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3)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1.
마침내 다산초당 입구에 이르렀다. 자거라투스트라는 90년대 초에 학생들과 함께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돈이 없어 감히 관광버스를 빌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시골버스를 타고 포장도 안 된 시골길을 툴툴거리며 돌아다녔다. 학생들은 ‘철학기행’이라는 티셔츠를 만들어 입고 등 뒤에다가는 “실학사상을 찾아서”라는 구호를 적었다. 그때 버스를 기다리던 동네 사람들이 참 신기하다는 듯이 아니면 먹고 사는 게 빠듯한데 저런 놈들도 다 있네 하는 식으로 바라보던 것이 기억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잠시 그때의 추억에 빠졌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학생들과 막걸리를 먹던 생각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학생들은 정말 노래를 많이 불렀다. 어디에서나, 어느 틈에서나 시간만 나면 학생들은 노래를 불렀다. 무슨 바위 덩어리나 돌멩이처럼 살자 라는 노래 말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지금도 의문이다. 왜 그때 학생들은 그렇게 노래를 불렀을까? 2000년대 들어 어느 덧 운동권 학생들이라는 개념이 사라질 무렵부터 이상하게도 학생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노래를 불렀지만 항상 노래방에서 다른 사람 앞에 나서서 그러나 혼자서 불렀을 뿐이지 길거리에서 합창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다산초당 입구에 내려 산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다산초당이 나왔다고 기억했다. 그래서 선배님에게 점심 먹기 전에 먼저 잠시 둘러보고 가자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산초당 입구에서 걸어 올라가는데 아무리 올라가도 다산초당은 보이지 않는다. 다산초당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 산을 4분의 3정도 올라가서야 나타났다. 그때는 금방 올라갔는데…그게 벌써 이십년 전 자거라투스트라가 아직 젊었을 때의 일이니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씁쓸해 한다.
다산은 왜 이곳에 초당을 지었을까? 자거라투스트라는 그런 의문을 풀어보려고 다산초당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유배되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강진읍 내에 있었다 하니까 굳이 이 외진 구석, 이름 없는 산 중턱까지 와야 했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물론 산에서 흐르는 물이 찻물로 좋기도 하겠지만 어디 좋은 물이 여기뿐이었을까? 다산초당을 오른 쪽으로 조금 돌아가면, 다산이 아마도 강진만의 푸른 들판과 은빛 갯벌을 동시에 바라보았을 장소가 있어 지금 거기에 누각을 하나 만들어 놓았으니 다산은 강진만을 보기 위해 여기 머물렀을까? 아니면 다산에게 다도를 가르쳤다는 초의선사가 다산초당이 있는 산 오른 쪽 중턱에 있는 작은 절(백련사)의 주지로 잠시 있었다니 서로 교유하기 위해 여기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산의 부인의 친정이 해남(해남윤씨)에 있었으니 그쪽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땅이 거기 있어서 그리 갔지 않았을까?
자거라투스트라가 그런 물음을 선배님에게 묻자, 선배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거야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유흥준 교수가 고민할 문제라는 것이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고민하지 말라 했는데, 남이 고민해 줄 문제를 우리 철학자가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거라투스트라는 언젠가 가까이 지내던 어느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분의 주장은 굳이 스스로 공부할 필요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과 술친구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가 알면 나도 아는 것이니 말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국민관광지’ 다산 초당을 휑하니 둘러보고 시끄러움을 피해 다산이 강진만을 바라보았던 곳에 가서 강진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유배라는 형벌이 제법 괜찮은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오늘에 되살리면 어떨까? 그래서 주로 학자나 예술가들에게 특별 형으로 부과하면, 좋지 않을까? 물론 국가가 밥과 잠자리는 제공해야 하겠지. 그러면 전국의 많은 시간강사들이 유배 형을 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시대의 금기에 도전할 것이니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겠는가? 은빛으로 빛나는 강진만의 갯벌을 바라보다가 자거라투스트라는 잠시 몽롱한 오수에 빠졌다.
