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산책29-내재 존재와 한계, 무용지용[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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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 산책29-내재 존재와 한계, 무용지용

1)

두 가지 이상의 ‘규정성[Bestimmtheit]’이 상호 교차할 때, ‘어떤 것[etwas]’이 나온다. 예를 들어 소금은 희고, 짜며, 입방체다. 여러 규정성 가운데 필연적인 것(일반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개별적인 것)이 구별되니, 필연성이 ‘규정[Bestimmung]’이고 우연성이 ‘양상[Beschaffenheit: 모습]’이다. 소금에서 입방체이거나 짠맛은 규정이며, 흰색은 양상이다.

존재론 2장 현존 장의 2절은 규정과 양상이라는 쌍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관계는 곧 이어서 ‘내재 존재[Insichsein]’와 ‘한계[Grenze]’라는 쌍 개념으로 나간다. 앞에서 헤겔 논리학이 의식 경험의 전진에 따라 평행하게 나간다는 것을 헤겔 논리학 해석의 대강으로 삼았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양상과 규정은 서로 무차별하다. 그러므로 규정이 변화함이 없이 양상은 변화할 수 있다. 소금의 성질은 흰색에서 보라색으로 변화하더라도 소금의 짠맛과 입방체라는 성질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이 좀 더 발전하게 되면 우리는 규정에 속하는 속성도 사실은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¹

주1: 참고로 말하자면, 성질이니 속성이니 하는 용어는 인식론상의 용어다. 규정성이니 규정이니 하는 용어는 논리적 범주 즉 서로 다른 판단형식에 속하는 용어다.

2)

소금의 짠맛을 보자. 소금은 짠맛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면 더는 소금이 아니다. 왜냐하면, 소금의 규정은 짠맛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소금의 규정을 짠맛으로 정하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며 또는 일상적인 맥락에서다. 앞에서 소금은 락스로도 쓰인다고 했는데 소금의 규정을 소독제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일단 소금의 규정을 주관적으로 짠맛으로 했을 때 이를 경계로 소금과 소금이 아닌 것이 구별된다.

양상 역시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해 주지만, 이 구별은 외면적인 구별이다. 흰 소금이나 보라색 소금은 서로 다르지만, 소금이라는 사실을 변화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짠맛은 다르다. 짠맛은 어떤 것의 규정에 속하므로, 짠맛이 없으면 소금은 이제 더는 소금이 아니다.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해 주는 것을 헤겔은 한계[Grenze]라 한다.

‘규정’이란 논리적 범주가 ‘한계’라는 논리적 범주가 되면서 서로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똑같은 속성 예를 들어 짠맛이 한편에는 규정으로 다른 한편에는 한계가 된다. 헤겔이 이렇게 같은 것을 지칭하면서 논리적 범주를 달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규정은 양상에 대하여 사용되며 이 경우 하나의 사물 내에서 규정성 사이의 관계가 논의된다. 그러나 이것을 한계라고 할 때는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 사이의 관계가 논의된다. 짠맛은 이 두 가지를 비교하는(외적으로 반성하는) 가운데 어떤 것을 구별해 주는 것이다.

3)

헤겔은 양상의 변화를 ‘대타적 존재(우연성, 양상)에 따른 변화’라고 하면서 이것과 구별하여 이 한계를 통한 변화를 ‘어떤 것에 정립된 변화’라고 한다. 이 부정은 “그 자신에 내재적인 것으로 정립되기”(논리학 재판, GW21, 112) 때문이다.

양상에서 어떤 것의 다른 것과의 관계는 무차별하다. 그러나 한계에서 어떤 것의 다른 것에 대한 관계는 자기 자신에서 나오며, 타자 존재는 어떤 것에 자신의 고유한 계기로 정립된다.

“어떤 것은 자기 자신에서 타자에 대해 관계한다. 왜냐하면, 타자 존재는 그 어떤 것에서 그것의 고유한 계기이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113)

한계를 넘어서면 어떤 것은 어떤 것이 아니게 되지만, 거꾸로 이 한계가 있기에, 어떤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것은 짜기에 소금이 된다. 이처럼 어떤 것이 한계 안에 있는 것으로 규정되면 이를 헤겔은 내재 존재[Insichsein]라 한다.

앞에서 ‘규정’과 ‘한계’라는 논리적 범주가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는데, ‘한계’와 ‘내재 존재’는 논리적 범주로서 똑같은 필연성 즉 속성을 지칭하지만, 쓰이는 맥락에서 달리 쓰인다. 예를 들어 어떤 소금이 소금이 아닌 어떤 것(예를 들어 설탕)과 구별되면, 그 구별은 짠맛이라는 한계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다른 것(예를 들어 죽염)이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소금이라면 그것은 짠맛이라는 내재 존재 때문이다. 한계라는 범주와 내재 존재라는 범주는 동전의 양면이 된다.

