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1]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한길석(한철연 회원)
[소개글]
하버마스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복잡하기 그지 없는 그의 사상이 무엇을 의도했고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되도록 간명하게 알고 싶어 한다. 여러 개론서들은 독자들의 이런 욕구를 충족하고자 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되지는 못했다. 2024년 출판된 이 인터뷰집은 하버마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독자들의 이러한 불만족을 해소해 준다. 오랫동안 하버마스를 연구했으며, 그의 학문적 전기를 깊이있게 서술했던 질문자들의 역량 덕분이기도 하다.
이 인터뷰는 하버마스의 어릴적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그의 학문적 여정을 차근차근 다루고 있다. 인터뷰를 따라가다보면 하버마스와 스승 세대, 동료들 그리고 제자 세대에게서 받은 여러 영향들이 정치적 현실을 배경으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이해하게 된다. 독자들은 이런 영향들이 하버마스의 사유에 있어서 어떤 동기를 부여했으며, 발전 방향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그리고 하버마스가 이런 영향을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면서 수용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인터뷰는 학문적 생애를 단순히 회고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2019년 두 권으로 출판된 대작 『또 다른 철학사』를 통해 구현된 ‘탈형이상학적 사유의 계보학’이 어떤 과정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었으며 관철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는 하버마스 취하고 있는 탈형이상학적 사유가 무엇이고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그의 철학이 현실 사회의 모순과 비판적으로 대결하면서 형성된 지적 정치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종종 내비치는 소소한 개인사와 사적 인연들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딱딱하고 진지하기만 한 이 이론가가 살아있는 인간의 몸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느끼게 하면서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번역은 AI의 도움을 받아 수정했다. 저본은 Habermas, Jürgen. 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 :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Stefan Müller-Doohm, Roman Yos, Frankfurt am Main: Suhrkamp.
[1]
1. 학문적 생애의 시작 – ① –
□ 하버마스 선생님, 예전에 “살면서 자기의 근본적인 의도를 쏟아부을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근본 의도’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이론 발전과 직업 경로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습니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49년 괴팅겐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 1949년 제 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역사적으로 급격한 어떤 단절을 경험한 세대로 회고해 볼 수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할 무렵, 우리는 4년 동안 나치 지배가 남긴 심연을 시간을 갖고 되새기며, 그 시절 우리가 살아갔던 ‘정상적’ 일상의 이면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었는지를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윗세대보다 우리에게 더 쉬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젊었기 때문에, 우리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상적 일상 속에 숨어 있던 심연의 깊이를 민감하게 너끈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짓이나 방조(放棄)한 일에 대해 책임져야만 할 기억이 없었기에, 그런 통찰을 중지하게 할 만한 ‘죄책감’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헬무트 콜이 말했던 ‘늦게 태어난 것의 은혜’라는 표현은 이 점을 정확히 짚었습니다. 우리보다 조금이라도 나이 많은 이들은 우리 세대와 전혀 다른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역사학자 논쟁(Historikerstreit)에 참여한 이들의 세대차를 늘 매우 의미 있게 보아왔습니다. 그처럼 완전히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는 민족적 환경 한가운데서, 우리 젊은 세대는 방향 감각과 계몽에 대한 갈망,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는 데 심리적인 장애물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의 비판적 성향을 지닌 이들이 주변의 ‘굳어 버린 사고 방식’과 결별하게 된 것은 일종의 직관적 통찰 덕분이었습니다. 즉, 나치는 ‘본질적으로 건전한 문화’ 안에 침투한 이질적인 물질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한낱 지나간 ‘악몽’ 같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 민족 문화의 가장 어두운 유산을 자신들의 자양분으로 삼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문화 유산은 심지어 토마스 만 같은 국민적 대문호조차도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1789년의 정신[프랑스 혁명 정신]’에 맞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직 그런 배경만이 나치가 공습 대피소 안까지도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그 ‘감염력’을 설명해줍니다.