다산 초당에서 본 강진만의 모습, 비가 오려 흐려 은빛으로 빛나는 강진만의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2
다산 초당을 둘러본지 두 시간째 어느새 오후 세시나 되었다. 이제 점심 겸 저녁을 먹을 차례인데, 기대해왔던 꼬막은 어디서 파는지, 바닷가를 차로 실실 돌아도 눈에 띠지 않았다. 그럼 강진 시내에 들어가면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무작정 강진시내로 들어갔다. 그런데 갯벌이 있다고 다 꼬막이 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강진 시내에서도 꼬막집을 발견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꽃게탕을 한다는 집에 들어 배를 채웠다.
그런데 강진 시내를 돌아다니는 중 시인 김영랑이 살았던 집이라는 표시가 있어 밥을 먹고 바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새로운 발견을 한다는데, 김영랑이 여기 살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영랑의 집을 지나칠 수는 없지 않는가?
찾아가보니 영랑의 집도 국민관광지가 된 것이 틀림없다. 다 똑같이 만들어진 한옥이 이제 너무 식상하다. 국민관광지의 한 가지 특징이 있는 것 같다. 한옥에 두 종류가 있는데, 초가3간이 있고 기와3간이 있다. 약간 엘리트적인 느낌이 드는 인물은 기와 3칸으로 반면 약간 비엘리트적인 느낌이 드는 인물은 초가 3간이 배정된다. 중요도에 따라서 3칸 4칸 5간정도 크기가 조절된다. 나철 선생은 초가3간이다. 반면 영랑은 초가 5간이다. 실제 시인이었던 김영랑의 집이 5간이나 되는 너른 집(현대식으로는 약 40평정도)이었을까 의심스럽다. 이것을 통해 국민들이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영랑의 집구석에 감나무가 있고 그 밑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실제 영랑의 시대부터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조경임에는 틀림없다. 아직 가을이 아니라 유감스럽게 장독대에 떨어지는 단풍잎을 볼 수 없었다. 세상에는 친화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화학적 친화성과 같이 이미지의 친화성도 있지 않을까? 얼음에는 팥을 쳐야지 콩가루를 칠 수야 없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감나무 잎이 단풍이 된다면, 그게 마루에 떨어질 수도 없고, 부엌에 떨어질 수도 없으니, 오직 장독대 외에는 다른 곳이 없지 않을까? 이런 장독대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누이라는 이미지로 이어지지 않을까? 영랑이 “오매 단풍들겠네” 라고 탄식할 때, 아마 그의 누이가 그 장독대를 닦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기에 저 산의 골짜기에서 시작한 단풍의 붉은 빛(골불)이 감나무를 거쳐서 마침내 장독대에서 일하던 누이의 발그랗게 상기된 얼굴에까지 번졌을 것이다.
모란과 감나무, 장독대가 어우러진 영랑의 생가의 마당
영랑의 집 앞에 비석처럼 생긴 바위에 그의 대표적인 시 ‘모란이 피기까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마당에는 모란이 심어져 있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이 시를 민족주의적인 시로 해석하는 것을 기억했다. 차라리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설명했더라면 더 아름다웠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장미과에 속하는 모든 꽃들은 꽃이 떨어질 때 마치 목이 벤 듯 통째로 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장미도 무궁화도 그리고 동백도 꽃이 떨어질 때는 그처럼 목이 벤 듯이 떨어져 후드득 떨어진 꽃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처참하여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다. 그 점을 기억하면 모란이 피기까지에서 영랑이 이렇게 읊었던 이미지가 눈에 떠오를 것이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인터넷으로 확인해 본 해학 이기의 생가, 국민관광양식 초가 4간이다. 나철 선생 생가-초가 3칸-보다 한 등급 높다.
3.