한계는 그것을 넘어서면 어떤 것이 더는 그것이 아니므로, 어떤 것의 부정이 된다. 내재 존재는 그 한계 안에서 한계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부정의 부정’이다.

“ 이제 내재 존재가 타자 존재의 비존재이며, 이 타자 존재는 존재하는 것으로서는 어떤 것과 구별되면서도 이 어떤 것 속에 포함되어 있으니, 그런 한에서 어떤 것은 부정이며, 그 자체에서 타자를 지양하는 것이다. 어떤 것은 이 타자에 대해 스스로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를 유지하는 것으로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113)

4)

한계는 그것을 넘어가면 더는 그것이 아니므로 한계는 어떤 것의 자기 부정성이다. 동시에 이 한계는 그것과 다른 것을 부정하는 타자의 부정성이다. 한계는 어떤 것과 다른 것의 경계선에 있으며 즉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계선에 있다는 것은 그 한계가 어떤 것 안에 있기도 하며 어떤 것 밖에 있다는 뜻이 된다. 어떤 것 밖에 있다는 점에서 한계는 어떤 것의 부정성인데, 어떤 것 안에 있다는 점에서 이 부정성은 어떤 것 내부의 부정성이다.

어떤 것의 부정성이 그것과 다른 것을 의미한다면, 어떤 것 내부에 있는 부정성은 어떤 것 내부에 자기와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한계는 내 속에 있는 나의 타자다. 내 속에 나의 타자가 있으니 나는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한계로부터 자기가 부정되는 운동이 일어난다. 나는 나의 한계 때문에 무너진다.

“또 다른 측면은 어떤 것이 그 속에 내재하는 한계 내에서 어떤 것이 지니는 동요다. 이 동요는 곧 어떤 것을 자기 자신을 넘어서 나가게 만드는 모순이다.”(논리학 재판, GW21, 115)

거꾸로 생각해 보자. 한계는 어떤 것과 다른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계는 다른 것을 배제함으로써 어떤 것 자신을 존재하게 만든다. 나는 나에게 고유한 한계가 있으므로 나는 다른 것을 물리치고 스스로 존속할 수 있다. 나에게 한계가 없다면 다른 것의 침범에 의해 나는 이미 무너졌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 자신의 한계가 나를 살린다.

“한계는 본질상 타자의 비존재이므로, 어떤 것은 동시에 그의 한계를 통해 존재한다. … 어떤 것의 존재는 그 한계를 통해 그 어떤 것의 본래 모습으로 되며, 그 한계 속에서 자신의 질을 갖는다.”(논리학 재판, GW21, 114)

헤겔은 한계와 내재 존재에 관해 흥미로운 예를 제시한다. 즉 점과 선(또는 선과 면)의 관계다. 선의 한계는 점이다. 선은 점에서 중지하며, 선은 점의 안에서 존재한다.(이쪽에서 보면 점의 안에 있다는 것은 반대쪽에서 보면 점 밖에 있다는 것이니, 선은 점 밖에 있다.) 점의 안에서 선이 존재하므로, 점은 선이 시작하는 출발점이며, 이 점에서 선으로 이행한다. 즉 선은 점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점과 선은 사실 양적인 규정이어서 정확한 비유라고 볼 수 없다. 여기서는 질적인 규정이 문제가 되므로 짠맛과 소금의 관계로 다시 설명하자면, 짠맛은 소금의 한계다. 소금은 짠맛이 있기에 소금이 되지만, 짠맛 때문에 소금은 소금이 아닌 것으로 된다.²

주2: 소금의 짠맛은 특정한 분자결합 때문에 나온다. 분자구조는 같으면서도 분자 사이의 특정한 결합은 언제라도 다른 방식의 결합으로 바뀔 수 있다. 소금이 락스가 될 수도 있는 것은 그 분자결합 때문이다.

한계가 지닌 이중성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자주 보는 예를 가지고 말해보자. 어떤 사람의 장점은 그 사람의 본분, 규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가 지닌 이 장점 때문에 몰락한다. 마음이 따뜻한 남자는 대체로 무기력하고 무능하다.

이번에는 거꾸로 보자. 어떤 사람의 한계 즉 단점이 그 사람의 감추어진 능력을 의미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장자가 말한 ‘無用之用’이 그런 뜻일 것이다.

“장인(匠人) 석(石)이 돌아왔는데 사(社)의 상수리나무가 꿈속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 또한 나는 쓸 데가 없어지기를 추구해 온 지 오래되었는데, 거의 죽을 뻔했다가 비로소 지금 그것을 얻었으니, 그것이 나의 큰 쓸모이다. 가령 내가 만약 쓸모가 있었더라면 이처럼 큰 나무가 될 수 있었겠는가?”(장자, 내편, 인간세, 무용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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