통화 개혁 전까지 이어진 전후 초 잡지와 문학 속에는, ‘문명 파괴’라는 이름조차 미처 붙이지 못했지만 그런 단절에 대해 스스로 책임 있게 성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학 공부는 저에게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다가왔습니다.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한 가정 환경, 그리고 학비를 기꺼이 대려 했던 아버지도 한 몫 했습니다. 그러나 전공 선택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기로 했을 당시 저는 특정한 직업—그리고 특히 교수라는 직업은 전혀—염두에 두지 않았고, 단지 관심을 충족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1949년에는 한 세대의 약 5%만이 대학에 진학했지만 오늘날에는 50%에 달하죠.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유가 보장된 시기였습니다. 단순히 한 전공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 학부라는 틀 안에서 자신이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주제나 대상들을 중심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거의 스스로 구성한 셈인 공부 과정을 통해, 중간 시험 같은 것을 본 적도 없이, 박사 시험에 필요한 두 개의 부전공을 나중에 선택하곤 했습니다. 저는 이미 대학 입학 시험(Abitur)을 통과하기 전부터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그 결심에 이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당시 선생님의 삶의 상황, 특히 철학에 이르게 된 과정에 대해 들려주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경험이 있었을까요? 청소년기에는 의사가 되고 싶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어릴적 의사가 되고 싶다고 희망해서 해부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열두 살 무렵 ‘융폴크(Jungvolk)’에서 ‘펠트셰어(Feldscher, 야전 의무병)’로 옮겨서 훈련받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마도 사춘기 시절 입천장 갈림병(구개열) 문제와 관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 그 문제를 뚜렷이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이 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제 친구 유프 되어(Jupp Dörr)와 함께 학교 운동장에서 불쾌한 경험을 몇 번 당한 것을 제외하면 순진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도록 꽤 잘 보호받으면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의학에 대한 관심은 생물 수업의 영향을 받아 점차 이론적인 방향으로 옮겨갔습니다. 제 흥미를 자극했던 생물 선생님은 사실 전쟁 이후에 나폴라(Napola, 나치 엘리트 학교)에서 우리 학교로 부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나치였던 셈이죠. 그러나 매우 해박했고, ‘인종생물학’의 함의를 이미 넘어선 학문 자세를 견지하면서 우리를 유전학과 다윈의 진화론에 입문하게 했습니다.
그 이후 제 관심은 생물학을 넘어서 인간학적 질문들로 확장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통화 개혁 이후 어느 날 저는 우연히 슐츠-헨케(Schultz-Hencke)의 책을 손에 넣었는데, 이는 나치 체제에 순응한 정신분석학 교재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김나지움(고등학교) 마지막 2년 동안에는 심리학 잡지 《Psyche》를 정기 구독할 수 있게 되었죠. 이처럼 넓은 의미의 ‘인간에 대한 관심’이 결국 제가 고교 졸업 시험을 보기 전 몇 해 동안 칸트와 헤르더의 역사철학을 읽으면서 철학적 관심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아이러니하게도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우(Otto Friedrich Bollnow)라는 구 나치 인사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은 특히 그의 희곡을 통해 우리 세대 전체를 사로잡았습니다. 또한 굼머스바흐(Gummersbach)역 근처에 있던 공산당 서점에서 접한 마르크스주의 문헌들 그리고 그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로서 제 아버지 세대가 선호했던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과 빌헬름 뢰프케(Wilhelm Röpke)의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도 저의 지적 환경을 함께 구성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저는 개인적인 ‘에세이’(Aufsätze) 속에서 풀어냈습니다. 그 에세이를 가지고 저는 학교에서 몇 안 되는 비(非)나치 교사 중 한 명이자 제가 깊이 존경하던 라틴어 교사 클링홀츠(Klingholz) 선생님을 꽤 괴롭혔습니다. 그는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었고, 저는 그에게 그런 글을 자주 들이밀었기 때문에 꽤 성가신 존재였을 겁니다. 또한 저의 외삼촌 페터 빈겐더(Peter Wingender)는 철학을 가르치는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칸트의 『프로레고메나(Prolegomena)』와 같은 ‘진지한’ 책을 추천해주며 제게 자극을 줬던 수많 내용들이 단순한 ‘흥미’ 수준에서 끝나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이처럼 지적으로 무수한 세계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환경에 살다 보면,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은 따로 의식적으로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한 ‘근본 의도’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철학 같은 학문을 전공하며 살아가겠다는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불안감’은 오랫동안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나중에, 뜻밖에도 제가 교수가 될 수 있었을 때조차도, 저는 제 능력이나 성과 나아가 제 직업에 대해 별로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직업—대학교수이자 학자—를 어느 정도 잘 해내고 있다는 감각이 비로소 생기기 시작한 건, 1980~90년대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마지막 재직 시절부터였습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생님이 전공을 선택하게 된 어떤 ‘내면적’ 동기가 없었던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가치 지향을 정리하고자 하는 욕구 같은 건 없었나요?