식사를 하고, 영랑의 집까지 구경하니 벌써 다섯 시이다.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다. 서울까지 가려면 여기서 대 여섯 시간은 가야 하니까 말이다. 드디어 자거라투스트라는 차를 돌려 서울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차 안에서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에게 물었다. 오늘 아침 해학 이기의 절명시를 선배님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속도로 운전은 단조롭고 지루하기 때문에 감기는 눈을 깨워야 하기 때문이다.
형, 해학 이기의 고향은 어디에요.
글쎄 전라도 김제 어디라고 듣기는 했는데, 정확히는 몰라.
그러면 가는 길인데, 김제에 들렀다 갈까요? 근데 김제 어딘지 알아요?
몰라. 또 거기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시간이 되나?
글쎄요. 빨리 가면 해 지기 전에 김제까지 가지 않을까요? 형, 나철 선생과 해학 이기는 서로 친했어요?
매천 황현이나 홍암 나철은 모두 왕석보의 제자이고 낮은 벼슬이나마 중앙의 무대에 출사를 했으니 서로 가까웠을 것으로 짐작돼. 그런데 해학 이기는 김제에서 공부하다가 28세 되는 때 과거 시험을 포기하지. 게다가 상처도 하고 부친도 돌아가시고, 집안에 먹을 것도 없어 전국을 유리걸식하거든. 물론 선비니까 이 집 저 집 사랑방에 떠돌았겠지. 이때 그는 기왕의 유교와 선비라는 제도적인 틀을 벗어던지게 되지.
그래서요?
그때 대구에도 갔다가 천주교 신부하고 논쟁하면서 ?천주6변?이라는 글을 작성하기도 했지. 그때가 44세 즉 1891년이야. 그런 가운데 나름대로 개혁사상을 정립하는데, 1892년 45세 때 순창에 머무르면서 ?질제고?라는 책을 쓰지. 질제란 그의 호야. 그 다음 해 46세 1893년에 황현을 만나. 황현이 그를 구례로 초청한 거지. 아마 그때 왕석보의 제자들 틈에 끼어 있었으니, 나철도 만나지 않았을까 짐작되는데, 그때만 해도 세상에 절망해서 은둔해 버릴 요량으로 호를 남악거사라고 바꾸어 버렸어. 남악이란 곧 지리산이 아닐까 해.
형, 그의 개혁사상의 핵심은 무엇이에요?
그게 참 재미있어. 이어지는 해 1894년에 알다시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잖아. 이기는 이 혁명 앞에서 은둔해 버리려던 결심을 깨고 거꾸로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가담해서 처음 단순히 부패청산을 목표로 한 이 혁명을 그야말로 진정한 제도적인 혁명으로 바꾸기를 기도했지. 그래서 전주에 입성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을 만나러 전주에 간 거야. 그래서 자기의 개혁사상을 토로했지. 그 핵심은 바로 토지개혁이야. 토지를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주자는 주장이야. 그 방식은 공전제라고 하는데, 요새 말로 한다면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주장이지.
와 그때 그런 주장을 했단 말이에요? 대단한데…
그의 토지개혁론은 그가 실학 사상가 정약용의 여전제나 유형원의 한전론 등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기 나름대로 제시한 이론이지. 실제로 그 후 60년 뒤에 이승만 시대 토지개혁이 유상몰수 유상분배였으니,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섰던 가를 짐작하지. 그는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을 몰랐지만 토지개혁이 부르주아 혁명의 핵심이라면 그가 바로 부르주아 혁명가이지.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힘으로 그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하려 했던 거지.
어마어마한데요. 소위 갑신정변도 꿈꾸지 못했던 혁명이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해학 이기를 다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전봉준이 만약 또 다른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김개남이 동의한다면 자기는 이기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김개남을 만나러 남원에 가는데, 이상하게도 더욱 혁명적이라고 알려진 김개남이 이기를 만나주지도 않고 체포하려 하지. 그래서 그는 간신히 탈출해서 도망하고 동학농민혁명 운동에 대해 실망하게 되었어.
