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종교답고 과학이 과학다운 세상을 그리며 8-③ [色 다른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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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현 (상지대 강사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우리 집 종교의 역사는 좀 화려한 편이다. 아버지는 결혼 전에 한동안 남묘호랑게교(SGI)에 심취하셨고, 어머니도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흔치 않은 종교인이셨단다. 그런 두 분이 만나 결혼을 하셨고 그리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종교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를 얻으셨다. 얼마 전까지도 이모 한 분의 종교는 대순진리교였고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작은아버지의 가족들은 원불교도시다. 다양한 종교인을 친인척으로 두었던 과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포부도 당당했던 철학과 신입생 시절에 내 관심은 온통 ‘종교철학’에 있었다.

 

종교와 과학, 그 진부한(?) 이야기

아직도 서점에 가보면 ‘종교와 과학’에 관한 신간들이 종종 눈에 띈다. 대개 종교와 과학을 대립적 구도로 나누고,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 승리를 안겨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 대부분이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진화론’ 연구도 상당히 ‘진화’했다. 이에 응전하기 위해 종교도 ‘창조론’에서 ‘지적 설계론’ 등의 대항마를 만들어 전쟁을 치렀지만 대부분의 승리는 과학의 몫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과학적 성향은 신중하고 잠정적이고 점진적이다. 자기가 획득한 최고의 지식조차도 전적으로 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이론은 머지않아 수정되어야 하며, 이 필연적인 수정 과정에는 연구와 토론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219p.)

‘종교’와 ‘과학’은 사실 서구 사회를 이룬 두 가지 핵심 축이라 할 수 있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헤브라이즘’은 신 중심적이고 초월적인 기독교 사상을 말하고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 기원을 둔 인간 중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를 일컫는다. 러셀도 이런 관점에 동의하고 있다. <종교와 과학>에서 그는 ‘종교’를 기독교에 한정하고 있으며 ‘과학’을 합리적 토론과 자유로운 연구를 통해 언제든 수정 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요컨대, 종교와 헤브라이즘, 과학과 헬레니즘은 치환이 가능한 것이다.

길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중국인과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일본인이 대화의 두 주인공이다. 만약 이들이 특정한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하고 있노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쉽게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의미 있는 논쟁이 오고가기 위해서는 먼저 말이 통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의 논쟁이 진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삶은 늘 ‘판단’의 연속이다. “지난 주 ‘나는 가수다’의 1위는 박정현이야.”라는 식의 판단은 ‘다시 보기’를 통해 참이냐 거짓이냐를 가려낼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이것을 ‘사실판단’이라고 한다. 반면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예쁜 여배우는 송혜교야.”라는 판단은 그야말로 자기 주관적 호불호(好不好)에 의해 내려지는 판단으로 우리는 이것을 ‘가치판단’이라고 한다.

‘가치’의 문제는 과학의 영역을 넘어 전적으로 지식의 영역 밖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이것 혹은 저것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 개인적인 감정에 상관없이 언제나 참인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204p.)

러셀의 주장대로 ‘가치’의 영역은 과학이 추구하는 ‘사실’의 영역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앞서 종교와 과학의 논쟁을 진부하다고 혹평한 까닭은 두 주장이 실은 전혀 다른 영역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하려 애쓰는 모습이 마치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으면서 합의점을 찾으려는 우격다짐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논쟁이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주장을 말이나 글로 펼치면서 다투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논쟁의 당사자는 상대의 합리적 이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래야만 ‘논쟁’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논쟁’은 합리적이어야 하며 러셀의 표현처럼 ‘과학적 성향’이 필요한 영역이다. 종교가 늘 과학과의 논쟁에서 지는 까닭은 싸움의 규칙 자체가 과학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 무장한 근대 이후의 사람들에게 ‘가치판단’의 문제를 설득하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무모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러셀이 이 책을 쓴 진짜 이유

서양 근대의 합리주의는 데카르트에서 비롯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명제로 유명한 그는 『방법서설』에서 “학문에서 어떤 확고부동한 것을 이룩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견해를 벗어나 아주 기초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껏 믿어왔던 경험적 사실들을 모두 부정하고 명석하고 판명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라는 것이다.

과학적인 방법을 제외하고는 진리에 도달하는 어떤 다른 방법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감정의 영역에서 종교의 근원을 이루는 경험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경험은 잘못된 믿음과 결함하여 선뿐만 아니라 많은 악을 낳았다. 그런 결함에서 풀려난다면, 바라건대 오직 선만이 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166p)

러셀은 종교와 과학의 논쟁이 단지 무의미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그가 데카르트의 전통 위에 서 있는 인물이었고 그로 인하여 <종교와 과학>의 대부분에서 과학의 손을 들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종교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만 종교가 잘못된 믿음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많은 악에 대한 우려가 있었을 뿐.