■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건 오히려 철학에 대한 플라톤적인 자기 이해에 가깝습니다. 저는 그런 관점을 한 번도 공유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이 늘 ‘진짜 철학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곤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그런 철학자들 말이죠. 즉 자기 삶을 깊이 성찰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심오하고 형이상학적으로 타당한 통찰을 추구하는 그런 철학자들 말입니다. 오히려 저는 마르크스주의와 프래그머티즘에서 [철학적 탐구에 대한] 제 동기들을 더 많이 발견했습니다. 세상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노력, 아니 최소한 늘 되풀이 될 위험이 있는 퇴행을 막으려는 노력이야말로 결코 하찮게 볼 수 없는 동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라는 호칭에 꽤 만족하고 있습니다.
□ ‘철학자’라는 호칭만 붙이면 선생님께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표현이었던 건가요?
■ 그건 오랫동안 말 그대로 느낌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보면, 동료들 가운데 제가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되어버린 지금 가끔 그 점을 곱씹어보게 됩니다. 확실히 위대한 형이상학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아무 거리낌 없이-하지만 아무 맥락 없이 그런 건 아니죠- 직접적으로 계승한 사람 중 로베르트 슈페만(Robert Spaemann)만한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고전 텍스트에 대해 깊이 있는 정독을 통해 놀라운 통찰을 끌어내는 능력을 지닌 인물로, 그 점에서 저는 종종 레오 슈트라우스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제 가까운 철학 동료들 역시 각자 고유의 이론적 구상 속에 겉보기엔 냉철해 보이면서도 ‘위대한 철학’ 전통에 다소간 뿌리박고 있는 동기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락하신다면 몇 가지 대략적인 도식으로 설명드리죠. 예컨대 칼-오토 아펠(Karl-Otto Apel)의 경우, 도덕의 최종적 정당화(die Letztbegründung der Moral)를 향한 그의 열정만 보아도, 그는 ‘탈형이상학적 사고’를 너무 멀리 밀어붙여선 안 된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그건 우리 사이의 핵심적인 의견 차이기도 했습니다. 디터 헨리히(Dieter Henrich)의 경우, 형이상학적 근본 동기는 명백합니다. 즉, 성찰로 진입하기 이전에 이미 자기와 낯익은 것(Mit-sich-Vertraut-Sein)과 같은 게 있다는 직관을 확신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직관 같은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의식으로 하여금 [모든 존재자들의 바탕이 되는 형이상학적 근거와 같은] ‘포괄적 전체(Allumfassenden)’를 이해하게 하는 문턱이 된다는 것이죠. 미하엘 토이니센(Michael Theunissen)은 평생 동안 종교적 동기들과 씨름해 왔습니다. 초기에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에는 상호주관성과 청년 헤겔적 관점에서 해석한 헤겔 독해를 거쳐 말년에는 후기 하이데거로의 회귀를 시도했죠. 저는 그 시도가 그리 생산적이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가장 명석하고 냉철한 철학자였던 에른스트 투겐트하트(Ernst Tugendhat)조차도 자신의 언어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번역한 작업으로 이해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윤리학 사상에서 형이상학적 지향성은 그의 후기 작업인 신비주의로의 전환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는 자기중심적 주체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압도적인 우주에 대한 관조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고는 칸트의 보편주의적 정의 개념과 이성적 자유 개념을 구제할 수 없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죠. 저에게는 그런 종류의 ‘심층적인’ 동기들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붙잡고 있는 문제는 왜 인간 사회는 그토록 쉽게 파괴되고 반복적으로 붕괴되어왔는가 그리고 그런 취약한 사회적 공존을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철학적 탐구의 동기가 될 수 있느냐고요? 저에게 인간의 자연 의존성[죽음의 숙명과 같은 것을 탐구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경향]은 철학적 탐구의 동기가 되지 않습니다. 