김개남이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에요?
그건 몰라. 연구를 좀 더 해야 하는데… 하여튼 그러고 나서 동학혁명 실패 후 일본군의 강압에 의한 정부 개혁에서 무언가 기대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쳐보려 했지만, 한계를 깨닫고 3년 후 1898년 구례로 다시 내려와. 이때 그는 다시 황현 등과 어울리지. 1902년에는 ?급무8제의?라는 글을 써서 요긴한 개혁의 핵심을 고종에 건의하지만 동시에 시를 통해 고종의 무능과 대신의 비행을 비판했다가 수난을 당하지. 이때가 말하자면 재야 비판가로서의 활동이지.
그래서요?
그는 개혁운동에 점차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거든. 1904년2월 일제가 약간의 차관을 대가로 해서 항무지 개간권을 달라고 했어. 그때 황무지가 국토의 4분의 1정도니 엄청난 국토가 일제에 넘겨지는 거지. 이때 그가 나철과 더불어 보안회를 조직해서 반대하면서 일대 군중운동을 일으켰어. 그러자 정부는 이 보안회를 강제해산시키기도 했는데 어떻든 군중운동의 힘으로 일제의 간계를 막아냈어. 이 보안회가 나중에 대한자강회, 그리고 신민회의 핵심세력이 되고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니까 그의 역할이 짐작되지?
사상적으로 그는 입각점이 어디에 있어요? 여전히 유학자였나요? 실학 아니면 양명학?
그는 유학에서 잠시 묵자 쪽을 기웃거렸다가, 바로 양계초의 신민사상 쪽으로 넘어간 것 같아. 그 점에서 당시 개혁주의자들의 대세를 따른 셈이지.
4.
형 그러면 대종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어요?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데, 이 보안회 이후부터 그는 나철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활동하기 시작해. 1905년 을사조약 전에는 일본에 건너가 언론을 통해 비판운동을 하기도 하지만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1907년에는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조직 즉 자신회를 만들었어. 하지만 거사가 실패해서 주모자로서 그는 7년 형을 받았지만 고종이 감동받았던지 7개월 만에 풀려났어.
그런데요.
1908년 그는 ?일부벽파론?을 발표했지. 도끼를 들고 제도개혁을 주장한 거야. 그 도끼는 물론 내가 잘못이면 내 목을 도끼로 베라는 그런 의미이지.
정말 단호하군요.
그래 단호한 개혁사상가로서 그는 나철 선생 이상이야. 그러다가 1909년 나철과 더불어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창립하지. 그런데 1910년 나철 선생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자 그는 단학회를 발기하고 그 경전이 되는 ?진교 태백경?을 완성해. 그러고 나서 1909년 7월 1일 10 여 일간의 폐문절식으로 자진하고 말았다 해.
그게 좀 이상하네요. 왜 태백경을 지은 거죠?
글쎄 그건 좀 이상한데, 사상적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하거든. 최근 『환단고기』라는 책이 있잖아. 그건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에 가까운 것인데, 환인, 환웅, 단군의 시대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주장이지. 그 책이 최근에 발간되는 데는 복잡한 연원이 있는데 결국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책의 주요 내용은 해학 이기가 지었던 것으로 보여. 그렇게 본다면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화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면 이기는 단군을 역사적 영웅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해. 둘 다 민족애를 고취시키려는 시도였지만 종교와 역사라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 사상가 해학 이기로서는 종교에 부담을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야.
이렇게 선배님의 강의를 듣는 동안 어둠은 깊어갔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 도저히 김제에서 해학 이기 선생의 생가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바로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10시, 피곤이 온 몸을 급습한다. 종교와 역사, 머릿속에는 이런 개념들이 마치 헬리콥터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소리치면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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