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위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Q 선생의 閑談]
[Q 선생의 閑談]
진보의 위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유미의 급진 민주주의론 ? 진보의 위기와 연관하여
글: 이규성(편집위원장, 이화여대 교수)
최근 참신한 석사학위 논문이 숭실대 철학과에서 나왔다. 논문 제목은 『무페와 라클라우의 급진민주주의론』(한유미, 2011, 지도교수 김선욱)이다. 이 논문은 계급의식이 희석되고 다양한 시민운동들이 출현한 상황 속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을 오늘의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신자유주의적 경제국가가 주는 고통)과 연관하여 논하고 있다. 이 급진 민주주의론은 계급분석에 의거한 근대적 계급동맹론으로는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창조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반영한다.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 일상세계를 장악하고 있으며, 초특급 부자는 뒤집어진 마르크스주의자처럼 계급의식이 분명한데 서민들의 계급의식은 희석되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국가나 소비문화에서 찾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만인의 평등한 자유를 부정하는 보수여당의 자유 민주주의가 인격의 평등과 자율지배라는 민주주의(급진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기본 조건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한유미의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한유미는 특정 이론가의 학설을 소개하는 태도를 넘어 민주주의 정신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하여 현실을 극복하는 방향에서 무폐와 라클라우의 제안을 시험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뒤흔듦’, ‘전복’ 등과 같은 개념들을 자주 구사하는 것에서도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한유미의 급진 민주주의는 우리 진보정치의 위기와 연관하여 다시 음미해 볼 만한 개념들을 제시하고 있다. 급진 민주주의가 사라진다는 것은 보수당의 정치?문화적 패권(헤게모니)이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한국에서 그 패권은 보수당의 저급한 교양에서 나오는 정치공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자기 이익을 민생으로 포장하고 반대파를 내몰기 위해 사상검증을 요구하는 광기의 종교재판, 불화와 궤변에 능한 정치인이 애국을 요청하는 것, 이에 동조하여 반종북을 고백하는 인사들의 형식적 민주주의론 등은 결국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석으로 내몰 것이다. 만일 민주주의 근본 공리(公理)를 부인하는 이 모든 행태들이 노회한 독재의 후예들의 패권 장악으로 귀결된다면, 해방 공간에서의 한국 진보정치의 실패를 다른 형태로 반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이러한 상황에서 급진 민주주의는 당연한 관심사가 되며, 이 관심이 어떻게 정치?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성해나가는 실천으로 될 것인가라는 물음도 나오게 된다.
급진 민주주의론에 자극받은 한유미는 민주주의라는 기호(기표)가 정치적 편의에 따라 규정되어 왔듯 ‘텅 비어 있는 것’으로 보면서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임을 전제한다. 자유와 평등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즉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이념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관철되어야 한다. 그것은 근대 마르크스-레닌주의 ‘계급동맹론’이 자유를 자유주의적 개념으로만 치부해오던 관습을 극복하는 동시에 평등을 제거하려는 자유주의의 폐습을 넘어서는 방향성을 갖는다. 자유와 평등을 함께 추구하는 급진 민주주의는 기존의 좌우 정치사상의 관행을 뒤흔들어 이른바 초심을 회복하게 하는 한편, 신자유주의의 만행의 산물인 비정규화된 인생(비정규직 근로자, 유랑 이민자, 실업, 여성 노동자, 어린이 노동자 등)을 중심으로 반자본, 반국가적인 ‘헤게모니’를 ‘구성’하려 한다.
헤게모니는 그람시로부터 온 개념인데, 구식 계급동맹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에 의해 정당화되지 못하는 모든 피억압자, 예외자, 이른바 타자를 정치적으로 구성하여, 국가와 자본의 영역인 내부와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사회에 이러한 타자가 있기에 정치가 있는 것이며, 이정치는 헤게모니 구성의 활동이기에 타자는 ‘구성적 타자’가 된다. 이러한 헤게모니 구성 활동이 ‘정치의 사회화’이다. 이것은 국가 내부로부터 배제된 외부자를 정치화하는 장외 활동이므로 여러 형태의 차이들을 갖는 시민운동과 그 밖의 반체제적 정치활동을 포괄한다. 정치의 사회화는 외부를 정치화하여 내부를 뒤흔들고 그에 침투하여 보편적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효력을 갖는다. 그것은 내부의 특권을 전복하려 한다. 이러한 활동으로서의 민주주의는《정치의 사회화》 이외에도 부차적으로 ‘정치의 국가화’도 필요로 한다. 《정치의 국가화》는 의회와 같은 기구에 들어가 제도내적 활동을 통해 민주화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정치의 국가화는 정치의 사회화가 지역성에 갇히는 위험성이 있는 것처럼, 진보인사들이 국가권력에 사로잡히거나 지나치게 우경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갖는다. 그러나 정치의 국가화가 급진 민주주의 정신을 상실하지 않는 한 민주적 절차를 통해 국가를 변형하는 것에 기여할 수 있다.
