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 다시 쓴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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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④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있는 것’보다 ‘있을 것’이, ‘없는 것’보다 ‘없을 것’이 더 앞선다. 따라서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

 
다시 한 번 제 신상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꽤 큰 변화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삶의 변화가 제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말투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글에 맞지 않는 사사로운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던 국립 대학 대학원의 교환 교수 노릇을 끝으로 저는 강단을 떠났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던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해안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동네 산자락에 묵어 가는 밭을 사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한 해 반이 흘렀습니다. 늦깎이 농사꾼으로 처음부터 농사일을 다시 배우다 보니, 해뜨면 일어나 들에 나가고 해지면 개울물에서 손을 씻고 들어와 저녁을 먹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자는 날의 연속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이제 돌이켜보면 내가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애써 그 때 상황을 되살려 보려 합니다만 제 단순한 삶이 기억까지도 단순화시켜 버렸기 때문에 도대체 옛 기억의 복원이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실제 상황과 많이 다르더라도 그 동안 정신이 흐려져 꿈과 현실, 실제와 가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엉클어진 실타래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탓이라 여기고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학생들과 이야기하면서 제가 하는 말에 두서가 없다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칠판에 다음과 같은 몇 개의 메마른 문장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본디 뜻은 제 생각을 정리하고 학생들에게 제 머릿속에서 뒤엉켜 있는 검증되지 않은 이론들을 명확한 형태로 전달하려는 데 있었습니다만 그 작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도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제 제가 그 때 적어 내려갔던 문장을 다시 적어 보지요.

1. 있었던 것이 있다.
2. 있었던 것이 없다.
3. 없었던 것이 있다.
4. 없었던 것이 없다.

“자, 보다시피 여기 적힌 문장들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과거와 현재가 관계 맺는 네 가지 방식을 문장의 형태로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진술을 존재 판단이라고도 합니다. 이 판단들은 모두 사실 판단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문장들 가운데 1과 4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있음의, 또 없음의 지속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2와 3은 변화를 드러냅니다. 2와 3에서 우리는 ‘있음에서 없음으로 바뀜’(있었던 것이 없다.)과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뀜’을 상식의 기준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러한 변화의 구체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있었던 것이 없다고 할 때 이 변화는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결핍을 나타낼 수도 있고, 군더더기가 없어졌다는 뜻에서 평형을 나타낼 수도 있고, 이러한 관계의 변화가 낳을 수 있는 여러 차원(현실, 심리, 판단……)의 달라진 사태를 확인할 수 있겠지요. 없었던 것이 있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1, 2, 3, 4의 문장은 모두 객관화한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 그래서 어떻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러한 지속이나 변화가 바람직하다, 바람직하지 않다 들에 대한 판단의 근거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속이나 변화가 미래의 영역, 곧 있을 것과 없을 것과 관계를 맺으면 사실 판단은 가치 판단으로 바뀌는 계기를 맞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학생 하나가 제 말을 가로막더군요.

“선생님, 있었던 것이 없다나 없었던 것이 있다는 판단이 그 안에 어떤 가치 판단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요. 실제로 오늘 저는 있었던 것이 없어서 기분이 몹시 언짢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강의 발표 요지를 분명히 책가방 안에 넣고 왔는데 찾아보니 없더라고요. ‘기분이 안 좋다.’ 이것도 가치 판단이 아닙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없었던 것이 있다는 판단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지요. 이를테면 굶주린 사람에게 어떤 계기로 밥이 생겼다 할 때 그 사람에게 없었던 것이 있게 된 계기는 결핍의 충족이라는 점에서 ‘좋다’는 판단을 내리게 하겠지요. 반대로 갑자기 없었던 위장 장애가 생겨 배가 몹시 아프다면 ‘나쁘다’는 판단을 내릴 겁니다. 학교 교문이 자유롭게 열려 있다가 어느 날 전투 경찰들이 교문을 닫아걸고 기관총을 걸어 놓았다면 두렵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겠고요.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가치 판단은 이제부터 말하려는 미래의 영역, 곧 있을 것과 없을 것의 관계 속에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과거의 존재를 있었던 것으로, 현재의 존재를 있는 것으로, 미래의 존재를 있을 것으로 나타냅니다. 또 과거의 비존재를 없었던 것으로, 현재의 비존재를 없는 것으로, 미래의 비존재를 없을 것으로 나타냅니다.

그런데 있는 것, 없는 것, 있었던 것, 없었던 것과는 달리 있을 것과 없을 것이라는 말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단순한 예측이나 추측이고, 다른 하나는 마땅히 그러해야 함, 곧 당위〔sollen〕입니다.