저의 철학적 탐구는 다만 인류가 언어를 통한 사회화라는 완전히 새로운 진화적 도약을 이뤄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인간 사회 외부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바탕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삶에 중심을 두고 사유됩니다. 제 철학의 ‘궁극적’ 동기를 굳이 꼽자면, 그것은 아마도 ‘언어의 해방적 힘(die befreiende Kraft des Wortes)’일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개별화된 사회화가 오직 상호 평등한 인정 관계 속에서 이뤄질 때에만 온전히 펼쳐질 수 있습니다. 가까이함과 멀리함, 예와 아니오, 해방과 퇴행, 찬성과 반대(Zustimmung und Widerspruch), 자립과 의존(Selbstsein und Abhängigkeit), 이 모든 것은 개인들이 사회화 과정을 통해 자아가 되어가는 과정을 치러낸 의사소통적 경험들입니다. 그런 개인들은 서로 상반된 극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때만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인간 사회 외적 토대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어느 정도 통합된 사회적 조건 속에서만 가능하죠. 저는 이런 직관을 가지고 철학과 사회 이론을 전개해 왔습니다. 저의 이론은 역사적으로 볼 때, 칸트, 피히테, 쉘링, 헤겔 이후 [세속주의적] 철학자들과 연결되어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직관을 세속적 사유로 완전히 이행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철학은 그리스적 동기보다는 성서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 말씀도 이미 어떤 근본적인 직관에 따른 것처럼 들리는 데요.
■ [관념적이기보다는] 좀 더 사실적인 측면에서 얘기해 봅시다. [앞에서 저는 인간의 사회적 삶의 성공 여부가 취약하다고 했어요. 이와같은] 성공적이거나 실패하지 않은 형태의 사회적 통합(soziale Integration)에 대한 직관은 저를 의사소통 행위 이론으로 이끌었고, 이 점은 제가 언어학적 전회에 주목했음을 말해줍니다. 처음 시작할 땐 명확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훔볼트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발전해 온 사고, 즉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의 생활 형식을 언어적으로 구성한다는 사고만이 언어학적 전회로서의 패러다임 전환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반면에 카르납, 콰인, 데이비드슨 같은 주요 분석철학자들에게 언어학적 전회는 단지 방법론적인 의미에 불과했습니다. 덧붙여 이[렇게 언어학적으로 전회한] 패러다임은 조지 허버트 미드와 윌리엄 제임스 같은 프래그머티스트들이 제기한 개별화와 사회화의 동시 기원성과 상호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통과할 때에만, 제1인칭, 제2인칭, 제3인칭 간 관계의 역동적인 긴장 구조에 내재한 변증법적 요소를 획득합니다. ‘나-너(Ich-Du) 관계’는 ‘우리(Wir) 관계’의 틀 안에서 형성되며, 이 ‘우리’는 [어떤 의견 등에 대해] ‘예’와 ‘아니오’라고 말하는 행위 주체들이 자신들이 공유하는 언어라는 공동 배경과 그로 인해 열리는 근거들의 공간을 인식하면서, 세계의 어떤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에 대해 합의를 이루려는 관계입니다. 저는 이 관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즉 헤겔의 변증법처럼 행위 주체들 상호 간의 대립과 투쟁 관계에서 발생하는 위기적인 분위기의 변증법과는 다른 의미에서의—‘변증법적’ 관계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성장해 가는 이들은 자신들이 ‘나(Ich)’로서 경험하고 자의식을 형성하는 정도가, 자신들이 각각 ‘너(Du)’로 인식하는 제2인칭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그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법을 배우는 정도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매개되는 것은 자의식만이 아닙니다. 의사소통 행위와 담론을 통한 이해는 타당성 주장에 대한 상호 비판을 목표로 하며, 그 점에서 문자 그대로 변증법적[변증술적] 과정입니다. 동시에 이 과정은 의사소통 행위를 하는 주체들로 하여금 ‘예’ 또는 ‘아니오’의 입장을 취하도록 강제하며, 이 입장에 대해 그들은 개인적으로 책임을 집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중요한 상황들에서는 이 책임감이 단지 개인의 자립성과 대체 불가능성에 대한 의식만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고유의 독특한 특성 또한 형성합니다.