한유미가 주장하는 급진 민주주의 전략은 ‘두 개의 공간’ 즉 ‘국민국가 안과 밖에서’ 쟁투하여, 근대적 확실성이 사라진 사회의 ‘불확실성(결정불가능성)’ 속에서, 배제된 외부자와 내부자의 경계를 타파하는 부단한 과정적 민주화의 쟁투에 진입하는 것이다. 역사의 미래를 단시일에 결정하는 결정적 계급과 이 계급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확실성은 사라졌다. 사실 레닌도 언급했듯 자본주의와 의회제가 정착된 사회는 혁명을 말하기 어려운 또 다른 상황을 보여 준다. 성질 급한 사람은 결정적 미래가 도래하지 않는 과정적 급진론에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봉건제의 붕괴와 세계대전이 혁명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시대와는 달리 ‘극소전자혁명’과 ‘생명공학 산업’이 자본증식의 논리에 잡혀 있고, 계급문제로만 환원되지 않는 여러 사회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급진 민주주의론은 주목할 만한 대안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의 투쟁이 진보적이지만 않고’, 각종 차이들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 단체들이 있는 한, 노동과 차이의 정치학을 연결하여 반민주세력에 적대하는 헤게모니를 구성하려는 급진 정치학은 중요한 대안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도 정치의 사회화와 정치의 국가화에 이미 접근하고 있다. 한유미의 급진 민주주의론처럼 ‘경계의 무력화’는 이미 진보진영의 전략이 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제도권에 진입한다는 정치의 국가화는 한유미의 지적처럼 국가권력에 오염되어 방향을 상실할 수도 있다. 권세가들의 비리는 법을 멋대로 휘두르는 망나니들에 맡겨지고, 동강난 전함에 대한 엄밀한 화학적 조사 요구를 종북으로 위협하며, 비정규 노동자의 절규는 그 원인 제공자나 판사에게 맡겨지고, 대학생들의 생존 위기와 교육의 파탄은 교육 산업가들에 맡겨지며, 여성노동자들의 비참이 국가 여성주의에 맡겨져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는 민주적 가치에 입각한 헤게모니 구성에 민주주의가 실패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정치의 사회화가 불평등한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면, 민주진영이 이 핵심을 버리고 정치의 국가화에 몰입하여 내부 분란으로 치닫는 것은 국가화가 갖는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그 함정에 빠진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급진 민주주의론은 오늘의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하는 계기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 보건대 진보적 활동은 온갖 어려움에 봉착하고 허약한 인간성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현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되어 양쪽이 모두 민주적 가치와 덕을 훼손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은 자유와 평등을 모순관계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양자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유 없는 평등이 평등을 부정하게 되어 인간의 평등이 아니게 되며, 평등 없는 자유가 자유를 부정하는 부자유로 귀결된다는 역설을 직시한다면 한유미의 급진 민주주의론은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의 사회화와 평등한 연대를 통한 헤게모니 구성이 근본적으로 폐쇄성을 극복하는 개방성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이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인성론적이고 윤리적인 토대가 무엇인지가 더 분명해지면 급진 민주주의론은 그 철학적 기초를 획득하여 오늘의 난국을 헤어날 수 있는 가치관을 수립하는 것이 될 것이다. 계급사회가 있고, 이를 극복하고 자신을 실현하려는 인간성이 있는 한 정치는 존속할 것이다.
미 공화당을 모방하여 빨간 옷을 뒤집어 쓴 보수당은 타도의 대상이었던 독재의 망령을 불러와 다시 응용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민생이라는 반민주적 구호로 그들이 통합하려는 세상은 둘로 분열될 것이다. 특권과 민주로 갈라서게 되는 것은 인간위에 인간 없고 인간아래 인간 없다는 초등학생도 아는 평등 원리 때문이다. 급진 민주주의는 이 인간 선언위에서 다양한 운동들이 연대했던 3 ? 1 운동의 원리를 새로이 계승하여 시민적 헤게모니를 확장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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