에 나오는 카르미데스의 말은 오히려 가난해졌기 때문에 자유롭고 행복하게 된 한 남자의 실로 유쾌한 유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전체의 극히 중대한 측면이 법정 변론가들을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재판의 배후에는 모든 재산을 몰수해버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으므로 그러한 재산은 일부는 국가에, 일부는 고발자등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것으로써 그 돈은 이미 일체의 권리와는 관계없이 바람직한 공적 수입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 알키비아데스(Alkibiad?s 기원전 450?-404): 그는 정치·군사적 재능과 준수한 외모를 타고난데다가 페리클레스의 조카로서 젊은 나이에 벼락출세를 한 후, 서방으로의 세력확장을 바라는 민중의 열망에 편승하여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하지만 헤르메스상(像)을 파괴한 용의자로 소환령이 내려지자 아테네를 배반하고 스파르타로 망명한다. 그러나 스파르타 왕비와의 스캔들로 다시 페르시아로 망명한 후 아테네의 과두정파에 빌붙었다가 뜻을 못 이루자, 다시 민주정에 충실한 사모스 해군과 손을 잡고 스파르타군을 격파하여 기원전 408년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아테네로 돌아온다. 정조 없이 야심과 사리에 가득 찼던 그의 삶은 결국 스파르타가 보낸 자객의 손에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 소크라테스와의 각별한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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