□ 선생님의 생애로 돌아가 보죠. 이를테면 당신의 ‘첫 번째’ 대학 이야기말입니다. 왜 괴팅겐 대학이었나요?
■ 대학 입학 시험을 마친 후 어디서 공부할지는 자연스럽게 결정됐습니다. 그 당시에는 마르틴 하이데거와 니콜라이 하르트만이 ‘누구나 꼭 가서 배워야 할’ 두 명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프랑크푸르트에 대학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어요. 프라이부르크 대학은 전쟁 때문에 ‘중단된’ 학년이 있었고 전후에 여전히 의무적으로 시행되던 정리 작업들(시설 재건 등) 때문에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거기서 공부하려면 몇 달, 어쩌면 한 학기를 더 보내야 했기 때문이죠. 반면 괴팅겐 대학에서는 하르트만과 ‘입학 면담’만 하면 됐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별 관심 없어 보이던 그에게 저는 릴케의 작품을 읽은 경험만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 첫 학기는 마침 제1차 독일 연방의회 선거운동 기간과 겹쳤습니다. 우리는 나치 시대에 성장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마지막 몇 해 동안에서야 어느 정도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도덕적인 반응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정치적으로도 깨어나게 되었죠. 그래서 괴팅겐에서 열리는 선거 유세 행사들을 거의 빠짐없이 찾아갔지요. 그때 저는 민주주의를 대부분 책을 통해서만 배워 온 젊은이로서 아주 극단적인 실망을 경험했습니다. 현실 민주주의와 했던 첫 대면은 충격이었죠. 그 충격은 1944년 7월 20일 베를린에서 반(反)히틀러 음모자들을 체포했던 오토 에른스트 레머(Otto Ernst Remer)가 극우 독일제국당 대표로 등장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저를 진정으로 충격에 빠뜨린 것은 BHE(동유럽 국가들에서 거주하다가 추방된 독일인 연합 Bund der Heimatvertriebenen und Entrechteten), 독일당 그리고 기독교민주당의 선동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레머 못지않게 극우적인 태도를 보였거든요. 그때 제가 알게 된 오버렌더, 제보움, 메르카츠(Oberländer, Seebohm, Merkatz) 같은 인물들은 거만하고, 모욕적이고, 점령국들에 맞서 들끓는 말투의 뻔뻔한 태도로 연설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아데나워 초대 내각에 전원 포함되었던 겁니다! 그들의 무책임한 언설에서는 나치 시대와의 단절이라는 필수적인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 장면이 기억납니다. 어떤 행사에서 독일 국가의 첫 소절이 연주되자 저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그 순간 청중들의 야유와 환호가 동시에 터져 나왔습니다. 그 국가가 12년 동안 나치의 당가였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Horst-Wessel-Lied)’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떠올렸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원래는 별 문제가 없는 국가였지만, 그런 식으로 악용되었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독일 국가에 대해 일종의 저항감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4년 연방총회에서 요하네스 라우가 로만 헤어초크와 경쟁해 낙선했을 때, 저는 그 자리에 있던 페터 글로츠에게 ‘독일 국가가 연주되기 전에 미리 알려달라’고 부탁해서 그 시점에 맞춰 회의장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제 첫 학기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그 시절 우리 세대가 ‘정치적으로 자명한 것들(die politischen Selbstverständlichkeiten 정치적으로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원칙이나 가치들)’을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철학적 깨달음에 대한 지적 욕구는 그런 자명성에 깊이 젖어 있었지요. 세상은 더 나아져야만 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 전후 시절 당시 철학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계셨나요? 디터 헨리히가 ‘1945년 이후 세대 철학자들만의 고유한 세대적 특징이 있으며, 그것이 특히 현재에 대한 특정한 시각으로 표현되었다’고 한 말에 동의하십니까?