‘여기 있는 칠판은 내일도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여기 없는 분필은 내일도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또는 ‘있을 것으로 여긴 모래무지는 없고, 없을 것으로 여긴 붕어는 많이 있다.’ 같은 말에서 있을 것과 없을 것은 추측이나 단순한 예상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요,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는 세상은 나쁜 세상이다.’와 같은 말에서 있을 것과 없을 것은 단순한 예측이나 추측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여기에서 있을 것이라는 말에는 있어야 할 것이라는 뜻이, 또 없을 것이라는 말에는 없어야 할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있을 것, 없을 것이라는 말에 이런 이중의 뜻이 담겨 있을까요?

파르메니데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서양 존재론의 전통에 따르면 미래는 ‘아직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네 개의 문장을 보기로 들면서 ‘있었던 것이 있다.’나 ‘없었던 것이 없다.’는 있음의 지속 또는 없음의 지속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 없다.’나 ‘없었던 것이 있다.’는 말은 있음과 없음의 관계의 변화를 나타낸다고 한 적이 있지요?
 

보티첼리의 ‘아우구스티누스’. [중앙포토] http://p.joongang.co.kr/kr/news.do?_method=webcontent&newsid=20110624N0026#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원인 또는 이런저런 원인과 조건에서 이런저런 지속이나 변화가 결과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서 필연의 법칙을 유추해 내는 거지요. 그런데 그 필연의 법칙은 엄밀히 말하자면 의식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속의 측면에서는 필연의 법칙을 끌어 낼 수 있을지 모르나 변화의 측면에서는 필연의 법칙이 안 나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있었던 것이 없게 되거나, 없었던 것이 있게 되는 이 극단의 변화에 어떤 필연성이 있습니까? 필연성이 없어서 필연의 법칙을 끌어 낼 수 없으니까 우리의 의식은 자꾸 ‘없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바뀌거나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날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모든 관계는 있는 것과 있는 것의 상관관계이고, 이 관계가 어느 측면에서는 지속으로, 어느 측면에서는 변화로 드러나는 것뿐이다.’ 하는 식으로 외곬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듯이 있는 것은 하나로 있지 여럿으로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있는 것과 있는 것의 상관관계라는 말은 일상의 차원에서는 편의에 따라 쓰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어불성설이요 모순입니다. 마치 야바위꾼이 품속에 무엇인가 감추어 놓고 모르는 사람을 속이려 들듯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있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는 없는 것이 있어서 이 있는 것과 저 있는 것을 갈라놓는데,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논리에 모순이 생기므로 없는 것은 없다고 하고 논의를 진행시키자.’고 강변을 하는 것입니다.

이 야바위 노름이 서양의 철학과 과학에서 어찌나 오랫동안 사람들을 세뇌시켜 왔던지, 지금 대부분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거나 이 엉터리없는 일면적인 의식의 법칙을 자연의 불변하는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의 표정에 불만의 빛이 역력했습니다. 손을 드는 많은 학생 가운데 한 학생에게 이야기하라고 했더니 이렇게 반박을 하더군요.

“지나친 매도인 것 같은데요. 만일에 선생님 말씀처럼 있는 것이 하나로 있고, 있는 것과 있는 것 사이의 관계 법칙이 야바위 노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동안 물질의 최소 단위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밝혀진 물질세계의 여러 법칙들, 또 생명체의 최소 단위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파생된 여러 과학 기술의 축적과 그것이 인류 사회에 기여한 공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요? 도대체 시공 연속체인 이 우주 안에서 단위인 여러 하나를 찾으려는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철학이고 과학이고 다 사상누각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의 틀도 다 무너지지나 않을까요?”

다른 학생이 일어나서 또 이렇게 말하더군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이 우주 안에서 양〔quantity〕의 최소 단위나 질〔quality〕의 최종 단위를 찾으려는 시도는 모두 부질없는 노력인 것같이 여겨지는데요, 그리고 그 최소 단위나 최종 단위가 확정되지 않으면 무엇을 무엇이라고 규정하거나 무엇이 얼마라고 측정하는 일이 불가능한데요. 질과 양, 척도 뭐 이런 것에 대한 규정이 없이 어떻게 어떤 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나요?”

“잠깐, 내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성급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요. 그러나 그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미 꺼낸 말이니까 먼저 사실 판단에서 가치 판단으로 전환하는 데 아직 없는 것으로 규정된 미래가 어떤 구실을 하느냐에 대한 설명을 마저 하기로 합시다.

파르메니데스의 규정을 받아들이면 있을 것도 아직 없는 것이요, 없을 것도 아직 없는 것입니다. 있는 것(또는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현재와 관계에서 아직 없는 것은 단순히 있는 것(없는 것)의 지속으로 나타낼 수도 있고 이 경우에는 지금 있는 것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낳겠지요. 또는 지금 없는 것이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낳을 겁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바뀌는 변화(또는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변화)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있음과 없음을 저마다 독립된 항으로 놓고 실체화시키는 관점에서 보면 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은 이러한 변화를 모순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로 못 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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