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7)

Spread the love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7)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1)

 

1. 추동과 저지의 양 측면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에 대한 우리 논의의 목표는 그 구체적인 지식의 내용들을 서술하는데 있지 않고 이 학문들과 그리스 정신과의 관계를 서술하는데 있다. 사실 고대 오리엔트 남서부에 위치한 고대 국가들은 지식 축적의 측면에서 고대 그리스보다 시대적으로 훨씬 앞서 있었다. 특히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문화는 매우 다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문화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오래전에 성립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나라들이 힉소스(Hyksos) 같은 탐욕스럽고 미개한 나라들의 장기간에 걸친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도 굳건히 그 문화를 지켜왔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도 위대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이룩한 최초의 위대한 종합이며, 또 이러한 국가들이야말로 지식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유용하게 사용한 최초의 국가였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강력한 신관 계급이 그 일을 맡아 오면서 수많은 자료들을 축적해두었기 때문이다. 페니키아 문화는 이러한 고대 오리엔트 문화 중에서 그리스 본토에 이식된 최초의 햇가지라 할 수 있다.

그리스가 문화적으로 발전한 것은 이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기나긴 미개의 상태를 지나 국가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여러 개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계급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또 그리스인들은 특유의 강한 그리스적 특징을 보전하고 있어서 극히 강력한 제약아래서만 외래 문물의 차용을 허락했다. 예를 들어 페니키아 문물의 영향을 접했을 때도 그들은 이 문물을 즉시 그리스화하여 그것이 거의 외래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자기나라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상형문자, 민용문자에 이어 병기된 로제타석 그리스어 부분

그런데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한 강력한 힘은 다름 아닌 그리스인들의 언어에 있었다. 그리스어는 그들의 시가(詩歌)에 기여한 그 이상으로 학문의 발전에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어는 장차 나타날 철학을 이미 잠재적으로 그 안에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스어는 아주 투명한 사상의 외피라고 말할 정도로 사상 특히 철학 사상을 표현하는 데 아주 적합하였다. 아마도 그것을 표현하는 그리스어의 유연성은 실로 무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개별 사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는 언어 세계로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자체로 이미 실천적 변증술(praktische Dialektik)의 토대가 됨으로써 철학 사상을 표시하는데 발군의 창조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최대의 그리고 결정적인 여러 가지 이념들은 이집트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어로 비구상적인 것들 혹은 추상적인 사상을 막힘없이 표현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검토해 보아야할 일이다. 셈족의 언어도 그리스어에는 한참 뒤떨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헤브라이어로 번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아라비아인들조차 그리스인의 저작이 없었다면 철학을 손에 넣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리스인 이외에 원래 처음부터 철학에 도움이 되는 언어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인도인과 게르만인 뿐이었을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라든지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가장 초기의 그리스 철학자들 역시 철학적 사색의 각 과정에서 신화적 명칭을 부여하거나 추상적인 것을 의인화 했다. 하지만 이윽고 철학은 자기 고유의 말을 손에 넣었다. 즉 철학은 초기 시대부터 존재하고 축적되어 있었던 언어에 의지하여 보편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을 표현하였고 또 그 의미가 매우 불안정한 심리적 표현들 이를테면 nous, psych?, thymos, phrenes, prapides 등의 의미를 안정화시켰다. 그들은 추상적 관념을 용이하게 명사로 만들어내는 그리스어의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리스인은 어떤 것을 개념적으로 드러내고자할 때 실로 간단하게 복합어를 만들어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고, 또 사태와 관련해서도 모든 동사와 명사를 전치사와 연결시켜 용이하게 잘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형용사와 분사를 중성명사화 하여 아주 쉽게 여러 가지 원리나 기본 물질 등을 표시할 수 있었다. 게다가 특히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그리스어에는 수동 형용동사(to lekteon)가 존재한다는 것, 동사의 부정과거(aorist) 용법 등을 통해 제약적인 것과 무제약적인 것이 드러내는 모든 표시와 음영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간태(주체의 동작이 그 주체에 관여하는 상태를 표시)를 통해 동사 개념의 미묘한 차이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리스어는 부정사의 명사적 용법은 물론 관사를 이용하여 실로 다종다양한 것을 명사화할 수도 있다. 물론 그리스어의 이러한 풍부한 활용성에도 불구하고 약점 또한 없지 않다. 이를테면 재앙과 사악함을 kakon이라고 하는 말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든지 ‘자의식(Selbstbewuβtsein)’을 나타내는 말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 등은 그 결함의 하나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리스어는 단지 사람들이 서서히 손에 넣어 익숙해진 도구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모든 정신적 뉘앙스를 표현할 수 있는 대화로서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실로 meropes(사태를 구별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부분과 전체, 특수와 보편을 식별하고 그것들에 명칭을 부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경우조차 어떤 말도 신성화 하거나 화석 같은 상태로 숭배하는 일이 없었다. 어느 것도 특정의 전문 용어 아래 예속되지 않았다. 어느 철학자, 어느 학파가 그 학파의 말을 완고한 의미로 사용하면, 동시에 다른 철학자들이 그곳에서 신기한 다른 것들을 끌어낸다. 여기에서도 오로지 시합 내지 경쟁(agon)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또 정신세계에서 드러나는 개별적이고도 유별난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그리스인은 그것을 나타내는 살아있는 표현을 늘 가지고 있었고 경험세계의 다양한 것들로부터 개념으로 상승하였다가 다시 개념으로부터 개별적인 것들로 하강하는 작업 또한 용이하게 수행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인은 사고의 모든 메커니즘을 상상의 소산으로부터 분리하여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일종의 논리학과 변증술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것에 가세해 수사학과 소피스트의 철학은 시민들의 입을 더욱 활발하게 열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언어도 언어지만 비범하다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인들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철학적 자질이었다. 실로 그것은 인식의 가짓수 수준의 것이 아니라 어떤 인식에도 이를 수 있는 능력이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큰 약점마저도 그들이 철학을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분명 철학은 강력한 종교의 한쪽 편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도나 이슬람교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이단이나 종파로서 발생한 것들이다. 그리스인의 경우, 철학은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생겨났지만 그것의 발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떠한 힘도 제도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관들 누구도 종교와 철학을 하나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그리스 종교는 기존 지식과 신앙의 감독자였지만 동시에 사고의 소유자이기도 하였으므로 위계적인 계급(Kaste)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 철학자가 등장할 때에 반드시 그것과 결부되어 있을 법한 특정의 ‘단체(Soziet?t)’도 존재하지 않았고, 관료 족속 따위의 특정 계층도, 분열을 조장하는 어떤 ‘교양(Bildung)’도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극히 다양한 환경이 있었고, 현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 또한 일종의 자명한 합의에 의해서 그러한 환경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부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이러한 현자들을 하나도 배척함이 없이 다 끌어안고 있었다. 또 정신적인 일에 종사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제약도 없었고, 자유민이라면 누구라도, 하물며 어떤 노예라도, 뿐만 아니라 비(非)그리스인들 조차도 그리스적 교양을 가지고 있으면 철학의 길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는 훨씬 커져갔다. 누구라도 실제로 철학에 종사할 수 있었고 철학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도처로부터 나타나 교사가 되었다. 계급대신에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는 학파(Schule)를 가졌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10권 일부가 실린 가장 오래된 파퓌로스