■ 전후 세대 철학자들에 관해 헨리히가 말한 ‘특유한 세대적 특징’이라는 감성을 제가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세대 구분으로 철학자들을 다른 학문 동료들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쉽지 않다고 봅니다. 저와 제 아내는 같은 또래 사회학자들 그리고 역사학자들과 우정을 맺으며 매우 비슷한 사고 방식을 경험했습니다. 인문학부 내 모든 학문 분야에 존재하던 더 깨어 있고 더 뚜렷한 개성을 가진 정신들 속에서 어떤 공통된 세대적 특성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전통이 부패한 뒤 모든 것이 오염되었다는 혐의를 얻었고, 모든 것이 회의와 불신, 비판의 여과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우리는 철학 교수로서 나중에 플라톤 전통의 엄숙한 제스처에 맞서서, 우리의 직업적 역할에 대해 냉철하고 소박한 이해, 특히 우리의 주장과 이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뿌리내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이데거가 여전히 찬양하던 진리에 대한 특권적 접근권을 주장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분석철학의 방법과 정신을 습득하려 노력했습니다. 독일에서 한때 경멸받던 프래그머티즘조차도 금방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이러한 서구에 대한 무조건적 개방은 독일 철학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저희 세대는, 자랑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각기 다른 이유로 저는 전쟁을 겪은 칼-오토 아펠, 에른스트 투겐트하트, 디터 헨리히, 미하엘 토이니센과 가장 가까웠습니다. 앞에서 말한 동기들 때문에, 우리는 모두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각자 철학 프로젝트를 발전시켰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다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서로를 지켜본 것 같습니다. 브루멘베르크(Blumenberg)는 독불장군이었고,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는 1960년대 초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뮌스터 대학 동료들, 특히 슈패만(Spaemann), 륍베(Lübbe), 마르쿠바트(Marquard)를 포함한 뮌스터(Münster)의 동료 철학자들은, 제가 보기엔 리터 학파(Ritter-Schule) 소속이라는 관점에서 받아들여졌을 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파울 로렌젠(Paul Lorenzen)의 ‘에를랑겐 학파’와 특히 ‘콘스탄츠 학파’인 프리드리히 캄바르텔(Friedrich Kambartel), 위르겐 미텔슈트라스(Jürgen Mittelstraß), 나중에는 페터 야니히(Peter Janich)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세대 철학자에는 알브레히트 벨머(Albrecht Wellmer)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을 공부할 때 수학을 전공했던 그가 제 첫 제자였는데, 우리는 곧 매우 우정 어린 관계를 맺었고, 다른 경우들처럼 가족 간 교류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알브레히트는 뉴스쿨(New School)에서 수년 간 가르치면서 미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벨머는 뉴 스쿨에서 비판이론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 과정에서 토마스 매카시와 그의 제자들도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전통은 오늘날 독일보다 미국에서 더 생생합니다. 197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딕 번스타인(Dick Bernstein 리처드 번스타인), 딕 로티(Dick Rorty 리처드 로티), 특히 긴밀한 연구 협력 관계를 맺은 톰 매카시와의 우정이 수많은 다른 인맥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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