러셀은 초기에는 수학이나 논리학, 과학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와 관련한 많은 책들을 집필했다. 또한 철학사가로서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고 있는 <서양철학사>를 남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윤리학이나 정치?사회?교육 등의 분야에도 전문서적을 펴냈으며 급기야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셀이 오늘날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것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거나 학문에 대한 욕심과 노력이 남달랐음에 있지 않다. 그의 삶이 던지는 묵직한 메아리는 그가 단지 배우고 익히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실천으로 옮기려한 지식인이었다는 것에 있다.

<종교와 과학>이 의미 있는 까닭은 러셀이 단순히 종교와 과학의 다툼을 나열하고 과학의 승리를 언명하고자 함에 목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에는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가 담겨있다. 핵무장을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던 평화주의자였고 옳지 못한 국가권력에 맞서 ‘불복종운동’을 주장하기도 했던 그의 실천적 행위는 그 내면에 자리했던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필연적이고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이다.

오늘날의 위협은 정부로부터의 위협이다. 혼돈과 무질서라는 현대적 위험 요소 때문에, 오늘날 정부는 이전에는 교회의 권위에 부여됐던 신성불가침의 특성을 이어받았다. 그러므로 낡은 형태의 박해가 사라졌다는 것에 만족하며 자축하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박해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자를 비롯하여 과학적 지식을 가치 있게 여기는 모든 이들의 명백한 의무라고 할 수 있다. (223p.)

새로운 진리는 종종 불편하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이 그렇다. 그러나 새로운 진리야말로 잔인함과 편협함으로 얼룩진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총명하면서도 방종한 우리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중요한 성과물이다. (224p.)

러셀은 ‘신성불가침의 특성을 이어받은 새 권력들’을 ‘신흥종교’라고 불렀다. 러셀이 비유한 ‘신흥종교’는 오늘날 ‘국가 권력’이나 ‘자본 권력’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러셀은 이런 ‘신흥종교’가 자행하는 수많은 악행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합리적 이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과제라고 생각했다.

자기계발서가 넘쳐나고 있는 요즘 누군가 말했다. “누가 이 좋은 말들을 몰라서 이러냐? 실천하기 어려워서 그러지.”라고. ‘앎’이 진정한 ‘앎’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간단하면서도 울림이 강한 진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현자(賢者)들에 의해 회자되었다. 그러나 실천은 늘 어려운 법?!

 

반성이 없다면 미래도 없다.

공자님 말씀을 들어보자.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政)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답하길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논어』, 「안연」)

위에서 공자가 강조한 것은 ‘자기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각자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에 비로소 정치가 바르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이른바 공자의 ‘정명(正名)’이다. 나는 종교와 과학의 미래도 ‘정명하는 것’에 그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본다.

예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그것도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종교를 이유로 자행된 전쟁들과 그로 인해 희생된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역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당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잘못된 ‘이웃사랑’을 펼쳤던 그들을 칭찬하실 수 있을까? ‘종교’란 삶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안식을 주며 권력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잊지 않고 따스한 온정을 베푸는 사회의 정화장치가 아니던가?

과학은 인간의 수고를 덜기 위해 발전해왔다. 그것도 선택받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해 준 것도 과학의 힘이고, 짧은 시간에 멀리 데려다주는 것도 과학의 힘이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도 과학의 힘이고 방사능물질 오염도 또한 과학의 힘이다. 오늘날 과학은 이처럼 인간을 위하던 초심을 잃고 자본이나 권력의 노예로 전락하기도 했다.

종교가 신성하고 고귀한 겉옷을 벗고 낮은 데에 임하는 것, 다툼이 있는 곳에 사랑을 전하고 아픔이 있는 곳에 위로를 건네는 것, 그것이 종교다운 것이며 종교가 지향해야 하는 길이다. 과학도 이제 권력과 자본의 노예에서 벗어나 ‘돈 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선택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인류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

종교건 과학이건 무턱대고 믿는다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까닭이 ‘사유함’에 있다면 자기가 믿는 바―그것이 종교건 과학이건―가 혹 저지를지도 모르는 잘못을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종교가 종교답고 과학이 과학다운 세상은 아직도 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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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여덟 번째 책은 버트란드 러셀의 <종교와 과학>(김이선 옮김, 동녘 펴냄)으로, 이한오(성공회 신부), 손산(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강사), 오상현(상지대 강사)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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