그러나 이상에서와 같이 철학을 추동하는 수많은 조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 처음부터 철학의 형성을 저지하는 강력한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 신화가 그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민족 형성기 이래 하나같이 영웅신들의 시대를 천진난만하게 살아왔고 그 후에도 신화는 실로 이 시대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서 중단되지도 축소되지도 않은 채 그리스인들을 지속적으로 지배하여 왔던 것이다. 이 빛나는 형상이 환영처럼 그리스인들의 머리 위를 맴돌았고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이 형상이 내비치는 상태에 가장 가깝고도 정당한 상속자라고 느꼈다. 그리하여 이 형상은 무섭도록 명백한 인생관으로 각인되면서 오랜 기간 철학을 대신했다. 이 형상이 지식을 대신한 까닭은 형상 스스로가 지식의 원형이었기 때문이고 자연, 우주관 그리고 역사, 종교와 우주생성론까지도 놀랄 만큼 상징적인 옷으로 치장하여 함께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화의 외형을 구성하고 있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시가(詩歌)들에 의해 신화는 불사신이 되었고 그리하여 신화는 그리스인에게 로맨티시즘이자 청춘으로 받아들여졌다. 신화는 고대 그리스인과 더불어 계속 살아있었고 고대 세계가 이어지는 동안 비그리스인에게도 계속 살아 있었다. 설사 종국적으로 신화가 단지 학술과 수집과 비교의 대상이 될 지라도 그것의 하나같은 표현이 예술과 시가인 한, 이 두 개의 분야에서 신화는 끊임없이 새로운 싹을 틔어왔다. 지식의 경쟁 상대이자 불구대천의 적(敵)인 신화는 오랜 동안 해석되고 새로운 해석이 더해지면서 거꾸로 뒤엎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유로운 사고와 지식을 일으켜 세우려고 한다면 먼저 신화를 전복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신화와의 결별은 아주 오랜 동안 더딘 속도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그 또한 결코 충분하게 완전히 이루어질 수도 없는 것이었다.

(2. 신화와의 결별. 다음에 계속)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